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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니이체 160614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80여명의 신학자들[부산강의]

니이체 160614

정인순 2016. 6. 14.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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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1606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4-니체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돌아가신 연도는 외우기 쉽지요. 199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19세기 사람이라 이야기할 수 있어요. 니체가 그렇게 유명한 이유가 있어요. 보통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살아가요. 신이 어떠니,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니, 우리의 미래, 우리 인생은 무엇이냐? 이런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말 안 해요. 너무 크기 때문에. 전문가가 될 자신이 없는 거예요. 세상이 워낙 크니까. 인간은 너무 작으니까.

 

그래서 전부 입 다물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은 그냥 고정돼있는 것이 아니고. 홍수가 나면 냉장고나 돼지가 떠내려가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그냥 세월 따라 떠내려가는 거예요. 떠내려가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는 겁니다. 떠내려가는 주제에 우주가 어떠니, 신이 어떠니, 세상이 어떠니 이야기해봤자 자기가 안 떠내려갑니까? 안 떠내려간다고 보장받을 수 있어요? 브레이크를 걸 수 있습니까? 떠내려가는 강폭이 자기 신장보다 더 큰데.

 

이건 공부를 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공부한다고 해서 전체를 알았다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전부를 안다는 게 건방진 것임을 알 뿐이고. 또는 못 배운 사람은 못 배우고 뭐고 간에 자기 살 단도리에 바쁘지 그런 데까지 신경 씁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이란,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떠내려가는 거예요. 떠내려가면서 누가 감히 나를 떠밀어, 라고 하면 안 돼요. 수동적인 사람이 어떤 능동적인 힘이 있을 때는 나는 내 식대로 살겠다고 해보겠지만 지금 자기 형편이 떠내려가는 입장에서 내 인생을 밀어붙이는 자가 누구인지 안 들, 그래서 알았다 칩시다. 그러면 떠내려가는 것이 중간에 스톱됩니까?

 

그래서 니체 말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사는 대로 그냥 삽시다. 그런 쪽이에요. 어떤 아이디어는 제시하겠지만, 인생은 이렇고, 세상은 이렇고, 우주는 이렇다고 하겠지만 그게 우리한테 힘이 안 되잖아요. 우리 인생을 바꾸는데 힘이 안 되고 더 중요한 것은 바꿔 봤자, 인생 바뀌면 살림살이 나아집니까? 아니지요. 백세 인생 하는데 왜 이백세는 안 되는데? 삼백세, 구백세는 왜 안 되는데? 아담은 백삼십에 셋을 낳고 낳은 후에 팔백 년을 살았더라. 합치면 아담은 구백삼십 년입니다. 게임이 안 돼요. 아담은 전부를 알았습니까? 마찬가지에요. 전부를 모르지요.

 

그래서 니체가 왜 유명하고 이슈가 되는지 보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보면, 우리는 입 다물고 그냥 떠밀리는 데로 살아가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 삶입니다. 신이 천지를 만들었다. 만들었겠지.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걸 안다고 해서 우리가 달라질 건 없어요. 그래서 신, 우주, 현실, 자연,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이걸 이야기한다고요. 알아봤자 브레이크도 걸리지 않고 인생은 떠밀려 내려감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입을 다무는데 니체는 입을 열어요. 니체가 왜 입을 여느냐 하면, 미친 사람이거든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해운대에 이 시간에 사람들이 운동하러 가든지 살 빼러 가든지 장 보러 가든지 놀러 가든지 분주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길 가다가 쪼그려 앉아서 개미가 꽃잎에서 떨어진 걸 보고 애처롭다고 두세 시간 동안 앉아있다면 그 사람이 정상이에요? 미친 사람이죠. 개미 떨어진 걸 왜 그렇게 신경 써요? 저녁 식사 준비나 하지 왜 그러고 있는데? 한 곳에 집중해서 거기에 몰두해서 언급한다는 것은 이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작은 것도 마찬가지지만 허황된 큰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우주가 뭐니, 신이 뭐니 하는 것도 심지어 니체는 신이 죽었다 했지요. 신이 죽고 안 죽고 이게 문제가 아니고 니체가 미친 사람인 이유는, 그걸 왜 그런 식으로 무슨 자신감에 근거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말이죠. 그냥 사는 대로 살면 되지. 교수하든지 작가하든지 철학자하든 살면 되지 신이 죽었다고 왜 하느냐 말이죠.

 

제가 아까 강의 시작하면서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해서 우리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 이유가 뭐라고 했던가요? 그냥 떠내려가요. 홍수에 너도 나도 얼굴 마주보면서 떠내려가요. 부부도 마찬가지로 세월에 떠내려가고 있고, 경제 사정에 떠내려가고 있고. 거제도 보세요. 거제도가 바닷가거든요. 옥포조선소도 바닷가로 떠내려가게 생겼어요.

 

배 만드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에요? 평소에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에요? 아니지요. 떠밀렸잖아요. 세계 경제에. 이제는 자구책으로 안 하던 나쁜 짓을 만들어낼 거예요. 거짓말할 거예요. 집세 안 주고 떼먹을 거예요. 예의도 없고 도덕도 없을 거예요. 평소에 좋게 지내던 이웃 사이도 돈 떨어지면 이웃이 아니고 야반도주할 겁니다. 이렇게 틀리지 않는 예언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따라서 세상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르면 입 다물고 살면 되는데 니체가 왜 유명하냐? 미친 짓을 해본 거예요. 사실은 나중에 정신분열 일으켜 죽기도 하지만. 이 세상 전체를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을 내가 말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자칭 자라투스트라, 예언자에요. 예언자는 논리가 없어요. 예언자의 입에서는 예언만 나와요. 니체의 모든 문장들이 명령입니다. 이렇다, 또는 단정적이에요. 그렇다. 그걸 시적이라 해요. 논문이 아니고 시처럼 나온 거예요. 하나님 앞에 계시를 받은 것처럼 글을 씁니다. 마치 광야의 엘리야처럼.

 

그러면 예언적인 방식으로 말을 하고 글을 써도 시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국 뭘 의도하는 겁니까? 추종 세력을 의식해서 그런 발언들을 쏟아놓겠지요. 그런데 니체와 추종세력 간에 논리적인 것이 성립됩니까? 추종인데 무슨 논리가 있어요. 공감은 되지요. 제 말이 들리십니까? 논리를 따져서 믿겠다는 게 아니고 말 자체 내용을 분석하자는 게 아니라 말을 들으니까 평소에 입 다물고 있던 것을 니체가 대신 이야기해줄 때 공감하죠. 니체는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말만 예언자적 입장에서 내놓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니체는 세상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얼마든지 본인은 예언자적 발언을 쏟아내도 하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가? 니체가 세 가지를 부정함으로 나옵니다. 첫 번째, 플라톤 사상을 거부합니다. 두 번째는 실용주의적 사상을 거부합니다. 실용주의적 사상=과학적 사상. 세 번째는 에피쿠로스 사상, 이건 불교와 생각이 똑같습니다. 에피쿠로스와 짝을 이루는 게 스토아 사상이에요.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사도행전 17장 17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니체 입장에서 자신도 이런 논쟁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어디 불교 사상을 칩니까? 불교 사상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인간의 모든 지혜를 다 끄집어내고 그걸 다 덮는 게 불교 사상이에요. 불교 사상은 브라만에서 나왔거든요. 브라만은 우주와 하나에요. 통합이 된 겁니다. 통합이란 전체를 말하거든요. 이미 모든 걸 포함해서 전체를 이야기했는데 거기서 빠질 게 뭐가 있어요. 그걸 보통 불교적으로 마음 넓은 사람을, 대승적 자질을 가졌다고 하지요. 모든 걸 용납하고 품어줄 수 있는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을 가졌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니체가 다 쳐버려요. 첫 번째 봅시다. 플라톤 사상은 간단합니다. 진실, 실제 같은 말입니다. 진실 또는 진리. 진리를 죽어봐야 압니다. 지금은 알 수 없어요. 그러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가상 세계에요. 허상, 허구, 환상. 왜 그러냐 하면, 플라톤은 이야기하기를 여기는 고정돼있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그래요. 변화한다는 것은 어지러운 거예요. 왔다리 갔다리. 가만히 좀 있어라. 가만있을 때 비로소 실체, 본모습이 등장하고 그 주변에 뭐가 있지요? 식당에서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할 때 어지럽잖아요. 거기에 허공, 비어있지요.

 

실체, 인간이나 탁자, 돌, 산이 있으면 실체로 고정돼있어야 이 사이에 공간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왔다 갔다 하면 공간이 없지요. 빈 공간이 있을 때 없음이 된단 말이죠. 그런데 사람이나 물건이 있을 때 있음이 되겠지요. 그러면 있음은 없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없음이 우선이죠. 그런 사고방식이 플라톤 사고방식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게 플라톤 사고방식이에요.

 

플라톤은 기원전 5세기경 아닙니까. 기독교 사상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플라톤 사상이 있었잖아요. 유대교 사상의 연장선에서 소위 그리스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유대교의 일파로 보는 거죠. 유대교 사상은, 모세가 언급했고 그걸 책으로 남긴 구약성경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단 말이죠. 잘 들으셔야 돼요. 창조했다는 것은 일반사람들이 듣기에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설명이 안 되는 모든 원인들을 한꺼번에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는 최초의 매듭이 돼요. 육체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어지러운데 정신적으로 그런 것도 어지러울 것 아닙니까.

 

엄마, 난 누가 만들었어? 내가 만들었어. 그럼 엄마가 누가 만들었어? 이렇게 질문하면 짜증나잖아요. 죽으면 어떻게 돼? 사후 세계는 어떻게 되는데? 죽기 전에 그걸 걱정한다는 것은 본인이 하고 있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어요. 어지럽단 말이죠. 깔끔하게 정리하려면 우리는 누가 만들었다? 신이 만들었지요. 그러면 죽으면 어디로 가겠어요? 신으로 가겠지요. 그러면 인생이란, 신으로 시작해서 신으로 말미암아 신께로 가는 거예요. 로마서 11장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깔끔하게 정리됐지요.

 

니체는 이게 바로 기독교라는 거예요. 없는 데서 만들어서 모든 있는 것을 하나님 자기 품 안으로 수용하는 것, 이게 기독교라는 겁니다. 그러면 큰 덩어리는 해결됐습니다. 어디서 만들어졌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고, 가기는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 품 안으로 간다. 큰 덩어리는 마련됐는데 일상생활에서 행복하십니까? 도둑놈이 와서 유리창 깰 때 마음이 편하던가요? 오만 원 날아갔네. 그렇게 생각하면 행복해지던가요. 내일 되면 또 깨질 가능성 있는데.

 

니체가 보기에 이런 겁니다. 오늘 중요한 것 나옵니다. 해결이 실제적이지 아니면서 이론상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거예요. 신이 태어났다는 걸 언제 이야기합니까? 어른 돼서 이야기하지요. 그럼 신이 불러서 죽는다는 말을 죽고 난 뒤에 이야기합니까? 살아있을 때 이야기하지요. 이것은 근거 없는 어떤 자체 내에서 아등바등 애를 쓴다는 느낌이 안 듭니까? 억지를 부리고 이 세상 살면서 뭔가 정리가 안 되고 불안하고 공포고 늘 염려되고 걱정스럽기 때문에 약간이라도 누그러뜨리고 싶은 몸부림, 다 해결은 안 되겠지만, 죽고 난 뒤에 문제가 아니고 한 달 뒤가 문제거든요.

 

거제도에 아는 사람들, 친척들이 있어서 하는 거예요. 거제도 사람들에게 사람은 태어나고 죽을 때 죽습니다. 기도합시다. 그러면 거제도 문제가 해결됩니까? 구조조정해서 잘릴 판인데. 대부분 계약직이에요. 오도 갈 데가 없어요. 전부 나와야 돼요. 가까운 목사님이 가서 주께로 돌아갑니다, 하면 전부 다 만만세 찬미하고 그렇습니까?

 

니체는 말합니다. 실제로 도움도 안 되는데 그런 억지를 부르느냐 말이죠. 도움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죽고 싶어 환장했나? 살고 싶은데. 사람들의 관심사가 죽는데 있는 게 아니에요. 사는 데 있는 이왕 사는 것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관심이 있단 말이죠. 니체는 묻습니다. 왜 인간은 건강하고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지를 기독교가 해결책을 낸 적이 있느냐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의 한계가 그거에요. 원인은 몰라요. 약으로 그 순간순간 억지를 부려서 뇌를 마비시켜서 살아있는 뇌를 죽은 뇌로 만들어서 잠시 발작을 진정시키는 것밖에 못해요. 약 떨어지면 또 마찬가지 된다니까. 원인을 몰라요. 다른 것은 원인을 아는데 정신과는 원인이 없어요. 한쪽을 수술했을 때 뇌가 하나로 돼있기 때문에 다른 쪽이 손상이 갔는지 어떤지 확인할 길이 없어요. 피부는 수술하면 그 부위는 낫잖아요. 그런데 뇌세포는 피부세포와 달라서 한쪽이 고장 나면 다른 쪽이 이상할 가능성이 농후해요. 하나로 움직이기 때문에.

 

니체가 지금 살아있으면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사람이 정신과에 가는 이유가 뭐냐? 자식이 불쌍해서 고치기 위해서 간다. 니체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가족 중에 누구 하나 병들고 발작을 일으키면 누가 힘들어요? 본인이 힘들어요. 그래서 사람은 본인이 힘들면 움직이게끔 되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까요? 니체, 당신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늘 행복하고 기분 좋게 살 수 있는 묘수가 있느냐고 할 때 니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통에 대해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동안 불행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기독교 사상에서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고통을 이상스럽게 생각하게끔 세뇌 받아온 게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고통이 나쁘다, 악한 것으로 생각하니까 플라톤 철학과 그에 연관된 기독교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은 죄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니체 철학의 시발점이 이거에요. 과연 죄라는 게 있는지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죄는 원래 없는 건데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내세웠기 때문에 죄가 생긴다는 겁니다. 너는 착할 수도 있는 왜 나쁜 짓을 해. 따라서 너는 책임을 져야 돼. 그러니 넌 벌 받아야 돼. 그래서 신은 벌주고 있는 중이야. 빨리 회개할수록 그 책벌에서 벗어나서 행복할 수 있을 거야, 라고 그런 식으로 기독교부터 모든 사상이 사회를 통제했고 질서 잡아왔고 훈계해왔다는 겁니다.

 

그게 플라톤 사상에서 그렇다는 거예요. 디오니소스는 그게 아닌데. 플라톤 사상이 왜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변화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실제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쁜 사람 플라톤이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변화하더라도 나중에 죽고 나면 편안히 쉰다는 거예요. 그러면 진실의 세계관은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신의 세계니까. 고정된 거고 세상은 변화되니까 종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어느 것이 너냐, 할 때 몰라요. 이십 년 전 내가 그 나인지. 물론 나는 맞아요. 안에 있는 내용물이 다르지요. 내용물이 다르면 내가 다른 건 맞아요.

 

똑같은 인간인데 어느 날 아내가 굉장히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어요. 그건 여자가 달라진 게 아니고 내가 달라진 거예요. 실망 없는 부부생활은 없거든요. 그 실망의 원인을 그동안 아내 탓으로 돌린 거예요. 남편들이. 너는 내 기대치에 부합되지 않다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달라졌다면 그때 나와 지금 내가 동일할 수 없어요. 거듭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기독교 세계에서는 변화하는 것, 잡을 수 없는 것을 포기하고 변화를 죄와 착함과 악함에 의해서 밀고 당기는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세계, 신께서 쥐었다 놨다하면서 인간을 선한 세계, 이데아 세계 또는 형상의 세계로 보내기 위해서 선은 장려하고 악은 나쁘게 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세상을 나쁜 행위와 착한 행위로 의도적으로 구분했다는 겁니다. 구분하다보니까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게 있고 그 의지를 어떻게 쓰기 나름이라는 거죠.

 

같은 샘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고 하지요. 사극에 보면 그런 이야기 많이 나와요. 도둑이 쓰는 칼은 죽이는 칼이지만 횟집에서 쓰면 맛있는 회가 된다는. 이게 바로 플라톤 사상이죠. 너의 행위에 따라서 있기 때문에 네가 착하고 착하지 않고는 네가 지금 행복하냐, 행복하지 않느냐로 판가름된다는.

 

니체는 말하기를 인간은 신체뿐인데 문제는 잘못된 정신으로 덧입혀져서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니체 당신 주장은 뭐냐? 진짜 실제를 밑으로 내려 보자는 말이죠. 가상 세계를 진짜 실제 하는 세계로 보면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되는 거예요. 지금은 고생하지만 참다보면 저쪽 나라에 가겠지요. 저쪽 하늘, 저쪽 세계 없어요. 이 세계뿐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무슨 근거로 이천 년 기독교 철학을 뭉개느냐고 하지만 니체는 말하기를, 너는 무슨 근거로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하느냐? 아무 근거 없어요. 양쪽 다 근거 없어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근거 잡으면 보이는 게 되니까 그건 안 되지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철저하게 은폐돼있어야 돼요. 숨어있어야 돼요.

 

아까 제가 떠내려간다고 했지요. 떠내려가는 건 뭘 알아도 그냥 떠내려간다고 했지요. 떠내려가는 걸 실제로 보는 거예요. 떠내려가면 안 된다는 것은 플라톤 사상에서 나왔고 기독교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내가 이 직업, 저 직업, 온갖 직업 해보고 안정되게 살아야지 할 때 안정되게 사는 것이 선이고 떠돌이 생활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 자체가 세뇌 받은 기독교 사상이고 플라톤 사상이고 이게 우리 본래 신체와 다른 수상하게 잘못된 정신세계가 귀신 붙듯이 들어붙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그걸 떼버리란 말이죠.

 

배고프면 먹으면 되고 먹을 것 없으면 안 먹으면 되고 안 먹으면 죽으면 되고. 이러면 되는데 왜 자꾸 지금 아픈 것은 신에게 벌 받아서 그런 것이다. 내가 배불러야 만족하다. 그거야 알지요. 신체는 쾌감이 있기 때문에. 그건 어디까지나 쾌감이라니까요. 쾌감이기 때문에 선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플라톤 다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로 책임을 져야만 형편이 나아진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에게 책임이란 게 없다는 겁니다. 죄가 없는데 무슨 책임이 있어요. 그럼 뭐가 있느냐? 책임 의식이 있는데(어렵지요^^) 그 책임은 진실 세계, 신의 세계, 천국, 실재 여기에 대한 책임이 아니고, 이건 칸트를 의식한 거예요. 칸트는 인간에게 의지가 있는 이유가, 네 속에 도덕적 원리가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책임을 요구한다.

 

칸트가 왜 그런 이야기한다고 했어요? 당신 속에 있는 신을 믿어라. 신의 계명이 성경책에 나오는 게 아니고 당신 속에 신의 계명이 있는데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신도 이웃이니까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거기에 대해서 우리 양심이 받쳐주면 이 사회는 아주 좋은 사회가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문제가 뭐냐 하면, 항상 내 의지가 제대로 쓰이는지 내가 나를 관찰해야 되겠지요. 내가 나한테 벌 줘야 되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자기 자제, 자기 절제, 자기 통제가 되는 사회가 좋은 나라가 된다는 이게 칸트의 윤리도덕입니다. 누가 시키기 전에 네 속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란 말이죠. 그것은 무조건, 조건 없이 따라줘야 된다는 겁니다. 들어보니 더러 기억이 나지요.

 

그런데 니체는 그게 아니고 신에게 책임지는 게 아니고 네 자신에게 책임져라. 이 말은 네 욕망을 긍정하란 말입니다. 아주 나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해운대에 80층 되는 고급 아파트에 보석을 훔치려고 스파이더맨처럼 올라가는데 76층에서 미끄러져 실패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포기하겠어요? 니체의 주장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도둑질이 나쁜지, 좋은지 이게 문제가 아니고 처음에 뭘 시도했어요? 80층에 있는 귀금속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욕망이 있었잖아요. 그 욕망에 충실하란 말입니다. 이건 귀금속이 탐이 나는 게 아니에요.

 

니체에 의하면 도둑질은 죄가 아니에요. 나쁜 짓도 아니고. 80층에 있다고 가상되는 귀금속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있잖아요. 그 욕망에 책임을 다해야 돼요. 그런데 갑자기 도둑이 로또 40억에 당첨됐다. 80층 아파트를 살 돈이 있어도 그 사람은 40억 은행에 저축해놓고 80층에 기어 올라가야 돼요. 니체에 의하면.

 

우리나라 유명한 등산가 엄홍길이 있죠. 엄홍길이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면 산신령 있어요? 없지요. 그런데 왜 올라갑니까? 산이 거기 있으니까. 전용렬 목사님이 암벽 타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 욕망에 충실한 거예요. 자기 욕망에 책임을 다하는 겁니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지. 이게 바로 니체 철학이에요. 이건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굶어죽으면 그만이지. 굶어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힘에 대한 의지다. 니체 철학을 한 마디로 하면, 힘을 향한 힘에 의한 의지. 그 힘에 의한 의지에 충실한 사람을 위버멘쉬, 다시 말해서 초인.

 

니체는 인간을 두 종류로 봅니다. 초인과 비속한 사람. 비속한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에요. 용감한 사람은 뭐냐? 니체 철학은 설명을 잘 들어야 돼요. 용감한 사람은 이기는 사람이 아니에요. 어떤 마라톤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버스 타고 2등한 사람이 있어요. 나중에 걸려서 2등 취소되고 선수자격 박탈된 사람이 있는데, 마라톤은 옆길로 새면 안 돼요. 가는 궤도가 있어야 돼요. 그걸 코드라 해요.

 

예를 들면 장기 말에 차, 포, 마, 상, 졸이 있는데 니체가 장기 이야기했는데 장기에는 글자에 따라서 코드화돼있어요. 니체 철학은 코드화를 없애버린 겁니다. 동양 쪽으로 이야기하면 장기가 아니고 바둑이에요. 장기는 가는 길이 규칙화돼있지만 바둑은 놓는 순간 그 자체에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놓는 순간 저쪽과 새로운 인과관계가 형성된다고. 그래서 바둑은 존재가 전략적 존재에요. 하나 둘 때마다 전체를 다시 살펴야 되니까.

 

인간은 바둑알이지 장기알이 아니에요. 누가 너한테 이 길로 가라, 저 길로 가라고 지시하는 그 사람, 권력도 나쁘고, 따라가는 순종하는 너도 나쁘고. 너는 왜 자신을 장기알로 어떻게 살지 묻느냐 말이죠. 네 속의 욕망, 힘에 의한 의지가 충천하고 있는데. 신은 죽었어. 신이 안 죽으면 네가 신이 안 돼. 신은 절대 개념이기 때문에 존재적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너에게 명령하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네가 신이기 때문에.

 

보통 인간들이 신을 이야기할 때 신은 누가 만들었느냐고 말 안 하지요. 신은 없어졌다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 이유가, 인간이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를 통해서 신의 의미를 규명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연아, 너는 어디서 왔니? 어디로 사라지니? 자연에게는 그렇게 물을 수 있지만 그 자연을 만든 최종 원인자한테 물을 수 없잖아요.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는 게 신의 개념이라면 그 신의 개념은 죽었다는 겁니다. 왜? 이미 인간들이 신에 의해서 학살당하고 매장됐기 때문에 자기가 신인 줄 모르고 스스로 자기를 죽이다보니까 신이 따로 있어서 그쪽에서 명령하고 그쪽만 영원하다고 그동안 플라톤에 의해서 오해해왔다는 거예요.

 

내가 춤춘다면 이야기하지 말고 내 안에 신이 춤춘다고 이야기하면 될 걸 왜 복잡하게 내가 춤추는데 그렇게 생각하느냐 말이에요. 또 니체는 이야기합니다. 10분 전에 내가 물을 마셨지.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과거는 이미 지나간 거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지금 내가 과거를 만들고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라는 거예요. 10분 전에 물을 마셨다고 하지 말고 10분 전에 물을 마신 것은 지금 내가 있기 위해서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란 겁니다.

 

내가 신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모든 만물은 신을 위해서 있잖아요. 그 신 자리가 내 자리라니까. 화산이 터져서 밑에 살던 이층집이 불타버리고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집 없는 나를 위해서 화산은 터져야 했다고 보라는 겁니다.

 

이걸 다시 정리하면, 철저하게 무슨 세계? 나는 비리비리하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진짜 좋은 것은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마시란 그 말이에요. 지금 내가 가장 좋은 건데 자꾸 다른 좋다는 걸 찾게 되면 나는 부족한 게 되잖아요. 그러면 죄의식을 느끼는 거예요. 니체에 의하면. 그럼 이것이 다냐? 다가 아니죠. 내 속에 욕망이 움직이죠. 그게 힘에 의지에요. 힘에 의지가 움직이면 그게 내게 주어진 과제요, 숙제가 되는 겁니다. 그냥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충실하란 말이죠.

 

그리고 니체는 말합니다. 자꾸 신, 신, 하나님 찾지 마라.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잖아. 본인은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 뒤늦게 벌받을까봐 신을 끌어당기는 그런 비겁한 짓을 하지 말고 네 자신에 충실해. 신이란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면 네가 신이야. 바로 그거야. 이 이야기 공감 안 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건 불교잖아요, 하는데 나중에 또 불교 깹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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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4-니체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니체가 플라톤을 건드렸어요. 이것은 기존의 기독교에 대한 모든 것을 다 건드린 거예요. 그렇게 건드린 이유와 니체의 철학과 부합됩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옛날 사람이잖아요. 니체는 1800년대고 기원전 500년경이니까 2300년 차이나잖아요. 2300년 전에 플라톤이 초인 사상을 들고 나왔다는 말은, 과거는 이렇다는 게 아니라 지금 초인 사상이 마라톤에서 나타나기 위해서 과거로부터 이렇게 진행해 왔다는 것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론에 현재 자신이 충실하다는 것. 이것은 철학자들이 어떤 주장을 내세울 때 본인이 딱 맞아떨어질 때 내용만 진리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 통째로 진리가 되는 장점이 있는 겁니다. 본인까지 포함하는 거예요.

 

“바르게 사세요.” 말만 이러면 아무 소용없잖아요. “나, 보세요. 나처럼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이게 훨씬 설득력이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살아?” “나는 이렇게 살아.” 니체의 백만 마디 말보다 본인이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아까 니체를 미친 사람이라 했지요. 그럼 니체가 아닌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인데 그들의 주장은 뭐라 했습니까? 그냥 입 다물고 떠내려가듯이 사는 거예요. 모든 운명은 신에 맡기고. 니체는 그 점을 알기 때문에 둘 중에 하나만 해라. “나한테 붙을래, 기존에 것에 붙을래?” 이렇게 요구하는 거예요. 자기는 광야의 예언자니까.

 

어느 논리가 옳으냐가 아니라 어느 것이 너한테 공감이 되느냐는 거예요. 첫째 시간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신을 찾고 뭘 해봐야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공감되지, 그지?” 그러는 거예요. 흑산도에 성폭행한 그 사람들이 만약에 교회에 나가든 안 나가든 나름대로 양심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럼 그 사람이 하고 싶어서 성폭행했다고 나옵니까? 아니지요. “나는 공모한 적 없습니다. 나는 손만 만졌습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건 곧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는 미친 사람 되기 싫어요. 정상적인 사람 되고 싶습니다.” 무슨 사람? 착한 사람 되고 싶다는 거잖아요.

 

니체는 말하기를 제발 착한 사람이란 환상을 깨라. 착한 사람하지 말고 초인이 되라.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너, 방금 흑산도 교사 성폭행했잖아.” 그런데 그 사람이 성폭행했다고 자랑한 적 없지요. 이건 나쁜 짓이니까. 니체가 보기에 성폭행보다 더 나쁜 것은 이게 나쁜 짓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 더 나쁜 거예요. 실토해서 잡혔잖아요. 자수한 게 아니죠. 잡혔죠. 그러면 초인 같으면 어떻게 해요? 나, 나쁜 짓 안 했는데. 날 찾아요? 내가 그 짓했는데, 하고 자진해서 경찰서 나와야지. 이게 초인이라는 거예요.

 

방금 중요한 이야기했어요. 니체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니체처럼 안 하고 니체 이론이 자기 행동을 어느 정도 정당화하고 변명거리로 그것만 이용하는 자에게 니체는 용납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초인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거예요. 그걸 비속인, 쉽게 말해서 더러운 인간, 다른 말로 하면 위선자에요. 좋은 일할 때만 위선자라고 말하는 게 아니고 니체는 나쁜 짓하는 자에게도 동일하게 위선자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세상에 자신이 없어. 기존에 플라톤 사상처럼 현재 선과 악이 지배하는, 그래서 니체 책 중에 [선악을 넘어서]가 있어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 권이 대표적으로 한국에 번역된 책이에요. 그걸 제가 다 읽었거든요. 위선자는 기존에 선악체계를 정상인 체제로 마음 두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위선자, 다시 말해서 비겁한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인간에게 책임지라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니체에 의하면, 제발 너를 “나는 죄인입니다, 부족합니다.”라고 비하시키지 말고 상승시키라는 겁니다. 상승시키는 방법에 니체가 제시한 동물 비유가 있어요. 낙타가 있고, 낙타에서 사자, 사자에서 어린아이, 이렇게 해서 초인이 되는 겁니다.

 

낙타의 특징은 무거운 짐을 지면서도 군소리 않고 가는 것. 세상의 무거운 짐, 결혼해서는 가족이라는 짐, 직장에서는 직장생활 버텨야 되는 짐, 짐을 지고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힘들게.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이게 뭐냔 말이죠. 노예가 따로 없는 거예요. 본인이 주인이면서 알 수 없는 주인을 섬기냔 말이죠. 왜 자진해서 노예가 되지? 이 바보야. 왜 알아서 짐을 지느냔 말이죠. 강요한 짐이 아니고 알아서 지는 거예요. 이렇게 살면 엄마가 좋아하겠지, 맨날 이러고 있단 말이죠. 자기 인생 살지 않고 엄마 인생사냐? 이럴 순 없단 말이죠.

 

여자 쪽에 아이가 셋이고, 남자 쪽에 아이가 둘 있다. 그런데 둘이 결혼하려고 하는데 남자 쪽 엄마가 결사반대해요. 그러니까 여자가 찔찔 짜는 거예요. 변덕도 많아요. 결혼하다고 했다고, 안 한다 했다가. 그때 남자가 꽉 잡아주는 거예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당신도 결심하세요. 아이는 어떻게 하고요? 아이는 내가 담당하겠습니다. 이게 바로 낙타에서 사자가 되는 거예요. 내 인생인데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낙타는 수동적으로 짐만 질뿐인데 사자의 특징은 전사, 군인, 적이 있어요. 낙타에서 사자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싸워야 된다. 소위 정상적인 사회질서에 대해서 싸워야 되는 거예요. 누가 이런 걸 좋아하겠습니까? 독재자들이 되게 좋아하죠. 그 중에 대표적으로 히틀러에요. 모든 민족들이 미쳤다고 하거든요. 그러나 히틀러는 뭐라고 합니까? 내게 주신 사명은 반드시 내가 이루고야 말리라. 투쟁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히틀러가 [나의 투쟁]이란 책을 지었잖아요.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를 따라가지 마라. 독일은 독일 나름의 독자적인 게르만족 혈통이 있고, 우리의 고유의 의지가 있는데 이 의지는 권력이 없어서 행사 못한 걸 권력의 의지를 따라서 충분히 할 수 있다. 니체가 1900년에 죽었잖아요. 2차 대전이 1939년에 일어납니다. 그 사상을 니체한테 배운 거예요. 사실은 배운 게 아니라 이용한 거죠. 자기 입장을 변명하기 위해서.

 

그런데 니체의 사상이 얼마나 좋은지 낙후된 독일, 맨날 수입만 하고 풀죽어있는 게르만 족을 목표와 이상을 향하여 그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집어넣는데 위버멘쉬, 니체 철학보다 더 나은 철학은 없지요. 깨어라, 일어서라. 그래서 니체의 낙타에서 사자되는 철학은 모든 대기업 신입사원 교육할 때나 직원들 교육시킬 때 등장하고, 미국의 산업혁명이라 할 수 있는 포드 시스템, 모든 경영기법에 니체 철학이 다 스며들어있습니다. 인문학 강좌에 단골로 들어있어요. 제발 신을 믿지 말고 네 자신이 신인 것을 스스로 깨어서 인정하라. 눈 활짝 뜨고, 내가 신이네, 잠재력을 왜 죽이냐 말이죠. 그걸 왜 질식시키느냐, 발휘시켜라. 그러면 회사는 산다. 다단계도 마찬가지고.

 

안철수의 정신적 멘토가 법륜 스님이죠. 여기 부산에 와서 즉문즉설. 이것은 네가 나에게 무슨 질문을 하던 즉석에서 다 답변해줄게. 답변이 다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 있어요. 니체철학으로 무장하면 돼요. 질문들이라는 게 꾸리하게 하거든요. 맥이 빠져서. 자기 속의 잠재력과 긍정적 가능성을 생각 안 하고, “스님, 남들이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물을 것 뭐 있노? 니가 신인데.

 

어떤 목사가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자기가 교인에게 복음을 전하니까, 보통 연세 많은 교인들은 복음을 몰라요. 그냥 들었던 대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할 뿐이거든요. 그런데 복음 전하니까 젊은 부부가 어렵다 하니까 주의 성도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라고 하니까 권사 입장에서는 자기가 알던 옛날 목사들의 권면과는 다르거든요. 그래서 권사 화가 난 거예요. 교인 몇 명 되지도 않은데 삐치면 어떨지 걱정이 돼서 목사한테 대든 거예요. 아이 둘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런 식으로 안 되지요, 한 거예요. 이럴 때 어떻게 하느냐고 저한테 물은 거예요.

 

제가 답변해줬어요. “제가 나이가 어려서 요령이 없이 복음만 전했는데 미안합니다. 그 젊은 부부를 권사님이 담당해서 해보세요.” 그 목사는 권사를 불러놓고 복음은 이렇다고 설명하려 했는데 그럴러니 자신이 없는 거예요. 나이 많아서 안 먹힐 게 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고 권사한테 한 몫을 떼어주란 말이죠. 그러면 권사는 목사가 자기 존재감을 인정해주니까 자긍심이 생기겠지요. 그러면 그 교회는 자기 존재감을 빛낼 교회가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나서겠지요. 이게 바로 니체철학입니다. 어느 경영기법이나 모든 것에 전부 이게 다 들어가는 거예요. 이건 인간해방입니다. 자기로부터의 구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낙타에서 사자는 그렇게 돼요. 그런데 히틀러는 사자에서 어린애로 가지 않습니다. 자기한테 필요한 사자로 끝나기 때문에. 사자는 싸워야 될 대상이 있다는 게 문제가 돼요. 그런데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숭고한 인간성, 사자가 초인이 아니고 어린아이가 되는 게 초인이라고 니체는 말해요. 어린아이는 그야말로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다시 말해서 고려시대는 어떻고, 조선시대면 어떻습니까? 대충 삽시다. 강의 초반에 뭐라고 했습니까? 제발 흘러가는 대로 군소리하지 말고 입 다물고 다들 그렇게 살아. 세월이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에요. 자기를 질책하지 말라는 거예요.

 

가만있는 게 아니에요. 가만있는 것은 세 번째,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 불교죠. 불교의 문제점이 그거에요. 불교는 전부를 알아버렸으니까 무슨 의미 있겠노. 다 소용없는 걸. 잘 되도, 좋다고 소고기 사 먹겠지. 이게 불교에요. 대승적 마음. 그러나 니체는 그게 아니에요. 니체는 단체에 충실하라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 충실하라. 새로운 주체관을 내요. 그게 초인이에요. 초인이지 힌두교, 불교 사상이 아니에요. 신은 없다는 게 불교라면 신은 죽었다는 니체사상이에요. 없다는 건 원래부터 없다는 거고, 플라톤의 사상이 신을 가져갔는데 사실은 원래 인간이 신이라는 거예요. 그게 니체 사상이에요. 오늘 이 강의 듣고 니체 추종자 나오는가 모르겠다. 그 종교가 괜찮은 종교 같은데(^^).

 

첫 번째 이야기에서 플라톤 사상에 이어진 기독교 사상을 쳐버렸습니다. 두 번째, 실용주의 사상을 칩니다. 실용주의 사상이 과학적 사상이죠. 이게 아주 나쁜 사상이라는 거예요. 실용주의 사상의 기본적 모토가 쾌와 불쾌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과학적 사상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과학 진리들이 진리입니까, 편리입니까? 편리지요. 편리하다는 말은, 신, 진리, 이런 것을 안 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신이 있다, 없다는 게 아니고 그걸 무시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만 편리하면 되니까.

 

두 개의 교회가 있는데 똑같은 설교를 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한 교회는 복지시설이 잘 돼있어요. 한쪽은 에어컨도 안 나오고 선풍기 틀고 한다. 똑같은 설교라면 큰 교회에 가겠죠. 내 몸이 편하잖아요. 19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죠. 니체가 보기에 인간이 신으로부터는 탈피했는데 자기 몸의 상쾌함에는 탈피 못했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자기 몸의 상쾌함에 굴복하게 돼있어요. 몸이 아니고 더 무서운 것은 정신적인 굴복을 하게 돼있어요. 이게 바로 산업자본주의에요. 니체는 자본주의를 굉장히 공격합니다. 도덕의 종에서 풀려났는데 이제는 자본가의 종이 된 거예요. 그건 초인이 아니에요. 왜 자기 몸의 불쾌함을 못 이기느냔 말이죠.

 

그러면 초인은 어디 있느냐? 몸의 불쾌함 속에서 자기가 그동안 몰라서 잊었던 놓쳤던 또는 사용하지 않았던 놀라운 의지가 불쾌함 속에서 자각이 돼요. 어려움이 오면 올수록 우리는 초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면 니체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거든요. 힘에 의한 의지, 힘에서 만들어진 의지. 나는 힘의 덩어리에요.

 

이것을 과학적으로 표현하면, 에너지보존법칙이라 합니다. 화이트헤드의 표현으로는 극소질서, 좁은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 지나간 것이 돌아서서 나한테 영향을 주는 것, 모든 얽힌 관계에 의하면 그때마다 극소질서가 생기게 돼요. 그러면 원인과 결과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니체에 의하면 사건만 있을 뿐이에요. 사건 안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담겨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움직임도 사건이에요. 사건 자체는 몰라요. 니체가 이래서 어려운 거예요.

 

사건, 사건이 연발로 일어나지만 사건 자체는 없어요. 왜냐하면 사건 자체는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이것이 해석이 되었기 때문에 사건 자체로 등장한다. 쉽게 말해서 소급해서 이해한다면 되는 겁니다. 내가 10분 전에 물을 마신 것은 지금 내가 있기 위해서 물을 마셔야 됐어. 할 때 지금 내가 있는 건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건 자체를 찾을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지금 내가 해석한 거니까.

 

이걸 한꺼번에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나는 나다. 그런데 불교는 나를 있음을 무화로 바꾸잖아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니체가 보기에 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가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들은 어쨌든 간에 인간은 고통스러워서는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는 거예요. 그런데 대자연 자체가 고통과 고해의 연속이잖아요. 그 자체를 긍정하면 되잖아요. 왜 자꾸 그 고통을 없애려고 하느냐 말이죠. 이게 불교의 잘못이고 에피쿠로스의 잘못이에요. 에피쿠로스나 불교나 똑같아요.

 

어떻게 하면 고통을 없앨까? 착한 일을 많이 하자. 그러나 그건 마약같은 거죠. 그야말로 구제하기를 마약처럼 하는 경우가 연예인 중에 한둘이 아니에요. 김혜자도 그렇고, 죽은 오드리 헵번이 제일 증세가 심한 사람이고, 김장훈이 그렇고 래퍼 션과 부인, 그 사람들은 구제할 때마다 상상도 못할 엔돌핀이 나와요. 돈을 준 값어치가 충분해요. 마약 같은 겁니다. 또 그와 같은 게 채식주의자. 밥을 굶는 쾌감이 먹는 쾌감보다 월등하게 낫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고통을 없애겠다는 그런 게 목적이 됐다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러나 초인은 목적은 없습니다. 시작도 없기 때문에. 오직 현재 주어진 사건, 그것이 전부에요. 니체사상이 그래요.

 

실용주의가 편리를 위해서 있습니다. 식기세척기 만들고, 냉장고 들여놓으면 쉽가 그런 거군요. 니체는 그것만이 아니고 니체가 실용주의를 공격하고 싶은 것은 과학에 기초가 된 것은 물론이고 그것에 기초한 현대 시민사회 조직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번 여름수련회에서 마태복음 할 때 초반에 나올 거예요.

 

현대 시민사회조직의 실용주의입니다. 경제학, 신고전주의, 마르크스주의, 공리주의, 사회주의, 복지주의, 모든 것이 과학적 인식, 실용주의에서 나온 겁니다. 그 사회에서 배고파하는 사람을 최소로 줄이는 것, 그러니까 힘들어하는 사람을 최소로 줄이는 것이 가장 경제적으로 정의를 이루는 사회다. 롤스의 정의 론입니다. 분배론.

 

경제학자들의 모든 주장은 자본주의만이 아니에요. 그 안에 반드시 소득 분배의 균형이라고 하지만 사실 더 쪼개 보면 사람이 밥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균형 맞추기거든요. 그런데 니체가 왜 반발하느냐 하면, 내가 이 사회에서 얼추 중산층은 된다는 사고방식이 어디서 왔느냐 말이죠. 이것은 바로 잘 사는 사람들을 모델화해서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내가 하층에서 중산층이 되면 그걸로 만족하겠습니까? 앞에 강남이 보이고 해운대가 보이는데? 께름칙하겠지요. 언젠가 여기서 저기로 이사 갈까, 하겠지요. 인간은 보면 탐심이 일어나게 돼있는데 그걸 어떻게 말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게 자기한테 충실하지 않은 거예요. 아까 낙타에서 사자가 된다 했지요. 이러한 니체사상을 오해하는 거예요.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을 싸워서 쟁취하면 사자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사자가 아니고, 니체가 보기에는 여전히 낙타에요. 빨리 좋은 아파트로 가야 되는데. 이게 자기한테 짐이 된다 말이죠.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다시 두 번째 이야기를 하면, 과학은 편리위주다. 모든 사회, 정치, 문화 전체가 이미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무장되었다. 이 회사에서 월급 받는 것이 나한테 합당한 편리를 주는지 계산해서 취직을 하든지 퇴직을 하든지 한단 말이죠. 그저 편리위주에요. 쾌감위주고. 그렇다면 사자에 멈추지 않고 어린아이가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니체철학이 동원됩니다.

 

영원영겁 또는 영원회귀. 회귀란 말은 돌아온다는 말입니다. 영원은 시작과 끝도 없이 계속 가는 것이고. 영겁이란 마찬가지로 끝없음이란 뜻이고. 영원회귀라 하는데 여기서 동일성을 찾아내게 되면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게 초인이에요. 기존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니체 말을 못 알아듣고 광야의 예언자처럼 외쳐 것만 어려워하고 왜 모르느냐 하면, 본인이 갖고 있는 동일성, 이걸 자아정체성이라 하는데 쉽게 말해서 나, 나다운 나를 계속 영원토록 끌고 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안 그런 사람 없지요. 사람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누구 좋으라고 합니까? 자기 좋으라고 하는데 이런 욕구, 욕망에 니체 당신은 나한테 무슨 아이디어를 제공할 거냐? 이렇게 생각하면서 니체를 생각하는 거예요. 니체는 뭡니까? 이천 년 서구철학을 다 깨는 거예요. 그리고 니체는 논리로 다가설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예언자는 시적으로 외칠 뿐이고 선포할 뿐이에요. 어째서 누구한테 무슨 이익이 됩니까? 이익 같은 소리하지 말라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니체가 사람들의 기분을 너무 잘 알아요. 이렇게 합니다. 컵이 있습니다. 물이 있습니다. 물을 마시세요. 니체는 명령하는 게 아니고 예언하는 겁니다. 진리를 선포하는 거예요. 현재 있는 그대로 실재라는 거예요. 물이 있다는 것도 실재고, 컵이 있는 것도, 실재고 물을 마시는 것도 실재라는 거예요. 분명히 니체는 예언자로 물을 마시세요, 하니까 사람들은 명령으로 듣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되라. 명령형이잖아요. 낙타되지 말고 어린아이가 되라고 명령하니까 니체 말 들으면 우리한테 무슨 이익이 되는데, 라고 생각하니까 니체 말을 이해 못하고 있는 거예요. 니체의 말을 들으면 나한테 무슨 편리가 오고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그런 토를 달면서 그런 심보로 다가서기 때문에 여전히 자기 동일성이 안 깨지겠지요.

 

니체가 이런 이야기할 때는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 하면, 서구에서 교회가 말씀을 선포하잖아요. 백날 교회에서 설교해서 소용없다는 걸 알아요. 설교자가 무슨 소리하든지 간에 듣는 사람은 그 설교가 나한테 무슨 이익이 될 것입니까, 라고 받을 게 뻔 하잖아요. 나는 안 깨지죠. 동일성 자체에 영원함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나다, 계속 가는 거예요. 이건 초인이 아니죠. 주변의 상황에 따라 같이 떠내려가는 거예요.

 

그럼 무엇이 영원하다는 말이냐? 컵의 물을 마시라는 말은, 이것이 계속해서 돌아온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컵에 물이 있구나. 컵의 물을 마셔라. 이것은 무슨 대상이 있든 없든 자체적으로 계속 돌고 돈다는 겁니다. 불교보다 더 어렵지요. 그럼 뭐가 동일성입니까? 초인은 영원히 계속 동일하다는 게 동일성이죠. 내가 초인되라는 말이 아니고 초인은 그렇다는 거예요. 따라서 자기 동일성의 영원함을 포기하면 그 순간 그 사람은 뭐가 됩니까? 초인은 영원하다에 이미 포함돼버리죠. 그럼 그 사람은 초인이죠. 사자도 아니고 낙타도 아니고 어린아이에 있는 거죠. 있는 생긴 그대로 계속 돌고 도니까. 돌고 도는 것은 변화를 의미겁니다.

 

니체가 어린아이라고 한 것에 의미가 있어요. 여러분 갓 난 어린아이를 상상해보세요. 어린아이에게 장차 네 스케줄을 내놓으라고 하면 말이 안 되죠. 너, 앞으로 뭐 될래? 그건 좀 커서 할 이야기고. 어린아이는 몸만 있을 뿐입니다. 몸이 요구하는 대로 살 뿐입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여기 어린아이가 있네, 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이 세상에 어린아이가 하나뿐입니까? 계속 어린아이가 생기잖아요. 어린아이가 늙어 죽어도 어린아이라는 알갱이는 계속 있잖아요.

 

이게 지난 낮 설교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형체와 알갱이를 나누잖아요. 형체는 죽어도 알갱이는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알갱이로 설명해야지 눈에 보이는 형체로 늙어 죽는다, 이걸로 설명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죽음이 다가 아니고 늙고 죽음을 유발시키는 그 알갱이가 뭔지 원천을 찾아가봐야 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그겁니다.

 

니체는 말하기를, 니체는 기독교고 뭐고 다 버리니까. 사실은 니체가 신학교 출신인가 그럴 거예요. 이렇게 보면 돼요. 니체의 모든 철학은 성경을 모방했다?? 성경 개념을 차용했다고 보면 정확해요. 예언자도 그렇고. 니체가 왜 예수를 싫어하느냐 하면, 혼자 희생하고 남들이 그 희생을 받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이 싫은 거예요. 내가 나한테 충실해야지 왜 남한테 짐을 지우고 기대느냐 말이죠. 나는 날 믿으면 되지 예수를 왜 믿느냐 이 말입니다.

 

니체가 그런 주장을 할 때 뭔가 오해한 게 있어요. 니체가 오늘날 21세가 교회를 보면 내 사상이 교회에 있다고 할 거예요. 니체는 진짜 복음을 믿는 사람이 있다고 치고 그런 이야기하거든요. 전제가. 그러나 인간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니체 말이 맞아요. 인간을 자기 자신을 처음부터 믿어왔어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되지 인간은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니체가 답답해.

 

니체가 말한 철학대로 교회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어요.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교회에 옵니다. 교회 와서 사랑받기 원하고 자기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교회 오고, 이미 승리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 교회 오고, 내가 스스로 절제하고 술 끊고 담배 끊었다고 떠벌이기 위해서 교회 온 거예요. 전부 다 니체 후계자들이에요. 교회는 니체 후계자들이에요.

 

위선하지 않겠다는 것이 위선의 마귀로써 덮어씌운 거예요. 위선하지 않는 그것이 새로운 위선의 아이템이 된 거예요. 고스프레란 말 알지요. 일본만화를 실제로 따라하는 것. <나는 가수다>란 프로그램을 중국에서 따라하는 것, 그 콘셉트를 그대로 베껴서 하는 것, 그것을 벤치마킹이라 하잖아요.

 

니체가 원했던 대로 지금 이 세상이 니체의 바다요, 니체의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니체를 공부하는 의미가 있어요. 우리는 입만 안 다물 뿐이지 이미 니체로 태어나는 겁니다. 그걸 논리적으로 규정을 못하고 정리 못해서 그렇지 모든 인간은 아담의 속성으로 태어나면 전부 니체로 태어나는 거예요.

 

아무리 신을 거론해도 그건 구색에 불과하고 자기 털 하나라도 건드리면 사나워집니다. 옥시 사건도 마찬가지고 2년째 버티고 있는 세월호도 마찬가지고. 동성애 큐어축제? 동성애 자체가 정신병자들입니다. 옛날에 왜 이런 축제가 없었느냐 하면 그땐 정신병자인 걸 알고 가만있었어요. 정신병자들이 늘어나잖아요. 전부 다 니체니까. 미친 사람이 늘어나니까 기존에 정상적인 세계에 편입을 시도하는 겁니다. 우리도 결혼할 테니까 주택자금 내놓으라는 겁니다.

 

니체의 주장대로 해봅시다. 니체의 시대에 니체는 안타까워서 이야기합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아, 내가 미친놈이니까 앞뒤 따지지 말고 내 선포를 들어봐라. 논리가 아니고 이성이 아니고 공감이 되는지 들어봐라. 지금 이 시대는 니체가 몰랐던 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 미친 사람으로 이단으로 정신병자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니체가 알았다면, 니체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어요. 너무 충격 받아서.

 

어떤 것도 인간 세계에서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니체가 그런 점에선 선지자에요. 해결책이 없으니까 영원토록 이 세상이 돌아감을 그냥 받아들이자. 그 속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어쩌면 초인이 되기 위해서 우주와 함께 해 아래 새로운 게 없으니 그것의 무한한 반복, 되풀이, 그것이 극소적으로 응축이 되면 지금 너고, 그리고 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아무도 입 다물고 있는 것을 나는 미친놈이니까 내가 대신 외칠게. 세상을 왔던 그대로 되풀이 될 뿐이지 신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신? 그분 죽었다. 우리가 처음부터 신처럼 살아왔으니 그냥 신이다 여기고 이 영혼 속에 우리 몸을 눕히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이것이다. 제발 고통 같은 것에 매달리고 과학 따지지 말고 선악 따지지 말고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욕망에 충실하시고 그게 남한테 피해 입혔거든 벌 받고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내가 사형당하기 위해서 남한테 피해를 줘야 했구나, 라는 식으로 그것마저 지금 떠나면 다시 자연으로 흡수 통합된다. 물질세계는 없어진다. 없어지면 다시 뭉쳐지면 내가 될 테니까, 영원 회귀되니까 그렇게 세상을 보는 것이 실재다, 이게 진리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니체한테 감사한 것은, 니체가 하는 말 전부가 진즉에 악마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해주죠. 악마는 압니다. 인간이 예수, 삼위일체, 뭘 하든 간에 그게 고스프레에 불과하고, 전부 다 위장에 불과한 것을, 흉내 내기에 불과한 것을 다 알아요. 악마는 진실 세계에 꼭꼭 숨어있습니다.

 

그 진실이 뭐냐? 복음인데 두 자로 약속이에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악마는 들어있어요. 약속대로 될 뿐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번 수련회에서 그것도 거론됩니다. 그 약속대로 세상은 움직입니다. 그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니체란 자들이 등장해서 외쳐야 되고, 그 외침이 이 현실에 대해서 어쩌면 그렇게 잘 이야기했는지. 어쩌면 우리 자신의 실상을 그렇게 잘 표현해줍니까? 자기 욕망에 충실하라. 하라가 아닙니다. 이미 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이 세상 죽었다는 사실, 그 죽음 앞에 설 때 우리의 실재는 비로소 성령에 의해서 노출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가 가만있지 않고 니체 같은 분들을 설치게 해서 우리의 실상을 앞서 보여주니 감사합니다. 이 모든 된 것이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일환인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