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푸코 161213 본문
녹취:한윤범
20161213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8-미셸 푸코
(강의:이근호 목사)
미셸 푸코는 1926~1984, 58에 패혈증으로 죽었어요. 60도 못 살았지만 참 열심히 살았어요. 이 사람이 한 주장들이 현대인들이 굉장히 잘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특히 동성애 부분에서. 동성애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인권이거든요. 스스로 자기 권리를 마음껏 발휘하는 그런 토대 위의 인권. 내가 남성을 좋아하든 여성을 좋아하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권리라는 겁니다.
동성애 주장의 모토는, 인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돼있고 그게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없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순수한 사랑이라는 거예요. 누구의, 국가나 사회인습에 간섭받을 필요 없는 것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고. 동성애자가 있었는데 왜 그동안 가만있었느냐? 국가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따로 구분해서 통념상, 사회전통상 남성은 남성다워야 되고 여성은 여성다워야 된다는 그것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푸코에 의해서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안 거예요. 푸코의 사상이 환영받는 이유를 알겠지요. 그걸 성소수자라고 이야기해요. 성소수자가 권세와 권리를 주장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미셸 푸코의 사상이 어떤 사상이기에 오늘날 성소자들이 기를 펴고 시위도 하고 이제는 국가정책에 자기 의사를 반영하고 그 다음에 미국에서는 남자의 샤워 실과 여자의 샤워 실을 초등학교부터 없앴어요. 남성이 남성답다는 것은 나중에 여성으로서의 인권을 남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박해할 가능성이 많다. 어릴 때부터 차별을 없애면 동등한 인격을 가진 자로서의 이상적인 사회가 펼쳐진다. 거기에도 미셸 푸코의 사상이 다 녹아있습니다.
왜 오늘날 미셸 푸코의 사상을 좋아하느냐 하면, 이것 때문에 그래요. 시대적 단절성입니다. 이 말은 어른들, 기성세대를 따라갈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 시대는 그 시대고, 이 시대는 이 시대고. 전통이란 연속성을 가져야 전통인데 푸코의 사상을 접하는 순간 우리 세대의 인생은 우리가 알아서 꾸려나가면 되지 모범답안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어르신,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물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하는 대로 살면 그것이 우리 시대가 되니까. 더 나아가서 우리 시대에 갖고 있는 가치관을 어린 세대에 강요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거죠.
그런 것들이 전부 어디서 나왔는가? 미셸 푸코의 사상에서 나왔다고들 이야기해요. 푸코의 사상은 그런 사상이 아닌데도 푸코의 많은 책들 가운데서 자신들이 무질서하게 살아도 된다는 것을 옹호해주는, 무질서란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무질서는 항상 질서 있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무질서가 부정적 의미로 있잖아요. 질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무질서는 없고 이것만 있어요. 창조적 질서만 있는 거예요. 이걸 미셸 푸코는 ‘권력생산’이라 했습니다. 그 시대에 필요한 질서는 그 시대 사람이 만들면 된다는 거예요. 권력이죠.
그런데 하필 요즘 와서 인기 있는가에 대해선 미셸 푸코는 책임 없어요. 왜냐하면 옛날부터 그래왔거든요. 그럼 옛날 사람들은 왜 그걸 몰랐는가? 같은 인간인데 정신 바짝 차려서 요즘 사람처럼 자유분방하게 왜 못 살았는가? 양반이 어디 있고 상놈이 어디 있어. 조선시대 사람, 고려시대 사람은 왜 못했지요? 그 이유에 대해서 밝힙니다.
역사가 흐른다 하잖아요. 역사란 그 시대에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 임의로 자기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상체계를 정돈한 거예요. 자기 권력을 옹호하기 위해서. 군주면 군주, 왕이면 왕 모든 것을 새롭게, 이걸 재생산이라 하는데 다시 만든 거예요. 꾸민 거예요. 조작된 거죠. 역사란 그 시대에 단절돼있었는데 사람들은 단절되면 전통성이 없으면 왕의 자리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뭘 우깁니까?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미셸 푸코는 역사를 지워버리고 계보로 바꾸는 거예요. 계보학은 니체에서 나온 말인데요.
계보학과 역사의 차이는 뭐냐? 인간이 그 시대를 살면서 갖고 있는 자신의 몸, 자신의 신체가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분출하는 욕망이 있을 거란 말이죠. 인간은 그 시대마다 진리처럼, 푸코는 이걸 진리라 하지 않고 ‘지식’이라 한 거예요. 지식을 어떻게 그 당시 권력에서 만들어내느냐, 하는 겁니다. 지식이란 그 시대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민중들에게 분배해준 모든 진리체계를 푸코는 지식이라 한 겁니다. 에피스테메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패러다임이라 하는데, 패러다임은 그 시대에 필요한 인식의 틀이죠. 패러다임은 토마스 쿤이 이야기한 거고, 미셸 푸코는 에피스테메라고 이야기합니다.
역사가 아니고 계보학이라 하면 시간 의식이 소용이 없지요. 시간 의식이 없다는 말은 못해요. 인간은 시간 의식이 있으니까. 이게 별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즉흥적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올해 노벨문학상 받은 사람이 누구죠? 밥 딜런이죠. 그의 주장이 그겁니다. 역사라는 게 수상하다는 거예요. 역사를 자꾸 가르치는 배후에 누가 있다는 거예요. 누가 있겠어요? 미국 같은 경우에는 미국의 정치사가 있겠지요.
그래서 밥 딜런이 제일 먼저 반대한 것이 베트남 전쟁이잖아요. 전쟁을 반대하면서 나름대로 이슈가 히피였습니다. 누구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정주하지 않는 삶, 한 곳에 거주하지 않는 삶. 그건 뭐냐? 대지를 떠도는 삶이에요. 그것은 일종에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 반발이죠. 진리를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새롭게 생긴다. 그래서 바람한테 물으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잖아요. <Blowin’ In The Wind>가 그 사상을 담고 있어요. 이조차도 밥 딜런과 미셸 푸코가 관련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미셸 푸코에 대해서 옹호하고 사상에 동조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요. 그러나 푸코는 그 이야기하려고 사상을 펼친 게 아니에요. 미셸 푸코는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는 악마를 보았다.” 상당히 절망적이에요. 옛날에는 왕이 또는 대통령이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반항하고 싶은 대상이 있어요. 삐지면 욕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미셸 푸코는 이성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성은 미쳤다.” 이성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판단력입니다. 규격화, 합리적인 것, 이게 전부 다 이성이에요. 정돈된 것, 지저분하지 않은 것, 깔끔한 것, 계획적인 것, 규격화된 것을 해서 이성적으로 원칙을 만들고, 그 원칙대로 밀어붙여서 그 원칙이 원인이 되어서 예상한 합당한 결과물을 시간이 흐르면서 내놓게 되면 그걸 진보, 발달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럼 이성에서 나온 제일 중요한 게 데이터가 나오지요. 모든 인간을 데이터화 시키면 되는 거예요. 그 시발점을 미셸 푸코는 바로 형벌의 계보학을 통해서 그걸 증명해냅니다. 옛날에는 죄 지을 경우에만 벌을 내렸어요. 옛날이란 말은, 중세 지나서 르네상스에서 1789년 파리혁명까지를 고전주의 시대라 해요. 19세기는 근대, 20세기는 현대로 봅니다.
고전주의 시대에 나온 게, 곤충채집할 때 어떻게 합니까? 곤충을 잡아서 분류를 하잖아요. 처음으로 데카르트의 이성이 발달하게 되면 모든 게 분류하게 됩니다. 데이터를 정하게 돼요. 분류를 할 때 인간의 이성이 동원되지요.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어떤 대상을 볼 때 정리정돈을 한다는 말은, 인간 안에 감정이 앞서는 거예요, 이성이 앞서는 거예요? 내 안에 정리정돈 한 게 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바대로 가지런히 정돈하고 싶지요.
정리정돈하면서 나온 게 프랑스에서 문법이 체계화됩니다. 문법이 체계화된다는 것은 언어가 체계화되는 거예요. 언어가 체계화된다는 것은 나중에 태어난 아이들이 기성세대의 언어의 문법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언어체계를 갖추게 되면 계속해서 계보가 아니고 역사가 돼버리면 순종과 복종이 계속 이어집니다. 순종과 복종이 인간의 몸에 각인이 돼요. 이 몸은 습속, 또는 습관화됩니다. 습관화된 이것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진리체계가 돼버려요.
농경시대에 며느리가 시집오게 되면 시어머니가 부르잖아요. 농경시대란 말은, 힘을 합치지 아니하면 연대하지 아니하면 넓은 토지에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농경시대는 가부장 제도에요. 요즘은 산업시대기 때문에, “이번 명절엔 못 갑니다. 수출 클레임 걸려서 해결해야 돼요.” 이렇게 산업시대는 다양화되어 부모와 합체를 못해요. 같이 있을 수 없단 말이죠. 그러나 농경시대는 토지 생산물 아니면 살 수 없어요.
그런데 십자가운동이 벌어지면서 베네치아, 또는 이태리 남부 나폴리는 무역항이 발달했어요. 무역이 발달하게 되면 토지에서 나온 생산물로 사는 게 아니죠. 무역은 시간차, 시간을 따져서 이윤을 채택하는 거예요. 이윤이 축적되게 되면 단순히 돈이 되는 게 아니에요. 자본이 돼요. 금융자본주의가 되게 되면 옛날에는 노동해서 얻는 생산이 나오는데 이건 시간에 따라서 돈 놓고 돈 먹기가 되겠지요. 있는 돈을 빌려주는 게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돈 있어서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건 옛날부터 있었어요. 자본주의는 돈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려와서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주되 거기에 대한 이윤을 붙여서 돈의 가치를 늘이는 것이 자본주의에요. 돈 놓고 돈 먹기에요.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그때부터 전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성적인 계산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리하면 토지에서 나온 것으로 생산을 얻던 것이 이제는 이성적인 머리를 쓰는 자가 권력을 갖게 되는, 그게 입헌민주주의의 시작입니다. 국회 중심, 상공인 중심으로 하면서 이제는 토지와 관계없이 이성적인 계산에 의해서 부를 획득하고 생산물을 획득한 사람들이 권력층에 합류가 됩니다. 거기서 나온 문화가 바로크문화, 로코코문화가 되는 거예요. 귀족들의 누리는 모든 스타일에 합류하는 겁니다.
여기서 기본적으로 재산이 문제니까 재산이 많아서 협상하지 않으면, 15~17세기 계속해서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전쟁은 용병을 모을 수 있는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는데 돈이 있어야 영토 확장에 나설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영토 확장하게 되면 백성들이 나오겠지요. 백성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분류체계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17세기입니다. 미셸 푸코는 17세기 이념과 18세기 이념에서 단절이 일어났다고 보거든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상당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전에 단절을 이해하려면 17세기 때 인간들이 이성적으로 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라는 겁니다.
이걸 토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고 몸에 지식이 입력되는 거예요. 이성적 지식이 몸에 입력되는 거예요. 토지 때는 자연스럽게 살면 돼요. 미셸 푸코의 책 중에 [성의 역사]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성에 대해서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너무 과도하지 않으면 모든 게 용납돼요. 동성애도 뭐도 괜찮아요. 그런데 그것이 근대에 들어와서는 이 성에 대해서 강력한 제재가 가해집니다. 함부로 성에 대해서 남발하는 것을 국가적으로 차단시켜버려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거예요. 성에 대해서 지저분하고 더럽고 추잡한 것이지. 그게 바로 우리가 인습화된 거예요. 이걸 푸코가, 내가 악마를 보았다는 겁니다. 악마가 바깥에 있으면 공격할 수 있어요. 이걸 전술, 전략이라 해요. 미셸 푸코가 표현하기를 권력의 전략이 뭐냐 하면, 바깥에 있는 공격하는 권력을 우리 안에 내재화, 자율화 시켜버려요. 그러면 알아서 긴다니까. 내가 알아서 스스로 이러면 나빠, 이러면 좋은 거야, 라고 권력이 나온 지식을 장착해버려요.
유명한 철학자들이 용어를 자꾸 만들어내기 때문에 용어 설명하는데 시간이 많이 가는데 어차피 그 용어를 쓸 수밖에 없어요. discourse라 해서 ‘담론의 공간’이라 합니다. 담론의 공간이란 은연중에 무슨 뜻을 갖고 있느냐 하면, 조직화돼있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이걸 언표라 해요. 언표란 단어도 상당히 낯선 단어고, 담론은 요즘 와서 좀 써요. 담론이란 말과 대화란 말이 달라요. 만들어진 토양이 달라요. 담론은 미셸 푸코가 처음 이야기한 거예요.
담론은 개개인은 평등한데 새롭게 모여서 새로운 지식체계를 창조해볼까, 이게 담론의 공간이에요. 그러면 담론의 공간 이전에 언표의 공간은 어떤 뉘앙스가 있냐 하면, 언표와 담론을 연결시키면, 네가 임시적으로 만든 지식으로 언표 수준에 있는 나를 함부로 질책하지 말라는 자유 인권성이 강렬해요. 이게 대화와 다릅니다. 대화는 네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을 우리가 지혜를 모아보자면 대화, 소통이 되지만, 담론이란 네가 무슨 지식이 있든지 간에 너는 물을 권리가 없다는 것을 강요합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언표 수준을 미셸 푸코는 존재라 합니다. 담론 수준으로 보면 유명한 푸코의 주체가 나와요. 언표의 존재의 차원과 주체의 차원이 달라요. 여기서 이만큼 무질서한 존재의 차원에서 담론의 차원의 주체가 조직화됩니다. 여기서 고백이 일어나요. 이것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시간이 많이 가지만 해봅시다.
이 고백은 옛날 수도원에서 자기들끼리 유폐된 그물망에서 했던 그때 누구한데 고백했어요? 수도사는 수도원장에게 수도원장은 신에게 각자 고백했지요. 고백이란 이런 뜻이에요. 언표의 주체와 언표 행위의 주체가 달라요. 언표의 주체는 예를 들면, “나는 밥을 먹는다.” 그런데 “밥을 먹는 그 자가 나다.” 할 때는 똑같은 내용을 보여주지만 나라고 고백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내뱉는 거예요. 이건 타인을 호출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체란 유폐된 그물망에서 호명당할 때 내가 이전에 미처 몰랐던 주체가 생산되는 거예요. 백수일 때는 몰라요. 그러나 회사에 취직이 되면 그 다음부터 그 권력의 그물망에서 나는 신입사원이 되는 겁니다. 새로운 주체를 부여받아요. 그런데 거기서 잘렸다. 그 주체는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주체는 뭘 염두에 두고 이해되느냐 하면, 자아는 아니란 말이죠. 자아는 홀로 있을 때지만 주체는 사회적으로 나왔을 때 유폐적 그물망이거든요. 나는 악마를 본 거예요. 어떤 인간도 이성적 악마의 그물에서 벗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상당히 암울한 세상을 이야기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아이고, 인간아 이렇게 됐어? 그 똑똑한 인간의 이성이 보편화되니까 인간은 자기 이성의 전략에 전술에 스스로 늪에 빠져서 해결책이 없습니다.
미셸 푸코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아요. 해결책이 없어요. 이건 지난 시간에 한 들뢰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달아나는 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달아나봐야 1차원적으로 옆에서 옆으로 순환되어 달아날 뿐이지 달아날 다른 장소는 아무도 누가 제시해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미셸 푸코의 사상을 제대로 모르고 푸코가 동성애 옹호하고 그러니까 미셸 푸코의 시대가 돌아왔다. 이건 들뢰즈가 한 이야기인데, 아니지 미셸 푸코가 들뢰즈에 대해서 앞으로 들뢰즈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해서 미셸 푸코가 들뢰즈의 영향을 받았다 것을 고백했는데 니체, 하이데거 서로 영향 다 받고 있어요.
언표란 주체가 무질서한 것이 조직화되고 담론이 되는데 여기에 인간의 이성이 주어졌고, 인간이 토지 중심으로 살다가 몸이죠. 무슨 몸? 몸은 무역을 하니까 배 타고 왔다 갔다 하니까 땅에 안 매이지요. 농경시대 이야기했지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장소에 사는 게 아니고. 왔다 갔다 하니까 새로운 권력을 생산할 수밖에 없어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촌의 엄마 말 들을 이유가 없잖아요.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지식을 두 사람이 이성적으로 권력체가 만났으면 몸에 각인된 권력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17세기와 18세기가 다르다고 이야기했어요. 지금까지는 서론이고 이제 본론에 들어갑니다. 17세기는 군주의 몸이라 했어요. 몸이라고 같은 몸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미앵이란 사람이 군주한테 대들다 참수당한 대목이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상세하게 나와 있어요.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형벌을 받는데 18세기부터는 죄 지을까봐 이성적으로 사전에 조치에 들어갑니다. 예방조치로. 그게 이성적으로 효율적이기 때문에. 차가 박았을 때 벌금 물고 교도소에 몇 달 가 있으라. 이것과 국가에서 과속하기 전에 예방조치로 ‘시속 60’이란 표지판을 달아버려요. 그러면 70을 달리면 사고 나지 않더라도 거기에 합당한 벌금을 물게 돼있습니다. 이게 오늘날이잖아요.
죄를 짓고 형벌 받는 것이 아니고 죄 지을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사전에 법을 내재화해서 스스로 알아서 기도록 그렇게 폐쇄적인 그물망으로 인간 전체를 덮어버린 거예요. 옛날에는 눈에 안 띠면 마음대로 해도 됐는데 이제는 내 안에 있는 법을 내가 늘 의식하게 돼요. 알아서 조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듣는 사람들이, “그게 정상이잖아요.” 하는데 미셸 푸코는, 그래서 너희들이 악마라는 거예요. 스스로 악마가 돼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악마가 만든 전략에서 너희 몸은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거예요. 이미 몸에 각인돼있으니까.
옛날에 성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허용이 됐어요. 르네상스 이후에 군주의 몸, 신하의 몸, 백성의 몸이 따로 있어요. 그러면 군주가 자기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지식을 준다 했지요. 지식이 뭐냐 하면, 나는 첩을 두어도 너희는 안 된다고 나와요. 이게 바로 고려시대잖아요. 조선시대고. 몸이라고 같은 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거역하면 어떻게 되느냐? 거역할 때는 몸에 직접 처형합니다. 그래서 다미앵은 공개처형했어요. 그것도 빨리 죽으면 안 되니까 찧고 질질 끌고 그러다 때리는 사람이 지치고. 조선시대나 중국에도 그랬지만 말로 사지를 찧는다든지 해서 사람들에게 몸이라도 다른 몸이 있다고 군주가 자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몸에 한 거예요.
1789년에 왕이 쫓겨나요. 그리고 인권이 나옵니다. 평등, 자유, 박애라는 미국독립운동의 이슈를 프랑스혁명이 그대로 받아서 이 세 가지 모토로, 이미 자본주의시대로 접어들었으니까 모든 인류는 평등하고 모든 인권은 신으로부터 나와서 어느 누구도 누굴 지배할 수 없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뭐냐 하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진리는 뭐냐? 숫자로 하자. 민주주의의 가장 모토는 다수결이에요. 마태복음 7장과는 다르죠. 많은 자가 찾는 건 멸망의 길로 가죠. 그러나 민주주의는 그게 아닙니다. 다수가 진리 쪽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사는 세계는 인간의 이성으로 결정하는 것이지 어떤 외부의 도움도 여기에 관여하지 말라는 거예요.
미국의 헌법이나 한국의 헌법이나 그 사람의 인종, 민족, 종교, 양심에 비춰 어떤 차별도 둘 수 없는 거예요. 동성애 부부라 해서 부부 아니라고 할 권한이 헌법 자체가 관여하지 못하게 돼있어요. 존 로크는 이걸 천부인권설을 주장하면서 인권은 하늘이 주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을 다른 인간이 못 건드린다. 그럼 그 법은 어디 있느냐? 그건 계약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사회계약설이에요.
미셸 푸코는 묻습니다. 사회계약설을 누굴 상대로 했느냐? 우린 사람 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언제 수 천 만이 사인했습니까? 한 적 없지요. 주민 등록할 계약한 적 있어요? 없어요. 사회계약설은 빈 말입니다. 그럼 뭐냐? 이게 규율인데 계약은 누구와 했느냐? 한 사람 없어요. 규율을 복종할까, 말까는 내가 결정해야지 누가 결정한 적 없습니다. 왜? 규율은 내재화됐기 때문에.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권력이 규율로 내재화한 걸 미셸 푸코는 전략 또는 전술이라고 한 겁니다. 이게 푸코의 뛰어난 점이에요.
분명히 우리는 각자 인간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것은 각자 이성을 존중한다는 거거든요. 자신의 주장을 존중해준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계약대로 했다는 것은 그건 어디까지나 일어난 결과에 대한 핑계에 불과하고 그런 계약을 하고 그런 규율을 옹호하고 복종하고자 한 결정을 언제 했느냐 말이죠. 없지요.
미셸 푸코는 바로 그 점을 파헤치고자 한 거예요. 그래서 그걸 주체의 분열이라 합니다. 권력이란 악마가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고 그 안에 주체는 분열됐는데 어떻게 분열되느냐? 1인2역. 내가 나를 보고 남을 감시하고 서로가 서로를 보고 감시하는 1인2역을 하게끔 규율이 내재화되어서 자발적으로 이게 옳다, 이게 맞는다는 식으로 거기에 맞춤 인간이 되고 이런 악마적 전술을 덮기 위해서 이걸 뭐라고 이야기했냐 하면, 인권이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이성은 미쳤다는 거예요. 미쳤는데 그걸 정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럼 이걸 자꾸 미쳤다고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라 다른 방식은 없느냐고 묻고 싶지요. 인권 옹호가 미쳤다면 다른 방법을 제시해보라고 묻는다면, 다른 방법은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권력에 갇혀있기 때문에. 이게 미셸 푸코의 사상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비겁한지 새로운 것에 벗어날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것을 마치 새롭다고 자기한테 계속해서 최면을 거는 거예요.
신혼이니까 행복하지요? 행복한 걸 누구한테 점검받았어요? 행복하냐고 누구한테 물어본 적 있어요? 없지요. 자율적으로 내부적으로 행복하지요. 그것은 미셸 푸코에 의하면 행복해야 된다는 그것이 나를 강요하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우긴다. 신혼은 행복해야 돼. 이렇게 행복해도 돼? 이 행복이 끊어질까 걱정돼, 라고 하는 식으로 똑똑한 이성이 나를 합리화시키는 겁니다. 이성은 합리화입니다. 무조건. 그 다음부터 이 행복이 깨어질까 똑똑한 이성이 또 생각해요. 그래서 행복하면서도 불안해. 여보, 오래 가자. 죽을 때까지. 누가 건드리지 않았어요. 내부적으로. 이성 속에는 시간 의식이 있거든요. 언제까지 갈지 계산하고 있는 겁니다.
계속 나가 봅시다. 아직도 초반인데, 주체가 되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결국 내가 남을 감시하고 내가 남한테 감시받는 사람 되고. 각자 배우지요. 이게 주체라 했지요. 인간은 몸이 있으면 자아가 있지 주체는 없어요. 내가 타인의 시선을 응시하는 순간 우리는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권력에 잠식되어 살아간다는 것이고 우리는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담론의 공간에서 회자되는 그 지식체계에 우리가 편승해줘야 오늘날 인간으로서 대우받는다는 것, 남들이 인정해준다는 그것이 습속화, 습관화되어 살아간다는 거예요.
이 주체의 분석에서 제러미 벤담이란 사람이 있어요. 공리주의의 시초인데 그 사람의 주장이 뭐냐 하면, 파놉티콘, 일망조망방식, 감옥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한쪽이 있고 주변에 감옥이 있어요. 여기는 통제하는 곳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다 볼 수 있으나 저쪽에서는 이쪽이 안 보이도록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일망감시방식이 근대적 방식인데 이 권력이 우리 이성 속에 내재화돼있는 거예요.
우리가 스트레스 받거나 할 때 어떤 프로그램이 제일 재미있느냐 하면, 예능프로. 같은 예능프로라도 일반인이 나오면 재미없어. 연예인들이 나와야 돼요. 가수의 일상 이야기, 정치 이야기. 우리가 보는 이상 뭘 감시한다? 천만 원 현상금 걸린 우병우는 어디 갔을까? 우병우 찾고 최순실 이야기하고. 이게 일망감시방식이란 이성적 합리적 체제가 남을 훔쳐보고 또는 서로가 감시하고 주시하는 방식이 우리 안에 내재돼있는 겁니다.
내재돼있는 방식이 어디서 나왔는지 미셸 푸코는 17세기에 벨라스케스라는 화가가 그린 <시녀들>이란 그림으로 설명해줍니다. 그 그림에 큰 캔버스의 뒷면이 나와 있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뒤에 거울이 있는데 왕과 왕비의 희미한 모습이 있고. 밝게 보이는 데는 신하가 있고. 그 앞에 난쟁이들과 시녀들이 있는 그림.
여기서 미셸 푸코가 뭘 묻느냐 하면, 이 그림을 보는 관람자는 어디 있느냐고 물어요. 화가가 그림 안에 들어있음으로 말미암아 모델이 왕과 왕비인데 거울에 비춰 보이고 왕과 왕비를 그리는 척하지만 화가는 무엇까지 수용하느냐 하면, 이 그림을 그리고 난 뒤에 관람객들이 보게 될 그 사람들까지 의식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예요.
결국 17세기 이후에 모든 언표, 모든 담론은 서로가 서로를 보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본다는 말은, 언어가 사물과 일대일 대칭되는 게 아니고 비가시적 영역까지 포함해서 공명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층까지도 서로 소통하고 울리는 거죠. 보이지 않는 곳에도 충분히 울리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주인공도 아니고 누가 대상도 아니고 대상과 주인공이 서로 공명하는 그 사이에 담론이 형성되고 언표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갇혀있는 셈이에요. 남들이 말하는 생산된 지식체계로 담론 바깥에 있는 우리까지 지시하고 요구할 수 있는 요구하는 정도가 아니고 의당 그래야 된다는 식으로 권력체제가 내 내부에 이성이란 이름으로 장착될 때 우리는 인권적인 존재로서 남한테 인정받게 돼요. 그런 시대에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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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3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8-푸코
(강의:이근호 목사)
18세기에 들어와서 예방차원에서 새로운 법이 주어지는데 그걸 규율이라고 했지요. 규율은 미리 조작하고 인간을 조정하는 거예요. 조정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법과 의학을 플러스 시킵니다. 옛날에 광인이란 미친 사람이죠. 새로운 것을 말하는 사람을 광인이라 했어요. 그래서 광인에 대해선 그냥 방치했어요. 유명한 광인이 있지요. 세르반테스가 지은 [돈키호테]잖아요. 풍차한테 덤벼들고 그러잖아요. 조수는 또 뭡니까? 같이 죽이 잘 맞아.
중세 때 신의 계시란 우연적, 우발적이에요.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밖에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을 통해서 주의 감추어진 비밀을 알려주시는 것에 대해서 기다리겠습니다. 이런 겸손한 태도였어요. 그러나 근세에 들어오면 그게 없어요. 모든 것을 규율화 시켜서 내재화하면 광인은 감금해야 됩니다.
감금은 수도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감금하는 겁니다. 감금해서 의사가 법적인 권한으로 죄 지은 자도 아닌데 처벌 받을 자에게만 필요한 감금조치를 내립니다. “이 정신병, 3년 있어야 됩니다. 강제로 해야 됩니다.” 감금이 감옥, 병영, 학교 등으로 확대돼요. 그리고 공장. 이렇게 확대되면서 권력이 내재화, 보편화합니다.
순서가 첫째, 배분의 기술이에요. 이건 각자 각자에 폐쇄된 공간을 부여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결혼 안/못 하고 어디로 갑니까? 고시원 등으로 자진해서 폐쇄된 공간을 찾아가죠. 그 폐쇄된 공간에서 스마트폰 쓰고 인터넷 하고 있지요. 자기만의 새로운 폐쇄된 공간을 마련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자발적이고 자율적입니까? 자율적 권력이 주체화되는 세계, 이게 바로 나는 악마를 보았다는 거죠. 악마가 다른 게 아니에요.
옛날에 죄진 사람들 가둔 것을 이제는 본인이 알아서 결정해놓고 이걸 내가 결정했다는 조그마한 어떤 자부심을 갖게 하는 거예요. 나는 알아서 취직 안 했어, 이런 식으로 비겁한 변명들을 늘어놓는 거예요.
배분의 기술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두 번째, 활동의 통제. 활동을 통제할 때 여기게 동원되는 것이 시간표입니다. 학교, 병영, 병원, 감옥, 공장 이런 데에 시간표가 동원돼요. 학원은 몇 시까지 갔다 와야 되고, 철저하게 통제하게 되면 규격화돼요.
첫째와 두 번째의 차이점은, 배분의 기술은 곤충채집하는 것처럼 밀폐된 공간에 집어넣어 격리시키는 겁니다. 요즘은 자발적으로 감금되기를 원하지만. 얼마나 내재화돼있으면 감금되겠어요. 남과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 누가 찾아오는 것도 귀찮아.
활동의 통제, 그러니까 이건 학교, 군대, 감옥, 공장 어떤 곳이라도 예외 없이 전부 동일하게 돼가는 거예요. 옛날에 수도원은 자발적으로 했는데 모든 것이 규율화 돼있습니다. 누가 사회계약서 필요 없이 알아서 전부 다 스스로 시간표 따라 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시간표 없으면 하루 일 안 한 것 같아.
공장이나 회사에서 출근도장 찍지요. 이게 우리 20대만 해도 굉장히 인격모독이었어요. 감시 받는다는 느낌 드는 거였어요. 지금은 보편화 됐어요. 당연히 그래야 되는 거예요. 경찰공무원도 수당 더 받으려고 퇴근하고 난 뒤에 다시 경찰서로 가서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수당 더 챙기고. 미셸 푸코는 이 정도면 몸이라 하지 않아요. 기계라 합니다. 이건 들뢰즈에서 나온 거죠.
세 번째는 발생과정의 조직화, 이것은 나중에 시험을 쳐요. 시험을 친다는 것은 서열을 매긴다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등질화에요. 동일한 질로 모든 인간은 질적으로 동일해요. 시험 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맞는 시험문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은 시험문제인데 몇 개 더 맞추느냐는 거잖아요.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네가 얼마나 맞추느냐는 겁니다. 10개 맞췄다, 5개 맞췄다는 것은 두 사람의 차이는 양의 차이지 똑같은 질을 요구받고 있는 그 사회에서 주체로 행세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주체로 보지 않아요.
사회는 인간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기계가 필요해요. 기계란 부품이거든요. 부품을 갈아 끼우기가 용이해야 돼요. 일 못하면 잘리고 그 자리에 적합한 다른 사람을 신속하게 집어넣어야 돼요. 철도공사 파업한다면, 월급 많이 받는 사람들 빨리 빼내고 신참들, 아르바이트, 계약직으로 시간표 따라서 해내면 결과물 나오잖아요. 그러면 됐지, 뭐. 그러면 회사 돌아가는 거지.
그게 진리는 아니고 지식이 되는 겁니다.
네 번째가 힘들의 합성, 이걸 연대로 해요. 이것은 이제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선 필요한 것을 하지만 그 일뿐만 아니고 내가 못하는 일, 예를 들어서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컴퓨터 전문가 따로 있고, 판매하는 전문가가 따로 있다면 어떤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를 판매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짝을 이룰 때 기계와 기계끼리 부품을 조립하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게 힘들의 연대에요.
여기에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그냥 힘의 덩어리에요. 할 수 있는 재주의 덩어리일 뿐이란 말이죠. 힘들의 연대로 이 사회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권력자는 어디에도 없어요. 전부 보편적으로, 눈이 오면 온 사방에 펴져있지요. 옛날엔 권력이 위에서 오는데 지금은 오는 게 아니에요. 퍼져있어요. 새로 출생한 아이는 기존에 퍼져있는 힘의 권력, 지식의 연대성에 부합되도록 새롭게 양육해야 되지요. 어떤 순서로? 빨리 네 방에서 공부 해. 벌써 감금이죠. 벌써 나와? 컴퓨터 하는지 볼 거야.
미셸 푸코는 이것을 가정에서 키우기 때문에 가정에서 성교육부터 해서 철저하게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왜 성에 대해서 함부로 남발해서는 안 되느냐 하면, 가정에서 산업역군, 산업예비군을 만들어야 돼요. 따라서 이에 필요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 같은 것은 자제돼야 돼요.
가정교육이 심화된 것, 바로 19세기 영국문화가 철저한 청교도문화잖아요. 청교도문화라고 하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영국은 기독교문화가 되어 사람 사는 것처럼 윤리, 도덕이 있었다고 낭만적으로 생각했는데 미셸 푸코는 그렇게 보지 않고 그 시대에 맞춤 산업역군을 옛날에는 국가에서 담당했는데 이제는 가정에서 담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거기서 나온 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거예요. 정신분석이란 사실은 이런 미셸 푸코의 권력체계에 의하면 하나의 결과물에 불과한 거예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어머니와 라이벌 관계에 있지 않으면 인간은 독립할 수 있는 준비가 안 됐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는데 하나가 안 되느냐 말이죠.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내가 태어나는 이유가 뭐냐? 옛날 생물학에선 그거야 자연스런 이치 아니냐고 하잖아요. 자연스런 이치가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면, 인간의 이성이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서 의미를 투여해요. 그러면 언표 수준에서 담론 수준이 된다고. 담론 수준, 조직화 되면서 존재에서 주체가 나오고 주체의 모임이 현 사회를 구성하는 겁니다. 우리가 조직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내부에 장착돼있어요. 알아서 긴다니까요.
권력이 내재화되어 돌아가는데 여기서 미셸 푸코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아요. 거기서 더 나갑니다. 지금 이야기는 권력과 인민들 이야기죠. 백성 속에 내재돼있는 권력, 특히 18,9세기에 들어와서 이 세상이 이성적으로 규격화되지 아니하면, 규격화는 자본주의의 발달이죠. 규격화 되지 아니하면 이걸 광인으로 봤죠. 미친놈은 따로, 이건 처벌하는 게 아니고, 치료대상이에요. 치료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요. 노동을 한다든지. 네가 이 사회가 요구하는 규격화 되려면 너는 노동해야 돼. 놀면서 밥 먹을 생각하지 마. 그래야 이 사회에 합당해. 치료를 빌미로 한 처벌이 되는 겁니다.
군대를 왜 싫어합니까? 독자적인 자아상을 인정 안 해줘요. 그러면 내가 날아가 벌여요. 그동안 내가 공들여서 영어 배우려고 학원 다니고 뭘 하는 것은 자기 잘되기 위해서 한 거잖아요. 그동안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노동을 하고 계획을 세웠는데 내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맨날 있던 곳이 집이죠. 엄마와 나, 그러니까 이 관계
그래서 미셸 푸코가 말하기를 언어란 지시대상도 아니고 지시되는 관계까지 표시한다고 했는데, 이 관계, 아까 이야기한 <시녀들>에서 보이지 않는 관계, 미셸 푸코가 얼마나 예리한지 보세요. “물을 주세요.” 할 때 물 주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냥 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먹던 그 물을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공들인 그 물을 주세요.” 물을 먹고 싶은 게 아니에요. 물이 오기까지 긴긴 계보학적 과정을 묻고 싶은 거예요. 목이 마른 게 아니고 목이 마른 내가 말라. 그때 그 물. 이 물을 볼 때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남녀가 사귀면서 아무 카페나 가지 않습니다. 푸른 의자 있던 카페에 가보자. 거기 가면 바이러스가 적고 그런 거예요? 아니에요. 인간은 나와 관련되었던 얽혔던 걸 끊어버리면 외로워서 자살합니다. 사람이 밥 못 먹어서 자살하는 게 아니고 외로워서 자살하거든요. 왜 외롭습니까? 얽히고설킨 관계가 많아서 그래요. 혼자 태어나서 혼자 살았으면 외롭지 않아요.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정 주고 정 받았거든요. 1인2역. 그는 나를 주시하고 그 주시에 맞추어서 나를 변경시켰고 변형시켜 왔어요. 그들이 요구하는 내가 됐는데 나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던 그가 죽었다. 난 못 산다. 세포는 단백질, 지방이면 살아요. 그런데 자기는 못 산다는 거예요. 자살하기 직전에 밥 먹어요. 희한해요.
그래서 철학자들이 볼 때 과학은 바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과학과 아무 상관없어요. 뭔가 덮어쓴 귀신 있잖아요. 푸코는 이걸 권력이라 하는데 자아라고 형성된 얽히고설킨 권력에 놀아나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 중요한 게 남았어요. 권력이 내재화되어 알아서 했는데 여기에 20세기에 와서 경제가 끼어들었다는 겁니다. 경제는 정치와 라이벌이에요. 전에는 정치 밑에 경제가 있었어요. 정치는 권력게임이거든요. 정치란 내 주체의 대리행위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대신 보여주는 게 정치에요. 내 주체의 열망, 또는 소망을 대신 보여주는 것을 정치가 해야 될 겁니다. 눈 내리는 게 바로 실재입니다. 실재는 인간들끼리 합니다. 인간은 실재로 사는 게 아니에요. 추상으로 관념으로 산단 말이죠. 이것을 통합할 수 있는 관념을 정치라는 것으로 반영해 줄 때 인간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습니다.
집안 아버지는 팔십 넘어서 아무 일도 하는 게 없어요. 왠지 아버지 계시고 어머니 계시면 고향에 가고 싶어요.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시면 고향 가고 싶습니까? 형제고 친척이고 끝났어요. 제사가 왜 있습니까? 상징적인 안정감을 제공해요. 제삿밥 먹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닙니다. 왠지 나의 원천을 다시 경험한다는 것, 접촉한다는 것, 옛날 이야기하면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해요.
그런데 기본적인 추상적인 단일화, 다음 시간엔 알랭 바디우를 하겠습니다. 알랭 바디우는 이걸 일자라고 했는데 일종의 신이죠. 추상적인 돌출에 의해서 구상된, 상상해서 생긴단 말이죠. 정치란 대리행위인데 정치가 흔들리면 대중들이 흔들리는 겁니다. 그동안 이걸 옳다고 했는데 미셸 푸코는 여기에 뭘 집어넣느냐? 경제가 차고 들어왔어요. 정치 위에 경제가 있어서 정치는 추상적이지만 경제는 실재적이에요. 이번 대통령 바뀌고 내 수입이 얼마나 늘어났는가? 이게 실질적이에요.
그렇다면 정치는 경제에 밀리게 되었어요. 여기서 나온 경제논리가 신자유주의입니다. 로직이란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가 주장한 거죠. 모든 관세장벽을 철폐해버리고 전 세계를 단일시장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것에 도움 준 게 인터넷이에요. 지금 미셸 푸코는 현재까지 내다보고 있습니다. 전체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면 모든 장벽을 없애버려요. 그러면 국가와 국가는 경제적 칸막이가 아니고 정치적 칸막이죠.
나라가 못 사는데 미쳤다고 그 나라에 삽니까? 특히 부모들은 자식을 생각할 때 이런 나라를 자식한테 보여주기 싫단 말이죠. 그럼 어디로 가야 돼요? 캐나다, 뉴질랜드, 미국, 호주로 그것도 잘사는 나라로 가든지 해야지요. 빼돌리는 겁니다. 그 나가 가거든 오지 마라. 올 필요 없어. 왜? 경제는 실재적이고 정치는 추상적이잖아요. 정말 이상적인 큰 바위 얼굴 같은 훌륭한 사람이 대통령 되면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낄 텐데 이놈이 되던 저놈이 되던 맨날 싸울 것 같으면 그런 것 쳐다보면서 행복을 느낄 이유가 없어요. 그저 수입만 늘면 되지요.
그래서 미셸 푸코는 말합니다. 현대국가에서는 경제적으로 이익이 얼마인지로 모든 이성이 그쪽으로 예민하게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가 아니고 시민사회의 등장이죠. 이 변화에 대해서 미셸 푸코는, 옛날에는 폴리스란 말이 정치적인 전반을 가리켰는데 그런데 19, 20세기에 들어오면 폴리스란 말이 제한적, 국소적으로 쓰입니다. 경찰에게만 쓰죠. 단어가 바뀐다는 말은 정치권력에 대한 관심의 성격이 바뀐 거예요. 무엇 때문에? 신자유주의 경제논리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가 되게 되면 여기서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전에는 내 몸이 있고 몸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잖아요. 그런데 시민사회가 되면 바뀌어요. 이익을 위해서 몸이 희생하더라도 내가 소원하는 이익만 있다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벌써 우리의 질이 정치적인 권력 질이 아니고 경제적인 아이템으로 우리 성질이 바뀐 거예요.
재벌한테 “밥 먹고 사는데 왜 일하십니까?” 하면, 돈 벌기 위해서 일한다는 거예요. 돈 벌면 뭐 합니까? 돈 버는 그걸 위해서 일해요. 돈 버는 행위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는 거예요. 부자들 특징이에요. 가정주부는 어떻습니까? 보통 가정에 충실한 것
아까 [성의 역사]에서 빠진 게 있는데 18, 19세기로 넘어오면서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이 구분됩니다. 남자는 바람을 피워도 되지만 여자는 가정에 충실함으로써 그 시대는 가정주부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거예요. 말 잘 들어야 돼요. 여자는 바람을 피우면 안 돼요. 왜? 여자는 욕구를 자제할 수 없는 자연친화적이기 때문에 주체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자는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거예요. 남자는 바람을 피워도 적당하게 서너 명 정도, 능력 되면 일곱 명도 할 수 있는데 여자는 단 한 명이라도 빠지기 때문에 절대로 바람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 쪽에서 손해 아니냐고 나올 거죠. 그런데 그 시대 권력의 지식이 뭐냐 하면, 살림을 잘 하는 여자를 바람피우는 여자보다 더 위대한 명예를 줘버렸어요. 세상에 자식 교육 잘 시키고 한 남편 잘 섬기니 최고야. 아주 덕스러운 여자라고 해서 바람피움으로 말미암아 남성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휘했던 그 남자도 정숙하고 살림만 사는 여자 앞에서 명예에 있어서 기가 죽을 정도로 그만큼 사회가 정숙한 여자를 옹호했던 시대에요. 그래서 성의 질서가 그나마 유지가 됐던 겁니다.
그러면 결국 가정이 단단해야 된다는 거예요. 권력의 네 가지를 위해서 그에 필요한 인재를 여자가 자식을 단단히 잡아줘야 국가발전과 정치발전과 진보에 필요한 인재들이 나온다. 그것 때문에 가정에서 교육을 심하게 시킨 거예요. 거기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나오고, 그게 오늘날 현대인의 자의식이 된다고 이야기했단 말이요.
그런데 지금은 경제논리가 들어오지요. 경제논리는 그야말로 미친 것 중에서 더 미쳤어. 사람은 경제가 없을 때는 가정 행복, 나의 행복이 우선이잖아요. 그런데 돈의 세계, 자본의 세계는 돈에 끌려 다니는 그 자체가 아니면 행복하지 않아요. 20대나 30대 초반이 남자들이 새로운 차에 로망이 있지요. 그러면 어느 정도면 만족합니까? 그런데 만족이라는 게 있을 수 없는 게 정치라면 어느 정도 만족이 되는데 경제는 새로운 이익을 계속 창출하잖아요.
옛날 경제는 필요한 걸 생산하고 소비하면 그만이잖아요. 지금은 소비욕구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생산하는 거예요. 광고를 해서 없는 소비를 만들어서 그들이 새 차 내라고 요구하게 만들어요. 경쟁적으로. 이것은 고정된 이익이 아니고 움직이는 이익, 계속해서 변화하는 이익, 그 변화에 동승하지 아니하면 한 순간도 우리는 새로운 자극적인 쾌감, 희열과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늘 드는 예지만 촌에서 동네 순이가 예뻤다. 교회에서 낡은 오르간 치는 그 순이가 제일 예뻤고 동네 총각들도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이 났잖아요. 갑돌이 갑순이 노래가 그 내용 아닙니까. 그런데 서울 압구정에 취직했다. 그러다 명절에 촌에 가서 순이 보니까 이건 여자도 아니죠. “내가 미쳤지. 저런 인물을 좋아했어. 참 내가 우물 안에 개구리였구나.”라고 하죠. 이게 뭐예요? 그 동네에 있을 때는 자기에게 내재된 권력체제가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장소가 바뀌니까 똑같은 눈을 가졌는데 주위 환경이 바뀌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장소가 주체를 생산합니다. 다른 말로 장소가 주체를 또는 권력을 생산합니다. 정치라면 니 나라, 내 나라가 있지만 지금은 칸막이 없어졌어요. 장소가 뭐냐 하면, 돈이 흐르는 장소에요. 자본의 시장이라니까요. 월급 더 주는 회사로 스카우트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돈 더 주면 대번에 옮겨버려요. 장소 자체가 머물지 않아요. 장소가 주체를 만드니까 주체도 고정적이 아닙니다. “당신만 있으면 족해.” 신혼 땐 다 그래.
제가 얼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제가 주례하면 이렇게 한다고 했는데. 당신을 사랑하면 안 돼요. 상대방 속에 있는 새로운 면을 사랑해야 돼요. 너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만 날마다 새로운 면이 나올 때만 계속해서 사랑하고 싶어. 또 기대가 되니까. 당신에게 이런 면이, 놀라워라. 3년 전이나 5년 전이나 맨 그 모양 그대로라면 지겨워. 지겨우면 재미가 없어. 재미가 없으면 내 욕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어. 내 욕구는 경제적인 흐르는 주체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해서 새로운 유머와 아이템을 개발해야 되고 계속해서 웃겨야 되고 새로운 면을 계속 보일 때 상대방은, “우리 부부는 왜 이렇게 행복한지 모르겠어?”
지금은 새로운 면이 없어도 왜 좋으냐? 아직까지 다 안 더듬었거든. 구석구석 다 수색을 안 했어. 상대방의 영토를 다 조사를 못했어. 그것 끝나고 나면, 내가 아는 것 말고 다른 것 내놔라. 그래서 먼저 결혼한 친구들이, 혼자 사는 게 낫다고 하는 이야기가, 신혼 때는 절대로 그런 소리 안 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새로운 면을 기대했는데 유머도 옛날 아재 개그고 이제는 새로운 게 안 나오니까 시시해요.
여러분, 집에 가구를 왜 바꿉니까? 가구를 바꾸면 분위기가 쇄신 되지요. 그 바람에 한 달은 신선하지요. 남자들이 왜 자구 바람피우려고 들썩거리느냐 하면, 바로 새로운 걸 찾고자 하는 남자의 근성이라 하는데 근성이 아니고 19세기에 형성된 권력의 지식입니다. 역사가 아니고 계보에요. 그리고 남자는 그것에서 못 벗어납니다. 내재화돼있기 때문에.
우리 모임이 뭐예요? 미셸 푸코 연구회입니까? 복음 전하는 장소지요. 미셸 푸코는 알아요. 나는 악마를 보았다. 인간은 모두가 갇혀있다. 백날 뛰어봐야 못 벗어난다. 돈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그러면 한 1억? 1억만 좋아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같은 말이에요. “돈 싫어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와 같은 말이, “1억으로 난 족해?” 이럴 사람 아무도 없어요. 1억을 종자돈으로 해서 1억5천. 1억5천에 만족할 사람 없어요. 2억, 3억, 10억, 조 단위까지.
조희팔이 십만 원, 이십만 원 모으려고 사기 쳤습니까? 어떤 영화에 보니까 조 단위가 아니면 푼돈이라 해요. 조 단위가 아니면 사기가 아니다. 최순실이 몇 조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그것 때문에 그렇잖아요. 최순실이 박근혜랑 해서 세상에 오백만원이나 횡령했대. 데모 안 합니다. 옛날이면 깜짝 놀라겠지만. 눈이 그만큼 높아졌어.
갇혀있는 권력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이제는 복음으로 대비해야죠. 항상 철학 강의하면서 마지막에는 복음과 대비해서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스스로 철학으로 또는 과학으로 해결점이 없다는 걸 말씀 드렸지요. 복음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인간 자체가 성경에 보면 오염됐어요. 오염은 더럽다는 겁니다.
길에 휴지가 있습니다. 내가 줍자. 처음에 도로포장 공사할 때는 휴지가 없었어요. 한 두 시간만 지나면 휴지, 담배꽁초 떨어져있지요. 그러면 휴지를 줍고 담배꽁초를 주우면 처음 상태로 돌아가지요. 오염된 것만 제거하면 깨끗하단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돌아갈 원천이 없어요. 원 상태가 없어요.
그러면 해결방법은 뭐냐? 창세기 3장에 나오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오염된 것을 가림 막을 칩니다. 이게 바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히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깨끗하다. 나는 건전하다고 나와요. 그러면 오늘 강의에 복음적 해결은 간단한 거예요. 이 가림 막을 제거하면 됩니다. 제거하게 되면 우린 죄인 되잖아요. 부끄럽잖아요. 오염됐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오염된 것, 비거룩이란 말이죠.
그게 바로 복음의 시작이고, 구원의 시작이에요. 주님 앞에서 자기 의, 자기 잘난 체를 제거해버립니다. 제거할 능력이 스스로는 없어요. 그게 불교거든요. 나는 욕심이 많다. 이 욕심은 어디서 나올까? 불교는 오온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다섯 가지의 추상적인 물질체로 돼있다고 봐요. 내가 욕심이 있어서 생로병사 괴로움이 많으니까 욕심만 끊으면 된다는 거예요. 아까 아스팔트에 휴지 주우면 깨끗해진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건 동양철학이고 불교도 유교도 이건데,
성경은 우리가 아담의 자손이면 아담의 자손답게 오염된 모습으로 사람 앞이 아니고 그대로 주님 앞에 노출시키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9장에 보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노출시키는 분은 목사도 아니고 집사도, 장로도 아니고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럼 예수님은 깨끗하게 오시는가? 예수님이 깨끗하게 와서 노출시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보다 더 지저분하게 십자가에 피 흘린 모습으로 와요.
피 흘린 모습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깨끗하고 우리는 더럽다는 게 아니라 네가 더러워봤자 네가 아버지 앞에 저주받을 만큼 더러워봤냐고 묻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저주받은 십자가거거든요. 저주받았다는 말은 아버지로부터 예수님의 죄에 대해서 아버지가 심판한 거예요. 그 심판의 자리로 우리는 갈 수 없어요. 왜? 우리는 뜯어내봐야 불교식이 되니까.
나는 부족하다. 머리 깎고 절에 가야지. 나는 수녀원에 가야지. 나는 기도원에 살 거야. 기껏 인간들이 하는 것이 내려놔봐야 내려놓은 그것을 보고 대견해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아무리 부정하고 부인해도 부인한 그 행위는 고상하게 보이고 괜찮아 보이고 착해 보여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전적으로 죄인 될 수 없어요. 아무리 도를 닦아도 새벽기도 40일 동안 연속해도 안 돼요. 성경 보고 기도해도 안 돼요. 전 재산 바쳐도 안 돼요. 절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항상 미화하고 옹호하고 변호하는 무화과 나뭇잎 치마의 속성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나와 하나님 상대를 끊어야 돼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예쁨 받고 귀여움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돼요. “나의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하지 말아야 돼요. 그럼 뭘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십자가 달린 그 모습에 본인이 합체하는 겁니다. 합체하는 방법은 우리 쪽에선 안 되고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를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아 버려요.
그러면 그다지 내가 잘난 존재가 아니란 걸 알아요. 그러면 여기서 감사가 나오는데 범사에 감사, 모든 일에 감사가 나오는데 내가 무조건 죄인인 것을 가볍게 기쁨으로 아주 부담 없이 그냥 수용하게 되면 거기서 감사가 나오죠. 감사가 나오면서 겸하여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이렇게 나오는 게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우리를 십자가 못 박았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교회에서 도 닦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건 육의 열매에요. 육의 열매는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나오죠. 저 사람은 몇 시간 기도했고, 헌금 얼마 했고, 나는 일주일 교회 한 번 갔는데 저 사람은 세 번 가고. 이런 식으로 항상 비교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감사가 나오는 게 아니고 감사가 나오도록 노력이 나와요. 위선이죠. 감사는 할 이유가 없어요. 감사는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순간 결과적으로 나와야지 감사하기가 돼버리면 안 돼요. 온유하기, 이런 것 하지 마세요. 화평하기는 또 하나의 거짓이고 위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고맙게도 마귀가 도와줘요. 마귀가 우리로 철저하게 이 세상 사람으로 살게 만들어요. 네가 어떻게 그렇게 된지 알아? 네가 그 사람들 생각해서 그런 행동하면 안 돼.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그런 행동을 해.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횐데 그런 비윤리적인 행동해? 그러면 교인들이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해.
마귀가 눈처럼 깔려있는 모든 권세 안에 우리가 잠기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아침에 눈만 뜨면 생각나는 것이 남들이 내 모습을 어떻게 볼 것인지, 특히 여자들 화장할 때 코스가 24개나 나와 있잖아요. 혼자 살면 화장 필요 없지요. 이 사회에 살려면 남들 의식하지 않고서는 안 되겠지요. 그 모습을 그대로 받는 거예요. 받으면서 동시에 그 안에 같이 합세해서 같이 웃고, 같이 떠들고 같이 동조한 내 모습을 그대로 이 세상에 던지는 거예요. 던지게 되면 그 모습과 동시에 이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보게 되면 이러한 지극히 세속적인 생활을 하는 내 모습 속에서 감사가 나오지요. 이런 죄인을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따라서 도 닦겠다고 산 속에 들어가거나 기도원에 가거나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어요. 주어진 환경이 주께서 죄인 되라고 주신 환경이에요. 그 환경 속에서 평소에 하던 대로 마음껏 자기 성질내시게 되면 그것과 하나님에 의해서 노출된 나의 세속적 모습과 죄악 된 모습과 그리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십자가, 유월절 양의 피와 만남 속에서 우리가 성도라는 감사가 이런 존재도 구원되었다는 감사가 나올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적인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결론지었습니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러나 일부러 십자가 피를 가지고 찾아오신 용서를 가지고 찾아오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영원히 감사케 해주시고 그 감사하는 자들의 모임이 천국인 것을 늘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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