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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레위기 1: 3 / 네 속에 나 / 161007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레위기

레위기 1: 3 / 네 속에 나 / 161007

정인순 2016. 10. 8. 00:33

 

 

음성1                   음성2

 

녹취:한윤범

20161007a 울산강의-레위기 1장 : 네 속에 나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1장 3절부터 17절까지 내용은 번제라는 거거든요. 레위기를 보는 사람들이 짜증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제사 지내는 과정이 지겹거든요. 출애굽기까지 재미나게 왔다가 레위기에 막혀서 더 이상 짜증나서 안 보고 민수기로 넘어가든지 하는데 레위기 숲을 지나가기가 만만치 않아요.

 

그리고 우리의 선입감이 성경을 보면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거든요. 그런데 레위기를 보면 어디에서 은혜를 받아야 될지 난감하거든요. 누가한테 이야기할 때는 핵심으로 이야기해야 될 텐데 지루한 이야기를 반복하면 질리죠. 그래서 레위기를 보면 큐티할 것도 없고, 내용을 뽑아내고 싶어도 어느 게 핵심인지 뽑아낼 수 없습니다. 레위기를 하면서 레위기가 번잡스럽고 지루하게 기록했는지 그 내용부터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뭐로 꽉 차있어요. 세상이 동그라미라면 동그라미 속에 하늘이 있고 인간은 땅에 있고 바다도, 강도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봅시다. 하늘에 별이 있지요. 별이 왜 있어야 되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늘이 텅텅 비어있는 것처럼 살아가요. 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별 보면서 나는 별 때문에 산다고 하는 사람 없어요. 별이 있든 없든 간에 밤에 달이 있든 없든 간에 낮에 해가 있든 없든 간에 나만 챙기며 살아가요.

 

자기중심의 현실체제를 갖추면서 현실관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거예요. 내 중심으로 살아가는 게 뭐가 문제냐 하면, 그렇게 되면 달이 있는 이유, 별이 있는 이유가 스며들지 않아요. 구태여 해가 있을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내 중심으로 사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세상은 나만 있으면 된다고 살게 되면,

 

오늘 아침에 집 앞에 새가 날아가요. 흔해빠진 이야기잖아요. 너는 내 허락도 없이 공중을 나느냐?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단 말이죠. 새야, 너는 왜 내 구역을 나느냐고 하면, 새가 뭐라고 하겠어요? 너는 왜 내 앞에 얼쩡거리고 있느냐? 마찬가지거든요. 둘 다 뭐가 잘못됐느냐 하면, 새까지 아우르면서 또 새는 나까지 아우르면서 전체를 보는 안목이 우리가 미흡하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전체를 창세기 1장에 보면 해와 달과 별, 코끼리, 코스모스, 바다 이런 것들을 다 의미 있어서 만들어놨는데 우리는 그런 건 다 빼버리고 마지막 날에 만들어진 나, 나 자신만 챙기면서 나는 현실에 대해서 안다고 하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현실에 대해 안다는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세상을 어떻게 만들겠는가? 내가 하나님이라면 쓸데없는 것은 안 만들지요. 별은 안 만들어요. 새똥만 뿌리는 새도 안 만들고, 달도 안 만들고, 아는 친구들만 만들고 재미나게 살겠지요.

 

사람들은 그걸 천국으로 상상해요.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 1절을 통해서 이 세상 전체와 천국을 연관시키는데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면서 나만 달랑 끄집어내고 자기 위주로 자기 이익 되는 위주로 따로 현실을 자기 영역, 개들이 오줌 누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조폭들이 자기 구역 차지하는 것과 똑같지요. 내 구역 위주로 살면서 이걸 고대로 마치 천국이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천국이 왔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뜻은 해와 달 이런 것들이 천국을 설명하는데 필요해서 만들어놨는데 우리는 그런 요소는 귀찮다고 다 빼버리고 일방적으로 내 위주로 나는 크게 그리고 남은 작게 그리겠죠. 이런 식으로 자기한테 필요한 것은 크게 느껴지고 필요치 않은 것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집에 오면서 가로수에 나뭇잎사귀가 몇 개인지 아십니까? 잎사귀 몇 개인지 내가 왜 헤아려봐야 돼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잎사귀가 달리게 했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이 존재하게 할지라도 나한테 의미 없으면 그건 있으나마나 한 거죠. 그러면 누가 신이에요? 우리는 마치 내가 신인 양 여깁니다.

 

내가 원하는 이상세계, 나한테 적합한 이상세계를 천국이라고 꿈꾸고 있으니까 이런 천국에는 십자가가 필요치 않아요. 십자가 대신 낚싯대만 있으면 됩니다. 하늘에서 낚싯대 드리워서 <흐르는 강물처럼> 영화처럼. 이번에 캐나다 갔는데 그 영화 촬영지가 그 동네에 있어요. 벤프 국립공원이라고 경치 좋은데 있습니다. 포스터에 보면 낚싯대 던지는 장면이 있거든요.

 

하나님은 능력이 많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낚싯대로 걸어서 잡아당기면 하나님 좋고, 나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십자가가 낄 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는 십자가가 없어요. 십자가는 잠시 들어갔다가 곧장 빠져버려요. 왜 예수님의 죽음이 필요한지 내가 바르게 살면 되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어야 되느냐 말이죠. 참 이상한 일이잖아요. 말씀 주셨다. 성실하게 지키면 돼. 그러면 착실한 사람 되고. 천국은 착실한 사람이 들어가고.

 

시편 1편에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로다. 묵상하면 되잖아요.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고 그 사람이 의인이 되고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악인으로 분류되어서 의인의 회중에 참여하지 못한다. 굉장히 간편하잖아요. 시편 1편에서 십자가가 보이지 않아요. 우리 구미에 딱 맞습니다. 흡족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편 1편을 지키려고 하는데 괴기영화처럼 내 다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전설의 고향에 귀신처럼 들어와서 너는 엉뚱한 길로 갔거늘 나는 네 죄 대신 채찍 맞는다 하고 오면, 왜 그런 이벤트가 필요한지 낯설단 말이죠. 착실한 나에게 당신은 누구세요?

 

여기서 십자가로 인하여 들어오면 우리가 생각한 천국 자체를 한 자로 죄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 가겠다는 게 죄가 돼요. 구원받겠다는 게 죄가 되고. 좋은 나라에서 계속 살겠다는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추방시켰는데 추방의 취지와 안 맞거든요. 십자가 피를 흘렸다는 것은 천국을 생각하는 어느 누구도 진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방향이, 노선이 잘못됐다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의 노선은 뭐냐? 하늘엔 별이 있고 달이 있고 바다에는 고기 있고, 땅에서 너와 코끼리, 맨드라미, 사슴, 너구리도 있고. 이 모든 것과 관련된 천국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뱀 같은 것들이 필요치 않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꼭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벌써부터 의견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의견이 서로 맞지 아니해요. 우리는 우리중심이고, 하나님은 전체를 몰고 가는 겁니다.

 

이러한 의견충돌이 바로 욥에게 일어납니다. 욥이 모든 걸 빼앗기고 난 뒤에 화가 나서 하나님께 대들었지요. 저한테 왜 고난을 주십니까, 라고 할 때 하나님의 답변은 이래서 고난 주신다는 게 아니고 엉뚱하게 하늘의 별 이야기하고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아느냐, 염소새끼 낳을 때 본 적이 있느냐? 지금 고난 받고 아파하고 있는 사람에게, 고난 받고 아파할 때는 염소나 하늘의 별에 관심이 없어요. 아파하는 지금, 그러니까 모든 정신이 자기한테만 쏠리게 돼있어요. 신이시여, 저와 이야기합시다.

 

하나님은 욥과 이야기하면서 주제가 달라요. 욥이 평소에 생각지도 않은 다른 이야기를 해버려요. 다른 이야기할 때 욥의 답변은 간단해요. 모릅니다, 모릅니다. 모른다는 이야기를 꼭 해야 되겠어요. 하나님께서 욥이 모르는 이야기만 골라서 했는데 모른다는 답변도 구차한 거죠. 하나마나한 소리에요. 모른다는 사실로 유도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욥에게 네가 전체를 알아? 모릅니다. 전체를 모르는데 왜 나한테 대드느냐? 이겁니다. 네가 전체를 알면 나와 이야기가 되는데 일부만 아는 입장에서 저한테 고난을 주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억울하다고 나오니까 하나님께서는 깨놓고 이야기해요. 네가 네 사태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소리하느냐, 알긴 알아?

 

별, 삼성, 북두칠성 만들 때 네가 있어나? 없었는데요. 황무지에 비오는 이유를 알아? 채소밭이 아닌 황무지에 비가 왜 오느냐 말이죠. 인간들은 자기 채소밭에 비오는 것은 자기 의미기 때문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채소 잘 가꾸고 시금치 잘 먹겠습니다. 그건 니 생각이고 황무지에 비오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에 쓸데없이 비는 왜 내립니까? 그러니까 네가 너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은 재를 뒤집어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천국의 활동은 먼저 우리에게 죄인이라는 것, 우리가 죄 속에 있음을 발각시키는 것부터 시작되지요. 그게 욥기는 구약이지만 신약은 바로 십자가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네가 죄인으로부터 출발해야 된다.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미국에 계신 분인데 아들이 선교단체에서 꾀어서 선교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 뜻이라 해서 선교하겠다는 거예요. 제가 사정은 잘 모르니까 간단하게 답변했어요. 그 사람이 선교하겠다는 것이 어떤 바탕에 있느냐 하면, 부모가 자기한테 돈을 대주면 고맙겠다는 바탕 위에서 선교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열아홉 살 됐으면 인간의 가장 기본을 알아야 돼요.

 

내가 하루 세끼 먹는 밥이 그냥 공짜로 먹을 수 있는 권리가 본인한테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부모가 희생해서 밥을 줄 때 어릴 때는 이해되는데 열아홉이면 성인이잖아요. 자기 밥벌이는 스스로 알아서 해야 될 거예요. 밥을 공짜로 주는 걸로 생각하게 되면 자기 근본을 모르고 건방떠는 것밖에 안 돼요. 예를 들어서 자식이 대학에서 전공공부를 한다면 부모입장에서 자식이 나중에 밥벌이할 수 있도록 자립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도록 부모가 협조해줘요.

 

그런데 선교가 취직하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취직하는 게 아니라면 제 의견은 이거에요. 네가 전공과목 살려서 대학에서 공부하고 취직해서 돈을 저축해서 그 돈으로 하나님 뜻이라고 해서 선교하게 되면 그건 자립된 존재로써 얼마든지 자신의 의지대로 알아서 할 거고. 그건 부모가 말릴 수 없는데 지금은 자기가 배부른 상태에서 부모한테 손 벌려서 선교하겠다는 말은 아무리 봐도 놀러가겠다는 의미 외에는 다른 게 없어요.

 

따라서 선교하겠다는 말 속에 뒤에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선교가 선교인데 내가 하는 모든 짓거리가 죄가 된다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그런데 선교단체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꾀느냐 하면, 중동 간답니다. IS가 자살폭탄 아이들 꾈 때 꼭 그렇게 꾀는 거예요. 당신은 귀한 존재고 사랑받는 존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뭐가 빠졌어요? 하나님의 일은 신약에 십자가, 구약에서는 네가 자연세계를 알아? 죄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죄를 비껴가서 너는 귀한 존재다. 이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선교단체가 아니고 악마의 단체지요. 저는 선교단체가 다단계회사라 했습니다.

 

젊은 얘들 외국이 궁금하거든요. 외국소식 들으면 자기가 대단한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호기심+모험심을 주체할 수 없어요. 주체 없는 건 좋아요. 나중에 자기가 돈 벌어서 가든지 말든지 하면 되는 거예요. 제가 몇 개월 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요새는 개나 소나 다 서유럽 여행 간다고. 한국 아가씨들 배낭 매고 시집도 안 가고 여행 와 있어. 20대에 돈 벌고 30대에 배낭여행, 유럽에.

 

왜 갑니까? 행여 우연히 외국남자 만나서 결혼할 수 있을까 싶어서. 그래봐야 발렌시아에서 살림 살겠지요. 몇 달 전에 <인간극장>에 발렌시아 이야기 나왔어요. 인도에서 스페인 남자 만났는데 마음 맞는다고 결혼했단 말이죠. 그게 한국 아가씨들에겐 로망, 꿈이 되고 말았어요. 한국에선 생각만 해도 컴퓨터 일 보면서도 이번 보너스 받아서 여행가야지. sns에 여행사진 찍은 것 올리고. #좋아요, #뭐하고, 달려 나오는 거예요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에요. 선교를 핑계로 놀러가고 싶은 거예요. 왜? 답답하니까. 이 핑계로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서 좋고. 그러면 돈은? 선교한다니까 주께 영광 돌린다고 하니까 군말 없이 주겠지. 제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해야 돼요. 근거가 창세기 3장입니다. 이 땅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에요. 힘들여 고생하지 않으면 돈이 안 벌리도록 주께서 그렇게 궁지로 몰아넣는 세상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10대는 철없다고 부모가 도와줘요. 하지만 20대가 되었으면 언제까지 취미생활이나 하고 오락이나 하면서 부모 돈으로 누가 못합니까. 상담하신 부모한테 그랬어요. 지금 돈 대주면 나중에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부모한테 대들 거라고. 왜 아버지, 엄마는 내가 뻔히 엉뚱한 길로 가는 줄 알면서도 안 말렸느냐고 나온다니까. 그런 소리 듣기 싫거든 가되 차비는 네가 벌어서 가라.

 

벌려면 어떻게 버느냐? 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져야 돼요. 일단은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적성검사해서 자기 노선대로 해야 되고, 두 번째는 직무능력이 배양돼야 그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요. 취직해서 6개월 동안은 진짜 정신없이 죽을 둥 살 둥 자기 업무에 프로가 돼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계약 들어갑니다. 그 업무에 성과 못 내면 잘리는 거예요. 취직했다고 자랑질할 여유도 없어요. 모든 게 모르는 거니까.

 

제가 아는 전도사님 자제분이 삼성에 취직했는데 아침에 출근하면 이메일로 오늘 해야 될 일이 백 몇 가지씩 온답니다. 삼성 돈 많이 준다고 하지요. 감당 못합니다. 그래서 나왔지요. 사람 잡아요. 직무능력을 감당해야 그 다음 업무도 맡기는 거예요. 이 세상은 지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파키스탄, 중동 이라크 선교가 아니고 현재 울산바닥에 살고 있잖아요. 이게 선교지에요. 그래서 남 구원시키려하지 말고 본인이 죄인인 걸 살아가면 이것이 외부적으로 복음 전파하는 겁니다. 선교, 참 쉽지요? 정말 쉽지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론으로 알았던 욥이, 욥기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론으로 아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욥을 삼켜버렸습니다. 욥은 거기서 죽을 뻔했습니다. 진짜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실습도 그런 실습이 없어요.

 

오늘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번제인데 이 세상 전체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면서 세상을 내 중심으로 우겼던 그러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리기 위해서 다섯 가지 제사로 찾아오십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제사에 마주치면서 우리는 죄를 발견하면서 이 제사가 나를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자체에서 천국 들어갈 수 있는 의, 다른 말로 거룩이 나와요.

 

그렇다면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를 봅시다. 첫 번째는 적성검사, 두 번째는 직무수행 능력을 배양한다. 이게 일단은 육적으로 사는 겁니다. 이것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감정적으로 해야 되는 게 있어요. 여자가 자식을 낳으면 자기 직업, 직무능력과 상관없이 무조건 키워야 돼요. 정 못 키우면 아파 죽든지 어떻게 해야 되죠. 앞의 것이 사회적이라면 뒤의 것은 생물학적입니다. 그리고 직업과 상관없이 어떤 남녀가 불꽃이 튀면서 서로 사랑한다? 이건 사회적인 것과 상관없이 생물적인 본능이죠.

 

이 두 가지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걸 ‘의미’라고 해요. 의미는 두 가지가 있어요. 사회적으로 내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는 내가 애써야 된다는 것과, 그것과 상관없이 딱 보니 서로 통했다, 반했다. 아무리 따져도 직업상 도저히 안 어울리거든요. 어떤 여자가 있는데 두 남자가 나타났어요. 한 남자는 기자고, 한 남자는 방송국 사장님이고. 자꾸 재벌 아들이 자기한테 프러포즈하고 사장 엄마는 구박해도 아들은 기어코 하겠다는데 마음으로는 기자한테 끌리는 거예요. 누구냐면, 공효진입니다. <질투의 화신>

 

이게 사회적 판단과 관계없이 마음으로 끌리는 것, 이것뿐이에요. 이게 사는 의미다. 사회에서 스트레스 받는 것 사랑으로 풀자. 이게 육적인 인간들이 살아가는 게 딱 이것뿐이에요. 제가 캘거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남녀가 사랑했다. 그런데 결혼했다. 끝인가? 아니요. 본격적으로 여자 입장에서 헤어질 때 이 정도 사랑했다면 같이 얼마나 사랑하겠는가, 그런 기대를 품고 결혼하는 거예요. 남자들은 결혼했다. 그걸로 사랑은 마감이 돼요. 내 것 돼버렸는데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의미라는 게 두 가지밖에 없구나.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건 인간중심의 의미라면, 하늘의 새가 날고 하늘엔 별과 달이 있는 이 전부를 통합했을 때 나오는 의미는 뭐냐? 그 의미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그 의미, 이제는 그 의미를 택한 백성, 이스라엘 백성에서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을 때 나오는 본문이 시편 50편 5절입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제사로 나와 언약한다. 하나님의 약속, 몇 시에 다방에서 만나자. 태화종합시장에서 만나자. 요새는 울산이 얼마나 유명한지 틀면 태화종합시장이에요. 그것도 물에 잠긴 서점이 나와요. 어느 특정 지점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아니고 제사 안에서 만나자는 거예요. 이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제사 안에는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만나자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의 성소에는 일반인들은 못 들어가요. 오른쪽 귀뿌리와 오른쪽 손가락과 기름과 피를 묻히지 않은 제사장이나 레위인 아니면 성막에 못 들어갑니다. 100규빗과 50규빗으로 동쪽에 문이 나있는 여기 성소가 있고 편물로 만들어놓고 여기 물두멍, 제단이 있거든요. 제단에서 제물 태우고 쓰레기는 동쪽에 버리고.

 

오늘 본문이 번제인데 번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입구에 백성들이 서있습니다. 양 한 마리 들어오면 마중을 나가서 끌고 옵니다. 양이 꿈틀거리면서 안 되니까 양의 목을 졸라요. 그리고 머리에 제사장이 안수하게 되면 양을 가져온 사람의 죄가 이전이 돼요. 양을 눕혀놓고 목을 치고 피가 나오면 양푼에 피를 담아서 제단 뿔 네 곳에 뿌리고 제단을 피로 도배해버립니다. 그 다음에 가죽을 벗기고 뼈 빼놓고 내장을 분리하고 고기를 발라서 몽땅 태우고. 쓰레기는 동편에 버리는 겁니다. 이게 번제에요.

 

이게 무슨 우주 전체, 하늘의 달과 별과 관련된 이게 의미냐 말이죠. 여러분 납득이 안 되죠. 왜 납득이 안 되느냐 하면, 우리의 선악적 사고방식, 선악과 따먹고 난 뒤의 우리의 선이라는 것은 악을 저지른 만큼 상쇄되는 선을 행하면 우리는 마음이 상쾌해서 기분 좋아요.

 

만약에 수해나서 차가 밀려서 교회 10분 늦게 왔다. 10분 늦었으니까 헌금시간에 오천 원 정도 넣으면 되고. 20분 늦었으면 만 원 정도 되면 마음에 위로가 되고. 그런데 끝날 시간에 왔다면 그때는 좀 더 쓰세요. 오만 원짜리 써야 하나님 앞에 늦게 왔다는 미안함이 상쇄되는 게 우리의 타고난 양심은 그런 식으로 구조돼있어요. 항상 대차대조표 균형 맞추듯이 우리의 양심은 그런 쪽이에요.

 

실수해서 악을 저지르면 다음에 고아원 방문한다든지 해서 선한 행동하면 주님 앞에 정당하게 큰소리칠 수 있거든요. 그게 바로 우리의 정서인데 하나님이 하는 것은 너무 과도해요. 죄 씻음 장치가 심해도 너무 심해요.

 

실제로 제가 어릴 때 그런 걸 느낀 적이 있는데 우리 할아버지에 유교에 철저한 분이에요. 질릴 정도로 유교적이에요. 자식들이나 손자들한테 유교적으로 철저하게 훈련시킨다고 저 같은 경우에는 신발을 어떻게 놓는지 감시해요. 저도 할아버지가 감시하는 줄 알고 나름 노력해요. 좀 삐뚤게 놓으면 근호야, 이리 와 봐라, 하면서 일주일 동안 잔소리해요. 너, 성질 안 고치면 나중에 출세 못한다. 범주를 추상적으로 넓혀서. 문 닫을 소리 나면 안 돼. 밥상 들어올 때 엉덩이부터 보이면 안 돼. 이제 보니까 할아버지의 취미생활이고 나는 그 할아버지의 취미생활에 노리갯감이 된 거예요.

 

내가 보기엔 조금 잘못했는데 그 처벌은 너무 가혹해요. 이게 매치가 안 돼요. 십자가에 죽었던 게 매치가 안 된다니까요. 너무 오버하시는 것 아니냔 말이죠. 십계명 줬으면 지키겠다는 최선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서 얼마든지 좋은 게 좋다고 말로 할 수 있는데 마음속으로 누굴 미워했다고 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 그것도 십자가에 못을 박는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을 잊게 만들어요.

 

제사로 언약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가 죄 지었으니까 벌 받으라는 게 아니고 이미 벌을 정해놓고 그 벌에 합당한 죄를 지으라고 우리를 울산바닥, 대구바닥에 평생 살게 만들어요. 또 다른 데 가면 다른 데서 살겠지만. 벌부터 이미 확정되었어요.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미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저주받기로 확정했어요. 그게 벌이에요. 이 벌이 자기한테 합당하다고 인정한 그 사람은 천국 갑니다. 왜냐하면 벌을 내리신 행위가 의고 그것을 용서한 행위가 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의는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의가 우리를 소유하도록 그렇게 주님께서 약속을 맺은 거예요.

우리는 기껏 의미란 적성검사해서 밥 먹고 사는 것과 그리고 서로 당기고 사랑하고 그렇게 한 평생 아옹다옹하면서 사는 것, 그게 전부잖아요. 그렇게 되면 해와 달과 별이 있을 이유가 없다니까요.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원치 않은 종달새가 울고 재수 없는 까마귀가 대나무 숲에 왔다 갔다 한 그 이유를 우리는 몰라요.

 

만약에 회사가 부도났다면, 하나님이여,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십일조 꼬박꼬박 냈는데 30배, 60배, 100배는 아니더라도 마이너스 30배가 뭡니까? 이럴 수 있습니까? 왜 물이 차서 서점이 다 잠깁니까? 이렇게 하면, 네가 태화강에 까마귀 있는 것을 아느냐?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비오고 난 뒤에 하늘에 달이 휘영청 빛나는 이유를 아느냐? 엉뚱한 질문을 한다니까. 그건 모르지요. 어디서 모르는 게 내 앞에서 아는 척하느냐.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것만 모르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이유를 몰라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어린양을 잡아야 되는지 이유를 몰라요. 그것도 불에 다 태워지는 이유를 몰라요. 그것은 인간은 일단 그 기능을 할 뿐이지 그 기능의 의미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율법이 투입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궁지로 몰아세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으로.

 

그러면 왜 우리가 살아야 됩니까? 그럼에도 죄인들이 왜 살아야 됩니까, 이런 문제가 나오거든요. 질문 자체가 잘못됐지요. 죄 지었으니까 죽어야 된다고 생각한 자체가 잘못된 선입관이에요. 죄 지어서 죽을 것 같으면 아벨을 죽인 가인은 즉사해야 돼요. 아벨을 죽인 가인은 내리 번창만 하더라. 온 도시를 다 점령하고. 산다는 것이 살만해서 사는 게 아니고 언약 때문에 언약에 의한 짝을 맞춘, 예수님은 의인이라면 우리는 죄인이라는 세트를 맞추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살기 싫더라도 살아가야 돼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율법은 우리가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에요. 우리를 스쳐지나가서 십자가와 관련돼있어요.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430년 후에 온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전제로 하고 율법이 와서 착륙하는듯하다가 비켜 가버립니다. 이렇게 한 이유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의를 알지/믿지 못하는 죄인인 것을 율법을 통해서 알리고 죄를 규정해놓고 아브라함이 드린 희생제사와 결합시켜서 그것의 완성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총 동원시킨 거예요.

 

시편 50편 5절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그러면 제사에 언약했다면 중간과정이 레위기에서 너무 난잡하고 너무 복잡해요. 그래서 우리는 결론부터 알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데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게 결론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방금 제가 결론 이야기했지 납득이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중간과정은 다 생략하고 이야기한 거예요. 결론은 뭐냐 하면, 피가 없으면 죄 용서도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피 흘린다는 말은 하나님이 과도한 액션을 취한 겁니다. 어쨌든 결론은 알았어요. 피 흘림이 있으면 용서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언약을 들고 왔는데 레위기에서 제사로 언약했다. 스타트 이야기했고 엔딩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중간과정이 어떻게 흘러서 결국은 역시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다는 것으로 마감되는지 그 과정에 누가 동원되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동원되지요. 기능별로 동원되지요.

 

어떤 기능이냐? 죄 짓는 기능이 있고 죄 지었다고 양을 몰고 진 중앙에 있는 성막까지 끌고 오는 기능이 있고, 양을 잡고 성막 안으로 끌어당기는 기능이 있고, 거기에 안수해서 죄를 이전시키는 제사장 기능이 있고, 양을 잡는 레위인들의 기능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역시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네요,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는 역할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레위의 율법을 모세를 통해서 전달하게 하신 겁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복습해보겠습니다. 여기 시내 산이 있습니다. 모세는 홀로 있습니다. 나머지 백성은 남자만 사십만 대군이 있습니다. 이들은 적성검사해서 직능별로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겁니다. 하지만 재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가난한 자, 부한 자가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비록 가난해도 정 맞춰 평생 살아가면서 나름 행복을 느끼는 생물학적인 의미를 찾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산 밑이에요. 두 가지 다 자기중심적인 의미에요. 산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완전히 빼버린 거예요. 이는 인간적인 소박한 꿈, 얼마나 소박한 꿈이에요.

 

이사야 37장에서 히스기야 때 앗수르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십팔만 오천 명이 산 밑에 인간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이에요. 앗수르 군대는 징병된 사람들이잖아요. 자기 집에서는 다 효자들이고 귀한 집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됐을까요? 천사가 와서 치니까 그날 밤에 다 죽었어요.

 

죽은 이유가 뭘까요? 다 집에서는 효자들이고 각자 직장들이 있었을 거예요. 앗수르 고향에서는. 나라가 전쟁한다니까 왔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효자니까 빼줘야겠다. 너는 방금 결혼했으니까 빼주고, 너는 집에 가라는 게 있습니까? 없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박한 의미를 일체 용납을 안 합니다. 그럼 왜 죽였는가?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예루살렘을 포위했다는 이유로 다 죽인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에 대들면 그 자체가 저주의 형상입니다. 이게 시내 산 위의 의미에요.

 

10분 쉬고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아래 의미와 위의 의미가 달라요. 위, 아래 의미가 다르다니까요. 우리의 소박한 의미를 하나님께 기도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기도 듣지 않습니다. 의미적인 기능만 기도 응답되지 밑에 있는 소박한 꿈, 결혼하게 해주세요. 우리 헤어지지 말게 하옵소서. 이런 것 응답 안 됩니다. 왜 다른 집은 멀쩡한데 우리 집은 수해드는가? 그것 의미 없어요. 까마귀 왜 왔는지 그 이유 알거든 나한테 찾아오너라.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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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7b 울산강의-레위기 1장 : 네 속에 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아까 그거는 이사야 37장 36절이었습니다. 십팔만 오천 명 그날 밤에 다 죽었어요. 하나님의 천사가 다 쳐버렸습니다. 효자니 불효자니 가리지 않고 어디 감히 네가 언약을 대들어 하면서 다 죽였습니다.

 

아래쪽 의미밖에 모르는데 시내 산 위쪽에서 모세가 제사법을 가지고 내려오는 이유가 뭐냐? 네 속에 내가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겠다는 겁니다. 너란 말은 이스라엘 전체를 단수로 간주해서 한 사람으로 봐서 한 아들로 간주해요. 출애굽기 4장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

 

그러면 인구가 얼마입니까? 남자만 사십만 명인데 한 아들 되는 방법이 뭐냐? 그건 간단해요. 언약을 줘서 사람들은 언약으로 서로 엮으면 되는 겁니다. 이게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묵주지요. 묵주의 구슬 하나하나가 하나의 줄로 꿰면 전체가 하나가 되죠.

 

언약으로 엮을 때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이미 엮였잖아요. 이웃이 누굽니까? 바로 네 옆에 있는 사람이 이웃이지. 가족 단위도 엮어버려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계명 없는 부모 공경은 소박한 자기 의미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부모가 날 키웠는데 내가 양심이 있다면 부모를 잘 섬겨야지. 그렇게 섬겨봤자 예루살렘에서 십팔만 오천 명 다 죽었는데. 효도는 언약이 아닙니다. 양심이 이야기하는 것은 언약이 아니에요. 백날 해봐야 천사가 치면 다 죽어요.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효 아니냐? 그건 효가 아니고 언약에 해당됩니다. 그러면 십계명에 있는 부모공경과 양심적으로 부모공경과의 차이가 뭐냐? 십계명 안에는 네 속에 내가 들어간다는 게 포함돼있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앞서서 십계명이 먼저 우리에게 화살처럼 박히는 겁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게 되면 갑자기 나를 집어넣어요. 내 부모이기에 섬겨요. 평소에 이 세상을 내 중심으로 사는 그 본색을 발휘하면서 내 부모니까 내가 섬겨야지. 성경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신명기에 그런 대목도 나오는데. 자식이 말을 안 듣거든 마을 이장에게 맡겨라. 야무지게 돌로 쳐 죽일 테니. 신명기 21장 19절.

 

왜냐하면 자식은 네 자식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언약에 의해서 규정해놓은 자식이거든요. 따라서 그 자식에 대해서 사적인 부모 감정에서 두둔하거나 봐주지 말고 언약의 자식이니까 언약에 맡기면, 언약대로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남의 자식을 돌로 쳐 죽이라는 거예요.

 

특히 이런 대목이 또 나와요.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이 평소에 보기만 해도 미운 사람이면 핑계대기 좋죠. 이게 어디서 법을 어겨, 라고 해서 다른 사람은 작은 돌 던지는데 커다란 돌로 한 방에 때려죽일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만약에 사랑하는 자기 아들이라면 돌로 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계명으로 엮여놨더라도 갑자기 거기서 자기 의미를 가미해버리죠. 여보게, 이는 내 아들이야. 차라리 나를 때리게. 그러면 다른 사람이 너도 죽으라고 같이 죽여 버립니다.

 

언약이라는 게 이처럼 무서워요. 안식일에 자기 자식이 못 지키면 차마 돌을 못 던지잖아요. 이걸 던져야 계명 지키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창세기 22장에 나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잖아요. 이삭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죄 없는 이삭이지만 하나님의 계명은 내 위주의 의미를 일체 관련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애굽에서 홍해 건너올 때 이미 죽었던 자였기 때문에 죽었던 자가 다시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나오면, 옛날 애굽의 의미로 시내 산 위의 의미와 연결시키려는 것은 가짜 천국으로 진짜 천국 되게 해달라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님의 진짜 천국은 바로 우리가 천국을 가려고 하는 우리마저도 죄로 만들어버려요. 모든 게 죄가 되기 때문에 그 죄 때문에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죄가 되게 한다는 자체 만해도 이미 언약적 관계로 맺어진 성도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오히려 고마워할 줄 알아야 돼요. 우리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라고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예수님 십자가 아니고는 아무도 그런 얘기 못해요. 교회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왜 죄인인 것을 알기 위해서 나와야 돼요. 그게 구원받은 사람의 티를 내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 나오면서 자기 잘난 척하는 것은 오락이고 교회놀이에요. 교회놀이는 소꿉놀이의 연장입니다. 어릴 때 꿈과 낭만, 사랑받기 원해서 하는 거예요. 천주교가 그런 놀이 잘하지요. 복장도 얘들 놀이 복장 있잖아요. 신부들 복장 있지요. 유니폼을 입고 거룩한 흉내를 낸다는 것은 아동들 학예회 때나 나올 법한 그런 짓을 하고 있어요. 어릴 때 훈장 달고 하지요. 그런 짓거리를 하는 거예요. 그걸 정신분석에서는 퇴행성정신분열증. 퇴행성 환자에요. 중들 머리 깎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머리 깎음으로써 뭔가 자기가 세속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남한테 보라고 티를 내는 것은 좋게 이야기해서 아동들 퇴행적 사고방식이죠.

 

그럼에도 머리 깎는 이유는 돈이 되기 때문에. 누가 머리 안 깎은 중한테 누가 시주합니까. 그게 자격증 비슷한 겁니다. 어떤 중이 목욕탕에서 머리 깎다가 나한테 걸려서 어디서 목욕탕에서 머리 깎느냐? 목욕탕이 이발소냐고 오지랖 넓게 했지요. 대구 은혜사 옆에 있는 목욕탕에서.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언약을 통해서 다수를 하나로 묶어놨어요. 사실은 처음부터 묶였어요. 창세기 2장에 보면, 부부가 이는 내 살 중에 살이고 뼈 중에 뼈이라 하면서 자기 아내를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이지만 한 몸이라고 돼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짝 지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고 돼있어요.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이혼하는 게 죄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은 아까 강의에도 나왔지만 이혼하라는 말씀이에요. 강의해도 무슨 소용 있어요. 다 잊어버리는데.

 

벌이 먼저 있고 저주가 먼저 있고 왜 너는 저주받아 마땅한가를 나중에 보여준다 했지요. 십자가 진 사람은 그 말씀을 내가 이혼 안 해도 이미 이혼 당한 상태인 것을 살아가면서 확인하라 이 말입니다. 덥다고 각방 쓰고, 이게 이혼이지 뭐. 삐져서 따로 밥 먹고, 그게 이혼이잖아요. 맨날 어딜 봐서 한 몸입니까? 하나는 축구 보겠다하고 하나는 드라마 보겠다는 게 무슨 한 몸이에요. 꿈도 다른데. 연애할 때는 이래요. “오빠, 내 꿈꿔.” “그래 니 꿈꿀게.” 무슨 꿈꾸는데? 남자는 다른 여자 만나는 꿈꾸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신 모둔 명령과 규정들은 이미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에요. 죄인을 부르러 왔단 말이죠. 자꾸 그걸 지키려한다면 십자가는 헛수고한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잖아요. 율법으로 의롭다 하는 자는 이미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그건 마귀 짓이에요.

 

교회 나와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왜 죄인인지 알아서 거기서 감사와 기쁨밖에 안 나와요. 교회 오면서 투덜투덜합니다. 비는 왜 갑자기 와서 지장 있게 합니까. 교회 늦게 온 것도 차 막혀서 그랬습니다. 참 그렇게 궁시렁거릴 자격이 못 된다는 것, 번제 앞에서. 십자가가 번제거든요. 십자가는 한 개지만 다섯 개가 중첩돼있어요. 번제용 십자가, 소제용 십자가, 속죄제용 십자가, 속건제용 십자가, 화목제용 십자가.

 

화목제가 제사의 제일 마지막이니까 그걸 최종적으로 화목제물로 통합시킨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 외에 한 의가 있으니 그건 바로 화목제물이다. 예수님은 화목제물. 그건 왜 그런가?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됐는데 하나님께서 의로 구원했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저는 기쁘던데요. 지금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의 원수로 살면 돼요. 그건 하기 참 쉬워요. 내 중심으로 사는 게 원수니까. 모든 사고방식과 행동 자체가 나만 챙기고 내가 최고잖아요. 그 짓을 왜 못합니까? 그건 가만 놔둬도 잘해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똑같아요. 둘 다 하나님의 원수 짓하는데 신자의 특징은 뭐냐? 성령을 받아서 원수 짓인지 알면서 원수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천국으로 가고 있는 사람이고, 지옥 가고 있는 사람은 원수 짓하면서 오만 가지 핑계를 다 대면서 어쩔 수 없었다. 사회가 날 버렸다든지, 남들 다 그러는데 나 혼자 병신 되기 싫어서 나도 폭탄주 먹었다든지. 폭탄주 맛있게 먹었다고 하면 될 걸 자꾸 핑계 대는 거예요.

 

감사와 기쁨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내가 변명할 필요 없음에서 와요. 변명은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스트레스는 암을 유발합니다. 이건 내 이론이지만. 아이큐가 낮은 사람은 암이 별로 없다는 그런 근거에 의해서. 한 잔 먹고 또 한 잔 먹고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사는 사람은 암에 걸려 죽진 안아요. 암은 꼭 남편 바람피운 아내가 거기에 신경 쓴다고 암 걸리고. “하나님이여, 외도한 남자와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의 응답은 그겁니다. “내가 네 남편 외도케 했다, 어쩔래?” 네 속에 내가 들어간다.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들어간다.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내 행복 중심으로 돌아가는지 그것으로 인하여 이 언약과 우리가 양보 못할 내 행복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죠. 그 충돌의 증거가 바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식으로 약한 흠 없는 양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피투성이 된 것을 성막 안에서 제사 행위를 통해서 미리 보여주면서 남김없이 다 태운다고 해서 번제라 해요.

 

번제를 하면서 핵심적인 요소가 이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불로 들어옵니다. 불과 죄인의 만남에서 피가 튀어야 돼요. 그 점을 신약을 통해서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3장에 모세 이야기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수건을 덮어썼다. 이렇게 연기로 보여주는 건 간단하죠. 개업했을 때 받은 마크 박힌 수건 있잖아요. 목사들은 울산노회 20회 기념수건, 아줌마들 계모임에서 받은 수건을 덮어썼다고 칩시다. 수건을 덮어썼다는 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시내 산 위와 아래와 그렇게 순하게 만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모세가 수건을 덮어쓴 것은, 밑에 있는 백성들이 시내 산 위로 올라갈 때 자기들과 똑같은 존재로 봤어요. 그런데 내려올 때는 광채가 너무 눈부셔서 같이 대면해서 이야기 들을 수 없어요. 산 밑에 있는 사람들은 예상하기를 모세가 하나님 만났으니까 무슨 낌새라고 알아차려서 우리가 하나님 잘 섬기는 어떤 아이디어라도 얻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생각했던 모세가 말은커녕 정면으로 대하기도 부담이 될 정도로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감당이 안 되면 모세 잘못이에요, 본인에게 문제 있는 거예요? 본인들에게 문제 있지요.

 

성경 자체가 그런 거예요. 읽기는 쉽지만 성경 한 말씀, 한 말씀이 사실은 우리 자신이 감당 안 될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우리 자신이 생각보다 과도한 죄인이에요. 너무 이기주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글로 돼있으니까 편하게 읽고 오늘도 두 장 뗐다. 하나님이 복 주시겠지. 주일이니까 다섯 장 더 읽으면 일 년이면 한 권 떼겠지. 다 떼면 뭐 할 건데? 교회에서 수건 하나 줍니까? 하늘나라에선 아무것도 안 주는데?

 

성경은 보면 볼수록 진도 나가기가 더 힘이 돼요. 숨어있는 걸 끄집어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뻑뻑해요. 내용은 아는데 갈수록 뻑뻑해요. 톰슨성경 보면 요약 나오잖아요. 그것 읽으면 그냥 넘어가죠. 그러나 그 속에서 십자가를 끄집어내면 할 말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기 레위기 1장 7절 보겠습니다.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고린도후서 3장에서 모세가 수건을 덮어썼는데 그건 감당이 되질 않더라. 어쨌든 수건 덮어썼더라도 지시할 건 지시했어요. 오늘 본문은 번제입니다. 번제는 반드시 불에 다 태우는 거예요. 불이 있어야 돼요. 불은 어디서 내려왔는가? 불은 하나님이 지정한 불이어야 됩니다.

 

시내 산이 있는데 여기서 보면 높다란 산이죠. 그런데 군홧발로 밟아봅시다. 밟아놓고 그걸 위에서 보면 높다란 산을 눌렀으니까 이렇게 되겠지요. 완전히 뭉갰으니까. 이게 바로 성막입니다. 위로 솟아있는 것을 뭉개버린 거예요. 수직으로 왔을 때는 불붙은 산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시내 산은 화산이었다. 진동이 있었고 진도 5.9 있었고 나무, 돌이 굴러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서 짐승도 못 올라갔다.

 

어쨌든 간에 불붙은 산이란 말이죠. 신명기 18장 16절에 보면, 백성들이 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까이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여, 불 가운데는 말씀하지 마옵소서, 라고 하거든요. 그렇다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왔다는 말은 이야기는 하면서도 두 가지 해야 돼요. 하나님 만나면서도 백성들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어떤 방안이 없겠습니까? 그게 모세가 수건을 얼굴에 덮어쓴 것, 그게 하나의 방법이 되겠습니다.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성막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두 개의 요건을 충족시켜놓은 거예요. 그게 아까 네 속에 내가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건 구약이고 신약에서는 주께서 어떻게 들어오십니까?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 함이 있다. 그때는 모세가 수건을 썼지만 지금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가 되어도 아무 구애 받지 않고 얼마든지 하나님과 함께 동행이 성사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주의 영이 바로 십자가의 영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가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이기적인 어떤 죄도 주님한테는 늘 용납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하기 위해서는 또 어떤 이기적인 죄를 범했다는 걸 알기 위해서 우리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팔 벌리고 교회 문을 열어야 돼요. 교회 문을 활짝 열고, “자, 여기 죄인 왔습니다. 목사님, 죄인 왔어요.” 그러면 다른 새순교회 죄인들이, “조용하세요. 너만 죄인이야 나도 죄인이다.”

 

그렇게 앉아서 목사님 설교하시면 이래서 우리가 또 십자가를 비켜갔구나. 그걸 로마서에서는 자기 행위를 죄라고 해요. 행위의 반대말이 믿음이죠. 믿음에서 믿음으로 모든 행위를 비껴지나갑니다. 그러면 행위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행위를 들춰내면서 믿음으로 비껴가기 때문에 나중에 믿음으로 바뀌고 이게 하나님의 의가 돼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우리 쪽에서 보면 죄가 되는데 주님 쪽에선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희한하게 그렇게 돼요.

 

이 공식을 이렇게 설명하면 돼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했는데 공식은 간단해요. 우리가 가만있으면 주께서 죄를 집어넣어요. 위에서 십자가로 언약이 완성이 되면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작동하도록 장치를 집어넣어서 그런 겁니다.

 

레위기로 다시 돌아와서 우선 물어야 될 것은,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제사장들이나 사람들이 제사행위를 했잖아요. 왜 제사했는데 이스라엘이 망했습니까? 열심히 시키는 대로 했는데. ①규칙대로 안 했다. ②제사하면서 딴 생각했다. ③그냥 제사하는 죄를 범했다. 몇 번입니까? 삼번이 해당돼요. 제사하라는 것은 제사를 함으로써 숨겨놓았던 네가 미처 모르는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제사를 한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양을 몰고 왔다고 했지요. 그래서 양을 잡아서 불태울 때 그들은 뭘 느끼겠습니까? 내 죄가 공중에 연기가 되어 날아가는구나. 그럼 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게 바로 그 제사를 통해서 자기가 의롭게 행했다는 수작을 벌인 거예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개인구원이 계속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나만 살면 된다는 것, 나만 천당 가면 된다는 것, 나만 복 받으면 된다는 개인적인 게 계속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은 오십 만인가 사십만의 사람들이 전부 다 묵주로 언약으로 연결돼있지요. 그러면 나만 용서 받아 구원되었으면, 그 다음에 이웃사랑을 할 필요가 있겠어요? 필요 없지요. 이미 서울대학 합격했는데 정통종합영어를 왜 봅니까? 수학정석 볼 필요 없잖아요. 세상에 대학합격 해놓고 ebs 수능참고서 보는 사람은 나중에 강남에 학원가 강사 되려는 사람 외에는 없어요. 구원받았는데 성경책 왜 봅니까? 그래서 요새 성경 안 보는가?

 

구원이란 개념이 나의 구원을 제치고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나의 구원을 일체 거절한 그 빈자리에 구원이 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단체 구원이 되고 집단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웃사랑을 안 해도 이미 이웃사랑이 확정된 상태가 돼버려요. 형제를 위해서 네 목숨을 바치라는 그 말씀은 우리의 죄를 통해서 성령께서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되게 만들어요.

 

극단적인 예지만 요거트 먹을 때 남한테 빼앗길까 몰래 먹는 것도 이웃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행위로 간주되도록 주께서 조치하십니다. 어떻게? 정말 나도 참 못 되기는 못 됐다. 세상에 이런 못 된 죄인이 어디 있어. 그게 옆 사람이 보면서 요거트 먹다가 온유가 나오고 화평이 나오고 형제우애가 나오고. 조금 전까지 누가 빼앗아 먹을까봐 그렇게 화내더니만 돌아서서는 갑자기 얼굴이 확 피는 게 적대적인 의사가 전혀 없이 너한테 이웃사랑이 뿜어져 나온다고 할 때 그건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새삼스럽게 알았기 때문에 그런 거야. 성령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야. 이웃사랑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죄를 지어주셔야 돼요. 가만있어도 죄 짓지만. 죄를 짓게 되면 그 죄가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완벽한 이웃사랑의 완전체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럴 때 제가 안 했어요. 제가 절대로 그럴 리 없습니다, 라고 할 때 그건 바로 이미 시작된 천국 생활입니다. 면류관을 반납한 행위가 되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조건이 되려면 그 사람에게 성령이 임해야 돼요.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육으로 났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해석은 누가 영을 받았는지 누가 육 그대로 있는지 구분하는 설교가 돼야 돼요. 괜히 육적인 사람한테 열심히 하시면 형제 사랑할 수 있다고 해서 돈만 빼먹고 교회 봉사하게 만들 때 그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천국 간다고 사기 친 것밖에 안 돼요.

 

제가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분은 성령 받은 사람만 알아듣는다면 나중에 교회에 달랑 두 명밖에 안 남으면 어떻게 합니까? 두 명 남아도 전체 이스라엘 숫자는 조금도 감소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됐잖아요. 다른 교회에 있는 성령 받은 사람이나 나나 주님 보기에는 한 몸이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되면 됐지 눈에 안 보인다고 갑자기 숫자가 감소하고 그런 법은 없어요.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이 없어요.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한다고 번제가 풀린 게 아니에요. 다시 레위기 봅시다. 1장에서 문제는 이겁니다. 큰문제인데 양이나 소를 끌고 오너라. 머리에다 안수하면 속죄가 된다는 데 왜 머리에 안수하면 속죄가 되느냐 이 말이죠. 제가 묻는 게 뭐냐 하면, 다리는 아니고 머리냐는 게 아니고 안수만 했을 뿐인데 어떻게 양을 가져온 그 인간의 죄가 양한테 인수인계가 되느냐 말이죠. 그 메커니즘, 과정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하는지 그게 궁금하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은 안 궁금해요?

 

모세가 시내 산 근처에 갔을 때 떨기나무가 있었거든요. 모세가 스스로 자기한테 묻는 게 있었어요. 어떻게 불이 붙었는데 떨기나무가 타지 않느냐는 겁니다. 이 말은 모세 말에 의하면 불이 붙었다는 것은 뭔가 소모가 되는 경우에만 불이 붙는다고 자기는 익히 알고 있어요. 그게 인간 세계에선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났는데 불이 붙었는데 떨기나무는 멀쩡해요. 그렇다면 이건 이걸 이야기해요. 단절. 인간이 갖고 있던 생각에서 주님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고 뭔가 끊어짐이 있다는 겁니다. 그 끊어짐이 굉장히 중요해요. 죄는 내가 지었는데 어떻게 흠 없는 양에게 죄가 날아갔는지 이동한다는 게 억수로 신기한 일이잖아요. 주님께서 네 죄는 이미 이쪽으로 옮겨졌다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예수 피를 믿는 사람은 이미 용서받았다. 이 소리는 교회마다 안 하는 교회가 없지요. 다 그런 소리하지요. 그럼 어떻게?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인간이 모르는 방식을 사용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범죄 하고 난 뒤에 생명나무 못 따먹고 쫓겨났지요. 쫓겨나고 난 뒤에 네가 잘 알아서 뒷문 열어놨어. 착하게 살면 뒤로 들어 와. 이렇게 했습니까, 행여나 들어올까 해서 야경 돌듯이 천사들이 불 칼 들고 설치면서 순찰 돌았습니까? 순찰 돌았잖아요. 그건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의미는 우리 식으로는 도저히 생명나무 있는 곳으로 천국으로 못 간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돼요. 그 말은 그것을 분명히 한다는 자체가, 단절된 자체가 주님의 사랑 속에 주님이 하는 일 속에 이미 포함이 됐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이제부터 시간 끝날 때까지 풀어봅시다. 이게 수학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에요. 부분집합이 전체집합보다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10*10 된 사각형은 유한이죠. 한계가 있지요. 가위로 잘라봅시다. 자른 걸 또 잘라봅시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유한 속에 무한이 들어가죠. 이걸 인간의 능력으론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버린 현상들이 의외로 인간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아요.

 

영양소 있는 음식 먹으면서도 바싹 야위어간다. 분명히 그건 상사병입니다. 심지어 상사병이 어느 정도로 심하냐 하면,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져요. 그리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고 분명히 살이 쪄야 되는데 어떤 사람이 나를 욕했다는 것이 머릿속에 들어가면 밥을 먹고 뭘 해도 점점 야위어갑니다. 이건 과학적으로 어떻게 규명이 될 수 없어요.

 

또 이런 게 있어요. 소크라테스는 그게 뭐냐고 질문했잖아요. 왜 자꾸 남한테 질문을 해야 되는지 소크라테스는 몰랐어요.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의 진리를 남들이 모르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걸 알기 위해서 질문을 해대는 본성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는 알 길이 없어요. 세상 하나하나 질문해보면 모든 것이 결국 해답이 없어요.

 

목성이 있잖아요. 목성 있으면 가만 놔두면 되지 목성탐사선 주노는 왜 띄웁니까? 달은 왜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엄홍길이란 사람이 세계에서 높은 산 15개 올라갔거든요. 산이 왜 가느냐고 물으니까 산이 거기 있으니까 간다는 거예요. 산이 있어도 안 가면 되지 왜 가는데? 맹목적, 아무 이유가 없어요. 사람은 내가 왜 이렇게 생겼는지 왜 너는 남자고 나는 여자인지 이유가 없어요. 그냥 여자로 태어났어요.

 

부모가 왜 자식을 사랑하느냐? 이유가 뭡니까? 네가 부모 되면 안다고 노래 가사에도 나와 있지만 부모 되도 모릅니다. 왜 내 자식은 예쁜데 남의 자식은 안 예쁜지. 제 자식이 분명히 셋 중에서 제일 못생겼는데 외손녀는 최고로 본다고. 그게 말이 돼요. 조 집사님한테도 밀렸지 김을수 집사님 외손녀한테도 밀렸지 분명히 그건 맞는데 지 외손자는 예쁘다고 하는 건 뭐예요? 그냥 본능이다

 

이것은 뭐냐 하면 부분이 전체보다 커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자기 쪽에서 위로 가요. 자기보다 크고 넓은 걸 생각해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미처 모르는 그 속으로 계속 파고 들어옵니다. 여기서 항상 단절이 일어나요. 부분이 전체를 알지 못하는 그런 방식을 계속 사용합니다. 왜 그러느냐?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네가 죄 짓는 현장이 하나님께선 천국을 만드는 작업 때문에 방향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벌이고 싶은 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내요. 죄 없는 곳에는 의가 없습니다. 지옥이 없는 곳에는 천국이 없어요.

 

아브라함 몸에서 이스마엘 나왔지요. 이스마엘은 저주받게 돼있지요. 저주받게 돼있는 자식을 아브라함이 낳았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이미 저주의 요소가 장착돼있지요. 각자 모든 것 속에 이미 하나님께서 저주밖에 없는 우리 속에서 주님이 찾아오니까 저주만 분명히 있어야 될 자리에서 천국을 실타래처럼 뽑아내는 불가능한 일을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래서 네 속에 내가 들어가는 거예요. 어떻게 들어가느냐? 죄를 유발시키면서 들어와요. 갈수록 죄를 더 깊이 있고 죄를 더 크게 만들면서 판을 키웁니다.

 

성경구절 두 개만 이야기할게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진다고 이야기했고, 전도서 12장에 보면,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인간의 늙어가는 모습을 그림 그리듯이 표현해놨지요. 귀도 안 들리고 맷돌도 안 좋다고 하지요. 전도서 처음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도다 할 때 우리가 헛되지요. 말이 어려워졌는데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주님께서 영적으로 우리를 구원한 건 좋은데 왜 이 세상에는 악인들이 설쳐서 살기 불편하게 만듭니까. 결국 주님이 하신 십자가는 절반의 성공밖에 안 되잖아요. ‘절반’이란 질문을 한 것을 우리교회에 보면 있지요. 제가 절반이라 한 것을 시비조로 나왔지요. 절반이라고 평가를 누가합니까? 이 세상은 영적으로서 1/2이고 나머지 악마가 설치니까 1/2이고 합쳐야 온전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 재림 때 된다고 보는 관찰의 자리를 따로 나가서 자기 자리에서 보는 거예요.

 

제가 답변하기를 이렇게 따라 나간 이것이 주의 뜻이냔 말이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제3의 영역을 우리가 나의 자리로 잡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우리를 어디에 집어넣어야 돼요? 이 안에다 집어넣어야 되지요. 아직도 엉망 속에 내가 엉망한데 일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죄 짓고 있다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은 1/2이 아니고 이게 바로 구원이구나. 죄 짓고 있는 이 모습이 바로 구원받았기에 인식되고 느껴지는 결과물이 이거구나. “주여, 죄인 중에 내가 괴수입니다.” 성령 안 받으면 그런 고백 나올 수 없어요. 성령 안 받으면 산 위는 의미 없어요. 지상에 의미가 있지.

 

지상의 의미는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역량으로 취직해서 돈 벌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가정 꾸며서 행복하게 살면서 뭐라고 핑계 댄다? 주의 은혜입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수해나면 어떻게 합니까? 주여, 우리 서점 어떻게 할 건데? 살아보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우리 행복을 왜 빼앗아 갑니까? 분명히 교회 나와서 땡깡 부릴 거란 말이죠. 왜 본인을 마치 죄인 아닌 것처럼 자기한테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따로 챙기느냐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가 죄 속에 들어옴으로써 불러내요. 너, 밖에 나가 있지 말고 들어와. 그리고 십자기를 그 안에 박아버리죠.

 

그래서 제가 답변하기를 성도는 주님을 배신해야 됩니다. 그분이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베드로처럼 배신해야 돼요. 왜?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이고 최선의 삶은 그겁니다. 사랑하신 예수님을 늘 배신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진짜 이것으로 끝내고 싶어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을 배신해야 되고, 그냥 배신만 한다면 지옥 가지만 배신했음을 우리가 스스로 눈치 채시면 거기서 우리는 고마움과 감사와 기쁨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여, 또 내 가족, 내 새끼, 나밖에 몰랐습니다. 타고난 걸 어쩌란 말입니까?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누가 뭐랬어. 그대로 살라 했잖아. 고칠 생각이야? 고칠 생각하지 마. 너는 평생 가도록 너는 그렇게 해서 죄라는 재료는 나한테 갖다 내.

 

그러면 이미 확정된 의미 속에 하나의 부분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전체 속에 우리는 부분으로써 배신하는 열두 제자들처럼 우리는 십자가를 증거하는 기능인으로 주님의 증인 노릇하면서 살아왔다고 나중에 돌아보면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제가 언제 주를 위해서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습니까? 저는 저 목마를 때만 포카리스웨트 마셨고, 모든 걸 나를 위해서 살았는데 언제 주를 위해서 살았습니까, 라고 질문할 대상이 있다는 게 우리는 행복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아무리 봐도 뭘 하나 지킨 게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우리에게 이미 합격통지서 보내주셨사오니 십자가로 용서받았다는 합격통지서를 귀한 보배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