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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161104a 울산강의-레위기 2장 : 위치의 결합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1장을 번제라 해서 번제는 다 태우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데 다 태운다. 태울 걸 왜 드리라 했느냐는 그 문제가 생기죠. 불로 태워질 걸 왜 바치느냐 말이죠. 바쳤으니까 뭔가 있을 거잖아요. 태우면 없어지지요. 그러면 있는 것과,
오늘 레위기 2장하고 있는데 뭔가 있단 말이죠. 있는데 태우면 없어지거든요. 태워서 없어질 걸 왜 바치라 했느냐 말이죠. 그러면 있다, 없다에서 중간에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흠향하신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있다가 없어지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있는 것이 다 태워지는 겁니다. 있는 것이 연기가 되어 태워지겠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연기를 좋아하시는 거예요? 숯불갈비 종류. 연기를 들이마시고 기뻐했다고 했으니까. 연기가 되는 재료가 사람이 바친 거란 말이죠. 그러면 있다가 없어지는 걸 좋아한다는 말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간주하시는 것을 원하시는 겁니다. 네가 보기에 있어 보이나? 너, 없어져야 내가 기분 좋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존재라 하는데 있음은 하나님께서 안 좋아한다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고 내가 있음에서 없음으로 바뀔 때 좋아한다는 겁니다. 있는 걸 왜 싫어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거기 있다고 보면 이건 있음과 있음 사이에 거래가 형성돼요.
“하나님, 저 있습니다. 하나님, 거기 계시지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에 잘 계십니까?” “있다. 어쩔래?” “그러면 있는 내가 하나님 앞에 시키는 대로 순종하겠나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저를 보시고 기쁘게 받으소서.”라는 거래가 형성되겠지요.
이런 제안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순종을 만약에 기쁘게 받는다면 그 기쁨의 전제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여기 있음이 되는 겁니다. 이걸 somebody, 거기 있다. 그런데 없음은 뭐냐 하면, nothing이 되거든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걸 ‘I have nothing.’이라 해요.
기어이 나를 포기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표현할 언어적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면서도 I have nothing이니까 ‘I’가 있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도 제가 여기 있으니까 괜찮은 말을 드리는 겁니다, 라는 티를 내는 거예요. 차라리 욥기 마지막처럼 아무 소리 안 하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에요.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
제사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취지가 뭐냐 하면, 뭔가 거기 있더라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생각한 것은 지상에서 하나님이 만들어서 그걸 도로 회수하는 것이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의 취지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만들어서 알아서 회수하시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는 위에서 출발해서 나를 경유해서 하나님이 나를 가지고 원하고자 하는 것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회수한다면, 우리가 제사하면서 따로 챙길 게 있겠어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레위기를 보면서 “하나님, 번제를 시키는 대로 잘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복 주세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번제를 내가 드리고 우리가 드렸으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은 우리가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오늘 레위기 2장 하는데,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유대인들이 이걸 보면서 “하나님 소제를 드릴 테니까 준비된 약속된 하나님이 마련하신 제사 드렸을 때 주실 복을 우리 것으로 주시옵소서.” 이렇게 된 거예요. 이건 거래가 되는 겁니다.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하나님 것을 우리한테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돼버려요.
그렇게 되면 레위기에서 번제나 소제 드리면서 이미 제사 할 때부터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겠습니까? 뭔가 노리고 드리게 되면, 제사가 노동이 돼요. 노동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이 땅에 와서, 창세기 2장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그냥 공짜로 다 주신 거예요.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네가 임의로 먹되, 모든 것을 공짜로 얻어 챙긴 거예요. 그러면 아담의 본성은 공짜로 얻어 챙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몸이 아담이에요.
그런데 쫓겨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바뀌었냐 하면, 노동을 하지 아니하면 일하지 않으면 이마에 땀 흘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요.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환경 덕입니다. 모든 게 갖추어진 환경이에요. 그리고 그 안에서 아담과 하와조차도 환경의 일부가 돼요. 이게 어렵습니다. 이게 어렵습니다.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환경의 일부란 것은 독자적인 가치는 없다는 겁니다. 독자적인 가치를 의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도 환경의 일부라면, 그 환경에 맞추어야 돼요. 나, 인간은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을 환경의 일부로서 부응해야 될 임무와 책무가 있는 겁니다. 그래야 전체 에덴동산 환경이 돌아가게 돼있어요.
그런데 뱀은 인간에게 찾아와서 독자적인 가치를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처럼. 오늘날 우리들의 하루하루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에요. 악마가 우리 조상 아담에게 준 마음이 대대로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유전요소dna에 실려서 온 게 아니고 이 세상 자체가 죄악 된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출생하다보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그걸 옳다고 당연한 것처럼 주어지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기대한 것은, 이 에덴동산은 죽음이 없는 동산이기를 원했습니다. 따먹지만 않으면 죽음은 없는 거예요. 그러나 따먹으면 죽음이 있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결국 아담과 하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창세기 3장에서는 선악과 따먹었는데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돼있고, 창세기 4장에 들어가면 선악과 따먹은 그것이 죽어야 될 이유가, 그냥 늙어죽는 게 아니고 뭔가 이유가 있더란 말이죠.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는 관계가 형성돼있으면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저주받게 돼있어요. 가인은 이 땅에서 저주받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가인이 하나님이 원하는 관계는 뭡니까? 우리에게 알려준 적 없잖아요. 알려줬지요. 동생을 통해서 알려줬습니다. 동생과 하나님의 관계가 하나님이 원하는 관계인데 가인은 거기서 소외된 거예요. 동생과 하나님의 관계? 저 관계와 현재 나와의 관계는 다르네. 다른 이유가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가인이 역할을 담당해야 되는 겁니다. 뱀의 후손이 이 땅에서 계속 구체화되어야 되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에 의해서 맞아죽는 기어이 발꿈치를 물려야 돼요.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서 발꿈치를 물릴 때 비로소 뱀의 후손이 자기 정체를 노출하게 돼있어요. 여자의 후손은 항상 역사 속에 같이 등장해서 하나님의 뜻 때문에, 의지 때문에 희생당하는 현장에서 비로소 뱀의 후손은 자신을 감추고 싶어도 그 순간 노출되게 돼있습니다.
아벨이 있어야 가인이 왜 나쁜지 등장하지요. 아벨의 제사가 없는 한 가인의 제사는 그 자체로 왜 나쁜지 몰라요. 가인이 드린 제사가 오늘 레위기 2장에서 하는 제사입니다. 곡물로 드리는 것, 소제라고 해요. 작다고 소제가 아니고 이런 뜻입니다. 소제素祭, 이 ‘소’자가 흴 소, 하얗다. 하얀 제사. 영어로 시리얼, 곡물이란 뜻이에요. 곡물로 드리는데 갈아버리면 하얗게 나오잖아요. 가루로 해서 하얗게 드린다.
2장 1절,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제사 드렸잖아요. 내놓으세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입니다. 시키는 대로 짜장면 말고 소면. 하나님이 원하는 곡물제사를 시키는 대로 갈아서 했단 말이에요. 꿀 넣지 말라고 해서 안 넣었어요. 그리고 누룩 넣지 말라고 해서 안 넣었어요. 소금 치라 해서 소금 쳤어요. 뒤에 다 나옵니다. “이제 복 주실 일만 남았네요, 하나님.” 이게 바로 성경해석을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레위기에서 시키는 것은 우리가 제사 드렸다는 그 인간을 nothing,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요. 일종에 유령 같은 인간. 제사를 드리는 와중에 우리 자신이 제사 드리는 것이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려요. 그 시키는 취지 안에 포함돼있어요. 누구든지 제사를 드리거든 제사 끝나고 난 뒤에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아니군요.
이게 바로 제사 드린 효과가 되도록 제사를 드리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인간이 제사 드리고 난 뒤에 많은 민족 가운데 살아있는 하나님 앞에 제사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민족밖에 없으니 우리는 특별한 선택된 구원의 백성이라고 그때부터 우기기 시작한 겁니다. 그게 못 됐어요. 그게 탈이 난 겁니다.
또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이런 해석들이 있어요. 여기서 곡물을 드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의미하고, 가루가 됐다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의미하고, 그 다음에 꿀을 넣지 말라는 것은 자극적이고 탐욕적인 것을 금하라는 주의 뜻이고, 소금을 치라는 것은 부패하지 말라는 뜻이니까 우리가 소제를 드리면서 우리 마음이 부패하지 말고 세상 탐욕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품성을 본받아서 우리가 헌신합시다.
그렇게 해서 지옥 갑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드리고 저주받은 천국은 너희 것이 아니고 지옥이 너희 것이다. 차라리 백부장, 이방인들이 천국을 차지할 것이라고 할 때 그러한 취지 때문에 그들을 지옥 보낸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취지는 시작을 우리부터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부터 시작해서 이 땅의 인간을 상대로 하나님만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서 그걸 회수한다 했지요. 가져가는 거예요. 우리를 이용해먹은 거예요. 제사 드리는 자를 이용해먹고 하나님 하는 일에 대해서 스스로 만족하고 우리는 탈락시키고. 뭘 드렸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다 떼버리는 겁니다.
소제, 번제 드려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예수님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 필요 없네요. 사도 바울이, “여러분, 레위기가 폼으로 있는 줄 알아요? 레위기대로 제사 드립시다.” 이렇게 해야지.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까? 그럼 곡물 가져오세요. 옛날에는 가루로 했지만 지금은 현찰로 바꿔서 내면 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어요. 5대 제사인데 달랑 십일조만 내고 말 겁니까? 다 갖다 바쳐야지. 수시로. 빈손으로 오지 말고. 없음이 노출되지 않는 것은 백날 헌금 교회에 갖다 바쳐도 이단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하면, 제사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없음으로 이끌 수밖에 없는가? 어떻게 없다는 것이 생산되게 하는가? 그걸 우리가 지금부터 생각해봐야 돼요. 지금부터 진짜 어려운 이야기인데 하여튼 할 수 없어요. 해야 되니까.
번제, 오늘은 소제, 레위지 3장에서는 화목제, 그 다음에 4장에 들어가면 속죄제, 속건제가 있는데 둘 다 죄 값을 치러야 된다는 제사고.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는 죄를 치렀으니까 홀라당 다 가져가고, 속건제는 피해 입은 사람에게 +20% 배상하는 겁니다. 백만 원짜리 티비를 부셨으면 백만 원 주면 안 되고 백이십만 원 줘야 된다니까요. 그렇게 해야 속건제가 완성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사가 일상적인 삶까지 연결되는 거예요.
번제는 소제와 같이 들어가요. 소제는 식물성이고 번제는 동물성. 다 태운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가루 드린다고 주께서 가루 마시는 게 아니고 가루를 불로 태워요. 그 다음에 속죄제 따로 드리고 화목제를 마지막에 드리는데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받고 난 뒤에 남은 음식을 백성들이 먹을 때 우리가 드린 것을 나눠먹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단 받으시고 내려올 때는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으로 배급받듯이 먹기 때문에 하나님과 백성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동일한 음식을 평등하게 다 같이 받았으니까. 하나님이 먹는 음식을 우리도 먹었으니까 하나님과 하나의 가족이 되는 겁니다. 가족이란 소풍 가서 같은 김밥 먹는 게 가족이에요. 하나님이 먹는 음식을 백성이 함께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내용이 유출되어 요한복음 17장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 유출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연설문이 유출됐어요. 거기에 보면, 내가 아버지와 하나가 된 것처럼 저희들과 나와 하나가 되게 해 달라. 하나가 된다면 몸만 하나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 강의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되지만 그건 제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저는 그냥 갑니다.
지금 제가 무슨 뜻으로 자꾸 뜸을 드리느냐 하면, 왜 번제와 소제가 구분되느냐, 이걸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려면 제사 드리라 하면 되는데 왜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로 무슨 의도로 구분 짓느냐는 겁니다. 구분 짓는다는 말은 경계선으로 나눴다는 말이죠. 나눴다는 것은 경계선 너머로 넘어와서는 안 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다섯으로 구분됐는데 신약에 오면 로마서 3장에 보면 모든 제사가 하나가 돼버려요. 이사야 53장에 예수님이 채찍을 맞음은 너희가 나음을 입고하는 그때는 속건제물이 등장하죠. 그런데 로마서 3장에는 화목제물이 등장합니다. 율법 외에 한 의를 준비했으니 하나님이 친히 화목제물이 되었느니라. 요한일서 4장에 보면, 하나님 사랑은 여기 있으니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이 됐다고 했어요.
그러면 화목제물로 마감이 된다면 처음부터 화목제물 하나만 드리면 되지 번제, 소제 왜 드리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우리가 따질 이유가 있어요. 왜 구분했는지 경계선을 지어놓고 나중에 화목제물로 통합시켰으니까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그 경과를 그 과정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되지요. 제사에서.
제가 이런 걸 따지는 이유가 골치 아프게 하지 말고 알기 쉽게 고기 잡으라 하면 고기 잡고, 곡물 갈라 해서 곡물 드렸으면 그냥 갑시다. 이렇게 되면 행함으로는 지옥 갑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 저 여기 있어요. 시켜만 주이소.” 이 말은 뭐냐? 시킨 대로 할 테니까 시킨 대로 한 근거로 천국 넣어주세요. 세상에 그런 천국 없습니다. 이건 흥정이고 거래라니까. 한국교회 전체가 그렇다할지라도 그건 인간들이 지어낸 천국인데, 사실은 악마가 그렇게 한 거예요.
시작을 하나님부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회수할 때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의 소나 곡물을 받는 게 아니에요. 마지막에 받는 것은 인간이 드릴 수 없는 것을 받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곧 제물이고 예수님이 번제요, 소제요, 속죄제요, 속건제요, 화목제니까. 인간은 nothing이니까. somebody, 거기에 누가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경유하는 거예요. 이걸 언약의 대상자라 해요.
원래 출애굽기 4장에서 언약이란? 이것부터 설명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기 위해 인간을 상대로 기준점으로 삼은 것이 아브라함언약의 시작이에요. 아브라함에서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같은 인간끼리 맞대어서 우리가 이렇게 해서 축복 받자. 그러면 저주받아. 인간들이 아이디어를 아무리 끄집어내야 하나님께서 그런 견해를 인정하지 않아요.
학생이 문제내고 학생이 다 풀면 그건 시험 치나마나 아닙니까. 출제자는 따로 있어요. 천국의 시험문제는 따로 있다니까요. 시험문제가 이 땅에서 유출되어도 비밀이에요. 숨어있어도 비밀이고 유출돼도 비밀이에요.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비밀인지 아닌지 그것조차 구분이 안 돼요. 성령을 받은 자만이 이것이 하나님의 문제고 정답인 것을 아는 거예요.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 지옥 기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용어야 유통하고 있지요. 예수, 삼위일체, 십자가, 언약, 유통되는 단어, 개념들이 많은지 몰라요. 하지만 하늘나라 날아다닌다고 하나 잡아서 십자가 괜찮네. 예수 괜찮네. 난 부처 안 믿고 예수 믿을래. 쇼핑하듯이 쇼핑바구니에 담아서 내밀면 그게 기준입니까? 발길로 차버려요.
인간세상은 언어의 세계에요. 괜찮은 언어 잡으면 괜찮은 인간된다고 그렇게들 협의한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정치판에선 욕을 하더라도 교회에서 그렇게 안 하잖아요. 교회는 자칭 고상하고 거룩하고 성스러운 집단으로 여기니까. 그렇게 모으면 하나님이 받습니까? 어디서 쓰레기를 모아서, 천국이 쓰레기장인줄 아나. 이 쓰레기 왜 들고 왔는데? 하나님 보세요. 이게 예수, 언약, 십자가, 성령, 삼위일체 있잖아요. 네 자체가 쓰레기야. 왜 들고 왔느냐 말이죠.
진짜 하나님이 출제하신 내용에 접촉이 된 사람은, I am nothing.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내가 죄인이니, 의인이니 하는 구분도 의미가 없다니까. 이건 선악적인 의미거든요. 주님께서는 선악으로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생명은 생명나무다움을 훼손한 적이 없어요.
어떤 목사가 레위기를 이렇게 가르쳐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천사들이 불 칼 들고 지키는 것을 아시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불 칼 든 천사를 몇을 빼돌려서 길은 내줬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참 하나님께서 줏대도 없다. 가는 길 막을 때는 언제고 길을 트는 건 뭡니까?
저 같으면 그 자리에서 이렇게 질문했을까? “목사님, 그 길이 차로 가도 돼요? 차타고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이 열려있습니까?” 세상에 천국 가는 길이 안 열려요. 지금까지 열린 적이 없어요. 참 어쩌면 좋아요. 모든 신학교 교수와 목사들이 최태민입니다. 무당이에요. 그저 사람을 좋게 하는 거예요. 너무 고생했으니 죽어서는 호화호식하려고. 죽어서라도 보상 받아야지. 예수 믿으면 구원받겠지. 누구 마음대로 구원받아요. 어디서 예수라는 쓰레기 들고 와서 구원받는다고? 그것 쓰레기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주님, 제가 믿었습니다.”가 돼버리면 나의 있음이 계속 예수란 것에 붙어있어요. 내가 믿습니다. 내가 십자가 믿었습니다. 내가라는 쓰레기가 늘 붙어있어요. 쓰레기가 원한 그 예수, 그 십자가는 같은 쓰레기입니다. 전혀 살아있는 예수님도 십자가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지금 제 질문이 뭐였습니까? 왜 하나님은 한 분인데도 불구하고 프리즘을 통해서 세상에 내려올 때는 다섯 가지로 구분 짓느냐? 구분 지었다는 것은, 각각의 칸막이 안의 내용이기 때문에 구분 지은 거예요. 그럼 다르게 했으면 계속 다르게 가야지 왜 신약시대에서는 화목제물로 통합이 돼버리고, 통합될 때 취지가 무엇이며, 통합되더라도 화목제물 드린 사람만 들어온다고 하면 되는데 화목제물 드린 사람도 지옥 보내면 어떻게 돼요?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시내 산에서 제사 드리라 해놓고 누가 중간에 가로채는 분이 있지요. 구약 때는 하나님의 이름이죠. 하나님의 이름이 가로채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다섯 개로 나눠놓고 통합했다는 말은, 그 일을 주의 이름이 진행시켜서 마지막에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가 제물이고 그분이 제사장이 그분이 성전이 되셔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다 이뤄놓고 그 다음에 다 이룬 효과로써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니까 성령 받은 사람만, 이미 끝났네. 심판 끝나버렸네. 일이 벌써 마무리됐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릴 때 그런 경우 있을 거예요. 옛날에 딸로 태어나면 공부보다도 집안일 많이 시키잖아요. 여자는 공부 할 필요 없어. 살림 배워서 남자 잘 만나면 팔자 고친다. 남자 잘 만날 조건을 갖춰줘야 되는데 무조건 시집 잘 가면 팔자 고친다는 거예요. 어쨌든 손님이 왔을 때 부엌 일 시키는 거예요. 집안에 잔치 같은 것이 있어서 올케들이 오게 되면 제일 꼬맹이 소녀는 도망칩니다. 불러서 일 시킬까봐. 다 끝나고 난 뒤에 와보면 손님은 다 가고 설거지하고 있어요. 그때 얼마나 기분 좋겠어요. 이미 일 끝났어. 소제 드린 적도 없고 번제 드린 적도 없고 화목제 드린 것도 없어요. 누가 내 대신 다 해버렸어요. 이제는 음식 남은 것 먹으면 돼요. 너는 한 것도 없으면서, 하는 타박 듣더라도 잡채든 뭐든 먹기만 하면 돼요. 고생은 자기 말고 올케들이 다 했겠지요.
이걸 하나님이 시작한 일을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 스스로 흡족해하셔요. 사람은 일체 못했다는 자체를 하나님은 유일한 기쁨으로 생각하고 하시는 거예요.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서 하시는 겁니다. 그게 언약의 대상이에요.
언약의 대상은 이름이 바뀌어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으로 바뀌어요. 아브람은 아버지란 뜻이에요. 동네 어르신, 땅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버지에 해당되지 않는 아버지 범주 바깥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약속의 아버지에요.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출애굽기 4장에서 어떤 아버지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낳아요. 아들이 되지요.
하나님의 뜻은 왜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냐, 그리고 내 백성이 내 백성에 머물지 않고 아들이냐?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미 아브라함언약부터 이 땅에서 구체화시켜 나가는 겁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돼있어요. 레위기 2장 14절,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
여기 첫 이삭이죠. 어려우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해서 아들 됨을 성취시키는 그것을 주께선 회수하고자 하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아들 말고 죄밖에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겠는가? 등장하는 방법은 아들의 원형이 있어요. 아들의 원형은 선악적인 체제가 아닙니다. 생명나무 체제에요. 생명나무 체제는 선악체제와 완전히 칸막이 쳐져 있습니다. 선악체제에 있으면 어떤 자도 생명나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천사들이 화염검 들고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목사처럼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는데 이제는 길을 냈다는 말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선악과가 절대로 생명나무에 침입해서도 안 되고 침입하면 천국이 안 돼요. 지옥이에요. 선악을 아는 자가 절대로 생명나무로 갈 수 없습니다. 그 입장은 지금까지 달라진 게 없어요. 천국 백성은 다른 말로 아들 되기는 아들과 아버지 관계에서 아들이 주의 이름으로 오던지 하여튼 이 땅에 와서 아들 만들기를 시작해서 그것이 성취될 때 비로소 아들이지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아들 되는 법은 없어요.
정말 누구든지 이걸 알아야 돼요. 이것 모르면 최태민한테 다 속아 넘어갑니다. 구원받고 싶지요? 예수 믿으세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수를 누가 믿는데? 본인이 믿는다고 우기는데요. 그 예수가 열 명이면 열 다 달라요. 백 명이면 백 다 달라요. 세상에 그런 구원은 없어요.
성경을 안 봐서 그런 게 아니고 성경을 만 독을 해도 소용없어요. 소제 드리라. 여러분, 소재 드립시다. 드릴 때 어떻게 드립니까? 빻았으니까 죄악 된 마음을 다 빻아서 깨끗한 마음으로 드립시다. 깨끗한 마음으로 천국 간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천국은 그런 사람 안 받아요. 생명나무 미안해서 율법 줬습니까? 너무 고생한다고. 내 조치가 너무 과했지? 무슨 장난도 아니고.
사람들이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납득이 되도록 해달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야기하면 납득이 되었습니까? 왜 납득이 돼야 되는데. 당신이 뭔데 설득해야 돼. 설득이 안 되도록 해야지. 그래야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티가 날 것 아닙니까? 돈 갖다 바친다고 구원돼요? 돈은 최태민한테 다 갖다 바쳐놓고.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가졌어요. 그런데 그것 아들이 아니란 겁니다. 나란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둔 적이 없다는 거예요. 육에서 난 아들을 둔 적이 없어요. 육은 끝까지 생명나무에 가면 안 돼요. 왜? 선악체제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선악과 아는 인간, 그냥 인간은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구원은 인간 속에 주어진 말씀이 자체적으로 만들어낼 때 거기서 새로운 인간이 등장할 때 하나님의 백성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해요. 참된 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등장하는 것이지 인간과 거래하거나 흥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실수해야 되고 반드시 오류를 나타내야 돼요.
인간인 이상 이렇습니다. 출생해서 성장하고, 성숙하고 그 다음에 죽습니다. 인간이 태어났다. 갓난아이가 육체적으로 성장한다. 정신적으로 점점 어른이 되면서 성숙하지요. 그런데 죽습니다. 주님께서 이 전체를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운명으로 본다면, 주님께서는 번제나 제사를 통해서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여기서부터 출발해요. 그러면 질문이 이렇게 돼요.
어차피 죽을 것을 왜 나는 성숙했다고 착각했지? 왜 자부했지? 어차피 하나님이 나를 죽일 건데 나는 이렇게 성화됐습니다. 그렇게 경건하다고 자부한 이유가 뭐지? 그 이유를 알려면 그 다음 단계로 들어가지요. 내가 어차피 죽을 것, 한평생 살고 있다고 무슨 마음으로 그런 착각을 했지, 라고 돌아보게 합니다. 20대, 30대에 야구방망이로 맞아가면서도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그런 착각이란 잘못을 왜 했지? 어차피 주께서 나를 죽일 걸. 그 다음에 더 나갑니다. 어차피 죽을 것을 태어나야 마땅하다는 착각을 왜 했지?
이게 바로 욥입니다. 하나님이여, 이럴 거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태중에서 죽이지 않고 왜 태어나서 고생하게 합니까? 욥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믿음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순서를 출생, 성장, 성숙, 죽음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죽음부터 거꾸로 가게 하는 거예요. 이 죽음에 누가 합류하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미리 당겨서 죽은 게 돼요. 그 죽음 속에 하나님의 진짜 아들이 뛰어들게 되면 지상에서 아들 만들기 시작되는 겁니다.
이런 죽음 입장에서 아들이 된 사람은, 출생부터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고 죽음부터 질문을 던져요. 십자가 진 내가 경건도, 성숙도 그것이 바로 죽어 마땅한 죄였군요. 내가 하루하루 살았다, 은혜라고 하지만 사실은 살고 싶은 죄의 발로군요. 죄의 고백에 불과하군요. 살고 싶어서 감사했던 것은 죽음을 잊어버린 착각, 이게 바로 죄군요. 그리고 나는 태어나야 마땅하다는 그런 생각도 십자가 앞에서 어차피 죽을 입장에서는 해선 안 될 생각이었군요. 주여, 이런 인간 선악과체제로 죽여주신 것,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그 원칙을 고수하신 하나님께 찬양드립니다. 그 원칙을 변함없이 저에게 퍼부어주신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을 저는 찬송합니다. 이게 주의 뜻이에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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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4b 울산강의-레위기 2장 : 위치의 결합
(강의:이근호 목사)
제가 첫 번째 시간에 말씀드릴 때 어차피 제사가, 예수님 한 몸이 제물이 된다면 번제면 번제, 화목제면 화목제 처음부터 하나의 제사만 드리면 될 텐데 왜 다섯 가지로 벌려놓고 신약시대는 그것을 하나로 하느냐 말이죠. 윷이 네 개인데 하나로 모아지잖아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관계가 지상에 구체화되는데 그걸 지상에 아들다움을 표현해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들 맞아요. 어떤 아들인지 지상에 마음껏 발산하는 조치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고 율법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되신 주님이 같이 개입하신 거예요. 피조세계 자체가 주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이건 수천 번 이야기해도 취지를 알아야 돼요. 피조물 본인을 위해서 독자적으로 있는 게 아니에요.
에덴동산은 그 자체로 환경이라 했지요. 그리고 인간은 환경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고 환경의 일부가 돼요. 환경을 즐기는 분은 하나님이고 아들 되시는 예수님이지 아담이 에덴동산을 즐기면 안 됩니다. 에덴동산을 아담이 즐길 것이라면 위험요소가 철저하게 배제되고 없어져야 돼요. 그러면 선악과라고 위험한 요소는 처음부터 중앙에 없어야 돼요. 그 위험한 폭탄을 왜 중앙에 심어놓습니까? 한 가운데에 죽음이라는 걸 왜 심어놨겠어요?
환경의 일부라는 거예요. 환경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고 주인공은 따로 있는데 어떤 분이냐? 그것은 그분이 지상에 내려오면 알겠지요. 언약 따라서, 율법 따라서, 말씀 따라서 오시면 알겠지요. 그냥 왔다 가시면 되는데 이 땅에 뭘 생산하려고 하느냐? 하나님이 만드신 천지창조는 아무리 마귀가 설쳐도 절대로 취소되면 안 돼요. 천지창조는 완성을 봐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는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완성시켜 버려요.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아들다움을 이 범죄 한 인간들 속에서 어떻게 구현하느냐? 이 문제와 관련돼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시작하느냐?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구분하는 것이 하나하나가 영토에요. 영토는 독자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구분된 영역이에요. 제가 영토란 말을 쓰는 이유가 그냥 땅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땅은 주인이 없어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는데 땅, 대지가 인간이 개입하든지 동물이 개입하면 영토가 돼요. 새들이 짹짹거리면 노래하지요. 여기에 반드시 반복구가 들어가요. 이것은 내 영토다. 오지 마라. 그런 뜻이에요. 개들이 오줌 누는 것도 내 영토라는 겁니다. 그러면 땅이 있고 영토가 있느냐? 인간의 입장에서는 땅이 있고 영토가 있지요. 땅은 넓고 영토는 각자 본인이 처해있는 환경 따라 제한적으로 동그라미 친 영토가 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땅이 있고 영토가 있는 게 아니고 천지창조가 전부 다 하나님의 아들, 주님의 영토가 되는 목적으로 천지창조하신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은 우리가 보기에는 점령할 정복할 땅이 있고 지금은 이것밖에 안 된다. 여기서 내 가치를 계속 반복함으로써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떤 강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토마스 홉스란 철학자가 모든 인간들은 이기주의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대들기를 왜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느냐고 하니까 홉스가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당신은 밤에 잘 때 문 잠그고 자느냐, 열고 자느냐? 문을 왜 잠급니까? 내 것 안 다치고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잠그지요. 그게 이기주의지요. 밤에 이기주의가 노골적으로 노출되지요. 이래도 인간이 이타적입니까? 어디 밤에 문 열어놓고 자 보지.
영토란 땅+권력. 그래서 힘이 없는 사람은 노숙자 됩니다. 영토를 마련하려면 돈을 주고 구입해야 되죠. 이 세상 모든 인류의 전쟁은 자기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남아있는 땅을 내 것으로 편입시키는 활동이 전쟁입니다. 그래서 인간들 입장에서는 아직 정복 되지 않은 땅이 따로 있고, 그리고 실효적 지배하고 있는 영토가 따로 있어요. 독도는 누구 땅이에요? 다케시마? 독도는 우리 땅, 한국의 영토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인간세계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는 지구의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지요. 주인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악마의 종들이 각자 영토를 내 것이라고 해놓고 기도는 얼마나 한다고. “주여, 내 영토 다치지 않게 해주시고, 밤에 문 잠그고 자면서 내 재산 지켜주시고, 내 노동으로 아파트 샀는데 물새지 않게 해주시고.” 도대체 여긴 영토 관리가 안 돼.
주님께서는 이것을 자기 아들 됨을 드러내는 영토로 바꾸는 조치를 5대 제사를 동원해서 실시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땅이 있고 영토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영토들의 영토가 돼요. 그러니까 인간적 안목으론 땅이 있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어는 한 곳도 빈 땅도 의미 없는 게 아니고 다 필요해서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야기했지요. 네가 황무지에 비 오는 이유를 아느냐? 텃밭이 아닌데 시금치, 호박, 고구마 안 심었는데 비 왜 옵니까? 이 말은 인간들이 영토개념은 자기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자기 생존에 필요한 것, 자기한테 유용가치가 있는 것, 자기한테 의미 있기 때문에 이 땅은 나에게 영토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이기주의적이고 자기 소유화시키는 거죠.
그런데 원래 주인은 주님입니다. 주님이 그 영토를 가져가게 되면 그냥 빼앗긴 게 돼요? 소유자한테 회수당한 게 되죠. 맏아들은 주님인데 아들들이 안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안 나와요. 예수님 혼자만 천국 차지합니까? 천국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지요. 백성들이 있을 때 그냥 있으면 안 되지요. 이들은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들로 만들어서 구원하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데도 제가 이야기하면 처음 듣는 것처럼.
그냥 구원 못 받아요. 아들 아닌 자가 아들 되어서 들어가야 돼요. 인간 자체가 달라져야 돼요. 아들이 되려면 아들의 영을 받아야 돼요. 그것은 기존의 모든 인간들 행위가 아들 되게 하는 성령에 대해서 대립되는 성질을 드러냄을 노출시키는 현상을 동반해서 아들 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만들려는데 우리는 그 아들 되는 것보다도 내 영토를 소유하는 것을 자기 행복인양 여기고 기어이 주께서 주의 것이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붙들려고 하는 겁니다. 너는 죄인이니까 가질 자격 없어, 하면 우리는 안 들을란다. 이건 울산에서 노동해서 적금 부어서 산 내 아파트인데 하고 붙들고 있어요. 왜냐? 그것은 자기 노동이 자기 주체성이기 때문에.
인간 속에는 자기 과거사가 들어있다고. 그야말로 쓰레기봉투 그냥 내놓으려니까 아까워서 쓰레기봉투 발로 밟고. 그저 내 것이라고 꽉꽉 담아서, 거기에 찬란했던 과거사가 꽉 담겨있습니다. 목사들 같으면 이 교회 와서 교인 몇 명 늘었고, 선교사 몇 명 보냈고, 예배당 지을 때 돈 되는 사람들 협박하려고 부흥사 불러서 예배당 지었다. 따라서 감히 니가 날 쫓아내. 자기 과거사입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꾸는 작업이 없으면 아들 아닙니다. 내가 아들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내가 소제 드리고 번제 드려서 아들 된 게 아니라는 과정이 나와야 돼요. 그것 하기 전에 영토부터 먼저 관계합니다. 우리 생각은 땅이 있고 영토 있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남은 땅은 하나님 것이지만 지금 영토된 것은 내가 고생해서 얻은 땅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영토가 있는 한 I am nothing이 아니죠. 나도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우기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원래는 뭐냐?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영토들의 영토. 앞의 영토들, 죄인들의 영토, 죄인들의 구주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물론 이 세상 속에 자기 백성 있지만. 요한복음 17장에 겟세마네 기도에 세상 중에 내 백성만 사랑한다고 나와요. 요한복음 3장에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 전체를 사랑한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 중에 내 백성만 사랑해요.
영토들의 영토란 너희들의 영토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말하는 세상, 현실, 이런 것들은 일체 잘못된 개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게 아니고 영토들의 영토에 오신 거예요. 그러면 영토들은, “주님이십니까? 가져가, 가져가.” 우리가 주는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헌금을 낸다는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시편 50편에 나오지요. 사슴을 바치고 소를 바친다 할지라도 바친다는 게 성립 안 된다는 겁니다. 소가 그 자리에 있어도 내 것이고 사슴이 그 자리에 있어도 내 것인데 네가 바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바치라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이라고 우긴 상한 심령만 받아요. 시편 51편에. 주여, 주께서는 번제도 원하지 않으시고 속죄제도 원하지 않으시고. 다윗 그런 이야기할 때 레위기 1장, 2장을 몰랐어요? 알아도 너무 알아요. 하나님께서 제사법을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이 법을 보고 우리의 감출 수 없는 영토개념이 반응을 드러낸 겁니다.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졌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고 백성 된다. 이렇게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고 율법이 우리에게 작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상한 심령이 되게 하는 능력이 율법 안에 이미 포함돼있거든요. I am nothing.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죠.
아무것도 아니란 말을 여러 번 이야기하는데 이게 무슨 취지냐 하면, 선악을 이것은 나쁜 거니까 죄고, 이것은 의라는 판단을 내가 한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판단은 선악체제 안에 갇혀있는 꼴이기 때문에 그 인식이 있는 한 주께서 천국에 안 받아줍니다. 그렇다면 선악의 인식을 마귀가 심어놨기 때문에 성경은 천 독, 만 독을 해도 바리새인은 나쁜 사람이고,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는 좋은 분이다. 이런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나는 바리새인 하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돼야지. 이런 생각이 나겠지요.
신데렐라 동화를 본 어린아이가, 나는 신데렐라 구박한 언니가 되겠다는 어린아이는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성도라면 제가 언니라고 손들고 나올 때 그게 바로 신데렐라 동화를 주신 취지에 맞습니다. 영토들의 영토에요. 하나님께서 영토라고 인정한 것은 선악과 자체가 죄라는 걸 알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에 부합되는 거예요. 합당한 거예요. 이 영토들의 영토의 주인께서 어떻게 빠져나왔습니까? 십자가, 죽음으로 빠져나왔어요.
이 말은 어떤 누구도 주님 뒤따라 나올 위인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죽음으로 빠져나온 주님의 세계, 주님께서 영토들의 영토의 주가 되실 때 완성 단계로 나갈 때 관계가 십자가라면, 이 부활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못 따라 나왔다는 말도 되고, 더 나아가서 자기 영토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아들 나라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예수님이 했던 십자가의 능력을 입지 않고서는 마귀 세계에서 빠져나올 위인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 능력을 예수도 아닌 우리가 무슨 수로 만들어내겠습니까? 접근력? 조금씩 능력 키우면 나중에 큰 능력 되는 겁니까?
그래서 여기 갔던 예수님께서 도로 우리에게 십자가 능력을 주셔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영, 성령세례지요. 성령 안에는 십자가 능력이 포함돼있습니다. 그건 이미 합격통지서가 돼요. 옛날 국민학교 입학식하면 손수건 달지요. 그게 성령입니다. 합격통지서를 바깥에 달면 까불다가 떨어져요. 아예 마음속에 집어넣어요. 집어넣고 못 빠져나오도록 해버립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거예요.
여러분이 혹시 천주교 마리아 초상화에 심장 부분이 바깥으로 크게 나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마리아가 왜 백인인지 도대체. 원래 황인종인데. 하여튼 심장에 칼 꽂은 것 봤지요. 원래 심장은 안에 들어 있잖아요. 만약에 심장이 마음이라면 헤집고 해도 우리 안에 박혀있는 성령은 빼낼 수 없습니다. 수술해도 안 빠집니다. 참 희한한 팔자 된 거예요.
팔자 타령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팔자입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달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어떤 팔자?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게 아들 되는 팔자.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생명나무 길로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갈 수 없으면 못 가는 거죠. 못 가는데 엘리야와 모세는 왜 천국 가 있느냐? 죽었잖아요. 그럼 우리도 늙어 죽으면? 늙어죽어도 안 돼요. 늙어죽는다고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관계에서 죽임을 당해야 돼요.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들관계에서 죽음은 예수님만 홀로 갖고 있는 능력이지 다른 사람이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로 죽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어요. 참 이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가슴 아픕니다. 이천 년 동안 기독교가 이걸 몰라요. 그냥 장렬하게 순교하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런 것 없어요. 예수님의 순교의 능력만이 우릴 구원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결혼식장에서 잔치국수 먹고 뷔페 먹는 그것도 순교에요. 그것도 죽도록 충성하는 겁니다. 물론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충성하는 거예요. 왜? 가슴 자체가 성령의 엔진 부분에 있기 때문에. 너는 오늘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다가 죽어라, 하면 노래 부르는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이 될 수밖에 없는 기구한 팔자가 그거에요. 파마를 하든지 단발을 하든지 그게 순교에요. 단발 순교입니다. 이번엔 파마할까? 파마 순교에요. 파마 했으니까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할 게 뭐가 있어요. 먹든지 마시든지, 라고 범위를 넓혀놨는데 뭘 따로 합니까? 무슨 영광 되는 행동이 따로 있어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했습니다. 망하고 나면 찬양이 가장 잘 된다고. 집안 망하고 이혼하고 난 뒤에 찬양하면 가장 잘 되지 노래 연습해서 하면 찬양이 아니에요.
오늘 강의대로 하면 영토에 대한 포기가 되면, 이것이 전에는 영토가 우리의 환경이 됐는데 예수 믿는 팔자가 되면 영토들의 영토가 우리의 환경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사나죽으나 파마를 하나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나 모든 것이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주의 것이 되면서 그 십자가 죽음으로 이미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주의 증인이 되거든요. 주의 증인 노릇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치 다시 이 땅에 오셔서 다시 공생애 사는 것처럼 어린 소자 우리한테 사명을 부여한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이 예수님 공생애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반복이 돼버리면 예수님이 세례요한한테 물세례 받을 때 인간의 죄 속에 뛰어든 것처럼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자로써 육을 입고 죄 속에 뛰어든 게 되는 거죠. 그러면 아까 순서가 맞는 거예요. 우리가 십자가 죽음이 유일한 생명이고 하나님의 거룩이고 의기 때문에 우리는 성숙했다는 착각을 한 죄를 범했고 그동안 50, 60 살아온 것도 생존 자체가 은혜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한 자체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 살기 위해서 살았다고 생각한 자체가 죄였고 출생한 것도 이 땅에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 짓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했기에 육 개월부터 이기주의로 살아가요. 안 주면 울고. 동생 생기면 동생한테 시기질투하고. 가인, 아벨이 따로 있습니까? 우리가 가인이죠. 질투의 화신. 공효진이 따로 있어요? 전부 다 공효진인데.
그러니까 옛날 말이 참 재미있지요. 중국에 이런 일화가 있잖아요. 원숭이한테 밤을 아침에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 줄까, 하면 화를 막 내는 거예요.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줄까, 하면 좋다고 하는 겁니다. 스스로 질투의 화신이에요. 아무리 가져도 아버지가 유산 나누면서 집은 막내아들, 감사합니다. 밭은 맏딸, 감사해요. 나머지 모든 것은 장자한테. 방금 좋다했는데 가만 보니까 저쪽은 40억 받고 자기는 2억 받으니까 감사한 게 날아가 버렸어요. 이게 질투의 화신이 아니고 뭡니까? 이만큼 하면 더는 소용없다. 바라는 것도 죄니라? 당신만 있으면 더는 소원 없다 해놓고 그 당신이 방구 뀌고 그러면 짜증나고 그러죠.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눈을 뜨기 힘든 가을 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 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인간의 영토를 그냥 뺏기만 하면 아들이 생성되지 않습니다. 뺏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자가 아들 되는 변화를 겪어야 되겠지요. 그 겪는 방법을 다섯 차례로 나눠서 다섯 개의 제사로 소개한 겁니다.
번제의 취지는 다 드리는 거예요. 그것도 불에 태워다 다 드리죠. 있음에서 결국 없음으로 끝나지요. 그런데 중간에 하나님께서 연기를 받지요. 연기는 지상에서 바람 불면 날아가 버리죠. 그러면 결국은 있음을 위하여 없음이 돼버리면 이 모습은 있음에 예수님을 일치시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가 주님께서는 있는 존재로 출현했다가 나중에 사라지지요. 그 과정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되게 만족스런 거예요.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지? 주님께서 하나님의 번제가 되셔서 몽땅 없어진 거예요.
사실은 유일한 제사의 시작이 번제에요. 화목제는 나중에 생겼지만 처음부터 있던 제사는 번제입니다. 제일 먼저 번제한 사람이 노아지요. 몽땅 다 태우는 거예요. 지상에 있는 것은 그냥 없어지면 안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연기를 들이마시고 기뻐하심을 위한 있음이 따로 있고, 그 다음에 없어져도 안 기뻐하는 있음이 있는 거예요. 있음 가운데서 있음을 구분시키는 것은 흠 없는 제물이 없어질 때 다 태울 때 하는 겁니다. 어차피 태워지는 것은 모든 인간이 속한 운명이고 그냥 운명의 사람은 지옥이 되니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위한 이 세상의 천지창조는 주님의 영토 되기 위한 취지는 여전히 완성이 돼야 되고 살아남아야 됩니다. 주님이 개입해야 그것이 윤곽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번제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략적인 포괄적인 그림이, 제사란 결국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하면서 사라질 것이 지상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세상인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걸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번제입니다.
그러면 소제가 뭐겠어요? 불로 태움에 부속적으로 포함된 거예요. 부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2장 1절에 나오지요. 가루로 만들어요. 가루에 뭘 섞습니까? 기름을 붓고 향기를 붓지요. 이렇게 여러분이 강의를 들었으니까 이 특수한 임무는 우리가 할 게 아니고 007이 할 거에요. 뭔가 특수한 임무를 위해 파견된 어떤 인물이라야 감당할 수 있겠지요.
말씀 보면서 우리가 이것 해야지 하지 마시고 어떤 분이 살아있어야 돼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말씀의 바탕에는 주님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그게 해석이 됩니다. 주님의 아픔과 고통과 신음 소리를 느낄 때 성경은 움직이는 살아 역동하는 말씀이 돼요. 우리가 지키는 규칙이 아닙니다. 우리 빼놓고 주님이 이 말씀을 가로채서 이룬다면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생생하게 느껴져야 된다 이 말입니다.
주님은 기름 부은 자지요. 그 다음에 향기니까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신 분이죠. 그런데 그분이 가루라는 말은 곧 없어질 중간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곧 사라질. 이것을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내가 이 땅에서 들려야 하리니. 주께서 이 땅을 떠나버리는 겁니다. 임무 완성하고 마감되는 거예요.
그러면 동물에서는 그냥 다 태우지만 식물로는 뭘 묘사할 수 있습니까? 향기롭다, 가루로 만든다는 그 과정을 배울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마지막엔 불에 태워져요. 결국 아무것도 아닌 거죠. 없어짐이에요. 제사의 특징은 우리는 이 땅에 있으나마나한 존재라는 거죠.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구원해달라고 손들지 말라는 겁니다. 천국 보내 달라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건 우리가 요구할 사항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제사가 그걸 의미하는 겁니다.
여기서 앞으로 더 진도를 나가야 되겠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신약에 있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구약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 되고, 예수님도 하나님 아들 되게 한다면 예수님의 몸인 개체, 우리 몸도 갖고 있으니까 몸과 몸의 결합으로 한 몸이 되는 거냐고 물을 수가 있지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바로 개체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가능하냐 이 말이죠. 우리가 정성을 다하고 신경을 다 쓴다 해도 내 사정을 남한테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없어요. 왜냐하면 언어는 항상 의미가 합치되지 않아요. 어떤 표현을 해도 그 의미가 글자에 다 담기지 않습니다. 뭔가 미끄러지고 빠져나오고 남아있는 구석이 있어요. “당신 참 예쁘다.” 할 때 내가 예쁘다는 말을 해도 말로써 마음을 다 담을 수가 없어요. “남자한테 참 좋은데 말을 할 수 없네.” 산수유가.
나도 내 표현할 때 마음에 안 들고 내 표현을 전달 받는 그 사람들도 네 뜻이 기껏 이게 다야? 말을 해. 말로 표현할 길이 없네. 사랑한다, 사랑한다, 곱하기 100배. 그러면 사랑입니까? 어떤 여자 친구가 남자한테 너, 나 사랑하나? 사랑한다. 네가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봐. 그 구멍 빼놓고 나머지 하늘만큼 너를 사랑한다고 하니까 여자가 고맙다고 해놓고 그 구멍에 다른 여자 있지?
전부 다 사랑한다는 것보다도 뭐 하나 빼놓고 사랑한다는 게 강조점이거든요. 언어에서 강조할 때는 뭔가 실제적으로 어긋나는 이야기를 해요.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고 할 때 이 말이 어폐가 있거든요. 바늘 떨어지면 바늘 떨어지는 소리만큼 시끄럽잖아요. 그런데 말을 할 때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만큼 그 정도로 고요했어. 바늘은 왜 떨어졌는데, 바늘 안 떨어지면 더 고요할 텐데. 그런 뜻이 아니라 강조하는 뜻이거든요.
사람은 표현할 수 없어요. 개체로 전달이 안 됩니다. 백날 주님을 찬양한다 해도 그것은 내 뜻도 안 담기고 말 자체에 의미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결합이 되느냐? 어떻게 예수님과 한 몸이 될 수 있느냐? 한 몸 된다고 에베소서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이번 겨울수련회 골로새서 할 때도 한 몸이 나옵니다.
개체의 결합이 아니에요. 위치의 결합, 자리의 결합이에요. 주님께서 제사를 드리고 속죄제 드리는 인간을 세워놓고 자리를 만들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 드리면서 어떤 생각을 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제가 드렸어요. 우리 민족이 드렸어요. 저쪽 민족은 제사 몰라요. 하나님 우리 지켜주시고 저 나라 망하게 하옵소서. 그게 죄가 되지요.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은 nothing이에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통해서 해야 되는데 분명히 제사 드린 당사자가 살아있는 한 아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죄를 위해서 주께서 계속해서 희생물이 개입되게 되면 이제는 적들과의 싸움이 아니고 제사 드렸다고 우기는 이스라엘 백성 내부에 희생적인 사건이 일어나요. 제물을 불에 태우잖아요. 그것이 제단 위해서 일어난 사건을 주께서는 제단 밖으로 성막 밖으로 온 사회 일상 속에 번지게 만들어요.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이웃에게 돌아 맞아죽는 희생적인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 과정 중에 하나의 실례가 열왕기상 8장에 보면 나옵니다. 5절에, “솔로몬 왕과 그 앞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이 저와 함께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
성전 건축하고 제사를 드렸는데 제물을 많이 바쳤습니다. 우리가 그 현장에 있다고 칩시다. 제사를 누가 드립니까? 솔로몬 왕. 누가 받습니까? 하나님. 그러면 솔로몬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안 되지요. 솔로몬은 주님 오시기 전 중간과정에 있지요. 솔로몬이 이런 제사 드리니까 나중에 하나님 영광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제사, 일천 번제 받았잖아요. 그러면 성공한 거네요.
그런데 여러분 알다시피 바친 솔로몬이 어떻게 됐습니까? 나중에 이방민족의 공주와 혼인해서 왕이 이스라엘 나라를 완전히 우상천지로 만들었잖아요. 개체의 결합이 안 돼요. 하나님께서는 개체를 사용은 합니다. 솔로몬을 사용하면서 솔로몬으로 하여금 제사 드리는 것을 통해서 마지막에 죄로 바뀌게 만드는 자리를 만듭니다. 솔로몬이 제사 드리고 영광 받으니까 자기가 의인인 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라가 부강하고 재물이 많고 적들이 굴복해서 남방여인이 와서 뇌물을 바치고 하나님께 찬양할 때 그 가운데 누가 우쭐 되겠습니까?
본인이 우쭐대겠지요. 다시 말해서 I am nothing이 아닙니다. 나는 의미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게 바로 이 자리에 미리 와있는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솔로몬과의 관계를 보세요. 모든 솔로몬의 행위가 죄로 드러나게 하지요. 죄로 드러났으니까 솔로몬은 지옥 가는 겁니까? 아니지요. 죄로 드러나게 한 주님의 십자가 자리가 그리스도와 솔로몬을 하나로 통합시킵니다. 네가 드린 제물을 받는 것이 아니고 너를 깔고 있는,
솔로몬은 제사 드릴 때 자기 죄를 몰랐어요. 나중에 죄를 알게 되지요. 그러니까 그 죄를 알게 하는데 투입되는 하나님의 언약 상대자는 솔로몬이 아들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들이고 예수님이 솔로몬으로 하여금 아들 되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예수님만의 자리가 아니고 솔로몬과 함께 할 자리를 만들어서 솔로몬으로 왕 되게 했고 제사 드리게 한 겁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느니라.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자기 위주로 자기 영통 위주로 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와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우리 자신에 자아성을 심어준 겁니다. 그때 부끄러움도 없고 하나가 됐다고 하다가 갑자기 죄 짓고 난 뒤에는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따로 독자성을 유지하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독자성을 유지한 아담의 후손들에게 율법을 주게 됩니다. 율법을 주게 되면 절대로 나는 무의미한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이 헌금은 내가 했고, 기도는 내가 했고, 전도도 내가 했고, 내가 했고, 내가 했고. 내가 한 것이 나를 구원되게 했다는 그것이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그것을 우리도 마찬가지로 되풀이 할 수밖에 없어요. 이러한 속성은 우리 힘으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는 입장에서 하나님과 합일하고 하나 되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하나님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 되겠습니까, 저렇게 헌신하면 하나 되겠습니까, 이렇게 내 마음을 낮추면 하나 되겠습니까? 백날 마음을 낮춰봐야 낮춘 당사자가 나라는 것을 우리는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이미 성령이 왔다는 것은 합격이 된 상태지요. 합격이 된 상태에서 우리의 모습은 뭡니까? 그냥 죽음이 아닙니다. 그냥 죽으면 노선이 달라요. 우리는 십자가 노선에 속한 사람이어야 되지 그냥 죽으면, “죽는 것도 팔잔데 죽고 말지. 죽고 난 뒤에 천당 가든지 그때 알겠지.” 이건 노선이 달라요. 엉뚱한 길로 가는 겁니다.
그러나 진짜 죽을 때도 주님의 십자가 있는 노선은 그 죽음부터 시작하게 되면 일어난 모든 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증거하기 위해서 이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그런 실수하면 안 돼, 해도 그런 실수해야 돼요. 남의 인생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 인생을 살아가야 돼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재산이 한 45억 쯤 됩니까? 그 인생을 살아가야 돼요. 할 수 없어요. 45억 가지고 고생해도 그것도 팔자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누구처럼 재산이 70만원밖에 없는 사람 있습니까? 그렇게 살아가야 돼요.
그렇게 살아간다고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고 십자가란 같은 자리를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게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이란 용어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이 용어를 바꾸겠습니다. 예수님의 파우치. 우리가 예수님의 지갑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우리가 사우디에 가도 예수님의 지갑이에요. 캐나다 가도 예수님의 지갑이고, 울산에 가도 예수님의 지갑이에요. 까마귀 나는 태화강에 살아도 우린 예수님의 지갑, 울산에 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지갑, 파우치 안에 살아요. 예수 안에 들었어요.
그것으로 우리가 레위기를 보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네. 꿀을 넣지 마라. 네가 맛을 낼 의미 없어. 맛있는 빵 먹으려고 이스트 넣지 마라. 네가 먹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야. 치려면 소금을 치라. 소금은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에. 소금은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짠맛이라면 신라면 수프 넣으면 되겠다. 소금 자체가 그냥 있는 자체로 영원해요. 뭔가 부패를 방지할 요소가 없어요. 소금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꿀과 누룩은 뭔가 변화가 유발되지만 소금은 그냥 소금이에요. 주께서 소금으로 쓰시면 그 자리로 끝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따라서 새로운 영토로 바뀌면, 시공간으로 바뀐다는 그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시간 관계상 못하고, 우리가 생각할 것은 나의 영토 속에서 주님께서 일찍이 자리를 펴셔서 그 자리에 합류한 사람은 우리로 하여금 그냥 구원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예수님만 알던 십자가 관계가 이제는 우리의 영원한 영토, 주님이 함께 하는 영토가 되었다는 게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날마다 주님의 제사가 반복되게 하옵소서. 다 드려야 되고 없어져야 되고 그리고 죄는 또 지워져야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결국 하나가 되는 이런 과정을 주께서 다 이룬 입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