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레 27:30-34 / 하나님의 소유 / 199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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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하나님의 소유 (레 27:30-34)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가, 아니면 교회에 나아와서 하나님을 믿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일단은 먼저 교회에 나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긴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자신도 그렇게 하나님을 믿었지, 어떻게 교회에 나오기 전에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 '하' 자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그런 줄 알고 있는데, 그런데 성경 말씀을 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부수어 버립니다.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교회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창세 전에 선택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교회에 다니면서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것은 우리의 머리로는, 우리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를 않습니다. 순서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분명히 나는 교회에 나올 때는 하나님도 모르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웃의 집사님 손에 붙잡혀 나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교회에 나오기 전에 먼저 믿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결코 우리의 노력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다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까? 과연 그들이 와서 하나님을 믿던가요? 안 믿습니다.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안 믿는 사람보다 우리들이 특별난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우리가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속에서 발견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밖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기에, 그런 믿음을 선물로 우리에게 집어 넣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라고 해서 준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특별히 설교시간에 감동해서 은혜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예배당에 앉는 이 순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눈물이 흘러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바닷가에 부딪치는 파도를 보고도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고 말입니다.
큰 도시에 살다가 오랜만에 산을 보고 바다를 보고 "야, 좋다" 라고 함성을 지르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은 일주일만 살면 그런 소리를 안 합니다. 한 달만 있으면 파도소리가 시끄럽고 산이 징그러운 것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것에는 모두들 좋아합니다만, 정말 좋아한다는 것은 매일 보아도, 보고 또 보아도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음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우리 덕분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날마다 말씀을 통해 확인하고 말입니다.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이 말씀을 덮으시면 안됩니다. 그렇다고 말씀을 옆에만 두고 있으면 되는 것도 아니고, 비록 어려워도 한 줄 한 줄 읽어 나가는 말씀에 대한 진지함과 열심히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구약 레위기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한 장에 한 번 꼴로 계속해서 설교를 해왔는데, 아마 여러분들이 이렇게 레위기를 이렇게 오랫동안, 약 30회에 걸쳐서 설교를 들어볼 기회는 흔치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들었어도 다 잊으셨겠지만 말입니다.
레위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보통 그런 것이 마지막에 나오는데,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27장 34절입니다.
(레 27:34)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
지금까지 하신 모든 말씀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모세에 내리신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을 네가 지키겠느냐?"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물어보시고,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의 이 계명을 지키겠느냐?"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서 이런 계명들을 주었는데 지키겠느냐, 아니면 공중으로 날려보내겠느냐?" 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물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만 하겠습니까? "사람들의 말이라면 내가 안 지키지만, 대통령이 말해도 겁이 안 납니다만, 하나님 말씀이라면 제가 지키겠습니다" 라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라고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듣고도, 그 하나님의 계명에 관심도 없고, 지키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고, 그냥 천국에만 가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사는 것 따로 믿는 것 따로' 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말씀에 관심이 없고, 천국에 가고자 하는, 좋은 곳에 가고자 하는 욕심에만 사로 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보다 더 좋은 곳에 가기 위해서, 그러한 대가로 교회에 나와서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생활이 아니고, 우상을 믿는 종교 생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시간에 기독교와 세상종교에 대해서, 쉽게 말씀드려서, 교회와 절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잘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절은 어떤 특별한 거룩한 공간이 있습니다. 절은 그 대문(일주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 장소는 하나의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절은 그 공간이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건물 하나 하나가, 아무리 작은 돌 조각이라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절 안에서는 시끄럽게 떠들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곳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절에서도 찬불가 부르고, 기도하고, 불경공부도 하고, 예불도 드리고, 할 것은 모두 다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무슨무슨 유치원" 라고 해서, 어린아이들의 교육까지도 하지를 않습니까? 여름불교학교도 있고 말입니다.
만약에 기독교도, 불교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교회냐, 절이냐' 라는 이름의 차이점만이 있지, 하는 것은 모두 같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더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리는 참된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지만, 그들은 우상에 불과한 부처를 믿지 않습니까?" 라고 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들은 우상에 불과한 엉터리 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시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믿는 대상이 다르다면 믿는 모습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어떤 특별한 장소, 거룩한 장소가 있기 때문에, "경내"라고 하는 절의 공간 안에서만 그 곳에서만 나름대로 경건히 하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절에 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는 좀 적당히 타락해서 엉터리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절에 와서 참선을 하고 시주를 하면 그런 나쁜 짓들이 모두 다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절에서 하는 행동과 이 세상에서 하는 행동이 좀 달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절이라고 하는 곳 자체가 세상에서 잘못한 것을 그러한 것을 용서를 구하면 없어지는 장치가 된 곳이니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서 절에 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절에 다니는 사람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엉망으로 사는가?' 라고 질문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엉망이고, 엉터리이기 때문에 절에 간다는 것입니다. 깨끗해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답게, 빛과 소금으로, 내가 믿는 예수님만 자랑하고 살라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야 교회에 다닌다고 말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법을 잘 준수하고, 착하고 정직한 것이, 도덕적으로 훌륭한 것이 빛과 소금이 아니고,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것이 빛과 소금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법을 지키지 말고, 착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법을 지키고 착하게 사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 부처를 자랑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부처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불교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처가 자랑스럽게 생각되면, 그 부처를 죽이는 것이 불교입니다. 자기가 중요한 것이지, 부처는 자기를 진리로 인도하는 길라잡이에 불과 하지, 그 외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잘 나오는가 하는 차원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정말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가?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약속의 말씀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가?" 라는, 바로 이 점을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차 확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을 드려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인 나를 너희들이 정말로 잘 믿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레위기를 마치면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교회 밖에서, 즉, 이 세상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서, 마치 절에 다니는 사람들처럼 일주일 동안 내가 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산 것을 용서받고, 새 힘을 얻어서 다시 살아가는, 그러한 특별한 장소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절이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잘 오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교회당 안에 들어오면, 평소에 하는 그런 걸음걸이와 마음가짐을 완전히 바꾸어서 얌전하게 걷고 이야기를 해도 아주 차분하게 하려고 하는데, 물론 예배드리는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모르지만, 마치 절에 가서 조용히 하는, 거룩한 장소이니까 조용히 하는 그런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당이 거룩한 곳입니까, 아닙니까? 물론 거룩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거룩하다는 것은 절과 같이 이 세상과 비교해서, 다른 어떤 장소와 비교해서 거룩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는 우리가 사는 곳은 그 어떤 곳도 하나님이 동행하시기에 다 거룩하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사시는 집은, 그리고 직장은 어떻습니까? 역시 거룩합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제 어떤 거룩한, 특별한 장소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장소와 공간에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구약시대, 옛 언약 때의 모습입니다. 그때는 특별히 거룩한 지성소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그러한 장소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러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감사해서 모이는 믿음의 백성들의 모임이지, 어떤 과거처럼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주일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어떤 하루를, 특정한 날만이 거룩한 것이 아니고, 1년 365일이 모두 다 거룩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같은 차원인 것입니다. 특별히 거룩한 장소도 없고, 거룩한 날도 이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년 365일을,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짓이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 예배당뿐만 아니라, 오늘 주일 하루뿐만 아니라, 날마다 그 어디에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이제 나 혼자가 아니고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치 불당에 부처를 모셔놓고 섬기듯이, 이 예배당 안에 예수님을 모셔놓고, 교회에서는 믿는 성도처럼 살지만, 세상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불신자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표현이 너무 과격해서 죄송합니다만,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예수라고 하는 부처를 모시고 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는 제가 설명을 일일이 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서 34절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에다 불러다 모아놓고, "이제 너희들이 이 광야를 벗어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내가 여기 시내산에서 명한 나의 계명들을 변함 없이 지키겠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에게 하는 말씀으로 바꾸자면, "너희들이 교회에서만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말할 것이 아니고, 정말로 이 세상에 나가서도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의지하고 살겠는가?" 라고,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가 어떤 곳에 간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아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술집에 갔다고 해도, 정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그냥 주일하루에, 그리고 교회당이라고 하는 공간에다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와 함께 동행하면서, 아니 우리보다도 먼저 한발 앞서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깨닫고 하나님과 함께 둘이서 팔짱끼고, 코를 맞대고서 얼굴을 비비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도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세상이 주는 순간적인 기쁨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제법 지나갔습니다만, 사실 오늘의 제일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인데, 주무시지 마시고 조금만 참으시고 잘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본문 32절 말씀을 살펴보면, 십일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레 27:32)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무슨 내용인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어떻게 바치는고 하니까, 자기들이 키운 양이나 소들을 줄을 세워놓고 지나가게 해서 그 위에다 막대기를 하나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나서 열 번째로 그 막대기 밑을 통과하는 양이나 소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의 양이나 소가 100마리 같으면, 10번째, 20번째, 30번째, 이런 식으로 해서 10마리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바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십일조라는 것은 10/1을 하나님께 바치는 어떤 물질적인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께 선택된 것은 이렇게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택함 받은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 너희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이렇게 10번째 되는 양이나 소만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뽑힌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아이쿠! 아까워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선택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시니 말입니다" 라는 고백이 십일조를 할 때마다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레위기 마지막에 이 십일조가 나와야 합니까? 헌금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방민족들과 싸워야 하는데, 그럴 때에도 이렇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잊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의미로 이렇게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구약의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은 신약 시대인데 말입니다. 새 언약의 시대,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의 정신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로 인해서 멸망당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택함 받았으니 감사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싸워서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들의 온전한 십일조는 무엇입니까? 우리 수입의 10/1을 드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수입의 10/1만 헌금한다고 해서 온전한 십일조가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로 우리의 신앙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신, 십일조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십일조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10/1을 바쳐도 좋고, 10/2를 바쳐도 좋습니다. 때로 형편이 어려워서 100/1을 바쳐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마다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을 이 땅에 희생의 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그런 아버지께 순종해서 자기 몸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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