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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 80여명의 신학자들] 가다머 160308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80여명의 신학자들[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 가다머 160308

정인순 2016. 3. 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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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160308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1-가다머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210페이지 가다머.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1900년부터 2002년까지 살았어요. 무려 102살. 아마 철학자 가운데 신기록 세웠을 거예요. 그래서 가다머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죽는 날이 안 나와요. 하도 오래 살아서. 최근 걸 찾아봐야 죽는 날이 나오죠.

 

가다머의 이론이 신학에서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 분리하게 된 여러 가지 경향성이 있는데 분위기가 그렇게 몰아갔는데요. 항상 신학은 교인들 숫자와 관련돼 있거든요. 교인들이 교리만 알고 그 다음부터 교회를 안 나오려고 마음먹기 시작했습니다.

 

옛날에는 먹는 것, 입는 것만 해도 사람 사는 걸로 여겼는데 자본주의가 발달하니까,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먹고 사는 게 다가 아니고 보다 귀하고 값나는 것을 소유해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놀이동산에서 의자에 앉아서 회전하는 기구가 있는데 처음엔 천천히 돌잖아요. 그러다 점점 빨리 돌거든요. 그럼 어지럽고 고함지르고, 그게 재미난단 말이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20세기 초반에는 그냥 농사짓고 사는 거예요. 통계적으로 농사짓는 사람들의 노는 날이 일 년에 200일이 넘어요. 겨울에는 그냥 놀고. 그래도 밥은 먹고 사니까. 그런데 근대화가 되면서, 근대화의 주인공은 일본이죠. 일본과 통합되지 않으면 근대화는 없습니다. 이건 친일파라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본에 잡힘으로 말미암아 강제적 근대화가 이뤄진 겁니다. 민주주의 한다고 근대화되는 게 아니고 자본이 받쳐줘야 되거든요. 계속해서 상품이 늘어나서 시장이 형성돼야 근대화가 돼요. 안 그러면 땅 갖고 농사짓고 겨울 되면 눈 놀이하면서 화투치면서 자면 돼요.

 

근대화 되면서 수출이 이뤄지고 수출 되려면 생산이 늘어야 되는데 이건 365일 늘 일해야 돼요. 일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득이 늘어난다는 겁니다. 늘어난 소득으로 뭘 합니까? 그냥 밥이나 먹고 떡이나 해먹고 맙니까? 아니에요. 전에는 꿈도 못 꾸던 외국의 사치품들, 전자제품들을 사게 마련입니다. 그걸 사려면 생산을 가동해야 되고 직장에 보내는 시간이 많아야 되고 자연적으로 일요일에 교회도 못 가요. 그래서 교인들이 원하는 게 뭐냐? 교리만 이야기해 달라. 그러면 교리만 머리에 기억해서 교회 안 나가도 죽어도 천당 갈 수 있도록 간단한 교리 위주로 그런 식으로 요구한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들 요구를 들어줬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교회 안 나오죠. 교리 아는 데 뭐요. 예정론 알겠다, 조직신학. 처음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교리신학 이야기했잖아요. 부르시고 소명, 구원의 여정, 순서, 스케줄이 나오잖아요. 최고 인기는 구원의 여정이란 말이죠. 순서가 나오니까, 목사님, 제 순서가 어디쯤입니까? 믿음 넘어섰습니까, 중생 되는 겁니까, 그 다음에 성화 되고, 의롭고, 이걸 손에 쥐니까 교인들도 자기도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목사 입장에서는 교리를 너무 일찍 가르쳐줬어. 돈 받고 가르쳐야 될 걸. 그러니까 교회가 할 일이 없는 거예요. 다 아니까. 이제 교회가 친목단체로 변하는 거예요. 사회에서 돈 번다고 힘들고 스트레스와 정신적인 고통을 교회에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위로해주고 위로받는 그들끼리 모일 때 교리로서는 구원받고 복 받는 것은 기도로 되고.

 

그래서 그들의 교리는 오직 하나로 응축됐어요. 한국교회 교리는 딱 하나만 남았어요.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이것 외에 알아듣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중추적이고 여기에 따른 부수적인 것이 있어요. 누구한테? 예수님한테.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기도 받는 이유가 아버지 하나님한테 백 쓰고. 기도를 어떻게 열성으로 하느냐? 이건 성령 받아서.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누구나 납득되고 알아듣는 이걸 중심으로 삼위일체가 형성 돼버려요.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것은 뭐냐? 실적이 눈에 보이고(실증적) 그 결과물이 손에 잡히잖아요. 이것보다 더 알기 쉬운 게 어디 있겠어요. 교리가 딱 하나 남았어요.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그러다 약간 자기가 살았다 싶으면 여유 있게 산다 싶으면 땅값도 좀 오르고 이러면 뭘 안하게 되죠? 기도를 할 필요가 없잖아요. 무한대로 욕심 낼 필요는 없고. 기도를 안 하게 된다고요. 처음부터 한국교회가 기도하면 응답받는다고 했는데 기도를 안 하게 되면 새벽기도도 안 나오고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안 나오잖아요.

 

그러면 옛날 교회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뭐부터 출발해야 됩니까? 경제가 어렵고 살기 빡빡하니까 기도가 부족해서 열심히 부족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부족한 데 어떻게 열심을 낼 수 있습니까? 그때 등장하는 게 뭐냐 하면, 성령을 받게 되면 기도하게 되고, 성령 받은 기도의 특징은 방언이고, 기적으로 응답받는 기도는 성령에 의해서 되는 겁니다, 라는 공식이 딱 나오는 겁니다. 교인들 입장에서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이것 외에 더는 필요 없어요.

 

더는 필요 없는데 목사들이 자기 가오는 있고 전문가라는 티는 내야 되겠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집어넣는데 여기에 대해서 외국물 좀 먹은 신학자들이 이래서는 안 된다. 기도하면 응답받는다고만 말고 성경을 직접 가르치는 그것이 캘빈, 루터의 개혁주의 전통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것은 교회를 생각해서 한 게 아니라 자기가 학위 받고 공부했으니까 자기 권위를 교계 내에 부각시키려고 그 짓한 거예요. “이 무식한 것들! 성경도 모르는 것들.” 이건 교회를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실력 있는 나를 알아달라는 것과 관련돼있습니다.

 

그때부터 나이 많은 사람들은 가버리고. 기도하면 응답받는데 그걸 왜 배워야 되는데.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로이드 존스가 나왔고 ccc부터 해서 소위 선교단체라 하는 것이 기존 교회에 불만 있던 젊은 청년들이 김준곤이나 4대천왕 있지요. 옥한흠, 하용조, 홍정길, 이동원, 젊은이들의 로망, 그들의 신학교 가서 나도 그들처럼 되고자 한 거예요. 거기서부터 두란노서원에서 각종 성경신학이 나온 거예요. 그 젊은이들이 나중에 결혼해서 아줌마, 아저씨 되잖아요. 그들이 계속 이어나가요. 그리고 성서유니온에서 큐티 나왔지요. 이게 오늘 강의와 관련돼있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미리 관련성을 이야기할게요. 텍스트가 의미를 품고 있느냐, 아니면 텍스트를 이해하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느냐, 그걸 가다머가 논하고 있는 겁니다. 텍스트에서 우리가 의미를 뽑아낼 때 진짜 성경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 뽑아내느냐, 아니면 뽑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의미가 새롭게 생성되느냐? 그게 가다머의 철학이에요. 가다머 하기 전에 교재 184페이지 슐라이어마허 해야 되고, 가다머가 이런 것을 비판하기 때문에 이것 안 하면 안 돼요. 그 다음에 198페이지 딜타이의 생철학을 거쳐서, 하나 더 거친다면 하이데거 거쳐서 가다머로 와야 돼요.

 

이것과 방금 길게 이야기한 쓸데없이 들리는 것과 어떻게 관련이 있느냐? 성경신학을 하면서성경이 말한 대로 하고 성경이 가라는 대로 가고, 성경이 멈추라는 데 멈추는 것이 캘빈에서 나온 개혁주의신학의 올바른 전통이라고 했을 때 그게 바로 가다머 해석과 관련돼있어서 그렇습니다.

 

성경을 텍스트라 하죠. 텍스트의 원 뜻은 직물입니다. 여러 가지 천 조각을 강화시킨 거예요. 텍스트에 대립되는 말이 콘텍스트고 콘텍스트는 상황이죠. 성경신학에서 관심을 갖는다는 말은 한 마디로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교리야, 꺼져라. 교리는 그 시대 사람들이 새롭게 만들어내는 게 교리다. 옛날 캘빈이나 루터 시대에선 교리가 먼저 확정돼있고 이 교리가 왜 진리일 수밖에 없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뽑았다. 1648년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부터 시작해서 수십 가지의 신앙고백이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별로 민족별로 다 만들었기 때문에.

 

그때 처음으로 국민이라는 게 나오는데 신앙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현대용어로 하면 이데올로기가 동일한 것, 이걸 국민이라 해요. 북한과 대치하는 입장에서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반공산주의고, 그걸 현실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군대가 있어야 되고, 그래서 군대 가기 싫어하는 사람은 현대 한국의 이데올로기에 저촉되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유승준. 14년째 못 오고 있어요. 지금 재판하고 있어요. 왜 저를 한국에 못 가게 합니까? 너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국익을 이용한 인간이라고 내쳤어요. 그때 유승준이 얼마나 인기 있었어요. 난리 났잖아요. 예능 프로에 다 나오고. 군에 안 가려고 미국시민권 이용했잖아요. 빠이빠이 보내버렸어요.

 

그런데 중세 끝나고 근세에 유럽이 쪼개지는데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아 전부 나라를 만들기 때문에 규칙을 법률화시킨 거예요. 우리 국민은 이런 식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같은 믿음 아래 신앙고백이 나온 겁니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그땐 독일 없었고, 보헤미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부 다 신앙고백이 있는 거예요. 거기서 나온 게 교리신학이겠지요. 이런 교리에 동의하면 내 백성이고 동의하지 않으면 법률로 보호받지 못한다. 성질 더러운 인간이 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해도 호소할 수 있는 경찰서 가봐야, “실례지만 조선족입니까? 중국에서 알아봐라. 우리 한국에서 당신 문제 안 합니다.” “혹시 사기 당했어요, 일했는데 월급 못 받았습니까? 실례지만 여권 봅시다. 중국 사람이네. 그럼 중국 가서 해결하세요.” 법률로 보호받지 못합니다.

 

그게 바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방인과 고아와 객이에요. 처음에 출애굽할 때 바로가 아들 낳으면 죽이고 딸 낳으면 살려줘라. 이건 누굴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까? 애굽 나라의 이데올로기를 보호하기 위함이에요. 이 말은 히브리인들을 내치겠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시리아 난민으로 보는 겁니다. 어디서 다른 종족이 우리 애굽 족속에 섞여서. 그리고 시리아 난민들이 아이 몇 명 낳습니까? 이건 생긴 대로 다 낳아요. 숫자가 많아지잖아요. 나중에 독일 사람보다 터키 사람, 시리아 사람이 더 많을 지경이에요. 국가권력과 국가조직에 대해서는 이번 수련회에서 마태복음 할 때 집중적으로 할 예정이에요.

 

교리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고 내가 믿는 하나님에 모여라. 같은 생각의 사람들이 모이면 거기서 행복이 나오죠.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이면. 그게 바로 종교개혁 시대에 국가별로 그렇게 했다면 그런 것에 대한 향수, 지금 자본주의사회에서 그런 걸 만드는 작업이 바로 공동체에요. 모든 자본주의사회에서 조직은 돈으로 되거든요. 기존 교회가 교리 중심에 동원했던 늙은 장로들 중심의 교회라면 거기에 불만 있는 젊은 사람들이 무슨 운동을 벌이겠어요? 공동체 운동을 벌이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복음학교에요. 김용의 선교사. 통합 측과 관련돼있어요. 제2의 ccc라고 보면 되죠. 합숙 훈련합니다. 이건 자금이 투입된다는 말이에요. 뭐든지 돈이에요. 교회의 기초는 십자가 피? 아니에요. 돈이에요, 돈. 돈이 있어야 공동체가 되고 교회가 되고 이슈화할 수 있는 발언할 수 있는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걸 티 낼 수 있는 것은 밑바닥에 유입되는 돈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아까 텍스트 이야기했지만 자본의 문제였어요. 교리신학은 구태의 초창기 개혁주의죠. 아까 성서유니온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성경신학이 등장했지요. 성경신학의 모토가 뭐냐 하면,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하자. 이게 원래부터 개혁주의가 했던 것이다. 천주교와 분리될 때 캘빈, 루터가 했던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캘빈, 루터가 성경대로 한다지만 사실은 신앙고백들 나오면서 조직신학 됐지요.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거기에 맞춘 걸 뽑아낸 거예요. 그게 싫다는 겁니다.

 

그게 싫다고 해서 젊은이들이 그러한 교리중심의 구닥다리 교회에서 벗어나자, 성경을 이야기하자. 큐티하자. 성경신학이 굉장히 유행했지요. 그렇게 해서생긴 게 성경입니까? 또 교리라. 또 이데올로기에요. 이런 해석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 우리 공동체에 넣어준다. 우리끼리가 돼요.

 

그러니 가다머가 보기에는 분명히 교리가 싫다고 거기서 나왔는데 텍스트, 성경 자체에서 진리를 뽑아내자고 이야기해놓고 처음에는 킹 제임스 번역이 맞니, 보통 번역도 되니, 성경의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사본은 누가 정했느냐? 되지도 않는 논쟁을 벌이면서 굉장했지요. 킹 제임스 보존협회 침례교 쪽에서 한 사람들. 그렇게 나와도 또 교리라. 유병언도 마찬가지고.

 

그 원인을 누가 밝힐 거냐 말이죠. 그게 해석학에 철학적 바탕이 없고 근거가 없으니까 철학이 뭐 필요해? 성경 보고 성경대로 가라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추면 되지, 라고 했던 거기에 대해서 가다머는 너는 너에 대해서 몰라. 성경 해석할 때 인간 자체가 어떤 정신적 구조로 되어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딴에 성경대로 갔는데 나중에 조금만 시간 지나면 그것도 교리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너희들이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래서 가다머가 유명해진 거예요.

 

가다머의 이론에 대해서 너무 옳은 이야기고 반박할 여지가 없으니 성경으로 성경을 풀자고 했던 신학자들이 어떤 자극을 받았다고 할까, 어떤 감동을, 도전을 받았다고나 할까요? 지가 도전한 것도 없어요. 스스로 도전받았다고 해서 정신 번쩍 들어서 성경신학자들아, 가다머부터 공부하자고 하지만, 성경 백날 봐야 성경 쪼개고 편집학파니 형식학파니 뭐니 해봐야 돈이 안 나오면 소용없거든요. 교회에서 먹혀줘야 되는데 신학교 1학기는 먹혀요. 신학교 2학년 가면 또 교리해요. 무슨 교리를 해야 교회가 잘 될까? 처음에는 이런 신학도 하다가 드디어 2학년, 3학년 되면, “교수님, 큰 교회 어떻게 했어요?” 신학교 시험도 컨닝하고 목회방법 배우러 가고.

 

도대체가 인간이 어떤 구조로 돼있는가? 그래서 성경신학을 했던 신학자들이 소위 보수 쪽에 있는 씨슬톤이 지은 [두 지평]이란 유명한 책이 있어요. 은사차등론 이야기한 권성수가 번역한 책이 있어요. 같은 보수신학끼리 차별 나게 지가 공부 많이 한 티를 내려면 이 정도는 공부해야 되지 않느냐 해서 나온 책이에요. 거기에 가다머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그리고 두지평에 대한 평은 십자가마을 [신학과 철학]에 보면 나와 있어요(두 지평:신약해석학과 철학적 기술). 거기에 하이데거 나오고 비트겐슈타인 나오고 불트만 나오고. 보수라도 자유주의신학에서 배울 건 배워야 된다. 그래서 어떤 점에선 상당히 용감한 사람이죠. 자찬하기를 의식이 깨어있다고 해요, 자기들끼리.

 

가다머 이야기하면서 왜 성경신학자들이 그렇게 했는가? 결국 가다머 이론을 빌려와서 성경해석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결론이 뭘까요? 성경신학자들이 성경이 이야기한대로 하고 멈출 때는 멈춰야 된다고 하면서 가다머의 이론, 언어학 철학자와 결탁해서 이론들을 내는데 그 이론의 마지막 결과가 뭘까요? 그렇게 해서 뭘 이야기하고 싶은데?

 

제가 개혁주의신학을 이단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이 내는 결론은 간단해요. 진리는 모른다. 이게 결론이에요. 진리를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목사가 전할 때도 말을 조심해서 전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예수 믿고 천국 갈 수도 있다는데 그건 하나의 이론이고 그런 설이 있지. 그런데 그것 말고 예수 믿어도 구원되는 다른 설이 있어, 라고 항상 문장의 끝마디를 ‘이다’가 아니라 ‘이럴 수도 있다’로 끝내야 한다는 겁니다.

 

공부깨나 한 사람들, 일반 교수까지 안 가더라도 프로 골퍼 말고 그 밑에 있는 세미프로들이 하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교수는 못 되고, 박사는 못 되지만 그들이 하는 한결 같은 이야기가 진리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걸 십자자마을 공격하는 버전으로 하게 되면, 이근호 이야기도 하나의 이론일 수도 있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너만 목사냐? 너희만 복음 아느냐?

 

오죽했으면 십자가마을을 이단이라 했겠어요? 우리교회 사이트 가족나눔터에 충성모란 분이 글 하나 썼지요. 사람을 믿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근호 믿지 마라에 한 표 던진다고 댓글 달았어요. 하도 세월이 수상하니까 관심사가 복음에 관심 있는 게 아니고 왜 너만 아느냐에 관심을 두느냐 말이죠.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보니까 이런 학설이 있고 저런 학설이 있다는 말은 그게 진심일까요, 아니면 나는 누가 뭐래도 이걸 주장해, 라고 따로 뭔가 챙기고 있으면서 그것 안 들키기 위해서 뭔가 많이 배운 티를 내고 겸손한 티내는 거예요, 아니면 몰라서 그런 거예요, 어느 겁니까? 진짜 자기가 추구하는 게 있어요.

 

이건 나중에 라캉할 때 해야 하는 건데 미리해서 미안합니다. 욕망입니다. 욕망인데 앞에 이게 있어요. 뭐냐 하면, 살고자 하는 욕망. 진리는 하나밖에 없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가 살아야 돼요,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 살면 돼요. 그래서 나만 산다고 할 때 성경에서 두 사람이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질 때 그 구절이 얼마나 기쁘게 다가오는지 몰라요. 데려감을 당하는 자가 누구겠어요? 나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나라는 구절이 없어요. 주님이 그렇게 조치한다는 것이지 그게 나라는 게 어디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가다머가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가다머가 바보가 아니에요. 왜 유명한 철학자인데요.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하여튼 좋은 건 무조건 자기를 일단 포함시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 욕하니까 덩달아 같이 욕하는 거예요. “에이, 바리새인, 사탄의 자식들.” 그런데 하는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본인이 바리새인이라. 바리새인이 뭐 때문에 추궁 받았습니까?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추궁 받고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너는 형식으로만 그렇게 한다고 돼있지요. 그게 확정되는 것은 바울서신에서에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유대인들의 특징이 있어요. 무엇 때문에 복음을 안 듣는다고 돼있습니까? 로마서 10장 3절에 자기 의잖아요. 자기 의라는 확정된 정답을 갖고 마태복음 5장, 6장을 보세요. 바리새인들이 욕먹는 이유가 뭡니까, 주께서 왜 그런 설교하는 겁니까? 그 속에 들어있는 뭘 끄집어내기 위해서? 자기 의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게 가다머 이론이라니까.

 

지금 가다머 이론을 그냥 하면 여러분 지루해서 잠 오려고 했을 거예요. 안 그래도 잠 오는데. 가다머 이론에 그냥 들어가면 용어, 배경, 철학적 환경이 복잡하게 포위돼있기 때문에 그걸 뚫고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어요. 철학에 관심 없는 사람은 힘들어요. 그래서 제가 친절을 베푸는 겁니다. 성경을 이용해서 직접 뚫고 들어가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바보가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천재 중에 천재들입니다. 그들은 해석한 사람이에요. 뭘? 모세 율법을 해석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놓친 게 뭐냐 하면, 우리를 위해서 텍스트, 말씀을 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해석에 대해서 누가 시비를 겁니까? 예수님이 시비 걸고 나왔잖아요. 그냥 시비만 걸었습니까? 이번 해석은 잘못됐으니까 다음에 다시 시도해봐라. 이렇게 한 거예요? 바리새인의 원천을 터치한 거잖아요. 그 원천, 배후에 악마가 있었잖아요.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할 때 예수님의 이런 취지에 대해서 열두 제자 중에 누가 알아챘습니까? 베드로가 알아챘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근거가 있어요. 베드로가 예수님 잡혔을 때 세 번이나 부인했지요. 왜 부인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 잘 알고 자기 장모도 낫게 하고 물 위를 걷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 저주한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가 베드로에 권력이 감겨있었죠. 구원이란 나를 뒤덮고 있는 권력을 뚫지 않으면 구원을 이르지 못해요.

 

어떤 세간이 주인집에 있는 거예요. 도둑이 와서 주인을 묶어야 세간을 들고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 주인을 악의 권력으로 보는 겁니다. 이 권력이 느껴지는데 보이진 않아요. 사람이 팔 흔들 때 대통령한테 물어봐야 돼요? 전혀 못 느끼죠. 어디서 권력을 느낍니까? 군에 오라고 영장 나올 때. 이건 갈까, 말까의 문제가 아니죠. 사실은 권력은 영장 나오기 전부터 이미, 우리나라는 출생지로 국적이 정해지는 나라에요. 태어날 때 아기가 엄마,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고, 이런 이야기해요? 아기가 울기 바쁘지 무슨 대한민국이 왜 튀어나옵니까?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이미 권력에 꽉 채워져 있는 거예요. 택배 받아보면 조그만 물건을 스티로폼을 채워 넣었잖아요. 스티로폼이 권력이라니까요. 그걸 뜯어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안 보이죠.

 

베드로가 왜 부인했습니까? 자기 의지로. 쇼펜하우어는 맹목적 의지, 니체는 권력을 향한 의지, 딜타이는 역사로 둘러쳐 있는 존재, 슐라이어마허는 섭입견, 선이해로 시작하는 이해, 가다머는 딜타이와 슐라이어마허를 합치고 거기에 하이데거를 합쳐서 선이해로 시작되는 이해, 그걸 역사, 전통으로 둘러싼 인간의 존재. 그 전통으로 말미암아 우리 해석은 전통이 스며있고 그 전통을 지금의 나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걸 이해의 지평선에 있다. 이런 용어들을 사용한 거예요. 상은 차려있고 반찬들이 있어요.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하이데거. 가다머 하기 전에 미리 세 가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런 개념들, 용어들 사용하는 이유가 다 있어요.

 

다시 권력 이야기해봅시다. 권력이 둘러쳐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네 아비는 악마라고 했잖아요. 요한복음 8장에서. 그렇다면 바리새인이 그 악마를 물리치면 되지 않을까요? 왜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이게 예수님 보기에는 이래요. 인간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인간을 낳아요. 예수님은 인간에게 관심 없어요. 죄를 구체화시키고 실체화시키기 위해서 계속 인간을 이 땅에 유포시킨 겁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겠지만 이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없어요. 죄인밖에 없어요. 죄를 증거하는 증인들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세상은 인간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마귀와 예수님과 상대하기 위해서 세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걸 언약을 위해서 세상이 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언약이 투입되는 게 아니고 언약을 위해서 돼있다. 그럼 언약은 누가 만드는가? 주께서 내 주와 만들어요. 주와 내 주는 시편 110편에 나옵니다.

 

주가 둘로 갈라졌어요. 이건 최초입니다. 원래 주는 한 분인데 주가 둘 돼요. 다윗을 미래를 내다보면 예언했기 때문에. 그 주는 어디서 등장하는가? 주의 원수가 등장하면서 동반해서 등장합니다. 주의 원수를 발등상 되기까지 활동을 해야 될 역할과 임무가 두 번째 등장하는 주가 되는 겁니다. 과정 속에서 주가 나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딜타이입니다.

 

딜타이의 주장은 한 마디로 말해서 진리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없다’와 ‘모른다’를 구분해야 돼요. 진리는 역사 끝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럼 역사 전체가 그 진리를 진리 되기 위해서 진행 순서에 포함되지요. 역사는 사건의 사슬이에요. 딜타이란 역사학자가 이 사람이 최초로 역사 중심으로 나가는데 이 사람이 강하게 강조한 것은 왜 사람들이 텍스트를 보고 이해하고 해석할 때 그게 왜 오류가 되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들어보세요.

 

내가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이렇게 봐요. 나는 지금 성경을 본다. 그런데 딜타이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성경을 보는 것은 성경 보는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디서 오류가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성경 보는 사건은 남들도 할 수 있고 옛날부터 해온 사건인데 인간들은 자꾸 오해하기를 내가 성경 보는 사건에서 진리가 다 드러난다고 착각들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쉽게 갑니다.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손오공 고향 이야기했잖아요. 손오공 고향이 화가 산이라고 중국에 있어요. 지금도 많이 찾아가고 우리교회 집사님도 얼마 전에 갔답니다. 손오공이 장난꾸러기에요. 선녀들이 연못에서 목욕을 했어요. 그런데 손오공이 오줌을 눈 뒤로는 그 연못에 선녀들이 목욕하려 안 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네 살 먹은 아이가 들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우리나라 동화집에도 [선녀와 나무꾼]이잖아요. 네 살 먹은 아이가 동화를 보면서 이건 가다머 적이고 이렇게 따집니까? 선이해고 이런 식으로 안 따지지요. 선녀와 나무꾼이니까 선녀가 존재해요, 안 해요? 네 살 먹은 아이들한테는? 산타클로스도 존재하는데 선녀가 존재하잖아요. 그럼 존재하게 되면 언어에 의한 주체 형성이 된 겁니다. 누가 뭐래도 선녀는 존재하는 거예요. 중국에 손오공이 있고 손오공은 장난꾸러기라고 다 믿고 있는 거예요. 그게 네 살 먹은 아이의 주체고, 주체란 말은 선이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동화책 볼 때 진심으로 보는 거예요.

 

딜타이는 말합니다. 그래서 네 살 먹은 아이가, 선녀와 나무꾼에서 옷을 훔쳐서 결혼했다고 할 때 엄마는, “그래 너도 착하게 살아라.” 이럴 텐데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와서 “선녀가 어디 있어?” 라는 말을 해버렸단 말이죠. 그러면 아이는 선녀와 나무꾼의 행복한 사건에 잠겨있을 때 아버지가 보기에는 진리입니까, 아닙니까? 진리가 아니죠. 딜타이는 말합니다. 네가 네 살 때 봤던 선녀와 나무꾼이란 동화책을 보는 순간 진리로 확정된 양 착각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시기를 지났잖아요. 선녀 같은 소리하고 있네. 선녀 만나면 니 엄마와 결혼했겠나.

 

그러면 진리라는 게 내 삶으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종결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진리는 어디서 와야 돼요? 현재 내 심리, 정신구조로 하는 게 아니고 이건 역사에 맡겨야 된다. 참 역사에 맡겨야 된다는 말은, 꼭 뇌물 받고 검찰에 출석하는 사람이, 이 평가는 역사에 맡겨야 된다는 정치인들의 상투적인 용어에 나오듯이 역사에 맡겨야 된다. 이걸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네가 나에게 돌 던질 자격이 없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너나 잘하세요.

 

이렇게 되면 딜타이가 상대주의는 아니지만 자칫하면 진리에 상대주의자가 되지요. 각자 각자가 진리 따로 있다면 각자 믿는 예수가 따로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진리를 모른다고 했지 진리가 없다고 이야기하진 않은 거예요. 없다와 모른다는 차이 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겸손해 보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되면 그 누구라도 잘난 척하며 갑질하는 사람을 꺾어 내릴 수 있는 준비가 자기한테 갖춘 셈이 되지요. 누구 아들 잘됐다고 하면 우리는 괜히 시기 나서 지는 갖고 싶은데 못 가지니까 ‘흥’하죠.

 

여러분, 지난 번 사사기할 때 주제 뭐냐 하면, 한 마디로 말하면 ‘흥’이에요. 기드온이 승리하고 오니까 에브라임 자손이 흥. 왜 전쟁할 우릴 안 데려갔노? 그래서 사사기 제일 마지막 대목이 어떻게 끝납니까? 사람들이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했는데, 조건이 있어요. 왕이 없음으로 소견대로 하였더라.

 

질문인데 잘 들어보세요. 첫 번째, 그 말은 왕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두 번째, 왕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세 번째, 왕이 있어도 소용없고 왕이 없어도 안 된다는 뜻이다. 정답은 사사기에서 하나님 뜻은 세 번째겠지요. 왕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왕이 있으면 있은 대로 왕으로 인하여 새로운 죄가 나오고, 왕이 없으면 왕이 없다는 핑계로 죄가 또 나오고. 인간은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고.

 

그 죄는 로마서 10장에 자기 의가 나올 때까지 우리는 그 죄의 정체에 대해서 알 길이 없습니다. 이걸 신약에서 주님이 주의 원수와 만나기 전까지 자기는 자기 자유의지대로 마음대로 산다고 생각하지 나에게 권력이 둘둘 감아있다는 생각을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하지요.

 

가다머가 주장한 것은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인간의 사고방식은 자기 입장의 사건일 뿐이지 전체 입장을 다 수렴한 건 아니다. 진리는 모른다. 그럼 어디 있냐? 역사 끝나봐야 안다는 뜻이에요. 좀 더 나가면 역사 끝을 향하여 나가면 나갈수록 진리는 점점 더 진리답게 될까요, 후퇴할까요, 안 그러면 진리에 접근할까요? 이건 답변해보세요.

 

딜타이의 주장에 의하면 접근하죠. 진리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 말은 바로 바리새인 해석법입니다. 현재 진리는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추가해서 계속해서 진리를 쌓게 되면 무한대로 계속 미분적으로 접근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우리에게는 믿을 게 없다가 아니라 정답은 모르는데 접근해가고 있는 그것을 믿자. 이게 바로 오늘날 개혁주의 성경신학을 주장하는 우리나라 모든 신학교 교수들의 주장입니다.

 

복음? 복음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접근하는 공부까지 한 나를 좀 알아줘. 외국에서 그렇게 고생하면서 박사학위 받으면서 너희들보다 더 얻은 정립된 진리를 알아줘. 쉽게 말해서 날 알아줘. 그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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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8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1-가다머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딜타이는 모든 것은 과정 중에 있습니다. 흘러가버리고. 흘러가는데 흘러간 것의 결실물, 그 열매, 그 결과물이 지금이니까 지금 남아있는 것은 과거의 중첩된 것이니까 이것도 좀 지나면 다른 것으로 변형되니까 진리란 마지막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진리가 없는 게 아니고 진리란 그때그때 달라요. 이걸 딜타이의 역사주의라 합니다.

 

딜타이가 역사주의를 한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형이상학을 다 부셔버린 거예요. 형이상학을 역사로 바꿔놓은 겁니다. 형이상학으로 신이 어떠니, 뭐가 어떠니 하지 말고 역사한테 물어보자. 옛날에는 신이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고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이렇게 볼 것이다. 신이란 것도 역사란 운반체에 실려서 흘러갈 뿐이니까 특정 사건을 진리라고 할 순 없다. 이게 딜타이가 말한 겁니다. 딜타이가 이런 말할 때 얼마나 시원했을까요. 골치 아픈 철학은 가라. 이제 남아있는 것은 역사뿐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이 문제에 대해선 딜타이가 아무 소리 못한 거예요. 옛날의 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했는데 신이 역사로 바뀌었거든요. 역사를 전부라고 말은 했는데 그 역사와 인간 사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그 문제는 옛날의 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그 문제와 똑같은 딜레마에 빠진 거예요. 문제가 굉장히 간단하게 여겼는데 간단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가다머는 역사를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알아야 된다. 자기 존재를 가다머는 세계 내 존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이데거에서 나온 표현이죠. 하이데거의 철학을 아시겠지만 다시 정리하게 되면, 인간이란 일단 없다. 존재가 인간이란 신체를 통해서 발현되게 되면 인간이란 껍데기를 사용해서 현실로 드러났기 때문에 존재에 해당되는 자(者)라 해서 존재자, 이해되시죠. 숨겨진 보이지 않는 존재가 인간화 되게 되면 그것을 인간이라 하지 말고 존재자라 하자. 왜 인간이라고 해선 안 되느냐? 인간은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죽기 때문에. 없애질 것에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느냐. 존재자에서 죽으면 도로 존재로 돌아가자. 무란 말은 맞긴 맞는데 처음부터 존재밖에 없었기 때문에. 존재자를 통해서 다시 존재로 돌아가 버립니다.

 

당신은 안 죽었는데 존재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그게 언어입니다. 가다머의 이론은 언어를 통해서 만들어진 인간이기에 진리를 아는 데 있어서 다른 것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해석하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화산을 통해서? 안 되지. 태풍을 통해서 나를 안다? 기어가는 달팽이를 통해서 인간을 안다? 아니에요. 언어를 통해서 안다는 겁니다.

 

그럼 달팽이란 말 붙이지 말까? 아니죠. ‘달팽이’라고 누가 호칭합니까? 달팽이란 누구 언어입니까? 인간, 존재자에서 나온 언어로 달팽이를 부르는 순간 그 달팽이는 자체적인 의미는 몰라요. 달팽이한테 물어보지 않아요. 달팽이로 부르니까 기분이 어때? 이런 것 묻지 않습니다. 달팽이라고 불러주는 것은 내가 너에게 이름을 부름으로서 비로소 너는 나한테 다가와서 나에게 의미가 되는 겁니다.

 

하이데거는 여기까지 이야기한 거죠. 그런데 가다머는 더 나가서 아까 딜타이의 역사주의 보탭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이름을 호칭하면서 나에게 의미가 되는데 그건 하이데거 식인데, 딜타이는 과정 중이죠. 과정을 갖다 붙이면 의미라는 것이, 하이데거는 내가 있고 존재가 있는데 존재자와 존재 사이는 언어로 연결된다. 언어라 해도 되고 하이데거는 이걸 계시로 봤습니다. 그래서 불트만이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불트만은 신학자잖아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집니까? 계시잖아요.

 

다음 시간에 할 에벨링은 그 계시를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미리 이야기할 게요. 에벨링의 핵심은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스스로 알려주는 사건이 터질 경우에만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딜타이잖아요. 내가 여기 책을 본다. 이게 사건이라서 책의 의미를 진리는 아니지만 진리에 근접하는 나는 진리라 우기는 식으로 보는 반면에 에벨링은 보이지 않는 성경의 힘이 나한테 성경 볼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는 겁니다. 에벨링 이론은 나중에 칼 바르트의 신학이론으로 흡수돼요. 그걸 말씀의 사건이라 하죠. 말씀의 사건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바르트가 이야기하지만.

 

개인이 존재로 따지는 것은 하이데거에요. 이건 스톱된 거예요. 그런데 역사, 딜타이를 집어넣으면 가다머는 역사가 운반체니까 전달된 게 있어요. 전달되면서 내가 이해하게 될 때 텍스트, 성경이라 합시다. 성경이고 학문이고 과학이고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하이데거는 성경을 포함해요. 과학책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성경을 봅시다.

 

성경을 볼 때 성경 안에 성경 역사가 들어있어요. 그럼 성경저자가 누구냐? 마태, 마가를 저자라 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역사가 저자지요. 뭔 뜻인지 충분히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마태, 마가가 역사 속의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역사 속의 인물을 마태복음을 이해할 때 마태가 저자니까 저자의 본심을 알아내자, 라고 주장한 최초의 해석학이 슐라이어마허에요.

 

슐라이어마허가 우리가 보기에는 굉장히 간단한 건데 소설을 썼잖아요. 소설의 저자의 의미를 알아내게 되면 그게 해석이다.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본래 의도고 그게 진리다. 성경은 진리니까 마태, 마가, 사도 바울의 의미를 우리가 알아내면 그게 진리가 된다. 이게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이에요. 그런데 제가 말한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연한데 그전 사람은 뭐 했노? 성경 볼 때 어떤 의미로 해석했는가? 그전엔 해석학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석했는가? 그 해석을 교리가 해줬다니까.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예를 들면 우리교회에 장로님 계시고 장로님 손자가 경산중앙교회에 다녀요. 일곱 살 먹은 애가 그 방면에 얼마나 머리가 특출한지 목사가 설교하면 설교를 다 외울 정도로 너무너무 성경에 관심이 많고 걱정도 많고. 사람은 다 죽는데 에녹이 죽어서 하늘나라 갔다니까 내가 하늘나라 못 가면 어떻게 하지, 걱정했다는 거예요. 성경 하나하나에 대해서 질문을 계속하는 거예요. 선악과 왜 심어놨습니까, 하나님은 누가 만들어놨습니까, 하는 식으로.

 

그러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귀찮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질문은 너희 교회 전도사한테 물어라, 라고 할 때 그 애가 아주 놀라운 말을 했지요. 목사, 전도사한테는 감히 물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평소에 주일학교에서 그렇게 교육을 시킨 거예요. 첫째는 무식해서고, 두 번째는 귀찮아서고. 내가 시킨 대로 믿으면 되지 그걸 왜 그러냐고 자기한테 따지만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 들은 애가 일곱 살이거든요. 그게 자기 주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주일에 손오공 고향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지요. 서너 살 먹은 아이가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것이 주체가 됐다면 오늘날 어른들한테는 뭐가 주체가 됐을까요? 돈이에요. 이게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허구에요. 왜? 돈으로는 목숨은 부지되지만 생명을 못 받고 대치가 되거든요. 요한복음 6장에서 고기 먹고 떡 먹었지요. 그들이 결국 무엇에 튕겨나갔습니까?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결코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고 할 때 그들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주님이 이야기했잖아요.

 

배불리 먹는 게 돈이니까. 존 로크가 이야기했습니다. 썩는 것은 돈으로 바꾸면 안 썩는다. 냉장고 넣어도 썩으니까 돈으로 바꾸면 된다는 거예요. 다 아는 이야기인데 얼마나 명쾌한 진리인지 몰라요. 돈은 뭐든지 교환할 수 있지만 사과나 고등어와 안 바꿔줄 수 있어요. 뭐든지 돈을 쥐고 있어야 돼요. 이게 우리의 주체가 된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허구가 되고, 요한복음에 보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이미 배부른 것이 주체가 된다면 너는 나와 완전히 대립된다.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느니라. 자기 주체와 안 맞으니까 다시 말해서 마치 예수님이 우리한테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선녀? 사실은 없거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선물 안 줘. 아버지, 엄마가 준 거야.” 이러는 순간 그 아이는 아버지한테 삐지는 거예요. 두 번 다시 아버지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와 똑같은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누구도 나한테 올 수 없고 아버지가 나에게 보내지 않으면 내게 올 수 없다는 그 내용이 현재 우리 주체에 새겨져 있으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열심히 해서 하나님을 믿었다든지 내가 기도해서 은혜 받았다든지 내가 어떤 행동 때문에 구원받았다면 그 추체는 허구입니다. 엉터리에요.

 

슐라이어마허는 마태복음이 있으면 마태가 썼고 그 저자를 알면 된다는 겁니다. 그럼 그전에는 뭐냐? 네가 왜 마태를 거론하느냐? 마태가 중요한 게 아니고 성경은 성령이 만들었지. 다르지요. 마태를 알아야 되고 사도 바울 알자. 아니, 아니. 모든 성경은 성령에 의해서 된 거다. 그러니까 마태 신경 쓰지 말고 마가 신경 쓰지 말자.

 

슐라이어마허는 1768~1834이에요. 19세가 중반 사람입니다. 가다머는 1900년 사람이고, 딜타이는 1833~1911, 19세기 중반 사람이죠. 딜타이 보고 하이데거 알고 가다머가 자기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다머는 20세기 사람이니까. 이야기 주제가 해석학에 대한 건데 성경해석과 다른 점은 끝날 때 말씀 드릴게요.

 

지금 해석학은 뭐냐? 저자를 알아야 된다. 알 때 문법적으로 알아야 되는데 아는 데 있어서 선이해가 있어야 된다. 선입관, 선이해는 슐라이어마허가 가다머보다 먼저 이야기했어요. 선입관은 어디서 왔는가? 슐라이어마허는 직관, 직접 보는 것. 직관을 나중에 감정, 신에게 무조건 의존하는 감정이 진리를 뽑아낼 수 있다고 한 거예요. 왜? 목사기 때문에. 목회를 해야 될 사람이잖아요. 19세기에 들어올 때는 유럽에서 사람들이 교회에 가겠어요? 이미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외국에 식민지 개발하고 바쁜데 언제 교회 찾습니까? 교리만 알게 되면 배 타고 먼 바다에 가도 거기서 교리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면 되거든요. 성경 해석학이 필요치 않다니까.

 

그런데 슐라이어마허가 보니 본토 유럽 사람들이 교회를 안 다니는 거예요. 세례 받을 때 오고, 나중에 죽을 때 오고, 태어날 때 유아세례 받을 때 오고 끝이라. 돈과 관련된 스피노자, 칸트, 뉴턴, 과학기술이 발달하다보니까 도덕은 이미 합리주의, 경험주의, 관념론, 이런 것들이 도덕윤리를 다 차지해버렸어요. 국가. 그러니 교회에서 들을 게 없어요. 칸트가 이미 윤리를 이야기해버렸는데, 뭐. 네 속에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있다. 끝난 이야기에요. 빛이니까 계몽주의, 칸트의 계몽주의. 하나님의 계시는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양심이 계시다. 끝난 문제에요. 교회에 와서 신학 들을 필요 없고. 윤리도덕이야 자기 양심에 따르면 되고.

 

슐라이어마허는 성경의 저자를 봐야 됩니다. 그 당시에 슐라이어마허가 혜성처럼 등장해서 교회도 너 때문에 존재 의의가 사는구나.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은 무한자가 유한자를 직접 만난다. 중간에 일체의 철학은 필요 없다. 철학은 가라, 윤리도덕도 가라, 도덕심도 가라. 일단 도덕심 이전에 우린 직관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의존하게 돼있다. 의존하는 감정은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의 저자도 같은 마음이니까 우리는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이게 슐라이어마허의 주장입니다. 의존하는 것.

 

의존하려면 언어가 필요하겠지요. 언어는 문법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지요. 문법적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해석학이 시작되는 겁니다. 어떤 문법이 되는가, 어떤 문장으로 돼있고, 전체적인 문장은? 한 단어가 다양하지요. 다양하다는 말은 긍정적으로 보입니까, 부정적으로 보입니까? 그게 다가 아니지, 라고 비비 꼬는 이야기지요. 그 미장원 머리 잘하더라. 그 미용실 원장 모르지? 그게 그 사람의 다가 아니야. 그 목사 훌륭하던데? 그게 네가 아는 게 다가 아니야.

 

그래서 단어의 의미는 뭘 감추고 있느냐 하면, 실재를 모르기 때문에 다양성이 나오는 거예요. 정답을 모르기 때문에 다양하게 나오는 겁니다. 모든 성경 원어도 마찬가지에요. 성경 원어의 의미가 하나로 고정된 의미가 없어요. 다양합니다. 물어봅시다. 성경 원래 의미가 다양한 겁니까, 성경을 보는 우리 해석학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가 유한자, 인간이기 때문에 다양한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아니면 둘 다입니까? 정답은 둘 다에요.

 

언어가 됐다는 것은 주께서 낮아지신 거예요. 모세가 시내 산에 갔을 때 언어가 필요 없어요. 딱 보면 다 아는 거예요. 이게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와요.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잖아요. 그때 교과서 들고 갔어요, 성경책 들고 갔어요? 방언, 예언, 언어는 나중에 다 폐해지는 거예요. 부분적으로 아는 거예요. 언어는 이 땅에서나 통하는 것이지 하늘나라에 가면 언어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헬라어, 히브리어 있습니까? 천사는 그 말 사용해요? 천사는 다양하게 사용해요. 아람어면 아람어, 헬라어면 헬라어, 한국말이면 한국말. 천사는 실재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잖아요. 방언을 하잖아요. 방언이 하나의 언어입니까? 다양한 언어지만 의미는 다 같이 복음만 이야기하잖아요. 복음이 아닌 방언은 없기 때문에. 그만큼 이 더러운 세상에 주님이 오셨단 말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한국말 쓰지 않고 아람말 쓰신 것은 스스로 낮춤입니다. 언어 속에 자기를 낮춘 거예요. 낮췄다고 비밀이 희석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나타남으로 더 모르게 돼있어요. 나타난 그것 때문에 안 나타나면 상상이나 하지 나타나면 더 모르게 돼있어요.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사람이 교회 올 때 천국 간다고 하잖아요. 천국 갈 때 문제가 있어요. 천국의 기준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천국 간다고만 이야기하고 천국에 넣어주고 안 넣어주는 기준을 고려하지 않아요. 그냥 가고 싶다고 다 가는 동네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간에 뭐가 빠진 거예요? 십자가를 빼버리고 그냥 하나님과 나와 상대해서 저 가고 싶어요, 하면, 넣어줄게, 내 새끼. 이런단 말이죠.

 

십자가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란 진짜 천국의 주인 되시는 분을 이 땅에 투입했다는 말이잖아요. 투입할 때 병도 고쳤지만 입에서 말이 나왔지요. 그 말을 유대인이나 심지어 열두 제자가 알아듣질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그 당시 제자들이 못 알아들었습니다. 46년 동안 지었는데 어떻게 사흘 만에 짓느냐? 주님의 뉘앙스도 그래요. 46년을 고려해서 3일이라고 했다고요. 그러면 듣는 사람은 뭘 계산하겠습니까? 46년과 3일만 계산하겠지요. 어떻게 46년을 3일 만에 짓는가? 여기는 작은 요정들이 동원돼야 돼요. 이 사람들 동원해서 필름을 빨리 돌리면 까부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지을 수 있는 그게 인간의 한계에요.

 

요한복음에서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비로소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몸을 지칭한 줄로 제자들이 알았다고 돼있지요. 그런데 그 해석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벽돌에서 인간의 신체로 연결돼요? 해석한 게 더 어려워. 여러분, 요한계시록이 쉬워요, 어려워요? 예수님 하신 일을 해석했는데 더 황당해요.

 

그래서 슐라이어마허의 해석에 대해서 가다머가 고민하면서 선배님, 해석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선이해가 있는데 그 선이해는 인간의 유한자의 한계에서, 아까 슐라이어마허는 유한자로 할지라도 무한자를 직관, 직접 알 수 있다 했지요. 비록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성경을 딱 보면 알게 돼있다. 이게 슐라이어마허에요. 이걸 슐라이어마허는 성령으로 봤어요. 하지만 철학책에서는 성령이란 말을 빼버리고 직관이라 한 거예요. 성령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유한자,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풀이하려면 감정인데 그냥 감정이 아니고 의존적 감정,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는 감정. 어떻게 뜻이 비슷하게 됐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성령과 같다고 봅니까?

 

일반인에게 납득은 되지요. 무조건 의존적 감정, 그걸 종교적 감정이라 했는데. 성경에서도 무조건 의존적 감정이라 합니까? 현대중공업에 골리앗 크레인이 있지요. 성경에 나오는 단어는 우리가 해석할 때 가다머처럼 덤벼드는 게 맞아요. 우리는 전통과 역사와 과거의 축적으로 된 건 맞아요. 성경은 누가 가져갑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나 오병이어 떡 먹던 사람은 모르지요. 그 성경 단어는 골리앗 크레인에 끌려서 성경해석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주체한테 가져가요. 그분이 누구십니까? 구약에서는 하나님 이름이고 신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가요. 주님이 가져간다고.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지요. 성령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내가 해석하는 걸 삭제시켜요.

 

이 복음이 오늘날 교회에서 납득이 안 돼.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이 그때 히브리어로 썼잖아요? 그건 낮아지신 것이지. 모세가 시내 산 올라갈 때 성경책도 안 들고 갔어요. 에비앙 생수 들고 갔습니까? 엄마 도시락 갖고 갔어요? 40일 동안 모세는 뭘 먹고 살았습니까? 베개 가져갔습니까? 그냥 맨 몸으로 갔잖아요.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얼굴이 해 같이 빛났어요. 그건 뭘 보여주느냐 하면, 생명의 세계와 이 땅에 있는 목숨 부지의 세계와 달라서 그래요.

 

모세의 육체가 대단하다고 하면 안 돼요. 모세와 대화해주신 주님이 대단한 분이죠. 그 주님이 더러운 신체, 죄 된 몸으로 이 땅에 왔단 말이죠. 그리고 변화 산에서 그 몸이 해 같이 빛난 몸이 되죠. 그런데 예수님만 그렇습니까? 같이 있던 모세, 엘리야도 해 같이 빛났지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진다는 말은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는 저쪽 세계고 우리는 지저분한 이쪽 세계란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했던 그 이야기를 그대로 산 밑에 내려와서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인자가 이 땅에서 죽고 사흘 만에 영광 받으리라. 방금 본 게 영광이잖아요. 내가 이 땅에서 죽어야 그 영광을 다시 너희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란 인간에겐 아무 의미 없는 세계에요. 우린 쓰레기니까. 쓰레기 같은 인간이나 이 세상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녀갔다는 것에 의미를 둡시다. 그 다녀간 발자국이 성경의 텍스트가 되는 거예요. 마태, 마가, 스가랴, 이사야, 예레미야, 신명기는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면서 밟아야 될 계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행동 할 때마다 성경이 응하게 함이라 또는 때가 되매 말씀을 이루려함이라. 여기에 보조역할하는 분이 있어요. 그분들이 천사입니다. 성경 봅시다. 가다머 이야기하다가 이 이야기가 더 신난다. 가다머가 중요한 게 아니고 슐라이어마허가 십자가에 달렸느뇨? 아니거든요. 딜타이가 못 박혀 죽은 게 아니잖아요.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사가랴 선지자가 6개월마다 교체하면서 제사장 직으로 들어가지요. 부인인 엘리사벳이 나이 많아 수태를 못합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나타나지요. 지금 사가랴가 성경 해석을 어떻게 했습니까? 사가랴 선지자가 가다머 식으로 해석한 거예요, 딜타이 식으로 해석한 거예요, 슐라이어마허 식으로 해석한 거예요, 하이데거 식으로 해석한 거예요? 아까 정답을 이야기했는데. 인간은 해석이 안 돼요. 사가랴도 인간인지라 해석을 하려고 시도하지요. 그게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 정말 중요한 거다.

 

20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보세요. 사가랴가 해석을 했어요? 당연히 해석하지요. 인간이니까. 어떤 식으로? 가다머 식으로, 딜타이 식으로, 슐라이어마허 식으로 해석한 거예요. 왜 우리가 모여서 철학 공부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인간들이 해석을 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해석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해석하는데 우리가 한 해석을 마치 잘한 짓으로 착각한다고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가랴를 찾아온 천사 이름이 뭡니까? 이름도 멋있어. 가브리엘 천사가 왔지요. 해석했어요, 안 했어요? 해석을 만약에 안 했으면 사가랴가 벙어리가 안 됩니다. 해석을 하니까 믿습니까, 못 믿습니까? 사가랴 해석법에 의하면 못 믿지요. 가다머, 딜타이, 어떤 해석을 해도 이건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에 해당돼요? 믿는 게 아니죠.

 

구원은 아무것도 한 게 없이 구원받아요. 따라서 해석해서 구원받는 것은 실패로 끝납니다. 그런데 실패로 끝난다고 이야기해도 인간은 죽을 때까지 해석해요, 안 해요? 해석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다머를 공부해야 된다 이 말이죠. 가다머가 얼마나 똑똑한지, 딜타이, 슐라이어마허가 얼마나 똑똑한지 공부해야 돼요. 그게 우리와 같은 종류니까. 그리고 사가랴도 공부를 해야 돼요. 사가랴가 믿지 못했어요. 20절 보면 재밌어요.

 

네가 믿지 못하기 때문에 벙어리가 되면서 그 벙어리가 언제 풀립니까? 여기 나와 있지요. 내 말이 이루리라고 돼있지요. 주님의 말씀을 누가 해석하고, 해석한 대로 누가 실시합니까? 주님의 말씀은 주님이 해석하는데 그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주님이에요. 그러면 주께서 모든 계시는 누가 밟는다? 예수님 스스로 자기가 공생애 모든 액션과 행위와 말씀은 때가 되매 말씀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면 성경은 주님이 주님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시편 110편. 받는 주님은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주님의 원수가 있어요. 그 원수를 척결하기 위해서 주님 보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 원수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전쟁에 돌입돼있지요. 그러면 구원은? 주님이 원수를 이겨놓으면 다시 말해서 집주인을 묶어놓으면 그 집에 세간은 도둑으로 오신 우리 주님에 의해서 그냥 공짜로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가 냉장고라면 냉장고가 도둑에 의해서 가져가면 우리는 어떤 느낌을 가져야 됩니까? 우리는 죄인이구나. 내 힘으로 가는 게 아니구나, 라는 것을 반복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슐라이어마허는 성경을 뭐로 봤습니까? 의존하는 감정으로 봤지요. 그러면 제가 묻겠습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하면 구원됩니까? 안 되지요. 유한한 인간 속의 어떤 요소도 그게 구원의 바탕이 안 됩니다. 그런데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명한 밴틸 교수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의 구원은 접촉점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종교적 접촉점. 그건 폴 틸리히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폴 틸리히는 하이데거 신학을 받아들여서 불트만도 마찬가지고 숨어있는 존재에서 주님의 계시 사건이 오게 되면 구원이 이뤄진다는 겁니다. 그 해석 맞아요? 틀리지요.

 

왜 우리가 가다머 공부를 해야 됩니까? 인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선입관이 있다. 이게 가다머 이론이거든요. 그 순간 우리가 이해하되 전에는 내 이해가 도로 가져가는 게 아니고 전통적으로 내려온 진리를 현재 나의 상황에 맞도록 서로 융합이 되면 그것이 지금 나한테 필요한 진리다. 누가 내 말에 이의 있으면 끄집어내봐라.

 

그걸 오늘날 도널드 거스리라든지 성서유니언에서 나오는 책들 있어요. 성경 신학한 사람들 씨슬턴 같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경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때 그 저자에게 마태, 마가, 누가에게 준 거다. 사도 바울의 신학을 공부하자. 바울신학으로 유명한 사람 있잖아요. 요 근래 그런 사람들 책 많이 나와 있거든요. 저한테 그런 질문해요. 목사님, 왜 마태, 마가 저자가 다 다릅니까? 마태신학은 뭐고, 요한의 신학은 뭡니까? 답변해놨는데.

 

요한의 신학을 보자. 가다머 이론을 적용시킵니다. 사도 요한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우리가 물어야 되겠지요.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 있고 사도 바울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이 성경이 옛날에 사도 바울이 있었단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동일하게 작용할 테니까 우리에게 사도 바울의 신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받아들이려면 사도 바울이 있던 역사적 상황과 우리의 역사적 상황이 융합돼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오늘 공부할 가다머 해석학의 핵심이에요. 지평선이 같은 지평선이 돼야 된다는 겁니다.

 

과거의 전통과 지금 나의 이해와 같이 결합이 되면서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나온 결과는 뭡니까? 가다머는 이야기합니다. 새롭다는 겁니다. 왜 새로운데요? 내가 성경을 본다는 사건이 새롭게 투입됐잖아요. 이게 딜타이의 철학이라 했지요. 내가 본다는 게 사건이잖아요.

 

지금 가다머를 성경 제쳐놓고 가다머 논리를 비판해봅시다. 비판할 여지가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너무 완벽합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창조하신 분이죠. 창조하기 위해서 누굴 사용한다? 나를 사용하신 거예요. 성경 보라고. 성경은 내가 보기 전에는 뭐가 들어있습니까? 성경에 나온 사도 바울의 해석도 들어있고 그동안 사도 바울과 오늘날 이 시대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게 텍스트와 투과된 텍스트, 완전히 바리새인 해석입니다.

 

쉽게 갑니다. 자, 여기 누가복음 1장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것, 누가가 살던 삶의 지평이지요. 그걸 보면서 결정 성경에서는 뭐라고 해석하나? 1장 38절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해놓고 마리아는 이미 요셉과 정혼한 사이, 이게 들어가지요. 이런 뜻이네.

 

그런데 오늘 이사를 하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시키지? 주의 계집종이 주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해운대로 이사하는 것도 주의 뜻이구나.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단 말이죠. 그럼 이사 안 가면, 설교하면? 설교할 때도 되지요. 이 본문으로 다음 설교할 때 더 보탬 되라고 성령께서 이 말씀 주셨구나, 라고 내 해석이, 내 의도가 내가 기대하는 목표가 추가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바보가 아니잖아요. 그냥 기계가 아니잖아요. 인간인고로 내 의도, 내 욕망이 추가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설교할 때도 주께서 함께 하시는구나. 새로운 느낌은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창조적인 활동으로 나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주어진다는 이것이 바로 가다머 해석법입니다. 얼마나 생생해요.

 

이것을 성경신학자들이 거부할 이유가 있어요? 뭐 잘못돼야 거부하지. 아무리 봐도 맞는 이야기하고 있다니까요. 방금 해석이 틀렸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이렇게 안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치매 걸려 죽을 때까지 이 짓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이 구절에 은혜 받았어요.” 목사는 안 그래요. 목사도 마찬가지잖아요. 그게 가다머 해석이라니까요.

 

성경신학자들의 바보가 아닙니다. 가다머가 철학자가 뭘 알겠어? 보니까 세상에 우리가 하는 걸 그대로 이야기했잖아요. 가다머는 어디서 나왔지? 딜타이. 가다머에서 딜타이, 딜타이에서 슐라이어마허로 간다는 말은 이미 가다머의 이론에 부합되는 거예요. 전통과 지금의 나의 상황과 결부해서 새로운 의미를 발굴해내는 것. 그래서 씨슬턴이란 그 사람은 말하기를 가다머 이론대로 우리도 내년 되면 새로운 이론이 나올 것이고, 2017년 되면 주께서 새로운 진리를 줄 것이고, 따라서 진리를 끝까지 가봐야 안다.

 

그래서 제가 개혁주의를 이단이라 하는 거예요. 진리는 없어요. 개혁주의신학이 이단인 이유는 끝까지 가봐야 알기 때문에 역사를 내가 거부하니까 김영한 교수가 하는 말이, 너는 계룡산에서 왔다는 말이 나온 거예요. 왜 그 사람이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논문 발표에서 왜 그런 소리했는지 이해되십니까?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계룡산에서 계시 받았네.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김영한 교수가 가다머를 주장한 거예요. 실제로 가다머 책들이 나왔고 김영한 책이 많이 나왔어요. 그중에 네 권정도 다 봤어요. 그 사람은 역사주의자에요. 오늘날 총신, 장신 전부 역사주의자들입니다.

 

이게 반박하겠습니다. 반박은 누가 하느냐? 성경적 반박은 다음 시간에 에벨링이 할 것이고 여기선 베르그송으로 반박하고. 베르그송은, 너희들은 연장과 지속을 혼동하고 있다고 했어요. 연장은 자꾸 퍼지는 걸 말하거든요. 연장은 분해가 가능해요. 책을 좀 작게 만들어볼까? 끊으면 되지요. 키높이 하면 키가 좀 커지죠. 신체는 연장되고 물체는 커집니다. 그런데 지속은 끊어집니까? 끊어지지 않아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람들은 시간을 시간 자체로 보지 못하고 시간을 공간화 시켜놓고 본다는 겁니다. 역사주의의 잘못은 시간, 공간 자체가 전부 의식의 흐름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시간, 공간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의식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의식이 먼저고 그 다음에 의식에서 조작된 것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겁니다. 베르그송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건방지게 주장하느냐?

 

수학시험 칠 때 수학 좀 하는 사람은 그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가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과 빚쟁이와 이야기하면 시간이 정말 안 갑니다. 설교도 재미없게 하면 시간이 그렇게 안 가요. 그런데 설교에 빠져버리면, “목사님, 5분 안 됐습니까?” 5분이 뭐야, 50분 됐는데. 이게 뭐냐 하면, 과학이 문제라는 거예요. 측정할 필요 없는 걸 왜 측정해서 사람들을 거꾸로 오인하게 만드느냐 이 말입니다. 그냥 의식대로 살면 되는데.

 

어떤 경우에 행복합니까? 질문 자체가 문제 되는 거예요. 행복하냐고 묻는 게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에요. 행복하게 되면 말이 없어요. 그냥 웃지요.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맛있는 점심 먹으면 행복할까, 차 바꾸면 행복할까? 지금 몸이 힘들다는 거예요. 몸이 힘들고 아프고 괴롭고 스트레스 받고. 행복이 뭔가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제가 전에 설교했지만 사랑 앞에서 내가 없어지게 되면 행복하냐고 말할 필요 없어요. 말이 필요 없을 순간이 바로 베르그송에 의하면 그게 바로 행복이란 거예요.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아프지 않은 상황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아프다는 자체가 뭔가 찌르기 때문에 아프다는 게 아니고 그 상황이 힘들어서 불행해서 아프다는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과학자들은, 철학자들은 아프다는 것을 연구하는 거예요. 이미 튀어나온 결과, 아프다를 연구하는 거예요. 그럼 주사 놓으면 되지요. 그럼 주사 놓으면 아프지 않을 행복이 있습니까? 중요한 질문이에요. 몸과 관련 없이 행복했는데, 그녀가 있음으로 행복했는데 아프다니까 병원에서 주사를 놓았단 말이죠. 그럼 주사가 그녀를 대신합니까? 아니죠.

 

베르그송은 말합니다. 그냥 생으로 살아라. 생으로 살면 내가 불행하니 행복하니 말할 자격, 그걸 따질 자격 우리한테는 없다. 가는 대로 살자. 이게 철학이 발전하게 되면 니체에요. 그게 발전하면 들뢰즈입니다. 제발 골치 아픈 생각하지 말고 되는 대로 살아라. 잘못하면 막 사는 게 되는데. 막 사는 건 모든 은혜에 감사하란 뜻이고요. 이건 흘러가는 물 같은 존재다. 이게 베르그송 철학입니다. 역사주의? 그런 것은 자기의 지속을 몰라서 무식한 이야기란 거죠. 그러면 뭔가 해석한다는 건 그 자체가 잘못된 거죠. 에벨링에 의하면 우리 자체가 해석된 존재인데 해석된 존재가 뭘 해석해요. 주께서 늘 우릴 인도하는데.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례요한 아버지 사가랴가 본인이 어떻게 해석한 게 아니고 본인 된 것 자체가 하나님 뜻에 의해서 그렇게 돼야 될 존재인 것을 우리가 알듯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일인 것을 증거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