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화이트헤드 160510 본문
녹취:한윤범
20160510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3-화이트헤드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화이트헤드에 대해서. 수학자지요. 수학자란 말은 과학적 인식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1861~1947까지 살았던 사람인데 화이트헤드의 오늘 이야기해야 될 철학, 사실은 신학에 대해서 언급하겠습니다. 이 화이트헤드에 대해서 김용옥 교수가 아주 좋아합니다. 종교를 갖지 않은 것에 대해서 뭔가 변명할 수 있는 종교를 대체할 만한 웅대한 철학이 필요한 데 화이트헤드가 자기 신론을 앞서서 대변해주니까 굉장히 반기는 겁니다. 김용옥은 화이트헤드를 백두선생이라고 해요. 그 사람의 종교관, 신론을 자기 것으로 그대로 인수합니다.
이 화이트헤드의 신학에 대해서 김용옥 교수만 아니라 동양 철학을 하는 사람들도 좋아합니다. 그럼 어떤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신론이 동양 철학하는 사람들에게 인기 있느냐 하면, 그동안 서양 철학에서 과학을 언급하면서 과학의 우수성, 탁월성, 세상을 진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 과학이 나오게 된 원인은 서양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해온 거예요.
동양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잖아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혜택, 과학적인 기술과 합리성이 언급한 탄탄한 국가제도에 그들이 사실은 당했습니다. 제국주의에. 전쟁하면 당하겠습니까? 기술 차이가 월등한데. 그동안 주눅이 들었지요. 과학을 믿으려면 과학이 유발된 하나님까지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동양에서 과학이 발달한 모든 동기는 선교사들이에요. 하나님 믿는 데서부터 과학과 연결됐다고 생각한 겁니다. 서양 쪽에서는. 동양에서는 과학은 탐나고 하나님 믿으려고 하니까 그동안 살았던 동양체제는 무가치한 것으로 자진 폐기해야 되는데 이게 상당히 열등감 느끼고 기분 나쁜 거예요. 과학은 과학대로 챙기고 신은 안 믿어도 되고. 오늘날 젊은 사람들처럼. 과학 공부는 하면서 하나님과는 관계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에 과학이 나왔던 바탕이 되는 기독교 문화, 기독교 정신과 무관한데 과학은 과학대로 밝힐 수 있다, 이런 아이디어 같으면 동양에선 굉장히 선호할 수밖에 없지요.
지금 중국의 자본주의나 세계관은 과학적 세계관이잖아요. 무기도 발달하고 달까지 로켓도 쏴 올리니까. 그런데 중국 사람의 사고방식을 서양의 사고방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신을 인정하지 않거든요. 특히 대만은 제사가 굉장히 심해요. 대만은 여전히 옛날 중국의 한 문화를 고수하고 있어요. 그게 중국적이라고 우기면서. 그런데 반도체 같은 것은 대만에서 발달했단 말이죠. 인도도 마찬가지에요. 인도는 다신론이에요. 그런데 컴퓨터, IT산업 쪽은 굉장히 발달해있거든요.
그래서 서양에서는 좀 기이하게 보는 거예요. 과학은 받으면서 과학을 유발한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과학을 주셨습니다. 과학기술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평범한 것은 과학기술로 살고 정신세계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에 의존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균형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동양에서는 과학은 받아들이고 조상에 제사 드리고.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단 말이죠. 안 맞으니까 서양에서 동양을 보면서 너희들이 기술은 따라와도 정신이나 문화면에선 못 따라온다고 낮춰볼 수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동양철학에서는 과학은 과학대로 챙기면서도 신에 대해서 동양적 해석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양쪽 다 챙긴 게 되잖아요. 그걸 다 챙겨주신 고마우신 분이 백두선생, 화이트헤드가 되는 겁니다. 화이트헤드, 물론 영국 사람이죠. 왜 서양 사람이 기존에 교회에서 이야기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거부하고 따로 하나님에 대한 철학을 수립하려고 한 의도가 뭔지 생각해봐야 돼요. 그 사람은 수학자라고 했죠.
그러면 수학이 진리입니까, 하나님의 존재가 진리 되겠어요? 본인이 어떻게 믿든지 간에 사람들에게 수학적으로 하면 먹혀듭니까,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게 먹혀들겠어요? 수학적 논리가 훨씬 먹혀들겠지요. 특히 현대인들에게는. 그러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은 포기해도 수학은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자기 전공분야기 때문에. 수학의 적확하고 분명한 논리, 확실한 논리에 대해서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또 있어요. 양승훈 교수가 있어요. 창조론 주장하다가 기존의 창조론을 포기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이단이란 소리 듣는데. 그 사람의 논리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포기해도 과학은 포기 못하겠다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보는 거예요. 성경이 맞는다면 그게 과학적으로 맞을 때 성경이 맞는다는 주장이에요. 성경도 맞고 과학도 맞으려면 기존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생각은 버려야 되는 거예요. 양승훈 교수에 의하면. 그 사람이 우리 교회 와서 나와 이야기도 했어요.
성경말씀이 진리가 되려면 과학적으로 분명하게 증명하게 될 조건 하에서만 성경말씀을 언급해야 된다는 겁니다. 7일 만에 창조한 것도 잘못 생각한 것이고 과학으로 성경을 봐야 된다는. 그래서 진화론에 이야기하는 세대론이 맞는다는 겁니다. 수천 년 만에 그렇게 된 게 다 맞는 이야기고. 다만 진화론에서 문제 있는 것은 과학적으로 수정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의 주장은 격변론이라 하는 겁니다. 노아홍수로 다 그렇게 된 게 아니고 노아홍수 이전에도 빙하기라든지 여러 가지 격변이 있는데 그게 현재 지구의 과학적 증거와 맞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양승훈 교수가 과학을 통해서 성경을 보자 할 때 그 사람은 과학을 포기 못하는 거죠. 화이트헤드는 전공이 수학이기 때문에 수학적 논리를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강의에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만 수학이나 과학이 미신이에요. 왜 미신이 되느냐면, 안 믿어지지요. 낙차로 전기를 생산해서 전구를 밝히는 게 과학이지 왜 미신이냐? 왜 과학과 수학이 미신이 되느냐 하면,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해낼 수 없어요. 그럼 부분이라도 설명하면 좋지 않으냐고 하는데 부분을 설명하게 되면, 그 부분이 전체와 비교할 때 전체와 안 맞을 때 일부를 떼서 믿는 것은 미신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예쁘니까 미스코리아 됐겠지요. 그런데 막상 결혼해보니까 아는 게 너무 없어. 요리도 못해. 그러면 그 사람은 결혼상대자에 대해서 나는 예쁘니까 결혼하겠다고 할 때 본인이 전부를 안 게 아니고 얼굴이 예쁘다는 일부만 알았지요. 결혼상대자 전부와 얼굴 예쁜 일부와 억지로 결합시켰단 말이죠. 그러니까 나중에 이혼하는 거예요. 얼굴 예쁜 건 인정하지만 결혼상대자로는 안 됐다는 거예요. 누가 잘못한 거예요? 여자가 잘못된 게 아니잖아요. 본인이 예쁜 것 하나로 결혼상대자로 됐다고 생각한 자신이 결혼상대자라는 개념에 대해서 잘못된 신앙심,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과학이 행복을 보장해줍니까? 하나 예를 들어볼게요. 삼성전자에서 티브이 만들지요. 스마트폰도 만들지요. 이건희 쓰러진지 2년 됐어요. 그 아들 이재용이 삼성총수 되고 난 뒤에 수익이 26% 감소했거든요. 행복합니까? 그 사람 집에 삼성 세탁기 있겠지요. 행복해야 될 것 아니에요. 제가 지금 어려운 말하는 것 아니지요. 옛날에 눈으로 보면서 통화하면 좋겠다고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스마트폰으로 화상 통화하잖아요. 처음 나올 때 잠시 행복했잖아요. 삼성그룹 이재용 회장이 보면서 행복합니까? “회장님, 26% 감소했습니다.” 행복하지 않지요.
발달된 전자제품을 갖고 있는 소비자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이지요. 스마트폰을 갖고 있는 것은 미신이 아닌데 삼성 스마트폰을 사셔야 됩니다. 사시면 여러분이 원하는 행복이 제공된다고 할 때 이 관계가 이미 미신 단계에 들어간 거예요. 미신이란 말은 잘못된 신앙심이잖아요. 잘못된 진리관이 되는 겁니다.
화이트헤드가 러셀과 함께 유명한 수학자에요. 그럼 수학자로 살지 왜 이런 주장을 했습니까? 왜 철학과 신학을 넘봤습니까? 수학자로 본인이 행복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요. 수학만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뭔가 자기 앎의 범위를 확대할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마치 손오공이 부처를 떠나서 부처와 관계없는 자기만의 세계로 가고자 권두운 타고 갔는데 부처 손바닥이 나오잖아요.
화이트헤드에게 수학은 진리니까 끝까지 가보자는 거예요. 거기서 내가 옛날에 알았던 유신론,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시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이 사람이 영국인이니까 서양의 전통적인 하나님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설명 안 되도 대학교수나 하고 월급 타먹고 살면 되지 꼭 설명해야 되나, 이렇게 나오잖아요. 몇 년 남았다고. 낚시나 하고 골프나 치지.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설명이 안 되면 답답해서 미치는 거예요. 골프를 치고 크루즈여행을 가도 이게 설명이 안 되면 모든 것이 납득이 되지 않으면 자기가 환장하겠다는 거예요.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수학을 밑천으로 해서 하나님이 누군지, 신이 무엇인지 끝까지 규명해보겠다는 겁니다.
그 규명 작업을 통해서 기존에 수천 년 내려왔던 서양의 모든 유신론을 업어치기 한 판으로 매치는 놀라운 원리를 발견했고 그것에 이름 붙이기를 ‘과정신학’이라 한 겁니다. 거기에 대해 드디어 신학계도 반응을 나타낸 거예요. 당신 말이 옳다는 거예요. 화이트헤드가 옳다는 것은 삼위일체 유신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틀려먹었다는 것, 그것으론 세상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고 세상을 납득시킬 수 없다는 점에 한 표 던진다. 당신 말에 동조하겠소. 엄지 척, 좋아요 하나 붙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화이트헤드 앞의 모든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거짓말한 거예요. 우리가 80인의 철학자 하면 늘 느끼는 게 뭡니까? 항상 뒤에 나오는 사람은 앞에 나온 사람을 자빠트리고 올라서지요. 그런 묘미가 있어요. 오늘도 마찬가지에요.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자빠트리는 겁니다. 어떤 점에서 자빠트릴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다는 구조에서 나왔는데 내가 그 구조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으로 시비 걸어서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자신감입니다.
그럼 이 시간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기존의 모든 수천 년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마찬가지고 힌두교, 불교, 이 모든 것이 과정신학으로 어떻게 통합적으로 설명되는지 궁금하지요.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에 매료된 사람들이 기독교 신학자, 철학자뿐만 아니고 불교의 중들도 그랬어요. 중들의 부처를 설명하고 힌두 철학을 설명하고 신을 설명할 때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으로 다해버려요.
앞에 김용옥 교수도 백두선생이라 하면서 추앙하고 그 사람의 제자라고 할 정도로. 이 사람이 신을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감리교 기독교 집안의 아들이라고 주눅 든 것을 화이트헤드가 거기서 해방시킨 거예요. 드디어 정신적으로 논리적으로 기독교야, 덤벼들어라, 종교야, 어떤 종교든 이야기해라. 나는 화이트헤드 신학으로 얼마든지 반박할 테니까. 그래서 수십 년 동안 김용옥 교수는 방송을 통해서 대 국민들을 향하여 선전해 온 겁니다. 지금도 원불교에서 이런 식으로 강의하고 있어요.
그럼 여기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궁금할 수밖에 없지요. 그전에 도대체 옛날에 유신론이 뭐가 잘못됐느냐는 말이죠. 잘못됐으니까 자빠트렸겠지요. 우리는 하나도 잘못된 게 없는데 하나님이 한분 계시니까 이름이 하나님이고, 구약성경에 하나님은 하나이시니 나머지는 다 우상이다. 분명히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한분으로 계신다 말이죠. 그것도 인격적인 모양새를 지니고.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을 분석할 수 있는 자격자가 없기 때문에,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이 어디 감히 한분 하나님께 대든다는 그런 발상은 나올 수 없는데 화이트헤드가 뭘 믿고 그건 아니라고 큰소리 칠 수 있느냐?
디도서 1장 12절에 보면,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가가 말하되 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라고 에피메니데스라는 철학자가 이야기했어요. 에피메니데스는 이 사람이 그레데 섬사람일까요, 아닐까요? 그레데 사람이에요. 그러면 크레데 섬 바깥사람들이 너희들은 맨날 거짓말하는 거짓말쟁이다. 이건 뭔 뜻입니까? “너희들은 거짓말쟁이지만 우리는 거짓말 안 해. 우리는 크레데 사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참 말만 해. 그레데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을 너희가 새겨들어.” 그렇게 잔소리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레데 토박이인 에피메니데스란 철학자가 그레데 사람은 항상 거짓말을 한다면, 그 사람이 그 말한 것이 거짓말일까요, 참 말일까요? 이런 문제에 봉착되는 겁니다. 이런 경우는 십자가마을에도 있지요. 한국교회는 다 썩었다, 하는 그 교회는 썩었어요, 안 썩었어요? 그래서 십자가마을 공격하는 사람이, 십자가마을 빼놓고 다 이단이냐고 할 때 김대식 성도님이 십자가마을도 이단이라 했거든요. 그쪽에서 무슨 말이냐 하는 거예요.
화이트헤드가 수학자잖아요. 수학은 논리에서 나온 겁니다. 머리에서 나와요. 이 컵과 물이 있다고 하지만 수학에서는 컵을 1로 보고, 물을 1로 보면 2가 되지요. 그런데 이것이 수학적으로 2로 표기되는데 2에서 이게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떡 두 개 나올 수 있고 개 두 마리 나올 수 있고, 집 두 채 나올 수 있지 딱 이것만 나온다는 게 없잖아요. 수학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지, 지붕처럼 덮는 거예요. 덮어씌우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논리가 되는 거예요. 덮어씌우려면 이게 개가 됐든 아파트가 됐든 적용이 가능한, 모든 것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처럼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논리가 수학에서 정립 돼야 하잖아요. 정립이 될 때 누가 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논리를 제일 밑에 깔아요. 그 밑에서부터 논리에 논리를 더하여 논리와 논리를 연결시켜서 그것 맞지? 그것 맞으니까 거기서 나온 이것 맞지? 두 개 맞으면 세 번째 것도 맞지? 해서 결국 맞는다고 나와야 틀렸다고 할 때 증명할 수 있는 논리들이 뒤에 준비돼있어야 돼요.
그 밑바닥의 논리는 뭐냐? 세 가지 논리가 있습니다. 그걸 모순율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는데, 모순율, 배중률, 동일률이라 했는데 그 말 자체가 더 어려워. 차라리 예를 드는 게 편해요. A는 A 아닌 것이 아니다. 컵은 컵 아닌 것과 같을 수 없다. 이게 모순율입니다. 모순율 생각하지 말고 물어보는 거예요. 이것 맞나, 안 맞나? 맞아. 바른 말했어. 그럼 그것 하나 챙기는 거예요. 배중률은 뭐냐 하면, A는 A이고 B는 B다. A가 B 될 수 없단 말이죠. 서로 배치, 대립되는 것, 이것도 맞는 말이죠. 앞의 말이나 뒤의 말이나 똑같아 보이죠. 그 다음에 동일률은 뭐냐? 더 간단해요. A는 A뿐이다.
바로 이걸 기초로 해서 신은 one, 일자, 오직 하나뿐이라고 수천 년 동안 기독교나 서양에서 계속해서 왔다는 겁니다. 이 논리가 마지막에 올라가게 되면 신은 한분만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다양하지만 결국 다양한 것은 뿌리가 여러 개이면, 보세요. A는 B가 아니라면, A만 아니라 B도 있어야 비교대상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럼 A는 어디서 생겼고, B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A의 원천과 B의 원천이 따로 되면 세상은 하나가 안 돼요. 하나가 안 되면 A는 A라는 이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인간이라는 것을 누가 증명해줄 것이냐? 내가 증명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이미 나라는 게 있는데 또 나를 증명하면 이건 증명 자체가 안 되지요. 우기는 것밖에 안 되니까. 그래서 데카르트는, 신이 우리한테 확실한 진리를 줬다고 설명하는 거예요. 신이 왜 등장하는데? 신은 진리거든요. 니는 뭐고? 나는 진리가 아니거든요. 이러면 문제가 깨끗하게 끝나버려요. 모든 제일 좋은 것, 제일 아름다운 것, 모든 진리는 신에게 던져놓으면 돼요.
종이에 동그라미 원을 그려보세요. 아이들 열이면 열 다 다르잖아요. 그럼 열 개 중에 어느 걸 원으로 삼아야 될까요? 안 되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너도 원 그렸구나. 너도 삼각형 아니고 원 그렸구나. 이렇게 설명한다면 선생님이 생각하는 원은 뭡니까? 그건 내 머릿속에 있지. 그 머릿속에 있는 것이 이상적인 하나밖에 없는 이데아 세계의 원이 되는 겁니다. 그게 플라톤 철학이에요. 플라톤철학은 신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모든 역사란 말이죠.
왜 신이 하나 있는 걸 원하느냐? 둘 있으면 사람이 정서가 불안해집니다. 뭔가 최종적인 것을 알지 못하면 행복하질 않아요. 모든 걸 믿고 의지할 어떤 대상체가 있어야 돼요. 그때 인간은 안심한다고. 나는 누가 만들었지? 부모가 만들었다. 부모는? 할아버지가 만들었다. 이건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할아버지는 또? 할아버지는 그 아버지가 만들었겠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간단하게 증명하면 돼요. 신이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그때부터 미끄럼 타듯이 자식 낳았다. 아, 신이 만들었구나.
아빠, 엄마 죽으면 어디 가? 죽으면 신에게 가지. 이건 서양이나 동양도 마찬가지에요. 죽으면 조물주에게로 귀신 되어 가는 거예요. 염라대왕이 둘되면 안 돼요. 염라대왕이 멱살 쥐고 싸우면 안 되잖아요. 염려대왕 앞에 죄수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싸우지 마시고 누가 대장인지 빨리 결정하세요. 최종자에게 우리가 모든 걸 다 걸 테니까. 진짜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럴 때 우리 마음이 쉼을 얻고 평안을 얻습니다.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지금까지 그래왔어요. 문제가 창세기 3장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2장에 보면 분명히 따먹지 말라 했잖아요. 그런데 따먹었단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포함되느냐, 종속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됩니다. 인간이 만약에 종속된다면, 인간의 행위의 책임을 누가 져야 되느냐? 인간을 만든 분이 책임져야 돼요. 인간에게 닦달내면 안 됩니다. 어린애가 잘못하면 경찰이 부모한테 책임을 묻잖아요. 애가 모를 때는.
진화론이 뭐냐 하면, 앞 세대의 형질 가운데서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새로운 형질이 나왔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가 돼요. 새로운 형질이 어디서 나왔어요? 앞에 없는 형질이거든요. 그 새로운 형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예요? 기존에 잠재돼있는 거잖아요. 그럼 없는 게 아닌데? 숨어있었는데. 라이프니치 철학처럼 접혀있는 것이 펼쳐진 것뿐이죠. 그럼 진화란 게 진화된 게 아니고 새로운 게 아니고 잠복돼있었네. 그런 셈이잖아요.
그러면 잠복된 것이 진화 한 번으로 끝나는 겁니까? 진화론에서. 세월 지나면 또 진화되지요. 갈 바를 알지 못하잖아요. 어디까지 진화될지 모르지요. 현재 인간을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한다고요. 인간을 지혜의 종이라. 원숭이, 유인원에 비해서. 만약에 인간이 여기서 진화한다면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붙여야 돼요. 또 진화한다면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 사피엔스 사피엔스라 해야 돼요.
그럼 진화론의 특징은 결국 어디까지는 모르는 입장에서 진화론의 사고방식은 간단해요. 케세라세라, 될 대로 되라. 막 사는 거지 뭐. 어차피 완전은 없어요. 또 진화 중인데. 이 말은 내 진화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수 있다, 없다? 자기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 거예요. 최선을 다해봐야 그게 최선이 아닌데.
진화론도 문제고 신학도 문제에요. 선악과 본인이 심어놓고 왜 따먹었느냐고, 따먹을 때 좀 말리지, 말리지 않았어요. 책임을 물었다는 말은 하나님 따로, 인간 따로 거잖아요. 그럼 하나님이 인간을 어디까지 창조한 거예요? 하나님 여기 계시고 인간이 있다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으로 끝나면 문제가 안 돼요. 위반했거든요. 하나님의 지시를 범했잖아요. 하나님이 선악과에 못 가도록 조치해야 하는데 내가 잘못이네. 이러면 아무 문제가 안 돼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주로써 책임지는구나. 그렇다면 인간은 누가 만들었다? 인간의 행동까지 하나님이 모두 관여하니까 하나님이 책임지지 우리는 책임 없구나. 이러면 우리가 납득이 되는데 하나님이 닦달 냈다니까요.
왜 따먹었어, 하는 것은 따먹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관여하셨다, 안 하셨다? 하나님이 관여를 안 하신 게 아니고 못하시지요. 그것은 인간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관여를 못하지요. 선악과 따먹을 때 하나님은 보고도 말지지 못한 무능력자가 되는 거예요. 저거 뱀한테 유혹받으면 안 되는데 어쩌지, 나한테 그만한 능력도 없고. 말릴만한 능력이 없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네가 따먹었잖아요. 에덴동산에서 나가.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창조한 그 이상의 짓을 인간이 한 게 돼버려요. 그러면 창조 받은 인간 속에 창조자마저 차마 예상 못하고 손 못 댄 여분의 것이 인간 속에서 새롭게 발생됐다는 말이 합리적으로 맞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신은 뭐가 되느냐? 신은 저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지켜 볼 수밖에 없지요.
방금 예를 두 가지 들었는데 또 다른 예가 있을 수 있을까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든지 간에 책임은 내가 진다. 이런 예를 들었고, 인간이 우발적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어서 추방하는 것, 둘 중에 어느 쪽이 하나님이십니까? 서 목사님이 저한테 이야기했잖아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음악교과서에 실렸다고 했지요.
인간이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라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걸 나쁜 짓이라고 책망할 권한이 있습니까? 이미 사랑하기로 작정했는데 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미워할 수 있는 권한이 없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쁜 짓을 하는 권한은 하나님께로 온 게 아니고 다른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셈이 돼버린다. 그런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의 능력은 전지전능한 것이 아니고 제한된 거예요. 그럼 하나님 영역이 따로 있고, 영역 밖은 하나님도 어찌 할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 프로야구 봅시다. 한화이글스의 감독이 아주 훌륭한 감독이죠. 지금 한화이글스 몇 등 합니까? 열 개 구단 중에서 몇 년째 꼴찌하고 있지요. 왜 괜찮은 감독인데 팀은 꼴찌하고 있는 거예요?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선수가 기계가 아니죠. 감독이 번트 대. 옳지. 도루 해. 다음에 홈런 치는 타임, 옳지. 다음은 홈런 치지 마. 안타 쳐. 이렇게 됩니까? 감독이라도 선수를 장악할 수 없지요. 그럼 그 선수는 감독한테 속했습니까, 아니면 포함됐습니까?
참 말 자체가 어렵다. 포함과 종속이란 말을 쓰고 있는 거예요. 소속이 있을 것 아닙니까. 삼성라이온즈 아니죠. 한화이글스에 소속돼있죠. 소속돼있으니까 감독 말 들을 게 아닙니까. 그런데 왜 감독 시킨 대로 안 돼요? 왜 따로 놉니까? 그건 포함은 됐지만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게 화이트헤드 철학의 시작점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전체가 있는데 이 전체에 포함돼있으면 이걸 부분이라고 해요. 방금 포함됐다 했지요. 포함됐으면 부분이거든요. 그런데 부분되게 되면 전체의 속성과 동일한 속성을 분배받아야 돼요. 전체를 하나님이라고 보고, 지금까지 기독교, 서양철학이 그래왔으니까. 전체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으니까 부분에 속합니다. 포함됐으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지요. 따먹지 말라는 속성은 하나님 성질에서 나왔지요. 그렇잖아요. 계시가 말씀이 그러니까. 따먹지 말라는 속성을 인간이 갖고 있다면 천년, 만년 선악과 따먹겠어요, 안 따먹겠어요? 따먹지 말라는 것이 자기 속성이 되면 마귀가 열, 천 와도 안 따먹지요.
그런데 따먹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위배된 속성을 발휘했잖아요.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우리가 수천 년 동안 잘못 안 거예요,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잘못 안 거예요?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신 자체와 신의 속성을 분리합니다. 신 자체는 영원하고 변함이 없지만 속성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화내고 걱정하고 이렇거든요.
창세기 6장 6절을 읽어보세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하나님이 지금 후회하고 계시는 거예요. 후회한다는 대목도 성경에 많이 나와요. 후회한다는 말은, 내가 뭔가 일을 그르쳤다는 뜻이거든요. 한탄할 때 어떻게 한탄합니까? 기분 좋게 한탄합니까? 이럴 수가, 이러잖아요. 일을 그르쳤구나. 너희들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난 참 예상 못했다. 네가 그럴 줄 알았으면 만들지 말 걸. 제가 없는 말 지어낸 겁니까? 창세기 6장 6절 이야기입니다. 제가 없는 말 지어냈습니까? 성경에 나오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무능해도 되게 무능해요. 하나님이 알파고와 바둑 두면 하나님이 지겠어. 네가 그렇게 뒀나? 난 몰랐네. 자기 둔 수를 한탄하세. 치워라. 내가 . 신이 누구한테 진다면 신을 바꿔야 돼요. 이긴 쪽을 신이라고 하고 진 쪽은 신의 자격을 박탈해야 돼요. 그러면 신은 여전히 이긴 쪽이 돼요. 이름이 바뀌니까. 경기하면 승자와 패자가 있잖아요. 승자와 패자가 고유명사입니까? 그냥 명사지요. 만약에 특정 사람에게 승자가 되면 그 사람은 뭘 해도 승리자가 되지요. 내일은 승리, 내일도 승리.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이름이 김 승리라면 그는 어딜 가도 승리하잖아요.
화이트헤드 이야기는 이겁니다. 하나님이 최고라고 하니까 그동안 수천 년 동안 오해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했다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계셔서 한꺼번에 창조한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자체는 고유명사가 아니에요. 일반명사에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는데 그 창조한 방식에 대해서는 한꺼번에 끝낸 게 아니고 과정을 통해서 창조했음을 드러냈다는 것이 바로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입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을 통해서 창세기 6장 6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누가? 신이.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신인데 자기 일에 후회할 신이 어디 있어? 화이트헤드는 말합니다. 그게 바로 신이야. 한탄하시고 후회하심이 신이 갖고 있는 속성이 되는 겁니다. 이걸 소유권이라 해요. 그리고 그러니까 신이야, 이건 신의 자책권.
신의 자책권과 소유권으로 구분해요. 이 개념이 어렵기 때문에 미리 설명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잖아요. 인간이 범죄 했지요. 기독교사상에 의하면 전체가 하나님인데 부분이 전체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잖아요. 이 말은 전체에서 이 대목만은 누락돼야 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거예요. 전체를 통제해야 되는데 반란을 일으켰으니까 이것 빼놓고 전체가 된 셈이죠. 아까 그레데 사람은 항상 거짓말한다고 할 때 그렇게 말한 에피메니데스 본인은 거짓말 아니죠. 그럼 본인은 빠져야 되는 거예요. 화이트헤드가 기존의 배중률이 잘못된 이유가, 참 속에서 거짓이 나오는 새로운 논리를 펼쳐야 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은 반항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진리 가운데서 비 진리가 나오는 것을 용납하는 새로운 논리에 의해서 하나님을 재구성해야 된다. 어떻게?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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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33-화이트헤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화이트헤드 논리에서 전체 속에서 부분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라고 생각되지요. 그러면 그게 부분이 부분인 척했지 실은 잠시 순하게 잠복돼 있다가 반란을 일으킨 거죠. 처음부터 선악과 심자마자 아담과 하와가 달려들었습니까? 아니지요. 가만히 둘이 살다 먹었습니까? 아니지요. 제3의 요소 뱀에 유혹받아 따먹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모르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해서 등장한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개념도 관념도 바뀌어야 된다는 겁니다.
아까 종속, 포함을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붉은 옷을 입는다고 할 때 붉은 색깔 속에 내가 포함되지요. 파란색이 아닌 붉은 색 옷을 입었으니까. 그런데 빨간색 남아있습니까? 빨간색 나만 입습니까? 옷만 빨갛습니까? 빨간 장화도 있을 수 있잖아요. 빨간 것 전부를 내가 차지한 건 아니잖아요. 일부를 했을 뿐이죠.
화이트헤드가 이런 예를 드는데 어린아이가 젖을 먹고 싶다. 처음에 한 일 년 동안은 줘요. 나중에 이유식 할 시기에 젖은 안 나오고 그러면 엄마가 젖을 안 주지요. 그러면 애가 어떻게 합니까? 엄마의 다음 조치를 보지요. 처음에는 젖 달라고 앙탈부리다가 이유식을 먹게 되지요. 그럼 콘텍스트, 관계성이 바뀐 거예요. 젖 주는 엄마의 부분으로 있다가 계속 젖 준다고 알았는데 이제는 젖을 안 줌으로 말미암아 이유식 주는 엄마로 바뀐 거예요.
전체가 부분을 꼼짝 마라가 아니고 부분을 만들어놓고 주고받으면서 전체도 바뀌고 부분도 병행해서 바뀌는 논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인간과 신에게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다 아시고 후회함도 없고 탄식함도 없고 실수도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 관을 갖다가 선악과 따먹지 말라, 또는 하나님의 아들과 땅의 여자들과 결혼해서 육체가 됨이라. 내가 후회한다, 속았다고 후회할 때 사람들은 전부를 안다는 하나님에서 뭐로 바뀌겠어요? 하나님도 후회하시는구나. 하나님도 탄식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내가 알고 있는 전능하심의 개념이 아니라는 걸 교류하면서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생겼지요. 그걸 콘텍스트, 상황 자체가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객체와 주체가 서로 바뀐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바뀌느냐? 서로 교류하면서. 전체와 부분이 교류하면서 서로 변화주고 변화 받는 거예요. 그 말이 맞는다면 이 논리에 이의 있습니까? 전제로 깔아놓은 게 뭐냐 하면, 화이트헤드는 수학자에요. 과학자 인식이 갖고 있습니다. 과학적 인식이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물 컵이잖아요. 물 컵 따로 하나님 따로, 물 컵은 물체에 속하고 하나님은 정신에 속한다고 따로 하겠어요, 아니면 하나로 과학적 인식으로 통합하겠습니까? 통합하겠지요.
따로 하면 플라톤철학이 돼버려요. 원본, 원형, 형상은 따로 있고 우리는 다양성이다. 이게 서양역사를 플라톤철학이 지붕처럼 억누른 거예요. 그렇게 되면 모순이 생긴다는 겁니다. 뭔가 역설이 생긴다는 거예요. 부분이 전체보다 크면 어떻게 할래, 라고 화이트헤드가 말해주는 겁니다. 하나님 속에 인간이 있다고 보지 말고 더 정확하게 보자는 거예요. 진화론까지 수용해서.
원숭이에서 인간이 되었다면, 인간이 우월하고 원숭이는 못하다는 개념도 달리 생각해야 된다. 세상 자체를 모든 걸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정확하게 납득이 되고 현대의 모든 과학에 맞아 떨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냥 구원받으려면 교회 가시고 사업하려면 공장으로 가세요. 이런 식으로 해버리면 사람 자체가 전체를 과학적으로 포섭이 안 되는 거예요. 다 과학적으로 납득이 되려고 한다면 교류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부분이 따로 논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렇게 돼버려요. 근대 시민이 자율성이 국가 전체의 자율성에 종속됩니까, 아니면 포함됩니까? 국가 행복하면 개인이 행복한 겁니까? 만약에 종속이 되면 국가가 행복하면 자동적으로 국민도 행복해야 돼요. 김성근 감독이 잘하면 한화이글스는 항상 1등해야 돼요. 최고의 감독이니까. 그 팀도 최고 등수가 돼야 돼요. 따로 놀잖아요. 일본 같은 경우에 나라는 잘 살지요. 그런데 개인은 잘 삽니까? 좁게 살지요. 집도 작고.
그래서 현대는 과학적으로 나라가 잘 되면 행복하다는 일괄적으로 밀어붙이는 그런 식의 정치적 논리는 비과학적이라는 겁니다. 비논리적이고 비수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거예요. 자신만만하게 화이트헤드가 공격하는 거예요. 나라가 잘 살면 개인이 잘 사느냐, 행복하냐? 봐라 당신 논리로 설명 못하잖아요. 화이트헤드 논리로는 설명되지요. 부분이 전체보다 더 클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성립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국가의 자율성 못지않게 개인의 행복은 따로 챙길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과정신학이 아니면 설명이 될 수 없다는 것, 큰 소리 칠만 하죠.
나라는 못 살아도 대통령은 되게 잘 사는 사람 있지요. 사십 몇 년 동안 대통령 질하고 있는 사람. 자식이 42명이고. 그 자식들 취미가 프랑스에 가서 천만 원짜리 쇼핑하는 것이고. 적도기니란 나라인데 세계에서 제일 못 사는 나라에요. 북한도 마찬가지고. 평균 내면 괜찮아요. 그런데 한쪽, 대통령과 그 가족이 다 가져갔어요.
그런데 더 놀라운 실제 사실은 뭐냐 하면, 생명체란 것은, 인간 속에 60개조의 세포가 있다는 데 내가 편안하면 내 속의 암세포도 편안합니까? 나라는 게 있어도 세포는 세포끼리 따로 놀지요. 참 신기하지요. 이걸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지금까지 설명할 수 없어요. 암세포는 내게 속합니까, 속하지 않습니까? 내게 속하지요. 속하다 하면 안 돼요. 그게 틀렸다는 거예요. 내게 포함됐다고 해야 돼요. 속하면 나를 해롭게 해서는 안 돼요. 그런데 암세포는 내게 분명히 포함돼있는데 어떻습니까? 지 마음대로 해요. 나중에 암세포가 커지면 누가 죽어요? 나라는 덩어리 전체가 죽어요. 이걸 과학적으로 그동안 설명했느냐 이 말입니다.
보통 암 걸리면 누구와 싸운다고 해요? 암세포와 싸운다고 하지요. 말이 싸우는 거지 따져보세요. 누구와 누가 싸우는 거예요? 나와 내가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정확한 진리인데 왜 기존의 윤리와 도덕에서는 인정하지 않잖아요. 그건 우리가 암 걸리면 남 탓 합니다. 담뱃값을 안 올려서 폐암 걸렸다. 하도 아내가 단 것을 줘서 당뇨 걸렸다. 전부 다 남 탓이에요. 엄마가 자꾸 먹으라고 해서 내가 비대해졌다. 자꾸 남 탓으로 돌리잖아요. 기존의 철학은 이렇게 한계점이 있다는 겁니다. 정확하게 봐야 되는데 얼렁뚱땅 넘어간 거예요.
하나님은 거룩합니까? 거룩하지요. 그런데 왜 이 세상에 악마가 있고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까? 왜 죽음이 있고, 왜 지옥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선하신 분인데. 하나님이 선하시고 거룩한 분이시면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 다 거룩하고 다 선해야 되고 악은 없어야 되는데 왜 악이 있어요?
그럼 묻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께 포함돼있습니까, 종속돼있습니까? 답변해줘야 복습이 돼요. 포함됐지요.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합니다. 신은 창조성 속에 포함됐다. 신은 그때그때마다 붙는 일반명사에요. 고유명사가 아니고. 이 세상에 신보다 더 높은 게 있는데 창조성이다. 왜 창조성이라 하느냐 하면, 과학적 인식이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보이는 물체와 물질을 통해서 정신을 구현하고 철학과 신학을 구현하는 것이 과학적 논리가 유지되는 방법입니다.
지렁이가 꿈틀거린다. 종전에는 하나님께서 지렁이를 꿈틀거리게 했다고 했지요.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창조성을 통해서,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원인은 지렁이 안에 있는 세포가 꿈틀거리잖아요. 가만있지 않고 꿈틀거리는 이유가, 대기의 습기와 화학적인 조성성분에 의해서 꿈틀거리죠.
그러면 창조성은 원인과 결과, 그 결과 자체가 다음의 사물을 만들고 존재를 낳게 하는 또 원인이 되겠지요. 이것을 그냥 존재라 하지 않고 존재는 너무 추상적이니까 화이트헤드는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나의 원숭이가 있기까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다고 봤지요. 그런데 국화꽃을 과학시간에 국화꽃을 피우는 이유는, 이라고 주관식으로 물었을 때 소쩍새가 울었다고 하면, 정답이에요? 정답이 아니지요. 국화꽃은 다음 중 어느 것을 닮았을까요, 할 때 내 누이 같다고 하면 정답이 아니에요.
화이트헤드는 그게 정답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초반에 이야기했듯이 동양철학, 불교 이런 쪽에서 굉장히 좋아하는 거예요. 연기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연결돼있다는 겁니다. 이유 없이 굴뚝에 연기 나는 것 봤습니까? 아파트 연기 나는 것도 부부싸움해서 불 질러서 연기 나듯이.
신을 추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신을 상상하지 말고 머릿속의 신을 떼어버려라. 실제로 꽃이 피고 지렁이 꿈틀거리는 것을 모아서 그러한 창조성이 되게 했던 그걸 일반명사로 신이라고 하면 된다는 거예요. 분명히 전체를 신이라고 하는데 그 신이 되는 원인은 전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전체를 이루는 부분, 부분 안에 들어있겠지요. 이제 이해되십니까? 그 부분이 발작을 일으키고 부분이 자체적으로 생성이 되면 그게 전체로 모아져서 그게 바로 신이 되는 거예요. 그걸 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이죠. 신은 이름뿐이기 때문에 신 자체성이라 하는 거예요. 신 자체성을 신 되게 하는 것은 신의 소유권, 그것은 신의 창조성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소유권, 자체권이란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이게 이런 뜻이에요. 정신과 육체에서 육체 없으면 정신도 없지요. 그럼 육체뿐입니까? 아니에요. 육체가 모아져서 육체를 이루죠. 정신과 육체의 관계는, 정신은 자체권에 속하고 육체는 소유권에 속해요. 전에 여러 번 강의했는데 상견례나 선을 볼 때 “오빠는 하는 일이 뭐예요?” ‘하는 일’은 소유권에 속하고 ‘오빠’는 자체권에 속하는 거예요. 나, 백수인데 이러면 못 사귀지요. 그럼 여자 쪽에서 백수라면 날 잊으세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날 잊으세요. 당신은 나한테 없는 존재가 되지요. 내가 선 봤던 그 남자 자체가 없는 게 돼요. 왜? 백수기에 소유권이 없기 때문에.
밤에 잠을 자는데 저 멀리서 개소리가 들립니다. 개소리는 개에서 소유권일까요, 자체권일까요? 개가 소유하고 있으니까 소유권이에요. 그러나 개소리는 들리는데 개는 안 보이죠. 그런데 아침에 보니까 개가 있는 거예요. 네가 어젯밤에 잠 못 들도록 짖어대던 그 개야, 이걸 자체권이라 합니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요. 왜 화이트헤드가 존재를 존재의 자체권과 소유권을 나누느냐 하면, 존재 이야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자체가 있다고 하는 것은, 포이어바흐가 잘 지적한 것처럼 인간이 지어낸 겁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신은 가짜 신이에요. 그럼 당신은 신을 믿지 않느냐? 아니요. 포이어바흐의 말에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아요. 포이어바흐는 신을 인간이 창조했다고 하잖아요. 포이어바흐는 신은 없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화이트헤드는 반대합니다. 지렁이는 있는데 왜 신이 없느냐? 국화꽃이 있는데 왜 신이 없느냐? 저 달은 누가 만들었지? 그럼 포이어바흐가 하는 말이, 달이란 빅뱅(포이어바흐 당시에는 빅뱅이론이 없었지만)이 있었는데 40억년 돌다보니까 가스체가 어쩌고 설명하겠지요. 백날 설명해도 소용없어요. 그 가스 어디서 왔는데? 가스라 하는 것은 코크에 의해서, 백날 설명해도 소용없어요. 그 코크 어디서 왔는데? 애들 질문하잖아요. “목사님,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답변해보세요.
화이트헤드는 확실하게 설명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소유권에 의해서 하나님 자체권을 증명한다.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하나님 어디 있습니까? 기어가는 지렁이를 보여주면서 지렁이는 어디서 왔게? 지렁이 엄마한테 왔겠지요. 그렇지. 모든 게 하나의 지렁이 되기 위해서, 화이트헤드는 진화론을 믿으니까, 지렁이 되기 이전에 또 진화될 게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지렁이 되기 전에 아미노산의 결합에 의해서 되거든요. 아미노산 단백질 결합이 dna를 만들고 dna가 자기복제에 의해서 아미노산 생산되고 그래서 세포가 만들어진단 말이죠.
옛날 진화론과 요새 진화론이 달라요. 유성이 폭발하면서 유성 저쪽, 다른 유성의 생명이 지구로 전파됐다는 외계설이 요새는 더 우세합니다. 참 희한한 아이디어에요. 화이트헤드는 다 수용합니다. 그게 바로 신의 소유권되는 거예요. 신의 소유권은 먼지, 지렁이, 모든 게 신의 숨결이고 신의 소유권에 포함돼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부분이 전체를 설명해주고 전체를 말해주는 겁니다. 부분이 소유권이고 전체는 자체권이 되는 거예요.
전선에 전기가 흐릅니다. 그러면 전기가 흐르는 것은 자체권이고 전선의 있음은 소유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전선이 있다는 것이 전기의 흐름에 방해도 되지요. 소유권이 자체권이 없앨 수도 있고 태어나게 할 수도 있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부분과 전체가 서로 교류한다고.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우리가 서로 만나기 전에 여러분 각자 모습과 여러 영향을 줬을까요, 안 줬을까요? 영향을 줬지요. 안 줄 수가 있습니까. 하여튼 화물차 운전하는 사람들 진짜, 이러다가 그래도 얼마나 점잖은 사람들 많다고. 공산당은 때려죽어야 돼. 김용옥이 분명히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중국에서 강의하면서 공산당이 최고라고 한 거예요. 완전히 차이 나는 도올이에요. 그런데 앞으로 중국이 망하면 역시 자본주의 최고, 미국 최고라고 할 것이란 말이죠. 한국에 유리하도록. 본인이 어디까지 진화될 것을 알아요, 몰라요? 내가 누굴 만날지, 내가 대통령 만나는 것과 노숙자 만나는 것이 달라요. 앞으로 내 가정에 이혼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에 말이 달라질 수 있어요. 그게 바로 어디까지 진화될지 모르죠.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당신이 자체라 하는데 당신이 앞으로 누굴 만나면 자체권도 바뀐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과정자체가 하나님 자체라는 거예요. 그래서 과정신학이에요. 존재를 하나 붙들고 신이라 하지 말란 말이죠. 그렇게 주장하는 순간 당신이 하나님 좋아한다고 하다가 사업 망하면 하나님이 어디 있어? 내가 믿은 걸 후회한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 없는 게 돼요. 화이트헤드 보기에는 하나님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 없다고 내뱉는 자기는 있잖아요. 그게 바로 신이었어, 라고 하는 거예요.
니체가 신은 죽었다 하지요. 화이트헤드는 그게 바로 신이야. 그렇게 말하는 너는 있잖아. 네가 어떻게 암세포를 다뤄? 포함돼있지 종속된 건 아니잖아. 네가 누굴 지배해? 누굴 통제할 수 있어요. 우리는 나를 내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임시방편으로 나라는 것이 요 정도까지 있어요. 키 얼마, 몸무게 얼마. 이게 죽어버리면 흙이 되지요. 흙이 된다 하더라도 지금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이건 무가치한 게 아니에요. 전체 신 자체에 보탬이 되는 부분이 되기 때문에.
지금 나름대로 설명한다고 하는데 설명이 됐는지 모르겠는데 여러분이 이해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서로 만나게 되면, 화이트헤드는 여기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요. 내가 여기 있다고 다른 분을 만나잖아요. 나는 가만있는 게 아니에요. 전체, 부분이 서로 교환한다니까. 내가 달라져요. 뒷담화, 이걸 철학적 용어로 담론이라 합니다. 찌라시지요. 내가 만약에 다른 사람을 만나서 여러분의 뒷담화를 한다면 나는 분명히 달라졌어요. 그런데 그 달라짐을 내가 예상하겠어요? 절대로 예상 못해요.
합생, 존재와 존재의 결합이 있다는 거예요. 물방울 하나와 물방울 하나가 결합되면 물방울 두 개 돼요? 한 방울이지요. 한 방울이지만 주변에 있는 상황의 원인으로써 전에 있던 한 방울의 물은 어디 갔는지 날아가 버리고 새롭게 형성된 새로운 방울 안에 합해졌지요. 그러면 원인, 결과가 모여서 합해진 그것이 존재의 소유권이 되고 합해진 그것은 존재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그것들이 모이면 창조성을 이루면 신 자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합생 된 게 가만있겠어요? 다른 옆에 있는 다른 존재와 합생의 원인제공을 하겠지요. 범퍼카가 이쪽저쪽에 박는 것처럼.
그래서 모든 것은 과정, 영어로 하면 becoming이 되는데 모든 것은 되어지는 거예요. 존재란 사실은 되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하나가 궁극성이고, 하나하나가 형식이고 그게 또 사실 존재고.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게 없어요. 이 강의 듣고 제가 십자가마을에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을 올려놓은 걸 보시면 이해되실 거예요. 정리해봅시다. 창조성 자체가 궁극적이면서 그 궁극적인 것이 부분 속에 다 포함돼있다고 보면 됩니다. 창조성이 개별성 피조물 속에서 자체적인 개별화를 이뤄나가는 거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냥 살다보면 우리의 지식도 새로운 창조에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지식도 늘어나는 겁니다. 그럼 나라는 것은 그때그때 다른 나로 새롭게 출몰하겠지요. 나라는 것이 자꾸 등장하겠지요. 이건 존재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건의 결과물들의 연속, 변하지 않는 속의 변화,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것, 전체 신은 변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계속 변해가는 그런 모양새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걸 새로 생긴다고 해서 생기론이라 이야기하는데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을 다시 정리해드리고 그 다음에 이런 것이 왔을 때 복음적으로 어떻게 마주칠 수 있느냐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우선 화이트헤드에서 항상 생각할 것은 과학적 수학적 논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세상을 대할 때 이미 과학은 진리로 판정 났어요. 해와 달은 만유인력으로 유지된다는 이것은 지금까지 이 법칙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무조건 진리고 그 과학을 과학 되게 한 것이 수학적 논리잖아요. 수학은 이유도 없이 합당한 논리, 진리가 되는 거예요.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안목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과학은 따로 있고 하나님 따로 있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마저 과학적으로 납득되도록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는 이것이 과학의 진리성을 증명하는 가장 마지막 최종 단계가 신마저 과학 속에 집어넣는 이것이 과학이 할 수 있는 논리체제가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럼 과학적으로 따진다는 것이 뭐냐? 눈에 보이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지렁이, 국화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옛날에는 어떻게 했는가? 하나님이 국화꽃 만들어놓고 하나님이 안 보였단 말이죠. 안 보이면 과학적 언어로 표현될 수 없어요.
에이어라는 철학자(미국 논리철학자)가 있는 검증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했어요. 종교, 언어 다 빼라 했습니다. 신도 대문자 God가 아니라 소문자 god로 써야 맞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신이 아니고 신들이라고 해야 맞다. 거기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동의했어요.
화이트헤드를 다시 설명합니다. 과학적으로 분명히 해야 돼요. 화이트헤드가 아주 진지합니다. 단호합니다. 만약에 내 논리가 위배된다면 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고 과학을 진리라고 우기는 너희들부터 다 바꿔야 돼. 과학이 진리인 것을 안 바꾸려면 신을 과학 속으로 해명해야 돼. 과학 따로 있고 신 따로 있다고 나누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체제가 둘이 되니까. 신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서 신도 과학 안에 집어넣어야 돼요. 그래서 과학을 진리라고 사는 우리 정서에 맞고 편안하게 살 수 있어요.
신이 따로 있다면 신이 만약에 과학세계를 심판하게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과학적으로 진리라고 해놓고 나중에 된 통으로 뒤통수 맞는 수가 생긴다고. 그러면 우리만 손해 게. 그러면 안 되잖아요. 미리 신이라는 걸 알아야 된다. 신을 알려면 눈에 보이는 대로 하면 돼요. 눈에 보일 때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게 과학적 안목입니다. 항상 그 결과가 나와야 되는데 여기서 과학이 진리면서 한계가 있어요. 예상 되는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것, 변수가 너무 많아서 안 돼요.
따라서 인간은 신에게 의존해야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과학을 의존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과학을 의존하면 행복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과학은 인공적인 기술적으로 아는 거잖아요. 아는 것은 새로운 창조성이 나올 때는 무식한 사람이 돼버려요. 만유인력 이게 다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상대성원리한테 뒤통수 맞았어요. 그런데 상대성원리는 결론이 없습니다. 상대성원리가 실제로 실증적으로 다 증명이 돼요.
태양 뒤에 숨어있는 별이, 태양이 일식 현상 때 뒤에 별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상대성원리는 안 보고도 맞췄어요. 이게 문제가 돼요. 지금까지 과학은 보이는 것으로 증명해서 결과를 얻었는데 상대성원리는 이론부터 내놓고 증명은, 아인슈타인 죽고 난 뒤에 너희들이 증명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과학에 의해서 비과학적 논리가 발생돼버립니다. 화이트헤드는 이것마저 수용할 수 있는 신학이 있고 철학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과정철학이라는 거예요.
과정철학을 내놓은 이유가 사람이 과학에 매이고 물질에 매이면 불행해져요. 과학이 전부다. 전부 아니에요. 신이 전부에요. 그렇게 과학, 과학하면서 신을 찾습니까? 우리가 겸손해야지. 또 우리가 아는 이론에 새로운 원인, 결과가 붙어서 합생, 새로운 존재 자체가 나올 때는 무슨 소리할래? 그때 우린 참 무식했구나, 이런 소리할 거잖아. 그러니까 그걸 미리 당겨서 하자 이 말입니다. 우리는 신 그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서 신의 소유권으로 날마다 합생의 과정에 놓여있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 마음을 겸손하게 행복하게 만드는 삶의 태도냐 말이죠.
과학 좀 발명했다고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까불다가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엎어지면 좌절하고 인간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과학이 진리라면 윤리도덕도 진리적이어야 되죠. 과학은 진리인데 과학에서 나온 윤리도덕이 돈만 알고 물질만 알고 죽여도 내 책임 아니다. 내가 했나? 새로운 원인이 추가했는데.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신을 믿어야 돼요. 여러분, 연관성을 알겠어요? 화이트헤드가 신을 인정하는 이유를 아시겠어요? 까불지 말란 말입니다. 내년이 있고 그 내년이 있는데 과학이 뭘 전부라고 까부느냐 말이죠. 신 앞에 겸손해야지.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이미 신이 창조성이 온 구석구석 삼라만상에 퍼지는 걸 봐서 그게 모여서 신 그 자체가 된다. 그게 신의 소유권이니까. 이게 바로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의 모토고 목표고 취지입니다. 이야기 들어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지요.
여기에 대해서 동양철학이나 불교라든지 김용옥 교수는 백두선생 만세라고 외치는 거예요. 스스로 그의 제자라 하고. [이성의 기능]이란 책을 번역했고. 김상일이란 동양철학자도 마찬가지고. 둘 다 한신대학교 교수고. 김용옥은 석좌교수고, 김상일 교수는 나이가 많아 퇴직했을 거예요. 동양과 서양을 합생하는 거예요. 합생하면 진리가 나온다는 거예요.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봐야 선악과 문제도 풀리고, 창세기 6장 6절도 풀리고. 그 외에는 달리 풀릴 수 없다는 거예요. 부분과 전체가 서로 교류하면서 과정 속에 놓여있는 게 신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복음적으로 그게 아니라고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사도 바울이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뿐만 아니고 열두 제자, 베드로도 이렇게 해요.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오신 분이라고 했습니까? 약속에서 나왔지요. 사도 바울은 약속을 언약의 완성으로 봅니다. 구약에는 언약이 있었지요. 과도기적으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도 언약이 있었지요. 요한복음도 마찬가지고. 그 과도기 거쳐서 사도 바울에 오게 되면 약속이란 표현을 해요. 물론 언약이 있지만 약속을 증명하기 위해서 언약을 거론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언약, 다른 말로 하면 로마서에서 말씀이라 하는데 모든 것을 언약을 앞장세우는 하나님에 의해서 벌어지는 일로 봅니다. 언약의 하나님, 하나님 앞에 언약이 붙어요. 만약에 언약을 떼버리면 화이트헤드의 말이 맞아요. 유신론이 아니고 다신론도 아니에요. 다신론이면 플라톤주의가 되고. 유신론도 플라톤주의고. 그게 아니에요. 서로 교류한다는 것. 그런데 거기에는 언약이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없어요.
하나님이 언약을 줬다고 보통 신학에서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화이트헤드가 그러니까 그 언약이 신에게서 나왔다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게 아니냐 말이죠. 언약은 신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언약은 약속에서 나왔어요. 이게 인간이 생각한 원인, 결과가 전부 다 틀려져요. 예수님에서 언약이 나와요. 예수님이 구약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기 때문에.
창조가 어디서 나왔는가? 요한복음 1장 1절, 화이트헤드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뭐라고 했는지 상상해보세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화이트헤드는 말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는 유신론, 하나밖에 없는 신을 공격해서 과정신학을 만들었기 때문에 신이 둘이 있다는 생각을 상상을 못한 거죠. 화이트헤드가 기존의 신을 치기 위해서라도 삼위일체를 하나로 묶어야 돼요. 성부, 성자가 있더라도 최종적으로 궁극적인 신은 성부가 책임진다고 해야 자기가 공격할 여지가 있어요. 신은 어쨌든 유일신 하나밖에 없다. 유대교가 그랬으니까. 구약이 그랬으니까. 나는 하나인 하나님이다. 나머진 다 우상이다.
화이트헤드는 자신만만하게 신은 하나라고 본 거예요. 자기는 수학자니까. 하나에서 다수, 다양성이 나왔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이 하나가 아니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독생자가 나타남으로 처음으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화이트헤드로선 할 말이 없어요.
화이트헤드는 뭐라고 하겠어요? 예수, 그건 등급이 낮잖아. 대표자는 성부지 성자가 아니야.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유일신을 치기 위해서 유일신적 관념을 전제로 깔기 때문에 그런 논리가 나온다 말이죠. 과정신학, 과정철학이 유일신을 까기 위한 논리거든요.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까고 말 것도 없어요. 아무도 몰랐어요.
아까 과정철학에서 인간의 지혜라는 것은 계속 시간이 감에 따라 지혜가 함께 늘어난다 했지요.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아무도 몰랐다. 이유가 뭐냐? 빛이 어두움에 비추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장 5절. 그런데 1장 3절에 보면, 그가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다 했어요. 그가 누굽니까? 하나님이 아니에요. 예수님 없이 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막상 모든 인간 가운데 예수님이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결국 정리해보면,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은 입을 다물고 가만있다는 말이 아니고 온갖 철학과 신학, 과정철학이고 유일신이고 모르니까 그런 것들의 튀어나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로마서에서 복음을 모르니까. 그 사람들에게 예수는 존재자로서 예수님이에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수는 십자가 지신 분,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와 관련된, 새 언약과 관련된 예수입니다. 주님 계시니까 믿자. 이것 아니에요. 예수 믿고 지옥 갑니다. 십자가 경유한 예수님이에요. 왜? 그 속에서 십자가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몰랐던 죄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서 그렇게 되거든요.
그 근거가 뭐냐? 십자가가 뭐냐 하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는 버림받아야 돼요. 화이트헤드가 모르는 어떤 분으로부터 버림받아야 돼요. 신으로부터 버림받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신을 이야기해도 신을 몰라요. 왜? 예수님을 모르니까. 예수님을 본 자만 아버지를 봐요. 예수님을 안 자만 아버지를 알아요. 예수님 모르는데 아버지 아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건 마귀가 배후에서 이런 과정철학, 과정신을 만들어낸 거예요.
그러면 선악과는 뭐고, 아까 창세가 6장 6절은 어떻게 푸느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집어넣어서 해석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위해서 인간은 따먹어야 했고, 십자가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선악과 심어야 되고, 뱀은 찾아와야 되고.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아들만 아는 그런 감정적인 교환이 있어요. 탄식하시고, 다시 건지시고.
구약 전체는 그림자에요. 신약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이스라엘도 물론 포함되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모형이라 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걸 정리하면서 육에 속했다. 육에 속한 것을 영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육으로 한 것은 육이요 영으로 한 것은 영이다. 성령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면전에 내세우게 돼있습니다. 몰랐으니까 십자가 사건 일어난 거예요. 몰랐으니까 죽인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죽는다고 했습니다. 안 사람이 없기에 모든 인간이 모르게 하도록 스스로 죽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이 예수 죽였다고 본 거예요. 견해 차이가 난 겁니다. 예수님을 존재자로 하나의 인간으로 본 겁니다. 그게 바로 육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영은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세상 전체가 모든 만물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서 지음 받은바 되었다고 예수님을 위하여 그분을 위하여 예수님이 친히 지었다고 골로새서 1장 16절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오직 그분을 위하여. 하나님이 아니에요. 신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화이트헤드의 모든 철학이 마귀에서 나왔다는 것, 그럼 이 철학이 왜 나왔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보이기 위해서 이런 철학이 나왔고 사람들은 여기에 환호성을 보냈고, 그래서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이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것을 또 공부할 수밖에 없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다 인자 되시는 주님과 관련성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사나죽으나 주의 것인 것을 이제는 잊지 않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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