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016겨울수련회 제 6강 : 은유 본문
녹취:오용익
2016겨울수련회 제 6강 : 은유
에스겔 초반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환상을 받게 됩니다. 거기 보면 네 생물이 나와 있고 그 네 생물이 사방으로 이동하고 있으면서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서 에스겔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제사장은 복장부터가 좀 특이합니다. 복장에 보석이 부착되어 보석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 보석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의 혜택이 같이 부착되어 있는 열 두 지파에게 그대로 책임지고 주어지는 겁니다. 몸이 같이 움직이니까, 부착되어 있으니까, 명찰같이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제사장이 보석을 달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내린 그 약속이 성취가 되면 해줄 것 다 해주겠다는 거예요. 최고의 보석처럼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화려해요. 황금 길, 그리고 모든 것이 다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혜택이 열 두 지파 모두에게 저절로 주어지는가? 그게 아니에요. 왜 아니냐 하면, 제사장에게 추가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 투입이 됩니다.
투입이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주체변환이 일어나는 겁니다. “저 구원받는다는 말이지요?”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다가 “제가 꼭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는 아니군요. 제가 뭔가 달라져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까? 아, 내가 없어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제가 없어지면 저를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라고요?” 점점 주체의 변환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그러한 다른 목소리, 다른 반응을 나타내게끔 언약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 언약자체가 ‘이쯤 했으면 신자 맞잖아.’라는 것을 자빠트리는 언약들이 주어집니다. “그 정도해서는 안 되거든. 그거? 그걸 로는 멀었어.”
그래서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땅에 있는 주체 이것을 2라고 하고 언약 속에 있는 주체 1이 있는데 주체1이 주체2를 몰아낸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몰아내고 그 현장에 주체1을 실어버리지요. 주체2에 있는 이 사람은 공연히 헛꿈 꾼 겁니다. 헛꿈 꿨는데 “괜히 좋아했잖아. 구원될 것도 아닌데 괜히 좋아했잖아.”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너희들은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지 않다. 보석 달렸다고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거룩해야 된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하나님이 만족할 정도로 거룩한 조건하에 너희들은 보석같이 되는 겁니다.
이 거룩이 언약으로 주어지게 되면, 더러움 속에 언약이 같이 자리를 잡게 되면 이 더러운 세계가 아주 혼쭐이 나고 굉장히 혼란스러워요. 무사히 거룩이 더러움 속에 안착이 되려면 거룩을 모실만한, 거룩을 지탱하고 감당할 만한 부속장치들이 이스라엘 내부에 있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제사제도에요. 그중 나름대로의 깨끗한 것을 드려서 그만 이것 받으시고 노를 푸소서, 해서 어린양 받으시고 받으신 그 자리에 잠시나마 거룩을 허용해주시고, 그런 일이 제사장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했더니만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이 제사제도가 습관이 되어버렸어요. 반복적인 우연은 필연이 된다고 했잖아요. 이게 습관이 되어버리면 같을 일을 되풀이하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본인들이 그렇게 착각해 버립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 하면, 이 주체변환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 정도만 해도 신앙인데 더 이상 뭘 변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탈락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변한다고 해도 어떻게 날마다 변할 수가 있는가? 누가 너보고 변하라고 해? 너보고 변하라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거룩을 어떻게 모시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에스겔에 있어서 선지자에게 성전의 내막을 통째로 주는 것은 과연 이 성전을 모실만한 환경이 이 지상에 있겠는지, 과연 이 성전이 이 지상에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를 묻는 겁니다. 불가능하지요. 불가능하지만 성전은 이 땅에 임하게 됩니다.
그 성전이 임하게 되는 것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돼요. 그게 뭐냐? 이스라엘이 통째로 날라 가버리는 겁니다. 멸망당해요. 그러면 그 거룩이 어느 정도로 혹독하냐? 그것은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로 혹독하게 징벌 받느냐에 상응해서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전혀 인간의 구원과 관계없지요. 로켓이 지상에 내리기 위한 터 닦기, 터를 닦는 일을 에스겔 선지자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전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백성 만들기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거룩한 성전 쪽에서 실시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괜찮은 사람을 뽑아서 제 2의 성전을 섬길까요?”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괜찮은 사람 등장합니다. 딱 두 자에요. 뼈들. 이 앞에 형용사 들어갑니다. “바짝 마른” 물기가 있으면 안 됩니다. “바짝 마른” 혹시 물기 있으면 DNA아미노산작용에 의해서 다시 생명이 생겨날 수도 있어요. 빠짝 말라서 구원되고 난 뒤에는 일체 군말 안하기, 일체 군말 없기. 오직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거룩을 모시게 되면 터전이 되었습니다. 신약에 보면 성도가 성전인데 성전은 내가 구원받는 것과 관련 없이 거룩한 분을 모시게 되었다는 겁니다. 감당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꼬락서니를 보니 감당하는 꼬락서니가 아닌데?
그래서 감당 안 되는 인간을 감당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대리자가 투입됩니다. 그 대리자, 성령이 투입됩니다. 성령은 낮으신 분, 십자가지신 분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잘못을 중간에 대리해서 의로 처리를 해줘요. 처리를 해주게 되면, 물론 당연히 아시겠지요, 그저 모른 체 하면서 “그래, 음, 내가, 거룩이 있을만한 성전이 되는구나. 그러면 내가 있지.” 이렇게 오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자리만 제공했을 뿐이에요. 이게 성전입니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요. 바깥에는 이러한 현상을 못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 온갖 현란한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겁니다.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해서 지금 일어난 일을 저쪽에서 커닝 못하게, 저쪽에서 흉내나 모방을 해서 자기들 쪽에서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극단으로 차단하는 그 양식이 너무 가혹하고 혹독합니다. 기분 굉장히 더럽게 만들어요. 그래서 그들은 에스겔 선지자가 전하는 말만 들으면 부아가 절로 치밉니다. 화가 나게 되어 있어요. 마치 오늘날 요한계시록을 보는 그 느낌처럼.
우리보고 어쩌라는 말입니까? 요한계시록 2장 봅시다. 제가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납니다.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기를” 방금 제가 몇 분 동안, 10분 동안 죽 설명했지요. 에베소교회에게 편지하는데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아까 성령 이야기했지요. 짜고 치는 고스톱, 안 되는 인간으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는 그 성령, 낮아진 그 성령,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그걸 자유로운 성령이라고 해요. 너희가 어떤 상태에서도 준비가 될 정도의 자유로움, 기도를 제대로 못해도 탄식하면서 우리 대신 기도를 다 해주시는 분, 우리 대신 기도해주시는 분, 그래서 우리는 대표 기도할 때 이렇게 하세요.
“주여, 이런 기도가 얼마나 엉망이었으면, 저는 믿습니다. 이 기도 말고 달리 대신 해줄 줄로 믿습니다. 아멘.” 어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안 된다는 사실을 네가 스스로 알라고 우리보고 기도하게 하시는 거예요. 스스로 알아야 주체변환이 일어나는데 우리는 꼼수를 써요. 아예 기도 안합니다. 해도 들어주지도 않는데 기도를 왜 하는데요? 미쳤다고 기도합니까? 그러면 이것은 꼼수지 주체 변화가 일어나지 않잖아요. 뭔가 기도를 해서 이 응답과 사다리 타기가 영 비켜간다는 사실을 아셔야 돼요. 그러니까 성령이 고맙지요. 안 되는 것을 되게 했잖아요.
구원받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들어갈 수 없는 혼숫감이 거룩이라고 쳐주고 들어오잖아요. 이 허름한 집에 주께서, 성령께서 오신다고요. 마치 삭개오 집에 주님이 들어가시는 것처럼. 이것은 계시가 아니고 제 상상입니다. 주께서 삭개오 집에 갔을 때 금고가 한 열 다섯 개 있었고 비밀 계단이 있었고 스위치 누르면 책장이 쩍 갈라지면서 비밀 아지트가 나오고 거기에 금덩이가 쌓여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삭개오가 말하기를 “이런 돈 밖에 모르는 저를 천국을 만드시는군요. 이 돈 필요한 사람에게 네 배나 갚겠습니다.” 구원 챙기고 헌금하는데 자기는 남는 장사에요. 헌금하고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네 배가 뭡니까? 더 줄 수도 있는 문제지요. 부자가 지옥 가서 물 한 방울도 없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지옥에서 물 한 방울 얼마 합니까? 택배 값이 더 비싸게 먹힐 거예요. 돈이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잖아요.
에베소 교회나 라오디게아 서머나 교회에게 성령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하신 것과 같은 취지에요. 성령께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2)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이 말 따라서 개선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개선을 안 한 것이 아니고 못해요. 그리고 칭찬해도 이 칭찬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왜? 쪼개야 되니까. 에베소 교회 안에 에베소교회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게 바로 구약 때 남북 이스라엘 속에 선지자 끄집어내는 겁니다. 주께서 이미 아신 사람을 에베소교회라는 입구를 통해서 자기백성 족집게로 뽑아내는 작업을 하는데 주께서 하시는 이 말씀, 칭찬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꼭 우리 수련회 같아요,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책망을 하는데 책망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따라서 우리가 할 것은 없고, 그런 입장에서 촛대는 옮긴다는 협박은 왔는데 교회 쳐다보니까 촛대는 안보이고.
촛대가 당회장실에 있습니까? 촛대 없어요. 주인이 그냥 자기 것 찾아가겠다는데 스카치 입테입으로 붙들 방법도 없고, 경비용역 써서 사수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에베소 교회 속에 교회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교회를 쪼개는 겁니다. 호빵 쪼개듯이 교회 쪼개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 들으면 즉각적인 반응이 이겁니다. ‘아, 그렇다. 우리가 에베소교회 같은 교회구나. 칭찬받은 사항은 일단 유지하고 책망 받는 부분만 개선하게 되면 주께서 촛대 옮기지 않겠지.’ 이거 이단입니다. 그게 바로 이단이에요. 왜? 성령이 하시는 일을 모독하기 때문에.
‘남은 자’됨을 행함으로 메우는 것은 배후에 누가 있었다? 악마가 에베소 교회를 세운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아시고 악마 속을 비집어 헤치고 들어가서 악마 속에 있는 진짜 남은 자를 끄집어내는 작업, 이게 주님의 전쟁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교회 망합시다. 망해야 삽니다. 망해야 교회에요. 고치라는 것 고치지 말고 책망하는 것도 책망 아닌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째기 위한, 쪼개기 위한 구실이고 핑계입니다. “가시적으로 행동하는 거, 너 아니거든.” 하지만 교회는 다른데 없어요. 바로 네 속에 교회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에베소 교회를 짓는 것이 아니고 교회 속에 있는 진짜 교회를 위해서 주께서 일곱 교회를 지은 겁니다. 거니시는 거예요. 그리고 뭐라고 하는가? 진짜 에베소교회가 나왔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 과일을 먹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따먹지 말라면서요? 하여튼 하나님께서 이랬다, 저랬다. 창세기 3장에서는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용역까지 써가면서 화염검으로 지키기까지 했잖아요. 줄 것이었으면 진즉 주시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왜 낳게 합니까?
쫓겨나고 난 뒤에 하와가 늙어가니까 “내가 너무 경솔했다. 나도 욱, 하는 성질이 있어서 미안한데 그래, 그만하면 이제 반성 좀 했지? 다시 봉쇄를 풀어 줄 테니 와서 애도 낳고 해라.”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구원에 관심이 없어요. 선악과를 따먹은 입장에서 그 죄가 성립되어야 주께서는 의를 생산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쥐고 있다고 그게 의가 아니라 죄인 속에서 끄집어내는 방식만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나는 죄인도 용서했단다. 나는 그런 주다.” 왜? 주의 희생, 이 세상은 주님의 희생을 찬미하는 아들의 나라로 전체가 변모됩니다. 십자가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들러리였어요. 주님은 혼자 노시는 게임을 벌린 겁니다. 피조물은 당해도 쌉니다. 왜? 주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누가 말립니까?
그러면 중간에 아브라함, 이삭, 왜 질질 끄는가? 바로 아담 2대에서 예수님 쫙 보내서 나머지 다 구원하면 되는데 왜 굳이 예수님에까지 길게, 길게 끌고 가는가? 인간의 배후인 뱀, 죄의 숙성, 그것을 숙성이라고 합니다, 숙성, 심판이 숙성될 때까지, 어느 정도로 숙성될 때까지? 예수님을 체포해서 살해할 때까지 죄가 마감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그냥 자기 일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쪽이 숙성되어야 되느냐 하면, 들어가야 할 저쪽 가나안 땅이 심판받아 마땅함이 될 수 있도록 죄가 무르익어야 돼요.
그 죄가 뭡니까? 인간의 행함으로 자기주변에 있는 상황을 해결하려고 설치는 것, 그것이 바로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주체입니다. 이 주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 때까지. 이 주체가 그리스도를 살해했거든요. 그래서 이 주체는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 주는 오직 주님밖에 없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오직 누굴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누가 만들었다? 예수님이 본인의 게임을 하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모든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게임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없어요. 주의 나라고 아들의 나라에요. 하늘나라는 인간의 상상이고 이미지, 상상 계에서 만들어낸 거예요. 현재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비가시적 사실까지 자기연대기로 집어넣기 위해서 결합을 시켜놓은 거예요. 그게 바로 종교입니다. 아까 이야기했지요. ‘없다, 있다, 없다, 있다.’를 반복해 버리면 그게 굳어지거든요. 반복은 ‘있다, 없다, 있다, 없다.’를 반복하면 그게 굳어져버리고 그렇게 굳어진 것을 뭐라고 하는가? 그 굳어진 것을 상징이라고 합니다. 심벌, 상징이에요.
상징은 습관과 습관이 굳어진 겁니다. 사람이 종교생활을 오래하게 되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그 안에 자기 의가 들어 있어요. 그 자기 의를 포근히 사수하기 위해서 과도한 습관들을 갈수록 점점 더 많이 하게 되는 겁니다. 복음 아는 목사는 그걸 뜯어내지요. 뜯어낼 때 안 뜯기겠다고 “이것만큼은 안 돼.” 하지요. “미안합니다. 뜯어냅니다.” 하고 우두둑, 뜯어내는 거예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하고 우두둑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는데 그것이 못마땅해서 뭘 하느냐 하면 “뜯어내기 전에 이번에 제가 금식을 하겠습니다. 헌금도 많이 하겠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반성이 덕지덕지 더 붙어서 뜯어내기 더 힘들어져요. 그냥 막 살면 되는데 괜히 막 살고 싶은 본심을 감추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일곱 교회 없다는 이야기에요. 촛대 다 옮겨졌습니다. 폐허되었습니다. 지금 관광지 되어 있어요. 옹기종기 340 킬로미터 안에 모여 있던 그 일곱 교회, 지금 관광지 되었어요. 성경덕분에 이슬람 국가가 돈 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이 모든 이야기는 그냥 과거지사인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런 말씀 주시면 우리도 본성상, “가만 있자. 에베소교회의 이야기 중에 내게 해당되는 것이 있나? 어? 있네.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이건 부지런 하라는 말인데 내가 성질이 급한 편이니 이것은 그만 되었으니 빼고, 그러면 해당 없으니 이번에는 서머나 교회를 보자. 서머나 교회가 유명한 목사가 있었던 교회인데 그 교회에 ‘사단의 회’가 있었는데 이게 뭔지 찾아볼까?” 그래서 사단의 회가 뭔지를 찾아봐요. 찾아보다가 움찔 하면서 빠져나옵니다. 왜? “죽도록 충성하라.”가 나오니까 “이것은 미리 하면 안 돼. 늙어죽을 그 때에나 해야지 지금은 자식들이 있기 때문에 안 돼. ‘내가 알아서 가겠다고 전해라.’ 하는 그 나이 때가 되어서 지켜야지.”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완전히 뷔페에요. 골라잡아서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것만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 해요. 그럴 경우에는 요한계시록을 봅니다. 그게 바로 뜯겨져야 할,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아직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굳은살이에요. “아, 이런 쪽으로 주님을 반기니 주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셨구나.”라고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교회주석이 보면 참 찬란해요. 못 봐줍니다. 자기교회의 정당성을 보이는 하나의 빌미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참 가관입니다. 특히 가관인 것은 선교단체에서 사용하는 것이 있어요. 3장 20절,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백날 문 앞에 서 보세요. 두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선교단체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께서 하실 것은 하고 네가 해야 할 것은 네가 해야지. 네가 성령이 없었는데 이제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너도 한 의미가 있으니까 두드린다 싶거든 후딱 문 확 열고 ‘주여 보고 싶었습니다.’ 얼싸안고 감격의 해후를 하라.”는 거예요.
백날 문 앞에 서 보세요. 누가 두드리는가. 안 두드리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여기에 억지가 동원됩니다. 두드린 적이 있었다고 자기 맘대로 날조를 해요. 계시날조입니다. 조작을 합니다. 조작을 하게 되면 흉내가 되어서 여기서 과도한 오버액션들이 막 쏟아집니다. 그러면 흥분의 도가니가 되면서 그걸 성령충만이라고 자기 맘대로 해석을 해버려요. 성령 충만은 딱 한가지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내가 뭘 해도, 기도를 해도 죄인입니다.” 이것만이 성령충만입니다. 어느 정도까지인가? “나는 돌에 맞아도 쌉니다.” 이게 스데반집사였어요.
스데반집사 나오니까 ‘마법의 성’ 그 노래가 다시 생각나는데 마법의 성 마지막 가사에 보면, 함께 가요. 함께 가는데 스데반집사는 홀로 갔습니다. 마법의 성은 계시가 아닙니다. 마법의 성은 자기가 손수 행함으로 건져낸 그 공주와 살고 싶지 절대로 주님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천당 가는 것도 꼭 마음 맞는 사람끼리 가요. 수련회에 와도 꼭 마음 맞는 사람끼리 나불나불 이야기하고요. 난 천국 가도 둘이서만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할 거예요.
계시록 2장 3장에서 2016년도 1월 10일에 지켰다고 칩시다. 내일을 보장 못해요. 오늘은 에베소서의 내용에는 안 걸렸는데 내일 되면 버가모 교회에 걸릴 수가 있어요. 이것은 평생 두근두근 입니다. 언제든지 안심을 못해요. 그러다 치매 걸려 보세요. “예수님이 누구신지요?” “몰라요.” 치매 걸리면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데 예수를 어떻게 알아봐요? 찬송가 부르라고 하면 나 훈아 노래 부르고 생전 욕 한마디 안하던 천심도 욕이 막 나와요. 어디서 욕을 배웠는지. 계시록 2장 3장의 모든 말씀은 기드온의 군대 300명처럼 은혜로 남은 자가 자기가 어떤 통로로 겪어야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느냐, 다시 회고록 쓰듯이, 회상하듯이 유리알 속에 있는 2장과 3장을 돌려보면서 ‘아 이 에베소 교회의 모습이 내 모습이고 책망 받는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라고 느긋한 마음으로 보는 재미, 골라먹는 재미가 아니고 돌려보는 재미, 편안한 마음으로 2장과 3장 넘어갑시다.
그 다음에 4장 5장에서 중요한 것 하나 또 들어가야 됩니다. 참 요한계시록 이렇게 편하게 하기는 첨이다. 강의 어떻게 할까, 벌벌 떨었는데 ‘가위바위보’ 한 템포 늦게 내는 이걸로 다 되어버렸네요. 한 템포 죽이고 가는 것. 이방인과 이스라엘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하는데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적용시킵니다. 이스라엘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에요. 택한 백성 버리지 않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했습니다. 물론 제가 이야기한대로 이스라엘 말고 이스라엘 속에 있는 이스라엘.
몇 층 내려가는가? 1층? 아니요. 그 이스라엘 중에서 또 이스라엘, 그러면 지하 2층입니다. B2. 그러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또 그 속에 들어 있는 이스라엘, B3. 그러면 어디까지 갑니까? 예수그리스도만이 남은 자가 될 때까지 계속가요. 그러면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왜 그렇게 층층이 뚫어서 예수님에게 도달되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욱, 새롭게 창조한 그 인간들로 하여금 앞에 탈락된 모든 이스라엘과 동일한 아담의 DNA, 아담의 몸을 동일하게 지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죄의 깊이를 많이 보여줌으로써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분수처럼 폭발하도록, 넘쳐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면류관까지 반납할 정도로.
“이 모든 계획과 미장 센, 무대장치, 천국의 모든 것은 보석 같은 이 부귀영화는 제가 누릴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은혜로 남은 자의 공통적인 속성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고백해야 환란이 와도 고마워요. 당해도 싸니까. 어려움을 줘도 “저 같은 인간은 당해도 마땅합니다. 혹시 이것보다 더 센 어려움은 없습니까?” 이런 식으로. “왜 자꾸 살려주시는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분리시킵니다. 분리시키는데 그 분리시키는 기준이 중요하거든요. 그 기준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분리를 시킵니다.
계시록 5장 4, 5절에 보면,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여기서 ‘사자’는 메신저가 아니고 라이언(lion)입니다. 유다자손을 가지고 라이언으로 표현한 것은 창세기에서 야곱이 유다지파를 예언할 때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맞아야 되는데……. 예, 맞습니다. 야곱이 유다지파에 대해서 예언할 때 ‘사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창세기 49장 9절에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하나님의 성전에 하늘의 무늬가 딱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사자고 하나는 종려나무입니다. 사자라는 것은 전쟁의 의사를 동물의 형식으로 드러낸 거예요. “나는 전쟁할 의사가 있다.” 그렇다면 다윗의 이 언약은 뭐냐 하면, 전쟁하시는 주님, 주님이라고 해도 되지만 주님이라고 하지 말고 구약이니까, 이것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이 있다는 것은 신약에서 드러난 사실이고 구약에서는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데 하나님은 숨어계시고 그 숨어 있는 하나님을 대리해서 역사 속에 함께 하셔서 전쟁 치르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주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쟁하시는 하나님, 그 전쟁하려면 적이 있어야 되잖아요. 적은 그 때 그 때 만들어내십니다. 억울한 사람을 죄짓게 하는가? 아닙니다. 인간은 빠지고 그 배후의 악마를 노려서 전쟁합니다. 그런데 그 악마가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 내에 있어요. 그래야 이스라엘 아니고 이스라엘, 이스라엘 아니고 이스라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나라는 편안하게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는가? 예수님 오실 때까지는 그랬었어요. 그래서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바울의 설교에 보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이방나라에 대해서 책망하지 아니했지만 이제는 이방나라에 대해서도 이 언약으로 심판을 하겠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29, 30)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언약쪼가리들이 이방나라에 다 기어들어갔거든요. 다 들어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죄지었다고 심판을 했다. 진짜 우리는 심판받은 민족이 맞다.”라는 식으로 그들은 나름대로의 언약을 전했어요. 자기백성이라도 언약을 위반하면 맴매하더라, 이걸 전했다는 말이지요.
그걸 듣고는 이방인 가운데 “와, 그런 하나님 같으면 진짜 살아 있는 하나님이네.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다고 육적인 것을 봐주지 않고, 자기백성이라고 봐주지 않고 심판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이라면 내가 영접하겠소.”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과 합류된 이방인들입니다. 퇴락된 천막을 다시 짓는 겁니다.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은 다윗언약에서 다 같이 “제사도 원하지 않고 번제도 원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오직 상한심령입니다.” 상한 심령, 제사나 예배나 이런 것을 원하지 않고 상한심령을 원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안 나와도 되겠네요? 또 꼼수가 남발하지요. 집에서 상한심령 되는 것과 교회에 나와서 상한심령 되는 것하고를 생각해 보세요. 집에서 상한 심령이란 뭐냐 하면, “주님, 부족합니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 집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교회 나와서 상한 심령은 뭐냐? “주여, 제가 오늘도 교회 나왔으니 복 주옵소서.” 하는 거예요. 어느 것이 더 상한심령이겠어요? 어느 것이 노골적입니까? 무엇이 자기 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겠어요? “주여, 열심히 했습니다.” 이게 노골적이지요. 그래서 집에 있으면 도인이 돼요. 집마저 귀찮아서 산속에 들어가면 도인이 된다니까요. 도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그냥 말로 때우지 말고 진짜 어느 정도 부족한지, 산속에 있지 말고 기어 나와서 전세 값 가지고 싸우고 전기세 한 푼 가지고 싸워야 진짜 실감나는 부족함이 드러나지요. 그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제발 놀지 말고 일하세요. 왜? 부족함을 알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일도 시켜줘야 하지 안 시켜주면 할 수 없고요. 그래서 울지 말라,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고 하시고 드디어 6장에서 일곱 인을 뗍니다. 일곱 인을 떼게 되면, 제가 분명히 했지요, 막간이 나오지요. 일곱 인을 뗄 때 자연현상들이 일어나고 천사들이 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데 이 천사들의 활동은 스가랴 예언에서 나온 겁니다.
이것을 전에 잡곡강정이라고 했지요. 문서선지자들의 예언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버릴 서류가 아니에요. 이것을 그대로 유지했다가 그대로 전달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일곱 인을 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또 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할 때 이것을 알아먹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막간을 보게 되면 남은 자가 등장해요. 남은 자가 되면 회고하듯이, 회상하듯이 ‘아, 주께서 이런 전쟁을 치르셨구나.’ 그런데 전쟁의 대상, 전쟁의 방법에 대해서는 인간들의 언어로 이해 못하는 환상적인 언어로 이해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인을 뗐을 때 흉년이 나오고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이 모든 일은 대체 어느 도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엘니뇨현상 때문에 콜롬비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런 식으로 찾아다니지 마세요. 이 일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다 일어난 거예요. 언약이 그냥 자연세계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은 일단 다 어디로 가느냐 하면, 일단 다 이루어야 되기에 예수님의 몸에서 다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몸으로 언약이 다 들어가요. 말씀이 다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러면 “다 이루었다.”가 되지요. “다 이루었다.” 가 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혼자 하는 소리고 다른 사람은 모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둡게 되었지요. 벌써 일곱 나팔입니다. 벌써 일곱 인을 뗐어요. 그리고 죽은 시체가 막 살아났지요. 그리고 성경에 보면 지진이 일어났지요. 벤허에 보면 지진이 일어나서 벤허의 문둥병 걸린 가족이 낫는 일이 일어났지요. 어릴 때 그 영화를 봤는데 네 시간이나 지루하게 해요. 고집도 그런 고집을. 오래 한다고 다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마차경주, 그것밖에 기억이 안나요.
이미 주님한테 들어가 버리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뭐냐? 그냥 역사적 언어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묵시적 내용을 담으면서 표현은 역사적 언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피해보는 자연세계는 그냥 자연세계가 아니라 묵시적 언어를 경유하고 난 자연세계기 때문에 사람은 여기에 나오는 흔적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성도만이, 남은 자 만이 지금도 항상 이런 일이 얼마든지 복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요. 그걸 느끼게 되면 한마디로 이렇게 됩니다. ‘아, 살 곳이 못되는구나. 작살내는 이 동네에 구태여 미련 두거나 연연해할 필요가 없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일곱 인을 떼고 난 뒤에 7장에 봅시다. 드디어 열 두 지파, 오직 이스라엘만 구원됩니다. 이스라엘만 구원되는데 전부 다 14만 4천이지요. 14만 4천이라 하지 말고 열 두 지파가 구원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열 두 지파가 모이면 뭐가 되겠어요? 이스라엘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인가? 그걸 잠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바탕이 있는데 죽음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어떤 죽음? 야곱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이 나왔어요. 야곱의 시체에서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그냥 이스라엘로 주어지지 않고 누구든지 이스라엘이 되는 사람은 누구를 경유하겠어요? 야곱을 경유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누구하고 싸웠던 사람이에요? 야곱은 주의 천사와 싸웠던 사람이고 주의 천사는 그 전에 야곱이 꿈을 꿀 때 사다리로 내려왔던 그 천사에요. 천사가 야곱에게 내려옴으로써 야곱의 인생은 역사적 입장에서는 수평적으로 가지만 야곱의 인생은 묵시적으로 미장센, 하나의 장면으로 스톱, 동결되고 응고가 되었어요. 움직이지 않는 운동만 있을 뿐이지 전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반드시 죽음을 경유해야 돼요. 죽음을 경유하고 이스라엘 되게 되면 이스라엘도 얼음땡이에요. 이것도 고정되어 있어요. 이것은 어떤 경우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왜? 이미 나라는 인간은 야곱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죽은 것을 누가 이스라엘 되게 했습니까? 천사가 와서 개입해서 이스라엘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천사가 개입할 때 야곱을 구원함이 아니고 야곱 속에 뭘 집어넣는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과 속성을 야곱이라는 껍데기에 집어넣으니까 이스라엘은 누가 이스라엘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에요.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주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그 몸에 달린 지체지요. 운명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계속 은사가 주어지지요. 은사는 주님이 전쟁하시고 전리품을 갖고 옵니다. 그 전리품이 우리에게 도달할 때는 묵시적 전리품이에요. 돈이나 부동산 값 오르는 그런 전리품 안 줍니다. 교회 부흥되는 그런 것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왜냐? 그거 줘버리면 ‘내가 뭘 했기에 이런 것을 받았는가?’ 하고 생각하고 더 무서운 것은 ‘주께서 내가 신자가 맞는다는 것을 확인해주시기 위해서 이런 복으로 격려를 해주시는구나.’라고 되어버리면 이제부터는 그걸 쥐면서 자기가 새로운 주체로 발생되면서 거기서 내 주체중심으로 고정화되어버려요.
그러면 자기는 잘난 존재가 되면서 나중에 주님의 증인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었다고 자부하는 자기 자신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보통 좀 큰 교회 목사도 전부 다 그런 류라고 보면 됩니다. ‘내가 이 교회에서 새벽기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이런 식으로. 그게 뭐가 잘못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거기 있는 사람들도 야곱을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이스라엘이 탐나서 그냥 가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죽어라.” 그 다음에 “네 구원은 없고 주님의 구원밖에 없다.” 너는 너로 끝내라는 말이지요. “너는 너로 끝내고 그 다음에 주님이 새로 준비한 ‘너’가 있다. 그것은 너의 이름이 아니고 14만 4천의 이름으로 합류되게 되면 너는 구원된다.” “안 넣어주면 어떻게 합니까?” “그 걱정 죽일 때 없애줄게.” 수면내시경 할 때처럼 죽여 버립니다. ‘지옥가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다가 스르륵 잠이 오면서 와보니까 천국이에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네요.
왜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느냐 하면, 아버지가 보낸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의 목회자들은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내가 깽판을 치고, 개판을 치고, 교인들이 나가도 주께 택한 백성인 자기 양은 목자의 손아귀에서 절대로 잃어버리는 것이 없다면, 진짜 그 목사가 주의 지체라면 주님이 좋아한다면 자기도 같이 좋다고 해야 되는 것이 맞는 이야기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분명히 주님께서 자기가 택한 백성은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자기가 오만상을 다 그리면서 ‘또 두 명이나 나갔네. 이번 달 헌금이 5만원이 뭐야?’ 이렇게 나오면 도대체 너는 지금 누구 자랑 질을 하려고 목회를 하느냐는 말이지요. “네가 주의 종이면 나도 주의 종이다.” 지금 그거 자랑 질 하려고 목회하는 거예요?
신학교 들어갈 때는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복음이 부끄럽다, 복음이 부끄러워. 커닝하고, 족구하고, 축구하고, 수요일 날 예배 참석 안하고 야한 영화나 보고 돌아다니고, 누가 더 농땡이를 부리나, 기숙사 가면 그거 시합하고 있어요. 시험 때만 되면 커닝한다고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녀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희한한 인간은 그걸 보고 개탄하는 인간, 그건 또 뭔데? “주여, 이 선지동산 죽었습니다.” 언제는 안 죽었어요? 참내!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워.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주여, 저는 커닝도 안하고, 족구도 안하고 공부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교회 부교역자로 취직시켜 주소서.” 에라이, 이 도둑아! 참 내! 교회가 있어야 취직을 하지.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알거든 어느 교회에 이상하게 취직이 되거든 교인들 몽땅 데리고 나오세요. 그거 하라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그게 선교입니다. 필리핀 가지 말고, 이상한데 갔다가 총 맞아 죽지 말고 기존교회에 가서 몽땅 데리고 나오세요. 왜? 쪼개야 되니까. 물론 마귀목사는 눈치 챕니다. 설교 안 시켜 줍니다. ‘저 인간이 또 몇 명 데리고 나갈지 모른다.’ 하고.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혹시 우리교회 그럴 리 없겠지만, 교인 수 몇 명 안 되니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부교역자가 있다면 저는 권한 없어요. 교인들이 “이 사람 꼭 부교역자 돼야 됩니다.” 이렇게 한다면 저도 한 표? 누가 명령 하달하고 갑 질하는 거, 우리 없기 합시다. 갑 질 많이 당하는데 교회까지 해야 되겠어요? 유다지파, 르우벤지파, 므낫세지파, 이렇게 지파들이 있는데 지파들마다 1만 2천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흰옷을 입고 손에 무엇을 들고 있습니까? 종려가지를 들었지요. 이들은 무엇을 경유했는가? 예수님을 경유해서 예수님이 기존 이스라엘을 버리고 속에 훅, 빨아들였다가 다시 새롭게 후, 하고 내뱉은 자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내뱉어서 나왔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야곱을 경유한 사람 같으면 오늘 여기에 해당된 사람이에요. ‘12*12*1000’이기 때문에 이 ‘천’은 계속해서 세상 끝 날까지 택한 백성만큼은 놓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천’이라는 것은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확산되는 거예요.
결국 따지고 보면 14만 4천은 수많은 사람들이 어린양의 동산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계시록 7장 10절에 봅시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그 다음에 뭡니까? “……어린 양에게 있도다.” 이게 그냥 주문외우라는 말이 아니고 속에 이것만 들었어요. “주께서 하셨지요. 주께서 하셨기에 저는 한 것이 없지요. 그렇지요? ‘주께서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왜 이렇게 하셨는지?’ 하여간 주께서 하셨지요.” 이게 걸어 다니거나 조깅을 하면서도 늘 나오는 거예요. “오늘도 조깅을 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요. 조깅 하다가 새똥을 맞았는데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요. 머리를 이렇게 짧게 깎도록 한 것도 주께서 하셨지요.” 모든 것이 “주께서 하셨지요.”로 나오는 거예요. “사기당하도록 주께서 하셨지요. 벌금 내도록 주께서 하셨지요.”
벌금을 내도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마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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