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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016겨울수련회 제 4강 : 7(칠)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6冬(요한계시록)

2016겨울수련회 제 4강 : 7(칠)

정인순 2016. 1. 16. 19:54

 

 

 음성4  

 

녹취:오용익

2016겨울수련회 제 4강 : 7(칠)

 

 

지난 시간에 “썩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이상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안 썩어도 되는데 왜 썩어야 되지요? 썩는다는 말은 그만큼 폐기처분해야 될 이유가 각자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폐기처분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환상에 의해서 살아야 되는데 우리가 역사에 의해서 주체를 굳히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신을 기어이 자기 손으로, 자기 힘으로 내 편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나는 어느 누구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면서도 구원을 성사시키겠다는 겁니다. 좋은 사이,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칭찬받아서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아들과 아버지사이를 오해해서 그래요. 아들도, 예수님도 아버지께 버림받았으면 마땅히 우리가 버림받는 것이 당연한 거거든요. 왜? 아담이니까. 첫 번째 아담도 버림받았고 두 번째 아담도 버림받았고 따라서 그 속에 있는 우리도 버림받는 겁니다. 버림받는 것이 구원인 것을 알아야 돼요. 버림받는 것이 구원에 필수적인 절차인 것을 우리는 아셔야 됩니다. 그러면 문제가 “역사에서 어떻게 환상으로 바뀔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이 뭡니까? 그걸 이야기해 주셔야지요.” 한다면 그것은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의 예레미야, 에스겔에서 이야기합니다.

 

분명히 이스라엘백성이 범죄 한 뒤에, 범죄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범죄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릴 때 징벌요소 속에 환상의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70년이 지나서 돌아오리라.”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마지막 장면이 그거에요. “70년이 되면 돌아오리라.” 사람들은 그것을 70년인 줄 알았어요. 70년 만에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70년이 아니었습니다. 70이레였습니다. 이레라는 묵시적 개념이 붙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할례 행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해놓고 뒤에 가서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지.”라고 딴 소리를 하시는 하나님.

 

70년에서 70이레로 바뀌는 과정, 그 바뀌는 과정에서 문제는 환상을 제시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동결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의 필름을 집어넣어서 환상을 비추게 하는 방법, 환등기속에 필름이 있는데 70년을 집어넣어서 70이레로 빼먹는, 확대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시간에 대해서 의미가 달라진다고 한다면 그 시간의 의미를 달라지게 하는 주체 자는 누구냐? 시간을 동결시키면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그 시간을 어떻게 동결시키는가?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보면,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헬라어 모르는 사람들도 성경에 알파요 오메가, 이것이 헬라어라는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고 해놓고 그 뒤에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계 1:17) 헬라어가 원래 A(알파), B(베타), G(감마) D(델타), E(엡실론), Z(제타), H(에타), Q(쎄타), I(이오타), K(캅파), L(람ㅂ다), M(뮤), N(뉴), X(크시), O(오미크론), P(피), R(로-) S(씨그마), T(타우), U(윕실론), F(휘), C(키), Y(프시), W(오메가), 이렇게 끝나거든요.

 

거기다가 알파벳 따라서 숫자까지 걸쳐요. 알파, 베타, 감마……, 숫자로 1, 2, 3……. 그래서 666이라고 하면 거기에서 알파벳을 가지고 사람 이름 끄집어낸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는 네가 666이다.” 환상적인 숫자를 붙일 때는 그런 식으로 숫자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666이 진짜 어떤 특정인물이라면 그 시대 모든 사람의 이마나 손목에, 아니면 그 당시 사용하던 동전이나 왕의 유물에 다 새겨져 있어야 돼요. 그게 없어요. 666, 숫자로 매매한다고 한다면 그 당시 화폐에 다 새겨져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요.

 

666은 밝혀낼 수가 없습니다. 도미티안도 아니고, 티투스도 아니고, 네르바도 아니고, 트라얀도 아니고, 클라우디우스도 아니고, 칼리굴라도 아니고, 베스파시안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특징 잡아서 666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은 고유명사가 없습니다. 숫자로 정했다는 것은 이미 동결된 것이고 그 동결된 것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되어 있던 모든 사실이 그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예수님을 대적했던 것이 숫자화 되어서 그걸 연대기 속에 집어넣어놓고 천사가 한 번씩 그걸 탁탁, 터치할 때마다 새로운 666이 계속 튀어나오는 겁니다. 어떤 특정인물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누구도 666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특정인물로 삼겠다는 것은 또다시 연대기적 주체의 성품을 못 이겨서, 그 성질을 못 이겨서 자기가 그것을 알아채겠다는 거예요. 베리칩이라는 것, 식별정보가 새겨진 칩 같은 것을 받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1953년 왓슨과 크릭이 무엇을 발견했는가? DNA를 발견했어요. 그것으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 DNA가 우리 세포내에 들어 있는 베리칩이에요. 날 때부터 다 박혀 있어요. 디옥시리보핵산. 인간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정보와 에너지로 되어 있어요. 정보라는 형상과 에너지라는 질료로 되어 있습니다. 정보 없는 인간은 없어요. 세포 안의 핵에 있는 DNA와 세포질에 있는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까지 다 파악해 낼 수가 있어요. 그게 정보인데, 그게 바로 베리칩인데. 아담의 베리칩이에요.

 

그거 하나 더 받는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밝혀야 될 것은 뭐냐? 인간은 왜 그런 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알 때 정보나 에너지개념 외에는 달리 자기를 파악할 수가 없도록 그런 식의 존재가 되고 말았는가? 그걸 밝혀내야 돼요. 그것은 알파와 오메가 속에서 그들이 동결되었으며 그 동결된 것들은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드디어 천사가 톡, 하고 터치하면 실제로 현실화되는 대기상태에 놓여 있는 겁니다. 대기상태에 있다가 천사가 치면 그 안에 담겨 있는 선지자의 예언들이 활개치고 나오는 거지요.

 

그래서 문서선지자와 기적선지자의 차이점이 나옵니다. 엘리사, 엘리야는 기적을 많이 베풀었거든요. 기적을 베풀었다는 것은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뜻이에요. “너희가 똑바로 하게 되면 이스라엘을 지켜주신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로부터 시작된 문서선지자는 “이제는 끝났어!”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는 이스라엘은 쪼개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포기해라. 난파선이다. 배 갈아타라.” 아예 갈아탈 배도 없어요. 그러면 문서선지자,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그 말씀을 전개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스라엘은 어디 있는가? 그 문서선지자가 심판을 행사하는 그 현장에 새롭게 생산되는 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생산되는 겁니다.

 

70년 포로 잡힌 사람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70이레라는 그 환상적인 실현에 의해서 등장할 때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들을 인자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인자의 백성은 그 환상에 근거해서 이 땅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 기능도 환상적입니다. 꼴 보니 별로 환상적이지도 않지만 성격자체가 주께서 환상적으로 다루게 돼요. 환상적으로 다룬다는 것이 뭐냐 하면, 세상을 ‘스톱’ 동결된 상태로 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환상적인 사람입니다. 누구처럼? 사도요한처럼.

 

그러면 요한계시록의 시간은 어디까지 가는가? 사도요한의 수명에서 마감이 됩니다. 열두제자는 하나님의 계시 때문에 특별히 은사를 받아서 그들이 있었는데 사도요한이 죽고 난 뒤에는 계시는 끝났습니다. 성경, 문서적 계시는 끝났어요. 이것은 뒤에 활용하면 되는 것이니까. 더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고 하는 것은 사도요한이 죽는 수명까지, 거기까지 스톱이 된 거예요. 그러면 인류역사는 사도요한의 시간까지만 인류역사가 확정됩니다. 그때부터는 인류역사가 되풀이 돼요. 왜? 사도요한의 수명으로 요한계시록이 끝나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을 반복시키면 되는 겁니다. 시간은 사도요한으로 끝나는 거예요.

 

지금 남아 있는 시간은, 올해 2016년이라는 시간은 누가 만들었는데? 성경에 2016년이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그걸 누가 만들었는데? 그것은 의미 없는 시간이에요. 2017년도, 의미 없습니다. 알파요 오메가라는 것은 알파부터, 알파, 베타, 감마,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알파요 오메가’ 안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움직임은 아까 말한 잡곡강정처럼 천사가 와서 다룹니다. 천사가 와서 다룬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인생에 대해서 손 떼세요.”라는 말이에요. “손 떼세요.”

 

우리는 뭔가 안하게 되면 불안불안 합니다. “목사님, 기도 안한지 벌써 6개월째 되었습니다.” 이런 거요. “교회 안간지가 1년이 넘었습니다. 헌금 안한지는 2년이 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 또 자기 연대기를 주장해요. 하루가 천년 같은데. “2년이 하루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게 위로인지 안 그러면 고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주께서 키워내는 시간을, ‘알파요 오메가’안에서 적합하게 키워내는 그 수명을, 그 인생을 왜 자꾸 썩어야 될 내 인생에 자꾸 갖다가 붙이는지. 본인이 알파요 오메가라는 말입니까? 아니잖아요.

 

요한계시록을 편하게 보세요. 제가 “편하게 보세요.”라고 해놓고 나중에 보면 아예 안 해요. 이제는 그걸 알았어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가장 편한 거구나.’ 이 요한계시록 1장 8절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알파요 오메가, 이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알아서 다 해낸다는 거예요. 하이카처럼 알아서 다 해요. CF에 보면 밀어내지요. “할머니는 저쪽에 가 계세요.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해놓고 하이카가 알아서 저쪽에서 다 해요. 거기서 복음을 봤어요. ‘아, 저게 복음이다.’ “위험한 곳에 오지 마시고 저만치 비켜서 주시고 여기는 제가 알아서 다 하겠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할 때 내는 것 다 보면서 한 템포 늦게 내는 그것이 믿음이잖아요. 자기가 하지도 않고 남이 다 했는데 뒤 늦게 개입해서 이긴 자가 되어버리는 것, “다 이겼다. 죽도록 충성했다.” 뭐 했다고 죽도록 충성입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죽도록 충성한 거예요. 그 ‘안하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자기구원을 안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왜? 인간 속에 뭐가 있기 때문에? ‘있다, 없다.’가 있기 때문에. 계속 요청하거든요. 자기 안에 선악과가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막가다가 지옥 가는 것이 아닌가?’ 이걸 이겨내야 돼요. 또 연대기적 자기를 바라보고 있어요. 알파요 오메가도 아닌 주제에. 옆에서 분주하게 천사가 다 하고 있는데. 설거지 한다고 나대다가 피부습진이나 걸리고.

 

사도요한은 그냥 주는 대로 받으면서 자기주체는 어떻게 되는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됩니다. 1장 17절에,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죽은 자 같이 되었다는 겁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과물이 저군요. 포도나무는 주님이시고 저는 단지 거기서 뻗어 나온 가지에 불과하군요.” 그런 마음으로 살았어요. 주께 따지고 원망하고,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는데 이렇게 귀양살이를 하게 하십니까? 내 자식들은 ……?” 아마 결혼도 안했을 거예요. “내 팔자가 무슨 이런 팔자가 다 있습니까?” 이렇게 따진 것 없어요. 그냥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고 엎드러져서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사도요한에게 환상적인 면류관, 또는 환상적인 요소를 집어넣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는가?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내 것 네가 가져라. 내가 이 땅에서 성취한 환상을 이제는 네 환상으로 공유하겠다.” “왜 주십니까?” “너는 내 지체거든. 나하고 붙어 있는 포도나무 가지거든.”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볼 때 지키려고 보지 마시고 ‘아, 이미 이런 것들을 주셨구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집에 가셔서 예수님이 보내신 택배상자들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39900원, 이렇게 내고 쇼핑하지 않아도 이미 그득하게 채워져 있는 것들이 많을 거예요. 옷장 한 번 열어보세요. 주께서 환상적으로 주신 옷들입니다. 물론 유행지난 옛날 것들이지만. 그리고 집에 있는 냉장고의 모든 음식들이 주께서 주신 겁니다. 환상은 환상으로 연결지어줘야 되지요. 그걸 연대기로 마중 나가면 안 됩니다. 연대기로 마중 나가면 “왜 이것밖에 안 줍니까?” 이렇게 돼요. “그게 네 거냐?”

 

그리고 난 뒤에 20절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라고 했는데 둘째 날 이 두 번째 시간 강의 제목은 간단합니다. ‘7’입니다. 빠찡고에서 수박그림 나오는 그런 것 아닙니다. 777이 아니고 그냥 ‘7’. 7을 설명하는 것은 간단해요. 예수님께서 여기 창조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1절부터 3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천지의 창조물을 주님이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시고 창조물이 여기 있다면 주님이 입을 벌리시고 이 모든 창조물을 훅, 빨아들입니다. 며칠 만에 창조했지요? 7일 만에 창조했지요. 훅, 하고 이 창조물을 빨아들였다고 고개를 반대방향으로 해서 훅 내뱉어 버립니다. 그러면 기존의 것은 날라 가버리고 주님의 언약완성에 근거해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창조세계가 7이라는 숫자를 달고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 7은 두 가지 기능을 하는데 하나는 기존의 것을 부수는 7과 만드는 7로 되어 있어요.

 

일곱 촛대에 거니시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만드시고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기존의 자연세계를 작살내는 거예요. 자연세계는 마치 만두의 피, 막이에요. 막처럼 얇습니다.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들어가게 되면 만두속처럼 아주 지저분한, 악마가 저질러놓은 모든 배설물들을 충분하게 없애버리지요. 우리는 그 안에 있으면 내 것 달아난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하나님, 저를 이렇게 고생시키기에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스키 타는 철이 되어서 은행대출까지 받아서 스키장 앞에 오뎅집 하나 차렸다가 망해버리고 “이럴 수 있습니까?” 치킨 집 차렸더니 조류독감이 유행해서 본전도 못 건지고 다 날리고서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자기만의 연대기에 감기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기껏해야 폐기처분될 창조안의 연대기적인 주체를 갖고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 안에 빨려 들어와서 다시 주님이 훅, 내뱉어 버리면 이쪽 일곱에 속합니다. 여기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관리대상이 되어서 주께서 일곱 촛대사이에 거닐지요. 그리고 “일곱별을 잡고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말씀하니 들어라.” 하고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라고 하지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환상 쪽에서 오게 되면 나는 연대기적 역사속의 인물에서 환상속의 인물로 바뀌면서 주님과 같은 안목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나는 이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이기 때문에 후차적으로 한 템포 늦추어서 보게 되는 겁니다. 가위, 바위, 보! 하고 보게 되면 이미 알파요 오메가 안에 모든 음식이 다 갖추어져 있어요. 특히 요한계시록에 음녀라는 것이 있지요. 음녀가 뭐냐? 음녀를 간단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본인이 신랑을 구하면 음녀요, 신랑이 구한 것은 음녀가 아닙니다. 신랑이 신부를 찾으면 음녀가 아니고 본인이 신랑을 구하면 이것은 음녀에요. 이것이 호세아에 나옵니다. 호세아, 요나, 요엘, 아모스, 이사야, 대략 BC 800-700년 사이에 활동했던 선지자지요. 아마사, 아달랴, 요아스 시대에. ‘일곱’이라는 그 새로운 창조가 오게 되면 주께서 훅,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뱉을 때 여기에 환상적인 조치를 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 부담스럽냐 하면, 이 육신의 몸이 굉장히 부담스러워요. 더우니까 어서 이 아담의 육신을 벗었으면 좋겠고 새 옷으로 좀 갈아입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전기밥솥 스위치 눌러놓았으니 칙, 칙, 김 막 내 뿜으면서 백미 밥 짓고 있어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하면, 후딱 이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거예요. 이게 환상적 안목이에요. 예수님과 같은 안목으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보고 있는 겁니다. “소원이 있다면 어서 이 육신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 마귀가 공격할 지점이 없어요. 죽겠다는데 뭐, 죽겠다는데. “돌이 떡 되게 해라.” 살아서 무슨 낙이 있는데요? “뛰어내려라. 네가 인기가 있을 것이다.” 죽을 몸이 뛰어내려서 인기 끌면 뭐할 건데요?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가 보이지 않느냐? 나한테 절하면 네 것 된다.” “너나 하세요. 너나 많이 하세요. 나는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존재가 가벼우니까. 어떤 일도 주께서 환상적으로 주신 일이기 때문에. 그것도 한 템포 늦게 가는 일이거든요. 이미 승리하고 들어가는 시합이니 자기가 손댈 것도 없어요. 전리품만 챙기면 되니까. 그 챙겨진 전리품을 가지고 두 자로 뭐라고 하는가? 그걸 은사라고 합니다. 자기백성 아니면 전리품 안 옵니다. 우리가 이북하고 전쟁했다. 전쟁했는데 김정일과 김정은이 갖고 있던 요트를 국방부에서 나에게 줬다. 물론 실제로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만, 그걸 나에게 줬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이미 끝난 거예요. 내가 하지도 않은 전쟁에서 우리는 전리품만 챙긴 겁니다. 그걸 두자로 뭐라고 한다고요? 그게 은사에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은사거든요. 그거 받는 순간, 후딱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버리세요. 버려야 됩니다. 슬슬 주례사가 정리되는데 23일 날 대전에서 12시에 김 종인 집사님 아들 결혼합니다. 광고를 안 하려고 했는데. 다음다음주일인데 못 오는 분들은 돈 보내시고. 김 을수 집사님이 그러는데 주례할 때 좀 복음으로 주례설교를 하라는 거예요. 누구 결혼식 깽판 놓을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혼자 살겠다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너는 이만큼 나한테 무조건 굴복하라는 뜻이거든요. 서로 마찬가지죠.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것은 우리한테는 없는 겁니다. ‘주님 주신 것이 온다면, 만약에, 그럴 리가 없지만 만약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그것을 주님이 주신 전리품으로 간주하겠다. 이 못난 것을 사랑해주니 고맙다.’ 그런 마음으로 유지돼야 돼요, 결혼이라는 게. 진작 좀 그렇게 하지. 때늦은 후회는 소용없고요. 한번 갔으면 또 가면 되고.

 

훅, 빨아들여서 새롭게 쑥 나올 때 그 주님이 바로 창조주입니다. 제대로 된 창조주지요. 제대로 된 창조주, 예수님이 갖고 있는 것을 우리도 공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썩어짐이 없어요. 예수님은 썩었다가 부활되었잖아요. 썩어짐이 없는 대신에 우리는 무슨 경험을 해야 되느냐? 썩어짐이 없는 대신에 썩어져야 돼요. 제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이 “목사님, 우리가 주의 말씀대로 믿고 썩었는데 안 살려주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이야기했어요. 내시경 하면서 마취된 상태인데 의사 얼굴 보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입만 벌린 채로 의사는 보지도 못하고 깨어나 보니까 회복실에 가 있는 거예요.

 

분명히 의사 얼굴 못 봤는데 깨보니까 벌써 끝났어요. “내가 봐야지. 나를 데려가는지 확인해야지.” 하면서 눈꺼풀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나는 사라지고, 내 믿음, 소망, 사랑도 다 없어지고, 내 모든 성과도 다 없어지고, 다 죄로 드러나고, 없어지고 깨보면 회복실입니다. “여기가 어디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다. 내가 살려준다고 했잖아. 왜? 내가 살았으니까. 내가 산 내 삶을 너희도 같이 산다.” 따라서 그러한 백성을 가지고 이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이름을 이렇게 지어요. ‘7’

 

왜? 우리의 고유명사는 날라 가버렸으니까. 이제는 숫자로 말합니다. 이제는 늘 7이라고 부르리라. 7이 확대되면 그게 성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7로 살아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7로 살아가게 되면 12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게 무슨 되도 않는 방언이냐? 7로 살아가게 되면 12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7은 뭐냐? 창조에 관한 숫자고 12는 무엇인가? 야곱의 언약에 관한 숫자입니다. 고난의 숫자입니다. 야곱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12명. 12명이 확장되어서 뭐가 되었습니까? 12지파. 12지파가 어디로 갔습니까? 광야. 광야에서 그들은 굉장히 큰 고난을 받았지요. 12가 감으로써 이미 이들 속에 진짜 창조주가 함께 있음을 주변의 이방사람들과 비교시키면서 뭘 하는가? 주님의 전쟁을 벌입니다.

 

그러면 이 전쟁에서 마지막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에스겔에 나와요. 성전입니다. 성전에 무슨 보물이 들어 있는가? 금인가? 금은 날라 가고 이것은 날라 가면 안돼요. 무엇인가? 언약궤.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언약궤가 있어야 돼요. 성전의 언약궤. 그래서 잡곡강정에 도입되는 스가랴, 호세아, 아모스, 이 모든 것이 완성되면 다시 성전중심으로 재편성됩니다. 하박국을 봅시다. 1301페이지요.

 

왜 하박국을 보자고 했는가? 묵시라는 용어가 처음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의 내용이 남쪽 유다의 요시아, 여호야김왕의 시대입니다. 600년을 전후한 시대입니다. 하박국이 부르짖어요. “하나님이여, 이렇게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켜도 좋습니까? 이게 정당한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악인은 그렇다 쳐도 의인이 함께 고난 받는 것이 잘못된 처사잖아요.”라고 언급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방나라가, 바벨론이 쳐들어오니까. 그럴 때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니 주께서 응답을 합니다.

 

어떻게 응답을 하는가? “네가 생각하는 의인이라는 것이 연대기, 역사 속에서의 의인을 자꾸 언급하는데 내가 생산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속의 의인이 아니고 묵시속의 의인이다.” 하박국 2장 3절을 봅시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 역사의 마지막이 묵시거든요. 그래서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은 “제가 어떻게 처신하면 의인으로 인해서 마땅히 심판을 면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처신하게 되면 다가오는 심판에서 피할 수 있습니까? 제가 의인 맞잖아요. 그런데 악인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은 너무 억울합니다.”라고 하니까 주께서 하신 말씀이 “너는 역사적 차원에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가오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묵시다. 묵시가 왔을 때 ‘나는 의인입니다.’ 하는 소리를 하지 말라. 의인은 역사적인 세계가 끝나고 난 뒤에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그 의인은 어떻게 행동을 하는가 하면, 이렇게 행동을 해요. 하박국 3장 17, 18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하는 환상적인 안목을 가진 의인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것은 묵시의 주인, 주체가 만든 거예요. 본인이 용케 살아남은 것이 아니고. 하박국 입장에서는 멸망과 심판, 이것은 당연히 일어나야 될 일이에요.

 

그래야 최종적 관점인 묵시적 관점에서 의인과 죄인이 어떻게 구분되는가가 확연히 드러나는 겁니다. 어제 제가 달력으로 만든 그림 있었지요? 동그라미가 이렇게 있고 그 위쪽으로 살짝 닿은 듯 아닌 듯 붙어 있는 작은 동그라미가 있는데 이걸 탁 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딸랑 하고 겹치듯이 내려왔지요. 그래서 전체 속에 섞이지 않는 환상적인 요소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쪽의 역사는 뭘 원합니까? 축복을 원하지요. 그런데 항상 반대거든요. 이쪽이 축복을 원할 때 여기는 저주아래 있는 거예요. 이쪽이 죄일 때 여기는 의가 되고, 이쪽이 현재가 되면 여기는 과거가 되고 이쪽이 현재가 되면 여기는 미래가 되고, 같이 있으면서도 섞이지 않는 것, 이것을 가지고 집합론에서 속한다고 하지 않고 포함된다고 하고 있어요. 포함된 것은 항상 이렇게 겹쳐 보여도 실상은 붕 떠서 있는 거예요. 부분집합의 전체는 전체집합보다 더 큰다는 이것이 모순이거든요. 이걸 전체에 담을 수 없도록 빠져나가요. 무화가 나무에 소출이 없다. 이게 저주잖아요. 외양간은 있는데 소가 없다. 이것도 저주잖아요. 포도농사도 안 되고. 충청도 지방은 포도나무 다 들어낸답니다. 농사도 안 되고 보상금이나 받으려고.

 

그런데 자기는 저주 안에서도 기쁘다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 의인인데 7, 훅 하고 내뱉는데 7이 내뱉은 의인이에요. 이런 의인이 요한계시록에 박혀 있으면 환란과 곤고와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당당히 이기리로다. 심지어 목 베인 영혼들, 목이 달아나도 그들은 ‘아, 주께서 이렇게 당했구나. 주께서 이렇게 했구나. 주님께서 한 그것을 그대로 나에게 주셔서 이 땅에서 12라는 야곱의 환란의 길을 가게 하시는구나.’라는 것을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을 보는 게 얼마나 만만하고 즐거운지 몰라요. 이제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이게 묵시세계의 특이성이지요. 하박국이 잡곡강정속에 있다가 건드릴 때……, “너!” 하고 건드리거든요. 그러면 이번에 내가 하박국 차례에요. 하박국 차례가 되면서 레코드 가게를 열었는데 망해버리고, 치킨 집 하다가 망해버리고, 이번에 취직했는데 6개월 만에 쫓겨나오고, 뭘 해도 안 되는데 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 한다는 이것이 의인이에요.

 

그런데 그 쫓겨난 것이 환상적 안목을 가질 수 있는, 7이라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순간순간이 되는 겁니다. 승인은 이미 났는데 이제 확인하는 것만이 남아 있거든요. 늘 인생을 살면서 확인하는 거예요. 제 이야기가 별로 기쁘지 않는 듯한데, 별로 즐겁지가 않다는 투인데, 그것을 두고 너무 고생하고 고난 받는다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 과자가 하나 있거든요. 이 과자를 보고 맛있겠다고 여겨서 먹어보니 내 입맛이 문제인지 교만해서 그런지 맛이 없어요. 이게 환란입니다. 왜 내 뜻대로 안 해주는지, 이게 환란이에요.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체험을 하셨어요. 목이 말랐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있어요. 열매를 보니까 아직 때가 안 되었어요. 때가 되었든 안 되었든 내가 필요한 열매를 못 내니까 저주해버렸습니다. 이게 무슨 횡포입니까? 굉장히 큰 횡포거든요. “정말 어이없어…….” 이게 유 아인이 하는 이야기거든요. 정말 어이없어요. ‘뭐가 이런 수가 다 있어?’ 제자들이 더 놀랐습니다. ‘이러다가 우리도 저주받는 것이 아닌가?’ 바로 천사가 탁, 터치한 거예요. 이번에는 에스겔? 에스겔은 너무 도가 심하다. 왜냐하면 아내가 죽어도 울지 않아야 되니까.

 

그러면 좀 쉬운 것 없나? 요나? 요나는 더 문제가 커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야 해. 어쨌든 간에 우리의 모든 기능은 잡곡강정속에 포함이 되어 있으니까 주께서 훅, 창조를 빨아 당겨서 7과 12의 안목……, 그러니까 창조 속에 7과 12라는 언약이 들어 있지요. 바깥에는 창조요 안에는 언약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언약을 함께 빨아들여서 훅, 하고 내 뱉어버리면 새롭게 나온 피조물 속에 12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12의 집단을 가지고 숫자로 표현하지요. 144,000. 14만 4천이라는 것은 12*12*1000, 야곱언약이 야곱언약대로만 확산이 되어서 그것이 언제까지, 1000까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에서 구원받는 사람의 총 합이 14만 4천명인가? 아닙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더 많아요. 숫자로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요? 성경에서 최고의 숫자가 이만만(계 9:16)이지만 그것은 마귀에 관한 것이고 구원받은 사람의 최고 숫자가 창세기 24장에 나옵니다. 24장 60절, 이것은 잘 안 가르쳐주는 것인데. 거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우리나라 인구의 5분의 1입니다.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신천지는 왜 자꾸 14만 4천을 주장하는지 몰라. 여기 천만인이 있는데. 여기 천만인이 나오잖아요. 천만인 나오고 그 다음에 뭡니까?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1429년에 잔다르크가 영국군과의 오를레앙 전투에서 이겼다고 했지요. 이 리브가가 꼭 잔다르크 같아요. 시집을 가는 것인지 싸움을 하러 가는 것인지가 분간이 안돼요. 남편만나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러 가는데 왜 예언이 “네가 원수의 성문을 열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역사적 연대기로 보면 자기 몸만 챙기면 되지만 환상적 입장에서 보게 되면 네가 맺어야 될 모든 관계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환상의 주인공을 보여줄 기능인으로 미리 당겨서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언약이라는 거예요. 언약이 얼마나 이상한지 언약대로 하게 되면 언약에 의해서 거짓말 안한 야곱은 지옥가고 거짓말 하는 야곱은 천국 갑니다. 제 말 맞잖아요. 제가 지금 거짓말 하고 있습니까? 거짓말해야 할 때 거짓말하는 것을 가지고 믿음에 합한 행함이라고 해요. 기생 라합. 뭘 더 보태겠다고? 베드로에게 보자기가 내려왔지요. 보니까 못 먹는 것들이에요. 그 때 베드로가 욥바에 있다가 가이사랴 해변가로 올라갔는데 욥바에서 자꾸 잘난 체를 하는 거예요. 연대기적으로. 자기는 괜찮다고 보지요. “못 먹습니다. 나는 법을 지킵니다.”

 

아까 법 이야기했지요. 또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 속에는 자기 무서움과 공포를 떨쳐 버리기 위해서 무엇으로 무장한다? 선과 의로 자기무장을 하지요. “나는 착하니까 나쁜 기운아 떨어져 나가라.” 하지만 그 의는 새로운 것을 요청하지요. 왜? 내가 의냐 악이냐, 할 때 새로운 악이 요청되면서 새로운 악을 저지를 열망이 생깁니다. 악이 있어야 그 대척점으로 자신이 의를 아니까. 그리고 그 악마저 정복할 때 비로소 의가 된다는 자기욕구의 만족을 성취하게 되는데 악을 언제 다 정복합니까? 정복 못합니다.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못 먹습니다. 지금까지 이정도 되는 것도 얼마나 애썼는데 이제 와서 그동안 쌓은 나의 의를 버리면 안 됩니다.” 하는데 “내가 먹으라고 한 것은 먹어.” 하고 먹기도 전에 휙 가버렸어요. 그랬는데 고넬료의 부하들이 와서 “천사가 와서 어르신네 모시라고 했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환상적인 모든 요소가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머리위에 하늘의 해, 달, 별, 온갖 무게 있는 환상적인 요인들을 걸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입장에서 내 주체를 보지를 못하고 기껏 세상에서 바라보는 것들만 추려서 나라고 여기는 겁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교인들이 베드로를 구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어요. 기도를 했는데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천사가 문을 열어줘서 감옥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기껏 왔는데 왜 왔냐는 식인 거예요. 놀라서 어떻게 나왔냐고 묻는 겁니다. 이게 뭐예요? 그러면 기도를 왜 했어요? 설마 그렇게 될 줄을 몰랐지요. 그러면 기도는 뭐냐? 답답해서 한 번 해보는 거지요. 그 상황이, 그 미장센(Mise-en-Scène)이 참 좋은 거예요. 왜냐? 모든 인간의 움직임은 안한 것이 아니고 방해했다는 거예요. 주의 일을 늘 방해하는 식으로 해도 주님께서는 묻거나 따지지 않는 배려를 해주시는 거예요. “너한테 아예 기대한 적이 없으니까 네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내가 그것에 대해서 탓하지 않겠다.” 하는 거예요.

 

이정도 이겼으면 보통 이긴 것이 아니잖아요. 어떤 짓을 해도 이미 용납된 채 행동에 나서라는 것, “용납 되었기에 어떤 행동을 해라. 그 행동마저 용납되었음을 추후 적으로 네가 그것을 확인하라.” 진리라는 주님의 환상의 능력을 받은 사람에게 주는 공통적인 속성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와 성도끼리는 어떤 교류가 없고 어떤 자리에서나 선지자 같은 역할을 하는데 그 대표자가 누구냐? 투톱, 두 증인이 나와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나옵니다.

 

이 두 증인이 아주 희한한 사람이에요. 도미네이션게임이라는 것이 있어요. ‘domination’이라는 것은 ‘지배’ 그런 뜻이 있는데, 말 그대로 지배하는 게임이지요. 007 영화에 보면 그런 게임하는 대목이 나와요. 전 세계를 두고 악당하고 게임하는데 먼저 선점한 나라는 전기가 흐르면서 상대가 못 점령하지요. 또 예전에 DDR이라는 게 있었지요. 불 들어오는 순서대로 밟아서 춤추는 발판. 뒤늦게 그거 설치한 사람들 망했습니다. 두 증인이 가는 곳마다 그 지명이 성경적 용어로 바뀌어요.

 

애굽이 되었다가 십자가 못 박힌 골고다 언덕이 되었다가. 이 말이 뭐냐? 이제 이 세상의 지명은 환상에 의해서 유동적이 되는 겁니다. 성도가 가는 곳이 성지순례에요. 성지에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머무는 곳이 성지순례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본인이 뭘 했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소속된 환상적인 영역이 이미 지상에 있는 자연세계를 몽땅 다 도미네이션, 통치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증인으로서 가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그들이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게임이 끝난, 전쟁이 파해진, 전쟁이 끝나서 휴지가 된 그곳에서 전리품 챙기듯이 ‘아, 이것도 주께서 승리하셨고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하면서 그것을 밟는 겁니다.

 

“목사님, 그런 것이면 저도 그거 하겠습니다. 이미 다 폐허가 된 상태에서 밟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은 할 수 있을 것같이 보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밟는데 거기에 괴물들이 있어가지고 체포해서 죽이는데요?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텅텅 다 비워놓은 상태에서 그야말로 무주공산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께서 들어가게 할 때는 그야말로 장대한 군사들이 버티고 있고 굳건한 여리고성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두고 뭐라고 하는가? “내가 이미 다 처리했으니까 너희는 들어가기만 하라.”라고 하니까 그들은 연대기적인 과거에 둘러쳐져 있으니까 과거의 인상들이 남아 있어가지고 겁을 내고 거기에 못 들어갔어요. 그런 환상적인 주님의 뜻을 모르니까 못 들어가고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갔잖아요. 교재에서 하나만 설명하고 이번시간 마치겠습니다. 교재 1페이지에 보면, 【흔히 ‘고향’이라고 여기는 것도 사적 기억을 걷어내면 그냥 물질더미다. 산등성이의 화강암 또는 흙과 살랑살랑 부는 바람, 그리고 건조한 들풀과 흩어진 채 누워있는 빛깔들이다. 우리의 몽상은 그 물질 하나하나에 소중한 추억을 붓질 한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뭐냐? 사람이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는 고향을 잊지 못해요. 주께서 훅, 빨아들였는데 그 빨아들인 것이 싫어요. 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기를 원해요. 연대기니까.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1989년 이 용복이라는 맹인가수가 불렀던 ‘어린 시절’이라는 노래거든요. 번안가요, 기타 치면서. 거기에 보면 돌아갈 수는 없지만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돌아갈 수가 없어요. 다 개발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가 봐도 예전의 그곳이 아니에요. 그래서 돌아갈 수는 없는데 잊지도 못해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의 발목을 잡는 겁니다. ‘나는 천국이 싫어. 어릴 때 내 고향이 좋아. 고향에 있던 그 수미가 좋아.’ 만나보면 이미 다 늙어가지고 “누구세요?” 이렇게 나올 건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보면 너무 늙었어. “혹시 옥경이?” 세월 지나면 어떤 가게도 다 부도나요. 우리 동네 가게 절반이 3년 안에 다 문 닫았습니다. 뭘 해도 안돼요. 무슨 고향이 있어요. 어릴 적 고향에 가 보면 그 때 살던 아저씨는 보상금 받고 다 서울로 이사 가버렸어요. 그 돈 가지고는 서울도 못 갔지요. 경기도 근처. 분당도 비싸서 못가고 그 밑에 어디. 무슨 고향입니까? 가지도 못할 고향이 그래도 기억에는 남아 있어요.

 

50년 믿었다고요? 70년 교회 다녔다고요? 남는 것은 진달래 먹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 그것뿐입니다. 이거 주께서 훅, 빨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식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