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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제3강 [잡곡강정]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6冬(요한계시록)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제3강 [잡곡강정]

정인순 2016. 1. 16. 19:51

 

 

 음성3 

 

녹취:한윤범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요한계시록:생명의 신호

제3강 [잡곡강정]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복음이라 하는 것은 그 원천이 구약 이스라엘에서 나옵니다. 구약 이스라엘 하나님의 특징이 뭐냐?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세계 어떤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자기 백성을 버리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다른 백성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유일한 자기 백성을 스스로 하나님께서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매정하신지 자기 독생자 아들마저 무참하게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보낸 곳이 지옥이죠. 음부란 곳이에요. 그리고 거기서 약속 만에 의해서 그 음부에서 사흘 만에 부활에 이릅니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은 없어요. 그저 하나님이 구원하는 자를 알아서 스스로 생산하고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아들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지만 그런 나라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만 있습니다.

 

그런 특이한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지난 시간에 한 것, 정말 중요한 건데 제가 많이 피곤했는지 강조 못했는데, 역사와 환상에서 주체는 역사에서 만들어지고 연대기에서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했고, 그리고 환상과 역사에서 요한계시록이 제시한 교집합, 접촉 지점은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십자가 사건으로 역사와 환상의 교차지점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십자가 사건이냐? 십자가 사건은 역사 쪽에서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거든요. 왜 살해했고 왜 주님은 살해당해야 하는가? 여기는 어떤 저항이 있었습니다. 어떤 저항이냐 하면, 인간은 역사 속에 주체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괴물이죠. 역사, 연대기 속에서 자기밖에 모르는 그 괴물이 환상을 알려주면 환상마저 역사 안에 편입시켜 버립니다.

 

예를 들면 역사 속에 없는 주체가 하나님이 어떤 계시를 주시면, 그 계시를 제가 믿나이다, 하는 순간에 이 환상은 토털 연대기로 변해버려요. 난 오년 전에 기도하다 은혜 받았다. 이렇게 돼버려요. 그러면 이 전체가 역사가 된다고. 그러면 십자가 사건은 어디 있느냐? 십자가 사건은 전체가 된 이것에서 다시 환상이 또 접촉점을 만들어요. 여기서 십자가 사건이 또 생깁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자꾸 환상마저, 하나님의 계시마저, 율법마저 정복해서 그게 나를 구원하는 세계로 만들고자 하는 자를 자꾸 저항하는 그런 십자가 사건이 환상 쪽에서 제시가 돼요. 이건 행함에 대한 적극적인 극렬한 저항이요 거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이미 그 당시 십자가는 15년 전에 끝난 사건이에요. 이미 지나간 십자가 사건이 계속해서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은 계속해서 내 쪽으로 행함으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연대기적 역사를 계속 쌓고 누적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건 내부에 역사를 고수하라는 어떤 명령권자가 있어요. 역사는 파괴될 수 없다. 끝까지 가야 된다. 유지돼야 된다. 히브리서 1장 10절과 다릅니다. 히브리서 1장 10절에서는 주가 나타나게 되면 주께서 친히 만든 모든 역사와 자연세계는 날아가 버려야 돼요.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버림받는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특색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어요. “목사님, 제가 예수 믿는 것 맞습니까?” 그러면 그건 본인이 아십니다. 저한테 확인받을 필요 없습니다. 내가 예수 잘 믿는다고 좀 칭찬해주시고 확정져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나 확정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십자가 사건과 결별하는 순간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 믿는 자기 역사로 전환되고 변질되고 만 거예요. 거기에 적당한 노래가 있어요. <시크릿가든>에 나오는 백지영이 불렀던 <그 여자>란 노래인데,

 

얼마나, 얼마나 더 너를 이렇게 바라만 보며 혼자

이 바람 같은 사랑 이 거지같은 사랑 계속해야 니가 나를 사랑하겠니.

조금만 가까이 와 조금만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

널 사랑하는 난 지금도 옆에 있어 그 여잔 웁니다.

 

하나님을 내 속에 장악하려는 거예요. 신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가 다루려고 하고 관리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흥정하려고 타협하려고. 얼마나 기도하면 내 소원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협상조로 나가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다가가고 주님은 내빼고. 내빼면서 십자가 사건은 계속 흘리고. 오지 말란 말이야. 저는 주님을 믿고자 합니다. 그 믿음이 바로 불신앙이거든요. 이스라엘이 그래서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기를 지켜내기 위해서 자꾸 여호와를 믿는데 여호와는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 속을, 어제 두 번째 강의제목이 [찐빵 쪼개기]거든요. 남쪽, 북쪽을 다 쪼개면 그 속에 고난 받는 선지자들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마치 장차오실 예수님처럼 버림받는 사명을 지니시고 이 땅에 와서 자기 백성으로부터 버림받으면서 가짜 이스라엘이 티가 나도록 조치하고 가짜 이스라엘은 결국 망하고 맙니다. 이게 우리 선배들이 했던 잘못된 짓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돼요. 자기 역사를 고수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요한계시록 들어가기 전에 이런 사실이 갖추어져야 돼요. 그렇지 않고 요한계시록을 보면 나의 역사로 전환되고 맙니다. 나는 요한계시록 22장 다 봤다. 이 역사가 나의 역사다. 그러면 두 발자국 도망하는데. 네가 나를 믿고자 하지 말란 말이죠. 그런 신은 없어요. 버림받아야 되는데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결국 못 잡아서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걱정하는데 걱정하면 불신앙이고, 괜찮아 하면 신앙이거든요. 이해가 안 되시는 모양인데.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들 가운데 자기 백성을 알아서 건지잖아요. 알아서 건진다면 구태여 내가 잡을 필요 없이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만들어낸다면 내가 여유롭게 살 필요가 있어요. 주께서 알아서 하시니까. 제가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이기는 자에게 이런 혜택을 준다고 할 때 백 퍼센트 이기는 방법을 이야기했지요. 시간차 공격을 하는 거예요. 상대방이 내는 걸 보고 바꾸면 되는 거예요. 시간을 한 박자 줄이는 겁니다.

 

주께서 벌이신 일을 우리 쪽에서 주와 함께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 전부가 나를 대신하신 주께서 하신 일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잖아요. 한 박자 죽여서 바라보는 믿음. 그리고 내가 몸부림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발악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시간에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본인을 쪼개세요. 이스라엘만 남북으로 쪼개는 게 아니고 신약에 오면 요한계시록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 둘로 쪼개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 자신을 내부를 쪼갭니다. 그 안에서 요한계시록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요. 우리는 완성된 요한계시록을 돌려보는 재미가 있어요.

 

여기 교재 3페이지 봅시다. 제가 어제 이 세상이 동결됐다 했지요. 시간마저 동결됐습니다. 분명히 요한계시록 1장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이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했다는 거예요. 속히 될 일이니까 미래가 아니냐고 하지만 미래마저 동결됐어요.

 

동그라미, 이게 현재라면 미래는 여기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목을 치니까 미래가 같이 섞여버렸지요. 현재 속에 미래가 같이 동결되는 겁니다. 동결되는 논리에 대해서 교재 3페이지 밑에. [세상은 예수님의 떠나심 앞에서 아무도 떠날 수 없는 환경이 된다. 모든 환경은 떠나신 분의 내부 환경이 된다.] 떠나신 분의 내부 환경이 된다는 말은, 이 세상은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남은 껍질이고 던져진 옷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활동하는 역사 무대는 가장자리로 밀리게 되고 거기서 아무리 대단한 사건들이 줄지어 일어난다하더라도 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4페이지 묵시와 역사 차이, 다섯 번째에 보면, 움직이지 않는 운동이라 했어요. 분명히 굉장히 움직이는데 전혀 움직이지 않아요. 주님의 시간으로 볼 때는. 원래 그랬어야 되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시각이거든요. 주님께서 가시고 사도 요한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제가 전기밥솥 이야기했듯이 이미 사도 요한은 구원받았어요. 성령이 임하면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고 난 뒤에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움직이지 않는 안에서 어떤 운동들이 요란스럽게 일어나느냐는 것이죠.

 

찾아야 되겠다. 여기 있네. 찾았습니다. 4페이지 위에서. [줄지어 일어난다하더라도 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꿈도 희망도 소용없다. 떠나심을 묘사할 수 있는 전체는 없기 때문이다.] 환상마저 포착할 수 있는 역사는 없기 때문이죠. [확인되지 않는 이질성을 맞이해야 한다. 설명할 수 없는 중심을 모셔야 한다.] 그 다음에 ‘요란한 정숙상태’ [세상은 스스로 자기 증명은 허락되지 못하고 달리 증명당할 일만 남아 있다.] 그게 뭐냐? [볼지어다. 구름 타고 오시리라.] 외부에서 침략하잖아요.

 

그들은 굉장히 바빠요. 지금도 바쁩니다. 내 집 마련 청약저축에 바쁘고, CMA나 MMF라 해서 단기성 자금을 어떻게 활용할까 굉장히 바빠요. 바쁜데 주님 보시기에는 정숙, 고요해요. 소박한 자기 연대성 만들기에 굉장히 바빠요. 요한계시록을 전혀 안 봄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을 수행하고 실천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 다니는 사람뿐만 아니고 이미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두 조각내고 쪼개기 때문에 혼자서 산 속에서 무슨 짓을 해도 그게 요한계시록에 표현돼있고 나타나게 돼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벗어나는 행위는 일체 없습니다.

 

이번 시간에 왜 그런가 하는 거예요. 왜 인간은 그러한가? 그걸 이제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진도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중요한 대목에 들어섰다고 생각되는데 잘 들으셔야 돼요. 인간은 어릴 때부터 자아가 형성되기 전에 딱 두 가지를 아는데 자기가 있다, 없다, 에요. 존재의 부재인데 엄마가 시장에 가서 없으면 없다가 되고, 오면 있다가 돼요. 있다, 없다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짝을 찾아야 돼요. 없음을 느끼면서 함께 찾는 겁니다. 없음을 요청함으로 내가 있음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것은 어떻게 증명되는가? 어린애들 보면 알잖아요. 엄마 없으면 울고 엄마 있으면 좋아하고. 자기만으로 자기를 알 수 없고 내 곁에 누가 있느냐, 없느냐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짝을 찾아서 요청해서 정합니다.

 

일단 존재와 있다, 없다가 한 세트가 되면 만족하지요. 만족한 순간 이게 있다가 돼요. 그러면 여기서 또 없다를 찾아야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을 사주세요. 왜? 없기 때문에. 그래서 스마트폰을 사줬어요. 굉장히 만족하지요. 그러면 그건 있다가 돼요. 그런데 옆집 정수기에서 얼음이 나오네요. 우리 집 정수기는 얼음이 안 나와. 갑자기 나는 무엇을 결핍한 존재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걸 느끼면 뭘 요청하게 돼있어요. 엄마, 우리 집에도 얼음 나오는 정수기 사줘, 라고 요청하게 돼있어요. 정수기 사주면 그 전체가 일시적으로 만족스러운 있다가 됩니다.

 

그런데 그걸로 인간이 만족합니까? 더 커서 나는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죽는지 몰라요. 있다를 모를 때는 뭔가 없다가 되지요. 없음을 요청하기 위해서 신을 요청해요.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 이걸 요청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게 신이에요.

 

신을 알게 되면 끝납니까?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데.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이며, 내가 신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뭘 해야 되며, 누구를 믿어야 되면, 헌금은 얼마 내야 되며. 선교는 일 년에 몇 명해야 되며, 기도는 하루에 몇 시간해야 되며, 성경은 하루에 몇 장 보는가? 계속해서 요청하게 됩니다. 나중에 나이 80,90 쓸모없게 되도록 계속 돼요.

 

계속 요청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이게 인간의 의식적으로 눈에 보이는 있다, 없다로 끝나는 게 아니고 편집증 환자처럼 계속해서 뭘 요구하는 의식적인 차원이 아니고 무의식적인 차원까지 내려가는데 여기는 선악에 관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내가 왜 자꾸 얻고자 하느냐? 뭔가 불길하고 쫓기고 두렵고 무섭고.

 

어제 이야기했듯이 2008년 10월 2일 새벽 6시, 남들은 중요하지 않아요. 최진실 좋아하는 사람은 중요해요. 자살한 거예요. 밥을 굶었습니까, 돈이 없습니까, 결혼을 안 해봤습니까? 그런데 왜 죽어요? 무의식 속에서 나는 선해야 되며 악하지 않아야 된다고 계속 쫓기는 겁니다. 자살이란 마지막 남은 자기의 선함을 유지할 수 있는 최후의 방책입니다. 장렬하게 죽는 겁니다. 물론 찬 물엔 들어가지 말고 따뜻할 때 뛰어내려요. 찬 물은 너무 차가워서 곤란해요.

 

끝까지 자기 정당을 요구한다는 것은 악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가치 없는 쓸모없는 인간, 무가치한 인간이 되지 않는가, 하고 쫓기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있다, 없다에서는 신을 요청하지만 여기선 법을 요청해요. 법을 지키면 되는 거예요. 성경말씀 가운데 지킬 것을 골라서 나는 이 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신자라고 확정하고 싶은 겁니다. 이게 성화론이에요. 그래서 쫓기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기억하다시피 아주 철저하게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그 현장에서 악은 또 다시 등장합니다. 철저하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이러다간 내가 광신도 되지 않는가, 내가 미쳤어, 이러면 너무 심하게 믿는 거야, 라는 순간 진짜 내가 원하는 선은 분명히 그 장소에 갔는데 저만치 멀어져가요. 지평선 쫓는 것처럼. 지평선 있는 장소에 갔는데 저 멀리 후퇴돼있습니다. 그 갭을 줄일 수 없어요.

 

완벽한 착함을 시도하면 할수록 그동안 몰랐던 죄들이 계속해서 더 많이 나에게 쏟아집니다. 마귀는 이야기합니다. 따라잡아라. 넌 우리 교회에서 제일 착해. 빨리 따라 잡아. 넌 우리 교회에서 기도 제일 잘해. 더 열심히 해야 돼. 너만큼 헌신하고 희생적인 사람은 없어. 너 뒤를 봐. 내신 성적 떨어지는 사람 많아. 하지만 너는 수능 전국 0.1% 조금만 더 따라가면 돼. 할 수 있어. 이게 바리새인들이에요. 자기 학대, 자기 채찍, 자기 비난. 부족합니다. 맨날 그러고 있을 때 주님은 제자들과 술 잡숫고 계시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다.

 

법을 만들어서 법을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양심에 쫓기는 일은 없도록 그렇게 자체적으로 나름대로 조치를 해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과 법을 구체적으로 연대기, 역사 안에 합치고 싶어 해요. 너무 추상적이니까. 인간은 연대기 속에서 주체가 나오니까. 이걸 합친 게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를 구약에서 짐승이라고 합니다.

 

일본과 한국 축구시합에서 한국이 이겼을 때, 일본과 야구시합에서 마지막 일본의 구원투수한테 역전으로 3점 낼 때 그걸 보는 시청자들은 눈물 흘렸어요. 드디어 일본 놈을 이기는구나. 우리 한국의 저력을 이렇게 나타내는구나. 갑자기 자기가 의로워지고 하나님이 내 편에 있는 것처럼 내 기도에 응답하고, 야구 때문에 기도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 나 좋은 쪽으로 해주는 거예요. 여러분이 스포츠를 보면서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겼을 때 우리는 신의 은총을 느낍니다. 바둑 안 두는 사람은 모르지만 이세돌과 커제와 몽학배 결승전할 때 간절히 기도하고 난리에요. 커제 9단을 이세돌이 이겨서 한국의 우수성을 보여주자. 3:2로 졌습니다. 1억7천만 원 날아갔어요.

 

국가에 대해서 국가가 나를 보호해주는 거예요. 괜찮은 국가 속에 있음으로 나의 정당함과 신을 찾는 것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으로 성취가 되는 겁니다. 안중근 의사처럼 나라 없는 백성은 없다. 그 국가가 성경에서는 짐승이 돼요. 악마가 만든 거예요. 그러면 국가에 대한 권력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 국가의 권력에 자발적 순종이거든요. 국가의 대통령에게, 왕에게 복종한다? 복종 안 합니다. 누가 대통령에게 복종해요? 일베? 박사모? 복종 안 해요. 북한 사람도 복종하지 않습니다.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본인에게서 나와요. 본인이 법과 신을 합치하고 싶어서 본인이 원했던 국가기 때문에 자발적 순종 그 자체에서 권력이 나옵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복종하는 거예요. 자기 권력에게 자기가 경배하는 겁니다. 내가 나한테 절하는 거예요. 잘했어, 훌륭해. 그래, 용기 내.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격려한 겁니다.

 

이게 짐승인데 국가에서 짐승으로 어떻게 갑작스럽게 변할 수 있습니까? 갑자기 변한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국가가 망하고 바벨론 제국에 잡혔을 때 비로소 바벨론이 짐승임이 폭로됩니다. 언약이 함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국가라는 형태가 짐승이란 형태로 변합니다. 왜냐?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환경으로 언약적으로 조종되고 배치되기 때문에. 미장센이라 했지요. 어제 못 쓴 것 써보자. mise-en-scène 하나의 같은 장면끼리 동결되는 거예요. 똑같은 짐승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함으로써 이제는 하나님만 남고,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 이름만 남고 모든 것을 날아갔어요. 날아갔지만 언약은 유효해야 되고 언약은 성취돼야 되기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계시를 주게 되면 다니엘은 현재 소속돼있는 바벨론 제국 공무원이거든요. 다니엘이 공무원으로 취직해 있는 그 국가가 짐승인 것이 폭로됩니다.

 

짐승인 것이 폭로되면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짐승을 짐승 되게 하신 그분이 다니엘이 제시한 계시를 따라서 장차 이 땅에 실제로 오시게 돼요. 사람들은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 예수마저 역사 속의 일부로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갑자기 역사에서, 이 그림은 끝날 때까지 잊으면 안 돼요. 역사에 환상 쪽에서 들어올 때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때 역사가 예수를 역사 일부로 간주해서 너 같은 인간은 그냥 사형수야. 역사 일부로 죽으라고 해서 죽으면 끝나는데 여기 예수님이 품고 온 환상이 예수님과 함께 있어요. 동방박사가 별 따라 온다든지.

 

요한계시록 12장 1절만 누가 읽어보세요.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제가 인터넷에 찾아봤어요. 태양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지구 무게의 33만 배라는 거예요. 지구 무게가 57억 톤이에요. 무슨 철인 같은 여인이 그 무게를 감당합니까. 그런데 또 조사해보니까 태양보다 훨씬 작은 10킬로미터짜리 고밀도 중량의 별은 그 무게가 태양의 두 배가 된다는 거예요. 그 별을 사파이어처럼 박아서 머리에 썼다는 거예요. 도대체 머리가 어느 정도 돼야 견딜 수 있을까요?

 

마리아를 보세요. 여자 하나에 환상이 끼어든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마리아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환상적인 요인들이 전부 다 크림들이 발라 있는 거예요. 다 연결돼있는 거예요. 그래서 에녹이 사는 게 정상이고 아담 자손들이 죽는 게 비정상이에요. 동방박사 별 따라 오는 것이 정상이고, 우린 백날 봐도 별 안 움직이는 이건 비정상이라니까. 물 위를 걷는 게 정상이고 물에 빠지는 게 비정상이고. 뭔가 반대로 되었다는 것, 환상 빼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환상 빼놓고 주체를 우리는 간증하고 있는 겁니다. 환상 등장하면 우리는 그걸 역사로 바꿔버리죠.

 

그럼 환상과 역사의 차이점이 뭐냐? 환상은 나와 직접 외부와 관계하는 게 아니고 바깥에 계신 분의 소유로서 관련될 때 이게 환상이 되는 겁니다. 그럼 그분이 어디 있는데? 왔다 갔어요. 왔다 가시면서 나는 구름 타고 다시 온다. 또는 주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다. 역사 속에서 전혀 재현될 수 없는 일회성 사건들을 남겼어요.

 

그래서 그 일회성 사건을 남기면서 등장한 게 바로 짐승이라는 환상적 개념을 국가에다 부여합니다. 너는 짐승이야. 국가에서 짐승으로 가는 메커니즘, 과정을 인간 속에선 찾을 수 없어요. 어떻게 우리 국가가 왜 짐승이 되는지. 짐승이란 부정적 개념이거든요.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여지는 없어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환상을 지시고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대해서만 짐승이 적대적 관계에 있다. 우리한테는 호의적 관계에요. 마음이 같이 맞았기 때문에.

 

제가 강의 처음 시작할 때 일곱 교회 이야기할 때 아멘이시요, 충성이요 하면서 혜택 준다는데 제가 분명히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지금 없다면 일곱 교회는 폐허가 된다고 했지요. 건물이 오래 되면 주저앉게 마련이잖아요. 그게 역사에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가미되면서 일곱 교회는 그냥 자연현상으로 무너지는 게 아니고 누가 무너뜨렸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환상적인 요소가 무너뜨린다면 그분이 오늘날 국가를 짐승으로 규정하는 쪽으로 몰아가는 것과 같이 연결 지을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빼놓으면 설명이 안 돼요. 그들만이 언약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만이 바벨론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잡혀갔기 때문에, 그들만이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버림받음과 버려짐 사이에 환상의 효과, 환상의 능력이 그들을 덮어씌운 겁니다. 버림받음은 일종의 파견근무와 마찬가지지요. 바벨론에 가서.

 

바벨론은 금신상을 만들고 금, 은, 동, 철, 진흙, 이것은 이미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세웠다는 말은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운동만 할 뿐이에요. 동결된 상태, 응고된 상태, 얼음땡 게임. 천사가 와서 치면 움직이고 그렇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이 세상은 아무리 요란하고 분주해도 정숙 된 분주함에 불과해요. 나름대로 분주한데 조용해요. 지금 이 시간처럼 조용합니다. 한 시도 짐승에서 벗어날 수 없이 고요해요. 그 자체가 미장센, 고착된 고정화된 그림 세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목 이야기 안 했지요? 제목 나갑니다. 사자성어로 잡곡강정. 잡곡강정은 잡곡들을 섞어서 엿으로 단단하게 하니까 그것을 압력을 가하니 그 많은 다양한 잡곡들이 고정되어 단단한 바처럼 굳어져있어요. 요한계시록 안에 아모스, 호세아, 요나, 하박국, 스바냐, 스가랴, 다 기어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언약 안에서 전부 고정돼있어요. 이걸 얼음땡 게임하는 것처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것처럼 또는 별에서 온 그대처럼 순간적으로 스톱됐어요. 중국에서는 이 드라마를 어떻게 찍어서 저렇게 되지, 하면서 신기할 정도로. 그때는 천사가 와서 건드리면 자기 활동을 하게 돼있어요.

 

잡곡강정이란 온갖 선지자들의 말씀이 거기 다 섞여있어도 그것들이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적인 존재를 묘사하기 위해서 천사의 감촉, 촉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기다리면 갑자기 굳어진 잡곡이 심판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는 어떻게 해요? 돌려가며 보는 재미가 있어요. 이런 현상을 이미 지나간 일로 여기고 돌려가며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마음껏 환란을 즐기세요. 주의 고난을 마음껏 즐기세요.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림자가 비추겠지요. 담벼락이 있고. 이 앞에 큰 버스가 지나갑니다. 버스 그림자가 담벼락을 다 덮치겠지요. 소박한 나의 연대기가 큰 짐승의 그림자 밑에 전부 가려지면 나의 그림자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사실은, 내 그림자는 내 범위를 안 벗어나는데 버스 그림자는 내 모든 것을 더 지나쳐서 다 덮어버려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은 개인적인 것과 관계없이 그 공동체, 그 사회가 요구하는 데로 추종해야 되고 그들이 원하는 데로 따라가야 돼요. 그러니까 이건 자발적인 복종이면서도 한편으론 자기 욕망과 배치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에서 짐승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짐승에게 순종했는데 늘 얻어맞는 거예요. 황충에 의해서. 같은 편인데 같은 편이 나를 치는 겁니다. 음녀를 만들어놓고 짐승이 음녀를 칩니다. 국가와 국가 간에 서로 다투고 싸웁니다. 시아파나 수니파가 똑같은 인간들인데 똑같이 버림받은 적이 없는 신을 믿는 자기의 상상, 자기의 욕구, 있다, 없다를 채우기 위한 신인데 그 신을 놓고 서로 권력 싸움한다고 서로 죽입니다.

 

이러한 비극, 그걸 비극으로 보지 마시고 요한계시록 했으면 즐기시기 바랍니다. 즐기는 것과 절망함의 차이가 뭐냐? 알고 하면 즐기는 것이 되고, 자기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불안, 불안합니다. 자기 내부에 선악이란 것 때문에. 나는 선해야 되는데 악하면 지옥 가는데. 맨날 거기에 매달려있는 거예요. 그러나 선과 악의 문제, 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뭐냐? 우리가 아는 신이 아니라면 어떤 하나님이냐? 본격적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만이 참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모든 숫자는 1,2,3,4 또는 1,2,4,6,8, 무한은 집합론에서 결국 1로 귀환돼요. 이걸 일자 또는 유일자. 모든 것은 신에게 돌아가는 거예요. 무한은 신의 영역이라고 보는 겁니다. 천문학도 마찬가지고.

 

성경은 1로 시작하지 않아요. 2로부터 시작합니다. 2로 시작하는 이유가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옵니다. 1장 8절에 보면,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22장 1절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지요.

 

이게 숫자 1이 아니고 2에요. 피조물들이 2에 끼어들지 마라. 네가 건방지게 아버지와 나 사이에 끼어들지 마라. 네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창세전에 의논한 대로 그냥 결과물로 될 뿐이지 네가 뭘 했다고 해서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2를 이해하고 2에 순종하는 자는 2의 세계, 아버지와 아들의 보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보좌가 있고 그 옆에 네 생물이 있고 세 번째는 24장로가 있고 그 다음에는 무수한 천사가 있고 그 다음에 무수한 백성들이 있어요. 단계가 그렇게 돼있단 말이에요.

 

이러한 천국의 내막은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고 전쟁을 통해서 부산물로 주어져요. 그렇다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자연세계에 대해서 공격할 때마다 줌 현상이 일어납니다. 점점 더 가까이 가요. 첫째, 둘째, 줌으로 더 자세히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결과, 부산물이 이쪽으로 넘어오면서 막간이 돼요. 이쪽은 공격하고 거기에 대한 결과물이 막간으로 넘어오게 되면 막간에서는 환상 속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하는 아군과 적군이 전부 다 환상 같아. 짐승이 어떻고 괴물이 어떻고 환상 같아요.

 

우리가 환상이라고 부르지만 우리가 역사를 오해해서 그래요. 환상이 진짜 세계고 우리 세계는 마귀가 조작한 세계에요. 그래서 조작된 세계를 까발리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고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전리품으로 등장한 게 뭐냐 하면, 더 깊이 있는 환상 세계, 더 깊이 있는 막간의 세계를 통해서 보니까 천국과 지옥은 이렇게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과 지옥은 장차가 아니라 지금, 지금 우리는 돌려보는 재미. 아하, 내가 오늘 죽으면 이곳에 가겠네. 보좌 있는데 가겠네. 전쟁은 우리가 못합니다. 왜? 우리는 한 박자 뒤에 들어가기 때문에. 즐기세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