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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016 겨울수련회 제 8강(우물 파기)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6冬(요한계시록)

2016 겨울수련회 제 8강(우물 파기)

정인순 2016. 1. 16. 20:06

 

 

 음성 8 

 

녹취:서경수

2016 겨울수련회 제 8강(우물 파기)

 

 

요한계시록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거예요. 이방인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깨졌고,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이 있었고, 이방인 중에도 특이하게 남의 나라 하나님을 자기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희한한 사람이 있이 벌어집니다. 언약에 따르면 성령은 주의 백성에게 와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말미암아 이방인 머리위에 퍼부어지니까 그들이 성령을 알게 되었어요.

 

성령을 받게 되니 율법, 십일조, 구약의 율례와 관계없이 졸지에 의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깨보니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있는데, 그 피 때문에 유대인이 아니고 할례를 행치 않아도 하나님의 성도가 되었어요. 성도가 된 후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새로운 이스라엘 법칙을 적용받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스가랴 2장 18-19절입니다.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이것이 원래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괴롭게 하는 제국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것이 신약 성경에 오게 되면 성령 세례가 임한 모든 이방인도 해당되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널리 전파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한다면, 전파한다는 것은 유명세를 떨치는 것이 아니에요.

 

전파하면 할수록 본인은 성령 세례 받아서 구원 받았지요. 그럼 남들이 성령 세례를 안 받았으면 고요한 것이 너무나 당연해요. 왜냐? 본인도 성령 세례 안 받았으면 전혀 그런 일에 관심 안 보일 거란 말이죠. 그런 무시와 멸시를 당하면서 우리 주님은 어떠했겠습니까? 주님은 이방인이 아닌 자기 백성들에게 멸시를 당해 죽었잖아요.

 

그렇다면 이 세상은 한결같이 고요한 가운데 주님을 죽이는데 가담한 셈이 돼요.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666을 언급 할 때도 짐승이 등장하고 자기들끼리 매매한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를 그들이 들으면 ‘우리는 옛날부터 그래왔어. 새로운 의미 부여하지 마.’라고 할 거란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해 줍시다. 왜냐? 우리가 특이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세례 받은 우리가 특이하지 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냥 자연스럽게 사는 거예요. 시장에서 서로 값을 흥정하면서 사고팔면 되는데, “너희들은 짐승의 표를 받고 서로 통용하는구나.” 이게 뭘 하는 겁니까? “갑자기 성령 받고 난 후에 이상하게 되었네. 왜 그래?” “예전부터 그랬어.”

 

다시 언급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요한계시록도 없고 짐승도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과거에 살다가 죽은 옛날 사람에 불과하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냥 연대기적 주체로써 살아가면 그만이에요. ‘죽으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죽어보면 알고. 살아있는 생명 계속 살려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세포가 밥 달라고 난리를 치는데 살아야지.

 

그런데 이것을 성령 받은 이스라엘 쪽에서 보니까 ‘그들은 배후에 짐승이 있어서 어린양의 복음을 무시하기 위해서 창세전부터 그런 수작을 부렸다’고 구원 받은 사람들끼리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결국 그들은 비밀단체입니다. 그러면 천사는 뭘 하는가? 이번 시간 강의 제목은 ‘우물 파기’입니다.

 

고요한 땅에 천사가 우물을 팝니다. 우물을 파게 되면 숨어있는 주의 백성(144,000)이 튀어 나옵니다. 우물을 파서 만나기까지 묵시 세계 자기들끼리는 대단히 요란해요. 미가엘이 용과 싸우고, 용이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고 요란해요. 그런데 바깥세상은 고요해요. 그런데 천사가 다른 곳에 또 우물을 팝니다. 이 때 요한계시록 1장에서 22장까지 다 동원됩니다.

 

성도가 구원되고 나면 하늘의 신부가 될 것이고, 세상은 불바다가 되고, 마귀들은 지옥 불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은 역시 고요해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우물 파기’라고 표현했어요. 천사가 묵시적 힘으로 우물을 파는 곳에만 자기들끼리 복음에 의한 기쁨이 생기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해석입니다.

 

묵시 세계가 하는 일을 역사 세계는 모르고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옛날부터 산천은 그대로 있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불심판 같은 것은 없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 약 올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순환하면서 영겁의 회기를 한다. 죽으면 흙이 될 뿐이다. 성경의 내용은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지 대세도 아니고 다수의 결정도 아니다. 성경은 옛 성인들의 명언집이다. 이 내용을 믿고 목숨을 거는 인간들은 광신도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라요. 우리도 성령 받기 전에는 그들과 똑같이 비난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천국 간다는 사실도 몰랐지요.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한패가 되어서 666노릇 잘 했습니다. 그리고 144,000이 되고 난 뒤에 과거의 666시절을 돌아보면서 ‘저것이 내 모습이었지.’ 이 생각이야 말로 고요한 세계에서 신앙으로 인내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알아주는 이 없고, 교회 간다고 축하하는 사람 없어도, 예수님이 당한 무시와 외면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무한한 영광입니다. ‘천사가 우물을 팠구나.’를 깨닫게 되지요. 이것이 사도행전에 보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이나 로마서를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의 수가 아주 적습니다. 몇 명 안 되는 중에도 복음을 떠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인간들 사는 모습이 똑같아요.

 

요한계시록을 이쯤 했으면 여러분들은 “간단하네. 우물 파기인데 뭐.” 이렇게 끝나야 돼요. 우리끼리만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더 용기를 줘요.

 

13장 8절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이 말씀은 새롭게 이스라엘이 된 자들이 다니엘에 근거해서 그 예언의 말씀이 오늘날 이 시대에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동안 두렵고 겁나서 읽는 것조차 망설였던 요한계시록이 전혀 새롭게 깨달아지니 좀 허망한 생각도 들지요?

 

14장 8절에 보면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나오는데, 밖에 나가보세요. 무너진 나라가 있는지. 없습니다. 이 세상에 200개가 넘는 나라가 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벨론 한 나라로 통합되어 있어요. 제가 지난 시간에 얘기했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는 아무리 갈라지고 나눠져도 결국은 하나로 통합된다고. 바벨탑의 속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다양성이 하나로 응축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보편성을 추구하는 의식 때문입니다. 다양한 개념들이 있다면 이 개념들을 모아서 공통점을 찾아서 메타 개념을 끄집어내요. 그러면 보편성 개념들을 마치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 같지만 이 보편성은 구멍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그 공백의 자리가 있어야 소통이 가능합니다.

 

국가는 없어요. 영토와 백성이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말합니다. “국가를 위해서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대학도 없어요. 캠퍼스가 있고 교수, 학생이 있지 대학은 없어요. 그런데 말합니다. “학생이 그런 행동을 해서 우리 대학의 명예를 먹칠했다.”

 

이처럼 서로에게 종속되지 않고 서로에게 공유된 추상적 개념이 있어야 서로 소통이 돼요. 이것을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공통된 사상체계지요. 그 이데올로기를 낳게 하는 소시민의 버릇을 ‘하비투스’라 하는데, 습관, 관습을 하비투스(habitus)라고 합니다. 스스로 특정 계급 속에서 살고 있다고 여기는 소시민들이 그 계급의 성향을 보여주는 반복적인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데 이것이 국가적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자기네들만의 삶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흔히들 국가 이데올로기를 낳는 것은 경제적 하부구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만 단지 경제적으로 한쪽은 착취하는 계급, 한쪽은 착취당하는 계급론으로만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이데올로기란 다양한 집단들이 나타내는 보편적 추구 내용이라고 보면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큰 성 바벨론이라고 이름 붙여지지요. 인간 세계 밖에 어떤 괴물이나 영적 짐승이나 악마가 있어 자신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들에 의한 세계, 인간들만 움직이는 세계, 인간들의 지혜와 노고에 의해서만 조성된 세계이기에 자신들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하나로 통합되어 모두가 다 잘 살 수 있도록 평화와 안전을 추구하는 의도들이 자생적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추상적으로 하나로 통합된 의식에 대해서 성경은 그것은 ‘큰 성 바벨론’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꿈꾸고 희망하는 하나의 세계상이기에 자발적으로 복종합니다. 이 마음을 요한계시록은 ‘짐승이 준 마음’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에서는 바벨론을 ‘짐승’이라고 합니다. 짐승인데 이 짐승이 어떤 짐승인가 하면 땅에 있는 짐승이 아니고 묵시적 세계에서 나온 짐승입니다. 묵시적 세계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고 했어요. 이 짐승은 땅에 있는 짐승이 아니어서 하이 브리드입니다. 몸체는 사자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고, 사람처럼 두 발로 서는 이상한 짐승이 등장합니다. 묵시 세계에서는 이처럼 혼합이 됩니다.

 

혼합이 되어서 ‘사자냐, 독수리냐?’ 라고 물을 수 없는 것이, 피조물이 보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배후에서 우리를 조종합니다. 그래서 경찰이 와도 체포할 수 없습니다. 실체가 있어야 체포를 하지요. 사상을 체포할 수 있습니까?

 

PC방에 가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초등생들이 게임을 하면서 악당과 싸운다고 욕도 하고 고함도 치고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누구와 싸우는 것입니까? 가상 적과 싸웁니다. 그 아이들이 나중에 어른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상 적과 싸우지 않으면 살맛이 없어요. 게임을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사는 보람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상대를 꺾어야 돼요.

 

누구를 꺾느냐? 요즘 정가에서는 안철수가 탈당해서 신당을 만든다고 하는데, 안철수 편은 문재인을 잡고, 문재인은 안철수를 잡아야 합니다. 왜냐? 그래야 살맛이 나요. 컴퓨터 게임처럼 누구를 쳐부숴야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저도 노모가 계시는데, 자주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심심해서 못 살겠다.”

 

이 말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멱살 잡고 싸울 상대가 없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적이 생겼습니다. 위층에 사는 할머니. 이제는 심심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면 “그 여자가 말이야 --” 하면서 위층 할머니에 대해 험담을 합니다. 저는 속으로 “살았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지요.

 

왜 시험을 치고 경쟁을 하고 서열을 매깁니까? 인간은 자기 존재를 위해서 적이 되는 타인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큰 성 바벨론입니다. 이것이 왜 그런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적 본성이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자가 아니어도 이미 환상적인 요소가 모자처럼 머리위에 있습니다.

 

이 영적 악한 기운을 사람들은 그때그때 역사적인 것으로 바꾸기에 자신에게는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소주 먹다 맛없으면 맥주 먹고, 맥주 먹다 맛없으면 양주 먹고. 의사가 보기에 이 사람을 알코올 중독인데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취향이 다른 뿐이라고 말합니다. 뭔가 영적인 것이 느껴지면 가시적인 것으로 바꿉니다.

 

꽃꽂이 하다가 재미없으며 골프 치고, 이것도 재미없으면 배낭여행을 해보고 계속 새로운 재미를 찾아 옮겨 다니는데 왜 그런가 하면, 내 자신에 대해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고 뭔가 여백이 있고, 잉여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뭔지 모르는 거예요.

 

이런 인간들이 큰 성 바벨론은 이루면 어떻게 되는가? 17장 2-3절을 봅시다.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데리고 광야로 가지요. 광야에 가면 묵시 세계가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사단이 나타났지요. 마찬가지로 묵시 세계에서는 광야가 모든 인간들도 악한 영적 존재로 번역되어서 나타납니다. 왜냐? 내가 바로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묵시는 묵시끼리 통하는데서 해석과 연결고리가 성사됩니다.

 

‘고맙다. 마귀야, 너 때문에 예수 믿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네가 나를 혹독하게 대해줬기에 나는 주님밖에 믿을 것이 없었다.’ 욥도 마귀가 와서 도와줬잖아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 아내는 이런 소리를 했고. 그러니까 성도뿐 아니라 불신자도 영적 존재입니다.

 

다만 불신자는 술이나 취미 등으로 스트레스를 풀지요. 우리도 불신자처럼 살 수밖에 없는 자인데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성령을 주셔서 이런 정황에 대해서 안목을 갖게 해주신 것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주의 증인 노릇을 하는 겁니다. 그들은 주체가 아니면서 주체 노릇을 하려고 하니까 세상 현실과 충돌이 발생합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만든 세상인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니까 세상에 대해서 몰라요. 밤이 왜 있습니까? 잠자라고 있는 거예요. 낮은 일하라고 있는 겁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이런 말을 하는가? 우리를 대표하시는 예수님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는지 보면 알아요.

 

17장 3절에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이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가? 5-6절에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호세아로 가야됩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에 있는 선지서가 그 당시 역사적 해석을 뛰어넘어 전 이방세계에 퍼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이제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니고 묵시적 안목으로 재해석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들어가지요.

 

요한계시록 1장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음녀’입니다. 호세아 1장 5절에 보면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처음에는 고멜이 아들을 낳지요. 이스르엘이죠. 다음에는 딸을 낳습니다. 이름이 로루하마인데, 그 의미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름을 누가 지었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런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런 저주스러운 이름을 주신 이유가 뭡니까? 이것은 이 이름 자체가 영적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준비하신 미래의 운명을 불순한 아내와 자녀를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즉 ‘이스라엘은 곧 음녀다.’

 

이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음녀, 즉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기에 언약을 어기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를 시범 조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당할 차례입니다. 그래서 ‘음녀’란 무엇인가? 언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음탕한 여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위배되는 것을 말합니다.

 

언약에 위배된다는 것이 신약에서는 어떤 의미인가?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이것이 음녀입니다. 왜냐? 언약의 완성이 예수님의 기능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언약에 위배되는 것이 저주 받을 일이라면 축복은 뭡니까? 축복은 없습니다. 호세아에서 축복은 없습니다. 그럼 호세아는 지옥 갔는가? 호세아 6장 1절 봅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 언약의 출발은 우리를 음녀로 규정하시고,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주님이 언약을 쥐고 십자가에 뛰어들어 자기 언약의 혜택을 받을 백성을 자신과 함께 3일 만에 일으키십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예수와 함께 죽은 자는 예수와 함께 살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성령 받은 우리끼리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 돌아갈 때 어떤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나는 음녀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잘난 척하면 안 돼요. 주께서 우리를 도로 싸매 주실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이 언약 요소에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대신 채찍 맞으시고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대속에 혜택을 입을 백성을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 불러내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불러내게 되면 그들은 누구를 만나는가? 성령은 반드시 십자가 지신 예수를 대변합니다. 십자가 앞에 세우지 않는 성령은 성령이 아닌 악령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게 하지요. 마치 도마처럼.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 주님이 보여주신 것은 못자국과 창자국이지요. 도마가 하는 말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호세아를 오늘날 신약에 그대로 적용시켜야 됩니다. 왜냐하면 호세아마저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바벨론으로 돌아가 봅시다. 17장, 18장 다 바벨론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막간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제가 지난 시간에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큰 통 안에 들어 있는 작은 통으로 설명했지요. 일곱 대접 이전 여섯 대접과 일곱 대접 막간에 일어난 사실들을 이야기합니다.

 

16장 19절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자연 세계를 박살내는 겁니다.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스가랴를 언급했는데 조금 더 해봅시다. 이방 나라가 하나님께 벌 받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요. 그럼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왜 하나님께 벌 받을 짓인가?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있는 곳을 그들이 공격함으로 말미암아 숨겨진 자기 정체를 폭로당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점을 보면 오늘날 우리의 사명과 기능이 막중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고요할 뿐 환상이나 묵시는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에 관한 것이 나오면 그들은 발짝을 일으킵니다. “광신도처럼 교회 돈 다 갔다 바칠 거야? 너는 멀쩡한데 왜 예수를 믿어? 착하게 되려고? 술 끊고 담배 끊고 싶어서? 그건 내가 인정해 줄게. 그보다 더 깊이는 들어가지 마라.”

 

이런 소리 들을 때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해져야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어요. ‘내가 주님 언약 안에 있으니까 내 주변에서 이제 짐승 된 주체를 드러내는 구나.’ 맞습니다. 그런데 내가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을 내가 조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세요. 그동안 신앙생활 하는데 전혀 핍박이 없어서 너무 심심해요.

 

사는 재미는 적과 싸우고 논쟁하는 것인데 내가 교회 다니는 것에 대해 전혀 방해도 없고 무관심합니다. 누가 핍박을 해야 ‘주님 이 어려움을 이기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라도 할 텐데 핍박이 없으니까 기도도 안 합니다. 불신자가 나에게 너무 잘 해줍니다. 핍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반은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말았어요. 성경에는 목 베인 영혼이 나오고 피가 뿌려지고 난리가 났는데 자기는 사지가 멀쩡하고 별 일 없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핍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구분하는가? 역사와 환상이 겹쳐지는 부분은 십자가 사건뿐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내가 핍박 받는 사건으로 위장하면 안 됩니다. 내가 핍박 받음으로 신자 된다고 위안을 삼지 마세요. 문제는 고요함 속에서, 그리고 주위에서 핍박이 아닌 친절하게 잘 대해주는 그 속에서도 어린양의 피 흘림에 고마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때려야 숙제를 하는 것이 버릇이 된 아들이, 때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숙제 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숙제하라고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숙제도 안 하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요. 이럴 경우에는 ‘내가 핍박 받아야겠다.’는 것은 바벨론의 속성이 나를 통해서 드러났다고 보면 됩니다.

 

남에게 핍박 받는 것만 생각했지 내가 현재 주님을 핍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거예요. 주님 증거해야 될 사람이 내 믿음 좋은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위장된 상황을 요청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전7:14)”고 했는데, 생각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말을 줄이면 한이 맺히거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무시로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사도 바울처럼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기도제목이 되지요. 그러나 초신자들은 자기 챙기기 바빠서 연출된 사건들을 기다려요. 우연히 굿하는 곳을 지나다가 구경을 하고 있는데 무당이 나를 알아보고 “여기 예수 믿는 사람있다. 더 이상 굿을 못하겠다. 철수하자.”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아, 나는 신자가 확실하구나.’ 또 점집에 갔는데 점이 안 된다며 “혹시 예수 믿는 사람인가요?”라고 나올 때, ‘아, 역시 나는 성령의 사람이구나.’

 

귀신한테 확인 받으려는 미혹에 빠지지 마세요. 사도 바울이 늘 강도의 위험을 당한 것이 아니고, 늘 핍박을 당한 것이 아니라 평안한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범사에 감사했지요. 그때마다 주께서 새로운 과제를 계속 주시는데,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바벨론화 되어간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세상이 바벨론화 된다는 것은 보편적 이데올로기가 서로 통용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 바벨론입니다. 똑같다는 거예요. 예수님께 관심 없고, 어린양을 무시하고, 편한 것이 좋고, 이웃끼리 사이좋게 지내고 이것이 바로 666이 서로 교통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666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이는데 모두가 공범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보니 ‘아, 내가 저러했었지.’라고 불신자들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래, 당신 마음 나도 안다.’ 왜? 나도 그럴 때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단이 등장해서 나를 핍박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고요함이 오히려 가장 우리를 시험하는 상황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17장 8절을 봅시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생명책 이야기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제가 요한계시록을 ‘잡곡 강정’이라고 했는데 구약 선지서의 내용을 다 가져다 놓았어요. 다 모아놓았는데 어린양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빠져나오면서 그동안 감춰져 있었던 배후(사단)들이 어떤 작용들을 하면서 인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지 그 실상을 지금 공개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적 언어로 묵시적 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단어를 가지고 특정인에게 적용시켜서는 안 됩니다.

 

9-10절에 보면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이것은 이 땅에 있는 군주들과 왕을 통해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꿈틀거린다. 이 세상의 모든 왕이 어린양과 대척관계 속에서 그들의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묵시 세계에 있는 사람만 감 잡을 수 있는 사실입니다. 왕과 세상 사람들은 행정적 직업 관료입니다. 괜히 억울하지요. 예수를 핍박한 것이 아니라 그냥 동사무소에서 호적등본 발부해 줬는데 졸지에 짐승이 되고 말았어요.

 

“당신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내가 왜 예수를 생각해야 되는데?”라고 나올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짐승이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짐승 취급 받는 사람들은 정말 억울하겠지요? 성실하고, 교양 있고, 양심적으로 살았는데 예수쟁이가 와서 마귀에 속했다고 하니까 황당합니다. “내가 마귀 들린 것이 아니라 네가 미쳤다.”라고 나올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서 직원들에게 짐승의 하수인이라고 욕할까요? 성경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해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귀한 것을 모르기에 발로 밟아버리기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말씀은 ‘전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가 만난 것도 천사들이 주선을 했지요.

 

요한계시록은 이미 동결된 상태고, 그들이 움직이는 것은 천사들이 손을 댈 때 움직입니다. 사도 바울이 움직이는 것은 성령이 움직이도록 한 거예요. 본인이 설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상 받으려고 다닌 것이 아니고 주께서 끌고 다니시기에 다녔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우리의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막 사세요.

 

평소에 하던 행세 있잖아요. 그대로 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럴 때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바벨론이구나.’ 하는 점을 깨닫게 하십니다. 어린양과 관련해서 세상은 짐승 노릇하는 것이지 나와 관련해서 짐승 노릇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과 좋은 친구로 지내면 됩니다. 그러나 어린양이 발설되면 그들은 발짝을 일으킵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지은 것이 아니고, 불심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가는 것이 세상일 뿐이다. 내 앞에서 예수 이야기하지 마라.’고 나오면, 그 이야기를 주께서 시켰다고 생각하고 우물 파지 마세요. 우물은 주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가 파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천사에 의해 뚫릴 뿐이지 우리가 뚫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를 통해서 주의 증인되게 하시는 것은 배후에 주의 성령과 천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만 합니다. 힘들다고 도망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뭐냐? 현 상태가 이런 식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7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주의 말씀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니까 쓸데없는 염려하지 마세요.

 

‘세상이 더러운데 주님은 뭐하시나? 이 더러운 세상을 빨리 전도해서 변화시켜야 할 텐데.’ 종은 가계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다 알아서 합니다. 다만 종은 손님이 오면 물건만 내주면 되지 자기가 가계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하시는데 왜 우리가 걱정을 합니까?

 

“목사님,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의 말씀이 응하는 식으로 될 겁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몸에 칭칭 감기도록 조치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증거임을 주의 지시가 있을 때 발설해서 주의 증인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18장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애통하고 일시에 무너진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시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시돈 사람들이 돈이 많다고 ‘내가 곧 신이다.’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선지서에 있는 말씀을 적제적소에 집어넣어서 이제는 시돈 사람만이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이라고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 죽이는 일에 참여했고, 우리도 한 때 내가 신인 줄 착각하며 살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믿고 싶지도 않았는데 주님 십자가 지신 것이 대신 죽음인 것을 성령께서 알려주니, 성령은 오직 십자가만 전할 뿐이고, 피로 씻어 흰옷 입은 그 세계만 크게 보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