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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제2강 [찐빵 쪼개기]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6冬(요한계시록)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제2강 [찐빵 쪼개기]

정인순 2016. 1. 16. 19:49

 

 

 음성2 

 

녹취:한윤범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요한계시록:생명의 신호

제2강 [찐빵 쪼개기]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 가운데 여러분이 기억해야 될 것은 역사와 환상 사이에서 환상이 없어져야 되는데 어떤 교집합 같은 겹쳐지는 지점이 반드시 발생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역사가 이것마저 역사 중에 하나라고 우기고 싶은데 막상 이쪽에 와서 이야기 들어보면 소통이 안 돼요. 뿌리가 다르다는 거죠. 보통은 연대기.

 

연대기란 말은 원인이 역사 속이라면 결과도 역사 안에 흔적을 남긴다. 역사에서 나온 모든 결과들은 그 원인이 역사 속에 있다. 역사 바깥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어떻게 행함에 따라서 결과가 나온 거죠. 그래야 희망이란 것이 실제성을 가지기 때문에. 했는데 결과가 안 나오면 희망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내가 이만큼 하게 되면 결과를 얻는 게 있다는 확고하게 그것이 진리로 수용이 될 때 뭔가 시도하는 보람이 느낄 게 아닙니까.

 

어떤 사람을 재판한다고 불러냈는데 성문이 열리지 않아요. 계속해서 열리지 않습니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란 책에 그런 내용이 나오죠. 분명히 불러놓고 죄인인지, 의인인지 재판해야 될 텐데 재판정이 열리지 않습니다. 끝. 그게 끝이에요.

 

역사주의가 1차 대전, 2차 대전을 낳았거든요. 힘과 힘의 대결. 그게 싫은 거예요. 역사가 전부가 아니야. 뭔가 있을 거야. 노벨문학상 이런 작가들은 이게 전부가 아니야. 또는 현실주의자들은 그게 아니야. 우리가 뭔가 놓친 게 있어. 놓친 걸 끄집어내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합니다. 놓친 것을 역사 속에 핍박 받으면서도 근근이 이어가는 살아있는 뭔가, 돈과 관계없이, 과학과 관계없는 순수한 무엇을 아직도 찌꺼기처럼 남아 있을 것이라고 노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기발한 예술작품이 유명세를 타게 되면 자본시장에 흡수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사람이 탈피하려고 연대기적 주체 말고 초월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봐야 끈적끈적한 돈 힘을 이길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네가 하나님 섬기느냐? 그럼 네 뿌리는 하나님이냐? 돈 아니지? 돈 없어도 괜찮지?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믿는 이유가 돈 잘 벌기 위해서 믿어? 그럼 네 뿌리는 하나님 아니야. 돈이야. 네 쪽은 돈 쪽이라고. 패를 잘 봐. 그러면 하나님 쪽에 선 사람은 누굽니까? 예수님 자신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전체니까. 역사와 환상 모두 주를 위하여 있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이 여기 개입한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전히 예수님은 미움 받을 수밖에 없고 만약에 내가 교회 가는 건 괜찮지만 우리 집안에 예수님이 쳐들어오는 건 우리가 용납 못해요. 혈연관계가 깨지기 때문에. 가정에 화평을 위해서 결혼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나는 화평으로 온 게 아니고 불화로 왔다면 예수님이 혈연 연대를 강화하는데 무슨 도움이 돼요. 아무 소용없어요. 나만의 소박한 연대기를 구성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죠. 소용없는 쓸데없는 예수.

 

그런데 겹쳐지는 것이 요한계시록 2장, 3장에서 벌써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에 일곱 교회가 나와요. 터키 동남쪽입니다. 순환구조로 돼있어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개가 고리 형상으로 돼있습니다. 전부 도는데 340킬로미터. 그런데 분명히 사도 요한 그 당시에는 역사적으로 있었어요. 분명히 역사인데 환상은 여기에 편지를 보냅니다.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사자는 마지막 때는 심판을 행사하는 사자에요. 목사 아닙니다. 교회를 부수기 위해서 옵니다.

 

사자가 하는 말이, 여기 에베소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일곱별과 일곱 촛대를 거니시는 이가 말하기를 이기게 되면 내가 너에게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겠다.

 

서머나에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말하기를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둘째 사망을 임하지 않도록 해주겠다.

 

버가모는, 양쪽으로 날선 검을 가진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에게는 만나와 알 수 없는 흰 돌을 주겠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불꽃같은 눈과 빛난 주석의 발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기를 이기는 자에게 세상을 철퇴로 다스리게 하고 새벽 별을 주겠다.

 

사데 교회는, 일곱별과 일곱 영을 가지신 분이 이기는 자에게는 흰옷을 입게 하고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나와요.

 

빌라델비아 교회에서는,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에게는 기둥이 되게 하고 예루살렘에 이름 새기고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한테는, 참되고 진실 된 한결같은 주님이 말하기를 이기는 자에게는 하늘나라 보좌에 앉게 하겠다.

 

그런데 그 주님이 없다면 남는 것은 뭡니까? 달랑 폐허가 다 된 지붕 내려앉아 사그라지는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 일곱 교회지요. 모든 연대기는 쇠퇴합니다. 인간도 나이 들면 죽으니까.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쇠퇴하고 소멸합니다. 왜 소멸하는지 이유도 몰라요. 과학에서는 텔레미어라 해서 DNA가 세포 내에서 복제하면서 텔레미어가 닳아지기 때문에 이것만 연장하면 오래 산다는 거예요. 오래 사는 게 욕입니다. 오래 살아서 뭐하려고, 뭐하려고? 그리고 죽어서 어디 가는데? 몰라요. 왜 죽음에 대해서 모르느냐 하면 안 죽어 봤거든. 죽어 본 사람만 죽음에 대해서 아는데 안 죽으니까 이런 논리, 저런 가설만 난무하지 실제로 죽었다가 살지 않은 이상은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참 성경에서 안타까운 일 중에 하나가 혈연관계의 한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았던 부자가 지옥 갔을 때 그놈의 혈연관계는 끈질기기도 하지, 내 동생이 있는데 나는 이왕 죽어서 버린 몸이고 동생이 아직 세상에 살아있는데 제발 나 있는 곳에 오지 말라고 거지 나사로를 보내셔서 이렇게 이야기해달라는 거예요. 형님 봤는데 형님 끝났더라. 지옥 가서 물 한 방울 없어서 애를 먹더라. 사우나는 엄두도 안 나고 온천놀이, 그건 안 되고 뜨거운 물에 영원히 못 빠져 나오더라. 네가 망해도 좋고 부도나도 괜찮은데 제발 지옥에는 오지 말라고 나한테 당부하더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들의 믿을까요? 그들의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네가 그렇게 한 환상은 너는 그런 환상을 어떤 역사적 사건에 근거해서 환상으로 조작하느냐고 이야기할 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성경책이 있으니까 구태여 거지 나사로 보낼 필요 없다. 성경 없이 그냥 거지 나사로 보내면 거지 나사로 왈, 또는 거지 나사로가 이렇게 이야기하더라, 또는 거지 아닌 나사로가 이렇게 하더라. 이렇게 되니까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로 모으자. 예수님은 이렇게 하더라.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 말하기를,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둘째 사망, 지옥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주겠단다. 못 믿으면 할 수 없고 믿으면 이상한 거고. 안 믿으면 정상이고 믿으면 이상한 거예요.

 

같은 아담 족속이잖아요. 같이 연대기 속에서 주체잖아요. 똑같이 원인, 결과만 따지는 인간에게 원인도 모르는 어떤 결과를 불쑥 믿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에요. 이건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아마 계룡산에서 귀신 받았던지 그 수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만약에 원인 없이 믿으면 그 사람은 졸지에 자기라는 게 날아가 버려요. 왜? 내가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내 행동을 낳으면 내가 여전히 주인공이 되지만 내 행동 없이 결과물로 내가 등장하면 나는 내 원인에 가입되지 못하고 내 원인은 바깥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내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나는 바깥에 있는 그분의 주장을 펼치는 대리인이 돼요. 그게 주의 증인입니다.

 

교회에서 기도했더니 교회가 부흥되었다. 그 교회는 본인의 자긍심과 명예를 드러내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건 주님과 관계없어요. 자기 연대기를 펼치는 사설 교회가 되지요. 그런데 일곱 교회의 특징은 개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나타나셔서 연대기적으로 역사 속에 원인이 없는 것을 이야기해버려요.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말하기를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결과를 보면 좋은데 문제는 원인에 결합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미치지 않고는 그것에 아멘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여러분이 요한계시록을 그래도 수련회 한다는 조금이라도 본 사람은, 제일 거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이기는 자’는 이에요. 그럼 우리는 뭐라 합니까? 만약에 이기는 데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보통 걱정이 아니에요. 못 이기면 어떻게 할 거예요? 조건이 이기는 자거든요. 이기는 자라 해놓고 조건이 죽도록 충성하라. 죽고 난 뒤에 이기면 무슨 소용 있어요. 죽기 직전에 이겨야지. 그래야 낙을 보지.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란 조건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는 완전히 졸아요. 못 이기는데.

 

제가 이 시간에 여러분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이기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이기느냐? 무조건 백 퍼센트 이기는 방법은, 가위바위보 할 때 상대방이 내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내면 돼요. 이게 요한계시록의 이기는 방법입니다. 상대방 보고 그 다음에 내가 내면 돼요. 가위내면 주먹 내면 무조건 이깁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상대방이 내고 얼음하고 굳어져 있어야 돼요. 시멘트처럼 굳어져 있어야 돼요. 마음껏 돌아보면서 놀리죠. 이쪽이 안 내도 말 못해. 얼어버렸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전체는 동결돼있는 책입니다. 미래도 없고 그 자체가 스톱됐어요. 마음껏 골라잡은 데로 내면 되는 거예요. 가위 내든지, 보자기 내든지.

 

이겼는데 누굴 향하여 이겼는지 회고하듯이 돌아보면서 보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땅콩 까먹어도 괜찮고 아이스크림 물고 봐도 아무 부담되지 않는 책, 세상이 이렇게 쉬운 책이 없어요. 11시에 밥솥은 눌려놨고 아침 되면 하얀 밥이 익어져 있는 거예요. 손댈 게 없어요. 주께서 버튼을 눌러놨습니다. 그래도 주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궁금해요? 밥솥에 창이 있어서 보게 되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사다리 식으로 내려와 있어요. “아하, 주께서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해서 나를 오늘날 구원시켰구나.” 그게 보인다니까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경로가 뭐냐 하면, 역사 속에 있다가 묵시로 사라진 예수님의 자기 공생애를 의미하는 겁니다. 유일한 환상적인 존재가 역사와 마주하면서 역사가 자기의 본색을 드러냈던 그 여정, 그런데 우리는 연대기 속에 사람이 예수를 죽였다고 했는데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숨겨있는 옛 뱀, 악마가 여전히 보이지 않은 채로 예수님을 공격해서 살해하여 죽음으로 돌려보냈다는 사실이죠. 그래놓고 인간 세계는 역사만 전부로 알기 때문에 마치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이 옛날이야기인 것처럼 지금 예수 죽었다. 어쩌라고? 옛날에 억울한 사람 있었겠지. 억울한 사람이 한둘이야. 나는 안 억울해? 그럼 내가 예수 게. 이런 식으로 다시 지나간 배가 지나간 바다처럼 흔적 없이 함몰되지요.

 

그렇게 해서 얻을 게 뭐냐? 그렇게 얻으면 자기가 주체로 고정됩니다. 다니엘에 보면 그걸 우상화라 합니다. 내가 금신상이에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드디어 나타났다. 너라는 짐승의 졸개야. 이 세상 살면서 예수님에 의해서 폭로당한 짐승의 정체가 오늘날 우리 생을 통해서 그대로 내뱉어지고 반복되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 있죠. 우상이란 뭐냐? 하나님이고 예수냐는 의미 없어요. 나를 위해서 움직이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신이 있음으로 나는 더욱 더 부각되지요.

 

어느 날 설교에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이 세상은 기마전하는 것 같다. 어깨에 메고 한 사람을 돋보이게 만들고 옆에 사람들은 받쳐주지요. 주체가 돋보이면서 밑에 사람들은 내가 원했던 사람, 나를 돋보이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끄집어냈고 우리는 거기에서 짐승노릇하고 있고 이게 잠시나마 황제인 양 행세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를 위한 놀이문화. 그래서 어느 자리에서나 자기가 돋보이지 못하면 자진해서 등록 안 합니다. 자기가 돋보일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죠. 골프 친다고 프로한테 걸려서 돈 잃고 난 뒤에 골프 안 해. 화투 타짜 만나서 그것도 안 해.

 

항상 피해가고 도망가는 장소는 뭐냐? 아직도 내 사랑. 그것이 계속 인식되는 장소가 자기가 마침내 도달하는 장소입니다. 그걸 두 자로 도인, 도 닦는 사람. 기도원에 가면 그런 사람 많아요. 기도원 원장치고 기도 못하는 사람 없어요. 그런 사람 우리교회에서 기도하라면 벌벌 떨 거예요. 우리교회 기도 잘하는 사람 많아요. 언제부턴가 기도가 끊어졌어요. 전부 다 애써 사양하고 있습니다. 환상의 내용을 끌어당기기가 상당히 부담이 되거든. 역사는 되는데. 당회로부터 어린이 주일학교까지 교회에 대해선 잘하는데 우리는 교회는 용납이 안 되니까 환상을 끌어당겨야 되는데 돈 번다고 언제 환상을 끌어당길 시간이 있어야지. 기도할 내용이 없어요.

 

이기는 방법은 이미 세상은 동결된 겁니다. 그것을 한 장면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건 주님이 활동하는 고정된 무대장치가 됩니다. 그걸 미장센misa en scene이라 합니다. 미장센이란 무대장치인데 한 세트에 한 장면에 다 동결되는 것, 전부 얼어붙은 것, 미래, 과거, 현재가 꽁꽁 얼어버린 것, 이 세상은 무대장치에요.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이미 구원받은 자로 유람하듯이, 오랜만에 복음 나옵니다. 놀려가듯이 소풍가듯이 이 세상을 거니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성도의 삶입니다. 여유를 가지시고 편안하세요. 내가 기도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동결됐기 때문에. 우리가 그 속에서 내가 본의 아니게 짐승노릇하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이런 죄인도 구원받았잖아요. 죄인으로 거기에 들어가야 돼요.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을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의 시조거든요. 오백년 도읍지 고려의 폐허를 길재란 사람이 돌아보면서 산천은 똑같은데 인재는 없네. 인재가 왜 없어요. 안철수가 있는데. 폐허를 보는 거예요. 다른 말로 풀이하면, 저렇게 해서 망했구나. 이건희 회장은 저렇게 해서 침대에서 생일을 보내는구나. 저렇게 아옹다옹 돈, 인기 얻겠다고 싸우는구나. 그래서 망해야 되는구나. 그걸 돌아보면서 보는 그 재미가 있어야 돼요.

 

미장센 속에 동결된 세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숫자화라고 해요. 666, 144000, 7, 1000, 모든 숫자는 동결된 거예요. 동결된 것을 ‘얼음땡’하는 것은 인간은 못합니다. 동결됐으니까. 얼음땡은 천사가 해요. 그래서 마지막 때 인간은 손 놓고 천사만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개인은 없습니다. 집단적인 고유명사는 없습니다. 집합명사밖에 없어요. 집합명사도 단체가 없어요. 누구누구에 속한 그걸 인치심, 마귀한테 속했느냐, 주님한테 속했느냐? 누구에 속한 집단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슬슬 요한계시록 전체가 쑥 들어와야 돼요. 그래야 요한계시록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이란 주님을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내가 주님한테 소유 당하는 것도 인이 아니에요. 소유 당할 내가 없어요. 내 안에 주님의 작업이 활동하는 관계를 인, 도장 받았다. 보통 도장 찍으면 서류에 도장만 나오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도장은 얼마나 센지 도장을 찍으니까 종이가 다 찢어지는 거예요. 자아가 찢어지고 도장만 있고 주님의 관계만 남고 없는 거예요. 우리는 뭐냐? 하나의 기능인이 되는 겁니다. 그것마저도 우리는 개인이 없고 집단이 없으니까 숫자로 표기해요. 14400.

 

숫자를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보통 인간의 세계에서 역사는 1-2-4-8-16 나와요. 주역, 동양철학에 이렇게 해요. 서양철학도 비슷하게 이야기해요. 1,2,3,4,5,6 되는 것은 바벨론에서 천문학이 발달해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문제는 ‘0’이 없어요. 그런데 환상에서는 1에서 2가 되는 게 아니고 2에서부터 출발해요. 2-7-1000-1로 돼버려요. 그리고 2-12-144000이 되고 또 중간에 12*12도 있어요. 이것은 창조 안에 언약이란 환상이 고정된 채 이건 고칠 수 없고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나란히 가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진도 빨리 나가는 건 좋지 않으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역사밖에 없는데 역사에 환상이 오게 되면 배척하게 돼있어요. 역사 속에 환상이 숨어들어가거든요. 숨어들어간 환상이 어떻게 나오느냐는 문제입니다. 지금부터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기원전 1050~1010 사울왕, 1010~970 다윗의 통치기간이고, 970~930 솔로몬의 통치기간이에요. 전부 40년씩이에요. 930~910에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집니다. 이쪽을 남쪽 유다나라로 보고 이쪽을 북쪽 이스라엘로 본다면, 여기에 르호보암, 아비얌이 나오고, 북쪽은 여로보암, 나답이 나와요.

 

둘로 왜 쪼개는가? 찐빵 쪼개기인데 찐빵을 둘로 쪼개면 그 안의 앙꼬가 나오지요. 호떡을 둘로 쪼개면 꿀물이 나오지요. 쪼개면 선지자가 나와요. 선지자가 나오기 위해서 나라는 둘로 쪼개져야 돼요. 왜 남북으로 쪼개졌는가? 진짜 하나님의 언약과 결합되는 것은 역사적, 연대기적 나라가 아니고 천상회의와 관련된 선지자가 지속적으로 그 안에 언약을 성취하는 모습으로 담겨져 있습니다.

 

그 다음에 910~850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 북쪽은 바아사, 엘라, 오므리, 아합. 이렇게 쪼개지면서 엘리야, 엘리사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은 문서 선지자 아닙니다. 기적 선지자에요. 기적 선지자는 미래와 관계없습니다. 진짜 문서는 이제부터에요. 문서는 옛날에 이렇게 잘못했지 않느냐는 증명서류가 돼요. 문서는 문서 내용대로 신약에 다 이루는 겁니다.

 

그 다음에 850~800에 드디어 문서 선지자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요엘 선지자. 벌써 요엘서 보면 겁납니다. 마지막 때에 해와 달빛을 잃어버리고, 막 이렇게 나와요. 해와 달빛을 잃어버린다는 건 자연세계가 찢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구약은 찐빵, 신약은 막(membrane)이 나와요.

 

신약에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막을 천사가 찢으면서 이쪽에는 역사가 깨지고 저쪽에는 막간, 요한계시록에 보면, 역사 작살내는 군대 사이사이에 막간이 있는데 그 막간은 역사를 찢어버리면 그 결과물로 속 내용물로 환상적인 모습으로 전개돼있습니다. 역사는 작살나고 천국에 있는 백성들은 좋다고 웃고 있고. 그게 교체해서 나와요. 막간인 역사 깨지면서 점점 더 등장하죠. 역사가 깨지면 깨질수록 숨어있던 악마의 정체가 나오고 악마의 마지막 팔자, 운명까지 나와요.

 

막간의 마지막이 뭐냐? 바로 천국과 지옥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막간일 뿐이에요. 이미 동결된 이미 끝나버린 거예요. 십자가 전기밥솥은 이미 눌러버렸어요. 우리는 그냥 찌이익~ 소리 들으면서 기다리면 영원히 삽니다. 생명나무에서. 보는 것도 못해요? 전기밥솥 보면서 벌벌 떨면 요한계시록 보지 마세요.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을 전기밥솥으로 봅시다. 우리는 실재하잖아요? 실재하면 우리는 IS여성대원이고.

 

850~800에는 아하시야, 아달랴(왕은 아니고 못된 여자), 요아스, 북쪽은 여호람, 예후, 여호아하스. 이 시대에 요엘 선지자. 800~750 아마샤, 웃시야 때에 네 명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요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북쪽 왕은 요아스, 여로보암2세, 스가랴. 그 다음에 750~700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북쪽은 마지막으로 므나헴, 베가, 호세아. 이때에 미가 선지지가 나와요. 미가 다음에는 하박국, 스바냐 나오는데 스바냐는 요한계시록과 똑같아요. 요한계시록 볼 필요 없이 구약 선지서 보면 아주 치열하고 연대기적 역사를 박살냅니다. 선지자 모르고 요한계시록으로 바로 들어가면 왜 주께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몰라요.

 

여러분이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것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면 선지서에 겁먹을 필요가 없어요. 이스라엘이 받은 계시기 때문에 난 이스라엘 안 해. 그렇게 험악한 꼴은 보지 않겠어. 그러면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메시아로 와서 이스라엘 속에 십자가란 사건을 남기고 사도 바울이 온 동네 다 돌아다니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니까 이스라엘 안 되면 작살나는 수가 있어요. 이스라엘의 메시아며 심판주거든요.

 

그래서 겁먹고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데 문제는 신약에 오면 그게 끝이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 만들어놨는데 교회를 찐빵처럼 잘라버립니다. 교회 와서 안심하고 있는데 교회를 두 조각내버려요.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의 옛날 실패를 되풀이하는 거죠.

 

그 다음에 750~700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그 다음에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호야김, 시드기야로 끝납니다. 거기에 맞추어서 선지자들이 나타납니다. 정확히 보게 되면 이래요. 이건 그냥 넘어갈 게 아니고 중요하다. 선지자가 중요하거든요. 850~800 요엘, 800~750 요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750~700 미가 선지자, 700~650 나훔, 650~600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가 등장합니다. 600~586 시드기야 때 오바댜.

 

이렇게 등장한다는 말은, 찐빵이 쪼개져서 앙꼬 되는 선지자들이 불쑥불쑥 바깥으로 튀어나온다는 거예요. 튀어나오면서 한 결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우상 섬겼기 때문에 망해야 된다. 그리고 덧붙여서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망한 것은 시범 조다. 이제 이방나라 죽었어.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합니다. 그 다음에 586년에 드디어 유다나라가 끝나고(다니엘, 에스겔) 난 뒤에 스룹바벨 때(537년) 학개, 스가랴. 458년에 에스라, 445년에 느헤미야, 말라기로 구성돼있지요.

 

그래서 성경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 나라가 있었고 르호보암, 여로보암 시대에 나라가 둘로 쪼개지면서 찐빵이 찢어지면서 앙꼬가 나오면서 역사에 온 천지에 다 튀기는 거예요. 나라만 망하는 줄 알아요. 자연세계도 망한다. 자연세계가 다 찢어지는 거예요. 걸레가 되고 하늘의 별 다 떨어지는 거예요. 계속 이야기하면서 드디어 이스라엘 역사가 망합니다.

 

망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 망했을 때 바벨론이 너희 여호와 믿는다고 까불다가 힘센 우리 신에게 잡혀서 고소하다고 했을 때 다니엘이 하는 말이, 잘못 건드렸다. 너희들이 이스라엘을 건드렸기 때문에 이제는 너희들 차례다. 그 바벨론이 짐승의 대표 나라가 됩니다. 결국은 여기서 신약에 오게 되면, 바벨론, 메대파사(페르시아), 헬라 마케도니아, 마지막 로마, 이렇게 되면 역사는 동결됩니다.

 

왜 동결되는가? 역사의 주인공인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십자가에서 다 이뤘기 때문에 더 이상 연대기는 의미가 없어요. 오래 끄나, 안 끄나 간에 천국이냐, 지옥은 이미 판결나버렸어요. 쪼개진 찐빵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안 쪼개지느냐 그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결국 내가 너를 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너 말고 너를 쪼갠 내가 생각한 너를 그 속에서 나에서 나를 뽑아내는 그 작업을 주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안 뽑히려고 애를 쓰지요. 소박한 연대기 속에서 내가 이만큼 올라오는데 그동안 공부 많이 하고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습니까. 그런데 내가 수고하지 않고 주님께서 은혜로 만들어낸 나를 내 속에서 끄집어내는 거죠.

 

주님을 둘러싼 우리는 뭐가 되느냐? 괴물이죠. 괴물 속에 갇혀있던 주님 안의 나. 이렇게 보면 로마서 다 풀립니다.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괴물, 행함으로 구원 얻고자 하는 아브람 속에 창세전부터 약속된 아브라함을 끄집어내는 주께서 아브라함을 찾아갔기 때문에. 야곱이란 괴물 속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는 것은 주께서 찾아갔기 때문에 그래요. 이삭도 마찬가지고.

 

어쨌거나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역사는 반드시 필요 있다는 겁니다. 70이레 논문 발표하니까 뭐라 하는 거예요. “당신은 역사를 필요 없다 하네.” 이걸 몰라. 역사 안에 들어온다. 역사 바깥에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가 종교적 상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역사 끝나고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이미 환상의 세계는 역사 안에 들어있어요. 누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느냐? 천사가 마실 걸 줬는지 알아요? 바로 괴물 안에 주의 영이 임한 사람이 했는데 주님은 그걸 너로 인하여 내가 물 마신 걸로 쳐주는 거예요. 이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주님 올 때 초라하게 온 것이나 오늘날 우리가 초라하게 사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초라하게 산다고 묵시적 존재가 아닌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그냥 사세요. 어차피 구원 안 될 것, 나댄다고 구원되는 것 아니거든요. 그럴 것 같으면 괜히 나대서 교회에 돈 날리지 말고 그냥 사시라고. 그냥 살아도 편하시거든 그냥 사세요. 편한 이유가 두 가지 있지요. 환상을 무시해서 편한 경우와 환상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편한 것, 어느 쪽이 좋은지는 알아서 하시고.

 

원인 없는 것으로 인하여 구원이 된 겁니다. 주님이 어떻게 했는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는 주님의 공생애가 대표로 보여줬고 남은 것은 주님의 공생애와 오늘날 우리의 삶과 그 가교역할은 성령이 하고 천사가 그렇게 해요. 그럼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살았는데 그 산 것이 어떻게 내 죄를 용서하고 나를 구원합니까?

 

그건 천사가 그때그때마다 우리의 삶의 상황 속에 손댑니다. 어떻게 손대는가? 뜯어내요. 뭘? 종교적인 습관과 우리의 관행, 교회 다닌 습관들, 많이 다녔으니까 의롭다고 착각하는 그런 것들을 뜯어내지요. 뜨드득 뜯어내요. 뜯어내 보면 우리 안에 괴물이 그동안 장악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그것은 우리가 행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한 박자 늦추고 가위, 바위, 보해요. 이기는 자라는 주의 말씀이 이미 우리 속에 들어오면 이미 이긴 자로 변하고 말았어요. 주의 말씀, 요한계시록이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이긴 자가 되는 거예요. IS여성대원이 되는 겁니다. 오늘 꿈에 IS여성대원이 되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바로 찐빵을 쪼개면 거기서 하나님의 언약적인 선지자가 튀어나온다. 단 쪼개면서 이스라엘 역사는 작살납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의 연대기적 소박한 인생은 작살났어요. 찢어집니다. 하지만 그 찢어짐 속에서 아파하시 마시고 예상 못한 기쁨이 나와요. 아하, 따로 준비해놓았구나. 난 쓸데없이 내 인생 상당히 소중하다고 여겼는데 나보다 더 귀한 나가, 주께서 나한테 쏙 집어넣었어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나는 천국에 못 갑니다. 여기가 단절돼야 돼요. 십자가에서 나는 스톱이 돼야 됩니다. 지금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는 나라는 것은 이건 내가 아직 죽기 전에 일방적으로 상상한 거예요. 이렇게 천국에 가면 이게 나의 세계가 되지 주님의 세계가 안 돼요. 나의 세계가 되면 어떤 오류가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사랑하는 혈연관계에 있는 딸과 아들이 지옥에 있다면 자기 혼자 천국 가면 어미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천국에 살면서 가슴이 찢어지지요. 이게 천국입니까? 지옥 생활이지.

 

나의 소망으로 간다고요? 아니에요. 나의 믿음, 소망, 사랑, 전부 다 죽음과 더불어 삭제 당합니다. 동영상 완전히 없애버려요. 누구라도 복구 못합니다. 그리스도로 죽고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주님이 창세전에 준비된 나로 새로 출발해요. 십자가로 죽고 이제는 예수의 것으로 다시 사는 거예요. 로마서 6장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데 조건이 있어요. 내 주체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주체라고 증거하는 지체로 사는 겁니다. 이걸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런 존재가 된 상태에서 지옥 같은 세상에 우리를 집어넣으니까 우리는 즐겨 기쁘게 나는 죄인 중의 괴수 맞는다고 허허 웃고 있는 거예요. 저런 죄를 나도 지을 수 있는데. 그걸 자랑 삼아 말이죠. 나도 환경만 받쳐주면 저런 죄를 지을 수 있는데. 빵을 훔쳐? 나도 배고프면 얼마든지 훔칠 수 있는데.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나도 돌 많이 쳤는데.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이나 못된 이야기가 나의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나도 연대기적으로 자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주께서 오셔서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내 속에 들어온 주님의 자기 작용을 자기가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 작용을 증거하는 주님만 증거하는 그러한 증인으로써 천국에서 면류관도 반납하고 사는 겁니다. 복음 뭐 있어요. 복음 이거에요. 나라는 것은 다리가 끊어졌구나. 이게 복음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새로 공급받은 나를 보는 거예요.

 

그게 사도의 시선에서 점점 올라가게 되면, 마지막으로 이것만 보고 마치겠습니다. 교재 4페이지, 안목의 나열. [현실 속에서 인간이 형성한 안목] 일곱 교회, 사도 요한 밧모 섬에 갇혔다, 안 됐다, 불쌍하다, 이거죠. 그러다가 잘 먹고 잘 산다, 바벨론이다. [현실 속에서 배척받은 사도의 안목] 밧모 섬에서 고생한다, 두 증인이 순교 당한다, 그거죠. 더 나가야 돼요. [천사의 안목] 활동해야 돼. 그런데 활동이 끝났어요. 이게 예수님의 안목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거예요.

 

전쟁을 시작한다고 알려주는 걸 일곱 인, 활동 진행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일곱 나팔, 활동이 끝났어, 시마이,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황이 일곱 대접. 그리고 일곱 대접 연속된 것이 마지막 요한계시록 천국과 지옥. 우리는 왜 안 보이는가? 육신 때문에 안 보이지요. 오늘 죽으면 되지, 뭐. 오늘 죽어 낙원에 가면 다 되지요. 육신 때문에 가려서 안 보이는 겁니다. 아직까지 주께 데려감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은 받아놓고 전기밥솥 눌러놨는데 우리는 마음껏 공개된 영적 전쟁과 진행 상태를 보고 완료된 전쟁이 끝나버린 것을 한꺼번에 파노라마처럼 다 보고 거예요. 예수님의 안목이 우리의 안목입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