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39 -주님의 셀카봉 / 150907 본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9 - 주님의 셀카봉 15,09,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25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이런 7가지의 많은 관계가 있는데, 우리는 본의 아니게 직면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를 만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구조 안에 우리가 놓여있는 처지입니다. 그 첫 번째 관계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라는 겁니다. (잠 13:24) 초달(楚撻)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개역한글판) (잠 29: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 사랑하니 때린다 !! 우리는 자식을 너무 사랑해서 때리지 않는다고 보는데, 그런데 여기 성경말씀을 보니 그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으니, 즉 미워하니 때리지 않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대로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반드시 때리게 되어있다는 것인데,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데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데 말이다. 그것이 교재 125페이지 이하에 나와있는데, 계속해서 살펴보자. ** 때리지를 않으면 그 자식이 부모를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즉 어리석은 자식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증거가 뭘까요? 그게 잠언서 19정 26절에 나오는데, 즉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속성이 누구에게 있다는 겁니까? "이미 자식에게 있으니, 그러니 너희는 그것을 간파해서 어릴 때부터 초달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잠 19:26)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그러니 자식에게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요소가 있다는 말인데, 물론 자식이 커서는 때리지를 못하니 어릴 때부터 때려야 하는데, 그렇게 자식에 부모에게 맞음으로서 무엇을 배우게 되는고 하니, '나' 라는 것이 자기 몸뚱아리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나' 라는 것은 없는데, 그러니 '나' 라는 관계는, "내가 어디서 누구로부터 태어났으며, 누가 나를 돌보아주는가?" 라고 하는, 그런 모든 것을 다 포함해야 비로소 '나'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냥 자기 몸 하나 달랑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아비와 어미는 장애물 !! 지금 교재 125페이지를 하고 있는데, 그러면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식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아비와 어미는 내가 나 되는데 있어서 장애물이 된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 몸만이 자기인데, 그러니 부모는 거기에 방해요소이기에 쫓아내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저리 가세요" 라고 하면서, 마치 물건을 하나 치우듯이 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동양윤리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삼강오륜에도 그런 것이 있는데,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는 게 말이다. 그리고 신라 화랑도의 세속오계에도 보면 뭐라고 하는가? 먼저 임금에게 충성하고, 그 다음에 부모를 섬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싸움에서는 물러나지 말고, 죽여도 가려서 죽이라고 하는데, 전쟁을 하는데 무슨 그런 정신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그러면 이런 우리나라의 과거 가르침과 잠언서가 일치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물론 성경에 대한 오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언제나 가정보다는 국가가 먼저인데, 부모보다는 나라가 먼저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런 성향이 강렬한데 말이다. 마치 하나의 뇌처럼 움직인다는 것이다. 뇌가 참 신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손가락을 움직여도 뇌가 알고 발가락을 움직여도 안다는 것이다. 이게 총괄 시스템이 되어서, 제 각기 떨어져 있어도 뇌는 다 안다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눈이 손더러 쓸 데 없다고 하지 못한다" 라고 하는데, 이렇게 총괄체제가 되어서, 그러니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할 때만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고전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 하지만, 인간은 이미 부속품 !! 이것을 마귀가 알고 지상에서 국가를 가지고 흉내를 내는데, 그래서 여자와 후손과 뱀의 후손이 일대일로 붙는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어디를 가도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데, 자기는 그런 부속품이 되는 것이 싫다고 외쳐도 이미 부속품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에 속하는지, 즉 "여자의 후손인가? 아니면 뱀의 후손인가?" 라고 하는, 그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요즘 여자들이 남자에게 애교를 떤다고 "오빠, 나 귀신 꿈을 꾸었어" 라고 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하는데, 잘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즉 "나 무서워. 그러니 보호해 줘" 라고 하는 의미인데 말이다. 그러면 귀신이 어디에 있는가? 학교에서 생물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쳐주는가? 표본실에 가면 포르말린에 그 귀신이 담겨져 있느냐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과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데, 즉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보이지 않는 귀신은 왜 자꾸만 요즘 같이 과학이 발달해도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의 대화 속에 등장하느냐는 것이다. "오빠, 나 귀신 꿈을 꾸었어. 무서워. 전화해 줘" 라고 말이다.
◈ 항상 경계선을 긋는 인간들 !! 여기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자들이 이미 언급했는데, 즉 "인간은 과학적으로 아는 것에 여분의 것이 더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항상 말이다. 그것이 욕망의 특징인데, 즉 인간은 무엇인가를 가지게 되면, 그렇게 가지는 순간 경계선을 쳐서, 그 경계선 안의 것은 가졌지만 그 바깥의 것은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유발하는 것이 곧 인간 자신들의 욕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을 내가 가졌어" 라고 하면서 선을 긋게 되면, 그 선 바깥의 것은 다음에 가질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 목표점이 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까, 이미 가졌다고 했을 때, 그것이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 현실은 이상하게도 경계선을 긋게 되면 그 현실은 불만족스러운 현실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충족되지 않는 현실, 미진한 현실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그냥 받아서 누리면 돼 !!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줄을 긋지 않으면 되는데, 즉 그냥 누리고 받으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주는 것을 받아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 나의 현실인가?" 라고 하면서 경계선을 긋는고 하니, 인간의 소유욕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주신 것만으로 감사하는 게 아니라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데, 왜 그런가? 인간은 어릴 때부터 자기 것을 가지고 '나' 라고 자꾸만 지칭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부모가 왜 있는가? "너의 것, 즉 너 이전에 누군가로 인해서 네가 생겼다" 라는 것을 자식들에게 훈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 라는 것은 무엇인가? 달랑 몸뚱아리 하나만을 가지고 '나' 라고 하고 말고, '나'와 연계가 되어있는 것 안에서 '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부모 밑에서 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오직 하나님만이, 실효성 있는 후견자 !!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그 특징이 고아와 과부라는 것인데, 그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아무도 돌보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즉 후견자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 지상에서 후견자를 다 없애고 말았는데, 왜 그런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유일한 실효성이 있는 후견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한데, 말로만 하는 성과도 없는 후견자가 아니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후견자 제도 중의 하나가 바로 '희년(禧年)' 이라는 것인데, 즉 '기쁜 날' 이라는 것이다. "7×7+1=50" 라고 되는데, 그게 구약성경인 레위기에 나온다는 말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성경을 보세요" 라고 하는 것은, 물론 내용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아는 내용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특이한 것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레 25:10) 제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 성경의 특이성 !! 성경의 그런 특이한 것이 진짜 자기를 아는 힌트가 되는데, 성경에서 이렇게 50년이라고 하는 것이 특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한 것도 특이하고 말이다. 그렇게 보면 성경에서 특이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물론 선악과나무를 심어놓고 나서 따먹지 말라고 한 것도 매우 특이하고 말이다. 우리는 선악과를 심어놓았으면 당연히 따먹으라고 하는 것인 줄로 아는데, 하지만 따먹지 않는 것이 은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먹으면 안 돼!" 라는 게 은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니 주제 파악을 해라" 라고, 즉 "니 경계를 지켜"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경계를 지키게 되면, 그렇게 해서 경계 바깥에 있는 선악과가 유지가 될 때, 바로 그것이 진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그 선악과를 놓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된다는 말이다. 선악과가 유지되지 않으면 말이다. 그러면 천국에 징계가 있겠는가? 징계가 이미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징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징계가 없는가? 없는데, 아무런 곳에서나 오줌을 눠도 징계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쁜 짓을 해도 징계가 없는가? 물론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나쁜 짓이라고 여기는 것도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되기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천국에 가면 참 좋겠다" 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말고 지금부터 그 어떤 짓을 해도 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 천국이 성령을 통해서 이미 삽입이 되어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주님은 그것을 소급해서 축복으로 간주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만이 알던 바깥 세계에서, 여기 교재에서는 그것을 '구조' 라고 이야기하는데 말이다. 그러한 구조에게 우리가 소속이 될 때, 그게 진정한 자기 자신의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결코 자기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구조적으로 우리는 징계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구조가 우리 삶의 터전인데,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부모들은 생판 처음 세상에 나온 자녀를 천사인 줄 압니다. 따라서 그냥 내버려두어도 자기 자신이 훌륭해서 잘 사는 줄로 오해해요. 여기에 구조가 나오는데, 이 구조에 대해서 여러 번 강의를 했기에 더 이상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오늘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서만 하겠는데 말이다. 그게 교재 127페이지까지 나오는데, 그것을 간추려서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있어서 !! 잠언서 19장 26절에 보면,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런 자식은 어디서 태어났는가? 구박을 받고 쫓김을 당하는 자기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기 속에 있는 것이 덩어리가 되어서 바깥으로 튀어나왔는데, '제2의 나' 라고 할까? 그러니 다시 자기 속에 집어넣으면 그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아' 라는 것은 몸뚱아리 하나가 있다고 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자식을 낳고 키워봐야지 뭐라고 하는가? "야, '나' 라는 것이 이렇게 깊은 구석이 다 있네" 라고, 물론 좋은 의미가 아닌데 말이다. 자식을 하나 낳았는데 참으로 예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예쁜 자식이 어디에서 나왔노?" 라고 하는데, 그런데 동생을 낳았는데 참 못되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못난 자식이 어디에서 나왔노?"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안에 예쁜 자식과 못난 자식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들어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안다는 것이 반칙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이 아니라, 미처 모르는 '나' 안에서 그 일부를 임시적으로 '나' 라고 여길 뿐이라는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다 파악하지 못하는데, 그 일부가 '나' 라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조금 어려운 내용이라서 그림으로 그려보면, 앞서서 자식이 아버지를 구박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몸만 있으면 그게 곧 자기 자신인데, 그러니 그 바깥에 있는 엄마와 아버지의 존재도 다 귀찮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달라고 하면서 구박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그 자식이 누구의 몸에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몸에서 나온 자식인데, 그런데 그때 부모는 자식이 품고 있는 그 깊이를 모르고, "저런 예쁜 자식을 누가 낳았지? 역시 내가 낳았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예쁜 자식을 자기로 소환을 시켜서, 결국 "괜찮은 내가 괜찮은 자식을 낳았다" 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데, 즉 '나' 라는 것을 자식까지 포함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제 아무리 자기를 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부이고 하나의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낳은 자식이 아무 못된 자식이라고 하면, 당장에 "저런 못난 자식을 도대체 누가 낳았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식을 누가 낳았는가? 역시나 자기가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못된 자식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다는 말이다.
◈ 이삭과 리브가의 경우에 !! 그러면 여기서 예쁜 자식을 야곱이라고 하고 못된 자식을 에서라고 한다면,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는 누구를 좋아했는가? 에서보다는 야곱을 더욱 좋아했는데,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성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분명히 두 명의 자식이 다 리브가의 몸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리브가는 평생을 살아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서와 야곱을 차별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나' 라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하는 행동, 즉 자식을 낳았으니 그게 행동이라는 말이다. 그런 자기 행동을 통해서, 그것을 반추해서, 즉 거기에 비추어봐서 "나는 이렇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못난 자식을 보고는 "나가 죽어라" 라고 하고, 예쁜 자식에게는 "나하고 같이 살자" 라고 하는데, 그렇게 취사선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부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야, 내 몸에서 저런 못된 자식이 나올 리가 없어" 라고, 즉 "내 몸에서 저주를 받을 에서가 나올 리가 없어" 라고 말이다. 리브가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자식이 두 명이 있는데, 하나는 천국에 가고 다른 하나는 지옥에 간다고 하면, 그리고 자기는 천국에 간다고 하면서, 천국에 가서 과연 기분이 좋겠느냐는 말이다. 예쁜 자식하고는 천국에 같이 오고, 못된 자식은 지옥에 간다고 하면, 그러면 천국에서 과연 기분이 어떠하겠느냐는 것이다.
◈ 자식이 부모를 낳기에, '→' !!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면서 수준을 어디까지 올려야 하는고 하니까, 못된 자식이 지옥에 가도 마음이 편한 수준까지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 수가 있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왜 보는가? 그런 경우가 있으니 본다는 말이다. 자기 자식이 지옥에 가는데 왜 기분이 좋은가? 그것은 그 자식이 자기의 자식이 아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자식이 부모를 낳았는데,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야곱과 에서가 또 자식을 낳는데, 야곱은 12명이나 되는데 말이다. 리브가에게는 손자인데, 그 손자들이 점점 자기가 미처 몰랐던 자기의 모습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삭이나 리브가의 경우에 말이다. 그래서 자식은 일종의 '화살표(→)' 역할을 하는데, 뭔가 지시하는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여기에 있고 천국은 저기에 있다면, 그러면 사다리가 어떻게 되는가? 자식들이 그 사다리가 되는데, 그래서 자식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어디까지 가는가? 천대 손을 지나고 만대 손을 지나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 다윗의 자손이여 !! 그래서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그리고 그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소경들이 예수님을 보고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이 오게 되면, 그 자손의 요소가 먼저 태어난 선조에게 부분적으로 할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부가 모자이크가 된다는 말이다. (마 9: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그러니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알고 싶으면 부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봐야하는데, 그러면 그게 훨씬 더 자기 자신의 원래 모습에 가깝다는 것이다. 만약에 자식이 하나밖에 없다고 하면, 그것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만 허락했다고 여기면 되고 말이다. 그러니 자식이 하나이면 거울이 하나이고, 만약에 자식이 두 명이면 거울이 두 개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자식이 없는 것을 두고서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이 없으면 자기 본색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끊어진 상태를 의미하니 말이다.
◈ 아브라함 인생을 통해서 !! 아비멜렉의 경우에,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리려고 하다가 그만 자기의 태가 끊어지고 말았는데, 그런데 그 끊어진 것이 누가 개입해서 회복이 되는가? 아브라함이 기도해서 이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그 이어진 태에는 무슨 요소가 들어가게 되는가? 아브라함의 존재의미가 이미 핵심요소로서 들어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창 20: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해서 그 주변에 파급되는 아브라함 언약의 실제적 효과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이렇게 성경인 창세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자석이 움직이면, 그 주위에 있던 보이지 않던 쇠붙이들이 달라붙듯이 말이다. 흙 속에 숨어 있다가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지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거기서 저주를 받을 자와 복을 받을 자가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 또 노아의 인생을 통해서 !! 그것은 노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노아가 술을 먹고 만취가 되었는데,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인데, 노아가 술을 먹었기 때문에, 그런 노아의 행위로 말미암아서 복을 받을 자와 저주를 받을 자가 갈라진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지라고 하나님은 성령을 주셨는데, 이 땅에서 성령을 받은 자들이 그렇게 하나의 자석처럼 살라고 말이다. 자기가 얼마나 소유하고, 한 달 수입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가난하든지 부자가 되든지 간에 우리가 존재하게 되면, 그 자체가 곧 선교이고 전도가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둥글기 때문에 그 어디를 가도 세상 끝인데, 즉 자기가 살아가는 지점이 최종지점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할 때, 그 땅 끝은 바로 성령이 임한 자리라는 것이다. 새로운 공간개념이고, 그리고 새로운 시간개념이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목사님, 결국 인생은 허무하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계속해서 성경공부를 하고 하는데, 또한 관심이 있어서 전화를 하는 분들을 보게 되면, 그들이 공통적으로 오해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목사님의 강의와 설교말씀을 열심히 잘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인생은 허무하다' 라는 것이죠?"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무엇이 빠졌는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말이다. 오늘 강의를 듣고도 그런 질문이 나올 수가 있는데, 물론 그것은 자기 느낌이기에 그럴 수도 있고, 그런 전화를 얼마든지 환영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엇이 빠졌는지 크게 칠판에 적어보겠는데, '하나님의 진노'가 빠졌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진노가 빠지면 안 돼 !! 시편 90편에 보면, 그것도 분명히 계시의 말씀인데 말이다. 거기 10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분명히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물론 이 성경구절만 달랑 들어서 보게 되면 전화를 하신 분의 말씀이 맞는데,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편 90편 10절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이야기를 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선교가 되고 또 전도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되어야 하겠는가? 우리가 "그래, 맞아. 인생은 참 허무하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살면서 이 세상을 알았다고 하는 자기 자랑이지, 그게 어떻게 선교이고 전도가 되겠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앞 구절인 9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분노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분노를 증거해야 선교이고 전도라는 말이다.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그러면 '허무하다' 라고 결론을 내리는 심리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평소가 살아가면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마침 이근호 목사의 설교를 들으니 그런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자기가 듣고 싶던 이야기가 말이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여깁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허무할 자격조차도 없는데, 그런 틈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진노하심과 분노하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다" 라는 것을 증거하기에 바빠서 말이다. 그 허무함이 그냥 허무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쓸모가 있는 허무함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일부러 유발시킨 의도적인 허무함인데, 그러니 그런 허무함이 오면 감사하면 된다는 말이다.
◈ 낯익은 낯섦 !! '낯익은 낯섦' 이라는 말이 있는데, 즉 굉장히 낯이 익는데 그런데 낯설다는 것이다. 익히 알기는 아는데, 그런데 그것이 자기에게 돌아오면 그만 낯설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죽음인데, 그만 암에 걸려서 죽고, 또한 낚시를 하려고 갔다가 물에 빠져죽고 말이다. 그 사람들이 죽기 위해서 추자도에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낚시를 가기 전에 친구들이 "이번에 누가 낚시를 하다가 그만 죽었어" 라고 해도, "참 재수도 없었네" 라고 하면서 낚시를 떠갔다는 것이다. 그런 사고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이 낯이 익지만, 그러나 그게 자기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닌 이상은 그게 자기에게는 굉장히 낯설다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닥치게 되면 자기도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뉴스에 나와서 뭐라고 하는가? 울먹이면서 "이런 일은 드라마에서나 일어난 것인 줄 알았는데" 라고 하는데, 아무튼 자기에게 일어나지 않으면 다 드라마에나 나오는 줄로 안다는 것이다. "저는 드라마와 같은 일에 저에게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그동안 모르고 살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뉴스 시간에 그런 내용들이 나오면, 안타까워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인구도 많다고 하는데 잘 죽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와 상관이 없으면 말이다. 특히 자기를 괴롭히는 인간이 죽었다고 하면 얼굴에 미소가 돈다는 것이다.
◈ 낯섦을 거부한 솔로몬의 기도 !! 물론 솔로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솔로몬이 뭐라고 기도하는가? 원수가 망하는 것도 기도하지 않고, 또한 자기가 오래 살거나 부자가 되는 것도 기도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주님에게 할당을 받은 역할만을 제대로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부자가 되게 하시고, 오래 살게 하시고, 아내가 천 명이 되게 하셨다는 말이다. 원수는 나가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친구가 되어서 돌아오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변의 나라와 태평성국을 이루는데, 굳이 외교를 하지 않아도 주변 나라들이 스스로 알아서 기어 들어온다는 것이다. 쫄아서 말이다. (대하 1:7) 이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그러면 또 시험을 해보시는 분들이 있는데, 자기도 그렇게 기도하면 부자가 되는지 안 되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소용이 없는데, 그것은 솔로몬에게 할당된 기능이기에 말이다. 각자의 기능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솔로몬의 기능도 주님의 모습이고, 지금 보잘것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주어진 일부의 기능도, 그것도 역시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속성이 이미 장착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비록 작아보지만 귀한데, 그러면 어떻게 귀한가? 우리 안에 들어있는 기능이 얼마나 귀한지,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이 귀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기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이 70이고 80이고 간에 신속하게 지나가야 하는데, 주님의 진노하심 앞에서 말이다.
◈ 그러면 주님은 왜 진노하시는가?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고 하니, 주님이 왜 진노하시는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마치 미끼와도 같은데, 바깥에 나오는 제일 구체적인 모습은 늙어간다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면 왜 늙는가? 성경에 보니,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기 때문인데, 그러면 왜 화를 내시는가? 우리의 죄 때문인데, 그러면 죄는 무엇인가? 우리의 제일 바깥에 있는 이 허무하고 힘든 인생을 가지고,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서 점점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 속으로 접근해가도록, 그렇게 성령께서 인도를 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을 '말씀 속으로', 혹은 '계시 속으로' 라고 할 수 있는데,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예정된 비밀 속으로'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데,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점이 좋은가? 우리 자신의 무게가 점점 더 가벼워지는데,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그게 짐이 아니라 할당된 주님의 속성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주님에게도 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이기에, 자기가 살고 죽고 하는, 그런 자기 존재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고 한 것은 햄릿의 입을 통해서 셰익스피어가 한 이야기이고, "내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다" 라는 것이 성경말씀인데, 그러니 이미 해답이 나와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도 성경을 분명히 보았을 텐데, 하지만 그게 인간의 한계라는 말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사람의 고민은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수상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즉 "어떻게 하면 내가 잘되고 오래 살겠는가?" 라고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시도 아니고 자기 일방적인 것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주제에 어디서 살려고 깝죽거리느냐는 말이다. 문제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기 욕망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문제를 걸어놓고, "해답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문제라야 해답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문제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니, 주님은 그런 우리의 기도에 일체 응답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응답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탄식을 하시는데, "어이쿠, 이 놈아!" 라고 하면서, 마치 놀부가 흥부를 보고 탄식하는 것처럼 말이다(ㅋㅋ). "어이쿠 인간아, 어떻게 그렇게 니 주제를 모르노?"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개인은 우선 자기 몸부터 간추리려고 하지만, 주님은 그런 개인의 몸이 아니라 그 범위를 넓혀 가시는데, 즉 '나' 라고 하는 범위를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의미를 두는 것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한 궁극적인 출발점은 외부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잠언서에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식을 낳음으로서, 손자를 낳음으로서, 그리고 부모를 앎으로서, 부모관계, 자식관계, 형제 관계, 이웃관계, 임금관계 등, 그런 모든 7가지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구조적인 필드, 그런 장(場)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나' 라는 생각에 있어서 그 껍질을 벗기고 진짜 '나'를 찾아가야 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속성을 성령을 통해서 받았다고 하는 것은, "나는 주님의 것인 동시에 주님이다" 라고 되는데, 왜냐하면 속성이 도달되어있으니 말이다. 즉 주님 몸의 일부가 되는데, 주님의 지체가 말이다. 여기에 있는 이 손가락은 몸의 일부인데, 그런데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손가락이 없다"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뇌가 아는데, 손가락이 보이지 않아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치면 아프고 말이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를 철저하게 관리하시는데, 경비회사인 '세콤'이 관리하는 것은 비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제대로 우리를 관리하시는데, 알아서 다 해주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손댈 필요가 없는데, 아무 것도 할 게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런데 인간은 자기 몸을 '나' 라고 여기니, 지금까지 자기가 알아서 살아온 줄로 안다는 것이다. 이마에 땀을 흘려가면서 자기가 고생했다는 것인데, 하지만 고생을 해도 할당된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 자리에서 말이다. 전도하고 선교를 하라고 말이다. 그러니 열심히 시장을 보고 밥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선교이고 전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 가서 "이 고등어는 얼마입니까?" 라고 하는 것을 천사가 사진을 찍어서 주님에게 보고하면, 그것도 역시 선교이고 전도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몸이 건강하니 시장에 나가는데, 그 건강이 어디서 나왔는가? 주님의 은혜인데, 그래서 "오늘 반찬은 고등어조림으로 할까?" 라고 할 때, 그것은 주님의 은혜를 앞장세우는 것이란 말이다.
◈ 주님과의 셀카봉 관계 !! 쉽게 말해서 '주님의 셀카봉'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이 땅기면서 가신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장을 보면 찍고, 밥을 먹으면 찍고, 또한 잠을 자면 찍고 말이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데, 바로 그 주님과의 셀카봉 관계를 통해서 감사라는 것이다. 오늘 강의제목을 '셀카봉 관계' 라고 하면 좋겠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나' 라는 것을 달랑 끊지 말고 관계를 통해서, 즉 "이런 못된 자식놈이 어디서 나왔노?" 라고 한다는 것은, 그게 자기에게서 나왔으니, 그것이 곧 관계라는 말이다. 그러니 못된 자식을 때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때릴 수 있는 것도 축복이고 은혜인데, 즉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때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고,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관계에서 끊어져 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식에게 채찍을 가함으로서, 그게 자기 몸을 때리는 행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부모가 자식에게 모범이 되겠다고 하면서, "니가 잘못했으니 대신에 이 부모를 때려라" 라고 하면서 매를 자식이 주는 분들이 있는데, 요즘 자식들은 진짜로 때린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그런 이미 한 물간 어설픈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자식은 성질이 나는 대로 때리면 돼 !! 그러면 부모가 자식을 때릴 때, 그것이 '사랑의 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사랑의 매로 때려야 하는지를 묻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러니 성질이 나는 대로 때리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억압되기에 말이다. 그래서 엄마가 소위 사랑의 매로 자식을 대하게 되면, 그날 저녁 콩나물 무침에는 소금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사랑의 매라고 하면서 자기 성질을 죽이고서 매를 아끼는 것이나, 자기 자식에게 줄 반찬을 짜게 하는 것이나, 그게 결국은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질이 나면 성질이 나는 대로 하면 되고, 그런데 웬일로 성질이 나지 않으면 나지 않는 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괜히 자기가 알아서 자기 욕망을 관리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게 어디 관리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 교재 126페이지를 보자. ** 쉽게 말해서 인간은 꿈이 깨지지 않으면 안간이 안 돼요. 꿈이 깨져야 자기가 깨져요. 그렇게 자기가 깨져야 하나님의 긍휼이 보이고, 하나님의 긍휼을 알아야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 꿈은 반드시 깨어져야 !! 자식이 부모를 구박하고 쫓아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나름대로의 꿈이 있는데, 그 꿈이 더럽다는 것이다. 죄악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부모가 자식을 때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식을 꿈을 깨는 것인데, 그런데 그 꿈은 자식의 꿈이기 때문에 곧 자기 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을 때린다고 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자기 야망에 맞추기 위해서, 즉 자기의 뜻대로 하기 위해서 때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자식에게 은근히 기대하는 그 기대감을 깨어버리는 것인데, 즉 자기가 자기를 부수는 작업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아서 덕을 본다는 것은 다 빈말이야. 나는 너를 포기했어" 라는 마음가짐으로 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자기 꿈을 깨부수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 꿈을 부수는 그 모습이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한 그 어떤 믿음도 깨어버리는 작업의 일환이기에 말이다. 마귀가 주님을 시험할 때,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와 권력을 다 주겠다고 했는데, 주님은 그것을 깨버렸다는 것이다. 즉 "나는 아버지의 뜻만 행하지 너와 협상하거나 타협할 의사가 없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나중에 예수님이 쓴 잔을 마시는 것이란 말이다.
◈ 베드로의 경우에 !! 하지만 베드로는 그 꿈을 깨지 못하고, 예수님 자체를 자기 존재의 확대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고난을 받고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 라고 하니, 베드로가 뭐라고 하는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드시 막아 드리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칭찬했는가? 오히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하셨는데, 한 글자로 표현하면 '휙!'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베드로 속의 사탄으로 인해서 말이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이전까지는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사탄이 어떻게 하는가? 마치 자기 집을 드나들 듯이 드나들면서 마구 까불고 있었는데, 이미 주님께서는 그것을 모두 아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 그것이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식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내 자식은 참 훌륭해. 실수도 하지 않을 거야" 리고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그대로 빼다 박아놓은 것이 자식이니 말이다. 자기의 결심도 자기가 어떻게 가늠할 수가 없는데, 그러니 자식이라고 해서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말이다.
◈ 사출된 유령 !! 인간은 주어진 상황이 바뀌게 되면 같이 바뀌게 되는데, 그것을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사출된 유령'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 인간을 유령이라고 했는고 하니, 주님이 준비하신 자아가 따로 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떠돌아다니는 유령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출이 되었으니 어디에선가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전 세계의 하나의 통합된 두뇌 시스템으로 구축한 속성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실상인데, 그것이 통합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여서 통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마다 상상을 해보면, 인류의 하나된 그 총집합을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기만 하면 모두가 다 상상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동화책에 보면, 흑인과 백인과 황인이 모두 하나가 되는데, 이미 통합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통합이 되어있는데, 그런데 성경에서 허무하다고 하면, 그 허무한 것이 결코 인간들이 바라는 해답이 아니라는 말이다. 통합된 것이 허무하다고 하면, 그러면 그 통합을 하나님이 반대하신다는 것인데, 그렇게 반대하면서 개입된 속성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진노한 속성을 우리가 할당을 받았다고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은 남에게 무엇을 발산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분노하심을 발산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화를 내면서 발산하는가? 그게 아니라, 오히려 참으면서 분노를 발산한다는 것이다.
◈ 깊이, 깊이, 더 깊이 내려가면 !! 여기서 마태복음 5장을 찾아보겠는데, 거기에 보면 팔복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나오는데 말이다. 그것을 여러분이 일단 안다고 치고, 이렇게 표면에는 마태복음 5장이 있는데, 즉 문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있는 문자를 그대로 푼다고 하면, 그게 과연 해답이겠느냐는 말이다. 그 다음에 우리가 인생을 좀 더 살고 나서, 이번에 표면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층으로 가게 되는데, 그러면 마태복음 5장을 그 밑에 있는 깊이를 가지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과연 해답이겠는가? 그러면 이제는 인생을 또 더 많이 살아서 더 깊이 내려가 보자는 말이다. 거기에서 마태복음 5장을 풀면, 그 앞에 있던 1번과 2번과 3번은 어떠하겠는가? 그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더욱 더 깊이 내려가면, 4번도 역시 다르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제일 깊숙이 내려가신 분이 누구인고 하니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마태복음 5장을 풀게 되면,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마태복음 5장을 했다고 해서 결코 알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인생을 더 살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알았던 것은 한정된 자아의 범위 안에서 마태복음 5장을 보았는데, 그런데 그 자아관이 주님에게 가까이 가게 되면 자기의 자아는 점점 더 옅어지고 주님의 자아가, 즉 주님의 속성이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마태복음 5장을 다시 보게 되면 다른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을 또 더 살게 되면 다른 내용이 또 나오고 말이다.
◈ 주님의 진노를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많은 진리를 !! 이것을 하나의 공식으로서 묶게 되면, "주님의 진노를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진리를 많이 알게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 자기는 죄인의 괴수가 되고 의인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주님이 주신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더욱 더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 마태복음 5장을 공부할 때는, "주님, 이번에 제가 마태복음 5장을 공부합니다. 우리 아이가 고3인 것을 아시죠? 그리고 우리회사가 이번 큰 계약을 합니다" 라고 하다가, 그런데 이제 죽음을 앞두고 마태복음 5장을 보게 되면 뭐라고 하는가? "마태복음 5장은 결국 십자가 이야기이네요. 지금 죽는 것도 정말 감사합니다. 진작 죽었어야 하는데, 오늘밤에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고 싶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믿음이 있는 경우에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마지막 멘트는 우리가 미리 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누누이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령 자체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난 다음에 오셨기 때문에, 성령은 언제나 십자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고물 덩어리이고 폐품인 우리를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 죄밖에 모르는 우리 자신을 재료로 !!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지 싶은데, 우상숭배밖에 할 줄 모르는 우리가 재료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의 톱밥으로 사용해서 십자가의 훈훈한 열기가 나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상숭배, 음란, 도적질, 시기 등의 육의 열매를 재료로 해서, 사랑과 온유와 절제 등의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데, 그런 십자가의 온기가 말이다. 그런 과정에 맹렬한 제단의 불이 있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양에게 안수를 해서 재료로서 집어넣는데, 그러면 그 양은 백성들의 죄를 한껏 짊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양의 겉모습은 뽀얗지만, 그 내부는 시커멓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성전의 제단 불 위에다가 놓는데, 그러면 홀라당 다 태워지고 만다는 것이다.
◈ 이제는 인물 자체가 제물이 되어서 !! 이것이 성전에서 일어나는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가니 어떻게 되는가? 성전의 제단 불이 양을 잡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데 이사야 자신을 어린양으로 간주해서 잡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장차 오실 어린양의 모형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사야라는 인간 자체가 제물이 된다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친히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다는 것이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런데 이게 말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성경말씀의 완성인 것을 온 천하에 성령을 통해서 알리도록 조치를 하셨는데, 그 중의 하나로서 할당을 받아서 걸려든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말이다.
◈ 바깥이 아닌 마음의 할례를 !! 그래서 성경을 보면, 구약에서는 바다도 갈라지고 성도 무너지고 하면서 실제적인 성과가 나오는데, 그런데 신약에서는 조용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조용한 것이 아니라, 신약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왔는데, 바깥에서 아무리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해도 그 인간의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통과해도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것이다. 정작 바뀌어야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인데, 즉 심령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포경수술이 문제가 아닌데, 즉 우리의 바깥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악한 마음이 악한 마음에게 할례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할당이 되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할례를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봐라, 이게 더럽다. 그런데 이 더러운 것을 의로운 것으로 바꾸었다" 라고 말이다. 그게 십자가의 능력인데, 그게 우리 내부에서 계속해서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발동기에 시동이 걸려서 마구 돌아가듯이 말이다. 지금도 우리 속에서는 그것이 작용하는데, 그래서 영적으로 우리의 내부를 잘라보면 그 안에 기계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바깥에는 셀카봉, 그리고 안에는 기계가 있다는 말이다.
◈ 마태복음 5장을 보면 !! 지금 우리가 마태복음 5장을 볼 텐데, 물론 5년 뒤에 보면 그때는 또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의 일이고 지금은 지금만을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가셨는데, 왜 그리로 올라갔는지는 제자들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데, 오직 예수님만이 아신다는 것이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그렇게 산 위에 올라가셔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을 하셨는가? 5장 3절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하는데, 당연히 듣는 사람마다 오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백 명이면 백 명이 각자 자기 생각이 따로 있으니 말이다. 각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왜곡을 하는데, 물론 그 중에서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산상설교를 듣고 주님을 배반할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오늘 강의에 의하면 자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주님에까지 이르러야 제대로 된 자아가 되는데, 즉 주님으로부터 "이게 바로 너다" 라고 성령을 통해서 통보를 받아야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에게 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자아를 넓혀보아야, 그것은 넓혀진 자아이고 마귀의 앞잡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니만 목사가? 어제 낮 시간에 요즘 목사들의 수법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했는데, "목사들이 성경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목회에만 관심이 있다" 라고 말이다. 저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목사가 있다고 하면, 거의 없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만약에 있다고 하면, 그런 목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니만 목사가?" 라고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말한 의도는 전혀 그것이 아닌데 말이다. 저는 "니만 목사가? 나도 목사다" 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의합니다. 제가 목사가 되게 한 것도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일 줄 압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과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한 형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니만 목사가? 니만 복음을 아나?" 라고 하지 말고, "딱 맞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정말로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한 형제이니 당연히 통한다는 것이다. 저는 그런 것을 기대했는데, 그런데 "니만 목사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제가 그런 말을 하면서, 처음에는 "십자가를 지지도 않은 인간이 은사를 받은 자들을 함부로 폄하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런 반응을 보게 되면 제대로 전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강도를 더 높일 생각인데, 뒤처리는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니 말이다(ㅋㅋ). 물론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당신이 그런 말만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당신이 그렇게 나오니 우리가 다가설 수 없지 않은가?"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니만 목사가?" 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하지 말고 "나도 죄인입니다. 무엇을 해도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끝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도 성령으로 헌금한 것도 있잖아?" 라고 나오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 누가 누구를 방종케 하는가? 울산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떤 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근호 목사는 교인들을 방종케 한다" 라고 하는 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더 방종케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하지만 한 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목사가 방종케 해서 교인들이 방종케 된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할당받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아무리 방종케 해도 방종케 되지 않는 것이 주님의 사람인데, 어떻게 목사가 인간을 관리하겠는가? 자기 자신도 관리할 수 없는데 말이다. 주님이 관리한다는 것을 믿으면, 그런 사람은 방종케 되던 무엇이 되던 간에 주님이 관여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평정 !!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이사야 40장에도 나오듯이,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된다" 라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가시는 곳마다 평탄하게 되는데, 즉 "니나 나나 똑같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우리는 다 죄인인데, 허무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노하심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그러니 저의 설교를 듣고 허무하다고 여기는 것은 오해인데,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허무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노하심을 느끼십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식이라서 귀하다고 하면서 매를 아끼는 것은, 그것은 주의 진노를 받아서 마땅하다는 말이다.
◈ 잠언서와 마태복음 5장 !! 그러한 관점에서, 이 잠언서와 관련을 지어서 마태복음 5장을 살펴보겠는데,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되어있으면, 천국을 넘나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홍해가 갈라진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병을 고쳐도,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도 그런 기적을 베풀었는데, 죽은 자도 살아나게 하시고 물 위를 걷게 하시고 말이다. 사도바울이 손수건을 던져서 살아난 자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심령이 가난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가난한 마음이 되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또한 교만이기에 말이다. "나는 마음이 이렇게 낮아졌습니다. 더 낮아질까요? 아예 엎드려서 살까요?" 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왜 선교단체에서 학생들에게 통성기도를 시키는고 하니까, 인위적으로 낮추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심령을 가난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자연은 비인위적인데, 왜 그런고 하니, 이 자연에다가 인공이 들어가게 되면, 이것이 연속이 아니라 불연속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가 한 것, 그리고 그 바깥은 니가 한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사이는 끊어져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은혜의 세계는 모든 것이 주님이 하신 것인데, 그런데 어디서 감히 선을 긋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무슨 식빵도 아니고, 그렇게 선을 긋고 잘라서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우리의 덩어리 자체가 그냥 주님의 은혜 덩어리이기에, 그래서 우리는 그냥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즘 들어서 '장애자 우대'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하지만 장애자가 아닌 존재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모두가 다 정신병자이고 말이다. 어디 미치니 않은 인간이 없는데, 우리는 모두가 불순종의 아들들이니 말이다. 우리는 모두가 다 장애자인데, 박근혜 장애자, 문재인 장애자, 그렇다는 말이다. 인간은 자기 욕망을 이길 수가 없는데, 그래서 욕망이라는 마귀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 주님이 평정을 해줘야, 비로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게 된다는 것이다.
◈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 그러나 !!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사실 그게 놀랍지 않느냐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그 이전에 전혀 거기에 대한 언질이 없었는데, 즉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애굽에 있을 때 "니가 백 날을 해봐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세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약속에 땅에 간다고 가슴이 부풀어있었지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 모세는 그만 성질을 내어서 들어가지를 못했는데, 그것도 한 번인데, 그러면 좀 봐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이게 무엇인고 하니, 약속의 땅은 모세의 나라가 아니라, 모세언약의 나라, 즉 주님의 나라라는 말이다. 물론 나중에 변화산에서,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다정히 사귀고 있다는 것이다. (민 20:10)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다시 말해서, 자기 못남을 아니까 그 당시의 약속의 땅은 밟지 못했지만, 진짜 천국은 모세가 밟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데, 주님은 언제 오시더라도 괜찮다는 말이다. 오늘밤도 괜찮고 내일도 괜찮고, 딸의 결혼식 날을 받아놓고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미 주님께서 다루시면 이 세상 영광은 보지 못해도 주님의 영광은 본다는 말이다.
◈ 우리의 자아성과 주님의 자아성이 부딪치면서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할 때, 이 말씀이 어려우니 긴장을 좀 해야하는데 말이다. 이것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성령이 오면 말이다. 물론 우리는 철이 없어서 이 말씀을 보고 지키려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지키려고 하는 우리의 자아성과, 말씀대로 이루지는 진짜 주님의 자아성이 우리의 내부에서 싸움을 일으키는데, 즉 "너의 방식이 아닌 나의 방식이다" 라는 것이다. 우리의 방식은 백 날 해봐야 인위적인 것이고, 그런 인위적인 것은 자기 교만에 불과한데, 즉 "나는 심령이 가난합니다" 라고 하면서 까불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 심령이 가난한 것은, 곧 교만하면 돼 !! 그러면 심령이 가난해지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교만하면 되는데, 정말 쉽다는 것이다. 어제 오후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누가 알랴만, 아무튼 교만하면 그게 바로 심령이 가난한 것이라는 말이다. 천국의 바로 그런 사람의 것인데, 왜냐하면 이미 천국에 왔기 때문에 교만함이 자기 몫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몫이고 말이다. 그러니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의 반대역할이 바로 우리에게 할당된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기계가 돌아가는데, 우리는 죄를 짓는 기계라는 말이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기계인데, 그게 같이 사이좋게 돌아간다는 말이다. 진짜 우리의 인생이 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4절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일종의 응용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애통해하지 않고 그냥 까불면 된다는 것이다. 젊은 목회자가 초빙을 받아서 설교할 때 이런 식으로 하면 되는데, 그래서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다" 라고 하면, 죽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이다. 여기 7절에 보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인간을 긍휼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천 원이면 세 끼를 먹습니다" 라고 하면서 도와달라고 광고도 하는데, 하지만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주님이 일으킨 사건 속에 이웃이 !! 그러면 누구를 도와주면 되는가? 그것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마주치게 하는 이웃이 있는데, 그게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데, 즉 이웃은 주님이 맺어주어야 이웃이지 자기가 선택한 이웃은 이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은 이웃을 맺어줄 때 사건을 가지고 만들어주시는데, 하지만 그 사건은 자기가 피하고 싶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인위적인 사건인데, 왜냐하면 인위적인 것은 자기가 의도한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사건에 부딪치게 해서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만드는데, 그게 바로 주님이 일으키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사건 속에 이웃이 될 수 있는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건 안에 말이다.
◈ 장사는 마음으로 하면 안 돼 !! 예를 들어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말을 잘 듣는 손님이 오면 참으로 예쁘게 보이는데, 그런데 엉뚱한 소리를 하는 손님이 오면 차갑게 대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제 아무리 "손님은 왕이다" 라고 외쳐도 역시 인간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손님이 예상외로 많은 매상을 올려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사를 하려면 철저하게 하나의 기계가 되어야 하는데, 친절을 베푸는 기계가 말이다. 사실은 친절이 아니라 장삿속인데, 그러니 장사를 할 때는 그야말로 상투적으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고갱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장사는 가식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마음으로 장사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주인이 상처를 받아서 결국에는 장사고 뭐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준 사랑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상처를 입게 되어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남에게 베풀면 기대를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그런 기대에 절대로 호응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주님 쪽으로 가지 우리 소원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입사시험을 쳐도 너무 기대를 하면 안 되는데, 그런 기대는 자칫 큰 상처만 남긴다는 것이다. 물론 아는 문제가 많이 나와서 걸리게 해주면 고맙게 여기면 되고 말이다. 그러니 이 산상설교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왜 죄인인가?"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있는데, 그것을 율법적 기능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모든 말씀이 율법적 기능이 있는데, 율법적 기능이 무엇인가? 죄를 더욱 더 죄가 되게 하는 것인데, 미처 자기도 모르는 죄까지 말이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쉽게 말해서, 자기도 미처 모르는 자아를, 즉 "이렇게 더러운 것이 너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주신다는 것이다. 그게 어느 정도로 더러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동조할 정도의, 그런 자아가 우리 속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십자가 앞까지 끌어당기는 역할을, 그것을 주님은 말씀으로 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지켰다고 우기는 것, 믿음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꾸만 믿음이라고 우기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키고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인위적이 아니라 비인위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공로는 당연히 주님께 돌려야하고 말이다. 이제 교재 126페이지를 보자. ** 잃어버렸다가 얻었을 때, 여러분이 지갑을 한 번 잃어보면, 그 지갑에 돈이 얼마 들어있지 않아도 지갑을 찾으려고 난리를 피웁니다. "왜 내 지갑을 잃어버려야 합니까?"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 주님, 왜 내 지갑을 잃어버려야 합니까? 여기에 "왜 내 지갑을 잃어버려야 합니까?"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꼭 이런 상태이어야만 합니까? 주여!"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가 여자라고 하면, "왜 내가 여자이어야 합니까? 남자라면 안 됩니까?" 라고 질문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가 선택해서 가꾸어나가고 싶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게 바로 마귀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미리 알아서 저에게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니 인생은 니가 알아서 가꾸어가라' 라고 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더 즐겁게 들립니다" 라고 하는, 그러한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마귀에 들린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고 평소의 생활태도라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인간이 다 마귀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다른 사람의 지갑은 그대로인데 내 지갑만 없습니까?" 라고, 혹은 "왜 내 스마트폰만 잊어버립니까?" 라고 하는데, 그리고 스마트폰은 택시에 두고 내리면 대부분이 찾지 못한다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택시를 모는 기사님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러면 택시는 취소인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 왜 나만 이렇게 당해야 합니까? 제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 인간은 어떤 일을 당하게 되면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왜 나만 이렇게 당해야 합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아가, 그런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까지는 미처 그런 자아인 줄 몰랐는데, 그런 사건으로 인해서 그런 자아가 우리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 발췌해지고 드러나게 되는데,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프로야구선수의 경우에도 보면, 다른 선수들은 잘 치는데 자기 혼자서 슬럼프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하고 2군으로 쫓겨나고 말이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도 답답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마음은 오죽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해설자도 보다못해서 한 마디 하는데, "저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너무 답답했습니다" 라고 말이다. 어쩌다가 잘 맞으면 야수정면으로 가고, 아무리 해봐도 어떻게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감사와 그렇지 않음을 가리는 하나님의 잣대인데, 거기에 대한 주님의 뜻은 다음과 같다는 말이다. 즉 "니가 잃어버렸다가 얻었을 때의 기쁨이 크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이다. 잃어버린 것은 바로 얻음에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잃어버림의 사건과 경험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얻었음에 대한 기쁨도 같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 먼저 잃어버림의 경험이 있어야 !! 다시 말해서, 얻음의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런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래서 아버지는 아낌없이 유산을 둘째에게 다 주어서 허랑방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모두 잃어버리고 돌아오너라. 그러면 아버지가 보일 것이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말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옆에 붙어있었다는 이유로 인해서 진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아버지는 자기가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아버지로, 그것은 자기 잘난 맛에 아버지를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왕창 다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백퍼센트 도와주는 아버지는 옆에 붙어있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출을 하라는 말은 아니고(ㅋㅋ), 아무리 가출을 해도 인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가출을 내놓고 집에 돌아와서는 지난날을 후회나 하지 말이다.
◈ 주님은, 이미 주님 !! 우리가 "꼭 이럴 수밖에 없습니까? 주여!" 라고 하면, "그래, 그렇다. 너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라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주님이니 말이다. 우리가 '주여!' 라고 불렀으니, 그것을 소급시켜서 적용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즉 "니가 나를 알 때부터 비로소 주님이 아니라, 모를 때부터 이미 주님이었다" 라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창세 이전부터 주님이었다는 말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래서 사도바울도 창세 이전으로 돌아가는데, 즉 "창세 전에 예정하사 은혜로 나로 하여금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게 하셨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도바울의 입을 통한 고백이 말씀으로 펼쳐지는데, 그것은 결코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가 엄연하게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식을 때림으로서, 자식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동안 부모 자신이 알고 있던 자아, 그 자아를 오해했다는 것이다. 그 오해한 자아를 진짜 자기의 자아로 여기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자식이 내 몸에서 나올 줄 몰랐다" 라고 하면서 자식을 때리면서, 바로 자기 자신을 때리고, 자기의 꿈을 깨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리고 나서 "꼭 이렇게 하셔야만 합니까? 주여!" 라고 하면, 주님은 "그래, 그렇다. 왜 꼽나?"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감히 대꾸를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더 골통을 부리는 자식을 낳게 하실 수도 있으니 말이다(ㅋㅋ). 우리는 마귀 자식을 열 명이나 낳아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자식 중에서 부모의 말을 듣는 놈이 있다고 하면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때리지 않아도 말을 잘 듣는 자식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부모가 잘나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어디서 이런 예쁜 자식이 나왔지?" 라고 하면서 자기 자랑을 하지 말고, "아하, 나는 당연히 못난 자식들만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말을 잘 듣는 자식이 나왔다는 것은, 주님께서 내 자랑을 하지 말라고 주셨구나" 라고, 그렇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 잘못됨이란 바로 주변의 희생을 모르는 겁니다. 어린애들은 부모가 자기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그리고 자기가 밥을 먹고 사는 것이, 부모가 얼마나 큰 희생과 아픔을 통해서 사는 것인지, 그런 희생과 아픔을 몰라요.
◈ 주변의 희생과 아픔을 몰라요 !!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가스관을 타고 도둑질을 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하면, 그것을 바로 자기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배가 아파서 낳고 몸조리도 제대로 못했던 부모의, 그런 주변의 희생을 다 잊어버리고, 그저 자기만 그렇게 도둑질을 하면 자기만 편하고, 또한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면 자기만 편한데, 하지만 그것은 타인의 희생과 아픔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타인의 아픔을 포함해서 자아가 된다고 하면, 우리가 십자가의 아픔을 늘 품으면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자아가 제대로 된 자아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십자가가 꽂혀있는 자아라는 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이 산상설교의 말씀이,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은 바로 천국이 이미 들어왔기에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주님이 그렇게 예뻐하시고 기뻐하시는 자식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들만 몰랐습니다. 천사도 다 알고, 하늘나라에서는 이미 다 소문이 난 것인데, 정작 우리는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런 소문이 난 자로서, 하늘에서 파견한 자로서, 전도자로서, 순교자로서, 주님의 속성을 할당받은 자로서 이 세상 끝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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