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40 - 부자연스러움 / 150921 본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0 - 부자연스러움 15,09,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2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죽음의 힘을 근거로 해서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제물이 왜 죽어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되어있어요.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 말씀은, 죽음의 힘을 근거로 해서 !! 여기 교재에 "제물이 왜 죽어야 하는가?" 라는 것은 히브리서에 나온다고 되어있는데, 바로 앞에 보면 죽음의 힘을 근거로 해서 사는 것이 지혜라고 하고 말이다. 즉 "하나님은 죽음의 힘을 근거로 해서 말씀을 주셨다" 라는 것이다. 죽음의 힘을 근거로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려고 하면, 먼저 하나님이 제시하신 죽음의 힘에 동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말씀의 완성은 예수님이 담당이고, 그 말씀, 혹은 언약, 즉 약속의 성취자가 예수님이고, 그 성취의 모습은 십자가의 죽으심인데, 그게 말씀의 완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경해석은 십자가 안을 경유해야 하는데, 즉 십자가 안에서 사는 삶의 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으면, 성경해석은 겉으로 돌 수밖에 없는데, 즉 관찰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관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성경말씀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학생들이 유적지에 수학여행을 온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 성령은 보편적이지만, 결코 보편적이지 않아 !! 다시 말해서, "성경해석은 십자가를 경유해야 한다" 라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복음으로 해석해야 한다" 라는 것이고, 또 같은 말이 "성령으로 해석해야 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보편적이지만, 십자가 바깥에 있는 자들에게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십자가 바깥에 있는 자들은 아무리 성령을 달라고 해도 주어지지가 않는데, 왜냐하면 성령을 받아야 하는 육신 자체가 십자가에 의하면 소실이 되어야하는 육신이기에, 그러한 육신으로는 성령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령을 주시는 취지와 맞지가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빵이 있는데, 이 빵을 종이로 만든 자그마한 쟁반에 담았는데,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빵과 종이가 서로 격에 맞아서 말이다. 그런데 이 빵을 다른 이런 것에 담아놓으면 격에 맞지 않아서 어울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성령을 받으려고 하면 성령을 받기 이전에 예수님이 가졌던 육신의 그릇과 일치가 될 때만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라" 라고 하니, 모두들 다 기도를 하는데, 자기가 어떤 그릇인지도 모르고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성령이 새롭게 생산하는 육신은 따로 있어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인간의 육신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성령이 인간의 육신에 온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육신이 계신다는 말이다. 이 육신이 바로 예수님인데, 요단강에서 성령이 어떻게 오셨는가? 비둘기와 같이 임했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육신에 성령이 임해서 예수님이 성령대로 사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하셨는데, 그 복종도 히브리서에 의하면 성령에 의한 복종이라는 것이다.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그러니 성령과 매치가 되는 육신은 기존의 육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육신은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되는 육신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육신에만 성령이 임하는 것이지, 기존의 육신에는 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기존 육신에 성령이 임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은 거기에 거주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시편 103 편에 보면, 모든 육신과 모든 동식물은 성령께서 관리하신다고 하는데, 그렇게 성령이 작용할 수는 있는데, 하지만 거주하는 육신은 따로 있다는 말이다. (시 103:19)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성령의 비췸을 얻고 기적을 맛보고 하다가, 타락한 사람은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이 거주하는 육신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은 하나님이기에, 모든 동식물을, 즉 코끼리와 해바라기와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까지도 다 관리하시는데, 하나님의 관리를 벗어난 존재는 없다는 말이다. (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하지만 성령이 임하고 싶은 육신은 어떤 육신인고 하니,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늘 생산되는 육신이라는 것이다. 기를 쓰고 철야를 한다고 해서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은 그냥 '기분' 인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기존의 육신이 요청한다고 해서 성령이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시는 육신은 따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성령은 기존의 육신은 개무시를 하는데,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가 있는데 말이다.
◈ 교정과 본보기 !! 중세 때의 죄수들은 가면을 쓰게 되어있었는데, 그 가면의 무게가 곧 그 사람이 지은 죄의 무게만큼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가면이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중세 때에는 왜 이런 식으로 처벌을 했는고 하니, 거기에는 두 가지의 취지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교정'이고, 다른 하나는 '본보기' 라는 것이다. '교정' 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법원에 소속이 되어서 사람을 바꾸는 업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소위 '교정작업' 이라고, 형무소가 그 대표적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각 개인에 대해서 앞으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그렇게 바꾸어지도록 각 개인의 성격과 사고방식을 뜯어고치는 것인데, 국가가 그것을 한다는 말이다. 죄를 지었을 때 말이다. 그런데 '본보기' 라는 것은 무슨 기능인고 하니, 교정은 각각 개인에 관한 것이고, 그러니 소수라는 것이다. 여기에 반해서 본보기는 죄를 짓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이 또 다시 똑같이 모방해서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뭔가 두려움을 느끼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아하, 죄를 지으면 저렇게 처벌을 받는구나" 라고, 그렇게 해서 죄가 사회 전반에 확산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 바로 본보기 취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법원의 형 집행은 이 두 가지 취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먼저 '교정' 이라는 것은 각 개인에 관한 문제이고, 그러니 소수라는 말이다. 그리고 '본보기' 라는 것은, 죄를 짓지 않은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취지라는 것이다. 교정과 본보기, 그렇다는 말이다.
◈ 광경(spectacle) !! 그렇다면 죄수의 얼굴에 가면을 씌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을 영어로 'spectacle' 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광경' 이라고 하고 말이다. 즉 보여준다는 것인데, 무엇을 말인가? 처벌현장을, 그 처벌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중세 때의 것이 그대로 요즘도 남아있는 것이 북한의 '인민재판'과도 같은 것인데, 본보기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까불면 맞는다" 라고 말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전체가 무슨 구조인고 하니까, 그 사회의 질서에 주목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질서를 부수는 것은 죄라고 규정하고, 그 죄에 대해서, 그것을 외부적으로 강압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강압적이지 않으면 죄가 어떻게 되는가? 그런 처벌규정도 없이 그냥 가만히 두면 죄가 나오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죄가 나오는데, 처벌규정이 없으면 죄를 당연히 더 짓는다는 것이다. 마치 시험이 없으면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듯이 말이다. 시험도 없는데 굳이 공부는 무슨 공부냐는 것이다. 처벌하지 않으면 당연히 그런 죄를 더욱 더 많이 짓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 죄가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말이다. 가만히 있어도 죄가 나오는데,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는 것이다. 저수지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우물 속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데, 인간 각 개인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아예 마음 자체를 죄가 나오지 않는 마음으로 바꾸면 된다는 말이다.
◈ 구약 이스라엘도 교정과 본보기 작업을 했지만 !! 그렇다면 구약 이스라엘이 그것을 시도했겠는가? 하지 않았겠는가? 당연히 했는데, 구약 이스라엘은 율법을 가지고 내부에서 이런 교정작업과 본보기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안식일에 나무를 한 사람을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어떻게 했는가? 죽였는데, 그것도 몰래 죽인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죽였다는 것이다. (민 15: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리고 자기 아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고 했는가? 아버지가 직접 처리하지를 말고, 마을 이장에게 가서 고소를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마을 이장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그 아들을 공개적으로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 21: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이렇게 자식이라도 말을 듣지 않거든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바로 '내 자식' 이라는 틀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모든 구조는 "내 육신의, 내 자식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맞으면 자식이고, 율법에 맞지 않으면 내 자식이 아니라 때려죽여야 한다" 라고 하는, 그런 구조라는 말이다. 그러니 오늘날과 같이 "내 자식이 최고이다" 라는 생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그것 자체가 오류를 낳는 과정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식이 말을 듣지 않지요? 그러면 때려죽이세요" 라고 하는 사고방식으로 누가 성경해석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설교를 목사가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신이 죽이지 못하면 우리가 죽여드리겠습니다. 저에게도 총알이 많습니다. 교인들을 불러다가 죽여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 성경말씀은 너무나 부자연스러워 !! 이것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데, 그러면 무엇인가?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오늘 강의의 제목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부자연스러움' 이라는 것이다. 즉 오늘날 현대인에게 있어서 성경말씀은 너무나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숨기고 성경을 억지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옳은 해석이 나올 리가 없고, 옳은 적용이 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부터 먼저 따져야 하는데, 즉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데는 그렇게 자연스러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억지가 동원되어야 하는가?" 라고 말이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억지, 말씀을 지키는 것도 억지, 반면에 어디에 놀러 가는 것은 자연스러움, 우리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장사를 하는데 있어서 손님이 많으면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매우 즐겁다는 것이다. 그럴 때는 굉장히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는데는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데, 그래서 말씀을 지키는 쪽에서 처벌규정이 내세운다는 것이다. "이번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으면 또 벌을 줄 거죠? 에이, 더러워서 내가 나가준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즐겁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래, 가줄게" 라는 식이니 말이다. 헌금도 "에이, 해줄게" 라고 하는데, 헌금을 하지 않으면 자기 재산에 더 손해가 나지 싶어서 말이다.
◈ 여보, 나를 의지하지 마세요 !! 그러니 모든 것이 억지스러운데,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저도 이것을 풀지 못하다가 오늘 아침에 비로소 "바로 저것이다" 라고 하게 되었는데 말이다. 집사람에게 "여보, 우리 우편번호가 몇 번이지?" 라고 하니, "나를 의지하지 마세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었다는 말이다(ㅋㅋ). 지금 인간들이 주님을 의지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의지하려고 내민 손이 정작 주님을 이용하려는 손이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말이다. 그러면 누구를 위한 주님인가? 자기 존재의 영역을, 자기 나와바리를, 즉 자기 힘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들의 영역을 확장하다가보니 중세시대의 질서가 어떻게 되는가? 피해자가 생기게 되는데, 사기를 치는 자도 생기고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범죄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교정작업에 나서야 하는데, 그리고 교정작업만으로는 되지 않고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이 의도한 것이 플러스라고 하면, 그 처벌은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로 가야하는데, 그것을 두고 '추징금'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사기를 10억을 쳤다고 하면, 추징금이 10억이면 원위치가 되니 안 되고, 10억을 더 때려서 손해를 보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무죄한 자인가? 의인인가? 이것이 바로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없는, 그런 무죄한 자가 되는가? 아니면 의인이 되는가? 우리 권사님이 한 번 답변해보세요. 물론 둘 중의 하나인데(ㅋㅋ), 예수님을 믿으면 무죄한 자가 아니라,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면 또 다시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죄가 나오는 부분을, 그것이 바로 마음인데, 그 마음에서 이제는 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만약에 무죄 상태라고 하면, 그 마음이 지은 죄는 없어졌지만, 한 시간 이후에 그 마음에서 또 무엇이 나오는가? 또 죄가 나온다는 것이다. 구원파의 박옥수나 유병언의 이론이 굉장히 교묘한데, 그들은 "여러분 마음의 죄는 이미 씻어졌기 때문에, 여러분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말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일반인들에게 무슨 희망을 가지게 하겠는가? 우편번호를 묻듯,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참 잘했어요 !! 그렇다면 그 의지하는 마음을 옳다고 그쪽 교회에서 긍정해준 것인데, 그러면 구원파에서는 "당신이 그렇게 의지하는 마음은 옳은 마음입니다. 나쁜 마음입니다" 라는 것 중에서 어느 마음을 인정해준 것이 되는가? 의지하는 마음에 대해서 "참 잘했어요" 라고 했는데, 그러면 마음이 바뀐 것인가? 바뀌지 않은 것인가? 마음이 바뀌지를 않았는데, 그러니 구원파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파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병을 고치고 하실 때 인기가 좋았는가? 나빴는가? 그야말로 인기 '짱'이었는데, 수 천명이나 따라다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체가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왜 그랬는가?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는데,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말이다. 메시야가 오게 되면 과거 다윗시대의 영광을 재현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것이 에스겔서에 마지막에 나오는데, 즉 "다윗이 오게 되면 잃었던 성전을 다시 짓게 되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이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들은 그 다윗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서편의 통곡의 벽에서 울면서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겔 37:24) 내 조상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그러니 그들은, 아무리 해도 자기가 메시야를 의지한다고 하는 그 마음만큼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겼는데, 하지만 그게 하자가 없는가? 겉돈다는 말이다. 그들의 성경해석이 말이다. 사도바울도 그랬던 사람인데, "하나님께 잘해주면 복을 받고, 대들면 벌을 받는다" 라고 말이다. 그것 외에는 없었는데, 즉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말씀에 위반되면 하나님이 섭섭해하신다" 라고 하는, 그것 말고는 달리 없었다는 것이다.
◈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도대체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고를 쳤다는 말이다. 그것을 누가 알겠는가? 성령이 아니면 이것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과연 이 세상에서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느냐는 말이다. 왜 사람을 의지하는가? 그것은 바로 "니가 괴롭던 말던 간에 나는 너를 의지해서, 나는 너를 이용해서라도 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야" 라는 것인데, 여러분 가운데서 이런 생각이 아닌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는 것이다. 즉 "나는 살 가치가 없어" 라는 것을 평소에 생각들을 하느냐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교회에 몰려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모자라서 이제는 전능하신 누구에게 의지한다는 말인가? 주님에게 의지해서,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내세까지 확보하고, 살아있을 때는 기도해서 복을 받는 것, 그것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근원적인 문제, 즉 "나는 이 땅에서 과연 살만한 존재인가? 그런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되물을 수 있는, 그것을 누가 언질이라도 해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분명히 사고를 쳤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야말로 심각한 하자가 있는 제품이 나오고 말았는데, 그러니 이것을 반품처리를 해야만 하는데, 책이면 파본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자동차라면 '리콜'을 하든지 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이렇게 제대로 된 맛있고 예쁜 빵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런데 그만 마귀가 와서 갉아먹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뭉개지고 말았는데,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신이시여, 도와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충만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그러면 누구만 더 좋아지겠는가? 그것을 가지고 또 다시 죄밖에 더 짓겠느냐는 것이다.
◈ 십자가가 곧 본보기 !! 십자가가 곧 본보기인데,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졌던 그 육신의 몸은 그냥 육신의 몸이 아니라,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무슨 몸이라고 하는가? 죄 있는 몸인데, 그 결과는 십자가의 저주받음이라는 말이다. 버림을 받은, 내침을 당한, 그런 몸이라는 것이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시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 주님은 쓰레기더미에서 !! 여기 22절에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라고 하는데, 여기 건축자는 메시야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집을 짓고 성전을 짓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돌을 버렸는가? 그것은 당연히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인데, 만약에 집을 짓는데 필요한 돌이라고 여겼으면 버렸겠는가? 전혀 아닌데,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버려진 현장에서 그 돌이 어떻게 되었는가? 성전이 만들어졌는데, 즉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성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행했다는 말인가? 23절에 보면,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여호와의 행하심은 그 전제가 무엇이라는 말인가? 인간의 무가치함을 완벽하게 폭로하고, 그것이 드러낸 현장만을 주님이 사용하셔서 주의 일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는 것과 같은 뜻인데, 또한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누가 믿으리요!" 라는 의미이고 말이다. 그러니 납득이 된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있는데, 설득이 된다는 것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사람을 좋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말이다. (눅 8: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존 듀이 - '진리란 유용한 것이다' !! "나에게 무엇이 이익이고 손해인가?" 라는 것은, 20세기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인 '존 듀이'에 의하면, 도구주의, 혹은 실용주의를 주장한 사람인데 말이다. 실용주의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서, "진리란 유용한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게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양심이 좋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유용하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좋다" 라는 것이 실용주의인데, 왜냐하면 "말씀을 지키면 복이 온다" 라는 것을 간증집회를 통해서 많이 들었기 때문에 말이다. 즉 "간증집회에서 들었던 그 복이 나에게 온다면 나는 말씀을 지킬 용의가 되어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전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존 듀이의 철학을 받았다는 말이다. 참으로 위험한 세상인데, 그리고 교회만큼 위험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주님을 기뻐하는 곳이 아니라 주님과 싸우는 현장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잘못된 의도를 인해서, 사실은 의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의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잘못된 의도로 주님에게 붙고자 하면 주님은 도망을 치고 만다는 것이다.
◈ 주님, 저 같은 인간은 살려두지 마세요 !! 그렇다면 언제까지 도망을 치는가? "주님, 저 같은 인간은 살려두지 마세요" 라고 하는 고백이 진정성 있게 나올 때까지 말이다. 즉 "저 같은 인간은 주님의 낭비입니다. 저 같은 인간을 계속해서 살려두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죽이시는 것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시는 겁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그 이전의 일은 모두 마귀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에게 이익이 될까 싶어서 날조해낸 일인데, 그게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삼위일체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날조되었는데, 조직신학을 하든 무엇을 하든 말이다. "목사님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간단한데, 우리의 육신 자체가 가면이었다는 것이다. 강의 처음에 중세시대에 죄수에게 가면을 씌었다고 했는데, 이 육신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밥을 달라고 하고, 오줌이 마려우면 화장실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가 아프면 치과에 가야하고 말이다. 나이가 많으면 병원에 가도 소용이 없는데, 틀니를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즘 치아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많은데 말이다. 심심하면 심심하다고 짜증을 내고, 또한 머리가 희어지면 염색을 한다고 난리이고, 그리고 며느리가 자주 찾아오지 않으면 욕을 퍼붓고 말이다.
◈ 육신은, 죄수가 쓸 수 있는 가면 !! 그러니 이 육신이라는 것이, 비가 오기도 이전에 기상청의 예보가 온 몸에서 다 일어나는데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 육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바로 죄수가 쓸 수 있는 가면이라는 것이다. 이제 궁금증이 풀렸지 싶은데, 그것이 바로 죄의 무게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축 늘어졌는데, 우리는 그런 육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이 말하는 '영'과 '육' !!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영'과 '육'의 개념이, 그것이 이분설이나 삼분설이 아니라 관계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언약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니 그것을 다 엉터리이고 조작된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치우고, 예수님과의 관계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진짜로 예수님과 관계가 있는 육신이라고 하면, 그러한 관계를 '영' 이라고 하고, 반면에 예수님에게 버림을 받는 관계를 두고 '육'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그 육을 육신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영과 육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육에서 나온 정신을 '혼' 이라고 하는데, 혹은 '영혼'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혼은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분석하면서 내어놓은 개념인데, 그게 바로 '영과 육과 혼'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이 사용하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셔서, 예수님을 이런 개념과 관련을 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과 육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즉 육이 있고 영이 있고, 그래서 죽고 나면 따로 하나님을 만나는, 그러한 영이 아니라, 이게 주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새로운 관계를 두고 '영' 이라고 하고, 기존의 모든 관계를, 그게 영이 되던 영혼이 되던 간에, 그 모든 관계를 두고서, 그 전체를 '육'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언약적 관계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 언약적 관계에서는 무엇이 포기가 되는고 하니, "내 존재에 얼마나 유리한가?" 라고, 그렇게 자기 존재를 챙기는 것이 그만 깔끔하게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존재가 포기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망한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바깥에 있는 언약이 자기 내부에 오게 되면, 그만 내부 질서의 조종을 받아서 왜곡되게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면,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라는, 그것이 바로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잠시 녹화용 카메라에 문제가 있어서 강의가 중단되었음)
◈ 왜 예수님이 죽어야만 하는가? 지금 히브리서의 "왜 예수님이 죽어야만 하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는데, 제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 죽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 라고 하는 생각이 잘못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미 망가져 버린, 즉 아담이 이미 사고를 치고 난 뒤에 나오는 모든 개념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나의 육신은 죽고 영혼은 떠난다" 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인데, 그것이 죽음도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면서 나온 생각이라는 말이다. 이게 철학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모르게 되면 무엇도 모르겠는가? 당연히 영생도 모르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 영생을 불멸로 보는데, 그것은 죽음을 짧은 세계로 보고 나머지의 세계는 영원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아니라는 말이다. 죽음이든 영생이든 간에, 그것은 우리 피조물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창조주가 알아서 하실 문제인데, 그러니 그것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죽는 것에 대해서, 그 앞에 '나' 라는 것을 붙여서 "내가 죽는다" 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죽여주신다고 보자는 말이다. 그러면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집사님은 죽는 것이 두려운가요? 아니죠?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은 두렵지가 않다는 말이다.
◈ 저는 죽어도 괜찮아유 !! 조금 전에 '관계' 라고 했는데, 이게 매우 간단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관계라고 했는데, 그러면 주님이 죽이시는 것이 바로 의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죽는 것도 주님이 죽이시는, 그렇게 주님이 의를 주시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죽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말이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된 것인데, 나사로가 죽어도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성경해석을 관계로 해야하는데,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주십니까?" 라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직도 우리가 육신의 무게에 눌려서 살아가고 있는, 종속되어 살아가고 있는, 자유롭지 못한, 즉 마귀에게 쫓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행위가 무엇인고 하니, 죽음이 무서워서 도망치는 행위에서 나온 것인데, 그런 행위들의 다양성이라는 것이다. 그 어떤 행동을 해도 말이다. 영화를 보던, 수영을 하던, 골프를 치던 간에 말이다. 그것은 바로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러면 발상의 전환을 해보자는 것이다. 죽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골프를 쳐도 괜찮은데, 물론 돈이 없어서 못하지 말이다. 그런 모든 것을 주님의 의의 작업으로 보자는 것이다. 즉 "내가 골프를 치는 것이 주님의 의의 작업이다" 라고 말이다. 심지어 강도의 경우에도, "내가 강도짓을 한 것도 주님의 시키신 일인데, 그러니 제가 그런 일을 해서 주님의 일을 마감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의 나라에 저를 좀 생각해주세요" 라고 했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밤에 니가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강도의 경우에는, "지금 너희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노?"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는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서 강도짓을 했고, 하지만 다른 강도는 강도짓을 하는 것이 곧 주님의 뜻이니, 그래서 강도짓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자기는 할 일을 다 했으니, 그 나머지는 주님이 알아서 해달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밤에 니가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셨으니, 그것으로 다 끝났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강도보다도 못한데, 만약에 우리를 보고 칼을 들고 설치라고 하면 우리가 과연 하겠는가? 우리는 우사스러워서 하지 못하는데, 하지만 그 우사스럽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죄인이고 죄수면서, 그렇게 이미 사고를 친 주제에 무슨 그런 말이 있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 사는 것이 부끄러워 !! 그러니 죄를 짓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이 부끄럽다는 말이다. 이렇게 대접한다고 정성껏 빵을 만드는 것이 부끄럽고, 강의를 하는 것이 부끄럽고, 전도를 한다고 돌아다니는 것이 부끄럽다는 말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부끄러운데, 즉 남편 값을 한다고 바깥에서 설치는 것이 부끄럽고, 아내 값을 한다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의의 작업이라고 보자는 것인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게 왜 주님의 의가 되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시는 주님의 조치가 된다는 말이다. 주님은 "나는 니가 무엇을 노리는지 안다. 너는 실용주의자이니 말이다. 너는 너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골라서 행하지? 사람도 가려서 사귀고 말이야. 사랑도 니가 이용할 가치가 있는 상대만 만나고 사랑하지?" 라고 하시는데,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중세시대에는 그런 것에 의해서 범죄가 일어나니 그것을 '죄' 라고 규정을 했는데, 그러니 사회에서의 죄는 죄가 아닌데, 그 질서체제에서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죽으심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죄가 아닌데, 그렇게 죄가 아니기에 진짜 죄를 보여줄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말이다. 그게 시편 118편인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념을 뒤바꾸는 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행하심인데,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보기에 기이하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기이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들에게는 그게 해석불가이기 때문에 기이하다는 말이다.
◈ 알아들 수 없는 말씀 !! 예수님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모두 차용하시는데, 그러니 그것이 아귀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사용하시는 용어를 쓰기는 쓰시는데, 뒤가 영 이상하다는 말이다. "그래, 내가 죽는다" 라고 하시고는, 우리 생각에는 죽는다고 하면 그 죽는 것으로 끝인데, 그런데 그 뒤에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 라고 하시는데, 도대체 뒤에 그런 기이한 멘트가 왜 붙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내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 라고 하시는 그 말씀을 주위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당시의 제자들도 알아듣지를 못했는데, 그래서 베드로도 뭐라고 했는가?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 누구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 자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기반으로 해서 그 이전에 나왔던 그 모든 기적과 말씀도 역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오늘 제가 강의초반부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는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오해와 오해가 확장될 뿐이라는 말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처벌구조 속에 들어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세상은 모두가 하나님의 처벌구조 속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처벌구조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직장이나 수입이나, 그리고 남녀요소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보는가? 죄인가? 의인가? 라고 하는, 즉 '죄와 의' 라는 구조 속으로 우리를 몰아세우신다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높은 권력자가 목욕탕에 갔는데, 그런데 그 사람이 팬티를 그대로 입고 탕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높은 분이니 그냥 하세요" 라고 하겠는가? 아니면 "팬티를 벗으세요" 라고 하겠는가? 벗으라고 하는데, 물론 아부한다고 그런 말도 못하는 주인도 있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렇게 주님에게는 우리를 무엇으로 보시는고 하니, 목사나 집사나 평신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또한 남자와 여자로 보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옷을 벗겨버리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데, 2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니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는가?" 라는 것인데, "니가 목사냐?"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28절에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관계인가? 존재인가?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는데, 너무 긴장은 하지 마시고 말이죠(ㅋㅋ). 여기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의 차이가 과연 없어지는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과연 그런 차이가 없어지느냐는 말이다. 정담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연극에서의 역할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신분에 대해서는 전혀 차이가 없는데, 즉 목사, 장로, 집사, 그 역할의 차이는 있지만, 하지만 신분의 차이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둘을 구분할 능력이 없는데, 왜 그런고 하니, 직분 자체가 자기 존재를 끌고 들어오기 때문에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장로이다" 라고 하면 그것은 존재가 되는데, 하지만 주님은 장로로서 사용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개념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개념을 모르기에 자기 존재의 가치밖에 챙길 줄 모른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고를 쳤기에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최종적으로 "나는 이만큼 잘난 존재이다" 라는 것으로 해석해야 만족해한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너보다 낫다" 라고 말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해석을 하는데, 하지만 주님은 그게 아니라 역할로 보신다는 것이다.
◈ 연극이 끝나고 난 후 ♬ 전에도 여러 번 언급을 했지만, 제가 참 은혜를 받는 복음송이 있는데,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 라고 말이다(ㅋㅋ). 가사가 너무 좋은데, 초반부터 말이다. 우리는 모두가 연극배우인데, 연극이 무엇인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 줄이 붙어있는데, 즉 꼭두각시라는 말이다. '사운도 오브 뮤직' 이라는 영화를 보면 아이들이 연극을 하는데, 서로가 각자 맡은 노래를 부르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가 주님의 관계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그래서 에서의 경우에는 지옥에 가야하는데, 즉 지옥으로 가는 관계라는 것이다. 야곱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데, 왜냐하면 사랑을 받기로 작정이 되었기에 말이다. 그래서 천국에 가는데, 하지만 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인간들이 판정을 내리겠느냐는 것이다. 각자가 맡은 역할이고 기능인데 말이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죽음도, 우리가 맡은 역할 !!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도 역시 우리가 맡은 역할인데, 물론 먹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늙는 것도 그러한데, 하지만 그냥 늙는다고 하면 "죄를 지었으니 늙는다" 라고 해야한다는 말이다. "청춘이니 아프다" 라는 말도 있지만, 죄를 지었으니 늙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값은 사망이니 말이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래서 우리 몸을 통해서 "나는 죄수입니다" 라는 것을 우리가 늙어가면서 마음껏 드러내고 발휘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늙어가니 이런 역할은 참 쉬운데, 그러니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쿠, 허리야!" 라고 외치는 것도 역할을 감당하는 것인데, 즉 "때가 되매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건강하게 살려고 하지 말고 아파야 한다는 말이다. 교통사고는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하늘나라에게는 교통사고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다가, 정작 교통사고가 나면 이 세상에 대한 정이 그만 왕창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짧은 순간이지만, 그렇게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말씀대로만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그동안 왜 몰랐는가? 그것이 우리에게는 부자연스러운데, 왜 그러한가? 자꾸만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는데, 일단은 자기가 살아야하니 말이다. 자기가 사는 것이 우선인데, 거기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 나는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인데, 남은 굶어죽든지 말든지 아무튼 자기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관계로 보아야 하는 것을 자기 존재로 보게 되니, 모든 것을 억지를 부리면서 해석하게 된다는 말이다.
◈ 히브리서와 제사 !! 이제 히브리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는데, 히브리서에서 예수님만 죽는다고 되어있는가? 아니면 제물도 죽는다고 되어있는가? 히브리서의 취지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구약의 제사법의 완성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은 우스운 이야기겠지만, 옛날에 히브리인들이 제사를 드릴 때 어떻게 했는가? 그냥 종이에다가 '제사' 라고 써서 "신이시여, 제사를 받으소서" 라고 했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제사' 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언어인데, 그런 언어를 드리면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에 일대일로 대응이 되는 실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대응되는 실체로서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염소를 바쳤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사를 드립니다" 라고 말로만 하면, 여기에는 무엇이 벌어지지 않는가? 제물이 되는 실체의 죽음, 즉 죽음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사람이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은 하나의 사건의 연장인데, 즉 "내가 여기에 살아있습니다" 라고 티를 내는 것, 그것이 곧 말하는 것에 해당이 된다는 말이다. 살아있으니 남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데, 그러니 말이란 것은, 그 말에 대응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말은 다 헛방이다" 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맞다는 것이다. 사람의 말은 다 허구인데, 즉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실체는 따로 있는데, 그래서 인간이 내뱉는 모든 말은 "내가 여기에 살아있습니다" 라는 것의 반복이라는 말이다.
◈ 모든 말은 명령이다 !! 예를 들어서, "야들아, 내일이 추석인데 차도 밀라고 하는데 굳이 여기까지 내려올 필요는 없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를 잊지 마세요"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모든 말은 명령이다" 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제대로 보았다는 말이다. 무슨 뜻인고 하니, "하늘에서 비가 오네" 라고 하면서 그것을 다른 누구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 말에 동의를 하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비가 오든지 말든지 나는 오늘 곗돈을 넣어야 한다" 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 말고 내가 신경을 쓰고 있는, 즉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것에 대해서 같이 동조를 해주면 안 되겠는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A : 하늘에서 비가 오네. 모든 관계가 다 그러한데, 사람들은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말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도바울은 틀어버리는데, 즉 "내가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나조차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니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너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역할을 맡긴 분이 따로 계십니다. 나는 그분이 시키는 일을 맡아서, 그 역할만 할뿐입니다. 그러니 나의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나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주를 받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 라는 신학자는 말씀을 세 가지로 이야기를 했는데, 즉 '숨어있는 말씀'과 '적혀있는 말씀'과 '나타난 말씀'으로 말이다. 그것을 '말씀의 삼위일체' 라고 했는데, 나름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숨어있는 말씀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리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언어를 사용하셔서, 그것이 성경이 되었는데, 그것이 적혀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가? 가만히 있어도 실효성이 있는가? 성경말씀은 우리가 지키고 말고 하기 이전에, 이미 바깥으로 튀어나와서 현실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미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러니 우리의 모든 것이 말씀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이 우리에게 시키는데, 즉 우리는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말씀과 관련이 있는데, 그래서 말씀의 삼위일체라는 말이다. 칼 바르트는 기존의 삼위일체는 존재론적이라서 거부하면서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 제사와 실체의 죽음 !! 계속해서 해보겠는데, 모든 인간의 말은 실체가 이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여기에 살아있다" 라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보면, '제사' 라고 글씨를 써서 드려도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받지 않다고 하는데, 즉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실체가 무엇을 보여주는가? 죽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렇게 실체가 죽음을 보여주게 되면, 제사에 참여하던 제사장들은 졸지에 무능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무리 제물을 잡아도 그 어린양의 죽음에 자기가 참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살아있기에, 즉 눈을 뜨고 보기 때문에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오늘도 실패다" 라고 하게 되는데, 즉 제사를 드리면서도 실패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 양이 왜 죽지? 잡으라고 해서 내가 잡기는 잡는데, 반드시 죽을 필요까지 있는가?"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의 특징이 바로 그러한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가 꼭 죽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공자처럼 좋은 멘트를 날리면서,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오래 살면 되는데, 그렇게 꼭 젊은 나이에 죽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왕 서로 만났으니 살아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되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반드시 죽어야만 하느냐는 말이다. 모든 불신자들의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모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포함이 되는데,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신학박사 등등, 여기에는 모두가 다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불신자들은 "꼭 죽을 필요는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일을 너무 과격하게 벌이시는 것은 아닌가? 살아서 좋은 소리를 하게 되면, 우리는 얼마든지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데, 헌금도 할 수 있고, 선교와 봉사도 할 수가 있는데 말이야. 아하, 옛날에 죽었다고? 그러면 안심이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성령 - '니가 반드시 살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성령을 반드시 무엇을 경유한다고 했는가? 십자가를 경유하는데, 주님의 죽으심과, 그리고 살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우리가, 그렇게 서로 충돌하게 되는 작업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작업이라는 말이다. 즉 "너는 니가 반드시 살아야 될 인간이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그렇게 하시면서 성령이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너희는 가면이지 이 세상의 실체가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을 히브리서에서는 '그림자' 라고 하는데, 그러니 양도 그림자이고 제사장도 그림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림자인데, 그것을 야고보서에서는 "너희는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니라" 라고 하고 말이다. (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러니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라고 했을 때, 그 말씀의 취지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뒤따라서 나오는데, "너희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너희는 헬라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즉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로서 헬라인의 기능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여겨라" 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존재가 아니라 관계성이라는 말이다. 즉 "너희는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역할을 해야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남자와 여자, 각자 맡은 역할이 있기에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나오지 싶은데,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아에 처음부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지 말고 똑같이 만들면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도 왜 계속해서 그것이 유용하게 활용이 되어야 합니까?" 라고 나오지 싶은데, 아닌가요? (ㅋㅋ) 왜 그런고 하니, 남자와 여자의 기능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모자이크 무늬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다" 라고 할 때는, 여자의 역할이 따로 있어야 하고 남자의 역할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남자와 여자에게 유리해지라고 그렇게 하신 따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필요해서 "너는 남자고, 너는 여자다" 라고,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로 말이다. 그러니 성경에 장로와 목사와 집사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역할을 하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분적 가치는 다 동일한데, 즉 눈이 발을 보고 쓸데없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모두 같은 혜택을 입는데, 하지만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다. 심는 자가 따로 있고 물을 주는 자가 따로 있지만, 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누구라는 말인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 일명 '팬티바람' 구원 !! 그렇게 관계로 보아야 하는데, 그런데 존재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상급론'이 튀어나오고 마는데, 즉 "너는 봉사해서 마일리지를 얼마나 쌓았노? 나는 이것밖에 안 된다. 니는 참 좋겠다. 하늘나라에 가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곳에 있고, 나는 저 구석에서 팬티만 입고 쭈그리고 있는데, 참으로 부럽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성경말씀을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그렇게 도구주의의 입장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을 의지하자" 라고, 달리 말하면 "주님의 믿자" 라는 것인데, 그것을 바로 "빼먹을 것이 있다" 라는 의미인데, 무슨 빼먹을 것이 있다는 말인가? 누구 좋아라고 말이다. 역할을 맡아서 사용되어지고 있는 입장에서 말이다. 무익한 종이고, 할 바를 할뿐인데 말이다.
◈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 우리의 육신 자체가 주님을 보여주는 기능을 해야만 하는 죄수가 가는 길인데, 그래서 생로병사, 즉 산다는 것 자체가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힘이 드는데, 그런데 히브리서 4장에 보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리만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그것을 체휼(體恤), 즉 동정을 하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힘이 드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 나도 너희들 이상으로 힘이 들었어. 너희들이 어떤 고통을 받는지 내가 다 안다. 너희들의 아픔을 내가 다 이해를 한다. 하지만 너희들이 맡은 역할은 다 해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영생을 얻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를 하겠는데, 복잡한 것은 자꾸 정리를 해야하는데 말이다. 말씀의 실체는 우리가 아닌데, 우리의 말은 자기 자신의 존재함에 있지만, 말씀의 실체는 누가 존재한다는 것인가? 이미 예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언약을 다 이루었는가? 미진한 것이 남아있었는가?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구원에 대해서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손댈 것이 있는가? 없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작업을 주님이 다 하신다는 것이다. 마무리까지 말이다. 지금 주님은 잘하고 계시는데, 우리의 머리를 허옇게 만들어가면서까지 말이다. 모든 것이 죄와 의의 관계인데, 그러니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의가 더 넘치는 이 작업에 대해서, 주님의 일은 전혀 하자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데, 그래서 우리가 지금 죽어도 영생인데, 즉 낙원에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가 알아서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즉 주는 것만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만큼 살면 된다는 말이다.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고 말이다. 우리의 소원은 지금 당장에 하늘나라에 가고 싶은데, 그런데 아직도 살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아직 연극 대본이 다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살아야 하는데, 1월에 딸도 시집을 보내고 말이다. 저희 어머니도 지금 살아있는데, 물론 우리가 보면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주님에게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주님에게 속한 문제라는 것이다.
◈ 우리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 그러면 우리는 왜 죽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도 덩달아서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린양이 왜 죽는가? 장차 오실 메시야가 실체이기 때문에, 그게 앞서서 그림자로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그림자라는 말이다. 사람이 이렇게 서 있으면 그림자가 여기에 있는데, 그러면 사람이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땅에서 어른거리면서 말이다. 아버지의 뜻은 주님만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 주님이 움직이면 덩달아서 우리 인생도 같이 흔들리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같이 붙어있는 관계가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대해서 환장을 하면서 좋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20대나 30대의 연인들이 같이 프로야구를 보는 장면들이 TV화면에 종종 잡히곤 하는데, 그것이 참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여자친구와 꼭 야구를 보러가야지" 라고 하는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데, 즉 그것이 참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봉투에 돈을 넣어줘도 한 번 겨우 나올까 말까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굉장히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을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이미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참으로 부끄러운데,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곧장 무엇을 잊어버리는가? 주님의 죽음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주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놓쳐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즉 굉장히 부자연스럽다는 말이다.
◈ 성령의 충만은, 그 특징이 매우 가벼워 !! 그런데 여기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즉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스데반 집사님처럼 갑자기 죄수의 무게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또한 돌에 맞아서 죽는 것도 유일한 마지막 행복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성령의 충만'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성령의 충만은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매우 가벼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다 아무런 쓸데없는 것들로 여겨지게 되는데, 즉 "아하, 내가 그동안 고민할 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들을 가지고 고만을 했구나" 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은 스데반 집사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니 이미 증명된 것인데 말이다.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다 용서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주여, 저들이 철딱서니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용서해주옵소서"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되기에 !!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은데, 20년 전에 자기 돈을 떼먹고 도망간 놈도 용서해주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자기에게 사기를 친 것은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인데, 그러니 그 사람은 자기에게 사기를 쳐야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그것을 알았기에 용서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용서가 되면 남편이 바뀌고, 또한 여편네가 바뀐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저는 바뀌었는데 여편네가 바뀌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용서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비록 여편네가 바뀌지 않아도 용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용서를 서로 주고 받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도구주의이고 실용주의라는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되는데, 자기 차를 박아도 용서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보험으로 보상은 받아야 하고 말이다. 길에서 침을 뱉어도 용서가 되고, 어차피 지옥이니 말이다. 그리고 추석에 자식놈들이 찾아오지 않아도 용서가 되는데,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왜 일찍 안 와? 점점 성의가 부족해. 내가 사는 것이 꼴 보기 싫으면 죽을게" 라고 하면서 심술을 부리면, 그런 감정이 남아있으면 추석이고 뭐고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된 행복을 누가 막는가? 자기가 자기 인생을 막는데, 그만 착각을 해서 말이다. 자기를 위한 하나님인 줄 알고 말이다. 온유, 양선, 화평, 자비, 형제우애 등등, 이런 것들이 자기가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한꺼번에 다 나오는데, 그런데 그것을 윤리와 도덕으로 억지로 땜질을 하게 되면, 얼마나 그게 어색하고 억지가 되느냐는 말이다.
◈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려라 !! 왜 우리가 죽어야 하는가? 우리가 바로 제물이기 때문인데, 그것이 로마서 12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 라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이 세상을 용서하면서, 자기를 힘들게 하는 자를 용서하면서, 즉 바람을 피운 남편을 용서하면서 말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잠시 택배기사에게 전화가 와서 강의가 중단되었는데, 주께서 보내신 택배이기에 전화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ㅋㅋ)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죽을 줄을 모르기에 말이다. 의로운 관계가 되면 죽지 않는데,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지 않는 것을 두고 고린도후서에서는 "옷을 갈아입는다" 라고 하는데, 즉 이 땅에서의 옷은 벗어버리고 하늘에 속한, 그야말로 천사와 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 며느리가 왜 우는가? 장례식에 가보면, 옷을 갈아입는다고 울고불고 그야말로 난리인데, 망자가 옷을 갈아입는데, 그것이 왜 슬프냐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울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다. 이렇게 말해놓고는 저 자신이 울까 겁이 나는데, 아무튼 울면 안 되고, 울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우는고 하니, 자기 나와바리에서, 즉 자기 구역에서 떠났기 때문인데, 그동안 자기가 투자한 것이 있어서 운다는 말이다. 그동안 병이 들어서 그렇게 애를 먹이던 시어머니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사람들보다 그 시어머니의 병 수발을 했던 며느리가 제일 많이 운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만큼 자기가 투자한 것이 있으니 말이다. 약을 먹이고 반찬도 해드리고, 또한 매일 같이 목욕도 시켜드리고 말이다. 그런 자기의 성과가 그만 떠나고 나니 얼마나 아쉬우냐는 것이다. 이제는 누구를 가지고 자기 존재함을 드러내겠느냐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떠나고 나니 당연히 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홈인가? 하우스인가? "아내가 죽고 난 다음에 집이 홈이 아니라 하우스로 변했다" 라고 하는데, 홈은 가족끼리 사는 것을 의미라고, 하우스는 그냥 단순히 주거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집이 이제는 그만 부동산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딸을 시집을 보내도 마찬가지인데, 너무나 허전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기가 몰랐지만, 자기가 그렇게 자기 영역을 고수하는 것이 바로 모든 세상의 실체인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게 그림자인데 말이다. 이 세상을 자기와 관련을 지었지 주님과 지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과 관련을 지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부자연스러우니 말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원천적이고 본래적인 것을 주입시키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로마서 8장을 보겠는데, 이제 택배도 오고 했으니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말이다(ㅋㅋ).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을 보자.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과연 무엇이 오리지날인가? 29절과 30절에 나오는 이 말씀이 그야말로 오리지날이고 원천적이고 본래적인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이런 오리지날은 생각이 나지를 않고, "내가 살아있다" 라는 것을 오리지날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행동에 나서는데, 그러니 당연히 "제발 나를 알아다오. 나는 이만큼 가치가 있는 인간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가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데, 그것은 자기 몸을 오리지날로 보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이지 전혀 관계가 아닌데, 즉 우리의 몸은 오리지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리지날은 무엇인가? 예수 안에서 미리 정하신 분이 바로 오리지날이라는 말이다. 또한 미리 정하신 그분이 우리를 불러준 것이 오리지날이고, 또한 불러준 그분이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이 오리지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오리지날이신 그분을 증거하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 모든 내용이 바로 성령이 탄식하면서 기도하신 것인데, 그것이 26절에 나온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성령은 오리지날과 관련해서만 기도를 하신다는 것이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사시기의 반복 !! 그런데 우리가 하는 기도의 오리지날은 무엇인가? 그야말로 아쉬운 것인데, 그러니 완전히 사사기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어려울 때는 주님을 찾다가도 해결이 되면 바알을 섬기는데, 물론 그렇게 바알을 섬기다가 얻어터지면 또 주님을 찾고 말이다. 계속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교회 교인들은 기도할 게 없는데,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이다. 모두들 살도 좀 찌고 말이다. 그렇게 살도 오르고 편안해 보이니 저도 참으로 편한데, 바짝 마른 것보다는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참 요즘은 살이 쪘다고 하면 안 되는데, 말을 하고 보니 본전도 못 찾은 기분인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제가 말하는 취지가 무엇인고 하니, 살이 쪘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다는 것인데, 그렇게 편안하면 무슨 기도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평소에는 아쉬운 것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버릇이었는데, 그런데 평안해지면, 그런 오리지날을 가지고는 별로 기도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어제 우리교회 집사님이 기도를 하셨는데, 그래서 제가 그 기도에 대해서 멘트를 했다는 것이다. 괜히 한 느낌도 드는데 말이다.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자빠져서 기도하면 됩니다" 라고 했는데, 그만 너무 자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ㅋㅋ). 그렇게 자빠지고 보니 주님에 대한 감사밖에 없는데,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했다는 말이다. 아무튼 오리지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성경이 너무 부자연스러워요 !! 이번 강의의 제목이 '부자연스러움' 인데, 우리는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면 다 아는 것 같고 참 좋은데, 그런데 돌아서면 이 오리지날이 남의 이야기 같다는 것이다. 비현실적이고 말이다. 교회에 오면 그런 소리를 듣고, 세상에서는 그런 소리가 귀에 별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무엇을 보는고 하니, 예배당이 눈에 들어오면 걱정이 앞서는데, "저기에서도 과연 복음을 전할까?" 라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여러분도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는데, 미장원이 눈에 들어오고 옷가게가 들어오는 게 아니고 말이다. 이렇게 이 세상을 오리지날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관점인데, 이번 겨울수련회 때 이 요한계시록을 강의할 예정인데 말이다. 우리가 껍데기를 벗겨내고 오리지날의 관점으로 봤을 때, 즉 이 세상은 다른 용어를 가지고 표현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해석하려고 하면,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해결이 되는데, 그런데 십자가도 없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려고 하니 온갖 엉뚱한 소리가 다 나온다는 말이다. 십자가가 없으면 해석자체가 불가능하고, 그렇게 해석하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겨울수련회에서는 앞뒤가 맞도록 설명을 해드리려는데 말이다. 이제 진짜로 마치겠는데, 교재 128페이지를 보자. ** "바빠서 못 나왔습니다. 지난주는 집안의 제사 때문에 못 나왔습니다. 지지난 주는 시댁에서 호출해서 못 나왔습니다" 라는 어떤 법칙이 계속해서 작용해요. … "주님께서 법을 주셨으니 나로서는 온 힘을 다할 뿐입니다" 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 저주를 받은 자의 변명입니다.
◈ 왜 변명을 하는가? 그러니 이것은 교회에 나오려고 애를 써도 문제이고, 나오지 못했다고 변명을 해도 문제라는 것이다. 변명을 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주님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었기에 말이다. 그런데도 변명을 하게 되면 주님이 그만 머쓱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일은 내가 벌렸는데 니가 왜 변명을 해?" 라는 식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서, 교회에 오는 그만 자동차가 고장이 났다고 하면, 그런 일을 누가 벌렸는가? 그런데 왜 그것을 목사에게 변명을 해야하느냐는 말이다. 목사가 뭐라고 말이다. 그냥 사는 대로 살아가면 되는데, 어차피 자기가 만든 자기 인생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는 주님이 얼른거리니 같이 얼른거리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만 모여서 뭐라고 하면 되는가? "우리는 그림자인데, 오리지날은 주님이 말씀대로 오늘도 이렇게 이렇게 시행을 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씀의 떡을 서로 나눠서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리지날 맨'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렇게 예수님만을 증거하면, 그것이 곧 성령님의 원하는 바대로 되는 것인데, 그게 주님이 보시기에 흐뭇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머리는 주님이고, 우리는 그 주님의 지체이니 우리도 역시 좋다는 것이다.
◈ 니는 니 역할, 나는 내 역할 !! 그러니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냥 사세요"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주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소품이고 우리는 연극무대에 놓였다는 것이다. 즉 "니는 니 역할, 나는 내 역할!", 그렇게 주신 것에 감사하면 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주시면 감사히 먹고, 물론 개고기는 좀 곤란하지만 말이다(ㅋㅋ). 그렇게 주님을 찬양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인생이란 것은 없고 주님이 지정하신 인생뿐인데, 그런데 우리는 왜 자기 인생을 저주하고 실패했다고 여깁니까? 왜 그렇게 스스로 힘들게 하는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제나 주님이 주시는 것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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