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37 - 동질성 / 150810 본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7 - 동질성 15,08,1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21페이지부터 살펴보자.
(잠 2: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 큰 성 바벨론, 음녀 !!
여기에 교재에 보면 잠언 2장의 말씀이 있는데, '음녀' 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게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기도 한데, 거기에 보면 무엇을 음녀라고 이야기하는가? '큰 성 바벨론'을 두고서 음녀라고 한다는 말이다.
(계 17: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 악의 구체성 !!
그래서 '악의 구체성' 이라는 것이 매우 어려운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만약에 악이 구체적으로 그 대상이 분명해져 버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피하게 되면 악하지 않고 계속해서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무엇이 악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있으니, 그것을 피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음녀가 그만 큰 성 바벨론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온 세상이 다 음녀가 되는 것이니, 그러면 우리가 어디에서 살면 되겠는가? 지리산 깊숙이 들어가면 되겠는가? 아니면 달나라에 가면 되겠는가? 큰 성 바벨론 자체가 음녀라고 하면, 이 음녀가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하나인데, 그러니 그 하나밖에 없는 현실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음녀가 되지 않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말이다.
◈ 우리는 모두가 '음녀 기여자' !!
다음에 대전에서 할 겨울 수련회에서 강의할 예정인데, 그 주제가 요한계시록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음녀가 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러면 이 문제가 어떻게 되는가? 더 나아가면 우리 자신이 음녀가 음녀가 되게 하는데 기여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들이 모여서, 그게 이 세상이 악한 여인으로 취급을 받는데 보탬이 되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말이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렇게 우리를 몰아넣는 그 힘,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있으면서 악을 규정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바깥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렇게 세상 바깥에 나와서 "저것은 음녀이다" 라고 해야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한 통속이 되어서 "니가 나빠. 나는 옳아" 라고 하려고 하면, 그렇게 하려고 하면 나쁨 속에서 선과 악을 분할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분할시키는 인식이나 자격이나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를 빼고 악하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 채로 음녀로 보는 것과는 맞지를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먹물을 왕창 부어놓았는데, 그런데 "나는 깨끗한데 너는 왜 더러워?"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 이라는 동화의 나오는 내용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되는데, 즉 구원이라는 것은 물에서 빠져 나온 것과 같은 것인데, 그런 사람은 자기가 이전에 물에 빠졌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즉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 비로소 "아하,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가운데 있었구나" 라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물에서 나온 다음에 "내가 물에 빠져 있었네" 라고, 자기가 물에 빠져 있었음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물 속에서는 이미 빠져있음을 알 수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나 권리가 능력이 전혀 없었다" 라는 것을 항상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원받는 방법을 늘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것은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 빼놓고 다 망해라" 라는 식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틀렸다는 것이다.
◈ 음녀의 반대말이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음녀의 반대말이 무엇인가? "1.살림을 잘하는 여자, 2.내조를 잘하는 여자, 3.조신한 여자, 4.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 라는 것 중에서 몇 번인가? 4번이라는 것이다. 차마 여기 보기에는 넣지 않았지만, 잠언서 마지막 31장에 고면 얼굴이 예쁜 여자도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 헛것이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 권사님이 웃으시는데, 자기가 왕년에 예뻐봤기 때문에, 그런 예쁜 것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얼굴이 고우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여유인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얼굴이 곱고 아름다는 것도 음녀의 반대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잠 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 성경에서 왜 음녀를 거론하는가?
더 어렵게 이야기를 하면, 성경에서 음녀를 거론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음녀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설명하려면 애굽이라는 것이 필수적으로 밑에 깔려줘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그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곧 성도라는 것이다. 자기도 보통 인간이고 싶은데, 특출한 것도 짜증이 난다는 말이다. 괜히 남에게 욕만 얻어먹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새로운 피조물로 다룬다고 하면,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출애굽을 할 때 히브리인들의 소망이 무엇인고 하니, 탈출이 아니라 애굽 사람들과 동질성을 이루면서 사는 것인데, 그냥 같이 사이좋게 말이다. 괜히 유별나게 살면 인생이 힘이 드는데, 그러니 애굽 사람들과 같은 백성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탈출이란 것은 자기들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일제에게 36년 동안 압제를 당했을 때, 그때 김구 선생님이 "여러분, 우리가 이제 일본의 압제에서 독립을 합시다" 라고 하면, 거기에 윤봉길, 안중근 등이 동의를 열렬하게 할텐데 말이다. 그런데 김구 선생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일제가 아니라, 음녀로부터의 독립입니다"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나온다면 누가 독립자금을 대주고 몸을 바쳐서 독립운동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암살' 이라는 영화도 나오지 않았지 싶은데 말이다.
◈ '동질성 유지'가 곧 근원적인 악 !!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근원적인 악이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동질성 유지' 라는 것이란 말이다. 17살을 먹은 사춘기의 소녀가 예뻐지고 싶어서, 그래서 돈을 모아서 성형외과를 기웃거리는 것이 왜 극악 무도한 죄가 되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동질성 확보라는 말이다. 즉 "나는 전지현처럼 예뻐지고 싶다" 라는 것이다. 같은 애굽 사람들끼리는 하등의 죄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래, 수능시험을 잘 치면 시켜줄게" 라고 하면서, 그게 공부를 잘하게 하는 유인책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니가 공부만 잘하면,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지고, 그러면 니 인생이 완전히 핀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무엇인가? 고운 것도 다 헛된데, 그러니 그렇게 고운 것도 찾아서 자꾸 성형외과를 다니다가 보면 무엇을 빠트리는고 하니, 정작 이 세상을 음녀로 간주하신 하나님의 그 해석, 그런 하나님의 관점을 우리가 발로 차버리는 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예, 감당하지 않겠습니다 !!
그러면 성도는 무엇인가? 성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예쁘면 좋고 못나면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경우에도, 자기도 애굽 사람들처럼 동질성을 유지하고 싶은데,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관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옆구리를 쑤신다는 말이다. 왜 그런 광고가 있는데, 덩치가 큰 농구선수가 하늘에서 땅을 보고 이야기하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헛된 것이야" 라고 하시는데, 그래서 옆에 있는 친구에게 "너도 하나님이 쑤시던가?" 라고 하면, "이게 미쳤나? 무슨 소리고?"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자꾸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 라고 하면, "교회에 나가더니 드디어 맛이 갔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점점 다른 존재가 되가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것을 자기가 요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은 애초부터 성도가 아니라 마귀의 장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이 쑤셔서 말씀의 세계로 이끄셔서 말씀에 관심을 두도록 만들게 되면, 그것은 자기 자신도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데, 그럴 때는 자기를 감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다(ㅋㅋ). 참 쉬운데, 자기를 감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더라" 라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쿡쿡 쑤셔주시는데, 그런데 왜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알아서 구원을 받고자 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편적인 평가를 무시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자기가 스스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 자기가 스스로 성도가 되려고 하는 것, 그것은 마귀가 만든 짓거리라는 말이다. 마귀는 되지도 않은 일은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생명나무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겨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따먹은 자기가 해결하려고, 그래서 선악과의 독소를 토해낸다고 하면서 아무리 토악질을 하더라도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마귀가 알고는 마귀가 어떻게 하는가? 바로 그 방법을 사용하는데, 종교를 만들고 교회를 만들어서 말이다. 즉 "니가 열심히 노력하면 과거의 그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다"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이다.
마귀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러니 마귀의 그런 사기에 대해서, 우리가 모두 다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게 마치 진실인 것처럼 납득이 되고 승인이 되는 자들은 결코 성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이 조절을 하신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요한계시록 17장을 보면, 예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위상을 모르는 유혹과 힘의 세상을 두고 음녀라고 합니다. 즉 음탕한 여자라고 했어요.
(계 17:4)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 힘의 세상 !!
여기 교재에 보면 '힘의 세상' 이라고 했는데, 즉 힘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힘인지 아닌지는, 그것은 힘의 방향을 가지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힘의 방향이 현실유지, 즉 동질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음녀에게서 나온 힘이고, 반면에 이 세상을 떠나라고 하는, 즉 이 세상과의 분리라고 한다면 주님이 주신 힘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강제로 떼 내는 힘, 강제로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나게 하는 힘, 그 힘과 머물려고 하는 힘과의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의 구조, 그것이 바로 이 현실세계라는 말이다. 즉 말씀 세계와 말씀 바깥의 세계,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있지를 못하다는 것이다.
◈ 윤도현 밴드의 '사랑했나봐' ♬
이번 수련회를 다시 생각해보면, 백지영과 윤도현에게 감사하고 싶은데 말이다(ㅋㅋ). 물론 백지영은 '총 맞은 것처럼' 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임을 알지 싶은데, 그리고 윤도현은 '사랑했나봐' 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말이다. 이 노래는 전해성이라는 사람이 작사 작곡한 것인데, 그때는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었기에 그 노래가사를 언급하는 것을 자제를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참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어서, 수련회 때의 삼손이나 오늘 말씀을 생각해서, 이 '사랑했나봐' 라는 가사를 설명하고 싶은데 말이다.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 라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이성적으로 살고 싶어도 우연적으로 폭발하는 인간의 감정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 내가 '믿을래' !!
그러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을 인간은 어떻게 해결하는고 하니, 지금 남자가 오랫동안 만나던 여자와 헤어지고 나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 가사에 보면 나름대로의 해결책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한 번쯤은 날 뒤돌아보며 아파했다 믿을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자는 이미 떠나고 남자가 그것을 견딜 수가 없는데,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도 견뎌야 하니까 어떻게 하는고 하니, 여자와는 상관이 없는 남자만의 생각인데 말이다. 그래서 남자는 생각하기를, "여자가 한 번쯤은 뒤돌아보면서 아파했다" 라고, 그것을 남자가 믿고 싶다는 것이다. 여자가 아닌 남자가 말이다. 그러니 이 남자는 "내가 여자를 사랑한 만큼 여자도 나를 사랑했을 거야" 라고, 그것을 자기가 믿고 싶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까,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라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이 드니까 예수를 믿는데,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그래, 니가 참 믿음이 좋구나" 라고 생각을 하도록, 그렇게 자기가 일방적으로 믿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해서 주님이 하시는 판정을 자기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주님이 나타나서 "니가 믿는 것이 진짜다" 라고 해주면 참 좋겠는데, 그런데 자기가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무소식이 견딜 수가 없어서,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주님도 자기를 사랑한다고, 즉 "나도 너 때문에 참 마음이 아파" 라고 자기가 일방적으로 지어내어서 믿고 싶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여기 가사에서 '믿을래'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예수를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인간들 !!
하지만 이것이 진짜 믿음인가? 물론 가짜인데,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게 인간의 한계라는 말이다.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최면을 걸어서 '믿을래' 라고 하니, 그런데 인간은 그 의식이 정서적우로 계속해서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수시로 커피를 마셔가면서 철야를 해야하고, 금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믿고 싶다. 믿을래" 라고 하는데, 그 다음 가사에 보면 "짠쨘, 바보인가 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바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그런 바보가 아닌 방식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장차 구원을 받을지 받지 않을지, 그 알 수 없는 불확정성, 그것 때문에 지금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도대체 강도를 무엇을 믿었기에, 그렇게 믿음이 좋아서 주님이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셨는지, 왜 자기에게는 주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주님이 저에게도 "근호야,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신 적이 없는데, 정말 그랬다면 녹음이라도 해놓고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래서 인간은 최면에 또 최면을 걸고, 계속해서 그것을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목사에게도 가서 자기에게 최면을 걸어달라고 요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믿습니다. 주여, 주여!" 라고 아이들처럼 통성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왜 유투브에 보면, 아이들이 나와서 "믿습니다. 아버지여, 집을 사주세요" 라고 하면서 통성기도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유투브 사이트에 가서 '통성기도를 하는 아이들' 이라고 치면 나온다는 말이다(ㅋㅋ).
사람들이 왜 복음을 싫어하는고 하니, 그 복음이 자기가 유지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와버릴 때,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가짜로 들통나는 것이 무섭기 때문에, 복음이 나오는 쪽을 계속해서 밀어버린다는 것이다. "니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말씀을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에게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졸지에 자기가 어떻게 되는가? 불신자가 되고 마는데, 그것이 너무 너무 싫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불신자라는 것은 자기도 알고 남도 알지만, 하지만 그것을 자기가 인정하기는 싫다는 것이다. 아무리 알기는 알아도 말이다.
◈ 억지 기도, 억지 찬양, 억지 헌금, 억지 예배 !!
이번에 오용익 목사님의 수련회 소감문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오는데, 억지 기도, 억지 찬양, 억지 헌금, 억지 예배라고 말이다. 소감문은 억지가 아닌지 모르겠는데(ㅋㅋ), 아무튼 새로운 게 나오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억지로라도 해서 견뎌야만 하는데, 그렇게 견딜 수 없음을 "아파했다. 믿을래 ♬"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믿으면 행복해져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뒤에 가사를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꾸만 날 작아지게 만들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보면 "멀어지는 니 모습처럼"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청년 때에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몇 십 년을 하게 되면 그때는 주님이 보이지 않게 되는데, 특히 이런 현상들이 목사에게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목사가 나이 60이 넘으면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데, 너무 오래 믿어서 지루하기 때문에 더 이상 믿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재미가 하나도 없는데, 이제는 믿는지 믿지 않는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목사가 그 나이가 되면 월급날만 기다리지,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원로목사가 되어도 그렇고 말이다. 신앙생활은 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들킬까 싶어서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구제를 해야합니다" 라고 하면서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는 것이다. 자기가 믿음이 없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말이다.
◈ 널 닮은 미소짓는 !!
그렇게 "멀어지는 니 모습처럼" 라고 한 다음에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게 중요한 대목인데, "언젠가 다른 사람 만나게 되겠지" 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여자와 헤어지고 난 다음에 다른 여자와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가 누구를 닮았는고 하니까, "널 닮은 미소짓는" 라고 한다는 것이다. 표현이 참 끝내주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상상한 예수와 닮은 비슷한 예수를 자꾸만 창안해서 믿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헤어져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데, 설령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만나더라도 자기가 새롭게 사귈 여자는 그 여자와 미소가 비슷한 여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즉 남자가 신부감을 자기 엄마와 닮은 여자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게 총각들의 공통점이라는 말이다. 자기에게 너무나 잘해주었던 엄마와, 비록 몸은 분리가 되었지만 정신은 분리가 되지 않는 상태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엄마의 사랑이 자기의 아픈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제 진짜 엄마는 늙어서 안 되고, 그것을 대신해서 해줄 수 있는, 즉 "엄마인 듯 엄마가 아닌 엄마 같은 여자 ♬",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엄마와 닮은 여자를 자기의 신부감으로 채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윤도현 밴드가 부르고 전해성이 작사 작곡한 '사랑했나봐' 라는 노래의 내용인데 말이다.
◈ 악마 - '그러나 나는 버리지 않으리라' !!
그렇게 계속해서 예수가 아닌 유사 예수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세상의 생로병사의 아픔을 채워줄 수 있는, 누가 자기를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는, 그렇게 자기의 미진한 부분을 채워주는 예수, 그런 하나님, 그런 삼위일체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어제 오후시간에 설교를 했는데, 즉 자기가 힘이 없는데 그래서 힘을 대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데, 그게 바로 '악'이 된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그렇게 해서라도 과연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가? 주님께서는 가치가 없다고 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켰는데, 그런데 우리는 추방이 된 채로, 추방된 그것이라도 의미가 있게 간직하려고 하는데,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마귀와 한 패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버린 자식, 그러나 나는 버리지 않으리라"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귀가 우리를 위로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오늘 좋은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즉 "신은 우리를 버렸지만, 나는 나를 버리지 않으리" 라고 하는, 그게 성형수술로 연결되고 한다는 말이다(ㅋㅋ).
"저 사람은 공부는 잘 하는데 얼굴은 못생겼다" 라는 말이 있는데, 물론 남들은 그것을 두고서 "신은 공평하다" 라고 하는데, 김태희처럼 예쁜 얼굴에 공부까지 잘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는 그렇지 않은데, 자기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사기 사장, 사기 상무, 사기 부장 !!
그래서 인간들의 모든 학식과 경험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나중에 성인이 되면 사기를 치는데 그것을 몽땅 다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신입사원들은 사기를 칠 줄 모르는데, 순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배들이 가지고 논다는 말이다. 그러면 누가 사기를 가장 잘 치겠는가? 사장, 상무, 부장, 그리고 과장도 좀 치고 말이다. 물론 대리는 어설프고 말이다.
◈ 우리 직원들이 사기를 치는데 서툴러서 죄송합니다 !!
그래서 소비자들이 항의를 하면 누가 나오는가? 신입이 아닌 노련한 상사가 나와서 뭐라고 하는가? "우리 직원들이 서툴러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 앞에 빠진 것이 있는데, 즉 "우리 직원들이 사기를 치는데 서툴러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평생을 사기를 치다가 은퇴를 하게 되면, 그러면 이제 남는 사기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동안 자기는 열심히 살았다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 죄를 가리는 사기를 또 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사시를 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고 하니, 이미 소속이 음녀 출신이라고 하면 그 출신답게 사기를 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세계에 속하지 않은 분이 딱 한 분 계시는데, 누구이겠는가? 음녀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그런 사기꾼들의 집합체에서 유일하게 속하지 않는, "나는 진실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이 누구냐는 말이다.
◈ 지혜와 음녀 !!
그것을 이 잠언서에서는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지혜', 혹은 '슬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잠언서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게 말하는 그 말이 아니라, 지혜, 혹은 슬기가 어떤 인격, 즉 인물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라, "어이, 지혜야!"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즉 "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혜' 라는 말이다. 잠언서에서는 그 지혜로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말씀으로 말이다.
그렇게 지혜와 슬기가 주어지는데, 바로 이 지혜와 슬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잠언서에는 음녀라는 말이 짝을 이루어서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제가 한 이야기한데, 우리가 음녀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음녀가 되기 싫어요" 라고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음녀 속에서, 이 하나밖에 없는 세상에서 태어났기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음녀답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음녀와 하나가 된 세상에서는 사기를 치지 않으면 굶어죽는데, 물론 사기에는 적극적인 사기도 있지만 소극적인 사기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력서에 자기의 어두운 면을 다 기록하지 않는 말이다. 미치지 않았다면 자기 약점을 거기에 왜 기록하느냐는 것이다. 취직도 안 되게 말이다.
그래서 장점은 내세우고 단점은 숨기는데, 결혼을 하려고 선을 보는데 자기 단점을 왜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 아이를 낳으면 그때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어쩌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그 이전에 미리 그런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진실게임' 이라는 게 있는데,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기라는 것이다. '솔직하게' 라는 말을 앞에 붙인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 "지금부터 사기를 치겠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솔직한 것은 없는데, 죄를 짓는 것을 인정하는 만큼 솔직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 이 세상은 정치적 구조 !!
그래서 이 세상을 '정치적 구조'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 말이다. 협상과 타협과 양보, 그것으로만 엮어져 있다는 것이다. 진실하면 안 되는데, 협상하고 타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느 정도 악해야하고, 어느 정도 착하게 될 때, 자기가 비로소 그 세계에서 밥이라도 먹고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서에서 뭐라고 하는가? "너무 착하지도 말고, 너무 악하지도 말라" 라고 하는데, 얼마나 예리한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새삼스럽게 지키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인데, 적당하게 말이다. 그래서 너무 가난하거나 너무 부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너무 가난해지면 남의 물건을 훔치게 되고, 그리고 너무 부자가 되면 더욱 더 욕심이 나니 말이다.
(잠 30:8)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 수준을 내리고 내려서 !!
그런데 만약에 그 상황이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수준이 또 내려가는데, "주여, 건빵이 3개도 많사오니 2개만 주옵소서" 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나만 살게 해주소서" 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즉 "나만 살게 해주시면, 나의 가족만 살게 해주시면 참 좋으신 세상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과연 진리인가? 물론 거짓인데, 이게 음녀의 속성이고 생리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지혜이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하나의 세계가 통 채로 음녀가 되면, 그 안에서는 그것을 음녀라고 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 세계 안에서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참 더러운 세상이네" 라고 말을 하게 되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기 자신만큼은 그 음녀에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통 채로 음녀로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즉 "니가 그런 소리를 한다고 음녀에서 구별된 특정한 사람이 되는 줄 아나? 그런 것은 없어" 라고 된다는 말이다.
◈ 이 세상에서 퉁겨나가신 분만이 !!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음녀라고 판정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어떤 분이어야 하는가? 처음부터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퉁겨나가신 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유일하신 분이 누구인가? 그러니 자기가 알아서 나가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알아서 나가면 어떻게 되는가? "이 세상이 음녀라고 했는데 괜찮은 세상이네. 아무도 나를 간섭하지 않고, 나쁘다고 해도 막상 와보니 별로 나쁜 것도 없네. 그러니 이런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조치가 오히려 문제가 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 의인 50명이 다칩니다 !!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생각이었는데, 아브라함이 기도를 10번이나 하면서 하는 말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이여, 그 소돔과 고모라에 제 조카 놈이 있는데 어지간하면 좀 봐주세요. 의인 50명이 있으면, 그들이 다치기 때문에 좀 봐주세요" 라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무엇인가? 이런 게 참 재미있는데 말이다.
아브라함의 기도내용은 "하나님, 50명이 다칩니다. 그러니 심판을 하시면 죄도 없는 의인을 치는 것인데, 그러면 의로운 하나님과는 모순점이 생기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면, 의로우신 분이 의인을 치는 것이 되니 말이 안 됩니다. 물론 그들이 나쁜 것은 아는데, 하지만 의인 50명이 있으니 좀 봐주세요" 라는 것인데, 그것이 기껏 아브라함이 내세운 이성적인 논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의인은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의인이 50명이 없다" 라는 것으로 잘못 이해를 해서 뭐라고 하는가? 50을 45명을 내려서 다시 묻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던 수준을 내려서 말이다.
(창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제가 이번에 수련회를 하면서 중요하게 이야기한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까, '악' 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관할 아래에 있는 '나'를 바깥으로 나오게 해서, 그 '나'를 다시 관찰하는 것인데, 그것이 곧 '절대적 악'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 (An/Bn)B !!
이게 참 어려워 보이지만, 공식으로 하면 쉽다는 말이다. 큰 괄호 옆에다가 B를 붙이게 되면, 이 B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말이다. 그러면 밑에는 B층이고 그 위에는 A층인데, 그 옆에 무한대를 의미하는 n을 붙이게 되면, 그러면 '(An/Bn)B'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그 어떤 변화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B가 아무리 변하고 A가 아무리 변해도, 그것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들이란 말이다.
그것이 곧 골로새서 1장 16절에 있는 말씀인데, 그러니 여기 아래에 숨어있는 B층도 모든 것이 주를 위해서, 그렇게 동반해서 같이 나타난, 그런 현실세계의 밑바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동반해서 간다는 말이다. 마치 얇은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흐르는 것처럼, 그런 판을 기준으로 해서 흐른다는 것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물론 여기 위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아파했다 믿을래 쨘쨘 바보인가봐 ♬" 라고 하면서 매일같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는 것이다. 그런 세계, 그런데 여기 얼음장 밑으로는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예정한 세계, 그것을 하나님의 '자기 존재증명'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인데, 그러니 이 공식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이다. 모든 성경해석은 말이다. 선악과를 왜 심었고, 생명나무는 왜 있는지, 그 모든 것이 말이다. 악을 악답게 드러내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예정코스인데, 마귀를 마귀답게 말이다.
◈ 드리워진 말씀의 긴 망토 !!
우리가 공부한 논리에 의하면 바깥에 있어야하는데, 이 바깥에서, 즉 B에서 통 채로 음녀라고 규정이 된다는 것이다. A가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질이 급해서(?), 말씀을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미리 깔아놓았다는 것이다. 저는 그것을 '긴 망토' 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중심인데, 그런데 망토가 너무 길어서 창세기까지 뻗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뻗어있는 망토에 예수 그리스도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는 말이다.
마치 국제 영화제를 하면 연예인들이 붉은 카펫을 밟고 등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인류는 주님이 하신 일을 밟으면서 온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발자국을 남기면서 말이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셨는데, 즉 모든 것을 끝내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에베소서 3장에 보면, 창세 전부터 숨져진 비밀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엡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로마서 16장에 의하면, 그것이 복음의 바로 비밀인데, 그런데 목사들이 그것을 어떻게 한다고 하는가? 사도바울은 목사들이 주님이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데 이 복음을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는 것이다.
(롬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그런데 목사들의 배를 채우는데 목사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닌데, 교인들이 힘을 합쳐서 거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빌립보서 3장에 의하면,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너희들의 행동이 십자가의 원수이다" 라고, 즉 십자가의 원수로 행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 그게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고?
그들에게 말씀을 주니까, 그들은 오히려 이 말씀을 가지고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삯군들은 뭐라고 하는가? 십자가는 이미 지나갔다고 한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자기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주님에게 둔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십자가를 한 번 보았으면 되었지 계속해서 보면 안 되고, 그 관심이 자기에게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게 마귀의 종들의 특징인데, 왜 그렇게 하는가? 교인들이 그것을 좋아하니 말이다. 그들이 십자가가 그리워서 오는 자들이 아닌데, 다만 자기의 생로병사가, 즉 자기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것을 원상회복 시키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A층의 일인데, 그런데 너무나 믿음이 없으니 뭐라고 하는가? "아파했다 믿을래 쨘쨘 바보인가봐 ♬"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에게 최면을 걸고 싶다는 것인데, 잃어버린 자기의 청춘이 그리워서 말이다.
◈ 이스라엘만큼은 '잠언' 이라는 이름으로 내부 깊숙이 !!
그러면 주님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바깥에서 보는 그 지혜를 이스라엘만큼은 '잠언' 이라는 이름으로 속에다가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여기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인데, 즉 바깥에서 보는 관점이 이미 음녀 속으로 들어와 버렸는데, 그러니 이것은 '유한한 경계를 가진 무한'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수련회에서 다 했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들인데 말이다(ㅋㅋ). 경계를 지었는데, 즉 이 세상이라는 판이 유한한데, 그래서 우리 모두가 경계를, 즉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우리 속에 어떤 인물이 등장했는데, 그런데 이분은 우리가 보기에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즉 너무나 평범하다는 것이다.
◈ 예수도 인간이다 !!
오늘날 철학자들이나 소설가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모두가 육체로 알고 있는데, 결국은 "니나 나나 똑같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봐도 예수님이 그렇게 묘사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예수님이 매우 똑똑하고 착한 것은 인정해주겠는데, 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가 인간이니, 그 인간이라는 동질성에 예수님도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그도 목수의 아들이니 말이다. 그래서 제가 '동질성'을 악이라고 했는데, 인간은 그렇게 동질성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그게 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하늘에 속한 분이라고 하면 누구의 동질성이 깨지고 마는가? 자기 동질성이 깨지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가 아닌 것이 되니, 그러면 그동안 자기는 가짜를 붙들고 있었다는 말인데, 그것이 들통나게 되니 강한 저항력이 내부에서 올라오는데, 그게 곧 마귀라는 것이다. 그것이 일곱 귀신인데 말이다.
그렇게 귀신들이 적극적으로 밀어내는데, 즉 "나는 나이고 싶어요" 라고 말이다. "나는 탈출이 싫어요. 이 땅에서 살고 싶어요" 라고 하면서 자기 동질성을 유지하고 싶어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니 어떻게 나오는가? "그래, 예수님을 믿어줄 게요. 하지만 나의 동질성은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한다 !!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졸지에 이 땅에 무엇에 퍼지는가? 예수님이 빛으로 오심으로서 주변은 졸지에 한꺼번에 다 어둠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 어둠의 특징에 대해서 요한복음 3장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한다" 라고 말이다. 아주 멋진 표현인데, 그렇게 믿고 싶어도 믿지 못하는 것이 확정된 상태에서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모조리 가짜라는 것이다. 가사에 나오는 '믿을래' 라고 하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은 "예수고 석가고 간에 모두 믿어서 생로병사로 고통을 받는 이 세상에서 나의 동질성을 회복하리라" 라고 하는, 그런 자기 동질성을 쥐고 있는 악을, 그런데 그것을 의로움이라고 하면서 유지하고 싶은, 그런 악마의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여기서 정리해보면,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취지가 무엇인고 하니, "과연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인간인가?" 라는 것인데,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싶다고 해서 성도가 아니라, 차라리 남들과 똑같다면 오히려 편하다는 것이다. 튀지 않으니 말이다. 튀는 것은 싫은데, 평범하고 싶다는 것이다.
인기 연예인들이 연기를 할 때는 그렇게 드러내놓고 하지만, 막상 집에 오면 숨어버리는데, 동네에서도 자꾸만 따라다니면 귀찮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경우에, 연기를 할 때는 대단하게 보일지 몰라도, 하지만 집에서는 그냥 평범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영애가 대장금의 주인공인데,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요리를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똑같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생활을 오래한 목사들이나 장로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50년을 믿어보았지만 별 것이 없다" 라고 하는 말이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고 말이다. 우리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은데, 똑똑하게 애굽에서 살고 싶다는 말이다. 그런데 탈출은 우리의 과제가 아니라 주님의 과제라는 것이다. 목자가 양을 알아보고 그 양을 놓아주지 않으니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자기는 똑똑하고 싶은데, 그런데 목자가 뭐라고 하는가? "너는 내 양이니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라고 하면서 놓아주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고 하니, 환난, 곤고, 기근, 핍박, 적신 등등, 그것을 요즘 말로 번역하게 되면, 회사 부도, 세월호 사건, 제2의 6.25, IMF, 뺑소니 등등, 그게 '피' 라는 책 앞부분에 나오는데 말이다. 차라리 자기가 사고를 당하면 몰라도, 멀쩡한 신혼부부를 자기 실수로 교통사고를 내서 그 가정을 박살을 내게 되면, 평생을 그게 자기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자기가 평생 죄인이 되기에 말이다.
◈ 김정은 주연의 '여자를 울려' !!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너무 사랑하는데, 그 여자는 강력계 형사출신이라는 것이다. 둘 다 이혼한 경력이 있고 자식도 있었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여자의 아이를 자기 아이가 그만 왕따를 시켜서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는 그것도 모르고 여자를 그만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견딜 수가 없어한다는 말이다.
거기서 여자가 뭐라고 하는가? "당신의 자식이 내 자식을 죽였는데, 당신이 나에게 위로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정 그렇다면 당신의 아이를 멀리 보내" 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 남자가 자기 멀리 외국으로 보냈는데, 그런데 그 아이가 그만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물론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 주인공 여배우가 아마 김정은이지 싶은데, 북한의 김정은 말고 말이다(ㅋㅋ). 그렇게 같은 아픔을 겪으니 동질성을 가지게 되는데, 하지만 둘 다 자기의 동질성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자식을 잃었으니 나는 의인이다" 라고 하는 그 동질성을 말이다.
그러므로 이 드라마가 얼마나 음녀적인지 모르는데, 음녀가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자식을 잃은 것을 가지고 대가를 치름으로 해서, "나는 자식을 잃은, 나는 상처를 입은 의로운 여자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자기를 떠남으로서 자기는 의로운 천사가 되는, 그리고 그 떠난 남자를 걱정하는데, 왜냐하면 그 남자가 말기 암에 걸렸으니 말이다. 자기는 그 정도로 착한 여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무튼 '여자를 울려' 라는 드라마의 내용이 그렇다는 말이다.
◈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그 드라마가 왜 인기가 있는가? 사람들이 동질성을 느끼는데, 거기서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그냥 '믿을래' 라고 하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그게 바로 어둠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믿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믿지 않는 것을 두고 요한복음 3장에서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믿는 것 !!
그러면 구출은 무엇인가? 흔히 말하는 구원, 즉 "예수 이름으로 구원한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이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자는, 그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빛을 빛으로 알고서 어둠 속에서 놀랍게도 빛을 고집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가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믿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행하신 일임을 믿어야 하는데, 즉 예수님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행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소급해서 믿는 것, 그것도 역시 믿음의 내용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세 글자로 '새 언약' 이라고 하는데, 혹은 '새 언약의 효과' 라고 해도 되고 말이다.
◈ 나의 일은 없어 !!
더 간단히 말하면, "내가 사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었고, 예수님의 일이었다" 라는 것이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공식대로 하자면, 큰 괄호 옆에다가 B를, 즉 예수님의 일이었다는 말이다. 그것을 소급해서 차후에 우리가 알게 되는데, 성령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의 일은 없는데, 없다는 것이다.
주님이 일을 하시니 우리는 놀면 되는데, 하지만 "주님이 일을 하시니 나도 일을 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반응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데, 그 반응이 바로 음녀와 같은 이 세상에서 음녀로 살아가는 것인데, 그것이 곧 이미 물에서 건져냄을 당하고 난 뒤에 물에 빠진 그 상황을 우리가 평생동안 재현하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 시키는 대로 죄를 지으면 O.K !!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기는 힘들지 몰라도 신앙생활은 참으로 쉬운데, 시키는 대로 죄를 지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죄의 수준이 다른데, 그 보는 관점이 주님의 안목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만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말하는 죄라는 것은, 주님 안에 있으면서도 상상을 해서 자기 영역을 따로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 있는 자기를 쳐다보는 식으로, 그렇게 새로운 영역을 따로 구축하는 것이 죄라는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주님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강도가 되고 세리가 되고 창기가 되어서, 삭개오가 되어서, 그냥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이 주님에 의해서 죽은 자로 다루어짐을 고백하면 된다는 것이다.
◈ 삭개오의 웃음 !!
어제 주일학교 설교를 하면서 삭개오 이야기를 했는데, 그림책을 가지고 말이다. 그 책 앞부분에 보면 삭개오가 이를 드러내면서 웃는데, 왜냐하면 돈이 들어오니 말이다. 자기가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세금을 내라고 삭개오에게 지목을 했으니, 삭개오는 가만히 있어도 돈이 막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고에 돈주머니가 쌓여있는 장면이 있고 말이다.
삭개오는 경우에는, 국가에는 자기가 약속한 만큼만 바치고 그 나머지는 자기가 수수료로 챙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금을 매기는 것은 자기가 알아서 하니까, 그러니 자기가 먹을 수수료는 자기가 알아서 정하는 셈이 되고 마는데, 그래서 "이번에 물가가 많이 올랐으니 더 내라" 라고 해서, 세금을 더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돈이 모이니 좋아서 입을 벌리고 웃던 삭개오가, 그림책을 몇 장 넘기고 나면 뭐라고 하면서 웃는고 하니, "제가 가진 재산을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착복한 사람들에게는 4배나 갚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웃는다는 것이다. 웃기는 웃는데, 그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다. 즉 "나 같은 인간에게도 주님이 찾아오십니까?" 라고 하면서 웃는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울고 있고, 우리는 그 십자가를 보면서 웃고 있는데, 하지만 그 웃음의 질이 다르다는 말이다.
(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신앙생활을 50년을 했는데 끝나고, 성경공부를 10년을 했는데 끝나고, 성경을 만독을 했는데 끝나고,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끝났을 때 남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때 남는 것이 주님이 자기를 건드렸다는 사실만 남아있다고 하면, 그런 사람이 곧 성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열심히 믿어서 구원을 받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이, '믿을래' 라는 것으로 끝난다고 하면, 즉 "이것을 믿으면 천국에 가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가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만 남아있다고 하면, 결코 그런 사람을 성도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 또 다시 정리하면 !!
여기서 정리하고 넘어가겠는데, 잠언서에서 말하는 '지혜' 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처세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이 세상이 곧 음녀인 것을 노출시키고 폭로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이 세상 바깥에 계신 분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셔서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와서 이야기를 하니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듣지를 못하고 반발하는데, 그렇게 반발하니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반발을 해야만 하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무엇이라고 하는가? "니가 복음을 전해야 이 세상이 어둡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겠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경우라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양보하지 말라는 것인데, 즉 "이것을 전하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 텐데" 라고 하지를 말고, 오직 복음만을 전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복음이 그 값을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분류가 되니 말이다.
◈ 목사님, 저는 복음뿐입니다 !!
그러니 복음에 죽고 복음에 사는 목사는 모이는 사람 숫자에 연연해하지 않는데, 물론 그런 목회자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만 말이다. 정말로 찾기가 힘드는데, '혹시나' 라고 해서 보면, '역시나'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저에게 "목사님, 저는 복음뿐입니다. 교인들이 모두 떠나도 괜찮습니다" 라고 하는 목사들이 많았는데, 하지만 그런 말을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저는 그 유효기간을 2개월로 보는데, 그 다음은 '빠이빠이' 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니만 복음을 전하나?" 라고 하는데, 즉 "당신만 복음을 전해서 장사를 잘해먹지 말고, 같이 잘해먹자"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차마 그런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는 하지 못하는데, 하지만 자기도 그것을 이겨내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그게 자기 본심이니 말이다.
그런 자기 본심은 들키기 싫어서,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그래, 당신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자기 문제를 감추기 위해서, 자기처럼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공격을 한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세력인데, 그래서 "예수 당신, 언제까지 가는지 보자" 라고 나오는데, 즉 "당신이나 나나 똑같이 동질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런데 당신이 언제까지 그렇게 가는지 보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자기파괴 !!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내 뜻대로 마옵시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는, 즉 자기를 죽여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제가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하나님에게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기 파괴현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지옥을 만들어내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자기 안을 파내어서, 그것으로 지옥을 만들었는데, 즉 하나님 안에 저주의 영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바깥에 지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지옥이 있는데, 그러니 이것을 누가 믿겠는가? 우리 인간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신 그 한 마디를 신학자들이 풀 수가 없는데, 특히 몰트만이 이것을 풀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그래서 그의 책제목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천주교는 십자가를 포기했는데,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꾸고 말았다는 것이다. "십자가, 그것은 하나의 절차입니다. 그러니 이제 잊으세요" 라고 하는 것, 그게 천주교라는 말이다. 여기에 비해서 개신교는 루터의 정신을 따라서 십자가 안에 숨어있는 하나님인데, 그런데 문제는 이 십자가를 해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고 단어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의 지혜가 없다는 말이다.
지혜가 없으면 신학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그래도 신학이라고 하면 뭔가를 내놓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파괴' 라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내놓게 되면 아무도 믿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믿던 믿지 않던 그것은 주님의 소관인데 말이다.
신학자들이 믿음이 없으니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주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라는 것인데, 그러니 "내가 내놓은 이론을 사람들이 얼마나 믿는지 보자"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을 우리가 왜 관찰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목회자가 아닌데, 최종적인 목회자는 따로 계시는데, 그런데 왜 자기가 목회자 노릇을 하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내가 복음을 전해서 우리교회에 몇 명이나 오는지 보자" 라고, 그런 것은 자기가 측정하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 마귀가 부추긴 다윗의 인구조사 !!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다윗의 경우에, 다윗 마지막 부분에서 뭐라고 하는가?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는데, 그것을 누가 시켰는가? 악마가 그렇게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악마가 죄를 지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악마는 인구조사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그 인구조사를 오늘 강의대로 하면 '동질성'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내 나라, 내 겨레, 내 민족",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김구 선생이라는 것이다. "보라, 저 떠오르는 태양을!" 라고 할 수 있는데, 아베 담화에 사죄내용을 집어넣어야 하고 말이다. 즉 "우리는 피해자, 너희는 가해자!" 라는 것인데, 우리 한 민족의 동질성 유지, 그것이 바로 절대적 악이라는 것이다.
계급은 없는데,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가? 마귀가 만든 것인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계급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프로레타리아와 부르조아의 계급을, 즉 노동자와 지배자의 계급을 말이다. 물론 계급이 있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계급을 만들어야 자기 동질성을,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려운 노동자의 생활 가운데서도 스스로 자기를 유지할 수 있는, 즉 "나는 이러한 피해를 보는 계급에 속해있어. 그것을 믿을래 쨘쨘 바보인가 봐 ♬" 라고 하는, 그렇게 믿고 싶다는 것이다. 자기가 억눌린 자라고 하는 것, 그것이 유일하게 자기를 위로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노동운동도 그런 것의 일종인데, 머리에 붉은 띠를 하고 말이다. 물론 촛불집회도 그러하고, 그렇게 동질성을 유지할 때, 그 속에서 숨이라도 쉴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나 노무현을 그리워하면서, 그것을 위해서 가상적인 적을 만들어야 하고, 그 적을 공격할 때 속이 시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음녀가 얼마나 전체적인지 모르는데, 종교 이야기가 나오다가 정치 이야기가 나오고 말이다. 이제 추석이 다가오는데, 처음에는 화투를 치면서 사이좋게 이야기를 하다가 정치 이야기가 나오고, 또 복음 이야기가 나오면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어질 때는 인상을 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니가 더럽다 !!
왜 정치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자기 소속은 따로 정해져있다는 것인데, 그게 곧 동질성이라는 것이다. 그게 악인 줄 모르고, 그게 있어야 숨이라도 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는가? 우리 각자를 보고 "니가 더럽다" 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이 더러운 세상에서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 한 통속이라는 말이다.
자기만 더럽지 않다고 하면 반칙인데, 우리는 사는 만큼 남들에게 피해를 주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게 그야말로 진리인데, 자기가 존재하는 만큼 피해를 주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많이 주고 덜 주고 하는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 삼촌, 설사 나온다 !!
저는 어릴 때 그것을 절실하게 느꼈는데, 좁은 집에 식구가 13명이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큰삼촌은 화장실에 가면서 꼭 신문을 들고 가는데, 자기가 콧노래를 부를 때 다른 식구들 가운데는 설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ㅋㅋ). 얼마나 급했으면 바로 앞에 있는 학교 화장실에 다 갔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저도 다른 식구들에게 그런 피해를 주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놀이동산에 가도 기구를 하나 타려고 해도 기다려야 하니, 그것이 짜증이 나서 저는 제대로 타 본 기구가 없는데 말이다. 즉 자기가 즐기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에 메르스 사태가 왔을 때가 절호의 기회였는데, 가서 마음껏 타고 놀아봐야 하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ㅋㅋ).
이제 교재 122페이지를 보자.
** 호세아를 공부해보면, 선지자의 아내가 바람이 나서 다른 남자와 살고 있어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그 음녀는 돌에 맞아서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돌로 치기는커녕 호세아 선지자에게 진정한 남편 값을 하라고 합니다.
◈ 외계에서 온 사랑 !!
선지자의 아내가, 즉 하나님의 종의 아내가 바람이 났는데, 그러면 그 여자를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내쳐야 하는가? 아니면 아내로 다시 맞아야 하는가?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바람이 났기 때문에 아내라는 말이다. 어디에 이런 사랑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즉 "바람이 나도 좋다. 당신만 행복하다면 나는 용납하리" 라고 하는 말이다.
물론 없는데, 왜냐하면 외계에서 온 사랑이니 말이다. 그러니 "당신, 바람을 피워도 좋아. 돈을 번다고, 집안살림을 한다고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데, 그것을 푸는데 바람만큼 좋은 것이 없어. 그러니 얼마든지 바람을 피워. 다 용납해줄게" 라고 하는, 그러한 남자와 그런 여자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냥 죽여버리려고 하지 말이다.
◈ 죽여버릴래 !!
여기서 제가 간단한 공식을 하나 제시하겠는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죽는데, 그런데 하나님과 생명나무는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인해서 죽은 우리를 생명나무가 살려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죽는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살려낼 수 있는가? 그것은 안 된다는 말이다. 바짝 마른 뼈는 바짝 마른 뼈이지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하면, 그런데 거기에 자기가 뭔가를 꼭 보태었다는 우기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그때 내가 정말 기도를 열심히 했어" 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꼭 한 다리를 걸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차단하는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는 자기 성질이 뒤틀릴 때, 우리는 쉽게 '죽여버릴래' 라고 하는데, 그게 우리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죽이려고 하는 대상 중에는 누구도 포함되어있는고 하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분도 우리가 '죽여버릴래'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참 고마우신 주님 !!
물론 예수님을 직접 죽이는 것은 아니지만, 바람을 피운 남편이 집에 들어올 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러면 그동안 바람을 피운 남편을 살게 하신 분이 누구인가? 주님인데, 그런데 그런 남편에 대해서 프라이팬을 가지고 죽여버리려고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도 역시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 주위에 그렇게 꼭 성질이 나게 하는 분들을 배치해놓고,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게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자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들추어내시는, 그런 고마우신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이다.
물론 일시적으로 성질은 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사건을 통해서 자기 본성이 유감없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죽지 않았는데, 즉 '죽여버릴래' 라고 하는 인간들이 그야말로 한 트럭이라는 말이다. 이놈도 죽이고, 저놈도 죽이고, 얼마나 죽이고 싶으면 밤에 잠을 다 자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열대야의 영향도 있겠지만, 사실은 '죽여버릴래' 라는 인간이 등장해서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대로 밤에 잠이 잘 올 때는 언제이겠는가? 수면제를 먹은 상태가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길 때인데, 왜냐하면 그때는 그런 죽이고 싶은 분노가 그래도 많이 가라앉은 상태이니 말이다. 물론 자고 나서 내일이 되면 또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참새를 보라. 누가 키우던가? 들풀을 보라. 누가 키우던가?" 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너희들은 공중의 참새와 들의 들풀보다도 더 못하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참새와 들풀을 무시했지만, 그런데 그것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고분고분하다는 것이다.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은 금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그래서 참 만족해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 값어치가 들풀이 입은 옷보다 더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들풀을 가지고 옷을 만들어 입는다고 하지 말고 말이다. 그것은 머리에 꽃을 꼽고 "남해에도 눈이 오네" 라는 것과 같은데, 즉 미친 짓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표정들인데, 한예슬이 나오는 그런 드라마가 있다는 것이다(ㅋㅋ). 무엇을 해도 음녀인데, 그러니 그런 드라마나 보면 된다는 것이다.
◈ 호세아와 붙어있는 여인을 보라 !!
아무튼 호세아서에는 바람난 여자를 아내라고 보는데, 그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호세아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 호세아와 붙어있는 여인을 보라. 그 여인이 바로 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이해한다고 하지 말고, 예수님과 붙어있는, 즉 예수님이 "나는 죄인을 부르려고 왔다" 라고 할 때의 그 죄인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붙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니가 외부에서 관찰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과 붙어있는 죄인, 그 죄인이란 규정 속에 니가 놓여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 하는데, 끝까지 말이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신랑이라는 존재 자체로 인해서 잠이 잘 온다는 것이다. 행복하고 말이다.
◈ 그만 치워라. 무겁다 !!
신랑의 그 굶은 팔뚝에 머리를 베고 자면 잠이 잘 오는데, 물론 그렇게 해도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은 결코 팔이 아프다고 하면서 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5분도 못 가서 "머리 치워라. 무겁다" 라고 하지만 말이다(ㅋㅋ). 하지만 주님은 새벽이 와서 아프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신혼초반에는 팔을 베고 자게 하는데, 물론 신혼여행을 가서 밤새도록 팔만 베고 자지는 않겠지만 말이다(ㅋㅋ). 아무튼 그 시기는 팔을 빼다가는 부부싸움이 싸는데, 여자가 "왜 내가 벌써 싫나?" 라고 나오면 골치 아프다는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참고 잘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율법에 의하면 그런 음녀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데, 그런데 남편이 그 돌을 대신해서 맞는다는 것이다. "나를 때려라" 라고 해서 말이다. 그러면 아무도 때리지 않는데, 그래서 주님은 자기가 스스로 그 돌을 맞는데,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그 저주의 돌을 맞고, 그 맞은 티를 내는데, 주님께서는 원하는 음녀를 골라서 해결했다고 하는, 그 통보를 성령을 통해서 뒤늦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통보를 맞은 사람은 졸지에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마는데, 물론 우리는 동질성, 즉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고 싶은데, 그런데 이상한 통보가 날아온다는 것이다. "니 죄는 이미 사했느니라" 라고 말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예배자리인데, 즉 말씀이 있는 자리, 복음이 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까발리게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그렇게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상급이 된다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상급을 !!
어제 상급을 잠시 이야기했는데, 조금만 더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토굴을 파고 들어가니 겹겹이 무엇이 쌓여있는고 하니, 온갖 것을 다 동원해서 자기를 커버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상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주님은 이 토굴을 뚫는데 그렇게 뚫으면 깨진다는 것이다. 깨지면 나오는 것을 가지고 전리품, 혹은 노획물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드릴을 가지고 뚫는 것을 두고 '여호와 전쟁'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주님은 전쟁을 하셔서, 그동안 우리가 숨을 죽이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미 다 깨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곧 죽음인데, 즉 우리는 죽기가 무서워서 도망을 치듯이 토굴을 파고 들어갔는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말이다.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뚫고서 들어오니, "너는 죽어도 괜찮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래서 나사로의 경우에, 죽어도 그는 나흘만에 살아났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주님은 바로 그것을 전리품으로 해서 우리에게 상급으로 주셨는데, 즉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그 상이 깨어진 파편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죽기를 무서워했는지, 그것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을 그렇게 잘 챙겨드려도, 자기 오빠가 죽기 이전에 예수님에게 와달라고 통보를 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했는가? 죽는 것이 무서우니 죽기 이전에 와달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번 기회에 그녀들에게 교육을 제대로 시키려고 일부러 가지 않았는데, 그래서 죽고 난 다음에 가니 그녀들의 본색이 드러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 오빠가 죽고 난 다음에 오시면 무엇을 합니까?"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멱살을(?) 잡고 흔드니, 주님께서는 흔드는 대로 흔들리고 말이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하는가? "나를 믿는가?" 라고 하시는데, 그러자 "예수님을 믿으니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들의 믿음과 내 믿음이 같다고 여기는가?"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녀들은 '믿을래' 라는 것이고, 주님은 그것을 깨버리는, 즉 '믿을래' 라는 것 속에 숨어있는, 그래서 그 '믿을래' 라는 가짜 믿음을 드릴로 뚫어서, "너희들이 과거에 이렇게 살았다" 라고 하면서 되돌려주시는 것이 곧 하나님이 주신 상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죽어도 좋습니다. 이것은 부득불 하는 일인데, 하지만 이것이 나타난 나의 상급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소개한다는 것이다.
◈ 덧대고 덧대고 또 덧대어서 !!
그런데 인간들은 주님이 주신 상급을 가지고, 즉 깨어진 파편을 가지고 어떻게 하는가? 자기가 살고 싶어서, 즉 죽는 것이 무서워서 거기에 덧대고 덧대고 또 덧대어서, 그렇게 해서 점점 더 정신병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정신병자가 말이다.
광주에 있는 어떤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분은 자기 직장이 학교인데 말이다. "학교에 있는 교사들 치고 미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라고 하는데, 모두가 다 미쳤다는 것이다. 물론 학교 교사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그러한데, 즉 모두가 다 음녀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잘 아는가? 광주의 그 집사님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미리 해결책을 들고 물에서 끄집어 내놓고 뭐라고 하시는가? "전에 니가 이곳에 빠졌단다" 라고 소개해주신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음녀와 하나가 된 이 세상과 한 통속에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출한 것도 싫고 그냥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그런데 목자가 되신 주님이 우리를 보고 양이라고 지칭을 하시면서 쑤셔대니, 우리는 오직 그 목자만을 알고 또한 그 목자에게만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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