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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38 - 수동성 / 150824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잠언

'잠언'속의 그리스도 38 - 수동성 / 150824

정인순 2015. 8. 24. 20:24

음성                          동영상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8 - 수동성
                                                                                
                                                         

15,08,2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2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언약의 본질이 용서와 긍휼인데, 왜 긍휼입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었다는 겁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처음에는 언약을 맺었는데, 그 모세언약의 내용이 호세아서로 밝혀집니다. 그 안을 뜯어보니, "이스라엘과 메시아는 부부지간이었다" 라는 겁니다.

 

◈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 !!

여기에 보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내로 삼았다는 말인데, 하나님은 왜 이러한 발언을 하시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출생부터가 수동적이라는 말인데, 수동적이라는 것은 자유와 자율이 제한적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 대자연 속에서 우리 인간이 태어났다고 하면, 그렇게 자기가 태어난 주변 속에서만 자유와 자율이 주어지는데, 그런데 그 주변의 자연이라는 것을 더 넓혀보면, 그렇게 자유롭다고 하는 것도 다 수동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로서 표현하니 그렇게 되는데, 즉 우리가 이 대자연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고 하면, 우리는 평소에 자기 주변의 이야기에 대해서만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아줌마들이 모여서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김치를 어떻게 하면 맛있게 담는지, 또한 어디에 가면 머리를 잘 하는지, 그런 자기 주변의 것만 이야기하지, 세계평화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의 수동성 !!

그러니 "이번에 사위가 오는데 무슨 음식을 해주지?" 라는 것은 자유에 해당된다고 보는데, 그런데 그런 자기 자신에서 좀 벗어나서 대자연, 혹은 그 이상으로, 그것을 초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물론 우리는 그것을 자유, 혹은 자율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모두 다 '수동적' 이라는 것이다. 즉 제한된 범위 내에 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들도 우리가 자기가 알아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고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몇 몇 조항들을 이미 제공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수동적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수동적으로 제공해주시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기서 얻고자 하시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관계'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그 관계라는 것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 관계, 결혼관계 !!

그것을 여기 교재에서는, 남편과 색시사이의 관계, 즉 '결혼관계' 라고 하는데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특별히 부부사이로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관계를 위해서 이스라엘은 수동적으로 움직인다고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사야서 62장 5절에 보면,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사 62: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 그 남편 됨을 메시야에게 !!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색시로 맞아들였는데,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그런데 막상 우리는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맞추어야 하겠는가?

예를 들어서, 결혼식을 할 때, 신랑은 보이지 않고 신부만 보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까, 자기의 남편 됨을 메시야에게 새겨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오실 메시야가 남편이 되는데,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듯이 혼인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하나님의 과잉친절, 그 이유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가지는 의문점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냥 "나는 너를 만들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굳이 우리를 신부라고 불러주면서 친절을 베풀면서 배려를 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노발대발을 하시면서 저주의 땅으로 추방을 시켜놓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내 색시, 내 신부야!" 라고 사랑의 메시지를 보낸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답지 않고,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이중적인 태도처럼 보이는데, 예를 들어서, 어떤 아가씨에게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그 아가씨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자기가 무슨 수녀가 될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솔직히 성경적으로 말해서, 여자가 결혼했다는 것은 예수님과 결혼하기 싫어서, 즉 예수님의 신랑이 되기 싫어서 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음보다는 현찰이 좋다는 말인데(ㅋㅋ), 믿음도 없으면서 있는 척을 해서 예수님과 산다고 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산다면, 그것은 전혀 자기에게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까, "당신이 예수님의 신부가 될래?"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고 수동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의 고자가 된 사람은, 자기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긴다는 말이다.

 

◈ 신부의 의미는, 신랑에게서 !!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수동적인 신부에게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신부가 아닌 자로 신부가 되게 하시는 신랑에게 의미를 두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신랑은 필히 여자가 아닌 남자이어야 하는데, 그리고 신부는 여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렇게 보면 되는데, 즉 창세기 3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아들을 낳게 하시는데, 바로 그 아들이 메시야가 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신부로 맞이함으로서, 그 아들이 여자의 후손으로서의 자기 기능, 즉 자기 사명을 완수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 사랑의 속성 !!

무슨 말인고 하니까, 신부와 신랑 사이에는 자기 것이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지금 신부가 율법에 의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즉 신부는 인간이고 죄인이니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용감한 흑기사(백기사?)가 나타나서 죽어야만 하는 자의 죄를 대신해서 담당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거기에서 사랑이 피어나는데, 그러면 그 사랑은 어느 속성에서 나오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서 사랑이라는 속성이 있는데, 바로 그 속성을 점령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된 자를 자기의 신부로서 맞이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여기면 제대로 정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호세아서에 나오는데, 그래서 이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답게 나타내기 위해서 이 땅에 어떤 절차가 있어야 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신부라고 여겼던 그 여인이 신랑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바람이 나서 '바알' 이라는 다른 남자를 쫓아간다는 것이다. 그 남자가 비아그라를 먹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호 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호 11:2)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 포기하지 않는 사랑 !!

그러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이스라엘이 서로 앞다투어서 누구를 섬긴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섬긴다는 것이다. 이 바알이 '나의 주' 라는 의미인데, 옛날에는 남편이 곧 주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남과 북이 다같이 여호와를 버리고서 다른 신랑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은 처음에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나의 신부였다. 너희들은 나를 포기할지 몰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진정한 사랑이 아니냐는 말인데, 물론 "니가 나를 모르는데 내를 어떻게 너를 아는가?" 라는 노래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호 2: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호 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러니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수동적이라는 의미인데, 즉 "능동적으로 천국에 갈 위인은 아무도 없다" 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인간은 천국의 문을 만들지 못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의 문을 만들려는 그 시도 속에는 자기 자율과 자기 능동이 추가되기 때문에, 그것은 가짜 문이라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주어진 문이 아니라고 하면, 그 이외의 모든 문은 인간의 능동성이 가미된 문이라는 말이다. 특히 교회가 천국의 문이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의 경우에, 그런 문은 모두가 가짜라는 것이다. 가봤자 닫힌 문인데, 열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 능동적으로 하실 분은, 오직 한 분 !!

이번 겨울수련회에는 요한계시록을 할 예정인데, 거기에 보면 "닫으면 열 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바로 "너희들은 수동적으로 머물러라"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우리는 인간이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당연히 인간도 아닌데,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 대접을 받으려고 하니 그야말로 가관이라는 말이다.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능동적으로 하실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는데, 그분이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신랑으로 지정하신 분, 그런데 그렇게 신랑으로 지정한 것만이 아니라 그분이 신랑 값을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신부가 그냥 신부가 아니라 죄에 갇혀있는 신부인데, 즉 마귀에게 팔려간 자기 신부를 값을 주고 빼내오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성경이 참으로 복잡한데, 하나님께서 그냥 "나는 너를 구원하겠다" 라고 하시면 간단한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신랑을 보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고 하시느냐는 것이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보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는지 모르는데, 예수님 한 분을 소개하는데 그렇게 복잡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복잡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복잡해서 그러한데, 우리가 능동적으로 자기 뜻에 의해서 자기를 천국에 보내려고 하니, 그것을 다 털어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내 힘으로 구원을 받겠다" 라는 모든 시도를 다 말이다.

여기서 마태복음 23장을 보겠는데, 13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천국 문을 따로 만든 인간들 !!

이게 무슨 내용인지 알지 싶은데, 그러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평범한 아줌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데, 오늘 반찬이 어떻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상당히 자율적인데, 그런데 그 범위가 어떠한가? 자기 신상과 관련된 것인데, 세계평화와는 관련이 없는, 어디까지나 자기 주변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천국 문을 닫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이미 바리새인들은 자율적으로 자기들이 납득이 되는 천국 문을 따로 만들었다고 하는, 그렇게 따로 설정해놓고 있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천국 문은 자기들이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누가 만들었는가? 인간들이, 즉 자기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교회를 만들 수 있는가? 천국 문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교회도 역시나 만들지 못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교회는 머리가 되시는 분이 만드는 것이지, 지체가 만들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지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결국 오늘 강의 전체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데, 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즉 자연을 넘어서 초자연적인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우리는 수동적이고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왜 이렇게 복잡한고 하니,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가 만들려고 하니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떨쳐내신다는 말이다.

여기 교재 124페이지에 보면 그 관계가 나오는데, 한 번 살펴보자.

(1) 부모와 자식의 관계
잠 1:8, 잠 4:1, 잠 6:20, 잠 13:1, 잠 15:5, 잠 23:22, 잠 20:20, 잠 30:17, 잠 17:17,25, 잠 10:1, 잠 13:24, 잠 19:13,18, 잠 23:13-14, 잠 29:15,26,
(2) 왕과 백성의 관계
잠 14:35, 잠 16:10, 잠 16:12-14, 잠 20:2,26, 잠 29:4,12, 잠 31:9
(3) 부부와의 관계
잠 18:22, 잠 31:10-31, 잠 12:4, 잠 14:1, 잠 19:13, 잠 21:9,19, 잠 27:15,16
(4) 노인과 젊은이의 관계
잠 16:31, 잠 20:29
(5) 친구와의 관계
잠언 16:19, 잠 24:26, 잠 27:6,9
(6) 종과의 관계
잠 17:2, 잠 29:21, 잠 30:10
(7) 이웃과의 관계
잠 25:17

 

◈ 잠언서는, '관계의 책' !!

여기에 이렇게 7가지 관계가 나오는데, 그러니 잠언서 이전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등에 나오는 모든 관계들은 잠언서에 와서 이런 7가지 관계들로 압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잠언서는 '관계의 책'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즉 관계를 최종적으로 정리해놓은 책이 바로 잠언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에 와서 "나는 남과의 관계는 다 귀찮다. 지리산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믿을 거야" 라고 한다면, 이런 관계는 다 끊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으면 되지" 라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것이 바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이 7가지 관계가 다 연결이 되어있으면서, 그 관계마다 누가 개입되어있다는 말인가? 일일이 주님이 다 개입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만 하는데, 그러니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 제 자식이니까 제가 알아서 키우겠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이미 자기와 예수님의 관계 속에 "부모는 이러해야 하고, 자식은 이러해야 한다" 라는 것이 이미 언약적으로 완성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완성된 관계를 우리는 주님의 증인으로서, 목격자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게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이런 관계를 나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그것을 증거하는 위치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왕과 백성의 관계' 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도자와 백성의 관계'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국가, 군대, 기업, 회사, 농장 등등, 그 모든 것이 다 서열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고 하니, 물론 그게 에베소서 5장에도 있지만, 이렇게 잠언서에도 나와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다 귀찮다. 나는 산 속에 들어가서 그냥 예수님만 믿을래"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이미 관계성이 다 정립되어있는데, 그리고 성경은 바로 그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깥으로 튀어나온 책이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성경은 나에게 대해서 증거한 책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나오는데, 20분이나 이렇게 강의를 했는데도 말이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그렇게 '수동성' 이라고 강조를 했는데, 그것을 오늘 강의제목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강의 중간 중간에서 뭐라고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그렇게 능동성으로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런 것을 우리가 묻기 전에 이미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도록 하셨는데, 이미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즉 "왕이 없음으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라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왔다는 말이다. 다만 그것이 자기의 이익과 관련이 되는, 즉 자기 주변의 좁은 상황에 대해서만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란 말이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사돈에게 복음을 전하라 !!

그래서 우리는 "주여, 사돈이 오는데 무슨 음식을 대접할까요?" 라고 하면서 기도하지는 않는데, 그저 자기 선에서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시장에 가서 장을 봐와서 잡채도 만들고, 문어도 좀 삶고 말이다. 그런 것이 굉장히 능동적인데,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도 역시 무엇이라는 말인가?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수박을 사고 싶었는데 마음에 드는 수박이 없어서 복숭아를 샀는데, 그런데 그만 사돈이 알레르기가 있어서 먹지도 못하는, 주어진 상황이 바로 그런 수동성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자기 뜻대로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어느 선을 넘어가게 되면 주님의 뜻과 부딪치면서, 주님의 능동성이 자기의 능동성을 압제하고 다스리고 지배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돈과 만나는 상견례 자체가 주님을 증거하는 기회로서 돌발하게 되는데, 그것을 두고 성경에서는 "발걸음도, 머리카락도 다 세신다" 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니, 무슨 머리카락까지 다 신경을 써주십니까? 그 정도는 제가 알아서 관리하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겸손을 떨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카락이 결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그러면 이 세상에 대머리가 어디에 있겠느냐는 말이다(ㅋㅋ).
  
(마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마 10: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 믿음이 있는 행함 !!

그러니 자기가 알아서 하는 모든 것은, 그것은 수동적으로 골라 잡힌 주변환경에서 자기도 어쩔 수 없이 행할 수밖에 없어서 행한 것이란 말이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 안에서 행했다" 라고 하고, 그게 바로 야고보서에 나오는 '믿음이 있는 행함'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행함의 원천이 자기의 행함이 아니라 주님의 행함으로 돌아가는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치는 것과 기생 라합의 거짓말을 통해서, "이 행함의 원래 능동자가 누구인가?" 라고 해서, 그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바로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행함이 없는 믿은 죽은 믿음' 이라는 말이다.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2:23)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약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원천자를 증거하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로마서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성경이니 당연히 똑같아야 하는데, 그런데 이것을 모르니 "로마서 따로, 야고보서 따로"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잠언서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던가?

교재 123페이지로 다시 돌아와서, 아무튼 잠언서를 보면 관계성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그러한 관계성은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맺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관계는 하나님이 주가 되시는 분과의 관계가 우리에게 능동적으로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수동적이 되고, 그래서 우리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 부부와의 관계 등을 맺으면서, 나름대로의 능동적인 행위를 펼친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 말씀, 즉 율법이 치고 들어오는데, "잠언서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던가? 시편에서, 욥기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던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성경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생각했던 원래의 의미와 우리 자신이 생각했던 의미와 마주쳐서 충동을 일으키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하늘이 침공한다 !!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하늘이 침공한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위에서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자아는 눌리게 되는데, 여기서 자아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주인공을 자기가 따로 설정해서, 그것을 두고 "내가 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나라가 침공하고 보니, "주님이 하셨다" 라는 말도 맞고, 더 나아가서는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이런 일이 있어야 한다" 라는 데까지도 가야한다는 것이다.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런데 천국은 어떻게 이루는가? 말씀을 가지고 이루시는데, 그런데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것이 결코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미국의 사막에 가보면 태양열 발전소가 있는데, 물론 우리나라에도 있는데 말이다. 여기 사막에 이렇게 유리로 된 패널을 펼쳐놓으면 거기서 전기가 생기는데 말이다. 그런 거대한 발전소에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의 임금이 방문했다고 하면, 그래서 "여봐라, 저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면, "폐하, 에너지가 발생되는 장치입니다" 라고 할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지금 태양은 하늘에 떠 있는데, 그리고 사막에는 유리판만이 가득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무슨 행동이 나오는가? 없는데, 그런데 무슨 에너지와 힘이 거기에서 나오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참으로 신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 야야, 여기 차안에 귀신이 들어있다 !!

이것은 실제로 안동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때 막 무선으로 자동차 시동을 거는 장치가 나왔을 때인데 말이다. 사위가 오랜만에 장인어른을 만나 뵙고 인사를 하고 서울로 올라오려고 자동차 시동을 거는데, 그 리모콘을 가지고 걸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자동차 시동이 '부르렁' 하고 걸렸는데, 그러자 장인어른이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자동차안에는 아무도 없는데 시동이 걸렸으니 말이다. 물론 요즘은 보편화가 되어서 아무도 놀라지 않지만 말이다.

요즘도 그러한데, 하물며 과거 고려시대의 사람이 태양과 유리판만 있는 곳에 가서, 거기서 에너지가 생긴다고 하면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데 자동적으로 힘이 생긴다고 하면 말이다. 물론 지금 우리는 그 원리를 아는데, 열 에너지가 바뀌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구식인지 모르는데, 아직도 말씀이 알아서 움직인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안동에 사는 양반이 "여기 차안에 귀신이 들어있다" 라고 하는 식으로, 바로 우리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 성경책에 귀신이 들어있는 모양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닌데, 성경책에는 귀신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지키는 것들은 다 박살나야만 하는 행동들이고, 말씀 자체의 행위가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 말씀 자체의 행위가 우리를 몰아넣는데, 그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하늘나라에서 침공했다" 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요즘 현대인들이 말씀에 대해서 신기하게 여기는 것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더 똑똑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여기서 창세기 24장 7절을 보자.

(창 24: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이것이 어제 낮 시간에 한 설교인데, 아브라함이 자기의 늙은 종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자기 며느리를 구할 때 한 행동이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아가 소멸되고 주님의 자아로 돌변한 다음에 며느리를 뽑을 때 말이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늙은 종을 보내서 며느리를 뽑으려고 하는데, 그러자 늙은 종이 뭐라고 하는가? 당연하게 "제 며느리도 아니고 주인님의 며느리인데 제가 어떻게 뽑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모든 것이 순적히 하나님이 하신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12절에 나오는데 말이다.

 

◈ 빡빡한 천사의 활동력 !!

그런데 여기 7절에 보면 사자가, 즉 천사가 나오는데, 그러니 하나님께서 앞서서 미리 보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태양은 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여기서 에너지가 생기는 것처럼, 이 세상은 빡빡하다는 것이다. 천사의 활동력으로 말이다.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하는데 말이다. 

(창 24:1)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창 24: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
(창 24:3)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창 24: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창 24:5)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창 24:6)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창 24: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창 24:8)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 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창 24:9) 종이 이에 주인 아브라함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창 24:10) 이에 종이 그 주인의 약대 중 열 필을 취하고 떠났는데 곧 그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창 24:11) 그 약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올 때이었더라
(창 24:12)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창 24:13)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섰다가
(창 24: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창 24:15)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창 24:16)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에 내려가서 물을 그 물 항아리에 채워 가지고 올라오는지라
(창 24:17) 종이 마주 달려가서 가로되 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창 24:18) 그가 가로되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 미션임파서블 !!

베드로도 옥에 갇히고 사도바울도 옥에 갇히고, 그런데 그 옥문을 누가 열었는가? 마치 미션임파서블처럼, 어디서 5인조가 나타나서 열었는가? 분명히 천사가 열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그 유명한 가스펠 송이 생각나는데, "천사가 내려와서 사바사바 ♬" 라고 말이다(ㅋㅋ). 그래서 미국에는 '로스엔젤레스' 라는 도시도 있고 말이다.  

아무튼 천사는 철저하게 피동적이고 수동적인데, 로봇도 그런 로봇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천사가 그때 그때에 따라서 그 기능이 달라진다는 것인데, 마치 트랜스포머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천사의 기능에는 어떤 것이 있는고 하니, 천사는 인간 세계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그 모양새가 지상에 있는 것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소, 독수리, 사자, 곰, 인간 등등으로 말이다.

그것은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이 이해하는 모양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리고 창세기 1장에서의 천지를 창조하신, 그 창조의 의미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솔솔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의미가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교회에서 이번 수요예배부터는 창세기를 설교할 예정인데, 그때 이러한 이야기를 할텐데 말이다. 

 

◈ 주님, 보이지 않습니다 !!

무슨 말인고 하니, "보고 있다고 해서 그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라는 것인데, 오히려 보고 있음으로서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눈과 코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는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그 귀를 가지고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에게 귀가 있나? - 예. - 몇 개고? - 두 개입니다. - 그러면 그 귀를 가지고 들리나? - 아닙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너에게 눈가 있나? - 예. - 몇 개고? - 두 개입니다. - 그러면 그 눈을 가지고 주님이 보이나? - 아닙니다. - 그러면 천사가 보이나? - 아닙니다. - 말씀이 활동하는 것이 보이나? - 아닙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주님은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귀와 눈을 두 개씩이나 잘 가지고 있구나"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주님이 그 눈에 진흙을 발라주시는데, 그래서 주님이 다녀간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주님 자체가 천국의 문이기에 말이다. 그렇게 이미 천국 문에 들어간 입장에서 이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소경 !!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왜 친히 진흙에 침을 발라서 비벼서 그 소경에 얼굴에 마르셨는가? "내가 다녀가게 되면 너는 이 지상에서 그동안 달고 다니던 눈이 아닌,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된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다른 차원을 눈을 주님이 박아 넣으신 것인데, 즉 새로운 창조라는 말이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를 주님을 위한 창조로, 마귀를 위한 창조가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주님을 위한 피조물로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똑같이 주님이 다녀가지 않은 입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얼래리 꼴래리, 너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 세상을 총천연색으로 보는데, 그러니 우리는 정상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정상인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니가 나를 알아? 모르지? 그런데 무슨 정상이야. 너는 인간도 아니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인간을 보여주시는데, 그래서 소경을 불러서 주님이 터치를 하시는데, 즉 주님이 새롭게 눈알을 박아 넣어서, "이게 제대로 된 인간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관계와 부합되는, 초자연적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부합되는 말이다. 

그러면 그 인간에게 일어났던 자기 나름대로의 모든 능동적인 것들은 무엇인가? 사실은 그것은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천국을 위하여 일어나야만 되는 수동적인 것들로서, 그런 존재로서 소경은 이미 천국에 입성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 어데예, 주님이 하셨지예 !!

그 관계가 바로 이 잠언서에 나오는 7가지 모든 관계와 연결이 되어서 완성이 되게 되면, 그 완성된 것이, 물론 소경은 그것을 다 행하지도 않았지만 주님의 능동적인 행함이 그 소경에게 덮치게 되면, 그 소경은 잠언서를 몽땅 다 이룬, 그 잠언서의 내용을 다 성취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의 의지는 아니지만,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구 덕분에 말이다. 

그러면 소경은 말씀대로 살았으니 의인인데, 그런 의인을 티를 내는 모습이 무엇인고 하니, "제가 한 것이 아니라예. 주님이 하셨지예"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인의 티를 내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예" 라고 말이다. 그래서 죽을 자리에도 가고, 살 자리에도 가고, 죽여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오고, 그렇게 바로 백부장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 수동적으로 산다는 것 !!

이제 성경전체가 좀 이해되었지 싶은데, 수동성 하나만 알면 된다는 것이다. 잠언서의 핵심은 8장에 나오는데, 즉 모든 말씀은 지혜라는 그분을 의해서 다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분에게 집중하게 되어있는데, 압축해서 쏠리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수동적으로 산다는 것, 그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유일하게 벗을 수 있는 길인데, 그러니 행복과 불행 등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것이다.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지 싶은데, 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디도서에도 조면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하나님의 의(義) !!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착하고 선한 일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능동성이 아니라 수동성에 나온 것인데, 그것이 바로 로마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 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착한 일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의', 그것밖에 없다는 말이다. 즉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약속의 성취, 그것이 곧 의라는 것이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자기 사랑은 없어 !!

거기에서 믿음, 소망, 사랑의 은사도 나오는데, 그래서 온유, 화평, 자비, 양선 등등, 모든 사랑의 은사들이 '사랑' 이라는 출처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믿음, 소망, 사랑이 세 가지처럼 보이지만, 그게 복수가 아니라 단수, 즉 사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의 다른 모양새가 믿음이고 소망인데, 그래서 자기 믿음, 자기 소망, 그런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혀 그런 것을 가질 권한이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자기 사랑이 아니기에, 그게 주님의 사랑이기에 말이다.

그러면 자기 것을 좀 가지면 안 되는가? 자기 것을 가지게 되면 능동성이 되는데, 즉 "나는 가졌다. 너는 없지" 라고 말이다. 자기 것을 따로 챙기게 되면 독자적인 노선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동안 잠잠하던 각양 귀신들이 다 달려드는데,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아, 가스불 !!

여러분들이 아마 평소에 무심코 고민이 되고 걱정이 되는 경험을 많이 했지 싶은데, "가스불을 끄고 왔나? 그냥 왔나?" 라고 말이다. 물론 집에 사람이 있으면 확인하면 되는데, 그런 경우에는 보통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아지는 잘 있겠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제 집을 떠난 지가 겨우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그런 걱정들이 앞선다는 것이다. 안 해도 되는데, 괜히 된다는 말이다. 

그 원인을 추적해보면, 거기에 자기의 능동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나' 라고 하는 주체가 말이다. 즉 "내 강아지이고, 내 집이고, 내 가스불이다" 라는 것이다. 집에 불이 나면 자기 집에 나는 것이지 남의 집에 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아파트는 옆집에도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항상 모든 걱정과 근심은 자기에게 있는데, 그러면 누가 그렇게 되도록 작용하는가? 그것은 마귀가 달라붙어서 걱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누가 봐도 걱정거리인데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전혀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 미래는 내가 만들지 않는다 !!

여기에서 창세기 27장을 보겠는데, 지금 계속해서 수동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이다. 거기에 모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 지금 이삭이 축복을 하려고 하는데, 자기에게 별미를 바친 자식에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 내용인데, 쉽게 하기 위해서 미리 결론부터 말해보면, "미래는 내가 만들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미래는 내가 만들지 않는다" 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 여길지 몰라도,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미래를 만들지 않는다고 해서 미래를 생각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래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 내용이 현재를 침공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자기 미래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다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다친다는 말이다. 즉 "너는 미래만 생각할 권한이 없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나' 라고 하는 것도 니가 생각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너무 어렵게 이야기를 해서 죄송한 마음이 드는데, 그러면 좀 쉽게 해보자는 것이다. 잠언서에 나오는 7가지 관계가 잠언서 이전에 나오는 모든 관계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했는데, 기억이 나지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등에 나오는 관계를 말이다.

 

◈ 아브라함의 경우에 !!

그러면 창세기의 경우에, 지금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폭탄을 던지려고 하는데, 그러면 아브라함은 누구를 생각하겠는가? 지금 자기 조카 롯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는가? 인간은 자기 주변의 것만 챙긴다고 했는데,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에 폭탄을 터트리는 것을 좀 봐주면 안 되겠습니까?" 라고 기도한 것은 누구 때문이란 말인가?

당연히 자기 조카 롯 때문인데, 그러니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자기 주변에 대해서 자기 능동성을 마구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식탁에 오를 반찬을 가지고는 기도하지 않는데, 그런 것은 자기 선에서 알아서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에게 다급한 일이 생겨서 자기 주변에 자기가 알아서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뭔가가 꼬일 때는 어떻게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님,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묻는 분도 있는데, 주님이 알아서 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장 맛이 이상한 것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데, 소금을 좀 더 뿌리든지 해서 말이다. 그러니 평소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마구 살아가는데, 물론 결과적으로는 성령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나타나지만 말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계속해서 인간의 기도를 거부하시는데,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무려 9번(6번?)이나 거부하신다는 것이다. "안 된다. 안 돼.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심판을 포기할 수 없어" 라고 말이다.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결국 "의인이 10명도 없다" 라고 하시니, 아브라함은 기도를 포기해버리고 마는데,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아브라함이 기도를 하면서 노린 것이 있는데, 당연히 심판이 지연이 되거나 중지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지금 현재 소돔과 고모라에 자기 조카가 있고, 그런데 그 미래를 지연시켜서 자기가 조카를 데리고 나오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포격을 하든지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 나름대로 생각한 '과거, 현재, 미래' 라는 것인데, 그것을 자기 기도에 담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거부하셨다는 말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할 수 없이 "하나님, 모두 알아서 하세요" 라고 하면서 맡겨놓았다는 것이다.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창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창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창 18: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창 18: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창 18: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창 18:28)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그러면 아브라함이 왜 그런 기도를 했는가?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날 때 하신 약속이 있는데, 아브라함은 마치 영화 '타짜'에서 화투 밑장을 빼는 것처럼 자기 혼자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동반해서 있다는 것이다. 

 

◈ 기도가 거절되는 은혜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 같이 자기 자식이 많을 것이다" 라고 해놓고는, 오히려 하나밖에 없는 자식마저도 죽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나는 죽어도 약속은 살아있다" 라는 것을 믿었는데, 즉 "내 행위는 비록 개판이지만, 주님의 태양광 패널은 지금도 천국 문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나는 말씀을 지키지 못해도, 말씀 스스로 말씀을 지키는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제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자기 주변에서 뭔가 일이 생기게 되면 자기가 나서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설치고 자기가 기도하는데,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음으로서, 응답이 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서, 즉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아도 믿음은 건지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기도를 거절하는 이 은혜를 어떻게 찬양하리!" 라는 것인데, 즉 "주여, 제 소원대로 했다면 넓은 길로 가서 지옥에 갈 뻔했습니다. 저는 그 길로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지옥으로 가는 길인 줄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은 받지 않는데, 거기에는 우리의 능동성이 가미되기 때문에 말이다. 능동성에는 우리의 시간이 가미되고 우리의 시간이 가미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브라함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 나오는 이삭이나 야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아무리 아버지에게서 한 수 배워도 그때뿐이고, 돌아서면 또 다시 인간적인 모습들이 그대로 발휘가 된다는 말이다.

 

◈ 아들아, 나는 별미를 좋아한다 !!

이 이삭은 큰아들인 에서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정도는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즉 "내가 상속할 아들은 내가 알아서 밀어줄 수 있습니다. 그 정도의 재량은 나에게도 있습니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삭이 큰아들에게 어떻게 해주었는가? 큰아들을 밀어주려고, "나는 별미를 좋아한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누가 들어도 "나는 큰아들에게 축복해주겠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에서와 야곱이 둘 다 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에서만 혼자 불러놓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완전히 불공정 거래인데, 감사원에 신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모른 척을 하겠지만 말이다. 무슨 이런 엉터리 입찰이 다 있느냐는 말이다. 완전히 짜고 치는 고스톱인데, 그러니 분명히 아버지가 잘못했는데, 이런 게임은 하나마나라는 것이다.

이것을 좋은 말로 '수의계약' 이라고 하는데, 이미 계약이 다 끝났는데, 그러니 야곱은 완전히 들러리라는 것이다. 이미 신입사원을 다 정해놓고 신입사원채용 공고를 버젓이 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회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말이다. 

 

◈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언약 !!

그러면 이삭이 왜 이렇게 하는가? "굳이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셔도 이 정도의 일을 제가 알아서 능동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삭 자신이 에서를 좋아하니 말이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누구를 좋아했는가? 그 이삭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의 생각이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생각은 무엇인가? 그 좋아하는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이 곧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 그것이 곧 언약의 핵심중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빠져버리면 전혀 천국 문에 접근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교회가 교회가 아닌데, 그러니 "나는 어느 교회에 다닌다" 라고 하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저는 아버지가 아들을 죽여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입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도 없는 자기 아들을 잡아죽여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는 것이 말이다.

 

◈ 하나밖에 없는 교회의 교인이 되어야 !!

여기에 대해서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라고 물으면, 그것은 바로 "나는 나의 능동성, 나의 재량권, 나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드디어 알았습니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나와야 진짜 하나밖에 없는 교회의 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백이 나오지 않는다면, 교회에 다녀도 그것을 놀러 다니는 것이란 말이다.

물론 회비가 만만치 않은 친목단체인데, 십일조에, 감사헌금에, 주일헌금에, 비용이 제법 많이 든다는 것이다. 때로는 건축헌금도 해야하고 말이다. 그러니 여호와 증인의 왕국회관이 엉터리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 김밥천국을 여호와 증인에서 운영해서 맛이 있다는 말도 있는데, 김밥나라의 김밥도 맛있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자기가 어느 교단에, 어느 교회에 소속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깔끔하게 "모든 교회가 다 이단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선교단체도 이단이고 말이다. 모든 것이 결국은 돈과 관련이 되어있는데, 자본주의 사회이니 말이다.

 

◈ 야, 주님께서 값을 치렀구나 !!

하지만 값은 우리가 지불하는 것이 아닌데, 호세아서를 보라는 것이다. 바람난 아내를 데리고 오는데 누가 값을 지불하는가? 호세아가, 즉 주님이 지불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인데,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바라볼 때마다, "주님께서 값을 치렀구나"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죄를 짓는 것만 잘했지, 값을 지불하는 것은 맹탕이라는 것이다. 사고는 쳐놓고 책임은 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주특기인데, 물론 책임을 질 수도 없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서, 옛날 사람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갈라진 곳마다 절을 하곤 하는데, 갈라진 것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말이다(ㅋㅋ). 제주도까지 가서 불룩 튀어나온 돌을 사 가지고 와서 빌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아들이 아닌 딸을 낳으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지겠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잘못했으면 그 책임을 자기가 져야하는데, 그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데, 이게 웃을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평소에 하는 행동이 늘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행패 부리는 인생' 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불신자는 술이라도 먹고 행패를 부리지만, 신자는 먹지도 않고 부린다는 것이다.  


◈ 이삭은 자기 아들을 잡아야만 !!

그러니 이삭은 자기 아들을 잡아야만 하는데, 자기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잡듯이, 역시 이삭도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인 에서가 버림을 받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삭 안에 죄가 들어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아무리 능동성을 발휘해도 그 죄만 발휘될 뿐이지, 그 성질이 따로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좋아하니 하나님도 좋아하겠지" 라고 하는, 그런 자기 일방적인, 자기 주변의 좁은 범위 안에서의 능동성을, 그것을 마치 오실 주님의 능동성으로 착각해서 일치시키는 것, 그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언약 안에는 반전이 있는데, 즉 바꿔치기를 한다는 것이다. '나' 라는 존재에서 '주님' 이라는 존재로 말이다. 그러면 주님이 자기를 대신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자기는 없고 주님이 자기 존재가 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고 말이다. 이러한 존재의 바뀜은 교회에 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바뀐다는 것이다. 혹은 '성령 안'에서 말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을 이번 강의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능동성이 주님의 능동성에 함몰이 되면서, 거기에 반응을 보이는 수동성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간다" 라는 의미인데, 그것은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야곱이 아닌, 에서 편에 서야 !!

이제 어려운 것을 하겠는데, 이렇게 이삭이 에서에게 일방적으로 밀어주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누가 엿들었는가? 이삭의 부인이자 야곱의 엄마인 리브가가 엿들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원수가 집안에 있는데, 그런데 이 리브가는 누구를 밀어주는고 하니, 에서가 아닌 야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성경해석을 하면서 염두에 두어야하는 점이 무엇인고 하니, "누구의 입장에 서는가?" 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 내용이 나오는 창세기 27장을 보면서 하나같이 모두가 야곱의 입장에 서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반칙이고, 우리는 야곱이 아닌 에서의 입장에 서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서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야곱의 반전이 자기 자신의 반전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에 관찰자로, 구경꾼으로 끝나고 마는데, 그래서 끝까지 야곱이 아닌 에서의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곱이 아닌 에서를 말이다.

 

◈ 여자를 울려 !!

이제 그렇게 에서 편을 들도록 하겠는데, 이것을 우리의 가정 이야기로 돌려서 '사랑과 전쟁3'를 시작하도록 하겠는데 말이다(ㅋㅋ).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유산을 모두 물려주려고 하는데, 그런데 엄마가 그것을 눈치채고 둘째 아들에게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흔히 있을 수 있는 내용인데, 요즘 드라마도 이런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최종적인 미래라는 것은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 갈 미래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미리 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미리 성도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절차를 밟아서 가야하는데, 그런 것도 없이 새치기를 해서 미리 가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래, 야곱은 잘 받아야 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는 에서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야곱이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남의 이야기라서 실감이 나지 않을지 모르겠는데,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한다고 하면, 자기가 형이고 그리고 남동생만, 그렇게 둘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기에게 다 밀어주었는데, 미리 유언도 다 쓰고 해서 말이다.

주소도 정확하게 썼는데, 주소가 틀리면 그게 또 제대로 된 효력이 없다고 해서 말이다. 물론 유명한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공증도 다 받고 말이다. 그러면 누가 뭐라고 그것은 자기 재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돈이 생기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부터는 계획이 줄줄이 들어서는데, 집은 어떻게 하고 또 자동차는 무엇으로 바꾸고 말이다.

그런데 그만 서류접수과정에서 행정적 착오가 일어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제 법원에 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만 갑자기 급성맹장염이 와서 119에 실려서 병원에 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게 자기 동생이 그만 서류를 바꿔치기를 해서, 형 대신에 자기 이름을 다 집어넣고 말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는 맹장수술을 마치고 집에 오니, 달랑 자기 옷가지와 운동화만 바깥에 나와있고, 집에도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빈 몸으로 쫓겨났다는 것이다. '여자를 울려' 라는 드라마에 보면 나오는 내용인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동생이 그만 아버지의 재산을 다 가지고 갔는데, 엄마와 공모해서 말이다.

(창 27: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창 27:2)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창 27:3)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창 27: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창 27:5) 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

그렇게 되면 형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인가? "1번,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서 포기를 한다. 2번, 반반 씩 나누자고 협상을 한다. 3번, 그만 죽인다" 라는 것 중에서 몇 번인가? 3번인데, 여기서 벗어날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마귀 덩어리이기에 말이다.

드라마는 자기가 만드는데, 미래도 자기가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손에 동생이 죽은 것이 미래라고, 그렇게 우리는 가정을 한다는 말이다. 미래를 하나님이 만든다는 것은, 그런 것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자기가 애를 써서 만든 것이 미래라고, 그것이 자기의 미래라고 찰떡같이 믿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부인할 줄도 모르고 거부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장래를 모르고 행동하는 법은 없는데, 장래의 목적이 뚜렷하기에 자신감이 있게 행동에 나선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미래를 하나님이 만든다고 하면, 그래서 그것이 자기의 미래가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인간은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미래가 아니라고 하면 말이다. 

따라서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기로 하는데, 그것이 성경에 그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7장 42절에 보면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구경꾼 노릇을 해서, 함부로 야곱 편에 먼저 서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내용을 다 안다고 하면서 말이다.

(창 27:41)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하지만 에서에서 야곱으로 가는 길은 주님의 능동성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것이지, 마치 드라마를 보듯이 해서 "나는 야곱 편이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짜인데, 성경말씀을 다시 봐야한다는 말이다. 왜 자기가 좋은 편에 서야하느냐는 것이다.

 

◈ 너는 죄인이다 !!

그러니 주님의 능동성과 우리의 능동성이 마주치면서, 그 지점에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너는 죄인이다" 라고 규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또 착각해서 뭐라고 하는가? "그렇습니다. 저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의 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너는 죄를 몰랐는데, 내가 등장함으로서 비로소 너는 근원적이고 원천적인 죄를 알게 된다" 라는 것이다. 그동안 자기가 알고 있던 죄가 아니고 말이다. 그것을 로마서에 가면 구체적으로 '자기 의' 라고 하는데, 혹은 자기 체면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행함을 믿는 것, 자기 믿음을 믿는 것, 행함에서 나온 믿음을 믿는 것, 그런 것이 다 죄가 된다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여기서 잠시 정리를 해보면, 성경전체가 하나님의 계시인데, 그것을 에베소서 3장에서는 숨겨진 비밀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16장에서 그러한데, 즉 '비밀' 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책에 기록해놓고 비밀이라고 하시는가? 우리는 이 책을 '성경' 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그것을 '비밀' 이라고 해도 된다는 것이다.

(엡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하지만 우리는 눈과 귀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데, 누군가가 다녀가야 하는데, 즉 진흙으로 발라주시는 주님이 다녀가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비밀책이 바로 성경이라는 말이다. 마치 태양이 떠 있어야 에너지가 만들어지듯이, 말씀 자체가 설쳐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알았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자기가 바로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래서 날마다 "죄인인데도 주님께서 오늘도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구나"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산다고 해도 사는 것이 아닌데, 오히려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죽음의 절차를 우리는 오해해서 살아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죽음으로 끌려가고 있으면서 말이다. 분명히 죽어가고 있는데, 그런데 "휴, 이제 살았다. 숨이나 좀 쉬자"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숨이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는 말이다. 

자기가 살아있다고 우기면 자꾸만 자기 능동성에 의미를 두게 되는데, 수동성이 아니고 말이다. 물론 우리가 행동에 나서면 능동적으로 하지 수동적으로 하지는 않는데, 하지만 성도는 마지막에는 결국 수동적으로 되돌아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하셨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그런 부분이 없는데, 끝까지 자기가 잘났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이번에 판문점에서 오랜만에 남과 북이 회담을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가? 노인네들이라서 체력도 시원찮은데 말이다. 서로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면 시간이 걸릴 것도 없는데, 그런데 서로가 자기 능동성을 주장하고 있으니 밤을 지새워도 시간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회담할 때, "주님, 맞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그것으로 그냥 끝인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라고 나오면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죽는 것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냥 죽어가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러니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 이빨이 아픕니까? 음식을 먹는 것은 고사하고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잡니다" 라고 하면 회담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여, 그동안 맛있게 먹게 해주신 것도 고맙습니다" 라고 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죄인인데, 이빨이 무슨 대수냐는 말이다. 그냥 갈아 뭉개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 성도는 존재자체가 달라 !!

일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욥과 욥의 친구들이 다른 점이 무엇인고 하니, 욥은 죽음과 가까이 있는데, 그래서 자기를 죽이는 하나님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자기들이 만든 거짓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같을 수가 없는데,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도는 존재자체가 다른데, 인간이라고 같은 인간이 아닌데, 성도가 진짜 인간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성도의 진짜 인간이 되시기에 말이다. 성도는 같은 종류가 아닌데, 이상하게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불신자와 막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죽일 놈, 야곱 !!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하는데, 따라서 에서의 눈에 야곱은 그야말로 죽일 놈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권이 마땅히 아버지의 손을 통해서 자기에게 전달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야곱이 강탈해갔다는 것이다. 야곱이 한 행동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고 하니, 거짓말에다가, 위장에다가, 목소리도 변조하고 말이다. 야곱은 처음부터 그렇게 싹이 노랗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이 좋아하는 팥죽을 이용해서 형의 뒷덜미를 치는데, 형을 위하는 척을 하면서 그렇게 배신을 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간사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야곱은 장자가 되려는 야망을 태어날 때부터 놓치지를 않았는데, 그래서 엄마 태 중에서의 싸움이 이 땅에 나와서도 계속해서 진행이 된다는 것이다.

(창 25: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 25: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창 25: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창 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그러면 이들의 싸움은 어디서 끝나는고 하니, 에서와 야곱을 태어나게 했던 그 태 중에서 끝이 나야한다는 것이다. 즉 "누가 쌍둥이가 되게 하셨는가?" 라는 것인데, 바로 그분이 야곱을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얍복 강가에서 말이다. 태어나고 난 뒤에, 즉 같은 인간이면서 서로 싸워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태어나게 하신 분이 찾아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목사가 찾아와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창조하신 분이 찾아와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그렇게 창조의 의미를 부여하게 하면서 태어나게 하신 분이 자기를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인지 그분인지 아닌지, 마귀인지 어떻게 아는가? 자기가 원천적으로 죄인이라고 하는 증거를 가지고 오신다고 하면, 그러면 그분이 바로 그분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곧 주님인데,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를 앞세우면서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면, 모든 관계는 정상 !!

그렇다면 잠언서에 나오는 모든 관계는 무엇을 앞세운다는 말인가?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로 하여금, 여기 잠언서에 나오는 7가지 모든 관계에 있어서,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주신 관계라는 증명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면, 그러면 정상적인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이고, 또한 정상적인 부부의 관계이고, 친구와의 관계라는 말이다.

양쪽이 다 십자가를 아는 것, 복음을 아는 것,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또한 수동성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를 보고 "여보, 당신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슬기로운 여인이야" 라고 하게 되는데, 슬기로운 여인이 아니라 지혜자체(?)라는 것이다. 이것을 지난번에 했는데 말이다.

잠언서 19장 14절에 보면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원천적인 분께서 왕과의 관계, 또는 부모와 자식과 관계를 통해서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야곱이며 사기꾼이라는 것을, 그렇게 남을 등 처먹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거짓말도 밥먹듯이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사람이 바로 야곱의 언약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잠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 그런데 왜 모든 것이 야곱으로 평정이 되는가?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무엇인고 하니, 에서가 참으로 억울한데 말이다. 그런데 그 억울한 것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나중에 모든 관계가 마감이 되고 난 다음에는, 그게 억울한 에서를 위한 쪽으로 정리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난을 받아서 마땅한 야곱 위주로 모든 사태가 평정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에는 사회정의라는 것이 없는데, 오히려 아주 불공평한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하나님은 내 편이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편이지, 결코 자기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염두에 두는고 하니, 이렇게 자연이 있고 그 너머에 하나님이 있고 그런 자연을 만든 신이 있든지 말든지 인간은 자기 생각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 주변에 있는 것에 대해서만 자기 재량권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 제가 한 착한 일을 보셨지요?

우리는 그렇게 선택을 하면서 건방을 떠는데, 어떻게 떠는가? 자연을 넘어서 있는 하나님에게까지도 자기의 뜻이 일치할 것이라고, 즉 자기가 하는 착한 일이 하나님에게 상달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상상을 하면서 일방적으로 그게 확정될 것이라고 반칙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지하철역에 엎드려 있는 거지에게 천 원을 동냥합니다. 주님도 보셨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 아이가 고3인 것을 잘 아시지요? 앞으로 더 착한 일을 많이 하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한 착한 일이 누적이 되어서 하늘에 잘 도착이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축적해놓은 마일리지는 월 별로 밀고 당길 수도 있는데(ㅋㅋ), 자기는 원래 착하기 때문에 굳이 그러한 마일리지가 그렇게 많이 필요가 없고 말이다. 그래서 자기가 쌓아놓은 그 여분의 것을 가지고 자기 자식이 혜택을 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사실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탐욕이라는 것이다. 마귀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그런 짓들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왜 그리 자연스러운지 모르겠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 야곱, 그리고 이삭 !!

그래서 야곱이 하는 행동을 보면, 야곱 자신도 그렇게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면서 얼마나 간이 떨렸겠는가? 그런데 야곱이 거짓말을 하는 것만 나쁜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너무나 거기에 잘 따라왔다는 것이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박수도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아버지도 거기에 대해서 일말의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야곱의 이름도 '속인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평소에 좀 철저하게 관리를 할 수 없었느냐는 말이다. 첫째와 둘째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 그러면 자기가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왜 미리 좀 생각을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에서에게 하는 말을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엿들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이삭이 순진해서(?) 그러한데, 즉 "나의 능동성이 곧 하나님의 능동성이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창세기 27장 뒤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이삭 자기가 축복하는 것이 자기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인데, 그것을 야곱이 대신해서 해준다는 말이다. 이삭은 복의 계통이니 말이다.

 

◈ 네버, 없다 !!

그래서 뒤늦게 에서가 헥헥거리면서 와서 "여기에 한우 명품이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저에게 남은 여분의 데이터가 좀 없습니까?" 라고 해도, 야곱이 뭐라고 하는가? 한 마디로 잘라서 말하는데, "네버, 없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런 것이 어려운데 말이다.

(창 27:30)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창 27:31)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창 27:32)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창 27: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 천국은, 뒤집힌 자들만이 !!

축복이라는 것은, 즉 축복을 주고 또 저주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축복을 주게 되면, 그 축복이 없는 쪽은 저주라는 것이다. 즉 축복과 저주가 같이 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의 배후에는 저주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세트를 이루어서 말이다. 그것이 곧 아브라함 언약인데, 즉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라고 말이다. 그게 언약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상식과는 얼마나 다른지 모르는데, 그런 다른 세계를 우리가 무슨 인식으로, 무슨 선입관으로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십자가가 우리를 완전히 뒤집어놓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뒤집힌 세상인데,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다 뒤집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나쁜 놈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 그것이 바로 놀라운 복음이라는 것이다. '알랑가 몰라' 라는 노래도 있지만, 나쁜 놈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숨겨진 비밀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이 다녀간 자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변의 작은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면서 살아가는데, 사실은 그것이 은근히 노리는 우리의 미래상, 우리의 축복상은 아닌지요? 그러니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는 모든 행동들이 다 죄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