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10:5 / 안과 밖 / 150508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10:5 / 안과 밖 / 150508

정인순 2015. 5. 9. 11:21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공은주

안양20150508a-히10장5절(안과 밖) - 이 근호 목사

 

10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되어있지요. 참, 신기하잖아요. 우리가 그렇게 소망했던 그 거룩한 곳 그리고 거룩한 곳에 가려면 거룩함을 입어야 되는데, 내 쪽에서 뭔가 거룩함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인데 히브리서10장10절에서는 그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그 결과가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했으니까 도대체 그 와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지요?

 

그렇게 우리가 매일 거룩하려면 거룩한 행동을 해야 거룩하다는 것이 우리네 상식이고 그렇게 교육을 닦달 내듯이 많이 받아왔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다른 이야기한다니까요. 거룩한 행동을 해야 거룩합니다. 라고 하는 상식이 파괴되고 예수님의 몸을 드리심으로 거룩함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함을 얻었다, 이렇게 되지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경로를 거쳐서 딱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지, 예수님의 몸은 우리하고 사실은 타인의 몸이지요. 남이잖아요. 옆집 사람이 몸을 드린다고 해서 이쪽 사람의 식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안 되지요. 을지문덕 장군 거룩하게 살았다고 수천 년 뒤에 우리가 거룩함이 됩니까? 시간을 초월해서 거룩하게 된다는 게 신기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믿어라 하는데 믿으려면 무슨 과정이 있어야 믿지요. 믿었으면 뭘 믿습니까? 이야기할 때 뭐 이야기해야 될 게 있는데 전혀 이런 경우에는 믿어라, 하는 말은 이야기하기가 적용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 과정이 히브리서10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그 과정에 시작이 8절에 보면 나옵니다.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제사 드리는 것, 예물 전체로 드리는 그 번제, 속죄제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와 속죄제, 번제 이것 누가 지시한 거예요? 이것 하라고 누가 지시한 거예요? 하나님이 지시해놓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교체작업을 하나님 쪽에서 했다. 이리 보면 돼요. 교체작업.

 

전에는 내가 제사 드려라, 번제하라, 속죄제 드리라 하다가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너희 쪽에서 하는 것을 내가 받는다는 식에서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 “스톱! 스톱해! 하지 마! 나한테 바치지 마! 너는 나한테 바쳐 바야 너는 구원 안 돼! 거룩함이 안 돼!” 너희들이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겠다는 말은 우리가 드리는 것으로 거룩을 획득하겠다, 거룩을 얻겠다는 심정으로 그들은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겁니다. 예배드리면 나는 거룩해진다. 예배드리지 않은 자는 거룩하지 않지만, 예배드린 우리는 거룩하다. 또는 속죄 드린 자는 거룩해지지만, 속죄 드리지 않는 다른 사람은 거룩하지 않다. 따라서 거룩하지 않은 것과 거룩한 우리와의 차이점은 하나님 앞에 시킨 대로 했느냐, 안했느냐의 여부다.

 

그러니까 구약은 행함으로 거룩함을 얻는 그러한 조항들이 가득 차 있는 때가 구약 때다 이 말이죠. 쉽게 말해서 “받쳐야 복을 받지.” 라고 하는 것이 구약이다 이 말이죠. 시간 바치고, 돈 바치고, 정성 바치고, 순종하고, 니 몸 바치고, 놀라운 사실은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받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부터 따져야 되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받는다? 안 받는다? 우리의 행동도 안 받는다는 뜻은 우리의 몸도 안 받는 거예요.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안 받았잖아요. 그럼 가인의 몸을 드리면 받겠습니까? 안 받지요. 그러면 다시 그 원천으로 돌아가게 되면 니 행위를 안 받는다는 말은 니 몸을 불사를지라도 안 받는다는 뜻이에요. 안 받는 겁니다.

 

만약에 제가 개고기를 못 먹잖아요. 그런데 집사님이 대접한다고 돌아다니는 개를 잡아서 개고기를 대접한다. 안 먹지요. “아이고, 정성인데.” 정성이고 뭐고 내 쪽에서 개고기를 안 먹겠다는 거예요.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거룩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거룩을 원하고 있고, 인간은 거룩을 유발시킬 수 없는 문제고,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교체에 들어가야 되지요.

 

중간에 교체해서 뛰어 들어가는 거예요. 중간에. 그러면 처음부터 속죄제를 드리지 말라는 말을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 들지요. 가인이 제사하기 전에 “제사하지 마!” 먼저 명령을 했으면 됐잖아요. 제사를 실컷 하게 해놓고 제사를 안 받는다, 이리 돼놓으니까 가인이 약이 올라버린 거예요. 처음부터 말리지. 제사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안 받는다! 안 받는다? 뭐예요? 약을 올리는 것 밖에 더 됩니까?

 

그 이유는 이겁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몸을 드리기 위해서는 거기에 필요조건으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인간은 거룩하지 않다.’가 ‘예수님은 거룩하시다.’ 요소로 이게 포함이 돼줘야 됩니다. 예수님 홀로 거룩하다. 이걸로 충족되지를 않아요. 우리 인간은 ‘주님 앞에서 전혀 거룩하지 않음’ 그것을 전제로 하고 인간이 아무리 뭘 해도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거룩이 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죠.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거룩을 유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몸 말고 만약에 예수님이 존재하심, 그러니까 하늘에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하늘에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다. 하늘에 하나님의 아들이 계신데, 자 여기에 하나님 아버지계시고 우리가 있다고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보고 거룩해요. 그 때는 예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겠지요. “아들아, 거룩하나?” “예, 거룩합니다.” “나도, 거룩해.” “예, 거룩합니다.” 거룩 끝났네. 뭐가 빠졌어요? 두 분만 거룩해져버리면 천국에 누가 살아요? 두 분만 달랑 남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가 거룩한 게 아니고 예수님의 몸의 거룩으로 이게 바뀌어져야 됩니다. 따라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셔야 돼요. 이 땅에 오셔야 됩니다. 거룩한 몸이 몸을 입었으니까 그 몸도 거룩한 몸. 그 몸도 거룩한 몸이니까 아무 문제없어 보입니다. 정상적으로 보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의 생각은 예수님의 존재가 몸의 거룩이 되는데, 여기에 뭐가 투입되느냐 하면, 이게 참 놀라운 거죠. 여기에 말씀이 투입됩니다.

 

그래서 말씀이 완성하는 몸이 거룩한 몸이에요. 예수님이 몸을 가졌다고 자동적으로 거룩한 게 아니고 그 몸이 어떤 몸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체가 될 때, 이 몸이 거룩해지는 거예요. 말씀의 완성체. 그런데 그 말씀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초반에 제일 중요한 건데요,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이 교체가 들어있어요. 교체가. 말씀 안에 교체하는 게 들어있어요. 말씀 안에 들어있어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희생할 때 그 희생이 거룩하다 이 말입니다. 자, 예수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면 뭐가 누락이 돼요? 뭐가 생겨나지 않습니까? 희생이 생겨나지를 않아요. 그런데 말씀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죄를 위해서 어린양을 잡는 게 들어있다 말이죠. 이거 누가 지킬 거예요? 그럼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팔짱끼고 있으면 그게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겁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예수님 말고 할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말씀에 보게 되면 세상 죄를 지는 어린양이 죄를 대신할 때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에 만족하시거든요. 그 일을 누가 할 거예요? 모세가 할 거예요? 아브라함이 할 거예요? 아무도 못해요. 그러니까 성경은 히브리서10장에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처음부터 말씀이 있었다. 말씀이 있었는데, 그 말씀을 주었다. 그 말씀의 내용이 뭐냐 하면, 누가 대신 희생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용서하는 그 짜임새가 그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 말씀에 대해서 인간들이 그걸 실천해보려도 속죄제 드리고 번제 드리고 했다. 그런데 그게 다 삑!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주신 것은 사람보고 행하란 것이 아니었다. 말씀을 줘놓고 뒤따라오는 게 뭐냐, 준비된 어떤 몸이 있었다. 이게 히브리서10장5절의 말씀이잖아요.

 

10장 5절에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 하셨도다, 이 말이죠. 지금 그 순서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말씀을 줬다. 말씀에는 희생의 내용이 들어있다. 희생의 내용이 완벽하게 할 때 거룩은 유지된다. 그런데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몸을 준비했다. 그 몸이 투입된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투입하면서 교체작업이 일어나는 겁니다. 바꿔치기가 되는 거예요.

 

그 바꿔치기가 되려면 우리의 자리가 뭐냐, 철저하게 거룩하다가 아니라 반대로 거룩치 않다를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의 자리에서 우리는 거룩하지 않다로 우리가 발각되어야 되고 이것이 정돈 되어야 돼요.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전혀 거룩하지 않구나!’ 하는 것이 확증이 되어야 됩니다. 정립되어야 돼요. ‘아, 나는 이래서 거룩하지 않다.’ 거룩하지 않으면 저주받아야 마땅하지요. 그래서 우리가 고생하잖아요. 집사님도 고생하지요. 고생하다가도 숨 쉴만하면 교만하고 또 어려우면 주여! 하고 부르짖고 이게 사사기내용입니다. 좀 숨 쉴만하면 다른 신 섬기다가 좀 어렵다 싶으면 할 도리 다하다가 다 실력발휘 하다가 이것저것 다 안 되면 그 때는 여호와시여! 또 돌아오고. 또 숨통 튀어주게 되면 다시 헤헤 거리면서 또 자기에게로 오고.

 

요한계시록17장에 나올 때 바벨론이 나오는데 바벨론 도시에 음녀의 특징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소유’입니다. 소유를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놀랍게도 성적인 용어를 써요. 이걸 ‘음욕’이라 해요. 음욕. 음탕함, 음욕, 음란함. 이게 소유잖아요. 내 것 못 놓겠다는 거예요. 바벨론 도시는 내 것들의 집합이에요. 내 것의 집단. 오늘날 이 세상을 그대로 묘사한 거예요. 각자 집이 다 있잖아요. 내 것들의 집합이 하나로 음녀로서 표현되고 음녀는 음욕이 되는 겁니다.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내 것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렇게 묻습니다. “니, 거룩하냐?”라고 물어요. “주여, 저 제 것입니다.” 주께서는 “니가 거룩하냐?” 라고 하면, 그런 식으로 묻지 마시고 “이게 제 것이라니까요. 힘들여서 얻은 내 것입니다.” 주께서는 “거룩하냐?” “아니요.” 그럼 저주지요. 니 것, 내 것이 거룩하지 않으면 다 쳐버려요.

 

성경에서 그 말이 있다는 말은 거룩으로 교체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에요. 거룩으로. 거룩하라는 말이 아니라 거룩으로 교체가 되면 그게 거룩이에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은 교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교체를 의미하려면 이 음욕을 음욕으로 인정을 해줘야 되지요. “제가 내 소유밖에 모릅니다.” 하는 것을 인정을 해줘야 돼요. 인정을 해준다는 말은 “나는 교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는 “교체되어야 마땅합니다.” 가 수응하는 거예요. 이것이 뭐냐 하면, 나의 세계에서 뭐로 교체가 되느냐 하면, 주님의 세계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이걸 어려운 말로 ‘주님의 체계’ 다른 말로 하면 ‘중보자의 체계’ 중보자가 내 인생에 들어와 버리면 나는 주님의 세계에 일부가 돼요. 일부, 부분, 한 모퉁이를 배당받은 거예요. 내 옆에 사람하고 연결을 해보니까 그 연결된 고리를 찾아가보니까 그리스도의 은사로 되어있어요. 내가 저 성도하고 관계하는 것이 주께서 만들어준 연결고리입니다.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에 이런 거 했지요. 수수깡으로 안경 만들고 했지요. 그 연결고리, 화학자들이 DNA 모형 할 때 동그라미에다가 가지 연결해서 모형으로 설명하거든요. 물질의 구조를. 그게 연결이 되게 되면 우리는 한 모퉁이를 차지하지요. 이 연결고리의 일부가 됨으로서 연결고리가 ‘거룩의 망’이라 해요. 거룩의 그물망 속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내 소유가 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소유가 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체계에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체제를 가지고 뭐냐, 이미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렇게 설명을 복잡하게 안하면 거룩을 내가 챙겼다고 생각해버리면 이것은 또 다시 음녀가 되지요. “나는 거룩 가졌는데 너의 거룩을 한 번 보자.” “아이고, 저게 더 크네. 아이고, 나는 뭐야?” 또 이렇게 된다 말이죠. 소유가 음욕이니까.

 

그런데 그 소유를 탈탈 털기 위해서는 나의 현실 체계를 주님의 현실체계로 바꿔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바꿔치기할 때 우리의 체계를 포기하겠습니까? 우리는 만만치 않거든요. 우리는 한 고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내 체계를 고집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말씀으로 와서 우리의 모든 속죄제, 번제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비거룩으로 바꾸어버려요. 이게 바로 죄로 바꾸는 겁니다. 비거룩으로.

 

거룩한 말씀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졸지에 비거룩한 사람이 돼요. 속죄제 드리면서 비거룩, 십일조하면서 그것도 더러운 것, 설교하면서 더러운 것, 성경공부하면서 더러운 것, 모든 것이 더러움으로 바꿔치기 하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교체작업의 일환이에요. 교체작업에 절차가운데 그것이 포함이 되어있어요. 그 절차를 개인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단체로 하는 겁니다. 단체로.

 

단체가 뭐냐,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여러분, 구약 보면서 이스라엘 망한 거 아시지요. 포로 잡힌 것을 아시지요. 그러면 같이 포로 잡혀가면서 둘 다 성질머리가 못됐겠습니까? 누구는 착한 사람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착한 사람 있지요. 한 쪽은 부모한테 어버이날 꽃 달아드리고 나는 꽃도 안 드리고. 전부다 사람성질마다 다 착한데 성격이 착한 것도 있지만, 환경 따라서 착해 보이는 사람과 그리고 환경이 악해서 성질나면서 어릴 때부터 살아온 사람 있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성경에서는 개인을 묻지를 따지지를 않습니다.

 

개인을 견주어서 누가 더 착한가, 누가, 누가 잘하나를 묻는 게 아니고 일괄적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다 포로 만들었어요. 포로 잡혀간 사람 10%정도, 돌아온 사람 1%정도 숫자로 그럴 거예요. 다 흩어져버렸어요. 돌아온 사람이 1%정도밖에 안될 거예요. 다 흩어져버렸습니다. 이건 뭐냐, 개인을 묻지 않는다. 단체로 묻는다. 왜 단체로 책임을 물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교체할 때 예수님께서 니는 착하니까 내 자리를 차지하라, 이렇게 하지 않고 일괄해서 단체로 주님의 사람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주님의 사람 속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 성질 더러운 사람도 있고 순한 양 같은 사람이 있는데 순한 양됐다고 더 거룩해진 것도 아니고 성질 더럽다고 해서 베드로처럼 더럽다고 해가지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연결망 때문에 다 같이 단체로 구원받는 겁니다.

 

전세버스타고 설악산이나 금강산 구경할 때에 창으로 보는 풍경은 다르지요. 한쪽은 오른쪽 보고 다른 쪽은 왼쪽을 보지요. 서로 다른 풍경을 봐도 차는 한 차에 탄 거예요. 이쪽은 인생을 살면서 자식 죽고 개 죽고 이리 살고, 저쪽은 아파트 4채있고 애는 서울대합격하고 이런 사람도 있는데 구원받기는 똑같아요. 배당이 달라서 그렇지 똑같아요. 주님께서 한차에 해서 바깥을 보게 하신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영어로 role 롤, 역할이라 합니다. 그걸 성경적으로 하면 ‘은사’라 해서 완전히 약 올리는 용어에요. 이 은사가 뭐냐 하면, “아이고, 너희들 귀한 선물 받았구나! 아 죽는 귀한 선물 받았네.” 약을 올리고 있어요. 사적으로 팔자 더럽지요. 그러나 집단적으로서는 세상에 거룩함을 얻은 거룩이라는 이름의 버스에 지금 동승하고 있는 겁니다. 그 물론 머리되신 주님이 머리고 우리는 몸이 되고. 왜 그런가, 이스라엘이 망할 때 착한 사람도 망했고 저질도 망했듯이 이쪽의 신약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은 누가됐든 간에 다 같이 거룩함을 얻게 된 거예요. 누구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그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데. 믿지 마세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개인적 음욕이 된다니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개인 소양이나 개인 주특기가 되어버려요. 통지표에 우수수수하다가 예수 믿는 거 가, 이러면 안 되잖아요. 예수 믿는 것이 하나의 과목으로 들어가면 안돼요. 예수 믿는 것이 전부다 포괄적이 되어야 되거든요. 너는 국어도 A, 수학도 B, 다 성적 좋네. 그런데 전체가 더 좋은 것은 니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렇게 되어야 되지요. 전체로 들어가야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해도 거룩함이 되어야 돼요. 중요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땅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았든 간에 그 인생전체가 거룩함이 되려면 이건 우리의 행함을 떠났습니다. 사적인 행함. 특히 개인적인 행동 여부와 이미 관계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몸 말고 다른 몸을 준비한 거예요. 우리가 몸이 있으면 행동하게 되어있지요. 우리의 몸과 행동을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고 이쪽 몸 가지고 바꿔치기해버리는 거예요. 바꿔치기하는 그 계획이 말씀 안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아까 속죄제 이야기했지만 또 달리 이야기한다면 마태복음7장12절에 의하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그 한가지인데,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한다. 그것을 예수님의 사랑으로서 우리를 대접한 셈이 되지요. 그걸 어제 가락강의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누가 나를 위하여 변호해준다고 이야기했지요.

 

변호 자가 계시니 욥이 고백한 것이 뭐냐, “거기 누구 계시지요? 그렇지요?” 이걸 고난가운데 발견한 거예요. 자기는 아무리 봐도 고난 받을 짓을 안했다 말이죠. 그렇다면 분명히 나 말고 다른 분이 있다 이 말이에요. 누가 계시지요? 하고 묻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봅시다. 방금 제가 체계라고 이야기했는데 영어로 하면 시스템이 되겠지요. 시스템 안에 우리가 일부 포함됐는데, 이걸 다른 말로 해서 ‘안과 밖’이죠.

 

신약성경에서 구원을 받는데, 방금 제가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한 것을 간단하게 사도바울은 설명했어요. 그건 뭐냐,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구원’ 궁금해요? 어떻게? ‘예수 안’에서 구원받아요. 예수의 체제 안에 우리가 할당받은 자기자리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체제 안에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같은 전세버스에 같이 타고 있는 거예요. 사적으로 동행한다고 하지 마세요. 집단적으로 동행하십니다. 나만 동행하는 게 아니에요. 아까 개가 두리인가 하던데, 그 개는 이 집의 개입니다. 동네 개 아니지요. 그런데 만약에 그 개가 구원받는다면 동네 개가 돼요. 이 동네 석수3동의 개가 되지요. 이렇게 설명하니까 쉽지요.

 

이 설명을 성경대로 하게 되면 또 어려워요. 누구든지 천하 자식이나 아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이런 말로 되는 겁니다. 방금 설명 드리니까 이해되는데 누구든지 천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이렇게 하니까 우리 생각에는 이제는 남편하고 이혼하고 자식도 미워해야 되는가, 이리 생각하잖아요. 그게 오해인 거예요. 그게 아니고 그걸 미워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게 공동소유가 된다 이 말이죠. 자식을 내 자식으로 하지 말고 주님 자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자식이 더욱 더 사랑스럽지요. 그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주 안에서 자식을 사랑하라, 이리 되는 겁니다. 남편이 내 남편이 아니고 주님의 남편이라고 이리 생각하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런 남편 별로 없지만. 강아지는 넣어주지 마세요. 주께서 강아지를 위해 십자가를 진 건 아니니까.

 

강아지 이야기 나와서 그런데, 로마서8장에 보면 피조물이 썩어지면서 해방되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영광을 얻는데, 그 피조물은 강아지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처음 창조할 때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과 관련되어 있는 강아지나 이런 가축들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 형상이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는 인간은 흙이 되어버리고 형상이 누가 대신 되느냐, 예수님이 형상으로 대표자가 되어버리면 예수님의 가치와 명예와 격에 맞는 새로운 피조물들이 거기서 새롭게 창조되는 겁니다. 기존의 코끼리, 사슴 이거 안 됩니다. 인간 중심의 인간과 친밀한 게 아니고 장차 천국에서는 예수님과 친밀한 격이 달라요. 격이 격상돼요. 하늘의 형상입어요. 놀랍게도. 그것은 몰라요.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냥 성경에서는 천사처럼 이야기하지요. 천사처럼.

 

왜냐 하면, 인간 언어의 한계 때문에 그냥 독수리모습, 사자모습, 이렇게 기존에 있는 독수리, 사자, 곰, 소, 사람, 이런 걸 인용을 했지만, 그것은 땅에 속한 인간이 있을 때 이야기에요. 인간도 새로운 피조물로 흙의 형상을 포기될 때는 말로 형용할 수 없어요. 왜냐 하면, 말 자체가 인간의 한계 내에서 적용되는 말이 한계 안에 있기 때문에. 인간세계가 붕괴되면서 하늘나라 적용되는 언어는 인간의 언어를 그냥 인용할 수 없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상징으로 남겨둬야 되지 그걸 풀이해버리면 내 소유의 해석이 돼버리면 다시 하늘에 갔던 것을 땅에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아요. 요한계시록을 왜 풀이하느냐, 풀이해서 대비하려고 하는데 그런 짓하면 안돼요. 대비해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요한계시록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의 영적 차원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이렇게 구원됐느냐 그걸 보여주는 것이지, 그 정보 빼내서 비밀을 캐내가지고 대비한다는 것은 이것은 집단 구원이 아니고 사적 구원이에요. 개인구원이 돼버려요. 개인구원.

 

개인구원의 잘못은 뭐냐, 나름대로의 체계를 만든다는 게 오류가 돼요. 내가 여기 있으면, 내가 머리가 되어가지고 내가 구원받기 위한 체계를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이 안에서 뭐가 있느냐 하면, 내 나름대로의 밖과 안을 내가 일방적으로 정해버립니다. 안과 밖을 . 밖을 정해버리면 내가 일방적으로 생각한 안과 밖은 내가 경계선이 되기 때문에 이게 뭐냐 개인구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귀신이 들어왔다. “안되지. 귀신 들어오면 안 되지. 귀신을 쫓아내야지.” 이리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기준이 되어서 귀신은 내 밖에 있어야 되지 내 안에 있으면 안 된다. 이리 되거든요. 그렇다면 성경해석이 전부다 개인구원 쪽으로 해석이 돼버리지요. “주님이여, 우리 딸 귀신 쫓아내소서.” 개인적 용도로 주님을 호출한 셈이 돼버립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의 안과 밖이 아니고 ‘예수 안’과 ‘예수 밖’이에요. 예수 밖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귀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밖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귀신의 제작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이길 수 없는 그 동네가 아니라 이미 이겼다. 사탄으로부터 벗어난 출애굽에서 벗어난 그런 입장에서 이제는 내 밖에 말고 주님의 밖에 뭐가 있느냐가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되지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은 안목이 달라집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 집안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이 왜 더러운 세계인지를 여유만만하게 우리는 만끽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겁니다.

 

롯데백화점 가서 “아! 이게 지옥이구나!” 여유만만하게 “지옥에서 물건 잘 만들었네. 원피스 잘 만들었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것도 입어볼까?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구원에는 관계없는 이야기니까. 느긋하게. 왜? 십자가피로 주님의 집단 구원받았거든요. 이건 내가 교체한 게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교체해가지고 전에는 내 안에 갇혀있던 나를 예수 안에 갇힌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면 큰 덩치가 예수님의 덩치잖아요. 우리는 그 안을 못 벗어나요. 마치 옛날에 사탄 속에서 못 벗어나듯이. 우리가 나의 자존심과 나의 가치와 나의 명예와 체면 밖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금식하고 “부족합니다. 회개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소리를 쳐도 죄인입니다, 라는 그것도 나의 의로서 이게 또 등장하니까 도대체 나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있었어요. 인간의 한계 때문에.

 

그런데 이제는 주 안에 있다 보니까 주님 안에 있는 그 자체가 사적인 구원에서 이미 벗어났기 때문에 “내가 구원했나? 주께서 구원하셨지.” 이런 느긋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남한테 이야기합니다. “내가 잘해서 구원받나? 주님이 잘해서 구원받지.” 이게 뭐냐, 다른 말로 하면 “행함으로 구원받나? 믿음으로 구원받지.” 같은 이야기거든요. “내가 열심히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야. 주님 주신 믿음으로 구원받지.” 그래서 '내 믿음' 하면 안 됩니다. 믿음은 행함의 일종이니까. 내 믿음을 주장해 버리면 내 믿음 안에는 구원이 있고, 내 믿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는 개인적인 체제를 또 고수하는 셈이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적 개인 구원에서 이미 집단구원으로 변화됐다는 사실을 히브리서10장 10절,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우리는 날마다 확인하는 게 좋아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햅쌀을 가지고 방앗간 기계에 집어넣으니까 김이 모락, 모락나는 떡가래가 나왔거든요. 그 떡이 우리에요. 입구에는 예수님 몸을 집어넣었는데 나중에 나온 것은 뭐냐, 거룩함을 입은 우리가 튀어나와 버렸어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체계 안에서 이루어진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거룩을 만들어내는 공장이에요. 우리는 그 결과물이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고 은혜입니다, 라고 사도바울이 고백했잖아요.

 

자, 지금까지 한 것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후딱 갔는데요. 제가 언급을 한 것은 이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속죄제, 번제를 분명히 먼저 제시해놓고 하지 말라고 했다. 제시해서 우리가 그걸 지킬 때 우리는 내가 중심이 돼서 ‘내 안에 구원이 있으면 되고 내 바깥에 구원이 있으면 나는 곤란하다. 밖에 있는 구원을 내 안으로 잡아당기기 위해서 시키는 대로 율법과 십계명을 지켜야 된다.’ 라고 생각했는데 율법 받았던 이스라엘이 몽땅 집단으로 멸망함으로 말미암아 착하고, 안착하고, 그 만큼 율법을 그동안 성과를 많이 거뒀는가, 적게 거뒀는가, 그런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몽땅 다 망했으니까. 그리고 하는 말이 사도바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해 버렸어요.

 

그러면 그것이 내 자신이 찢어지면서, 내가 설정한 안과 밖이 찢어지면서, 바깥에 뭐가 있느냐 하면, 말씀은 누가 가지고 가느냐, 내가 가져갈 게 아니고 말씀을 가져가서 일방적으로 다 지켜버린 분이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그게 내 몸과 대비가 되는 나 말고 다른 몸이 돼요. 그 몸과 내 몸을 해놓고는 주께서는 바꿔치기한 겁니다. 개인구원은 예수님만 적용되지 우리한테는 적용되면 안돼요. 예수님의 개인의 몸이 구원을 받음으로 그 개인의 몸이 하나님께서 팽창시켜서, 확대시켜서 하나의 그걸 집단구원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게 어디 있느냐, 그게 바로 대표라는, 맏아들이라는, 율법에 보면 맏아들 하나 장자가 은혜를 받으면 그 장자로 말미암아 나온 모든 자가 같이 은혜 속에 있다, 이리되는 겁니다. 이게 아브라함 언약이거든요. 아브라함이 아브라함 자손 안에서 전부다 같이 복을 누리는 거예요. 다만, 이스마엘은 안되고 이삭은 돼요.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과 이스마엘인데, 이삭은 없는데서 생긴 아들이고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육체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처럼 예수님을 맏아들로 만들어서 맏아들로 말미암아 다른 아들을 양상하게 하는 그 모든 근거가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놓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근거를 주께서는 이미 하나님 앞에 제출할 수 있는 서류작성을 이미 다한 거예요. 우리는 그냥 몸만 가면 돼요. 이 사람이 천국 갈만한 합당한 서류가 몇 달 전부터 말씀으로 다 이룬 것으로 돼있어요. 우리를 아까 변호한다고 했지요. 우리 변호사가 전부다 해보니까 이 사람은 합격해야 돼. 이미 창세전에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되어있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곧 이 사람에게 적용되는 겁니다. 교체되기 위해서. 하이카가 알아서 다해줘요. 어설프게 엔진 만지지 말고 멋 내지 말고. 우리는 가다가 매일 고장 나. 사적으로 고장 나. 사적으로 고장 나는 그 하나의 역할로서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집단 속에서 개인적으로 맨 날 고장 나는 역할을 해요. 개인적으로.

 

매일 아침마다 우리는 거룩에 실패합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개하고 싸우고 늘 실패해요. 늘 실패합니다. 거룩하지 않아요. 누가 잘됐다 하면 화가 나고. 내 원수가 망했다 하면 휘파람불고 난리 나고 좋아서. 우리는 본성대로 가기 때문에 우리 육신의 본성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이걸 꾸민다고 해서 주께서 모를 리가 없어요. 다 알아요. 그런데 그래야 돼요. 그래야 사적 구원에 기대를 안 걸지요. 나의 거룩함에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20년째 술 끊었다고 좋아하다가 21년째 아내하고 이혼하고 술 먹는 사람 있어요.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그동안 참은 거 한방에 끝납니다. 한방 브루스 하는데. 인생이란 한 방이라 하잖아요. 한 방에 운이 하나 트면 완전히 팔자 고쳤다 그런 뜻이잖아요. 마찬가지로 한 방 터지면 팔자 내리 꼬라박는 게 인생입니다. 강도로서 구원받아야 할 팔자가 더러운 팔자지요. 남들처럼 멀쩡하게 살다가 구원받으면 좋겠는데, 강도가 되어야 구원받는 것. 강도는 거기다가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작업이지 내 작업이 아니라고 본 거죠. 정말 보통 믿음이 아니지요. 거지 나사로도 마찬가지고. 거지 되어야 구원받는다는 이 기구한 팔자.

 

제가 언젠가 대중가요 가사를 인용하면서 그러한 가사의 심정을 내가 표현한 구절을 말씀드립니다. 이런 게 있어요.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버린 세월이 너무 길~~어요. 남자라는 이유로. 참는다 이 말이죠. 참으면 무슨 소용 있어. 한 방 터지는데. 결국 울 걸. 남자의 울음. 요새는 나이 60넘어서 드라마 보고 우는 게 남자들인데. 죽었던 야야가 살아왔다고 좋다고 울고. 드라마 그런 게 있어요.

 

거룩함을 얻었다는 이 선언이 이것은 바로 그 전에 사적 행함의 구원은 잊어라, 그런 식으로 거룩한 것은 그것은 너희들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한 나의 전략이었다. 하나님의 전략이었다. 따라서 너희가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조치였지요. 말씀의 어느 구절도 주님이 다 지켰다. 이 말은 같은 말로 말씀 어느 구절도 애초부터 우리는 못 지켰다. 못 지켰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 우리 지킨 것으로 천국 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처음부터 없었던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마귀는 지금도 교회라는 것을 통해서 자꾸, 아까 개처럼 달려들어요. 멍멍멍 계속 행하라. 행한 만큼 너는 거룩해진다. “봐라, 성경에 나오잖아. 주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했잖아!” 행하라, 행하라, 우리는 하도 들으니까 행해보지요. 행해봤지만, 한 방에 다 깨진 거예요. 10년 공로 다 깨지는 거예요. 주식 사놨다가 한 방에 내려가니까 온유와 화평은 다 날아가 버렸지요. 한 방에. 땅값 내려가는데 한방에 내려가는데. 그동안 참았는데. 참아도 무슨 소용 있어요. 얼마를 참아야 돼? 한 방에 참은 것도 다 무효가 되는데. 오늘 강의 제목을 ‘무효’라고 할까. 우리는 전부 무효에요. 인생 자체가 무에요. 무보다 더 심한 게 무효에요. 무효.

 

체조대회에서 수년간 연습해가지고 그야말로 뜀틀 넘기하고 뭘 해가지고 드디어 박수치고 고난도 해가지고 점수 9.65했는데 주체 측에서 요번 대회 무효입니다. 3년 동안 5년 동안 고생한 거 아무 소용없어요. 무효라는데. 우리 인생요? 처음부터 무효였어요. 그런데 마귀는 자꾸 훈련시키는 거예요. 경건의 훈련, 성화의 훈련, 교회 돈 내는 훈련, 교회에 봉사하는 훈련, 교회가 커지는 것은 주의 축복이고 기적입니다. 훈련 세뇌를 받아온 거예요. 그리고 그걸 보고 “야, 나도 인간 가치 있구나!”하고 덩달아 춤을 췄어요.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는 그 체제 안에서 거룩해져버린 겁니다. 11절 보면 구약이야기입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뭐로 없게 하지 못한다? 죄를 없게 하지 못한다. 자, 묻습니다. 죄를 제사가 이깁니까? 못 이깁니까? 못 이기지요. 그러면 이유가 뭡니까? 이것은 사적인, 내가 드린 제사기 때문에 개인적 구원의 욕구에 의해서 드렸기 때문에 안 받습니다. 왜? 흠이 있어서. 아니 흠이 있는 게 아니고 이미 대타가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교체할 다른 분이 그 몸을 독점해서 지키기 때문에 우리는 안 지켜도 되지요. 안 지켜도 되는 거예요.

 

절기 지키지 마시고 안식일 주일 지키지 마세요. 십일조 그런 거 지키지 마세요. 제사 드리지 마세요. 18절 읽어보세요.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세상에 성경에 이런 고마운 구절이 있는 줄 누가 알았습니까? “아이고, 그러면 목사님, 죄를 위해서는 제사 없지만 제사 받고 난 뒤에 제사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제사는 속죄제가 들어가게 되어있어요. 모든 제사 번제도 그렇고, 화목제도 그렇고, 속죄제가 먼저 앞선 절차가 속죄제입니다. 따라서 모든 제사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죄와 관련되어있어요. 그런데 죄를 드린 제사 없다는 말은 제사 없다는 말이에요. 제사 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제사 드리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뭘 행하게 되면 그 행함에 대해서 의미를 둬가지고 내 행함만큼 어떤 보상기대를 하게 돼있어요. “주여, 안하던 착한 짓을 했는데 요번 주에 애 시험 있는 거 알지요? 성적 조금만 올려주세요.” 반드시 기대를 걸고 있어요. 그러니까 뭡니까? 인간의 손으로 한 것이 그냥 무효로 가지를 않고 자기의 꿈과 연계해서 음흉하게 개인적 사적 소유할 만한 것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거예요.

 

“제가 안하던 헌금을 듬뿍했사오니 우리 애가 요번에 수학시험 치는데 100점 맞게 하옵소서.”라고 했는데 은근히 노렸는데, 물론 노골적으로 그런 표현은 안 해요. 지가 생각해도 웃기거든요. 말은 안하지만, 속은 “주여, 아시지요. 응응응 아시지요?” 순수하게 드린다고 하면서 노리는 게 있지요. 1주일 후에 애가 수학100점을 맞았어요. 자기가 간증하고 싶어서 살아 계시다고 하고 싶은데 그 시험문제가 전교 다 100점이에요. 시험문제를 잘못내가지고 100점 처리해서 다 100점이라. 주님한테 또 속았어요. 주님한테 속은 게 아니고 내가 속이려하다가 실패로 끝난 거지요.

 

우리는 맨 날 주님의 눈을 속이면서 맨 날 실패로 끝나는 감사를 드려야 됩니다. “나를 실패하게 해주신 나의 모든 행함이 무효로 끝나게 해주신 주께 감사합니다.” 이리 되어야 돼요. 앞으로 감사헌금 봉투 할 때, “주여, 나의 인생을 무효로 끝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써가지고 내면 그 목사 기절하겠다. 모든 제사는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죄와 있기 때문에 죄를 처리하지 않으면 제사 받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죄를 위한 제사가 필요 없다는 말은 니가 제사를 드리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너 안에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원으로서 하나의 멤버로서 포함을 시켰다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영광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바로 “나는 무효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를 통해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은 뭐냐 하면, 나의 죄를 알고 이런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죄와 피의 만남이 아버지께 유일한 영광이 돼요. 그 근거는 이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칠판이 넘어졌음)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거 넘어졌다고 해서 제가 이야기한 것이 거짓말이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징표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그리 보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 우리가 사기를 치든 뭐하든 간에 확실한 것은 주께서 죽었다는 사실과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사실, 이미 우리하고 동떨어진 우리가 손을 댈 수 없는 쪽에서 이미 완성이 됐기 때문에 그 안에 실수하고 실패해도 내 운명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에서 아까 한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다시 언급을 하고 10분 쉽시다. 여기에 10절 봅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무슨 말입니까? 뭐가 나오지요? ‘우리가’나오지요. 우리.

 

그 우리가 누구에요? 이게 정해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야, 우리가 끼면 좋겠는데. 정해지지 않은 것은 뭐냐 하면,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이것은 결과적으로 성경 말씀에 의해서 이 성경말씀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사람. 그 사람이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오, 그러면 나는 내가 드릴 제사는 필요치 않네.’ 라는 현상이 들면 그게 소급해서 10절에 우리에 포함된 사람입니다. ‘아이고, 그래도 죄는 아니지만 영광 돌려서 제사 드려야지.’이러면 그 우리에서 빠져있는 사람이에요.

 

죄를 아는 제사만 주께서 이루어진 게 아니고 모든 제사를 다 이루었어요. 아니 모든 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교체해서 들어갑니다. 그 법에 대해서는 그 법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은 왜 우리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율법을 준 거죠. 이 성경말씀을 준 거죠. 우리는 보기만 하면 우리가 이걸 지켜서 사적으로 내가 괜찮은 존재인 것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날아가 버렸지요. 우리의 시선에서 이미 시선바깥에 범주 바깥에 있지요.

 

그렇게 되면 나는 지켰다와 안 지켰다에 따라서 나의 건전한 안과 밖을 나를 미워하는 인간은 지옥가거라, 이리 되어서 안과 밖을 누가 정합니까? 내가 일방적으로 정해버리지요. 내가 싫어하는 놈은 지옥 가거라. 그런데 그 지옥가라고 한 인간 천국에서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내 돈 떼어먹고 도망친 놈 지옥가거라. 그 지옥가라고 한 놈을 마침 천국에서 만나면 돈 내놔라고 할 거예요? 어떻게 할 거예요? 평소에 버릇이 내 중심이기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면 복 받으라고 하고 나한테 못해주면 저주 받아라 하는 것이 일상이거든요.

 

그런 사적인 것과 이 말씀을 우리는 매일같이 싸워야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무효로 바꿔주시는 그런 기쁨을 우리한테 허락해 주시지요. 10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안양20150508b-히10장5절(안과 밖) - 이 근호 목사

 

12절에 보면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렇게 되어있지요. 여기서 요 문장 “죄를 위하여 거룩한 제사를 드리시고” 여기까지는 우리가 이해가 되지요.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이해되는데 그 다음 구절이 이해가 상당히 곤란해요. 죄를 씻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이유가 뭐냐, 하나님 우편에 앉아야 그게 죄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죠. 그냥 하나님이니까 “너 죄 용서한다.” 하면 끝나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하나님 우편에 앉는 그러한 과정과 우리 죄 용서와 무슨 관련성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 질문을 알겠지요? 정답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사적으로 지은 죄는 죄가 아니에요. 내가 살인했다. 내가 강도 짓했다. 이건 죄가 아니에요. 그런 것을 죄라고 한다면 요, 그것은 교도소 몇 번 들락거리고 반성하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그건 내 쪽에서 죄를 해결하면 돼요. 나쁜 짓 했잖아요. 그러면 착한 일을 양으로 더 많은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빼기하면 되지요. 착한 일 5개, 나쁜 일 3개, 남는 것은 2개, 그럼 2개 남으면 착한 사람 부류에 포함돼서 죽으면 천국 가는 것. 선악적인 사고방식인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다는 말은 뭐냐, 너희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몰라요. 그러면 죄는 어떻게 아느냐? 죄는 우리가 짓는 게 아니고 지을 수밖에 없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 우편에서 죄는 하나님 원수에요. 이게 죄에요. 원수, 그럼 그게 어디 나오는가, 시편110편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가 나와요.

 

부흥회하면서 부흥사가 회개하시오! 라고 하면 나름대로 회개한다고 하니까 자기는 회개할 게 없으니까 회개한 거 또 회개하고 옛날 이미 철지난 죄를 끄집어내가지고 또 회개하고 시간은 안가고 5분밖에 안가고. 그런 쓰잘데기 없는 짓 많이 했지요.

 

시편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내 우편에 앉아있으라, 라고 한 겁니다. 이걸 설명해드려야 돼요. 이걸 설명함으로서 왜 설명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죄에서 못 벗어나며, 따라서 지을 수밖에 없다는 말은, 우리가 착함으로서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신세다. 그 말은 우리 힘으로 죄에서 못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죄에서 못 벗어난다는 말은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적이라는 말이에요. 착하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한 게 아니고, 죄 지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도적으로 만들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우편에서 말하는 죄를 모르게 되게 되면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착한 일 열심히 하면 되지 왜 또 죄를 지어야 되느냐,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고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자, 설명하면서 제가 좀 이렇게 난해하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요 이야기에서 존재가 둘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존재라는 말은 뭐냐 하면, 그냥 있음 또는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딸기 존재하네.” 이 말 되지요. “체리 존재하네.” 아까 존재한 강아지 어디 갔어요? 존재하지요. 이 존재가 우리가 보기에는 있다, 그걸로 끝나는 줄 아는데, 끝난 게 아니에요. 둘로 나누어집니다. ‘실존적인 존재’와 ‘의미적 존재’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실존적 존재와 의미적 존재. 실존적 존재라는 말은 뭐냐, 내가 실존에 있는 것처럼 딸기가 있다. 라고 할 때 그 있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아까 개나 딸기한테는 해당이 되는데 누구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가 하면, 하나님한테는 해당이 안돼요. 하나님한테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는 “계십니다.” 라는 말은 못 붙여요. 그럼 뭐가 깨져요? 삼위일체가 거짓말이에요. 요즘 삼위일체 때문에 엄청 욕을 얻어먹는 사람이 있어요. 미국에 계신 목사님 욕을 많이 얻어먹어요.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인간들, 내가 보기에는 이단입니다.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자체가 이단이에요. 왜냐 하면, 하나님은 그게 바로 사탄적인 발상인 것을 주께서 아시기 때문에 그래요. 분명히 하나님은 이야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정하면 구원받아요. 그런데 그 인간은 뭐로 바꿨습니까? 예수님 자리에다가 뭐로 바꿨어요? 삼위일체로 바꿨어요. 이 말은 뭐냐, 예수 믿기 싫다는 거예요. 합치된 신을 믿겠다는 겁니다. 왜 합치된 신을 믿고 싶냐, 예수가 믿기 싫어서 그래요. 예수님이 믿기 싫어서.

 

왜 예수가 믿기 싫냐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릴게요. 예수님 본인은 뭐냐, 하나님의 아들로 봤지요. 이것 때문에 그래요. 아들을 믿게 되면 아버지를 놓친 게 되지요. 그래서 아들을 믿음으로서 아버지도 같이 믿고 거기다가 성령까지 믿으니까 한꺼번에 다 믿고 싶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의 의미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의미 있는 행동을 믿음으로서 이걸 영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누구의 믿음입니까? 본인의 믿음이지요.

 

본인의 믿음을 적용해 버리면 본인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본인은 죄 바깥에 나와 있을 때 가능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우편의 죄는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죄는 빠져나올 수 있다? 없다? 못 빠져나오지요. 그런데 인간은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구원 받겠다는 말은 자기는 어디에 빠져있다? 관찰자, 제3자의 자리에, 중립의 자리에, 죄에 오염되지 않고, 뭔가 죄를 짓고 안 짓고를 결정할 수 있는 중립적인 자리에 본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 그걸 믿고 싶은 거예요.

 

누가 그렇게 믿고 싶어 했을까요?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본 거예요. “너는 중립이야. 네가 예수 믿느냐? 중립을 믿느냐? 니가 알아서 해.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어. 니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부처를 믿으면 니는 우상숭배자가 되는 거야. 어느 것 할래?” “부처 믿고 지옥갈래? 예수 믿고 천당 갈래? 골라 봐!” 뭐라고 합니까? “나, 예수 선택할래.” “구원 받았어. 합격했어.” 이리되거든요. 그게 사탄의 생각이라니까. 뭐가 빠졌어요? 바로 이 의미적 존재를 가지고 실존적 존재를 자기가 있다는 그 의미에서 실존을 새로 뽑아낸 겁니다. 그러면 이 뽑아내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오른손’ ‘오른편’이라 해요. 나는 나의 행동이 나의 대표자 행동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고 내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선택의 행위, 자유 행위, 나는 골라잡는 행위, 그 행위가 나를 대변해줘요. 나를 대변해 준다고요.

 

그러면 내가 선택했으면, 그것이 내가 행동으로 나서면, 그게 나의 의지에요. 내 의지를 대변해서 내가 행동에 나선 겁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행동하는 것은 나의 오른쪽의 하는 행동이죠.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른손이에요. 우리 몸에는 오른손 있지요. 성경에서는 왼쪽을 장애인으로 보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보통 일을 많이 해요. 그러면 오른손으로 일한다는 말은 오른손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오른손이 대신하는 거예요? 오른손이 대신하는 거죠. 그러면 내 속에서 이미 오른손은 나에게 의미 있는 손이 되겠지요. 내가 하고 싶은 것 생각하면 안돼요. 행동에 옮겨야 돼. 그럴 때 오른 손이 동원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호칭이라 합니다. 호칭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냐, 이름이 아니에요. 누구, 누구의 아들이지 이름은 아니잖아요. 누구, 누구의 아버지는 이름이 아니지요. 호칭은 부르는 분이 있어야 돼요. 여기서 중요해요. 여기서 완전히 전환되는데, 하나님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예수님 말고 누가 압니까? 쉿! 아무도 모르지요. 숨겨진 하나님이죠. 아무도 모르지요. 아무도 모르는데 나타난 하나님은 누굽니까? 주님의 오른손만 나타나요. 오른손만. 그것을 가지고 뭐냐,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이름.

 

그게 홍해 출애굽 할 때에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용사가 그게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삼위일체는 없어요. 애초부터. 그냥 숨어있는 하나님이 예수님만 드러냈을 뿐입니다. 예수님만. 이 강의가 녹취될 거예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성부, 성자 계시지요.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이에요. 그리고 요한복음17장에 보게 되면, 성부 성자 하나입니다. 분명히 있지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에요. 아버지도 하나님이고, 예수님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이고, 그리고 세분은 하나에요. 그러나 삼위일체는 없습니다. 왜 삼위일체로 묶으면 안 되느냐 하면, 우리가 그렇게 묶을 수 있는 입장이 못돼요. 우리는 예수님으로 시작해야 돼요. 예수님으로 시작해보니까 예수님도 하나님이고, 아버지도 하나님이고, 그 분의 영도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그 분이 하나가 되고 그 분만 하나가 된 게 아니에요. 나중에 보면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너희도 하나 되게 하리라, 분명히 하나가 나오거든요. (요17:21) 삼위일체의 한분이라는 것은 잘못된 거고 하나입니다. 삼위가 하나로 계신, 하나라는 것은 맞아요. 한분이라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아들 모순되니까. 분명히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있는데 그 모든 성경의 중심은 뭐냐 하면, 이걸 삼위일체를 받아들여라가 아니라 니는 여기에 대해서 모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통보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삼위일체를 믿어라, 가 아니라 너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오른손에 의하면 하나님의 원수 안에 속 했느니라, 부터 시작을 해야 돼요. 그렇다면 우리가 삼위일체 믿는 것도 뭐다?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게 삼위일체 끝이에요. 실체입니다. 삼위일체 믿는 게 죄가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삼위일체 믿어서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믿으면 안 되는가?” 예수님을 하나님 믿어도 구원 못 받아요. “그럼, 십자가를 믿으면?” 십자가를 믿어도 구원 못 받아요. “그럼, 성령하나님은?” 그것도 구원 못 받아요. “그럼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우리가 믿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오른손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사람들은 그 차이를 분간을 못해요. 성령 받은 사람은 분간해요. 성령 받은 사람만.

 

사람은 뭘 믿게 되면 의미가 발생됩니다. 그 의미의 주인공이 본인이 돼요. “주여, 제가 믿었어요. 주님 안 보입니까? 제가 믿었다니까. 옆 사람이 믿은 게 아니고 내가 믿었다니까.” 이게 바로 마귀의 모습이에요.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적 구원 있다고 했습니까? 사적 구원 없어요. 사적이란 말은 오직 한 분에게만 써야 됩니다. 누굽니까? 예수님만 개인이고 나머지는 개인이 아니에요. 예수님에게 속한 집단이라니까요. 왜 집단이겠어요? 사적인 것을 무효로 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무효가 되어야 예수님만 개인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있고, 우리 있고, 이리 되면 안돼요. 예수님 안에 있어야 되지.

 

만약에 예수님이 있고 내가 있어버리면 내 밖에 예수님이 계신 게 돼요. 그러면 내 밖에 있는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내 속에서 시작을 해야 되는데 그 시작하면서 내 오른손이 작용해요. 내 오른손이 의지가 작용한다고요. 그러면 내 의지로서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 셈이 되어버리죠.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고 추방한 취지가 날아가 버립니다. 그 날아가도록 유도한 게 마귀입니다. 그게 마귀에요.

 

요한계시록에 666표 받지 말라고 했지요. 사람들은 그걸 보고 뭡니까? 표를 안 받으면 구원되는 줄 아는 겁니다. 그 표는 하나님 앞에 인 치심을 받은 자에게는 그 표를 찍을 수 없게 되어있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의 인이라는 것은 소속을 의미하거든요. 어린양의 생명책에 소속된 사람은 이마에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장을 받아요. 맞게 되면, 소속이 되면, 이미 예수님 자체가 마귀를 이겼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소속된 사람은 이미 바깥에 추방된 마귀가 이쪽 안에 있는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인을 새길 수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왜? 능력으로 커버가 돼요. 이미 십자가에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능력이 인을 못 받도록 커버가 되어있어요. 우리가 할 게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에 속한 사람은 그 소리 듣고 우왕좌왕 하는 거예요. 주의해야 된다! 우왕좌왕한다는 것은 이미 구원이 됐다? 안 됐다? 구원이 안 된 거예요. 사적 구원만 챙기는 겁니다. 자연적으로 이기주의 될 수밖에 없어요. 나라도 구원받아야지. “나라도 구원 받아야지.” 그게 성경에 나오는 거예요? 이건 안돼요. 그런 이기주의가 어디 있습니까? 사적 구원이잖아요. 그러니까 성경해석 전체가 구원론으로 미끄러지게 되잖아요. 전체가. 사탄의 짓이 되는 겁니다.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구원파가 사탄의 짓이라니까요.

 

삼위일체 다시 이야기합니다. 삼위일체에서 “하나님이 계시다.” 할 때, 계심이 그 용어를 누가 썼느냐 말이죠. 그 용어가. 내가 여기 있다. 딸기 있다. 내가 있다. 그 있음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삼위일체 자체가 무효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계신 게 아니고 일하시잖아요. 어떻게? 우리가 알아듣도록. 아니에요. 오른손을 통해서 일하시지요. 그럼 하나님의 오른편이 누구입니까? 주님이죠. 그 주님은 우리를 납득하게 한다. 아니에요. 우리를 이해시킵니다. 아닙니다.

 

주님의 일은 뭐냐 하면, 우리가 왜 납득이 안 되고 우리는 왜 모른가, 우리는 마귀에 속했거든요. 우리하고 상대 안 해요. 마귀하고 상대합니다. 마귀의 힘에서 빼내면 다 이해가 돼요. 소급해서. 뒤돌아보면서. ‘아!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그것이 강도가 되어야 되는구나. 창기가 되어야 되는구나. 그게 구원의 코스구나! 너는 너 식으로 나는 나식으로 따로 따로 주께서 어떤 role, 역할을 맡겼구나.’ 이게 뒤늦게 다 이해가 된다니까요. 뒤늦게.

 

그게 하나의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게 되면 그 소속이 되고, 그 인 치심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군대에 사단에 보면 사단 깃발이 있어요. 사단의 집단의 소속이 됐다 이 말입니다. 20사단, 54사단 소속이 된 거예요. 출애굽에서 나와 싸울 때, 하나님께서 아말렉전쟁을 붙게 했잖아요. 광야에서. 그 때 ‘여호와 닛시’나오지요. 여호와는 나의 뭐죠? 깃발이지요. 깃발. 그게 뭐냐 하면, 너희는 집단을 생각하는 거예요. 개인의 능력 아닙니다. 영웅 필요 없습니다. 집단이에요.

 

그리고 모세가 구원한 게 아니고 여호수아가 구원한 게 아닙니다. 모세가 든 게 있어요. 지팡이입니다. 그 지팡이는 방향타에요. 어디로 갈 바를 몰라요. 지팡이와 더불어 구름기둥, 불기둥이 일어나면서 길이 계속 그 길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지팡이가 뭐냐, 지팡이의 과거는 바로 홍해를 갈라지게 했던 그 지팡이에요. 그리고 광야에서 물을 내게 했던 그 지팡이고요. 그리고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렸던 그 지팡이에요. 그럼 지팡이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바로 저주, 심판이 들어있지요. 너희들은 전에는 어디 소속이었다? 저주 안에 있었고 심판 안에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저주 가운데서 너희들을 지팡이로 저주하는 가운데서 지팡이로 구원해요. 그러면 이스라엘에게는 지팡이 속에서 저주와 구원이 함께 양쪽 다 들어있으니까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양쪽 다 있다. 매개 또는 중보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해잖아요. 중보자 특징은 뭐냐 하면, 양쪽 다를 본다는 것. 인간 쪽도 보고 숨어져있는 하나님,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숨겨진 하나님. 왜 그냥 하나님이 아니냐 하면, 그냥 하나님은 인간이 지어낸 하나님이에요. 인간이 상상한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은 자기의 투영입니다. 자기가 거울에 비취지요. 그 모습이 하나님모습이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기가 자기를 보는 그 상상한 하나님의 확장입니다.

 

그 하나님은 무조건 나를 이뻐해야 돼요. 왜? 내가 만들었으니까. 인간이 상상이라 하는 것은 기억에서 나왔고 인간의 기억 속에는 온갖 경험 속에서 나왔고 나한테 경험되어지고 건전하고 괜찮은 경건한 것만 골라서 신을 만든 겁니다. 인간의 이미지가. 상상하니까. 그 상상한 하나님을 하나의 파트너로 생각해가지고 동행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했던 하나님 믿는 사람이 누구를 죽였느냐, 하나님을 죽여 버린 사건이 십자가사건이에요. 누구 이름으로? 하나님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죽여 버린 희한한 사건. 내가 믿는 하나님, 우리 집단적으로 동의하는 하나님을 지키기 위해서 그 장애물로 되는 예수님을 죽였는데 죽었던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처음부터 어디 소속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죽이라고 외쳤던 그 소속인 것을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밝혀진 거죠. 사도행전2장입니다. 유대인이 하는 말이 “그러면 나는 어찌할꼬?” 하지요. 나 어찌할꼬? 사도의 설교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충격이었냐 하면,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었다. 야~ 처음부터. 처음부터 니는 주의 작전에 말려든 거예요. 처음부터 너는 메시아를 죽여야만 했다. 그 죽여야만 했던 것이 뭐냐, 하나님을 죽인 자는 결국 저주지요. 그 저주를 수용해라, 그러면 저주 속에서 하나님께 부활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것이다. 그게 뭐냐, 십자가와 함께 죽은 자만이 십자가에서 부활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제가 죽였습니다.”라고 외쳐라 이 말이죠. “십자가 죽은 것이 제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왜? “내가 성질이 못돼서가 아니라 나는 마귀의 사주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제가 죽였습니다.” 라고 외치는 사람.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제가 죽였습니다, 라는 말은 소급해서 창세전부터 나는 이미 은혜받기로 확정된 사람으로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던 거예요.

 

십자가를 알아요? 십자가 알면서 십자가 넘어서서 부활까지 다 들어갑니까?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십자가에 넘어서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영원히 곁에 둡니다. 그래야만 내가 내 자아를 죽일 수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 바깥에 나가면 안돼요. 안과 밖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정합니까? 예수님께서 정하신 겁니다.

 

갈라디아서6장14절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왜 자랑하지요? 애가 좋은 대학 갔다고 자랑 좀 하지요. 군에 좋은 데로 빠졌다고 자랑 좀 하지요. 미장원에 가서 머리 잘나왔다고 자랑 좀 하지요. 자랑이 그렇게 많은데 왜 자랑이 없다고 했어요? 자랑할 게 없으니, 왜 그렇습니까? 내가 살았으면 자랑할 게 있는데 십자가 안에서는 누가 죽었어요? 하나님께서 십자가 안에서 내가 죽였다가 그리스도가 살려내고 또 죽였다가 살려내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그게 존재가 아니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기능이라 하는 거예요.

 

이왕 이해도 안 되는 거 어렵게 확 갑니다. 분명히 우리가 존재로 하게 되면 실존적 존재하고 의미적 존재 있다고 했지요. 이 존재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했지요. 이 존재를 무엇으로 바꾸느냐 기능으로, 활동으로 바꾸는 거예요. 너가 있음 자체가 활동이 되는 겁니다. 너가 이렇게 구원받게 됐음에 주께서 계시다가 아니라 니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주께서 일하신다고 바꾸라는 겁니다. 내 안에 주께서 활발하게 일하신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결과물로 아까 떡가래 빠져나오지요. 방앗간에서. 지금도 계속 밀어 넣고 계속 떡 나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와가지고 “개를 토실, 토실하게 어떻게 키웠노.” 개보고 칭찬하는 겁니까? 누가 애 먹었다는 거예요? 주인이 애 먹었다는 거예요. 개가 “제가 했어요.” 개가 말을 해서 이러면 개 한 대 쥐어박아요. “니는 그냥 존재해!” 일은 활동은 주인이 활동하는 거죠.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내가 존재하는 걸 자랑하지 말고 십자가를 자랑하라. 계속해서 활동하는 십자가 때문에 나라는 떡가래라는 존재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잖아요.

 

거기다가 삼위일체 믿으면 어떻게 돼요? 안되지요. 삼위일체 자체가 엉터리인데. 존재인데.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계시다가 들어가면 안돼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세분이시고 하나로 계신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이리 되어야 되지요. 활동이 되어야 되지요. 이제 삼위일체 아셨지요? 삼위일체는 삼위일체를 언급한다는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뜻이지요. 예수님 믿으면 되는데, 십자가 자랑하면 되는데 그게 하기 싫은 거예요. 십자가 대신 존재를 자랑하고 싶어서 “나, 삼위일체 믿었어. 우리 목사님이 말하는데 삼위일체 안 믿으면 이단 된데. 우리 교회는 삼위일체 공부해가지고 정통, 정통파야. 누가 뭘 해도 삼위일체 확실한 정통파야. 우리는 곧 죽으면 천당 가.” 이게 바로 마귀가 따로 있어요? 그게 바로 마귀지요.

 

뭐가 빠졌습니까? 중보자의 오른편이 빠져버리고 그 자리에 턱하니 엉덩이 큰 푸짐한 지가 앉아있는 거예요. 자기가 앉아있는 거예요. 자기 존재가 앉아있는 거예요. 그리고 늘 기도하기를, “주여, 제 존재가 어떻습니까?” 묻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나아지겠습니까? 내 존재가. 존재를 계속 들이대는 거예요. 어떻게 기도하면 내 존재가 우수한 존재, 복 받는 존재가 되겠습니까? 자랑 질하는 존재가 되겠습니까? 주께서는 십자가만 자랑하는데, 십자가 말고 십자가 믿는 내가 얼마나 우수하겠습니까? 이걸 자랑하는 거예요. 아무리 기능을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해도 존재가 버티고 있는 한 존재의 소유로 귀환되고 말아요.

 

그놈의 존재 치매 걸리면 아무도 모르는 존재, 치매 걸려보세요. 나라도 할 일이 아니에요. 치매 걸렸다고 공짜로 노인 보양 공짜로 다 해주고. 15만원으로 다 사게 만들고. 돈 안 내도되고. 그런 게 있어요. 내가 경험해보니까. 변기하고 휠체어 대여하고 다 합해서 100만원 넘는데 그걸 공짜. 그런 기쁜 소식도 있네. 우린 존재가 공짜입니다. 우리 존재는 무효고 우리 기능은 주의 기능입니다. 우리 존재는 기능을 자랑하다보니까 내 자랑할 새가 없어요.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되어지는 존재지요.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게 하시고, 헌금 하는 게 아니고 헌금하게 하셨고. “주여, 어떻게 천원으로 헌금합니까?” “내가 하게 했다.” “감사합니다.” 이리 되어야 돼요. 존재가 되어버리면 “천원이 뭐고? 껌 값도 안 되는 거, 나는 만원했어.” 이리 되어버리면 존재와 존재의 싸움이 되면 교회가 뭐가 되느냐 하면, 교회가 자랑 질하는 그야말로 음욕의 목욕탕이 돼요. 음욕의 탕이 돼요. 사우나탕이 돼요. 앉아서 뭐하는데? 탕 속에서? 존재 자랑합니까? 음, 좋다. 존재자랑. 저주의 탕 안에 갇혀가지고. “우리는 다 형제입니다. 삼위일체 다 아니까.”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게.

 

“삼위일체가 뭐예요?” “주께서 존재하십니다.” “그 존재의 개념이 뭔데?” “내가 존재하니까.” 그게 바로 종교지요. 그게 바로 우상 숭배자에요. 말이 나와서 하는데 우상이 뭐냐 하면, 사실은 우상은 없어요. 우상은 성경에서 유대교가 일방적으로 한 것이고 우상이 아니고 사실은 신이에요. 신. “나는 우상을 믿는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어요? 내가 믿는 알라는 진짜 신이지요. 다 물어보세요. 전부 다 믿는 신은 신이지요. 진짜 신이지. 우상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 쪽에서 하는 우상이지 인간은 그냥 신을 믿어요.

 

신은 뭐냐 통합체입니다. 통합체는 뭐가 되느냐 균형을 맞추는 거예요. 사람은 다양하잖아요. 다양하니까 싸우잖아요. 어떻게 해결하느냐, 우리는 다 같은 신을 믿으면 어떻게 돼요? 갑자기 하나가 되지요. 그게 필요한 게 신이에요. 신은 통합체고 균형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진짜 신, 진짜 하나님은 이런 통합체, 이런 균형 맞추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떤 하나님입니까? 내 죄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이지요. 다르지요. 하나님은 몰라요.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에요. 그럼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봅시다.

 

호칭이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의 아들이 호칭이죠. 호칭인데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이름으로 이야기해버리면 우리는 그 이름을 부르지요. 부르면서 우리한테 이름이 있잖아요. 내 존재가 있으니까 이름이 있을 게 아닙니까. 이름은 존재에 붙었으니까. 창세기2장에서 아담이 이름을 붙이지요. 이름이 먼저에요? 존재가 먼저입니까? 존재가 먼저 있고 이름을 붙이잖아요.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필히 이들은 우상 적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부르는 쪽이 뭐냐, 존재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 존재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존재거든요. 추방된 존재에서 이름을 부르니까 여호와의 이름에 우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게 필연적 코스에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자들이 누구를 죽였습니까? 진짜 하나님을 죽였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우상의 끝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욕하는 이방인이 아니고 누가 우상의 끝이에요? 여호와 믿는 본인들이 우상의 끝이고 삼위일체 주장하는 그들이 우상의 끝이에요. 우상의 막장이에요. 최고의 우상은 그들이에요. 그 안에 깨보면 누가 들어있어요? 하나님을 부르는 내가 들어있어요. “주여, 내가 믿었잖아요. 내가.” “내가 착한 일 했잖아요.” “내가 이렇게 성실하잖아요.” “내가 순종했잖아요.” “내가 쉐마, 쉐마, 주 앞에 말씀 들었잖아요.” 그러면 격려는 누가 해요? 내가 나한테 격려하는 거예요. 어떻게?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는. 의인은 여덟 번째 일어난다.

 

매일같이 우리는 우리를 격려합니다. 뭐를 걸고? 그 희망이라는 단어를 걸고. 그 희망이 완성되게 되면 나는 우수한 존재로 거듭난다. 그걸 마슬로우가 이야기했던 인간의 최고의 욕구의 끝은 자아실현의 욕구. 그걸 불교로 하면 두 자로 해탈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것이 바로 사탄한테 속아서 선악과 따먹은 모든 그 징후가 그 징조가 뭐냐, 나는 신이다. 그걸 기독교로 아무리 포장해도 가짜가 되는 겁니다. 속일 걸 속이세요. 2000년 속였다고 계속 속아 넘어가는 줄 알고 있지.

 

12절 다시 봅시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자, 설명합니다. 인간의 존재에서 나온 죄는 죄가 아닙니다. 그럼 죄는 누구만 안다? 오른편에 계시는 분만 죄를 안다. 오른편에 계시는 분은 누구하고 싸운다. 마귀하고 싸우지요. 그럼 마귀는 어디 있느냐, 인간을 장악하고 있으니까 인간 속에 있습니다. 그럼 마귀의 대변자가 누구냐, 유대인들이고 이스라엘이지요. 인간이죠. 그 인간이 여호와를 상대하면서 결국은 그 인간의 손에 의해서 누가 살해당합니까? 바로 예수님이 살해당하지요.

 

살해당할 때, 살해당한 그 사건을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그걸 그대로 주의 오른편으로 부활시켜 놓은 거예요. 부활시켜 놓으니까 주님의 부활하신 주님의 못 자국, 창 자국이 있는 거예요. “너희들이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걸 영원히 가져갑니다. 그 영원히 가져가는 것을 12절에 뭐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영원한 어린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어린양 용어가 계시록에서 딱 붙습니다. 어린양의 보좌, 무슨 뜻입니까? 앞에 붙어요. 일찍 죽으심을 당한 어린양의 보좌. “니들이 나를 죽였잖아. 끝까지 갈 거야. 니들이 나를 죽였잖아.” 책임을 묻는 게 아니에요. 너희들은 내가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되는 겁니다. 징후가.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예수님의 피로 옷을 희어지게 된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은 아까 갈라디아서6장에서 누구를 자랑합니까?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를 자랑한다.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는 자랑할 게 있는데 뭐냐, 내가 어쩔 수 없이 죄인일 수밖에 없다. 그걸 자랑해요. 그런 미친 사람이 다 있어. 자기 죄를 자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참, 희한하지요. 자기 죄를 자랑한다? 그래, 니 자랑해봐라. 그런데 그 죄를 죄라고 자랑하는 거 보니까 남들 보기에는 기절초풍할 죄네요.

 

뭐냐 하면, 순종했던 죄, 설교했던 죄, 회개했던 죄, 헌금했던 죄, 전도했던 죄, 목숨 바쳐 순교했던 죄, 이걸 죄라고 내어놓으니 다른 사람들은 기절하지요. 왜? 다른 사람은 그걸 뭐로 분류했습니까? 하나님의 의로 분류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미친 소리 또 듣는 거예요. 도대체 나 알아듣는 소리 좀 해. 알아듣는 소리. 우리가 이해 못하는 소리는 하지 말고. 그럼 이쪽에서 성도는 니가 알아듣는 소리는 모든 가치가 도로 너가 잘났다는 쪽으로 니 자랑하기 위해서 회수되는 그러한 절차를 통해서 의미가 추가된 의미로 돌아오거든요.

 

이게 체계라는 것이 뭐냐 하면 여기서 의미를 생산해내요. 그러면 체계가 중보자의 체계 다시 말해서 십자가 죽는 분의 체계가 들어가 버리면 주님이 죽었던 것이 사람의 손에 죽었지요. 그러면 사람 손에 죽었던 예수님이 체계 속에 들어가 버리면 우리의 체계와 주님의 체계가 어떻게 돼요? 서로 충돌되겠지요. 그 충돌이 로마서7장입니다. 나는 선함을 원하지만 내 악이 또 나를 선을 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탐내지 말라. 제 얘기가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얘기니까. 탐내지 하는 순간, ‘탐이 뭐지? 그거 하나 해볼까? 오! 탐 한 번 내봐.’ 라는 생각이 또 다른 내가 그 생각을 유발하게 돼요. 과일을 가지고 엄마가 먹어라, 하면 애는 안 먹어요. 그런데 이걸 숨기고 뒤에다가 선반위에 놓고 “내가 오기까지 절대로 그거 보면 안 돼!” 하면 그 순간 엄마 오면 다 먹고 없어요.

 

인간은 얼마나 썩어 빠졌는지 금지했으면 반드시 금지선을 넘어가야 속이 편한 사람들이에요. 꼭 금지된 것만 밟아 넘어가요. 유명한 소설 있잖아요. <나는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그 말이 맞아요. 금지해놨다는 말은 그게 나의 소망이 되는 겁니다. 왜? 인간은 자기의 존재의 영역을 확장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런데 확장한 것을 방해하고 넘어오지 마! 하면 못 참아요. 개하고 똑같아요. 침대 올라가지 마! 하면 침대 올라가고. 꼭 넘어서요.

 

죄를 어디까지 확장하느냐, 죄를 우리가 감당 못할 선까지 확장해버려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확장한 그게 작전이었어요. 어떤 작전? 내 힘으로 제사 잘 지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작전. 가만 있어라. 구원은 나의 결정에 달려있다. 그럴 때 그게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14절 봅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온전케 하셨지요. 그렇다면 온전하다. 완전하다. 완전히 거룩하다는 그 근거를 우리의 행동에서 뽑아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행동을 철거해야 되겠습니까? 철거해야 되지요. 그게 하나의 예의입니다.

 

제가 어제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길에서 노는 자들을 데려다가 혼인잔치를 채웠습니다. 채웠을 때에 거기에 준비한 유니폼이 있어요. 예복을 입지 않으면 그 온 사람도 나중에 저주받습니다. 그런데 그 예복을 입은 사람은 혼인잔치에서 파티에 함께 참석이 되는 겁니다. 자,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그 모든 절차를 보면 누가 봐도 임금님의 100% 전적인 은혜로 했는데, 꼭 이런 인간이 있어요. “내가 예복 입어줬잖아.” 그런 인간 있어요. 예복 지가 준비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래서 내 인생은 내 인생의 장점을 끼어 넣으면 그건 주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니까요. “예복 내가 입어줬잖아.” 하는 식으로. “십자가 진 걸 내가 믿어줬잖아. 다른 사람은 안 믿는 걸 내가 믿었잖아.” 이러면 예의가 아니라니까요.

 

그게 15,16절에 나옵니다. 15절,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 하시되, 나오지요. 16절,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언약이 이것이니, 일방적으로 집어넣는다고 생각하세요. 우리를 마치 아담이 잠자고 있을 때, 일방적으로 갈비 대를 빼가지고 여자를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아담만 갈비대가 하나 없어요. 그런데 그 이후에 모든 남자가 갈비대가 없는 게 아니고 다 있어요. 오늘도 남자 잠들 게 해서 여자를 만드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갈비 대는 똑같아요. 아담만 그래요. 일방적으로 그렇게 한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언약이 뭐냐, 일방적으로 주신분이 100% 다 실시를 해요. 뭐냐, 내 법을 너희 마음에 두지요. 그러면 마음에 둔다면 우리가 마음에 순종했다, 가 성립이 됩니까? 안 됩니까? 우리 쪽에서 성립이 안 되지요. 왜? 집어넣은 것도 하나님의 언약이 일방적인 밀어붙임에서 오기 때문에.

 

“믿음은 제가 믿었습니다.” 라는 말을 해서는 된다? 안 된다? 안 되지요.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수동형으로 바뀌어야 되지요. 구약 때는 실패한 것이 이런 신약의 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1:1 대응을 했어요. 왜? 우리는 존재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존재를 생각한 거예요. “주여, 뭘 해드리면 저를 구원하시겠습니까?” 제가 행했기 때문에 저를 구원해 달라, 그렇게 요청한 거예요.

 

그렇다면 주께서 이거해봐라, 저거 해봐라, 했는데 못 지켰단 말이에요. 그 돌 판이 우리에게 스톱이 된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인간은 예수님을 합세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의 천국을 채울 수 있는 백성은 이제는 주도권이 누구냐 하면, 인간이 주동을 했고 그런 인간을 죄로 규정했던 예수님이 오른편이니까 주의 의지를 보여줄 실행자의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건져버리면, 건져낼 때 주께서는 자신의 영을 그 사람 속에 깊숙이 넣어버려요. 마치 잠 잘 때 칩이 들어온 것처럼. 그걸 그리스도의 인, 도장을 우리의 내부에 찍어버리는 거예요. 이마 정도가 아니고 내부에 찍어버려요.

 

그런데 왜 이마에 하느냐,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을 말씀을 이마에 손목에 새기라고 되어있어요. 소속이 그래요. 그걸 가지고 뭐냐, ‘기표’라고 하는데 기표는 기호와 기능으로 둘로 나누어지는데 이 기표란, 표시를 하는 겁니다. 이 표시를 하거든요. 돼지 도살하고 돼지 엉덩이에 찍잖아요. 퍼런 도장. 합격도장 찍듯이. 주께서는 엉덩이에다가 이마에다가 도장을 찍는 거예요. 내 것! 이걸 성령의 도장. 성령의 도장이라는 것은 어떤 권세도 빼앗을 자가 없어요. 성령의 도장을 만나봤으면 참 좋겠다. 하고 그리워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더 이상 드릴 제사가 남아있지 않음을 그것만 알면 안 되고, 남아있지 않음을 십자가에 근거해서, 그리스도 죽은 것 이외에는 알지 않기를 근거로 해야 되지, 나 구원받았다! 이러면 안돼요. “나, 예수 때문에 구원받았다.” 하지 말고 십자가를 근거해서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나를 구원했다.” 이리 되어야 돼요. 구원도 수동형 되어야 돼요. “나, 구원 챙겼다.” 소유로 나가면 안 되고 “주님이 하신 일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로 구원되게 하셨다.” 라고 주체를 주님께 돌려야 돼요. 그 사람의 움직임이 새 언약의 움직임입니다.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오게 되면 어떤 결과가 되느냐 로마서8장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앞에 있는 것을 거두절미하고 마지막만 남깁시다.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그걸 뒤에 것을 끊으면 “니는 죽어야 돼!”이겁니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절차야. 니 좋아라고 죽는 게 아니고 주님 좋아라고 니는 죽어야 돼! 바이. 바이. 잘 죽어.”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는 것은 잘 죽는 겁니다. 이왕 죽는 거 잘 먹고 죽어야지요. 참외 잡수고 딸기 잡수고 이왕 죽는 거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잘 살고 잘 먹고 죽어야지요. 오늘의 복음입니다.

 

온 인류 아까 나왔어요. 실존적 의미할 때 아까 온 인류 나왔어요. 인류가 나의 존재를 확장해서 인류를 만들거든요. 인류가 있다, 할 때 있다를 나의 의미에서 나온 실존적 의미로 보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 따라서 온 인류는 있구나. 그런데 이 말을 숨 거두고 있는 80살 먹은 노인보고 “할아버지 계시니까 온 인류가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느냐, “그게 죽는 나하고 무슨 상관있어? 걱정되는데. 죽고 난 뒤에 지옥 갈까봐 걱정 되는데. 그건 니가 팔팔 살아있을 때 20, 30대 그 걱정 하지. 나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내 존재 의미가 지금 삭제되고 있는데, 온 인류도 같이 삭제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의 존재는 이처럼 허점이 있어요. 지금 아직도 생기 나니까 온 인류가 어떻고 걱정하고 있지요. 본인이 죽어보세요. 본인 죽으면 걱정 안 돼요. 북한의 핵이 어떻고 북한에 식량 떨어졌다. 라고 하는 사람은 여유 있는 사람이고 당장 구조조정 당해서 쫓겨 난 사람 같으면 내 취직도 걱정인데 어디 그걸 걱정해요. 자기 취직도 안 되는데 왜 북한까지 걱정합니까? 말이 안 되지요. 여러분, 헌혈합시다. 물론 건강하면 좋아요. 저도 많이 해봤기 때문에 하는데. 막상 본인이 아프면 내 몸만 편한 게 최고에요. 인간은 자기 존재가 중심입니다.

 

(북한이 어떻게 될까, 핵전쟁이 일어날까 : 사담 중) 그건 남한 사람의 핵 존심이에요. 지 자존심이에요. 왜냐 하면, 북한과 남한 쪽을 주의 복음으로 연결해야 되는데 나의 존재로 연결한 거예요. 우리는 한 형제로 연결해버리면 이건 반칙이 되지요. 주께서 기르시나니, 남쪽도 주께서 기르시나니, 그럼 주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그렇게 되어야 되는데, 같은 우리의 겨레요, 한 민족이요, 홀로 아리랑 있잖아요. 바다가 하나 됨 같이 언제 우리는 하나가 될까, 노래에 나와요.

 

결국은 모든 문제는 내 구원을 위해서 내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 애쓰고, 삼위일체고, 성경을 보고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는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그런 걸 아는데 니가 그런 육신을 갖고 있는 걸 아는데 성령께서는 그 니 뜻대로 안하고 아버지 뜻대로 그런 너를 구원했다. 말이 재미있지요. 니 뜻대로 구원 안 시켜주고 주님 뜻대로 구원되는 거죠. “아이고, 이래나 저래나 구원되면 그만이지.” 아니에요. 니 존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너를 활용한다니까요. 우리를. 일을 시키고 숙제를 주고 이 땅에 산다는 그러한 고생을 우리에게 시키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봅시다. 19절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여기에 보게 되면 예수의 피 다음에 뭐가 나오지요? 힘이 나오지요. 힘. 그게 능력이에요. 예수 믿어서 구원 못 받습니다. 주의 피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피의 능력은 언약이 되고, 언약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가서 우리 몸속에 이미 하나의 인 치심, 우리 속에다가 예수의 피를 장착을 한 거예요. 우리가 잠 잘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예수의 피는 작동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활용되고 있고 하나의 도구로서 쓰여 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말이 뭡니까? 성소에 들어간다. 갑자기 성소라는 말이 왜 튀어나오지요? 구원받으면 되는데. 성소라는 말은 이 용어 자체가 하나의 공간을 의미하지요. 그러면 공간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 활용되는가 하면, 인간 존재들 속에서 활용되는 곳이 성소입니다. 성황당, 거룩한 특정한 장소라고 생각되는 그러한 소문난 곳. 이게 성소거든요.

 

그러면 성소가 되면 뭐가 생기느냐 하면, 성소가 특정지점을 점령하게 되면 성소 안이 생기고 성소 밖이 생기겠지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특정 공간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여기 있다면 안에 들어가면 나는 성소 안에 있고 성소 안에 못 들어가면 나는 밖에 있겠지요. 만약에 이 성소가 주님께서 이 성소를 사용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체계에 들어가지요. 그러면 기존의 시공간은 깨져버립니다. 성소 안에 들어가고 아니고는 우리 존재의 몸으로는 불가능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버리면 기능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이미 예배당에 안가도 성소 안에 이미 들어온 셈이 되지요. 그것을 가지고 예수의 피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소 어디 있는데? 예루살렘에 있나? 어디 있는데? 큰 교회 예배당이야?” 그게 아니고 이미 주께서 피 이야기할 때 성소 안에 들어간 것도 이미 하나의 컨셉으로 이미 포함이 되어있어요. 옵션이 아니고 이미 확정된 것이라니까요.

 

예수 믿고 성소 단 가고 싶은데. 성소 체크. 아니오, 필요 없어요. 암은 보장해준다는데 그러면 종기는? 종기는 특약으로 새로 체크하셔야 됩니다.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암이고 종기고 전부 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장 다 해줍니다. 이 순재 보험. 모든 걸 다 해줘요. 2년마다 갱신하는 것도 없어요. 백세 보장.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못 하는 계약을 주님이 아버지하고 따냈기 때문에.

 

따냈다는 근거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모든 사람이 죽음의 길로 갔는데, 남들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주님만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이게 진짜네.” “이게 하나의 교리인 줄 알았는데 종교 교리가 아니고 이게 현실이네.” “실제 상황이네.” 이것 안다면 그 사람 속에 바로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과 밖을 생각했습니다. 타고난 죄 성으로 나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 잘되는 그것조차 죄였고 그것이 죄로 드러났다는 사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상태인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