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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6장 61절 / 끈 / 150507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6장 61절 / 끈 / 150507

정인순 2015. 5. 9. 11:14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공은주

가락-요한복음6장61절(끈)15050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6장 60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님께서 말씀을 참으로 어렵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쉽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갈 텐데 왜 어렵게 해서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고. 이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음에 뒤에 보면 다 가버렸어요. 66절에 보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많이 물러간 정도가 아니지요. 다 가셨네요.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더라. 주님께서 사람을 모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제대로 예수님을 모른다면, 같이 있어도 소용없다는 그런 투지요. 주님께서.

 

천국에 사람이 아쉬워서 모집하는 게 아니잖아요. 천국은 천국다워야 되지 천국 못 올 사람이 가게 되면 천국을 버려버리잖아요.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어렵게 하시는데 제자들이 다 가버렸습니다. 다 가버렸을 때에 그러면 이 어려움이란 장벽을 통과를 해야 주님의 나라에 합류가 된다는 그런 논리가 되겠지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가버렸는데, 이 12제자들이 주님과 결별할 그 시점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당국에 체포되고 난 뒤에는 12제자가 다 떠나버렸지요. 결국은 이 말이 뭐냐, 예수님 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요한복음의 특징은 처음에 이 세상은 어둡다고 할 때에, 그 어두움부터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이미 나는 예수님의 제자기 때문에 어떤 인센티브를 갖고 시작합시다, 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인정하지를 않아요. 제자기 때문에 수월하다는 그런 것을 일체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똑같이 나를 모르는 데는 합치했다. 똑 같았다. 누구도 자기 능력으로 예수님을 알거나 믿거나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출발점부터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그게 창조에요.

 

창조라 하는 것은, 창조의 특징은 여기 뭐가 생겼다. 생겼다, 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흔히 창조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 무에서 유로 창조하잖아요. 할 때, 사람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없는데서 생겼네. 신기해라.” 여기에 관심이 있는데 하나님의 관심은 없는데서 생기는 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어떻게 없는 데서?’ 요게 하나님의 관심사에요.

 

창조 과학 회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창조 과학 회. 진화론 반대해서 이 세상 모든 자연이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한다. 그것을 증명하는 단체가 창조 과학 회에요. 창조과학회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바로 현재 있는 데서 창조주를 끄집어내려는 무리수를 둔 겁니다. 창조 과학 회는 성경적이 아니에요. 일종의 유신론 철학입니다. 전혀 복음의 능력과는 관계없습니다.

 

왜냐 하면, 돌이나 과학적 사실을 통해서 중보자가 나오지를 않아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어디든 화석에 예수 그리스도 안 나오거든요. 진화론이 아니다, 라는 것만 나오지 예수님이 나오지를 않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나오지를 않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이 하는 것도 긍정하게 되지요. 예수님이 안 나오면 내가 하는 열심, 내가하는 기도와 헌금과 충성과 예배참석과 성경공부, 설교, 찬양, 이 모든 것을 긍정하게 돼요.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 돌릴 수 있을 걸.’ ‘아마 의미 있을 걸.’ ‘하나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실 걸.’ 이렇게 긍정하게 됩니다. 뭐가 빠졌어요? 중보자가 빠졌어요. 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것을 지키는 것이 왜 죕니까?” 라는 질문이거든요.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지키고 자기 목숨을 지키고 부지하려는 것. 부모가 자식 키우는 게 왜 죄가 되지요? 학생이 공부 열심히 하는 게 왜 죄가 되며, 직장인이 자기 직업에 충실 하는 것, 그게 왜 죄가 되느냐, 정답은 뭐가 빠져있어요. 중보자가 빠져있어요.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이런 이야기는 뭐가 빠졌는가 하면, 창조라는 게 반드시 없는 데서 나와야 되고 시작을 해야 될 텐데 사람들은 없는 데서 시작을 못 합니다. 왜냐 하면, 사람은 이 중간에 있거든요. 중간에 있으니까 뒤로 돌아가지를 못해요. 이왕 생긴 것, 최선을 다해서 앞으로 더 훌륭한 더 멋있는 내가 되고 싶다. 그게 종교지요. 종교라는 게 뭐가 있겠어요? 종교라는 것이 자기 가치를 더욱 더 급성장 시키는 것이잖아요.

 

아주 간단하게 알기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어디 있는가 하면, 잃어버린 천국과 그리고 다시 만날 천구, 그 사이에 인간이 있어요. 그렇지요? 잃어버린 천국과 잃어버린 행복이나 기쁨이나 다 마찬가지에요. 잃어버린 천국과 그걸 실라국이라 하는데, 잃어버린 천국과 다시 만날 수 있는 천국, 그 사이에 인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잃어버린 천국을 어디서 찾는가 하면, 지금 고생스럽기 짝이 없는 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천국에 증거를 찾지요. 꼭 진화론 같아. 꼭 창조론 같아. 창조 과학 회와 똑 같아요.

 

내가 이렇게 몸이 아프고 이렇게 힘든 것은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거야. 이것은 뭔가 내가 죄를 지어서, 저주를 받아서 이러니까 빨리 저주나 죄를 풀어서, 그러니까 내가 뭔가 잃어버렸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이 말이거든요. 내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잃어버린 그 부분만큼 나중에 다시 회복되고 보충하고 채워질 수 있는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그 날을 위해서 입을 꽉 다물고 이빨 꽉 물고 참고 그날을 기다려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여, 제가 오늘도 참습니다. 어서 천국에 가게 하옵소서.” 라는 그런 오기 같은 것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거예요.

 

교회가 기도해서 복 받는 것도 되지만, 근본적인 것은 뭐냐 다시 올 천국에 내가 입성하는 것, 그게 목표가 돼서 교회가 있지요. 절이 그런 거 못해주고, 청와대가 못 해주니까 삼성그룹이 그걸 못해주잖아요. 교회 아니면 희망이 없으니까 교회에 가는 거예요. 이걸 제가 방금 뭐라고 했던가요? 이걸 가지고 종교라고 했지요. 이 말을 쓰는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를 쓰고 있는 겁니다. 종교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취미가 되어버려요.

 

취미, 흥밋거리, 그래서 모인 것은 친목 단체. 계 모임 모여서 재미있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곳. 가서 다시 만나고 싶은 곳, 모이다보니까 사람들이 커지고, 거기서 경제적인 사회적인 어떤 혜택 같은 것도 기대해볼 수 있고, 정수기 하나 더 팔 수 있고, 보험을 한 구찌 더 넣을 수 있는 문제고, 애 피아노 가르치는데 좋은 정보 얻을 수 있고, 정보도 얻고 외롭지 않고, 놀 수도 있고, 돈 모아서 성지순례로 외국에도 갈 수도 있는 문제고, 천국 가는 것은 보너스로 그냥 등록하게 되고.

 

이 살은 내 살이고 내 피다. 이 살과 피 이거 먹고 마시면 이것은 이미 등록된 사람에게만 주는 혜택이고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게만 주는 특혜, 그런 것으로 정보를 모아서 자기를 안심시키는 이 모든 게 하나의 친목단체, 종교라 하는 거죠. 그럼 이 종교에는 바로 뭐가 빠져야 되는가 하면, 바로 중보자가 관여할 수 없어요. 관여할 수 없고 대신 뭐가 있느냐 하면, 종교가 되려면 중보자는 빠지고 제사를 지내야 돼요.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지내잖아요.

 

예배라는 이름의 제사를 지내는 거예요. 종교는 예배당의 특정 장소에 모여서 특정시간 일요일 11시, 늦게 오면 11시 5분 정도. 11시에 모여서 한 시간하고 12시 되면 빨리 가야 돼요. 예식장에 가야 되기 때문에. 또 뒤에 제2부 자기 스케줄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리면 교회 중심의 생활이 되지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교회 중심으로 해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교회 다니면서 마치 최면 거는 거예요. 교회 중심으로. “교회를 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복은 교회를 통해서 옵니다.” 여러 가지 간증적인 사례를 쫙 나열을 하고 “교회를 떠나면 안 됩니다.” 하지요.

 

그런데 성경을 보세요. 성경에 보면 교회라는 곳이 없어요. 교회라는 단체는 있는데 교회라는 장소, 시간은 없어요. 이건 뭐냐, 일상 속에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일상을 주께서 조성해 내는 식으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갑니다. 주께서 일상 속에. 일상 속을 다른 말로 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에브리싱(everything)이거든요. 무엇을 하든지. 놀러가든지 아니면 잠을 자든지 목욕탕에 가서 사우나를 하든지 간에. 아니면 조깅을 하던지. 무엇을 하던지. 거기서 영광 돌려라, 가 아니라 그런 일을 조성하신 분을 인정하면 그게 영광이 되는 거예요.

 

학생이 시험을 치는데 컨닝을 했다. 컨닝을 하면 영광을 가린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잘못이에요. 컨닝을 하게끔 주께서 조성한 것을 믿게 되면 그 아이는 컨닝하면서 영광이 되는 겁니다. 이제 니 점수는 끝났어. 니는 바닥이다. 그걸 감사한 마음으로 수용해야 돼요. 감사한 마음으로. 왜? 내 자신의 죄와 숨겨진 내 위주의 인생을 찢어버리는 작업을 우리는 늘 당해야 구원받았거든요. 왜냐 하면, 찢는다는 것은 누구 이름으로 찢느냐 하면, 내 이름으로 찢는 거예요.

 

주의 이름에 방해되는 내 이름을 찢음으로 말미암아 찢어진 그 분이 주체 이름, 주의 이름으로 내 이름을 찢는 그 작업이 우리로 하여금 지식이 아니고 온 몸으로 “제가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이름의 활동 안에 놓여서 제가 구원받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하지 말라는 거예요. 에브리싱,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안하게 되면 반드시 뭐든지 하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내가 뭘 하기 때문에 정작 주께서 하신 것이 자꾸 가려져요. 가려져버립니다. 아침에 눈을 떴다. 내가 손가락가지고 성냥개비로 바쳐서 벌린 게 아니거든요. 주께서 눈을 뜨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자기 전부터 주의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떻게 운동하고 식사하고 양치질하고 전부 다 이게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마치 참새가 짹짹거리듯이.

 

참새가 굶어죽을 때까지 주께서는 먹이시나니. 굶어죽을 때까지. 참새가 먹을 게 없어서 굶어죽더라도 하나님한테 원망하면 안돼요. 그동안 키워준 것이 주의 은혜니까. 마태복음6장26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친히 기르신답니다. ‘친히’가 중요해요. 친히 기르시나니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참새가 팔리는 것도 주의 뜻인데 친히 기르신다는 거예요. 친히 기르시는데 인간들은 뭘 보느냐 하면, 하나님이 친히 기르신다고 본 거예요. 그걸 바꾸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는 게 아니고 인자가 친히 기르는 거예요. 바꾸라는 거예요. 인자가.

 

왜 하나님이 친히 기르신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를 믿으면 왜 구원을 못 받는가 하면 왜 그게 구원이 안 되는가 하면, 그 하나님이 나의 확대기 때문에 내 존재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가 왜 했을까? 신이 만들었겠지. 그러면 신은 있네. 그러면 그 신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음을 증명, 확인하기 위해서 내 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따로 설정한 것이 신의 이름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되어있지 않아요. 골로새서1장16절에 누가 만들었습니까? 신이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이 우리를 만들었어요. 오직 인자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친히 만드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분을 위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 다 알아요. 천국 갑니까? 아니에요. 성령이 임해야 바로 숨어진 하나님이 예수님이란 사실을 알아요. 전에는 이방인들이 신, 신해서 우상화된 신을 믿었지만, 마지막 때에 구체적인 특정 인물로 보냈사오니, 사도행전17장30절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이 설교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정하신 자를 마지막 때에 보내사 지금까지 한 모든 신을 믿던 것을 이걸 그냥 용납하시고 이제는 용납하지 않으시고 그 분이 신이 보냈는지 어떻게 확인하느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마지막 때를 위해서 더 이상 증거를 두지 않았다고 되어있어요. 사도바울이 설교할 때, 설교핵심이 바로 이거였습니다.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증거는 내놓을 수 있는 증거는 손 털고 다 내어놨다는 거예요. 이제는 그 예수를 믿고 안 믿고를 따라서 그 정하신 사람으로 마지막에 심판을 준비했다. 끝! 사도바울의 설교가 그렇습니다.

 

전에는 몰랐을 때는 허물치 않았더니만, 마지막 예수를 보냈을 때는 더 이상 봐주는 건 없기! 봐주는 건 없습니다. 오직 숨겨진 너희들이 말하는 헛소리,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그 헛소리가 이제는 실제 인물로 33살 먹은 목수의 아들로 실제로 등장했어요.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육신으로 오신 그 하나님, 그 성자를 인정하지 않으면 적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적그리스도.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이 중요해요. 하나님이 그냥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그런 건 안 통해요. 정답이 아니에요. 육신으로 왔다는 것이 중요해요.

 

육신으로 왔다는 게 왜 중요한가 하면, 육신으로 오신 분이 피와 물과 성령이라는 증거물을 남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일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그분인 것을 증거 하는 것은 3가지라, 성령과 물과 피다. 요한일서1장8절 보는 사람은 무슨 이야기 때문에 그걸 적어났는지 몰라요. 그냥 예수 잘 믿는데 이거까지 필요 없는데. 우리가 예수 잘 믿는다고 하는 그 예수가 전에 있던 하나님을 이미지화시킨 그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대단한 예수를 우리가 만들어낸다니까요.

 

우리가 안 만들어내면 물과 피라는 그런 거 이야기 안 해도 되는데, 항상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를 어떤 켄터키치킨 할아버지처럼 뭔가 점잖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점잖고 훌륭하고 자비롭고 인자하신 그런 모양새를 우리가 만들어내는 그런 자질들이 있어요.

 

왜 불교가 우상숭배입니까? 부처를 만들어냈잖아요. 요번에 여름수련회에 사사기하는데 사람들이 기드온의 에봇을 만들었어요. 에봇은 물질이잖아요. 물질에 어떤 능력이 나오는 줄 알고 에봇을 음란하게 섬겼다고 했어요. 섬길 때 음란하게 섬겼다 했어요. 음란이란 말은 보통 성적용어인데 성적용어를 어디에 쓰느냐 하면 바로 종교용어로 적용을 시켜요. 확대시킨 겁니다. 또 모세가 들었던 놋 뱀 있잖아요. 놋 뱀 그것도 사람들이 놋뱀이니까 그것보고 바라보는 사람은 살았잖아요. 그 소문 듣고 놋뱀이 우상화됐어요.

 

또 법궤 그것도 우상화됐어요. 천주교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입던 옷 성베도 우상화될뿐더러 예수님의 마지막 잔 성배도 찾아내서 그것도 우상화시키지요. 참 이상하잖아요. 그게 아이콘인데 그런 게 있으면 신앙심이 더 돈독해지잖아요. 왜 그걸 말리지요? 이게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신앙이 돈독해지면 안돼요. 왜냐 하면, 신앙이 돈독해지면 그게 특수영역이 돼버려요. 주님은 일상 속에서 찾는데 화장실에서 찾고 목욕하면서 찾고 했는데 우리는 그 영역 말고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만날 매치할 수 있는 주님을 모실 수 있는 특수영역을 따로 만들어요. 마치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안방에다가 마리아상해서 특수영역으로 따로 마련하는 것처럼. 예배당에서 강대상은 목사만 올라가고 전도사는 아래 강단에서 이거 쳐야 되듯이 특별한 영역과 특수한 시간 새벽2시45분은 주님 안 계셔. 꼭 11시 예배에 참석해야 주님 만날 수 있는 미팅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처럼 은연중에.

 

히브리달력으로 하면 1월 15일 유월절, 3월6일 오순절, 맥추절이 두 개인데요. 유월절, 맥추절, 오순절 봄 절기입니다. 히브리달력은 뭐냐 하면, 출애굽기12장에 보면 출애굽 할 때 1월 달로 쳤으니까. 사실은 그 기간이 3개월 더 차이난다 보시면 됩니다. 7월1일 나팔 절, 7월10일 속죄 절, 7월10일부터 일주일동안 초막절 또는 수장절이라 해요. 마지막 절기. 그 절기를 하나님께서 만들어놨거든요. 그런데 갈라디아서4장10절에 보면 뭡니까? 내가 너희 절기를 지키면 내가 전한 복음 다 찢었다고 생각해라.

 

참, 재미있는 게 절기를 누가 정했어요? 우리가 정했습니까? 하나님이 정했어요. 안식일 누가 정했습니까? 하나님이 정했어요. 분명히 사도바울이 안식일 지키지 말라고 했거든요. 안식일 주일 같은 거예요. 주일, 안식을 지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이건 물론이고. 부활절 이것도 마찬가지고. 하여튼 절기 지키지 말라고 하는 뜻이 뭐냐 하면, 주님 뜻은 이거에요. 너희들 일상을 볼게. 일상을. 화려한 드레스 보는 게 아니고 너희 속옷 보겠다, 그 말이에요. 속옷.

 

주님의 창조는 어디서부터 시작했는가, 무에서부터 창조했잖아요. 이 무의 개념이 죄의 개념으로 바뀌어요. 원래 처음에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왜 그 날 안 죽었지요? 그날에 죽으리라 했잖아요. 그런데 그 날에 왜 안 죽었지요? 죽음의 의미가 바뀌어요. 어디서 바뀌느냐 하면 창세기4장에서 바뀌어요.

 

아벨을 죽인 가인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살았지요. 하나님께서 벌을 주는데 그 벌이 뭡니까? 니도 죽어라, 이러지 않고 너가 다른 곳에서 살아서 살도록 하니까 가인이 하는 말이 “그러면 다른 곳에 가면 죽을 수 있습니다.” 하니까 “표를 해서 안 죽게 해줄게.” 라는 게 그게 벌이래요. 그게 벌이랍니다. 그게 살인죄의 벌이라는 거예요. 죽은 놈만 손해 봤지.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멀쩡하게 대대로 잘 사는데. 큰 성을 짓고.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목숨 끊어져도 죽음을 몰라요. 자살의 바보가 그거에요. 자살해도 안 죽는 게 문제에요. 자살해서 죽으면 나도 자살해요. 자살해도 안 죽어요. 인간들이 죽는 사람을 보니까 그게 죽음인 줄 알아요. 인간들 개념에서 너무 성급하게 개념을 따와서 그래요. 죽음은 저주를 말합니다. 그리고 저주는 인간이 살아있을 때는 못 느껴요. 진짜 죽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버림받을 때, 그 때 유일하게 저주와 죽음을 같이 경험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선악과 따먹을 때, 정녕 죽으리라한 죽음이 있잖아요. 그 죽음의 진짜 정답은 누가 쥐고 있는가, 예수님이 쥐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는 것이 지옥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 안 죽었어요. 거지 나사로의 앞집 사는 부자는 아직도 지옥에서 못 빠져나오고 있어요. 지금도 물 달라고 난리에요. 괜히 시원한 물을 경험해가지고 그 경험을 안 했으면 물 달라 소리는 안 하는 건데. 괜히 물 마셔놓으니까 결핍이 생기는 거예요. 결핍이.

 

철저하게 고립되고 철저하게 버림받는 것, 영원히 버림받는 것이 지옥입니다. 그 버림받는데, 부자고 거지는 다 하나님 믿어요. 그런데 하나님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 받는다는 것이 이상스러워요. 하나님 믿는데 왜 버림받는가, 하나님 뜻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을 안 믿으니까 저주를 받는 거예요.

 

기독교가요, 하나님교회는 안됩니다. 예수교로 바뀌어져야 돼요. 기독교가 하나님 교회로 바뀐 것은 사람들을 고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시지요. 하나님이 모르는 사람 없이 다 아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아시니까 “여러분들에게 잃어버린 천국을 제가 우리 교회에서 다시 천국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나님 잘 믿으세요. 믿던 것처럼.” 그게 엉터리에요. 하나님 믿으면 안 된다니까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안다고 했어요. 심지어 절의 중들도 하나님 알아요. 귀신도 이미 야고보서2장에서 알고 있지요. 귀신의 종이니까 하나님 다 알고 있어요. 이미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하나님 다 알고 있어요. 부처도 넘어지면서 “아이고, 하나님 아버지.” 이거 하고 있어요. 중들도. 지금 뭐로 바꾸느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뭐로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어야 해요. 왜냐, 저주가 예수님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3장35~36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지금 누구보고 하는 겁니까? 여호와 믿는 유대인보고 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그냥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율법을 가지고 체계를 갖추어서 믿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도 버릇처럼 “하나님이 살려주셨구나! 하나님이 살려주셨구나!” 이리 되어버리면 내가 만든 이미지의 신과 나는 좋은 관계라고 자꾸 착각을 하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살려주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살려준 것과 차이가 나요. 뭐냐 하면,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우리 죄 때문에 희생하신 분이 나를 살려줘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네 죄 때문에 희생을 했는데 니가 그 희생을 깜빡 놓쳐버리니까 우리는 헤헤거리면서 또 까불기 시작하는 거예요.

 

마치 어떤 불효자가 있는데 불효자 엄마가 그 추운 날 시장바닥 차가운데서 콩나물 팔고 있는데, 얼마나 아들이 애를 먹였으면 엄마가 손가락을 끊어서 그 손가락을 하나 잃어버려가지고 다른 손가락은 칭칭 붕대 감아가지고 콩나물 팔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아들은 자기 죄 때문에 날아간 손가락이 꼴 보기 싫어서 엄마한테 근처도 안 오는 거예요. 그런데 가끔 용돈 얻기 위해서 엄마한테 가다보면 뭐가 보이느냐, 이 손가락이 자기 죄 때문에 날아간 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요새 교인들도 하나님 좋아하지 예수님은 별로 안 좋아해요. 생각하면 예수님은 십자가 피 흘리는 것이 먼저 다가오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십자가 피 흘림을 생각하면서 “주여, 우리 애 성적이 내려갔는데.” 지금 십자가 피 흘리는 것을 생각하면서 지금 성적 내려간 것이 거기에 매치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지요.

 

“주여, 주식을 샀는데 깡통이 되어가지고 백수로 사놨다가 다 날렸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 순간 성령이 임해서 십자가를 보여줘 버리니까 “야! 백수 그거 깡통 주식 사게 하신 것이 바로 주님의 일이구나! 돈 날리라고 하신 것이 돈 날리고 감사하라고 하신 주님의 조치였구나!” 라는 것을 차후 적으로 간파를 하게 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성도 맞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예수님이 뭐냐, 하나님하고 똑같이 이미지를 만들어서 멋있게 생긴 예수, 키 1m86Cm에다가 몸무게70Kg뭔가 도포 입은 사람. 그리고 사랑하노라 그런 것으로 마구 꾸며가지고 자기가 예수라는 인형을 만들었어요. 그것도 3D로. 입체로. 그래서 자기가 만든 예수가 꿈에도 마구 나타나지요. 자기가 만들었으니까. 예수 본 사람들 만나 보세요. 공통점 하나도 없어요. 자기 인상을 조합해가지고 멋있는 것으로 모아가지고 예수 만들어놨으니까 같을 수가 있겠어요? 없지요. 같을 수가 없지요.

 

다시 정리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지키는 것이 왜 죄가 되는가. 그게 왜 죄가 되는가 하면 중보자가 거기서 들어있지 않는 조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열심히 살아서 이만큼 살았습니다. 뭐가 빠졌느냐, 중보자가 빠져버렸어요. 그 말은 뭐냐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는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그 사람을 구원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천국 들어가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다가 장차 행하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거기다가 집어넣고 이야기를 해버려요.

 

예를 들어서 오병이어 보리떡 5개 물고기2마리 줬잖아요. 사람들은 그것을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물질화로 본 거예요. 요런 물질을 받으니까 음식을 받으니까 예수님이 좋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뭘 먹었습니까? 떡과 고기를 먹었지요. 그런데 53절에 뭡니까?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했지요. 그런데 그 전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축복해서 주신 떡과 고기를 먹으면 예수님을 경유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능력이 둘러있기 때문에 고기와 떡을 먹으면 생명이 막 쏙쏙 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예수! 예수! 하고 쫓아다녔는데 그 떡과 고기는 뭐냐 말이죠. 먹었던 것은 뭐냐 말이죠.

 

기도해서 예수님의 응답받아서 병 낫고 하는 이건 뭐냐 말이죠. 사업이 망했는데 기도해서 사업 잘된 것 주의 주신 축복, 이건 뭐냐 이 말입니다. 교인5명밖에 안 되는걸 기도 열심히 해가지고 2000명 됐는데 이 교인 수 2000명 뭐냔 말이죠. 예배당 큰 건 이건 뭐냔 말이죠. 선교사100명이건 뭐냔 말이죠. 그건 바로 예수의 살과 피를 가로막는 요소가 니 안에 그 거대한 요소가 마귀적인 요소가 애초부터 니 안에 들어있었고 그것이 풍선처럼 나에 대한 일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마귀적인 해석을 니가 부푼 거예요. 그렇게 풍선처럼 커지게 만든 거예요.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그 다음에 예수님이 여기 계시잖아요. 예수님께서 지금 요한복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마중을 나가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요한복음(17장3절)에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알아서 내가 잃어버린 천국을 다시 회복할 수 있으니까. 아까 강의하면서 후딱 지나간 것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인간은 어디에 있다? 잃어버린 천국과 다시 찾을 천국 그 사이에서 노정에 있지요. 그게 종교라고 했습니다. 복음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종교라고 했습니다. 이건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이. 잃어버린 것 어떻게 한다? 고생하고 있으니까. ‘이건 분명히 신의 뜻이 아니야.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힘들게 하지 않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간으로 만들었으면 이렇게 힘들게 하지를 않아. 뭔가 분명히 대책이 있어. 그 대책을 다른 사람은 안 찾아도 나는 찾아서 내 것으로 만들겠어.’ 강한 집념과 오기로서 교회를 다니는 겁니다.

 

언젠간 천국에 들어갈 줄 알고. 군데, 군데 기도의 응답 받으면 보너스로 챙기면 되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래서 주의 말씀을 듣고 그걸 믿으라고 했으니까 거기다가 갈라디아서, 로마서에 보니까 뭐라고 되어있어요? 행함이 아니고 믿으라고 했으니까. 행함보다 더 쉽네. 왜? 믿음은 4자만하면 되잖아요. ‘믿씁니다.’ 이건 더 쉬워요. 할렐루야, 믿씁니까? 믿씁니다. 믿씁니까? 하면 아멘하면 되는 거예요.

 

이건 행함보다 더 쉽네. 세상에 이런 쉬운 데가 어디 있어. 신라시대에 유명한 중이 있잖아요. 원효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도 불교의 교리가 어려우니까 민중들에게 불교신자 만들기 위해서 간단한 것을 줬어요. 나무아비타불만 해라.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이것만 하면 응답이 다 되는 거예요. 참 쉽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그럼 믿습니다, 하면 되는 거예요. 그냥 하면 좀 찝찝하니까 회중들 앞에 나와서 믿습니다! 손들고 하면 되는 거죠. 오늘 새로운 친구가 왔는데 믿는답니다. 할렐루야로 화답합시다. 할렐루야! 그러면 구원되는 거죠. 그런데 그 믿습니다가 행함의 일종이에요. 시옷을 4개 5개 붙여도 소용없어요. 백번해도 그건 행함의 일종이에요.

 

그러면 진짜 믿음은 뭐냐 하면, “나는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나는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주께서 주신 믿음이 내가 얼마나 주님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진짜 믿음은 주님만 알고 있거든요. 주님만 알고 있는 믿음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되면 나는 나만 사랑하는 철저한 이기주의고 나 빼놓고 모든 타인들 타인 중에 예수도 포함된 나 빼놓고 모든 주변에 있는 타인들은 나의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그런 죄인임을 고백할 때 그 능력이 니 믿음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이 니 믿음을 완전 포위를 해버려요. 완전히 덮쳐버린 거예요.

 

이런 컵 가지고 지나가는 개미 덮쳐버린 거예요. 꼼짝 못하지요. 그 안에 놓여있지요. 창고 같은 것이 덮쳐버리면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믿어지게 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고 생각되어지게 되는 거예요. 비로소 최초로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겁니다. 피조물이란 뭐냐, 창조주 없이는 못 산다는 뜻이거든요. 처음으로 창조주가 나의 주체로 등장하는 순간이에요. 교회 간다. 주께서 보내게 하셨구나. 30분 늦었다. 주께서 늦게 하신 거예요. 그거 메운다고 돈1000원주고 헌금 더 보태고 하지 마세요.

 

성가대 하다가 음 하나 틀렸다. 주께서 음 틀리게 하신 거예요. 그 성가대 지휘자에게 미안해 할 필요가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너무 자기 합리화 되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지 행동하나 어떤 나쁜 짓해도 그런 식으로 뒤처리를 하게 되면 이건 죄를 더 유발하고 더 퍼트리는 그러한 부작용이 생기지 않겠는가, 라고 질문하거든요. 그 부작용마저 주의 뜻이라고 믿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요. 누가 믿겠어요? 성령 받아야 되지.

 

그런 부작용마저 주님의 뜻인 것을 누가 감사히 받겠습니까? 이게 부작용이야. 부작용이야. 내가 지금 너무 오버했어. 안 돼. 조심해야 돼. 다시 행함으로 돌아가는 게 인간이죠. 뭔가 겁을 내고 있다는 것은 혼자 지금 나대고 있다는 뜻이에요. 누가 덮쳐주는 사람이 없기에 지금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목자가 없기에 지금 목자를 외치고 있는 겁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의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얼마나 목자가 없으면 그걸 주문 외우듯이,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하는 것처럼 왜 자꾸 그걸 외웁니까? 절인지 교회인지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믿씁니다, 믿씁니다 반복을 해야 되겠어요?

 

그래서 우리교회는 아멘 좀 하지 말라고 해요. 아멘을 하게 되면 첫째, 아멘을 하면 목사가 지 설교 잘하는 줄 알고 착각해요. 이게 제일 큰 문제에요. 오늘 뭘 주는구나! 하고 이리돼가지고 지가 착각한다니까. 두 번째가 아멘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옆 사람이 믿음 좋은 줄 알고 착각하게 만들어요. 아멘3번 한 사람하고 아멘1번 한 사람하고 믿음이 누가 좋겠어요? 3번 한 사람이 좋지. 세 번째가 문제에요. 아멘을 자주 하게 되면 없는 믿음 생기는 줄 알고 착각하게 돼요. 이 3가지 착각을 해요. 착각의 3종 세트에요. 설교하는 목사 착각하고 옆 사람 착각하고 본인 착각하고. 이건 주변에 다 착각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아멘을 안 하느냐, 하세요. 언제? 내 뜻대로 안 될 때 아멘하세요. 내 뜻대로 안 될 때,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입니다. 그 때는 아멘이 절로 나와요. “주여, 맞습니다. 당해도 쌉니다.” 그 아멘을 잘해도 구원받은 사람이 강도잖아요. 강도되어서 사형 잡혔잖아요. 완전 범죄 깨졌어요. 경찰한테 잡혀서 “주여, 이게 바로 주께서 유발하신 주님의 작품 아멘입니다.” 내가 강도되어야만 구원된다는 게 주의 뜻이라면 제가 기꺼이 강도라는 신분으로 인생 마감하는 것을 감사히 던지겠습니다. 그리 좀 살아봤으면 좋겠어요. 이론만 그러지 마시고. 그걸 저는 번지점프라고 합니다. 번지점프인데 이것도 비겁해요. 발에 묶인 왜 묶어. 강도는 그냥 날려버렸어요. 오늘밤에 니가 낙원에 있으리라. 나와 함께 있으리라. 몸을 그냥 던졌어요.

 

신앙은 뭐냐, 나보다 주님의 폭이 넓다는 것을 아는 게 신앙이에요. 내가 구축한 이 현실보다 더 넓은 범위로 그걸 포위하고 있는 게 신앙입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따라온 사람들에게 물고기와 떡을 줬잖아요. 그들은 영생을 먹었다고 생각한 거죠. 그리고 당신은 메시아 맞다 하는 거예요. 그 메시아에 주님은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건 니가 지어낸 메시아지. 니가 생각하는 얻어먹은 게 있으니까.

 

진짜 메시아는요, “저를 구원할 필요도 없는데 왜 구원하십니까?” 이럴 때만 메시아에요. 베드로 같은 경우에, 저 주님 3번 부인했습니다. 주께서 저를 내쳐도 제 쪽에서 예수님을 내쳤기 때문에 할 말이 없지요. 빡세게 붙들려고 애썼는데 주님께서 내친 게 아니고 돌아가는 상황이 나, 저사람 모릅니다. 3번씩 부인했잖아요.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습니다. 니 숨겨진 본색, 니는 니 자신밖에 생각 못하는 것, 오직 어디에 가도 너는 너만 최종적으로 궁극적으로 너 이외에는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게 궁극적으로 드러난 기회가 뭐냐, 바로 노닥 불 펼 때 소녀가 이야기할 때, 베드로는 자기의 주제파악을 한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 엮지 마세요. 나는 저 사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엮지 마세요. 아는 체 하지 마세요. 그 때 주님은 돌아봤거든요. 시선이 마주친 모양이라. 그 때 타이밍 맞게 닭은 울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습니다. 지금도 닭은 울거든요. 양계장 근처에 가면 닭은 웁니다. 닭이 운다고 그 때 그 말씀이 생각날까요? 왜 닭이 우는 것은 수컷이 암컷을 유인하기 위해서 그냥 우는 과학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지어낸 과학이지만.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동물에서는 수컷은 암컷을 전제로 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닭 우는 것을 전에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한 것이 생각이 난다는 것 그게 바로 은혜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생각나는 겁니다. 똑같은 장치해가지고 똑같이 다 울어보세요. 주님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남한테 이야기할 때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못해요. 뭐냐, 그 듣는 사람이 당신의 일방적인 억지 같은 해석을 나한테 펼치지 말라 이렇게 나와요. 그 때 닭 울 때, 니 혼자 생각이지. 변화산에서. 변화산에서도 그것도 니 혼자 착각이지.

 

그러니까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사람의 말로 하지 않고 지혜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남으로 전도하잖아요. 그러면 진짜 구원받은 전도 받은 사람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 집사가 말 잘해서 구원 받았다고 고백하겠어요? 아니면 성령에 의해서 구원받았다고 하겠습니까? 성령에 의해서 구원받았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고백했다면 본인이 남한테 전도할 때, 은근히 기대하지 마세요. 아이고, 완벽하게 말하고 봉투에 돈까지 넣고 점심까지 먹여놨는데 그래도 교회 안 나온다고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본인이 어떻게 구원받았는데. 왜? 본인은 그렇게 구원받아놓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걸 강요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지요.

 

전도는요, 말로 하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신학 배워서 성경 전도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살아가는 모든 그 모양새가 다 전도입니다.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다 전도입니다. 성령 받은 부모가 가정에서 생활할 때, 성령 받지 않은 자녀한테 그게 전부 다 전도가 되는 거예요. “엄마는 복음 알아도 저렇게 행동하는구나!” 그게 다 전도가 돼요. 전도가. 그러니 전도하려고 애쓰지 마시고 그냥 사세요. 주께서 전도되게 하십니다. 주변에 그런 변화를 유발시켜줍니다.

 

행동을 나쁘게 하게 되면 전도가 막힐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나쁘다, 좋다, 를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선악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반칙입니다. 주님은 생명나무 차원에서 하기 때문에 선악적으로 내가 나쁘다고 해서 나쁜 게 아니고 내가 선하다고 주께서 선한 게 아니에요. 그냥 주님께서 꼭두각시 인형을, 꼭두각시 인형이 뭐냐 하면, 인형 뒤에 줄이 있어서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잖아요. 애들이 축하파티를 열 때 마리아 선생님이 애들을 데리고 오를레이 오를레이호 하면서 하는 거 있지요. 꼭두각시처럼 우리를 줄로 맺어있어요. 그래서 뭘 하던지 간에 우리 역할을 할 뿐이에요. 악하면 악한 역할을 할 뿐이고 선하면 선한 역할을 할 뿐이지, 내가 선하고 내가 악하지는 않아요.

 

선악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 안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누구 바깥에 있는 주님과의 어떤 관계성, 끈하고 끈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 끈과 연결되어 있으면 의고 끈이 끊어져 있으면 이게 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내 내부에 선과 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착한 일하면 착한 생각, 나쁜 일하면 나쁜 생각. 코메디 프로에 그런 게 있어요. 중이 뭔가 음란한 생각을 할 때는 갑자기 절을 해요.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슬픈 생각…, 그 코메디에 보면 여자 동창생이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중이 됐어요. 그런데 중이 돼가지고 반갑다고 막 껴안고 하니까 갑자기 몸에 반응이 나타난 모양이라. 그게 부끄러워가지고 아버지 돌아가실 때 슬픈 생각, 슬픈 생각해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티를 안 내기 위해서 하잖아요.

 

그걸 보면서 바로 저게 오늘날 교회가 하는 짓이다.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요. 여러분, 죄지을 때마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착한 생각, 주께 영광, 주께 영광 그런 행동을 시킨다니까요. 그걸 경건의 훈련이라고 이야기해요.

 

경건의 훈련이 뭔 줄 알아요? 내가 왜 경건치 않은가를 아는 게 경건이에요. 훈련이에요. 로마서4장4절에 보면, 경건치 않은 자를 어떻게 하신다? 의롭다 하신다. 그 끈을 나타내기 위해서 왜 나는 모든 게 경건치 않은 것인가를 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경건치 않은 행동을 하는데 어떻게 행동하면 됩니까?” 그건 제가 말할 필요 없어요. 왜? 평소에 하는 것이 전부 다 경건치 않은 거니까. 전부 다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 이기주의적 행동이잖아요. 그렇잖아요? 어느 부모가 자기 아들 시험에 합격했다고 우는 사람 너무 죄를 알아서 우는 사람 누가 있어요? 내 애가 합격하는 바람에 다른 애가 내 애 자리 때문에 탈락했다는 것에 가슴아파하는 부모가 누가 있습니까?

 

회사 취직하러와 가지고 취직해놓고 너무 슬퍼가지고 나 때문에 엉뚱한 애는 탈락하고 자기는 합격했으니까 애통해하면서 통곡하면서 내가 사는 게 내가 도둑놈이야. 이렇게 하는 사람 봤습니까? 단박에 감사헌금할 건데. 그러니 이 모든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누구를 경유해요? 내가 평소에 원했던 것, 기대했던 것, 소망했던 것, 너무나 고생스러운 이 삶이 예수 이름으로서 행복해질 때 그 행복해지는 것을 사람은 뭐냐, 아까 한 다시 만나는 천국을 앞당겨서 맛봤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천국은 뭐냐, 주님 앞에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 그게 맛본 거예요. 그걸 자기 십자가지고 주를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어려운 게 아니고 사실은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 겁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전에 이야기했지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방법을 이야기했잖아요. 돌아서면 다 잊어먹어. 모르지요. 기억 안 나지요. 녹취해도 기억 안 날걸. 기억납니까? 안 나지요.

 

살과 피를 어떻게 마시는가 하면, 주님이 스스로 찔러서 피다, 살이다, 라고 주신 게 아니고 니가 찔러야 돼요. 죄인이 찌를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 살과 피 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야 되고 죄를 지어서 그 죄로 말미암아 주님을 나는 저 사람 모른다고 부인하는 그 순간 나오는 것이, 생산되는 것이 살과 피에요.

 

그래서 주께서는 끝까지 우리의 육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 우리의 육신이 있어줘야 살과 피가 나오기 때문에. “내가 나 된 것은 죄인입니다. 내가 지금 구원받은 것은 주의 은혜지, 저는 제 구원에 제가 어떤 노력도 한 적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 그럴 때만 면류관도 천국에 과감하게 던졌어요. “이건 제가 쓸 게 아니군요.”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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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6장61절(끈)150507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중보자라고 할 때, 사람들은 하나는 신의 세계가 있고 여기다가 중보자를 집어넣습니다. 이게 오류에요. 이게 잘못이에요. “여기 나 있는 거 맞지요? 신은 거기 계신 거 맞지요?” 신이 있다는 것을 왜 아느냐,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나를 안 만들었잖아요. 만든 분이 있을 게 아니에요. 그게 신이라고요. 신과 나의 배치구조 이것은 누구나 맞는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중보자가 오니까 중보자가 중간자잖아요. 매개자, 그러니까 집어넣으면 다 이게 아귀가 착착 딱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이 중보자가 오시게 되면 이 둘 다가 날아가 버려요. 인간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인간은 죄인이 돼버리고 신은 사탄이 돼버리고,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중보자 속에 아버지라는 이름으로만 계셔요. 아무도 모르는 오직 예수님만 알고 아들만 아버지를 알지 그 외에는 아무도 몰라요. 그럼 그동안 하나님은 뭐냐, 인간이 마귀한테 지시받고 다시 사탄이 신의 자리에 앉아있는 거죠.

 

그러면 그걸 어떻게 아느냐, 이 신이 여기서 뭘 행하느냐, 행함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행함의 반대말이 뭐냐 구약에서는 이걸 언약이라고 해요. 이걸 약속이라 합니다. 그러면 언약은 어떻게 되어있는가, 언약은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죄 플러스 피로서 세상에 언약이 등장하게 되어있어요. 죄 + 피.

 

그러면 이 죄는 어떻게 아느냐, 인간은 스스로 반성하면 안 되고 죄는 죄를 죄 되게 해서 여기 율법을 주지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동시에 제사법이 오고 그 제사법이 제사를 드릴 때, 그 언약궤에 피를 뿌립니다. 7월10일 날 대 속죄일 날. 우리 달력으로 하면 11월 달에. 피를 뿌리게 되면 그 피와 인간의 죄가 만나서 용서가 돼요. 아이러니한 아주 신기한 거예요.

 

우리가 아는 속사람은 뭐냐 하면, 회개하고 회개했으니까 참 잘했어요. 착했어요. 이렇게 도닥거릴 때 우리는 회개하는 자체가 우리의 선에 해당되는 겁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잖아요. 죄를 지었지만, 죄를 선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회개를 하게 되면 세상에 죄지은 걸 알고 네가 회개하는구나! 라는 것이 하나의 박스화 되어가지고 그게 착한 일에 들어간다니까요.

 

반성하잖아요. 반성은 무지 무지 착한 일이 되는 거예요. 누가 반성하겠어요? 착하니까 반성하지요. 얼마나 착했으면 반성을 다 하겠습니까?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 있으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죄인이 아니고 반성할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우리가 선한 사람 맞다가 되는 겁니다.

 

칸트라는 사람이 있는데 한 번은 들어봤지요? 칸트라는 사람이 인간의 천국 가는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반성하고 살다가 반성하고, 살다가 반성하고, 살다가 반성하게 되면 인간은 구원받는다. 이게 딱 사탄이에요. 악마에요.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구원의 단계가 천로역정, 단테의 신곡 이런 천주교, 개신교 유명한 명작이 나와요. 힘들고 어려움을 겪고 산 넘고 물 건너서 바다 건너서 드디어 천국에 도달했다. 이만큼 돌아왔으면 이것은 내신 성적이 1등급, 요 밑에 떨어진 사람은 2등급, 올라간 만큼 이것은 성화됐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는 것을 베드로전서1장16절 말씀을 인용해가지고 성화되는 거예요.

 

점점 더 성화가 되게 되면 세상은 넓게 보이면서 천국에 가까이 오고. 성화 못된 인간은 빌빌 기면서 아직도 세속에 속물에 허덕이고. 성화된 쪽이 성화 안 된 사람을 위에서 중보기도 해줘야 되고 그리고 여러 가지 훈계나 도와줘야 될 때, 이미 제자 된 사람은 초자에게 제자 되라고 늘 중보기도하면서 도와줘라. 이게 뭐냐,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이잖아요. 전부 다 사탄 적입니다. 다른 방법도 마찬가지고. 사람 끌어 모으는 데는 이런 재주도 있어줘야 돼요. 사람 끌어 모으는 방법으로는.

 

우리 속에 있는 뭔가 희망이라는 것, 희망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거든요. 희망이 없으면 아무 모티브 베이스 동기 삶의 의욕이 생기지를 않아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만 있으면 사람은 일어서게 되어있어요. 유레이지업 나를 높은 곳에 세운다 하잖아요. 노래에.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 하는 그 노래. 그런 노래를 불러가지고 나를 더 희망을 제공할 때 사람들은 7번 넘어져도 8번째 일어날 수 있다는 잠언서 말씀처럼 일어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인간에 잠재되어 있는 겁니다.

 

중보자가 뭐냐, 될 놈 더 도와줄 때 그게 중보자답지요. 뭔가 애쓰고 하려고 할 때 도와줄 때 중보자다운 거예요. 공부 아예 안하는 건 내쳐버리고 공부하려고 애쓸 때만 그때는 엄마가 열심히 맞벌이해가지고 애들 과외비대고 나는 니 하나보고 산다. 이 엄마가 있잖아. 앵그리 엄마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디 가서 맞고 오거든 내가 때려줄게. 모든 것이 백만 명이 들어도 다 납득이 되는 어떤 행복을 위한 어떤 희망을 보여줄 수 있는 긍정적인 말이 갖고 있는 이 모든 것. 이것이 바로 마귀의 발상입니다. 사탄이 그 짓을 하고 있어요.

 

주님한테 구원받은 창녀가 이런 식으로 이런 마인드였습니까? 베드로가 이런 마인드였어요? 강도가 이런 마인드였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끊어질지라도 주의 뜻이라면 제가 수용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져 저주받는다 할지라도 로마서9장3절, 제가 그냥 수용하겠습니다. 정말 믿는 자에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정말 죄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욱더 많이 알게 되었지요. 왜? 성령께서 자기가 미처 알지 못한 죄를 알려줬으니까요.

 

그러면 그 죄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성령 먼저 받은 분이 계시잖아요.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성령 받고 이 땅에 오셨지요. 저는 이걸 적신다고 표현하는데. 적신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하나의 초콜렛이고 소스라면 이렇게 적시잖아요. 죄 없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가지고 세례요한의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세례요한도 말했어요. “당신은 세례 받을 필요 없습니다. 의인인데 뭘 세례를 받습니까?” “아니, 아니, 아니야. 그게 의가 아니야.” 그건 존재론적인 내가 얼마나 착하냐가 의가 아니고 의는 관계거든. 끈이거든. 관계란 말이죠. 들어가요. 죄 속에. 들어가니까 죄 없으신 분이 죄 값은 다 치루는 거예요. 죄도 없으면서.

 

왜냐 하면, 그 구조 속에 들어오니까 죄 속에 거기서 죄 짓지 않은 분이 죄 값으로 오는 벌은 다 받네요. 그러면 주님의 일어났던 그 일을 성령께서 그대로 포장을 해요. 포장을 해서 그 포장을 가지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찾아와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이미 의인되었습니다. 의인된 사람으로서 “내가 왜 의인되지?” 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이제는 그걸 경험케 하는 한평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하는 말이 “따라가겠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아들로서 아버지 마지막 장례 치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장례 치르고 난 뒤에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니는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제자가 하는 말이 본인은 효도한답시고 효도하는데 주님보시기에는 그것이 주님의 합당한 모습이 아니지요. 죄가 되는 거예요. 죄라는 것은 주님의 합당한 그게 아니면 전부 다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를 어기면 다 죄가 되는 거예요. 죄가 되면 저주 받아요. 저주받을 짓을 한 거예요.

 

그러나 그 제자의 한 일을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 다 모아보세요. 그 제자의 행동은 어떻습니까? 지극히 효심 가득한 행동이지요. 그걸 누가 죄라고 하겠어요. 주님만이 죄라고 하지요. 그 주님만이 아는 죄를 성령께서는 그걸 포장을 해가지고, 큰 나무 옮길 때에 뿌리를 어떻게 합니까? 흙을 모아서 새끼줄로 꽁꽁 묶어가지고 트럭에 실어서 옮기잖아요. 예수님이 하신 그걸 새끼줄로 묶어갔어요. 성령으로 그대로 우리에게 오게 되면 그 제자가 했던 그 발언이 이미 내 속에도 수시로 그게 올라오는 거예요.

 

“교회 오려했는데 남편이 등산가자고 해서 그냥 따라갔습니다. 다음 주에 갈게요.” 가정이 행복할 때 주께서 원하시던 바가 그거잖아요. 가정이 행복해야 “아이고, 니가 믿는 예수는 좋은 분이야.” 라고 이렇게 감동 받게 되면 언젠간 또 남편을 꼬셔가지고 같이 교회에 나올 수 있잖아. 요런 생각도 있잖아요. 그 생각이 어찌 그게 죄라고 누가 알겠습니까?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하나님 아버지, 일평생 살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시고 저를 주의 종으로 사용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것은 교인들 다 모아서 물어보세요. 세상에 그렇게 완벽하고 경건스럽고 정말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기도라고 생각되지요. 그걸 죄라고 생각한다면 어떻습니까? 상상이나 됩니까? 다시 할까요? “주여, 이 몸을 주의 종으로 드리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의 종으로 바치겠습니다. 완벽한 이 기도. 조금도 자기 이기주의 내세우지 않고 진짜 헌신하겠다는 그 기도가 어떻게 죄가 되느냐 그 말입니다. 로마서8장에 보면 죄로 드러나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청년이 집에서 백수로 놀면서 아버지의 용돈을 받아가면서 사는 그 20대 백수 아들이 아버지한테 효도한답시고 250만원짜리 안마기 살 때 그게 효도겠습니까? 아버지 기쁘게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인간은 자기를 경유 안 할 수 없어요. 왜 경유하느냐 하면 항상 꿈을 꾸게 되어있어요. 비전 가져라 할 것도 없어요. 인간은 늘 꿈을 꾸면서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뭐할까 항상 미래 자기의 계획이 있어요. 그 계획을 먼저 설정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거기다가 초빙을 해서 협조 요청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아프가니스탄 선교할 테니까 도와주소서.” 할 때 아프가니스탄 선교 누가 이야기해요? 자기 계획이라니까요. “카투만두에 가서 봉사하겠습니다.” 계획은 누가합니까? 본인이 했어요. 본인이 해놓고 마치 자기는 순교하는 냥 그 어려운 사람에게 복음전하는 냥 전부 다 본인이 계획안을 내세운 겁니다. “목사님, 그렇게 되면 우리가 기도할 게 없는데요.”

 

기도라는 게 뭐냐 하면, 그런 자기가 계획한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아뢰는 게 기도에요. “주님, 오늘 이런 일이 있는데 이런 일을 이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그게 기도에요. 문제는 그 기도를 하면 되는데 제가 뭘 잘못했다고 하는가 하면, 완벽한 기도를 한답시고 본인의 의도는 다 숨기고 솔직한 것은 다 숨기고 건전한 것만 골라서 “어떻습니까?” 내미는 그 꼬라지가 주께서는 밉상인 겁니다.

 

“내가 선교사할 테니까 내 자식만큼은 밥 먹여 키워주세요.” 라고 그걸 간증이라고 하는 목사도 있어요. “제가 창녀를 돌보고 어려운 사람 도울 테니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들만큼은 키워줘야 됩니다.” 무슨 자격으로 그런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까? 그 사람은 자기 세계에요. 자기 세계. 중보자 세계 아닙니다. 자기 세계라니까요. 자기의 이미지, 자기의 환상이에요. 그가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배웠고 들었던 모든 것 중에서 제일 고상하고 멋있는 것 다 골라가지고 그것으로 어떤 차림새를 메뉴를 짠 거예요. 그렇게 하면 주께서 기뻐하실 줄 알고.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욥에게 죄가 뭡니까? 입을 놀리는 게 죄에요. 아프다고 하는 게 죄고, 아들 열 명 죽고 재산 날아갔다고 불평한 게 죄가 되는 겁니다. 나중에 그걸 욥이 알지요. 제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무조건 죄입니다.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그걸 느끼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순간, 순간 그걸 성도는 느낍니다. 봄이 왔다고, 누가 봄이 와야 된다고 제사지낸 적 있습니까? 여름 와야 된다고 누가 철야 기도한 적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자기 일밖에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는 기도하지 않아도 봄이 오게 하시고, 아까 보니까 아카시아 향기 날리잖아요.

 

시편135편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해를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해는 늘 떠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감사해요? 해를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라, 해는 해요, 거기서 무슨 감사가 나옵니까? 해에 뭐가 있다고? 사람은 자기와 관련이 없는 것은 감사가 안 나와요. 반드시 자기가 관련된 것만 감사해요. 남 잘되는 것은 감사가 아니고 짜증이 나요. 남 잘 되는 것이. 달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우리가 언제 달보고 감사하겠어요? 노사연이 불렀던 님 그림자. 그거 보고 아마 감사할 거예요. 저 만치 앞서가는, 그러니까 달그림자 뜰 때, 자기가 애인하고 같이했던 그 기억 때문에 달이 감사할 수 있는데 그냥 자기 빼고 달보고 감사하라, 이게 됩니까? 안 됩니까? 이게 안 되지요.

 

그러니까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와 결부되기 때문에 모든 게 내가 손대면 전부다 죄가 돼요. 마이다스의 손처럼 만지면 황금이 되는 것처럼 내가 손대고 내가 생각한 건 전부 다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게 주님이 의도한 거예요. 그러면 천국은 어디 있느냐, 천국은 바로 이 땅이 천국이에요. 천국은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경계선이거든요. 우리는 신이 있고 우리가 있고 예수님이 있다, 이렇게 오해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신이 있는 걸 지워버렸어요. 신을 지워버리고 우리로 뭘 만드는가, 우리로 하여금 중보자세계에 들어가 버려요. 들어 오면 거기에 누가 있는가, 거기에 아버지가 있어요.

 

이것은 중보자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몰랐던 아버지에요. 몰랐던 하나님입니다. 이건 예수님만 아는 하나님이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으면 나를 죽이지 않았다. 아무도 몰라요. 바라바를 원해요. 사람들은 바라바를 원하지 예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예수님하고 바라바하고 여기에 취업원서 냈으면 집사님은 누구를 뽑겠어요? 완벽한 재무담당은 안 뽑아요. 바라바를 뽑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신이 항상 여기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의 시체를 넘고 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 십자가 믿고 잊어버리세요. 만 날 목사들이 하는 짓이 그거에요. 십자가 믿고 잊어버리라는 거예요.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죄가 안 되는데.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잘난 사람이 되어버려요. 그렇잖아요.

 

요한일서3장16절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안 바치면 뭐가 돼요? 죄가 되잖아요. 그러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안 바친다 하는 것은 언제 등장합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줬다고 되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를 잃어버리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걸로 때우려한다 말이죠.

 

남편 된 자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 것처럼 아내를 위해서 목숨 바쳐라. 결혼은 뭐냐,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 위해서 남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남편에게만 존중하고 자기에게 목숨을 바치지 않는 남편에게 존중하는 것은 그건 여자가 남편을 이용하는 겁니다. 달래가지고 월급 빼먹기 하는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애를 키우기 위해서 남편을 돈 버는 기계로 이용하는 아주 얄팍한 술책에 지나지 않지요. 니는 돈만 벌어온나. 존중하는 척 해줄게. 오늘 맛있는 잡채 해줄게.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내 새끼 아니면 니는 벌써 헤어졌어.

 

그렇다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어떻게 아내를 위해서. 아내가 또 이쁘면 몰라도. 늙어가는 아내를 보고. 어떻게 늙어가는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까? 그러니까 니가 십자가를 모르는 거야. 니가 십자가를 안다고? 믿습니다, 하고 그걸로 때웠잖아요. 십자가는 평생 곁에 둬야 돼요. 십자가하고 후딱 부활로 가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크게 세운 그곳이 부활의 세계에요. 십자가 세계 따로 있고 부활의 세계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십자가만 보이는 그 세계가 부활의 세계에요.

 

그 십자가세계를 가지고 요한계시록에는 어린양의 보좌라고 해서 어린양, 순교당한 어린양, 일찍 죽으신 어린양의 보좌라고 해서 십자가가 천국의 중심에 있습니다. 십자가외면하면 천국도 못가요. 십자가 만나고 싶어 할 때 천국 가는 겁니다. “아, 나를 죄로 만든 그 십자가로 빨리 가고 싶다!” 라고 할 때, 천국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중이에요.

 

내가 이렇게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도 아침 먹었다 말이죠. 분명히 아침이 없어야 돼요. 콩밥 대신 하얀 쌀밥 먹었잖아요. 나는 하얀 쌀밥 먹었잖아요. 죄를 지었는데. 한 사람은 죄짓고 재수 없어서 교도소에서 콩밥 먹고, 나도 죄를 지었는데 멀쩡한 흰밥 먹고 있고. 이런 불공평한 세계가 어디 있어요. 그런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분명히 시속 120Km로 가다가 앞차는 잡히고 나는 그냥 가고. 만약 순서가 바뀌어보세요. 나는 걸리고 그 사람은 빠지고. 이 세상은 불공평한 세상이에요.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뭡니까? 공평 찾지 마라.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헛됨으로 짜 맞추어진 구조되어진 이 세상입니다. “니가 지혜를 알아? 니가 헛됨을 알면 니가 지혜를 아는 사람이다.” 지혜 다 뗐어요. 이 세상이 헛됨을 아는 것이 지혜를 다 뗐어요. 청춘도 헛된 거예요.

 

주께서 올라갈 때 십자가로 가잖아요. 갈 때, 그냥 천국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이걸 뭐로 바꾸느냐, 이것을 죄인으로 바꿔요. 그럼 죄를 바꾸는 방법이 2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죄를 더 짓는다. 둘째는 죄를 더 안다. 몇 번이겠습니까? 2번이지요. 제가 2번을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제 설교를 듣고 1번을 이야기한다고 지 맘대로 생각해요. 이 근호목사는 지 맘대로 살아라 하더라. 멋대로 막 살아라 했다. 이건 죄 짓는 거잖아. 본인밖에 없기 때문에 막 살면 죄가 더 증가하고 조심하면 죄가 적어진다는 것은 본인만 있을 때 그래요.

 

그러나 주님과 함께 있으면 주님 가신 그 인생길을 느끼다 보면 죄 아닌 게 없어요.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앞에서 갈수록 점점 더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주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매사 하는 그것이 어떤 나의 마지막에 나의 이득이나 이익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찬양하면 이거 주실 랍니까? 기도하면 이거 주실 랍니까? 헌신하면 이거 주실 랍니까? 선교사가면 이거 주실 랍니까? 내가 목회 전념하면 우리 애는 키워주시겠습니까? 항상 반대급부 흥정 같은 거 뭔가 동정심 유발, 일몰 차게 유도하는데 지옥에서는 그게 안 통하거든요. 주께서는 이 땅을 지옥으로 만들어놨어요. 지옥에서 택한 자만 건지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은 지옥이 아니고 괜찮은 세상으로 알고 있는데, 괜찮은 세상으로 알고 있는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희생 덕분에 이만큼 지금 말할 수 있는데 오늘 저녁도 볶음밥 먹었기 때문에 일할 수 있고 볶음밥 먹게 하신 것도 주의 은혜란 말이지요. 어떻게 이용하려는 것을 일 체 금하는 거예요.

 

죄를 더하기 위해서 주께서 성령께서 히브리서4장에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 우리를 그냥 겉만 찌르고 가는 게 아니에요. 가만히 있어보자, 완전히 해부해서 단층촬영도 완전히 다 잘라가지고 뼈를 발라 먹는다는 말이 있지요. 골수는 뼈 속에 있어요. 뼈까지 쪼개가지고 골수까지 신경조직까지 건드려가지고 말씀이 그래서 움직입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습니다.

 

우리는 내 맘대로 사는데 주님은 주님 마음대로 말씀가지고 자기 백성을 가만히 두지 않고 말씀으로 쑤시는 겁니다. 뭐하라고? 이 지독한 죄인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가뿐하게 니가 이미 영생을 얻었느니라. 그거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제가 여러분 이야기합니다만, 지난 주일날 했지요. 죄를 없애주는 게 아니고 죄는 그대로 있고 소양강 댐에 물이 차는 거예요. 그 물이 찬 게 용서에요. 용서라는 게 성립되려면 죄가 그대로 있어줘야 용서가 그만큼 용서 값을 하거든요. 베드로의 죄가 뭐냐 하면, 내가 일곱 번씩 용서하면 용서가 되겠습니까? 라는 죄를 범했지요. 왜냐 하면, 내가 일곱 번 용서한다는 말은 내 행함을 포기 못하겠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일곱 번의 용서를 했으면 인간의 도리로서는 할 때까지 다한 겁니다. 그야말로 best do it. 최선을 다한 겁니다. 라는 그것이 죄의 극단이었다는 말이죠. 바리새인이 바로 그거잖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더 이상 못 합니다. 누가 더 이상 하라 했나?

 

구원관을 자기가 조작한 거예요. 자기가 신을 만들어놓고 자기의 괜찮은 존재의 인간을 만들어놓고 거기다가 중보자를 집어넣고 중보자를 하나의 모델로 보는 겁니다. ‘아, 저렇게 착하면 되는구나!’ ‘저렇게 희생하면 되는구나!’ ‘기도할 때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 ‘아, 시범조교니까 주님이 시키는 대로 본받고 하면 우리도 될 수 있구나!’ 이러한 마귀적인 구원관을 고수하다 보니까 결국은 십자가는 없고 십자가 그 다음 단계가 뭐냐, 부활이 있잖아요. 부활의 새 생명을 거기다가 흠뻑 도취되어있어요. 부활의 새 생명. 새 생명이다! 말로만. 그러니 증거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기도해서 응답 받는 것, 새 생명이 응답인 줄 알고 그걸 찾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이 땅이 천국이라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여기 중보자 위에 있는 천국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여기서 만들어져요. 죄 안에서 천국이 만들어집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유를 대라 한다면, 예수님의 주되심이 이 땅에 안 찾아와서 주가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찾아오심으로서 주가 되는 겁니다.

 

그냥 안 찾아오시면 예수님은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되셔요. 그런데 찾아오심으로서 만유의 주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빌립보서2장 9절~11절에 나와 있지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걸 포기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그 다음에 뭐가 됐어요? 자기를 낮은 자, 죄인 됐지요. 죄인 되어서 어디까지 갔습니까? 대충 죄인 흉내 내다가 갔습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갔지요. 십자가 죽음으로서, 이 십자가에 모든 인류의 모든 가치가 모든 의미가 십자가에 전부다 여기에 응축이 되어있어요.

 

촌에 시골에 이런 밝은 불을 피워놓게 되면 그 동네 날아다니는 나방하고 모기, 하루살이 다 달려들어요. 십자가 사건 앞에 모든 인간 아담의 족속들은 전부다 거기 다 몰려오는 겁니다. 다 몰려왔는데 그 중에서 하나님의 합당한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참 인간이에요. 다른 사람은 인간이 아닙니다. 흙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은 괴물이에요. 인간이라 볼 수 없어요.

 

진짜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나머지 천국 가는 사람은 양자가 되는 겁니다. 아들이 아니고 아들로 쳐주는 거예요. 쳐줄 때 조건이 있어요. 예수님이 너를 변호한다는 조건하에. 니가 예수를 붙드는 조건이 아니고, 붙들어봐야 빠지지요. 지옥가면 다 붙들어야지요. 예수님 옷이고 다 붙들어야지요. 불 가운데 답답한데.

 

주님이 변호해 준 사람이 있어요. 붙든다고 구원받는 것은 불교식이고. 주님이 변호해 주는 거예요. 그 변호해 주는 것을 히브리어로 고엘이라 하고 욥기에 보면, 나에 대해서 대속 자가 계시니, 변호 자가 계시니. 내가 죽고 난 다음에 그 분을 만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변호해 줬지요.

 

그 변호에 대해서 스가랴4장에 보면, 여호수아하고 멜기세덱이 더러운 옷을 입으니까 사탄이 얼레리 꼴레리 하잖아요. 아이고, 저 더러운 옷 봐라. 하니까 하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 옷을 벗겨라. 그리고 흰 옷으로 갈아입히잖아요. 예수의 피가 묻으면 옷이 흰 옷이 되고 흰 옷 입은 사람이 144,000이라는 숫자에 포함되어서 천국에 간다는 요한계시록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계7:9)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의 스토리 이야기가 아니고 이게 실제가 되려면 반드시 이 이야기에 부합되는 분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해야 되고요, 그 죽는 죽음도 그냥 정치범으로 죽으면 안돼요. 어떻게 죽어야 돼요? 말씀 때문에, 말씀 해석 때문에 이게 갈등이 생겨서 돌아가셔야 돼요. 지금 그 작업을 요한복음6장에서 한다니까요. 이 땅에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렵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이제. 알아들으면 안돼요. 그러면 그 사람도 아들 돼요. 안돼요. 예수님만이 아들 되어야 돼요. 모든 사람은 최선을 다해봤자 결국은 예수님을 닭 쫓던 개로 그냥 따라가지를 못해요.

 

여기 62절 봅시다. 방금 한 이야기,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제자들이 수군, 수 군 했던 모양이에요. “어렵다. 어렵다. 가자. 가자. 가자. 이게 뭐하는 짓이고, 그냥 가자.” 전부다 가버리고 수군, 수군 했던 모양이에요. 지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 너희 눈에 내가 보이지?” “예, 보입니다.” “나중에 너희들이 내가 안 보이는 곳으로 갔을 때는 너희 어떻게 대처할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말씀이 더 어렵게 된 거예요.

 

“인간이 안 보이는 곳에 간다? 저 사람이 자기 하늘인가?” 어떤 사람 말대로.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는 이쪽과 이쪽을 다 보는데 사람들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다른 사람 보듯이 요 범위 안에 범주 안에 지금 갇혀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평가하듯이 예수님을 평가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평가하게 되면 평가가 도로 자기한테 오잖아요. 예수님을 평하는 것이 예수님을 평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던져보고 납득 안 되면 다시 자기 것으로 회수를 하는 겁니다.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자기 해석과 자기 판단을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예수의 말씀을 똑바로 해석해서 구원받자, 라는 것은 성경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경해석을 엉터리로 해서 지옥 가는데 우리는 성경 해석 똑바로 해서 구원받읍시다.”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그게. 인간에게는 똑바로 라는 해석이 없어요. 그러면 똑바로 해석을 못 하는데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지요. 다른 분이 나를 변호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주님하고 흥정할 생각마세요.

 

탕자가 아버지한테 재산 날리고 집에 오면서 아버지가 자기를 아들로 받아줄 것으로 생각했습니까?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안 했지요. 기껏 많이 해줘봐야 종으로만 불러주시면 황공무지로소이다, 이리되잖아요. 그러면 아들로 인정해줬다. 가락지까지 준비했다. 이것은 예상 못한 거죠. 예수님은 우리를 예상 못한 방법을 사용해서 구원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예상은 뭐냐, 평생 두고 살아보세요. 우리는 예상한 것만 생각하지요. 우리는 평생을 예상한 것만 예상해요. 주님의 구원은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그것을 포괄해서 말하기를 ‘새 언약의 완성’ 또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십자가’ 그리스도가 죽은 것 외에는 너희가 알지 않기로 원하노라. 그 말씀이 해당되는 겁니다.

 

십자가 또는 나는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노라, 또는 갈라디아서6장에 내가 십자가에 이미 죽었고 십자가 안에서 내가 산다.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 그런 십자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십자가 믿는 게 나의 행함의 일종이라니까요. 아는 게 우리는 행함의 일종이에요. 요번 목요일 날 무슨 영화가 새로 개봉되고 다음 목요일에는 뭐다. 우리가 알잖아요. 아는 건 우리의 행함 지식의 일부에요. 십자가 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능력으로 구원받지요.

 

십자가능력으로 구원받기 위해서 십자가 안다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오늘 알은 것은 내일 되면 깨져야 되지요. 내일은 모레 되면 깨져야 되고. 그런데 뭘 아느냐, 늘 깨고 계시는 그것이 바로 주의 십자가능력입니다. 익히 아는 십자가능력을 그걸 붙들고 있으면 우상이 돼버려요. “니, 십자가 알아?” “나, 알아!” 이러면 자기가 스스로 우상 숭배자가 됩니다. “그것도 모르나?” “그런 능력도 체험 못했어?” 이것은 자기가 교주가 되어버려요.

 

목사한테 싫은 소리 들었다. 대체 방법은? “니만 교주인가?” 이러면 끝나는 거죠. “니만 교주야? 나라고 교주 못해? 나도 교주할란다.” 그러면 되지요. 스데반 집사님이 자기 자랑했습니까? 빌립집사가 이디오피아 내시를 전도했잖아요. 빌립집사 그 이야기를 애들한테 하면서 저도 참 신기했는데. 멀쩡하다가 사막으로 가버려요. 현지 블레셋 가사 지역 밑으로 사막으로 간다고요. 주의 영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막에 누가 있다고? 도마뱀 만나러 가나? 그런데 저기서 먼지가 일어나요. 왠 마차가 들려요. 기막힌 타이밍을 보세요.

 

이쪽에서는 빌립집사를 보내고 저쪽에서는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하고, 그런데 이디오피아 내시가 그냥 가면 되는데 성경책을 폈네. 핀 대목이 하필이면 이사야53장이에요. “실례지만, 이사야53장에 이거 채찍 맞고 하는데 이게 누구지요?” 빌립집사가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지요. 그의 찔림으로 해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그것부터 시작해서 성경책 다 풀었어요. 그 땐 신약이 없으니까 구약 전체를 다 풀었습니다. 십자가로 해석을 다 해버렸어요.

 

십자가로 해석을 다 하니까 이디오피아 내시가 “여기 물 없습니까?” “물은 왜 찾는데?” “내가 어떻게 이 세례를 안 받고 그냥 가겠습니까? 본국에 가서 내가 전도해야 되는데 받고 가겠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줬어요. 그리고 난 뒤에 빌립집사가 어떻게 됐습니까? 거기에 25번 버스가 옵니까? KTX기차가 옵니까? 성경에 보면 주의 성령으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갔어요. 베드로, 고넬료 보자기 3번 내려오는 이야기는 물론이고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에요? 우리가 데려온 사람을 데려왔다고 해서 천국에 절대로 넣어주지를 않는다는 말이에요. 우리를 하청업체로 간주 안합니다. 동업 안 해요. 우리가 투자를 언제 했습니까? 모든 걸 주님 홀로 다 하셔요. 홀로. 홀로 해야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혼인잔치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을 초청했다. “에이~ 왜 아무것도 안했어.” “뭘 했는데?” “준비한 유니폼은 입었잖아.” 그거 입어줬다고 혼인잔치에 들어갑니까? 그거 입어줬다고? 준비된 유니폼 누가 준비한 건데요? 주님이 준비했잖아요.

 

혼인잔치에 와서 그 옷 입었다고 그걸 공로랍시고 내세웁니까? 우리가 십자가 믿게 된 걸 공로라고 내세워요? 십자가 믿게 된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데? 그것마저도 주님의 능력이라면 우리는 아무 능력 없이 그냥 당한 거예요. 그냥 갑자기 당한 겁니다. 인간 바뀌었어요. 그걸 뭐냐, 바로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이 ‘무’가 없음이 아니고 저주, ‘유’가 있음이 아니고 영생, 주님의 세계, 그 과정에 누가 들어갑니까? 과정이 중요해요.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예수님이 중보자로 여기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그냥 나,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반드시 뭘 경유합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요. 왜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입니까? 십자가에서 비로소 나의 모든 것이 죄였음을 주님이 보시기에 죄였음을 그리고 주님을 통해서 죄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주님의 의로 바뀐 것도 주님이었어요. 주와 함께 죽은 자는 주와 함께 살리라. 이것을 이미 확정 시켜 놓고 이게 왜 확정되었느냐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육신이 갖고 있는 죄를 여기서 발산하도록 그렇게 조치합니다.

 

죽을 때까지 오직 너는 너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라, 이 지독한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 지독한 이기주의가 되어라, 남의 자식 생각하지 말고 니 자식만 생각하고 니 가정만 생각하고 니 몸둥아리만 생각해라. 이런 명령은 이건 안 지켜도 돼요. 타고났으니까. 본성이니까. 이게 환경만 주어지게 되면 얼마든지 그런 모습은 내가 놀란다니까요.

 

분명히 옷 사고 돌아서서 옆에 있는 똑같은 옷보고 화나요. 분명히 여기서는 50만원인데 똑같은 제품이 여기서는 30만원일 때, “주여, 이런 징벌을, 제가 오늘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징벌을 주십니까?” 그게 원래 100만원짜리인데 50만원 탕감한 은혜는 모르고 옆에 부도나서 20만원 깎는 건 어디서 알아가지고 아는 게 화근이라. 우리는 매일같이 내가 얼마나 우수한가를 증명하는 식으로 24시간을 다 보냅니다.

 

그런데 중보자께서 그렇게 해놓고 거기다가 중보자께서 십자가 들고 들이밀게 되면 우리는 그렇게 죄지었다는 그 아픔이 뭐로 바뀌는가 하면, 환희와 찬양과 감사로 바뀝니다. 아이고, 나 같은 인간도 이게 되네요. 구원이 되네요. 나 같은 인간이. ‘아이고, 남들에게 이 이야기를 이 기쁜 소식을 어떻게 전하지? 아, 전하는 방법은 이렇구나!’ “나, 인간 아니다! 나, 인간 개판이야!” 이런 식으로 전할 수밖에 없지요.

 

63절에 봅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다시 말해서 “육 된 너희들아, 나 있는 곳에 육으로서는 갈 수가 없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육에서 뭐로 바뀌어야 된다? 영으로 바뀌어야 된다. 바뀌는 방법은 있다?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니, 육에서 영으로 되는 방법은 없다.

 

그러면 니고데모는 뭐라고 했습니까? “에이~ 있잖아요. 있는데. 나도 아는데.” “뭐?” “모세가 놋뱀 들었을 때 쳐다보고서 살았잖아요.” “모세 놋뱀? 그거? 놋뱀 아니야.” “그럼 뭔데요?” “그게 인자야!” 요한복음3장이야기입니다. 모세가 놋뱀 든 게 놋뱀 든 줄 알아? 인자가 들렸어! 인자가. 인자가 들려야 돼! 놋뱀 든 것처럼. 그러면 신, 구약의 모든 해석에 누가 삽입된다? 예수님이 다 삽입돼서 해석이 되어야 되지요.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삽입되어야 돼요. 왜 십자가냐? 십자가가 바로 새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모든 언약의 완성이 십자가입니다.

 

다 이루었다! 는 어느 자리에서 이룬 거예요?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예요. 십자가를 집어넣고 다 이루었다를 경유하기 때문에 이미 성도는 다 이룬 이미 합격해놓고 다 이루어놓고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가면서 느긋한 마음으로 “내가 무슨 죄를 또 지었는고 한 번 보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나 같으면 빵 얻어먹고 그냥 집에 갔어. 딱 나네. 또 내가 있네.” 늘 찾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성경 보면서. “바리새인이 딱 나네.” 바리새인은 이혼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다른 여자가 새로 생겨가지고 이혼을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느냐, 방법은 여자가 너무 반듯해. 어떻게 합니까? 이혼증서 하나 써주면 돼요. 법에 그게 맞으니까. 그게 얼마나 이기주의인 겁니까.

 

그런데 그걸 오히려 욕을 해요. 에이! 할 것도 없어요. 우리도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무슨 미인이 와가지고 빌딩도 있고 이러면 빌딩 없는 아내와 빌딩 있는 미인과…, 나쁜 생각, 나쁜 생각, 나쁜 생각. 나쁜 생각도 접을 수 없어요. 꿈에 나타나요. 그게 사라집니까? 본색이 육인데. 육은 절대로 본성은 죽을 때까지 나이90돼도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연세 많으면 인간 된다고요? never, 이건 절대로 안돼요. 네버, 이건 절대로 안 됩니다. 내가 장담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인간 같은 순간은 없었습니다. 위장술만 늘 뿐이지 변장술이 늘었다 뿐이지 속마음은 절대로 그 본성 그대로 가는 겁니다. 변화지 않는 인간의 죄, 죄 앞에 감사해야 됩니다. 왜? 변화지 않기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살리는 것은 영인데, 육은 무익하다 하거든요. 그러면 육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믿씁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자, 여기 한 번 봅시다. 65절에,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했지요. 성경 구절 다 떼어놓고 요걸 오리는 거예요. 요걸 딱 오려가지고 한 구절만, 예를 들어서 65절만 딱 오려가지고 액자를 만들어서 놨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집에 들어온 사람이 다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아버지가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갈 수 없다.’ 부정형으로 했거든요. 그러면 그 말을 줄여보면 ‘아무도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갈 사람이 없다.’가 돼요. 더 줄이면 ‘없다.’에요.

 

그게 뭐냐, ‘무’에요. 무에서 없는데 천국에 아브라함이 도착했잖아요. 아브라함, 엘리야 갔잖아요. 갔다면, 그 중간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없다고 하신 분이 개입했기 때문에 그래요. 없다! 없다! 하시면서 우리를 천국에 넣어주신 거예요. “없다! 믿나?” “예, 믿습니다.” 이러면 안 돼요. 없다를 믿어버리면 없다를 믿은 게 공로가 되어버려요. 우리가 없다고 했지만, 내가 마중을 나가서 있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한 짝꿍이 되어서 구원받는다.

 

그런데 이 있다고 한 것이 나중에 치매 걸려가지고 예수님이 누구지?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정신 말짱할 때는 예수 믿습니다. 하고 사도신경 잘 외우다가 나중에 치매 걸려가지고 “실례지만, 예수님이 누구지요? 아저씨 누구에요?”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할래요? 자기 아들보고 “아저씨, 보고 싶어!” <폭풍속의 여자>보면 거기에 나와요. 치매 걸려서 “아저씨, 누구예요?” 저 사진은 누구사진인지? 어떻게 하려고? 치매 안 걸리면 되지. 60넘어보세요. 깜빡하는데요.

 

놀라운 사실은 젊은 때는 내 몸이잖아요. 60, 70되면 내가 몸에 끌려가고. 몸이 내 자아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의 지배를 받아서 정신 같은 게 몸의 컨디션에 따라서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그 때 자아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쓸데없는 하나의 곁가지 같은 있으나 마나한 자아에요. 그렇게 젊을 때는 자아 자존심 하다가 나이 많으면 자존심이고 뭐고 자식 앞에서도 옷 벗고 이건 없어요. 원래 그게 우리 모습이 비로소 만천하에 공개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그런 존재. 주께서 불쌍히 보시고 그런 인간이 뭐라고 변호해 주셔서 “우리 변호 자가 계시니.” 라고 우리는 치매 걸리기 전에 미리 성령 받아가지고 “내가 사는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고백이 고백되어지도록 지금도 그렇게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는 협약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개입하지 마세요. 우리가 그냥 당하세요. 구원 당해버리고 영생 주시거든 그냥 받으세요. 왜? 내가 끼어들지 마세요. 아버지하고 주기로 약속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택배오거든 그냥 받으시고 주께서 죄인 되게 하시거든 십자가를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행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방적으로 다 했는데 할 게 남아있지 않는데, 우리는 아직 죄 성이 있어서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협조했습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이 죄, 그것마저 죄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