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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7장 1절 / 길 / 150604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7장 1절 / 길 / 150604

정인순 2015. 6. 5. 10:23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공은주

가락-요한복음7장1절(길)150604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7장에서 예수님께서 서서히 이제 행동에 나서십니다. 절기 초막절에 자신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제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집단적으로 활동이 파급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핍박 같은 게 오지를 않지요. 그러나 정치적 집단과 만나게 되면 거기서부터 그쪽에서 숨겨진 힘이 노출이 돼요. 예수님이 개인을 만나면 개인의 숨어있는 죄 성이 나오지만, 집단이 만나면 집단을 아우르게 그렇게 배후에서 세력을 발휘했던 숨겨진 조정세력들이 예수님 앞에 발작을 일으키듯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주께서 만들어지는 게 뭐냐 하면 길입니다.

 

요 길이라는 말을 제가 썼는데요, 좁은 길이지요. 예수님이 길을 만드시는데 길을 만든다는 말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말은 “길이 있다. 어느 길로 가면 되지?” 이게 우리한테는 편해요. 왜냐 하면, 어차피 평지가 있으면 길이 생기게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만든 길은 분명히 땅은 있는데 길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러면 길은 어떻게 만들지요? 주님의 몸짓이 길이 되는 양식으로 이제 개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뭐 이 명박 대통령이 했던 것처럼 그냥 불도저로 앞장세우느냐, 아니에요. 길은 어디서 나왔느냐 바로 사탄과 마주치는 그 틈새가 길이 되는 겁니다.

 

<샌 안드레아스>라 하는 영화를 개봉 날 조조보고 내가 올렸던 글이거든요. 샌 안드레아스가 사람 이름인 줄 알았더니 그 영화를 보니까 그게 단층,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로 이어지는 지진의 약한 취약 된 단층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안 오시면 이 세상은 그냥 세상이에요. 그런데 예수님 오시면 단층이 생겨요. 단층이 생기면, 지진이 일어나면 땅과 땅이, 영화에 보면 오렌지 밭이에요. 오렌지 밭인데 지진이 일어나니까 이 지진이 오렌지 밭 같은 거 고려합니까? 안 합니까? “아이고, 이 오렌지 밭에 내가 관통하면 안 되지. 농사지은 사람에게 미안하게.” 피해가고 그런 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완전히 밭 한 가운데를 협곡을 만들어놔요. 쫙 갈라져버립니다. 균열이 생겨버리는 거예요. 균열이.

 

예수님과 마귀의 이야기는 사실 영적인 영역이지요. 그것이 바탕이 되어있어요. 바탕위에 살포시 얹어놓은 것처럼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구축한 사회가, 공동체, 이런 게 얹어져있다 말입니다. 그러면 이 위 사회에서의 힘은 구성원들끼리 모이는 결집력과 단결력으로 되겠지요. 교회도 마찬가지고. 교회가 단결하고 결집하고 그러잖아요. 교회끼리 축구대회, 배구대회하면 결집이 잘되잖아요. 체육대회, 단합대회 하게 되면 잘되잖아요. 놀러간다 하면 잘 하잖아요. 그런데 놀러갔는데 눈치코치 없는 사람이 와가지고 복음이야기 해버리면 이 놀러간 교회가 둘로 단층을 이루겠지요. 여기까지 와서 영적이야기 해야 되겠나, 이리 되지요.

 

영적 이야기가 이 안에 인간들의 결성으로 다져진 이 지평을 지진을 일으켰다면 이것은 밑에 뭐가 있다? 영적인 단층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지역에 평범한 오렌지 밭이 갑자기 둘로 나누어졌다면 이것은 눈에 보이는 지형과 땅과 그 위에 사는 인간이 현실의 전부 이겠어요? 아니겠어요? 전부가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어디 석가모니처럼, 공자처럼 좋은 말 했습니까? 아니면 귀신을 쫓아내는 거예요. 귀신을 쫓아냈잖아요.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은 언어로 집결된 인간이 좋은 말만 하면 결합이 되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아는 인간 현실 그 바닥에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귀신이라는 것이 상주하고 있다는 것이 폭로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은 마태복음12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이미 하늘나라의 권세를 가지고 왔다는 뜻이거든요.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은 귀신을 심판한다는 뜻이에요.

 

귀신은 악마 이외에는 지시, 명령을 받지를 않아요. 귀신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악마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귀신은 누구의 힘에 의해서 삽니까? 악마의 힘에 의해 사는데, 악마 외에 다른 힘으로 귀신이 꼼짝 못하고 쫓겨났다는 말은 예수님이 누구보다도 세다는 뜻이에요? 악마보다 힘이 더 세잖아요. 누가 주를 이기겠는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것처럼. 세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간단히 이런 뜻입니다. 내가 쥐고 있는 게 다 날아가도 허허 주님 잘하셨네요. 그게 예수 믿는 거잖아요. 왜? 내가 쥐는 것은 내가 너무나 꼭 쥐고 있기 때문에 안 놓치는 법인데, 나보다 누가 더 셉니까? 주님이 더 세지요. 예를 들게 되면, 열심히 새벽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애가 몸이 아프니까 건강케해주세요.” 열심히 기도한다 말이죠. 그러면 병 낫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한다는 말은 그 아줌마는 어디에 매여 있느냐 하면, 병들면 나는 겁낼 거야, 라는 두려움 속에 있지요. 애가 병이 안 낫고 계속 아프면 나는 어떻게 살지, 라는 두려움이 늘 있지요. 그러니까 그 아줌마는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믿어요? 안 믿어요? 전혀 안 믿고 있지요.

 

제가 어제 수요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내입으로 기도시작해서 마지막에 예수님이름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다?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그 자체가 기도 응답이에요. 따로 기도 응답이 필요 없다니까요. 처음 할 때만 기도응답 있겠지요. 우리 애가 건강한 모습으로 오는 것을 상상해가지고 그게 기도 응답이라고 내가 챙겨야지. 이런 게 있겠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해서 덮쳐버리면 이 기도 응답이 되던 안 되던 애가 죽던 말든 그것은 내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고 주님께서 유발시킨 일이라는 것을 믿어진다면 이미 그 사람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응답 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아프게도 하시고 건강하게도 하시고 특히 사람들이 기대하는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직장 되게 하시고 쫓겨나게 하시고 아직도 못 들어가게 하시고 이력서 내도 소용없게 만드시고 믿는 믿음이 그렇게 티가 나는 거예요. 환란과 핍박이 이렇게 티가 나는 거예요.

 

하여튼 예수님의 믿음은 내가 기대한 믿음을 손 털 때까지 계속 작용합니다. 멀쩡한 산이 빠져서 바다에 옮긴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뭐를 잘못되게 상상하느냐, 주의 믿음의 능력이 임하면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질 것이라고 상상하거든요. 그게 믿음 좋은 게 아니에요. 산이여, 바다여, 들으라, 바다에 빠져라, 이거 성사했다고 믿음 좋은 게 아니에요.

 

“산들어서 바다에 빠지는 게 내 소관 아니지.” 이게 믿음이라니까. 산이 들려 바다에 빠지든 산이 그대로 있던 어쨌든 거기서 손 떼는 게 믿음이에요. 손 떼는 게 믿음이고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하나님의 일이란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하면 주께서 그렇다 하면 그런 거예요. 뭐 사람이 어떻게 마십니까? 그거 따지지 마.

 

현정화가 라면 먹고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땄다. 라고 넘버3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그 부하가 뭐라고 합니까? “형님, 현정화가 아니고 임춘애인데요.” 하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아!” 말을 더듬으면서. 내가 그렇다 하면 그런 줄 알아. 어딜 니가 따져. 송 강호 나오는 <초록 물고기> 유명한 대사 아닙니까. 말을 더듬으면서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예요.

 

성경 끝났어요. 성경 해석 모든 해석이 끝나버린 거예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누가 하신다? 누구 일이다? 주님의 일이지, 내 일은 아닌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 보면서 원하는 게 있으니까 주제넘게 거기에 끼어드는 거예요. 믿음으로 끼어들어가지고 요걸 내 것으로 만들어보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이게 주님을 가리는 짓이 되는 겁니다. 비가 오든 안개가 끼든 다 누구의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이지요. 오늘 숨 쉬고 내일되면 숨이 멈춰도 누구 소관이에요? 주님 소관. 죽이든지 살리든지 주의 뜻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대해서 강력하게 거부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바깥에 있는 이 사회라는 것, 이것 말고 그 밑에 뭐가 있는가 하면 인간이 겁이 나서, 두려워서 못 이기는 게 있어요. 그게 바로 사탄의 힘입니다. 죽는 게 무섭고, 실패하는 게 무섭고, 성공 못하는 게 무섭고, 남들이 나보고 욕할까 싶어서 무섭고, 궁시렁 궁시렁 나한테 뒷말 할까봐 뒷다마 할까봐 무섭고, 아이고, 인간아, 왜 저래 사나, 욕할까봐 무서워하지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대시하는 것은 거지 나사로보고 욕해라. 돌 맞아 죽은 스데반보고 욕해라. 12제자보고 다 욕해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욕을 얻어먹거든 차라리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선지자들도 다 이와 같이 해서 천국에 갔거든요. 모세, 엘리야 변화 산에 나타났잖아요. 모세, 엘리야 변화 산에 천국과 함께 있는 건 부럽지요? 그건 부러우면서 그들이 어떻게 갔는지는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그들은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간 거예요. 주님주신 믿음으로.

 

주님 주신 믿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믿음이에요. 내가 만든 믿음은 믿는 나에게 도로 찾아오는 믿음이에요. 요건 신념이라 합니다. “아이고, 나 믿음 왜 이리 좋아.” 이런 거. 자기 주인을 찾아 도로 돌아오는 것. 그런데 주님이 주신 믿음은 주님이 누구십니까? 믿음을 주신 분을 찾아가도록 이끄시는 믿음, 능력, 이게 믿음이죠. 그걸 고린도전서에서는 은사라고 해요. 은사. 선물이라 해요. 선물.

 

애들 가지고 노는 요요 있지요. 던지면 다시 돌아오는 요요 있지요. 그것처럼 던지면 다시 나한테 돌아오게 되어 있잖아요. 주님이 던진 은사로 믿음, 소망, 사랑은 다시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에게 제자들에게 성도에게 주기 전에 먼저 되돌아오는 길을 닦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길을 몸짓을 하시는 거예요. 자기의 길을 가시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7장부터 시작이 됩니다. 7장부터 길을 가시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가는 그것이 곧 길이 돼요. 그러면 주님이 움직이기 전에는 길이 있었다? 없었다? 없어요. 뭐 여호와 믿고 이렇게 하면 천국 간다. 그런 사람들은 많았는데 길은 없어요. 길은. 그냥 아이디어만 있을 뿐이지. 이리하면 갈걸, 저리하면 갈걸. 그냥 길은 예수님의 하신 그 일로 길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인간이 가는 길은 요 윗부분에 사회적으로 또는 지형적으로 어떤 지명이나 또는 행동, 방법, 이런 것을 제시하는 게 길이라면, 주님의 길은 어디를 홈을 냅니까? 이 밑에 바닥에 있는 영적 세계 그러니까 사탄과의 관계위에 길이 내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가는 길에는 뭐냐, 나와 타인이 보이지만 나와 타인이 구분되지만, 주님 가신 길에는 예수님과 마귀로 갈라지게 되어있어요. 쉬운 예가 있지요. 홍해 같은 거. 홍해 같은 경우에 히브리인들이 갔을 때 지형적으로 물은 절벽이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는 길은 물이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길을 텄으니까. 물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 되겠지요. 이건 요단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궤 들고 중간에 들어가니까 홍수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스톱이 됐지요. 물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 되겠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길이 이상해요. 마귀가 있는 곳과 주님 가신 길로 길이 나와져있습니다.

 

성도가 가는 길에는 성도가 기대하는 어떤 일이 잘 풀리는 게 아니에요. 다만, 마귀가 자기 정체를 폭로하는 그런 절벽길이 나올 뿐이에요. 성도가 가는 길이 건강하고 잘되고 사업 잘되고 그런 길이 아니고 숨어있던 마귀가 톡 튀어나와서 얼굴을 내미는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고 길이 주께서 이끄시는 좁은 길이 되는 겁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예지만, 쉽게 말씀드리면 낮에 공동묘지로 가는 길은 그냥 억새풀이 있고 가끔가다 장미도 피어있고 시원한 버드나무 그늘이 있고 고 가는 길에 끝에는 공동묘지가 볼록, 볼록한 묘들에 참한 잔디가 있고 그게 낮에는 공동묘지가 그 길이에요. 그런데 비가 부슬, 부슬 오는데 밤12시 넘어서 오는 그 길은 누가 나옵니까? 죽은 귀신이 나오는 길이에요. 말도 안 되는 예지만, 쉬운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억새풀 안 보여요. 개인택시 하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게 비오는 날 공동묘지 데려가 달라는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휙 뒤돌아보면 하얀 소복입고 있어요. 머리는 길어가지고. 차에 탔는데 비는 다 젖어가지고. 흰옷 입은 긴 머리는 분명히 차비 안 낼 거예요. 그거보고 2만원 나왔습니다. 하면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는 게 요한복음7장인데, 마귀가 정체를 드러내는 시작입니다. 영적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영적 세계에 들어가는데, 개인적으로 귀신 쫓아내는 경우는 앞에서 많이 있었고 마태복음에 많이 있거든요. 그러면 7장부터는 뭐냐, 집단적으로 본격적으로 귀신 말고 악마의 아지트로 출교를 해요. 그 아지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아지트에서 축제가 벌어집니다. 절기 가운데서 제일 마감하는 하이라이트 절기를 가지고 초막절이라 합니다. 초막절.

 

여기1~2절 봅시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지 않고 베들레헴에 돌다가 드디어 초막절로 개시를 해가지고 예루살렘에 드디어 이제 등장하십니다. 초막절과 이 악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생각이 들겠지요.

 

자, 제가 아까 강의할 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6장마치고 7장에 와서 길 만든다 했지요. 그 길은 평지에 나와 있는 인간들이 이해하는 이런 길이 아니고 인간들이 미처 모르는 영적세계를 가로지르는 길이 나온다고 방금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 가신 곳에 마귀의 본색이 드러나는 겁니다. 악마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악마의 본색이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도대체 악마는 존재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악마의 존재가 이유가 있는데요, 악마의 존재가 이유가 뭐냐, 욥기에 있어서의 악마가 등장하면서 했던 역할이 있어요. 하나님 편에 서있는 욥을 비난하기. 지적질 하기가 이게 마귀가 해야 될 역할입니다. 성도를 고소하는 일을 해야 돼요. 여러분 자신이나 혹시 남들이 여러분을 비난할 때는 마귀가 한다, 이리 보면 돼요. 마귀는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뭘 비난하느냐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예수를 비난해요. 그래서 예수 안 믿으면 마귀한테 비난 받을 일이 없어요. 왜?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을 바쁜 존재가 뭐 때문에 자기 편인데 비난하겠어요? 베드로기 때문에 매일 달라고 하는 거예요. 우는 사자같이 헤매는 이유가 뭡니까? 누구를 공격하기 위해서? 택한 백성 낚아채려고 그렇게 계속해서 여러 가지 시험하잖아요.

 

마귀가 우리가 겁나고 우리가 무서워서 달려드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시비 거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요,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을 겨냥해서 내게 달려드는 겁니다. 뭐하기 위해서? 청구하기 위해서. “내놓으세요.” 청구가 뭐냐 하면, 내놔라, 라는 거죠. 주님 품안에 있는 인간이지만, 내가 가지고 가야겠습니다. 내놓으세요. 그 역할을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마귀는 성심 성의껏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겁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돼요.

 

왜 그런 노력을 하여야 하는가 하면, 그래야 주님과 붙어있는 것이 내 힘으로 붙어있지 않다는 것을 성도로 하여금 되새겨서 깨닫게 하는 그러한 보조적인 역할을 마귀가 해줘야 됩니다. 내가 믿음 좋아서 붙어있고, 내가 신앙 좋아서 붙어있고, 믿음이나 신앙이나 같은 거지만, 소망과 이런 것 때문에 내가 열심내서 복음 잘 전해서 붙어있고, 내가 착해서 붙어있고 이러한 코딱지 같은 거 다 떼어내기 위해서. 다 떼어내야 돼요.

 

부산에 부둣가에 가면 옛날 고물 배를 페인트 칠해가지고 다시 새 배 만드는 수선하는 공장들이 있답니다. 그런데 그 아르바이트가 굉장히 힘들데요. 녹슨 그 벽을 다 벗겨내야 된답니다. 마귀가 보세요. 얼마나 고생합니까? 천국 가지도 못하면서 교회 붙어있는 인간들, 주님한테 붙어있는 인간을 녹을 떼어내는데 마귀가 와서 떼 내어 주지 않으면 우리가 나가라고 해도 안돼요. 제발 좀 교회 떠나주세요. 해도 안 떠나요. 복음만 전해보세요. 24명 가운데 몇 명 남는지 몰라. 복음만 전하면 돼요. 알아서 다 떨어져요. 자석이 그렇잖아요. S극하고 N극이 밀듯이 주님이 등장하게 되면 이것은 집단적으로 주님을 공격합니다.

 

바라바를 원하느냐, 아니면 예수를 원하느냐, 의외의 투표 결과가 나왔지요. 만약에 예를 들어보세요. 만약에 우리가 그 현장에 있다면 우리는 어느 쪽에 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예라고 할 때 나 혼자 노라고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못하지요. 눈치 보는데. 아이고, 나 혼자 아니요 라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투표가 이미 과반수 넘어갔는데. 가만히 있자. 내 몸만 살자. 이리 나오지. “아닙니다. 예수는 그럴 분 아닙니다.” 손 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도대체 어느 안전에서 누구 앞에서 함부로 손을 들어요. 죽을라고.

 

아예 베드로 같이 자진해서 나 저 사람 모른다고 아주 미리 당겨서 지가 알아서 긴사람 있잖아요. 귀순한 사람 있잖아요. 예수님 쪽에서는 배신이지만, 저쪽에서는 뭡니까? 귀순용사지요. 마귀가 셉니다. 아담의 족속은 누구도 못 이겨요. 불순종의 영들의 지배 앞에서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길 수가 없어요. 목회를 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 게임은 애초부터 안 되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은 백발백중 실패할 게임이에요. 멀쩡한 홍해바다 갈라진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모세 빼놓고 전부다 반대했어요.

 

모세가 홍해 가까이 딱 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죽을 데가 없어가지고 공동묘지, 집단 자살하는 곳이 기껏 여기구나!” 그들의 아이디어는 그들이 평소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기억만 들어있어요. 기억은 재탕입니다. 기억은 새로운 게 없어요. 기억은 창조가 아니에요.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모세도 홍해가 갈라질 생각도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지시를 할 때, 지시하는 그 순간까지 바닷물이 갈라질 줄은 몰랐지요. 지팡이를 대니까 지퍼도 그런 지퍼가 없어요. ykk지퍼 같아요. 쫙 열렸어요. 모세가 지팡이 끝을 봤는가. 뭐 이런 게 다 있어. 지팡이에 뭐 있겠어.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뿐만이 아니고 모든 일, 모든 기적이 인간의 아이디어 속에 없습니다. 인간의 지금껏 경력과 한계 속에는 없어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자기 힘을 보탤 수가 없게 돼있어요. 내가 힘을 보탠다는 것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내 소유의 힘을 보태는 건데 그것 보태면 천국이 얼룩이 생겨서 안돼요. 때가 묻어서 안돼요. 차라리 세리나 창녀나 강도처럼 차라리 뻔뻔스러워야 돼요. “저 창기인데 주여 되지요?” “되고말고.” 그리 가면 돼요. “저 강도인데 오늘 밤에 응?” “뭐?” “에이, 아시면서.” “그래, 니 오늘밤에 낙원에 있어.” 이거 아주 간단하게 끝났어요. 세상에 바위하고 협상해도 그런 협상이 없어요. 너무 수월하게 계약돼 버렸어요. 왜? 그 뻔뻔스러움 때문에 구원하신 거예요.

 

강도가 내 것 없이 간다는 걸 알았어요. 강도의 믿음 대단하지 않습니까? 내 것은 쓰잘데기 없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평생 동안 살았던 나의 착함, 선행 심지어 악함, 선행도 포함 안 되고 악했다는 것이 구원에 전혀 구원에 방해 안 된다는 사실을 누가 알겠어요. 나의 죄가 나의 구원에 전혀 지장되는 요소가 아니고 장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가 받아들이겠어요.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믿겠어요? 그걸.

 

그러니 이게 기쁜 소식이지요. 희년은 기쁨의 해가 되겠지요. 어제 수요설교에서 했잖아요. 기쁨의 해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심지어 도박하다가 재산 날린 사람들. 그 다음의 해가 희년이라, 날린 재산 그대로 들어와요. 다 돌려받아요. 세상에 뭐 이런 일이 다 있습니까? 그게 복음이에요.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게 공짜가 아니에요. 우리가 못하는 것을 주께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다 이루신 거예요. 문제는 이겁니다. 예수님이 왜 육신이 필요했던가, 하는 그 문제거든요. 상당히 어려운 문제에요. 예수님이 왜 육신이 필요합니까? 육신은 죄 있는 아담의 계통인데. 로마서8장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왔거든요. 육신이 왜 필요할까요?

 

예수님의 본인 개인 구원 문제가 아니지요. 예수님은 개인이 혼자가 주가 될 수가 없어요. 만인의 자기 백성들의 주가 되어야 돼요. 자기백성들의 주가 되려면 자기 백성을 자기가 생산해야 돼요. 생산하려면 그들이 있는 곳까지 찾아와야 됩니다. 그들이 있는 곳까지만이 아니고 그들이 있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지역에 있는 게 아니에요. 마귀 권세 아래에 있어요. 에베소서2장2절에 의하면 불순종이 작렬하는 그 아래에 있어요. 쉽게 말해서 지옥 아래에 있어요. 주님은 시원한 천국에 사신 분이 지옥의 뜨거운 것을 맛볼 하등의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마는 죄 속에 들어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죄 속에 들어오게 되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봐주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죄 속에 들어온 이상은 죄 값을 똑같이 주님한테 묻게 되어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광야에서 만나고 난 뒤에 마귀가 노리는 건 이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당신도 다른 사람처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기를 유혹했지요. 악마가. 기존에 인간들이 살았던 방식을 원했던 겁니다.

 

기존의 인간이 사는 방식은 인간에 방식이 아니고 마귀가 이미 정신적으로 심어 넣어준 방식이에요. 사람은 떡 없이는 못산다. 사람은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 세 번째는 인간이 결국 노리는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다. 인간은 여기서 못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고 벗어날 마음을 아예 먹지를 않지요.

 

아침에 눈을 떴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갑자기 부귀영화가 방안에 있다. “에이 씨, 오늘도 재수 더럽게 없네.” 이렇게 이야기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아~~ 정말 왜 이러지. 나 정말 이런 식으로 살기 싫은데. 아이고, 지겹다 다이아몬드 지겨워. 5캐럿 정말 지겹다. 정말. 차고 무겁기만 하고.” 이런 거 없어요. 그것도 사람이 떡으로 산다. 아침에 문을 여니까 짬뽕, 자장면, 탕수육, 요기요를 했는지 배달통을 했는지 줄줄이 족발부터 있는데, 대부분 밥하기 싫은데 잘됐다. 설거지도 안하고 알아서 가지고 가고. 이렇게 생각하지. ‘아, 언제까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문을 여니까 웬 소녀 팬들은 많은지. 엑소 하면서, 오빠 하는 인기가 감당을 못할 정도로.

 

두 번째 시험이 그거잖아요. 당신이 뛰어내리면 인기 있을 거고 메시아 기능을 수월하게 된다고. 당신이 그거 하려고 왔잖아. 한 번 딱 뛰어내려봐라, 천사가 딱 받쳐봐라, 당신은 완전히 당신의 업무는 막 되는 거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3절에.

 

3절 읽어보세요.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보세요. 배 다른 형제지만 형제들이 그렇게 조언하잖아요. 아, 이런 인재가 촌에서 숨어있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갈릴리라는 하는 곳은 어디냐 하면, 이스라엘 지형이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여기가 지중해이고 밑에서부터 올라옵니다. 요단강이 여리고성하고 마주하는 게 예루살렘이에요. 산지가 있고 중간을 계곡이라 하고 구릉지고 해안평야고 이렇게 돼요. 요 산지에서 죽 올라가면 화살표 모양의 이스라엘의 평지가 나와요. 갈릴리 호수가 있고 데가볼리가 있고. 이스라엘, 사마리아 이렇게 있어요. 있는데 이 갈릴 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평지가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말이 맞아요. 평지에서 올라가니까.

 

예루살렘은 850m에요. 높이가. 예루살렘에 맞은편에 감람산이 있다고 아까 말했지요. 주께서 기도하신 곳. 예루살렘에서 일하고 쉬기는 감람산에서 쉬고. 그리고 또 예루살렘에서 일하고 감람산에서 또 쉬고 이렇게 했어요. 체포되기는 감람산에서 체포됐지요. 기도 끝나고 난 뒤에 체포되어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야바하고 이렇게 그 당시에 제사장이 두 명이었는데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이고. 그렇다면 이곳은 시골이다 말이죠. 시골. 흑암이 거한 땅이고.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절기 때 어디로 와야 돼요? 갈릴리에 안 갑니다. 어디에 와야 돼요? 예루살렘에 온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지요. 성전에서 나와야 된다는 것은 이것은 이미 그들의 정신세계는 예루살렘이 중심이고 갈릴리 이곳은 별 볼일 없는 거예요. 시편의 모든 내용이 뭐냐, 메시아가 어디에 옵니까? 시온 산에 오거든요. 시온산은 예루살렘에 시온 산이 있어요. 모든 예언이 초점이 예루살렘 시온산 여기에 초점이 있는데 갈릴리가 어디서 티를 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빛은 움직인다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이 성경의 모든 시온 산이 예루살렘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예루살렘이라는 곳에 지정돼 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내가 예루살렘이니까 내가 성전이니까 움직이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경을 어깨에 메고 가신다고 보면 되는 거예요. 성경 전체를.

 

성경을 문자로 보면 어떤 특정지역이 있지만, 성경의 실내용은 누가 짊어지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지금 실천에 옮기고 있는 하나, 하나가 뿜어내는 모든 것이 성경의 완성입니다. 모든 개념의 완료가 되지요. 그것이 신약의 사도바울이 오게 되면 뭐냐 하면,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 안에 있어요. 천국은 어느 하늘에 있는가? 공간으로 묻는 게 아니에요. 공간으로 묻는 게 아니고 인격으로 물어야 돼요. 말이 참 어렵지요. 인격으로.

 

예를 들어서 “아버지, 내가 행복하려면 어느 집에 가야 됩니까?” 하면 아버지가 “니가 독립했다고 나가있지 말고 어서 내 집으로 들어오라.” 아침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많잖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천한 출신의 여자하고 살지 말고 재벌 된 아버지 집에 오면 행복 한다. 아버지 집에 오라, 하잖아요. 그런데 그 말을 우리는 알아듣는데 촌에 있다가 평창동이나 압구정동 아버지가 오라고 하면 이해가 되는데,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버지,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나랑 같이 살자.” 비슷한 말 같은데 차이가 나지요. “아버지, 집 몇 평인데?” “나, 집 없다. 같이 살자. 그러면 행복하다.” 이런 식이다 말이죠.

 

그래서 마귀가 이야기하는 세상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주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천국 백성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려면 뭘 포기해야 돼요? 우리 인간이 꿈꿔온 것이 세상에서 내 눈에 경험했던 것의 조립한 거잖아요. 아, 저 집이 좋아 보인다. 주여, 저 집주세요. 아, 저 사람은 너무 잘났다. 저 사람과 결혼하게 해주세요. 저 여자는 너무 예쁘다. 저 사람과 결혼하게 해주세요. 모든 게 이미 눈에 들어왔던 기억들을 중요한 것을 뽑아가지고 지 맘에 드는 거 뽑아서 이거 달라 하잖아요. 그렇게 모아놓은 게 잡동사니가 되고 쓰레기장이 되지요.

 

행복의 조건을 누가 만드는 겁니까? 행복의 조건을 자기가 만드는 거니까 복을 받는 게 아니고 복을 지어낸 셈이 되지요. 복을 창작한 셈이 되지요. 조각가가 지가 재료가지고 조각한 거와 똑같은 거예요. 지가 깎아가지고 지가 자기 얼굴 깎는 거예요. 이게 인생인데. 인생은 누구나 자기를 모델로 한 우상숭배자입니다. 왜? 모든 하는 짓거리 보면 자기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듬어놓은 하나의 가정도 그렇고 모든 대외적인 사업도 그렇고 전부다 자기 자존심을 가지고 자기 마음에 흡족하도록 그렇게 만든 거지요.

 

주께서 그거 치워버리고 니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아라, 그 집이 어디입니까? 그게 성령이 인도하는 예수님의 집이지요. 예수님의 집의 특징이 뭐냐, 예수님의 자존심만 있어요. 우리 자존심은 챙겨주지를 않습니다. 주님의 자존심이죠. 대표적인 것이 뭐냐, 바로 어떤 임금이 말도 안 되는 요청을 하지요. 임금이 자기 아들 혼인잔치 있다고 청첩장을 보냈거든요. 오지를 않는 거예요. 종들을 보내니까. 그 중에 아주 특이한 경우가 뭐냐 하면, 그 날짜가 하필이면 본인 장가가는 날이라. 아니 지 장가 놔두고 남의 장가 참석한다고 말도 안 되는 거죠.

 

그 사람들이 밭을 샀습니다. 소를 샀습니다. 장가를 가야됩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그들이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못 갈 수밖에 없는 사항이 딱 맞아서 그런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임금님의 아들 잔치보다도 이게 급선무라고 생각들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면 바빠서 못 오면 양보를 하던지 임금 쪽에서 날짜를 미루면 되잖아요. 임금이 왜 임금입니까? 아량이 넓어서 임금이지. 좀생이하고 똑같은 마음이 무슨 임금이에요. 그게 무슨 대자 대비한 겁니까.

 

그런데 보세요. 이 임금의 자존심 보세요. 안 왔다고 해가지고 군대를 풀어서 죽여 버렸어요. 거기다 웃기는 것은 놀고 있는 사람들을 강제로 모았잖아요. 임금이 지 자존심 기어이 세우려고. 아, 놀고 있는 사람을 모았으면 그냥 밥이나 주고 보내면 될 텐데 예복 안 입었다고 군대를 보내서 또 진멸하네요. 이건 조폭도 아니고 임금이 이상한 성질이에요. 예복을 안 입었다고. 그러면 사전에 놀고 있는 사람에게 미리 이야기를 하지. “이 중에서 예복 입지 않은 사람 들어오지 마세요.” 이렇게 하던지. 예복 입기 전에 미리 주의사항을 하던지. 예복 안 입으면 혼날 수가 있습니다. 미리 알려줘야 하는데. 미리 알아서 예복 입을 사람, 안 입을 사람 결정해 놓고 예복 안 입었다고 조저 버리면 도대체 임금 아들 결혼식인지 아니면 살육장인지 분간이 안 돼. 사람을 심판하는 장소인지, 임금의 축하장소인지. 변 사또 생일하고 춘향이 조지는 거하고 똑같아요. 아주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니까요.

 

도저히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적들이 인간으로서는 납득 정도가 아니고 거부하고 싶은 일들이에요. 그걸 전하세요. 녹슨 거 다 떨어지도록. 이것은 도저히 뭔가 잘해보려는데 그것마저 차버리는 거예요. 주님한테 잘해가지고 점수 따려하는 것까지 차갑게 밀어내잖아요. 강도되기 전에 오지마라. 창녀되기 전에는 오지 마. 탕자되기 전에는 오지 마!

 

예수님께서 하던 그 정치적인 집단, 그것은 바로 귀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진짜 귀신대장은 이슬에 맞듯이 우리의 현실에 장악하는 우리는 그의 일부 화된 그 상태 자체가 사탄의 세계입니다. 사탄의 세계에서 사탄을 찾지 마세요. 우리는 이미 거기에 푹 젖어있어요. 수박에서 물 빼고 주세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수박의 95%가 물이에요. 오이하고. 물 빼고 주면 수박도 아니고 오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귀신 빼내면 껍데기만 남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 먹을 것, 입을 것, 인기와 세상의 부귀영화 이것은 우리 자체가 완전히 수박이 물로 되어있듯이 우리는 아예 매일같이 하루 온종일 마귀 생각으로 우리는 완전히 푹 젖어있습니다. 짜면 마귀 생각만 주욱 짜여 나와요.

 

그걸 대신 짜주는 쪽이 있어요. 그 짜주는 일을 하는 쪽이 있어요. 그게 미디어 쪽이에요. 드라마, 프로야구, 프로축구, FIFA, 주식시장,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총괄해서 죽 짜면 다 귀신 나옵니다. 마귀 나와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푹 젖어 살기 때문에 그것 없이는 우리는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는 생각도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그것을 사는 거예요. 우리 한국 축구가 일본보다 인기가 앞서야 되고, 만약에 지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졌다. 하루 종일 이것도 결재야! 집어던져버려. 이번에는 분명히 두산이 졌을 거야. 그런데 갑자기 막 두산이 또 이겼어. 두산 베어들을 응원하는 상사라면. 우리의 모든 울음과 웃음, 행복, 기쁨, 슬픔, 이건 마귀가 던져준 미끼에 따라 조종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걸 불순종의 역사하는 영들 속에 우리는 꼭두각시처럼 살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그것 말고 다른 세계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지금껏.

 

공부하는 것, 사는 것, 모든 것이 오직 내가 원하는 것을 현실화되는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한 가운데 그 집단화된 마귀의 왕국에 주님께서는 나올 수 없는 길을 만들어요. 길을 만들려면 마귀의 세력이 흠집이 나야 되잖아요. 그러면 유대나라라는 이름의 사탄의 왕국에서 사탄이 인간에게 심어준 종교가 허울 진 가치관입니다. 그 궁극적으로 심어놓은 그것이 뭐냐, 그것이 바로 2절에 나옵니다. 유월절의 명절인 그 다음에 무슨 절이 되지요? 초막절.

 

자, 초막절은 모든 유대 가족들을 집결하는 그러한 정신적인 중심 절기로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일 끝 절기거든요. 제일 첫 번째 절기가 뭐냐 하면, 유월절이지요. 마지막 절기가 뭐냐 하면, 초막절이에요. 이스라엘의 가장은 3번 올라가게 되어있습니다. 유월절 한번 올라가고, 맥추절 한 번 올라가고, 그 다음에 초막절에 올라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약간의 세분화되면 요 3개가 5개가 돼요. 유교절 다음에 무교절, 초실절, 맥추절, 오순절, 7월1일 나팔절, 7월10일 속죄일, 그 다음에 하는 초막절이 7일 동안 시작돼요. 맥추절과 오순절과 수장절은 같이 보면 됩니다. 초실 절이라 하는 것은 유월절하고 무교절하고 같이 보면 돼요.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어쨌든 절기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죄를 위해서 희생물이 희생하는 장소를 들여다봐라. 그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10분 쉬고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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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7장1절(길)150604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절기라 하는 것은 왜 남자들이 세 차례 모여야 되느냐 하면, 원래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에 그 죽었던 양이 있잖아요. 양이 바로 그 장자를 대신해서 했던 겁니다. 그리고 양 때문에 살았던 그 장자는 가정의 소유로 돌아가지 않아요. 한 가족이 살겠지만. 뭐냐 하면, 전부다 그리스도에게 바친바 되는 겁니다. 그러면 출애굽 당시에 양이 바쳐졌지요. 양의 운명을 누가 담당해야 된다? 그 집에 대신 살았던 장자가 그걸 담당을 해야 돼요. 그러면 장자는 장자이어야 되지 다른 사람은 안돼요. 장자는 1년에 3번씩 양의 죽음을 크게 확대시킨 성전이 있는 곳, 1년에 3차례씩 방문해서 세미나를 받아야 돼요. 누구한테? 제사장한테.

 

거기서 제사장은 죽음과 관련된 일을 하지요. 백성들이 제물을 가지고 오면 안수해가지고 죽음의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는 곳으로 밀어 넣습니다. 제단이죠. 그 제단의 불에 의해서 타버리고 타버리면서 몸체는 타고 그 다음에 뭐는 남고? 피와 기름은 남고. 이 피와 기름은 어디에 뿌려집니까? 그 뒤에 제단에서 더 들어가면 있는 천막 쳐 있는 그 성막에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는 그 앞에 뿌립니다. 특히 1년에 한차례씩 수송아지를 가지고 언약궤라는 황금으로 입힌 그 상자, 천사조각으로 되어 있는 그 상자에 그것도 서쪽이 아니고 동쪽에다가 피를 뿌리게 되어있어요. 7번 뿌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피는 나중에 물체만 뿌리는 게 아니에요. 제사장 자기 몸에도 기름과 피를 뿌립니다. 오른 귀 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 거기다가 뿌리게 되어있어요. 그럼 만약 오른발 엄지가락이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신체에 흠 있는 사람 안 됩니다. 탈락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물체든지 사람이든지 성소라는 지역에 있는 것은 기름과 피로 범벅이 되지 아니하면 도무지 하나님과 동행해서 살 수 없음을 언급합니다. 거기에 있던 제사제도는 무엇에 집중하는가 하면, 율법에 집중해요. 율법을 전부다 압축을 시켜놓으면 제사가 나옵니다. 한마디로 피가 나와요. 피가.

 

모든 언약의 완성은 예수님의 피와 살이지요. 예수님의 피 입니다. 그걸 신약에서는 히브리서에는 피언약이라고 해요. 피 언약(히9:20). 피언약이니까 피 언약으로 해서 모든 율법이 거기에다가 집중돼 있지요. 그러면 반대로 말해서 피를 펼쳐버리면 거기서 뭐가 다 나옵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가 다나오지요. 그러면 성경해석 어떻게 해야 돼요? 피로 시작해서 피로 마감되어서 피가 나와야 되겠지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십자가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마감되는 설교 그게 복음입니다. 그걸 언약의 완성이라 하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 부활이라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본격화하기 위해서 부활이라는 새로운 영역 환경을 조성한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만약에 저는 술집에 안 가봤지만, 술집에 보면 안주가 나온대요. 안주에 보면 이만한 쟁반에 과일도 몇 개 해놓고 3만원 받고 5만원 받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안주를 가지고 왔는데 안주는 하나도 없고 쟁반만 나오면 안 되지요. 쟁반은 뭘 담아내잖아요. 쟁반이 부활이고 담아내는 내용이 뭐냐 하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나 십자가나 공통점이 뭐냐, 시간이 정지되어있어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 안에 시간이라는 게 없습니다. 뭉쳐져 있어요. 시간이 멈춰져 있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3장1절에 보면,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할 때 그 십자가가 도대체 시력이 얼마인데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봅니까? 십자가 사건은 이미 25년 전에 지나간 사건인데. 십자가가 보인다니? 안개 낄 때는 안 보이다가 안개 안 낄 때는 멀리 보이는 것이 십자가입니까? 그것 때문에 십자가 마구 심어놨어요? 공간적으로 십자가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시간적으로 십자가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그 십자가 어디 보인단 말입니까?

 

아까 이야기했어요. 주께서 길을 만들어놓으면 그 길은 어떤 길이다? 무엇의 내부를 갈라놓는 길이라 했습니까? 사탄의 세계에 영적 세계를 갈아놓는 길이지요. 그 길을 가는 성도는 뭐가 보입니까? 십자가만이 사탄에서 불순종에 의해서 이겨난다는 사실이 보이지요. 그래서 누가 너희를 꾀이더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해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있던 그 공생애를 지금 현재화시켜 버립니다. 예수 안에서는 그게 시간이 멈춰져있어요.

 

바깥 세계에서는 시간이 흘러가도 안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그래서 영생은 시간이 끝난 뒤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생은 시간 안에 있어요. 시간 안에 영생은 거기서 분투하고 있습니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어요. 공간 안에 그리스도가 있어요. 그리스도 세계가 있어요. 공간인 듯 공간 아닌 공간 같은 공간, 하늘나라 그 안에 있어요. 천국이 그 안에 있습니다.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것을 시간과 공간으로 말하지 않고 인격으로 말했지요. 뭐냐, 예수 안에서.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사도바울의 모든 표현은 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나니,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었나니(롬5:21), 하늘나라는 뭐라고요? 성령 안에. 하늘나라는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느냐 묻지 마세요. 성령 안이 시간과 공간을 대변해주고 있어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제가 지금 신비주의를 말한 게 아니에요. 로마서 14장17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러니까 이걸 듣고서도 어딘데요? 예루살렘입니까? 지금 저기 비행기 타고 가야 돼요? 주님 거기 오십니까? 이리 묻는 게 아니에요.

 

구약에 나온 절기가 신약에 완성을 언급할 때는 그러한 시간과 공간도 겸하여서 언급이 되면서 이게 완성이 되어야 돼요. 구약에 있던 시간과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약에 절기를 예수님 안에서 완성했다하는 것은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시간과 공간 자체가 예수 안으로 달려들었어요.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졌다 했지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이게 죽음입니다. 그렇잖아요? 죽음. 예수님의 죽음이고 또 성도의 죽음이고. 예수와 성도가 함께 죽는 죽음이 십자가지요. 주님과 함께 죽을 때, 주와 함께 산다. 로마서6장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주님이 계시고 인간이 자기가 여기서 죽음에 들어갈 때 뭐도 들어가겠어요? 시간과 공간 개념도 같이 들어가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서 죽게 되는데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게 죄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죽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이 아는 시간과 공간개념이 뭐다? 이게 죄의 일종이 되는 겁니다. 이것도 죄의 양태가 돼요. “언제 오십니까?” 이것은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잖아요. “주여, 그 때가 언제니이까?” “언제 오십니까?” 주께서 대박 타박을 하지요. “너희들이 알바가 아니오!” “그래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성령이.” “성령이 올 때가 그 때입니까?” “그 때가 그 때가 아니라니까.” 성령이 올 그 때가 그 때가 아니에요. 인간이 대기하고 있던, 인간이 생각하고 있던 그 때하고 성령 때가 달라요.

 

성령이 오게 되면, 기존의 때는 무의미하게 돼버려요. 내가 성령 받을 때와 구원받을 때가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구원받지 성령 받을 때가 구원받는 시점이 아니에요. 그런 것은 유 병언한테 물어요. 유 병언은 죽었잖아요. “당신은 구원 언제 받았습니까?” 이건 묻는 게 아니에요. 시간과 공간을 따지면 안 되고 누가 구원시켜 주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가. “누가 구원시켜 주던가요?” “그래도 누가 구원시켜 주거든 때와 장소가 있을 게 아닙니까?” “커피숍에서 구원받습니까? 설거지하다가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오후7시에 구원 받았어요?” 이건 사주보는 것도 아니고. “애 언제 태어났습니까?” 사주 보려고. 그게 아니고 성령의 때가 오게 되면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이것이 무의미하다는 것.

 

우리가 알고 있던 시간과 공간의 때를 차버리고 밀어내고 시간도 공간도 없이 그냥 온 것을 가지고 디모데후서(1:9)에 보면 창세전에 아버지가 나를 선택했다, 나오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자기 뜻과 영원한 때, 그 다음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했지요. 그러면 예수 안에는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창세전부터도 예수 안이고 지금도 예수 안이고. 예수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꼭 캡슐 같아요. 시간과 공간이 정지돼 있는 캡슐 안에 우리가 들어있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타락해서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타락도 이미 구원받은 일부에요. 우리가 죄 짓는 것도 우리가 이미 구원되었음을 증거 하는 증거물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죄 짓는 것도, 우리가 막 사는 것도, 강도가 강도된 것도, 창녀가 창녀된 것도, 구원의 물결입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확인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내가 수용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구원된 사실을 그제 사 이제는 자기가 인식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언제 구원 받았느냐고 하거든 바꿔서 답변하세요. “예수 안에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그러면 반드시 “그것 말고.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건 나도 아는데, 언제? 언제? 작년? 언제? 언제? 몇 월 몇인 날 언제?” “당신은 지금 내가 하는 답변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 당신은 구원 받지 못했기 때문에.” 끝.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언제 구원받느냐고 자꾸 원하느냐, 지금 그 언제라는 말이 오늘 본문과 관련됐기 계속 이야기합니다마는 왜, 언제라는 것을 자꾸 강조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구원을 할 때 이미 자기가 구원에 대해서 미리 자기가 그 상황을 조작을 해놔요. 성경을 보고 미리 자기가 꾸며놓는다고요. 구원을 누가 만들어놓는가 하면, 주님이 만드는 게 아니고 자기가 다 만들어놓고 주님한테 결재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온갖 아이디어를 다해요. 그것이 유대교입니다.

 

특히 유대교가 무엇을 중요시하는가 하면, 바로 절기를 중요시합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그 다음에 시킨 대로 해놓고 그 다음에 몫으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참 잘했어요! 이렇게 하고 거기다가 빨간 도장, 파란 도장만 찍어가지고 숙제 잘했다고 도장 찍듯이 그것만 하게 되면 우리는 구원된다, 라는 그런 아이디어를 사람들은 원하고 있습니다. 그게 납득이 되니까. 어떻게 납득이 됩니까? 하라, 하지 마라, 그 명령도 살리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도 다 살릴 수 있는, 그러한 설명이 가능한 상당히 빠진 게 없이 이해가 전체적으로 통하는, 성경 전체가 통하면서도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방식이에요. 바로 율법으로 준비해 놓고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구원받는 방식이지요. 그게 바로 예수님 오시기 전에 마귀가 계속했던 그런 아이디어였습니다. 마귀의 아이디어.

 

유대인은 바로 그 역할에 충실했고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보고 너희 애비는 마귀다. 너희 애비는 마귀다, 라는 말이 같은 말인데 문장을 바꿔보면, 너희는 누구 새끼다? 뱀 새끼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말이 맞잖아요. 세례요한이 이렇게 했어요. 독사의 새끼들아! 누가 너희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너희들이 피할 것 같으면 돌들이 피한다. 너희들이 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돌멩이를 지금이라도 아브라함 자손 만들 수 있다. 너희들은 무조건 아니야. 바리새인보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세례요한이 욕설에 가까운 이야기를 했을까요? 그들이 세례요한을 관찰하고, 측정하고, 평가 내리기 위해서 찾아왔어요. 그 평가를 내린다는 말은 그들에게 뭐가 있다? 평가의 기준이 이미 확정돼 있고 확립돼 있다는 겁니다. 그 확립된 기준은 단순히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대대로 역사적으로 내려온 것들이에요. 정통이고, 역사고, 관례고, 관행이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교회사라고 합니다.

 

교회사하면 사탄의 역사라고 보시면 딱 맞아요. 그 교회사에서 만들어진 게 삼위일체 이론입니다. 그 삼위일체 이론이 마귀 적 이론이에요. 예수님의 두 속성이 하나님일까, 인간일까,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하나님은 하나님도 아니에요. 인간도 아니에요. 인자에요. 인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표현할 때 존재로 표현한 게 아니고 기능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인자라고 해요.

 

“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성경에 뻔히 나오잖아요. 왜 인자라는 말을 두고 왜 인간이냐, 신이냐, 왜 그걸 따졌을까요? 마귀의 세력들이 사람들을 납득시켜가지고 구원받기 위해서 “여러분, 연약한 인간이지요. 여러분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하나님 여기 계십니다. 여러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시고, 인간이신 분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두 속성이 나온 거예요. 에베소 공회에 그걸 확정했고. 신학생은 그걸 다 외우고. 야, 이거 써먹으면 되겠다. 이거 사람들 설득하기에 이 깊은 성경을 설명하기에 멋지다는 거죠. 왜? 사람은 신이 못돼서 환장했으니까.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이유가 뭡니까? 마귀가 선악과 따먹을 때 제안이 뭐였어요? 니가 따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서 뭐처럼 된다? 눈이 밝아서 그냥 돋보기 안 써도 된다,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에요. 눈이 밝아 2.0된다. 이거 아니라니까요. 눈이 밝은 정도가 어느 정도입니까? 니 고양이 된다. 아니요, 부엉이 된다, 아니에요. 독립할 수 있다는 거예요. 독립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이고 뭐고 다 생각하지 말고 니만 생각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게 진리라는 겁니다.

 

제가 영화<샌 안드레아스>편 마지막 평한 거 있지요. 이 땅에 유일한 진리는 뭐밖에 없다? 살고 보자. 사는데 이유도 없고 그리고 묻지도 말라. 늙은 몸이지만, 무조건 살아야 돼! 이것만 인간이 통하는 유일한 진리에요. 무조건 살고보자! 에요. 내가 왜 육신이 있나? 그런 거 물어서는 안돼요. 그래서 제가 마지막에 성경구절 갈라디아서6장 8절 이야기했지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기 육신을 위해서 심는 자는 망하지요.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고.

 

보세요.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비로소 단층이 생기잖아요. 단층이 생긴다고요. 갈라졌잖아요. 그 갈라진 틈을 뭐라고 했습니까? 길. 길이에요. 우리는 길을 만들 수도 없고 내가 가는 길이, 길이 아니거든요. 길은 없어요. 길은 주님에 의해서 움푹 파여진 그것만이 길이에요. 그런데 그 파일 때, 마귀의 지평을 파야 되잖아요. 그 마귀의 지평이 어디쯤 되는 줄 알아요? 여기 있잖아요. 우리 자신들이 바로 마귀의 정신에 스폰지처럼 푹 젖어있는 곳이잖아요. 여기를 갈라지게 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오늘 두 번째 강의는 쉽습니다. 절기의 성취와 완성은 뭐다? 나를 분열시키는 것. 나를 깨는 것. 나를 부인하는 거예요. 중간에 뭔가 많이 새겨진 느낌이 들지요. 절기라 하는 것은 딱 절기 드리는 시점이 있어요. 히브리 달력으로 유월절은 1월 달, 오순절은 3월 달, 나팔 절, 대 속죄일은 7월 달 이리되거든요. 그 지정된 날만 돼요. 지정된 날만. 지정한 날에 절기를 지낸다는 말은 시간이 밑에 받쳐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그 시간과 공간은 이미 누가 지배했다? 사탄이 지배한 거예요.

 

그 유대인들이 안식일 지켰어요? 안 지켰어요? 철두철미하게 지켰습니다. 안식일 주인은 뭐라고 하는데. 희한한 일이지요. 안식을 왜 지키는가 하면 주인을 알아보려고 지킨 거예요. 그들이. 안식일 지키라고 하신 분이 온다면 우리는 안식일 잘 지키기 때문에 아마 머리 쓰다듬으면서 칭찬할 거야. “아이고, 내가 시킨 대로 잘 했어요. 아이고, 착하기도 하지.” 이렇게 할 줄 알았지요.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 지켰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하루 전날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안식이 뭐하는 날이 됐느냐, 사람 죽이는 날이에요. 안식일 만드신 분을 죽이는 날이 됐어요. 예수님은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 해서 모든 율법이 무빙, 율법이 움직이는 식으로 성취의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지요. 왜? 그들이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으니까.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으면 인간으로서는 쉽지요. 왜, 하면 되니까. 그 장소에 가서 그 방법대로 고 날짜 시간 맞춰서 드리면 손 털고 율법 숙제 끝! 굉장히 쉬워요. 목사가 돼서 교인들이 요구하는 게 뭐라는 것은 목사가 되면 알아요. 교인들은 행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하면 참 좋아해요. 심방가시거든 그냥 봉투 하얀 봉투, 노란 봉투 말고 하얀 봉투에요. “차비 넣어주시면 강상에 올려가지고 제가 감사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옳은가, 그른가가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한 목사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일요일 날 11시에 오지 마시고 10시30분부터 와서 찬양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주거든요. 10시 30분까지 나오면 참 잘했어요. 하고 이마에 마구 찍는 것 같아. 이게 목사의 인이지 그리스도의 인은 아니지만 하여튼 도장이 막 찍을 것 같아. 하라 하는 대로 하면 돼요. 성가대는 가운입고 30분 전에 미리 와서 연습하시면 나중에 연말 때 파티 열어줍니다. 앞으로 잘하라고, 이런 거. 굉장히 쉬워요. 불고기 먹어주면 되니까.

 

그런데 목사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버릴 때 미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막 사세요.” “죄 지으세요.”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하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 당신이 현재진행형으로 하고 있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당신은 하고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할 필요 없습니다.” 왜? 하고 있으니까. 간단한 이야기에요. 당신들은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교회 와서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예배드리면 마치 죄가 상쇄되는 것처럼 여기는데 그거 주님 안 통합니다. 죄 짓고 있잖아요. 죄 지으세요. 차라리 그게 주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괜히 교회에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충성하고 열시 반에 찬양 준비하고 그런 짓하지 마시고 하시는 대로 하세요. 다 뭘 해도 죄가 됩니다.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모든 걸 죄로 바꾸어놓는 이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죄 짓는 것이 축복이 아니고 죄 지은 것을 아는 게 축복입니다. 이리 되어야 됩니다.

 

절기를 예수님은 나로 아예 절단하게 하시는데 그 중간에 뭐가 들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나타납니다. 이러면 좀 감이 들지요.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절기는 모세언약에 속한 것이다. 모세언약을 누가 받는가, 다윗언약이 인수받아요. 다윗언약을 인수받은 것을 누가 받는가, 예수님이 새 언약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다윗언약과 새 언약 이전에 중간에 예고편 언약이 들어갑니다. 그게 뭐냐, 예레미야31장33절에 나오는 새 언약 예고 부분이 나와요.

 

새 언약은 뭐냐 하면, 옛 언약은 어떤 지시나 명령이 내 앞에 와서 스톱이 돼요.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내 앞의 율법이 되겠지요. 내 앞의 율법을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내 안의 율법으로 바꿔주십니다. 내 안의 율법으로. 그런데 내 안의 율법은 내가 있어야 되는데 내 안의 율법 이전에 먼저 절차가 있어야 돼요. 주 안의 율법이 돼가고 주 안의 율법에서 내 안의 율법이 만들어져요. 새로운 피조물로 내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아담은 흙에서 만들었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흙에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은 로켓 올라 갈 때에 캡슐 올리고 난 뒤에 밑의 추진 로켓은 어떻게 됩니까? 바다에 버려야 되겠지요. 버리지 않으면 무거워서 못 올라가요. 예수님의 피 부분이 캡슐로서 지금 주님이 하늘나라를 선회하고 있거든요. 인공위성으로. 그리고 우주 정거장이 천국이니까. 우리는 육신의 껍데기는 벗겨져야 되겠지요. 그럼 가장 성도가 되어서 가장 기분 좋을 때가 뭐냐 하면, 우리의 육신이 벗을 때입니다. 곧 숨 끊어질 때. 손꼽아 기다리십니까. 제대날짜 표시합니까? 언제인지 알아야 제대날짜를 꼽지. 그 제대날짜 모르지요.

 

그런데 조금씩 우리에게 매일같이 그걸 경험합니다. 뭐냐 하면 잠 들 때. 마지막 TV끄고 잠들 때. 죽어갑니다. 이제는 내 힘으로 못 일어납니다. 왜냐, 잠에 들어버리면 자율신경계가 작동해요. 자율신경계는 그야말로 자율입니다. 몸이 알아서 하기 때문에 내 의지를 말을 듣지를 않아요. 꿈을 지가 지어낸 대로 꿈을 꿉니까? 꿈은 전혀 내 예상대로 못 꿉니다. 자율신경계가 있기 때문에. 자율신경계는 교감과 부교감 신경이 있어가지고 내장기관에 분포되어 있어요. 왜냐 하면, 밤에 엔진 안 돌아가면 죽잖아요. 엔진 자체적인 에너지가지고 자율신경계가 돌아가야 되니까. 그 자율신경이 뭐냐 하면,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는 거예요. 심지어 사람만 잠자는 게 아니거든요. 참새도 잠자잖아요. 부엉이도.

 

그런데 참새는 아침에 나와서 짹짹거리면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데 왜 인간은 잘 잤다!~ 해놓고는 아이고, 지난밤에 술을 먹었더니 머리가 아프네. 맨 날 자기가 알아서 깨는 것처럼. 스마트폰의 모닝콜이 깨우는 것처럼. 지가 준비성이 많아서 아침에 눈 뜬 것처럼.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삽니다. 고린도전서15장31절처럼. 발걸음? 물론이고. 머리카락? 물론이고. 우리의 하루, 하루 목숨도 하루살이 목숨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내일 일을 니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말을 할 때 이렇게 해라.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하리니.(야4:15)

 

절기에서 우리 자신이 길이 된다는 것을 전환시키기까지 요한복음7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절기를 의식하고 절기를 겨냥하면서 절기 날에 올라갑니다. 올라가면 되는데 또 때가 안됐데. 때가 안됐다고 빼시는 거예요. 또 빼셔요. 동생들이 하는 말이 “주여, 지금 때를 나타내면 됩니까?” 하니까 그 말 때문에 안 올라가는 거예요. 그 말 때문에.

 

때가 안됐다 하니, 5~7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 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 함이라” 보세요. 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사적인 것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전체에 통할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악한 세상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런데 그 규정하는 동기가 뭐냐 어디서 나오느냐, 예수님 쪽에서 먼저 세상을 건드려요.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정답은 예수님께서 먼저 건드렸기 때문에. 어떻게 건드렸습니까? 세상이 악하다고 했잖아요. 자, 그러면 질문 드리겠습니다. 세상은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악하다고 봅니까? 선하게 봅니까? 어떻게 봅니까?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고, 있다는 그 평가는 선하고. 그렇죠? 그렇게 되지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고 그런데 이 평가는 악하고. 요것은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빨리 했습니다. 다시 해봅시다. 세상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는데 요런 평가를 내리는 요 평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건 진리다. 참이다. 라는 것을 세상이 내리고. 성도가 세상 보기에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악한 것도 있고 선한 것도 있는데 이렇게 있다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살해하게 만든 사탄의 생각입니다. 이게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포함돼 있지요? 세상에 포함돼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늘 아픈 것도 아니고 늘 생생한 것도 아니고 어떤 때는 선한 생각을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망상해가지고 나쁜 생각 할 때도 있지만, 하지만 나는 무슨 선한 생각을 해도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죄인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께서 당장 나를 이 세상에 없앤다 할지라도 저는 흔쾌히 수용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지요. 이런 때 두려움이 생겨버리면 모순돼요. “나는 흔쾌히 죽겠습니다. 아휴~ 그런데 내년에 딸이 결혼하는데. 안되는데.” 이건 뭐예요? 이건 뭐가 문제에요? “흔쾌히 죽겠습니다. 그런데 딸의 결혼식은 보고 죽어야 됩니다. 아니면 딸 손잡고 갈 남정네가 없기 때문에.” 이건 이상한 거예요.

 

“저는 평소에 주의 예배를 기다렸습니다. 빨리 주님 예배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드라마는 마지막 장면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고 가겠습니다.” “오후예배 2시인데 2시에 빨리 참석해야 될 텐데 한일 야구전이 8회 말 투아웃의 말루에 이승엽인데, 지금 카운트가 2스트라이크 3볼 그것보고 가겠습니다.” 주께서 이것까지 다 아시고 구원하신다니까요. 이런 것까지 이미 구원의 절차 속에 시나리오에 포함이 돼있어요.

 

그것은 바로 주께서 관심사가 우리의 구원의 관심사가 1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있느냐 하면, 길 만들기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길 만들기. 이 길 만들기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누가 길이에요? 예수님 본인을 길이라고 했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만들어줘야 우리가 내 생각이 마귀생각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지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마귀 생각 같으면 마귀 생각 가운데 착한 마귀 생각 있습니까? 없습니까? 착한 마귀 생각. 무슨 착한 마귀 생각이 있어요? 선한 마귀 생각 있습니까? 하얀 거짓말 있어요? 회색 거짓말 있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그 말은 하나님이 용납하는 분은 인물은 딱 한분뿐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안 받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받아줍니다. 왜, 예수님의 이름만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다른 영광은 안 되기 때문에. 영광요? 예수 안에서 영광 돌려야 돼요. 예수 안에서 뭘 부인할 때? 자기를 부인할 때. 내가 헌금하고 내가 기도한 것도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입니다. 라고 할 때, 영광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하면서 기도 자체를 하게 하신 것이 주님이라는 걸 믿는 그 자체가 이미 기도응답이 된다 이 말입니다. 주님은 어디를 방문하느냐, 초막절에 방문합니다. 초막절을 깨버리죠. 초막절을 폭파시키면서 폭파된 초막절 안에서 초막절의 주인이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자, 초막절 미리 당겨봅시다. 7장37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뭘 마시라는 말입니까? 마신다니까 액체종류겠지요.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생수의 강은 성전에서 있는 언약궤에서만 나오도록 에스겔47장에 있지요. 성전에서 물이 나올 때 그것이 마지막에 완성될 성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진짜 성전이냐, 아니냐는 무엇으로 결정 나느냐, 물이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로 결정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성전에다가 뭘 붓습니까? 실로암에다가 물을 갔다가 붓는 거예요. 물을 갔다가 부어요. 그 말은 스스로 뭘 인정하는 겁니까? 헤롯성전은 온전한 성전 아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왜? 이걸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교육용으로도 적절하고 또 이런 식으로 우리가 열심히 새 성전을 고대했습니다, 를 티내는 성의 표현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11시에 예배드리는 것이 신령한 진정한 예배가 됩니까? 안 됩니까? 형식은 신령한 진정한 예배에 넘어설 수가 없어요.

 

성령의 세계는 앞에 길을 타넘어야 돼요. 길을 통해서 와야 되는데 길은 우리가 모른다 했지요. 길을 우리가 알고 가는 것이 아니고 길을 주께서 만들어내시면서 가는 거예요. 만들어내시면서. 지금 이해를 더 쉽게 합시다. 어린 애가 지휘봉으로 지휘를 한다고 합시다. 뭘 알겠어요? 대곡 운명 교향곡을 알겠습니까? 정명훈 지휘자가 뒤에서 어린애가 작으니까 팔을 잡고 지휘를 해준다고 봅시다. 그러면 지휘가 되잖아요. 왜? 배후에 누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내가 길을 찾아가는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나를 가지고 길을 만들지요. 길을 만들 때 어떻게 한다? 내 마음에 길을 내는 거예요. 내 마음이 찌부러지면 ‘아, 내가 죄인이구나!’ 아는 순간, 우리는 두려움이 없어지지요. 죄인이니까. 죄인이니까 당장 죽여도 저는 고맙습니다. 이리 나옵니다. 그 자체가 남한테 증거 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길이 된다 이 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를 도 닦으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너를 데리고 남에게 전도시키겠다는 이 말이에요. 목회는 주님이 하시고 전도도 주님이 하시는데 사용하기는 죄 많은 우리를 사용하시면서 하시는 거예요.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제가 어릴 때 들었던 동요가 나오는데 어떤 정이 돈독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었는데, 이 할아버지가 장날에 가가지고 말도 안 되는 식으로 물건을 교환해 온 거예요. 같이 갔던 청년이 이제 할아버지는 할머니한테 죽었다. 저렇게 손해보고 물건을 바꿨으니까 혼나겠다. 해가지고 얼마나 혼나는지 딱 들어보니까 그 할아버지가 자기가 장날에 가서 바꾼 걸 이야기하는데, 바꿀 때마다 이것은 속아서 터무니없이 나쁜 물건으로 바꿨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 입에서 하는 말이 “잘했어요. 잘했어.” 그래서 나온 노래가 <잘했군. 잘했어>에요. “아휴, 잘했어요. 잘했어요.” 그렇다면 결국 할머니가 할아버지보고 잘했다는 말은 이미 할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의미이고 딴 의미 아니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뭘 해도 “잘했군. 잘했어.” 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지금 주님은 우리를 그런 안목으로 보시는 거예요.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잖아요. 아가서에 나오듯이.

 

그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바쁘다 보니까 우리가 너무 세상에 살다보니까 그걸 자꾸 빠트리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길이 되고 주님의 <잘했군. 잘했어> 의 사랑을 알게 되면 그 <잘했군. 잘했어>가 남한테 나타날 거죠. 나타나게 되면 다른 사람은 뭘 느낍니까? 주님이 함께 있음을 보일 때, 그게 바로 복음이 되는 거예요. <잘했군. 잘했어요.>

 

그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농심이야기. 밤중에 몰래 형은 동생한테 주고 동생은 형한테 주고. 형은 식구가 많기 때문에, 동생은 신혼살림에 보탤까 싶어서 볏 짚단 바꾸다가 그만 둘 다 마주쳐서 들켰어요. 그럴 때 찰칵 찍어서 농심라면 붙인 거예요. 우리가 바로 보름달에 들켜버린 십자가 지고 가는 우리 모습이 들킨 거예요. 찰칵하고. 갑자기 누가 와서 조명탄 터트려서 사진 찍은 거예요. 십자가 지고 가는데 들켜버렸어요. 십자가 심. 내가 죄인인 걸 들켰어요. 그게 복음의 전파입니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아이고, 목사님 훌륭하십니다.” 하는데 목사가 설교자체가 죄인인 것을 들켜버릴 때 그 교인들은 목사를 통해서 복음을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가 지 자랑해버리면 이건 완전히 고린도후서11장의 사탄의 일군이 설교하는 중이에요. “이 교회가 25명 이었는데 10년 만에 2500명 됐다.” 이게 전부다 사탄이에요. 자랑하는 거 이렇게 하세요. “25명 왔었는데 2명 남았다. 그래도 나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있다. 믿습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성령의 세계는 못 갑니다. 길이 나와야 되고 길을 통해서 갈 수 있는데, 그 길은 우리 힘으로 못 만들지요. 그러면 길이 나오는 재료는 뭐냐, 재료는 사탄에 속한 우리가 되는 거예요. 맨 날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이 세상 부귀영화, 돈, 자존심, 이것밖에 모르는 이것이 놀랍게도 강도보다, 세리보다 더 흉악한 우리가 꿈에 온갖 생각 다하고 성질나면 온갖 성질 다 터트리는 우리가 주님의 길이 된다니까요. 길의 재료가 된다니까요. 재료가.

 

“마귀 여기 있었네.” 하고 그걸 훅! 쪼가리 낼 때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 내부의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두 층으로 되어있구나! 하나는 마귀 층, 그 밑에 주님의 성령 층, 성령 안에 있으니까 내가 죄인인 걸 알지요. 성령 밖에 있으면 착한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는데 이런 평가는 옳았다. 이렇게 돼버려요. “이 근호 목사는 매일 죄, 죄, 죄. 왜 죄만 있어. 착한 일도 있지.” “그 평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 평가가 내 평가니까 옳을 걸.” “그러니까 마귀네. 딱 마귀지.” 바로 선악과 따먹은 티를 그렇게 내는 겁니다.

 

그래서 좀 뭐 복음 안다하고 복음 전하는 교회 다녔다 하고 이야기 죽 들어보면 결국은 뭐냐 하면, “내가 복음 아니까 나는 의롭잖아.” 하는 그거에요. 아직까지 그 강을 건너지 않았어요. 아직까지 그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았어요. 성령의 강을 못 건넜어요. 복음 전하는 교회 다녔으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잖아요. 생수가 나오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생수가. 생수 나온다고 맨 날 호수 꼽아가지고 닝겔에 머리 잊고 침 나오고 튀기고 그렇게 할까요? 그것은 니가 아는 시간과 공간식이고 주님의 방식은 따로 있어요.

 

그것은 십자가 이후에 우리에게 그대로 이 말씀을 그대로 우리에게 생수가 나오도록 조치할 겁니다. 생수가 나오려면 십자가에 우리가 죽는 순간만 나오게 되어있어요. 생수가. 그래야 그리스도의 은혜만 나오게 되어있어요. 만약에 성령이 안 오고 나와 버리면 내 자랑이 나와 버려요. 성령 들으러 왔다가 사탄의 침만 디닥 쳐 바르고, 사탄의 신전에 가서 사탄의 이벤트 구경하다가 나온 거예요.

 

자, 지금 우리가 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절기인데 어떻게 절기에 예수님 한 분 개입한 것 때문에 어떻게 우리 속에서 생수가 나오는가, 돌변적인 사태가 어떻게 해서 벌어질 수 있는가, 그 메카니즘 그 절차, 과정을 우리가 살펴보는 겁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서 요한복음7장에서 계속 이어서 나가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8~10절에 보면,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올라갔습니다. 그럼 분위기는 뭡니까? 집단적으로 이미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지요. 그 분위기는 완전히 종교분위기죠.

 

자, 물어봅시다. 종교분위기는 기쁠까요? 슬플까요? 대단히 즐겁지요. 유대인들의 초막절의 절기를 보세요. 이것은 미치듯이 춤춥니다. 마치 김정은 앞에서 북한 아줌마들이 춤추는 것과 똑같아요. 이것은 자발적으로 미치듯이 너무 좋아서 춤을 춰요. 그걸 누가 보고 슬프다 할 사람 없어요. 왜? 성경에 보니까, 시편에 보니까, 그 날에 기뻐하라, 하는 거예요. 성전에 올라갈 때 기쁨의 노래를 불러라.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해요. 나중에 해보면 이게 버릇이 돼가지고 기뻐져요. 기뻐진다고요. 그거 기뻐서 구원받았습니까? 만약에 그들이 기뻐서 구원받았을 것 같으면 예수님은 십자가 지지 않고 이랬을 거예요. 춤추면서 올라갔을 거예요. 성전에. 나처럼 해봐라, 요렇게! 주께서 춤이 모델이 돼가지고 춤추고 올라갔을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늘나라 갈 때 예루살렘에 가신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쫓겨나서 갔지요.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만에 올라가셨잖아요. 그 방식이 길이라면 우리를 그 방식대로 따라오게 하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뭘 지어야 돼요? 주님 가신 방식이라면 뭘 해야 됩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누구도 십자가를 질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의 육신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흠집 내고 자기 자존심, 자기 싫은 소리, 내 가치, 의미, 모독하는 것은 우리는 용서가 안 됩니다. 막 보복 운전하고 난리 나요. 보복운전 안 한 사람 없어요. 다 해본 사람들이에요. 전부 다. 욱질 해본 사람들이에요. 전부다. 다 자기 사수하는 게 인간이에요. 다 나빠서가 아니라 육신의 본성이에요. 우리의 본성은 내 인력으로 안 되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주님께서 명령한 것은 인력으로 될 이야기를 하신 게 아니에요. 안 되니까 이야기하시고 안 되니까 주님 올라가신 거예요. 우리는 주님 하신 걸 통해서 왜 내 힘으로 안 되는가를 새삼스럽게 알면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께 몽땅 다 감사하는 겁니다. 이 은혜에 대해서.

 

안 되니까, 안되는데 자꾸 하라하니까 내가 막 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안 되는데, 자꾸 하니까 이게 위선자가 될 뿐이지요.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아예 막 살아버려라. 명절날 분위기 자체가 기뻐요. 기쁜데, 주께서 초를 치러 가신 겁니다.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초치는데.

 

아까 요한복음7장 다시 봅시다. 7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 함이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나, 누구는 미워해요? 나는 미워하지요. 왜? 내가 세상의 행사를 뭐하다? 악하다 하기 때문에. 그 행사가 뭐냐, 그 행사 중에 하나가 초막절이잖아요. 주님께서는 지금 지적질 하려고 올라가신 거예요. 아예 욕을 유발해. 의도적으로. 욕을 유발한다고요.

 

우리는 세상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우리는 안 믿는 가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성령이 임해버리면 주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게 되면 이것은 터무니없이 우리는 본의 아니게 남한테 욕을 얻어먹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목을 ‘길’로 할게요. 길. 길로 하겠는데, 우리가 우리 인생 우리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 섭섭해 하지 마시고 도리어 내 힘으로 나를 움직였던 그 자체를 용서해 달라고 이렇게 늘 회개하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맘대로 안 되는 인생, 내 뜻대로 되지도 않는 인생, 지금껏 주님께서 밀어붙인 인생, 하지만 또 돌아서면 또 내 식대로 고집을 부리는 내 인생, 주께서 익히 아시오니 내 식대로 고집부리더라도 그것마저 주의 뜻에 활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