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요한복음 3장 27절 이 대목은 세례요한이 선지자잖아요? 선지자라고 할 때 사람들은 구약 전체에 약속한 그분이다. 이렇게 시키게 해서 유대인들은 정치적 이해를 했다고, 정치적 이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를 살려주신 하나님이다.
산다는 것이 우리 타고난 본성이잖아요. 산다는 것이 본성일 때 그 본성에 부합되는 하나님은 그럼 뭐에요? 나를 살려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이고 제대로라고 이해하겠죠. 유대인들이 현재 입장이 뭐냐 하면 로마에 포로 잡혀 있는 상태에요. 로마에 포로 잡혀 있는 정치적 현실과 그리고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약속한 걸 보세요. 약속한 걸 보면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스라엘 나라 장래가 어때요? 이런 큰 승리가 없죠. 대단한 나라 되는 거예요. 화려하게 마지막이 승리로 끝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로마한테 잡혀 있다 말이죠.
그러면 해결책은 뭐냐? 약속대로 누가 오면 되는 거예요? 메시야가 오면 되는 겁니다. 자, 이러한 간절한 메시야의 기다림을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 했냐하면 이건 정치적인 요소가 이미 있는 겁니다. 정치적 요소가 뭐라 했어요? 우리가 제대로 살아보자. 그런 뜻이겠죠. 살아야 되겠다. 그러면 우리를 살려주는 메시야는 참된 메시야다. 이 메시야가 오게 되면 메시야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판명된다? ‘현재 있는 정치적 상황이 변화되어서 너무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는 이것은 하나님의 준비된 메시야 맞다.‘라는 틀이 딱 잡혀있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세례요한이 와서 털옷을 입고 그 다음에 권세가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회개하라고 이야기했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줌으로써 옛날 요단강 건너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던 그 상황을 물세례란 이름으로 표현을 해줄 때 철석같이 이 세례요한을 메시야와 연관된 사람으로 믿는 사람들이 여기 등장할 수밖에 없겠죠. 회개하라 했으니까.
그런데 한번 물어봅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세례요한 앞에 회개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성경 누가복음에 보면 세례 안 받았다고 돼 있어요. 세례요한이 세례 줄 때 바리새인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돼 있습니다. 받지 않았다는 말은 결국은 세례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다? 기존의 세력에 대해서 기대를 안 걸은 사람 이예요. 기대를 안 걸었으니까 그들은 참된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안 가지고 있었습니까? 마찬가지로 안 갖고 있었던 거예요. 모두 정치적이라니까요. 모든 게 정치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정치적 상황이 바뀐다는 겁니다. 정치적 상황은 결국은 나라가 되려면 힘이 있어야 되고, 우리가 필요한 힘은 하나님이 힘 주실 때 우리는 힘을 얻어서 우리는 진짜 옛날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약속한 그런 이상 나라가 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걸 한번 정리하게 되면 현재 대중들이 있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뭘 기대하느냐 하면 구약성경이 예언한 대로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힘에 눌려 있으니까 하나님께 뭘 호소하느냐 하면 힘을 가진 메시야 오기를 고대하고 있어요. 힘 가진 메시야나 선지자가 오게 되면 그들의 뜻에 부합 되냐, 안 되냐를 뭐로 아느냐 하면 자기는 기존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안 믿거든요. 그들은 방금 메시야가 와야 된다고 하니까. 따라서 자기들처럼 기존의 세력에 아부하지 않고 고개 숙이지 않고 당당히 맞서서 대항할 때 이건 확 눈에 들어오고 맘에 와 닿죠. ‘야! 역시 메시야답다. 기존 정치세력에 대담하게 대들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금 전교조라든지 소위 좌파들,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누가 소환해도 법 안 지키고 뭔가 바른 소리 하고 대통령에게 악랄하게 이렇게 할 때 그쪽 편에 있는 사람은 뭘 느낍니까?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세상에 그 무서워하는 권력에 굽히지 않고 할 소리 다하는 거 보면 뭔가 희망이 보이네.’ 라고 나올 거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도 세례요한을 그런 식으로 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예수님이 등장했거든요.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선생님이 증거 하시는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이렇게 돼 있죠? 예수님은 세례를 줬습니까? 안 줬습니까? 예수님은 세례를 안 줬어요. 안 주고 누가 줬느냐 하면 예수님 제자들이 줬죠. 예수님 제자들은 왜 줍니까?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하는 세례가 단순한 한 때 이벤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세례요한하고 예수님하고 연관이 있으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연관성을 그대로 수용해서 예수님 증거 하려면 그전에 물세례 주는 절차를 필히 거쳐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준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반대를 했어요? 안 했어요? 반대를 안 했어요. 그런데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가버리니까 섭섭하니까 찔렀겠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니까 여기서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유명한 말이죠. 오늘 본문에 드디어 핵심이 나왔습니다.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자, 이걸 오늘 중점으로 설명 해보겠습니다.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받을 수 없다.” 이 말을 줄여버리면 사람이 달라고 한다고 하늘의 것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받을 수 없는 거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땅에서 하늘로 연락을 취할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은 땅은 땅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어떤 것도 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리고 받지도 못하고.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그럼 그대로 땅을 땅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그냥 가면 될 게 아닙니까? 죽 가면 되는데 왜 세례요한은 물세례 주고 예수님은 왜 뛰어 내려오신 거예요? 누가 요청했습니까? 요청한 게 없는데 갑자기 세례요한 등장했고 갑자기 예수 등장했다. 그럼 이 땅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누구 요청이란 말입니까? 사람이 요청한 건 아니고 누구 요청 이예요? 그냥 하나님의 자기 계획이죠.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사람이 천국 가고 싶어서 하나님께 요청을 했고 요청대로 뭔가 주었다면 이 사람의 이 땅의 가치는 아직도 약간의 가치는 있어요. 달라하면 주시니까. 그런데 달라 해도 안주신다면 이것은 인간은 ‘왜 안 주십니까?’ 할 수도 없어요. ‘왜 안 주십니까?’ 하는 자체가 이건 싸가지 없는 짓이거든요. 그냥 그대로 땅은 땅대로 가고 하늘은 하늘대로 가면 그만 이예요. 하늘에서 아무것도 안 줘도 괜찮은 거예요. 상관없는 거예요. 요한복음은 그렇게 시작해야 되는 겁니다. 주님이 찾아온다고 우리 요청대로 찾아왔다고 하면 안 됩니다. 세례요한이 왔다고 우리 불쌍해서 온 게 아니에요. 세례요한의 종적이나 예수님의 종적에 대해서 우리가 관여를 할 이유도 없고 개입이 돼서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쨌든 간에 예수님 오셨잖아요. 오셨으면 이 땅은 누가 접수한 거예요? 하늘에서 접수해 버린 게 되죠. 그러면 땅은 졸지에 뭐가 되느냐? 땅은 하늘 안의 일부 지점이 돼 버려요. 하늘나라 일부 지점. 하나님 나라가 흡수 통합을 하니까 인간, 땅이 생각하는 하늘은 그냥 고상하고 안정돼 있고 멋있고 거룩한데, 하늘이 접수해서 나타난 그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는 쟁반에 목이 달아나는 그 현상이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돼 버려요. 곧 하나님의 일이 되고 그게 하늘나라 일이 돼 버려요.
그렇게 되면 뭐가 어려우냐 하면 하늘의 일이라 하는 것은 아주 깔끔하고 고상하고 깨끗하고 흠 없고 이런 것이 아니고, 아주 치열하게 이 땅에서 비난받고 설움당하고 외면당하고 배척받는 그런 요소의 낯선 사건들, 그러면서도 그 사건가지고 땅의 모든 요소에서 낱낱이 지적하는 그런 식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어려운 게 없어요. 땅은 어쩔 수 없고 하늘이 접수했을 때 하늘이 땅에 왔을 때 인간이 기대하는 그러한 고요한 모습이 아니고, 천사가 날개 옷 입고 와서 두레박 내려와서 두레박 타고 가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고 치열한 모습이죠. 예수님도 고생했고 세례요한도 고생하고 바리새인이 죽이려고 달려들고 이런 낯선 변화를 겪으면서 하늘나라는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이 지상에서 움직임 그 자체가 이미 하늘나라에 의해서 움직이는 낯선 하늘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한 이건 어려운 게 아닌데 어렵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 하늘나라가 오게 되면 이 지상에 낯선 시간과 공간을 줘요. 여기서 시간과 공간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냥 시간, 공간이 아니고 낯선 시간과 공간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아까 바리새인은 세례요한한테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세례 받은 사람들이 있어요. 이렇게 되면 바리새인과 일반 사람들이 구분이 되는데 바리새인과 일반 사람을 구분하지 말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히 알고 있는 게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입니다. ‘이곳에 몇 시에 오시옵소서. 마지막 때에 몇 시에 오시옵소서.’ 시간과 공간이 이건 바리새인이나 누구든 다 그렇거든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고.
구름 타고 오신다는데? 구름 타고 오신다. 그럼 위에서 오신다 할 때 위가 공간입니다. 아래가 있고 위가 있고. 그리고 도적 같이 잠잘 때 온다. 요한복음 5장에 보세요. “죽은 자들이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그렇게 돼 있고 또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내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무덤 속에 있으니까 공간이죠.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내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니까 이건 시간이잖아요.
그러니까 다시 한 번 강의를 하게 되면 하늘나라가 어디 있느냐? 쳐다보면 거기 계신 것이 아니고 이미 하늘나라는 이 땅에 이미 섞어져버렸어요. 섞어지면서 이제부터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그 하늘나라를 묘사하고 표현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쓰고 있는 시간과 공간 개념을 활용하고 사용한다는 겁니다. 이게 아주 어려워요. 같은 공간, 무덤이 있는 자리, 또는 때, 같은 시간을 표현하는 용어들을 쓰는데 납득이 안 돼요. 우리 인간들이.
전에 요한복음 2장 했잖아요.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우리 같으면 이걸 보고 지금 몇 달 후란 말인가? 몇 년 후란 말인가? 몇 달, 몇 년, 아침, 저녁, 언제야? 우리가 생각하는 때는 항상 그런 때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하는 때는 같은 때라는 인간들이 쓰는 시간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수용이 안 되는 낯선 시간들을 이렇게 자꾸 말씀을 해주니까 이거는 말이야 하늘나라와 땅이 섞였는데 섞여봤자 여전히 땅에서 그 섞인 하늘에 침투하거나 갈 수 있는 방도는 인간 쪽에서 있어요? 없어요? 전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요한복음 3장 돌아가서 이렇게 해놓고 27절 봅시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라는 이 말이 절망적으로 한 이야깁니까? 사실이 그래서 이야기하는 겁니까? 사실이 그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왔으면 이제는 쉽게 하나님을 보고 맛보고 손 만지고 같이 구원받을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가까이 침투해도 여전히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라서 그걸 눈치해서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한테 익숙한 시간과 공간 개념 속에 우리가 놓여 있고 사실은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 개념에 갇혀 있는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바로 세례요한의 물세례입니다.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보면서 그 세례요한의 물세례 보고서 그걸 흉내 내서 자기 집에서 바케스에 물 담아서 자기한테 물 엎어 버리면 그게 목물이지 세례입니까? 그렇게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죠. 어디 가야 돼요? 세례요한이 있는 그 공간에 가야 돼요. 아침에 덥다고 바케스 뒤집어 씌고 저녁에 잘 때 덥다고 뒤집어 씌면 시도 때도 없이 세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세례요한한테는 단 한 번 받아야 돼요. 한 번이 뭡니까? 시간이잖아요.
아까 세례요한은 권세가 하늘에서 왔다 했죠? 하나님이 주신 거죠.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그들 인간은 참여했습니다. 참여했는데 지금 오늘 본문에 보니까 참여한 사람이 현재 어디로 가고 있다? 세례요한을 떠나서 예수님께 갔죠. 이게 뭐냐 하면 그들의 의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 하면 세례요한은 자기 할 일은 거의 뒤처리 할 때가 된 거예요. 소위 청산할 때가 온 거예요.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굉장히 쉬워요. 왜 그 장소에 가서 물에, 요단강에 들어가면 돼요. 옷 벗고 물에 들어가면 세례요한이 와서 세례주면 그게 물세례 되는 겁니다. 약간의 시간을 내고 차비내서 옷 벗고 물에 들어가면 세례요한이 와서 세례주면 그게 물세례 되는 겁니다. 약간의 시간을 내시고 차비내고 약간의 자기의 참여하는 수고하시면 물세례 성립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이렇게 성사되는 그 시대는 지금 저물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시간과 공간관 속에서 해낼 수 있다는 그 세례는 이젠 점점 더 우리를 떠나고 있습니다. 떠나면 어디로 갈 거냐? 종이가 이렇게 있습니다. 언젠가 설교하다 보니까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이걸 세례요한의 물세례라 그리고 세례요한 물세례 떠나서 요 경계선 떠나서 이곳(예수님 세례)에 가게 되면 예수님 제대로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냐하면 이 땅이라는 차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땅이잖아요. 땅에서 세례요한이 물세례 주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 인간이 참여할 수 있다 했죠. 가서 물 뒤집어쓰면 되니까.
그런데 떠나서 예수님한테 가게 되면 이 사람은 구원 받는 겁니까? 예수님 만나서 손 한번 악수하고 하면 구원 될 수 있습니까? 안 되죠. 그러니까 같은 시간과 공간을 섞어놓고 여기서 이렇게 가봤자 안 돼요. 섞었다는 공간을 표현한 것이고 시간으로 이야기하면 세례요한 만나다가 이제는 세례요한 만난 건 과거로 돌리고 옛날 세례요한 따라다니는 식으로 예수님 따라다니면 그 자체로 구원입니까? 약간의 시간을 내고 차비내서 옷 벗고 물에 들어가면 세례요한이 와서 세례주면 그게 물세례 되는 겁니다. 약간의 시간을 내시고 차비내고 약간의 자기의 참여하는 수고하시면 물세례 성립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이렇게 성사되는 그 시대는 지금 저물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시간과 공간관 속에서 해낼 수 있다는 그 세례는 이젠 점점 더 우리를 떠나고 있습니다. 떠나면 어디로 갈 거냐? 종이가 이렇게 있습니다. 언젠가 설교하다 보니까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이걸 세례요한의 물세례라 그리고 세례요한 물세례 떠나서 요 경계선 떠나서 이곳(예수님 세례)에 가게 되면 예수님 제대로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왜냐하면 이 땅이라는 차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땅이잖아요. 땅에서 세례요한이 물세례 주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 인간이 참여할 수 있다 했죠. 가서 물 뒤집어쓰면 되니까.
그런데 떠나서 예수님한테 가게 되면 이 사람은 구원 받는 겁니까? 예수님 만나서 손 한번 악수하고 하면 구원 될 수 있습니까? 안 되죠. 그러니까 같은 시간과 공간을 섞어놓고 여기서 이렇게 가봤자 안 돼요. 섞었다는 공간을 표현한 것이고 시간으로 이야기하면 세례요한 만나다가 이제는 세례요한 만난 건 과거로 돌리고 옛날 세례요한 따라다니는 식으로 예수님 따라다니면 그 자체로 구원입니까? 아닌 거예요. 시간적으로도 문제에요. 세례요한 시절 지나고 예수님 시절 됐다고 해서 인간은 자동적으로 구원 되는 거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럼 어떻게 되느냐? 아예 이 땅과 공간을 뻥! 하고 찢어져서 이걸 뚫어서 구멍을 내서 다른 쪽에 이런 시간과 공간이면 이건 어떻겠습니까? 이건 가능하죠.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다른 공간에 시간과 공간을 뚫을 수 있는 능력과 아이디어나 그런 발상이 있을 수가 없어요. 왜? 태어난 것이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 땅을 뚫고 다른 세계가 나타나는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다른 세계 이걸 가지고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낙타, 바늘구멍, 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됩니까? 특수 제작 말고 안 되죠. 안 된다는 것은 막혀 있잖아요. 막혀 있다는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는 우리가 인식하는 대로만 흉내 낼 뿐 이예요. 세례요한이 물세례 주고 예수님 제자들이 세례 주니까 무조건 받는 겁니다. 예배 참석하면 되고 헌금하면 되고 전도하면 되고 되는데 그것으로는 전혀 같은 바닥에서 같은 차원에서 노는 이야기다 말이죠. 이것으로는 안 되는 거예요. 예배참석하고 헌금 백날해도 안 된다 이 말이죠.
이게 뚫려야 된다니까요. 그런데 이게 뚫릴 수가 있어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를 못하는데. 그러니까 아까 처음에 강의했듯이 하나님의 일이 이 땅에서 벌어져도 소용없어요. 벌어져도 우리 인간은 ‘낯설다. 이상하다.’ 그 뿐이지, 우리가 그걸 믿는다고 해도 그건 믿는 것도 아니고요. 믿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저 인간들은 자기 시간과 공간 속에 그냥 낯선 세계를 여기다 자꾸 모으고 편입시키고 축적을 해대고 ‘나 주님의 하신 일을 많이 봤다.’라든지 자꾸 ‘뭘 봤다. 들었다. 경험했다.’ 해봤자 자기는 구멍 뚫리지 않은 상태에서 있는 이상은 이것도 소용없는 일 이예요.
그런데 미리 이야기하지만 구멍을 뚫는다는 말은 인간들이 기껏 알고 있는, 인간이 갇혀서 알고 있는, 인간을 가둬놓는 그 세계 바깥으로 나가려면 그 세계에서 추방돼야 되겠죠. 이 세계에서 추방될 때 죽음으로 추방 된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 말고 죽은 사람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예수님 이전에 수많은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죽었겠습니까? 아담도 죽고 노아도 죽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한 죽음이죠. 죽어도 그 죽음 자체는 인간이 이미 예상한 죽음이지 낯선 죽음은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죽을 때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고 그런 죽음의 하나인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 시체 찾으려고 무덤에 가 보니까 시체가 없었죠. 죽어서 묻었는데 시체가 없다. 이거 국립과학 수사 연구소에서 연구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어요? 당연하죠. 시체를 누가 수거해서 빼돌렸다. 당연한 거예요. 그분 말씀대로 살았다. 이건 없어요. 왜냐, 그걸 믿게 되면 우리가 생각했던 우리의 모든 죽음이라든지 모든 사는 거 모든 기준이 이게 다 엉터리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 모든 게 죄라고 느껴지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게 죄가 되는 이유는 우리가 기존의 죄가 아니라고 여기는 그런 사고방식 가지고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노라. 하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나오는 영을 통해서 그걸 우리가 계속 점검받고 확인받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성령은 이제 감사원 직원과 마찬가지에요. 뭐 물건 하나 던져 놓고 시도 때도 없이 와서 묻는 거예요. ‘이 물건 어디서 나왔지?’ ‘이거는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그래? 오, 잘 아네.’ 하고 가고 또 다음날 와서 묻는 거예요. ‘이 물건 어디서 왔지? 네가 열심히 해서?’ ‘아닙니다. 이건 주께서 주신 겁니다.’ ‘그래? 잘 알고 있구만. 다음에 보자.’ 그리고 다음에 와서 또 묻는 거예요. 항상 우리 인생에서 성령께서 뭐냐. ‘네 인생 누구 것이냐? 네 자식은 누구 것이냐? 네 모든 것은 누구 거냐? 네 시간과 공간은 누가 만들어 줬느냐?’ 늘 묻고 그냥 가버리고 또 찾아와서 묻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 안 받는 사람은 꼭 소꿉놀이 하는 것 같아요. 애들 소꿉놀이 보세요. 여기는 부엌도 만들어 놓고 여기는 책상도 만들어 놓고 여기는 병원 청지기 갖다 놓고 자기가 자기 놀이해요. 삼위일체, 성부 놓고 성자 놓고 성령 놓고 자기가 다 달아요. 실컷 놀다가 그보다 더 재밌는 게 있으면 때려치우고 다른 거 하다가 그것도 재미없으면 다시 와서 보고 종교 놀이하고 이래요. 누가 찾아오는 게 아니고 본인 이외는 본인을 찾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자기 인생이 낯설지 않아요. 지루하고 누가 나를 다룬다는 느낌이 없이 내가 손 안 보면 아무도 손볼 사람이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은.
그런데 세례요한 보세요. “사람이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뭔 뜻입니까? 내가 지난 날 동안 세례요한이 세례를 준 것은 이게 내 일이 아니고 누가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제는 하늘에서 주신 것이 드디어 그만하라는 날이 왔는 모양이다. 왜, 자기 제자들이 어디로 가니까? 예수님 쪽으로 가니까 하늘에서 주신 일은 마감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 말을 한 겁니다.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같은 말인 거예요. 그래서 항상 내가 계획하지 않은 대로 뭐든지 움직이니까 나라는 인생자체가 나한테 늘 낯설게 느껴지는 거예요. 말씀으로 예상 밖의 사건이 터지고 딸이라고 여겼는데 사진 찍어보니까 아들 나오고. 모든 것이 비 온다고 우산 준비하니까 비 하나도 안 오고, ‘도대체 이 세상은 누가 담아놓은 거야?’라는 곳에 관심을 갖는다는 자체가 성령 받는 사람입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런데는 관심 없고 자기만 관심 있습니다. 자기만 챙기면 그만 이예요. ‘나는 영원하다.’ 그거하고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그 말하고 얼마나 말의 모든 그 의미가 달라도 너무 다르죠. ‘하나님이 살려주지 아니하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이거하고 ‘오늘도 열심히 해서 살았구나.‘ 하고 지향하는 바가 달라도 너무 달라요.
세례요한은 구원의 구멍이 뚫렸으면 뚫린 구멍에다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고 희망과 소망도 이 구멍 뚫린 여기다 둔다 이 말이죠. 그때는 예수님 십자가 죽기 이전이지만 만일 죽으신 후에는 세례요한도 엘리야 모세도 마찬가지고 예수님 별세하기 전에 엘리아 모세가 했잖아요. 관심사가 뭐였습니까? ‘주님 별세하세요. 구멍 뚫어주세요.’ 이 말이다 말이죠. 구멍 뚫어주게 되면 그 밑에 있는 세계는 뭐냐, 부활의 세계입니다. 구원은 뚫린 세계니까 죽었다가 산 세계기 때문에 부활의 세계에서는 부활된 자만 가는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내가 하고 있어요.
부활의 세계에 누가 간다고요? 부활된 자만 가죠. 그러면 그 부활은 사람이 죽었다고 부활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었을 때만 부활돼요. 왜냐 하면 십자가 죽은 분의 부활이기 때문에. 엘리아의 나라 아닙니다. 물론 엘리아도 죽을 때 그냥 안 죽고 바로 갔지만 그렇다고 천국이 엘리아의 나라 아니에요. 예수님의 나라에요. 에녹의 나라 아닙니다. 에녹이 안 죽은 건 사실이지만 에녹의 나라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에요. 에녹의 천국이 아닙니다. 땅의 연장 이예요. 우리도 우리 연장 이예요. 땅의 연장 이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릴 그냥 죽이지 않고 십자가 죽을 때 동원되는 언약대로 우리를 죽여서 언약대로 살게 하시는 작업을 매일같이 반복해요. 그러면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뭘 느낍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감지하게 되고 하나님 약속을 느끼게 됩니다. 죽어도 산다는 것.
이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 하니까 여러분이 너무 어려워하니까 쉬운 거부터 먼저 해볼게요. 내가 누굴 사랑했다 할 때 사람들은 강조점이 뭐냐 하면 ‘내가 저 사람을 사랑했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내가 사랑하는 것은 관심 없고 어디 관심 있느냐 하면 바로 사랑이 나타남에만 관심 있어요. 하나님의 관심은 사랑 나타남이거든요. ‘주여 제가 희생했습니다.’ 손들지 말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사마리아 사람의 희생 때문에 누가 살았습니까? 강도 만난 사람이 살았죠. 그러면 그 관계 속에서 부각되는 건 뭡니까? 누구 희생 때문에 누가 살았습니까? 그 관계 속에 나타난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가 떠오르죠. 목련처럼 피어오르죠.
‘내가 저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베드로가 ‘내가 7번 용서해줘야 됩니까?’ 라고 했을 때 지금 주님 보시기에 관심사가 베드로가 용서에 관심 없고 용서 잘하는 베드로 자신에 관심이 있어요. 주님께서는 일흔 번에 일곱 번을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용서에서 누굴 떼버리느냐 하면 베드로 자신을 떼버리고 끝없이 용서하는 용서에 베드로가 휘말려 들어가게 만드는 겁니다.
지금 여기 선풍기 있죠? 지금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잖아요? 만약에 여기에 손가락 넣으면 손가락이 쑥 들어가잖아요? 빨려 들어간다 말이죠. 빨려 들어가듯이 예수님의 모든 개념들은, 말씀들은 그걸 우리가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 속에 빨려 들어가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면, 이걸 딴 성경에서는 하늘의 권세, 세례요한은 하늘의 권세, 권세 자체에 세례요한이 빨려 들어가 버립니다. 한 쪽은 빨려 들어가고 한 쪽은 그 권세가 더욱 더 부각이 되고 세례요한은 빨려 들어가고 예수님은 반대로 예수의 권세가 더욱 더 부각이 되고,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자기의 임무와 역할은 이제는 다한 거죠. ‘좋겠다.’ 이제 세례요한에게 남은 것은 뭐냐 하면 휴가밖에 더 있습니까? 편히 쉬는 거. vacation, 편안히 하늘에서 쉬는 거밖에 더 있어요? 얼마나 좋겠어요? 세례요한이 목 베었다. 이건 안 중요합니다. 왜냐 하면 세례요한 본인이 안 중요하니까. 목 베이나 그냥 숨 끊어지나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참혹하게 목 베이는 것은 세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게 악하냐를 세례요한은 자기가 죽는 순간까지 아낌없이 주의 계시의 소모품으로 다 전적으로 쓰여 지기 위해서 최후의 장렬한 죽음까지 주께서는 그렇게 그 역할을 맡긴 겁니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죽는 영화처럼. 성경에는 다 그래요. 삼손도 마지막에 죽는 거예요. 예수님도 이 땅의 마지막은 죽음으로 끝났어요. 그런데 그 죽음은 그냥 개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죽는 죽음 이예요.
자, 이제부터 어려워요. 방금 뭘 구분했습니까? 언약대로 죽는 것과 그냥 죽는 것의 차이를 제가 두었습니다. 예수 믿고 살다보면 천국 가겠지, 이러지 말고 살아있으면서 언약이 계속 감지돼야 돼요. 하나님의 약속이 감지가 돼야 돼요.
그러면 우선 그걸 쉬운 이야기로 해보겠습니다. 신명기 8장 11절부터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 이 상황은 요새 금 한 돈이 굉장히 비싸잖아요. 은금이 풍부하다는데 얼마나 좋겠습니까? 집 잘 짓고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이게 잘 되고 난 뒤에 나중에 언약대로 죽어야지. 이게 아니고 이미 이 잘된 자체 속에서 이미 언약은 개시가 된 겁니다.
그럴 때 정답이 나와 있어요. 정답이 뭐냐 하면 17절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보세요. 잘 살고 지옥이라 하는 것은 언약대로 하면 저주입니다. 제가 말하는 죽어서 지옥과 천국이 갈라지는 게 아니고 살아서 평범하게 아파트 짓고 밥 먹고 하면서 이미 뭐가 구분된다?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드러나는데 그 천국 갈 사람의 고백과 지옥 갈 사람의 고백이 어디서 드러나느냐 하면 천국 가는 사람은 뭐라 합니까?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은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겁니다.’라고 나온 거예요. 이게 수학 정석 1 이예요. 그럼 여기서 응용문제 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편도선 암에 걸렸습니다. 암에 걸렸을 때 언약 적 고백이 뭡니까? 내가 이 병에 걸린 것은 내 능력과 내가 죄인이서 그런 게 아니고 뭐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야, 응용문제 어렵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한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죠. 이게 신명기 언약 이예요. 언약을 가지고 또 언약을 응용한 그것이 또 언약이고 율법을 응용한 그것이 율법인 거예요. 눈 오는 날 지붕위에서 눈을 굴리면 처음에는 작은 눈인데 나중에 처마 끝에서 큰 눈이 돼서 뚝 떨어지듯이 율법을 떼구르 굴려버리면 율법에 위반한 사례까지 어디에 포함된다? 율법의 내용 안에 이게 포함이 돼 버려요.
그래서 하늘은 늘 땅을 대응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볼 때 하늘은 고정돼 있고 우리가 지키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 땅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하늘도 거기에 다른 대책을 만들어서 기어이 인간들이 하늘이 주신 권세 없이 구원 받을 수 없게 만드는 조치가 율법으로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율법 앞에서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지, 율법, 그래도 딴 건 못 지켜도 이건 지키겠습니다. 할 게 없다 이 말이죠.
‘집이 부자지만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가 된통 터진 사람 있어요. 누굽니까? 욥이죠. 욥은 자기 자랑 안 했어요. 내 자식 잘 되고 특히 딸이 예쁘고 한 건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욥 같은 사람 없다 했잖아요. 마귀가 알아요. ‘쳐보세요.’ 마귀가 사람에 대해서 마귀처럼 잘 아는 존재 없어요. 왜 자기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자기 품성을 다 집어넣기 때문에.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고백할지라도 막상 어떤 암에 걸린다든지 집안이 망했을 때 ‘참 주의 힘으로 일부러 망하게 하셨군요. 이것도 감사합니다.‘ 라고 나올 믿음 있는 사람 정말 없다고 봐야 되죠. 나이 많아 흰 머리 생기고 머리 쑥쑥 빠져보면 ’아이 참, 왜 갑자기 머리가 많이 빠집니까?‘ 이렇게 나오지 ’나는 쇠해야 되고 주님은 흥해야 된다.‘라고 하는 이런 거 없어요.
따라서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성경 말씀이 잘못된 게 아니고 그 말씀 앞에서는 우리 인간들이 1차원인 이 땅에서 아무리 돌아다니고 나름대로 종교적인 선을 그어놓고 이동하고 왔다 갔다 해도 이 구멍 없는 상태에서는 그냥 이 땅에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어요. 심지어 죽으면서도 죽음을 몰라요. 죽고 난 뒤에 죽음을 아는 게 아니고 죽음은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까지 보류돼야 되는 겁니다. 진정한 죽음은 멀었어요. 진정한 죽음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 봤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그것이 성도가 진정 언약 적으로 느껴야 될 진정한 죽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위반했기 때문에 지금 지옥 보내도 우리는 입이 100개라도 우리는 반항 못합니다. 이 땅에서는 선풍기 있어 좋죠. 나중에 지옥 가서 선풍기가 어디 있습니까? 아마 우리 같으면 나사로 시켜서 나만 쪼이는 간이선풍기 하나 보내 달라 할 텐데 천국에 무슨 소켓 꽂아서 선풍기… 지금 선풍기 바람 쐬면서 이게 지옥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감사해야 됩니까? 그런데 우리는 선풍기 바람이고 뭐고 당연히 지옥 가야 돼요. 당연히 지옥 가야 돼요. 여기 이의 없습니다. 당연히 지옥 가야 되는데 지옥 가야 되는 나를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예요. 영생 얻고 천국을 보내겠다는 소식이 들려오네요. 그러니까 이걸 나의 행동이나 평소의 태도를 경유하게 되면 이게 납득이 안 되고 논리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천국 갈 수 있는 그런 능력과 그 외 어떤 행동도 천국에서 살만한 행동을 우리가 보여주질 못합니다. 조금만 돈, 재산 안 나오면 불평하고 교인 수 조금만 적으면 짜증내고 카메라 잘 안 올라가면 짜증내고 비와도 문제, 또 뉴스 보면 비 안 온다고, 언제 비 올 때 교회 나간 적도 없어요. 비 안 오니까 신을 원망하잖아요. 교회는 안 나가면서. 맨날 조상숭배하고 제사 지내고 절에 가면서 또 비 안 온다고 또 ‘신이시여 왜 비 안 옵니까?’ 라고 신에게 원망하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절에 나가도 하나님을 알거든요. 중도 안다고요.
그런데 천국을 가게 됐다. 그러면 이 경유를, 나를 경유하면 안 되고 다른 경유, 나를 통해서는 지옥 가야 되는데 이게 분명히 노선이 나 말고 다른 노선을 택했어요. 그 노선이 누굽니까? 그 노선은 하나님이 준비했어요. 그래서 하늘에서 권세를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이 땅에 천국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천국을 만들어서 자기 백성 집어넣기 위해서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미 하나님 일을 개시를 해버렸어요. 개시를 해놓고 뒤늦게 우리로 하여금 요한복음 3장 27절 이 말씀을 이게 현실로 와 닿게 만드는 거예요. 믿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구원은 누가 시켜줘야 된다? 하늘에서 구원의 능력이 와야 되는 거예요. 그 능력 주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장비 다 보내고 천사 다 보내고 중요한 주인공 보내셨어요. 누굽니까? 예수님을 보내신 거예요. 예수님 보낼 때 누굴 보냈습니까? 세례요한 보내면서 마지막 하는 말이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자기는 쓸쓸하게 은퇴를 해버리죠.
그 다음에 28절 봅시다.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 무슨 말입니까? ‘얘들아 이제는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말고’ 어디 가라? 주님한테 가서 혹시 누가 그동안 세례요한을 오 따라다녔느냐고 묻거든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 할 자로서의 역할만 할 뿐이다.‘라고 증거 하라고 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신부를 취하는 자가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너희들은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라. 나는 그냥 신랑의 친구로서 족하다.’ 세상에 신랑 친구가 친구의 아내를 취하면 안 되잖아요. 들러리가 신부를 납치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신랑 친구가 신부를 탐내면 안 된다 말이죠. ‘참, 색시 예쁘네, 아휴, 나는 언제 저런 아가씨 만나나.’ 이렇게 섭섭하게 입맛만 다시고 그냥 자기 집에 가서 자야지, 신혼여행까지 같이 따라가서 자면 안 된다 말이죠. 여기 신랑, 신부, 모든 용어는 땅의 용어입니다. 그렇죠. 땅의 용어를 사용하되 예수님을 경유하는 걸 모르게 되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이미 땅은 누가 접수했다? 이미 하나님이 접수를 했어요. 접수를 하고 그 다음에 인간들이 사용하는 시간과 공간을 사용하되 그들이 아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그런 날, 그런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을 때에 인간은 결국은 여기서 나온 것은 못 믿겠다. 못 믿겠어. 못 믿는 게 정상이죠. 왜 못 믿어야 그들은 예수를 떠밀게 되고 떠밀어서 예수님이 자빠져야 피를 흘리고 피를 흘려야 비로소 구멍이 언약에 의해서, 예수님 자체가 언약이니까, 예수님 자체의 죽음, 언약 적 죽음, 언약이 이 땅에서 죽을 때 ‘이 땅은 아무도 언약을 지킨 자가 없었다.’ 가 확정이 되면서 몽땅 지옥 보내도 어느 누구 하나 하나님 앞에 대들지 마. 너희들은 지옥 가도 마땅한 존재다. 라는 것이 확정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 예수님을 보내실 때에 세례요한을 앞서 보냈죠. 그럼 세례요한은 누구 편입니까? 세상 편입니까? 예수님 편입니까? 예수님 편이죠. 세례요한이 뭐라고 해요? “나는 물세례 주지만 뒤에 성령 세례주실 분이 오신다.“ 그러면 세례요한 볼 때에 자기가 물세례 준다 이 말이죠. 그럼 자기는 예수님 역할을 하면서 자기한테 물세례 받는 사람은 뭡니까? 장차 예수님한테 성령 세례 받을 사람의 역할을 지금 앞서서 하고 있는 겁니다.
세례요한은 물세례 주고 그 사람들은 자기한테 물세례 받고 요러한 방식으로 장차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 세례를 주고 그 다음에 받는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게 되고, 이거는 시간과 공간 누굴 만나든지 어느 장소에 가서 받는 게 아니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버립니다.
바로 요한복음 4장에 바로 이어서 누가 나옵니까? 사마리아 여인 나오죠. 종족의 경계를 탈피해 버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날이 주어져 버리면 그것이 곧 그 여인은 바로 하나님의 권세를 받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에 해당되는 여인, 구원받은 여인입니다. 남자 여섯 명 사귀어도 괜찮아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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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가락-요한복음 3장27(흔적)140717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렇게 돼 있죠? 지금 세례요한이 이야기했듯이 자기가 세례를 주는 행위가 자기 의사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거죠. 그러면 하늘이 주신 것은 수직적으로 산다는 거죠. 나는 있고 하늘은 수직이잖아요. 그런데 세례요한은 하늘이 주신 거라고 이렇게 낮춰버리면 그 하늘이 위에 있는 하늘이 아니고 어디에 있느냐 하면 자기와 더불어 함께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하신 일을 부각하기 위해서 자기가 그동안 물세례주고 온 거예요. 이제 물세례 시대가 끝난 겁니다. 그래서 나는 쇠해야 되는 거죠.
그렇다면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우리가 공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죠. 예수님 중심으로! 내가 요번에 직업을 얻었다. 이거는 마치 내 중심인 것처럼 여길 게 아니고 주님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새로운 직업을 얻음으로써 다시 한 번 확인케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직업을 통해서 그 성도가 가져야 될 것은 내가 그 직업을 갖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내가 그 직업을 가지면서 내가 새롭게 발견된 죄가 있을 거예요.
그래서 결론 내리면 내 죄를 더욱 더 밝혀내어서 그래서 그리스도만 높아진다는 고백이 절로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있도록 주님께서 새로운 직장을 주셨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문장이 길죠.
또 예를 들면 집에 냉장고가 새로 들어왔다. 일기를 쓴다면 오늘은 맑음, 날씨는 무척 더운데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처제가 결혼하면서 쓰던 냉장고를 갖다 쓰라고 했다. 이제 냉장고가 두 대가 되었다. 처제가 자취하면서 6개월 간 써서 새거나 마찬가지다. 정말 기분 좋다. 그래서 나는 또 죄를 지었다. 끝. 이렇게 되는 거예요.
또는 우리가 기분 좋았다. 이것이 죄였구나. 또 기분 나빴다. 이것이 죄였구나. 그리고 죄인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사하면서 내일 되면 이 감사하는 자기를 얼마나 또 자랑하겠느냐? 이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 말은 아까 첫째 시간에 한 말에 의하면 숭숭숭숭 우리 자체에 구멍이 성전에서 구멍이 늘 뚫려서 우리 땅이라는 세계 뒤에 하늘나라와 우리 사이에 바림이 늘 구멍 난 우리 뚫린 구멍 속으로 숭숭숭숭 바람이 불어야 돼요. 그래서 시킨 대로 했더니만 ‘과연 제가 죄인 맞군요.’ 이렇게 해서 늘 바람이 숭숭 불어줘야 돼요.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할 때 ‘예수님만 잘 된다면 저는 이렇게 교회 나와서 망해도 좋습니다.‘라는 고백을 어느 교인들이 하겠습니까? 아무도 이런 고백할 사람 없어요. ’예수 덕분에 내가 소원풀이 한번 해봅시다.’ 이렇게 나오는 게 정상이지, ‘주님만 잘 된다면 내가 교회 나와서 망해도 좋습니다. 교회 나온 이 시간에 집에 불이 나도 괜찮습니다.’ 이런 사람 없어요. 이런 사람 없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핸드폰 들고 ‘예, 예, 예, 그래요? 예, 예, 잠깐만요. 복도에 나가서 예.’ 지금 말씀보다도, 말씀이야 뭐 생중계 아니라도 나중에 볼 수 있지만 아예 전화 끊기면 매출이 끊어지니까 골치 아프죠. 늘 우리는 이런 식 이예요.
31절 봅시다. 야, 이제는 무섭다. 무서워서 감히 설명조차 하기 힘들다. 묵직하게 들어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 속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아~ 참, 어제 수요일 날 했던 거 잠시 해볼게요. 어제 수요설교 들어봤습니까? 에스겔 바퀴 속의 바퀴 이야기했죠? 천사의 모양새가 뭐라 했습니까? 소, 독수리, 사람, 사자죠. 천국에 사자, 독수리가 살고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형상이죠. 천사는 육체가 없기 때문에 그때, 그때 달라요. 다른데 무작정 다른 것이 아니고 임무와 기능에 맞추어서 형상이 달라져요.
마노아에게 나타난 천사의 모습이나 소돔 고모라에 나타났던 모습이 같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그 천사의 모습이 같을 수가 없어요. 그 예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죠? 그런데 그 얼굴이 아무리 봐도 예수님 얼굴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이미 인간의 땅에 속한 육신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모양새가 바뀔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녁 식사하면서 갑자기 익히 아는 얼굴로 잠시 바꿔준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시잖아요?’ 이랬다 이 말이죠.
마찬가지로 천사도 마찬가지에요. 무심코 나그네 대접하다 무심코 천사 대접한다고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천사라 하는 것은 결국 뭘 반영하느냐 하면 연못 위에 자기 얼굴 비취면 연못의 얼굴은 자기 얼굴이죠.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거울로 보고 천사가 1대 1 대응하는 식으로 이 세상사는 인간들의 죄 성을 죄 없는 상태에서 죄 성을 드러내는 모양새를 천사가 받아낸다면 천사의 모습은 죄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그 역할은 (천사는 시키는 대로 하니까) 죄 없는 약식으로 이 세상에서 활동을 하겠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요한이 누구한테 넙죽 절을 합니까? 천사에게 넙죽 절하죠. 천사에게 절한다는 말은 천사가 분명히 인간의 모양새를 했다는 거죠. 천사가 문어처럼 널브러진 것도 아니고 천사의 기이한 모습들은 에스겔이나 다니엘 보면 나와요. 그러나 다른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도 종종 등장해요. 그리고 천사가 모습을 안 나타내고 할 때도 있어요.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나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와서 흔들어대니까 옥문이 다 뽑히고 없잖아요.
천사가 보여주는 그 모양새에 대해서 인간이 마주보면서 또는 엎드려 절하면서 이야기한다는 말은 천사의 모양새 자체가 이미 인간의 죄 성을 띤 모양새를 하면서 천사의 모든 기능은 죄가 없는 차원에서 활동을 해버리는 겁니다.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천사의 활동은 결국 누구 손에 달렸다? 인간이 어떤 식의 죄를 짓느냐에 달려있어요. 왜냐 하면 그 짓는 죄의 질에 따라서 천사가 적재적소에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땅과 하늘은 서로가 서로에게 변화를 주면서 같이 움직인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제가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하늘은 고정돼 있고 하늘은 모델이 되고 우리는 이렇게 쭈그리처럼 앉아서 그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이 깨끗하네. 네, 빨리 깨끗한 천사처럼 살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다 말이죠. 하늘이 멀리 저렇게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고 직접 하늘이 죄 있는 인간 속에 같이 섞이면서 활동하면서 우리한테 매 맞고 버림받고 배척당하고 미움당하는 그런 모습의 활동성을 갖고 있다 말이죠. 지금. 천사나 주님이나 성령님이나. 성령도 탄식한다 했잖아요. 그 탄식하는 이유가 뭡니까? 멀찍이 구경만 합니까? 직접 인간들 속에 같이 섞이면서 아파하면서 탄식하는 거예요. 우리 때문에.
그럼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겠습니다. 구약에 보면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 어떻게 했습니까? 돌로 쳐 죽였죠? 우리는 그 사람이 안 된 거예요. 지금 주님 안 믿는 사람들이 안 된 겁니다. 우리가 얼른 보면 그 사람을 돌로 쳐 죽이면 그 사람이 참혹하다 싶지만 지금 예수 인 믿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사람을 참혹하다고 봅니까? 참혹한 이건희, 이런 거예요? 참혹한 정 몽준, 이렇게 되는 겁니까? 그 사람들을 참혹하게 봐요? 그렇게 안 보잖아요. 참혹한 남편. 아! 그렇게 안 보잖아요.
그만큼 우리는 땅의 것에 여전히 많이 친밀, 친숙해져 있다 말이죠. 그래서 늘 성령께서 뻥! 뻥! 하고 오늘은 이 구멍. 내일은 저 구멍, 구멍을 뻥! 뻥! 뚫어서 그 뚫린 속에서만 배후의 천국에서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도록 하는 겁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려면 반드시 구멍이 뚫려야 돼요. 그래서 나온 노래가 총 맞은 것처럼 구멍이 뻥뻥 나야 돼요. 구멍이 나서 바람이 불다가 잠시 총 맞은 구멍은 완전히 다시 세상 것으로 ‘그럴 수도 있지.’ 또 메워지고 또 구멍 내고 또 메워지고 완전히 우리는 걸레에요. 이 몸 자체가 온 천지에 상처투성이고 구멍투성이고 말씀으로 벌거벗은 게 다 드러날 정도로 드러내야 됩니다. 우리는 항상 갑옷을 입고 다니거든요. 말씀은 우리의 세상적인 갑옷을 뚫고 전도되면 우리가 걸치고 잘난 체 하는 이 말씀이 찢어져야 되거든요. 우리의 방탄조끼가 찢어질 때 얼마나 아파요? 자식 자랑하다가 자식이 실망스러울 때 우리는 얼마나 아픕니까? 하지만 실망스러운 그 자리가 구멍 난 총알 맞은 성령의 구멍 난 그 장소에요.
요한복음 3장에서 처음에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오잖아요.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 왔다는 자체가 자기가 구멍 난 거예요. 구멍 뚫린 거예요. 얼마나 위험한 만남입니까? 그러니까 밤에 찾아왔죠. 밤에 찾아와서 되도 않은 질문을 하고.
세례요한을 통해서 세례요한이 주의 일을 하는 것은 그때뿐입니까? 지금 늘 상 일어나는 일입니까? 늘 상 일어나죠. 늘 상 일어나려면 우리는 무엇을 부수적으로 아느냐 하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 난 인간들은 땅의 것밖에 모른다.” 요한복음 3장 31절 말씀이 우리는 그 구절의 몇 장 몇 절이냐, 요한복음이냐, 마태복음이냐, 그건 기억이 안 나지만 이 말씀은 현재 우리에게 늘 적용이 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땅의 것밖에 모른다.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32절에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이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바로 35절 “아들은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어려운 대목에서 물 한번 마시고, 계속 이어서 바퀴 안에 바퀴가 있다. 천사의 모든 모양새는 세상을 거울삼아서 되비춰 나온 거라 했죠?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천국은 하늘에서 만들어집니까? 땅에서 만들어집니까? 땅에서 만들어지죠. 왜냐 하면 천국을 만든 주인공이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지 않고 어디 왔기 때문에? 땅에 내려왔죠. 교인들 중에 이걸 아는 사람이 없어요. 자꾸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천사라고 이야기하겠어요. 어째서 하늘만 쳐다보느냐? 이야기하겠어요. 그분이 위로 가신대로 다시 내려오실 거다 말이죠. 그럼 내려오실 거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의 관심사는 이 땅에 관심이 있어요. 이 땅에! 물론 우리한테는 관심 없어요.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마귀한테 관심 있죠. 인간은 마귀한테 꼼짝 마라, 하고 있으니까.
그럼 천사가 바퀴 안에 바퀴란 말은 그 에스겔 1장을 시간 관계상 보면 지루하니까 다 안 보겠습니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이 천사들의 활동을, 그 천사들의 바퀴가 땅에 닿는 바퀴라 돼 있어요. 에스겔 1장에 보면. 하늘에서 돌아가는 바퀴가 아니고 땅에 닿아서 도는 바퀴에요. 결국 천사들의 모든 활동의 근거지는 어디다? 하늘이 아니고 땅에서 일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천사에서 전쟁이 한번 일어났고 뱀이 쫓겨나가서 땅으로 따라와서 예수님이고 전부 다 마귀 따라서 같이 이 땅에서 한바탕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죠. 물론 천사들과 같이 활동해서 이 땅에서 자기 택한 백성을 마귀 손에서 손을 떼고 자기 백성을 강제로 데려가기 위해서 강제로 그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 작업을 하는데 천사들은 장래 이 땅에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서 미리 당겼는데 바퀴 안에 바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껍데기가 벗겨지면 벗겨질수록 거기서 진짜 하나님의 준비된 속살이 나오는 겁니다. 이 속살이란 표현은 누가 잘하느냐 하면 김 명현 목사님이 잘해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근사하게 주의 이름으로 이야기한 이 모든 걸 다 벌거벗겨서 끄집어내면 결국 칩처럼 남아있는 게 뭐냐 하면 너희 안에 성령이 있으면 죽을 너희 몸도 성령으로 인하여 살리리라. 그동안 우리가 우리의 주체 자가 아니었고 주체 자가 따로 있음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팔도 아프고 팔꿈치도 아프고 모든 게 머리도 빠지고 염색도 해야 되고, 모든 게 퇴보가 되고 해체가 돼서 다 뜯어져 나가는 거예요. 믿던 자식도 뜯어져 나가고 믿던 남편도 뜯어져 나가고 심지어 내가 나에게 나는 이정도로 괜찮았는데 일이 터지니까 천하 나쁜 놈 돼버리고 나의 의로움과 내 자존심 체면도 모두가 다 뜯어져 나갈 때 결국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세리와 창기도 천국 갈 수 있는, 강도도 구원받게 해주신 예수님 십자가 피가 안에서 바퀴 속의 바퀴로서 작동을 한 겁니다. 그 바퀴 속의 바퀴가 하나님의 보좌, 어린양의 보좌, 그분이 언약 적으로 피를 흘림으로 그 자리가 언약궤가 같이 될 어린양의 영원한 성전이 되는 겁니다.
천사들은 그 성전을 바퀴와 바퀴로 중첩되면서 보호한 거예요. 결국은 이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뭐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이 땅에서 만들어진다. 뭐로? 십자가로서.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뭐라 했습니까? “다 이루었다”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 할 거예요. 너무 일찍 죽으니까 자기 기대보다 너무 일찍 죽고 인생 조져놓으니까 너무 실망스러워서 자기한테 한풀이 하는 식으로 그나마 마지막 발언하는 식으로 ‘다 이루었다. 나는 드디어 승리했어.“ 이렇게 들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를 백부장은 이야기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기 이전부터 저분은 의로운 분이다. 메시야라고 고백하죠.
성경은 결국 우리 이야기,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서 아쉽다. 이걸 원합니다. 이걸 주세요. 이건 바빠서…, 이런 핑계 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무슨 이야기만 합니까? 예수님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는 것으로 귀결되도록 한 겁니다.
오늘 유튜브 동영상 녹음할 때 했는데 첫 번째 한 게 뭐냐 하면 바로 제목이 아들의 출현 이예요. 그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이 몸이 천국 가느냐. 하는 거예요. 내가 천국 가느냐 하는 문제. 내가 천국 못 가요. 왜냐 하면 나는 육신의 자녀, 우리 아버지의 자녀기 때문에 천국 못 갑니다. 따라서 천국 가려면 하늘 아버지 자녀가 돼야 천국 갈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 몸은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이미 있거든요. 그러면 이 몸 가지고는 못 가죠. 그러면 하나님 아들이어야 간다는데 하나님 아들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만 아버지 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아버지를 몰라요. 그러면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작업은 뻔하죠. 어떤 결론이 나왔습니까? 본인만이 아는 아버지를 육신의 아버지만 아는 우리에게 진정한 영의 아버지라고 알려주는 작업에 나서겠죠.
그렇게 해서 제가 인용한 요한복음 9장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장례식 하고 떠나게 해 달라. 또 어떤 제자는 작별인사 하고 떠나게 해 달라. 작별인사 한다는 제자는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뜻이고 다른 제자는 아버지가 방금 죽었으니까 자식 된 도리로 마지막 인사 하고 따르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 말은 뭐냐, 결국은 ‘가기는 어딜 가?’ 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늘나라가 이루어져야 되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나는 죄밖에 없는 인간을 어떻게 하늘나라 가겠습니까?‘ 하는 그 간다는 개념을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과 공간 개념으로 사용하지 말고 있는 그 지점에서 펑크를 내버리면 그 지점이 천국이 된다니까요. 여기 이 땅에서 동그라미 그려서 이 땅 넘어가면 천국이 된다. 하지 말고 여기 구멍을 뚫어서 구멍이 뚫리면 천국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나를 임시적으로 우리 아버지 아들로 70대, 80대로 살게 임시적으로 아버지 아들로 하게 한 거예요. 결국은 누구 아들이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 땅에서 태어나서 임시적으로 육신의 아버지로 살게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따를 때는 바로 그 자리에다, 아버지 장례식 자리, 그리고 예수님 따르는 그 자리가 곧 천국을 이루는 자리가 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 아버지 뜻하고 주님 따라다니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네가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라는 말은 뭐냐, ’아버지 장례 치르고 아버지 작별인사 하겠습니다.‘ 라는 자체도 이건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그러한 이 세상에서 가르침 받은 이 세상의 구성 원리 중에 일부가 돼 버린 거예요. 사고방식이.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말씀에 의하면 주님 믿으면서 집안에 작별한 사람들 다 쟁기 잡은 사람이 되죠. 그러니 예수님 말씀 앞에서 누가 제대로 살았다고 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사람이 없어요.
동영상 두 번째 내용이 그거였습니다. 자본주의 이야기하면서 원래 자본주의 이전에는 사람이 농사 지면 고기는 없잖아요. 그러면 이번에 농사지어서 고기 이번에 잡은 거 바꿔치기 해서 고기 먹으면 되잖아요. 이 말은 생산이 우선이고 생산에 필요한 것으로 생산 못한 것만 메우면 되거든요. 예를 들어서 내가 양복을 못 만들면 양복 만드는 사람에게 양복 하나 양식 주고 사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는 어떤 자본주의냐 하면 여기도 일하고 계시지만 필요치 않은데 자꾸 소비를 장려해서 그 이야기 안 했으면 몰랐을 텐데, 보험이라든지 건강기계, 헬스기계 이런 거, 이야기 안 들었으면 몰랐을 텐데 듣고 난 뒤에 탐욕이 생겨서 구매를 촉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생산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다? 소비를 증진시켜 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생산을 하는 식 이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전부 다 욕심에 들떠 있는 사람만 있지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산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는 뭐냐, 땅을 깨끗이 해놓고 그 다음에 주님 모시겠다는 생각은 자체가 잘못이다 이 말이죠. 땅은 땅의 것만 생각하게 돼 있어요. 아멘! 아멘! 요번 주 설교 마지막에 아멘 들어가요. 땅의 것만 생각하게 돼 있어요. 그 다음에 땅의 것이 구원받기 위해서 하늘을 요구하면 줍니까? 안 줍니까? 안 줍니다. 그래서 뭡니까?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원칙을 계속 고수하기 위해서 땅에 있는 사람은 땅의 것만 줄 창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확실히 하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일하십니다.
‘집사님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나는 땅의 것만 생각했어요.’ ‘그건 아는데. 땅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하늘의 것을 아시는 분이 하늘의 이야기를 하니까 내가 받았죠. 하늘의 것을 주시니까 받았죠.’ 이게 정답인 거예요. 기도를 했더니만 자식 준다고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어쨌든 여기서 결론 내립시다. 땅의 일은 뭐다? ‘내가 뭔가 한 것은 다 땅의 일이다. 내가 한 것은 다 땅의 일이고 하늘의 일은 내가 할 수 없었고 또한 나는 땅의 일만 생각하는 존재다. 그래서 나는 구원 못 받는다.‘를 분명히 언질을 해주시면서 해 주시는 거. 그건 하늘의 것이죠.
자, 그러면 땅의 일을 생각하면 땅의 일을 생각하면 될 텐데 생각하면 되지, 아무 일 없네, 안 찾아오면 할 수 없지, 안 찾아오면 구원 못 받는 거지, 안 찾아오면 어쩔 수 없지 뭐. 이렇게 되면 편안하긴 한데요. 36절 다시 봅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이 대목 어려워요.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는데 아들을 믿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자기 힘으로 믿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들을 못 믿죠. 믿을 수 없죠.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는 요 말이 땅의 말입니까? 하늘의 말입니까? 하늘의 말이죠. 그러면 하늘의 말을 하신 분이 뭘 준다? 요 말씀을 누구한테 준다? 땅에 있는 사람에게 줘버리면 땅의 이미 영생 얻은 사람은 뭘 고백하게 됩니까? 아들을 믿는 자만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저주가 있습니다. 라는 말을 이거는 할 수밖에 없는 식으로 남은 인생을 살게 되겠죠. 어쩔 수가 없어요. 이거는 조카고 삼촌이고 봐주는 게 없어요. 사장이라고 봐주는 것도 없고.
사람이 교도소 안 가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태어난 자체가 이미 지옥이란 교도소에 이미 갇혀서 태어난 거예요. 복역 중입니다. 창세기 3장 이야기에요. 우리 조상이 죄져서 거기서 새끼를 까서 모든 인간은 감옥소에서 이미 출산을 해내서 교도소에서 나가지를 못해서 그 교도소의 모든 저주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가 감옥소에 있고 지옥 속에 산다는 것을 몰라요. 왜 모르느냐, 그 이야기를 해야 돼요. 왜 사람들은 자기가 지옥에 있고 저주 받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왜 모르느냐 하면 그 알려주는 모든 것을 마귀가 그걸 차단시켜서 차단해 버리고 항상 ‘네가 잘났다. 네가 전부다.’라고 한 거예요. ‘너 말고 너보다 우선되는 말씀이 우선이란 말이야.’ 라고 한 적이 없고 말씀을 실천에 옮기면 네가 잘 돼, 말씀을 지켜야 네가 복을 받아.‘ 교회마다 전부 다 그 이야기하고 있어요. 주인공은 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35절 봅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누구 손에 주었습니까? 다 그분 손에 주었죠. 그러면 예수님 손에 들어있지 않은 마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모든 것은 주님 손에 있어요. 그럼 주님께서 그걸 어디 활용합니까? “오직 아들을 사랑하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진노가 있다“라는 그 이 말씀을, 하늘의 소식을 증거 하는데 있어서 모든 만물을 다 활용하시고 거기다 설치하시고 사용하시고 돌리시는 겁니다. 페인트 하나 팔았다. 이것도 바로 주님의 사랑이 페인트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팔게 하신 거예요. 페인트 하나 팔았을 때 ‘야! 보너스 더 받겠구나. 기분 좋다.‘ 할 때 내가 지금 페인트 때문에 좋아하면 천국은 페인트 나라가 아니거든요. 내가 가야 될 나라가 그 나라가 아닌데 주님께서 나를 페인트 만드는 게 아니고 나 같은 천국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의 계획은 내 은총 만들기 나는 페인트 팔기, 이러면 앞뒤가 안 맞잖아요. 거기다 페인트 팔았는데 페인트 바꿔달라고 했는데 없다 하니까 돈 물어내라 해서 돈 내주고, 괜히 기분만 좋았다 그날은 총 맞은 것처럼 구멍이 나서 대 실망. ’아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때려치우고 싶다.‘ 라는 식으로 생각이 나죠.
지금 농사짓는 거 보세요. 농사가 잘 돼야 자기가 괜찮은 존재로 확인되는데, 비는 안 오죠. 농사가 버려버렸다. 농사해서 농협에 빚졌다. 그러면 자기가 큰 소리 칠 수 없는 거예요. 큰 소리 칠 수가 없다는 것은 평소에 무슨 재미로 산다? ‘큰 소리 치는 재미로 살아왔다.’를 드러내죠. 그것이 바로 땅에 속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땅에 속해도 하늘의 증거를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러는데 32절 봅시다.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는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31절에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 증거를 받는 이가 없다.” 정말 요한복음 어렵죠? 받는 이가 없잖아요.
오늘 어렵다 해도 할 수 없다. 어려움의 절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아직까지는 어렵지 않았는데. 시간과 공간이 하늘나라에서 보면 낯설다 했죠? 우리들 시간 봅시다. 우리의 시간이라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입니다. 이거 벌써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 다 잊어버렸죠. 공간은 설명했잖아요. 주 안이란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진다. 주 안이 경도 몇도, 위도 몇 도입니까? 그런 거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이 여기 구멍을 뚫고 나가서 천국을 만들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여기 구멍 뚫린 이 세상에서 아는 시간과 공간 그런 개념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공간이든 어떤 시간이든 얼마든지 주께서, 그렇다고 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활용해요. 왜 관심사가 땅에 있으니까. 땅에 천국을 이루니까. 땅에서 마귀를 축출하는 과정이 곧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땅에서 구원만 하는 게 아니에요. 저주할 자를 저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니까 어차피 하나님이 땅을 떠나지 않습니다. 저주 할 사람을 솎아내야죠. 솎아낸다니까 기억이 나는데 요번에 영덕에 금강 송 쳐낸 사람 있죠. 사진 찍는다고 쳐내죠. 주님은 그런 식으로 일해요. 사진작가라. 주님 앞에서는 돈 많은 사람이 유명한 게 아니고 예수님의 증거, 예수님 자기를 증거 할 자기 백성을 바로보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가지를 쳐내는 겁니다.
노아 방주 짓고 몇 명 들어갔습니까? 다른 가지 다 쳐내고 달랑 8명만 들어갔어요.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하늘나라에서는 너희들이 기쁘다.” 왜 생명책에 너희들 명단이 있다. 명단대로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철저한 장부 위주에요. 명단 보고 명단에 있으면 구원하고 명단에 없으면 구원 안 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영생을 얻어요.
그래서 교인들이나 목사가 교회 부흥에 대해서 제발 염려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명단이 있는 사람은 오게 돼 있기 때문에 쓸데없이 명단에 없는 사람이 오게 되면 그거는 나가주셔야 돼요. 가지도 않을 사람이 괜히 끼어들어서 단물 다 빼먹고 나중에... 여기 시간적으로 말해서 그분은 하늘에서 본 이야기를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증거를 해도 땅에 있는 사람은 땅의 것만 생각하는 조건 때문에 예수님의 하는 이야기를 전혀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전혀 못 알아들어요. 그러면 그게 끝났잖아요. 끝났는데 뭐라 합니까? 이미 끝났는데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이는 하나님께 뭘 받았다? 하나님께 인 치심을, 도장을 받은 사람 이예요. 인 쳤다. 도장 받았다.
도장이라 하는 것은 내 소속이다. 노예 도장 찍듯이. 도살하는 양 도장 찍듯이 특별히 구별해서 도장을 찍는 거예요. 사인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늘 강의 시간에 흔적이라 했는데, 이 땅에서 그냥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차나 오토바이가 빨리 지나가면 뭐라 합니까? 위잉~ 지나가잖아요. 소리가 뭔가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죠. 그러면 위잉~ 하는 소리는 뭡니까? 일종의 흔적이죠. 세례요한도 위잉~ 하고 없어져 버렸죠. 흔적이죠. 그런데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은 사람 맞잖아요. 뭐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뭐든지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 자기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로 하는 것이지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인생 자체가 이건 주님 주신 흔적이죠.
그러면 흔적이라고 끝나면 안 되고 그 흔적은 반드시 예수님과 어떤 식으로도 연결되는 흔적 이예요. 연결되는 흔적에 대해서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대해서 지금 31절, 32절에서 하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하늘의 일을 유일하게 알고 계신 분이라고 증거 하는 흔적, 위잉~, 위잉~ 지나가는 거예요. 증거 하는 흔적 이예요. 결국 이 이야기는 무슨 중심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 중심이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모든 만물을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에게 줬다? 예수님께 준 거예요.
이런 해석에 대해서 일반 사람의 생각하는 걸 봅시다. 일반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하면 ‘그래, 맞아, 나도 동의해.’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런데 동의한다는 말이 뭐냐 하면 예수님과 관련된 게 아니고 예수님은 따로 놀고 자기는 자기 주체자로서 딴 사람이라고 따로 노는 거예요. 따로 놀면서 주께서 언젠가 재림하시면 나를 건져가겠지, 왜, 나는 예수를 믿으니까! 이렇게 된다 말이죠. 이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예수를 진짜 믿는다면 우리 인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단독적인 인생이란 게 없어요.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한 용도로서 붙잡힌 인생 외에는 주의 백성의 인생이란 것은 따로 없습니다. 하늘의 끝에 가도 바다의 끝에 가도 우리는 주님께 붙잡힌바 돼요. 바다 끝에 가서 붙잡혀 온 사람 있잖아요. 구약에 누구입니까? 요나. 참 웃기죠. 인생이. 바다 끝에 가서 잡혀서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나 생각했는데 막상 전개해보니까 자기 뜻대로 하지 않고 완전히 자기는 당황스럽게 된 거죠. 무척 당황스럽죠. 내가 어쩔 줄을 몰라요. 내가 뭘 해야 될지, 이렇게 앞뒤 사고가 안 맞으면 무슨 일이 됩니까?
그런데 요나가 해야 될 일이 있어요. 뭐냐, 자결, 자살인데 자살할 때는 자살 안 하고 그 자살할 때가 있네. 박 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줬다가 다시 거둬가니까 죽으려하다가 오히려 안 죽고 화를 내는 거예요. ‘아휴, 뜨거워라. 날씨도 뜨거워서 못 죽겠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요나란 사람은 자기 인생에서 어떤 주장과 어떤 성깔을 부리더라고 결국은 누가 놓지 않더라? 하나님께서 결코 그 요나를 놓지 않더라. 뭘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장차 오실 예수님 증거 하라고 놓지 않더라. 하나님의 일은 땅의 일과 너무나 판이한 것을 증거 하라고 특이한 낯선 사건들이 요나에게 벌어진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대동소이합니다. 이 말씀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31절 봅시다. “하늘 위에 계신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만물이 만물 위에 계신 분을 알아봅니까? 못 알아봅니까? 못 알아보죠. 그럼 만물이 만들어 낸 삼위일체나 다 거짓말이죠. 왜냐 하면 만물은 만물을 쥐고 계신 분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 알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 멀어서 안 보인다는 뜻입니까? 너무 소리가 엄청나서 안 들린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고 만물 위에 계신 분이 이 땅에 합류를 했죠? 오늘 강의하면서 뭐라 했습니까? 하늘이 일이 땅과 섞였다 했죠. 섞여도 못 알아보죠. 마치 이건 요한복음 3장 12절에 니고데모 이야기에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건 뭡니까? 하늘에 예수님 계시고 우리가 마음속으로 믿자. 이게 아니고 땅에서 일어나게 하신 예수님 중심의 일을 믿지 않는 자는 저주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뭘 증거 해야 됩니까? 예수님 살아계십니다. 이게 아니고 십자가를 증거 해야 되죠. 십자가를! 이제 십자가에 도달될 이유를 이제 아시겠죠? 왜 성경에 그 많은 이야기 중에 왜 십자가뿐인가를 아시겠죠? 나머지 일을 인간이 상상해 낼 수가 있고 그려 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죽으면 천사와 함께… 천사도 이쁜 천사 만나야 되는데.’ 천사가 무슨 룸 사롱의 아가씨쯤으로 보는지.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땅의 일을 한다고 했고 땅에서 일을 벌인다는 거예요. 그리고 땅의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 죽으시기 전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셨죠. 그런데 만물 안에 있는 인간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땅의 것만 생각하죠. 땅의 것만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일은 오직 예수님만이 알고 있음이 분명해졌고 그 예수님만이 하늘의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 확실해졌죠.
그래서 요한복음 전체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 뭐냐 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만이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입니다. 빛입니다. 나머지는 어두움입니다. 를 분명히 하는 취지와 부합되는 구절들을 우리가 죽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물 위에 계신다니까 만물 안에 있는 자는 만물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만물 위에 계신 자를 보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증거를 받을 사람이 없는데 여기 보면 “하나님이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있죠.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인간이 있는데 그 인간은 능동적인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뭘 받아요. 수동적 인간이 등장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할 일은 뭡니까? 하늘의 일을 하면서 하늘 일 중에 일부가 그 중에 포함된 게 뭐냐 하면 내가 하는 일을 믿을 수 있는 자의 생산,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 만들기도 주의 일에 포함돼요? 안 돼요? 포함이 된다 이 말이죠. 그 사람을 뭐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할 때 아들을 믿는 자에 해당되죠. 그러면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람 손에 맡겨둔 것이 아니고 아들을 믿는 것마저도 예수님 소관 이예요.
그러면 이야기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에요. 예수님 소관이라면 이들은 땅의 일을 하잖아요. 그럼 땅의 일을 하는 사람을 예수님 믿도록 하는 일도 누가 해야 돼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돼요. 그럼 예수님 공생애 가운데 어떤 정보가 입력돼 있습니까? 비록 네가 땅에 속하더라도 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기어이 영생 얻을 것이라는 정보가 주님 공생애 안에 깔려있겠어요? 안 깔려있겠어요? 반드시 깔려있죠. 그래서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합니까? 간음한 여인을 용서를 해줬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간음한 여인이 용서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찾는 것은 용서를 드러내는 거예요. 용서는 누굴 경유한다? 예수님이 용서한 게 용서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할 때 용서의 최종 상태가 등장하는 거예요. 용서의 마지막은 ‘주님 날 용서했다.’가 아니라 ‘주님 십자가 지셨다.’가 용서가 되는 거예요. 주님 사랑은 ‘주님이 날 사랑한다.’가 사랑이 아니고 ‘주님 십자가 지셨습니다.’가 사랑이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십자가를 경유해야, 이 구멍이 나야 돼요. 내 존재에 구멍이 나야 뒤에 있는 배후에 있는 성령의 바람, 천국의 바람이 구멍을 통해서 올라올 게 아니냐 말이죠. 구멍이 나야 숨을 쉴 게 아니냐 말이죠. 십자가 구멍이 늘 나야 돼요.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나는 살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내가 요번에 사법고시 합격한 것은 십자가 뿐입니다.’ 개그맨 신보라가 상 받으면서 한 말이 ‘나는 십자가 피만 자랑합니다.’라 했죠. 그 때문에 간증 많이 들었어요. 십자가 피만 자랑한다 했잖아요. 그럼 뭐는 자랑 아니다? 이 상 받았다고 좋아하는 것도 십자가를 위해서는 이미 죄가 된다. 땅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나마 땅에 속한 것을 받은 이유는 하늘의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우리는 그렇게 해석을 해야 돼요. 본인이 그렇게 믿는다는 게 아니고 요한복음 3장 30절 이후의 이야기는 그렇게 해석을 해야 돼요. 성도가 상을 받는다 해서 더럽다고 버리지 마시고 상을 받으시되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이런 상을 주셨다고 하란 말이죠. 교인이 안 오면 십자가 증거 하라고 안 온 것이고, 교인이 오면 십자가 증거 하라고 온 것이고, 딸이 아니고 아들이 된 것은 십자가 증거 하라고 된 것이고, 뭐든지 다 그런 겁니다.
만물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11장에 만물을 내 손에 주신 것은 모든 것이 내 손에 있는 것은 내가 아버지가 주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임을 영광 돌리기 위해서 내가 모든 권세를 내가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을 세신다는 것이 살려둔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오늘 죽더라도 십자가 때문에 너는 산다는 것, 영생이 있다니까 ‘너한테 영생 있어.’ 나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모든 사태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가끔 뉴스 보게 되면 어떤 사람은 착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돈 2천만 원 주워서 주인 돌려준 적 있죠? 그 사람이 착한 겁니까? 그 사람보다 착한 사람 많이 있어요. 만약에 저한테 그런 일이 있어도 저도 마찬가지일거예요. 그럼 저는 그 순간 착한 사람 되는 겁니까? 예수님 십자가 증거 하라고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러면 지금 길에 2천만 원이 없더라도 없는 이유가 뭐냐, 십자가 증거 하라고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집에서 빌빌 노는 것도 십자가 증거 하라고 노는 거예요.
집사님 집에 가면 전기가 선을 붙여야 불이 들어와요. 십자가 증거 하라고 그런 거예요. 그러다가 이제는 안 해도 아들 친구가 고친다면 안 해도 들어온다. 그거 십자가 증거 하라고 한 거예요. 왜, 모든 만물은 십자가 증거 하라고 주신 만물이기 때문에.
만물이 다 누구 손에 있습니까? 주님 손에 있죠. 그럼 우리는 누구 손에 있습니까? 주님 손에 있죠. 그럼 마귀는 누구 손에 있습니까? 주님 손에 있죠. 이미 주님의 시간에선 끝난 상태에요. 주님의 시간 론에선 이미 끝나고 뒤늦게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끝난 상황을 알려주는 쪽으로 일들을 만들어나가시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 구멍을 통해서 들어온 주님의 시간 론이고 주 안에서는 주님의 공간론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끝내고 집에 간다. 그러면 우리에게 확 다가오는 것은 뭐냐, 우리가 그동안 이 몸이 익혔던 이 세상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론, ‘낼 아침에는 반찬 하나도 없고 계란 후라이나 먹을까.’ 이런 생각, 만물은 다 내 하기 나름이다. 라는 생각이 불현 듯 확! 밀려오죠. 어디서 성령의 총알을 쏘든지 총알을 맞아서 구멍이 나야 돼요. 구멍이 나야 온다는 게 아니고 성령이 불면 구멍이 나게 돼 있어요. 성령이 구멍을 내게 되면 아! 진노 안 당한 것만 해도 이 세상에서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감수해야 되고 고마워해야 된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이 말이구나. 하나님의 진노 안 받은 것만 해도 우리는 이미 받을 것 다 받았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회개합니다. 십자가 눈 돌리게 되면 자기가 절대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그 자아에 구멍 나게 되면 그저 구멍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이런 생을 반복하다가 흔적처럼, 마치 자동차 지나가는 것처럼 획! 하고 지나가는 우리의 인생, 오늘밤에 데려가시더라도 주께서 영생 얻으라고 주신 귀한 새로운 시간이 있다는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