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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4장 11절 / 거울 자아 / 140918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4장 11절 / 거울 자아 / 140918

정인순 2014. 9. 19. 09:42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이한례

가락-요한복음 4장11(거울 자아)140918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4장 10절부터 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이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수 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 일을 “내가 너에게 생수 줄게.” 이야기하면 될 걸 여기서 예수님 이야기하는 것이 ‘그’라고 해서 마치 제 3의 인물한테 언급하듯이 그렇게 언급을 하죠.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이 사마리아 여인이 아무리 예수를 봐도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요, 유대인 남자 중에 하나이지. 이렇게 하지, 생수를 준다는 것은 찾을 수 없죠.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내가 누군 줄을 그 사람, 영생 주는 그 사람들을 모른다는 말은 네가 네 자신이 누군가를 모르고 있다 하는 현재 상황을 주께서는 지금 언급해주시는 거예요. 너는 너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너 자신을 모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아’라고 이야기해요. 리드라는 인류 여자 물리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은 자아와 자기를 구분했거든요. 자아는 에고, 생각하는 걸 자아라 하고, 주체라 하는 것은 영어로 self라 해서 세상과 관련돼서 나의 위치, 세상에서 나를 어떻게 보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주체, 자기라고 하고, 자아라 하는 것은 그거 이전에 이미 내 몸 자체를 두고 이야기할 때 자아라고 이렇게 구분을 했습니다.



상당히 구분도 누구한테 인정받을 구분이 아니고 자기가 그렇다 싶어서 한 구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이해하려면 우리가 좀 부질없는 행동처럼 느껴지거든요. 어쨌든 저는 자아를 그냥 자기, 주체, 같이 씁니다. 이 자아에다 예를 들면 이런 걸 하나 붙이자 말이죠. ‘거울 자아’라고 이렇게 해봅시다. 그러면 사람이 내가 거울 보면 거기 누가 나타납니까? 내가 나타나죠. 그러면 거울 자아라고 할 수 없죠. 내 자아나 그 자아나 동일한 자아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내 모습을 거울에 비췄는데 오!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모습의 자아가 나온다면 그건 거울을 비췰 때만 나타나는 자아가 되겠죠. 그러면 그것은 거울이 없다면 나타나지 않는 자아가 되겠죠.



지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타났을 때 지금 현장에 몇 명입니까? 예수님 한 명, 사마리아 여인, 몇 명이예요? 두 명이죠. 예수님의 이것을 세 명이 나타나는 현장으로 보는 겁니다. 세 명이 나타나려면 예수님 한 분, 사마리아 여인 두 사람, 나머지는 없는데 주님께서는 ‘그’라고 딱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알고 있는 나는 진정 나가 아니고 따라서 나를 못 알아본 입장에서 네가 알고 있는 너는 너가 아니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러면 제 3의 인물을 경유해서 보게 되면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알고 네가 누군지를 알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 자아라 하는 것은 몸에서 나온 것이고, 자기라 하는 것은 자기가 자아상을 구축하기 위해서 따로 누구 외부를 이렇게 통해서 세상과 속에서 내가 누구냐 이렇게 할 때 자기, self, 주체라고 이야기해요. 우리 집에 물은 셀프입니다. 있잖아요. 알아서 스스로 하는 거예요. 스스로 한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는 누구냐,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까 셀프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타인 관계없이 나? 나지, 이건 자아고, 남을 비교해볼 때 ‘나는 저 개가 아니고 나는 저 사람도 아니고 나는 저런 여자도 아니니까 나는 나다.’ 할 때 한번 이렇게 거치고 타인을 거쳐서 나는 나지 뭐, 이렇게 할 때는 사회성과 관계성과 교회 속에서 자기가 형성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제 3의 인물을 등장합니다. 그가 등장할 때 이 사마리아 여인은 나름대로의 나라는 것은 그냥 내 몸만 있다고 해서 나라고 한 것이 아니고 ‘나라는 주체는 뭔가 다른 세계 속에서 나는 어떤 위치를 갖고 있는 그러한 다른 이런 내가 알고 있는 세계 속에서 나라고 다시 한 번 규정할 수 있고 생각하는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라고 사마리아 여인이 내세운 게 뭐냐 하면 여기 12절에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여기 누가 나옵니까? 야곱이 나오죠. 그 다음에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라고 해서 이 사마리아 여인의 자기상은 주체상은 자기는 야곱을 경유해서, 야곱마저 말고 있는 ’야곱이 조상입니다.’를 알고 있는 그러한 범위 내에서 ‘나는 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말이 예수님 당신이 제시한 ‘그‘라는 분하고 내가 알고 있는 야곱하고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가 등장해버리죠. 이 말은 누구 자아상이 최종적이고 정확하게 자아를 밝힐 수 있는 그러한 우리를 주체화 시킬 수 있는 어떤 분이냐? 제 3의 인물이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또 언급하게 되는 겁니다.


11절에 보면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라고 했습니다. 자, 사마리아 여인 조상이 야곱이 맞기는 맞습니까? 야곱이 조상이란 말은 우리 혈통적으로 야곱과 관련돼 있다는 말도 되고 이스라엘 자체가 혈통적으로 야곱의 DNA를 받은 거죠. 야곱에서 12지파, 아들이 나와서 이스라엘 나라가 됐잖아요. 뿐만 아니고 자기가 현재 물 길러 온 땅, 자기가 사는 땅도 야곱이 하나님께 축복 받아서 받은 땅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땅에 살게 되게 되면 야곱의 은혜 속에, 야곱이 받았던 혜택 속에 계속 놓여 있는 셈이 되니까 이것은 이 땅에 사는 자체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런 뜻이죠. 그러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께 복 받고 있는 이 자아상, 이 자기상, 이건 하등의 문제가 된다? 안 된다? 문제 될 게 없죠. 이미 복 받고 있는데요. 이는 부잣집 아들이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부잣집 아들인데 용돈 500원 줄까? 아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 자체가 부잣집 아들인데. 내가 만일 만수르 아들이라면, 만수르라고 세계에서 갑부가 있어요. 사우디아라비아 옆의 나라 쿠웨이트 근처인가 귀족의 왕인데 돈이 많답니다. 아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도 만수르가 인수했는가 모르겠어요. 그 수조 원 되는 재산가 아들에게 누구 아들이니까 이쁘니까 500원 줄게. 하면 뭐라 그러겠어요? 그거 없어도 나는 부잔데. 이렇게 되잖아요.


이것은 야곱이라고 언급한다는 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나름대로 자부심을 챙기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자기로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고 야곱의 자손이고 또 야곱이 하나님께 받았던 상속분의 땅에서 자기가 살고 있으면 이미 하나님의 선물을 풍족하게 받고 있는 입장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10절에 봅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는 나에게 선물을 구하여야 한다.” 이야기하잖아요? 그럴 때 여인이 ‘주시옵소서.’ 할 의사가 없어요. 왜, 지금 자기가 복 받은 여인이고 지금 야곱의 자손이고 야곱이 준 땅으로 살고 있는데 뭐 또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선물을 주느냐 이 말이죠. 이미 받은 것도 선물인데.


그렇다면 이미 받은 것이 선물인데도 불구하고 선물을 주겠다는 말은 결국은 지금 받은 것이 선물일 수가 없다는 뉘앙스를 예수님이 지금 여자한테 한 거예요. “네가 만약에 정말 하나님께 선물을 받고 복 받은 여인이라면 네가 생수가 나와야 된다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공식을 만들어봅시다. 하나님의 진정한 자손의 특징은 공통점은 뭐냐, 속에서 뭐가 나와야 된다? 속에서 생수가 영원토록 계속 나와야 된다는 거죠. 이거 안 나오면 야곱의 조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 입장에서는 자기 몸 자체가 야곱의 후손이고 자기가 살아온 땅 자체가 야곱의 후손이란 말이죠. 이런 조건만 해도 충분히 진짜 하나님이 택한 자손이 맞다고 자기는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뭐가 틀렸느냐는 거죠. 결국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대화를 시도했다는 것은 뭘 끄집어냈느냐 하면 바로 이걸 끄집어내죠. 죄를 끄집어내죠.



하나님의 모든 일은 죄를 발굴하지 않고서는 진행되지를 않습니다. 죄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여인이 자기가 죄 지었다고 생각합니까? 이 여인은 물 길러 왔죠? 물 길러 와서 가만히 있는데 이렇게 누가 죄인이라고 하면 좀 안 좋잖아요. 이런 게 있습니다. 담배 갑을 버린다. 담배 피우지 마라. 이러니까 담배 피우는 사람이 하는 말이 담배 피우는 일이 나쁜 일이고 국가 보건에 지장이 된다고 하면 아예 전매청을 없애든지 인삼공사를 없애고 아예 담배를 만들지 말든지 담배를 만들어놓고 이제부터 나쁘다 하면 어떻게 해? 값 올려서 서민들의 주머니 압박을 가하면 되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담배가 안 좋다 하는 것은 본인들이 인정하는데 너무 몰아세우지 마라 그런 뜻이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 말이 굉장히 복음적으로 또는 성경적 해석에 굉장히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합니다. 뭐냐 하면 이런 거거든요. 예정론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택하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하니까 그 소리 듣고 보통 사람이 말하기를 ‘아니 선택받지 못한 것도 죄냐?’라고 나온다 이 말이죠. 내가 선택 안 받는 것이 내 죄냐 말이죠. 선택을 누가 하는데 그 책임을 왜 나한테 묻느냐? 선택 안 받는 게 무슨 죄라고 죄 값을 왜 우리가 치르느냐?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담배 이야기를 한 겁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우리가 담배 피우니까 ‘죽여주옵소서.’ 하면서 담배를 매일같이 피웁니까? ‘그래 마저 피워서 죽어야지.’ 이런 희망 때문에 이런 목적 때문에 담배를 피웁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말이 다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무슨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나도 담배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 말 자체가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정말 그 사람이 본인의 죄를 안다면 ‘나 같은 담배 골초를 제일 먼저 감옥 갈 필요 없이 현장에서 몽둥이로 패서 죽여주시옵소서.’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담배 피우는 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인 거예요. 그렇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은 것은 제대로 된 정당한 처분이십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불신자 봤습니까? 불신자 그렇게 이야기 안하죠? 불신자뿐만 아니고 신자라고 우기는 인간도 다 마찬가지에요. 이순신 장군은 그렇게 훌륭해도 복음 못 들어서 지옥 갔단 말이냐? 이렇게 나오거든요. ‘신에게는 아직도 열 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하면서 자기 한 몸 바쳐서 결국은 전쟁에서 목숨 잃어가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렇게 하면서 나라 살렸는데 그렇게 훌륭한 분이 단지 복음 못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을 가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아까 유튜브 동영상에도 했지만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에 예수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는 형벌을 받는다니까 그 중에 이순신 장군도 포함되잖아요. 그러면 이순신 장군은 형벌받기 위해서 태어났잖아요. 이게 얼마나 불합리하냐 말이죠. 왜냐 본인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책임을 물 수는 있어요. 그런데 태어나는 것도 자기 맘대로 안 태어났고 주께서 만들어 놓으니까 비로소 응애, 하고 태어난 인간을 보고 인간이 뭘 잘못했다고 거기다가 복음도 누가 전해줘야 믿든지, 전하지도 않은 복음을 안 들었다고 해서 형벌을 받아버리면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불합리하고 이런 억울할 데가 어디 있어요? 기회를 주고 잘못했으면 그때 때려도 우린 할 말이 없는데 전혀 기회를 주지도 않고 복음 모른다고 지옥 보내면 세상에 이런 횡포가 있어요? 너무나 불합리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불합리하다고 하는 ‘그것이 합리적이 아니고 말도 안 됩니다.‘라고 했던 것이 하나님이 찾고자 했던 죄 그 자체입니다. 그게 죄라는 거죠. 불합리합니까? 그건 주의 뜻이죠. 이게 아니고 납득이 안 되는데 내가 어떻게 믿으란 말입니까? 이렇게 나올 때 ’네가 지금 나한테 반항하느냐?‘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죄라 하면 우리가 인정을 하겠는데 ‘그게 죄에요. 그럼 내가 뭐가 잘못됐지? 앞으로 그런 짓 안 해야지.’ 반성의 여지가 있고 다시 죄 안 질 가능성이 있는데 그게 아니고 물 길러 온 게 그게 죕니까? 물 길러 오면서 자기가 아는 나는 야곱의 자손이다. 그거 알았다고 그게 죄가 된다 이 말입니다. 평소에 그게 죄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예수님이 요구한 기준은 뭐냐 하면 ‘네가 딱 보면 딱 알아야 돼.’ 이거거든요. 그게 인간에게 성립이 안 되죠. 예수님을 딱 봤는데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 그거는 이미 인간이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마귀는 딱 보고 예수님 알아봤어요. 마귀는 알아보고 인간은 못 알아보고. 그만큼 마귀가 인간을 장악하고 있다. 누르고 있다 이렇게 보면 되죠.


물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은 갑자기 생수를 거론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여기서 물 이야기했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유대인이기 때문에 못 주겠다고 이렇게 나온 거죠. 물은 줄 수 있죠.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네가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이전에 네가 그런 그냥 우물의 물 내놓는 거 자체가 생수에 미달하기 때문에. 애 잘 키우면 구원 받습니까? 구원 못 받죠. 애 키우는 게 나쁜 짓입니까? 집사님도 애 키우러 내려가야 하는데 나쁜 짓하려 내려가는 겁니까? 아니라 하면 안 돼요. 그게 나쁜 짓 맞다니까요. 애 키우는 것도 나쁜 짓이 돼요. 목욕탕에 목욕하는 것도 나쁜 짓이 되고 인간이 나쁜 짓 아닌 게 없어요. 왜냐 하면 천국에서는 애 키우는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천국에서는 목욕하는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에서는 목욕하는 게 없는데 여기는 목욕하는 게 있다는 말은 이 땅이 지금 문제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 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문제덩어리인 줄 모르고 있으니까 그게 죄인 되는 거 맞는 거예요.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가 문제 있다는 것을 누구 만났을 때 가능한 겁니까? 예수님을 만났을 때나 가능하죠. 예수님께서 생뚱맞은 이야기를 서서히 끄집어 낸 거죠. 처음에는 ‘물 좀 달라.’ 했죠. 그래서 물 달라 해서 물 줄 수 있는데 ‘당신이 유대인인데 어떻게 줍니까?’ 라고 할 때 그 다음에 이 말은 뭐냐 하면 ‘유대인에게 내가 물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이 물 달라 합니까? 물 줄 수 있는 능력은 나한테 있습니다.’ 할 때 주님께서 말씀이 ‘네가 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인간 자체가 벌써 잘못됐다는 거예요. 잘못됐다 하니까 여인이 ’나 잘못된 게 아니고 나는 야곱의 후손이고 하나님이 선물로 준 이 땅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야곱의 자손 같으면 왜 나를 못 알아보느냐?‘ 이렇게 나오시는 거죠. 하나님께 선물을 받았으면 왜 나를 즉각 못 알아보느냐는 거죠.



선물은 준대로 받았고 야곱의 자손 혈통은 받았지만 제대로 주신 그렇게 하신 그분을 못 알아본다는 자체는 이미 사마리아 여인은 진정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거울자아라는 것은 바로 자기가 비춰 본대로 비춘다면 그건 자기 자아를 되찾는 것밖에 안 되고 주께서는 예수님 자신이 거울이 되어서 예수님 안에 사마리아 여인의 자아를 비취게 만드는 겁니다. 그 자아가 뭐냐 하나님과 결부돼 있는 자아를 지금 사마리아 여인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과 결부된 자아는 생수를! 예수님이 생수 줄자인 것을 알아보는 자아,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과 관련성 있는 자아입니다. 그 자아를 사마리아 여인은 여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자기는 평소대로 그냥 우물이 있기에 그것도 야곱의 조상의 우물이기에 물 길으면서 ‘우리는 조상 덕 본다. 야곱이 받은 축복 덕 본다.’ 이렇게 생각했지, 덕 본다는 생각하는 내가 이게 문제성이 있는 자아라는 사실을 저는 추호도 상상도 못하고 생각도 못했죠.



13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뻔한 이야기잖아요? 물 한번 먹고 난 뒤에 3년 6개월 견디는 사람 없습니다. 물 먹고 난 뒤에 몇 시간 지나면 또 마셔야 돼요. 물 안 마시면 갈증을 느끼게 돼 있고 인간의 신체는 70 몇 퍼센트의 물로 돼 있고 그래서 땀으로 계속 증발하니까 물이 보충돼야 되고 따라서 갈증을 느끼면서 물 마시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그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아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걸 당연하다고 보는 거예요. 물마시고 목마르다는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것은 죄도 아니고 이건 마땅히 인간이 그러하다고 본 겁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하나님과 결부된 게 아니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너는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 말이죠. 사람이 물 마셨는데 목마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당연히 물마시면 되지 이게 무슨 죄일까? 그게 바로 출애굽이 안 된 상태, 애굽에서 사는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의 욕구나 불만을 해결 지으려고 오신 게 아니에요. 도대체 우리는 주님 앞에서 던져야 될 질문조차도 정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왜 그렇게 잘하는지 몰라. 무슨 질문을 해야 되는지 몰라요. 우리 성도가 성도다운 질문을 하는 것도 주님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질문이 돼요.



예를 들어서 어떤 판이 있다 합시다. 뭔가 판에서 꼼지락거리고 움직인다면 우리는 만약에 벌레가 있다면, 징그러운 이야기지만 이리 들어가, 하고 보내버리고, 음식을 먹는데 나방이 날아오게 되면 ‘엇, 저리가.’ 그러면 나방이 날아가잖아요. 그런데 이걸 수직적으로 케이크처럼 하면 여기 밑에 있는 어떤 구조가 파리나 모기를 이렇게 오게 했다면 훌친다고 모기가 날아가는 게 아니고 또 앵하고 달려올 거다 말이죠.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땅을 가진 것으로 주의 축복을 가진 걸로 그걸 족하다고 여긴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 땅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에덴동산 쫓겨났을 때부터 계속 유지됐던 사고방식 이예요. 자기한테는 문제가 없고 땅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땅만 일한대로 농사지어서 잘 되면 자기는 만족하겠다는 겁니다. 땅이 척박하고 저주스러워서 문제지 땅만 괜찮으면 괜찮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땅 자체가 저주를 뿜어내는 원천에 대해서는 그들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땅이 저주를 뿜어내는 것은 선악과 따먹었다는 말씀을 위배했기 때문에 땅이 저주를 뿜어내잖아요. 뿜어내는 이유는 모르고 그냥 표면에 있는 거, 나한테 살기 좋으냐. 편하냐. 이것만 생각하고 있는 게 인간들이다 말이죠. 인간자체는 인간이 속해 있는 뿌리는 주님이 아시는 겁니다. 이걸 하나님과 결부된 인간을 불쑥 주님께서 제시한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과 결부된 인간을 제시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 ‘그’라니까 예수님이 그니까 예수님 안에 누가 들어있다? 예수님 안에 사마리아 여인이 이미 담겨있는 거예요.



그리스도 몸 안에 지체가 있듯이, 문어가 이렇게 눈, 주둥이 튀어나오고 발이 있잖아요. 문어가 주님이라면 우리는 풍선 같은 주님(문어)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가 아시는 자에게만 부르시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미 들어있는 것은 하나님과 결부된 자아상인데 이 바깥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결부가 끊어진 사마리아 여인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자신을 거울로 보여주게 되면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 누구시죠?’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당신이 누구신데 나한테 생수를 준다는 말입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생수를 받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네 몸에서 생수가 터져 나올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이야기하면서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여인의 자아상을 염두에 두고 이 여인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인이 기대한 자아상은 따로 있어요. 나는 야곱의 자손이다. 나는 복 받고 있다. 이게 여인이 자기가 기대한 평소의 자아상인데 예수님 속에서 들키지 않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의 자아상은 정작 사마리아 여인은 못 알아보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내 몸에서 생수가 나와? 쪼개봐?’ 쪼개보면 안 나오죠.



동화에 그런 동화 있잖아요. 암탉이 있는데 알을 낳으면 황금계란이 나오니까 안에 황금 들은 줄 알고 쪼개보니까 들은 게 없어서 삼계탕 해먹었죠. 보통 닭하고 똑같은 거예요. 반석에서 물 나오니까 반석 치면 물 다 나옵니까? 아니죠. 그래서 반석 안에 물이 없단 이야기했잖아요. 반석 안에 물이 없고 예수님에게 물이 있었죠. 예수님께서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거죠.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찾지 않고 자기 주변에서 찾을 생각을 해요. 자기 내부에서 찾고 자기 주변에서 찾고, 혹시 내가 놓친 것 없나, 이런 거. 나도 기도를 하게 되면 옛날에는 처음에는 30초도 못했는데 이제 교회 다니고 훈련받고 숙련된 기도모임에 참여하다 보니까 나도 두 시간 안지고 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러니까 나한테 기도하는 힘이 있다는 이 말은 그거는 자기 개발이지, 자기 자랑 중의 하나가 돼 버려요. 기도는 주님 안에 있지 우리 안에 있지 않아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것이 우리한테 오게 되면 그건 성령한테 기도가 되는 거죠. 우리 기도는 아니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생수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여인도 예수님 자신이 생수가 영원히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여인도 계속 생수가 나오는 겁니다. 나오는데 그걸 사마리아 여인이 예정에 상상을 했다? 못했다? 이건 상상도 못한 이야기에요.


사람들은 자꾸 말씀을 지식으로 확보를 하려고 해요. 확보하는데 본인이 문제 있다고 생각을 못한 거예요. 자꾸 성경 외우고 성경 배우고 이렇게 하게 되면 나는 점점 더 나는 문제없어. 나는 문제없어. 맨날 이런 식으로 되는 거예요. 이거는 문제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 안에 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쳐들어온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 거예요.


주님 말씀이 안 쳐들어오게 되면 사람은 기존의 나를 고수하고 고집하게 돼 있어요. 그렇게 되면 나를 노력하고 반성하고 개선합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어떤 점에서 개선됐습니까? ‘난 이제 때려죽여도 남자를 보기를 돌 같이 본다.‘ 이랬습니까? 아니죠.


어떤 마그리트라는 유명한 인류학자가 있는데 기자가 물었어요. ‘어떻게 이혼을 세 번씩이나 합니까?’ 라고 물었어요. ‘당신은 이혼 세 번 했느냐 묻지 말고 어떻게 세 번씩이나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라.’ 당신은 내가 세 번씩이나 열정적으로 사랑했다는 걸 왜 잊어버립니까? 신문에 이렇게 내라. 세 번 이혼한 여자라 내지 말고, 세 번씩이나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대단한 여자, 이렇게 내라.


사람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것을 흠 잡으려 하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인의 흠을 잡는 게 아니고 흠 없다고 여기든 흠 있다고 여기든 이것이 진짜 하나님과 결부된 진짜 택한 백성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진짜 야곱의 자손 같으면, 진짜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 같으면 계속해서 생수가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럼 야곱 본인은 계속 생수가 나왔습니까? 계속 나왔죠. 아브라함도 계속 나왔죠. 왜, 아브라함에게 줄기차게 누가 따라다닙니까? 천사가 따라다니죠.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죠. 그럼 계시를 ‘하나님 제가 준비 됐는데 계시 한번 내려 보소. 하나님 살아계신 솜씨를 한번 보여 보라고요’ 아브라함이 이렇게 거들먹거렸습니까? 그냥 아브라함은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그게 자기 원대로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살고 싶어서 자기 아내를 성상납하고 그랬잖아요? 애굽 왕한테도 아비멜렉 앞에서도 자기 누이동생이라 속이고 잘 보이려고 했잖아요. 제 할 일 뿐 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간섭하고 그 애굽의 왕이 사라를 범하려고 할 때 그날 밤에 바로 왕이 하나님께 혼쭐 난 모양이라. 얼마나 화가 났으면 ‘도대체 너는 나한테 어떤 물건을 줬느냐’고 따지느냐 말이죠.



여기 한번 보세요. 여기 보면 재고가 나오죠? 자투리 재고, 파선 재고, 유통기한 초과 재고, 반품 재고 나오잖아요. 왜 재고품을 받죠? 그래서 반품했죠. 도로 가져가라 했다 말이죠. 설교 시간에 이걸 보고 인용한 게 있어요.


이 말은 뭐냐 바로 왕이 하는 말이 ‘아브라함아 너는 네가 누군지 잘 모르는 모양이지?’ 이런 뜻이다 말이죠. 그래요. 아브라함은 본인이 누군지 몰라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다 몰라요. 하나님이 앞으로 어떻게 다룰지 우리는 감을 못 잡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나는 나가 아니라는 사실, 그건 우리가 알죠. 주님의 손에 있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바꿀 수 없다는 거예요. 성형수술? 내가 원하는 것을 기대하고 돈 주고 변형하잖아요. 늘어진 볼 당겨주고 이마는 보톡스 맞아서 부풀려 주시고 처진 눈 올려주고 눈썹은 문신으로 해주시고 턱은 위, 아래 양악으로 완전히 끼어 맞춰 주시고 온갖 것 다하죠. 축 처진 엉덩이도 바짝 올려주시고, 그거는 내가 원하는 나고, 그거 하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래나 저래나 뭘 해도 주님 보시기에 나는 항상 가짜라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게 죄가 된다는 겁니다. 모를 수밖에 없죠. 누가 알려줘야 알죠. 진짜 나의 진품 명품을, 진짜 나의 모습을 알려줄 분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도 없었거든요. 아무도 없다 말이죠. 그건 예수님이 했잖아. 여인이 지금 예수님을 볼 때는 자기가 아는 수준의 예수님이지 그 예수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1과 2는 서로 왔다, 갔다. 그걸 피드백이라 하는데 왔다, 갔다 주고받고 할 뿐 이예요. 제 3의 인물이 등장할 때 그 제 3의 인물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반성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기회를 갖는 겁니다. 이렇게 세상을 둘이 가다가 한 사람이 더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뭐가 생깁니까? 갈등과 충돌이 생기죠. ‘쟤는 얘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 슬슬 질투 나는데 물어봐? 말아? 그런데 표정 보니까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기분 좋은데 그래서 쟤가 삐져서 나가면 안 되는데?’ 두 사람이 있을 때는요, 끼어드는 사람이 없어서 좋아요. 그런데 하나 더 생겨버리면 문제 생긴다니까요. 부부가 둘이 결혼할 때는 서로 참기름이 고소하죠. 그런데 애 하나 낳고 난 뒤에는 그 다음부터는 ‘애가 좋아? 내가 좋아?’ 이러고 애한테 묻기를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자기도 못 푸는 문제를 애한테 억지를 부리면서 문제를 던지고.



제 3의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새롭게 규정돼야 된다는 것을 강요받는 순간이기도 해요. 현재 내가 유지했던 그것은 아니다 말이죠. 뭔가 제 3의 인물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아를 난 자신하고 여겼던 그런 우매함의 소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 3 인물은 뭐냐? 그것은 예수님도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도 아니에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함께 있는 제 3의 인물, 십자가 대신 지신 주님이십니다.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인간의 죄를 품고 오신 하나님, 중보자시죠. 그 중보자 속에서 비로소 생수가 나오죠. 하나님 속에서 나오는 생수는 우리한테 넘겨지는 생수가 아니에요.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존재기 때문에 감히 생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생수가 나오게 하시는 것은 그 죄인의 요소가 하나님 요소를 함께 품은 제 3의 인물이 아니면 그건 불가능한 일 이예요.


그래서 하나님 믿지 말고 예수님 믿어야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 같은 예수를 만들어 놓고 믿어버리죠. 진짜 예수님은 못 믿어요. 안 믿는 게 아니고 믿을 수가 없어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자꾸 하나님 같은 예수만 믿죠. 정작 내 자신은 내 자신이 아니고 허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분이, 성령, 예수님의 영이 와야 비로소 나 자신이 내가 아니고 가짜고 껍데기란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진짜 우리는 따로 있어요.



빌립보서 3장 20장 한번 봅시다. 수요일 날 언급을 했는데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이렇게 돼 있죠. 우리의 시민권이 왜 하늘에 있죠? 그리고 골로새서 3장에서는 우리의 생명은 어디 있다 했습니까? 우리의 생명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죠. 그럼 땅에 있는 목숨은 무슨 목숨입니까? 이건 죽은 목숨인 동시에 그냥 죽은 목숨이 아니고 주님을 위하여 죽은 목숨이죠. 주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쓰여 질, 용도를 갖고 있는 목숨.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목숨은 용도가 없어요. 목숨은 오직 자기 자신이 사는 게 목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명분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의인을 위해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말하죠. 안중근 같은 사람. 의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 혹 있거니와 죄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 누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한번 적어봅시다. 이게 말이 안 되죠? 죄인을 위해서 왜 죽어야 됩니까? 죄인을 옹호하려고 주님께서 죽으십니까? 그건 아닐 것이고. 죄인에게서 뭐 건질 게 있어요? 죄인에게서 어떤 희망이 있습니까? 죄인이 무슨 희망이 있어요? 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거예요. 죄인을 목숨을 버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본인이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찾아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죠? 죄인을 위해 목숨을 던진 분이죠. 로마서 5장에.


그러면 자기가 전적으로 죄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그 예수님은 가짜 예수고 그건 진짜 예수가 아닙니다. 본인이 죄인이 아닌 입장에서 예수를 믿어버리면 그건 예수가 아니죠. 조작된 예수고 마귀가 집어넣어준 마귀가 만들어 낸 유사품이죠. 가짜 예수죠. 진짜 예수는 뭐냐, 자기가 뭐다? 죄인인 걸 아는 거예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안다는 것은 자기가 죄를 많이 지어서 죄인인 것이 아니고 주님이 와서 나를 죄인으로 규정을 시켰다는 그것을 자기가 그대로 수용한 겁니다. ‘너 죄인이야.’ 할 때 ‘고맙습니다.’ 받는 거예요. 죄인이라 하면서 죄를 위해서 목숨 바친 주님이 그와 함께 있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께서 다가와서 이야기를 하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보여준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안 졌을 경우에 하나님입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이죠. 누구는 아닙니까? 주는 아니죠. 언약에 의해서 주가 되려면, 약속에 의해 주가 되려면 죄인을 위해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생수가 나오려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그 주님의 생수가 같이 나와 줘야 그 사람이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영생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온 것은 내가 이미 너와 함께 있는 존재로서 너한테 다가왔다는 거예요. 네가 보기는 너 따로, 너 앞에 있는 사나이 나란 사람이 따로지만 내 안에는 이미 너는 내 품속에 내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여인인 겁니다. 그래서 너한테 생수가 나온다는 것은 곧 내 생수가 내 속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집에 가더라도 계속 생수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생수가 계속 나오는 조치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렇죠. 구원에 관해서 예수님만 다 알고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러면 그 말이거든요. 그럼 예수님께서 ‘갇혀 있다.‘라는 말을 해줘야 비로소 우리는 갇혀 있는 걸 알지, 예수님이 갇혀 있다는 소릴 하지 않는 이상은 우리는 절대로 갇혀 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의 사정을 아는 것은 예수님이 와서 직접 알려줘야 비로소 우리의 형편에 대해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아까 목요일 날 개봉한 영화 이름이 ‘메이즈 러너‘ 인에 그 영화가 이런 영화입니다. 어떤 젊은 애가 영화 첫 장면부터 막 솟구치는 엘리베이터 위에서 아주 혼쭐나서 어쩔 줄 모르는 게 첫 장면 이예요. 그 장면 뚜껑 열리면 어떤 햇빛 비치는 들판이 보이는데 그 들판에 사방에 약40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이 확 둘러쳐져 있어요. 그런데 지하에서 엘리베이터 타고 지표면에 올라왔는데 와 보니까 여기 들판도 있고 숲도 있는데 숲과 들판보다 더 높은 60미터 높은 콘크리트 큰 장벽들이 사방을 둘러쳐 있어요. 그럼 이건 갇혀 있는 셈이죠. 이 갇혀 있는 것을 어떻게 탈출하느냐 하는 영화가 오늘 개봉한 영화에요.


제가 아침에 그 영화가 굉장히 중요해서 보고 왔는데 이걸 보면서 생각한 게 ‘우리가 지금 죄에 갇혀 있다. 또는 세상에 갇혀 있다. 마귀에 갇혀 있다.’를 갇혀 있다고 수용하지 말고 도대체 누가 이 사실을 이야기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누가 이 사실을 이야기했을까요? 예수님이 이야기 안 하면 아무도 이 사실을 알려질 수가 없죠.


그러면 그것을 가르쳐 줬다는 그분만이 곧 뭡니까? 구원할 수 있는 방법도 그분만이 이미 유일하게 갖고 있죠. ‘갇혀 있다.’를 유일하게 이야기주신 그분만이 구원의 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개인의 행함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지금 사업하고 학교 교사로 일하고 다들 직장 생활하고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이 영화에 입각해 보면 그냥 갇혀 있는 꼴. 갇혀 있는 상태에서 그냥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죽어서 어디 가는지도 그 사람들은 몰라요. 왜 공자도 있고 맹자도 있고 똑똑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그 어느 누구도 갇혀 있고 네 힘으로는 절대로 못 빠져 나올 지경에 놓여 있다. 그걸 언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이것은 우리보고 종교생활, 신앙생활 잘 하란 문제가 아니고 현실이 이렇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이 알려줬으면 우리는 거부하든 거부하지 않던지 상관없이 우리가 그걸 믿습니다. 안 믿습니다. 그것도 의미 없다니까요. 믿는다고 현실 되고 안 믿는다고 현실이 안 되는 게 아니고 상관없이 ‘아! 아 그렇구나.’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종결된 거죠.


메이즈 러너, 그런데 그 영화에서 갇혀 있는데 갇혀 죽으면 영화가 재미없잖아요. 그 영화가 콘크리트 벽이 낮에는 틈을 주고 틈에 들어가면 엄청난 미로가 있어요. 미로 크기를 영화에서 보여주는데 그 청년들이 잡혀 있는 터전이 요만하다면 미로는 몇 배 커서 이만해요. 이 미로가 있다는 말은 갇혀 있기는 갇혀 있지만 미로를 통과하게 되면 구원이 된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갇혀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분으로 인하여 이미 구원이 돼 버린 상태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기에 비로소 모든 인간은 갇혀 있음을 이제는 그걸 보는 안목이 열린 거예요. 그러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중차대한 문제가 또 있겠습니까? 그걸 지금 주께서는 사마리아 여인보고 실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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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 4장11(거울 자아)140918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14절 보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했잖아요. 예수님이 우물이라는 거죠. 그럼 사마리아 여인 이 제시하는 우물은 야곱의 우물인데 야곱의 우물은 이미 야곱은 죽고 그 우물은 야곱이 하나님께 복 받아서 물이 나왔던 약속의 땅의 그 지하수를 그냥 야곱의 후손들이 그 땅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집에 가서 퍼먹으면 되는데 문제는 이게 목마르다는 게 문제에요.

‘목마르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라고 생각하는 그걸 생각 못하니까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목말라야지.’ 이렇게 생각하지 ‘목 안 말라야 돼. 영원히 목 안 말라야 돼.’ 이런 것은 인간으로서 예상 못 합니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 그러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삽입되지 않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사람들이 예상하거나 기대하거나 짐작한 것이 절대로 스며들지 않는 이야기를 해버린다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의 행함으로써 주님을 접근할 수가 없죠. 그럼 어떻게 되느냐? 그냥 믿어야 되지 뭐. 믿으려면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죄였습니다. 라고 인정하고 믿어야 되죠. 주님만이 영원한 우물입니다. 라는 이 말은 ‘우리가 지금 길러 오는 이 물은 물도 아니고 주의 축복도 아니고 주의 선물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목마르다가 죽어 마땅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이 영원한 생수가 주는 우물입니다.‘ 라는 것을 인정된 상태에서만 비로소 그런 고백이 나오게 되죠.

그럼 여기 이 여인이 이 말 듣고 믿었느냐? 그때는 안 믿었죠. 계속 버티죠. 자기한테 문제없다는 것. 버틴다는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목마르지 않은 우물을 이야기할 때 자기는 너무 허황돼 보입니다. 참으로 허황돼 보이고 하는 말이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라고 돼 있죠. 참 이 여인이 생각하는 수준이 이런 물이 목마르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물 길러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물은 현재 기존에 있는 그 물하고 같은 물인데 차이점은 목마르지 않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안 길러 와도 되는 물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물도 뭐다? ‘기존의 물도 물이다.’라는 것을 계속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기존의 물이 물이라고 고집하는 자아는 누굽니까? 기존의 자기 자아상이죠. ‘난 이게 물인 줄 아는데 당신이 그걸 준다니까 이 물보다 그물이 낫겠습니다.’ 라는 뜻이지 이거는 물이 아니고 그것만 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여인이 아직도 여전히 자기 기존의 자아상을 나는 포기 못하겠다는 식으로 나오죠.

그러니까 주님 하신 말씀이 뭐라 합니까?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죠. 자, 여기서 남편을 불러오게 되면 그 물 줍니까? “네 남편 데리고 오게 되면 내 생수 만들어 줄게“ 그런 조건으로 한 겁니까? 왜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현재 있는 내가 아는 물 말고 거기다 당신이 주는 물까지 추가해서 얻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이 말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나는 포기 못하겠습니다. 이것도 정당한 겁니다. 꾸준한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아주 생뚱맞은 이야기를 해줘요. “네 남편 불러와라” 고 이야기합니다. 써 봅시다. 이게 어느 정도로 무관한 이야긴지. 물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네 남편 데려와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물이라는 관심사에서 남편으로 관심사를 옮기려면 어디를 통과해야 됩니까? ‘현재 나는 이 야곱의 우물도 물이라고 우깁니다.’라고 여기는 이 여자의 자아상을 통과해야 이게 가능하겠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물도 물입니다.’라고 우길 때 그러니까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그 물과 당신이 주는 물과 이렇게 결합이 가능하다, 이런 뜻이거든요. 지금 물 길러 오기 귀찮은데 아이구,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됐습니다. 이런 거거든요.

물이 뭐냐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는 물 길러오지 않게 된 것도 자기는 그거라도 고맙습니다. 그런 뜻이다 말이죠. 물을 그렇게 생각하는 자아상에서 남편 데려오라 하면 그냥 이야기를 못하고 자아를 뚫어야 내 남편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데려와라”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러면 “네 남편 데려와라” 한 순간에 무슨 소리가 날라 가 갑니까? 물 이야기를 순식간에 날라 가 버렸죠. 날라 가 버리고 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이 여인은 자기를 지키고 사수하고 보호해야 될 입장에 있죠. 만약에 예수님께서 ‘네 남편 데려와라“ 이렇게 하게 되면 ”사실은 요 제가 전에 남편이 다섯 명 있었거든요.“ 이렇게 나와야 돼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무슨 이야기합니까? 남편이 없다 하죠. 단답형으로 이야기했죠. ”남편 데려오라“ 할 때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계속해서 여인은 자기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있죠. 그런 자기 자신을 감추는 순간 물 이야기는 어디로 날라 가 버렸습니까? 물 이야기는 벌써 날라 가 버렸죠. 그러니까 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핑계였고 예수님이라는 자아와 여인의 자아와 물이라는 하나의 매개로 해서 끝나버리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자아와 그 여인의 자아 속을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그 뒤에 물 이야기 안 나오죠? 그 말은 뭐냐 여인은 자아를 숨긴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두 번 다시 물 안 길러오는가, 내게 어떤 이익이 있는가, 저 유대인 남자를 한번 이용해봐? 혹하는 소리를 했는데 다시 영생하는 물이 온다면 안 길러오지. 자아 자신은 계속 숨긴 채 계속 주변에 있는 자기가 안 들킨 상태에서 주변 이야기 가지고 예수님과 관계지려고 하다가 예수님께서 남편 이야기한 순간 물 이야기 다 날라 가 버리고 직접 예수님과 여인의 속마음이 공개 당하게 된 겁니다.

“네 남편 데려와라. 생수를 주시옵소서.“ 참 이건 실전하면 되죠. ”여기 맛있는 홍삼이 있는데 드릴까요? 집사님.“ ”주세요.“ 했다고요. ”남편 데려오세요.“ 이거 갑자기 무슨 이야기냐 말이죠. 그러니까 여인의 입에서 뭐가 나옵니까? ”남편은 없다.“ 했죠. ”남편은 없다.“에서 남편을 잘라보세요. 뭐가 남습니까? 없다. 여인은 없는 거예요. 여인 자신이 주님 앞에서 없는 존재입니다. 여인은 없습니다. 여인은 없는 거예요. ‘없다.’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나는 네가 무엇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내가 알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네 친구 데려와라.” 하면 “친구 데려오면 생수를 줄게.” 한 거예요. 없는 걸 주님께서 지적한 거예요. 그러니 주님께서 생수를 줄 때는 그 생수 주는 그 바탕이 우리가 이미 짐작하고 기대하는 바에서 덧붙여서 주시는 게 아니고 우리는 받아 낼 그릇조차 없는, 받아낼 수 있는 어떤 건더기도 없는, 받아내려는 두 손마저 없는, 없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없는 것부터! 없는 것부터 뭐가 나오느냐? 없음에서 있음이 있다는 것은 남편 없다에서 남편 있다가 아니고 나 없음에서 나 새롭게 나 있음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야기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여인은 자기가 여자라고 여겼습니다. 자기 자아가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합니다. “물을 달라.” 여인은 자아와 더불어서 나는 야곱의 자손이며 야곱이 주는 축복 가운데 하나님 주신 선물 가운데 살면서 지금도 그 혜택으로 이 맛 좋은 물도 야곱의 우물에서 혜택을 입습니다. 해서 계속 자기 자신이 있는 존재로 있죠. 거기다가 생수를 준다 하니까 있는 존재에다 덧붙여 주는 줄 알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생수를 줄 때는 어떤 원칙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있는 것이 다시 있는 게 아니고 없음이라는 것을 본인이 알아야 돼요. 본인이 알았다는 말은 물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물 이전에 내가 없고, 내가 없다는 말은 내가 여기 있지만 주께서 원하는 아까 하나님과 결부된 나가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하늘나라 갈 수 있는 나는 없는 거예요. 하늘나라 가는 나는 주님 안에 들어있지, 내 안에 들어있는 게 아니에요. 영생 얻는 나는 내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주님 안에 있다 이 말이죠.

주님 안에 있다는 내 목숨은 내 목숨이 아니고 주님의 목숨이 함께 작용하는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는 따로 있는 거예요. 그것을 주께서는 예수 안에서 자신의 야곱의 자손으로서, 예수님 자신이 야곱이니까, 이스라엘이니까, 자신의 후손으로서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백성들을 만들어줘야 그 백성 속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넘쳐나는 겁니다.

여인은 자기가 있다는 것을 자기는 항상 자부했고 그걸 들키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여인에게 없는 이야기를 했어요. “남편이 없지?” 이야기하지 않고 “남편을 데려와라” 했잖아요. “남편 데려와라” 하니까 여인이 하는 말이 “남편은 내게 없습니다.” 남편은 없는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 말은 뭐냐 여인이 뭔가 감추고 싶은 게 있어요. 결혼 안 했으면 남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남편 없죠. 결혼했는데 남편을 사별해도 남편이 없죠. 그래서 여인은 어디다 숨어버렸냐 하면 결혼 안 해서 남편 없을 수도 있고 결혼했는데 남편이 죽을 수도 있고.

그런데 자기가 숨기려고 했는데 누가 여인이 숨기고자 하는 본색을 누가 끄집어냅니까? “그래 네가 남편 없는 건 맞다.” 하면서 그냥 지나가지 않고 뭐라 합니까? “원래 네가 남편 다섯 있었잖아” 생판 모르는 여인보고 완전히 도사도 아니고,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다.” 그럼 여인 말이 참된 거예요? 예수님이 참된 거예요? 여기서 예수님이 참되죠. 여인은 참되지 않죠. 왜, 숨기려고 했으니까. 설마 남편 없다하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 저 여인이 나이를 보니까 결혼은 한 것 같고 남편 없다하니까 아, 사별했구먼.’ 이렇게 이해해주기를 바라죠. 왜냐 하면 그래야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숨겨둔 자신이 계속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자기가 나라고 여기는 이상은 생수를 줄 수 없어요. 몽땅 거덜 내야 된다 말이죠. 거덜 내려면 숨길 수 있는 숨기는 마지막 모습까지 완전히 거덜 내야 돼요. 그걸 누가 하시느냐,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이게 뭐냐 십자가의 기능입니다. 주께서 십자가 지실 때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 앞에 있는 사람은 이유도 묻고 따지지 않고 죄인 이예요. 그것은 자기가 잘못한 게 아니고 저 피가 말해주는 겁니다.

백부장이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뭐라 했습니까? “당신은 정말 의인입니다.” 나는 죄인 맞다는 뜻 이예요. 십자가 앞에 설 때 묻거나 따지지 말고 그냥 죄인 이예요. 따라서 죄인 되게 한 그 나를 내가 가질 수 없어요. 왜냐 하면 죄인 되게 했다는 말은 이미 주님께 손 탔다는 거예요. 이미 거기서 관여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까 처음에 했죠? 하나님과 관여된 자아상, 주님에 의해서 관여된 자아상만이 영생 얻지, 그렇지 않으면 영생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수가 나오지 않아요. 주께서 오신 것은 우리에게 통보한 자체로서 이미 그 사람이 구원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구원된 백성이라야 야곱의 언약이 완성되거든요. 야곱의 언약은 야곱이 이룬 게 아닙니다. 야곱 안에 누가 있느냐, 예수님이 있어요. 그럼 야곱이 구원받았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라 할 때 야곱이 구원받은 것은 야곱의 공로도 아니고 야곱의 기여도도 아니에요. 누가 구원했습니까?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누굴 구원했다? 야곱을 구원했거든요. 야곱에게 주신 언약에 의해서 야곱이 매달려 끌려가니까 구원받은 겁니다.

똑같은 방식을 이제 새 언약 가지고 하시는 거예요. 새 언약이 뭡니까? 십자가잖아요. 십자가가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뭔가 내 것은 완전히 묵살당하고 일방적으로 끌려가서 일방적으로 구원된다는 그런 모양새가 나타나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 모양새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누가 시비를 걸었어요? 주님이 먼저 시비를 걸었죠. “남편 데려와라” ‘남편 데려오면 물 주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 나한테 없는 이야기를 하지?’ 그래서 무심코 이야기했죠. “남편이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아직까지 자기를 안 들켰죠.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뭐라 합니까? ”네 말이 옳도다.“ 하니까 이거는 지금 자기를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이야기했으니까 분명히 나보고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지금부터 내가 너를 찾아가는 모든 행동이 참이고 옳을 수밖에 없는 행동이 너를 향하여 실시가 된다는 이야깁니다.

네가 한 말은 네가 진심이 아닌데 그 진심이 아닌 것을 들통 내는 그거는 진심이 되도록 하시는 거예요. 내가 내 죄를 숨긴 것이 진심이 되는 경우는 이 여인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 경우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는 죄인임이 드러날 때 그때 내가 거짓말 한 것도 죄 일부임을 자백하게 되니까 그게 진심이죠. 그런데 그걸 향해 주님이 뭐라 합니까? “네 말이 옳도다. 참되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그리고 나서 여인이 까붑니까? 까불이 하면서 나는 주님과 친합니다. 이렇게 합니까? 어떻게 됩니까?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그렇죠? 이미 “너는 참되다. 옳도다.” 한 순간부터 이 여인은 예수님 손에 완전히 장악된 거죠. 이제부터 그 여인은 자기 멋대로,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주께서 여인에게서 뽑아낼 것을 다 뽑아내요. 여인의 입을 통해서.

그 다음에 뽑아낸 게 뭡니까? “예배는 어디서 드리면 됩니까?” 이런 소리까지 다 뽑아내요. 여인을 통해서 에스겔 흐름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여인은 졸지에 하나의 칠판이 된 거죠. 주님이 이 땅에 계시를 전하는 하나의 칠판이 된 겁니다.

이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분명히 사마리아 땅에 갈 때에 12제자와 더불어 갔잖아요. 이 12제자 이야기보다도 한 여자하고 이야기한 게 더 많아요. 예수님과 12제자 이야기는 몇 구절 되지도 않아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일을 누구와 한다? 홀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추수할 때 한 사람은 수고하고 다른 사람은 그냥 누린다. 공짜로 다른 사람은 참여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인도 이미 참여된 여인이 되는 겁니다.

계속 이야기해 봅시다. “남편이 없나이다.” 자기를 숨기려고 했죠. 설마 알겠나? 남편 없으면 남편 하나 있었는데 사별했겠지. 이렇게 여긴 거죠. “남편이 없나이다.” 하니까 “옳도다.” 여기서 주님 이야기가 좀 마감해 줬으면 여인이 자존심이 유지될 거잖아요.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가 네 남편이 아니다.” 할 때 여인이 뭐라 했어요? ‘쉿, 쉿, 쉿, 쉿’ 아무리 여인이 쉿 해도 이거는 이 성경책이 팔릴 때마다 공개 다 된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은 하늘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인사가 됐잖아요. 요한복음 8장에 들어있어요. 막달라 마리아도 유명인사 됐고, 사도바울은 말할 것도 없고.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인이 여기서 뭐라 합니까? 드디어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자가 여기 있다는 걸 알죠. 야곱의 우물보다 더 큰 자, 야곱보다 더 큰 자. 어느 누구도 이제는 자기가 주님 앞에 나서서 “내가 어때요?”라고 비춰야 될 하나의 거울 같은 존재로서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모르는 게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나는 당신 앞에 서고 싶어요. 내가 당신 앞에 서면 왜 그리 작아지는지, 나는 당신 앞에 서고 싶어요.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물 이야기하다가 남편 이야기하다가 이제는 여인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무슨 이야기? 나는 우리 조상이 어떻고 이야기 끊어지고 예수님 이야기로 전환되죠. 성전의 특징이 바로 예수님 이야기로 전환되는 겁니다.

제가 부산 강의하면서 들은 이야기에요. 부산에 섬이라고 중심가가 있는데 큰 합동 측 서문교회라고 있어요. 그 교회 부목사님 그분이 쫓겨났는데 쫓겨난 이유가 뭐냐 장로인지 당회장이 쫓겨냈는지 모르겠는데 이유가 이거에요. 당신은 1년 내내 예수 이야기밖에 안한다. 물론 그 부목사가 복음 안다, 그건 모르겠는데 알든 말든 지금 쫓아내는 그 빌미가 1년 내내 설교를 할 때 설교가 예수 이야기해서 맘에 안 들어서 당신을 쫓아낼 수밖에 없다. 그 이야기에요. 장로들이 한 거예요.

그럼 예수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들 장로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럼 다른 이야기해버리면 그게 교회입니까? 교회 아닙니까? 그건 머리가 주님 되시는 교회가 아니죠? 교회가 아니고 친목 모임이죠. 그러니까 그 목사는 실례한 거예요. 친목 모임에 자기는 교회인 줄 알고 착각해서 1년 동안 다닌 거예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몰라 봤습니다. 친목 단체인 줄 모르고 난 교회인 줄 알았잖아요.’ 이러고 나와 줘야 되죠. ‘아, 나는 교회인 줄 알았는데 교회가 아니었구나. 아이쿠, 제가 참 실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처 알아봐야 되는데 못 알아봐서 미안합니다.’ 이러고 나와야 되죠. 그렇죠? 그런데 그런 교회가 그 교회뿐이겠어요? 대부분 교회가 다 그렇죠.

예수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일단 그분이 복음을 전했다 치고 예수 이야기한다고 복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자기 신학적 학문 배운 걸 내놓을 수도 있는 그런 요소가 굉장히 많아요. 예수가 어떤 분이고 신학적인 의의가 뭐고, 진짜 복음을 위한 게 아니고 예수에 관해서 이야기하지만 진짜 예수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지 복음을 뽑아낼 어느 설교도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러면 성경에서 예수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 해달라는데 다른 이야기가 뭘까요? 그건 그 서문 교회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그 설교를 해달라는 거죠.

그 설교가 어떤 설교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인간 설교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게 전부죠. 그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욕심만 채우지 마시고 선한 이웃을 돌보세요. 그러면 여러분 복 받습니다. 이런 설교죠. 그러니 이것은 예수가 필요 없죠? 그냥 행함이죠. 그냥 하나님 믿고 행하기만 하면 교회 된다는 게 그들 주장입니다.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여기 보면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유대인들하고 자기 사마리아 인하고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차이가 뭐냐 하면 예배를 드리는데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이시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맞고 맞는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뭘 원한다? 예배를 원하는데 예배 방식에 대해서 예수님한테 왜 묻습니까? 이게 어려운 문제죠.

본인이 이미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고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이 정당할 것 같으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립니다.’ 라는 말을 꺼낼 이유가 없어요. 에이, 유대인들이야 뭘 하든지 우리는 그리심 산에서 꾸준히 지금까지 드려왔고 저는 옳다고 믿습니다. 이러면 될 텐데 새삼스럽게 왜 이걸 예수님한테 묻느냐 이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이게 컵입니다. 컵에 물 따라 먹습니다. 이렇게 물으면 될 텐데 우리는 컵으로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이걸 그릇이라고 생각하는데 선생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이걸 왜 묻는 거예요? 이게 아닐 수도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 정도로 주님이 자기 과거를 밝힌 주님의 견해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듣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죠. ‘당신이 하시는 어떤 이야기든지 간에 그냥 그대로 수용하겠는데 수용하기 전에 우리는 요 정도 알고 유대인은 저 정도 아는데 우리가 보기는 나타난 선지자 당신 앞에서는 둘 다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를 본인이 지금 인정한 셈이 돼요.

예를 들면 우리는 이걸 컵으로 알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이걸 그릇으로 봅니다. 그러면 주님은 이게 뭡니까? 물으면 “그거는 주전자지.” 이럴 수 있다 이 말이죠. 주전자라 하던지 간에 나는 더 이상 토 달지 않겠다. 이미 마음을 비운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여인이 자진해서 자기 속에 있는 그동안 예배해 왔던 자기 종교를 완전히 선지자인 줄 알고 탈탈 털어내는 겁니다. 자기 것만 털어내는 게 아니고 자기가 들었던 것도 털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과 그리스도는 대립관계에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동안 보이지 않게 암투로 싸웠던 우리들 수준 이 정도까지 싸우는데 그 싸우는 양쪽 다 탈탈 털어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러한 예수님 앞에서 이런 논쟁도 부질없을 가능성 있음을 여인이 이미 인정한 겁니다. 처분만 맡기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산으로 가면 뻐꾹, 저 산으로 가면 뻐꾹, 이산 저산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땅에서 하는 예배는 주님과 연결된다? 안 된다? 어떤 예배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예배는 이 땅에는 없었습니다. 구약에 있잖아요. 그거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건을 유발한 거죠. 인간이 드린 예배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엘리야가 물 12통 부니까 불이 확 탔잖아요. 갑자기 물이 핥아지고 불이 확 붙었잖아요. 누가 주인공입니까? 주님이 주인공이죠. 이걸 동시성의 불일치성.

사건이란 특징은 사건은 일어나면 누가 봐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의견은 일치되지 않아요. 이해관계에 따라서 다 달라요. 가정에 애가 성적이 내려가게 되면 아버지는 공부 못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엄마는 당신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니까 애가 공부 방해돼서 못했다 이러는 거예요. 공부 못했다는 동일한 사건이 가정마다 다 달라요.

주님은 예배를 뭐로 시킨다? 사건화 시켜버려요. 사건화 되게 되면 땅에서는 잡을 수가 없어요. 표준 형식이란 게 성립이 안 되고 매뉴얼도 지금까지 했던 매뉴얼도 소용없어요. 경리 보면 딱 나오잖아요. 견적서 따라 약정 나오죠. 양식이나 폼이 나오죠. 세금계산서에 빈칸만 있어서 빈칸만 메우면 되잖아요. 그 양식이 없다니까요. 성경에. 주보에도 맨날 그거만 바꾸면 돼요. 주보 틀이 있어서 바꾸면 되는데 주님의 예배는 그게 없다니까요. 왜냐 하면 예배는 인간이 드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배는 누가 드리느냐? 성령이 알아서 드려요. 신령과 진정, 진리와 성령, 성령이 성령 안에서 드려야 그게 하나님께 예배가 됩니다. 이 말은 예배 말라가 아니라 인간은 예배 할 수가 없어요.

예레미야 31장 33절 한번 볼까요?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 예레미야 31장 33절 이야기하게 되면 지금 마음을 누가 장악하죠? 그때 새 언약 시대가 되면 하나님이 장악하잖아요. 그렇게 되게 되면 예배라는 그 모든 시작과 끝을 누가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시작해서 하나님이 마무리 짓죠. 에스겔을 봐도 하나님의 신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키게 돼 있어요. 에스겔에 그런 게 있습니다.

제가 왜 예레미야, 에스겔을 언급하느냐 하면 여기 23절에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할 때 이 때가 온다 할 때 예레미야나 에스겔에서 이미 예언했다는 그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그대로 우리에게 실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배라는 것을 우리에게 언급했을 때 유대인들이 부지런히 예배를 드렸죠? 제사 드리고 예배 드렸잖아요. 예배드리게 한 이유가 뭘까요?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예배답지도 않은데 예배드리게 했을까요? 그것은 뭐냐 하면 분명히 예배는 드렸는데 어떻게 됩니까? 약속의 땅에서 추방이 되고 벌을 받죠. 그러니까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들을 통해서 주의 말씀 성취에 인간이 하는 일이 개입이 될 수 있다? 못 된다? 인간은 개입하거나 관여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제사의 특징은 뭐냐 하면 철저하게 인간을 배척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게 어려운데요.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뒤에 죄 속죄 해달라고 어린양을 잡잖아요. 어린양을 잡고 제사 때 인계할 때 그들이 자기 죄를 압니까? 몰라요? 죄인 줄 알고 바쳐도 죄가 뭔지 몰라요. 왜냐 하면 일단 제사장에 의해서 성막 안에서 양을 잡을 때는 이거는 새로운 하나님이 생각한 죄가 여기 어린양에 가해져 버립니다. 인간은 자기 죄를 몰라요. 양심의 가책이라고 죄라고 이야기해도 그게 진정 죄의 진수는요 인간의 손을 떠나서 주님한테 맡길 때 주님만이 진정 인간의 죄가 뭔지 알아요.

그래서 제사의 특징은 뭐냐 일단 제사장 손에 들어가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죄인은 거기 관여하지 못하고 제사제도 안에서 그 양은 무참하게 불태워지죠. 무슨 죄가 불태우는 죄를 범합니까? 주님 앞에서는 작은 죄, 큰 죄 없어요. 전부 다 불 탈 죄에요. 도대체 어떤 죄의 기준이기에 커닝 했다고 불태워버리고 농사 졌다고 불태워버리고 무슨 기준에 의해서 그런 죄가 있을까요? 인간은 뭘 해도 불타도 할 말 없는 죄인인 겁니다. 그러니 그 죄인이 예배를 드린다고 그리심 산에서 드린다고 받겠어요? 예루살렘에서 드린다고 받겠습니까? 받지 않죠.

찝찝해서 안 되겠네요. 기어이 찾아야지 마음이 울적해서 안 되겠어요. 에스겔 36장 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을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이 예언이 요한복음 4장에서 지금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주신다 할 때 그 주시는 분이 누구다 하는 것을 이 사마리아 여인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은 거예요. 왜냐 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해서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예배는 뭐냐 하면 그리심 산이냐?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느냐? 형식과 격식에 맞추어서 역사와 전통에 맞추어서 하는 거,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에요.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참 예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한계를 벗어나서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된다 말이죠.

그러면 예배는 이루어져야 되거든요. 왜 예배 중에 말씀이 이루어지니까. 그 예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누가 왔단 말입니까? 결국 그런 이야기하시는 분이 지금 사마리아 여인 눈앞에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예배 이야기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이 요한복음 4장 29절에 보면 그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 사람한테 누굴 만났다 합니까?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돼 있죠?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이야기하는 걸 봐서 이미 그 여인 속에 뭐가 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을 알아들은 거예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예배는 본인이 어느 산에서 어떻게 드릴 그런 수준이 아닌 거예요. 어떤 형식과 격식이, 아침 10시에 드릴까요. 9시에 드릴까요? 그럴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진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주님께서 성령 주게 되면 이미 예배가 시작된 거예요.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면 여인이 물을 얻은 거예요? 안 얻은 거예요? 물 어떻게 됐습니까? 여기 4장 28절에 보면 여인이 뭘 버려두고 왔습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빈 몸으로 마을 사람에게 왔죠. 뭔가 급했던 모양입니다. 자기 본연의 사명을 잊어버렸죠.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버려뒀으니까 물을 어디 손에 담아왔는가요?

그러니까 물이냐? 아니면 메시야냐? 그리스도냐? 둘 중에서 여인이 어느 게 더 중요하다고 보죠? 지금 물 길러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중요한 거예요. 그리스도가 왜 중요하냐 하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와야 모든 것을 밝히 보여주거든요.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그분이 한방에 다 보여준다 이 말이죠. 보여주면서 여인이 겪었던 일 중에 하나가 뭐냐 여인 자신의 과거가 들통 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지식을 전달하면 지식을 받고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고 예수님은 우리 구원받은 자를 관통함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자아라고 여겼던 자아는 이미 그것은 인정받지 못할 자아고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자아만이 진정한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자아는 이미 예수님이 알고 있죠. 그러니까 일부러 제자들 따로 돌려놓고 없는데서 이야기한 겁니다. 추수하러, 자기가 알곡을 알기 때문에 건지러 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진짜 여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그걸 거울 자아라고 내가 표현한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23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그 다음에 뭐라 합니까? 곧 무슨 때다? 이때다. 사건화 시켰어요. 사건화 시켜버리면 예수님이 말하는 그 당사자가 그때를 이미 선포를 해버렸죠? 이때라고. 누가요? 예수님이 그걸 선포를 해버렸다 말이죠. 예수님이 그걸 선포를 했으니까 앞에 보면 이때라 하기 전에 앞에 때가 또 나오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돼 있으니까 때가 온다고 하는 것은 예언이고 이때라고 선포한 것은 주님 본인의 결정이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스스로 약속한 것을 스스로 지금 실시되고 완성되었다고 선포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건 속에 누가 계십니까? 이미 사건이 현재와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을 통해서 현재화 되려면 반드시 누가 완성해야 될 그리스도가 나타날 경우에만 그 구약의 예언된 것이 “이때”에 해당될 수 있어요. 이때가 뭐냐 그리스도가 왔기 때문에 가능한 때가 이때가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단순한 선지자라면 뭐라 합니까? ‘아마 내 뒤에 또 그리스도 오시면 될 걸.’라고 미래로 미룰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에 선지자라 이야기해놓고 뭐라 합니까? 나는 누굴 만났다? 선지자를 만난 게 아니고 누굴 만났다? 그리스도를 만난 거예요.

이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 이거는 무서운 의미에요. 심판 날입니다. 더 이상 카렌다에 6월 달, 10월 달 이게 의미가 없는, 째칵째칵 이게 의미가 없는 때가 돼 버린 거예요. 째칵째칵 날짜 넘어가고 해가 넘어가고 달이 넘어가는 것은 이거는 기존의 인간들이 그만한 가치 있다고 우겨서 아직까지 쥐고 있을 때 그 시간 속에서 기존의 자기 자아를 유지하려고 할 때는 그 카렌다가 필요한데 자아가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나라는 자아는 이제는 묵사발 되고 껍데기로 변했고 이제는 그리스도 자아만이 절대 자아가 돼 버리면 그리스도의 자아에 부합된 시간이 적용되는 그런 시절에 우리가 지금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거예요.

그러면 그 앞에서 우리의 째칵째칵 시간은 이건 부정돼야 마땅하죠. 그걸 가지고 예수님은 추수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 35절 봅시다.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니까 토지 추수가 몇 개월 있어야 되죠? 넉 달 남았죠. 사람들에 의해서 넉 달 뒤에 추수가 있죠. 그러면 예수님은 넉 달이라는 그 기간을 이걸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이걸 버린다면 지금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계신 그것이 뭐냐 하면 추수 때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넉 달 공백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넉 달 공백은 없는 거죠. 그럼 주님이 넉 달 기다렸다가 주님 다시 시작하죠? 이럴 수 없어요. 넉 달이라는 그 기간 자체가 주님 앞에 의미 있다? 없다? 그건 무의미한 걸로 날라 가 버렸죠. 넉 달 기다렸다가 추수하겠다는 이 말은 인간들이 예상하고 기대하고 짐작한 거잖아요. 주님께서는 예상하고 기대하고 짐작한 것을 이걸 무산으로 만들어버렸죠. “네가 남편이 있느냐?” 할 때 뭐라 했습니까? “남편이 없다.” 한 거예요. 없다 할 때 없다는 말은 그냥 없다는 말이 아니고 ‘설마 내 과거를 알랴? 내가 틀린 말은 안 했잖아. 남편이 없다는 말은 맞잖아. 하지만 내가 남편이 없다고 하면 이혼해서 없다고 이렇게 생각하겠지.’라고 여인이 자기나름 대로 조마조마하면서 숨기고 있는데 주님께서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은 옳다.“고 이야기한 것은 그 여인이 옳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새로운 여인의 자아 입장에서 거기 ”없다.“에 맞춰서 새로운 여인을 내가 만들어 내겠다는 이야기거든요. 네 말이 옳게 만들게 하는 조치가 내 안에 있는 새로운 여인의 탄생으로서 결국은 네 그 옳다는 말이 옳은 말이 되도록 지금 내가 너한테 조치를 가한다는 이야깁니다. 하여튼 배려해도 이렇게 배려해 주시네.

만약에 집사님이 “나는 주님 싫어요.” 하면 “그렇다. 싫다는 말이 옳도다.” 이 말은 우리가 잘했다는 말이 아니고 “싫다.”하는 그걸 통해서 그것이 진짜 제대로 진리를 표현한 말로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거예요.

촌에 가다 보면 배고파서 그런지 진짜 맛있어서 그런지 촌에 어떤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 시키면 맛있어요. 참 맛있단 느낌 있잖아요. 맛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대도시에 큰 중국집 요리하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시켜보세요. 그 촌에 먹던 그 맛이 안 나옵니다. 당구장이나 기원에서 먹는 그 짜장면 맛이 안 나와요. 당구 내기해서 한 그 짜장면 맛이 안 나와요. 만화 보면서 먹는 그 짜장면 맛이 안 나온다고요. 찜질방에서 배달해 먹는 짜장면 그 맛이 안 나와요. 레시피가 달라요. 그러면서 나름대로 짜장면에 온갖 것 콩 넣어놓고 완자 넣어놓고 해도 맛이 그 맛이 아니라. 맛이 이상해. 옛날 우리 몸에 맞는 그 맛이 아니죠.

“옳도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 여인에게 옳을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그게 뭘 해도 그게 죄가 아니고 의되게 하시는 작업을 주님 쪽에서 알아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믿어라” 그러면 믿음 있는 자가 뭐 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되는 거예요. 믿음으로 사는 거예요. 믿음으로 의인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내가 행함으로 의인되는 게 아니고 다른 분이 나한테 그런 조치를 해줬기 때문에 의인됐다고 하는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행함과 믿음을 대비할 때 행함과 믿음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행했느냐, 아니면 너 말고 다른 분, 예수님이 행했는가, 그걸 비교해서 예수님이 행했으면 믿음이고 자기가 했으면 믿음이 아닌 거예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됐으니까 아브라함이 뭘 믿었습니까? 자기가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걸 믿게 된 거예요. 이건 다른 분이 있음을 인정한 거예요. 이게 얼~마나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늦게 와서 공부하는 게 우리가 알아서 버텨서 했지, 삐졌으면 우리는 갔다. 우린 이런 생각이잖아요? 주께서 버티게 하신 거예요.

수요일 날 제가 무슨 설교했습니까? 우리는 뭘 했다고 하지 말고 당했다고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안 들었죠? 표정 보면 알아요. 당했다고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놀러 갈 때 목욕탕에 가서 ‘나 주님 목욕 왔습니다.’ 하지 말고 오늘도 목욕탕에 앉아서 ‘어~! 좋다.’는 그런 소리 하도록 나는 당했습니다. 이런 이야기하라는 거죠. 뭘 해도 우리는 당하는 입장에 있죠. 사실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눈이 가리워서 그런 모르고 성령 받은 사람은 그걸 늘 우리는 당하며 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도 당했어요. 바른 소리 안 했는데 “옳도다. 참되다.” 해서 당했어요.

개그 콘서트라는 코미디 프로가 있는데 어떤 젊은 신혼 남편이 아내한테 화를 냈어요. 내가 결혼하기 전에 그렇게 당부했는데 왜 말을 안 듣느냐고 화를 낸 거예요. 내가 결혼하기 전에 네가 설거지하지 말라고 내가 한다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왜 네가 설거지해? 그러면 내가 너한테 때치, 때치 할거야.

우리는 죄인 밖에 없는데 주께서 때치, 때치 해서 전부 의로 다 만들어 놨어요. 우리가 책임질 자아가 아니고 주님이 책임질 자아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일에 말려든 사람 이예요. 오늘 강의 제목을 때치, 때치 할까요?

사마리아 여인은 선지자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아직도 자기의 자기 자신이 남아있어요. 선지자 말씀대로 따르겠다고. 그러나 그리스도가 돼 버리면 이것은 따를 것도 없이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덮치는 거예요. 허리케인처럼. 태풍처럼 밀려와 덮치기 때문에 그냥 자기는 추수 당했죠. 알곡으로 추수당한 거예요. 알곡 되려고 애쓴 게 아니고 알곡 추수를 당하고 보니까 이미 알곡으로 당해져 있어요.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도 버려두고 오직 그리스도만 감사하면서 자랑하죠. 그래서 성도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와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이건 성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에 우리가 말려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께로 말려들지 아니하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착한 일해서 영광 돌린다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믿는 위선에 빠져있을 텐데 뭘 해도 죄인 것을 까발려 주시는 그 주님의 선한 손길로 인하여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케 하는 일에 저희들이 말려들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