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 10절부터 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이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수 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 일을 “내가 너에게 생수 줄게.” 이야기하면 될 걸 여기서 예수님 이야기하는 것이 ‘그’라고 해서 마치 제 3의 인물한테 언급하듯이 그렇게 언급을 하죠.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이 사마리아 여인이 아무리 예수를 봐도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요, 유대인 남자 중에 하나이지. 이렇게 하지, 생수를 준다는 것은 찾을 수 없죠.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내가 누군 줄을 그 사람, 영생 주는 그 사람들을 모른다는 말은 네가 네 자신이 누군가를 모르고 있다 하는 현재 상황을 주께서는 지금 언급해주시는 거예요. 너는 너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너 자신을 모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아’라고 이야기해요. 리드라는 인류 여자 물리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은 자아와 자기를 구분했거든요. 자아는 에고, 생각하는 걸 자아라 하고, 주체라 하는 것은 영어로 self라 해서 세상과 관련돼서 나의 위치, 세상에서 나를 어떻게 보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주체, 자기라고 하고, 자아라 하는 것은 그거 이전에 이미 내 몸 자체를 두고 이야기할 때 자아라고 이렇게 구분을 했습니다.
상당히 구분도 누구한테 인정받을 구분이 아니고 자기가 그렇다 싶어서 한 구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이해하려면 우리가 좀 부질없는 행동처럼 느껴지거든요. 어쨌든 저는 자아를 그냥 자기, 주체, 같이 씁니다. 이 자아에다 예를 들면 이런 걸 하나 붙이자 말이죠. ‘거울 자아’라고 이렇게 해봅시다. 그러면 사람이 내가 거울 보면 거기 누가 나타납니까? 내가 나타나죠. 그러면 거울 자아라고 할 수 없죠. 내 자아나 그 자아나 동일한 자아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내 모습을 거울에 비췄는데 오!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모습의 자아가 나온다면 그건 거울을 비췰 때만 나타나는 자아가 되겠죠. 그러면 그것은 거울이 없다면 나타나지 않는 자아가 되겠죠.
지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타났을 때 지금 현장에 몇 명입니까? 예수님 한 명, 사마리아 여인, 몇 명이예요? 두 명이죠. 예수님의 이것을 세 명이 나타나는 현장으로 보는 겁니다. 세 명이 나타나려면 예수님 한 분, 사마리아 여인 두 사람, 나머지는 없는데 주님께서는 ‘그’라고 딱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알고 있는 나는 진정 나가 아니고 따라서 나를 못 알아본 입장에서 네가 알고 있는 너는 너가 아니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러면 제 3의 인물을 경유해서 보게 되면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알고 네가 누군지를 알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서 자아라 하는 것은 몸에서 나온 것이고, 자기라 하는 것은 자기가 자아상을 구축하기 위해서 따로 누구 외부를 이렇게 통해서 세상과 속에서 내가 누구냐 이렇게 할 때 자기, self, 주체라고 이야기해요. 우리 집에 물은 셀프입니다. 있잖아요. 알아서 스스로 하는 거예요. 스스로 한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는 누구냐,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까 셀프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타인 관계없이 나? 나지, 이건 자아고, 남을 비교해볼 때 ‘나는 저 개가 아니고 나는 저 사람도 아니고 나는 저런 여자도 아니니까 나는 나다.’ 할 때 한번 이렇게 거치고 타인을 거쳐서 나는 나지 뭐, 이렇게 할 때는 사회성과 관계성과 교회 속에서 자기가 형성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제 3의 인물을 등장합니다. 그가 등장할 때 이 사마리아 여인은 나름대로의 나라는 것은 그냥 내 몸만 있다고 해서 나라고 한 것이 아니고 ‘나라는 주체는 뭔가 다른 세계 속에서 나는 어떤 위치를 갖고 있는 그러한 다른 이런 내가 알고 있는 세계 속에서 나라고 다시 한 번 규정할 수 있고 생각하는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라고 사마리아 여인이 내세운 게 뭐냐 하면 여기 12절에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여기 누가 나옵니까? 야곱이 나오죠. 그 다음에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라고 해서 이 사마리아 여인의 자기상은 주체상은 자기는 야곱을 경유해서, 야곱마저 말고 있는 ’야곱이 조상입니다.’를 알고 있는 그러한 범위 내에서 ‘나는 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말이 예수님 당신이 제시한 ‘그‘라는 분하고 내가 알고 있는 야곱하고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가 등장해버리죠. 이 말은 누구 자아상이 최종적이고 정확하게 자아를 밝힐 수 있는 그러한 우리를 주체화 시킬 수 있는 어떤 분이냐? 제 3의 인물이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또 언급하게 되는 겁니다.
11절에 보면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라고 했습니다. 자, 사마리아 여인 조상이 야곱이 맞기는 맞습니까? 야곱이 조상이란 말은 우리 혈통적으로 야곱과 관련돼 있다는 말도 되고 이스라엘 자체가 혈통적으로 야곱의 DNA를 받은 거죠. 야곱에서 12지파, 아들이 나와서 이스라엘 나라가 됐잖아요. 뿐만 아니고 자기가 현재 물 길러 온 땅, 자기가 사는 땅도 야곱이 하나님께 축복 받아서 받은 땅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땅에 살게 되게 되면 야곱의 은혜 속에, 야곱이 받았던 혜택 속에 계속 놓여 있는 셈이 되니까 이것은 이 땅에 사는 자체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런 뜻이죠. 그러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께 복 받고 있는 이 자아상, 이 자기상, 이건 하등의 문제가 된다? 안 된다? 문제 될 게 없죠. 이미 복 받고 있는데요. 이는 부잣집 아들이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부잣집 아들인데 용돈 500원 줄까? 아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 자체가 부잣집 아들인데. 내가 만일 만수르 아들이라면, 만수르라고 세계에서 갑부가 있어요. 사우디아라비아 옆의 나라 쿠웨이트 근처인가 귀족의 왕인데 돈이 많답니다. 아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도 만수르가 인수했는가 모르겠어요. 그 수조 원 되는 재산가 아들에게 누구 아들이니까 이쁘니까 500원 줄게. 하면 뭐라 그러겠어요? 그거 없어도 나는 부잔데. 이렇게 되잖아요.
이것은 야곱이라고 언급한다는 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나름대로 자부심을 챙기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자기로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고 야곱의 자손이고 또 야곱이 하나님께 받았던 상속분의 땅에서 자기가 살고 있으면 이미 하나님의 선물을 풍족하게 받고 있는 입장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10절에 봅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는 나에게 선물을 구하여야 한다.” 이야기하잖아요? 그럴 때 여인이 ‘주시옵소서.’ 할 의사가 없어요. 왜, 지금 자기가 복 받은 여인이고 지금 야곱의 자손이고 야곱이 준 땅으로 살고 있는데 뭐 또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선물을 주느냐 이 말이죠. 이미 받은 것도 선물인데.
그렇다면 이미 받은 것이 선물인데도 불구하고 선물을 주겠다는 말은 결국은 지금 받은 것이 선물일 수가 없다는 뉘앙스를 예수님이 지금 여자한테 한 거예요. “네가 만약에 정말 하나님께 선물을 받고 복 받은 여인이라면 네가 생수가 나와야 된다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공식을 만들어봅시다. 하나님의 진정한 자손의 특징은 공통점은 뭐냐, 속에서 뭐가 나와야 된다? 속에서 생수가 영원토록 계속 나와야 된다는 거죠. 이거 안 나오면 야곱의 조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 입장에서는 자기 몸 자체가 야곱의 후손이고 자기가 살아온 땅 자체가 야곱의 후손이란 말이죠. 이런 조건만 해도 충분히 진짜 하나님이 택한 자손이 맞다고 자기는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뭐가 틀렸느냐는 거죠. 결국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대화를 시도했다는 것은 뭘 끄집어냈느냐 하면 바로 이걸 끄집어내죠. 죄를 끄집어내죠.
하나님의 모든 일은 죄를 발굴하지 않고서는 진행되지를 않습니다. 죄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여인이 자기가 죄 지었다고 생각합니까? 이 여인은 물 길러 왔죠? 물 길러 와서 가만히 있는데 이렇게 누가 죄인이라고 하면 좀 안 좋잖아요. 이런 게 있습니다. 담배 갑을 버린다. 담배 피우지 마라. 이러니까 담배 피우는 사람이 하는 말이 담배 피우는 일이 나쁜 일이고 국가 보건에 지장이 된다고 하면 아예 전매청을 없애든지 인삼공사를 없애고 아예 담배를 만들지 말든지 담배를 만들어놓고 이제부터 나쁘다 하면 어떻게 해? 값 올려서 서민들의 주머니 압박을 가하면 되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담배가 안 좋다 하는 것은 본인들이 인정하는데 너무 몰아세우지 마라 그런 뜻이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 말이 굉장히 복음적으로 또는 성경적 해석에 굉장히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합니다. 뭐냐 하면 이런 거거든요. 예정론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택하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하니까 그 소리 듣고 보통 사람이 말하기를 ‘아니 선택받지 못한 것도 죄냐?’라고 나온다 이 말이죠. 내가 선택 안 받는 것이 내 죄냐 말이죠. 선택을 누가 하는데 그 책임을 왜 나한테 묻느냐? 선택 안 받는 게 무슨 죄라고 죄 값을 왜 우리가 치르느냐?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담배 이야기를 한 겁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 우리가 담배 피우니까 ‘죽여주옵소서.’ 하면서 담배를 매일같이 피웁니까? ‘그래 마저 피워서 죽어야지.’ 이런 희망 때문에 이런 목적 때문에 담배를 피웁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말이 다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무슨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나도 담배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 말 자체가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정말 그 사람이 본인의 죄를 안다면 ‘나 같은 담배 골초를 제일 먼저 감옥 갈 필요 없이 현장에서 몽둥이로 패서 죽여주시옵소서.’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담배 피우는 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인 거예요. 그렇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은 것은 제대로 된 정당한 처분이십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불신자 봤습니까? 불신자 그렇게 이야기 안하죠? 불신자뿐만 아니고 신자라고 우기는 인간도 다 마찬가지에요. 이순신 장군은 그렇게 훌륭해도 복음 못 들어서 지옥 갔단 말이냐? 이렇게 나오거든요. ‘신에게는 아직도 열 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하면서 자기 한 몸 바쳐서 결국은 전쟁에서 목숨 잃어가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렇게 하면서 나라 살렸는데 그렇게 훌륭한 분이 단지 복음 못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을 가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아까 유튜브 동영상에도 했지만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에 예수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는 형벌을 받는다니까 그 중에 이순신 장군도 포함되잖아요. 그러면 이순신 장군은 형벌받기 위해서 태어났잖아요. 이게 얼마나 불합리하냐 말이죠. 왜냐 본인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책임을 물 수는 있어요. 그런데 태어나는 것도 자기 맘대로 안 태어났고 주께서 만들어 놓으니까 비로소 응애, 하고 태어난 인간을 보고 인간이 뭘 잘못했다고 거기다가 복음도 누가 전해줘야 믿든지, 전하지도 않은 복음을 안 들었다고 해서 형벌을 받아버리면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불합리하고 이런 억울할 데가 어디 있어요? 기회를 주고 잘못했으면 그때 때려도 우린 할 말이 없는데 전혀 기회를 주지도 않고 복음 모른다고 지옥 보내면 세상에 이런 횡포가 있어요? 너무나 불합리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불합리하다고 하는 ‘그것이 합리적이 아니고 말도 안 됩니다.‘라고 했던 것이 하나님이 찾고자 했던 죄 그 자체입니다. 그게 죄라는 거죠. 불합리합니까? 그건 주의 뜻이죠. 이게 아니고 납득이 안 되는데 내가 어떻게 믿으란 말입니까? 이렇게 나올 때 ’네가 지금 나한테 반항하느냐?‘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죄라 하면 우리가 인정을 하겠는데 ‘그게 죄에요. 그럼 내가 뭐가 잘못됐지? 앞으로 그런 짓 안 해야지.’ 반성의 여지가 있고 다시 죄 안 질 가능성이 있는데 그게 아니고 물 길러 온 게 그게 죕니까? 물 길러 오면서 자기가 아는 나는 야곱의 자손이다. 그거 알았다고 그게 죄가 된다 이 말입니다. 평소에 그게 죄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예수님이 요구한 기준은 뭐냐 하면 ‘네가 딱 보면 딱 알아야 돼.’ 이거거든요. 그게 인간에게 성립이 안 되죠. 예수님을 딱 봤는데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 그거는 이미 인간이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마귀는 딱 보고 예수님 알아봤어요. 마귀는 알아보고 인간은 못 알아보고. 그만큼 마귀가 인간을 장악하고 있다. 누르고 있다 이렇게 보면 되죠.
물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은 갑자기 생수를 거론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여기서 물 이야기했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유대인이기 때문에 못 주겠다고 이렇게 나온 거죠. 물은 줄 수 있죠.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네가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이전에 네가 그런 그냥 우물의 물 내놓는 거 자체가 생수에 미달하기 때문에. 애 잘 키우면 구원 받습니까? 구원 못 받죠. 애 키우는 게 나쁜 짓입니까? 집사님도 애 키우러 내려가야 하는데 나쁜 짓하려 내려가는 겁니까? 아니라 하면 안 돼요. 그게 나쁜 짓 맞다니까요. 애 키우는 것도 나쁜 짓이 돼요. 목욕탕에 목욕하는 것도 나쁜 짓이 되고 인간이 나쁜 짓 아닌 게 없어요. 왜냐 하면 천국에서는 애 키우는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천국에서는 목욕하는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에서는 목욕하는 게 없는데 여기는 목욕하는 게 있다는 말은 이 땅이 지금 문제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 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문제덩어리인 줄 모르고 있으니까 그게 죄인 되는 거 맞는 거예요.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가 문제 있다는 것을 누구 만났을 때 가능한 겁니까? 예수님을 만났을 때나 가능하죠. 예수님께서 생뚱맞은 이야기를 서서히 끄집어 낸 거죠. 처음에는 ‘물 좀 달라.’ 했죠. 그래서 물 달라 해서 물 줄 수 있는데 ‘당신이 유대인인데 어떻게 줍니까?’ 라고 할 때 그 다음에 이 말은 뭐냐 하면 ‘유대인에게 내가 물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이 물 달라 합니까? 물 줄 수 있는 능력은 나한테 있습니다.’ 할 때 주님께서 말씀이 ‘네가 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인간 자체가 벌써 잘못됐다는 거예요. 잘못됐다 하니까 여인이 ’나 잘못된 게 아니고 나는 야곱의 후손이고 하나님이 선물로 준 이 땅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야곱의 자손 같으면 왜 나를 못 알아보느냐?‘ 이렇게 나오시는 거죠. 하나님께 선물을 받았으면 왜 나를 즉각 못 알아보느냐는 거죠.
선물은 준대로 받았고 야곱의 자손 혈통은 받았지만 제대로 주신 그렇게 하신 그분을 못 알아본다는 자체는 이미 사마리아 여인은 진정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거울자아라는 것은 바로 자기가 비춰 본대로 비춘다면 그건 자기 자아를 되찾는 것밖에 안 되고 주께서는 예수님 자신이 거울이 되어서 예수님 안에 사마리아 여인의 자아를 비취게 만드는 겁니다. 그 자아가 뭐냐 하나님과 결부돼 있는 자아를 지금 사마리아 여인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과 결부된 자아는 생수를! 예수님이 생수 줄자인 것을 알아보는 자아,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과 관련성 있는 자아입니다. 그 자아를 사마리아 여인은 여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자기는 평소대로 그냥 우물이 있기에 그것도 야곱의 조상의 우물이기에 물 길으면서 ‘우리는 조상 덕 본다. 야곱이 받은 축복 덕 본다.’ 이렇게 생각했지, 덕 본다는 생각하는 내가 이게 문제성이 있는 자아라는 사실을 저는 추호도 상상도 못하고 생각도 못했죠.
13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뻔한 이야기잖아요? 물 한번 먹고 난 뒤에 3년 6개월 견디는 사람 없습니다. 물 먹고 난 뒤에 몇 시간 지나면 또 마셔야 돼요. 물 안 마시면 갈증을 느끼게 돼 있고 인간의 신체는 70 몇 퍼센트의 물로 돼 있고 그래서 땀으로 계속 증발하니까 물이 보충돼야 되고 따라서 갈증을 느끼면서 물 마시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그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아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걸 당연하다고 보는 거예요. 물마시고 목마르다는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것은 죄도 아니고 이건 마땅히 인간이 그러하다고 본 겁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하나님과 결부된 게 아니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너는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 말이죠. 사람이 물 마셨는데 목마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당연히 물마시면 되지 이게 무슨 죄일까? 그게 바로 출애굽이 안 된 상태, 애굽에서 사는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의 욕구나 불만을 해결 지으려고 오신 게 아니에요. 도대체 우리는 주님 앞에서 던져야 될 질문조차도 정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왜 그렇게 잘하는지 몰라. 무슨 질문을 해야 되는지 몰라요. 우리 성도가 성도다운 질문을 하는 것도 주님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질문이 돼요.
예를 들어서 어떤 판이 있다 합시다. 뭔가 판에서 꼼지락거리고 움직인다면 우리는 만약에 벌레가 있다면, 징그러운 이야기지만 이리 들어가, 하고 보내버리고, 음식을 먹는데 나방이 날아오게 되면 ‘엇, 저리가.’ 그러면 나방이 날아가잖아요. 그런데 이걸 수직적으로 케이크처럼 하면 여기 밑에 있는 어떤 구조가 파리나 모기를 이렇게 오게 했다면 훌친다고 모기가 날아가는 게 아니고 또 앵하고 달려올 거다 말이죠.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땅을 가진 것으로 주의 축복을 가진 걸로 그걸 족하다고 여긴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 땅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에덴동산 쫓겨났을 때부터 계속 유지됐던 사고방식 이예요. 자기한테는 문제가 없고 땅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땅만 일한대로 농사지어서 잘 되면 자기는 만족하겠다는 겁니다. 땅이 척박하고 저주스러워서 문제지 땅만 괜찮으면 괜찮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땅 자체가 저주를 뿜어내는 원천에 대해서는 그들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땅이 저주를 뿜어내는 것은 선악과 따먹었다는 말씀을 위배했기 때문에 땅이 저주를 뿜어내잖아요. 뿜어내는 이유는 모르고 그냥 표면에 있는 거, 나한테 살기 좋으냐. 편하냐. 이것만 생각하고 있는 게 인간들이다 말이죠. 인간자체는 인간이 속해 있는 뿌리는 주님이 아시는 겁니다. 이걸 하나님과 결부된 인간을 불쑥 주님께서 제시한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과 결부된 인간을 제시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 ‘그’라니까 예수님이 그니까 예수님 안에 누가 들어있다? 예수님 안에 사마리아 여인이 이미 담겨있는 거예요.
그리스도 몸 안에 지체가 있듯이, 문어가 이렇게 눈, 주둥이 튀어나오고 발이 있잖아요. 문어가 주님이라면 우리는 풍선 같은 주님(문어)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가 아시는 자에게만 부르시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미 들어있는 것은 하나님과 결부된 자아상인데 이 바깥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결부가 끊어진 사마리아 여인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자신을 거울로 보여주게 되면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 누구시죠?’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당신이 누구신데 나한테 생수를 준다는 말입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생수를 받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네 몸에서 생수가 터져 나올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이야기하면서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여인의 자아상을 염두에 두고 이 여인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인이 기대한 자아상은 따로 있어요. 나는 야곱의 자손이다. 나는 복 받고 있다. 이게 여인이 자기가 기대한 평소의 자아상인데 예수님 속에서 들키지 않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의 자아상은 정작 사마리아 여인은 못 알아보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내 몸에서 생수가 나와? 쪼개봐?’ 쪼개보면 안 나오죠.
동화에 그런 동화 있잖아요. 암탉이 있는데 알을 낳으면 황금계란이 나오니까 안에 황금 들은 줄 알고 쪼개보니까 들은 게 없어서 삼계탕 해먹었죠. 보통 닭하고 똑같은 거예요. 반석에서 물 나오니까 반석 치면 물 다 나옵니까? 아니죠. 그래서 반석 안에 물이 없단 이야기했잖아요. 반석 안에 물이 없고 예수님에게 물이 있었죠. 예수님께서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거죠.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찾지 않고 자기 주변에서 찾을 생각을 해요. 자기 내부에서 찾고 자기 주변에서 찾고, 혹시 내가 놓친 것 없나, 이런 거. 나도 기도를 하게 되면 옛날에는 처음에는 30초도 못했는데 이제 교회 다니고 훈련받고 숙련된 기도모임에 참여하다 보니까 나도 두 시간 안지고 할 수 있다 말이죠. 그러니까 나한테 기도하는 힘이 있다는 이 말은 그거는 자기 개발이지, 자기 자랑 중의 하나가 돼 버려요. 기도는 주님 안에 있지 우리 안에 있지 않아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것이 우리한테 오게 되면 그건 성령한테 기도가 되는 거죠. 우리 기도는 아니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생수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여인도 예수님 자신이 생수가 영원히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여인도 계속 생수가 나오는 겁니다. 나오는데 그걸 사마리아 여인이 예정에 상상을 했다? 못했다? 이건 상상도 못한 이야기에요.
사람들은 자꾸 말씀을 지식으로 확보를 하려고 해요. 확보하는데 본인이 문제 있다고 생각을 못한 거예요. 자꾸 성경 외우고 성경 배우고 이렇게 하게 되면 나는 점점 더 나는 문제없어. 나는 문제없어. 맨날 이런 식으로 되는 거예요. 이거는 문제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 안에 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쳐들어온다는 생각을 해야 되는 거예요.
주님 말씀이 안 쳐들어오게 되면 사람은 기존의 나를 고수하고 고집하게 돼 있어요. 그렇게 되면 나를 노력하고 반성하고 개선합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어떤 점에서 개선됐습니까? ‘난 이제 때려죽여도 남자를 보기를 돌 같이 본다.‘ 이랬습니까? 아니죠.
어떤 마그리트라는 유명한 인류학자가 있는데 기자가 물었어요. ‘어떻게 이혼을 세 번씩이나 합니까?’ 라고 물었어요. ‘당신은 이혼 세 번 했느냐 묻지 말고 어떻게 세 번씩이나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라.’ 당신은 내가 세 번씩이나 열정적으로 사랑했다는 걸 왜 잊어버립니까? 신문에 이렇게 내라. 세 번 이혼한 여자라 내지 말고, 세 번씩이나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대단한 여자, 이렇게 내라.
사람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것을 흠 잡으려 하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인의 흠을 잡는 게 아니고 흠 없다고 여기든 흠 있다고 여기든 이것이 진짜 하나님과 결부된 진짜 택한 백성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진짜 야곱의 자손 같으면, 진짜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 같으면 계속해서 생수가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럼 야곱 본인은 계속 생수가 나왔습니까? 계속 나왔죠. 아브라함도 계속 나왔죠. 왜, 아브라함에게 줄기차게 누가 따라다닙니까? 천사가 따라다니죠.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죠. 그럼 계시를 ‘하나님 제가 준비 됐는데 계시 한번 내려 보소. 하나님 살아계신 솜씨를 한번 보여 보라고요’ 아브라함이 이렇게 거들먹거렸습니까? 그냥 아브라함은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그게 자기 원대로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살고 싶어서 자기 아내를 성상납하고 그랬잖아요? 애굽 왕한테도 아비멜렉 앞에서도 자기 누이동생이라 속이고 잘 보이려고 했잖아요. 제 할 일 뿐 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간섭하고 그 애굽의 왕이 사라를 범하려고 할 때 그날 밤에 바로 왕이 하나님께 혼쭐 난 모양이라. 얼마나 화가 났으면 ‘도대체 너는 나한테 어떤 물건을 줬느냐’고 따지느냐 말이죠.
여기 한번 보세요. 여기 보면 재고가 나오죠? 자투리 재고, 파선 재고, 유통기한 초과 재고, 반품 재고 나오잖아요. 왜 재고품을 받죠? 그래서 반품했죠. 도로 가져가라 했다 말이죠. 설교 시간에 이걸 보고 인용한 게 있어요.
이 말은 뭐냐 바로 왕이 하는 말이 ‘아브라함아 너는 네가 누군지 잘 모르는 모양이지?’ 이런 뜻이다 말이죠. 그래요. 아브라함은 본인이 누군지 몰라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다 몰라요. 하나님이 앞으로 어떻게 다룰지 우리는 감을 못 잡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나는 나가 아니라는 사실, 그건 우리가 알죠. 주님의 손에 있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바꿀 수 없다는 거예요. 성형수술? 내가 원하는 것을 기대하고 돈 주고 변형하잖아요. 늘어진 볼 당겨주고 이마는 보톡스 맞아서 부풀려 주시고 처진 눈 올려주고 눈썹은 문신으로 해주시고 턱은 위, 아래 양악으로 완전히 끼어 맞춰 주시고 온갖 것 다하죠. 축 처진 엉덩이도 바짝 올려주시고, 그거는 내가 원하는 나고, 그거 하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래나 저래나 뭘 해도 주님 보시기에 나는 항상 가짜라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게 죄가 된다는 겁니다. 모를 수밖에 없죠. 누가 알려줘야 알죠. 진짜 나의 진품 명품을, 진짜 나의 모습을 알려줄 분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도 없었거든요. 아무도 없다 말이죠. 그건 예수님이 했잖아. 여인이 지금 예수님을 볼 때는 자기가 아는 수준의 예수님이지 그 예수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1과 2는 서로 왔다, 갔다. 그걸 피드백이라 하는데 왔다, 갔다 주고받고 할 뿐 이예요. 제 3의 인물이 등장할 때 그 제 3의 인물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반성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기회를 갖는 겁니다. 이렇게 세상을 둘이 가다가 한 사람이 더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뭐가 생깁니까? 갈등과 충돌이 생기죠. ‘쟤는 얘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 슬슬 질투 나는데 물어봐? 말아? 그런데 표정 보니까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기분 좋은데 그래서 쟤가 삐져서 나가면 안 되는데?’ 두 사람이 있을 때는요, 끼어드는 사람이 없어서 좋아요. 그런데 하나 더 생겨버리면 문제 생긴다니까요. 부부가 둘이 결혼할 때는 서로 참기름이 고소하죠. 그런데 애 하나 낳고 난 뒤에는 그 다음부터는 ‘애가 좋아? 내가 좋아?’ 이러고 애한테 묻기를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자기도 못 푸는 문제를 애한테 억지를 부리면서 문제를 던지고.
제 3의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새롭게 규정돼야 된다는 것을 강요받는 순간이기도 해요. 현재 내가 유지했던 그것은 아니다 말이죠. 뭔가 제 3의 인물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아를 난 자신하고 여겼던 그런 우매함의 소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 3 인물은 뭐냐? 그것은 예수님도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도 아니에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함께 있는 제 3의 인물, 십자가 대신 지신 주님이십니다.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인간의 죄를 품고 오신 하나님, 중보자시죠. 그 중보자 속에서 비로소 생수가 나오죠. 하나님 속에서 나오는 생수는 우리한테 넘겨지는 생수가 아니에요.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존재기 때문에 감히 생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생수가 나오게 하시는 것은 그 죄인의 요소가 하나님 요소를 함께 품은 제 3의 인물이 아니면 그건 불가능한 일 이예요.
그래서 하나님 믿지 말고 예수님 믿어야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 같은 예수를 만들어 놓고 믿어버리죠. 진짜 예수님은 못 믿어요. 안 믿는 게 아니고 믿을 수가 없어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자꾸 하나님 같은 예수만 믿죠. 정작 내 자신은 내 자신이 아니고 허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분이, 성령, 예수님의 영이 와야 비로소 나 자신이 내가 아니고 가짜고 껍데기란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진짜 우리는 따로 있어요.
빌립보서 3장 20장 한번 봅시다. 수요일 날 언급을 했는데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이렇게 돼 있죠. 우리의 시민권이 왜 하늘에 있죠? 그리고 골로새서 3장에서는 우리의 생명은 어디 있다 했습니까? 우리의 생명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죠. 그럼 땅에 있는 목숨은 무슨 목숨입니까? 이건 죽은 목숨인 동시에 그냥 죽은 목숨이 아니고 주님을 위하여 죽은 목숨이죠. 주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쓰여 질, 용도를 갖고 있는 목숨.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목숨은 용도가 없어요. 목숨은 오직 자기 자신이 사는 게 목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명분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의인을 위해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말하죠. 안중근 같은 사람. 의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 혹 있거니와 죄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 누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한번 적어봅시다. 이게 말이 안 되죠? 죄인을 위해서 왜 죽어야 됩니까? 죄인을 옹호하려고 주님께서 죽으십니까? 그건 아닐 것이고. 죄인에게서 뭐 건질 게 있어요? 죄인에게서 어떤 희망이 있습니까? 죄인이 무슨 희망이 있어요? 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거예요. 죄인을 목숨을 버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본인이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찾아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죠? 죄인을 위해 목숨을 던진 분이죠. 로마서 5장에.
그러면 자기가 전적으로 죄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그 예수님은 가짜 예수고 그건 진짜 예수가 아닙니다. 본인이 죄인이 아닌 입장에서 예수를 믿어버리면 그건 예수가 아니죠. 조작된 예수고 마귀가 집어넣어준 마귀가 만들어 낸 유사품이죠. 가짜 예수죠. 진짜 예수는 뭐냐, 자기가 뭐다? 죄인인 걸 아는 거예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안다는 것은 자기가 죄를 많이 지어서 죄인인 것이 아니고 주님이 와서 나를 죄인으로 규정을 시켰다는 그것을 자기가 그대로 수용한 겁니다. ‘너 죄인이야.’ 할 때 ‘고맙습니다.’ 받는 거예요. 죄인이라 하면서 죄를 위해서 목숨 바친 주님이 그와 함께 있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께서 다가와서 이야기를 하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보여준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안 졌을 경우에 하나님입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이죠. 누구는 아닙니까? 주는 아니죠. 언약에 의해서 주가 되려면, 약속에 의해 주가 되려면 죄인을 위해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생수가 나오려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그 주님의 생수가 같이 나와 줘야 그 사람이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영생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온 것은 내가 이미 너와 함께 있는 존재로서 너한테 다가왔다는 거예요. 네가 보기는 너 따로, 너 앞에 있는 사나이 나란 사람이 따로지만 내 안에는 이미 너는 내 품속에 내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여인인 겁니다. 그래서 너한테 생수가 나온다는 것은 곧 내 생수가 내 속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집에 가더라도 계속 생수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생수가 계속 나오는 조치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렇죠. 구원에 관해서 예수님만 다 알고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러면 그 말이거든요. 그럼 예수님께서 ‘갇혀 있다.‘라는 말을 해줘야 비로소 우리는 갇혀 있는 걸 알지, 예수님이 갇혀 있다는 소릴 하지 않는 이상은 우리는 절대로 갇혀 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의 사정을 아는 것은 예수님이 와서 직접 알려줘야 비로소 우리의 형편에 대해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아까 목요일 날 개봉한 영화 이름이 ‘메이즈 러너‘ 인에 그 영화가 이런 영화입니다. 어떤 젊은 애가 영화 첫 장면부터 막 솟구치는 엘리베이터 위에서 아주 혼쭐나서 어쩔 줄 모르는 게 첫 장면 이예요. 그 장면 뚜껑 열리면 어떤 햇빛 비치는 들판이 보이는데 그 들판에 사방에 약40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이 확 둘러쳐져 있어요. 그런데 지하에서 엘리베이터 타고 지표면에 올라왔는데 와 보니까 여기 들판도 있고 숲도 있는데 숲과 들판보다 더 높은 60미터 높은 콘크리트 큰 장벽들이 사방을 둘러쳐 있어요. 그럼 이건 갇혀 있는 셈이죠. 이 갇혀 있는 것을 어떻게 탈출하느냐 하는 영화가 오늘 개봉한 영화에요.
제가 아침에 그 영화가 굉장히 중요해서 보고 왔는데 이걸 보면서 생각한 게 ‘우리가 지금 죄에 갇혀 있다. 또는 세상에 갇혀 있다. 마귀에 갇혀 있다.’를 갇혀 있다고 수용하지 말고 도대체 누가 이 사실을 이야기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누가 이 사실을 이야기했을까요? 예수님이 이야기 안 하면 아무도 이 사실을 알려질 수가 없죠.
그러면 그것을 가르쳐 줬다는 그분만이 곧 뭡니까? 구원할 수 있는 방법도 그분만이 이미 유일하게 갖고 있죠. ‘갇혀 있다.’를 유일하게 이야기주신 그분만이 구원의 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개인의 행함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지금 사업하고 학교 교사로 일하고 다들 직장 생활하고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이 영화에 입각해 보면 그냥 갇혀 있는 꼴. 갇혀 있는 상태에서 그냥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죽어서 어디 가는지도 그 사람들은 몰라요. 왜 공자도 있고 맹자도 있고 똑똑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그 어느 누구도 갇혀 있고 네 힘으로는 절대로 못 빠져 나올 지경에 놓여 있다. 그걸 언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이죠.
이것은 우리보고 종교생활, 신앙생활 잘 하란 문제가 아니고 현실이 이렇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이 알려줬으면 우리는 거부하든 거부하지 않던지 상관없이 우리가 그걸 믿습니다. 안 믿습니다. 그것도 의미 없다니까요. 믿는다고 현실 되고 안 믿는다고 현실이 안 되는 게 아니고 상관없이 ‘아! 아 그렇구나.’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종결된 거죠.
메이즈 러너, 그런데 그 영화에서 갇혀 있는데 갇혀 죽으면 영화가 재미없잖아요. 그 영화가 콘크리트 벽이 낮에는 틈을 주고 틈에 들어가면 엄청난 미로가 있어요. 미로 크기를 영화에서 보여주는데 그 청년들이 잡혀 있는 터전이 요만하다면 미로는 몇 배 커서 이만해요. 이 미로가 있다는 말은 갇혀 있기는 갇혀 있지만 미로를 통과하게 되면 구원이 된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갇혀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분으로 인하여 이미 구원이 돼 버린 상태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기에 비로소 모든 인간은 갇혀 있음을 이제는 그걸 보는 안목이 열린 거예요. 그러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중차대한 문제가 또 있겠습니까? 그걸 지금 주께서는 사마리아 여인보고 실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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