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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말려듬 / 요한복음 3:15 / 140703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말려듬 / 요한복음 3:15 / 140703

정인순 2014. 7. 4.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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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가락-요한복음 3장16(말려듬)14070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16절 이전에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돼 있죠? 15절에 보면 15절에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 인자가 들리는 거하고 영생을 얻는 거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거부터 시작해 봅시다. 제가 들리면 영생 얻습니까? 들린다는 말은 이 지점에서 위로 올라가야 되잖아요. 올라가는 그거하고 영생하고 무슨 관계있죠? 우리가 아는 영생은 오래 사는 거, 끊어지지 않고 계속 사는 것, 그게 영생인데, 예수님은 그 영생과 다른 영생을 제시한 거예요.

다른 영생이 뭐냐, 인자와 관련돼 있습니다. 보통 영생 얻는다 하면 반드시 앞에 누가 붙느냐 하면, 영생이 의미 있으려면 앞에 (나) 내가 영생 얻을 때 나한테 의미가 있는 거예요. 남이 영생 얻는 거 짜증나요. 내가 영생 얻을 때 영생이 확 와 닿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15절에서 인자가 들려야 하고 인자는 예수님이고 예수님과 영생과 관련돼 있죠. 그러면 예수님과 관련돼 있는 영생이 ‘나’하고 연결되려면 거기 무슨 어떤 다른 연결고리가 있어줘야 되잖아요. 그렇죠? 연결고리가 있어야 되는데 예수님과 영생 사이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이죠. 들린다는 것은 죽어 있던 예수님이 위로 올라간다는 거죠. 들린다는 것은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걸 이야기합니다. 그건 요한복음 뒤에 차차 나와요.

그러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은 뭘 지셨다? 십자가를 지셨다가 되죠. 예수님이 십자가 지셔서 사흘 만에 부활해서 영생 얻은 거예요. 영생이라는 것이 최초로 등장한 겁니다. 그러면 나는 예수님이 아니다 말이죠. 예수님이 죽어서 예수님이 영생 얻었다면 이 영생은 내가 이 영생에 참여되려면 결국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 속에 우리가 빨려 들어가고 거기 참여될 경우에 되는 거죠.

그러면 내가 십자가 지면 나는 영생 얻습니까? 안 돼요. 이건 내 십자가기 때문에 안 된다 말이죠. 그러면 내 십자가를 지고 그 다음에 예수님 십자가에 가서 거기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에 관건은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참여될 것인가? 그게 주안점이 되겠죠. 그러면 십자가 찾아가려면 십자가 지는 그 갈릴리 그 장소에 가면 되겠습니까? 예수님 제자들 12명 있는데요. “야, 너희들 왜 따라와?” “주님 가신 길에 영생이 있으니까 따라갑니다.” “따라올 필요 없어, 나중에 내가 죽을 때 전화해줄게. 나 죽을 때 너도 같이 십자가 만들어서 같이 강도처럼 달려 죽으면 돼” 그렇게 되는 거 아니잖아요?

옆에 죽었던 강도도 영생 얻었습니까? 한쪽 강도는 영생 얻었지만 한쪽 강도는 영생 못 얻었죠. 왜 같은 십자가 동기생인데 왜 하나는 못 얻죠? 십자가 나무하고 옆에 딱 붙어서 간다고 해서 그게 주님의 인생에 참여될 문제가 아닌 거예요. 왜냐 하면 타인이기 때문에. 몸이 다르잖아요. 예수님 육체가 따로 있고 우리 육체가 따로 있는데 한방에 이불 같이 덮고 잔다고 해서 같은 길을 간다고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자가 들려야 간다. 들리게 되면 너희들이 영생을 얻는다. 그런데 그 영생이란 말이 예수님의 입에서 최초로 나왔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본인이 영생을 얻었다는 뜻이거든요. 예수님이 얻었던 그 영생에 우리가 거기에 기어 붙어야 되고 거기 참여하려면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되는 어떤 연결이 있어줘야 된다고요.

그래서 그 연결이 무엇입니까? 묻는다면 직접 우리하고 물을 게 아니고 예수님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있었죠? 12명의 그들은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라는 질문부터 생각해야 돼요. 그것은 성경에 일일이 찾으면 번거로우니까 제가 그냥 말씀드리겠어요.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였나니”라고 돼 있고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내게 아무도 올 수 없다.” 그 말을 잘라버리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가 없다.”

예수님이 영생을 만들어 놓았지만 문제는 예수님께 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영생은 없다가 돼요. 예수님한테는 영생이 있는데 예수님에게 있는 영생을 우리가 찾아간다든지 그곳에 참여해서 그걸 가진다든지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은 우리한테는 없는 겁니다.

16절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돼 있어요. 요 대목에서 독생자를 주셨다 하면 중간에 주신 것이 독생자고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받으신 분이 누구죠?  받으신 분을 ? 표로 합시다. 주신 분이 누구라고요? 하나님, 뭘 주셨다? 독생자를 주셨다. 받는 자는 있어요. 받는 자를 누구라고 확정 짓지 맙시다. 결국은 영생 얻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오는 결론은 간단합니다. 15절에 영생 있다. 16절에 영생을 얻는다. 어떻게? 아버지가 우리한테 뭘 주시면 되는 거예요. 누굴 주시면 되죠? 예수님을 통째로 주시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주시면 받는 쪽이 예수님과 동시에 영생도 같이 받는 게 돼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이 생명이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영생을 주시면 우리는 생명, 영생을 받은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 쪽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겁니다. 굉장히 쉽죠?

쉬운데 쉽다는 말을 건방지게 제가 방금 썼는데 왜 쉽다는 말을 썼느냐 하면 받는 자는 굉장히 쉬운데 아버지가 예수님을 안 준 사람한테는 이 소리가 하나 마나한 소리에요.

예를 들어서 목이 마르다. ‘목이 마르면 이 물을 드세요. 물을 드세요.’라고 물을 주면 되는 거예요. 주면 물을 마신다 이 말이죠. ‘어때요? 시원하죠?’ 그런데 물을 주지 않은 사람한테는 목마른 거예요. 왜 목마르냐 하면 물을 안 찾아서가 아니라 유일하게 물을 주실 수 있는 분이 그 사람에게는 안 줬기 때문에 계속 목말라 있는 거예요. 이거는 어렵고 쉬운 문제가 아니고 ‘받은 사람 손드세요.’라는 그 문제라니까요.

예수를 믿으면 안 된다니까요. 예수를 믿지 말고 예수를 받으면 되는 거예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를 받았음을 후차적으로 고백하는 게 믿음이거든요. ‘나 예수를 믿습니다.’ 하면 예수를 소유한 게 되니까 이건 틀린 것이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저한테 주셨습니다.‘를 믿는 게 되는 겁니다.

좀 늦었으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15절, 16절 할 차례입니다. 요한복음 3장 15절에 보면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이 공식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인간이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그러면 하나님이 만들었다면 우리는 이 공식을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들어내지 못하죠. 공식을 일방적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공식을 일방적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영생 주는 모든 방식에 대해서 우리로부터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게 되는 겁니다. 헌금하나 전도하나 영생이 안 되고 예배 참석해도 영생이 안 되고 아무것도 영생이 안 돼요. 공식 따라 주어지기 때문에.

공식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을 만들어 놓고 아버지가 우리에게 직접 주게 되면 그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는 거예요. 독생자를 주셨다 이 말이죠. 독생자를 주시면서 아울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뭐냐 하면 그 주신 독생자가 믿어지게 하는 믿음도 더불어서 세팅돼서 같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3장 16절 이것이 뚝뚝 끊어지지 않고 한꺼번에 이게 세팅돼서 한꺼번에 다 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그 말씀 자체가 우리 속에 그냥 들어와 버리죠. 그럼 우리 마음에다 칩을 하나 만듭시다. 마음에다 빈자리를 만들고 여기에 3장 16절에다 할애를 하는 거예요. 택지 분양을 한다 말이죠. 요 장소에다 3장 16절을 새겨버리는 그런 몸에 택지 개발을 해서 요 틀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말씀이 들어있는 사람입니까? 말씀이 들어있는 사람이죠. 이 차이가 중요한 겁니다. 말씀이 들어있는 사람 이예요. 우리가 남을 믿는다 할 때는 그 사람이 나한테 없어요. 그 사람이 내 속에는 없어요. 내가 믿어줄 때만 그 사람은 순간만 나한테 아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침해 걸렸다? 내가 짜증난다? 갑자기 그 사람이 싫어졌다? 그러면 그 사람은 믿지 않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옛날에는 아는 사이다 할지라도 그 순간에는 나한테 없는 순간이 와 버려요.

그러면 이러면 믿음이 어떻게 돼요? 믿음이 내 감정에 따라 믿음이 뚝뚝 끊어지겠죠. 의식이 다 끊어진다 말이죠. 끊어지게 되면 그 끊어질 때 주께서 재림하게 되면 지옥 갑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죠. ‘믿습니다.’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신념이죠. 신념은 신념이 있을 때는 어떤 경우냐 하면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데 다른 게 관심이 들어와 버리면 이쪽에 있던 신념의 순간이 날라 가 버려요.

예를 들면 말씀 듣고 예수님 생각하는데 갑자기 애가 학교에서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다는 전화를 받을 때 그 전화 받는 그 순간 뭐가 날라 가 버립니까? 은혜 받은 것은 날라 가 버리고 그 순간에 어디에 집중해야 돼요? ‘애가 병원에 갔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게 걱정되게 되면 하늘이 노래져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겠죠. 그때 어떤 사람이 ‘믿습니까?’ 하면 ‘지금 그딴 거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하겠죠. 그런 순간이 매일같이 얼마나 찾아오겠어요?

내가 내 감정 중에서 하나 믿는 감정을 따로 떼 내서 그 떼 낸 감정 가지고 믿음 가지고 주님을 믿어버리면 이건 항상 주님은 나 바깥에 있으나 마나한 존재, 내가 필요할 때만 차용하고 필요 없으면 무관심한 그런 존재로 전락되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그건 믿음이 아니죠.

믿음이 되려면 끊어지지 않고 세팅 돼야 돼요.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믿을 수 있는 믿음도 같이 세팅해서 동반해서 같이 주셨다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뭣도 주셨느냐 하면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멸망치 않고“란 말을 주셨다는 말은 이 세상은 필히 뭐한다? 멸망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예수를 믿어라. 이 뜻이거든요. 이 세상은 멸망하는데,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지옥인데 지옥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독생자밖에 없다“를 평소에 늘 이걸 새겨가면서 산 자에게 독생자를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믿음을 따로 떼지 말고 이게 한 세트로 뭉쳐서, 믿음을 누가 줬다? 하나님이 주셨다. 뭘 주셨다? 독생자를 주셨다. 독생자는 뭘 했는데? 영생을 주셨다. 그런데 그 믿음은 나한테 없는데? 믿는 믿음까지 주셨구나. 그런데 안 믿으면 어떻지? 안 믿으면 같이 멸망할 때 같이 멸망한다. 그런데 이 전체가 뭐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전체가 다 주어지는 거예요.

TV 올 때 안테나 같이 딸려오고 다 오는 것처럼 전체가 다 딸려오는 거예요. 교복 올 때 단추도 같이 달려오고 세라 복 올 때 카라에 타이도 같이 오고 다 같이 오는 것처럼 전체가 한 세트로 같이 와야 됩니다. 왜 자꾸 같이 왔다고 강조하느냐,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같이 와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담당할 행위나 어떤 몫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체 있으면 안 돼요. 내가 영생 얻는 것은 있으면 안 돼요. 내가 영생 받고 싶다 하는 그게 있으면 안 돼요. 우리는 영생 받고 싶다는 그것마저도 죄가 돼요. 영생 받고 싶지도 않은데 영생이 왔는데, 주어진 영생에 ‘내가 받고 싶으니까 왔다.‘이런 식으로 하면 안 돼요. 이건 홈쇼핑이고요. 하늘나라 아닙니다. 010 전화해서 ’그거 내가 사고 싶다.‘ 하는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택배로 와버렸어요. 풀어보니까 하나님 나오고 풀어보니까 독생자 나오고 풀어보니까 믿음 나오고 풀어보니까 멸망치 않고 나오고 풀어보니까 그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가 통째로 다 나오는 겁니다.

그 말은 결국은 이 모든 영생 계획 구원 계획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말려들었다. 주님 일에 말려든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해요. 영생을 주는데 ‘싫어요.’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영생에 대해서 뭔가 크게 잘못된 영생의 소식을 들었어요. 영생에 대해서 ‘싫어요.’ 가 성립이 안 됩니다. 영생 주는데 ‘믿어라.’ ‘저 안 믿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금 이 말씀을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안 믿을 거예요.’가 성립된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이 주어진 이 말씀 속에 ‘안 믿을 거예요.’란 게 없어요.

‘예수님 독생자 믿어라.’ 이렇게 했으면 ‘안 믿을 거예요.’가 되는데 그 보내는 택배 안에 뭐도 포함됐다고요? 믿음도 포함됐기 때문에 내가 끄집어 낸 믿음 말고 아예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믿음도 그 안에 포함됐기 때문에 그걸 뜯어보게 되면 그 안에 믿음도 들어있다 말이죠. 그러니까 내 쪽에서 새삼스럽게 ‘난 안 믿어요.’ 하는 것이 거기 섞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죠. 그냥 이 말씀 들으면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가 하신 일에 ‘우리가 말려들었구나. 꼼짝없이 말려들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주께서 원하시는 진짜 선물로 준 믿음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말려든 거예요.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여기다 새삼스럽게 주어질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 한번 해볼게요. 3장 16절이 이만큼 중요한데 왜 창세기 1장은 왜 있는 거예요? 창세기 1장 없애버리고 요한복음 3장 16절만 달랑 남으면 성경이 얼마나 얇겠습니까? 그렇잖아요. 가지고 다니기 쉽고. 이렇게 두꺼운 책이 뭐가 필요해요? 3장 16절 쪽지 하나만 돼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달랑 요거만 주면 되지, 뭣 때문에 앞에 3장 15절, 17절 왜 있는 거예요?

제 질문 답변해 보세요. 왜 설명서가 그렇게 길어요? 그 이유는 인간이 관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 일에 관여한 것처럼 여기는 그 모든 것을 강제로 훑어내기 위해서, 떨쳐버리기 위해서, 밀어버리기 위해서 그렇게 길게 한 겁니다. ‘우리가 착해서 구원받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이 모든 가짜들을 떼 내기 위해서 한 겁니다. ’30년 동안 날 위해 살았는데 이제 예수 믿고 예수를 위해 살아야지.‘라는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 이예요? 왜냐 하면 30년 동안 날 위해 살았다는 그것이 정작 예수를 믿게 되면 30년 동안 날 위해 살았다고 한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그 30년 동안 예수를 몰랐던 그 시절도 누가 관여했어요? 예수님이 관여하신 거예요.

이제 소급해서 뒤돌아보니까 그게 보이는 거예요. ‘아! 내가 주님을 알기 전부터 주께서 먼저 나를 이미 아셨구나.’ 이게 예레미야에 나오고 온 성경 전체 구석구석에 다 나옵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왜 요한복음 3장 16절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왜 예레미야가 왜 있고 창세기가 왜 있고 아브라함이 왜 있느냐? 그것은 인간들이 내가 조금이라고 관여해서 이 관여한 이것이 구원받는데 보탬이 된다고 여기는 그 모든 오해와 곡해가 어떻게 이것이 말이 안 되고 엉터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사례, 그런 해당되는 사건들을 쫙 배치를 해놓은 거예요.

그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성경 책 한권이 있는데 책 한권을 입체적으로 그리면 십자가에요. 십자가에서 이렇게 피라미드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모든 것은 이렇게 피어오르면서 결국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잖아요. ‘다 이루었다’가 제 말입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 이예요? 요한복음 19장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잖아요. 아무도 이해 못했어요. 죽으면서 발악하나? 이렇게 생각했겠죠. ‘다 이루었다.’ 본인이 죽는데 뭘 다 이루어요?

우리는 우리가 ‘다 이루었다’ 할 경우에는 자기가 어떤 경우입니까? 자기가 죽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있을 경우에는 ‘다 이루었다’ 할 수 있잖아요. 숙제 끝났을 때 뭐라 합니까? 숙제 끝났을 때 숙제 끝이라고 이야기하는 내가 지금 살아있어서 숙제 끝났다는 업적이나 실적을 지금 기쁘게 감상할 때 ‘다 이루었다’가 되잖아요. 곗돈 다 부었을 때, 곗돈 꼬박꼬박 내든지 적금 다 냈을 때 다 이룬 거죠. 주택 부금 다 넣으면 기분 좋죠? 내가 어떤 성과, 공부를 했는데 서울 대학에 합격했다. 뭐라고 합니까? 다 이룬 거죠. 물론 서울 대학 교수는 ‘너희들 오기만 해봐, 공부가 얼마나 빡센데.’ 이러겠지만 애들은 서울 대학 교수 이야기까지는 생각 못하고 어쨌든 자기 목표는 다 이뤘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엄연히 살아있어야 그 영광을 자기가 맛 볼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가 부활 때 ‘다 이루었다’ 했습니까? 십자가 죽을 때 했습니까? 돌아가실 때 벌써 다 이룬 거예요.

그러면 정리해보겠습니다. ‘다 이루었다’가 뭐였다? ‘다 이루었다’가 결국은 어려운 말로 언약 적 죽음, 약속된 죽음이라 하는데 그냥 어려우니까 쉽게 빼버리고 ‘다 이루었다’가 예수님의 죽음인데 이게 영생이죠. 그러면 영생은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이잖아요. 그럼 천국은 어떤 세계에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세계, 천국입니다. 우리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백날 죽어봐야 영생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만든 세계가 천국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하지 않으면 천국도 없고, 하늘나라도 없고 극락도 없고 낙원도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내가 살아있는 걸 전제로 한 천국이기 때문에 100% 가짜입니다.

천국은 십자가 뒤로 숨어버렸어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가는 길은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이겁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천국은 십자가 뒤에 있어요. 딴 데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 제치고 없애버리고 가는 게 아니고 길목에 십자가가 있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만 천국이 만들어진다 말이죠. 길이 있는데 십자가가 중간에 있고 부활이 있는데 십자가 지나치고 그 다음에 부활 역 지나가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이거는 천로역정 ..이 주장하는 것이고, 십자가가 어디 있느냐 하면 십자가 뒤 여기가 천국 이예요. 십자가 이쪽이 천국 이예요. 이게 영생이라니까요. 영생은 뭐냐 영생이 왜 좋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던 그 생명이 살아난 생명의 세계가 영생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가게 되면 나 잘함의 과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루었다’에 우리는 공짜로 맘껏 누리게 돼 있어요.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주님이 홀로 했는데, 그 혜택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거예요. 고생은 주님이 하고 그 혜택은 우리가 받는 셈이라. 그래서 여기는 생명의 면류관도 전부 다 반납하는 세계에요.

한국 교회는 천국도 몰라요. 천국이 어떤 동네인지도 몰라요. 천국에 가면 맨션 아파트로 알아요. 천국 가서 맨션아파트 청소할 일 있습니까?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았으니까 죽어서 편하게 살자는 이러면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는데 이거는 종교성에서 나오는 본성에 불과하고. 만화 같은데 보면 주인공에서 연기처럼 뽕~뽕~뽕~해서 상상하죠. 이게 바로 인간들이 만든 교회서 만든 천국 이예요. 고생하지만 언젠가 죽어서는 좋은데 갈 것이다. 그런 천국 같으면 예수님 오실 필요없어요. 유대인들이 다 잘 만들어 놨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이야기한 천국은 너무나 낯설고 너무나 기이하고 생전 못 들어본 이야기에요. 얼마나 이게 낯설었으면 죽으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 이루었다”고 했다 말이죠. 그 이야기를 옆에 있는 강도는 못 믿었고 옆에 있는 또 다른 강도는 그걸 믿었다는 사실 아닙니까? 놀라운 사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걸 믿은 거예요. “오늘밤에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 둘 다 죽어가면서 마지막 자기 한풀이하는 식으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뭐라 하느냐 ‘둘 다 죽는 마당에 둘 다 꼴좋다.’ 이럴 거다 말이죠. 마치 이런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세월 호 물에 빠질 때 단원 고등학교 친구 둘이서 ‘네가 나를 믿느냐?’ ‘주여 믿습니다.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둘이 이야기하는 거와 똑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놀고 있네.’라고 하겠지만 진짜 놀고 있는 거예요. 웃기지도 않죠.

안 믿은 강도는 끝까지 ‘네가 뭐냐?’ 말이죠. ‘네가 뭔데 네가 모든 주도권을 쥐려고 하느냐?’ 안 믿는 강도 같은 똑같은 인식이 평소에 우리의 장마철에 살아가는 인식과 똑같아요. ‘예수를 믿긴 하지만 예수가 뭐지? 지가 뭐지? 지가 뭔데 내가 자꾸 그분을 매달려야 되지? 돈만 줘봐라 안 매달리지, 내 힘으로 살 거야.’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마그마처럼 계속 올라옵니다. ‘지가 뭔데 4대 성인 중에 한 사람, 그 정도? 박수 쳐줄게. 위대한 이 순신 장군 정도?’ 그러니 예수님은 죽으면서 ‘따라오려면 따라와라.’ 말이죠. 따라 온 사람 아무도 없었죠? 아무도 없는데 혼자 천국을 이뤄버린 거예요. 제자들도 닭 울기 전에 다 도망가 버리고 아무도, 사랑하는 엄마 마리아부터 아무도, 사랑하는 마리아도 전부 다, 주님 혼자 다 홀로 다 이룬 거예요.

왜냐 하면 천국은 혼자만 영광 받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 가서 내가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은 그건 천국을 모르는 사람 이예요. 그리스도만 홀로 영광 받는 그곳이 천국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동기 부여는 경영학에서 motivation 이라 하는데 뭔가 동기가 있어야 일하거든요. 그 동기가 뭐냐, 내가 영광 받는 게 동기에요. 심리학자 마슬로우의 욕구설의 제일 위 단계가 자아  실현의 단계에요. 심리학자이니 얼마나 잘 봤습니까? 모든 인간의 마지막 종착점은 내가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거예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완전히 여호와죠. 나는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내 영광 받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요. 나는 나로 인하여 만족하는 거예요.

제일 밑의 단계가 뭐냐 하면 생존의 욕구, 그저 건빵이라도 있으면 주워 먹는 욕구, 그게 충족되면 점점 충족되면 더 못한 욕구와 욕망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마지막 욕구가 뭐냐 하면 ‘나는 나다.’ 에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나는 나다.’ 그냥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거예요.

우리가 지옥 가도 위로할 자는 누구냐? 지옥 갈 때 누가 위로해 주느냐, 내가 위로해줘요. ‘지옥 가도 힘 내. 힘 내. 고개 숙일 필요 없어. 지옥 가도 당당하게 지옥 가.’ 마지막 위로 자는 결국은 우리 자신입니다. 이 세상에 나 말고 위로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건 윤 복희나 할 소리지, 아무도 나 말고 나를 위로할 자 없어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결혼하기가 무서워하는 거예요. 해봤자 백날 퍼 줘봐야 자기밖에 모르는데.

이런 인간이 뭘 믿어요? 누굴 믿어요? 나 말고 다른 분을 믿어요? 말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거 있을 수 없는 일 이예요. 나를 버리고 주님을 믿어요? 이 무슨 미친 소리가 다 있어요? 예수를 이용하죠. 나 잘되기 위해서 그 전능하다는 능력을 가진 그 영웅적인 메시아를 이용하지 마지막 이용해봤자 그건 이용가치기 때문에 그건 하나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최종 목적지는 뭡니까? 결국은 지금보다 더 월등하게 가치 있는 나로 다시 한 번 멋들어지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었고 그런 사람을 예수님께서 가면서 쟁기로, 이렇게 밭이 있으면 트렉터로 돌 때마다 밭이 파이죠? 예수님은 십자가를 가지고 온 천지를 가시는 곳에 밭을 다 후빕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결국 예수 믿는 게 아니고 표면에는 믿는 것 같지만 한번 밭 갈아버리니까 누구를 믿어요? 나는 누굴 믿는다? ‘나를 믿는다.’를 다 들통 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도 내가 영생인 건 맞지만 영생 얻을 만한 정도로 나를 믿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유효합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예수를 믿는다고요? 아닙니다.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를 도와줄 때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을 따로 주실 때, 내가 만들어 낸 신념은 필요 없어요. ‘하면 된다. 믿습니다. 믿씁니다’ 쌍 시옷 해봤자 소용없고 따로 줘요. 따로 주게 되면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에게 영생 얻었음을 확인해 주는 조건이 돼요. 그런 조건마저 주께서 매일같이 우리에게 따로 주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뭐에서 벗어날 수 있냐 하면 내가 하는 이 모든 동기는 내 인생을 내가 동기부여해서 사는 게 아니고 동기 부여할 주체 자가 내가 아니고 다른 분이 나를 가지고 자기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까 제가 뭐라 썼습니까? 말려들었다. 우리는 주님의 하는 일에 그냥 거지같이 말려든 거예요. 말려들었다는 말을 다른 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노는 자로 돼 있어요.

천국 잔치가 벌어졌는데 전부 다 자기 일에 바빠서 못 오니까 천국 잔치는 자리를 메워야 되니까 누굴 불러오라 했습니까? 사방에 나가서 누굴? 노는 자, 비리비리 노는 자, 아무 할 일 없는 자를 불러서 내 자리를 채워라. 그 노는 자 중에 하나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요. 그냥 이마에 브랜드, 상표만 하나 붙었는데 상표를 떼보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것이 딱 이마에 또는 하나의 필지에 아예 칩처럼 우리 안에 새겨져 버렸어요. 그게 뭐냐? 말씀의 사람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허락도 없이 파고 들어왔어요. 암세포처럼. 그래서 말씀이 퍼지는 겁니다. 방사선 치료해도 안 돼요. 말씀이 온 몸에 퍼져버려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설거지 하다가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게 하나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사실은 주인이지만) 나를 제치고 본인이 주인이 돼서 말씀이 부합되도록 우리로 하여금 살도록 조치를 해버려요.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나중에 너희를 핍박할 것이다. 그때 사람들에게 나갈 때 네가 ‘무슨 말을 할까?’ 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때 네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누가 이야기한다? 네 속의 성령이 이야기한다. 이 말씀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 못 지킵니다. 못 지키는데 정말 남한테 복음으로 미움 받는 상황이 왔을 때 정말 희한하게도 내가 주인이 아니니까 말씀이 턱하니 자기가 주인으로 있으니까 그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처럼 성령이 말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몰라요. 듣는 사람도 모르지만 말하는 당사자 나도 놀래버리죠. ‘미쳤어, 내가 대학까지 나와서 이런 희한한 소리 할 줄 몰랐다.’ 본인이 놀란다니까요. 천당 가는데 대학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천국 가는데 빼지가 중요합니까? 아무 소용없잖아요. 결국은 일 끝나고 난 뒤에 돌아서 하는 말이 뭡니까? ‘내가 주의 일에 본의 아니게 말려들었구나.’

그 말려들은 사람이 구약에서 이스라엘 아닙니까? 애굽과 하나님 싸움에서 말려든 사람이 누구냐, 히브리인들이 말려들었어요.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노예였잖아요. 노예란 신분은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누구의 노예입니까? 여호와의 노예가 된 겁니다. 이래도 노예고 저래도 노예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성도는 말합니다. ‘주 예수여’ 예수를 믿으면 안 되잖아요. 주인 ‘주 예수여’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주 예수를 믿어라” 예수가 아니고 “주 예수를 믿어라” 예수하고 상대할 생각하지 마라. “주 예수를 믿어라” 이미 너는 주인이 따로 있고 애초부터 너는 나의 종이었느니라.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거는 구원은 하나의 결과물 이예요. 자동적인 결과물 이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거 정리하게 되면 아무도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들어가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어요. 따라서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이뤄야 되거든요. 왜, 말씀을 주신 당사자가 말씀을 책임지고 이루니까.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이야기는 예수님하고 아버지만 아는 이야기지 우리는 생전 몰랐던 이야긴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성령을 통해서 3장 16절 가지고 우리 속에 집어넣으니까 우리가 뭐냐, 말씀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성경책만 말씀이 아니고 이 말씀이 우리 속에서 이게 경험케 하고 체험케 하고 말씀이 운동력이 있다 했죠? 운동력이 있어서 이게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자꾸 꼼지락 거리면서 자꾸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삶의 동기 부여를 제공해주니까 항상 3장 16절이 펄펄 뛰는 거예요.

그렇다 보니까 세상의 피는 꽃은 스러지지만, 세상의 모든 영광은 다 없어지지만 뭐는 영원하리라? 말씀은 영원하리라. 그 영원한 말씀이 우리를 말씀되게 하는데 ‘우리’라는 도화지 또는 우리라는 공책, 그러한 노트북처럼 기계처럼 우리를 활용해버리는 거예요. 활용해버리니까 우리는 어쩔 수없이 3장 16절에 저촉을 받은 채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 현상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했는데 3장 16절 설명은 멀었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그 3장 16절의 내용이 뭐냐를 3장 17절을 통해서 봅시다. 아직까지 이해하기 우리가 힘들어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돼 있죠. 이 말이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여기 보세요.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고 했죠? 제 말이 틀리면 틀렸다고 하세요. 그러면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는 말과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오늘 질문 참 어렵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 이예요? 아예 심판이 없다는 말입니까? 같은 말로 들리죠. 같은 말로 들리는데 주님은 같은 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뭐한다? 구원을 받는다 했죠. 이제 풀립니다. 구원이란 말이 없어버리면 구원이 된다? 안 된다? 구원이 없을 때는 구원이 됩니까? 안 됩니까? 구원이 안 되잖아요.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은 뭡니까?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란 뜻 이예요. 18절 끝에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벌써, 과거 완료죠? 벌써 심판을 받았죠. 지금 심판 중에 있죠? 심판이 있어야 그 다음에 뭡니까? 구원이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밤중에 집에 갈 때  야~ 밝다. 밝다는 말이 뭔 뜻입니까? 그전에는 어떻다? 그전에 어둡다는 걸 깔고 밝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집을 계속 어두움에 두지 아니하고 밝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이거든요. 그런 말이 얼마나 세상을 모독하는 말입니까? ‘내가 집사님 안 때릴게.’ 이 말이 집사님 들을 때 얼마나 기분 나빠요? ‘집사님 안 때릴게.’ 이게 무슨 말입니까? 때릴 자격도 있고 맞을만한 짓을 했지만 안 때릴게. 그런 뜻이잖아요.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 17절, 기분 되게 나쁜 말 이예요. 나 없이는 영생 국물도 없다는 뜻 이예요. 이 예수 없이는.

예수 없이는 영생 없다는 말을 더 간추려버리면 이 세상에 영생은 없다. 인간들끼리 아무리 머리 짜내봐라, 내가 들어서지 않는 한 아무리 짜내어서 종교 만들어보고 기독교 만들어보고 천주교 만들어도 영생은 없다. 천주교, 기독교 영생 없습니다. 영생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죽으심을 기초로 해서 종교 만들면 그 종교는 구원의 능력이 없어요. 교회는 구원의 능력이란 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꾸 구원에 신경을 쓰느냐 하면 자기가 심판에 있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중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절에 갈까? 교회 갈까? 절에 가면 맘대로 해도 되는데 죽어서는 보장이 안 되고 교회 가면 구속하는 게 많은데 돈도 내야 되고 그런데 나중에 천당 구경하니까 차라리 고생하고 천당 가는 게 낫지, 이렇게 생각해서 교회 가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판단하는 자체가 이거는 심판 받아도 싼 그런 행동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가지 마세요. 기독교 믿지 마세요. 그리고 예수도 믿지 마세요. 그리고 주님한테 통째로 말씀이 들어오거든 그때도 예수 믿지 마세요. 왜, 이미 믿어졌으니까. 이미 믿어진 상황에서 새삼스럽게 예수 믿는다는 게 의미가 없잖아요. 주님이 날 알고 내가 주님 알면 되지, 새삼스럽게 예수 믿는다 하면 그 예수 믿는 것이 이상스럽게 생각합니다.

집에 남편 계시잖아요. ‘여보’ 하면 괜찮은데 ‘당신은 남편 맞지?’ 하면 남편은 ‘누가 봐도 네 남편이야. 누가 봐도 네 남편이야.’ 새삼스럽게 남편 맞느냐고 묻는 게 뭡니까? 자식이 ‘엄마 맞아?’ 이 묻는다는 자체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요. 출생의 비밀을 너무 많이 봐서 혹시 고아원에서 애가 바뀐 게 아닌가? ‘혹시 이거 낳지도 않고 30년 동안 키워서 나중에 낳은 엄마 찾아와서 내 아들이라고 데려가면 안 되는데.‘ 이런 식으로 어느 드라마에 나와요. 그런 드라마처럼 그런 공산이 있거든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말씀을 이야기하지 “내가”를 집어넣지 않습니다. “내가 뭐했습니다. 내가 믿었습니다. 내가 헌금했습니다.‘ 이게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수동적이기 때문에. ’주께서 나에게 일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교회 가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헌금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오늘도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항상 주체가 따로 있어버리고 나는 하나의 주체가 만들어 낸 결과물로 하나의 결실물로, 열매가 되는 쪽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된 상태를 그게 구원이고 그게 영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 네가 속한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거 설명한다고 문제가 중간도 들어가지 않았어요. 다시 해봅시다.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라고 돼 있죠?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고 한다면 세상은 중립 단계에 있느냐?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죠?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는 말은 이건 말로 해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렇다고 때리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무대가 이렇게 있는데 여기 가수가 있어요. 조명이 꺼졌습니다. 그러면 여기 조 용필이 섰는지 누가 섰는지 몰라요. 그런데 여기 갑자기 스포라이트가 여기 무대 가수 부분을 비췹니다. 보니까 가수 조용필에게 비췄잖아요. 비췄을 때 조명이 없다고 생각합시다. ‘자, 여러분 가수가 노래 시작합니다.’ 하면 객석에서 웅성웅성 거려요. ‘뭐, 누가 왔어? 누구야? 왜 시작해?’ 그런데 조명발 쫙 비쳐보니까 아! 조 용필이가 있으니까 곧 노래가 시작되잖아요.

그러면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란 말은 전체 다 적용되는 범위가 아니고 독생자가 있을 그 범주 안에서는 뭐가 없다? 심판이 있다? 없다? 심판이 없다는 말 이예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관점에서 이걸 보게 되면 전혀 요한복음은 해석이 안 됩니다. 그런데 조명 따라서 주님 안목 따라 보게 되면 주님 안에서는 뭐가 없다? 심판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이 안에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심판이 없는 거예요. 심판이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쪽에는 심판이 있는 거예요. 나도 옛날에 심판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 거예요. ‘심판이 없는데요.’ 와 같은 말은 뭐냐 심판이 있는 거예요. 말이 참 어렵죠? ‘심판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반드시 ‘심판은 있습니다.’ 하고 같은 말 이예요. Do you understand? 이게 같은 말이라니까요.

정리하게 되면 심판 없는 자는 없다. = 다 심판받는다. 그런데 여기에 심판받는데 심판 밖에 없는 곳에 영생의 조명발이 비췄다. 요기서만 “심판하려 하지 아니함이라“는 것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겁니다.

하나 천박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남자가 반지를 사서 예쁘게 포장해서 사랑하는 여자한테 주려고 하는데 여자가 ‘아유, 세상에 드디어 재벌 3세가 날 사랑하는구나.’ 하고 반지를 받았어요. 반지를 끼고 자랑하려고 동창생 모임에 갔는데 동창생 여자들이 다 같은 반지를 끼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배신감을 느끼겠죠. 그런데 자기만 반지 꼈어요. 다른 사람은 반지가 없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반지 낀 손을 돌리며) 주셨으니”라고 한다면 친구들이 ‘요새 돈 없더니 미쳤구나. 요새 남편 사업 안 되더니 완전히 미쳤구나.’ 이러는 거예요. 그러나 그 여자가 진짜 자랑하는 것은 뭡니까? 오직 주님만 자랑하죠. 이게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고 성경 보고 지킨다고 ‘믿씁니다. 믿씁니다.’ 하는 것은 반지를 자기가 네 클로버로 가짜로 만들었어요. 이 가짜로 만들어서 ‘믿씁니다. 믿씁니다.’ 쌍시옷을 달아서 ‘그러므로 믿씁니다. 믿씁니다.’ 라고 매일 이러고 있다 말이죠. 수시로 기도하면서 ‘주여 믿씁니다. 믿씁니다. 항상 믿씁니다.’라고 한다면 이게 얼마나 가짜냐 말이죠.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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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 3장16(말려듬)140703b-이 근호 목사

강의가 참 어렵습니다. 강의하는 저도 어렵지만 할 수 없어요. 요한복음 3장 18절 여러분 안다 치고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조명발이 보여주는 고 안목에서는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심판이 없다. 사랑한다. 사랑한단 그 말도 조명발 안에서만 사랑하지, 그 조명 밖에서는 극한 위험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인간은 죄를 지었어요. 미움 받는 게 당연한 거예요.

하지만, 불구하고, in spite of,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안에서만 내가 사랑해줄게.‘라는 것이 사랑이지, 세상 사랑한다고 온 천지 사랑한다는 그런 사랑은 그런 건 성경에 없는 이야기에요. 오직 주님의 안목 내에서만, 주님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만 사랑이고, 나머지는 미워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 자체가 굉장히 인간 세계에 대한 모독적인 말입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 그럼 목사님이 ‘전에는 미워했나?’ 이 말이거든요.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면 ‘이 사람이 뭔가 딴 짓을 했나? 나 몰래 무슨 짓 했나? 갑자기 사랑을 남발하니까 수상한데?’ 대번에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주님이 날 늘 사랑하거든’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널 미워할 수도 있는 게 정당한데 아! 사랑해줄게.’ 이렇다 말이죠. 미워해야만 하는데 미움대신 사랑해줄게. 그런 뜻으로 사랑이란 말을 쓰는 거예요. 주님께서, 일부러 독생자 보내셔서 그리고 중요한 것은 대신 죽으심으로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대신 죽었다는 말을 대신 희생했다는 말로, 대신 희생했다는 말은 우리가 식사를 할 때 이 식사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일했고 월급 타서 시장가서 물건 사고 이러잖아요. 그렇게 되면 뭐가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까? 대신 희생이 식사할 때 들어올 자리가 없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식사하면서도 이 식사가 오기까지 주님께서 십자가 죽었던 그 공로로 내가 식사를 하고 있다고 그렇게 여기 관계망, 이 그물망 속에 희생 망 속에 우리를 집어넣고 이해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십니다.

갑자기 이빨이 아프다. 이빨이 아픈데 어느 날 일주일 병원 다녀왔더니 건강해져서 식사를 잘할 때 ‘어떻게 내 병이 나았지? 치과는 알지. 주께서 대신 희생하신 사랑이 그 물결이 계속 치기 때문에, 그 물결로 인하여 내 몸이 아팠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보통 사람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랑하면 안 아파야지.’ 이게 보통 사람이잖아요. ‘사랑하면 안 아프도록 사전에 조치해주셔야지.’ 이게 우리가 이해하는 건데, 사랑이 사랑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음이 항상 먼저 깔리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사랑을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늘 아파야 하는데 ‘왜 오늘 안 아프지? 미치겠어. 왜 안 아프지?’ 제가 얼마 전까지는 오른 쪽  다리 관절이 갑자가 아파와요. ‘이제 늙은 탓인가?’ 갑자기 계단을 오를 때 아픈 거예요. 그런데 며칠 전부터 아프지를 않아요. 왜냐 하면 독일 칼슘 약을 먹으니까 아프지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은 처음부터 아팠는데 칼슘 없이도 안 아프게 해주셨다가 이제는 칼슘 없이는 아프니, 칼슘이 사랑이라. 칼슘 주셨어요. 칼슘이 떨어지면 또 아플 거예요. 아픈 정도가 아니고 사실은 오늘 살고 오늘밤에 내 영혼 데려가도 우리는 할 말 없습니다. 그동안 오래 산 셈 이예요. 우리는 다들 예수님보다 오래살고 있어요.

항상 전제가 예수님 조명발로 보니까 성경 자체가, 이 세상 자체가 어둡다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여기 19절 봅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라고 돼 있잖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예수님 일방적 주장 이예요. 예수님의 일방적 주장이고 예수님 보기에 그렇고 예수님 제켜버리고 우리들끼리 보게 되면 이 세상은 전적으로 악하지도 않고 전적으로 선하지도 않아요. 항상 내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나는 선한 길을 선택하면 선한 자가 되고 악한 짓을 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 그런 중립지점 이예요.

여러분들이 자동차 자동 변속기 보면 제일 뒤에 있는 것이 D고, 제일 앞에 있는 것이 P고 그 다음이 R이고 그 다음에 N이 있잖아요. 전부 다 차 없죠? 여기 N이 뭡니까? 이게 중립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중립(N)으로 보지 않고 R로, 우리를 계속 뒤로, 후진으로 가는 것으로 보는 거예요. 후진으로 가는 차를 주께서는 D로, 주님 안에서만 D로 천국으로 잡아 옮기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이 그런 경로로 갔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가 들려졌기 때문에. 아까 처음에 했죠? 들릴 때는 뭐가 들린다? 들림으로 뭘 얻는다? 영생 얻는다. 안 들리면 뭘 못 얻는다? 영생을 못 얻는 거죠. 주님이 우리와 함께 죽어 사흘이고 나흘이고 함께 있으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주님도 죽고 우리도 죽고 다 지옥 가는 거죠.

그런데 주님께서 들렸기 때문에 주님의 죽음은 이건 대신 죽음이란 사실이 드러난 거예요. 뭔가 특이한 죽음 이예요. 이 죽음에는 뭐가 있다? 영생과 연결이 되는 그런 죽음 이예요. 영생과 끊어지지 않는 죽음이 우리한테 주입이 된 거예요. 수면 내시경 할 때 마취제 맞잖아요? 프로포필인가, 그거 수명 내시경 할 때 저도 수면 내시경 여러 번 했기 때문에 보면 정말 기분 좋아요. 이야기하다가 깨보면 벌써 다 끝났어요. 이야기하다가 잠들었는데 깨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영생의 프로포필을 우리에게 주입을 시킨 거예요.

우리는 마취가 될 때까지 나불나불, 나불나불, 우리 행함, 그래도 나는 선한 쪽을 했기 때문에 선하다. 나는 악은 싫어. 악은 버렸기 때문에 나는 악한 쪽은 아니야. 하나님께서 구원하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할 걸.‘ 나불거리다 잠들었다가 깨보니까 천국이라.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같이 들리게 된 거죠. 주와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들렸을 때 우리는 깨나서 그동안 무슨 자랑하겠습니까? 나불된 거 자랑하겠어요? 뭐 자랑하겠습니까? 내가 나불된 그것이 바로 죄였고, ’착하게 살아야지, 말씀대로 살아야지.‘ 한 그게 죄였고 그거 상관없이 우리에게 영생 주신 것은 예수님의 공로만이 우리에게 주신 너무나 큰 사랑, 아까 했죠? 반지 자랑! 요 반지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한 순간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은 졸지에 어두움이 돼 버립니다.

예수님이 등장할 때 세상은 졸지에 어두움이 되었죠? 예수님이 빠져버리면 착하게 사는 사람보터 나쁜 사람까지 계급이 돼요. 서열화 돼요. 유대교에서 일곱 단계라 했죠? 제일 높은 단계 사두개인, 사두개인은 교회 중심 생활하자. 그 밑에 단계가 바리새인, 바리새인은 말씀의 생활화하자.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교회 중심으로 해야지, 교회 떠나서는 제대로 신앙생활 못한다. 교회 중심, 그 다음에 말씀 중심으로 생활하자. 라는 서열로 해서 잘난 사람들이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소위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죠.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뭐가 나오죠? 땅에 있는 자를 지도자라고 하라 했어요? 하지 말라 했어요? 하지 말라 했죠.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했죠? 아비는 하나님이 아비고 지도자는 누구밖에 없다? 그리스도밖에 지도자가 없는 거예요. 자기가 왜 누굴 가르쳐요? 신앙고백하면 되지. 가르치는 것은 여러분 속에 있는 성령님께서 친히 가르쳐요. 다이렉트, 직접, 영어로 하면 Direct, 직접 가르쳐요. ‘지금 구라거든.’ 직접 ‘지금은 맞는 이야기야.’ 직접 가르쳐요.

누구한테 교육 받는 게 아니에요. 누구 사람에게 교육 받을 필요 없어요. 교육 받아서 인간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직접 여러분들에게 ‘그처럼 말씀이 맞네.’ ‘당신 말이 맞네.’가 아니라 ‘이 성경말씀이 맞네.‘ 성경말씀을 풀이하는 내가 맞는 게 아니고 지금 내 소리가 맞는 게 아니고 ’성경말씀이 앞뒤가 맞네.’ 그럴 때 이건 성령이 와서 이야기해야지, 내가 설득력으로 이야기하면 이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설득해서 너를 구원할 생각은 애초에 없다.’고 했습니다. 말 잘하는 건 아무 소용없어요.

다시 이야기하면 예수님 오실 때 세상은 졸지에 어두움이었다. 예수님 빠져버리면 잘난 사람 바리새인들 위에서 제일 뒤에는 백정 같은 못난 사람들, 세리와 창기들, 창녀 짓해서 밥 먹고 사는 아주 저질 그런 인간들은 지옥 가고 자기들은 천국 간다. 그런데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누가 천국 간다? 세리와 창녀들이 천국 간다. 왜,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줄 알기 때문에. 난 내가 하는 짓들이 저주 받아 마땅한 짓이라는 것을 본인이 수용하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습니까? ‘난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저 도둑놈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그동안 반듯하게 최선을 다하여서 말씀을 지킨다고 온갖 노력과 희생을 다하였습니다. 저 내신점수 괜찮게 나오겠죠?’ 예수님이 임시적 발령으로 ‘너는 지옥으로, 세리는 천국으로’ 보냈습니다. 아! 9회 말 역전 이예요. 정말 투 아웃 투 스트라이크 쓰리 홈런 쳐버린 거예요. 완전히 신세가 바뀌잖아요.

그러니 이 신세를 매일같이 우리에게 바뀌도록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난처한 상황을 자꾸 만들어줘요. 난처한 상황 만들어서 우리는 불쑥 짜증나서 하나님께 화를 내고 화내면서 말씀과 부딪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런 예를 제가 자주 든 예가 뭐냐 하면 화투 패 예를 들었잖아요. 화투장이 몇 장이죠? 48장입니다. 1월 달부터 12월 달까지 4장씩, 이거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죠. 창녀촌에서 일하시는 여자 분들이 낮에는 손님이 없잖아요. 손님 없으면 하루 재수를 화투 가지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영화를 보면서 재밌는 것은 운명이 아가씨들 치마폭에 이미 다 놓여 있다는 거예요. 이미 뭘 들쳐도 5월 난초 7월 단풍 11월 똥 12월 비, 1월 공삼 다 나오게 돼 있거든요.

이미 구원을 준 상태에서 오늘은 좋은 일, 내일은 나쁜 일, 내일은 애 성적 올라가는 것, 다음엔 애가 아픈 거, 이 모든 패를 뒤집어 봐야 이미 이것은 내게 맞는 이미 주께서 선물로 완전히 세팅해서 선물로 준 거예요. 완전히 피자 같아요. 피자 두 판 줘버렸어요. 먹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고 이미 준 거예요. 다만 우리는 기대하기를 그냥 좋은 패만 나오기를 기대하죠. 좋은 패만 나와 버리면 우리가 우상이거든요. 우리는 우리가 잘난 사람이 된다고요. 보니까 똥도 나오고 안 맞는 것도 나올 때 어쨌든 주어진 것은 우리가 주의 일에 말려든 거예요. 주님의 영생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렇게 못난 사람들,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는 우리 이익만 챙기고 내 편한 것만 좋아하는 그런 것을 날마다 노출시킵니다.

참, 나이 많아서 침해 걸린 분을 옆에서 주시해서 보니까 사람이 나이 많으면 많을수록 점점 더 자기밖에 몰라요. 갈수록 반성도 없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뭐 하지 말라 하면 ‘죽어버릴까? 그럼 내가 죽었으면 좋겠나?’ 앞뒤도 안 맞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다음에 봅시다. 할 수 없다, 쉽게는 못하고 그냥 하는데 18절 “저는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해서 조명 받은 고 범주와 조명 받은 쪽의 사상, 발상, 사고방식 자체가 확연히 다르다는 겁니다. 조명 받은 사람은 ‘심판 받아도 마땅한데 웬 사랑입니까? 웬 떡입니까?’ 라고 좋아하고, 조명발이 없는 사람은 ‘왜 나 같은 착한 사람을 왜 지옥 보내? 그거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니야. 나 같이 정의로운 사람이 또 있을까? 나를 지옥 보내? 우리 착한 어머니를 지옥 보내? 그렇다면 나는 동의 못해.’ 이런 식으로 그 심판 성을 굉장히 극구 반대하겠죠.

그래서 하는 말이 19절부터 20절까지 설명서가 나와 있습니다. 설명이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그들이 악한 것은 나한테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악한 거예요. 그들이 악한 것은 나한테, 빛으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빛으로 왜 안 오느냐? 어두움이기 때문에 빛으로 안 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은 말 하나 마나에요. ‘너는 왜 머리 길러?’ 난 여자거든요. 여자는 머리 기르거든요.‘ 이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잖아요. 이게 말이 됩니까? ’약국이 어딥니까?‘ ’미장원 옆에, 미장원 옆에 약국.‘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왜 악하냐?‘ ’빛으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왜 안 오는데?‘ ’악하기 때문에.‘ 무슨 이런 말이 다 있어요? 그 말을 써놨다고요. 그 말을.

그런데 성경 본다고 인간의 이성 능력으로 믿을 수 있어요? 없어요? 믿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고 ‘뭐 이런 게 다 있어?’ 차라리 덮고 싶은 충동으로 나가도록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건 안 들은 걸로 해줄게.’ 사람이 사는데 말을 했으면 알아듣는 소리를 해야지, 이건 자기가 일방적으로 소리 해놓고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지껄여놓고 이걸 믿어라? 이게 말 되는 이야기에요? 안 되죠. 그리고 믿으라 할 때는 납득 돼야지, 무슨 이 말이 납득이 돼요? 납득이 안 되는데. 제 말이 틀린 말 아니죠?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다시 말해서 오고 안 오고는 왔던 사람이 착해서 온 게 아니고 누가 보내서 왔다? 하나님에게서 보냈기 때문에 왔다. 그래서 온 사람은 ‘너 어떻게 해서 여기 빛으로 왔지?’ ‘하나님이 보냈잖아요.’ 요 소리하라 이 말이죠.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거예요. ‘제가 살려고 예수 믿었습니다.’ 이런 소리 하지 말라 말이죠. ‘살려고 예수 믿어? 가. 결국은 너 살면서 내가 이용물이란 말이냐? 네 영생 얻기 위해서 이 예수를 잘도 이용하려고? 내가 너희들한테 이용당할 것 같으냐?’ 그런 식으로 너하고 거래 흥정 안한다. 너하고 협상해서 이익 볼 것 없고.‘ 그런 식으로 안 해요.

‘십자가 지기까지는 예수님이 하시고 그 다음에 믿고 안 믿고는 내 손에 달렸다.’는 이야기를 하죠. 침례교 쪽에서. 그거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는 겁니다. 악한 세상에 뭘 믿어요? 악한 세상은 모든 행위가 자기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겠다는 자체가 이거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게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아버지로부터 온 게 아니고 나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이익 얻겠다는 것은 그거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로 온 게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마귀로부터 온 거예요.

교회가 사람 수가 많다. 상당히 수상합니다. 뭔가 들을만한 소리를 했다든지 원하는 것을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람 수가 많은 건 잘못이 아닌데 다시 한 번 돌아봐야 되죠. 아무도 없어야 되는데 심지어 내 아내도 떠나야 되는데 이걸 듣는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에요. 뭐냐 하면 내가 진리를 안 전했거나 성령께서 오게 하셨거나 둘 중에 하나에요. 하나님께서 오게 하셨거나 아니면 내가 진리가 아닌 다른 복음을 전했거나 둘 중에 하나에요. 어느 쪽인지 그건 뭐 하나님 판단에 맡겨야 되죠.

자, 19절 여기 보면 세상에 대해서 해봅시다. 여러분 쉬운 질문 하겠어요. 어려운 거 해서 미안하고 당황스러우니까 쉬운 질문하겠어요. 빛의 반대말은 뭐죠? 쉽다. 어두움. 그러면 세상의 반대말은 뭡니까? 세상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여기서는 하나님 안이라고 돼 있거든요. 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 하면 세상의 반대말이 하나님인데 하나님 반대말이 세상이라 말이죠. 그럼 악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반대편에 있겠죠. 지금 사도바울의 논리가 뭐냐 하면 세상을 뭐로 = 시키느냐 하면 세상= 악, 나한테 온 것이 아니고 세상을 따라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보세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뭘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이걸 잘못 들으면 세상 전체를 하나님이 사랑해서 세상 전체 다를 하나님이 구원하는 셈이 돼요. 일단 세상을 사랑해놓고 믿고 안 믿고는 너희들의 자유의지의 결정하라. 이런 침례교 쪽의 사고방식이 돼요.

그런데 제가 제시하는 방식은 뭡니까? 세상 전체가 무대라면 이 무대에 특별히 빛의 조명발이 있을 때 이 안에서만 비로소 사랑이 있고, 여기만 사랑이 있다는 말은 곧 요 바깥에 나가면 미워하겠다는 겁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다워요. 어둠을 미워하는 것이 빛의 속성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지막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어두움에 속했기 때문에 빛으로 오지 않죠. 그러면 빛으로 온 사람은 어떻게 된 거예요? 자기가 알아서 빛으로 오진 않았을 거예요. 왜냐 어두움에 속했기 때문에 어두움은 빛으로 오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어요. 이게 수학에서 공리입니다. 삼각형의 내각은 180도, 이건 증명 할 필요 없어요. 이건 당연한 공리거든요. 세상은 어둡다. 어두움은 빛으로 절대로 오지 않는다. 그런데 빛 안에 있는 사람은 뭐에요? 빛이 그 사람을 찾아간 거죠.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내가 가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오셨잖아요?’라고 고백할 때 이미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고깔 콘 알죠? 고깔 콘이 어떻게 생겼어요? 고깔처럼 생겼잖아요. 고깔의 특징이 뭐냐 하면 뒤집어씌우는데 있어요. 요런 게 있으면 고깔로 뒤집어씌워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 그들은 그 후유증이 자기들에게 미칠까 싶어서 도망치듯이 예루살렘을 도망치기 위해 엠마오로 내려가는데 누가 고깔 되어 누가 찾아왔어요? 어떤 아저씨가 딱 붙어서 이야기하는데 예루살렘에서 어떤 분이 이야기하는데 그때까지 예수님인 줄 몰랐죠. 나중에 저녁 때 식사하면서 눈 떠주니까 예수님이었잖아요? 자, 그 제자가 십일조 했습니까? 전도 했습니까? 어디 봉사했습니까?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죠? 기도해서, 성경공부해서 구원받았어요? 뭡니까? 자기들이 둘이 가는데 끼어들어서 세 명 됐죠? 끼어든 그분이 눈 뜨게 해주니까 그 제자들은 구원을 받았잖아요. 이런 식이라니까요.

30년, 40년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하고 목사 되고 장로 되고 권사 되고 집사 되고 말짱 그거 아무 의미 없어요. 설거지 하다가도, 심지어 바느질하다가도 주님이 갑자기 찾아오시면 ‘맞아,’ 천국은 주님이 죽어서 만든 세계기 때문에 아무도 같이 죽은 사람이 없는 이상은 천국은 아무도 못 가는데 이미 천국에 들어가야 될 사람에게는 주님이 그냥 값없이 천국이 그냥 고깔처럼 덮쳐 버리면 주님이 혼자 다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죠. ‘주님이여 혼자 다하셨군요.’ 그거 뭐 울 필요는 없어요. 그런데 눈물이 났었습니까? 날 수도 있고 안 날 수도 있는데 눈물의 양을 그램 수로 달아서 그걸로 구원받았다고 할 수는 없고, 뭐냐 하면 ‘이건 인간의 행함으로 할 수 없는 거잖아.

그리고 난 뒤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 요한복음 다시 한 번 보세요. 이해 다돼요. 로마서 갈라디아서 이해 다돼요. 은혜로 시작했다가 네가 은혜로 마친다. 행함으로 마치지 마라. 내가 복음을 전했는데 또 다시 행함으로, 율법을 지키니까 내가 복음을 전한 것을 헛되게 하는 줄로 너희는 각오해라. 나는 너희들 그런 식으로 가르친 적이 없다. 성령 받은 사람은 값없이 준 그 은혜에만 감사할 뿐 이예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뭐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그냥 사시면 되는 거예요. 그냥 살면서 이 인생은 주께서 친히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 조작해놓은 주님의 인생이고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주님께서 내 인생을 알아서 천국 가도록 데리고 몰고 가는 겁니다. 하키 선수가 공을 스틱 가지고 몰고 가듯이 지금도 몰고 가는 겁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지팡이로 나를 안위하시고 지켜주셔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편 말씀처럼 이렇게 몰고 가시는 거예요. 매일같이 뭐가 보이는 곳으로? 십자가만이 보이는 그 상황 속으로 계속 몰고 가시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빛이 그냥 덮친다. 빛이 덮쳐서 어두움이, ‘이것은 우리가 어두움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고 빛으로 오셨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기 사랑의 영역을 따로 구축하시는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21절 봅시다. 그전에 공리 하나 있죠.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절대 인간은 자력으로 빛으로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베드도 마찬가지고, 세 번씩 부인하죠.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 뜻 이예요. 아버지가 택한 자 아니면 나한테 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진리로 우리를 꽁꽁 묶어버려요. 진리로 묶어버리면 위에서 하늘에서 낚시하듯이 진리의 릴을 감아버리면 진리에 딸려서 우리가 진리에 딸려서 가는 거예요. 뭐로 묶인다고요? 진리로 묶였기 때문에 비 진리로 갈래야 갈 수가 없어요. 왜, 사랑을 묶는 끈으로 꽁꽁 묶였으니까. 사랑으로 꽁꽁 묶였으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중가요가 어떤 땐 은혜롭다니까요. 꽁꽁 묶여 간다니까요. 진리를 감아버리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꽁꽁 묶여 가면 갈수록 ‘에이, 주님 혼자 다하셨군요.’ 이게 점점 더 느껴지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주님 혼자 다하셨군요. 내가 이렇게 개판인데 이런 개판이 천국 간다? 말도 안 되는데 아! 주님 혼자 다하셨군요.’ 그렇게 가는 거예요. 물론 일부러 개판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살아도 개판인데 그냥 평상시 살아도 개판 이예요. 내 돈만 챙기고 나밖에 모르니까. 내 식구만 잘되면 돼요. 남의 식구는 신경도 안 써요. 내 식구가 최고에요. 그게 얼마나 이기주의입니까? 거기서 벗어난다? 못 벗어나요. 우리 태생이 그러니까. 남의 자식 잘되면 잠이 안 와요. 내 자식 잘되면 잠이 안 와요. 너무 좋아서. 남의 자식 잘되면 시기 나서 잠이 안 오고, 내 자식 잘되면 너무 좋아서 잠이 안 오고, 그 정도로 우리는 우리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을 나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느껴지는 거예요. 죄가 더 점점 더 증가 하는 거예요.

결혼이라 하는 것은 누가 얼마나 둘 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을 해킹하면서 파악하라고 결혼하는 거예요. 혼자 살면 항상 훌륭하거든요. 그런데 막상 자기 옆에 누가 있어버리면 불편하기 짝이 없어요. 그리고 그놈의 잔소리를 어이 감당하렵니까? 사랑은 조금이고 잔소리는 한 바가지고.

제가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여자가 남자와 다른 점은 여자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 여자는 자기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잖아요. 그게 남자는 이해가 안 돼요. 남자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요. 남자가 하는 모든 일은 자기 좋아 하는 일이고 결혼 안한 여자 말고 결혼한 여자는 하는 모든 일이 자기를 위하지 않는 일만 해요. 그냥 퍼주는데서 만족을 느껴요. 그래서 여자에게 남편이 죽어버리면 여자가 우울증 걸려버립니다. 왜 퍼줄 대상이 없기 때문에. ‘아유, 그렇게 못나도, 그렇게 바람피워도 좋으니까 내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아.’ 퍼주는데서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게 여자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이용해보고, 악질처럼.

그래서 교회가 예수님의 여자가 되잖아요. 예수님의 신부. 교회는 예수님의 아내입니다. 에베소서에 자기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돼 있거든요. 그리고 그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말은 그렇게 바친 여자는 두 번 다시 자기 남편을 혼돈하지 않는다. 나를 전적으로 최종적으로 책임지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지, 세상의 남편이나 자식도 나를 책임 못 진다는 것을 알아요.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왜냐,  유일하게 나를 죄인이라고 까발려 주신 분은 이미 구원해주신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 만나면 내 칭찬해주고 나의 장점을 높입니다. 물론 장점을 높인다는 말은 뒷 담화해서 장점을 확 깎지만 어쨌든 면상에서는 높여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돼요? 내가 잘난 사람으로 오인하겠죠. 그거는 곧 나를 망치려는 마귀의 전략입니다. ‘훌륭하십니다. 대단하십니다.’ 이거는 망하라고 짓밟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제일 사랑하는 아내는 눈 떠서부터 해질 때까지 잔소리 해대는 신부, 심지어 꿈속에도 잔소리 해대시는 아내 아나님, 아내 + 하나님. 잔소리 해주는 아내가 최고 아내에요. 남이 칭찬할 때 심하게 남편 험담해주는 아내가 최고의 아내입니다. 남편은 그것도 모르고 남편 기죽인다고, 기죽이니까 사람이 되랴마는 사업 못하는 핑계 남 탓이나 하고. 사랑하니까 잔소리 하는 거 아닙니까?

자, 22절 봅시다. 21절로 이야기 끝나버렸어요. 끝나버리고 세례요한은 갔습니다. 자, 그렇다면 잊어버리기 전에 정리를 해줘야 되겠죠.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귀한 말씀입니다. 그럼 그 말씀만 남기지 왜 다른 말씀도 왜 그 옆에 붙어 있느냐 말이죠. 여러분 초등학교 운동회 할 때 사람 위에 또 사람 그 위에도 사람이 올라가고 또 올라가는 게임 있죠? 인간 피라미드이라는 게 있죠. 제일 마지막에 위에 제일 키 작은 애가 깃발 들고 청군 기 들고 승리했다고 뛰어나오잖아요.

요 장치, 밑에 깔려 있는 애들이 깔려줘야 깃발, 십자가가 흐른다고요. 그럼 그 전에는 전체가 뭡니까? 왜 인간들은 이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요게 쌓여진 위에서 십자가에요. 예수님도 십자가로서 죄인 중에 하나지만 예수님만이 사흘 만에 들려서 뭘 얻었습니까? 영생을 얻었죠. 그러면 요 노선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예수님에 의해서 거꾸로 영생이 흘러들어갑니다. ‘죄인입니다.’ 하는 자가 영생을 얻고 ‘난 의인입니다.’ 하는 사람은 지옥 가고, 요 원칙을 그대로 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하고자 하는 3장 21절 다음에 누구 이야기 나옵니까? 세례요한 나오죠. 자, 세례요한을 요 공식에다 집어넣읍시다. 그러면 다음 이야기하기 전에 미리 이야기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왔습니다. 그럼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뭡니까? ‘주님도 잘 되고 나도 잘 되고.’ 그럽니까? 어떻게 돼요? ‘나는 망하고 주님은 잘 되고.’ 우리 같으면 세례요한이 그 정도 겸손했으면 ‘아유, 착하구나. 그래, 나는 쇠해야 되고 주님은 흥해야 됩니다.’ ‘어유, 그렇게 기특한 말을 했어요? 그리고 그런 말했기 때문에 네가 잘 되게 해줄게.‘ 라고 나올 만도 한데 세례요한이 죽을 때 어떻게 죽었죠? 처참하게 죽었죠. 만인이 보는데서. 평소에 헤롯을 세례요한을 무서워했고 좋아했어요. 세례요한만큼은 손 안 대려고 했어요. 왜냐 하면 군중들이 선지자로 인정했기 때문에.

그런데 누가 싫어했느냐 하면 헤롯의 부인이 싫어했어요. 왜 싫어했느냐 하면 세례요한이 어떻게 가까운 친척 간에 남의 여자를 빼앗느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남자는 가만히 있는데 여자가 자존심이 상하잖아요. 여자에게는 결혼이 전부인데. 자기 결혼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나의 인생 자체에 대해서 도전이고 이건 인생을 허물어 버리는 거거든요. 그러면 사람의 본성이 나를 공격했을 때는 공격한 자를 허물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내가 우뚝 강자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입 다물고 있었으면 예수님이 안 죽었어요. 예수님이 살해당한 이유는 예수님이 성전을 훼손하면서 ‘이건 하나님 집을 완전히 강도의 도굴로 만들었구나.’ 공격을 먼저 했기 때문에 애들 같으면 ‘네가 죽어봐라.’ 해서 죽인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밉상 받아서 남자가 살려주는데 여자가, 하필 남자가 말실수했어요. ‘그래 네 소원이 뭐냐?’ 딸은 왜 그리 춤을 잘 춥니까? 댄싱 나인에 나올 정도로 그렇게 춤을 잘 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잠시 춤에 너무 빠지니까 눈에 세례요한도 보이지 않아요. ‘소원이 뭐냐? 나라의 반이라고 주겠다.’ ‘나라 반이 아니라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 상당히 당황스럽죠. 하지만 안 주면 되는데 자기가 권력이 있어서 한 맹세가 있어서 맹세 지킨다고 자기 자존심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을 희생물로 처단시킵니다.

보세요. 세례요한의 죽음도 그냥 죽음이 아니고 어느 노선의 죽음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같은 노선의 죽음이죠. 가인에게 죽은 사람이 아벨이죠. 아벨과 사가랴, 세례요한 모든 흘린 피가 너희들에게 돌아가리라. 그들이 이 같은 노선에 있다. 이 노선의 요 밑바닥에 있는 사람이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은 노선. 그럴 때 우리가 억울해 하지 마세요. 왜냐 우리는 이미 선언했습니다. 주님만 잘 된다면 저는 새도 무방합니다. 이미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내일 더 안 살아도 괜찮습니다. 라는 게 우리의 마음가짐이고 사도바울도 그런 이야기했고 어서 빨리 죽어서 이 땅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했고 내일 내가 사는 것도 주께서 살려줘야 산다는 것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오늘밤 네 영혼 데려가면 저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 말이 우리에게 택지가 돼서 그 말씀도 우리 속에 택지로 박혀 있어요. 누가복음 12장 말씀인데 이게 박혀 있다 이 말이죠. 박혀 있을 때 그 말씀이 자동적으로 활성화 되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죠,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느냐?’ 예, 저보고 하는 이야깁니다. 내일 염려는 언제 하라? 내일 하라 말이죠. 당겨서 하지 말라 말이죠. 네가 내일 살지 안 살지 누구 맘대로 걱정해? 걱정할 권리 있다? 없다? 우리는 내일 걱정할 권리가 없는 거예요. ‘아유, 애가 내일 시험기간인데 어쩌고, 내일 우리 아들이 대학 시험 치는데’ 혼자 당겨서 걱정하지 마세요. 시험 치다가 한 칸 당겨서 칠 수도 있고 시험 치르는데 펜이 안 나와서 흔들다가 3번, 4번 다 뿌려져서 다시 칠 수도 없고, 시험 치르러 가는데 마침 차가 펑크가 나서 시험에 늦어서 시험도 못 치고 1년 재수하고, 온갖 상황들이 그건 주님 맘대로 일으키는데 우리 맘대로 거기에 개입을 우리가 저지할 수 없어요. ‘하루 사는 것도 참 은혜다.’ 생각하고 살아가시면 됩니다.

어쨌든 요한복음 3장 16절이 전부지만 그 밑에 배치돼 있는 모든 말씀들은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그러한, 왜 인간들은 쇠해야 되는가, 그 이유를 보여주죠. 그러면 세례요한이 여기서 순교 당합니다. 그러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뭐에요? 이들은 세례요한을 공격함으로써 누굴 공격한다? 빛 되신 주님을 공격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어두움이 어두움 값을 충실히 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 설교 시간에 그랬잖아요. 우리는 악마한테 교육 받아야 된다고. 우리의 교육자는 마귀에요. 마귀한테 시달리고 교육을 받아야 우리는 왜 주님이 고마운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마귀의 활동이 그냥 하는 게 아니고 허락 있는 활동 이예요. 마귀 믿다가 실망당하고 그래야 돼요. 이런 이단들, 이런 어두움의 사람들이 공격을 해줄 때 이 사람들은 눈을 들어서 오직 십자가만, 놋 뱀만 볼 수 있는 그러한 장치가 요한복음 전체의 장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기 전까지니까 지금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여기서 나와서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온 천지를 지금 쟁기로 다 갈아엎는 거예요. 요한복음은 갈아엎기! 오늘 강의 제목을 이걸로 할까요? 갈아엎기, 온 천지를 다 갈아엎어버려요.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억울하게 죽게 만들고, 죽기 전에 세례요한은 ‘나는 망해도 좋습니다.’ 이런 희한한 고백을 하게 만들고 이러한 것이 요한복음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공생애라는 겁니다. 그 공생애가 지금 우리가 그 길로 진리에 따라서 꽁꽁 사랑의 밧줄로 묶여서 거기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 너무 좋다 보니까 복음 전할 때도 입을 다물죠. 계란으로 바위 쳐봐야 계란만 깨지지. 바로 그거거든요. 우리가 스스로 깨지라고 바위로 부딪치라고 한 거예요. 주께서! 바위 깨지라고 던지라는 게 아니고 네가 깨지라고. 너 자신이 깨지면 그 안에서 예수님만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내놓을 생각 안 하고 잘난 나를 안 깨지려고 하다 보니까 자꾸 입을 다물고 있고 양보 위주로 나와요. 그런데 그것도 주께서 역사하시면 깨질 땐 깨집니다. 10년 동안 안 깨지다가 한꺼번에 깨지면 완전히 엄청나게 깨지는 수가 있어요.

자, 세례요한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대단한 사람인데 30절에 보면 “그는 흥해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는 고백을 하죠. 그렇다면 세례요한을 좇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갈아타기 해야죠. 갈아타기 해야 되는 거예요. 세례요한 믿다가 누굴 믿어야 되죠? 주님 믿어야 되죠. 세례요한 어제 수요일 날 설교했잖아요. 세례요한 물세례와 성령세례 차이점이 뭐라 했습니까? 물세례는 인간이 행할 수가 있어요. 그냥 뿌리면 되지만, 나도 하겠다. 물 뿌려서 나도 했고 했었었고, 과거완료입니다. 했었었고, 나도 지금 할 수 있어요. 지금 해 달라 하면 해줍니다. 물세례는 인간이 할 수 있지만 그걸로 구원이 안 되잖아요.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세례를 받아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성령세례입니다. 그러면 물세례 필요 없네요? 그럼 물세례 왜 했어요? 해도 소용없는 걸 왜 했습니까? 참 그런 질문하면 오늘 공부한 거 헛방이라. 주께서는 우리를 어두움이라고 밝혀내야 그 조명발 의미가 살잖아요. 물세례 해주면서 소용없음을 이야기해줘야 소용이 있는 세례가 물세례 그 다음에 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주최자가 예수님인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물세례 가운데서 연합돼서 성령세례가 왔어요. 물세례 도중에 다 너도 나도 물세례인데 갑자기 어떤 한 사람은 물세례가 아니고 물세례 받는 동시에 성령세례 받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같이 왔다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물세례는 물세례로서 의미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세례와 연결되면서 물세례의 의미가 살아난다는 것을, 이중차원이 한 장소에서 결합이 돼 버린 겁니다. 결합이 되면서 물세례 시대는 세례요한으로 끝나버리고 물세례가 끝나면서 서서히 뭐로 바뀌느냐 성령세례로 바뀌면서 세례요한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으로 가는 거예요.

어쨌든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나 이런 보통 사람은 아니잖아요. 보통 사람 말고 외곽에 있는 사람이잖아요. 아웃사이드. 외곽에 있는 사람이잖아요. 세례요한도 주님의 성신에 의해서 부름 받았고 예수님은 아예 성령을 주신 분이고 따라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스스로 구원 못 받고 외부에서 온 분의 작용의 여파가 물결이 쳐야 고깔처럼 뒤집어써야 구원받는다는 점에서는 같은 점입니다.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나 외부인인데 우리를 구원코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 이예요. 다만 차이는 세례요한은 폼만 잡았다는 사실입니다. 폼만 잡았는데 그 폼이 물로만 폼이 아니고 물세례라 하는 것은 뿌리는 게 아니고 물에 잠겨서 죽는 거거든요.

성령세례라 하는 것은 ‘성령 받았다.‘가 아니라 성령 받고 난 뒤에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걸 의미합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이름으로 살지 않고 누구 이름으로 사는가? 주님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이걸 발달심리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아이는 엄마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렇죠? 아이가 ’김 혜숙씨‘ 이렇게 안 부르죠? 물론 드라마에는 애가 자기 아버지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강동희씨‘ 좋은 시절인가에 나와요. ’강동희씨, 강동희씨는 말도 제대로 못합니까?‘ 이런 식으로.

애는 아빠, 엄마로 불러요. 아빠, 엄마를 계속 부르죠. 하지만 어느 날 아빠, 엄마가 이름이 아니고 따로 있다는 것을 안 순간은 어떻게 하느냐? 내가 자기가 자기 이름을 확인하죠. 내 이름 따로 있다. 나는 그냥 딸이 아니고 아빠가 불러준 이름이 따로 있을 때 자의식이 생기면서 아버지, 엄마도 나름대로 나처럼 따로 이름이 있다는 걸 발견하죠. 그러면 그렇게 되면 언젠가 결혼하면 헤어져야죠.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그전에 누구 이름? 우리 이름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이름이 있는데 우리 이름이 주의 이름과 교체가 되면서 이거는 흙입니다.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주의 이름은 인자거든요. 진짜 사람이거든요. 진짜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 이름으로 바꿔치기 하면서 우리는 이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니까 내 명찰에 이근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있으면서 구원돼요. 이름이 내 이름이 있으면 구원 못 받아요. 내 이름은 구원 못 받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바뀌면서 안에 있는 알맹이도 전부 다 주의 소유가 돼버려요. 구원의 원리가 그래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돌에 이름이 있는데 이름이 주의 이름 이예요.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호명할 때 주의 이름으로 호명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것이 돼요.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 사람. 주의 이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죠. 천주교는 이름 바꾸는데 베드로로 이름 바꾼다고 구원받습니까?

주의 이름을 바꾸는 게 명찰에다 ‘예수 그리스도’ 하면 구원받겠네요? 아니죠. 이름이라 하는 것은 문자로 새기는 것이 아니고 이름이란 실제로 구체적으로 적용이 돼요. 야곱은 야곱답게 인생이 되고, 이스라엘이 바뀌면 이스라엘 되고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이름이 바뀌면 이름에 걸 맞는 새로운 인생 스케줄이 이름에서 쏟아져 나오게 돼 있어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보려면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 돼요.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그 길을 우리로 강제로 가게 돼 있습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주님 가신 길을 가게 돼 있어요. 그 길이 뭐냐, 바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이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라는 그것이 늘 반복되죠.

그래서 세례요한이 여기 요한복음에는 세례요한이 어떻게 죽었다는 것이 안 나오죠? 세례요한은 완전히 릴레이 하는 거죠. 릴레이 바통 있잖아요. 바통 넘기는 자와 받는 자, 넘기는 세례요한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걸 율법이라 하고 율법을 누구한테 주느냐 하면 독생자의 사랑으로 넘어갑니다. 사랑으로 넘어가면서 율법 시대는 끝나는 겁니다. 율법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고 사랑은 율법에 죽은 우리를 사랑으로 되살리는 거예요. 율법으로 되살리는 게 아니고. 예수 믿고 율법 지키는 게 아닙니다. 율법하면 율법보다 더 어려워요.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고 사랑으로 하기 때문에 사랑은 받는 거예요. 받는 거기 때문에 사랑 안에서는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오만하지 않아요. 왜냐 다 받은 거기 때문에!

탕자가 아버지 집에 와서 자기 자랑합니까? 탕자가 집에 와서 삐딱하게 다리 꼬고 있습니까? ‘아버지, 내 구두 닦아’ 이렇게 나옵니까? ‘어휴, 미안합니다. 어휴, 이 가다마이 옷, 아휴, 금가락지는 왜 주시고 고기 목살 좋은 건 왜 주시고 어휴.’ 모든 게 황공스럽죠. 탕자기 집에 와서 보니까. ‘저는 굶어죽어도 괜찮은데 왜 이렇게 넘치십니까? 고맙습니다.’ 이렇게 돼야 탕자죠. 이렇게 비꼬고 거만하게 앉아서 ‘볼수록 똑같아.’ 이러는 탕자 봤습니까?

성경은 간단해요. 율법으로 죽이고 죽은 자를, 율법에 죽은 자만 살려요. 율법을 배워서 안 되고 율법으로 죽었다는 걸 아는 자만 사랑으로 살림으로써 율법으로 쏘는 것이 어디냐? 내가 율법으로 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사랑 받는 자리로 가버렸다 말이죠. 율법은 맨날 십계명 쏘고 있어요. 간음하지 마라. 퓨웅! 살인하지 마라. 퓨웅! 나는 뒤에서 쳐다만 봐야죠. 내 그림자에 쏘아대는 걸 보면서 ‘내가 옛날에 저랬었지. 그래 내가 옛날에 간음했었지. 내가 그래 도둑질했어.’ 맘껏 보면서 내 그림자를 보면서 사랑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겁니다. 지금도 율법으로 쏘아대죠.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미 부활한 사람은 반대편에 표적이 없는 저쪽에서 주님 품안에서 사랑받고 있잖아요. ‘아이구, 내 여자야.’ 사랑받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강의 제목은 미결입니다. 오늘 강의 전체를 요약하게 되면 그냥 찾아와 주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오셔서 이미 무슨 일 벌려놓고 그 다음에 성령 보내셔서 십자가만이 너를 살린다는 것을 이렇게 뒤늦게 우리에게 알려주시니 그것이 받아집니다. 창세전부터 예정한 일이오니 그 일이 우리를 통해서 그대로 실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