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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외 / 요한복음 3장14절 / 140619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외 / 요한복음 3장14절 / 140619

정인순 2014. 6. 20. 10:11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이한례

가락-요한복음 3장14(외)140619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3장 이야기가 워낙 유명한 이야깁니다. 니고데모가 찾아왔고 하늘나라는 어떻게 해야 들어가느냐 이야기했고 예수님 하신 말씀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끊어버렸고, 그러면 들어가는 방법은 뭡니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하니까 내가 육신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까? 이렇게 되물었고 주님은 같은 자리에서 백번 태어나도 안 되고 다른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야 된다. 같은 자리에서 백번 아니라 천 번을 태어나도 구원 못 받아요.

그러면 자리를 바꿔야 된다는 겁니다. 판을 새로 깔아야 되는 겁니다. 기존의 판 가지고 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구원 못 받고 주님께서 깔아놓은 판에서 다시 태어나면 거기서 영생을 얻거든요.

그런데 그 판은 어떤 판이냐 하면 산 사람을 산 자로 다시 만드는 게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을 죽음으로 집어넣어서 스스로 살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살 수 없었는데 살려주는 영이 임함으로써 그 죽음 판에서도 기어이 살아날 때 그것만이 천국 가도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천국이라 하는 것은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옥도 있잖아요. 그러면 천국은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천국은 누가 가느냐 하면 지옥마저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에게만 천국에 갑니다. 뻔히 아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거예요.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만 천국 가거든요.

따라서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주께서 지옥에다 집어넣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을 저주 아래 두게 하신 겁니다. 이 땅 자체가 죄가 넘쳐흐르고, 저주가 흐른다는 것은 죄가 계속 보글보글 기어 올라온다는 거예요. 저주라 하는 것은 죄 없는 곳에는 저주가 없거든요. 불의한 곳에 저주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 창세기 3장에 저주가 있다는 말은 온 천지가 계속 뭐가 올라온다? 죄가 올라온다는 겁니다. 마치 비 내리고 난 뒤에 대나무 죽순 올라오듯이 올라오는 거예요. 그 올라오는 죄에서 어느 누구도 거기서 죄의 권세를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판에 그냥 묻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판에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 유일하게 죄에서부터,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장소를 만든 겁니다. 그 장소가 뭐냐, 죽었는데 사흘 만에 부활하는 장소, 그걸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게 되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 있는 것이 들통 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법 외의 다른 의, ‘율법 외‘ 니까 이걸 모른다 칩시다. 율법 외(?)의 뭐거든요. 그러면 ’율법 외‘라 했다는 말은 율법은 이다? 아니다? 아니라면 율법을 X표 쳐야 된다 이 말이죠. 이 X표 칠 때 여기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십계명 들어있고 십일조 들어있고 안식일 다 들어있어요. 그렇잖아요. 심지어 뭐도 들어 있느냐 하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할 때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이것도 X표 쳐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권면 있잖아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것도 X표 쳐야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외’니까. 지금 여기 하나님의 의가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테두리를 이렇게 ‘외’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테두리를 정해버린 거예요. 여기에 우리는 이것을 직접 들어가는 방법은 없고 어디를? 이것(율법)을 거쳐서 와야 외가 살아요. 율법 외, 율법 말고 +알파, ‘외’를 살리기 위해서는 율법이 아니고, 율법 말고, 경상도 말로 율법 아니고, 율법 말고 이거 알기 위해서는 ‘말고’라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바로 갈 수 없고 율법을 거쳐서 가야돼요. 율법을 거쳐 가야 ‘아! 이게 아니고 이거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우리가 율법을, 성경을 봐야 되고 성경을 알아야 돼요. 이 전체가 법, 율법이니까 이게 법이거든요. 법은 선합니다. 악하지 않습니다. 법이 선한 거예요. 우리는 그게 선한 줄 알고 지키는데 결과가 의를 나지 못한다면 율법이 문제가 아니고 그걸 지키겠다고 나선 누가 문제란 말입니까? 우리가 문제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이 악한 게 아니고 율법이 선한데 왜 선한 율법이 안 되느냐 하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율법이 아니고 율법이 간소한 율법, 더 깊은 율법, 어떤 율법을 줘도 우리는 못 지켜요. 10개 중에 7개 지켰다가 아니라 단 하나도 못 지킵니다. 왜, 못 지키라고 준 게 율법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솝이야기에 보게 되면 두루미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긴 항아리에 줬잖아요. 거기에 간 짜장이 들어있던지 짜장면이 있던지 그건 아무 소용없어요. 피자가 안에 들어있어도 소용없어요. 그 의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게 율법 이예요. 약을 올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루미가 그 음식을 못 먹으면 자기는 배 쫄쫄 굶는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율법을 안 주게 되면 자기는 얼추 ‘내가 전적으로 나쁜 인간은 아닐 것이다.‘라고 이렇게 오해한다 말이죠. 전적으로 율법을 주고서 더욱 더 저주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율법은 전적으로 지키지 못한 걸 줘야 돼요. 지키지 못한 걸 줬다 하면 사람들은 자꾸 이 길로 바로 가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율법 외’라는 취지가 날라 가 버리기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이것을 가야 돼요. 가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전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그런 티를 내게 돼 있어요. 하나님 덫에 말려든 거예요.

‘내가 성경을 보니까 내가 인간이라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토록 나쁜 존재는 아니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느껴져요. 세상 사람하고 다르니까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 사람들 지옥 가도 우리만큼은 천국 가는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 그걸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다 보면 그 다음부터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욥과 같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왜 내가 무엇이 잘못돼서 이런 벌을 주십니까? 그런 반항과 반발이 나도 모르게 여러분 자신이 모르게 나오기 마련 이예요. 사람들이 왜 그런 현상이 있느냐 하면 율법을 볼 때 지킬만한 것만 뽑아내요. 못 지키는 것은 심화학습 관계로 이걸 미뤄놨기 때문에 그래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그런 말씀은 우리는 안 들은 걸로 여기는 거예요. 온유와 화평 이런 건 잡아당기면서 우리가 지킬만한 것은 뽑아내고 못 지키는 건 미뤄놔서 그래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더욱 더 율법에 대해서 가까이 하게 해서 그것마저 없애게 해줘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라 했거든요. 자, 문제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육신이기 때문에 율법 속에 있다 했습니다. 율법외의 한 의로 가는데 여기서 이리 건너갈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없다는 게 문제에요. 이거 쟁취하면 되는데 이걸 손에 넣고 쥘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율법 안에 있으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가 죽은 자가 돼요. 죽은 자는 그야말로 죽은 자기 때문에 계속 죽은 자이어야 하는 겁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해골 나오죠. 해골이 그 에스겔하고 하나님하고 같이 해골 방문하니까 해골이 갑자기 ‘어! 선지자하고 하나님 오셨네, 알아서 일어나야 되겠다.’ 라고 해골이 알아서 이렇게 ‘힘 합쳐서 다시 근육을 조립하자.’ 이렇게 했습니까? 어떻습니까? 누가 오든 하나님이 오든 선지자가 오든 그냥 골짜기 해골은 바짝 말라 있는 거예요.

제가 막 살아야 된다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고상하게 살면 내가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내 쪽에서 어떤 시도를 한 것이 내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도 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주교는 이게 주 교리고요. 하나님께서 딴 건 다 망해도 하나님의 음성 들을 때 캐치할 수 있는 능력만큼은 아직도 죄에 물들지 않고 남겨뒀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 주장에 어떻게 호응이 되십니까? 호응이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 다른 예수를 모시고 계신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 호응해서 ‘아유, 네가 거기 있었구나. 내가 미처 놓칠 뻔했다. 그래 갈게, 내가 성령 줄게. 믿음 줄게.’ 이렇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완전히 우리를 바짝 마른 해골로 만들었어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우리의 전쟁을 하기 때문에 주님의 전쟁은 관심 밖입니다.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해골들이 나중에 사람이 될 때는 그들이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군대였어요. 우리는 내가 밥 먹고 살기 바빠요. 내가 내 전쟁하기 바쁘고 내 생존경쟁 하기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든 싸움은 내가 어떻게든 살아남느냐 이 싸움이지 어떻게 우리가 누구 걱정합니까? 주님 전쟁이 어떻게 됐습니까? 남의 전쟁을 자기가 왜 신경 씁니까? 우리는 나를 위한 내 군대에요. 이미 우리 관심사가 그쪽이 아니고 관심사는 나한테 귀환되거든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구약 때 보면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참여하지 않은 대장들끼리 싸워서 승리한 쪽이 나를 전리품으로 가져가면서 구원이 성사됩니다. 출애굽기 15장, “여호와는 용사시니” 승리하셨기에 우리는 전리품으로 애굽에 포로 돼서 잡혀있던 패잔병들이 전리품으로 우리는 주님의 품으로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돼 있어요.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선물로 나눠주었다.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는 거기 관여 못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자본주의 전쟁한다고 바빠요. 우리가 영적 전쟁까지 신경 못 씁니다. 가족은 가족 전쟁하기 바빠요. 남편은 아내, 시어머니, 며느리, 그 전쟁하기 바빠요. 자식은 부모, 부모는 자식 이기려고 바쁩니다. 무자식 상팔자인지 유 자식 상팔자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가족끼리 늘 다투는 이유는 뭐냐 하면 물론 자기 싸움이지, 자기 자존심 싸움이지, 주님의 전쟁이 아니거든요.

그만큼 이쪽은 엉뚱한 곳 이예요. 엉뚱한 곳인데 그래도 천국 가는 사람 있잖아? 있으면 그들은 어떻게 갔는가? 여기에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창조가 개입됩니다. 여러분들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 끝난 줄 알고 있죠? 창조는 그 자체가 사건이기 때문에 주님의 사건은 사건이란 말로 제가 표현하는데 사건은 뭐냐 하면 사건이 일어난 흔적과 결과는 사건의 원천을 붙잡을 수 없다는 원리가 있어요.

자, 이 자리에 폭탄이 터졌습니다. 폭탄이 터졌으니까 여기에 있던 바위가 폭발에 의해서 여기로 옮겨졌죠. 옮겨진 바위가 다시 돌아와서 그 폭탄을 본인이 설치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미 벌어진 사건 그걸 결과물로 하면 돼요. 이미 사건이 터진 결과물이 흩어진 그 결과물을 주워 모아서 처음에 사건 되기 직전의 상황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사도바울이 했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내가 예수 믿을 수 있는 능력은 나한테는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주님이 폭탄이고 주님이 이 십자가폭탄을 터뜨려서 오늘 나 같은 인간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예수 믿는 쪽에서 다시 시작해서 십자가를 붙들 수 있는 그러한 관계는 이미 차단돼 있어요.

“예수를 믿어라” 이 말은 예수 믿을 사람이 없다는 뜻 이예요. 아무도 예수 믿을 사람 없습니다. 만약에 믿는다고 우긴다면 그건 믿는다는 행함이지 믿는 게 아니에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소유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왜, 이미 소유 당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주님을 소유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늦게 오셨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해보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데 판이 바뀌어야 돼요. 판이 바뀌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판은 뭐냐 이미 창세기 1장에서 창조를 했고 그 다음부터는 지루하게 이어져오는 맨 그 판, 그 창조의 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써서 나는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에서 이걸 존재, 또는 존재 판이라고 해요. 이 존재 판을 하나의 이불, 이불 홑청, 또는 담요라고 봅시다. 담요가 이렇게 있다고 봅시다. 담요는 얇지만 넓게 펴져 있습니다. 나라는 A라는 사람이 1014년 6월 달에 여기 등장해 있습니다. B라는 이웃도 있고 C라는 이웃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2000년 전에 또는 3000년 전에 또 1592년 이순신 장군 그 시대에 누가 태어났다가 죽었던 그 자리, 그 판이거든요. 강감찬, 연개소문 같은 사람들, 낙랑공주와 평강공주 이런 사람들이 다 있던 판이란 말이죠.

이 판이 무슨 판이냐 하면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판이거든요. 이 판에서 내가 여기 있다면 나는 이 죽음에서 이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여기에 자리를 마련하는 거예요. 이 자리는 무슨 자리냐 하면 이 죽음을 이길 수 없고 유일하게 구멍을 뚫고 사흘 만에 되살아난 자리를 의도적으로 다 같이 죽는 자리에다 점을 찍은 겁니다. 다른 길은 구원받을 길이 없어요. 십자가 외는.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킨 거죠. 방금 제가 십자가에다 무슨 말을 붙였습니까? 십자가 사건!

사건! 지금 이 어려운 이야기를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사건이라면 여기서 사건이 잘 안 돼요. 왜냐 존재라니까요. 사건은 우리가 반복될 수 없고 잡을 수가 없어요. 아까 폭탄 이야기했죠. 폭탄이 일어났으면 그냥 파편들이 일어나지 그 흩어진 파편이 그 폭발 사건을 다시 힘을 맞춰서 재현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게 딜레마라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잖아요. 우리는 내가 나를 새롭게 창조하고 싶어요. 그게 거듭 난다 이 말이죠.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창조됩니까? 하지만 우리는 창조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창조는 사건이다 말이죠. 창조된 결과물이 사건을 다시 손에 쥐거나 붙잡을 수 없는 이 딜레마, 여기 이 한계에 빠진 겁니다.

구원 못 받아요. 왜? 흩어진 파편이 무슨 수로 다시 그 자리에 기어 올라갑니까? 영화는 돼요. 영화 ‘매트릭스’ 보면 깨어졌다가 다시 조립되고 조립됐다가 깨어지는 게 있잖아요. ‘엣지 오브 투모로우’라는 지금 상영하는 영화에 보면 리세트란 게 있어요. 다시 세팅하는 거예요. Reset. 전쟁 중에 죽었는데 주인공이 다시 또 살아나고 죽었는데 나중에 또 살아나는 거예요. 기분 좋죠. 처음에 전쟁할 때 자기가 실수해서 죽었다 이 말이죠. 다음에는 실수한 걸 기억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실수를 이기고 기어이 외계를 이긴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주님이 니고데모보고 요구한 게 그거에요. 네가 알아서 reset, 다시 태어나 봐라 말이죠. 그러니까 기껏 니고데모 하는 말이 내가 엄마 뱃속에 갔다가 다시 태어납니까? 그런데 그 reset, 다시 재 세팅하는 것은 이 판이 이미 존재의 판, 창조 사건이 일어나서 파편들이 흩어진 그 창조 판이거든요. 이미 사건은 없어졌어요.

우리가 이해하는 성경은 이렇습니다. 옛날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나저러나 이 하늘과 땅과 바다, 해, 달은 뭐냐, 그때 창조한 그때 그것이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입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에요. 끝.

그래서 우리는 태어났다가 죽는 겁니다. 죽고 나면 어디 가느냐? 죽고 난 뒤에는 모르죠. 죽고 난 뒤에는 다시 창조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죠. 창조를 죽이는 죽음 속에 있을 뿐이죠.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그럼 희망은 어떤 희망밖에 없습니까? 요 창조 사건이 다시 되풀이 되면 다시 살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여러분 머리 좋은 분들은 퍼뜩 생각나죠. 우리보고 하라고 하지 말고 창조하신 분이 오셔서 다시 리세트 해주고 다시 거듭나게 해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하죠. 그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하시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창조를 다시 해줘?” 그런 법은 없어요. 왜냐 하면 이미 창조가 망가졌기 때문에. 창조를 다시 하지 말고 다시 하는 대신 뭐냐 하면 너희들이 죽는 이유가, 뭣 때문에 죽느냐 하면 죄 때문에 죽거든요.

그러면 죄 때문에 죽는데 다시 살려면 뭐가 해결돼야 돼요? 죄가 없어지고 그게 뭐로? 하나님의 의로 바뀌면 의에 합당한 조치, 위에 합당한 존재의 세계가 펼쳐질 거다 말이죠.

그런데 죽어있는 우리보고 그것도 죄에 죽어있는 우리보고 이걸 하라 하면 할 수가 없죠. 늙어 죽어가는 입장에서, 우리가 못하니까 주님께서 오셨는데, 주님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주님은 의인이죠. 의인이 와서 죄인의 자리에서 드르륵하고 드릴로 구멍을 뚫는 거예요. 요 구멍만큼은 뭐가 없다? 죄가 뭐로 바뀐다? 의로 바뀌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못 믿죠. 믿으라고 준 게 뭐냐 하면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봐라 내가 죽었잖아. 너희가 죽였잖아. 죽은 내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사도들과 사도바울과 제자들은 전파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드디어 구멍 뚫렸다는 거예요. 마귀가 지배하는 이 죄인 세상에, 죄의 세상에 어떤 숨통이 트였다 할까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하면서 얼마나 신났는지, 저도 신나는데 사도바울이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여기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 발언을 하면서 사도바울이 얼마나 감격해 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어디 의사를 부러워하겠습니까? 판사를 부러워하겠습니까? 판사가 구원합니까? 의사가 구원해요? 이게 뭡니까? 본인이 구원하는 것도 아니에요. 누가 구원한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끝. 진짜 끝난 거예요. 깐죽댈 필요 없어요. 이제 끝났어요. 하나님 의가 나타났으니까.

사람들이 이 말한고 먹히지 않겠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하고 있느냐. 그래서 그 뒤에 나온 말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뭐다? 의의 반대말이 뭡니까? 죄죠. 죄한테 주어지는 것이 저주고 심판이죠. 그전까지는 인간은 늙으면 죽는다고 생각했어요. 왜 죽는가? 늙었기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지금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

사도바울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의를 증거 하기 위해서 말을 바꿉니다. 죄가 있어서, 죄에서 못 빠져나와서 죽는다는 거예요. 인간은 죽는다. 숨 끊어진다. 이 건희처럼 …하고 있는데 이 건희처럼 죽는 고거까지만 알고 죽고 난 뒤에 죄에 대한 합당한 심판과 저주가 있다는 그것까지는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단순히 죽은 게 아니잖아요. 아버지께 저주 받았잖아요. 저주 받는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십자가에 달리사 아버지로부터 율법의 저주를 받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죽는다는 숨 끊어지는 그 수준이 아니고 인간들이 미처 모르는 발견하지 못한 더 깊이 내려가 보니까 거기는 숨 끊어진 정도가 아니고 저주가 기다리고 있고 무서운 영원한 불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주님께서 다녀오신 거예요. 석유 시추하듯이 시추 봉을 뚫는 거예요. 시추 봉을 뚫고 뚫어진 시추 봉을 끄집어내서 눈에 보이게 하신 겁니다. 보여서 그것을 사도바울에게 전달했고 사도바울은 그것을 우리에게 로마서로 펼치게 한 거예요. 아! 이게 내가 밥 먹고 사느냐, 안 사느냐. 이게 문젯거리가 안 돼요. 내가 월급이 얼마인지 이건 문젯거리가 안 된다니까요. 고부간의 갈등, 형제간의 재산 싸움, 이건 문젯거리가 안 돼요. 뒤에 머리가 빠진다. 갱년기다. 온 몸이 뜨겁다. 이것도 문젯거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 것 가지고 기도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돼요. 갑상선 암 때문에 기도하고 그러지 마세요. 나도 걸리면 하겠지만.

강도가 예수 믿고 난 뒤에 강도에서 풀린 게 아닙니다. 사면 된 게 아닙니다. 그걸로 사형당해서 그날로 “오늘 밤에 나와 함께” 그냥 천국 간 거예요. 거지 나사로가 죽을 때 재벌 된 게 아닙니다. 거지로서 그냥 아픈 채로 아브라함 품에, 낙원에 간 겁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어떤 모양새를 갖고 있느냐, 그건 문젯거리가 안 돼요. 어떤 차냐. 어떤 아파트 평수가 문젯거리가 안 됩니다. 사도바울을 그걸 증거 한 게 아니고 환경운동, 이런 걸 한 게 아니고, 정치 운동, 민주화 운동 한 게 아닙니다. 독재야 물러가라, 박 근혜 사퇴하라. 그 데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그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네 주제나 파악해라 인간들아. 문 창극이 나가든 말든 사퇴하든 관계없어요. 러시아하고 1:1 비기든지, 누가 넣었어요? 이름이 누굽니까? 이 근호가, 내가 유명해졌어요. 한 골 넣고 그게 나중에 월드컵 끝나고 보세요. 허탈합니다. 이것 때문에 그동안 밤잠 못 잤구나. 치맥이나 많이 팔렸지 뭐.

세상을 사람은 살아봐야 알지만 우리는 안 살아봐도 세상을 알아요.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오직 구멍 뚫린 이 구멍에 불과해요. 십자가만으로 구원 얻는다는 이 복음, 이것만이 중요한 겁니다.

지금 제가 요한복음 하기 전에 로마서를 이렇게 하는 것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곁길로 많이 돌아갔느냐 하면 바로 창조의 반복입니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한번 창조했으니까 끝났다? 아닙니다. 창조는 반복됩니다. 어떻게 반복되는가? 산이 뒤집어지느냐? 아니에요. 창조의 사건의 반복 이예요.

그 창조 사건이 반복된다는 말을 앞의 논리는 다 빼버리고 결론만 딱 이야기해버리면 예수님이 오셔서 창조의 취지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반복시킨다. 이렇게 결론이 납니다. 창조주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 이예요.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 지옥 가는 겁니다. 예수님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왜 죽였을까요? 그들이 누굴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 이름이 뭐에요? 여호와 하나님 이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인 거예요. 그들은 명칭만 외웠을 뿐 이예요. 그 여호와가 예수님이란 사실을 본질은 몰랐던 거예요. 이름만 들은풍월이 있어서 율법에 나오는 여호와는 있어서 그걸 그대로 입으로 고백하면 주께 먹히고 알아주는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 외우는 데는 도사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외우는데 도사거든요. 어릴 때부터 시편 다 외워요. 구약 성경을 달달 외우고 있으니까 외운다는 말은 거기 나오는 용어, 기호, 문자, 그게 들어있다 이 말이죠. 기호, 문자, 그 기억력이 무슨 죄로부터 건질 능력이 됩니까? 안 되잖아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그런 문자와 그런 것을 버리라 이 말입니다. 그런 문자와 기호 이런 거 쥐고 그게 나중에 교육이 되고 새롭게 조작된 율법이 되는 겁니다. 제가 부산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그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볼게요. 산상설교에 “간음하지 말라”는 내용 나오죠? “간음하지 말라”는 내용을 오페라 작곡가 바그너는 오페라를 쓰면서 이렇게 바뀌었어요. “간음하지 말라”의 이런 부정적인 의미는 그걸 긍정적인 의미로 고치면 ‘사랑 없이 결혼하지 말라는 그런 뜻입니다.’라고 자기가 풀이해서 했어요. 자, 그러면 여러분한테 물어볼게요. “간음하지 말라” 하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혼하자 말라‘ 하고 같은 뜻일까요? 다른 뜻일까요? 제가 여러분한테 묻는 겁니다. ①번 같은 뜻이다. ②번, 다른 뜻이다. 둘 중에 하나인데. 새로 오신 분 대답해 보세요. “간음하지 말라”하고 ’사랑 없이는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음악가 바그너가 했는데 여러분 둘이 같은 뜻입니까? 다른 뜻입니까?

바그너는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더 확대를 시켜야 된다는 겁니다. 사랑 없이 결혼해 버리면 결국은 배우자를 강간한 셈이 돼 버리니까 이것은 그걸 방지하라고 반드시 사랑한 상태에서 결혼하라는 뜻으로 주님이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그런 해석에서 여러분 동의가 됩니까? 안 됩니까? 그게 안 되는데 그 이유가 있어야 돼요. 뭐냐 하면 “간음하지 말라”는 산상설교의 말씀을 때려죽여도 우리가 못 지키게 되는데 바그너가 그렇게 해석을 해버리면 사랑하고 결혼한 사람은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지킨 셈이 돼 버려요.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율법은 취지가 뭐다? 율법은 못 지킨다는 취지가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하고 결혼한 사람은 그 사랑하고 결혼한 그것이 자기에게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자기 나름대로 자기 의가 생겨 버리면 이건 사건이 아니에요. 창조 사건이 아닙니다. 자기가 굼벵이가 몸을 부딪힌 거예요. 나름대로 바르게 살아서 그 바르게 산 마일리지 가지고 천국 가보겠다고 그냥 시도하는 거예요. 10% 내면 십일조입니까? 그걸 십일조라고 하거든요. 10%는 십일조가 아닙니다. 의와 신이 있어야 돼요. 사랑과 믿음이 있어야 돼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십일조라 하는 것이 장자에요. 하나님은 맏물을 받습니다. 구약이 십일조는 맏물의 10%를 받아요. 과일이 이렇게 있다면 그중에서 제일 우수한 이쪽을 받는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이 땅의 소유권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권 이예요. 소유권자에게 있어서 여기서 일했던 이스라엘은 임대차 계약한 사람 이예요. 이걸 레위기 25장 55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의 품군입니다. 그냥 취직한 거예요. 취직했기 때문에 세금을 내야 되는데 그 세금이 10%라니까요. 남의 땅에서 일해서 얻은 소득의 10%를 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노동한 것 중에서 10% 냈으니까 90%는 자기 것이라고 나오겠죠. 이게 아니에요. 왜냐 하면 이 땅이 특수한 땅이 돼서 노동한다고 소출이 일어나는 땅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줘야 이 소출이 나와요. 그러니까 이삭 심는 거나 모든 비오는 거, 계절의 날씨나 기후 이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일 좋은 걸 받는 거예요.

이건 뭔 뜻이냐, 전부 다 내 것이다. 그러니까 10%를 낸다는 말은 공짜로 90%를 얻어먹는다는 뜻에서 10%를 낸 겁니다. 이 곡식의 10%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사람의 10%로 바뀌어요. 그게 뭐냐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장자가 누구냐 예수님이 맏아들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곡식을 바쳐서 제사드릴 때 그 제사가 인격화 되면 사람이 되거든요. 그 사람의 10%, 다시 말해서 내가 받는 것은 내가 준 은혜로 내 말씀대로 완성한 그 의로운 것을 내가 받겠다. 그럼 이 세상에서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일조에요. 모든 말씀은 내게 대해서 증거 한 것이다. 십일조는 인격화 되면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십일조 안에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그 결과물이 십일조로 나왔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시킨 대로 했기 때문에 그 결과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말씀을 다 완성해서 하나님의 의가 이뤄졌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율법은 어디에 다 모아져야 되느냐 하면 통속에 넣어야 돼요. 여러분들이 한약방에 가면 여러 가지 보약 다릴 때 보약 재료가 봉지나 서랍에 들어 있잖아요. 이걸 끄집어내서 한 곳에 모아서 이걸 불에 다리잖아요. 서랍에 있는 걸 먹으라고 입속에 던지지 않죠. 모아서 다려야 되잖아요.

모든 말씀을 다 어디 모으느냐 하면 예수님이 다 거둬요. 거둬서 여기서 다려서 엑기스를 짜내서 엑기스 짜낸 게 뭐냐 하면 피고 피 흘릴 때 예수님 하신 말이 “다 이루었다.” 하신 겁니다. 무슨 우리가 지킬 율법이 남아있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율법으로 의롭다 했을 것 같으면 예수님이 보약 다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십자가 지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성령 받은 사람 이예요. 옛날에는 율법을 우리가 지켜야 된다고 했던 사람이 사도바울 되기 이전의 사울이던 시절이 있었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알아요.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구원하려 하는 걸 다 알아요. 사도바울이 한국교회 다 압니다. 말씀 지키면 더 착해지면 거룩해진다. 그런 식으로 가르친다는 걸 다 알아요. 알면서도 그게 아니고 오직 피만 받고 거룩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거룩하지 내가 노력한 의는 의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난 뒤에 말씀 지키면 그건 의잖아요. 예수 믿고 난 뒤에 말씀 지킨다는 말은 예수 믿고 난 뒤에 착해지란 말이 아니고 십자가, 이것이 같은 판에 이게 사건이거든요. 이 사건을 향하여 우리가 이 존재의 지평에서 말씀을 계속 나가서 가는 거예요. 예수 믿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뭘 기억합니까? 날 구원했던 최초 사건, 그게 뭐라 했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 사건으로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왜 십자가만으로 다 되느냐를 확인하면서 우리는 한평생을 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성도의 남은 생입니다.

사도바울의 권면과 사도바울의 모든 지시 알죠? 너희들이 서로 용서받은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말씀. 남편 된 자는 아내를 위해서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처럼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그런 말씀 나오죠. 그거 지키는 남편 있습니까? 남편들이 그거 지키겠어요? 그거 지키는 남편 만나면 부담돼요. 왜 그 남편에게 복종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 둘 다 너무 심하게 믿지 말자.’라고 타협할 수 있다 말이죠.

모든 성경은 어떤 성경도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라고 주신 겁니다. 사도바울의 모든 성경. 사도바울의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마지막 때에 뭘 사랑한다?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한다 하죠. 집사님 돈 사랑 안 합니까? 이 세상에 돈 안 사랑하는 사람 나와 보라 그래요. 목사들이 왜 그렇게 설교를 열심히 하는데요. 교인 지갑 열기 위해서 그런다잖아요. 그렇죠?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기 사랑하고 돈 사랑하고 이게 전부인데 그럼 우리보고 어쩌란 말인가? 뭘 더 원하는데? 우리가 원하는 게 이건데. 이 지뢰를 밟으라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가는 데마다 지뢰 밟고 가는 거예요. ‘내가 죄인입니다.’ 퍽퍽 터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안 생기던 여드름이 나서 거울보고 내 여드름 짜는 거예요. ‘이래서 내가 못난 존재구나.’ 이게 성령의 열매에요. 이게 한번 짤 때마다 온유, 한번 짜면 화평이 되는 거예요. 또 짜면 자비고 양선이고.

그러니 이게 막 살아야 여드름이 나오거든요. 모든 것이 어쩌면 이렇게 주의 말씀과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진솔한 모습을 매일같이 확인하는 겁니다. 어쩌면 이렇게! 주께서 원하는 것을 이토록 싫어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것을 이토록 좋아하는 내 모습을 진솔하게 매일같이 접하면서 우리는 감사!, 감사밖에 안 나와요. 이런 인간도, 이런 세리, 창기 같은 인간도 십자가 피로 용서했구나. 이게 뭐냐 하면 다시 하면 보약 다리기. 모든 성경을 다 넣어서 보약 찌꺼기를 우리 면상에 던지는 거예요. ‘너 때문에 내가 죽었어. 너 때문에 내가 죽었어.’ 하고 보약 다리고 난 그 찌꺼기를, 그 찌꺼기 다시 우려먹는 사람 있는데 그러지 마세요. 그 찌꺼기 가지고 우리 얼굴 면상에 던지는 것이 말씀이 우리한테 날라 오는 거예요. “죽도록 충성해라.” 하고 던지는 거예요.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미 너는 생명 얻었다는 거예요. 생명 얻었기 때문에 네가 죽더라도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 말이죠. 생명 얻은 이상 이미 이 땅에서 그만 사는 데, 뭐가 아쉽냐 말이죠. 나그네 삶인데. 그런 뜻으로 준 거예요.

그럼 성경이 그렇게 보면 어려운 거 없죠? 문제는 우리가 성령을 안 받아서 아직도 우리는 종교생활하고 도 닦는 생활하니까 아직도 이 성경이 전부 다 완전히 개판이 되고 이단으로 빠지는 거예요. 교회를 섬기라고요? 성경은 교회를 부수라는 겁니다. 교회를 부숴야 주님이 보이지 교회를 섬기면 교회가 보입니다. ‘아휴, 내가 이 교회 한다고 새벽기도 얼마나 나왔고 이 교회 헌금한다 할 때 내가 집 전세 바꿔서 전세 돈 바치고’ 이게 자꾸 기억이 나는 거예요. 이 피아노 내가 200만원 주고 사 준 것이고, 어쩌고 저쩌고.

그게 결국 누구 잘난 겁니까? 내가 이 교회에 대해서 내가 지분을 많이 갖고 있다. 그 뜻이잖아요. 내가 그 교회 이사입니까? 오래 다니면 다 이사돼요? 이사를 다른 말로 하면 장로라 해요. ‘너는 젊은 놈이 돈도 안 내고, 나는 이 교회 한다고 내 재산을 바쳤다. 이 교회 손대지 마. 내 것이다.’ 그게 소유잖아요. 그러면 치면 창조사건이 나옵니까? 창조사건은 십자가를 반복합니다. 십자가 반복은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를 계속 지적 질을 해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미 다른 판에서 놀고 있는, 이미 사건 판, 이런 존재 판이 아니고 존재에서 벗어난 어떻게 해도 사는, 어떻게 해도 영생 얻는 지금 그 판에서 우리가 놀고 있는 거예요. 놀면서 우리는 옛날 우리가 살았던 내가 허겁지겁 구원받으려고 악을 쓰고 몸부림쳤던, 성경대로 살기, 새 생명 운동하기, 그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그 모습을, 제자 훈련 12단계 그런데 모여서 세미나하고 철야했던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쓰잘데없는 짓들을 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겁니다. 그거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교회는 행사를 벌리면 비용이 들고 행사 벌려 놓고 비용 이상의 돈을 헌금으로 각출해서 교회가 재산을 불리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제야 말한다. 그게 교회 사업입니다. 그 소속 원들의 자기 자존심,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함께 있다는 것을 남한테 과시하고 싶은 그런 불신앙, 믿음이라는데 사실은 불신앙이거든요. 안 보이는 분을 믿어야 믿음인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걸 믿어야 되는데, 교회 번듯하게 있는 것으로 우리교회 믿음 좋고 우리교회 주님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임마누엘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과시해서 더 많은 사람을 확보하는 영업적 전략으로 그걸 사용하는 거예요. 인테리어 바꾸고 파이프 오르겐 들여놓고.

그럼 이목사 당신은 교인 수 많으면 그렇게 안 하겠는가? 나도 그래야죠. 나도 그럴 수밖에 없죠. 교인 수 많으면. 하지만 그 교회를 부정해야 돼요. ‘여러분 교회 크죠? 이거 아무짝에도 도움 안 됩니다.’ 이렇게 설교를 해야 돼요. 참 교인 수가 점점 빠져나갈 때는 오히려 그런 소릴 할 수 있어요. 왜냐 하면 목사가 성질나서. 에라 망해버리자. 그런데 이상하게 교인 수가 불면, 말조심해야. 간만에 왔는데 말실수해서, 돈 되는 사람이 왔는데, 청년들이 온 게 아니고, 그런데 보니까 50 넘어서 돈 꾀나 있어 보이고 하면 맞춰줘야 해요. 심한 말 하면 안 되고. ‘여러분, 우리교회가 전통과 역사가 있습니다.’ 이상한 잔소리가 또 나오거든요. 붙잡으려고.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창조를 할 때는 반드시 구멍을 파죠. 이 세상 자체를 부정하는 구멍을 파기에 창조를 합니다. 창조의 반복은 사건에만 주어지는데 자꾸 목사님은 사건이란 어려운 말을 합니까? 왜 사건이란 어려운 말을 하느냐 하면 두 번 다시 붙잡을 수가 없어요. 홍해 갈라짐이 두 번 갈라졌습니까? 아니면 요단강입니까? 요단강이죠. 하나는 홍해지만 그 다음에는 요단강이죠. 그 다음부터는 강 안 갈라졌어요. 왜, 사건은 한번이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사람은 존재기 때문에, 존재는 반드시 붙잡아서 그걸 존재 판에서 반복을 해서 그걸 신봉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그걸 자기 역사화 시켜요. 내 찬란한 역사에 하나의 굴비 꿰듯이 나의 괜찮은 역사에 또 하나의 목걸이처럼 구술 꿰듯이 하나 꿰서 ‘나 이런 놈이야.’ 하고 자랑 질 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건들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사건을 소유화 시켜서 자기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망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망한 거예요. ‘옛날에 이렇게 잘나갔고 옛날 이런 사건 있었고 우리는 그 사건을 기대해야 된다.‘ 라고 요청할 때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서 너희들이 이해하는 그 사건으로서 도무지 이해 못할 낯선 사건을 다다닥 쳐버리죠. 그러니까 그 낯선 사건에 대해서 그들은 문헌을 조사를 해요. ’가만히 있어보자, 지금 이 사건에 대해서 어이, 율법 박사들 와보라, 이 사건이 하나님 사건인지 사건이 아닌지 조사해 봐라.‘ 옛날 사람들이 기껏 연구하는 것은 반드시 과거 업적의 도서관을 들추는 거예요. 들춰보고 ’안 맞습니다. 원칙이 다릅니다.‘ ’그래? 그럼 이단이다.’ 그렇게 해서 이단 받은 사람이 누구냐? 참 선지자에요.

그런데 거짓 선지자는 뭐냐 하면 주님의 영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교육을 하는데 과거에 했던 것들을 끌어 모아서 그것 가지고  교육을 시킴으로써, 이것은 지식으로 들어와요. 지식과 이론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는 단순한 실천이 아니고 낯선 실천, 이걸 제가 대구 강의에서는 발견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이 발견하지 못할 낯선 사건을 주입하는 이유가 그 사건은 미래에서 오기 때문에.

재밌는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울산에 갔는데 울산에 42개월 된 5살 애가 자기 증조할머니 집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할머니 전하는 예수는 다른 예수 같아.’ 이러는 겁니다. 90 넘은 할머니가 약이 올라서 ‘야, 너 내일 …’ 심술을 부린 거예요. 대구 오래된 경산교회 다니거든요. 그 유명한 교회서 다들 자기를 칭찬하는데 ‘할머니는 예수가 다른 예수 같아.’ 다른 예수라 하는 것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걔 이름이 뭐냐 하면 민준입니다. 별에서 온 그대. 그래서 그 애를 키우던 할머니가 본인이 깜짝 놀랐답니다. 걔가 안 듣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었던 거예요. ‘민준아, 이게 다른 예수고 이게 십자가 복음이고’ 이걸 이야기하는 걸 애가 듣든지 안 듣든지 계속 이야기했는데 걔가 듣지도 안 해요. 그냥 안 듣는 것 같아요. 까불기만 하고. 그런데 막상 어떤 상황이 왔을 때는 자기가 알고 있던 내용하고 다른 예수를 푸니까 ‘할머니는 다른 예수 같아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삐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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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 3장14(외)140619b-이 근호 목사

다시 태어난다는 그 이야기는 판이 바꿔진다는 이야기고 네가 있는 판에서는 아무리 거듭나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한 거죠. 그러면 다시 태어나려면 어떻게 하느냐? 육으로서는 안 된다. 그럼 성령으로 와야 되는데 성령은 사건 이예요. 그걸 뭐라 하느냐, 바람이라 했습니다. 바람은 분명히 불었어요. 그런데 분 바람은 다시 쫓아가서 잡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잡을 수 없어요. 이게 문제에요. 천국은 가고 싶은데, 바람은 불어야 되는데 바람은 한번 불었잖아요. 그 불은 바람을 내가 늘 간직하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야말로 바람은 우리한테 잡히질 않습니다. 그 다음에 또 불어야 바람이 또 부는 거예요.

그러니까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뭡니까? ‘그 바람이 어디서 옵니까?’ 그 바람의 출처가 어디냐 그게 궁금한 거죠. 이 존재 판에 모든 인간이 있었다. 바람이 불었잖아요. 바람이 불었을 때 이 바람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바람구멍이 어디서 부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안다고 하늘에서 분다 하죠. 그 하늘에서 불던 시절이 끝났다니까요. 이 지상의 구멍에서 나온 성령이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어디?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보기에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았잖아요? 세례 받을 때 예수님께서 비둘기같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세례요한이 증언하기를 “성령을 받은 사람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분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의 출처가 확정됩니까? 확정 안 됐습니까? 확정된 거예요. 왜 확정됐느냐 하면 예수님 계시면 성령이 거기서 나오게 돼 있다 이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찾아갔습니다. 니고데모는 지금 하늘나라 가고 싶어요. 그런데 바람이 불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더라도 바람이 나오는 그 사람은 네가 지금 만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는 하늘나라 쳐다보지 말고 땅의 일도 모르는 게 어떻게 하늘의 일을 알겠느냐, 그렇게 설명한 겁니다. 이제 뚫리십니까?

성령을 줘야 하늘나라 가요. 그런데 성령을 ‘주시옵소서’ 한다고 주는 게 아니고 이 땅에 성령 줄만한 사건이 일어나야 성령이 나와요. 그게 십자가 사건이 터져야 성령이 나오거든요. 십자가 지신 분이 하늘나라 가서 주니까. 그러면 십자가 지신 분의 일은 하늘나라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죄인으로서 합류된 땅의 일이잖아요. ‘땅의 일을 보고 하늘나라 가거라.‘ 그런 뜻 이예요.

그 다음에 나온 이야기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뭘 주셨으니? 독생자를 주셨으니. 거기서 뭐가 빠집니까? 성령이 완전히 빠져버리죠. 성령부터 이야기해놓고 점점 더 이야기 과제를 성령 이야기해놓고 성령 없이는 천국 못 간다. 이야기해놓고 화제를 점점 더 어디로 가느냐 하면 독생자 이야기로 몰아가는 이유가 그 독생자만 성사가 되면 성령은 거기서 쏙쏙 새롭게 사건 사건이 터져 나오게 돼 있어요. 성령은 사건 따라 가게 돼 있습니다. 그 사건이 계속해서 성령이 나올만한 사건이라면 성령이 나온다에 대해서는 이거는 멈출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실 사건은 뭐냐, 성령이 계속해서 나올 수 있는 사건을 일으켜야 되겠죠. 그 사건이 되려면 성령은 오직 공자도 아니고 맹자도 아니고 소크라테스도 아니고 우리 집단도 아니고 한분만 겨냥해야 돼요. 너 아니고 나 아니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한분에게만 집중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한분이 살아있는 이상 성령이 계속 그 한분에게서 나오게 돼 있어요. 만약에 예수님도 나오고 딴 데서도 나오게 되면 우리는 우리에게서도 나와야 될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내 말이 어려운 이야기에요.

성령을 받아야 구원받는다면 내가 아예 성령을 계속 만들어내면 어떨까? 이런 아이디어가 우리에게 나올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우리를 상대하지 않는다. 누굴 상대한다? 예수님을 상대한다면 우리는 성령 받고 난 뒤에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제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의 공로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나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이 전부 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는 잘나지 못했는데 예수님 때문에, 피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그걸 그리스도의 몸, 교회라고 이야기하고 성령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방금 이야기한 걸 요약하면 뭐냐 다수를 잘라버리고 다수를 뭐로 모은다? 한분으로 집약시키는 작업을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성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오직 주님입니다.’ 이러면 성령 받은 것이고, ‘너하고 나하고 단결해서 이 교회 세웠잖아.‘ 하면 성령 받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 말이죠. ’우리가 저 교회보다 큰 것은 우리교인들이 기도 많이 해서 그렇습니다.‘ 하면 이건 성령 받은 게 아니에요. 이건 육적 이예요. 자신들의 가치가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자신의 공로와 가치가 있기 때문에 성령은 그런 식으로 상대한 적이 없습니다. 성령은 모든 걸 다 육신으로 잘라버리고 오직 누구만 찾아갔습니까? 예수님에게만 찾아간 거예요. 요단강 올 때부터 성령께서 오셔서 십자가 죽고 부활할 때까지 성령께서는 오직 집중해서 예수님만 찾아간 거예요. 이 만희가 아니고 예수님만 찾아간 겁니다. 이 만희는 자기가 성령이라 하지만. 그래서 내 뒤에 오는 보혜사가 오직 예수님 것만 이야기해요. ‘예수님 것만 이야기하는 게 나다.‘ 해서 그 사람이 성령인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 건 주의해야 돼요.

그렇다면 성령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하면서 중간에 하나 걸쳐요. 뭐냐 하면 모세의 지팡이 든 이야기를 합니다. 요게 하나의 징검다리를 거쳐 갑니다. 왜냐 하면 모세가 지팡이 든 것은 구약입니다. 이거는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이야긴데 민수기 이야기를 징검다리로 해서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는 들려야 한다.“ 들려야 한다는 것은 누가 들었다는 말입니까?  들리기 전에 이미 완전히 깔아졌다는 이야깁니다. 내가 들린다는 것은 일종의 들린다는 자체가 하나의 동사처럼 사용되거든요. 동사라 하는 것은 결과나 시작점만 보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을 보게 해요.

도착했다가 아니라 나는 달려가고 있다는 것은 그 움직임 자체를 보게 하잖아요. 지금 예수님께서 여기서 십자가를 사용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십자가 졌다. 나는 부활했다. 요거 두 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개보다도 이 과정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들린다는 것은 지금 보세요. 완전히 마술사가 지금 보조 아가씨가 커튼 젖히니까 뜨잖아요. 이 들리는 이 과정을 왜 주목하라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12장 32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주님께서 땅에서 들린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들린다는 말이죠. 그럼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흙 있고 지리적인 평야나 들에서 들린다는 말이 아니고 나를 추방시킨 이 세상 임금이 다스리는 이 세상 자체로부터 들리는 거예요. 여기서 땅이란 의미는 어떤 지역을 말하는 게 아니고 지구 땅덩어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이 세상 질적으로 악한 이 동네에서 들리는 거예요. 들릴 때에 그 뒤에 보세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여기서 ‘모든’ 이라 하는 것은 숫자로 양적으로 ‘모든’을 말하는 게 아니고 어떤 직업이나 인간들이 정해놓은, 이 땅의 임금들이 정해놓은 계급이나 이런 것을 철폐하고 너희들끼리 스스로 정해놓은 어떤 한계나 구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주께서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가 이끈다 이 말이죠. 이끈다니까 이것도 들리는 것과 같은 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해주는 거죠.

그렇다면 요한복음 3장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니고데모가 뭐라고 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했죠. 그럴 때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했죠. 다시 태어날 때는 니고데모가 어떻게 오해했느냐 하면 내가 알아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야 된다고 오해하는 겁니다. 왜, 명령이니까. 사람은 명령받으면 명령의 실천의 주체자로서 자기를 반드시 내세우게 돼 있어요.

목사님이 ‘서로 사랑하세요.’ 하면 이게 뭔 뜻입니까? ‘서로 사랑합시다.’ 라고 자동적으로 나와요.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설교 할 때 우리교인들보고 서로서로 잠시 인사하라 했죠. 뭐라고 인사하라고 제가 시켰습니까? ‘나는 이제부터 당신을 개똥으로 여기겠습니다.’라고 인사하라 했죠? 왜 자꾸 교회서 ‘안녕하십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이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반대로 바꾼 거예요. ‘나는 당신을 사람 취급 안 합니다. 나는 당신을 없는 존재로 보겠습니다.’라고 막상 해봐라 말이죠. 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시원한 말인지. 평소에 그걸 안 하고 있다가 하게 되면 너무나 속이 시원해요. 왜, 그게 사랑이니까.

사랑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사랑 이예요. 그리고 사랑은 반드시 표현해야 돼요.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괴로움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안 보고 사랑하란 말은 제발 네 자신을 미워하라는 겁니다. 자기가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남을 사랑할 여지가 내 속에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왜 자기가 너무 예뻐서. 자기가 너무 좋기 때문에 나 말고 달리 남 사람 사랑한다는 그런 데까지 신경 쓸 에너지가 오지 않아요.

그러나 자기가 자기한테 너무나 실망스러울 때는 아무나 사랑하게 됩니다. 지금 니고데모에게 문제는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온다.” 하니까 다시 태어나는 방법을 자기 쪽에서 끄집어내고자 지금 아이디어를 제공해요. “제가 모태에 갔다가 다시 가겠습니다.” 자꾸 아이디어를 내가 어떻게 실천에 옮기는 나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는 방식, 자꾸 이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방금 지금까지 두 번째 시간 이야기해보니까 뭡니까? “내가 너희를 땅에서 들리게 하리라“가 되죠. 뭐로 바뀌었습니까? 결국 정리해 봅시다. 성령이 온다는 것은 육적으로서는 내가 나한테 어떤 행위를 가해서 나로 인하여 내가 들리는 방식이 육이라면, 성령은 내가 성령 받아서 성령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성령은 일방적으로 나만 챙기는 나를 강제로 들리게 하는 조치의 관계가 곧 성령의 일입니다. 이게 신약에서 성령의 일 이예요. 왜, 아까 요한복음 12장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목사님, 혹시 이게 신약 이야긴데 구약 때 그런 비슷한 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게 놋 뱀을 드는 거예요. 아까 징검다리 했죠? 구약을 징검다리 삼아서 신약에 있는 완전히 종결된 내용, 진리를 구약에서는 맛만 보여주는 거예요. 모세가 놋 뱀을 듭니다. 그 이야기해봅시다. 놋 뱀 드는 게 이제 풀리네요.

놋 뱀이 왜 들려야 되는가? 모세 놋 뱀 들기, 그리고 예수님이 들리기. 둘 다 뭔가 아래쪽에 있었는데 그게 위쪽으로 위치가 옮겨졌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죠. 모세가 놋 뱀 들기 전에 먼저 모세가 들었던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자 물어보겠습니다. 그럼 지팡이가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까? 모세가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까? 출애굽기 본 사람은 다 알아요. 이거는 모세가 지팡이를 분명히 잡지만 사실은 지팡이가 모세를 붙들고 있었던 거예요. 지팡이를 던지니까 뭐가 됐다? 뱀이 되었다. 다시 잡으니까 지팡이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모든 계획이 지팡이 속에 있는 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일제 때 이야깁니다. 조선의 큰 부자가 있는데 사람들이 부자인 줄 아는데 돈을 어디에 감추는지 알 수가 없었던 거예요. 하루는 그 부자가 차를 타는데 지팡이를 들고 타는 거예요. 노인이 지팡이를 드는 건 맞거든요. 그런데 ‘저 노인이 현찰이 많다는데 도대체 어디 있지?’ 하는데 화장실을 가는데 지팡이를 들고 가는 거예요. 화장실에 왜 지팡이를 들고 갑니까? 들고 갈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도둑놈이 지팡이를 훔쳐서 뜯어보니까 그 안에 돈을 말아서 넣었던 겁니다.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이야긴데 믿거나 말거나.

모세 지팡이 안에 뭐가 들어 있어요. 그것은 뭐냐, 뱀을 잡는 겁니다. 자기는 지팡이인 줄 알았는데 뱀인 줄 몰랐죠. 그 뱀을 잡는 그 결과로 말미암아 뱀으로 드러나게 되면 성공인데, 애굽이 이사야에 보면 뱀이라 했거든요. 그 지팡이 잡았던 손을 모세가 품속에 집어넣으니까 졸지에 뭐가 됐습니까? 문둥병이 된 거예요. 그러면 지팡이는 뱀이고 모세 손은 자기가 보기에는 멀쩡한 손이지만 품속에 들어가게 되면 몸 전체가 사실은 저주받은 문둥병이란 말이죠.

그런데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 일을 마무리 지으면 다시 들어갔다가 다시 손을 빼면 이게 멀쩡하게 되고 저 뱀은 쥐면 다시 지팡이가 되는 거예요. 지팡이가 뱀 되고 문둥병이 멀쩡하게 되는 그 과정을 겪음으로 말미암아 이번 일은 모세가 진두지휘하는 일이 아니고 오히려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모세와 더불어 함께 일하고 그냥 모세는 시키는 대로만 할 따름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 그 모습 이예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세요. 시력 안 좋아요? 주께서 시킨 거예요. 맡은 배역이 그 배역 이예요. 눈이 안 좋은 역할을 맡은 거예요. 일종의 지팡이라고 보면 돼요.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그랬죠? 집사님 머리 빠지는 것 고민하는데 맡은 역할이 그거거든요. 호르몬 때문에 맡은 역할이 그 역할 이예요. 머리가 허옇잖아요. 맡은 역할이 그래요. 다시 말해서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다? 나한테 있지 않다는 것을 주되심 이에요. 그리스도는 나의 주인 되십니다. 나는 종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네가 지려고 하지 마라. 내 인생 내가 책임지면 그건 신앙이 없는 사람 이예요. 우리 인생 자기가 책임지지 마세요. 막 사시되 책임지지 마세요. 오늘 이상하게 복음이 자꾸 나오네. 왜, 우리는 어차피 존재한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줘요. 화장실 하나밖에 없는 집에서 식구 일곱 명 같으면 아침 되면 서로가 피해를 줘요. ‘빨리 나온나, 오빠.’ 난리가 나요.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직장에서 짜증을 부리면 그 화풀이를 누구한테 합니까? 멀쩡한 식구들이나 애보고 하죠. 내가 바로 남들이나 애한테 무슨 죄가 있어 피해를 줘요? 그래서 인간은 의인 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피해 주게 돼 있어요. 그걸 인정해야 돼요. 별 미안스러울 것도 없어요. 원래 인생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제가 한 책임지지 말라는 말은 사람 물에 빠져도 도망가라는 말이 정당화 될 수가 있어요. 유 병언이처럼 그럴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거와는 다른 이야깁니다. 그런 사람은 큰일 납니다. 본인이 본인 인생을 책임지게 되면 이게 우울증 걸립니다. 정신병 걸려요. 왜냐 하면 책임지겠다는 말은 내가 생각한 나다운 것은 나는 포기 못하겠다는 고집을 의미하거든요. ‘나는 이런 인간 될 때 스스로 만족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인간이 못 됐으니까 주님은 눈 질끔 감으시고 내 하는 고집대로 가만 계세요. 내가 이정도 해서 괜찮은 사람 될 때 그때 하나님 만나겠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술 끊고 담배 끊고 주님 만나겠습니다. 교회 나오겠습니다.‘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책임지지 말라는 거예요.

제가 책임지지 말라는 것은 남의 아픔을 모르는 체 하라는 말이 아니고 책임을 지고 싶어도 못 지니까 오히려 그것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더욱 더 아픔을 주겠느냐, 그 아픔을 우리가 근원적으로 이해하라는 이야깁니다. 순천서 도망치지 말고 지금 아픔을 빨리 나와서 ‘제가 물에 빠뜨렸습니다.’ 하고 나오란 말이죠. 책임진다는 말은 여러분, 없는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어요. 이미 빠져 죽은 애를 살릴 수는 없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책임지지 못해요. 하지만 피해 입힌 것에 대해서 더욱 더 책임 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더욱 더 우리가 안타깝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식구 일곱 명이 있는데 혼자 화장실에 있으면서 30분 동안 책 보고 그러지는 말라 이 말입니다. 아버지가 설사가 났는데 자기 혼자 샤워한다고 머리감고 30분 샤워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지는 말라는 말이죠. 그만큼 남의 아픔을 이해하면서 거기에 대한 책임은 내 고난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시집 간 사람들이 내가 남편한테 봉사해서 남편을 인간 만든다 하는데 제가 살아본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잘해준다고 달라지지 않고 잘해주면 이용해 먹지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긴급한 순간에 본색 다 튀어나와요. 그러니까 애초부터 ‘저 인간 내가 인간 만들겠다.’고 책임질 필요 없어요. 더구나 자식은. 자식은 태어난 지 6개월도 안 돼서 부모 이용하는 게 자식입니다.

모세 지팡이를 다시 해봅시다. 모세 지팡이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갖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그 당시 대중들은 지팡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보세요. 모세의 지팡이를 의지하는 거예요. 그 당시 백성들은 모세만 쳐다보고 있죠. 그러면 누가 욕 얻어먹습니까? 모세는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 이예요. 아말렉 군대 왔을 때 모세가 산 위에서 뭘 들었죠? 지팡이 들으니까 승리하고 내려오니까 패배했잖아요. 백성들이 이것 보고 정신 좀 차려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 지나도 누구보고 원망합니까? 모세보고 원망한 거예요. 모세는 그냥 경리 직원인데 직원이 돈 다 떼먹고 도망가면 경리직원한테 돈이 나옵니까? ‘아니 주인이 따로 있는데 왜 나보고 이야기해?’ ‘너는 왜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렇게 악해?’ ‘왜 그걸 나보고 이야기해? 나는 직원인데. 나도 내 인생 내 맘대로 못하는데 왜 그걸 나보고 이야기해?’ 그런 말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지금 예수님과 교류하고 있는 사람 이예요. ‘아유, 그래요? 내가 예수 믿는 사람답지 못했죠?’ 이러면 그 사람한테 주인이 없어요. 자기가 주인이고 주님은 그냥 모델케이스에 불과합니다. ‘주님 가만히 계세요. 제가 알아서 예수님처럼 닮을 테니까.’ 이거는 도 닦는 겁니다. 그거는 신앙이 아니고 종교 취미생활하고 있는 사람 이예요.

다시 정리합시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을 때 백성들은 모세를 공격합니다. 그러면 모세는 선지자로서 자연적으로 핍박을 받죠.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당신은 믿을 인간이다? 못 믿을 인간이다? 절대로 믿을 수 없다 이 말이죠. 왜, 난 당신 쳐다보는데  당신은 우리를 실망케 하고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몰아가는 거예요. 그런 가운데 모세가 놋 뱀을 들었습니다. 쳐다보겠습니까? 안 쳐다보겠습니까? 안 쳐다보죠. 지팡이 든 손으로 놋 뱀을 들은 거예요. 지팡이 들고 와서 사람들이 10번이나 시험하고 10번이나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원망해 댑니다.

드디어 불 뱀이 등장했어요. 이 불 뱀을 통솔하고 지휘하는 체계는 지팡이를 쥐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지금 뭘 설명하려하느냐 하면 징검다리라 했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판은 무슨 판이냐 하면 바로 죄가 있는 세상이죠. 죄가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죄가 있는 세상에서 만든 재판장에 예수님께서 자신해서 올라섰습니다.

아까 유튜브 동영상 찍을 때 욥과 예수님의 차이점이 뭐라 했던가요? 욥이 난데없이 어려움이 처했을 때는 ‘주여, 저 잘못 찍을 거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벌 받을 입장이 안 되는데요.’ 이러는 반면에 예수님은 의인이면서도 죄인의 자리에 자진해서 올라가 서버렸어요. 그게 예수님과 모든 인간의 차이점입니다. 우리는 손톱에 가시만 있어도 ‘주여,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뭐 헌금을 적게 했습니까?’ 이렇게 나오는데, 주님은 아무 죄도 짓지 않은 분이 죄인이 서는 자리에 알아서 서버린 거예요. 그게 제가 수요일 날 복음이라 했죠. 교회 수십 년 다녀도 이 복음을 몰라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게 복음인 줄 알아요. 아니에요. 우리는 내빼기 바쁘고 도망치기 바쁘고 우리는 내 몸만 챙기고 내 몸에 조금이라고 손해 오면 그야말로 항의하고 시위하고 데모하고 난리 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올랐다는 말은 그만큼 이 세상이 악하다는 뜻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몽둥이 들고 때리면서 오시는 게 아니고 반대로 너희들의 죄를 몽땅 다 노출시키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역할, 산성인지 알칼리성인지 집어넣으면 색깔이 변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자기를 시험지로 내놓는 것처럼 너희들 스스로는 우리가 어느 정도로 악한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악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길은 모세가 한 조치, 놋 뱀을 쳐다보면 살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뭐냐 하면 우리는 원래 자기가 잘났기 때문에 주께서 살려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교회 나와서 십일조 내고 주일마다 잘 했기 때문에 내 애한테 병이 안 생겨야 되고 우리 애 좋은 대학 가야 되고 우리 남편 사업 잘 돼야 되고 마땅히 그래야 우리 둘 사이는 좋은 관계 유지 된다고 우리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는 인간은 교회 다닌다고 십자가는 눈에 안 보여요. 자기가 한 만큼 보상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30배, 60배, 100배 내놓으라는 거예요. 아까운 돈 내놨으니까 십일조, 쌓을 곳이 없다 했으니까 내놓으라는 거예요. 쌓을 곳이 없다 해도 망한 사람 있습니다. 창고 지어놓고 ‘내 영혼이 이제는 평생 잘 먹고 잘산다.’ 했는데 오늘밤 내 영혼 데려간 사람 있습니다.

말씀을 보약 다리면 십자가가 나오지, 부자 되는 게 아닙니다. 모든 말씀을 엑기스로 짜보니까 십자가 피가 나오지, 부자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어느 인간도 십자가 질 인간 없고 어느 인간도 주님의 쓴 잔을 마시고자 나설 인간 없습니다. 이게 없게 돼 있어요. 누구 나서면 안 돼요. 원래 없다는 걸 알아야지, ‘그럼 내가 나서볼까?’ 이러면 안 돼요.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종이 아니에요. 없으면 없는 거예요. 없어서 제발 주님만 좀 보이도록 해주지, 앞에서 얼쩡거리면 안 돼요.

여러분, 예수님.. 아무도 없죠?‘ 하면 ’저요.‘ 이렇게 나오면 안 돼요. 비켜요. 주님만 쳐다봐야 돼요. 주님만! 이 세상 놋 뱀 봅시다. 놋 뱀을 사람들은 자기가 살 가치가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이 땅은 어떤 땅이냐 하면 아무도 살 수가 없는 땅을 일부러 보낸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살아온 건 뭐냐, 모세가 동행했기 때문에 살아온 거예요. 줄기차게 모세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은총을 그들은 느껴져야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애굽으로 돌아가게 되면 누가 빠지느냐 하면 모세가 괜히 온 게 돼요. 모세가 온 것은 애굽의 불의한 접근을 뒤엎어버리고 히브리사람들로 하여금 모세가 애굽의 왕이 되어서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증거를 쥐는 이런 정치적인 찬탈의 목적 때문에 모세가 온 게 아니고 간단해요. 나오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출애굽 할 때 한국의 부흥사들은 출애굽의 내용을 언제 써먹는지 알아요? 언젠가는 일제 압박에서 해방되어서 우리도 독립국이 된다. 여기에 출애굽을 연결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해석이 맞는 해석입니까?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어느 나라든지 구원받아야지, 일본에서 벗어나 한국 독립국가 되는 게 그게 구원입니까? 안중근 의사가 뭣 때문에 총 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총 쐈어요?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서 총 쐈습니까? 유관순이 왜 설쳤는데요? 고등학생이.

광야라는 것이 원래 못 살았던 곳 이예요. 못 사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했는데 보통 하나님이 인도하게 되면 항상 물이 넘치고 없던 샘도 터지고 양식도 생겨야 되는데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인도한 것이 어디였습니까?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했고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해요. 그게 뭘 유도하기 위해서였습니까? 하나님 믿다가는 굶어죽겠다. 그게 바로 네 본심이라는 거예요. 네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본심이 그거예요. 우리가 교회 나와서 예수 믿어야 될 이유가 우리는 주님 사랑, 예수님 관심 없어요. 내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그걸 숨기면서 하나님에게 잘 보이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나에게 행운이 주어질 줄 아는 거예요. 사업하는 사람들 자금 문제 때문에 행운 한번 떨어져야 돼. 그래야 해결되지. 갑자기 누가 자금 확 대주든지 해야 하는데. 우리는 내가 죽지 않고 버티는데 필요한 행운들을 얻기 위해서 ‘주여, 복 받는 방법이 뭐냐.’고 목사들에게 닦달내고 ‘시키는 대로 다할 테니까 복만 챙기게 하옵소서.‘ 하면 목사는 그걸 잘 왔다는 식으로 ’당신이 못 얻는 것은 어린애 같은 무조건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해버리면 미친 듯이 교회 충성 봉사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봉사하잖아요. 왜, 어린애 같은 믿음 보여서 기어이 따내겠다고. 둘 다 똑같은 인간,  둘 다 말려든 거예요.

우리가 사는 이것은 불 뱀이 원래 주인공 이예요. 불 뱀을 그때, 그때 제거해 주고 살아왔는데 그들은 모세를 없는 시절, 애굽으로 돌아가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구원할 때 그들의 지혜와 그들의 착실함 이걸 보고 구원한 게 아니에요. 뭘 제거했느냐 하면 인간들의 능력을 다 제거하고 오직 주께서 너희에게 심판을 보낸 그 심판이 사실은 구원의 유일한 통로가 바로 심판을 경유해야 구원된다는 이 비밀을 보여주기 위해서 심판으로 왔던 놋 뱀을 들은 거예요. ‘우리는 이런 뱀에 물려 죽어야 마땅합니다.’라고 한 자만 쳐다보라 이 말입니다.

십자가 쳐다보면 구원받는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뭔 줄 몰라서 하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린 강도 있잖아요? ‘제가 그 강도입니다. 그 강도의 자리가 제 자리입니다.’라고 할 때만 비로소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가는 거예요. 왜냐, 십자가 졌던 그 예수님은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게 아니고 우리 허락도 없이 우리 죄를 그냥 가져갔어요. 우리 죄 대신, 내 대신 받는 형벌이 주님 십자가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를 나한테 가져온다는 말은 ’제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왜 이 세상에서 살려고 했던가요?‘ 바로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하나님 있는 세상보다 더 선호하고 더 좋아한 내 본색 때문에 ’예수님 꺼져버려라. 하나님 필요 없다.‘ 다급할 때나 찾고 편할 때는 예수님을 버려버리는 그 속성이 까발려 질 때 그게 구원의 개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건화에서 까발려지는 거예요. 이걸 알아서 고백한다고 하나님이 봐주는 거 없습니다. ’너 고백하지 말고 내가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할 때까지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그러면 자연적으로 우리는 ’나는 내가 주님 믿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 소리 나올 거예요. 그게 구원의 시작 이예요. 그게 우리의 나도 미처 발견 못했던 내 본 모습이 바로 그겁니다.

평소에는 어떠냐? 평소에는 나의 찬란한 역사를 항상 간직하기 위해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존심, 침해 걸려도 없어지지 않는 게 뭐냐 하면 유일한 자존심입니다. 이건 내가 요즘 실감하고 있어요. 침해 걸려도 끝까지 포기 못하는 것은 자기 자존심 이예요. 집에 쌀 떨어졌다고 산에 올라가서 자살을 시도하시는 분이 어머니인데 평소에 제 아내가 반찬 해서 주면 ‘얘들아, 이건 너희나 먹지 뭐 하러 가져오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럼 그런 멘트 왜 날리는지 알아요? 그건 뭐냐 하면 내가 너희한테 얻어먹는다고 내가 어른이 아닌 게 아니다. 그런 뜻 이예요. 내가 해석을 과도하게 한 게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나는 이렇게 비참하게 얻어먹지만 내가 어른 도리는 한 거야. 너희 알지?‘ 이런 뜻 이예요. 그 어른다움의 면모, 도대체 그게 아무 짝에도 소용없거든요. 그걸 끝까지 지탱하는 거예요. ’그저 고맙다.‘ 하면 될 문제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맙다는 소리를 하니까 내가 얼마나 착하냐.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평소에 고맙다 소리를 하지 않느냐? 내가 밥 해주니까 고맙다 소리를 한 순간부터 주인이 바뀌기 때문에. 자식이 내 주인이 되고 나는 부모지만 내가 종이 된다는 그 자존심은 차라리 죽기 보다는 싫은 거예요. 집에 쌀 떨어지면 쌀 사 달라 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쌀 없는 집구석에 못 산다 해서 산에 올라가서 드러누워 버린 거예요. 이 모습이 어쩌면 우리가 침해 걸리지 않은 현재 모습이 이 모습 이예요.

월드컵에 왜 열성 합니까? 우리들 자존심이 걸려있으니까.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걸려있거든요. 결국 우리는 천국 안 좋습니다. 대한민국이 더 좋아. 우리는 대한민국을 위한 대한민국에 의한 국민 이예요. 그것이 우리는 그게 우선적이고 다급하고 시급한 거예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고 지금은 대한민국, 내 자리, 내 영역, 이곳에서 100번 태어나도 하늘나라 모릅니다.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 제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구멍을 뚫어야 되죠. 그 구멍을 뚫는 방법이 뭐냐? 불 뱀을 보낸 겁니다. 불 뱀을 보내서 네 주제 파악을 하고 그 불 뱀을 보냈다는 자체가 신호가 돼서 불 뱀을 보내시고 그 다음에 뭐 보내고? 놋 뱀을 보내고.

 그래서 제가 주일 날 오후에 이야기했잖아요. 치료제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병이 생기게 하는 거예요. 치료제가 얼마나 대단한가, 효과를 맘껏 발휘하기 위해서 온갖 병이 걸리게 하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하는 겁니다. 죄 짓게 해놓고 간음하게 해놓고 현장에서 간음하게 해놓고 주님께서 십자가 져버리고. 문둥병 걸리게 해놓고 십자가 져버리고. 죽은 자도 살아나고 죄진 자도 용서받고.

그 사태가 모세가 놋 뱀을 드는 겁니다. 다 봤겠습니까? 놋 뱀을 안 쳐다봤겠습니까? 쳐다 본 사람만 살았다는 말은 다는 아니죠.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주목해야 됩니까? 본 사람 주목하지 말고 보지 않은 사람을 주목해야 되겠죠. 왜, 그게 우리니까. 마지막 자존심이 있으니까. ‘주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기보다는 내가 착하다는 칭찬받고 싶습니다.’ 쪽을 항상 선호하게 돼 있는 우리의 심보, 그렇다면 십자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목사의 지시가 반갑습니다. ‘시키면 하겠습니다. 약속대로 부자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 우리는 이런 거래가 맘에 쏙 들어요. 내 행한 대로 복 받는 걸 원하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공짜로 영생 얻어버리면 나의 잘남이 있을 자리가 없잖아요.

이런 이야기가 일반 교인들은 잘 듣는데 목사들, 교수들은 안 들어요. 신학교수들한테 강의 발표해보면 그 완악함은 하늘을 찌릅니다. 그래서 신학교수들한테 제가 발표할 때 그랬어요. 속으로 ‘당신은 아마추어들이야.’ 오죽 믿음이 없으면 유학 가겠나. 믿음 있으면 개척교회하지 유학을 왜 가겠습니까? 뭐 따려고? 학위 따려고 간 거예요. 열심히 학문한 사람들 대학에서 진급을 못 합니다. 꼭 제자들 논문 붙여서 해야 그 나머지 정치해야 높은 자리 올라가는 거예요. 세상이 다 그래요. 승진도 마찬가지로 다 그래요. 충실한 사람은 승진 안 되고 꼭 자기 할 일 남한테 이용해먹고 자기는 승진하고, 특히 공직사회에서 그런 일 많이 있어요.

그럼에도 우리는 제가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악한 목자한테 양이 잡힌다고 이야기했죠. 문제는 양이 없다는 겁니다. 왜 양이 없는가? 전부 다 목자를 노려요. 목자가 양을 잡으니까 잡혀먹은 양들이 ‘주께서 오시겠지?’를 기다리는 게 아니고 언젠가 나도 힘을 길러서 ‘나도 남 못 잡아먹는 줄 알아? 나도 목자 되어서 양 잡아먹을 거야.’라는 목표로 하기 때문에 양이 없어요. 잠재적 목자들밖에 없어요.

저한테 질문하기를 ‘목사님은 여자 목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질문을 저한테 여러 번 한 적이 있어요.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그 더러운 짓을 왜 하려고 하는데?’ 저한테 어떤 여자 분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어떻게 하면 사찰집사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 같으면 내가 이해를 하겠는데 그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목사 안수 받아서 목사 됩니까?’라고 하는 질문 자체가 이건 목사가 목표로 돼 있죠? 목사가 왜 목표가 될까요? 그게 얼마나 수상한 생각입니까? 목사가 섬기는 거잖아요. 왜 더 심하게 섬기려 하죠? 그러니까 이미 목사가 결국은 이건 지도자급, 남을 내려다보는 자리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남자가 독차지하니까 여자라고 해서 그 자리 못 갖느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질문 자체부터 수상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저~ 낮은 곳을, 십자가를 졌는데 예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사람들은 전부 다 높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 겁니다. 국무총리까지 예수 이름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거는 구원의 정 반대 방향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구원의 방향은 십자가가 보이는 방향입니다. 십자가가 보이려면 우리는 개 똥 돼야 돼요. 우리는 완전히 인간 취급도 하지 말아야 돼요. 우리는 불 뱀 물려 죽어 봐야 정신 차리지. 우리는 불 뱀 물려 죽어도 마땅한 자리가 될 때 비로소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막 살고 있는 사람인 것을 자인해야 돼요. 스스로 인정해줘야 됩니다. 제가 왜 막 살아야 된다는 이유를 이제야 아시겠죠. 이 이야기 벌써 두 시간이 됐는데, 막 살아야 되는 이유가. 십자가 때문에!

자, 그 다음에 봅시다. 땅의 일은 바로 놋 뱀을 들었다. 참 놋 뱀을 볼 때 놋 뱀과 자기를 연관시키면서 보죠. 그 놋 뱀을 쳐다보면서 무슨 생각했을까요? 저 뱀이 나를 물었다. 그런데 그 뱀은 누가 보냈다? 저 뱀을 보내신 분이 바로 우리를 살리신 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짐으로써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졸지에 완벽한 죄인 됐죠. 우리를 완벽한 죄인으로 만드신 그분이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우리에게 알게 해주신 분입니다.

복습합시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십자가란 것이 세 번 졌습니까? 네 번 졌습니까? 지신 분이 누구죠? 오직 한 분이죠. 숫자로 치면 1, 영어로 one, 한 분뿐이죠. 1 말고 다른 사람은 전부 다 다수가 되겠죠. 그러면 다수가 1만 쳐다본다면 요 A와 B 이 사람들끼리 쳐다보는 것은 뭐를 쳐다봅니까? 서로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게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다 ‘너도 불 뱀 물렸어요?’ ‘나도 불 뱀 물렸어요.’ 불 뱀 물린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살기는 놋 뱀 쳐다봐서 다 살았기 때문에 너나 내나 다 같은 입장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자랑거리는 뭡니까?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죠. 이걸 가지고 결과적으로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누가 만듭니까? 이런 심판의 사건을 반복시키는 주님에 의해서 교회 만드는데 교회 당회장이고 교회 주인이 누굽니까? 사람 목사가 아니죠. 누구죠? 지금 살아계신 이런 심판의 자리를 일으킨 살아계신 주님의 교회기 때문에 교회가 잘 된다. 못 된다, 하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어요. 교회면 그 자체가 잘 된 것이지, 그 앞에다 잘 된 교회, 못 된 교회, 있다는 말 자체가 이건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대머리이면 대머리지, 이쁜 대머리, 참한 대머리, 머리 없으면 다 대머리거든요. 머리 빠지면 대머리지, 대머리인데 이쁜 대머리다. 그런 거 없어요. 머리카락 없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의인 없기는 마찬가지고 우리가 잘 난 거 없기는 마찬가지라면 그것을 누가 덮습니까? 주님에 의해서 덮어졌다면 주님만 자랑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네 교회 어느 교회 관계없이 그 전체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교회가 됩니다. 성경에서 교회가 있는데 왜 교회가 실패 했니, 교회가 성공한 교회니, 왜 교회 앞에 성공, 실패가 왜 붙습니까?

제가 지난 화요일 날 부산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성도한테는 실패란 게 없다 했죠? 딴 거 생각하니까 실패한 게 생각나는데 성도한테는 실패가 없습니다. 맡은 역할이 그 역할이기 때문에. 모두 다 주인공 할 수 없잖아요. 모든 사람이 다 김.. 변호사 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사람 죽이고 재벌이 되는 그런 나쁜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 말이죠. 역할들이 다 달라요. 하지만 그 역할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역할이든 간에 예수님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한결같아요. 이게 전부 다 이미 한 몸이 된 교회입니다.

어느 교회 다니면 좋겠습니까? 저도 이쁘장한 고딕체 건물에다, 고딕체 건물이란 말은 집세 안 나간다 그런 뜻이거든요. 집세 안 내고 기존에 교인 몇 백 명 모여서 목사 생활비 정도, 사택 정도는 미리 준비하고 뒤늦게 와서 푼돈이나 내면서 천당 갈 수 있는 그런 교회 있으면 저도 교회 소개시켜 드릴 수 있는데 주님이 그런 교회는 전부 이상한 교회고 아직은 그럴 수 없네요. 주께서 때가 되면 또 어떻게 하실지, 다만 제가 하는 말은 큰 문제는 아니다.

자, 그 다음에 봅시다. 14절 보고 제가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아까 설명했죠. 모든 말씀은 누구만 독점한다? 예수님이 독점했다. “인자 외에는” 아까 처음에 했죠. 외, 외. 오늘 강의 제목을 ‘외’라고 해버릴까? 참외는 아닌데. 외, 율법 외의 한 의거든요. 네가 너한테 손 떼면 네가 구원받는다. 그 뜻 이예요. 네가 네 구원에 손 떼라는 거예요. 믿는 행위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믿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게 믿음이란 말이죠. 믿는 행위를 해버리면 믿는 나를 자랑하기 때문에. ‘살아온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이러면 돼요. 천국 가는 것도 주의 은혜고.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따라서 모세를 예수님 자신과 연결시켜 버리죠. “저를 믿는 자마다” 그 다음에 뭡니까? “영생을 얻는다” 영생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영생이 뭐냐 하는 겁니다. ①번, 오래 사는 것이다. 사람이 오래 살면 죽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오래 살면 지겨워서 못 살아요. 노인네들 하루 종일 집에서 노인정에 갔다가 돌아다니다가… 차라리 죽는 낫지 못 삽니다. 오래 사는 건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은 뭐냐 하면 나한테 없는 생명을 영생이라 합니다. 현재 우리한테 없는 생명, 인간에게 없는 생명.

그러면 누구 생명이냐? 예수님의 생명이 영생 이예요. 그러면 영생이 뭐가 되겠느냐, 영생하려면, 영생을 탁 깨보면 아버지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용서하심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는 말은 내가 하지도 않은, 주님 혼자 하신, 주님의 공로로 얻은 그것이 난데없이 데굴데굴 굴러서 나한테 온 거예요. 골목을 가는데 애들이 공을 차다가 공이 데굴데굴 굴러서 내 발 앞에 왔을 때 요거 영생입니다. 공도 내 공 아니요, 놀이도 내 놀이가 아니고 천국에서 창세전에 놀이하던 축구공이 굴러서 나한테 온 거예요.

그것이 내 맘 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게 영생입니다. 그걸 성령이라 하거든요. 영생에 대해서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너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한다.” 이게 영생이거든요. 영생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함께 하나가 되어서 계속 사느냐가 영생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 채 사는 거.

문제는 우리는 내 자식하고 살기를 원하지 주님과 살기를 원치 않고 있다는 게 문제가 돼요. 우리는 나한테 잘 해주고 나 잘 사주는 우리 남편과 살기를 원하지 남편 사이에 예수님 끼어들면 우리는 부담이 돼요. 왜, 너무나 거룩하고 우리는 너무 초라하니까. 내 자랑거리가 티가 나지 않는 거예요. 내 잘남이,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게 안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내 잘남을 뭐로 바꿔요? 못남으로 바꾸어주면서 이 바꾸어주는 자체가 이미 네가 싫든 좋든 너와 함께 살 남편이 너와 함께 기거하고 있음을 그런 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표현시키는 겁니다.

사랑은 뭐라고요? 표현하는 것이죠.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사람이 짝사랑해서 완전히 밥도 안 먹히고 이럽니다. 짝사랑하면 무서워요. 병(약?)도 없어요. 사랑은 표현해야 돼요. 잘한다고 이야기해야 되고, 말 안 해도 알지, 그러면 안 되고, 표현해야 되고 서로 껴안고 표현해야 돼요.

주님의 표현이 뭐냐, 우리를 줘 패는 겁니다. 패도 너는 내 사랑이라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생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꿈같은 이야기, 참 우리한테 해당되지도 않는 이야기인데 영생 준다고 하니까 받겠습니다. 그 대신 십자가 앞에서 받을 자격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