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디모데전서 2:8 / 자리 / 140411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디모데전서

디모데전서 2:8 / 자리 / 140411

정인순 2014. 4. 12. 10:21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김창길

서울 의존교회140411a (자리)―이 근호 목사

오늘 디모데전서 2장 5절, 중보자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신약의서 중보자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경향이 구약을 깡그리 다 잊는 경향이 있어요. 구약이 대단하잖아요. 홍해 갈라지고 여호수아가 싸우고 또 이사야가 예언하는 여러 가지 구약의 정경들이 있는데 그런 것은 과거 이야기이니까 하고 그냥 제겨버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계시니까 그 대목에서 제가 믿을게요! 하고 손들고 나가서 중보자를 믿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고생했던 그 의의, 취지가 날아가 버려요.

괜히 고생시켰어요.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을 괜히 고생시켰어요. 간편하게 ‘중보자 있습니다.’ ‘예’ ‘믿으세요!’ ‘예, 믿습니다.’ ‘됐습니다. 합격’간단하게 끝날 문제를 왜 그 긴긴 역사를 그렇게 하는 겁니까? 제가 어릴 때 촌에서 그때는 국화빵이었어요. 붕어빵 없었어요. 국화빵을 구운 적이 있습니다. 국화빵을 사먹을 때는 돈만 내고 몇 개 사먹으면 되는데 친척집에서 방학을 맞아서 제가 국화빵을 만들겠다고 선뜻 나서니까 그 밀가루 반죽에다가 앙꼬에다가 불 조절에다가 그 회전판 돌리는 것도 요령이 있어야 되고 앙꼬도 딱딱 맞혀서 넣어야하고 어떤 때는 너무 많이 들어가고 어떤 때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고 완전 복불복처럼 그런 식으로 했다 이 말이죠.

돈 주고 사먹으면 되는데 제가 왜 국화빵을 직접 만들어야 되겠어요? 그게 바로 사람들이 교회 와서 뭐 믿으면 돼요? 중보자, 믿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정태호씨하면……. 안녕히 계세요! 하고 집에 가면 구원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돈 주고 국화빵을 사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고 네 속에 만드는 작업에 참여시키는데 우리는 아주 손쉽게 구입하고자 하는 그런 형국으로 가지요.

삼성전자에서 티브이 만들면 돈 주고 사면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막상 삼성전자에 입사해서 티브이 만들고 반도체 다 만들려고 하면 그들은 근무시간이 길어지죠. 힘들고 잔소리 듣고 관섭 받고 거기다가 제대로 티브이 안 나오고 수신이 안잡히면 그들은 엉터리 기술자야 하면서 쫓겨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삼성전자에 입사해서 자기가 실력이 없고 컴퓨터나 전자제품을 만들 능력이 없음을 확인받고 추방당되겠죠. 그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돈 주고 구입하는 것은 쉬운데 막상 하나님이 쳐 놓은 율법이라는 망 속에서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고 있는 그런 하늘나라를 우리 손으로 이상적인 천국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부 다 실패로 끝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머리를 굴리죠. 어차피 인간이 실패해서 안 되니까 나는 완제품 그냥 돈으로 구입하겠다, 그냥 믿겠다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완제품이라는 것, 중보자,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그 완제품이라는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약 이스라엘이 했던 그 역사를 반복시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반복시키는 가운데서 국화빵을 돈 주고 사먹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허락하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천국 들어갈게요.’라고 손들고 나올 입장이나 처지에 우리 인간이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속에 함께 동참하면서 비로소 발견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15절에

딤전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제가 지금 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있고 그 중보자를 믿으면 구원받는 것으로 알고 있고 로마서 10장에서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겁니까? 여자들은 시집가서 해산을 해야 구원받는 겁니까?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구절을 여기다가 적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에 이 편지를 하나님의 계시로 받는 모든 교회에서 얼마나 걸림돌이 되고 혼선과 혼동이 일어난다는 것을 바도 바울이 알고 있잖아요.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고 고린도전서에서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그러면 십자가에서 나올 때 십자가 앞에 몇 미터 앞에 진열이 되어 있을까요? 이런 겁니다. 십자가가 있다면 고린도전서에서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온다고 했잖아요. 십자가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올 때 이 앞에 쇼윈도에 쇼케이스에 십자가 몇 미터정도에서 예수의 피가 나오고 우리는 몇 미터 접근해서 믿기만 하면 내 것으로 가져갈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방금 한 것이 말이 안되죠.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서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이 말입니다. 이 구원과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과 동일한 구원입니다. 가는 곳이 제2의 천국, 그런 게 아니거든요. 동일한 곳에 동일한 집기를 댄다면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도 맞고 여인이 해산함으로 구원받는다면 애기 낳아 오는 여자는 다 구원받네요. 그렇게 되는 겁니까? 이것이 잘 연결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히 오해가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오해할 일은 없고 어디에서 문제가 있느냐 하면 우리 쪽에서 십자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남자든 여자든 심지어 어느 소녀라 할지라도 정말 계모 밑에서 얻어맞는 소녀라 할지라도 예수 믿으면 구원받거든요. 12살 먹은 아이라도 구원받아요.

그렇다면 그 구원받는데 여자가 해산 하면 구원받는다는 이 말씀을 위치에 어디다가 집어넣어야, 어느 서랍에 어느 자리에 집어넣어야 이것과 원활하게 연결이 될 수 있느냐를 우리가 빠뜨릴 수 없는 겁니다. 산부인과 가서 산모들에게 ‘아이고 축하합니다. 뭐 낳았어요?’ ‘아이고 복숭아입니다.’ ‘아이고 구원받으셨네요!’이렇게 하게 되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을 거예요. 해산함으로 구원받으니까 해산하기 직전까지도 구원 못받고 해산하고 난뒤에 구원받는 샘이 되니까 우리가 모르는 그 무엇,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해석할 때 이해할 때 안다고 여겼지만 우리 속에서 먼저 장애물을 유발시키지 않았는가? 그 장애물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여기 중보자 개념에서 차질이 있었어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계시니 이렇게 하니까 말끔한 하늘과 말끔한 우리 인간사이에 맑끔하게 신사복을 입은 주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여기계시고 인간이 여기 있다면 하나님도 깔끔하고 우리도 아주 깔끔하고 그 앞에 주님도 아주 깔끔하고 그래서 우리가 깔끔하게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이 구약에 있는 모든 개념은 있으나 마나 된다고 언급했습니다. 중보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에스겔 1장을 봅시다.

에스겔 1장에 대해서 사람들이 언급하기를 겁내고 있습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부시 아들 나와요. 부시 아들이 누구냐 하면 에스겔이에요. 에스겔이 뭘 봤어요. 봤는데 뭘 봤느냐 하면 뭔가 번쩍번쩍하고 빛이 있고 그 빛은 불에서 나오고 구름이 있었고 구름 속에서 불이 있고 불속에서 번쩍하는 빛이 비취고 그 불 가운데 단쇠가 나타나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모양은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겔 1:4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겔 1: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겔 1:6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에스겔이 소설을 쓰면서 이렇게 요란스럽게 소설을 써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실제로 본거예요?  실제로 봤죠. 그런데 사람이 뭔가 보게 되면 일단 신기한 것 보면 기분 좋아 보이고 신나 보이죠. 너 봤어? 난 봤어, 넌 안 봤지? 나한테 꿇어! 이렇게 될 가능이 많다 이거죠.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의 신기한 계시를 보게 되면 어떤 부담이 있느냐 하면 자기 본 것을 본인이 해석과 의미를 거기서 추출해 내야 합니다.

보지만 하면 안돼요. 요셉이 꿈에서 분명히 두 꿈을 꿨죠. 그런데 그 요셉이 그 꿈에 대한 해석을 본인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본인이 몰랐습니다. 말랐는데 나중에는 알게 됐는데 그 알게 된 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그 고생의 길이 너무 길어요. 꿈을 내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 모든 말씀이 그래요. 요셉의 계시뿐만 아니고 모두 그래요. 내가 외부에 있는 대상을 파악하거나 그것을 장악해서 현미경을 들고 해석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쪽에서 요셉을 가지고 자기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 속에 일방적으로 장악해서 이것을 굴려버려요.

굴려버리면 요셉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왜 나는 남들이 가는 그 평범한 길을 못 가게 왜 이쪽으로 몰아넣습니까?’ 이렇게 돼 버려요. 그것을 흔한 말로 사명이라 해요. 사명이라 하는데 더 근원적인 말로는 소명이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소명이 나중에 사명되니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왜 저를 이렇게 합니까? 시편 105편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어요.

네가 말씀에 응할 때 까지 나는 너를 떠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선 오브 가드’라는 영화를 보고 제가 줄거리를 십자가 마을에 글을 올려놨잖아요. 그 영화 보면서 제가 깊이 감명 받은 대목이 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올 때에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성경에 없는 말인데 ‘예수님, 이제 우리 곁으로 돌아 왔군요?’ 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너희를 떠난 적이 없다!’  베드로는 모든 것이 자기 입장이에요. 자기 눈에 안 보이면 떠난 것으로 여기고 눈에 나타나면 다시 돌아온 것으로 여깁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해석할 때 그게 성경에 나온 것이 아니고 영화의 이야기에요. 베드로가 과연 주님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까요? 자기가 주님을 바라본 인식 자체가 이게 왜곡되고 엉터리라면 그 전에 있는 모든 주님에 대한 의견도 전부 다 엉터리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엉터리이기에 주께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엉터리이기에 사용하셔서 나중에 말씀이 완성되었을 때는 제 능력으로 제 실력으로 제가 보탬이 되고 기여했습니다. 하는 말을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 나는 모든 것이 틀려먹었고 모든 것이 실수와 실패였고 오류였습니다. 라는 그것으로서 모든 구원을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으로만 돌릴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을 주께서 만들어 나가시는 겁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을 간단한 도표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있는데, 성도가 이렇게 있다면 하나님께서 꿈을 주게 되면 꿈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자 시도 할 겁니다. 꿈의 의미가 뭐냐. 꿈을 내가 이루리라! 이렇게 나올 거예요. 이렇게 나올 때 꿈은 도리어 이것을 삼켜 버려요. 꿈이 둘러 쌓아버립니다. 둘러쌓아버리면서 이안에서 뭐가 나오느냐, 나의 오류와 나의 죄와 나의 실수와 나의 죄악, 이런 것들이 계속적으로 본격적으로 유발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나는 율법대로 살겠다! 라고 했던 다윗이 오히려 율법대로 살겠다는 그 다윗이 이스라엘 내에서 행하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다윗 자신이 진짜 이스라엘 속에 완전히 포위됐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나는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군요. 라고 한 거예요. 나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군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할 일이 뭐냐 하면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행위가 죄가 아니라 날 때부터 처음부터 어떤 죄인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날 때부터 울었던 거 오줌 싸는 것, 공부하는 것 모든 것이 죄인을 죄인으로 들어나게 하기 위한 어떤 재료가 된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되게 기분 나쁘게 이야기하는데 이 말이 기분 나쁜 것 자체가 수상해요. 그 말은 자기는 말씀 밖에 나가 있겠다는 뜻 밖에 안 되거든요. 이것은 다윗뿐만 아니고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말씀에 들어올 때는 말씀 안에는 십자가 있고 십자가 은혜로만 구원받기 때문에 말씀 안에 이미 들어왔을 때부터는 우리는 죄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을 하도록 말씀안에는 그렇게 장착되어 있어요. 그렇게 시스템이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우리는 기분 더럽게 생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에스겔 1장을 이야기하겠어요. 에스겔 같은 이야기가 10장에 나오는데 10장은 좀 더 자세히 되어 있어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봤는데 그때에 바퀴가 있는데 그 바퀴 안에 하나님의 신이 있어서 어떤 분이 있어서 그 네 바퀴를 돌리더라! 이래 되어 있어요. 제가 디모데전서를 하면서 갑자기 왜 에스겔 이야기를 왜 언급 하느냐 하면 중보자 이야기를 하면서 에스겔 1장과 10장에서 봤던 그 놀랍고 무섭고 두려운,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봤으면 본 것으로 끝이면 안 되고 어떤 부담을 갖고 있다? 그게 뭔지를 다른 사람에게 해석하고 해독해야 되는 부담을 느끼는 거예요.

다니엘이 봤으면 그는 해독을 해야 되는데 자기 평생을 다 허비, 소비하면서 결국은 자기 꿈의 해석은 자기가 대장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형제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 앞서서 나로 하여금 애굽에 미리 가서 가뭄 때를 대비해서 마지막 심판 때를 대비해서 나를 통해서 우리 가족이 살도록 나 하나 희생시켰다는 사실을 결국은 고백해요.  형들이여, 돌아서서 아버지 돌아가는데 복수한다고 염려하지 마세요. 복수 안 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보다 먼저 앞서 보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그 와중 속에서 그냥 하나님께 다루어 졌으며 나는 때로는 그것을 오해했고 내 팔자가 왜 이러냐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도 하고 불만도 했을 것이고 분명히 꿈을 해석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단단히 신신당부해서 나중에 바로 왕에게 가서 신하님께서는 저를 기억해 달라고 했는데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요셉이 바로 왕이 꿈을 다시 꾸니까 그때서 아하, 생각납니다. 내가 옛날 감옥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꿈 해몽을 잘합니다. 하고 이제서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꿈에 해석 대해서, 꿈대로 이루어지는데 있어서 요셉은 조금이라도 자기가 기여하거나 보탬이 된 적이 없어요. 말씀자체를 성취하는데 보탬이 된 적이 없어요. 그냥 끌려갈 뿐이지 이 말씀을 내가 한번 지켜 봐?  이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일정 대목에 있어서 구역을 자기 담당으로 지켜 본적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자리입니다. 중보자 이야기하고 여자가 해산해야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면서 이 자리 배치의 의미를 중보자 앞에서 알지 못하면 중보자도 해석이 안 되고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도 해석이 안돼요.

윷놀이 할 때 돌아가는 윷판에 그 자리가 있죠. 백도 나오면 뒤로 가야되고 먹고 하고 하는 그 자리 누가 만들었습니까? 어느 대통령이 윷놀이하다가 자기가 지니까 야, 이 윷판 내가 이기는 쪽으로 새로 만들어내! 하면 이게 돼요? 안돼요? 안 되잖아요. 그러면 윷 자체가 아니니까요. 어떤 할아버지가 축구 시합하는데 축구를 잘 몰랐는데 건장한 사람들이 공 한 개 가지고 서로 공을 뺏으려한다 말이죠. 이 어른이 하는 말이 여기 공 서너 개 줘라! 공하나 가지고 모자라는 것 같다. 공을 서너 개 가지고 축구를 하면 그게 축구가 안 되잖아요.

결국 이 말은 이미 축구 시작하기 전에 윷놀이를 하기 전에 특별한 자리 자리를 거쳐야 되고 그 자리가 중요한 제자리를 잡고 있어야 구원이 되는 거예요. 옛날에 은행에 30년 전인가 동전을 셀 때에 판이 있는데 동전을 부어서 겉은 드러내고 담겨있는 것만 한 판하고 들어내죠. 그러니까 이 판은 누가 판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판을 만들어 놨다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주도권을 쥐어야 해요? 이 자리 있잖아요. 이 자리가 주도권을 쥐어야 되는데 우리는 일단 자기 자신이 중요하니까 나를 구원하려고 너무 억지를 부려요. 억지를 부리다 보니까 이 말씀 안에 배치되고 있는 이 자리를 깡그리 무시하는 경향이 많아요. 억지를 부린다니까요.

제가 얼마 전에 봉화를 갔는데 봉화 어린이 집을 갔는데 무려 40억을 들여서 지은 거예요. 너무 잘 지었어요. 나라에서 돈 다 나오고 한 달에 5천원만 내면 되는지 그렇고 제가 원장님한테 물었어요? 원아 모집은 어떻게 합니까? 3년 전에 끝났습니다. 그 봉화에 어린 애가 태어났잖아요, 제일 먼저 하는 게 어린이 집에 3년 후에 어린이 집 갈 것을 미리 등록을 하는 거예요. 순서대로 하니까요. 그래서 그 원장 선생님이 하는 것이 압박을 많이 받는 거예요. 나는 군에 군수하고 아는 사람인데 우리 친척애인데 넣어주세요. 압력이 많이 들어온 데요. 그런데 그 원장 선생님이 일체, 그런 거 없습니다. 순서대로 합니다.

억지를 부리면서 자기애를 어린이 집에 들여 넣으려고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천국에 억지를 부리고 구원을 억지로 얻어 내려고 하는 겁니다. 일체 안 받습니다.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고 하는 그런 것이 일체 없습니다. 주께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구원이 아니고 구원 판이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개인구원은 없어요. 더불어 구원인데 이 더불어라 하는 것은 동전 판처럼 똑같이 구원받은 사람은 다 같은 입장이에요. 집단 구원입니다.

집단 구원이라면 그러면 서너 명 계 모아서 구원 될까요? 돈 모아 전세 버스 얻어 그렇게 할까요? 우리끼리 모이는 그 우리는 성립되지 않는 우리거든요. 성경에서 우리라 하는 것은 반드시 대표자가 들어갈 경우에 하나님이 지정한 사람을 집어넣고 그 분을 집어넣고 그분 중심으로 우리가 새롭게 조성되는 겁니다. 그게 중보자에요. 중보자를 집어넣어 놓고 우리가 되는 겁니다.

중보자 빼고 먼저 우리가 인간들끼리 모여서 대충 모였지? 이제 중보자 초청하자! 그렇게 중보자 초청해서 중보자와 더불어서 중보자가 안내자가 돼서 천국 간다? 그런 거 없어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것은 그들이 왕을 구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이 왕을 구했다는 것은 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면 왜 왕이 보이지 않느냐? 하나님 자체가 왕이거든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면 되지 왜 구했느냐? 하나님이 제시한 이 자리가 영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처음에 준 자리를 가지고 모세언약이라 합니다. 모세언약을 두자로 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이 조성한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누구든지 안식일에 나무하는 자거든 너희들이 알아서 돌로 쳐 죽여라 했다 말이죠. 만약에 여러분들을 구박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안식에 나무하게 되면 우리는 좋다고 쳐 죽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을 가만히 보니까 자기 딸이다. 그럴 때 자기 딸을 친 부모가 돌로 쳐 죽이겠습니까? 안 쳐 죽이겠습니까? 쳐 죽이지 않겠죠. 바로 그게 쳐 죽이느냐 안 쳐 죽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왜 하필이면 우리민족만 이렇게 난처한 관계망 속에 걸려들었느냐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 쳐 놓은 율법자체가 유리할 때는 좋은데 자기를 건드릴 때는 마음에 듭니까? 안 듭니까? 마음에 들지를 않는 거예요. 

고아나 과부를 도와주라 할 때에 고아와 과부 입장에서는 그 말씀이 좋은 말씀이 좋아 보이지만 고아와 과부가 아닌 입장에서 그 말씀은 상당히 부담되는 말씀이거든요. 왜냐 하면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면 국가에 재정이 여력이 없으면 용병이나 무기를 구입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전쟁할 때에 다른 나라에 패배할 가능성이 많아요. 항상 지도자들은 약한 자들을 희생해서 강자가 더욱더 강하게 되는 원칙을 사용해요. 나라를 경영할 때에 이방민족들이 그렇게 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만약에 율법대로 했을 때 적들이 쳐 들어왔을 때는 인간적인방법으로 그들을 물리칠 어떠한 대비가 되지를 않아요. 한번 물어봅시다. 가나안땅에 장대 같은 원주민이 있을 때에 여호수아가 그 나라를 어떻게 점령하게 되었습니까? 그 나라는 장대 같고 이쪽은 메뚜기 같은데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거든요. 어떻게 그 여리고성을 이겼습니까? 대책 없지요. 그 대책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이겼습니다. 왜냐 하면 사람은 자기한테 대책이 없을 때만 누가 보입니까? 두리번거리다가 누구를 의지 하게 돼요? 주께 믿겠나이다가 아닙니다. 답변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주여, 저 안 됩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주님만 믿으면 될것입니다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만 우리가 십자가를 오해하는 이유가 우리가 십자가 피 있으면 구원받겠다는데 그것은 피를 몰라서 그래요. 피를 한바가지 뒤집어쓰세요. 구원받는지, 피에 뭐 아미노산이 있습니까? 비타민 씨가 있어요? 

피라 하는 것은 도저히 안됩니다라는 뜻이에요.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 했잖아요. 하나는 바리새인이 했고 하나는 세리가 기도 했다 말이죠. 누가 의인되었습니까? 세리가 의인되었어요. 예수님은 그 시점에 형판이었습니다. 형판이 뭔지 아세요? 광주 토박이 판사, 그러니까 장차 심판하실 분이 미리 앞당겨서 잠시 재판을 여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의인이냐 하면 세리가 의인되어 버렸어요. 세리가 의인되고 바리새인들이 지옥가게 되었습니다.

세리가 뭐라 했습니까?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을 흠모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어떻게 이야기했어요?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어요. 그러면 죄인이라면 이 말은 나는 구원 안 받아도 괜찮아요. 이런 뜻이에요. 주여, 저 구원 안 해 줘도 괜잖을 정도로 저질입니다. 라고 자백을 했다 이 말이에요. 그게 자리에요. 그게 그 자리에 동근이 하나 들어가는 자리란 말이에요. 요셉이 내가 높은 자리에 앉아서 형들 구원해야지, 요셉한테는 그런 게 없어요. 갈수도록 점점더 희박해요. 가능성이 없어요. 꿈은 꿨지 점점 더 절망적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고 세리가 그랬고 창기가 그랬고 심지어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도 마찬가지였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어떤 자리를 구원하는데 그 자리와 우리가 관련된 것이 아니고 그 자리와 예수의 자리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하나의 촌스런 예인데 일본 도쿄에 가면 간담브이 로봇이 있다는 거예요. 제가 봤어요. 보니 있어요. 돌아온 슈퍼맨에 보니 있어요. 간담브이에 팔이 있잖아요. 간담브이 팔에 어린이가 매달릴 때 실제로는 간담브이 팔이 움직이지는 않는데 만약에 움직인다면 걔는 팔에 그냥 매달려 있을 뿐인데 로봇이 자기 집에 갈 때 걔도 따라 가겠습니까? 안 따라 가겠습니까? 따라 가겠죠. 왜냐, 연장된 몸체에 팔에 있었기 때문에 몸체 움직일 때 같이 움직이죠. 그럴 때 이 얘는 몸체를 붙든 것이 세리는 그 자리에 왔을 뿐 인데 그 죄인의 자리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 자리와 같은 몸체를 이루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그 같은 연결된 자리도 같이 주님 나라에 부활되는 거예요.

네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보세요. 개인구원이 얼마나 위험한 사고방식입니까? 개인구원은 자리의 개념이 없고 뭘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이 개념이에요. 제 쪽에서 기도를 할까요? 도를 닦을까요? 성경을 몇 독 읽을까요? 헌금 십일조를 할까요? 예배 참석을 할까요? 얼마나 착하면 됩니까? 항상 자기 쪽에서 출발해서 자기가 내 놓을 수 있는 것을 다 내놔요. 바리새인이 뭐 내놨습니까?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한다고 했죠. 글쎄요. 한번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가 한번 보세요. 바리새인이 나쁜 짓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안 했죠. 안 했는데 저 세리와 같이 아니하고 라는 이점 때문에 바리새인이 다른 자리임이 들통이 나 버린 겁니다.

바리새인이 강도짓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돌아다니면서 나쁜 짓 한 게 아닙니다. 돈 뜯고 하지 않았어요. 세리보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 했습니다. 하는 이 말 때문에 그래? 너 이야기 잘 했어! 그래 네 자리가 그 세리와 같은 자리가 아니야?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세리와 같은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너 지옥 보내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리 문제를 바리새인들이 생각을 못하고 온갖 인간 속에 장착 되었다고 여기는 흔히 말하는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 있잖아요. 의와 거룩과 공유성 속성, 신학때 배우거든요. 공유성 속성, 인간은 공통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해서 그것을 개발하라고 하잖아요. 개발하세요. 개발하면 할수록 그것은 자리와 같은 거룩을 내 놓을 수 없는 저 인간들과 나는 같지 아니 했습니다. 하는 그 자부심만 높아질 뿐입니다. 하늘까지…….

주께서 인간 구원하는 방법 멋있죠. 재판하는 방법이 아주 간단합니다. 저 칠곡 아줌마, 계모 죽여야 돼! 나는 칠곡 아줌마와 같지 아니하느니라, 그래서 자기가 칠곡 아줌마는 아닌데 나중에 지옥가 있더라, 칠곡 아줌마하고 같이요. 해산함으로 천국 간다는 이야기는 세상의 어느 종교, 어느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겁니다. 나올 수 없는데 왜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서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나왔습니까? 그것은 특수한 동전판 때문에 나왔습니다. 같은 지평이라 하는데 같은 층, 같은 마루다 이 말입니다. 거리는 떨어져 있어도 같은 마루, 찾아가보면 언제가 만나는 그 같은 마루에 뭐가 있느냐 하면 창세기 3장 사건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사건을 12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딤전 2: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딤전 2: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딤전 2: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게 언제 적 이야기입니까? 이게 창세기 2장 이야기잖아요. 언제 적 이야기를 왜 여기에 나옵니까? 시대가 벌써 수천 년 지났는데 수만년 지난 줄도 모르고 왜 창세기 2장 3장 이야기가 그 당시는 현대죠. 교회에 여인들에게 이야기하면서 거론하는 겁니까? 자리가 같은 자리 라는 거예요. 그 자리는, 인간의 자리는 과거라는 것은 흘러가면 그만입니다. 잊어버려요. 우리는 과거가 지나가면 그만 이거든요. 인간에게 과거라는 것이 사실 과거는 없어요. 과거에 대한 기억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미래, 인간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에요. 그 만큼 인간은 과거를 끌고 다닐 능력이 없어요.

과거까지 포섭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 지신 십자가 사건, 다 이루었다 할 때에 알파와 오메가 속에 과거 현재 미래 한꺼번에 다 지평을 이루어 있지 인간은 그럴 능력이 없어요. 그럴 능력도 없는 인간이 만날 저 어떻게 됩니까? 자기 개인의 구원을 자꾸 거론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물으시죠. 네가 뭘 받겠다고? 예, 구원을 받고 싶습니다. 이것은 부자 청년이 주님한테 와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거예요. 네가 구원이 뭔데? 부자 청년이 이야기했죠. 제가 어릴 때부터 율법을 지켰습니다. 영생을 주시옵소서!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으니까 영생을 달라는 거죠. 주님께서 언급해 줬어요. 네 모든 것을 팔아라! 네가 정말 영생이 귀한 것을 안다면 네가 귀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갑자기 부자 청년이 근심과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따라 갔습니까? 안 따라 갑니까? 안 따라 갔죠.

결국 안 따라 갔다는 말은 자기가 영생을 언급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언급하고 선한 선생이여 해도 선함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가기 자리에서 나온 거예요. 죄인의 자리에서 나온 엉터리 개념이었고 그 개념을 어디로 바꿔야 돼요?  예수님의 자리에서 나오는 영생으로 바꾸려면 이쪽 것은 곱표 해야 돼요. 곱표가 경상도 말인데 가위표를 곱표라 합니다.

나를 가위표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 있던 세리는 뭐라 했습니까?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가위표를 했죠. 모든 동전 판에 이미 전부 다 가위표가 되어 있어요. 이 가위표를 다 모아 놓으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야기는 뭐냐?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그 나라 망했데! 이게 복음이에요.

구원의 자리는 누군가 망해야 돼요. 망한 그 자리가 구원의 자리에요. 다른 자리에서는 구원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자리에서 구원이 올라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 구원은 없어요. 없는데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는 그 자리에서 영생이 나와요. 그러니까 영생을 예수님이 엉덩이로 눌러 앉았다고 보면 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보통 한 집에 고모 삼촌들이 살잖아요. 방은 작고 할 때요. 그때에 숙제한다고 연필 잊어버리고 지우개 잊어버리면 어떻게 찾느냐 하면 꼭 어디 있느냐 하면 때구루루 굴러서 엉덩이 큰 엄마나 누나나 고모 방안에 있어요. 반드시 그 안에 있어요. 장담합니다. 일어나야 돼요. 영생은 못 찾아요.  예수님이 눌러 앉은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그 십자가 죽는 거기에서 만 구원이 나와요. 부활은 죽기 전에 원상복귀하는 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죽음을 확대 시키는게 부활이에요. 죽음을 없애는게 부활이 아니고 반대입니다. 죽었다는 사실을 본격화 시키는게 부활이에요. 죽음을 확대시키는게 부활이에요. 죽음을 더욱더 생생한 현실적 경험으로 이제는 모든 기준으로 적용시키기 위해서 죽음으로 힘으로 나타난 힘이 바로 부활의 힘이에요. 죽은 분이거든요. 그 죽은 분이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 죽은 분이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결백하고 죄가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 유일한 의인입니다.

의인임을 그런 식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던 의와 죄와 심판의 개념 자체가 애당초 이것은 전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확실히 다 까발려주고 노출시킨 그 당사자의 세계가 바로 그리던 천국입니다. 다른 데는 천국이 아니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선하고 영생,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착하면 구원받습니다. 그런 천국 자체가 없어요. 십자가에 동참하지 아니하면 천국은 어림도 없습니다. 영생 없습니다. 구원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부터 먼저 선급하게 계산하고 나부터 먼저 넣어놓고 생각하니까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받는다? 난 여자 아니고 남자인데 그러면 남자는 해산을 못하는데 구원될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믿어라, 그건 또 뭐지? 에이, 둘 중에 뭐 십자가 쉬우니까 그거 해 보자 이렇게 우리가 선택하고 골라잡을 그런 식으로 구원은 그런 식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돈주고 국화빵 구입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실제로 국화빵이 되는 그 뜨거운 자리가 돼야 돼요. 나를 죽이고 나를 다시 살리는 가운데서 나를 죽이고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다시 살리는 그 과정 속에서 나만의 구원이 아니고 진짜 이스라엘 집단구원이라는 것을 맛보게 되는 겁니다. 더불어 구원되는데 그 이유가 대표자 때문입니다. 너나 나 때문이 아니고 대표자 때문에 그 대표자 한분 때문에 단체로 구원받는다는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의 의미를 새롭게 알 수 있습니다.

아직 까지 중보자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는데 중보자 이야기를 하면서 에스겔 1장과 10장을 언급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에 제가 하나님 같으면 에스겔에게 장차 중보자 온다. 보고 싶습니다. 키는 176, 눈썹은 짙고 예, 지금 몽타주 그리고 있습니다. 이러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런데 에스겔 1장에 나오는 현상은 놀라 자빠질 현상입니다. 도대체 괴물도 이런 괴물이 없어요. 하이브리드입니다. 어떤 동질성이 없어요. 

동질성이 없어요. 괴물입니다. 그래서 제가 에스겔 설명할 때 이렇게 했죠. 휴전선에 있는 북한에서 남한에 정치 선전할 때 스피커 있잖아요. 꼭 스피커 모습이에요. 왜냐 하면 눈들이 박혀있고 사면의 얼굴이 다 달라요. 독수리, 소 뭐 사자 그리고 또 사람, 이게 살아있는 생물체인지 아닌 어떤 초현실적인 건축물인지 모를 정도로 괴상망측한데 움직여요. 그리고 바퀴가 있어요. 바퀴가 있다는 말은 지상과 닿아있다는 겁니다. 여기 있는 나타난 현상이 지상과 닿아있고 그 내면은 천사거든요. 문제는 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천사를 안에서 조작하고 있는 움직이는 어떤 신이 있다는 겁니다.

지상에 박혀있다는 것은 에스겔 1장에 어디든지 움직이더라 어디든지 가거든요. 굉장히 활달하죠. 그리고 활동성이 굉장히 강력하고 번잡하고 그러니 결국은 이것은 해석 불가한 겁니다. 코 눈이 있는 것이 아니고 괴상망측한 그런 괴생물체가 에스겔에게 등장한 겁니다. 그리고 이게 뭐냐 하면 메시야입니다.는 수염 났고 키 크고 메시야 꿈에서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듬직하고 잘생기고 인물이 왜 그리 잘났어요? 그런데 원래 메시야는 인물이 볼 폼이 없어요. 이사야 53장에 보면 흠모할게 없다는 겁니다.

상속자에 나오는 이민호? 원빈? 아니에요. 김수현 아닙니다. 별에서 온 그대는 괴상망측해요.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흉측하기도 하고 망측하기도 하고 에스겔이 그것을 봤을 때 느낌은 그것이었습니다. 에스겔 10장에 나오는데 세상의 모든 일은 인간의 선에서 하는 게 아니다. 왜? 이스라엘은 이제 망하니까 중보자가 직접 일해요. 천사를 앞장세워서 어떻게? 땅끝까지 바뀌 굴려가면서 끝까지 일해요. 이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4장 보면 에스겔 형상이 계속 나옵니다. 그 안에는 어린 양의 보좌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직접관리에 나섭니다. 관리에 나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믿고 자하고 또는 그림으로 나와 있잖아요. 또 영화로 나왔잖아요. 그 영화된 그 어떤 인물, 어질게 생긴 인물이고 키 크고 수염 길고 파마도 너무 잘나오고 그런 것을 상상해서 주여!  주여!  누구십니까?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개인 구원이 될 수 있는 여지를 자꾸 우리 쪽에서 상상해서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제거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누구를 만났습니까? 다멕석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인물 묘사했습니까? 간단한 건데 사람들이 왜 빼먹습니까? 너무 그림이 문제에요. 중세때 이콘이 문제에요. 예수님의 성화를 이콘이라 하는데 그 이콘이 문제입니다. 그게 우리 기억 속에 있어서 유사한 인물들을 아주 멋있게 생긴 인물들을 자꾸 우리가 양산해 냈었어요. 그것을 사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물이 아니고 기능이에요. 그 기능을 우리가 믿는 게 아니고 기능이 나를 덮쳐서 어느 새 내가 메시야 기능화 되는 변화 조짐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이미 성령 안에 있고 구원받은 사람, 같은 동전에 어떤 자리를 부여받은 성도가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40411b (자리)―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의 인상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상을 언급한적 없는데 본인이 예수님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자기가 만나 본적도 없거든요. 그런데 자기 본인이 예수님인지 마귀인지 아니면 부처인지 자기가 어떻게 함부로 판정을 하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에스겔 1장에서 에스겔이 봤을 때 이게 괴물이야? 뭐야?  라고 할 필요가 없듯이 압도당한다 하죠. 그 형상에 압도당하죠. 압도당하게 되면 거기서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선지자도 그렇고 사도 바울도 그렇게 자기가 근원적으로 죄인임을 알아요. 뭐 나쁜 짓해서 죄인이 아니고 성실도가 떨어져서 죄인이 아니고 공부를 못해서 죄인이 아니라 이것은 근원적으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는 나설 잽도 못 된다 그렇게 되면 내 쪽에서 구원을 시도 하겠다는 그 시도 자체가 이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이것은 분명히 마귀가 배후에서 나를 가지고 부추기는 그 결과에요. ‘구원 받아야돼! 네가 율법지키면 구원받아야 돼!’이것은 바울이 사도가 되기전에 했던 짓이에요.

율법을 주신 것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준거야! 쉐마, 들으라 했으니까 네가 이 율법대로 지키면 너는 영광 돌릴 수 있어! 라고 했던 그 모든 것이 주님을 만났을 때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한 바로 나사렛 예수다’ 나의 자리가 유지가 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핍박이라는 그런 관련성으로 주님과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주님과 우리 사이가 핍박받는 분이 주님이고 핍박하는 자는 우리인데 우리가 핍박할 때는 반드시 그냥 핍박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적으로 자기가 의롭고 정당하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주님 앞에 압박을 가하는 식으로 세상이 짜여 있습니다. 거기서 예외적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전부 다 그렇게 짜여져 있어요.

낮에도 안양에서 그런 강의를 했지만 제가‘선 오브 가드’라는 영화를 보고 요약을 했잖아요. 그 중에서 감독이 의도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예루살렘 들어갈 때에 종당나무 깔고 당나귀 삐딱하게 타고 들어가요. 당나귀 타고 들어가는데 환영을 해요. 촌에서 유명세를 탔으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이 보고 싶은 거예요. 그 소문난 분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환호했던 사람들이 막상 판결내리고 십자가 지고 가니까 사람들이 아주 냉담하게 차갑게 대해요. 누구 하나 십자가를 들어 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어이, 거기 서 있는 네가 져라’해서 그 사람이 지고 가는데 구레네의 시몬인가 그 사람이 지고 가지요. 영화에서는 이름이 안 나오고 그냥 흑인으로 되어 있지만 구레네의 시몬이 지고 갔습니다. 그럴 때 요한복음 8장에 이런 게 있어요. 염두에 섰던 사람들이 전부 다 누구한테 굴복했는가! 본인도 의식 안한 채 국가권력에 굴복했잖아요. 판결에 대해서 동의 했다 바나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동의 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아주머니, 아저씨들 집에 설거지 안 합니까? 설거지하죠. 빨래 안합니까? 빨래하죠. 밥 먹었으면 설거지하고 옷 더러워지면 빨래해야죠. 그러면 빨래한 게 죕니까? 설거지 한 게 죄에요? 하지만 그들은 죄인되었습니다. 누가 등장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졌던 그 사실로 인하여 그 사건으로 인하여 그들은 빨래를 하던 설거지를 하던 장가, 시집을 가던 전부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네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너희가 죄가 없었으나 내가 이 세상에 등장하는 그 순간 일대의 전부 다 모든 것이 죄가 죄로 다 드러났다는 겁니다. 우주에 있는 유성이 지구를 때려버리면 지구는 일거에 지구가 폭발하죠. 예수님이 유성처럼 나타난 거예요. 그것을 하나의 인물로 보니까 잘생겼다 못 생겼다고 하지만 에스겔의 그 해괴망측한 그야말로 이것은 괴물인지 그게 만약에 지구상 중간에 메시야가 떨어졌다면 그 자체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그 거룩 앞에서 그들은 찍소리 못할 저주 받아 마땅한 그러한 처참한 세상으로 돌변하고 맙니다. 그게 바로 에스겔이에요.

이스라엘나라가 망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던 그 모든 이방 나라를 이제는 복수하겠다고 나설 때 바로 천사를 앞장세워서 모든 것을 복수해 버리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그게 나와 있어요.

계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계 4: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계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에스겔 1장에 언급했던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거기에 보좌가 있고 거기서 경배하고 있지요. 이 천사를 앞장세워서 활동하는 것, 이게 6장에 넘어가면 어떻게 되느냐 바로 전 세상을 심판해 버립니다. 예수 어린 양의 보좌에 의해서 찌른 자도 볼 것이요 그리스도 죽으심을 근거로 해서 모든 세상을 이미 저주로 규정해 버린 겁니다.

따라서 두 번째 시간에 첫 번째로 제가 이야기할 것은 뭐냐 하면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라는 것, 어떤 기능으로 주님께서는 자신의 일, 메시야의 일을 하는 거예요. 그 기능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디모데전서 2장에 나와 있는 중의 하나가 여인이 해산하는 그것도 구원과 연관성이 있는 벌어질 일이다 이 말입니다. 여자가 해산함으로 본인이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여인이 해산함으로서 하나님의 구원해 주신 느낌에 참여 된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시간을 끌고 오느냐 하는데 이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왜냐 하면 제가 이렇게 여자는 이미 구원받은 여자가 해산하면서 하나님의 언약 사건에 이미 가담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인이 해산할 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저주가 뭡니까? 여인에게 준 저주가 해산할 때 고통 오게 되어 있지요. 그것이 아담 때뿐 입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겁니까? 지금도 반복되죠. 그러면 창세기 3장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도 반복되고 에스겔 1장도 반복되죠.

왜?  모두 같은 동전 판이니까요. 모두 같은 집행이니까 같이 움직이니까……. 그러면 간단하게 구원받은 여자가 해산하고 구원을 느낍니다. 하면 되는데 왜 간단하게 않느냐? 그것을 간단하게 해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럼 나 해산할 때 느낌 아니까, 아 나 느낌 받았어요.’ 이러면 구원 된 사람 되고 ‘난 느낌 못 받았으니까 구원 못된다’ 이렇게 되어 버린다니까요. 또 그게 개인구원으로 가버려요. 그러면 백날 설명해 봤자 아예 모든 듣는 것이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에 대해서 해답처럼 느껴지면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제가 우회, 피해 갈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이것은 피해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피해 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잖아요. 죽으셨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으로서 사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세계가 이미 죽은 세상이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실 때 그냥 죽으신 게 아니고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했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게 된 근거가 뭡니까? 예수님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죠?  죄가 있기 때문에 그렇죠. 그 죄, 예수님이 이 죄가 어디서 얻어진 죄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기거했던 이 세상 사람들의 죄와 같은 죄가 되는 거예요. 

본인은 죄진 적이 없지만 이미 세례요한 물세례를 받을 때 인간 속에 이미 죄 속에 참여 된 거예요.  세례요한이 말렸습니다. 주님은 의롭기 때문에 씻을 필요 없습니다. 할 때 예수님이 나한테 세례 줘라!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는 그 메커니즘, 프로세스에 참여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의를 결국 끌어내기 위하여서 주님은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인으로 가담이 돼야 돼요.  왜냐 하면 죄의 왕국에서 건져 내려면 누구하나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죄의 권세 누구하나는 대표적으로 빠져 나와야 되고 줄줄이 사탕, 한번 빠지고 난 뒤에 그와 연결된 사람은 다같이 10 17넉넉하게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있고 악마에서 이 세상에서 율법에서 빠져 나오게 하려면  먼저 풍덩 빠져든 사람이 있어줘야 돼요.

이것은 바로 개인 구원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알아서 하세요. 라고 할 수 없고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날 믿고 구원받으세요!  그렇게 해서 구원받을 사람도 없어요. 자, 제가 십자가 졌습니다. 알아서 십자가 피를 알아서 믿으세요! 할 때 예, 제가 알아서 믿겠습니다. 하고 나오실 사람도 없어요.  누가 그분을 믿었어요?  아무도 믿은 적 없어요. 왜냐 하면 만약에 그분을 믿는다면 어떤 경우 이냐 하면 죄에서 벗어난 경우에만 믿는데 죄에 속해 있는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모든 시선과 안목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왜곡되게 예수님을 대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믿는 사람이 등장하죠. 백부장, 특히 베드로 같은 사람 네게 알게 하신 것은 네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다. 그러면 백부장 같은 사람들, 또는 강도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 사람들은 자기 자력으로 하지 않고 어떻게 구원 받았느냐? 주님께서는 이렇게 구멍을 뚫어요.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산상설교하시고 마치고 난 뒤에 문둥병자가 와서 다윗의 자손이여! 제 병을 낫게 해 달라할 때에 주께서 낫게 해 주시죠. 낫게 해 주시고 네가 나았으니까 율법의 증거된 예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보여라 이렇게 합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 지려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그 문둥병이 나은 것은 문둥병자 개인의 자질이 아니고 주께서 이용하신 거예요.  장차 십자가 진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문둥병이 가지고 있는 문둥병을 자기가 담당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담당한다는 말이 나와요. 치료하시는 게 아니고 치료는 치유가 아니고 치유는 오늘날 건강 매니저들이 방송에서 하는 거고 등 푸른 생선 많이 먹으세요.  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짐을 짊어지는 거예요. 

십자가 지기 전부터 십자가 사건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미리 맛보기로 보여 주신 거예요.  거기에 걸려든 사람이 백부장이고 문둥병이고 강도인거예요.  그리고 그 전에 보면 엘리야고 모세고 아브라함이고 변화산에서 엘리야하고 모세가 뭐라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이여, 언제 돌아가십니까? 그런 이야기하죠. 왜 그런 이야기합니까? 모세 구원 받은 게 아니에요?  엘리야 구원받은 게 아닙니까? 기다려야 돼요. 언제 까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까지요 기다려야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쳤으니까 대단한 믿음이죠. 그러면 자기 아들 받친 행위로 구원받은 게 아니겠어요?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예수님 때 오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진짜 구원은 예수님께서 하신 그 기능이 효과를 봐서 그 효과로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자기 아들을 바치는 그 방식을 통해서 오실분이 뭔가 일을 치러야 우리 죄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는 백부장이 하는 모든 행위는 결국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그런 행위를 하는 거죠. 자기 뜻대로 세상이 자기 원대로 노선대로 가지 않고 이상하게 꼬여서 나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만드는 그 일 자체를 통해서 내가 엉뚱한 노선 속에서 나 자신을 구원하려고 했었구나! 하는 그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그거에요. 

말이 어렵게 됐습니다만 그냥 쉽게 하겠습니다. 이런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기능을 하시는데 그 기능은 예수님이 죄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셨고 그 다음에 죄인의 육신의 모습이 되셨고 성경대로 하면 로마서 8장 3절에 죄 있는 육신이 되셨고 그 다음에 아버지께 버림받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뿐만 아니고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께 이미 버림받은 입장에 있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분명히 보여 주는 겁니다.
 
버림받은 자가 구원을 언급한다는 것은 자기 분수에 위반되는 거예요.  버림받았다는데 왜 구원이라는 말이 왜 튀어 나와요?  다 같이 죄 아래에서 버림받았는데 버림받았으면 이제부터는 건져주고 안 건져주고 하는 것은 누구 소관입니까? 손든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손 내려 다 내리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모든 사람을 강퍅케 하신 것은 죄 아래 가둬 두신 것은 오직 구원은 불쌍히 여기는 자에게만 구원이 돌아가게 하신 겁니다. 로마서 9장의 말씀처럼 그냥 불쌍히 여겨 주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참, 주님이 보시기에 제가 어지간히도 불쌍하지요?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보시기에 그런데 제가 봐도 그래요. 

정말 저는 주님 아니면 전혀 희망이 없던 자인데 어떻게 저 같은 인간을 이렇게 생각하사 저를 이렇게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까? 그저 불쌍히 여겨준 자체에 대해서 저는 감사할 뿐입니다. 찬양할 뿐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그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겸손은 정말 위험한 거예요.  겸손해서 구원받는 법은 없습니다. 교만해서 구원받지 겸손해서 구원받지 않습니다. 이게 또 무슨 소리 이냐 하면 우리가 긍휼이라는 뜻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긍휼을 받기 전에 우리는 어떤 상태였느냐 하면 아이고 쯧쯧쯧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는 짓거리를 해 줘야 돼요. 그 짓거리가 뭐냐, 교만입니다. 자기 잘난 체 하는 거예요.  실컷 지 잘난 체해 놓고 나중에 죽어보니까 천국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주님한테 뭐라 합니까? 아하 불쌍히 여겼군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알아서 긍휼을 낮춰버리면 그렇게 해서 구원될 일도 없지만 만약에 구원된다면 ‘야, 참 나도 그 때 혈당량 어지간히 낮췄다 그지?’ 그렇게 된다니까요. 

교만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만 하는 방법을 제가 알려 드릴게요. 교만 하는 방법은 내가 이것을  마시는 이것조차도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교만해서 잘난체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해도 이것을 마시면서도 마시는 폼이 전에 보다도 훨씬 폼이 자세가 낫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사람은 건드리면 교만이 나오는데 왜냐 하면 모든 행동과 태도에서 스냅 사진을 찍어요.  착칵 착칵 누가?  내가 나 있고 내가 만든 자아를 만들어 놓고 그 자아로 하여금 항상 나를 반성하고 주시하고 관찰해서 보다 멋있고 멋있는 존재로 유지 하려는 그런 시도를 하게 되거든요. 

그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 나와요. 거기는 타인이 나의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내서 남이 나를 보듯이 타인이 요구하는 내가 그 사람이 나를 늘 지켜봐서 자체적으로 회개와 반성이 유지 됩니다. 회개와 반성이 유지하기 때문에 그 회개와 반성을 하는 나로 등장해요.  항상 반성된 체, 정화된 체 나와요. 그 정화된 나를 제 2의 나라고 간주할 정도로 그 정도로 우리는 교만합니다.

그 일은 제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같이 하고 있는 일이에요. 기도 하면서 기도 한참하면서 지금 손가락 잡은 폼이 어때? 미쳤어!  벌써 내가기도 두 시간째야!  오늘 웬 일이야! 나는 5분만하면 끝나는데 오늘 두 시간째야 오늘 성령 받은 거 같아!  오늘 뭐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아!  좋은 일은 무슨 좋은 일!  인간은 기도 자체, 그리고 자기가 하는 그 행위 자체가 그렇게 이뻐요. 자기를 구원 안하면 구원 될 사람이 없어! 너무 예뻐서, 너무 참해서, 그래서 신약에 보면 꿈속에 있는 자아는 현재 나이보다 대충 20살 어려요. 다 젊어요. 꿈속에서 60대같으면 40대같이 보이고 40대 같으면  20대로 보입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던 시절이거든요. 남들이 나를 만들기 때문에 남들이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곧 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수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니까 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참 옷을 못 입습니다.’  옷을 못 입는데요.  그래서 오늘 티를 바꿔 입고 왔는데 그 다음부터 ‘아하 내가 옷을 못 입는 사람이구나!’ 왜? 타인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니까 예쁘다 하면 이쁜거고 못생겼다고 하면 잘 생겨도 못 생긴 거예요.  왜냐 하면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하는 것이 없어요.

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내가 해 줄 테니까 이런 식으로 날 때부터 지금 까지 그런 식으로 살아 왔어요. 그래서 만약에 자기한테 지시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자살해요.  왜? 타인 때문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기 때문에 타인이 사라져 버리면 나한테 지시와 명령이 사라져 버리면 자신은 있어도 없는 존재에요.  외로워서 못 살아요. 결국은 자살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남편 죽고 난 뒤에 자살하거나 아내 죽고 난 뒤에 자살하는 이유가 바로 평소에 잔소리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혼자서는 살수가 없어요.

나를 지켜보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살맛이 나고 살 용기를 얻고 희망이 생기는 거예요.  보란 듯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어머니 이름으로 아버지 무덤에 가서 출세한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 그게 모티베이션, 동기유발이 되는 거예요.  나를 주시하는 사람들, 나에게 기대를 잔뜩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프로야구에 관중 없으면 아무도 열심히 안 합니다. 목사가 교인수가 많을 때 흥분하고 아멘소리 많으면 자기가 도취되어 하는데 만약에 자기 아내하고 둘하고 앉아있으면 그렇게 흥분하지 않습니다. 흥분대신 욕설이 나오죠. 이 사람들이 지옥가려나 뭐 하나?  욕설이 나오지 흥분하지 않습니다.

자기에 도취된 게 아니고 인간은 타인에게 도취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을 우리라고 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의 것이에요 우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요.  그것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적 동물, 사회적 동물이라 했거든요. 사람은 혼자 못산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는데 주님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모든 세상이 저주 아래 있다 이 말이죠.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가셔서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참 그 이야기해야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나갈 때에 그 아주머니들이 설거지를 빨리 해도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죄인되었습니다. 그 때문에부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뭘 보내느냐 하면 성령을 보내시거든요. 

이 대목이 중요한데 성령을 보내게 되면 너희들이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에요. 그러면 이 저주 받은 상태, 죽은 상태거든요.  이 세상에 죽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 난 사람만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살아난 사람, 살아나신 분의 마음, 또는 영, 그분의 영이 자기 백성에게 주어지게 되면 이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이 밖에 나와 있어야 됩니다. 밖에 나와 있으면서 이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거듭났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까지 거듭난 것은 뭐냐, 내가 죽고 어떻게 사는가?  자기 개인문제부터해서 개인문제로 되돌아오는 게 거듭남인데 이것은 니고데모가 오해한 거예요. 

거듭났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한번 태어나고 이 세상 말고 밖에서 한번 태어난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에요. 이 때 중요한 맨트는 '믿습니까? ‘ 이 대목에서 나와야 돼요. 이 세상에서는 죽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두 번 태어나면 안돼요. 이 세상에서는 기대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먼저 빠져 나온 분이 예수님이거든요.  로마서 6장, 함께 죽고 빠져 나와서 그게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부활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이 바로 같은 장소에서 태어난 게 이쪽에서 죽고 다른 세계에서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진 사람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성령을 가지고 파견 시켜 버려요.  이 세상에 보내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요.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받습니까?’가 아니라 구원받은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여! 기도 하면서 주님, 왜?  이미 내가 살은 자인데 내가 죽은 자 속에 섞여서 뭐할까요? 고스톱 쳐라!  고스톱 같이 쳐야죠. 고스톱을 쳐도 죄가 되지 안 되는 이유는 한 쪽은 주님께서 조정하거든요. 저는 고스톱 못치고 포커도 못해요. 민화토할 줄 알아요. 주께서 야! 광내! 주님께서 화투를 쳐서 도박을 해도 주님이 함께 치기 때문에 다 가르쳐 줘요 다 가르쳐 줘서 거기에 있는 판돈을 누가 잃느냐 내쪽이 다 잃게 해요. 왜?  그게 주님께서 이 땅에 와서 하늘로 갔던 접전 지점, 십자가 빠져나간 지점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위표, 다른 말로 방언으로 하면 꼽표, 돈 다 잃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일어나면서 다 잃었을 때 끝!  목회했는데 선임자가 50명 물려줬는데 한 둘 빠져 나가도 당황하지 말고 10년 지나니까 아내하고 자기 하고 둘만 남았다 끝!  그게 바로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이미 그것을 통해서 왜 내가 삭제 돼야 될 세계에 미련과 애착을 가졌었는가? 이미 내 신분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육신 때문에 어떻게든 이 세상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보란 듯이 타인의 욕망대로 맞추어서 봐, 나 예수 믿고 잘됐잖아?  하는 그런 육신의 욕망이 펄펄 끓는지, 끓어나야돼요.  왜?  그것 때문에 가위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삽입되거든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구원받은 입장에서 죽으면 안돼요.  일을 하고 죽어야 돼요.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죽은 자 속에 들어가서 지옥속이죠. 지옥 속에 들어가서 왜 세상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가를 우리가 느껴야 되죠. 목사님, 그 이야기가 너무 어렵지 않습니까? 전혀 어렵지 않아요. 왜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거든요. 아침에 눈만 뜨면 하는 일이 그 일이에요. 어떻게 하면 세상과 동화될 수 있는가? 외로움을 덜 타는가? 내 친구가 많아지는가! 내가 쓸 돈이 많아지는가?  이것은 늘 하는 일이잖아요. 

믿음이 뭐가 믿음이 아니냐 하면 내가 기도 하고 내가 목회하고 내가 헌금하고 다 이게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것 가지고 자기 새삼스럽게 구원 받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전혀 그것은 악마의 짓이에요.  내가 누구덕분에 고스톱을 치지?  내가 누구덕분에 오늘도 된장국을 먹지지? 모든 발걸음과 모든 일이 주께서 파견한 소명주신 그 일이에요. 주께서 맡겨준 그 일인데 그 맡겨짐을 통해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가위표, 실패자가 되게 하는 거예요. 그 실패자, 무너지면서 오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겁니다.

모든 게 무너지는 즐거움, 학생들 같으면 공부를 잘 했는데 분명히 수학시험 100점 예상했는데 시험쳐보니 80점 나왔다, 그 무너지는 즐거움이죠. 그래서 나는 이것밖에 안 돼, 하고 그 다음에는 아는 문제가 나와서 100점 맞았을 때 진짜 성령 받은 애 같으면 주여! 이렇게 나오시면 안됩니다. 저 같은 아이는 100점이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의 열매에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 양선…….   저한테 수학 100점은 어림도 없습니다. 제가 사법고시 수석합격?  이것은 말도 안 됩니다. 저는 죄인인데 왜 이런 수모를 저한테 주십니까? 이렇게 나와야합니다. 왜 제 딸이 사법고시 합격되는 수모를 왜 주십니까? 제 딸이 교만을 떨건데 안그래도 까부는데 까불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당신 지금 좋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지금 슬퍼서 하는 이야기야 하고 물을 거예요. 

모든지 잘되면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거고 못되면 너무나 당연한 거고 아니 이것 보다 더 못 돼야 돼요. 왜? 본래의 자리는 십자가가 내 자리니까요 모든 것을 발가벗기고 모든 수치가 드러나고 망해도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자살보다 더 심각한 수치를 당하는 그 자리가 원래 자리인데 왜 그런 자리에 보내지 않고 오늘도 왜 세끼는 왜 주시는지 저녁에 김밥을 먹고는 김밥은 왜 먹어야 되는지 왜 이 맛있는 김밥을 왜 먹어야 되는지 이것은 저한테 분에 넘치는 겁니다.

햇빛은 왜 비취고 담배는 왜 주시고 공기는 이렇게 신선한지 요새는 중국 때문에 신선하지는 않지만 모든 범사에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성경 말씀을 지켰어요? 지키지 마세요.  이미 산채로 그냥 들어가 사시면 주께서 주어진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내 공로도 아니고 내 열심 있는 성과도 아니다 이 말이죠. 사람은 좀 잘되면 교만을 떨거든요. 

자, 그렇다면 오늘 디모데전서 2장 8절부터 15절까지 간단하게 풀렸습니다. 어떻게 풀렸느냐 하면 뭐 제 혼자 풀렸습니다만 설명해 드릴게요.  판이 있는데 편편한 판이에요. 이 판에 보니까 인간의 시간으로서는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는데 이 판은 이미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동시성이에요. 동시에 일어나고 더 중요한 것은 동시 성 플러스 반복이 된다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었다.  여러분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 총탄에 맞아 죽었죠. 이순신 장군이 1592년에 죽었는가 뭐 하여튼 죽었다 치고 1605년에 이순신 장군이 또 죽었습니까? 아니죠. 1727년에 또 죽었어요? 안 죽었죠.

그러나 성경은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그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후손이 지금도 매일같이 따먹고 있어요. 왜? 주께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말씀은 같이 들썩거려요. 같이 들썩거려서 늘 반복합니다. 그 안에 십자가도 반복하면서 들썩입니다. 남자는 해산을 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해산하지 않지만 여자가 해산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판에 해산할 때 고통스럽게 해산한다고 했거든요.  여자가 해산할 때 남편은 남자가 있다가 ‘아이고 당신은 참 죄를 지어가지고 애 낳을 때 고생 많이 했다, 고생해도 싸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당신이 마귀한테 안 빠졌으면 우리도 제대로 잘 살건 데 당신 때문에 그랬어!’ 라고 할 쨈이 못돼요. 왜? 여자 해산하면서 아픈 그 순간에 남자는 돈 벌어오면서 이마에 땀 흘리는데? 같이 반복되는데요. 역할이 달라요. 

역할이 다른데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기에 11절에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를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지 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을 취지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선악과 사건에서 누가 먼저 유혹 받았느냐를 반복시키는 거예요.  누가먼저 받느냐 하면 여자 먼저 유혹받았고 그 다음에 악마한테 유혹받았고 그 다음에 남자가 여자의 말을 듣고 유혹 받았잖아요. 그러면 여자 쪽에서 ‘여보, 여자가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서 따먹었으니까 내가 이제부터 당신한테 순종할게’ 이렇게 나오면 남자가 참 부담스러워합니다. ‘좀 하던 대로 해라! 디모데전서 봐서 또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우리는 남자는 동등해’ ‘여보 동등한 게 아니야 이제부터 순종할게’ 그러면 남자가 ‘난 네가 그렇게 나오니까 무섭다 좀 하던 대로 해 그렇게 나오면 무서워’ 왜 무서우냐 하면 여자가 남자한테 순종하는 대신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됩니다. 그게 무서운 거예요. 

왜?  에베소서 보면 어떻게 되어 있어요?  남자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뭘 바쳐라? 목숨을 바치라고 했죠. 그것을 여자 쪽에서 요구한 셈이 돼요. 여보, 당신이나 나나 주안에서 각각 맡은 자리가 있을 꺼다. 하면 그러면 당신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내가 순종할게 왜, 순종? 순종하니까 당신은 당신 할 일해!  남자는 나 안 해! 그냥 당신이 나를 지배해 나는 그게 너무 편해 모든 당신이 알아서 해 나한테 뭘 요구 하지 마!  난 당신을 위해서 목숨 바칠 힘이 없어! 

그래서 결혼식 주례할 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할 때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남자나 여자가 주안에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이미 죽은 세상에서 성령을 받아서 이미 죽은 입장이라면 각각 해야 될 역할을 하자고 나올 경우에 그것은 하나의 가정이야기가 아니고 그것은 바로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에베소서 5장 끝에 나오잖아요. 이것은 부부의 가정에 관한 이야기 아니고 곧 교회에 관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요. 그러면 부부라고 하는 것은 사라지고 교회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분점으로서의 부부 생활을 해야 되는 겁니다.

여자가 먼저 성령 받아 그렇게 나오면 남자는 미쳐버립니다. 왜냐 하면 그러면 ‘내 역할은 뭔데?’ ‘당신은 간단하지 날을 위해서 죽으면 돼지’ ‘아이고, 안 돼! 그것은 차라리 안 들은 것으로 해!’라고 해 버리는 거예요. 안 돼! 따라서 제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느 누구도 아내같은 아내없고 남편같은 남편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아내 같은 아내없고 말씀대로 맞춘 사람이 없는데 이 뒤에 뭐라 했습니까? 동시 성, 반복을 해 줘요. 우리는 자꾸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냥 주안에 말고 주님 빼버리고 그냥 이 땅에 지옥 같은 세상에서 타인의 욕망, 저 부부가 얼마나 잘사나 지켜 볼 거야 하는 타인의 욕망, 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항상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것을 묻거든요. 내가 뭘 해 주면 당신이 기뻐 하겠습니까? 이것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데 타인을 의식하는데 그런 식으로 살고 싶은데 주님의 자리가 만들어 진 구원의 자리가 갑자기 덮쳐서 반복을 해 버리면 그 반복하는 순간 우리는 졸지에 주 안에서 본인도 어쩔 수 없이 성경에 나와 있는 아내의 역할을 하는 그런 미친 짓을 하게 돼요. 

갑자기 이번 일은 남편한테 이상스럽게 왠지 순종하고 싶은 순간이 들 때가 있어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두 달간에 하루정도는 그런 때가 있어요.  왠지 이 때는 남편 말을 한번 들어봐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 때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물론 돌아서면 그 다음 날이면 싹 달라지지만 남편도 마찬가지에요.  왠지 오늘 저녁은 아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싶은 그런 남편은 별로 없지만 하여튼 뭐든 희생하고 싶은 아내의 중요성을 아내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그런 순간이 올 때 그것은 본인이 알아요. 주여! 이것은 제 뜻이 아닌데 주께서 함께 있기 때문에 주께서 나를 또 반복시키는 군요! 말씀의 기능자로서 이 땅에서 이미 산 자로서 죽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이런 일을 버리시는 군요!  이벤트를 벌리시는 군요!  깨달을 때 그 모든 공로는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이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공로를 돌려야지 내가 원래부터 나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하고 자기 공로로 돌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8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이것도 마찬가지로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하는 이 말씀 자체가 반복되게 되면 구원받은 남자한테 반복되게 되면 어느 날 가정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기도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이것을 기능적으로 생각하지 나는 원래 눈만 뜨면 기도 하는 사람으로 해 버리면 그 사람은 무엇을 놓치게 되느냐 하면 갑자기 십자가도 같이 스프링처럼 움직인다는 사실을 놓쳐버리고 십자가를 빼놓고 내가 잘나서 혼자 널뛰기 하는 것 밖에 안 되거든요. 십자가와 함께 연동해서 같이 움직입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그 죄에 대해서 누가 갚았다? 주께서 갚아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죄인임을 드러내고 주님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그런 분으로 주어진다. 이것이 연동되면서 십자가를 보여 주는 증거로서 여러 가지 일을 같이 더불어서 말씀을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일을 하면서 나 같은 죄인이 이렇게 된 것은 주의 은혜구나! 라고 알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돌아서서는 그렇게 은혜 받았으니까 나는 진짜 제대로 된 사람 맞지?  라고 한다면 그게 뭐가 돼요.  그게 바로 교만이 되고 또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말씀은 율법적 기능을 여전히 유지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권면은 율법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십자가와 연동하면 해석이 다 돼 버려요. 그런데 십자가를 따로 빼 내 버리면 누가 잘난 사람인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결국 자기가 도 닦는 것밖에 안돼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 잘난 맛이 뭐냐? 내가 잘난 맛이 아닙니다. 타인이 요구한 모델이 있어요.

신자라면 적어도 주기철 정도 돼야 되고 손양원 정도 돼야지 그러면 내가 그런 정도 돼야 내가 따라 붙이지 라고 타인이 정해 놓은 모델을 그게 제 2의 자아상으로 여기고 거리를 좁히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럴 경우가 얼마 전에 있었죠. 이것은 산 사람끼리 한 게 아니고 죽은 사람 속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sbs에서 케이팝을 하는데 버나드박인가가 노래를 했는데 100점 99점 100점이에요. 준결승전에서요. 그러면 그것은 타인의 자기에 대한 평가죠. 그러면 타인의 평가는 곧 내가 되고자 하는 목표가 되어 버려요. 인간은 누구든지 남이 뭐라 하면 목사님 옷 못 입습니다. 하면 옷 갈아입고 오는 것처럼 말이죠. 타인을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그 다음은 뭐냐?  100점 100점 100점 밖에 없어요. 그런데 점수 그렇게 안 나왔어요.  안 나오거든요. 

이게 바로 인간이에요. 인간은 ‘아이고 은혜 받았네요. 잘 믿었네요.  남자가 돼서 기도를 하고 여자가 돼서 이렇게 정결하게 단정하게 살다니 아이고 훌륭한 신자네요’ 라고 누가 이야기를 해 버리면 또 이야기하든지 내가 그것을 느껴 버리면 남들이 이런 모습 때 얼마나 기뻐 할 건가 주님이 없는 기뻐 해 버리면 그것이 자기한테 교만이 돼버립니다. 그게 자기의 모델이 되어 버리면 뭘 놓쳐버려요? 십자가로 가야될 코스가 십자가를 벗어나서 엉뚱한대로 가버려요. 마귀가 좋아하는 거예요. 

‘역시 나는 이 정도 훌륭하니까 아마 고3 우리 딸 시험 성적 잘 나올 거야!, 내가 이 정도 기도 많이 했으니까 아마 우리 남편 사업 잘 될 거야!’ 전부 엉뚱한 타인이 욕망이 요구하는 대로 그것이 나의 욕망이기도 하고 그쪽으로 가버려요. 

9절 봅시다. 딤전 2: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이게 수치로 측정하기 곤란합니다. 아담한 옷이 얼마짜리입니까? 한목사님 사모님, 아담한 옷이 얼마짜리입니까? 시장에서 얼만한 것이 아담한 옷이에요? 연예인들이 입는 아담한 옷은 중국가면 비싸게 팔려요. 전지현이 입은 아담한 옷도 중국가면 없어서 못 팔잖아요. 그렇지요? 

그 다음에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 성경에서 머리스타일 까지 지정해 주십니까? 땋은 머리나 이게 레게 머리하지 마라 이런 뜻이에요?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금 진주 없어도 천만 원짜리 옷 있어요. 한 땀 한 땀 이태리 장인이 지은 옷이 있거든요. 꼭 진주 안 들어가도 비싼 옷 있다 말이죠. 명품,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인간은 그 시대에 따라서 상대적 가치가 결정되는데 그것이 시대 자체가 십자가와 연동해서 그 시대마다 아담한 것과 사치함과 정절한 것과 정절한 것이 그 시대마다 주어지는 겁니다.

아마 구석기시대에는 치마하나만 해도 아담한 옷이 될 거에요.  요새 그렇게 하고 다니면 미친 사람되잖아요. 머리를 땋았다? 머리 땋았다는 말은 머리 풀고 다녀야 돼요?  여러분 수녀 가운데 머리 땋은 사람 봤어요?  없지요. 수녀들은 성경대로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수녀들을 주위 깊게 봐요. 얼마나 위선자인지 티가 나는데 수녀들이 꼭 공공의 질서에는 관섭을 안 하고 그러니까 남들 일에 일체 관섭을 안 해요. 왜? 고상해도 너무 고상하니까 그런데 민주화 운동할 때는 또 나서요. 해군기지 철거, 북한 뭐 보내기, 신부도 마찬가지고 제복 자체가 타인의 욕망입니다. 관행과 관습이 타인의 욕망이거든요. 중들이 머리 깎는 것과 신부가 제복 입는 것은 바로 이미 타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뜻이거든요. 

여기서는 자기를 고정 시키는 겁니다. 나 이런 존재라고 고정화시키는 거예요.  이미 십자가에서 떠난 사람들입니다. ‘아담한 옷을 입고 염치와 정절로’ 이 말씀은 우리가 이렇게 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율법적 기능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참 아담하네요, 예수 믿더니만 착실하네요! 라고 해 주는 것은 주님이 하실 일이지 우리가 이 말씀을 해서 스타일 맞추어서 했던 행위의 결과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정결한 척 했고 아담한척 했고 거룩한 척 했고 기도 한 척 했던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그러면 저쪽에서 그러니까 더욱더 성령 받은 모습이 보입니다. 받은 것이 보이는지…….

항상 이 모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도 주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를 떠난 적이 없어요.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우리로 하여금 산 사람으로서 죽은 사람속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함께 고난에 체험하면서 그러면서 합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진리가 무엇인가를 증거 하기 위하여 나 예수님을 입증하기 위해서 죽을 때 까지 네가 고생을 해라 하면서 십자가의 은혜로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변동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자리가 주님이 주신 자리이고 우리가 만든 자리가 아닌데 그 자리에 맞는 역할을 우리가 말씀에 따라서 할 뿐이죠. 그래서 창세기 3장이나 지금도 그것이 십자가와 더불어 같이 연동해서 반복하면서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 뿜어내고 증거될 때 그것이 성령이 임하면 세상 끝날 까지 나의 증인이 되라는 그 말씀이 실현되는 모습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활하셔서 제자를 찾아오신 주님 부활하셔서 사도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 십자가로 찾아오셔서 네가 되는 것은 은혜라고 말씀하신 그 은혜가 날마다 우리의 삶속에서 되풀이 되고 십자가와 연동되어서 반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