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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딤전 1:18 / 죄인 구원 / 140110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디모데전서

딤전 1:18 / 죄인 구원 / 140110

정인순 2014. 1. 11. 15:48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김창길

서울 의존교회140110a

(죄인구원)―이 근호 목사

10절부터 율법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 뒤부터 계속하겠습니다. 사람은 분명히 있는데 사람을 만드신 분은 우리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여기서 딜레마가 여기서부터 있는데 만약에 누가 나는 있는데 당신 부모 없지? 한다면 우리는 부모 있다고 이야기를 해야 되고 반드시 해야 돼요. 왜냐 하면 부모 없이는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에서 부모님이 어디 있느냐를 보여 달라고 할 때에 우리는 부모님이 없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돌아가셨다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계시기는 계시는데 돌아가셨다. 

그렇게 할 때 그 답변이 이렇게 돼요. 내가 없었는데 나보다 먼저 부모님이 계셨고 부모님이 날 나으시고 키우시다가 나보다 먼저 돌아 가셨다고 되게 되면 그러면 나를 창조하신 분은 지금 죽음 속에 있지요. 지금 돌아가셨잖아요. 그 다음 질문이 뭐냐 하면 그 다음 질문이 어색한 질문 같은데 사실은 당연한 질문이에요. 그러면 부모님이 왜 돌아가셨지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처음의 질문이 뭐냐, 나 여기 있다 이것으로 더 이상 질문은 안 나와야 되는데 누가 당신을 여기 이렇게 생기도록 했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부모 이야기했고 부모님이 어디 있느냐 하니까 죽었다는 거예요. 죽음은 왜 죽는 거예요? 사람이 죽는 것이 당연합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왜 죽었느냐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데 우리가 평소에 죽었다는 것이 우리 일상속에 스며드는 것이 아니고 살다보면 그냥 사라지는 것을 죽었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우리의 근본적인 질문이 뭐냐 하면 왜 우리의 부모는 죽어야 되는가 하는 이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죽어야 되는가. 이유를 알아야 결국 우리도 어디에 합류합니까? 결국 죽는다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죽는다에 합류가 될 것 같으면 죽을 꺼 왜 사십니까? 그 다음 질문이 또 쏟아지게 됩니다. 아 죽을꺼 왜 사십니까? 성경공부 해 봐야 죽는데 왜 오셨어요?  같은 이야기거든요. 가게에 물건 사러 손님 오게 되면 손님이 이게 얼마입니까? 죽을 꺼 그거 알아서 뭐 할 건데요? 물건 사게요. 사봤자 사서 당신 오래 못 살아요. 해 봐야 몇 십 년 뒤에 죽습니다. 그 물건 사서 뭐할 건데? 

근본적인 중요한 문제를 자꾸 남겨두고 못 본척하고 진짜 중요한 문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숙제가 남겨 있는데 그 숙제는 할 생각은 안 하고 자꾸 엉뚱한 것을 해서 진짜 문제를 못 본체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지요. 이 질문에 대해서 처음에 ‘나는 왜 여기에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어요. 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 하면 우리가 이스라엘을 질문할 때는 조금 다르다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여기 있어요. 이스라엘이 여기 있을 때 이스라엘은 왜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자기 부모가 이스라엘 되게 했지요. 그런데 그 부모는 왜 죽습니까? 글쎄요. 왜 죽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한테 통하지 않아요. 다른 민족은 내가 여기 왜 있느냐? 부모 때문이다. 부모는 왜 죽었느냐? 모르겠다, 결국은 다른 민족은 모르겠다! 에요. 제일 중요한 문제에요 내가 왜 죽는지 살고 싶은데 왜 죽느냐, 이 문제에서 모르겠다 인데 이스라엘은 거에 대해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까? 안 갇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해답을 제공하기 위해서  등장한 민족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부모가 이스라엘 부모가 이스라엘을 만들어 놨다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누가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만들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도 아닌 일반 대한민국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반칙입니다. 그렇게 답변을 하면 안돼요. 우리는 우리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해야 돼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독점적이기 때문에 이방인한테는 그것을 감추고 있다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하면 그쪽에서 그러면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그건 모릅니다.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알거든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누가 있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있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율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우선입니까? 율법이 우선입니까? 율법이 우선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길을 건넙니다. 빨강불인데 길을 건넜어요. 경찰이 잡았습니다. ‘당신 왜 빨강불인데 길을 건넜습니까? 벌금 3만원입니다.’ ‘아이고 다음에 잘 할게요.  한번만 봐주세요. 사람 나고 법 났지 법나고 사람 났습니까?’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경찰이 있다가 ‘네, 법나고 사람이 났습니다.’하면서 못 알아듣는다니까요 ‘아이고 봐주면 될걸,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다시는 안 하는 것은 좋은데 법을 위반했으니까 법 위반 돈 3만원 내시고 다음에는 하지 마세요’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정도가 아니고 법을 위반 하면 이스라엘이 안돼요. 법이 먼저 있고 거기에 법이 합당할 경우에만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 이유는 다른 민족들에게 해답을 제공하려면 이스라엘이 철저해야 됩니다. 남에게 법을 집행하는 법원 판사 검사가 법을 안 지킨다는 것은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가 없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하라는 그런 특수한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온 민족입니다.

그래서 법이 얼마나 무섭고 법이 얼마나 엄중한가를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에게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먼저 누구에게 묻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그 문제를 물어야 되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은 법을 위해서 있는 나라라서 그런 겁니다. 이스라엘 살리려고 이스라엘이 있는 것이 아니고 법을 살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없앨지언정 법은 절대로 양보 못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이죠.

사람들은 이것도 모르고 교회는 이것도 모르고 십계명 외우라고 하는 거예요. 십계명은 그냥 십계명이 아닙니다. 십계명을 위해서 우리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게 십계명이에요. 뭐 1계명과 6계명은 지금 지키고 7계명은 나중에 지킬까 하고 이렇게 우리가 골라 선택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스라엘은 내가 살아있는 게 우선이 아니고 법이 살아있는 게 우선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기독교신자이고 하나님의 법을 우리가 수용하다면 내 우선의 시절은 끝났었어요. 나를 위한 인생이라든지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까? 나는 얼마나 낭만적인 인생을 꿈꾸고 있을까? 이거 끝났습니다. 낭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나를 어떻게 행복, 그런 행복은 있을 수 없어요. 나 위주가 왜 들어가는데요? 이스라엘이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그렇지 않은 거예요.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아들였다 이 말은 십계명이 나를 대신하는 겁니다. 율법이 대신하는 거예요. 모세가 십계명을 들고 올 때 취지가 그거였습니다. 다른 민족에게 없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그게 십계명이었습니다. 다른 민족은 율법이 없어요. 언약이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자기들끼리 편의를 위해서 법을 만들었지요.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다른 민족의 경우를 봅시다. 항상 이스라엘을 생각하지만 다른 민족도 생각해야 되거든요. ‘얘들아, 우리가 왜 있지?’ ‘부모가 만들었지,’ ‘그런데 부모는 왜 죽지?’  ‘그건 몰라, 그건 우리는 몰라도 돼! 부모가 우리를 남기고 부모가 돌아가시고 우리끼리 남았다는 것이 중요해! 우리끼리 잘살아보세!’ 이게 이방민족이에요. 해답은 없어요. ‘그런데 형님’ ‘왜?’  ‘그런데 우리가 죽잖아요?’ ‘워 죽으면 죽어야지’ ‘죽고 난 뒤에 어디 가는데요?’  ‘그건 모르지 살 동안만 우리가 서로 질서 있게 살기 위해서 법을 만들자, 우리가 법을 지키자!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평안과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법을 지키자!’ ‘예, 그럽시다.’

해답은 없어요. 해답은 계속 늙어가면서도 해답은 자꾸 차버리고 해답은 안 본체 가고 있어요. 이것이 이방민족이라는 오늘날 모든 사람도 사실 인생에 해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부모 죽은 것도 모르는데 해답이 왜 있어요. 부모가 죄 때문에 죽은 것도 모르는데 해답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법을 어겨서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저주 아래로 간다. 왜? 법은 살아있고 인간은 법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전부 다 저주하는 겁니다.

‘목사님, 그거 옛날 이스라엘이 했잖아요.’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이 해당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넘어지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지난주일 낮 설교가 뭐냐 하면 촛대가 넘어졌다는 이야기했지요. 특히 못사는 동네에 이 동네도 못살지만 촛대가 넘어지면 불이 퍼지잖아요. 유다나라가 법을 어겨서 넘어진 거예요. 유다나라가 넘어 졌다고 안타깝다 하지 마시고 유다 나라가 법 어겼다고 그 유다 나라를 멸망시키는 하나님은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입니까? 그게 살아있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그런 분입니다. 뭐 관심 없지요? 

하나님이 그런 분이에요. 법을 어겼다고 저주하는 분이에요. 너 한 달 수입이 얼마냐? 묻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제 수요일 설교에 이야기했어요. 용서받지 못한 것이 제일 불쌍한 거예요. 착하게 살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듯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이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 잘 알아요. 이스라엘이 법을 못 지키면 다른 민족은 말할 것도 없어요. 법을 안다는 인간도 못 지켰는데 법을 모르는 인간이 법을 지킬 수가 있습니까?  모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막에 제시한 마지막 카드가 뭐냐? 그러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용서받아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 용서받으려하니까 용서받으려면 자신이 하나님이 얼마나 엄청 무섭다는 것을 인식을 해야 용서받지 무섭지도 않는데 용서를 왜 받아요. 만만한데요. 만만한데 용서를 왜 받아요?  때려봐라! 하는데 용서가 됩니까? 한바탕 붙으려고 하지요. 지난 수요일인가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십일조 하는 것이 죄가 되고 주일성수하는 것이 죄가 된다고요. 율법이라 하는 것, 십일조 하는 율법, 안식일 지키는 그 율법은 하나님이 익히 할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키려면 지키려고 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인간의 본색이 하나님의 무서움보다도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게 잘 지키는가를 뽐내고 싶은 심보가 내부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요. 용서만 받으면 되는 겁니다. 다른 생각은 하덜덜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 간단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할 때 받아들이세요. 뭐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요. 용서받으면 되지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이거거든요. 저, 성경에 복음 나왔잖아요. 복음 나오면 반드시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복음의 조작이 나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세상이 어두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이 나오면 반드시 법의 조작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율법에 안식일 지키라하니까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담요 들지 않으면 그게 안식일 지킨 걸로 되었어요. 반드시 율법 있는 곳에 율법의 조작이 일어나는 겁니다. 반드시 그래요.

예수님이 말씀한 천국을 이야기하니까 바리새인들이 천국을 안다는 거예요. 그 천국에 자기들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반드시 천국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이미 천국의 조작이에요.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천국이라는 하는 것은 아무도 못 들어가요. 왜냐 하면 예수님이 천국을 만드시기 때문에 만드시는 분이 만들기 전까지는 아무도 못 들어가요. 엘리야, 모세 그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갔습니까? 변화산에서 엘리야, 모세가 천국 갔습니까? 아직 천국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묻는 거예요. 예수님이 언제 별세하십니까?

아브라함, 이삭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은 낙원에 갔거든요. 낙원에 가서 그들은 무슨 대기상태에 있느냐 하면 주님이 천국을 완성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부활의 첫 열매가 에녹이 아닙니다. 시간상으로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았죠. 에녹이 안 죽었죠. 엘리야가 예수님보다 안 죽었죠. 엘리야는 뭐 타고 올라갔습니까? 시체 없습니다. 72시간 찾아도 없습니다. 시체 없이 불 수레 타고 올라갔잖아요. 그런데 성경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부활의 첫열매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모세?  엘리야?  에녹?  누구라 했습니까? 예수님이에요.

이 땅에서 안 죽은 것은 그것은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닙니다. 부활의 세계가 아니에요. 부활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죽었다 살아나는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살고 싶은데 너무 성급하다보니까 미리 짐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민수기에 보면 길르앗 루우밴 지파들이 우리가 어디 놀러갈 때나 소풍 장소 정할 때 꼭 이런 현상이 있어요. 분명히 산 조금 더 들어가면 놀기 정말 좋은 곳이 있거든요. 있는데 차타고 너무 오랫동안 기진맥진 오다보니까 그만 입구에 잔디 얼마 있고 물 흐른다고 여기서 텐트 칩시다! 이렇게 나옵니다. 나중에 들어가 보면 야, 진짜 사람들이 왜 여기 안 오고 다른 데 들어가는지 이제야 알겠다,  다른데 좋은 데 더 많다는 거예요. 

르우벤 지파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자기 목초지 좋다고 그만 들어가지도 않고 요단강 맞은편에 떡하니 여기가 좋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주께서 하는 약속의 나라보다도 자기가 상상했던 나라가 곧 약속의 나라로 오인해서 그런 겁니다. 살기 좋은 데가 천국이 아니고 율법이 완성된 상태를 천국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이 완성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법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해서 못 들어가고 용서받아 들어가는 사람밖에 없어요. 거기서 용서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고백밖에 없어요.

내가 행한 모든 것은 죄뿐이요 따라서 이 죄에 대해서 용서하심으로서 피 발라서 갔습니다. 라는 고백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이라 하는 것은 오지 마라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인간이 행하고자 하는 그 의도가 있는 한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그러한 철조망 같은 역할이 율법인데 그 율법이 우리 내부까지 침투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현재 우리가 항상 성경을 볼 때 생각할 것이 ‘나만 배부르면 됐지 성경 이거 뭐 필요한데?’라는 생각을 가지시고 성경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있든 없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나는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봐야 돼요. 그렇지 않고 믿음 좋은 쪽으로 해 버리면 믿음도 없으면서 역시 나는 믿음 있어! 이렇게 되어 버려요. 나는 믿음 없다고 생각하고 들어가야 돼요. 믿음 없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성경에서 묻는 질문에 답변을 못할 때 ‘아 내가 그냥 안일하게 내 몸만 되어 버리면 되는구나! 하는 이 자체가 마귀의 시험이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  우리는 하나님이 있든 없던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를 통해서 율법이야기 하면서 바로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가 같은 인간인데도 이미 생각하는 것이 다르더라 이 말이죠. 다른 나라는 부모가 죽으면 나하고 상관없이 살아있는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 했는데 이스라엘은 우리가 밀어놓은 해답을 이미 제공받았다는 겁니다.

말로 이렇게 하는 것보다도 하나의 예를 들면 쉽겠지요? 신명기 4장 23절 24절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신 4:23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신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 뒤에 뭐가 붙었어요? 그냥 불이 아니고 무슨 기능을 하는 불이다? 소멸하시는 불이다. 사람을 아예 태워 죽이는 불이다. 무섭지요? 우리 보통 사람들은 나만 취직해서 잘 먹고 잘살면 돼요. 하나님은 관심도 없어요. 있는지 없는지도 구경도 못해 봤고요 있는지 없는지 죽고 난 뒤에 만나면 가만이지 이렇게 생각하지 하나님이 중요한 게 아닌데 이스라엘은 달라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뭐했다고 우리를 이렇게 겁주고 우리고 어떤 행동을 한다고 이렇게 우리에게 심판하십니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거나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이 멸망시킨다는 겁니다. 아주 특이해요 이런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아주 특이하다니까요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행복과 나의 번영과 나의 평창과 나의 잘됨을 나의 출세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이런 신은 이방인들이 갖고 있는 신이지 진짜 살아계시는 하나님하고는 완전히 아니라는 사실이 나타나지요.

우리는 이스라엘 자리에 가야될 이유가 뭐냐 하면 거기에만 어떤 하나님이 나오느냐 하면 진짜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얼마나 진짜냐?  유대나라를 B.C 586년 성전과 더불어서 홀라당 그것을 다 태워버렸어요. 소멸하는 불이다. 나는 소멸하는 불이다. 지금 장난 아니지? 그것을 저는 수요설교에서 이것을 두자로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을 ‘현실’이라 합니다. 이스라엘이 보는 현실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발생된 현실이고 이방나라의 현실은 인간들이 각자 지혜들을 짜내어서 열심히 노동하여서 그 결과로 생긴 문명과 문명을 이어나갈 때 그것을 현실로 보는 겁니다. 이방나라의 현실이라 하는 것은 구성요소인 인간들이 열심히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해서 일구어낸 지혜와 노동의 열매들이 모여서 그게 현실이에요.

거기는 기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고 구체적으로 배도 있고 석유개발 그런 것도 있고 정신적으로는 법제도, 복지제도 그런 것들이 갖추어져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본겁니다. 그래서 누가 취직을 한다는 말은 이미 갖추어 놓은 그 문명 속에 한 자리 차지해서 노동의 대가로서 돈을 버는 그것을 가지고 취직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디에 취직했습니까? 인간이 현실이라고 여겼던 곳에 취직을 해서 돈을 버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땠습니까? 이스라엘의 현실은 뭡니까? 언약대로 살지 않으면 소멸 당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이게 현실이에요.

이방인 종교에서는 아까 말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세계, 문명세계라는 현실이 있어요. 신은 어디 있느냐 하면 신은 밖에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잘 굴러가고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저 밖에 세워놓은 신에게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하나님은 무엇을 긍정을 하느냐 하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 문명세계를 이 현실 세계를 무조건 잘 하고 훌륭하다고 인정을 해 줘야 돼요. 인정을 해 주는 거예요. 인정을 해 주기 때문에 여기서 열심히 살면 문명세계에 네가 기여하는구나! 그래 내가 복주마! 열심히 살아라! 하고 복을 주시면 그 주신 복으로 우리는 월급 가지고 우리는 밥 먹고 살면 되는 겁니다. 아주 참 기특하고 훌륭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뭐에요? 이스라엘은 이게 인간 중심이, 인간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라 했습니까? 율법이 우선이고 하나님의 언약이 우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름대로의 계획이 따로 있어요. 우리 인간들은 지금 잘 먹고 잘살면 되는데 하나님의 계획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놓친 게 있어요. 오늘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는데 인간이 뭘 놓쳤어요?  왜 나를 낳은 부모는 왜 죽는가 하는 문제, 왜 죽는가 하는 문제를 우리는 밀어놓은 거예요.  에이 골치 아파, 나중에 늙어죽을 때 그거 생각하지 지금 생각하지 마! 우리는 자꾸 밀어놓은 거예요.

너희들이 죽는 이유가 바로 이 율법대로 언약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부모 죽듯이 너도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하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이 얻고 자하는 것은 뭡니까? 우리한테 그런 언지를 주는 하나님의 이유가 뭡니까? 물으면 혹시 우리를 살려내려고 그런 말씀 주십니까? 하면 아니, 너를 살려주려고 그런 말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실체의 내용이 뭔가? 언약이 언약대로 들어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 말씀 주는 거예요. 문명사회의 현실은 누구 중심이냐 하면 내 중심이에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현실이라는 게 얼마나 유동성이 많은가를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태권도 도장을 다녀요. 철수도 다니고 영희도 다니고 둘 다 태권도 도장을 다녀서 안면이 있어 만났습니다. 그런데 태권도 도장에 원장이 심판하다가 돈 먹고 해서 말썽을 일으킵니다. 둘 다 태권도 도장 다니지 말고 앞에 합기도 하자! 해서 둘 다 나와버렸어요. 그러면 둘 다 처음에 태권도 도장 갔을 때는 태권도 도장이 자기의 현실이 되었지요. 둘이 빠져 나와서 둘이 만났어요. 둘이 몰랐던 사람이었는데 빠져 나와 합기도 도장에 갔다면 그 다음부터 그 사람들의 현실은 뭡니까? 합기도 도장이 현실이 되지요. 보세요. 우리가 말하는 현실이라는 게 누구 중심입니까? 나 중심이잖아요. 나 중심입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태권도장 갔을 때는 태권도 품세 따려고 기도 하다가 합기도 가면 합기도 품위 따려고 기도 할 건데 하나님은 누구 장단에 맞춰야 합니까? 하나님도 되게 바빠요. 네덜란드하고 독일하고 축구한다. 네덜란드도 하나님께 기도 하고 독일에서도 기도 하다면 주님께서는 되게 바빠요. 이쪽에 한 꼴 넣어줘야 되고 또 이쪽도 한 골 넣어줘야 되고……. 우리는 진짜 해답을 미루고 있는 거예요. 해답을 미루고 축가 누가 이기느냐? 김연아가 스핀 돌다가 엎어지고 자빠지는 그것을 지금 기도 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우리가 지금 엎어지고 자빠지고 이 현실세계에서 얼마나 버티느냐 그게 기도 할 문제가 아니라는 이 말입니다.

주여! 해답을 주옵소서! 왜 그렇습니까? 그리고 그런 질문은 율법에 부합되고 합당한 질문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지금 사도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해답을 주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미뤄놨던 해답을 주면서 슬그머니 뭐를 집어넣느냐 하면 새로운 현실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 현실은 뭐냐 하면 전에는 우리가 폭행자요 죄인이요 죄인의 괴수요 안 믿는 사람을 미워했던 그런 사람인데 지금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 이 말이죠. 이 현실을 현재 사도 바울이 유령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입니다. 이 인간들이 있는 로마라는 로마의 환경 속에 B.C 160경에 그리스가 로마한테 멸망합니다.

인간 세상 현실의 역사는 자꾸 멸망하고 또 세워지고 또 멸망하고 또 세워지고 이럽니다. 멸망하고 세워지고 할 때에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 멸망하고 세워지고 하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우리가 죄인인데 구원하는 게 현실이구나 하고 오해하지 마시기바랍니다. 왜 그러냐 하면 둘을 겹쳐서 다 현실이에요. 현실인데 멸망할 때는 멸망하는 이유를 몰랐는데 해답을 미뤄놓은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이 헬라가 멸망하고 그리스가 멸망하고 로마가 세워진 것은 그 로마가 융성하고 번창하는 그것이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라고 그렇게 우리 마음에 확 드는 우리가 욕망에 부합되는 이런 나라의 융성이 이러 난갑니다.

만약에 여러분 집에 갑자기 50억이 들어왔을 때 누구나 이것을 생각해도 축복받았다 하잖아요.  그 50억 주는 것은 그게 축복이 아니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50억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돈이 오는 것이 현실아니라 하지 마세요. 그것도 현실은 현실인데 해답이 없는 현실이에요. ‘아, 그래 이 현실은 내가 예수 잘 믿으니까 복 줘서 했구나!’ 라고 우리는 진짜 정답 말고 우리가 그것을 보고 정답 있는 곳에 자꾸 왜곡시키고 조작된 다른 엉뚱한 해답이 우리에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꾸 말씀이 어렵지만 가까이 정답을 주시는 겁니다.

옛날에 우리는 죄인이었지만 지금은 긍휼을 입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거거든요. 그러면 이것을 보고 우리는 이야기를 해요. ‘그건 그거고 그건 고맙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문제는 현실을 살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데? 돈이 필요하잖아요. 우리에게 용서라는 은혜를 줬으면 이번에는 무슨 은혜를 줘야 된다는 말입니까? 죄마저 용서를 했으면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돈 마저 우리에게 주셔야 고맙겠습니다. 이래 나온다 이거죠. 해답을 받은 게 아니고 이것저것을 받은 거예요. 죽어서 천당 가는 방법도 일단 끄집어 내꺼 만들고 돈도 있어야 산다는 이것도 내꺼 만들고 이것저것 주신거예요. 거기에 여전히 해답을 전혀 받은 적이 없는 겁니다.  십자가로 구원받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은혜 주셨으면 돈도 이제 주실꺼죠? 라고 손을 내 밀 때 이것은 뭔가 잘못된 거예요.

이제 하나님께서 현실을 어떻게 만드는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여기에 공터가, 큰 구멍이 생깁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실이라 여겼던 인간 세계에서 구멍이 뚫리게 됩니다. 구멍이 뚫리면서 여기서 우리는 인생이 왜 죽습니까? 해답이 뭡니까? 해답을 구할 때 해답을 구하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불에 의해서 완전히 화상을 입어요. 그 해답을 알아서 뭐할 건데? 이렇게 나와요. 해답을 알아서 뭐할 건데?  우리는 해답이 돼야 되지 우리가 해답을 알면 안돼요. 우리자신이 해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해답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 해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기 때문에 이미 우리가 해답인 것을 말씀을 통해서 이미 해답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해답이 뭐냐 13절, 14절이 해답입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내가 전에는 폭행자였고 훼방자였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뭐가 됐습니까? 하나님의 직분을 맡는 하나님의 사도가 되었다는 이 말이잖아요. 그렇죠? 이게 왜 해답인지 알겠습니까? 자기가 사도바울이 해답을 가졌습니까? 아니면 이미 해답이 되어 버렸습니까? 해답 속에 이미 놓여 져 있어요. 그렇지요? 내가 뭘 가지느냐? 내가 이 컵을 가지느냐 이 문제하고 내가 혹시 남을 때린 적이 없을까? 이 문제하고 달라요. 내가 이 컵을 소지하면 현재 컵이 없는데 추가적으로 하나 얻는 게 되지만 내가 혹시 누구를 때린적이 있을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잘못이라고 내가 죄인이라고 내가 누구한테 고소당해도 할 말이 없어! 비록 컵도 가지고 돈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누가 나에게 저 사람이 나를 때렸습니다. 하는 순간 나는 이런 것을 가진 것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게 되지요. 그게 바로 정답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리 이 세상에서 돈 많고 누려고 나는 애초부터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인간일 수 있다는 생각을 언제 한번 해 본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십일조 해도 소용없고 교회와도 소용없고 성경공부해도 소용없고 목사가 되도 소용없고 나는 애초부터 소용없는 인간이 아니냐, 그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존재가치도 없는 그런 존재이다. 라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십자가 앞에서 다 들어나거든요. 그러면 십자가가 해답이라면 진짜 우리가 해답을 가진 것으로 하지 말고 해답 속에 놓여 있다면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사람으로 지금도 다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저는 하나님께서 구멍을 뚫었다, 말씀으로 구멍을 뚫는 거예요. 뚫으면 여기서 쟁반처럼 또 그릇처럼 구멍이 생기는데 이 구멍이 뭐가 답이냐 하면 이렇게 구멍이 생겨야 여기에 뭐가 담기느냐 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제대로 발산하면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라는 말을 같은 말을 해도 나는 쓸모 짝도 없는 인간이야 라고 전제를 깔고 난 뒤에 ‘주여, 너무나 불쌍히 여겨 감사합니다.’ 하고 ‘나 아무래도 쓸모 짝이 있으니까 사용했지, 이런 가운데서 뭘 하나 추가적으로 알면 되지? 옳치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내가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구나!’  이것하고 다릅니다.

선교사 중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선교사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아는 사람밖에 없어요.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선교사나 목사나 집사나 되려면 오직 나오는 게 긍휼만 나와야 돼요. 바로 그 해답을 사도 바울이 지금 자진해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겁니다. 내가 해답을 가진 것이 아니고 해답이 나를 가지고 해답으로 지금 다루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평생을 살아온 것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서 살아 온 겁니다. 전에는 내가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자부했는데 이제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심지어 더 심하게 말해서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나 같은 인간이 죄만 짓고 다닙니다. 어떻게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하는 식으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나가 나를 구원할까? 주 예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식으로 가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낮선 현실이에요. 다른 말로 우리가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우리 이방인으로 도저히 경험하지 못했던 그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어떤지 신명기 5장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어떤 지경에 놓여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신명기 5장 24절을 보면

신 5: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신 5: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지금 모세가 이 이야기하는 취지를 제가 아주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언제 군에 오겠다고 군에 왔습니까? 나라에서 오라해서 왔는데 왜 이렇게 빡세게 훈련시킵니까? 이런 이야기이에요. 내가 원했던 현실이었다?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왜 저를 이렇게 궁지에 몰아세우십니까? 라는 그런 고백이 여러분 일상에 매일같이 나와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의 동행이 맞습니다. 저도 남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라는 투정아닌 투정이 나와야 돼요. 여러분 뭐가 재밌습니까? 극히 재미나고 즐겁게 하하호호 거리다가도 갑자기 내가 뭔가 즐겁고 기쁘다는 것이 왠지 낯설다는 겁니다. 왠지 낯서야 돼요. 이상하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야, 신나는데 왠지 이 세계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하는 이 세계가 왠지 낮설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왜냐 하면 노아가 홍수올 때 그랬거든요.  그렇잖아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갈 때 갑자기 뭐가 임했습니까? 홍수가 임했죠. 딸이 결혼식 하는데 갑자기 부산에 홍수가 오면 뭐가 되겠습니까? 왠지 낯설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내가 기뻐 하고 세상것으로 좋아하고 즐거워할 그런 존재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니야 내 현실은 이 현실이 아니야 다른 현실이 따로 있어, 세상 것으로 마냥 좋아할 입장이 못돼, 아니야 이것 말고 다른 현실이 있어! 이것을 감 잡아야 돼요. 이것을 감 잡아야합니다.

애는 공부 잘하지요, 남편은 돈 잘 벌지요, 교회는 날로 부흥되지요, 등록교인은 한 주간에 50명씩 되지요, 목사님이 신이 났지요, 선교사 200명 더 파견한다고 설쳐대지요, 이렇게 할 때 아니야 왠지 낯설어! 이거 아니야 이거 분명히 신명기 4장 5장 분명히 아니거든요. 신명기 4장, 5장이 뭐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이런 지경에 왜 저를 보내셨습니까? 제가 사람하고 놀겠습니다. 무서운 하나님하고 놀기가 너무 무섭습니다. 이게 신명기 4장 5장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인데 그런 하나님을 잊어버렸어요. 나중에는 젖과 꿀이 흐르기 때문에 거기에 만끽해 버렸어요. 야, 땅 좋다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는 잘해요. 하나님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것으로 끝났어요. 이제는 요거 내꺼에요. 이 땅 내꺼고 이 민족 내꺼고 난 여기서 살리라

하늘은 구름 떠있고 바다는 배가 떠있고 철마다 누리는 이 세상 아 대한민국 이런 것처럼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현실에 만끽하고 그것에 흠뻑 빠져들지요. 그런데 사사기 기드온에게 누가 찾아왔죠? 하나님이 찾아왔죠. 천사가 찾아왔잖아요. 그런데 기드온의 첫 번째 응답이 뭡니까? 아이고 반갑습니다. 이렇게 했겠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저 같은 자에게 왜 찾아오십니까?’ 보세요. 다르잖아요. 달라요. 하나님이 왜 찾아오십니까? 저들과 저들처럼 살고 싶은데 그저 눈에 보이는 인간들과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이 문명사회, 저는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초막셋을 짓고 여이가 좋습니다. 죽는 거 나중 문제이고 죄 문제는 나중 문제이고 여기서 내가 편하게 살게 해 주옵소서! 라는 그것이 우리의 전부라면 우리는 매우 수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내가 전에 폭행자이지만 은혜를 입었다는 이 말은 나 같은 사람 찾아나서기 분명히 이런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거의 없는 줄 아는데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 왠지 낯설어지는 그런 휘기한 현실에 사로잡힌 사람이 분명히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자기 이야기를 했지만 사도 바울이 원래하고 싶은 여러 가지 이야기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11절에 보면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전에는 폭행자요 지금은 은혜를 받은 내가 너에게 주님에 의해서 증거함이다. 나 같은 사람 혹시나 있을까? 싶어서 따라서 돈을 얼마나 더 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성령이 있는데 이 성령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이의 영이고 내가 그런데 관심을 갖고 있고 그리고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을 나의 몸도 다시 살리신다는 이것에 내가 마음이 빼앗겼으며 그로인하여 세상 사람들, 세상적인 돈으로 먹고 살고 잘되고 출세하는 그것이 왠지 낯설어지는 그런 사람 혹시나 계십니까? 이런 말이에요.

참 어렵지요? 로마서하고 디모데전서 하고 결합시켜 보자 이 말이에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나는 폭행자요 나는 은혜 받았습니다. 나같은 사람?  나도 그래요. 이게 아니라 바로 로마서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 와서 로마서처럼 나처럼 관심 있는 사람 혹시나 있습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그 말은 진짜 자기가 죄인이고 진짜 은혜를 입었다면 관심사가 나 구원받았다가 관심사가 아니고 로마서 8장에 관심을 두고 산다 이 말이죠. 성령이 와서 어떻게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거기에 관심이 있다 이 말이죠. 내가 어떻게 공부하면 승진하고 어떻게 하면 출세한다는 것에 관심 있는 게 아니고 승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승진이 잘 되더라도 잘되니까 왠지 낯설고 뭔가 나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고 이것은 내가 좋아할 내용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 이 말이죠.

특히 장사하시는 분, 우리교회에도 장사하시는 옷가게 하시는 분이 있지만요 요즘처럼 장사 안 될 때 손님 하나가 오게 되면 진짜 천사를 대접하라 이상으로 대접합니다. 대접하고 싶어요. 그런데 잘 꼬여서 물건을 두 개 살줄 알았는데 세 개 사게 해서 남는 것 없습니다. 하고 남겼을 때 성령 받은 주인이 어떤 마음이 있느냐 하면 이상하다 뭔가 성공은 했는데 이 상황이 왠지 낯설어, 이런 쪽으로 계속 살 그런 존재가 아닌 것 같아, 뭔가 찝찝하고 그런 생각이 들다가 또 손님올 때는 그런 생각이 들다가 진짜 손님이 안 오면 짜증나고 이렇게 못살겠습니다. 하고 짜증부리고 그러지요.

사도 바울이 하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가 오늘날 사람들이 이 세상에 교회 부흥용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고 나같은 인간 혹시나 없는 줄 아는데 혹시나 계십니까? 라고 묻는 투로 디모데전서를 쓴 거예요. 그래서 디모데야 네가 나처럼 고생해 봐라 디모데전서 이야기가 디모데야 내가 알거든 이 복음 가진 자의 운명을 내가 해 봐야 아는데 너도 복음을 위해서 나처럼 고난받아라, 고난받아라가 아니라 아예 너의 인생 고난 투성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디모데전서 1장 18절에 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복음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게 이게 수월한 인생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복음으로 산다는 게 복음만 이끄시는게 아니고 그 동안 복음을 양생시킨 복음을 만들게 했던 그 어두운 세력이 복음이 있는 곳에 같이 달려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귀신같이 압니다. 똥파리가 먹이 있는 곳을 귀신 같이 알듯이 성도가 떴다 하면 마귀들이 귀신같이 알아요.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거기에서 인간의 행복과 기쁨을 다 찾도록 그렇게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깜박 속아 넘어가서 헤헤거리면서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성령께서 그래 이건 아니지 이게 전부가 아니지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게 아니야 이것은 해답이 아니야 해답은 따로 있어! 인생은 왜 죽을까? 소멸하는 불 앞에서 이스라엘은 왜 멸망했을까?  아 이것 좋아하다 멸망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것이 뭐냐 하면 우상숭배하지 마라 했죠. 구약에서 우상이 등장하지요. 신약에는 율법이 완성되잖아요. 율법이 완성되면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율법이 아니고 복음이 등장해요 복음이 등장하면 여기에 병행해서 우상의 완성도 나옵니다. 우상의 완성도가 뭐냐 하면 이게 마귀에요.  마귀입니다.

이게 구약 때는 이스라엘의 내부 문제였습니다. 신약에는 이게 이스라엘 내부를 벗어났어요. 이스라엘의 울타리가 촛대가 넘어졌기 때문에 온 천지가 화재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에 있던 소멸의 불이 촛대가 진노의 불이 넘어짐으로서 온 지구상 온 나라에 하나님의 마귀 색출과 마귀에 대한  저주가 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디모데야 네가 새로운 현실에 들어온 것을 내가 축하드리며 앞으로 네 인생에 대해서 이 마귀가 만든 이 세상과 싸우면서 네가 고생 꽤나 해야 된다 왜?  나도 그것을 통과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40110b

(죄인구원)―이 근호 목사

성경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는 식으로 보라 해서 봤는데 내가 해답을 얻은 게 아니고 내 자체가 해답이 이미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해답을 내가 얻는 것과 내가 이미 해답으로 살아가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디모데전서 1장20절을 보면

딤전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사단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뭐를 아느냐 하면 사단이 어떤 식으로 꼬이느냐를 사도 바울이 알아요. 사도 바울은 당신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하는 자체가 인간으로서는 성립이 안돼요. 왜 그러냐 하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되고 싶어서 이스라엘 되었습니까? 제가 근본적인 것을 묻는 건데 절대로 그런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애굽에서 살고 있던 그 사람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쳐 들어온거예요. 하나님이 모세를 그냥 보낸겁니다.

그들이 잘 살았어요. 잘살았는데 바로가 압박을 가했거든요. 압박을 가하니까 히브리인들이 조상의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압박을 가한다는 것이 창세기 15장에 보면 이미 아브라함에게 예언이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4대만에 나온다는 게 약속이 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4대만에 나온다는 것이 이미 해답이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해답이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해답을 소유하거나 알려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예상하는 해답이 여러분들이 성도된 것는 해답을 쥐고 있으면 안돼요. 내가 살아가는 게 하나의 이스라엘의 살아가는 것이 그 자체가 해답이라니까요.

그렇게 돼야 되는데 만약에 해답을 내가 쥐고 있으면 이것은 누구한테 말려드느냐 하면 사단에게 완전히 밥이 돼요. 야, 너 5년 전에 믿음 좋았잖아! 교회에 충성 했잖아! 왜 지금 와서 교회도 안다니고 왜 이래?  열심히 해! 열심히 해야 낙심을 해야 다시 일으켜주지! 자꾸 해답이 우리에게 속삭인다는 거예요. 자꾸 속삭여서 격려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믿음을 북돋우는 것 같은데 이게 자꾸 미끄러져 가거든요. 해답을 내가 해답이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해답을 쥐었다가 다른 것에 신경 써 버리면 놓쳐 버려요. 내가 아침 10에 믿음 좋았다가 딴게 신경 쓰면 오후 2시 되면 내가 믿는 사람 맞나? 이렇게 회의가 온다 말이죠.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 소유케 함으로 말미암아 그 소유가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단이 먼저 알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교회에 낙심과 절망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아무리 낙담하고 낙심하고 패배해도 그 자체가 해답이라는 이미 그 소용돌이 속에 우물 속에 휘말려가는 거예요. 죄 져야 되고 망해야 되는데 그게 그들이 보여 줄 해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생 살면서 나밖에 모르고 돈만 챙기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아가야 될 이유가 그 자체가 우리가 보여 줄 해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안양강의가 끝난 뒤에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라고 마지막에 질문을 했어요. 하나님한테 방앗간이 있는데 방앗간은 뭔말이냐 하면 고추를 넣으면 고춧가루가 나오지요? 쌀을 넣으면 찹쌀떡 나오고 우리의 죄를 넣으면 방앗간에서 의가 튀어나와요. 우리가 죄짓는 이것이 재료가 돼요. 주님의 의를 보여 주는 재료가 됩니다. 전에는 내가 폭행자요 살인자요 죄인 중에 괴수죠.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는 재료가 돼요.

이것은 사도 바울이 괜히 겸손을 떨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야곱의 인생이 어떻습니까? 야곱의 인생이 죄 짓는 인생입니다. 그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내꺼 다치면 용서하지 않는다! 어디 감히 내가 삼촌 집에서 번 돈과 자식을 누가 나를 공격해? 밤중에 튀어나오는 그 정체를 밝혀라! 나는 이것을 지키겠다 얍복강에서 한 바탕 씨름해서 싸움을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분이 처음부터 복을 주셨던 바로 복 주셨던 분을 야곱이 붙들고 죽이려고 달려든 거요. 주신 복에 덮쳐야되는데 그 복을 자기의 소유화시키는 겁니다.

나 복있다, 나 복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러한 짓을 한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여 주기 위한 하나의 해답인 것을 해답에 말려든 사실을 나중에 알지요. 그래서 야곱은 나중에 야곱의 아들들에게 축복할 때 자리를 바꾸지 않고 자리를 바꿔서 해야 되는데 있는 자리에 해 놓고 어긋맞게 합니다. 큰 자가 작게 되고 작은 자가 큰자가 된다 작은 자를 작게 만들고 큰자를 크게 만드는 그 과정 속에는 하나님의 해답이 안나온다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이 익히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완전히 인간의 예상을 꺽어버리고 작은 자라고 무시당한게 큰자가 되고 큰자라고 의시되고 자만하는 것들이 작은 자되게 하는 그런 조치로서 지옥갈 에서는 맏이가 되어야되고 천국가야될 야곱은 둘째가 돼야 돼요. 둘째가 돼서 그것 보다도 더 낮아져야 돼요.

이것을 바꿔치기한 것은 누가 바꿔치기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와서 바꿔치기한 거예요. 이것은 하나의 모형인데요.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어느 누구보다도 낮아져서 그래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다 무시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물론이고 모든 민족들도 바라바를 살려낼까 강도를 살려낼까 예수님을 살려낼까 할 때 사람들은 누구를 선택했습니까? 예수를 죽이라고 했지요. 예수를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보는 겁니다.

세상이라는 것이 해답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렇게 반대로 모든 게 돌아가는 악마에 속한 세상속에 우리가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반대로 바뀔 생각을 하지 않는데 성령이 와서 그것을 반대로 바꾸는 작업을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인 복음에 의해서 그것을 바꿔지게 그것을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 강의를 정리해 보면 우리 자신이 해답입니다. 우리 자신이 해답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구원받으려고 하지 말고 이미 해답이 되어버렸는데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안목에 새로운 게 나와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아까 이야기한 사단이 이 복음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실, 이게 신약적인 특징이에요. 구약과 달리 신약적인 특징이 되는 겁니다. 구약에는 우상숭배였죠. 신약에는 사단이 바로 결론이 나오는 사단이 역사하는 거예요. 그게 첫 번째 중요한 점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모든 것이 해답이기 때문에 그 과정 속에서 a에서 b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진리가 나옵니다. 나는 옛날에 죄인중에 괴수였지만 지금은 긍휼을 받았다는 그 바꿔치기하는 이 과정, 죄인을 의인으로 바꿔주는 그 과정에 주목함으로서 내가 잘났다가 아니라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신 주님이 영광 받아야 됩니다. 하는 쪽으로 나와야 됩니다.

마귀가 이것을 싫어합니다. 마귀가 이것을 싫어합니다. 마귀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이기 때문에 인간은 일은 인간이 처리해야 되지 왜 중간에 주님이고 하나님이 왜 끼어 드느냐 니가 할 수 있는데 왜 어린 애처럼 남한테 자꾸 의지하느냐? 이렇게 마귀에 시험 드는 겁니다. 아마 알렉산더와 후메내오가 그렇게 해서 시험든 것 같아요. 사단에 든 사람이 다 특징이 그래요. 본전 찾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사단이 든 사람이 있었죠. 가룟유다죠.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은 이유는 본전이라도 찾아보겠다고 그렇게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되찾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죄인 되기 싫은 거예요. 그냥 용서받고 긍휼받기 싫고 내 힘으로 뭔가 일구어내고 싶은 겁니다. 그게 사단의 속한 모든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는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왠지 낯설어요. 그런데 그러고 싶은데 그게 이상하게 용납이 안되는 것 같아요. 성령에 의해서 자꾸 용납이 안돼요. 왜? 우리가 해답이어야 하니까 그렇습니다. 해답은 두 가지 다 있어야 돼요. 우리는 이래서 죄인입니다. 그런데 용서 받았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우리 안에 다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체가 해답으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자동차에 보면 바퀴가 있습니다. 바퀴에다가 뭔가 이름이나 색칠을 해 보세요. 그 바퀴 굴러갈 때 마다 누구도 같이 굴러갑니까? 이름도 같이 굴러가듯이 우리네 짧은 인생도 주께서 이렇게 굴리시는 하나의 주님께 달린 타이어처럼 우리의 모습을 늘 반복적으로 보여 주면서 계속 굴러가고 있는 거예요. 죄인이었다가 의인인줄 알았다가 다시 죄인 되었다가 주님께 용서해 주셔서 감사하다가 또 다시 죄 지었다가 바퀴 굴러가듯이 매일 이렇게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세상 좋아 했다고 후회 되었다가 다시 세상 좋아했다가 후회되었다가 후회되고 잊어버리고 또 세상 좋아 했다가 또 후회됐다가 하는 식으로 이건 아닌데 자꾸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그 다음에 여기 15절 봅시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해석을 제가 한번 적어볼께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 다음에 중요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주께서 세상에 임했다’ 라고 할 때 여기서 우리가 아는 단어 하나도 없어요. 왜 우리가 이것을 해석하고 풀 수가 없느냐? 그 이유가 이 끝에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임했다는 것에 이 세상에가 우리하고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세상은 뭐냐? 이게 어두운 세상이에요. 어두움이에요.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 1장 4절 보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볼 때에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 세상을 뭐로 보느냐 하면 세상을 악한 세대로 봤어요. 우리가 세상이라 하는 것은 공간으로 봐요. 우리가 보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지평선 수평선 저것을 세상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세대에 대해서 이것을 시간으로 따집니다. 이 세대, 시간으로 세대라 할 때는 다른 세대가 있다는 거죠. 우리가 이 세상에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 말고 다른 데를 뭐라 합니까? 하늘 또는 천국이라 하잖아요.

공간 개념으로 봤을 때 이 세상을 죽어서 떠나면 어디로 간다? 천국 간다. 또 땅 밑으로는 지옥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세대로 보면 이 악한 세대 말고 무슨 세대가 옵니까? 이 악한 세대가 이 세대라면 오는 세대가 있어요. 그러니까 천국을 설명할 때 하늘나라 온다고 하지 않고 오는 세대가 있다는 거예요.

올해가 말띠죠. 말띠라면 말띠 지나면 다른 띠가 또 오겠죠. 말띠 지나면 다른 띠가 온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말띠하고 말띠 다음이 무슨 띠입니까? 양띠입니까?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데 말띠 세대하고 양띠 세대하고 차이점이 없어요. 날짜 보면 맨 그 날짜인데 이게 그냥 악한 세대라는 말은 악한 세대를 누가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앞으로 올, 오는 세대가 미리 악해 라고 이야기해 주는 세대입니다.

그러면 공간은 여기서 떠나면 그만이지만 세대라 하는 것은 떠날 수가 없어요. 그 세대, 그 전체를 두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고, 죽으면? 죽어도 안돼, 죽어도 매일 그 세대에요. 왜?  이미 띠가 말띠이기 때문에 그것도 백 말띠이기 때문에 .... 새로운 세대에서는 예수님의 세대가 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세대는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는 거예요. 이 땅에서 보면 세대가 오는 거지만 주님이 오게 되면 세대가 없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여기에서 이 세상은 뭐냐? 악한 세상으로 보는 겁니다. 악한 세상으로 보기 때문에 악한 세상에서 주 개념의 악한 세상에 메시야를 원해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이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주께서 오실 것을 기대했죠. 구름타고 오신다고 믿었어요. 그들은 믿었습니다. 왜?  다니엘에서 구름타고 오신다고 했으니까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 당신은 메시아라 하는데 구름타고 안 왔느냐고 시비를 걸었어요. 당신은 메시야인데 왜 구름타고 안 오느냐? 그 유대인 율법사들이 말하기를 메시야가 어디에서 태어나느냐?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요. 그것을 헤롯 왕 때 이미 알아챘어요. 그래서 베들레헴에 2살 아래는 다 죽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나게 되면 그까짓 별까지 동원했으면 죽이지말고 우대해야 되지 않습니까? 2살 밑에 아이들 보육원 만들어서 잘 키워서 그 중에 메시아 하나 나오면 이것은 진주 하나 건지는 것처럼 참 좋잖아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 태어난다는 정보를 알고 그것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고 죽일 생각을 하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왜 그래야 되는데요? 이게 왜 우리의 루트를 통해서 안 나타나느냐 왜 동방박사라는 이방인에게 별이 나타나서 하는 방법은 자기들의 율법 책에 보면 그게 없어요. 왜냐 하면 메시아는 독점적입니다. 메시아는 유대나라만 알아야 돼요. 왜? 에스겔에 보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다른 이방민족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은 이방민족은 곡소리나 다 죽어야 돼요. 오직 우리들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다 죽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께서 이 세상에 임했거든요. 임할 때 오늘 본문을 보면 뭘 구원하려고? 죄인을 구원하려고 그들은 도저히 뭐가 될 수가 없느냐 하면 자진해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건더기가 없어요. 그런 근거가 없어요. 아, 이것은 비극중에 비극입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한다는 것은 참 좋습니다만 성경공부를 함으로서 우리가 더욱더 죄인되어야 되는데 일반교회에서 성경 공부한다는 만큼 전부다 도를 닦아서 점점 도사의 길로 가요. 그것도 단계를 몇 단계를 7단계, 10단계 해서 1단계 한 사람은 2단계, 2단계 한 사람은 3단계 해서 10단계 띤 사람을 보고 싶어요. 어떻게 사는 지 보고 싶어요.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않는지 내가 한번 보고 싶어요.

전지현이 연기하는 것 봐도 마음이 유혹되지 않는지 한번 보고 싶어요. 이영애 이런 사람 앞에서도 유혹 되지 않는지 유다는 김수현 앞에서 안 반하는지 한번 보고 싶어요. 어느 여자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차를 막는 남자를 안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갑자기 내려와서 세상에 이런 보디가드, 훌륭한 분이 어디 있어요?  ‘도 매니저 살려줘!’하니까 도매니저가 등장해서 살려주잖아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라고 있어요.

주님이 차지할 위치가 먼저 세상이 악한 세상이라고 자위해야 돼요. 안 그러면 주님이 안 보여요. 그러면 주님이 안 생겨요. 주님이 안 보인다니까요. 나는 이 세상에 죄지을 그런 정도가 아니고 아예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못 빠져나와요. 우리는 돈 없이 못살아요. 죽이던 밥이 되던 예수 믿던 안 믿던 간에 우선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은 이 땅의 사람들 말을 고개숙이고 그 사람들에게 따라 줘야 돼요. 

우리가 무슨 용기가 있다고 우리는 뭐가 대단한 배포가 있다고 아니요 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예 해야 겨우 먹고 살까 하는데 뭐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아니오가 됩니까? 우리는 뭐가 생긴다고 하면 다 예예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입장인데 악한 세대에서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주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뭐해야 돼요?  여러분 교회 다니십니까? 교회가 악합니다.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바로 인간들, 죄인들 집결소입니다. 각자 한 주간 지은 죄를 들고 와서 그것 감추기 급급한 그 모습들이 예배라는 형식으로 감출 수 있다고 착각한 그 죄인들의 모습의 바로 이게 교회에요. 그 때 주께서 십자가 피가 의미가 있는 거예요. 착함에다가 피까지 알게 되어 더 착해지고 뭐 이런 것인 줄 압니까? 아닙니다. 그 피는 지식이에요. 그런 피는 선지국에 많아요. 그 피 말고 이 피가 나에게 경험되려면 정말 어떤 행위라도 용서 안되는 존재가 바로 나인 것을 피 앞에서 고백하고 자인해야 돼요.

그리고 십자가 사건은 뭐냐 하면 예수님마저 버림받은 곳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무섭습니까? 하나님은 죄인을 버림을 주시는 거예요. 마땅히 우리가 버림받아야 마땅함을 알아야 돼요. 왜?  어떤 말씀에도 나는 지키지를 못했으니까? 죄인을 구원하러온 메시아,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 구원 다 되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악한 세대에서 주께서 오셨는데 죄인을 구원하러 왔다, 라고 할 때 다시 어디로 가느냐 하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야 되거든요.

주께서 죄인들을 구원한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세상이 마련됩니다. 그러면 기존의 세상하고 비눗방울이 달라요. 이쪽에서는 사단이 역사하는데 여기는 메시아 이용해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이런 사단적인 현실이 있는 반면에 이쪽에서는 진짜 나는 죄인이고 주님이 오셨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주님만 찬양하는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 천국이 이곳과 같이 여기에 속해 같이 살게 됐지요. 자연적으로 사단은 이쪽을 향하여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핍박 각오해야 됩니다. 밉상 받아야 돼요.

사도 바울의 이런 이야기가 여기는 짧게 되어 있지만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아주 길게 되어 있지요. 너희 원수가 집안 식구니라, 내가 며느리와 시어미를 불화하게 만들고 누가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다시 보니까 사단의 세계와 결합이 되니까 이 가운데서 핍박과 고난이 있는 것이 결합이 되니까 비로소 마태복음 10장 말씀이 이해되지요? 집안 식구가 나의 원수다, 핍박을 하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상식적인 것을 알아야 되는데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두 세 사람 이상을 공동체라합니다. 그 공동체 가운데서 혈연공동체, 피로 나눈 공동체가 있어요. 그게 가족입니다. 그런데 이 가족이라 하는 것은 왜 생기느냐 하면 이것은 육신의 표시로 생기는 거예요. 예수님한테 동생이 있다 했지요. 예수님하고 같은 피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태어났고 다른 것은 요셉과 마리아 속에서 태어났는데 예수님의 가족이 있을 때 그 예수님의 가족이 왜 있는가! 이유는 사람들이 몰랐는데 마태복음 12장 끝에 보면 나와요. 제자들의 말이 ‘예수님’  ‘왜?’ ‘예수님 엄마하고 동생들이 왔습니다.’하니까 이왕이면 좋은 소리 하면 되잖아요.  예수님이 뭐라 하느냐 하면 ‘누가 내 동생들이고 누가 내 모친이냐?’듣는 모친 기분 나쁘겠어요.

누가 내 동생들이고 내 모친이냐? 하늘의 내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이고 내 모친이니라. 라고 했어요. 예수님께서는 동생이 있는 줄 압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동생하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분명히 알면서도 이 세계와 이 세계를 예수님이 계속 구분해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쪽 사단의 세계에서 이쪽으로 가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어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임해야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2장에서 유명한 혼인잔치가 있어요. 가나안 혼인잔치, 그 가나안 혼인 장치에 하필이면 포도주가 떨어졌어요. 주께서 사건 만드시는 겁니다. 마리아가 하는 말이 포도주 떨어졌다 할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답변이 그거에요. '여인아,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이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인이 생각한 말과, 마리아가 생각한 그 세계관과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내가 왔다고 생각하는 그 세계관이 잘못 됐다는 거예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관의 현실에 주께서 뭔가 보탬이 될 것이라고 여기고 찾아온 세계관 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주님께서는 구별 짓기 위해서 분리시키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좋다는 것을 전부 다 끌어 땡길 생각을 하는 거예요. 예수여!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너 같으면 뭔가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할 때에 예수님이 여인아! 포도주 떨어진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여인이 생각하는 세계관에 내가 기여할꺼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지금 나의 세계관을 전혀 이해 못했던 일이다 말입니다.

그러면 빠이빠이 해야 되는데 그런데 왜 갑자기 물을 길러 붓고 그것을 열어보니까 이게 뭐 마르샤쥬 150년산 프랑스 포도주도 세상에 이런 포도주를 생전에 먹어보지 못했다는 거예요. 왜 포도주를 만들어 줍니까? 그 마리아의 잘못된 세계를 접수하시는 겁니다. 왜? 새로운 세계관은 죄악된 세계관이 접수되어야 그 바탕위에서 죄는 죄대로 드러내면서 주님의 세계가 펼쳐지는 겁니다.

여기서 어려운 것은 뭐냐? 우리 손에서 세계관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잡으려고 손을 내 밀잖아요 손이 잘려져야 돼요. 그래서 팔도 짤려져서 이제는 내밀 손도 없고 내밀 팔도 없어 질 때 이미 우리는 그 세계에 우리가 도달되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구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해답이 되어 버렸어요.

제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것을 누가 믿습니까? 이게 성령이 와야 믿어져요.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주께서 이런 분이라는 해답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차라리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훨씬 더 우리한테 맞지요. 그래, 전에는 나를 믿었는데 이제는 예수를 믿어야지, 무슨수로 어떻게 믿습니까? 결국 예수님을 조작할 수 밖에 없어요. 믿을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믿을 수 밖에 없거든요. 그게 전부 다 이것은 악마적이고 사단적이죠.

주님이 내 손에 다루어집니까? 주님이 들었다 놨다 됩니까? 주님이 요물이에요? 우리가 주님을 다루는 요물이에요? 안 되잖아요. 주님이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해야지 어떻게 주님을 머슴 부리듯이 할 수 있습니까? ‘주님, 여기 물 흐르는데 채워줘!’ 그거나 ‘우리애 성적 떨어졌는데 올리게 해 줘!’ ‘성적 올리게 해 주시옵소서!’나 그냥 반말로 ‘성적 올리게 해 줘!’해도 똑같은 말이에요. 내용이 똑같은 거니까 아예 반말로 하는 게 솔직해요.

‘죄인 중에 내가 여기 예수께서 죄인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임했다.’여기 짧은 문장에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 전체가 다 들어있습니다. 공간 복음서라고 하는데 관련되어 있는 복음서를 공간 복음서라 하는데 요한복음은 공간복음서가 아닙니다. 마태 마가 누가가 서로 내용이 연결되기 때문에 공간복음서라 하는데 공간 복음서 모든 내용이 이 한 마디에 다 들어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왔다고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을 때에 세례요한이 하늘나라에 대해서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지요. 참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입니까? 저 혼자 재미있는데 하늘나라 왔다고 해 놓고 예수님이 잡히니까 하는 말이 오실분이 당신입니까? 신천지에서는 그 기준을 두고 세례요한은 구원 못 받았데요. 참 그러니 신천지죠. 희한한 천지죠. 신천지 이 사람들이 뭘 모르냐 하면 성경 공부해서 알면 아는 것을 소유하면 구원인줄로 알고 있어요. 세례요한 자체가 해답인줄 모르고 세례요한이 몇 개 놓쳤다고 해서 그것을 구원 못 받았다고 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한국교회와 똑같은 레벨이기 때문에 뭔가 믿고 알아야 구원받는 줄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기꾼들이고 마귀 적이에요. 그게 마귀 수법이에요. 성경공부 많이 하시고 성경구절 외우면 구원 받습니다 하는 것은 여호와 증인하고 똑같은 거예요. 지금도 성경구절 달달 외워서 하는데 많이 있어요. 네비게이터, 일반 대학선교 단체도 그렇고요 성경 달달 외우면 살쪄! 교만해서 살쪄! 뜬거 없어요.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못 알아본 그것이 자기의 기능이에요. 그게 해답으로서 다루어지는 그 기능이 그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세례요한 보기에 세례요한의 시간관은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곧바로 심판이 있어지고 완전히 불바다 되고 주께서 구원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대로 된 죄인을 만들어 줘야 돼요. 만드는 방법 예수님이 떠밀려야 돼요. 메시아로 오신분이 자기 백성한테 떠 밀려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살해당할 때 그때 그들은 제대로 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쳤잖아요. 그러면 그것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까? 그걸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의 죄로 인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을 알 때 아브라함은 구원받습니다. 구원이라는 개념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내 행위도 구원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철저하고 까발려질 때 비로소 그 자리가 무조건적인 오직 100% 주님의 용서와 긍휼로만 구원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동시에 구원되는 거예요.

한 때 죄졌다가 아니라 이것은 날 때부터 모친에서부터 죄 덩어리로 태어났다는 두 번 다시 나의 착함을 아예 기대하지 않게 만드는 어떤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전에는 잘못했지만 앞으로 정신 차려서 성령 받아서 제대로 해야지’ 이러면 구원 못 받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완벽하게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나 되게 하시는 것은 주께서 나를 살려주는 것처럼 예수님에 의해서 십자가 해답을 위해서 다루어질 때 나의 모든 의는 완전히 인정받지 못함을 확정지어져야 합니다. 그게 뭐냐? 십자가 피로 되는 거예요.

고후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 전에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뭐로 알았습니까? 육체적으로 알았지요. 육체적으로 안 것이 뭐냐?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거든요. 육체적으로 안게 뭡니까? 말씀을 뭐로 지킨다?  인간의 육신으로 지키면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육체대로고 그리고 거기서 나온 결과가 유대인들은 자기의 의를 쌓아서 그것으로 구원을 받고 자 한 거예요. 로마서 10장 3절에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열심히 있는데 그 열심히 무엇을 위한 열심이다?  무엇을 누적 시키는 열심이다? 자기의 착함을 계속 적금 넣듯이 계속 착하고 착한 거예요. 학생들 일기장 써 보세요. 학생들 일기장을 몰래 보게 되면 대부분이 자기 자랑이에요. 어떤 자는 반성‘하는 자기 자랑, 반성을 하는 자기 자랑, 반성 자체가 자기 자랑으로 마일리지가 쌓여요. 나는 왜 이렇게 살지, 나는 이렇게 못났어!’ 그게 착함으로 변해서 마일리지가 쌓인다니까요. 그러니까 ‘회개 하세요’ 하는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몰라요. 회개하면 할수록 점점 사람이 착해져요. 남들은 반성 안하는데 자기는 반성했거든요. 얼마나 착합니까? 반성할 줄 아는 인간된다는게요. 칸트에 의하면 반성하는 인간이 최고의 인간이에요.

바리새인들도 반성 잘했어요. 회개하고 심지어 금식까지 해 가면서요. 사도 바울이 반성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반성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까 신명기 이야기했지요?  ‘주여! 왜 저를 원치도 않는 상황 속에 몰아붙이십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반성한다는 것은 반성한 이후의 상황을 미리 예상한다는 뜻이거든요. 만약에 집에 있는 엄마가 귀하게 여기는 엄마의 도자기를 깼다, 그러면 사람은 생각해야 돼요. ‘내가 반성을 해서 내가 잘못한 것 인정하고 나중에 돈 모으면 첫 번째 월급타서 빕스가서 아르바이트해서 그동안 내가 10살 때 깼던 똑같은 도자기 내가 사 드리면서 어머니를 위로 해 줘야지’라고 하는 것은 이미 예상이 되는 반성 이후의 착해지는 자기의 모습이다 이 말이죠.

이것은 조금도 반성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잠시 미뤄 놨던 착함을 곱빼기, 두 배나 더 반성이라는 이름으로 더 위대해 버린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떻게 됐습니까? 사도 바울은 ‘허걱- 주여, 누구십니까?’ 야곱은 어땠습니까? 야곱은 씨름하다가 ‘허걱- 누구십니까?’세례요한은 ‘허걱- 오실 자가 당신맞습니까?’세례요한은 예상하지 못한 점에서 구원받은 거예요.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를 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자신이 이 정도로 지저분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 안에 십자가, 놓쳤던 십자가의 진수를 한꺼번에 온몸으로 적십니다. ‘주여, 피 아니고서는 야- 될 놈이 아닙니다. 제가 예수의 피 아니면 제가 피 외에 뭘 더 자랑 하겠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우리는 자랑할 것은 오직 뭐만 자랑하면 됩니까? 오직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 중요한 구절을 모르면 신천지 보다 더 못해요.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오직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많은 편지를 써놓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나는 너희들이 죽으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라고 디모데전서에는 길게 왜 썼는데요? 시집가지 말고 혼자 사는 게 낫다는 이 이야기는 왜 써 놨는데요? 십자가도 알고 시집도 안가야 되지 왜 이거 왜 써놨는데요?  이 모든 말씀은 우리보고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써 놨습니다. 

교회에서 네가 당하거든 차라리 고소하지 말고 사기를 당해라는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가 있습니까? 만약에 그래 더럽지만 참겠다고 하면 더럽지만 참겠다는 것은 또 어디에 걸리는 줄 알아요?  그것은 바로 산상설교에 또 걸려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다. 뭐 어디 안 걸리는 게 없어요. 다 걸리게 되어 있어요. 범사에 감사하라, 그것도 걸리네, 아이고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면 안돼요. 감사해야 되지 참아서 지켰다고 보면 안돼요. 모든 성경 구절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 원하고 또는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 모든 성경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정과 욕심과 이기주의 덩어리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안 보면 사람이 괜찮아져요. 그러면 성경을 보는 그 순간부터 겁이 나요.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 보면서도 겁이 안 나기 위해서 자기가 지킬 만한 것만 골라 지켜요. 그거는 반칙입니다.

옛날에 우리가 젊었을 때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성경 집회를 했을 때 여러분들 자식이 군에 갔습니까? 하나님께서 군에 가는 자식을 지키라고 여호수아 1장을 주셨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좋은데 후방으로 빠집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뭔가 두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맡기라 그러면 네 뜻을 이루리라 내 뜻을 이룹니까?

성경구절이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 십자가를 비껴나가서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성경해석 했던 동일한 성경 해석법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거의 100%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유대교인들이 되었어요. 왜? 납득이 되니까요 그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귀한 말씀을 주셨는데 만약에 내가 못되는 것은 내가 말씀을 못 지켜서 못 되는 것이고 반대로 내가 말씀만 성경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셔서 이 땅에서 잘 살게 해 주실 것이다. 라는 그런 희망과 포부를 그들은 그것을 쥐고 있었어요. 이것은 모든 육체를 사는 사람의 모든 사람의 공통점입니다.

거기에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 고난을 이야기하니까 심지어 12제자 가운데 베드로는 뭐라 했는지 아세요?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말리는 정도였어요. 사단아 물러가라 했지요. 베드로가 그 정도 됐으면 모든 사람들은 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 고난 받아야 될 그 십자가 있는 이유, 그 정당성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었다, 없었다?  아무도 없었어요.

하나님은 나 잘되기 위해서 있는 분인데 십자가에 죽기는 왜 죽느냐 말이죠. 십자가 왜 필요 하느냐 이 말이죠. 말씀만 한번 잘 들어서 복 받으면 그만인데 십자가가 왜 필요해요? ‘아, 우리가 죄지었는데 우리 힘으로 안 되니까 십자가로서 용서해 주려고 했구나!’ 그건 아니에요. 그것은 유대인에다가 십자가 하나를 더 첨가한 것뿐이에요. 화학 조미료 뿌린 것 뿐이라니까요. 맛은 비슷한데 영 그 맛, 자연미가 안나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네가 주인공이 아니고 너의 해답이 네가 아니고 주인공이 아니고 너의 현재 주인공은 예수님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증거하라고 이미 우리는 거기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그게 십자가 능력이 옴으로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될 수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라고 주께서 오셨다를 증거 하라고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죄인으로 살게 하는 거예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미 예수 안에서 십자가를 자랑하기 때문에 이미 의인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죄인으로 구원받아 예수님을 내가 믿었기 때문에 이제는 죄인 아니고 의인이라고 도망치지 마세요. 그러면 그것은 자기를 위해서 예수가 되어 버려요. 그게 바로 세례요한이 오해했던 겁니다. 오실분이 메시아 맞습니까? 왜 내가 예상한 대로 안 됩니까? 그러면 육체적 인간이 예상한 것은 뭡니까? 누구 하나 내 죄만 용서해 주면 나는 천당 간다는 이것은 이미 자기 자신이 잘되기 위해서 예상한 거잖아요. 그 예상한 그것이 바로 죄라니까요 그것은 예상 안 되려면 그냥 나를 멱살잡고 이리와 하고 질질 끌고 와야 돼요.

주님,  왜 이러십니까? 죄인을 구원하러 내가 왔다를 증거하기 위해서 너는 가야돼! 하고 가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바로 그랬던 겁니다. 사도 바울이 폭행자요 죄인중에 괴수라 하지만 사도 바울이 예수를 알기 전까지는 죄인으로 보지 않았어요. 자기는 의인 중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 알았습니다. 나는 율법으로 흠이 없는 사람인데 왜 갑자기 죄인중에 괴수가 되어 버렸어요?  그것은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나를 판단해 볼 때 나도 역시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마땅함을 십자가를 경유해서 비로소 파악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장에서 누가 이야기했어요?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거잖아요.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이 십자가 알고 하는 이야기이에요.  그렇다면 그 말씀할 때, 그 설교를 할 때 반드시 뭐 안에서 이야기해야 돼요?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설교를 해야죠. 그러면 더욱더 우리는 어떤 말씀 앞에서 의인은 없습니다. 라고 분명히 말을 해야죠. 사람들이 돈을 내던 안 내던 교회가 부흥이 되던 안 되던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교회의 증인이 아니잖아요. 십자가의 증인지 내 교회 잘됐다는 것을 증인하라고 목사 된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어떤 가정주부는 ‘아이고 예수 믿고 난 뒤에 자식 잘 키웠습니다.’자식을 훌륭하게 잘 키워서 제가 누구 의식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자식 잘 키워서 이렇게 기도로서 지금도 매일같이 아들을 위해서 기도 합니다. 입을 띠려하니까 쑤셔 싸서 입을 못띠고 입을 다물고 말았는데 자식 잘 키우는 증인으로서 사는게 아닙니다. 자식을 잘 키웠는데, 그게 맞는데 그게 바로 내가 몰랐던 죄였습니다. 내가 자식 잘 키운게 죄가 될줄이야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라고 증거하라고 지금도 자식 잘 키우고 있는 겁니다. 동의를 안 하시는 것 같은데 동의해도 괜찮아요. 다 이 나이에 성경 공부한다는게 어디 있어요? 자식 잘 키웠어요. 그런데 그게 죄라니까요.

그럼 자식 못 키우면? 못 키우는 것도 죄고 원래 못 키우게 되어 있어요. 원래 못 키우게 되어 있는데 잘 키웠으니까 주께서 잘 키우게 해 준게 아니고 내가 잘 키웠다는 거예요. 꼭 자기를 집어넣어요. 마치 졸업식 사진 찍는데 자기가 수강한 적도 없는데 부모가 학사모 쓰고 찍어요. 부모가 학사모를 왜 씁니까? 등록금만 댔지요. 자기가 석사모를 왜 쓰는데요? 내가 키웠다는 거예요. 진짜 키우려면 리포터 대신 작성하고 숙제 다 해 주고 시험볼 때 애로 변장해서 시험 쳐주고 그래야 키운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그렇게 키웠습니다. 십자가 알아서 의인되라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죄 아닌 죄는 다 짓게 만들었어요. 교만한 죄, 자만의 죄, 주님을 무시하는 죄, 주님께 원망하는 죄, 주님은 관심도 없고 그냥 돈만 챙기는 그 죄, 내 자식이 주님 보다 더 좋은 죄, 교회 부흥 성장을 원해서 기도 했던 죄, 교회 성장 부흥의 증인이 아니고 십자가 용서 받으면 그것으로 됐어요. 더 이상 더 원하지 마세요. 그것으로 우리는 받을 것 다 받았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좋아 울면서 향수 뿌린 이유가 뭡니까? 그깟 향수가 내 용서에 비할 때가 못 됐다는 거예요. 향수는 깨져라, 내가 뿌릴 향수가 아니라 내 눈물과 섞이는 향수입니다. 하고 주의 발에 던졌잖아요.

바리새인들이 ‘아이고 그게 얼마인데 바보 같이 가난한 사람한테 주지’가난한 사람 네가 알아서 해라 어디서 주님의 가치를 그런 가치와 견줄 수가 있습니까? 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임했습니다. 이거 알아듣는 사람은 성령 아니면 아무도 못 알아듣습니다. 왜? 자기가 잘나고 싶어 하는 것, 자기가 예상을 이미 익히고 있는 이상 이 사람은 해석 못한 사람이에요. ‘내가 예수 믿어 구원받아 잘 되야지’이런 예상한 사람같으면 전혀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에요. 차라리 ‘주여, 나는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싶지만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서 구원하였다는 것의 증인은 되기 싫습니다.’

그 차이를 알겠어요?  ‘예수님 덕분에 구원은 받고 싶지 내가 예수의 증인으로 살기에는 아이고 나는 지금 자식 키워야 되고 할 게 너무 많아서 그건 좀 빼줬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그 심보 아직 이해 못한 사람입니다. 목사 신학교 가도 마찬가지이고 안 가도 마찬가지이고 그‘그래 니 자식 키우고 다 해’ 그게 이미 해답이라니깐요.

오늘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는데 우리가 말씀 지켜서 해답이 되는 게 아니고 이미 해답인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성령 받아서 된 거지 성경 공부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미 해답이에요. 해답인데 그 해답을 주께서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다루어지느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까지 이야기한 것이 주께서 이렇게 다루어지게 하십니다. 죄인을 위하여 죄인을 구원하려고 주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라고 이미 우리를 증인으로서 사용을 이미 실시했습니다. 우리는 몸부림 치지요. 우리는 하기 싫어서 내 빼지요. 내 빼면 뺄수록 말씀은 점점더 우리를 해답으로 사용하게 될것입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새삼스럽게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사단 적인지 알았습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지 말고 이미 주께서 이 못난 우리를 그 쪽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 증인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갈수록 감지덕지 감사함으로 받아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