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연대연합 14강 본문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14
연대연합 14강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방인들은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이 이야기를 이방민족들이 들으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너희들의 신만 신이고 우리들의 신은 신이 아닌가 말인가 라고 나올 것이 뻔합니다. 이것에 대해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대화는 성립하는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직 정복함과 정복당함 관계뿐입니다. 현재 이슬람과 이스라엘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이슬람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이스라엘에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집합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택한 민족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짓는 그 계획에 대해서 인간이 함부로 변경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앙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신앙은 무엇입니까? 강력한 자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집단화 되면 집단적 주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만큼은 구원받을 백성이라고 여겼던 것을 이스라엘 내부에서 어떤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 이스라엘 가운데 다윗의 혈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이 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시지 않을 때 여기에 대한 정치적 충돌이라는 것은 뻔한 이야기입니다. 둘 중에 누가 죽든지 죽어야 됩니다. 이스라엘 다수가 죽을 수 없고 예수님 한분만 제거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거 사건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의 에피소드(일화)라면 우리가 무시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성경에 담겼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성령에 의해 써졌습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쓰셨다면 지금도 성령이 활동하신다면 성령은 스스로 자기 제한에 들어갑니다.
나는 성경 내용 외에 다른 사건은 벌이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자기 약속이 됩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누가 내려옵니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오셨지요(요1:33). 하늘이 열렸습니다. 최초로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 열림을 신학적 용어로 종말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같이 성령이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잉태도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마1:18).
마리아는 몸만 빌려주었을 뿐입니다. 껍데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 빼고 하나님과 성령님의 합의 하에 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후에 지상에 계신 예수님께서 여기에 가담을 하게 되면 성령이 있던 위치를 예수님께서 차지하시고, 성령은 이제 예수님의 지시를 받게 되고 오직 예수님께서 하신 일 안에서만 일을 하실 뿐입니다.
성경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할 때에 우리 인간이 성경말씀에 직접 다가 갈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직접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성령으로 써졌다면 성경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못갑니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경에 다가 갈 수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만일 이 말에 동의한다면 여러분들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성경을 알 수 없고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갈수 없다고 인정하고 동의 한다면 만일 우리 교인가운데 성령을 받지 않고 육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제외 되어도 좋다는 것을 여러분이 인정을 해야 합니다.
숫자가 오천 명 왔는데 그 중에 성령 받은 사람이 두 사람이라면 4998명은 엉터리임을 감안해 설교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목회적 결심이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교회가 나의 자의식 투영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람은 이렇습니다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짝을 이루어 말씀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이렇습니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반드시 이렇습니다를 동반해서 이야기 합니다.
왜 자꾸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언급하느냐? 가짜가 많습니다. 가짜가 계속 들어옵니다.
성경은 사람에 대해 삼분설로 보지 않습니다. 이분설도 아닙니다. 삼분설이 문제가 있으니 이분설로 옮겨 탄다고 해서 인간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실 때에는 관계로 설명합니다. 만일 육의 관계에 있으면 육이고 영의 관계에 있으면 영입니다. 이것을 헬라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히브리적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인간을 다룰 때 관계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방금 관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언약적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안에서 택함 받은 민족입니다. 따라서 언약밖에 있으면, 아간처럼, 사울처럼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은 언약 하나를 굳히기 위해서는 그 하나를 삭제하고 배제합니다. 이 작업 기간이 이스라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90퍼센트는 전쟁입니다. 그 전쟁은 외부전쟁과 함께 내부전쟁이 겸해집니다.
이런 성경말씀이 교인들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자의식의 실현을 위해 교회에 오기 때문입니다. 나를 천국에 넣어주는 이야기, 여기에 관한 것만 이야기 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지나간 구닥다리 이스라엘 이야기는 난 관심 없습니다. 그런 것은 잘라 버리고 당신은 성경전문가이니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갈 수 있는지 이야기 해 주면 된다고 합니다.
선교단체에서 이것을 이용합니다.
사도행전16장31절에 나오는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알려줍니다.
본인이 구원받기 위한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왔는데 목사님 쪽에서는 주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그리고 난후 회중들 앞에서 고백하세요라고 하면 까짓것 회중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회중 앞에 나오라고 해도 부끄러움도 한번이지요. 나갑니다. 손들어라고 하면 손듭니다. 잠깐 나와 박수 받고, 꽃다발 받고 들어가면 됩니다. 육개월후 세례받으면 됩니다. 얼마나 간편합니다.
뒤쪽에 성가대 있습니다. 내가 노래 잘하니 성가대 하면 되고, 그러면 내가 하나의 공동체에 편입이 됩니다. 편입이 되면 남들이 나의 신앙을 알아줍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스스로 신앙을 확신하는 것 보다 남들이 인정하고 알아주는 신앙은 더욱더 확실해 집니다. 모든 것이 눈에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성경을 왜 봐요. 바쁜데. 오토바이 수리하는데 왜 성경을 봐야 합니까?
여러분 십자가 피가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을 믿습니까? 까짓것 믿지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나만 천국에 넣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자의식이 있으면 추억이 되고 기억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믿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첫사랑이 있죠? 첫사랑과 함께 삽니까? 첫사랑을 기억하십니까?
첫 사랑은 잘 이루어지지 않으니 대부분 첫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추억하십니까 아니면 함께 살고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이론상으로는 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내가 산다면 나는 누구를 미워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한 대가는 나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합니다. 이것은 나 홀로 살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내 곁에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함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분, 나는 부분을 알지만 그분은 전체를 아시는 분입니다. 함께 있다면 우리는 누굴 자랑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자랑해야지요.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갈라디아서 6장에서 말씀합니다(갈6:14).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만 이야기 한다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뭐냐고 묻습니다. 제가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의 자의식은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중요한 그분 앞에 부정되어야 될 나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래 나 십자가 기억할게. 이스라엘 기억할게. 홍해를 기억할게. 다 기억할게 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 말고 두뇌 속에 저장 말고, 천국갈 때 나 예수님 기억했습니다라는 기억 끄집어내어 통과할 생각하지 말고 동반자를 제시해야 합니다. 당신은 나의 동반자.
동반자는 우리가 동반하겠습니다. 해서 동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반자께서 보내신 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신 후 예수님과 너를 묶어줄 보혜사가 옵니다.
이만희 아닙니다. 그 보혜사가 오는 것이 너희들이 나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유익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왜 유익됩니까?
주님 보이지 않으면 늘 주님 어디계신지 찾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령께서 함께 계시면 내가 화장실가도 거기 계시고 바다 끝, 땅 끝에 가도 계시고, 중국에 가도, 한국에 가도, 미국에 가도 거기 계십니다. 무얼 더 원합니까?
여성이 남자와 결혼하면 고향을 잃어버립니다. 물론 남자를 사랑하는 조건하에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남편 있는 곳이 곧 내가 있는 곳이 됩니다.
남편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갑니다. 술집이든 어디든.
여자는 남자와 결혼하면 남자가 자신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항상 전화합니다. 오빠 어디야?
계속 전화합니다. 그러면 남편이 전화 그만해라 바이어 만나는 중이다. 그러면 또 전화합니다. 이에 남편이 전화 그만해라고 하면 아내가 그러면 나 싫증났어?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제발 이렇게 해 주기를 원합니다. 딱 달라붙기를 원합니다. 그 틈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세상 출세욕, 자기 성취욕이 그리스도와 성도사이에 끼어들지 않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틈사이에 십자가를 놓습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
이런 식으로 성령께서 활동하십니다.
성령의 활동에 대해 너무 다양하니 그것을 객관화 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16장8절에 객관적인 성령의 사역을 말씀합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책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상은 애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애굽에서 나온 이후 물 없고 양식 없으니 다시 어디로 돌아가자고 합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원한 것이 아니라 물주는 하나님을 원하고, 나에게 양식 주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애굽에서 바로가 제공하지 못한 것을 제공하는 그런 하나님을 원합니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을 원한다는 정신적 구조자체가 애굽적입니다. 바탕이 애굽구조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들에게 물을 주시면서 애굽에서 주는 물이 아니고, 양식을 주시면서 애굽에서 주는 양식이 아닌 만나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애굽적으로 받아내려고 하는 이스라엘의 기본구조를 깨트려 버립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 능력으로 있는데서 있게 되는 애굽적인 방식은 완전히 와해시키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우린 세상에 대해 관찰자, 구경꾼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이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 완전히 이분법이지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세상을 부정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 어떻게 살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이 신명기 8장에 나옵니다.
만나를 주셔 놓고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애굽적인 정신구조로 되어 있으면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아 말씀 지키면 내가 먹었던 만나를 주시는 구나. 이렇게 말씀을 수단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는 원인이 되어서 세상에서 얻을 것을 얻으며 사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6장에서 내가 하늘에서 온 만나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어려운 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이보다 더 어려운 말씀, 업그레이드 하면, 내 살을 뜯어 먹고 내 피를 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느니라.
교회에서 세숫대야에 물 떠서 발 씻기기는 잘하는데 왜 그것만 하십니까?
예수님 살점 뜯고 피 퍼마시는 일은 왜 하지 않습니까? 너무 엽기적이라서. 너무 잔인 합니까? 18세 이하는 정서적로 용납이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성경을 보면서 왜 그리 쉬운 것만 하고 어려운 것은 넘어가버립니까?
성경이 있다. 성경은 성령이 쓰셨다. 따라서 육은 성경을 쓰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육이 성경에 도착하면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성령이 경유한 그 경유로 되돌아갑니다. 따라서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내가 말씀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분이 다 지켰음을 발견하면서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의를 주님께서 다 이루셨네를 만나게 됩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반드시 은사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은사 없는 성령은 없습니다. 일시적인 은사는 날아가 버립니다. 영원한 은사는 세 가지 밖에 없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여기에 믿음은 에베소서 2장8절에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내통하면서 유지되었던 그 믿음, 주님 고유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 믿음과 다른 신념이 있고, 야심이 있고, 야망이 있고 집착이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의 믿음으로 교체시켜버립니다.
사도행전3장16절에 성전미문의 앉은뱅이가 나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3:16).”
베드로와 요한은 목격자일 뿐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난 믿음으로 나았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난 믿음이기에 믿음을 개인이 소요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추적해 들어가 보면 그 끝에 믿음을 주신 십자가 지신 주님이 계십니다. 믿음 주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고 하십니다.
성경의 일관된 내용이 이렇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못합니까? 인간의 자의식, 다르게 말하면 존재를 유지하려고 보니 믿음 소망 사랑이 애굽같은 세상에서 내가 원하고 야망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해 초월적인 것을 힘입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구에서 경제가 발전하고 식민지 개발이 일어나면서 인간의 과학 기술 발전에 인간이 도취되고 말았습니다.
과학기술은 전쟁무기로 이어지고 전쟁 무기는 상품으로 이어지면서 각 나라의 경제적 격차가 심해집니다. 그래서 제국주의가 성립할 수 있었습니다. 활 쏠 때 총 쏘면 게임이 안 됩니다. 인디아나 존스를 보면 학자가 칼 잘 쓰는 무사를 총으로 쏴 버리지요.
인간은 과학 기술로 스스로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어느새 자본주의에 물들게 됩니다. 자본주의에 물들면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물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마네킹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외부만 꾸미면 됩니다. 나 전지현처럼 어떻게 해주고, 옷은 누구처럼 해주고, 성형수술하고 좋은 화장품 바릅니다. 거리에 나가면 마네킹이 한 둘이 아닙니다.
집안이 깨끗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세상에 합류하려면 그들이 원하는 패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자기 집안청소하지 않으면서 바깥으론 깨끗한 척 돌아다니고 마네킹은 마네킹과 만나서 결혼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이트 가서 부비부비하면서, 마네킹들이 춤을 춥니다.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물체가 되고 사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장식하기 바쁩니다. 장식에 덧대기 덧대기 하기 바쁩니다.
이렇게 되니 인간은 없고 돈밖에 없습니다. 믿음 좋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노동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다가 됩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이 되어버립니다.
당신은 팔십만 원짜리, 당신은 백만 원짜리 노예가 따로 없습니다. 과거 미국에만 노예 있는 줄 아세요?
지금 현재 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다 아시고 계셨지요.
마태복음6장24절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처음에 돈은 교환 수단이었지만 이후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돈을 버는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돈의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프로이드는 인간스스로 인간을 진단해 봅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은 인간이 성령을 통해서 성경을 보게 되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가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 없이 성경을 보게 되면 교회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자아를 보았습니다. 6세 이전에는 혼돈입니다. 6세이후에는 거울단계에 들어갑니다(라캉). 이때에는 임시적으로 저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인식합니다. 여기서부터 성장하는 중에 주변에서 많은 것들이 유입됩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계속 유입됩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자아가 누구냐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지를 알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내가 누군지를 알려고 한다면 지금 현재 있는 내가 조작해낸 과거입니다. 지금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조작해 냅니다. 조작이 가능한 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원초적인 욕망 즉, 부모의 나에 대한 기대, 타인의 나에 대한 기대입니다. 그 기대에 맞추어서 돌아가는 세상에서, 마치 부폐에서 음식 골라 먹듯이 자기 마음대로 퍼 담아 이것을 자신의 자아라고 합니다.
이것은 임시적인 조치입니다. 오늘도 임시땜빵 쉬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두리번거림이라고 합니다.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주위에 나의 욕망을 채울 것을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왜? 또 조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차피 나는 누군지 모릅니다. 나는 그때그때 마다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욕망만 채우면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욕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지난 것은 버리고 새로운 욕망을 채우려고 두리번거립니다.
이런 식의 자의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목회자는 성경에서 이상적이 교회상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상적인 자아상을 찾습니다. 그것을 왜 찾습니까?
지금 불만족스럽다는 겁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이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물으면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계속 추구할 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수단으로 집어넣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캉의 유명한 말입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뭐냐고 나에게 물으면 우리는 답변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이란 남들이 원하는 그것이 나에게 넘어와서 내 자아에 장착되면서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으로 재편집됩니다.
오늘 아침에 목사님이 박주영이 한골 넣고 손흥민이 한골 넣었다고 했습니다. 원했던 바입니까? 아니면 한국이 5대 0으로 지기를 원했습니까? 한국이 이기기를 원했습니까? 그리스가 이기기를 원했습니까?
한국이 이기기를 원했지요? 그러면 한국이 목사님과 무슨관계에 있습니까? 정말 한국을 사랑합니까? 그러면 다시 군에 갈 용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나라는 것이 어떻게 조작되고 편집되었는가 하면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조작되고 편집되어 있습니다. 만일 목사님이 속한 곳에 파벌싸움이 생기면 목사님은 러시아로 귀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큰 목회해서 금메달 딸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삼관왕.
세상은 내 중심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조작했습니다. 왜 조작합니까? 내가 그러고 싶어서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그러고 싶습니다. 그래서 항상 임시 땜빵(땜질)입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고 계속해서 새로운 땜빵질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이 월드컵16강에 올라갔다고 했을 때 그것으로 만족할까요?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8강. 8강도 잘한 걸까요? 아닙니다. 4강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홍명보는 목사님께 뭡니까? 종입니다. 종이에요. 종.
세상은 나에 의해서 조작되고 왜곡되고 뒤틀려진 세상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봅니다. 성경을 보니 서로사랑하라가 나옵니다. 굉장히 이상적인 교회 상이 됩니다. 이상적인 교회 상이 나의 욕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회하면서 만족함이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통하지 않을 때 나오는 현상입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성령 받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있지요. 그러면 여기에서 성령 받은 사람 되고 싶습니다고 할 때 이것은 또 하나의 욕망이 됩니다. 또 왜곡된 욕망입니다. 너도 문제고 나도 문제고 계속해서 임시땜빵입니다. 자아상이라는 것은 작년에 다르고 올해 다르고 어제 다르고 오늘 다릅니다. 내년 다르고 내일 다릅니다.
교인수가 20명인데 갑자가 50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 자아상이 왜곡합니다. 50명 교인의 당회장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20명이 빠져 버리고 30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만족하겠습니까? 전에 20명이었는데 만족한다고 하겠습니까? 왜? 왜? 제가 뭐가 잘못되어서 30명이 되었습니까? 라고 하겠지요.
나의 자아는 현재가 급조한 겁니다. 이런 자의식은 나이 90되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내 나이가 연애 못할 나이입니까?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유행가 중에 오승근이 부른 내 나이가 어때서가 있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90 되어도 연애합니다. 두근두근 거립니다. 안되어 봐서 모릅니까?
되어 보세요. 90되어도 20대 찾고. 30되어도, 40되어도, 50되어도 60되어도 예쁜 것만 찾습니다.
아침마당에 사별한 나이 많은 사람들 나오지요. 남자 하나 여자 셋. 결과 보나마나 입니다. 제일 예쁜 사람 찾습니다. 돈 필요 없습니다. 예쁜 사람입니다. 예쁜 사람 기준은 절대적 예쁨이 아니라 저 옆 사람과 비교해서 예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데리고 가야 채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대적 예쁨인데 남자는 그것을 절대적 예쁨으로 오인합니다.
여자가 민낯과 화장한 얼굴이 다릅니다. 다를걸?
여자가 화장을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화장 지울 때 실망감으로 상대를 좌절하게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초화장만 해야지 찐하게 화장하면 남자가 아내의 화장한 아름다운 모습을 몸이 기억해요.
이 문제를 성경에서는 하나로 끝내버립니다. 바로 왕입니다.
네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고 이 사람도 왕이 아니고, 저 사람도 왕이 아닙니다.
드디어 어려운 사사기가 나옵니다.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라고 합니다.
자의식, 나는 누군지 모르겠다. 존재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 자리에 내가 앉을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언약은 주어자리를 빈자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누구냐에서 나는 자리에 내가 있어 버리면 안 됩니다.
어제 질문하셨지요? 어떻게 행하느냐? 주어 자리에 앉아서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꿈꾸는 것은 자 자기 욕망입니다. 이 주어 자리를 비켜 술어 위치에 나를 보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기능이 되고 역할이 되고 속성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첫시간부터 지금까지 존재와 기능이라고 그렇게 목쉬도록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 주어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으면 아무리 겸손해도 자기보다 겸손한 교인 있으면 그 교인 내어 쫓습니다.
목사님 두 시간 기도하는데 집사님이 새벽기도 와서 네 시간 해 보세요. 보일러 기름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자리를 그냥 말석이라 하지 마세요. 그냥 말석에 가버리면 그 곳에서 자기 자리를 또 쳐다봅니다.
주님을 주어 자리에 보내고 자기 자리에서 나가면서 그냥 나가지 말고 연결고리, 즉 성령이 주시는 새 언약, 십자가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그냥 주어자리를 비워 술어자리로 가면 그곳에서 또 딴 짓합니다.
멀리서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함께 동거한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24장13절에서 25절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님의 만남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소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미지의 X 로 사라졌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중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서로 궁금한 것을 물을 때에 어떤 아저씨가 함께 동행합니다. 그러나 얼굴을 보아도 모르는 얼굴입니다.
제자들에게 끼어든 제 3의 인물은 타인이 됩니다. 남입니다.
그런데 음식 잡수실 때에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갑자가 아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얼굴이 변검처럼 순간적으로 변했는지 아니면 그 얼굴인데 그들의 눈에 눈꼽이 끼었는지 모릅니다.
성경대로 한다면 두 제자는 갑자기 자기 자리에서, 주어 자리에서, 예수님은 별 볼일 없다. 우리끼리 해야지, 내 인생 내 맘대로 해야지, 내 몸 챙겨야지 하면서 주어자리에 있는 그들입니다. 예수님이 동행하실 때에도 여전히 주어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시니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이는 자리로 갔습니다. 묻습니다. 식사하신 후 예수님이 함께 살았습니까 사라졌습니까?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때 제자들에게 있어서 주인은 누굽니까? 여전히 주님입니다. 주어자리를 자기가 차지할까요 차지하지 않을까요?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구만 증거합니까? 나는 그분 때문에 나임을 증거합니다. 내 욕심과 야망과 탐욕을 위해 그분이 있는 것이 아니고 ,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나를 만족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란 존재 자체가 의미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스스로 구성이 되든 안 되던, 혼란스럽든지 그때 엠마오 도상에 나타나신 그분이 여전히 그분입니다. 나의 자리를 그분이 차지해야지 내가 건방지게 차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쓴 글이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 고린도 전후서입니다.
그런데 샌드슨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성경은 사견에 불과하고 옛날이야기이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젊은 교수들이 참신하다해서 목사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사람이 성경책을 어떻게 보는가 하면 로마서를 사도바울이 썼다고 합니다. 말은 맞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사도바울과 나란히 섭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보는데 나는 이렇게 본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날아갑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이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갈1:12).
그런데 샌드슨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으면서 사도바울과 맞먹으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된 바울이라고 합니다. 이 자체를 잘라버립니다. 너만 똑똑하냐? 나도 똑똑하다. 나도 하나님 믿는다.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사도바울과 나란히 보니까 사도바울이 생각했던 것, 교회 공동체가 그럴 듯합니다. 바울 네가 한다면 나도 성령 받고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사도가 쓴 편지가 나의 욕망을 달성하는데 하나의 재료가 될 뿐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가 있던 그 현장에 먼저 우리가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면 사도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 합니다. 사탄의 가시를 주셔서 오히려 능력이 약한데서 강하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도 됩니다. 여기에 함께 끼어들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현장에 가야 됩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밝혀 보여야합니다.
고린도전서2장2절에 나오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나니라는 말을 같이 내뱉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 죽었다는 것만 알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부활, 재림, 성령의 열매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 부활, 재림, 성령의 열매가 다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입니까?
너는 자아 자리에 있지 말고 어디로 오라고 합니까? 나는 예수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그 자리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이 사도의 권면이고 명령입니다.
그래서 제가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시고 해석하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는 사도바울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역사적 해석법에 의해서 진리에 가까운 액기스만 모아서 온 선배들의 공로를 함부로 갖다 버릴 수 없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인간의 전승에서는 성령의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이란 주어 부분이 주님이고 우린 술어자리에 들어갑니다. 본인은 목회 잘되나 망하나 아무 의미 없고, 목회를 내가 소유할 입장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다루어 졌을 뿐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교인3000명 되는 목회자로 다루어졌을 뿐입니다. 오직 내 자랑은 3000명 목회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뿐입니다. 목회 50년 한 후 고백은 나는 예수그리스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나는 끝까지 죄인중의 괴수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주께서 지금도 날마다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고백해야 됩니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은 주어 자리에 자기들이 있습니다. 왜 이 자리에 있으려고 합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이 세상을 기독교 세상으로 만들려는 야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콘텐츠는 성경의 내용으로 채웁니다.
이렇게 되면 야망가진 목사와 야망가진 교인, 똑 같은 사람끼리 모였습니다. 여기에 십자가 이야기 하면 지금은 부활의 새 생명인데 왜 지나간 이야기하느냐라고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지나간 이야기라면 사도바울에게 그런 소리를 하세요.
왜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이야기 합니까? 또한 저주 이야기를 합니까?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합니다(갈1:8). 이런 저주 이야기해서 목회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긍정적 사고를 펼쳐야지 저주 이야기를 왜 끄집어냅니까?
고린도후서2장에서 사도바울은 복음이 구원받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냄새요 사망을 얻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라고 합니다(고후2:16).
모든 사람에게 좋은 향기가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악취를 풍기게 할 자격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고린도후서1장1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어 자리에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 자리에 주님이 계시고 자신은 말석에서 십자가를 보고 있으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부족해서 십자가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 보이니, 이 보이는 것을 부정할 수 가 없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 와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칼에 목베임 당해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죽는 순간에서 사람이 칼로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보내신 종들이 죽이는 것을 압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께서 군대생활 그만하라고, 쉬라고, 제대하라고 주께서 보낸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1장21절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왜 다메섹에서 왜 도망쳤습니까? 도망치는 것도 선입니다(행9:25). 죽을 수 없기에 도망쳐야합니다. 로마로 갈 때 풍랑 이는 것도 주의 뜻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아니요가 없고 모든 것이 예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날마다 주께서 열어주시는 그 길을 가셔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