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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연대강의 16강 본문

해외 특강/14연대연합

연대강의 16강

정인순 2014. 3. 20. 10:51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16   

 

연대강의 16강

 

사사기13장-16장에서 삼손은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는데 그 부산물이 이스라엘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삼손과 이스라엘 구원을 직접 연계시키면 곤란합니다.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구원을 삼손의 개인적 공로로 돌릴수 없음을 없게 만듭니다. 동시에 삼손은 왕일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삼손을 죽여버립니다.

죽음의 원인이 여자 때문입니다.

 

삼손 힘의 비밀을 들릴라가 알려 달라고 할 때 여자의 간청에 못이겨 알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고 무엇이고 난 당신 없이 못살겠다. 사랑이 전부다 되었습니다(삿16:15-17).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게 자게 하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삼손의 힘이 없어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붙잡아 눈을 뽑고 끌고 가사로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삼손은 이제야 언약안으로 들어갑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속으로 들어갑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언약의 하나님을 보여줄 결정적 이벤트만 남아 있습니다. 삼손의 나실인됨은 삼손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해서 나실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나실인을 하나의 제물로 삼아서 죽였습니다. 삼손의 죽을 때 죽인자가 삼손이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 많았습니다(삿16:30).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만 일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책임자는 하나님 스스로 되십니다. 삼손이 아닙니다. 삼손이 그렇게 한 후 그것은 하나의 이벤트입니다. 그 순간 뿐입니다.

 

지금 모세 율법에서 다윗언약으로 어떻게 원활하게 넘어갈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구약성경에서 무척난해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겠습니다.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 내부에서, 즉 범죄한 이스라엘 내부에 긴급투입된 나실인에 의해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수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준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율법준수는 구원의 혜택을 입은 이스라엘 손에 맡겨놓을 수가 없습니다. 알아서 잘해라고 부탁할수 없는 문제입니다.

 

율법준수의 완성은 모든 사람이 하는 행위가 율법을 위반 것이라고 다 들통 난 이후에, 아무도 율법대로 살지 못할 때(언약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시니) 율법대로 산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 사람이 왕이 됩니다.

 

사사시대와 같이 일어난 사건, 새싹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과 삼손이 같은 시대 사람입니다. 분명히 얼음장인데 안에서 새싹이 돋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나라이지 너희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요청한다고 도와주고 하는 식으로 유지 진행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요청할 때 도와주되 도와줌을 통해 이스라엘은 도움받을 존재가 못되는 것을 파악할 뿐입니다. 정작 이스라엘, 거룩한 나라는, 숨겨진 다른 움직임에 의해서 아무 차질 없이 진행됩니다

 

목사님들이 목회할 때 교인들이 이사가고 하면 아이구 망했구나 하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교회는 망한적도 없고 망할이유도 없습니다. 주께서 보내주신 자는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6장3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읍시다. 나와 연계시키비 맙시다. 나는 농땡이고 게으르기 때문에 일이 안된다고 할 분이 아닙니다. 나 지쳤다. 너 때문에 못하겠다는 주의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항상 이벤트만 남길 뿐입니다. 혼자 울었다가 웃었다가 하지만 전체적인 주님의 일은 차질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왕이시다는 고백속에는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고 하면 절대로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질수 없습니다. 내가 관리해야 할 내 인생이 아닙니다.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면 망합니다를 자인하면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16장에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들이 자신들을 심히 괴롭게 하니 귀신을 여종에게서 쫓아 내버렸습니다. 이 일로 돈벌이가 끊어진 것을 여종의 주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결국 감옥에 갇히게 합니다.

 

감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는 중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수들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합니다.

 

이때 바울이 소리질러 우리가 다 여기있다고 할 때 간수가 떨며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묻지요.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네가 구축한 현실세계, 애굽에서 빠져 나올 수 있으리라. 네가 상상도 못한 세계를 맛보게 되리라. 그것은 네가 손을 댈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깔았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율법이 지켜지는가입니다. 만일 지키지 않으면 없애지요. 없애는 것은 나중에 없앱니다. 지금 없애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반율법 기능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해 오해해서 율법에 대해 반대한다는 기능을 해야 합니다.

사사기20장에 이스라엘백성들이 법대로 법대로 행했습니다. 그 결과는 베냐민지파가 날라가버렸습니다. 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 무슨 짓을 했는가를 소급해서 보니 율법대로 행했습니다.

율법대로 행하면 악한자는 죽이고 신실한 자만 살아가게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했는데 결과가 열한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열한 지파로 살면 되잖아요? 안됩니다. 왜냐하면 야곱언약에 의하면 열두 지파가 다 복을 받는데 베냐민 지파가 빠져 버리면 야곱언약과 다른 노선으로 간다는 표가 나 버립니다(창49장). 마치 핸들을 제대로 돌렸는데 차는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현지 선수가 안되면 용병을 찾아야죠.

언약이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백성 입장에서는 저주 받은 백성입니다.

저주받은 백성중에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이 룻입니다. 저주받은 백성 룻을 만나게 되는 과정은 언약이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백성이 믿음이 없어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땅으로 내려감으로 그곳에서 룻을 만납니다.

그곳에서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 둘이 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후 빈손으로 베들레헴으로 돌아 옵니다.

 

나오미의 뜻은 즐거움, 희락인데 자신을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즉 괴로움입니다(삿1:20).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신학은 무엇일까요? 회복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신학 문제점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바로 통일교교리입니다. 이것과 비슷한 것이 지방교회입니다. 웟치만니, 휘트니스 리입니다. 그런데 구속사, 하나님 나라 이야기 하면서 회복이라는 말이 또 튀어 나옵니다. 성경에는 회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회복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회복을 시도했지만 절데로 회복되지 않게 하십니다. 회복이 되어 버리면 그동안 자신이 저지런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움을 요청하는 자의 원하는 바를 절대로 채워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 편입니다.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들를리에 불과합니다. 콩국물 얻어 먹을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맡은 직분은 천사가 부르워하는 직분입니다(벧전1:12).

 

나오미가 모압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때 빈몸으로 오지 않습니다. 이름이 마라로 바뀝니다. 마라와 나오미의 뜻은 반대입니다. 기쁨으로 갔다고 슬픔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나오미가 고백합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리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나를 괴롭게 하셨다. 전능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하셨다.

 

정말 조화되지 않는 고백입니다. 목사님 간증하겠습니다. 네. 간증해 보세요. 저 아파트 불이나서 일억원을 물어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분이 사랑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끝.

그 다음에 누가 일원원을 주더라. 이런 이야기 없습니다. 새 아파트를 주더라 그런 이야기 없습니다. 지금 나오미의 상태가 이런 상태입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비로소 저는 전능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이전까지 나오미는 하나님이 자신의 편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편일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주어의 자리에 절대로 다시 들어올수 없습니다. 회복될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예수님이 사라진 후에도 결코 주어의 자리에 자신들이 들어 올수 없습니다. 끝자리로 가야합니다. 물론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면서. 나 이렇게 망하게 하셨습니다. 당황하지 말고 끝.

 

여기에 룻을 연결점으로 보아스가 등장합니다.

출애굽기에서 고엘사상이 나옵니다. 후견인 사상입니다.

욥기19:25,26절에서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 후견이 사상이 출애굽의 중심을 이룬다고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함으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싲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함으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22:21-24).”

 

이스라엘이 고아요 과부일 때 후견인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약속의 땅에 가게 되면 역시 후견인 때문에 축복받아 산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후견인이 계시다는 것을 티내야 합니다. 어떻게 티를 내느냐 하면 주위에 고아와 과부가 있으면 그 고아와 과부의 자리가 원래 내자리다. 원래 내 모습이었어. 그러면 지금 내가 고아가 아닌 것은 폭만큼 후견인에게 감사해야 할 폭입니다. 고아와 현재의 나 사이의 폭. 감사의 폭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 율법, 흔히 구약학자들은 사회법이라고 합니다. 사회법이 아니지만 그냥 용어를 사용합니다. 사회법을 말할 때에는 후견인 사상 즉 나는 고와와 과부였었다는 것을 경유하여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그냥 돈을 주는 것은 동냥이 되어 버립니다.

교회에서 구제할 때 여유있는 사람이 여유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구제가 아닙니다. 그 거지가 본래 나의 모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주님의 것이지요. 주님의 것으로 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비를 멸시하는 것으로 간주해서 너를 죽여 너희 아내를 과부로 너의 자녀를 고아로 만들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고아와 과부가 되면 땅을 잃게 됩니다. 땅을 잃으면 종으로 팔려 가든지, 빚을 내서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데 빚을 못 갚으면 몸으로, 종으로 팔려 갑니다. 노예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유발시킵니다. 그것은 7*7=49. 49년 다음의 해가 희년입니다. 요즘은 목사들 노는날로, 안식년이라 해서 월급다 받고 쉬는 것으로 이용해 먹지요. 개척교회하는 사람은 상상도 못할일이지요. 월급주면서 놀아라고 하지요. 평소에도 노는데 또 놀아라고 합니다.

 

누가복음4장을 보면 희년(레25:8-12)사상을 예수님께서 복음으로 연관시켜버립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누구시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와 함께 동행하셨다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동행하십니다. 동행하는 위치가 우리가 싫어버린 바 된 위치에 가 계십니다. 왜냐하면 힘으로 버티는 곳은 애굽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주님이 됩니다. 십자가의 잔을 거부했다면 절대로 주가 될 수 없습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예수님은 구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결과만 먹으려고 하지요. 그러나 과정, 과정이 우리가 새로 살아갈 활주로입니다.

 

신약에서 이미 구약을 인용했기 때문에 구약을 모른다고 하면 안됩니다. 성도로 하여금 구약속으로, 신약속으로 밀어넣어서 그들의 갔던 그 경로를 밟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있다는 인식 자체가 얼마나 하나님을 힘들게 했는지를 그들도 몸소 겪어야 됩니다.

물론 겪다가 다 교회를 뛰어 나가겠지요.

 

룻기에서 보아스가 등장합니다. 보아스가 어떤 인물인지는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다만 나오미가 보아스를 끌어 들일 때 율법을 동원시킵니다(룻3:13; 신25:5-10).

사사시대에는 율법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려는 기회가 어떻게 왔습니까?

풍족할 때, 남편 살아 있고, 자식 둘 있을 때 율법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의지할 만한 고엘, 후견인을 다 날려버렸습니다. 이방 땅 모압을 다녀오면서. 이제 믿는 구석은 이방여인 룻 밖에 없습니다. 이방인 룻은 율법과 상관없습니다. 나오미만 율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나오미는 이방인 룻을 율법과 관련시키는 일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사는 사람과 결혼시키려고 합니다. 율법속으로 룻을 밀어 넣습니다.

나오미는 계산합니다. 벌써 저쪽에서 썸이 왔습니다. 뭔가 썸띵이 있었습니다.

보아서가 재벌 3세가 아니면 나오미가 룻을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나오미는 어떻게 먹고 사는가가 문제입니다.

보아스는 법대로 하자고 합니다. 자신은 기업무를 자 2순위라는 겁니다.

기업을 무르준다는 말은 기업을 원상복귀해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업무를자 일 순위는 계산해 보니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기업을 무르지 않겠다고 합니다. 돈은 헛된 곳에 쓰지 않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보아스는 그 헛된 돈을 자신이 쓰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아스와 룻이 결혼을 합니다. 보아스아 룻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룻4:14,15).”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 났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씨형제 결혼법, 즉 신명기25장에 나오는 말씀을 확대해석해 버립니다.

여기에 나오는 룻이 마태복음1장 예수님 족보에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언약이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있는 이스라엘을 없는 이스라엘로 만들고, 살아 있는 이스라엘을 죽은 이스라엘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약에 의하면 백성이 있어야 언약을 이루시기 때문에 없는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쪽에서 없다고 여기는 이방쪽에서 이스라엘의 씨를 만들어 내서 있다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이 오히려 진짜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훼방꾼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죄인으로 구원받게 하십니다.

 

마태복음1장 족보에서 에게서(ejk)가 다섯 번 나옵니다.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마리아에게서.

‘에게서’가 나올때마다 철도 노선이 쫙쫙 바뀌게 됩니다. 이스라엘혈통이라고 여겼던 것이 새로운 혈통의 개입으로 바뀌면서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멜기세덱의 족보로 날아갑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족보도 없는 세계로 날아갑니다. 인간손으로 가는 것은 차단되어 있습니다.

창세기3장에서 24절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차단시켜놓은 것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무도 자력으로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 갈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상에 남겨진 여자의 후손, 즉 생명의 후손, 즉 예수님이 관여한 여성을 통해 그 비행기는 멜기세덱 족보로 날아갑니다. 그리고 생명의 나라에 도착됩니다. 복음의 비밀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고전1:22-24).

남들이 보기에는 부끄럽고 어리썩은 것이지면, 미련한 거이지면, 거리끼는 것이지만 오직 성령으로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십자가는 어떤 조건, 어떤 생김새, 어떤 행위를 따지지 않습니다. 십자가만 믿는다면 누구나 구원받습니다. 간단명료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 것이 너희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예수님은 존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존재가 아닙니다. 피라는 사건입니다. 우발적 사건입니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유당함만 있습니다. 만일 내가 소유하게 되면 나는 어느 자리에 앉습니까? 주체자리에 앉습니다. 내자 술어쪽으로 밀려야 주님이 나를 소유한 것이 되고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겠지요.

 

모세율법과 왕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모세 율법은 개인개인이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언약에서는 왕 한 사람이 지키면 다른 모든 백성이 지키지 않아도 지켰다고 쳐주는 새로운 언약시대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되려면 율법을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가 규정되면서, 없는데서 생기는 율법지키는 왕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왕을 구해야 합니다(삼상8장). 그 구한 왕이 사울왕입니다(삼상10:17-24). 사울왕에게는 백성들이 원한 왕의 소망이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격체로 사울이 등장해야 합니다. 사울의 역할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신과 인간의 대결입니다.

언약의 하나님과 언약지키지 않는 백성과의 대결구조에서 엉터리인 백성들을 대표해서, 엉트리같은 율법과 사상을 토해내는 가장 앞장선 역할을 사울이 해 주어야 합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은 인간이 택한 왕으로부터 핍박받고 고난 받는 왕으로 등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언약은 유지되어야 하니 기름부음받은 것은 계속 유지시키지요. 그래서 다윗은 자기 손으로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삼상24:6; 26:11; 삼1:14)”

동행하는 하나님이 하시도록 했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은 어떤가요?

똑같이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쫓겨다닐때에는 여호와가 자신의 목자였지만 안정된 자리에 있을 때에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주인공이라 생각했습니다.

인구조사할 때 요압장군이 반대했지요(삼하24:1-3). 요압이 다윗왕에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아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께서 격동시켰기 때문에 기어코 인구수를 세라고 명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고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그는 자신이 범죄하였고 악을 했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야기를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말씀합니다.

다윗은 껍데기로 주인공은 예수님이셨다. 신학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정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사시대에는 왕이 없어 자기 소견에 옳을대로 행합니다. 엘리 제사장 가문이 있습니다.

당시 한나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엘가나의 아내입니다. 그에겐 브닌나라는 아내도 있었습니다. 브닌나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상황은 마치 아브라함언약시대에 사라와 하갈의 관계와 흡사합니다. 브닌나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복주십니다. 의로울 때 복주십니다. 따라서 나는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아들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믿음좋다고 하고 남편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은 좋은데 자식있습니까? 자식없지요? 자식도 없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복받았다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 놓을 것도 없으면서 복받았다는 일방적인 자기 주장입니다.

 

한나가 아무리 보아도 자신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데 브닌나가 자꾸 약을 올립니다. 심히 격분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따집니다. 하나님이여 약속대로 해 주세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들은 대가 끊이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한나에게 아들이 없습니다.

불임여성입니다. 사라,리브가, 라헬 모두가 불임여성이었습니다.

특히 리브가를 보면 리브가가 시집갈 때 오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 것이고 네 씨가 원수의 성문을 열것이라고 했습니다(창24:60).

그런데 막상 시집가니 한명도 낳지 못했습니다(창25:21). 하나님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막습니까?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신다는 이 개입이 하나님의 언약의 개입으로 증거되기 위해서입니다. 자식을 얻었을 때 내 힘과 능력, 잠재 능력으로 얻었다는 것은 누구나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낳게 하셨다고 했을때에는 그전에 당황스런 상황, 난처한 상황이 벌어져야 합니다. 이럴 때 아들을 주시게 되면 아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계시가 함께 따라옵니다. 그 계시에서 새로운 언약노선이 펼쳐지면서 기존의 육의 노선과 싸우게 됩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가 싸움에 돌입됩니다. 이것은 한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하니 그제서야 아들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진작 주시지 왜 안주셨습니까? 왜 그렇게 내가 멸시당해야 했습니까? 이렇게 주실걸 왜 빼시다가 이제야 주시는 겁니까? 힘들게 해놓고 왜 주시느냐?

 

그냥 주시면 그 자식이 내 자식이 됩니다. 그러나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자식을 주셨다면 그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진 하나님의 자식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그래서 한나가 하나님께 드립니다.

 

사무엘이 어릴 때부터 들어간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관심없는 시대입니다.

백성들이 율법에 관심 없으면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았습니다. 십일조 제대로 내지 않으면 십일조를 받아 생활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먼저 자기 배부터 채우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엘가나의 자식에서, 한나의 자식에서 엘리제사장집으로 갑니다. 사무엘은 아빠 엄마가 없습니다. 사무엘의 아빠 엄마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자식과의 싸움이 벌어집니다.

율법을 놓고 인간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사무엘이 개입되면서 위기가 옵니다. 둘줄 누구하나가 제거 됩니다.

이가봇 사무엘상5장21절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엘리제사장, 그리고 비느하스의 아내가 한 날에 죽습니다.

엘가나 가문은 왕가문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위에서 내려온 가문입니다.

사무엘 가문도 없습니다.

다만 사무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기준 엘리가문을 무너지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하나님이 사무엘과 함께 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은 뻔히 압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켜야 하는 가문이 무너진 상황에서 율법을 지키는 가문의 등장은 사무엘 본인도 모릅니다. 새로운 가문이 옵니다. 어떻게 아느냐? 사무엘의 엄마의 찬송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삼상2:10)”

하나님이여 내 아들이 기름붙는 자의 가문이 새로운 율법의 가문이 되게 하옵소서. 한나가 이렇게 찬송했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한나를 통해 찬송케 하신 것입니다.

 

여기 한나의 찬송을 마리아가 표절하듯이 그대로 해버립니다.

기름부은자가 등장할 것이다. 왕이 등장할 것이다. 사무엘 본인도 모릅니다.

지금 모세언약이 다윗언약으로 넘어가는가 연결고리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인수인계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쪽이 망합니다. 망하는 속에서 고난과 핍박이 일어납니다.

 

사사기 노선이 있습니다. 왕이 없음으로 소견에 옳은대로 합니다.

또하나 노선이 점으로 나와 있습니다. 점으로 끝난 곳에 실선이 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모세율법의 바탕위에 다윗언약 바탕으로 인수인계합니다.

그러면 구약은 이미 지나갔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가 왜 알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도레미파솔을 깔고 있습니다. 언약을 그대로 밟아서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십자가가 무엇입니까라고 할때에는 구약을 포함해서 이해가 되어져야 합니다. 그냥 오셨다. 피흘렸다. 피 믿으면 끝이 아니라 구약에서 어떤 식으로 활주로에서 동서남북으로 움직이는가를 보아야합니다. 어떻게 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죽어야 벗어나지 죽지 않으면 벗어나지 못합니다.

 

고린도후서5장에서 사도바울은 소망이 하나있다고 합니다.

8절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죽는 것이 소망입니다. 할수 있다가 아닙니다. 교회기둥에 올해 목표는 죽는 것.

선지자를 섬겨라 이런 것 필요없습니다. 죽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주께서 죽여주십니다. 죽을 때 고맙다고 죽습니다. 다윗도 죽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오시면 왜 안되느냐? 다윗왕을 거치지 않으면 언약의 깊이를 갖지 못합니다. 괜찮은 왕 왔으면 좋겠다해서 괜찮은 왕 와도 믿음이 안생겨요. 천국가는 믿음은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간의 언약속에 주어진 성자의 믿음이 와야 천국문이 열립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24:7)” 이것은 다윗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설교했지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영원한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본모습, 시편의 본모습이 보입니다.

사무엘도 어리둥절합니다. 세 번씩이나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릅니다. 물론 사무엘도 엘리도 처음에는 몰랐지요.

 

사무엘은 사사입니다. 장기근무 사사입니다. 사무엘이 왕은 아닙니다. 왕에게 바톤을 넘겨줄 사사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사사와 사무엘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기존의 사사는 이벤트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기존의 율법체계가 아님을(부정) 보여주면서 바톤을 넘어주는 두가지 기능을 합니다.

 

사무엘이 왕이 아닌 이유는, 엘리 아들들의 행실이 나빴지요. 그런데 사무엘 아들들로 마찬가지입니다(삼상8:1-3).

 

왕이란 반드시 세습됩니다. 사무엘은 사사이기 때문에 세습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율법이 아니다를 말해 줍니다.

사울왕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사무엘을 초청해 제사를 드리고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습니다. 도저히 기다리지 못해서 사울왕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왔습니다. 누가 잘못했습니까? 약속시간 어긴 사무엘이 잘못했지요. 그런데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여호와께서 당신을 버려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삼상13:14).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자신이 늦게 와 놓고 왜 여호와께서 명하신 명을 지키지 않았냐고 책망하지요. 약속은 사무엘이 지키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 모든 잘못은 사울왕에게 있답니다. 이게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선지자면 다냐? 왜 억지를 부리느냐 하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이 어처구이 없는 행동을 합니다. 합리적은 해석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사무엘의 해석은 미래에서 현재에서 과거를 제해석합니다.

 

요한복음6장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도 갈래라고 하니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계시는데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수 없다고 하시지요. 내가 너희 열둘을 택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이야기가 긍정적으로 좋은 분위기로 끝나면 되는데, 너희중 한 사람은 마귀라고 합니다.

왜 분위기를 깹니까? 이미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을 가룟유다에게 지울수 없지요. 예수님이 사탄을 택했잖아요. 그렇다면 자기도 모르게 불려 왔는데 그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은 정의 사회 구현에 전혀보탬이 안되는 논리입니다.

 

가룟유다의 일을 하라고 지시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파는 일을 하라고 하는줄을 몰랐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시나리오에 말려드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세상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사람의 합리적이고 이성적 논리로서 따질 수 없는 논리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돌리지 마세요. 이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주권이 되면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팔았다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에 의해서 피흘리신 예수님, 피해입은, 처단받은 그분만이 주님입니다. 그분의 주권, 언약적 주권입니다.

 

남는 것을 불합리입니다. 우린 똑똑하고 정도를 걷고자 했지만 그 정도가 불합리와 마주칩니다. 어떻게 설득되지 설명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영이 와서 믿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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