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연대강의 13강 본문
강의:이근호 목사
연대강의 13강
어떤 분의 질문-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었고 살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기적으로는 십자가를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십자가를 모른다고 고린도 전서 2장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 같지도 통달하시느니라 ”
서른 세 살 먹은 청년이 자칭 메시아라고 우깁니다. 만일 내가 빌라도고 내가 제사장이고 내가 바리새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한복음11장47-53절을 보면 제거하자고 판정이 났습니다(성도는 이것을 현재로 봅니다). 한 사람을 죽여서 모든 민족이 살자라고 합니다. 여기에 가해자가 인간 맞지요. 그리고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헤롯이 어떻게 했습니까? 화환을 보냈습니까 아니면 죽이려고 했습니까?
어떤 사람이 피를 흘릴 때 수사관이 와서 남편이 아내를 미워한 죄로 체포되는 것이 아니고 아내를 죽인 살인죄로 체포가 됩니다. 성경에 보면 살인죄는 자신이 사형을 당해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분명 살인사건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해석해 낸 내용 중에 사랑이 나오고 하지요.
그러나 그 구심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죽었으니 메시아는 이 세상에 없는 겁니다. 구원자가 사라졌습니다.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왜 자신이 부활했다고 온 천하에 보여주지 않습니까?
부활하셨는데 왜 숨어서 부활하십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왜 다시 제자들을 모아 삼년동안 함께 하지 않습니까?
이미 세상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자체는 세상 자체가 가해자로써 이미 끝났습니다. 로마서에서 너희들은 하나님의 원수된 자라라고 규정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창세기 6장3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없는 자들, 곧 육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아심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육신인데 이것을 육으로 보지 말로 인간으로 보자라고 한다면 말씀과 다릅니다.
십자가 피를 흘렸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어린아이들이 보기에 정서상 좋지 않지요. 그러면 얘들아 우리가 어린양의 피로 살았다고 말로 할 수 있는데 아버지가 얘들 보는데서 양을 잡아요. 피를 문설주에 발라요. 피 없으면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냥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이여 보소서 우리가 양 잡을 정도의 정성이 있잖아요 할 수 있겠지만 정성은 피 안에 담기지 못합니다.
우리의 어떤 의지적인 것도 담기지를 못합니다. 나의 정성과 열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약속대로 어린양의 피를 봅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잡아서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지막에 모형으로서 역할 했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진짜 죽을 어린양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다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습니다. 아비도, 어미도, 족보도, 시작도, 끝도 없는 분입니다.
그분을 보고 세례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을 때(요1:29), 다른 이름은 안 되고 그분의 조치로 다 끝났음을 그냥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어둠이고 깨닫지 못하는 자였다는 말입니다. 그 유일한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성경에서 성도가 살았다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그 용어를 그대로 연장해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것을 살았다고 넣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확실하니 나는 그 안에서 죽었고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겁니다.
13강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은 이미 지나 버렸는데 왜 알아야 합니까?
지난 일이 아니고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용을 갖고 일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일을 반복시키고, 이삭에게 일어난 사건을 반복, 야곱에게 일어난 사건을 반복합니다.
문제는 출애굽이후에 국가적 단위에서 다루어집니다. 이전에는 가정사에서 다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이후에 국가가 만들어 졌습니다. 그 이름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이제는 국가단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적용시킵니다.
우리는 왜요라고 반문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까?
출애굽기4장을 보니 그래야 아들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출4:22).
출애굽기4장에 모세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중 숙소에서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격려해 주었습니까?
그래 수고해. 잘 다녀와 했습니까? 숙소에서 모세를 죽여 버렸습니다.
김이곤 씨의 책에 이 본몬에 대해서 제대로 주석한 책이 없답니다. 어물쩍 넘어 갔답니다. 왜냐하면 앞뒤를 볼 때 하나님의 일관성을 구축할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자기 일꾼을 보냈으면 격려하고 해야 할 텐데 보낸 사람을 죽여 버리면 누굴 보냅니까?
죽일 것 같으면 보내질 말아야죠. 왜 죽입니까?
김이곤 교수 자신은 해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른 주석도 해답을 못 내놓으니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김이곤 교수가 무엇을 놓쳤는고 하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는 것을 놓쳤습니다(출4:22).
단수입니다. 이스라엘은 60만 명이 넘지요. 복수지요. 그런데 이 복수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의 언약에 저촉을 받게 합니다. 묶는 끈이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하나. 이삭의 하나님. 둘, 야곱의 하나님. 셋, 하나님본인 말씀에 의하면 벌써 끈이 셋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단수가 됩니까?
여기에 공통적으로 동일한 아들의 위상이 나옵니다. 요셉을 통해서 아들이 구체화 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나를 먼저 애굽으로 파견하셨습니다. 파견하는 꼴이 우습게 되었지만 어찌되었던 파견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종합적으로 볼 때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정된 계획에 의해 된 것이지 사적이 감정문제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모세 언약 이후에 더 확실한 깊이를 갖습니다.
시편 105편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 요셉을 앞서 보냈는데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손에 차꼬를 차고 몸은 쇠사슬에 매여 보냈습니다(시105:18,19).
차꼬를 차기 위해 요셉을 팔아먹는 역할을 하는 자가 있어야겠죠? 그 역할을 요셉의 형들이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차꼬를 차게 한 원인 제공자가 누굽니까?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누굽니까?
한쪽은 아버지가 특별 대우한 것이 문제였고 더 중요한 것은 요셉에게 꿈을 두 겹으로 꾸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요셉의 생애는 장차올 하나님의 지상생애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럴 때 언약이 담겨 있는 언약이 양산한 아들입니다.
언약의 아들입니다. 이삭을 무엇이라 부르는고 하면 약속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무엇과 차별이 되는가? 이미 아브라함 혈통의 아들이 있습니다. 이스마엘. 이스마엘과 구별되는 의미에서 약속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구별된 이라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성화라고 하면 경건함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는 성화는 경건함이 아니라 구별입니다. 다시 말해서 분류닙다.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는데 너는 무조건 나와 달라요.
그럼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네 속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그 근거는, 분류 기준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2장에서 십자가의 피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합니다.
자르고 모읍니다. 은총을 부수고 다시 연락시킵니다. 스가랴11장4절 이하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부수고 다시 연락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주님 앞에 주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부셔지고
연합하는 자들이 됩니다. 병 주고 약주는 꼴입니다. 철저하게 농락당합니다. 철저하게 언약을 보여줍니다.
요셉이 그렇습니다. 요셉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면 자신은 이상하게 일이 꼬이지만 주변이 이상하게 재수가 좋아요. 왕이 오해해서 감옥에 넣은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만난 후 이상하게 감옥에서 나가 승진이 됩니다.
꿈을 해석해준 요셉도 인간인지라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창40:14).
그런데 이상해요. 신하가 요셉을 기억했습니까? 잊어버렸습니다. 그 잊어버린 기억을 누가 깨어 줍니까?
또 초월자가 개입을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 이름의 관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언약적 주권론입니다.
내가 결정해 놓고 주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상하지도 못한 돌발사태가 주어지면서 나는 선택된 효과로서만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일의 효과로만 존재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차후에 할 말이 있습니다.
형들이시여 나를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신 후 이제 형들 죽었어 라고 하지 않지요(창50:21).
나를 앞서 보내신 분이 계신데 우리 아버지에게 언약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요셉의 고백이 무책임합니까?
너무 허무맹랑합니까? 남들은 그렇게 보일겁니다. 그러나 본인은 진심이었고 실제로 다른 형들은 그 혜택을 받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국가 단위로 적용을 시키겠다는 겁니다.
그 다음 이야기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다음 소설을 써 본다고 합시다.
우린 어떻게 이 드라마를 마무리 지을까요?
이렇게 개인가정사에 있었던 사적인 사건을 국가 단위로 하게 되면 난처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국가는 가정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이 동네는 아들 잡는다고 난리고 이 동네는 별미 바친다고 난리고, 저 동네는 꿈꾼다고 난리고 이렇게 되면 하나의 아들이 되지 않겠지요.
이 삼중 언약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어떻게 하나로 주어집니까? 해답은 신명기에 나옵니다.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신9:6). 너희들을 약속의 땅에 넣어주는 것은 너희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다. 너희들은 악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신9:6).”
그러면 이방민족은 악하지 않습니까? 악하지요(신9:4). 그런데 왜 하필 우리만 특별하게 악하다고 지명해 줍니까? 그런데 그 악함이 어디에 활용되는가 하면 언약을 마주치면서 언약을 구현하는데 활용됩니다. 필수요소로서의 악함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모든 언약에서 구원받은 언약의 주인공들이 언약 때문에 선함이 하나도 없는 자로 드러나는 사태가 일어나야 되겠지요.
그 예로 유다를 봅시다.
창세기38장입니다.
유다에게 아들 셋이 있었습니다. 엘, 오난, 셀라입니다.
유다의 첫째 며느리 엘의 아내 다말이 있습니다.
다말의 남편 엘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해서 여호와께서 죽였습니다.
형이 죽자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와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형을 위해 씨를 잇게 하기 싫었습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함으로 여호와께서 오난도 죽였습니다.
이제 셀라가 남았습니다.
유다가 셀라도 죽을까 염려해서 다말을 자기 아버지 집으로 보냅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녀가 없는 동네에서 창녀로 변장해 시아버지와 동침합니다. 왜냐하면 유다가 셀라가 장성함을 보고서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담보물을 받았습니다. 도장과 끈, 지팡이.
그런데 회임을 했습니다. 감축드릴 일이 아니지요. 다시 너울을 벗고 본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유다가 창녀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석달후 며느리 다말이 행음했고 임신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명합니다.
우리 가문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거룩한 구별된 가문인데 감히 행음하여 임신을 하였다니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복의 근원 저주의 근원입니다.
그때 여인이 자신이 받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 보입니다.
이때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중요한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여기의 다말이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갑니다. 그 이름이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희생자가 죄를 저지른 자를 도리어 구원하는 방식이 언약적이고 언약을 집단적으로 적용시킨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하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의 면류관을 반납해야 합니다. 이 영광은 오직 주님만, 어린양만 받아야 됩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계4:10)”
요한 계시록의 보좌는 어린양의 보좌입니다. 어떤 기능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보좌입니다. 그 기능을 증거하는 기능이 우리의 기능입니다.
어린양 때문에 살았습니다. 요셉처럼. 우리가 죽였는데 죽인 자가 언약 때문에 살았습니다. 죽임당한 자가 오히려 죽이는 자를 대신하셨습니다. 죄 없는 분이신데 죄를 대신 짊어 지셨습니다.
그 어린양이 아들이고, 이스라엘은 아들이어야 됩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아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복의 근원을 제공하는 하나의 껍데기입니다. 이 껍데기 역할을 국가적 이스라엘이 담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알맹이가 나오는 순간 이스라엘 국가는 의미 없이 날아갑니다.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감람산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영화제목이 ‘회복’입니다.
로마서11장26절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이 말씀이 역사적으로 눈으로 확인되면, 즉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감람산에 재림할 것이고 거기가 메시아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눈에 보이는 역사 외에는 믿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 즉 우발적 사건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번 붙잡으면 계속 갈수 있는 덩어리로 붙잡고 싶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4장3,4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창세기를 새롭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모세로는 창세기를 새롭게 시작할 수 없습니다.
아들 된다는 것은 모세가 죽어야 합니다. 모세를 왜 죽입니까? 모세 네 자격으로 아들 만들 수 있다 없다. 없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껍데기입니다. 모세가 담고 있는 그것이 살립니다.
십보라가 모세가 숙소에서 죽는 것을 보고 후시딘 연고 바릅니까? 고려 침 안했습니다. 인공호흡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건강 매니저 아닙니까? 목사님은 어떻게 처치하겠습니까? 헉헉 숨이 넘어가는데, 누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비틀거리고 있어요. 등 푸른 고기? 아닙니다. 십보라의 방식은 아들 게르솜이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칼을 가져 할례를 합니다.
아들은 모세에게 아들역할입니다. 모세는 아버지 역할입니다. 모세가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기 위해, 국가적 단위로 언약을 이루기 위해 갑니다. 그런데 이 아들에게 뭔가 빠졌습니다. 뭐가 빠졌습니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할례를 행할 때에 그렇게 난해한 성경구절이 한 마디에 풀립니다.
당신은 피남편이라.
국가 이스라엘의 요점은 오직 피. 피작업을 위해서 있습니다. 마지막 재앙이 피라면 처음부터 아홉 번째까지의 재앙은 피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준비 절차입니다.
모세는 자기 아들이 할례를 행함으로 모세의 자격으로서는 이스라엘을 절대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할례 언약의 자격으로 가야됩니다.
할례 언약을 받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리지요. 그 제사 재물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차량은 엔진이 있어야 가지요. 바퀴만 있으면 그림책처럼 차가 아니지요. 굴러갈 수가 없지요.
할례언약에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동행하신다 입니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히브리인들을 보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출5:1).
이 때 바로가 여호와가 누구지라고 말합니다(출5:2).
회사직원이 일요일 교회가기 위해 사장에게 묻습니다. 사장님 교회가야 합니다. 교회가 뭔데?
예수님을 믿는 곳입니다. 예수가 누구지? 너 예수 믿는 것과 회사 출근하는 것이 무슨 관계있는데?
여러분 누가 정상입니까? 회사 사자이 정상입니까 아니면 예수 섬긴다고 교회 간다고 하는 사람이 정상입니까?
사장이 정상이지요.
아니지 싶어요?
여러분 목사 그만두고 회사 차려보세. 내일 모레 선적해야 되는데 직원들이 평소에 교회 안가다가 초코파이 준다고 했는지 교회 간다고 할 때 누가 정상입니까? 직원들이 사장의 은덕을 모르고 말이죠.
우리가 비정상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반대로 바꾸어서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항상 비정상입니다. 분류가 거룩입니다. 거룩한 생활 따로 없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을 느끼고 사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나는 달라. 비정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이것이 유지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이 내편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우리는 껍데기입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분 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아브라함 언약을 유지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무엇인가? 행함이 없는데 발생한 의. 이 의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 됩니다.
사람의 행함, 인간이 지키는 의는 소용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의를 위해 우리를 다루었고 그 의는 제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모세가 바로 왕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광야로 나가야겠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바로 왕이 근본을 묻습니다. 똑똑하기 때문에.
여호와가 누구지? 난 모르는데.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지 왜 나에게 묻느냐?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가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출5:7-9)”
이때 누가 원망합니까?
종교적으로 원망합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5:21).”
벌해 주옵소서라는 말이지요. 결속력이 깨어졌습니다. 힘을 합쳐서 나가자도 물 건너갔습니다.
다시 바로 앞에 서서 지팡이를 던지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모세 안에서 창세기가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을 기적을 통해 보여줍니다. 이 싸움은 인간의 싸움도 아니고 바로의 싸움도 아닙니다.
출애굽은 애굽의 신들과의 싸움이 됩니다. 그래서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잡신들과 싸우는 기능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국가, 자기를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 그리고 여호와를 모독하는 다른 민족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진짜 아들을 만들어내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동행하시어 작업하십니다.
놀랍게도 그 중에서 모세마저 제거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와. 하나님께서는 수고했다고 보너스 챙겨주시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출애굽기17장6절에서는 모세가 반석을 치니 물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20장11절에서는 두 번 반석을 칩니다.
치면 안 되지요. 모세는 착각했습니다. 백성이 자기 수하에 있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백성인줄 알았습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이 오니 교인들 구원책임이 목사에게 있다는 것과 똑 같습니다. 사모님은 목회에 부담 느끼지 마세요. 마음대로 사세요. 목사도 책임지지 못하는데 사모가 왜 책임을 져야돼요. 뭐 국모인가요? 나는 조선의 국모다. 왜 자신이 책임을 집니까? 너무 건방을 떨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실 때 이동경로를 모릅니다.
더 경악할 일은 구름기둥이, 불기둥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니 뭐가 없었다? 물이 없었다. 이게 뭡니까? 이게 우리를 살리겠다는 말입니까 죽이겠다는 말입니까?
백성들이 정상이죠? 애굽이 정상이죠?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출14:11)”
너무나 지극히 정상인들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 욕할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물이 없어 물이 없다고 했을 뿐이고, 양식 없어 양식 없다고 했을 뿐이고, 고기 먹고 싶어 고기 먹고 싶다고 했을 뿐이고 뿐인데. 인간의 한계인데 어쩌라고. 미리 물주고, 미리 오아시스 만나게 하고, 미리 양식 주시고 미리 고기 주셨다면 원망하라고 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을 유도했습니다. 아들 만들기 위해서. 애굽이 적이 아니고 출애굽한 너희들이 바로 하나님의 적이다. 40년 동안 광야생활에서 망하고 망하고 다 망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다만 남는 게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다는 것만 남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광야에서 망한 사람 지옥 갔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사랑과 전쟁에서 나쁜 역 하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까? 역할만 그럴 뿐입니다.
완성된 것을 가지고 앞당겨 적용시키면 위험합니다.
성신과 성령이 어떻게 다릅니까? 간단합니다. 그 당시 언약을 적용시키는 분이 성신입니다. 성령은 완성된 새언약을 적용시키는 분입니다.
성령 받은 내용을 성신 받은 내용에 집어넣으면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성신을 받았는데 왜 악신이 들립니까? 사울 말입니다(삼상16:14).
사울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다가 악신에 들렸다고 하잖아요. 역할입니다.
다윗도 죄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했는데 주어진 고백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시편22편.
그리고 시편23편에 곧장 바꿉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하지요.
시편22편을 거치지 않으면 시편23편이 나오지 않습니다.
시편의 특징은 고난을 앞에 두고 영광은 뒤편에 있습니다.
원수들이 있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심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억울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시달리고 당했던 그 모든 것이 결국 할렐루야로 이어집니다.
시편 후반부에는 할렐루야로 도배를 해 놓았습니다. 그 앞에 사울에게 쫓기는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광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