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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연대연합강의 12 본문

해외 특강/14연대연합

연대연합강의 12

정인순 2014. 3. 20. 10:43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12 

 

연대연합강의 12

 

창세기12장에서 아브라함이야기 나오면서 아브라함은 지리적으로 본향 떠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우리가 궁금한 것은 갈라디아서 3장입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의로움이 율법을 지킴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다른 노선을 통해서 나오느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21절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쪽 노선의 대표자로 아브라함을 제시합니다.

 

창세기12장 하면서 아브라함 시작합시다라고 하면서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율법이 없는데, 지킬 법도 없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는가하는 문제와 율법이 없으면 영원히 없어야지 왜 430년 후에 율법이 오느냐의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율법이 없으면 깔끔합니다.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입니다. 이것으로 종결해도 문제없습니다. 믿으면 의롭다. 그렇다면 끝. 문 닫으면 되는데 율법이 왜 와야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 율법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입니다. 만일 연결이 되지 않으면 너 편한대로 골라잡아가 됩니다. 나 율법 지켜서 구원받을 거야. 난 믿음으로 구원받을 거야. 그러나 이것은 슈퍼에서 물건 고르는 것처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위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본인의 자격으로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본인의 행함으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의 근원이면서 복을 못 받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하나의 미끼상품?

아브라함은 빈 껍데기고 그 속에서 여자의 후손이 피어 나와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자리를 대여해 준 겁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자진해서 빌려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차출하셨고, 강제로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 차압당했습니다. 불쌍한 아브라함, 자기 인생을 다 날려버린 아브라함.

우리가 아브라함 될까 겁납니다. 네 아들 죽이라 할까 겁납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어떤 전도사는 기도하다고 아들 바쳐라 해서 아들 죽였습니다. 이게 무엇인고 하면 오기입니다.

아브라함 아들 바쳤어? 네만 믿음 있냐? 나도 믿음있어라는 태도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니 그렇게 믿어야 되는 줄 알아요. 그런 믿음 아니면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설치는 우리 몸을 주님 앞에 대여합시다. 한국에는 대여차 번호판 앞에 무엇이 붙지요? 허.

헛되고 헛되니. 헛된 것이 그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안개가 그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대여해 드립시다. 어떻게 사용하시든 우린 손대지 맙시다.

 

이제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아브라함 당황하는데, 나름대로 그 속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데, 꼼짝 못하는데 , 조카는 지금 심판 속에 들어가는데, 구출할 방법은 없는데, 아브라함은 여섯 번이나 기도했는데, 기도하는 대로 되지 않는데, 약속대로 유황불이 떨어지는데, 결과적으로 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져내셨습니다.

왜 갑자기 아브라함이 등장합니까?

창세기 19장29절“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 보내셨더라”

 

롯이 나름대로 천사를 대접하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끝에 롯은 역시 구원받을 만한다라고 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생각하사라는 말씀이 나옵니까?

아비멜렉 사건에서 아비멜렉 집안이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갑자기 회임을 해서 감축드리나이다라는 소리를 왜 듣습니까? 왜 임신하지 못한 여자가 임신이 됩니까? (창20장). 스캔들 중심에, 태풍의 눈에 누가 있습니까? 아브라함. 아브라함 본인도 미쳐요. 좀 조용히 살게 내버려 두시지.

 

애굽에 내려갔는데, 애굽의 바로 왕이 자기 아내를 원했는데, 성상납 했는데 갑자기 그날 밤에 애굽 바로 왕이 개한테 쫓기는데 팔에는 개에게 물린 자국이 있는데, 아브라함이 종이 태웠습니까?(기황후에서 하지원을 죽이려는 중전의 주술방법)

쿵다리 샤바샤바 했습니까? 주문 태워 올렸습니까? 저승사자 명부 땅에 심었습니까?

 

주여 왜 이렇게 저를 못살게 굽니까?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그게 바로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에 산 욥 이야기입니다. 풀리지 않는 비밀이 있습니다.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욥이 모릅니다. 욥은 모르면서 왜 자신에게 고난을 내립니까? 저는 고난 받을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정답입니다. 무엇이 정답입니까? 무엇을 배제해 놓고 정답입니다. 황무지에 비 내리는 것을 모르면서, 염소가 산에서 고통스럽게 새끼 낳는 이유는 몰라도 나는 고난 받지 않아야 되는 존재라고 우기고 싶습니다라고 한 것이 욥의 한계였습니다.

 

전체를 모르고 부분이 전체 행세한 겁니다. 마치 자신이 중심인 냥 행세했습니다. 욥의 친구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친구들은 얼러리 껄러니, 마누라는 저주하고 죽으라 했고, 자식 열 명이 한꺼번에 죽습니다.

우리 같으면 돌아버리겠지요. 안 미친 게 이상해요. 여기에 대해 대단한 점수를 주어야 하겠지요.

욥과 우리가 일입니다. 같은 지체입니다. 아브라함을 펼치는 순간 재수 더럽게 없는 인간이다. 된 통으로 당했구나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입니다. 동시에 저주의 근원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들지도 안했어요. 건드렸으면 말도 안 해. 건드릴 뻔했지요. 건드릴 뻔 했는데 임신이 안돼요. 자신은 아브라함을 건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복의 근원을 건드렸습니다.

복의 근원과 아브라함을 분리시킵니다. 아브라함 그리고 복의 근원.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서의 자기 임무는 오년임기로 끝나버려요. 이제는 아브라함의 씨가 복의 근원이 됩니다. 이삭도 몇 년 가지 않습니다. 이삭은 복의 근원을 에서로 몰아주기 해 주었지만 그것이 어찌 되었는지 야곱으로 다 몰렸습니다. 야곱이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으로 몰아주었는데 요셉은 죽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에게 복의 근원을 물려주면서 어떤 사건 하나가 벌어집니다.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면 아브라함 자신이 그동안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의 역전이 일어납니다.

내가 이삭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장차 태어날 이삭이 아브라함 나를 용서하고 살려준 것입니다. 이미 주문받은 상품 때문에 이번 달만 더 일해라고 하면서 살아난 겁니다. 이번 달에 구조조정당해야 하는데 선적 납기 기일이 있어 쫓겨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의 역전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하다가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 때 기뻐한 것은 아브라함이 살아생전의 기쁨과는 질이 다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이삭은 자신이 원한 음식을 원했습니다. 그것은 이삭 자신이 복을 주는 줄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빗나가게 만드셨습니다. 네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바입니다. 이삭과 복의 근원은 또 분리됩니다.

 

야곱은 자신이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이스라엘이 또 분리됩니다. 복의 근원인 줄 알았더니만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야곱은 마지막에 요셉 자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을 합니다. 자리를 바꾸어 오른 손에 에브라임, 왼손 쪽에 므낫세를 두고 축복할 수 있지요. 그런데 자리를 안 바꾸고 팔을 엇바꾸어 축복을 합니다(창48:14).

 

이것은 누구에게 축복을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언약만 노린다는 것을 엇바꾸는 과정에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뱃속에 있을 때에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25:23).

 

이것을 빌립보서 2장6-11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코스는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사건입니다. 과정입니다. 그런데 현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존재로 봅니다. 예수님을 존재로 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언급하다가 제대로 언급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칼 바르트입니다. 처음에는 언약으로 시작해서 언약으로 끝내지 못했습니다.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엔 이웃 사람으로 나갔습니다. 이웃사랑으로 나간 것은 잘못 되었습니다.

 

껍데기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 다음 문제는 하나님의 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을 빌려서 갖다 드린 것이 있습니다.

삼년된 암소, 삼년된 암염소, 삼년 된 숫양, 산비둘기새끼, 집비둘기 새끼입니다(창15:9).

삼년된 암소, 삼년된 암염소, 삼년된 숫양은 중간을 쪼갰습니다.

솔개는 쫓아내야 합니다. 솔개는 실체가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본인은 쪼갠 후 손대면 안 됩니다. 쪼갠 후 그것을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곳에 새롭게 추가된 사건하나가 우발적으로 터져야 합니다.

난데없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여기서 아! 하나님 자신이 곧 재물이 되시는구나! 여기에서 나는 뭐지? 나는 그냥 이용당했구나! 하나님에 의해서 이용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의가 자신으로 인하여 의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자신 안에 내장되어 채워지는 그분이 바로 창세전에 바로 아버지와 의논해서 이 땅에 의를 남기기로 작심하신 일에 대해 나를, 내 몸을 동원, 차출하신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네 자식으로 인하여 의롭게 된다고 하면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으면 되지요? 그런데 사라가 늙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 삼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네 상속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임신합니다. 임신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텐데 꼭 이런 식으로 자식을 낳으려고 합니다.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창16장). 이 대목에서 상당히 혼란스런 대목이 나옵니다.

임신한 하갈이 고난 받을 때 여호와께서 그 고통을 들어 주셨습니다(창16:11).

하나님은 고난 받는 자의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그 앞에 한 단어가 더 붙어야 합니다. 언약적으로 고난 받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임신한 후 사라를 멸시하지요. 그래서 사라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사라가 착합니까 착하지 않습니까? 질투가 나서 미워서 쫓아냅니다. 하갈이 행세해서 미운 것 이전에 내가 없는데 네가 왜 가졌느냐 입니다. 타고난 겁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해체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자신이 새롭게 정립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 앞에 서는 내가 작아져요. 그러나 사랑하는 대상이 떠나 버리면 갑자기 나는 커지게 됩니다.

자기를 사수하고 방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아를 심하게 지키는 사람은 나는 아무도, 나 외에 달리 내세울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내가 청바지 입고 남편이 학교 다닐 때 입었던 추리닝 입고 돌아다닐 때에는 그만큼 남편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화장할 때 이미 가정에 위기가 온 겁니다.

거울 속에 나 말고 사랑할 대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그 때 그 남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복음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아이 부끄러워라).

 

사라 착하지 않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고만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가 질투 낼만 한 사건이 개입될 때 내가 얼마나 독한 여자인지, 나쁜 왕후 노릇을 하고 있는지를, 자신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람보고 성질을 고쳐라고요? 성질은 이성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성은 기껏해야 난 성질을 변명하는데 동원됩니다.사회가 악해서 그렇다. 이렇게 더러운 변명만 늘어놓습니다. 절대로 이성은 감정을 점령할 수 없어요. 90퍼센트가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의 다른 말은 한입니다. 프로이드는 아이가 엄마를 떠난 후 엄마의 대체물을 찾는 한의 여정이 한 평생이라고 봅니다. 하나 밖에 없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해 줄건가? 여러분? 그건 윤복희고.

 

누가 나를 사랑하는데? 세상에 죽은 남자친구에게 편지를 했더니 엉뚱한 여자에게서 답장이 오고.

러브레트영화이지요. 인간은 정이고 그 정은 나를 사랑해줄 사람, 이것이 육신의 근본입니다. 그 외에 복음이고 교회 나오는 것이고 모두가 다 정 찾아 사랑 찾아 가는 것입니다. 부교역자들이 왜 선교사로 갑니까? 이 씨 당회장만 주의 사자고. 나도 사랑받고 싶다는 겁니다.

사랑 찾아 길을 떠나는 겁니다. 사랑해 주지 않는 조국은 더 이상 조국이 아닙니다. 몸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나의 투영채이니까. 내가 확산된 겁니다.

 

아프리카, 아마존 어디든 나를 원하는 곳은 다 갑니다.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갈급하고 목말라합니다.

프로이드와 라캉이 이렇게 논리를 펼칩니다.

 

사라는 자신이 그렇게 나쁜 여잔지 몰랐습니다. 하갈을 구박하고 쫓아냈습니다. 이스마엘을 임신한 하갈은 가출한 것이 아니라 쫓겨 났습니다. 여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마치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축복과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씨를 번성하여 수가 셀수 없게 하리라” 이름도 여호와의 사자가 직접 지어 줍니다. 이스마엘 이라고

이 이스마엘이 저주받기로 확정된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요? 누가 누구를 도와주어야 됩니까? 사라를 저주받게 하고 사라에게 당했던 억울한 하갈 편에 들어 하갈을 축복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사라 편을 들지요. 사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어떠한 자격도 없습니다.

일체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가 튀어 나올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인간의 의와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아브라함 가정에 그 터전이 마련됩니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은 껍데기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 가정을 못된 가정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서 의를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일을 하지도 않고 경건하지 않았는데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방적으로 일을 하지도 않고 경건하지도 않았는데 의롭게 된 것이 아브라함부터 되어야 조상 값을 한다고 로마서4장에서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바울을 죽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유대인이잖아요.

 

세 번째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되었지 율법이 왜 연관됩니까? 이 세 번째가 제일 복잡한 부분입니다.

창세기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과 함께 한 왕들에 의해 소돔왕등 네 왕과 함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조카 롯의 사로잡힘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구출하러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생각에는 삼백십팔 명으로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없는 싸움임을 알고 있습니다. 절대 이길 전쟁이 아닙니다. 축구라면 심판을 매수하면 되는데 이 전쟁은 그런 것이 아니지요.

김연아가 은메달을 따는 것은 당연하지요. 심판 전체가 러시아 쪽인데.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지요. 푸틴이 경기에 나서도 금메달을 땄을 거라고.

문제는 이길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나중에 붙여주는 전쟁으로 바뀝니다. 붙여주는 전쟁을 통해 네 속에 다른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며 확인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복의 근원이 아님을 압니다. 자신은 껍데기임을 압니다.

그래서 누구지? 누구지? 누구지? 하는데 누군가 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으니 전리품이 있겠지요. 전리품중 가장 좋은 것 십분의 일을 떼어 마주 오는 그 사람에게 드립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멜기세덱입니다.

이게 왜 복잡할까요?

멜기세덱이야기 하면서 그냥 끝나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점퍼해서 시편110편4절에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 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만 원수를 이기는 혜택을 입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중에 멜기세덱 지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시편110편은 다윗 언약 이후입니다.

다윗언약도 껍데기입니다. 아하스왕도 다윗의 혈통입니다.

아하스왕이 메시아입니까? 히스기야 메시야인가? 아니다. 요시야 왕은? 율법대로 시행했지요. 그러나 애굽이 앗수르를 치러 올 때 요시아 왕이 맞서 싸우러 나갔는데 므깃도에서 애굽왕이 요시야 왕을 죽입니다(왕하23:29).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왕하23-24장) 망했습니다. 다윗의 혈통이 다 날아갔습니다.

 

마태복음1장에서는 분명히 14대15대14대인데 14대14대14대로 적었습니다. 마태가 족보하나 제대로 못 적었습니까? 실수 했습니까? 실수 했다면 고치면 되는데 왜 그냥 넘어 갑니까?

유다지파는 다윗혈통이 맞습니다. 그러나 다윗 언약의 혈통은 아닙니다.

사도행전2장에 보면 누가가 다윗의 시편을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한 대목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설교한 대목입니다. 무엇을 강조하는고 하면 다윗이 메시야냐 아니냐 아니다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무덤은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 그렇다면 누가 메시야냐?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다. 예수님은 지금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주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시편에 이야기하는 말씀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비약적인 해석, 언어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해석을 사도라는 권위를 가지고 해버립니다.

시편에 나와 있는 그를 예수님으로 다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다 바꾸어 제대로 된 해석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골리앗 크레인이 동원되어야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뉴턴의 중력에 의하면 달이 지구에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과가 지구에 떨어집니까? 아니면 지구가 사과에게 떨어집니까? 둘 다 맞아요. 그런데 우리는 사과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지구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과가 지구에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갈릴레이가 말한 상대성원리입니다. 인간에게 주체란 따로 없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과학에서도 벌써 성경해석학이 나오지요.

성경을 보는 대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간 것이 아니고 붙여주는 전쟁에 의하면 골리앗이 다윗이 던지 물매 돌을 향해 달려 와서 자기가 알아서 이마에 맞은 겁니다. 만군의 하나님이 이런 조치를 했기 때문에 다윗은 이번 승리를 만군의 여호와의 승리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역할들을 맞추었다는 겁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군복을 입히고 놋 투구를 씌우고 갑옷을 입히고 칼을 군복위에 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익숙지 않아 다 벗어 버리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갔습니다(삼상17:31-40).

골리앗은 자신 만만했습니다.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먼지하나가 날아오네요. 맞았어요.

완전무장한 골리앗, 빈틈 자리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년 다윗을 통해 이기게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이 전쟁이 자신의 전쟁이 아님을 알았을까요? 하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17장입니다. 저쪽은 할례가 없고 이쪽은 할례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언약이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에 여호와의 이름이 있다는 말입니다.

골리앗 눈에는 아주 시시한 고만고만한 인간만 보입니다. 다윗의 눈에는 할례를 행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보입니다.

자신은 사울 왕이 시켜가 싸움에 나간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이 시켜서 골리앗과 싸움을 했습니다.

전쟁은 해보나 마나입니다. 하나님이 이깁니까? 사람이 이깁니까? 그것은 말 끄집어낸 내가 미워.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내가 나서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전쟁이니 아니고 나의 전쟁이 되니 전쟁하기 전부터 이미 실패한 겁니다.

목회? 주님과 주님의 원수와의 전쟁인데 여기에 내가 왜 끼어듭니까? 내가 한 기능인데 왜 끼어들어요.

다윗 보면서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사울 눈에는 그것이 안 보입니다. 이 단체는 내게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도 난처하지요. 자신은 양치고 있었어요.

이새의 아들은 여덟 명입니다(삼상16장).

사무엘도 다윗에게 기름 부으러 갈 때 사울 왕이 두려워 이새의 집에 몰래 갔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실 왕이 있답니다. 원래 사울왕도 있는데. 이중(두 명)왕입니다.

현장에 7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니다. 육대일. 여섯 번째도 아니다 할 때 일곱째 얼마나 기분 좋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소년 다윗도 현장에 있을 때 바로 직접 너다라고 하시면 되는데 사무엘도 누가 왕이 될지도 몰랐습니다. 사무엘도 인간적이라서 그중에 가장 잘 생긴 엘리압을 보고 여호와의 기름부으실 자가 여기 있도다라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물에 중심이 나오잖아요.

그러니 사무엘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섯째까지도 아니다라고 하니 일곱째 얼마나 기분 좋겠습니까?

이것은 백퍼센트 합격이잖아요. 그런데 아니랍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에게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고 물으니 양 지키는 막내가 남았답니다. 불러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으로 새움을 받을지는 몰라요. 그런데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왕됨을 두고 하나님 개입의 효과입니다.

성부께서 성자에게 기름 붓습니다. 한국에 있는 어떤 사람이 구원될까? 아니다. 된다 라고 했을 때 그 효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중보자입니다. 이런 역사적 수순을 밟으면서, 모세, 다윗, 엘리야를 왜 그렇게 층층이 깔아 놓습니까?

우리의 육신이 실패한 그 실패를 미리 선배들이, 우리가 끄집어 ,낼 수 있는 모든 죄는 이미 선배들이 다 보여주었습니다. 보여주면서 내 잘나서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을 구약을 통해서, 바리새인을 통해서 낱낱이 알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창세전에 성부하나님과 예수님이 의논해서, 다른 말로 창세전에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 선과 악을 행하기 전부터 하나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시고, 하나는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느니라(롬9:11-13).

그것을 우리가 구약 같은 인생을 살면서 쭉 보여줍니다.

멜기세덱이 왔을 때 이번 전쟁은 당신과 함께 있는 분의 공로입니다라고 올리는 겁니다.

멜기세덱은 시편110편에서 다시 히브리서 7장으로 점프합니다.

히브리서6장에서 단단히 다짐을 합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는 것이 어려우니라(히6:11).”

 

젖을 먹는 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말씀합니다.

멜기세덱은 ,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히7:3).

바로 없음이 곧 있음이고 그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있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그러면 이 족보에 가입된 모든 사람은 멜기세덱과 똑 같습니다. 없는 자인데 있고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양자가 됩니다.

 

유다족보는 왜 안 됩니까? 있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러면 유다족보는 구원못받습니까? 아닙니다. 있음이 없음으로 바뀌면서 유다족보가 구원받습니다. 유다족보는 일시적입니다. 멜시세덱에게 바통을 넘겨줄때까지 일시적이었습니다.

레위족보는 유대지파 올 때까지 임시적입니다. 레위지파에 속한 것이 모세율법이라면, 왕이란 이름으로 구심점을 가질 때 그것이 다윗언약입니다. `다윗 언약과 모세언약의 차이점은 집단화 되어 있는 것이 모세언약입니다. 그것을 왕이라는 개인화 된 것이 다윗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은 누구든지 법을 어기면 일에서 탈락되고 저주 받지만 다윗언약에서는 왕만 잘하면 죄를 범하더라도 용서받고, 왕에게 복속되었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그 시스템이 바로 다윗언약입니다.

그래서 눅18장38절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겁니다.

왕이시여. 왕 하나 잘 만나서 팔자 고칩시다가 됩니다.

 

존 로크 이후에는 왕개념이 없습니다. 바로코, 로코코, 신고전주의 미술사를 보게 되면 너만 귀족이냐 나도 귀족 누리자가 됩니다. 부르주아가 등장하면서 왕, 귀족, 기사, 농민으로 구성된 봉건사회가 무너지면서 잉여 자본을 가진 자만이 부르주아 도시민으로 등장함으로써 그들이 의회를 장악했습니다. 그 의회가 국왕의 권력을 견제하면서 이제는 협상에 의해서 새로운 국가단위가 형성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가 등장함으로 왕이 날아가 버립니다. 왕? 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이런 사람에게 설교자는 우리들의 임금님이 계십니다라고 설교를 해야 합니다. 정서상 받아들이기 곤란합니다. 그래서 임금님이라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지냅시다. 김대중 대통령처럼 예수는 나의 친구다는 식으로 막먹으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의 임금님이신데. 임금은 왕노릇합니다. 왕은 무엇이 없다고 했습니까? 자기 밑에 권력 통치의 누수가 없는 것을 두고 왕노릇 한다고 합니다.

 

죄가 왕노릇한다는 말은 아무리 우리가 죄에서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죄의 왕노릇입니다.

의의 왕노릇이라는 것은 아무리 우리가 죄를 지어도 우리가 의인이 아니 될 수 없고 의인 될 수밖에 없다는 통치의 세력을 두고 왕노릇이라고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넘치지요.

한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것은 모형인데 한 사람의 의로움으로 우리가 의의 통치를 받는 그것을 미려 보여 주기 위해서 아담은 죄의 왕노릇함을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로마서 5장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5:12-14).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 않으려고 하지 말라. 오히려 원수가 되어야 됩니다.

경건치 않은 자 ,원수된 자였는데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한 의로 말미암아 원수된 자를 의롭게 하셨느니라는 완료형으로 로마서 8장30절에서 말씀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멜기세덱이라는 것은 없음이 진정이 있음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늘에서 준비된 미지의 X 족보입니다.

족보라고 했을 때에는 시간적으로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의 족보는 시간적 흐름이 없습니다.

시간을 깨어 버립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알파요 오메가인 영원한 현재가 유지되는 희한한 족보입니다. 그런데 그 족보의 그림자인 유다는 흘러가는 것이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멜기세덱 족보가 다윗족보에게 마중을 나가 흡수 통합하면 유다족보, 다윗 족보라도 하나님의 의가 안생기네요라는 것을 고백케 하기 위해서 유다 족보가 있고 이스라엘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껍데기였다. 아브라함과 복의 근원은 분리해야 된다. 그 원리는 이삭, 야곱으로 계속된다.

진짜 의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우리가 행해서 상 받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때 상 받았습니다.

율법과의 관계는 율법이 멜기세덱을 보여 주기 위해서 430년 후에 추가적으로 제공됩니다. 그 시대 부합되는 정도까지만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고 은퇴를 합니다. 은퇴 후에 아브라함언약에 맞추어서 이삭언약이 주어집니다.

이삭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은 같은 내용일까요 다른 내용일까요?

언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축복의 내용을 세 가지로 언급했습니다.

의와 자손과 땅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렇게 되어 버리면 신약성도들은 의, 자손, 땅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땅은 무엇입니까?

나의 땅과 나의 자식이 축복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애기 못 낳는 사람은 저주 받았습니까? 땅 없는 사람은 저주 받았습니까?

 

이 세 가지가 있어야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세 가지를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의냐? 아니다. 자손이냐? 아니다. 땅이냐?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복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구체적이지 않잖아라고 반문합니다. 그 이야기는 나도 하겠다. 주님인 것은 나도 하겠는데 주님이 주신 그 무엇이 뭐냐고? 그 무엇?

주님 믿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지는 행운, 로또복권당첨같은 것, 이런 것을 원하잖아요.

 

골로새서 3장에서는 이 땅을 잊으라고 합니다.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3:2,3).

 

잊어 버려야 돼요. 땅은 무슨 역할을 하는고 하면 성도는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땅은 따로 마려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주택단지가 새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모조리 우상 숭배로 규정합니다(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자식 잊으세요. 율법의 의 잊으세요. 선악 잊으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잊으라는 겁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왜 사람들이 이렇게 집착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 집착 때문에 인간들은 주어진 언약에 대해 미워하고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낱낱이 보여주는 것이 구약입니다.

그러면서도 언약의 진정한 완성자는 사람의 이름, 아담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그분, 주의 이름으로 오신 그분이 바로 이 언약을 이루어나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란 언약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들의 뿜어내는 모든 죄를 다 감당하면서 희생희생 해 가면서 , 희생하는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인간이 못하는 일을 기어이 주의 이름으로 홀로 이루어 내시는 그분이 바로 주의 이름, 곧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 내용을 성령께서 채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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