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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연대연합강의 11 본문

해외 특강/14연대연합

연대연합강의 11

정인순 2014. 3. 20. 10:41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11

 

연대연합강의 11

 

창세기 8장20절에서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에서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세기8장이 끝나고 난 후 법이 없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은혜 주신다는 것에 대해 무슨 말 할 수 있습니까?

 

이미 죄인인 것을 아는데 왜 법이 들어 와야 합니까?

 

어려서부터 악한 자를 용서할 때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의 번제로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뒤 법이 주어진다는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9장4-6절을 보면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말씀하시는 법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 만드셨다면 우리와 연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하나님의 법이 우리와 연관이 있죠? 그렇다면 우리 세계 속에서 이 법이 실현되어야 되겠죠?

법이 실현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가 법을 지켜야 합니까 어겨야 합니까?

질문이 간단합니다. 법을 지킬 때 법이 법다운 겁니까 법을 어길 때 법다운 겁니까?

법을 어겨야 돼요.

 

기독교 2천년 동안 이것을 몰랐던 겁니다. 성경을 보면서 법은 어길 때 비로소 내속에 법이 있음을 깨닫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어기지 않으려고 하니 우린 도망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법을 어겨야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미운 사람이 있다. 그럴 때 내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간단해요. 죽여 버리면 됩니다. 사도바울이 발견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산상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다. 사도바울이 발견한 것은 하나님이 내가 착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법의 취지를 살려 내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역할극입니다. 역할극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효과입니다. 법과 죄인의 만남을 성사해준 주님의 언약의 효과를 우리가 누려, 누리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미울 때에는 그 사람을 죽여 버리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효과입니다.

그러나 노아 홍수 이후에 가인족속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족속이 아닌 족속에서 가인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법을 통해 하십니다. 법이 무엇입니까? 법속에 창조의 원리가 담겨 전수되고 전수됩니다.

 

우린 나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법이 뒤따라 올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일 내가 미운 사람이 있으면 가인처럼 사람을 죽이면 됩니다.

죽이면 되는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저 사람을 못 죽이게 하십니까라는 이 말과 하나님이여 나는 저 사람이 싫습니다. 그러나 내가 알아서 저 사람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법을 지키겠습니다라는 말 중 어느 말이 주님의 십자가의 효과를 드러내는 말입니까? 은혜와 은총의 효과를 드러내겠습니까?

 

아 죽이고 싶은데 말리시는구나! 나는 가장 극단의 나쁜 놈이 되고 극단의 나쁜 놈의 자리가 내 자리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안 죽이게 하신다면 그 여분의 고층건물은 무엇으로 채워집니까?

주님의 긍휼과 자비로 채워집니다.

 

아 죽이고 싶은데 아 주님의 은혜가 말리네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아 죽이고 싶은데 내가 착한 존재 선한 존재가 되려면 꾹 참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꾹 참으면 살인죄입니까 아닙니까? 꾹꾹 눌러서 참으면 살인죄입니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돌출합니다. 심지어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그 분노가 자기에게 되돌아와서 자기를 죽여 버립니다.

 

저 인간 죽이지 못하면 차라리 내가 죽겠다.

이 말은 죽이고 싶을 때 죽이지 못하게 되며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책임은 하나님 당신에게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마저 죽이고 싶은 자리가 바로 주께서 마련하신 나의 자리입니다. 나의 위치가 되는 겁니다.

 

법은 내가 법입니다. 못돼먹은 내가 법이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은 못돼먹은 내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효과로서 우리 온 몸에 피어오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10절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 후서 12장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내가 약한데서 은혜가 내게 넘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 주께 간구하였으나 거절당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안 생겨요. 주의 이름 붙여도 응답이 안돼요. 나중에 알고 보니 사탄의 가시가 박혀있는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사탄이 그렇게 유용하게 사용될 줄이야. 사탄이 없었다면 여분의 은총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탄의 가시가 있을 때 나는 여분의 은혜로만 주께 끌려가고 있고 살려지고 있음을 알 때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아이성 공격할 때 아간이 있습니다.

아간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아이성 전투에서 하나님을 좋아하는 36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죽었습니다.

 

이때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으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수7:6,7) 라고 했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수7:11). 그런데 삽디의 아들 아간 한 사람만이 범죄했습니다.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편입니다. 문제 있는 사람은 셋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한 사람입니다. 누굽니까? 소수점 이하에 해당됩니다. 얼마든지 무시해도 되는 끝자리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아간은 지극히 작은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간이 하나님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자기가 챙길 때에 여호와전쟁이라는 하나가 아간 한사람으로 인해 훼손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면 한 사람, 하나인데 하나 , 물건을 많이 훔친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한명 찾아내라고 36명을 죽게 만듭니까?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라는 말씀은 너희들끼리 하나로 구축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 됨을 훼손했을 때 하나 됨이 깨어졌다고 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하나 됨이 깨어진 것을 하나 됨으로 회생시키는 작업을 하시겠지요. 이 작업에서 아간을 죽이니 하나가 승리했습니다.

 

사람들은 셈을 할 때 내가 1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2가 됩니다. 왜냐하면 같은 1 이 되면 그 사람과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2, 다른 사람은 3이 됩니다. 이것을 서수라 하지요. 마지막이 7이라면 여기에 몇 명이 있습니까? 7명이 있지요.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식으로 이해하여 용납하지 않으면 내가 칼 들고 다 죽여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 한 사람만 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우리가 하나라고 했을 때 각 사람의 각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한분이신 주님을 위한 역할의 자리로 만듭니다. 그래서 각각의 자리의 존재에서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자기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만일 1을 경유해서 형제라 했는데 상대 쪽에서 1을 경유하지 않고 그냥 오면 주님이 이것을 제거해 버립니다. 보편적인 1을 위해서. 이것이 이스라엘의 숫자 줄이기 원칙입니다.

 

1은 유지하면서 각지파의 숫자가 조정이 됩니다. 고라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할 때 고라에 속한 무리들을 모두 죽였습니다(민16장).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1은 새롭게 정립됩니다. 1을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100명이 1을 경유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1입니다.

 

방금 하나님을 경유하라 언약을 경유하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이것을 추상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중심으로 진행하게 만드셨습니다.

 

동쪽은 반드시 유다지파,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차지합니다. 이들은 모두 레아의 자녀들입니다.

서쪽은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이 위치합니다. 라헬의 자녀들입니다.

남쪽은 르우벤, 시므온, 갓지파가 차지하는데 르우벤과 레아의 자녀이고 갓지파는 레아의 시녀 실바의 첫째 아들입니다.

북쪽은 단, 아셀, 납달리 지파입니다. 단과 납달리는 라헬의 시녀 빌하의 자녀들이고 아셀은 레아의 시녀 실바의 둘째아들입니다.

 

 

열두 지파를 둘로 나룰 때에는 첫째로 정실부인이냐? 둘째로는 라헬계통이냐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레아는 덤으로 들어갑니다.

언니와의 결혼이유는 정말 원했던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두 여인이 야곱과 에서의 사건을 반복시키는 언약적 역할임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형 에서와 본인 야곱의 분주한 모든 갈등이 레아와 라헬사이에서 반복됩니다.

 

그래서 나온 12자녀에 대해 야곱은 축복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흔적이었습니다. 야곱은 죄의 흔적을 축복으로 오해했기에 죄의 흔적들을 지키기 위해 삼촌을 속여 많은 재물을 얻어 삼촌에게서 떠납니다.

 

이때 형 에서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홀로 얍복강가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 때 낯선 자객이 등장했습니다. 야곱 자신은 복의 근원입니다. 이미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꿈에 사자를 통해 약속을 받았기에 자신이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복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언약의 원수가 되가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싸웠습니다.

 

야곱 자신은 하나님과 한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작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는 방식은 야곱을 자기 자기로 돌려보냅니다.

즉 야곱을 죽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창32:30).

이곳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꿉니다(창32:28).

이스라엘의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의 이름이 아닙니다.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이름대로 그 내용을 채우십니다.

 

요한복음1장51절에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미리 보여준 역할에 불과합니다(창28:12).

 

창세기 9장에서 무지개와 피 흘림이 관련 있습니다.

배트맨 표시가 하늘에 떠 올랐을 때 이것은 고담시 옥상 어디에서 비추는 것입니다.

무지개가 떴습니다. 무지개를 뜨게 만드는 출처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의 피 흘림 자리입니다.

은혜를 피어내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중심 자리 외에는 무지개가 뜬 것에 대해 고맙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어 마땅하다. 이런 죄인을 용서해 주는 자리가 그렇게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알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법이 있어야합니다. 법을 주신 것은 죄를 지으라고 주신 겁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8,9).

 

만일 이 법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나는 그냥 구경꾼이 됩니다. 관람객이 됩니다.

돼지털을 몇 개 뽑아야 돼지가 아플까요? 한 개 뽑아도 돼지 몸통은 반응합니다.

 

하나의 율법을 어겨도 모든 율법을 어긴 겁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하나님의 은혜가 장차 어디에서 피어날 것인가? 바로 율법이 완성된 십자가 자리에서, 주님이 저주 받은 십자가 자리에서 피어납니다. 십자가 저주받은 흔적을 가진 분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유일한 이름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법을 어김으로써 법을 지켜야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여러분 법을 어깁시다가 됩니다. 막 살지 마시고 법에 맞추어 법을 위반하면서 삽시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법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항상 잘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법이 들어오는 순간 내가 그다지 잘난 사람이 아님을 압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6장4절 이하에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모든 말씀은 율법적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이 중첩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모든 말씀을 뜯어보면 언약의 층층이 합창하고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받고 죄를 지은 사람은 다시 회개할 수 없다는 법을 우리가 지켜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립니다라는 말씀을 우리가 지켜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딤전6:10).

우리는 위반해야 할까요 위반하지 말아야 할까요? 위반 할 수밖에 없지요.

돈 오천 원? 사랑하지 않습니다. 육천 원?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만 원? 사랑하지 않습니다.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영화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국경을 지키는 전임자는 돈을 많이 챙기면서 봐주었습니다. 그런데 신임 수비대장이 와서 선언합니다. 나는 전임자와 다르다. 나는 돈 같은 것 모른다. 나는 원칙대로, 공화국의 법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이때 주인공이 하는 말이 글쌔 그 원칙대로 하는 것이 얼마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라고 이야기 했어요.

 

바로 이것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지요. 천원? 만원? 십만 원? 잠깐 생각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100억? 목사 때려치웁니다. 100억 있는데 왜 욕먹어 가며 고생하며 목회하겠습니까? 100억이면 이곳 바닷가에 별장하나 구입해 종용히 살 수 있지요.

 

아 백억 이긴다고요? 좋습니다. 천억?

민수기에 보면 안식일 날 나무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민15:32-36).

 

그런데 만일 안식일날 나무한 사람이 나의 돈을 빌려가 떼먹은 사람을 어떻게 할까요? 가장 무겁고 뾰족한 돌을 들고 칠 겁니다. 그래서 십년 묵은 한 풀이를 하듯이 네가 감히 하나님의 법을 어기다니 하면서 돌을 그 사람이 가장 아픈 곳을 가장 앞장서서 쳐버릴 겁니다.

 

그런데 만일 안식일날 나무한 사람이 내 자식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이렇게 말하겠지요. 오늘 몸이 왜 이리 아프노? 미안합니다. 제사장님 갑자기 몸이 아픕니다. 이렇게 말하겠지요.

 

하나님께서 민수기에서 안식일날 나무한 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는 말씀은 너희들의 혈족관계에 대해서도 동일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쵸코파이입니다.

피 책 처음에 나옵니다.

사람은 정으로 산다.

 

여러분 목회를 십년 이십년 계속해 보세요. 복음 핑계입니다. 돈 핑계입니다. 정주고 정받고 사는 것이 사는 겁니다. 왜 외롭게 삽니까? 그 놈의 정 때문에 사는 거예요. 왜 미운 겁니까? 그 놈의 정을 배신했기 때문에 미운 겁니다. 준 사랑이 있는데 준 사랑에 대해 뒤통수 칠 때 우리는 죽이고 싶은 겁니다. 죽이세요. 죽이고 싶은데 주님이 말리십니다. 이때 내가 살인자입니다. 이런 죄인을 왜 구원하십니까라고 하면서 십자가가 보이는 겁니다. 죽이고 싶은 것이 계속 발생됩니다.

 

다시 돌아가 만일 안식일날 나무한 사람이 내 자식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식도 미운자식이 있잖아요. 이럴 경우 주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살짝 칠는 채 하겠지요.

그런데 정말 내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라, 젊은 놈이랑 바람피웠던 마누라면 안식일날 나무했다고 내가 밀고할 겁니다. 내가 죽일 겁니다.

 

신명기21장18-21절에 패역한 아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안산홍 집단이 하는 말이 구약성경대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킵니다.

그러면 신명기21장에 아들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않으면 장로들에게 가서 우리의 이 자식이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고 술에 잠긴자라고 고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1의 효과를 위해.

요즘 부모말씀 듣지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녀들이 있지요.

그들의 부모가 ‘내 자식을 제발 죽여주세요. 주의 일을 훼손하는 아간 같은 존재이니 제발 죽여주세요’ 라고 하는 부모 있으면 나오라고 해 보세요.

없지요? 없으면 부모와 자식은 한 통속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에서는 많은 법이 있지 고기를 그 피째 먹지 말고.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법이 나옵니다.

이때는 아직 덜 죄인입니다. 조심해서 선지국 먹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되니까요.

그러나 그다음 갈수 록 법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지뢰가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온 천지가 다 지뢰입니다.

십계명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 지요. 탐내지 말라를 안 밟을 위인 있으면 나오라고 해 보세요.

우리는 마치 뽁뽁이 같이 터트리지요. 모든 것이 탐이 나요. 큰 교회가 탐이나고, 교인수 많은 것도 탐이 나요.

 

율법은 어기라고 준 거에요. 내 자식,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죽이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안되지요.

 

그러나 언약 속에는 사랑하는 자식 죽이기가 내장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였습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을 물려주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진짜 사랑하는 자식, 누구입니까? 요셉이지요. 가장 사랑하는 자식, 그래서 특별대우 해준 그 자식이 야곱에게는 영원히 다시 돌아 올수 없는 죽은 자 였습니다.

아들은 죽었지만 야곱언약은 계속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반복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네 아들을 바쳐라. 그 때 그 당시 하나님께서 자비를 주는 형식이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무엇일까요? 오늘날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는 겁니다.

백억 있어도 괜찮아요.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땅이 넓어도 괜찮아요. 십자가 있으면 구원받습니다. 십자가만으로 구원받습니다.

 

제 강의를 듣고 욕하는 사람은 한 종류인데 두 번 욕합니다.

하나는 너무 어렵다고 욕하고 또 하나는 너무 간단하다고 욕하고.

자세히 들어 보니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이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 이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라고 하면 자신이 주체가 됩니다. 역할이 아니고.

십자가 믿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십자가 믿는 내가 내 믿음을 유지한 공로로 구원받는 셈이 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믿는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꼴이 됩니다.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복잡하니까 이것저것 다 걷어내고 보니까 십자가만 있으면 되네. 십자가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피만 있으면 됩니다.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오직 둘 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히9:7).

명료하고 굉장히 간단합니다. 이렇게 간단한데 왜 이리 두꺼운가? 그것은 곁가지를 쳐 내는 겁니다. 피만 남기고 쳐 내는 작업인데 쳐 내는 작업이 만만치 않습니다.

 

십자가의 효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린 효과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효과를 받았다는 역할극을 하라고 성령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 이, 삼, 사가 아니라 전부가 하나가 됩니다. 십자가를 경유하면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만약 둘이 되면 경쟁이 일어납니다. 너 기도 몇 시간 했어? 난 몇 분밖에 못했는데. 너 성경 몇 장 읽었어? 나는 두절 읽었는데. 경쟁이 됩니다. 교인 몇 명이냐? 난 몇 명인데.

모든 것이 경쟁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 즉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우린 모두가 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며, 그 십자가를 믿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됩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죄라는 것, 구약사람들은 모릅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죄를 압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고, 이미 죄인이라고 십자가 지신 분이 규정하기에 아 그렇구나 믿어질 뿐입니다.

 

다윗이 간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알리바이를 성립하기 위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했습니다. 고의적이 아닌 척 하면서 살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달랑 두 가지입니다. 간음죄, 살인죄? 두 가지가 아니지요.

한 가지입니다. 한 가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죄였습니다. 내가 모친의 죄중에 태어나서 무엇을 해도 죄라는 사실을 몰랐던 그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죄를 공짜로 알았습니까 아니면 희생물이 있었습니까? 희생물이 있지요? 희생물이 우리아 장군이었습니다.

주께서 꺾으신 뼈, 우리아의 죽음에 내가 참여하고 관여하면서 나로 인해 오직 하나님나라만을 생각했던 죄 없는 우리아 장군을 내가 죽였구나 아는 순간 자신은 이미 의인되었음이 확인됩니다.

그러면 이 말을 듣고 있는 지하에 있는 우리아 장군은 얼마나 화를 내겠습니까?

‘네가 죽여 놓고 하나님의 은혜로 핑계 댄다면 일반사람들이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 하면서 하나님 끌어당기는 그 책임을 네가 질 거야?

그런 식으로 설교해서 교회가 죄 투성이 되고 막사는 교회, 그런 엉트리같은 교회, 그런 악령이 넘치는 교회가 될 때 너는 복음만 전했다고 그 책임에 대한 발을 뺄 수 있겠어?’ 라고 지적할 때 뭐라고 이야기해야 될까요?

 

어느 누구도 누구의 죄를 평가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요8:10).

죄 없는 자만이 돌로 쳐야 합니다. 아무도 없음이 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태들을 나로 하여금 나의 본래의 자리, 죄인의 괴수의 자리로 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께서 설치한 배치물들입니다. 조성된 환경입니다. 그 속에서 주 예수님밖에 없습니다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왕궁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연락을 했던 에스더(별)는 자신을 어느 누구도 다치지 못하게 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에스더 자리가 가장 위험한 자리로 만드셨지요. 그래서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신약시대로 바꾸면 이미 죽었습니다입니다.

 

다니엘 3장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출애굽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운 이유가 개인종족에서 국가로 바뀝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국가는 짐승입니다.

라인홀드 리버가 고민한 것이 이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은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데 모이면 개판이냐? 대안이 없어요.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 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어떻게 개인은 다 양심적인데 예비군복 입혀놓으면 휘파람 휙휙 불고 왜 이래요?

유니폼이 무슨 죄가 있어요? 왜 그래요. 왜 집단성에서 인간은 자기의 본성이 드러납니까?

 

다니엘 3장에서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불속에 집어넣는다고 했습니다.

왕들이 자신에게 죄를 지었을 때 취조하는 방법이 굉장히 심하지요. 주리를 틀어라.

왜 그렇게 주리를 틀까요? 왕에게는 신체가 두 개입니다. 첫째는 생물학적 신체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이미지로서 신체입니다. 이 신체를 건드리면 그 신체를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신성한 신체를 건드린 깊이만큼의 혹독한 아픔을 그 신체에 가해 줄 때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은 왕은 단순한 남자가 아니고 살아 있는, 성육된 신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데올로기화 되어 모든 사상 속에 들어갑니다.

이석기라는 통진당 간부가 사람 몇 명 죽였습니까? 슈퍼에 가서 물건 훔쳤습니까? 아니지요.

구형이 몇 년 내렸습니까? 20년이죠? 20년이면 일반 형법에서는 주로 살인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것도 술 먹고 개판치는 남편 죽이면 3년밖에 안 받아요.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데 20년구형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너로 인하여 온 사회 구석에 20년 구형받을 살인죄가 성립될 가능성이 많다는 겁니다. 장난감 총을 쏘면 죽을 수가 있어요.

 

국가란 자아의 투영입니다. 이것이 창세기11장에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의 명칭은 우리의 이름을 내는 겁니다. 그 속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불꽃놀이하면 재가 사방이 흩어지지요. 그 땅이 무슨 땅이냐 하면 함의 땅, 가나안 땅입니다.

 

함이 접수 점령합니다.

 

존로크라는 학자는 최초로 소유권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 전에는 소유권이 없고 신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왕이 분배받아 준 것입니다.

 

열왕기 상21장에 아합왕 시대 나봇의 포도원이 나옵니다. 아합왕이 자신에게 팔라고 할 때 나봇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주어진 유산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신상 숭배하라고 할 때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내지 아니하실지라도 라고 합니다.

다니엘 시대는 이스라엘이 없습니다. 언약만 남았습니다. 언약이 구체화 될 때 무엇을 경유하는고 하면 그냥 경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을 통과합니다. 그 투입된 관이 바로 바벨론이라는 관입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성전과 언약궤마저 불태웠던 제국입니다.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잡혔다는 것은 이스라엘 되기 전 애굽의 종살이 하던 때로 돌아간 겁니다.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은 단독행동을 못합니다.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빠져 나올 수 없는데 모세가 가서 빼내었습니다. 그 애굽을 바벨론으로 바꾸었습니다.

두로, 애굽, 바벨론 모두가 다 자신이 신이다고 우기다가 몰락합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애굽과 바벨론의 위치가 다릅니다.

애굽을 대체해서 이제는 바벨론이 애굽을 대신합니다. 차이점은 이스라엘이 온 세상에 흩어져버립니다. 바벨론 나라가 이스라엘 이웃 나라가 아니고 인류가 사는 전 지역이 바벨론 제국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17장1-16절에 음녀 곧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로마 아닙니다. 네 번째 짐승 로마가 아닙니다.

 

바벨론 금신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서 있을 때에는 바벨론입니다. 이것이 엎어지며 코가 어디에 닿습니까? 네 번째 짐승이 나오는 곳이지요. 신상은 금, 은, 동, 철과 흙이지요.

진흙과 철이 섞인 열 개의 발가락이 있습니다.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립니다.

분명 바벨론, 메데 바사, 헬라제국, 로마 제국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시간의식이 그렇지요.

그러나 성경은 메데 바사, 헬라제국, 로마 제국 모두가 동일할 바벨론으로 봅니다.

바벨론 1, 바벨론 2, 바벨론 3, 바벨론 4, 즉 바벨론의 연속입니다. 왜 바벨론의 연속인가?

유다 1, 유다 2, 유다 3, 유다 4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망했지만 언약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언약은 누가 이룹니까? 언약과 함께 동행하는 분이 계셨으니 바로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니엘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요구했습니다. 당신 메시야야 아니야? 구름타고 왔어? 죽여 버립입니다. 유대인이나 예수님이 알고 있습니다. 메시야는 반드시 구름타고 오신다는 것을. 그러나 예수님은 장차 구름타고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진작 구름타고 오시지 않았는가?

70이레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방인에 의해서 성전이 세워졌다. 이방인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었다. 망한 그 자리에서 일 이레, 십자가로 승리하시는 영원히 망하지 않는 영원한 제국입니다. 영정조의 나라가 영원한 제국이 아니라 인자의 나라가 영원한 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인자로 불렀지요. 인자는 구약에서 세 사람이 나옵니다. 에스겔, 다니엘. 시편에서는 다윗이 나옵니다. 처음부터 국가였는데 우리는 일반적인 국가에 속하여서 국가도 있고 나도 살고, 나를 나답게 나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나라를 국가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내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는 국가입니다. 그전에 나는 망해야 됩니다. 나의 존재를 일체 인정해 주지 않는 짐승의 국가에서 혹독한 시련을 당해야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영장입니다.

군에 다녀오셨습니까?

누가 오라고 했습니까?

울면서 집떠날 때 뒷동산이 그립지 않았습니까?

이등병의 편지 써보지 않았습니까?

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왜 스케줄을 자기들 마음대로 짜고, 왜 다나까로 이야기해야 합니까? 왜 인간을 기계로 만들어요. 난 기계되기 싫은데. 밥먹여주는 것 싫고, 월급 몇 푼 주는 것 싫어요. 집으로 보내주세요. 집으로.

누가 이렇게 했습니까? 국가죠. 국가를 출애굽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예 하나 들고 마치겠습니다.

아내가 바빠서 여보 의자 갖다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내가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지킵니다.

 

여보 의자 갖다 줘. 가만 있어봐. 나도 바빠.

여보 의자 갖다 줘. 가만 있어봐. 그래 갖다 줄게.

아내의 소리가 다가옵니다. 남편이 그 소리에 마중 나갑니다. 그래서 나의 놀라운 자비로움으로 의자를 갖다 주는 것으로 전환됩니다.

이것이 존재의 문제점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절대로 듣지 않습니다. 내 존재와 가치, 위상을 높이는 쪽으로 DMZ에서 포로교환 하듯이 내가 해 줄게요 라고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의자를 갖다 주었을 때 아내가 달라서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아내를 너그럽게 봐 주어서 자비가 넘쳐서 바쁜데도 불구하고 , 지금 게임하는 중이거든요. 바쁜데도 불구하고 아내를 협조하는 이 자비심에 대해서 나는 다시 뿌듯함을 느끼면서 나의 능력은 저만치 확장됩니다. 아내가 잔소리 하면 어제 내가 의자 갖다 주었잖아. 그만큼 자기 영역이 확장됩니다. 이것이 느부갓네살 왕의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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