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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연대연합강의 제9강 본문

해외 특강/14연대연합

연대연합강의 제9강

정인순 2014. 3. 20. 10:38

 음성9   

녹취:한윤범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9강

(강의:이근호 목사)

 

진도 많이 나가는 건 의미 없고 하나하나 다지고, 다지고 나가는 게 중요하거든요. 제 이야기는 그거에요. 생명나무는 못 먹지요. 그러데 여자이름이 왜 하와, 생명이냐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담은 흙이 돼요. 흙은 죽음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죽더라도 내 마누라는 살면 되겠다고 했는데 그 여자의 후손에서 후손이 여자를 결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름이 생명이란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 마누라가 여자 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마누라가 뱀의 후손의 정체를 몰라요.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움으로 모든 일이 종결되거든요. 우리는 여자 쪽에 서고 싶은데 부릅니다. “이 뱀에 대해서 아느냐, 마귀에 대해서 아느냐?” “나는 내 이웃집 아저씨밖에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싸움이 안 되는 거예요.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온다고요. 옛 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목회란 다른 게 아니었어요. 영적 전쟁. 우리의 싸움은 혈육,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고 공중 권세 잡은 자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라는 것도 사탄이 만든다는 것을 인식을 해야 돼요. 그리고 그 교회의 머리가 사탄이라는 사실도 수용을 해야 돼요. 언제 그게 보이느냐 하면, 내가 존재일 때 내가 주님에 속한 하나에 속성에 의한 기능이 아니고, 언약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게 우선일 때 내가 목회한 교회는 사탄과 합작하고 사탄과 타협하고 사탄과 동업하고 있는 교회인 거예요. 거기에서 대해서 목회를 논한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본인부터가 교회로 밥벌이하겠다는데 진리가 주님인데 주님이 거기서 무슨 조언을 하겠어요? 죽으라는 것뿐인데.

 

“저는 내 밥벌이하려고 하는 교회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려면 자신이 싸우는 대상이 누구인지 겸해서 이야기를 해줘야 되지요. “저는 옆에 있는 불교신자입니다.” 이러면 안 돼요. 불교신자는 이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다 따랐으니까. “주님이 원수가 나의 원수입니다.” 나한테 사기 치고 돈 떼어먹고 도망간 사람이 원수가 아니고, 내 존재에 훼방되고 내 존재를 유지, 보존하는데 방해하는 건 육신의 원수지만 그런 게 원수가 아니고 내가 싸워야 될 대상은 내 생명을 앗아간다 할지라도 주님의 원수와 싸워야 될 입장입니다.

 

이건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나와요.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야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자기 존재 보존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게 영적 군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이라는 게 아닙니다. 생명은 주님이지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주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주님에게 소속된 속성을 보여주는 기능인이지요. 출발점 자체를 내가 주의 종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의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면서 존재 가치가 유지되기 위해서 유지됨으로써 자본주의사회에서 그것이 나의 생활비로 들어올 수 있는 근거로써 성경을 본다면 그렇게 하는 자체가 주의 원수에요. 그런데 주의 원수가 안 되려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우리 육신 자체가 주께서 주의 원수하도록 아담으로부터 제공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5장에 하나님의 형상이 나오잖아요. 그 다음에 바로 이어 나오는 것이 아담의 형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을 만들었지요. 아담부터는 하나님의 형상이 날아가고 아담의 형상으로 대체되면서 자식을 낳았지만 결국 끝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그 죽게 되는 기능에 우리는 감사합시다. 죽음으로써 우리는 주의 기능인에 속함을 확인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걱정, 근심? 사치입니다. 걱정, 근심은 살아보겠다는 것에서 유발되는 것이지 죽는 입장에서 걱정, 근심은 사치가 돼요.

 

히브리서 2장 16절에 보면,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이 개인의 취향도 아니고 취미도 아니에요. 죽기를 무서워하는 자체가 하나님 보기기에 사탄에 종노릇하는 관계에요. 제가 어제 그런 강의했잖아요. 두려움이란 선과 악의 갈라진 틈에서 일치되지 못한 상태. 자꾸 벌어지니까. 우리가 좀 착하다고 하면 피로감이 생겨요. 내가 이렇게 착해도 되나? 이제 마음대로 노래방에 가도 용납하시겠지. 주의 일한다고 너무 고생을 많이 했으면, 당분간 태만해도 주께서 이해하시겠지요? 고생 많이 했으니까.

 

항상 선과 악은 질량적인 관계, 양적 관계로 대차대조표를 이뤄요. 차변, 대변 나누고 당기순이익이 밑에 깔립니다. 살아생전에 선한 일을 많이 한 것과 그동안 악한 일을 한 것을 빼는 거예요. 빼서 남는 게 있으면 천국이고 남는 게 없으면 지옥 간다. 세상에 모든 민족들이 만드는 종교의 룰이 이거에요. 인간? 다같이 아담 줄기입니다. 선악과는 도~처럼 제거됐습니까? 넉넉히 살아있지요. 선악이 인간의 자아를 추진한 거예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마귀가 대든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 피조세계에서 경계선을 그어놓느냐? 누가 하지 말라고 할 때 금지함으로서 우리에게 생기는 것은 자아의식입니다. 독자적인 자아성이 발생돼요. 하지 말라고 했을 때 비로소 어디까지 미치며 넘어서는 내 힘이 도달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금지를 시키게 되면 금지 다음에 소망이 나와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선반 위에 사과가 있을 때 엄마가 아무 소리하지 않고 출근합니다. 아이들은 과일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나가면서 이야기합니다. “선반 위에 사과 먹지 마!”라고 하는 순간 그 아이에게 그것은 하루 종일 소망의 대상이 돼버려요. 그걸 따먹었을 있을 나한테 혹독한 결과가 어떤 것일까? 그리고 따먹기 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짜릿한 쾌감은 내가 당할 징벌과 상쇄될 때 플러스가 될 것인가, 마이너스가 될 것인가? 그래서 이득이라고 생각한다면 먹게 되겠지요.

 

벤담의 공리주의사상이에요. 이 사회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 사람의 모든 움직임, 모든 생각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한테 이익이 될까? 거기서 나온 경제논리가 자유주의,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그거에요. 가치를 따지지 말라. 믿음, 소망을 따지지 말라.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유용하다면 팔릴 것이고, 아무리 좋은 책, 훌륭한 내용의 책이라도 사람들이 찾지 아니하면 그 노동의 가치는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될 것이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기업에서 외치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타이밍을 차단하라. 질이 문제가 아니라 타이밍이에요. 한때 보리밥 먹는 게 유행이었어요. 보리밥 먹는 게 타이밍이에요. 다른 말로 운이에요. 목회도 교인 모이는 것도 운이라니까. 그 운을 전도서에 보면, 사랑할 때가 있으며, 미워할 때가 있으며, 어떤 때가 있으며 하지만 그 모든 때는 이미 바다 속에 물이 포함된 것처럼 희석돼버리는 것처럼 언제 그런 때가 있었느냐는 때가 올 것이다.

 

그걸 지혜라 하고 그 지혜가 신약성경 야고보서에서 전체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4장 끝에 이런 게 있어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엇어지는 안개니라”(13,14절)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나만 안개입니까? 야고보서 4장이 나한테만 해당되는 겁니까? 모두가 안개지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신의 주권사상이 얼마나 잘못된 사상인지 이야기합니다. 신의 주권사상에 존재로 접근하면 전부 다 이방종교가 돼버려요. 이슬람교, 힌두교.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다. 나라는 존재를 지금까지 키워온 것이 신의 섭리다. 섭리란 말은 철학에서도 사용해요. 유신론적 철학에서 사용해요. 신의 섭리고 신의 뜻이다. 운명을 수용하자. 인생이 너희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푸쉬킨의 시에 나오잖아요. 때가 되면 이뤄질 것이다. 뭘 이룬다는 말입니까?

 

내 존재를 다가서는 주권은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 속에 포함된 영원성입니다. 칸트가 그걸 구성해냈거든요. 인간은 종교를 만든다. 자기를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구성자체가 인간 이성 속에 내장돼있다. 따라서 교회에 가지 말라. 네 속의 양심을 키우면 그 양심이 곧 신의 율법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리츨의 신칸트주의. 신칸트주의에서 나온 신학자의 주장은 산상설교만 잘 지키면 하늘나라가 이 땅에서 유지돼요.

 

가만 보니까 로이드 존스도 꼭 닮았지요. 벌써 선배들이 다 한 것 같아. 산상설교를 무시하지 말라. 교회가 이렇게 섞어서는 안 된다. 산상설교를 회복하자. 그 이야기를 요즘도 하잖아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것은 산상설교밖에 없다. 저는 묻지요. 산상설교하고 주님이 하늘로 올라갔습니까? 산상설교 끝나고 난 뒤에 이제 할 말 다했으니까 간다고 했습니까? 산상설교와 십자가가 매치가 안 돼요. 매치가 안 되니까 그 다음에 뭐해요? 회초리로 때리는 거예요. “왜 숙제 안 해.” 하고 숙제검사만 하면 돼요.

 

산상설교하고 난 뒤에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문둥병자에요. 산상설교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문둥병자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만나고 난 뒤에 주님께서 문둥병을 낫게 했지요. 그리고 요구한 게 있어요. 네가 나았으니까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받은 후에 취할 조치가 레위기에 있어요. 그 율법대로 제사장한테 보여라. 그리고 나아버렸습니다.

 

그러면 산상설교 빼고 가셔도 되잖아요. 주님께서 문둥병 낫게 하듯이 “죄 많네. 용서한다. 구원받았어.” 이래도 되잖아요. 산상설교를 구태여 말씀 안 하시고 그냥 오자마자 다 구원할 수 있는 문제인데 왜 산상설교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문둥병자 만나서 그런 조치를 하셨느냐 말이에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를 씻어주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볼테르가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교회에 가니까 예수가 죄 용서한다면서? 그럼 예수는 죄 용서하는 전문가네. 의사의 전문기능이 뭡니까? 환자를 고치는 거지요. 예수님과 의사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요? 의사는 환장의 병은 고쳐주되 자기가 병에 걸리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환자를 고쳐주되 환자가 갖고 있는 죄를 자신이 가져가지요. 그게 마태복음 8장에 나옵니다.

 

내가 앞으로 할 일은 저 문둥병자가 당했던 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면서 자비를 베풀 때 값없이 베푸는 게 아니고 값이 있어요. 그 값을 용서받은 사람에게 추후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 값을 누가 다 대신 치룬 거예요? 자기 아들, 흠 없는 아들을 보내서 그 값을 치루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되 절대로 우리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구원 자체가 다른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되는 겁니다. 어떤 수단이 되느냐 하면, 우리를 용서하되 용서받은 자로 하여금 자기 의와 자기 공로를 버리고 오직 우리를 대신해 죽었던 그분을 영원한 주님으로 높아질 때 발생된 것이 뭐냐? 하나님나라입니다. 그것이 아들의 나라에요. 골로새서 1장 14절에 나오는 아들의 나라.

 

아들이 없는 자는 영생도 없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따라서 어떤 교회 다니는 아가씨가 검사와 결혼했는데 검사는 예수를 안 믿어요. 그러면 영원히 저주가 있는 사람과 결혼 셈이 되고 그리고 그 가정에 영원한 저주가 있다면 그 아가씨는 결혼을 통해서 자기 집안에 저주를 불러온 셈이 된다 말이죠. 왜냐하면 저주는 언약이 없는 곳에 영원히 저주가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야고보서에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내 존재로 다가서면 야고보서 이해 안 돼요. 야고보서 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잘 들어보세요. 이게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내가 존재라고 하면 독자적이기 때문에 선택하면 돼요. 다시 말해서 내가 선택하면 추가인가를 하나님께 받으면 돼요. 그렇게 되려면 이 뜻이 성립이 안 돼요. 이 뜻이 성립되려면 우리는 안개에요. 안개니까 주체가 없지요. 주의 뜻만 살아있지요. 주의 뜻만 있다면 내가 먼저 어떤 뜻이라고 고를 자격이나 근거는 아예 박탈돼있고 주의 뜻이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존재가 아니고 기능적으로 관여하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여호와 이름의 행함의 특징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들의 모든 주체적인 예상은 다 끊어놓습니다. 끊어놓았을 때 그들의 주체는 멈추지 않고 어디를 향하느냐? 놀랍게도 애굽이 좋았더라. 애굽 사상, 애굽 정신상태가 몸이 기억해요. 그 몸은 애굽에서 떨어져 나온 몸이 아니고 끈질기게 엿가락처럼 늘어진 몸이에요. 애굽은 어떤 기능이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실현하기 위한 환경으로서의 애굽입니다. 도~, f레~, 미~. 애굽은 영원히 같이 가요.

 

이사야에서 애굽제국을 멸망하신다고 언급하시기 전에 반드시 언급해요. 이스라엘아 너희는 절대로 애굽의 병거나 애굽의 말들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애굽은 신이 아니고 사람이다. 애굽의 바로 왕은 자체로 말합니다. “나는 신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두로 왕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바벨론 제국의 왕도 나는 나뿐이라고 이야기해요. 세 제국의 특징이 뭐냐? 애굽, 두로, 바벨론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려면 어렵지만 대충 해보겠습니다.

 

우선 공통점이 뭐냐? 높아졌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높으냐? 별이에요. 하나님께서 이걸 떨어뜨렸다는 거예요. 건방진 계명성아. 네가 어디까지 떨어질지 몸소 체험할 것이다. 이 계명성을 루시퍼라고 해서 마귀의 실체라고 하는데 마귀의 실체는 없습니다. 마귀의 실체를 본다는 것은 나를 실체로 봤을 경우에 마귀가 실체가 되는 거예요. 마귀의 실체는 우리 쪽에서는 파악이 안 되고 유일한 실체, 예수님 쪽에서만 마귀가 실체를 보이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날 마귀의 활동은 뭐냐? 예수님에 의한 역사 속에서 주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일에 대한 속성들이 그거에요.

 

야고보서 4장대로 이번에 서울에 가서 장사하려고 하는데 “돈가스 집을 할까요, 치킨 집을 할까요? 주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시작부터 내가 뭘 되겠다는 주체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안개가 아닙니다. 물론 돈가스 집을 하면서 안개 같은 돈가스 집이라고 간판을 걸 수도 있겠습니다만 안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면서 아브람의 주체는 날아갔어요. 왜 주체가 날아가느냐 하면, 주체는 한분이어야 되지 두 사람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관여입니다. 주의 뜻이면 이것저것도 하리니 제가 거부할 주체는 저한테는 없습니다. 이 말은 결과적으로 말해서 내가 중국에 온 것도 주의 뜻이라고 한 순간, 나는 안개에 불과하다는 고백이에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기능과 주체만 바꾸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자꾸 내 주체가 나오고, 자아가 나오니까 그리고 그 주체, 자아라는 것은 누가 뒤통수를 째려보고 있습니까? 나한테 기대 걸고 있는 부모님, 마누라, 내 자식. 아버지가 그런 짓하면 안 되지요. 정 목사님 자식한테 시달리잖아요. 서열이 세 번째니까. 갑이 아니고 을 밑에 병이니까.

 

그러니까 찬송가에 어머니 기도 못 잊어 내가 나쁜 길로 안 간다는 거예요. 어머니는 주의 이름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이 없을 경우에는 어머니를 집어넣으세요. 내가 주와 동행하지 않거든 어머니를 집어넣으세요. 그리고 인자하신 아버지를 집어넣고, 내가 모델로 삼은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를 집어넣으세요. 하지만 한경직 목사도 주체고 나도 주체입니다. 둘 다 안개가 아니에요. 아침에 먹은 멀건 좁쌀죽처럼 우리가 멀겋게 되려면 우리는 멀건 죽에 불과하고 그걸 떠먹는 분은 따로 상정이 돼야 되는데 그분은 주의 이름이고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부르면서 그 이름의 지시와 명령 따라서 이 땅에서 “이걸 할까요?”가 아니라 “하게 되었네요.”라고 과거완료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참 이 과거완료를 설명하려면 복잡해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to부정사거든요. to부정사에서 시간이 날아가 버려요. to 뒤에 동사원형을 붙여서 명사나 대명사 역할을 하는 거예요. 정통종합영어에 나와요. 시간요소를 빼버린 겁니다. 그걸 과거완료형이라 합니다. 그리고 또 있어요. 에베소서 2장에 이미 하늘에 앉히시고.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걸 풀기가 난해해서 에베소서 강해에 보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어요. 히브리적 시간개념을 몰라요. 헬라적, 철학적 시간개념으로 성경을 푸니까 억지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이 보통 헷갈린 게 아니에요. 이미 구원받았는데 명령이 또 튀어나왔거든요. 이제는 성령 받았으니까 제대로 법을 지키라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그 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 다음에 뭐가 발생하느냐 하면, 그 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는 판정을 내가 내리지요.

 

인간은 자기 합리화하는 속성이 있는데 좀 못 지켰다 싶으면 변명조로 하면 되는 거예요. 지키려고 했는데 갑자기 차사고가 나서 어쩌고. 온유하려고 했는데 아침에 갑자기 이빨이 아파서 인상을 찡그렸는데 어떤 집사가 왜 인상 쓰느냐고 해서 갑자기 온유가 깨져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아이 성적이 떨어져서 인상 쓰고 있는 그 찰나에 마침 목사가 심방 와서 인상이 안 좋다고 해서 나중에 해명한다고 전화 걸고 복잡해진 거예요.

 

차라리 그럴 때는 주의 뜻으로 화냈었고, 이빨 아팠었고, to부정사. 그래서 그 목사는 오해해서 삐졌어야만 했고. 나는 내 육신으로 변명하고 싶었고 그래서 전화했고 전화 안 받았고 비는 왔는데 어쩌고저쩌고.

 

모든 주권은 이방종교에서 나온 겁니다. 신의 주권은 존재와 결부하는 거예요. 신이시여, 거기 계시지요. 나란 존재를 이렇게 만드니 고맙습니다. 신의 존재니까 건들지 마세요. 내 존재를 유지할 때 그게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모든 우상숭배할 때 특징이 있어요. ‘나를 위하여’가 반드시 붙습니다.

 

시편 135편에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해요. 내 이름 위하여 너를 택하였나니. 이사야도 마찬가지에요. 지렁이 같은 야곱아 내 이름을 위하여 너를 택하였나니. 이게 뭐냐 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니. 그것을 저는 주권이라는 오해할 말 대신에 ‘관여’에요. 우리는 결과물이고. 관여할 뿐입니다. 늘 관여 당합니다. 관여하는데 그 관여의 목표는 어떻게 예수님이 주가 되시느냐에 집약이 되는 관여, 어떻게 해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고 다른 이름은 없는가? 주의 이름 자리에 내 이름을 집어넣으면 안 되지요. 그래서 주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개인 이름은 사라집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까, ‘아들’입니까?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내 아들이지요. 아들이 왜 그렇게 많아요. 왜 단수로 이야기하지요? 왜 아들들이 아니고 아들이냔 말이죠. 아간 사건 알지요. 여리고 성에서 이겼다고 깐죽거리다가 당한 사건 있잖아요. 아이성이 작다고 저 정도는 우리끼리 손봐도 되겠다고 덤비다가 36명 죽었잖아요. 그런데 민주주의는 몽테뉴에 의하면 다수결로 처리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물건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신명기에서 정리된 여호와 전쟁은 몇 가지 특징이 있어요. 이겼거든 다 바쳐라. 두 번째는 몰살시켜라.

 

사람들이 별로 듣고 싶지 않는 구절 가운데 여호수아에 보면 나옵니다. 여호수아 11장 20절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우리는 기능이지요. 이스라엘 기능이 이해되십니까? 이익 될 주체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단수니까. 여호와 이름의 소유거든요. 소유자가 기뻐하면 됐지 소유당한 우리가 기뻐하는 것과 관계없습니다.

 

“그들로 저주받는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한다는 거예요. 누가? 이스라엘 소유자가. 그분이 누굽니까? 여호와 이름이. 어떤 기능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충실하게 역사 속에 남겨서 후손에 의해서 등장한 여자가 생명 되기 위해서 하늘의 생명이 땅에서 이뤄지기 위해서 언약을 투입했던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 이름이 사랑의 교회가 있어요. 옥 씨란 분이 있다가 돌아가시고 그 다음 사람은 논문 표절하다가 걸리고. 논문 표절 주의하세요. 진짜 내가 논문 쓰고 싶어. 왜냐하면 목사님 일이 아니고 내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왜? 하나니까. 한 몸, 한 소망, 한 교회잖아요. 아니었습니까? 내가 오해했네.

 

한 지체 아니었던가요? 지체는 떨어지고 싶어도 못 떨어지지요. 한 성령 받았기 때문에. 돈 때문에 원수지간 되도 원수가 안 되는 거예요. 만약에 돈 떼먹어서 원수라면 하늘나라에서 멱살 쥘 일 있습니다. 그럼 하늘나라 치안경찰이 와요? 하늘나라에서 싸우는 일이 생깁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하늘나라에서 데모하면 안 되잖아요. 사전에 조치하겠지만.

 

우리 존재로 알고 있는 사랑의 하나님은 만들었으니까 책임져주시는 하나님. 자식이 부모한테 요구하는 게 그거에요. 만들었으니까 책임지라는 겁니다. 똑같아요.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왜 이렇게 고생시킵니까? 책임지라는 거예요. 주께서 말하기를 책임지고 은혜 안 줄게. 네 말 맞아. 너를 그런 인간으로 만든 것은 지옥 가기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여기 본문 말씀대로 그들은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희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보라. 천국은 지옥과 손잡고 나온다는 사실을 보란 말이죠. 저주받음으로서 네가 잘나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신명기 9장의 말씀처럼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네가 구원받은 것은 다른 근거로 구원받은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맹세를 이루기 위하여 너에게는 은혜가 임한다. 따라서 너는 은혜를 소유하지 말고 은혜에 소유당하라는 겁니다.

 

들어보니까 성경해석이 전부 다 현장에서 갈라지지요. 존재냐, 기능이냐? 기능이냐, 존재냐? 항상 갈라져요.

 

다시 창세기 5장을 봅시다.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그리고 죽었다는 것은 아담의 형상 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이름, 그 이름이 여기서는 안 나타나지만 나중에 보니까 천지창조에 개입하신 그 하나님이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참 잘됐어요. 이런 것도 생각할수록 어려워요. 말 한 마디 떼기가 무서울 정도인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고 했지요. 우리는 말씀을 이렇게 안 썼으면 좋겠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계신데 그 옆에 말씀이 있었다. 이러고 싶어요. 왜? 서열이 성부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성자, 성령이고 하잖아요. 성경은 그게 아니에요. 성경은 바로 예수님이 위주. 성부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 게 성경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 되심을 증거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은 이 땅의 역사를 체험했기 때문에, 죄를 체험했기 때문에, 언약을 완성했기 때문에.

 

이것은 존재론적 서열이 아니라 언약적 서열이 되는 거예요. 존재론적 서열은 성부가 우선이고 성자, 성령의 순입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3장 끝에 나와요.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21~23절)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라. 그 때는 아이온을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먼저 나오고 하나님은 보조 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인간들아 초점을 말씀에 모아라. 이 말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존재자, 주체가 된다는 거예요. 그동안 있었던 세상 만물은 중심인물이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네가 중심인물로 나대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믿는다고 하잖아요.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여기서 나온 단어가 본 사람은 있다, 없다? 없지요. 골치 아픈 일입니다. 여러분 없는 데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 누굴 보내봤자 그건 소용없는 짓이잖아요. 욥기에 나옵니다. 욥이 하도 고난을 당하니까 짜증을 내고 원망을 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욥아. 내가 너한테 질문할 테니까 답변해봐라.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어떤 문화학자가 오지에 가서 풀이름이 뭐냐고 물으니까 토인들이 막 웃는 거예요. 쓸데없는데 이름을 붙이는 게 우스운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이 언어를 만들고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유용성과 관련돼있어요.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별은 그냥 있는데 별자리는 인간이 만들지요. 별자리를 만들 때 별한테 허락받았습니까? 받은 적 없지요. 인간들이 별자리를 만드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 개입하고자 별을 이동시켜서 동방박사 따라오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을 철없는 것들이라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내놓는 것에 인간이 저지른 모든 것에 주의 이름이 언약으로 내려오시는 거예요. 그들의 죄로 인하여 온 몸으로 받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적 죽음이 유발되는 겁니다. 아벨과 스가랴의 피가 곧 책임져야 된다는 것. 그래서 언약이라 하는 것은 우리로부터 낯설게 마련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따져보겠습니다. 없다는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부터 하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했지요. 하지 말라는 것은 하라와 대조를 이룹니다. 이것을 숫자로 기호로 보겠습니다. 하라는 0으로 보고 하지 마라를 1로 하게 되면 짝이 이뤄지지요. 최초의 상태가 이겁니다. 하지 말라와 하라 사이에 차이성이 발생되지요. 그러면 이게 바로 정보에서 1비트에요. 이든지, 아니든지. “우리나라 사람은 아프든지, 안 아프든지. 둘 중에 하나야.” 맞는 말이잖아요. 가장 최초의 정보를 제공한 겁니다. 이게 바로 1비트 정보에요. 상태는 두 개에요.

 

형광등이 하나 있으면 켜지든지, 꺼지든지. 켜진 것을 0, 꺼진 것을 1로 본다면 이 정보량은 1비트에요. 그런데 형광등이 두 개라면 AB 둘 다 켜지든지, A는 켜지고 B는 꺼지든지, A꺼지고 B는 켜지든지, AB 둘 다 꺼지든지, 네 개가 되겠지요. 이 상태는 네 개고 정보는 2비트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위치상 많아지게 되면 점점 더 상태가 복잡해지고 확산되겠지요. 마치 동양사상에 나오는 음양사상과 유사한 논리가 되는 거예요.

 

음양사상이 기원전 5세기 경이에요. 그전에 있던 사상은 수메르에서 나와요. 기원전 3500년경에 수메르란 나라가 있어요.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는 지금의 이라크를 말합니다. 최초의 문명국가에요. 그것 약간 늦게 이집트의 고대문명, 그것보다 더 늦게 온 것이 유프라테스 강이고, 황하 강이 제일 늦어요. 기원전 1500년경. 그리고 2300년경에는 크레타 섬, 유럽의 최초 문명이 발전되는 겁니다.

 

흔히 에덴동산이라고 여기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이 에덴동산의 발원지거든요. 제가 물었어요. 에덴동산이 어디 있습니까? 궁금해 미치겠지요. 고고학자들 찾는다고 바쁩니다.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지 말고 정보량이 증가되면 어떤 상태인지 물어야 돼요. 시간이 역전 되는 그 안에 에덴동산이 들어있어요. 왜냐하면 선악과, 생명나무의 관계는 언약 안에서 계속 유지가 돼요. 상당히 모호하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처럼 들리지요.

 

저에게 관념적, 추상적이라고 하지 말고 홍해가 갈라진 것을 관념적, 추상적이라고 봅시다. 그리고 여리고 성 무너진 것도 마찬가지고. 세상에 몸무게 70~80킬로그램 나가는 사람이 물위를 걷는다는 말이 성립이 됩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물은 산소 하나에 수소 둘로 돼있어요. 이온 결합으로 돼있단 말이지요. 에너지 결합도가 크질 않아요. 밟으면 터지게 돼있다고. 그러면 80킬로가 올라가면 그게 되겠어요? 안 되지요. 그러면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은 물위를 걸은 게 아니고 관찰자가 오해했다는 불트만의 신학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든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마태가 거짓말했다는 거예요.

 

목적만 좋으면 구라 쳐도 괜찮다는 게 우리의 기대지요. 그러나 주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구라 쳤습니까? 아니지요. 주인은 그런데 주인 따로 종 따로. 주인의 제자가 아닌 모양이라. 보니까 동업이 수상해. 정보량이 확산됩니다. 복잡해지지요. 하지만 그 원리를 캐보면 0과 1, 그러니까 하라와 하지 마라의 관계 속에 주님께서 끼어들고 선악과 속에 끼어들어서 어떻게 그걸 생명으로 인도하느냐?

 

 

 

그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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