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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열왕기하 6:24-33 / 대표적인 불신앙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하

열왕기하 6:24-33 / 대표적인 불신앙

정인순 2014. 2. 6. 16:33

 

이근호

 

6. 대표적인 불신앙 (열왕기하 6:24-33)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찌로다 하니라 그 때에 엘리사가 그 집에 앉았고 장로들이 저와 함께 앉았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내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자식이 내 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그 주인의 발소리가 그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무리와 말씀할 때에 그 사자가 이르니라 왕이 가로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열왕기하 6:24-33)

 

  『하나님! 주님이 주신 평화, 그 평화가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말씀에서 나온 것을 다시 한번 발견하고 주님에게 감사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섬겨야한다고 보통 말하고 있는데 섬기는 것은 한쪽은 높은 자가 되어야 하고 한쪽은 낮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죠. 그러면 높은 자는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이 높은 자이며, 낮은 자는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낮은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러한 원리원칙에 맞추어 살라고 만드셨습니다. 만약에 미래에 과학이 발달하여 우리가정에 로봇트를 사용한다하면, 가정부 로봇트 세탁사 로봇트 등 있다면 세탁사 로봇은 세탁을 하라고 있으며 가정사 로봇트는 요리하라고 있지, 만약에 세탁사 로봇이 왔을 때 주인이 그 로봇을 위해 빨래를 해 준다면 주객이 전도 된 것이죠. 그렇죠?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보고 '너는 죄인이다' 라는 것은 너의 사고 방식이 주객이 전도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그 순간부터 주객이 전도되었습니다. 어떻게 전도되었나 하면 하나님하고 나하고 맞먹자 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당신이 나에게 잘 해주면 나도 당신께 잘 해줄 것이고 하나님 당신이 나에게 잘 못해주면 나도 당신께 못 해줄 것이다. 나도 알만큼 안다. 나도 선악과를 따먹었다 말이야. 그러니까 하나님이라고 나한테 이렇게 저렇게 간섭하지 말란 말이야. 나도 독자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야. 내가 뭔데 당신을 섬겨?


  이러한 심보가 마귀와 더불어서, 뱀과 더불어서 우리 속에 파도 치고 있고 출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 된 것이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은 너는 낮고 나는 높은 데 낮은 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라고 그렇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하나님보고 나를 구원해내라는 것입니다. 예수여 나를 구원해 내라 이 잘나고 똑똑한 나를 안 구원해 내면 누구를 구원해 내 것이냐? 나를 구원해봐 공짜로 구원해준다고 ? 고맙소. 내가 감사 헌금 할께. 자기가 고통스럽고 인생살이가 힘드니까 이 책임이 누구한테 있느냐 하나님한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저지른 일이니까 하나님 당신이 나를 고통 없는 세계로 데리고 가란 말이야. 이런 건방 떨면서 교회 나오고 평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한답시고 하는 것을 보면 교회 나와서 얼마나 그 동안 복을 챙겼나 그것을 따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교회 나왔다고 죄 아닌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나와도 그런 심보가 그런 심보인데 무슨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TV에 보니까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주유소 광고인데 어떤 아저씨가 차에 기름을 넣으려고 하니까, 빰빠라 ~빰 하고 오늘은 당신의 생일입니다. 그리고 받을 것 다 받은 사람 또 생일이라고 선물을 준다는 말이지요.


  꼭 교회가 그런 것 같습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받을 것을 다 받아 챙기다가 그것도 분에 안 차니까 더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섬기는 것입니까? 주객이 전도되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사람들이 강아지 키우다가 조금 뒤에는 강아지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강아지께 고기 갈아줘, 아플 때 병원에 데리고 가... 주객이 전도되어도 보통 된 것이 아닙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놓고 다른 사람도 다 그런데 나만 그런가 하는, 남 핑계되면서 그런 식으로 흉내만 내는 무늬만 신자, 겉모양만 신자가 되어 있습니다. 본래의 우리 자리를 찾으려고 한 적이 있습니까? 본래의 우리 자리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상상을 초월한 삶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왕이요 한사람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백성입니다. 이 두 사람의 실존이라고 할까요, 살아가는 마음자세를 우리가 훑어보겠는데 이 사람들의 상황을 보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짜증내는 그 심정을 우리는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그 상황을 당하면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 이야기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24절 보니까, 엘리사가 그토록 혼을 내주었던 아람이지만 다시 정신을 못 차리고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완전히 이스라엘 성을 완전히 포위를 합니다. 일종의 경제 제재(制裁)이지요. 테러국가에 대한 경제제재 처럼요. 완전히 포위를 하니까 외부에서 분유가 들어 올 수 있습니까? 약품이 들어 올 수 있습니까? 이라크 같은 경우에 기름 팔아서 사는데 기름을 제대로 팔 수 있습니까? 이라크 기름 사는 나라는 우리들이 상대 안 한다니까 이라크 기름을 살 수 없는 거죠. 그러면 그 나라는 자기들 먹을 것 필요한 것은 자급자족해야되지요. 고기 잡는 어부는 농부와 물물교환 해야 되는데 그렇게 못하니까 아침에도 고등어 점심에도 고등어 저녁에도 고등어 매일 매일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안 질리겠습니까? 질리지요. 저는 중국 집에 가면 중국 집에 일하는 주방장은 무엇을 먹나 하고 관심 있게 보면 점심때 그들은 짜장면 먹지 않습디다. 한식을 먹더군요. 매일 짜장면을 어떻게 먹겠습니까?


  지금 전쟁의 일환으로 항복하라고 완전히 봉쇄작전을 쓴 것입니다. 양식이 외부에 공급이 안 되니까, 사람이 가장 힘든 것은 물과 공기와 양식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인간은 세포로 되어 있고 세포는 에너지로 살아가는데 그것이 공급이 안 된다 말이죠. 영양소가 잘 안되니까, 공기는 해결이 되는데 물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백성들의 하루하루 삶이 지옥의 삶입니다. 자, 여기에 물가가 인플레이션이 됩니다.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은 없으니까 돈을 억 만금을 주어도 물건구입하기 가 힘든 것입니다. 인플레이션이죠, 물가 상승 말입니다.  


  25절을 봅시다.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여기서 합문태 라는 것은 비둘기 똥입니다. 아침부터 똥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똥을 짜장면이라고 합시다. 이 비둘기 똥이 어디에 쓰이겠습니까? 이 비둘기 똥이란 것이 가축이나 먹지 사람이 먹을 수 있겠습니까만, 오죽 먹을 것이 없으니까 이것도 한 갑에 즉 1.5리터나 1리터 정도 그런 작은 양인데 은 다섯 세겔에 매매될 정도이고 돈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생필품은 너무나 모자라고 이 책임은 임금이 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임금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 어려운 시간에 두 사람이 나온다고. 하나는 임금이고 하나는 백성이 나온다고요. 먼저 임금부터 봅시다. 여러분이 책임자가 아니라고 나 먹을 것만 챙기고 남 간섭도 아니하고 이러면 괜찮은데 막상 어떤 집단조직의 어떤 회장이 되고 임원이 되어버리면 그 회원들 하나 하나의 권익을 신장시켜주어야 하고 회원들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봉사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복음을 들을 권리가 있으며 목사는 복음을 전할 책임의 책무가 있는 것입니다. 안 전해도 나 혼자 천당가면 된다 라고 하면 안되지요. 목사는 복음만 전할 책무가 있고 교인들은 복음만 들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강대 상에서 쓸데없이 목사 자기 자랑한다든지 교회 자랑한다든지 하면 목사를 쫓아내야 합니다. 교인들을 주관하는 것은 주님이기 때문에 교인들은 복음 듣고 구원받을 것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임자라는 것은 자기만 돌보는 것이 책임자가 아닙니다. 그만한 합당한 봉사를 타인에게 해 주어야하는데 임금님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백성들의 생활권을 생존권을 보장해 주어야하는 것이 임금님의 임무가 아닙니까? 그래서 백성들이 지금 어떻게 사는가하여 민정시찰을 나가게 된 것입니다. 민정시찰을 하고 있는데 임금을 알아본 한 여인이 외칩니다.


  26절을 보면,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도와달라고 하는 소리를 어디 한 두 번정도 들었겠습니까? 가는 곳마다 도와주소서 못 살겠습니다. 굶어죽겠습니다. 이렇게 많이 들었겠지요. 이러니까 임금도 자기가 할 답변을 미리 다 준비 해놓았는가 봅니다.


  27절에,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당신도 알다시피 타작할 곡식이 있나. 추수한 포도가 있나 임금인들 왕인들 이 처지에서 어떻게 할 수 있겠나? 하나님 때문에 생긴 일인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나 하면서 어물쩍 자기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도 임금님이 자기 핑계나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까 백성들의 속사정이 얼마나 처참하고 참혹한지 아직도 임금님은 자기 먹을 것이 있으니까 저런 다 싶어서 실상을 이야기합니다.


  무슨 실상인가 하면 27-28절에 나오는데, 이웃집 아주머니하고 자기하고 계약을 합니다. 어떤 계약이고 하면.. 우선 아이 잡아먹기로 한 것이죠. 자식은 또 나으면 되지만 자기 자신은 없어지면 안되니까요.  누구의 아이를 먼저 먹을 것인가 가위바위보로 했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했겠지요.  그래서 이 아주머니의 아이를 먼저 먹게 됩니다. 상대방 아주머니는 쾌재를 불렀겠지요. 속으로 자기 아이를 빼돌릴 생각으로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을 했겠습니까?


  남의 고통이 자기의 고통은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인간은 본질로 돌아갑니다. 무슨 본질?   내 중심으로.... 남의 고통보다 내 고통이 먼저입니다. 이웃 사랑요?  배부르고 편할 때입니다. 여유 있을 때 그리고 눈 뜰 힘이 있을 때 이웃사랑이겠지요. 배가 안 고플 때.... 의리? 여러분 의리도 자기가 괴롭지 않을 때만 의리입니다.   우정? 여자의 우정요? 시집가서 자기 아이 생기면 우정이 어디로 갑니까? 남자의 우정? 이것도 서로 보증설 때 다 깨어집니다. 보증 설 때 알아봅니다.


  둘이 약속을 해 가지고 네 아이부터 먹고 나중에 내 아이 먹자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태가 입에 오르기 어려운 사태이지만 어쩔 수 없이 어른이 살아야 되니까요. 그래서 먼저 이 아주머니의 아이를 먹었는데 드디어 29절에 봅시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드디어,,, 드디어 라는 이 말에 가슴이 철렁 합니다. 사람고기는 식인종만 먹는 것이 아니고 전쟁통에는 이런 경우가 많답니다. 실제로 어려운 지경이 되면 아무도 장담을 못하는 것이지요. 내 아이? 아침에 자고 나니 이 아이가 없어졌네? 없다 .하고 숨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인들 그 고기 먹으며 그 입에 맛있게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힘이 쫙 빠질 때는 이것이 내 아이 고기인지 거미인지 바퀴벌레인지 그런 것 가리지 않고 먹습니다. 빠삐용 이라는 감옥탈출영화를 보면 바퀴벌레 잡아먹는 장면도 나오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극한 상황에 있으면 인간이 극한 악에 바친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튀어나옵니다. 인터넷이든 무엇이든 ...할 소리 안 할 소리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놀랍게도 주객이 바뀌었어요. 놀랍게도 누구한테 하나님께 최종적으로 최후로 하나님께 원망을 돌리는 것의 인간성 본질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저 아저씨이야기가 아니고 저 아주머니 이야기가 아니고 각각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그 더러운 습성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객이 전도되어서 쉽게 말해서 하나님 당신 나한테 해 준 것 뭐있노? 다른 사람은 예수 믿고 잘 도 챙기더니만 받을 것 다 받았는데 나는 하이타이를 받았나 생일날 꽃을 받았나 다른 사람보다 나는 왜 적게 주노, 이렇게 사람차별하기가?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야 될 그러한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는데 우리의 성품이 태어날 때부터 주객이 전도된 채로 거꾸로 태어 났다보니까 매일 하는 소리가  하나님 나한테 해 준거 뭐 있노 하는 그 소리밖에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욥에서 신앙이 있다 없다를 무엇으로 판단하느냐하면 하나님께 원망을 하나 안 하나로 판단하자는 것이 욥기입니다. 마귀가 하나님께 찾아가서 하는 말이 욥의 재산을 확 빼앗아버리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욥에게 자식을 빼앗아 버리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튼튼한 건강을 뺏어버리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원망 안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이 있다는 것이 바깥에 나올 때는 정말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나 안 하나로 그 속내를 드러내는 그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어떻게 합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란 말은 일 잘될 때라는 말도 아니고 골라서 하라는 말도 아니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 그리고 찬송가에 나오지요 지금까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우리가 460장을 생일날 많이 부르잖아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잖아요. 우리가 모르는 바가 아니고 다 아는 바잖아요? 아는 바지만 이 세상을 내 중심으로 보니까 이 세상이 내 뜻대로, 내 포부대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왜 안 돌아가 주는가 말입니다.


  너무나 환란이 극하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30절에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그 옷을 찢으니라  왜 찢습니까? 찢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한번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나 하면 엘리사가 아닙니까?  31절에 보면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 지로다 하니라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엘리사야 내가 간다. 너 거기 있어. 너 목을 내가 칠리라. 내가 너의 목을 안 치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리라. 이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나? 이 가련한 백성들이 오늘은 내 아이 잡아먹고 내일은 너의 아이 잡아먹고.. 도대체 하나님은 눈도 없고 코도 없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왜 아람군대가 와서 우리의 성을 포위해서 이 비참한 상황을 만드느냐. 그 책임을 내가 엘리사 너에게 묻겠다라는 말이지요.


  아까 제가 오늘 극한 상황에 두 사람이 나온다고 했지요. 왕이 나오고 백성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 백성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을 쳐다보면서 왕이여 내 아들 책임지라 왕이여 내 생존을 책임져라 백성이 왕을 쳐다보면서 왕이여 왕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같지만 자기 위주로 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나 왕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나 둘 다 똑 같은 것입니다.


  단지 이 성에서 단 한사람, 제대로 하나님을 섬겨야겠다는 단 한사람, 누구냐? 엘리사 밖에 없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 연 이어서 두 번 얘기했잖아요. 엘리사와 다른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이냐? 사환은 자기를 잡으러 오는 수많은 아람군대를 보고 겁을 냈을 때 엘리사가 기도를 해서 눈을 떴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수많은 군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천군 천사가 오히려 그것을 포위하고 있었고 또 엘리사가 아람사람을 사로잡아 갔을 때에 이스라엘 왕은 그때서야 이제 내손에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이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이 나쁜 사람을 잡듯이, 우리 주님께서 죽기를 무서워하는 우리를 위해서 사탄을 체포했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주보에 나오지요. 지난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미 악마를 체포했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지 말고 , 이제 남은 일은 이 기쁜 소식을 남에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내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악마를 체포하셨다. 마치 옛날에 우리 경찰이 탈주범을 체포했다와,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 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이 무섭다라고 속삭이는 마귀를 체포하셔서 이제 예수 믿는 자는 영생이다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어떤 어려운 상황이라도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닙니까?


  지금은 엘리사만이 내가 어떤 사명으로 하나님을 섬길꼬 라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하고 아주머니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해 준 것 뭐있노 라고 얘기하며 임금님은 '엘리사야 거기 있거라 내 간다 자객 보낸다 오늘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나 임금 안 할 거다 반드시 너를 죽이고 말 것이다'라며 자객을 보냅니다. 자객을 보내는데 세상에 이런 도사 봤습니까? 자기 죽이러오는 것까지 엘리사는 앉아서 훤하게 천리를 보며 만리를 보는데...


  32절을 봅시다. 그때에 엘리사가 그 집에 앉았고 장로들이 저와 함께 앉았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내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자식이 내 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여러분 다시 한번 봅시다. 너희는 살인한 자의 자식이 내 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여러분, 여러분이 사마리아성의 임금님이라고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을 해보세요. 아무리 믿음이 좋고 교회에 오래 다니고 신학을 다녔고 해도 지금 자기 백성이 어려울 때에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 그것이 살인한 자식이라는 욕을 먹어야할 정도로 나쁜 것입니까?


  살기 어렵다고 하나님 살기 어렵습니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그게 무슨 살인한자의 자식이라는 무서운 욕을 받아야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항상 주님 편에서 보지 말고 주님의 반대편에 서서 보면 이상스럽게 그 사람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평소에 가지는 마음가짐하고 우째 그렇게 똑같은지.... 아니 나는 임금님인데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그것도 하나님께서 아람군대를 보내 가지고 먹을 것이 없어서 오늘은 내 아이 잡아먹고 내일은 너 아이 잡아먹고 이 어려운 상황에서 지도자가 된 입장에서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좋아 엘리사야 너 거기 있어라 내가 너의 목을 치리라. 이런 소리는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해서 관심을 쏟은 임금님은 그렇게 악에 받친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이해는 안하고 엘리사가 하는 말이 이 살인한 자식이 나를 죽이려 오는구나 라고 왜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면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인정할 줄 알아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본질에 대해서...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교회 나올 때 오늘 목사의 말대로 못삽니다. 어떻게 하지요 하지 말고, 성경을 보면서 이러니까 내가 죄인이지. 내가 지금 여유가 있으니 교회 나오고 안 바쁘니까 교회 나오지만, 내가 바쁠 때는 교회도 빼먹고 돈 없을 때는 헌금도 못하고 이럴 수밖에 없는 인간, 이러니까 나는 죄인이지 그걸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어려울 때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는 자기 변명 .자기본질을 가리는, 남들 다 그런데 나만 그렇습니까? 교회 나온 것 만 해도 잘 한 것입니다 라는 자기 투정, 그런 마음 갖고 살지 마세요. 성경을 보면 아구~  내로구나 바로 나... 이거 남 욕할 것 없네 바로 나를 보고서 하는 말씀이네. 주여 맞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이런 겸손한 마음, 오늘 임금님을 보고 이런 아주머니를 보고 예수님 같은 엘리사를 보면서 주님 앞에서 원망하려다가 하나님 앞에서 주먹질하려다가 성경을 보니까, 열왕기하 6장을 보니, 바로 저 자신이군요. 내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군요. 아무리 해도 나는 인간이 안됩니다. 이 시험 왜 이리 어렵습니까? 하는 이런 겸손한 마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진짜 제사고 진짜 상한 심령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완벽하라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원망 투성이고 불만 투성인 주객전도된 사고방식의 인간이 꼭 우리들 자신인데, 신약시대에 2000년 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피를 흘려주심으로서 이 막대한 엉터리 같은 사고 방식까지 다 씻어줌으로서 다시 한번 주님을 우리 구주로 감사히 고백할 수 있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