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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왕하 6:1-7 / 엘리사와 도끼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하

왕하 6:1-7 / 엘리사와 도끼

정인순 2014. 2. 6. 16:24

 

이근호

 

3. 엘리사와 도끼 (왕하 6:1-7)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그 하나가 가로되 청컨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가리라 하고 드디어 저희와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무 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가로되 너는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하니라 (왕하 6:1-7) 

 

  『참 아름다운 주님의 세계 속에 살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고 이미 에덴 동산을 잃어 버렸고 생명 과일나무도 없는 세상에서 저희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옛날 아담이 보았던 그 생명나무를 다시 볼 수 있는 영안을 이 시간에 다시 펼쳐지게 하여 주옵시고 그 나라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성경에 보니까 도끼가 물에 빠졌습니다. 엘리사와 함께 있던 어떤 선지생도가 집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를 베다가 풍덩하고 도끼를 물에 빠뜨렸습니다. 그 도끼 없이는 집을 지을 수가 없지요. 그것을 보니까 선지자하고 함께 있어도 문제는 일어나네요. 그죠? 예수님과 함께 살아도 문제가 일어나듯이 선지자와 함께 동거하고 동거해도 낭패는 나타나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 물에 빠진 도끼가 나중에 떠오르는 도끼, 물에서 물에 의해서 없어졌는데 없던 도끼가 물에 다시 떠오르는 도끼가 되어 재차 그 사람 손에 쥐어 주게 되는 일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사람들이 떠오른다고 주문을 외운 것이 아니고 엘리사가 한 어떤 행위를 했는데 엘리사의 어떤 행위로 말미암아 사라졌던 도끼가 물위에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도끼가 물위에 떠 오른 것은 엘리사 쪽에서 무언가 하나를 던졌지요. 나뭇가지를 던지니까 물에 빠진 도끼가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도끼는 엘리사의 도끼가 되겠지요. 엘리사의 행위에 의해서만 현실로 나타난 도끼입니다. 엘리사에 의해 새롭게 조성된 새롭게 쓰임 받는 도끼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직감적으로 무엇을 느낄 수 있나하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느낌이 옵니다. 하나님의 자비.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보내서 자비를 이렇게 베풀었구나' 이것을 느끼고 직감적으로 알게 되는데 우리는 자비라는 열매를 굉장히 반가워하고 고마워합니다만, 그 자비가 만들어 내는 상황은 절망적이고 낭패가 될 수밖에 없는 엄청난 힘든 상황이 먼저 있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비가 빛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로서 자비라는 열매를 따먹기는 바라면서 절망적인 상태에서 물위에 떠오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부하고 싫어하고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좋아하면서도 그 생명의 길이 좁은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외면해 버립니다. 얼마나 좁은 길인지 찾는 자가 없습니다.


  오늘 박사교회는 이렇게 많은데, 저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많이 의심됩니다. 분명히 생명의 길이 적다 했는데 왜 이리 많은지. 저는 목사님들과 공부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들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목회를 실패할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목회 성공하고 자 하는 집념이 자꾸 생겨납니다." 남보란 듯이 성공하겠다는 이런 욕망이 수 없이 새어 나옵니다. 여러분 목회 성공한 자리에 무슨 주님의 자비가 그렇게 고맙겠습니까? 좁은 길을 가야되며 생명의 길은 그 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독하게 먹지 않았고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성공의 길만 보이고 환상과 출세와 번영의 길만 보이고.......


  우리의 의식을 전환시켜 보세요. 나도 실패의 길로 , 남이 안 하는 길로 한번 가볼까?  남이 거부하는 길로 접어들면 그 길도 재미가 솔솔 할텐데? 그런 아이디어를 왜 못 가집니까? 자비와 용서 그리고 무한대의 사랑 이것들이 우리의 성공을 위한 것들이 욕구의 태풍 속에 흔적 없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 자비의 용서의 손길도 우리의 성공이라는 회오리바람에 다 날아가서 가정이나 회사에 가면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있는 것은 그래프에 숫자 올라가는 것과 성공의 신화 전설적인 영웅인물이 되는 것  TV에서 나오는 성공시대를 보면 저 사람이 성공하기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까 하는 생각을 저는 해 봅니다.


  경쟁시대에서 얼마나 서로 힘듭니까? 이기는 자 뒤에는 진자가 항상 있는 것입니다. 실패의 어두움이 있는 것이지요. 실패가 그 만큼 짙기 때문에 영광도 찬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게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리들의 구원도 그렇게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 구원의 영광 밑에는 우리자신의 영광이 거름처럼 깔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실패, 죽음 찢어진 살점 덩어리가 우리의 구원을 떠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세요. 어떤 것도 예수님의 공로 위에  무엇을 걸치지 마세요. 주님도 잘 했지만 나도 잘했다는 것 이런 것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는 영광은 내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그러한 야비한 노력과 행위이지만 주님의 노력과 공로는 대신 죽으시고 원수 된 자를 위해서 죽으시고 경건치 못한 자를 위해서 죽으시고 죄인 된 자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인인 것입니다. 대가가 없고 보상도 없는 희생의 피가 축축이 젖어있는 그 터전 위에서 구원의 밀알, 영생의 밀알, 알알이 맺혀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원의 맺힌 알알들을 따먹고서는 밀알을 따라 가보고 추적해 보니까 그 바닥에는 피에 젖은 예수님의 뿌리가 있다는 그 사실, 예수님이 피에 젖어서 우리에게 영생이라는 것 우리가 의인되었다는 이러한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될 텐데. 그 열매만 보고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자기가 잘나서 구원받았다는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 떠 오른 도끼와 그리고 대신 던져진 나뭇가지, 이 두 개가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다. 엘리사가 함께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비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자비가 함께 있다는 뜻은 너희가 하는 모든 행세들은 위기와 절망과 낭패만 유발시키는 요인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한 시간이라도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우리는 버틸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엘리사의 생도가 집이 좁아서 집을 짓겠다고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었습니다. 나무를 베는 이 행위에 자비심이 들어 있습니까? 아니면 인간 자기의 행위에 대한 포부가 들어있습니까? 사람들이 직장이나 가정에서나 하는 모든 일은 하늘에서의 자비심이 전혀 들어 있지 않는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심, 제가 설교하면서 나 설교하면서 피를 토하고 죽을 테니까 이 설교 듣고 영생 얻으세요 이런 마음으로 설교한다고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 큰 오산입니다. 대충하고 끝내야지 목도 아픈데 오히려 이런 생각이 더 앞서서 나올 수 있지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어떤 자비심이 나서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일을 하니까 나를 좀 알아도, 자기 과시욕이 앞서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비심이 포함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위한 자비도 결국은 자기의 것, 즉 이기심인 것입니다. 이기주의라는 울타리가 깨어져야 자비심인데 우리민족 .우리나라 내 공동체 내 가족 내 가정 내 직장 내 교회 그런 것 밖에 더 됩니까?


  어제 비가 왔는데 운동을 한다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신한동에 걸어가고 있을 때 개가 나를 향해 짖어 대며 따라 옵니다 그것을 보고 저는 크게 느낀 것이 있는데 저 개가 왜 나를 향해 짖을까?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영역표시라 합니다. 영역표시는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역표시가 동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다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교회라는 영역 싸움, 우리 직장도 대우직원 삼성직원 현대직원 등으로 말입니다. 그 동물적인 성향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동성로파 향촌동파 등의 조직폭력배가 아닙니까? 이것 좀 고상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정치판의 한나라 민주당 자민련 등의 영역싸움 등이 동물과 다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비심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엘리사 생도가 내 집 짓는다가 개인적으로 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엘리사도 위하고 하나님도 위하고 자기들도 위하고 자기 생각에는 가치 있다고 의미 있고 보람있다고 하는 이 일에 왜 사건이 벌어집니까? 왜 도끼가 물에 빠져 버립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끼로 나무 베어서 잘먹고 잘 살았네 그건 자비심이 아닙니다. 저나 여러분은 어렸을 때 모두 동화책을 보고 살았습니다. 동화책 내용의 끝에는 왕자와 공주가 결혼해서 잘먹고 잘살았다는 행복한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자비심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잘 된 것입니다. 하늘의 자비심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는 어떻게 끝납니까? 십자가 죽으심, 죽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를 향한 조치입니다. 이 땅에서의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아까 공부 시간에 장로님께서 좋은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자가 있나 라는 단서를 부치시면서 이미 시나리오와 각본이 너는 이렇게 착하게 살았고 남에게 도움을 주었건만 결국은 이 땅에서 십자가에 죽게 되었다고 되어있다면 이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과연 예수 믿을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누가 있나 그러니까 성령을 통해서 가게 하신다. 그 취지로 말씀하셨죠?


  여러분, 왜 우리가 보기에 십자가 죽는 것이 비록 그것이 생명길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거부감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고 단정을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야지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나 라는 말이죠? 성공하겠다고 애를 쓰는 것 그것이 사람끼리는 통하겠지만 문제는 선지생도가 엘리사와 함께 있다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과 함께 잘 살아 보겠다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세상적으로 종교단체 만들어서 잘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제는 가룟유다가 종교단체를 만들었는데 교주를 잘못 만났다는 것입니다. 교주가 십자가에 죽는 교주를 만난 것입니다. 인도 출신의 유명한 '배꼽'이라는 책을 쓴 교주는 고급 승용차 35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교주는 고급 승용차는 커녕 십자가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가룟유다의 개인사적인 것으로는 이해를 해 줍시다. 그래서 12제자는 뽑혀야 되는 것이며 11제자가 주의 길로 간 것은 뽑혔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네가 나를 택했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택했다' 는 말입니다.


  기독교에서 선택 교리 이만큼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중이떠중이는 따라 오다가 중간에 다 탈락합니다. 정말로 예수님만 쳐다보는 자가 누구냐?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비인 줄 아는 자가 누구냐?  그리고 예수의 길이 우리가 보기엔 실패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좁은 길이며 영생의 길 인줄 아는 자가 누구냐? 마음을 독하게 먹지 않으면 우리 인생이 실패 못하고 목회 실패 못합니다. 우리 눈에는 성공, 성공만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십자가의 길이 왜 많은 사람과의 길과 대조가 되는가 하면 다른 인생들은 자비가 포함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포함되지 않으면 그 인생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지금 엘리사 생도가 다른 사람과 있었더라면 칭찬 받을 일이었겠지만 엘리사와 함께 있으므로 말미암아 도끼를 잃어버리는 낭패를 당하는 일이 생기는 것은 그냥 집 지어서 살아가는 것은 종교가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엘리사 선지생도가 되었으면 존재의 의미가 되어야지 엘리사가 왜 함께 있는가를 알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 예수가 누군지 어떤 분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거리에 가면 가장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 마네킹입니다. 마네킹은 하루종일 서 있으면서 폼만 잡을 뿐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못하는 죽은 인간의 표상이죠. 그 마네킹을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으로 간주하고 믿고 있습니다.


  마네킹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지도 않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나오지 않는 다고 믿고 있지요. 살아있는 자에게는 사랑이 나오고 살아있는 분에게는 자비가 나오고 살아있는 자에게는 죄 용서가 나오는데 하나님을 마네킹처럼 세워 버리면 그곳에는 사랑도 멈추고 자비도 멈추고 모든 것이 단절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모셔놓고 관람만 하는 쇼윈도에 서 있는 마네킹과 똑 같은 것입니다. 삐에로처럼 말입니다. 광대와 같은 하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 생도도 도끼를 잃어버리는 인생으로 낭패. 파탄. 위기 이런 것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엘리사가 하나의 마네킹처럼 또는 괴물처럼 하나의 동상 불상처럼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택한 자에게는 낭패를 일으키시고 파탄을 유발시켜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더 이상 자기가 자기에게 어떻게 할 수 없는 행위에 대해 해결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버립니다.


  5절에서, 이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 온 것이니이다.  도끼가 빠졌으면 자기가 건질 것이지 왜 엘리사에게 도움을 간절하게 요청합니까? 도끼를 빠트린 데 대해서 큰 절망을 느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절망을 느낀 것이죠. 그 절망과 엘리사가 그때서야 유일하게 그 순간 연결시켜 보는 것입니다. 아! 도끼가 빠졌습니다. 엘리사여! 여기서 하나님에 의해서 문제가 발생시켜지고 하나님에 의해서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는 죽은 대서 살아나고 없는 데서 새로 취해지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그러한 새로운 피조물로 재2의 인생을 살도록 하시는데 그런 인생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비가 장착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내포되어 있는 그런 인생으로 거듭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돈 없을 때 도와주는 자비가 아니라 죄 있을 때 도와주는 자비입니다. 죄가 있을 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죄인이 아니기를 아닌 체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은행의 돈을 위해서 흘린 피가 아닙니다. 주님의 찢어진 살이 우리의 재정문제를 해결키위한 살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죄 의식 때문에 엄청난 수 천 톤의 죄 때문에 자비와 불쌍히 여겨줌.... 이 죄 많구나. 죄 때문에 불쌍히 여김을 주시는 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의 무의미함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자비와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어야 인간이지 주님의 용서가 없으면 인간이 아닙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가는데요?


  마태복음 7장에 모든 율법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끝에 가면 집을 두 사람이 짓는데 한사람은 모래 위에 짓고  한 사람은 반석 위에 짓습니다. 모래 위에 짓는 자는 태풍이 불 때 무너졌는데 왜 무너졌는가 그것은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성입니다.


  진실로 여러분은 신자입니까? 하나의 밀알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밀알의 줄기 따라 한번 따라 가보세요. 밀알 줄기 뿌리... 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에 적셔져서 밀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각 사람의 뿌리가 예수님께 놓여져야만 교회이지 교회바탕에 있는 그것은 사업체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안 들어 있으면 무슨 의미 있는 인간입니까? 선지생도처럼 됩시다. "아아! 주여 엘리사여 어떻게 하여주소서!' 라는 것은 놀라운 겸손입니다. 세상에 예수님을 쳐다본다는 것은 놀라운 자존심 꺾기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쳐다봅니까? 예수님,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런 모습들이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무능력자이며 죄인이다 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도끼를 옷 벗고 물에 풍덩 들어가며 과시하며 건진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를 베어서 대신 던지니까 나뭇가지가 오르는 것이 아니고 도끼가 올라옵니다. 나뭇가지는 물 속에 잠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은 뜻합니까? 주님의 자비, 엘리사의 자비, 하나님의 자비를 느끼는 동시에 엘리사가 하는 행위를 그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존재의 이유, 엘리사가 왜 우리와 함께 있어야하는 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은 항상 위기이며 항상 낭패를 맞을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고린도후서 5:14-1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대신'이라는 의미, 자비라는 의미가 내 마음속에 있어야지 내가 열심히 살겠다고 도끼 들고 열심히 나무를 찍어봐야 그것이 의미 있는 인생이 아니고 지옥 가는 인생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까? 우리 가슴속에 하나님의 십자가의 흔적과 자비가 장착되어 는 이런 인생... 남들 보기에는 똑 같지만 하늘에서 보면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물 속에 잠겼는데 의미 있는 인생으로 하나님의 자비심이 내포되어 있는 인생으로 다시 찾았다는 그런 것 말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주님의 자비심과 소중함 사랑을 아는 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도끼가 잃어버린 도끼가 되어 주시고 다시 되찾은 도끼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되찾은 도끼는 도끼 질 하는 선지생도의 것이 아니고 엘리사의 도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주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머리 속으로는 하나님의 자비를 원하고 사랑을 원하지만 우리의 머리 바깥에는 마네킹 같은 죽은 예수, 돌멩이 같은 하나님 그렇게 의미 없이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제부터 마네킹으로부터 자비심이 흘러나오고 시시하게 보였던 예수님에게서 십자가가 흘러나오고 죄 용서가 흘러나오는, 그래서 그 십자가 피 위에 밀알이 맺힐 수 있는 의미 있는 인생...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자비가 담겨 있는 인생을 되찾아 살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