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4. 엘리사의 전쟁 (왕하 6:8-19)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그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곳으로 나오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방비하기가 한 두 번이 아닌지라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의 내응이 된 것을 내게 고하지 아니 하느냐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보내어 잡으리라 혹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리사가 도단에 있나이다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 지라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저희를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왕하 6:8-19)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시간 은혜의 바다에 헤엄치고자 합니다. 은혜가 코에 들어오고 입에 들어오고 가슴팍을 칠 때에 우리가 새로운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앙 생활을 하면서 신앙 경륜이 신앙 자체를 부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있다 없다를 우리 자신이 가끔 점검해보아야 하는 데 어떻게 점검하느냐 하면 내가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있다고 생각 해 볼 때 '진정으로 내가 무엇을 믿고 있나' 그것을 생각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믿지 않고 돈도 하나도 없고 신앙 생활 5분도 해보지 않는 초보자다 이렇게 생각할 때, 즉 내가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내가 5분밖에 앉아 있지 않았는데 내가 천국을 간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 천국을 가게 되었을까?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신앙 경륜이 뒷받침이 되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학의 해박한 지식이 뒷받침이 되어서도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당을 가려면 신앙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믿느냐?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금 죽어도 천국 가는 좋은 장치를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셨습니다. 신앙 경륜이 오래된 분은 속상해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신앙이 오래되었다는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게로 작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힘겹습니다. '내가 신앙생활 십 년인데 처음 온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텐데' 하면 자기 자신이 무거운 짐을 어리석게 짊어지고 가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마세요.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그것은 저녁에 작업복 벗듯이 벗어버리고 신앙의 새 옷을 갈아입고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경륜과 자신의 축적된 지식이나 의로움 등과 전혀 무관한 체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눈이 열린 것 그 외에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없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눈이 열렸더니만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현실이 그 눈 속을 통해서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눈이 열리는구나. 내가 끌어 모으는 것도 아니고 애를 쓰는 것도 아니며 눈만 열리면 되는구나.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떤 현상이 눈감긴 것인가?
8절-13절 보면, 눈감긴 자가 나오는데 아람 군대가 나옵니다. 아람의 왕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숱한 시도를 합니다. 할 때마다 정보가 새어나가서 자기의 전략이 실패를 합니다. 왜 그런가? 스파이가 우리 진 중에 있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는 눈이 안 열려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복 중 하나가 이르기를 우리 중에 스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엘리사 선지자가 있는데, 12절에 보면,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왕이 은밀한 침실한 말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여 다 알게 합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그런 도사가 있습니까? 우선 이것부터 우리가 한번 점검해 보고 나갑시다. 세상에 내가 침실, 안방, 화장실에서. 나 혼자 마음속으로 하는 생각을 눈치채고 알아채는 그런 존재자가 있다면. 만약에 그런 분이 여러분의 친구로 있다면 반갑습니까? 무섭습니까? 그분을 대하기가 무섭습니까? 여러분 무섭지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예수를 무서워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사귀지 않으려고 하고 거절하며 배척하며 예수 없는 곳에 도망칩니다.
예수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가 예수가 무식쟁이가 아니라 너무 알아서 혹은 너무 똑똑해서 탈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의 심판 주인데 어떠합니까? 심판 주인데요! 우리는 친한 친구한데서 심판 받기 원하지 내 속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심판 받기가 얼마나 겁이 나는지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나 만나지 예수님 지금은 잠시 헤어지렵니다. 그러한 충동 같은 것이 쉴 사이 없이 우리 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눈이 감겼다는 것은 자기 생각만 하는 것 엘리사의 입장에서 엘리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여 나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아람 왕이나 우리 입장은 무엇인고 하면 세상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이렇게 오래 했는데 내 뜻 하나 안 이루어 줍니까?
왜 세상은 나를 이렇게 낙심을 시키고 나에게 실망을 줍니까? 왜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됩니까? 왜 나의 오랜 신앙 경륜을 무시하십니까? 우리는 항상 이런 쪽입니다. 그런데 교회 온지 5분밖에 안 된 사람은 하나님 내가 무엇을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찬송가도 못 찾고 성경도 잘 모르지만 교회 온지 5분된 자는 '하나님 교회신자로는 초보자인데 이 순간 죽는다면 무엇을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교회 온 자는 예수님께 붙으려고만 하고 오랜 된 사람은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고있고 또 떼어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너무나 현실에 익숙해 지다보니까 자신도 모르게 교회 안에서의 신앙과 교회 밖에서의 신앙이 이렇게 차별 나는 이중생활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아람 왕의 신하는 왕이 듣기에 싫어하지만 현실을 똑바로 지적합니다. 왕이여 당신이 왕실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엘리사여, 오 주여 제가 졌습니다.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을 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아무리 숨어서 해도 다 들통난다는 데도 분명히 이야기를 듣고도 어떻게 하냐하면 신하야 엘리사가 어디 사느냐 그곳에 가서 엘리사부터 처리하고 이스라엘을 치자라고 얘기합니다. 골칫거리부터 해결하고, 즉 엘리사를 처리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나를 다 아는 자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머지 일은 내 식대로 내방식대로 꾸려 나가면 된다는 말입니다.
자, 여기서 이러한 눈 감긴자 현실을 제대로 못 보는 자가 설쳐대는 이런 저런 모습을 한 곳으로 집약시켜서 화끈하게 보여 주는 사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와 버리니까 하나님 만나러 가겠다는 자가 멀쓱 해 져 버린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시골에 있는 친정어머니가 서울에 살고 있는 딸에게 '너희 집 어디냐 요즘 전화도 안하고 뭐하노?' '엄마 바빠서 그런데요 얼마 후에 내가 갈께요' 그런데 엄마가 시골에서 딸이 살고 있는 서울로 와 버립니다. 그런데 하도 엄마를 하도 오랜만에 만나니까 엄마가 아니랍니다.( 저가 만들었는 얘기인데 참 황당한 이야기죠?) '당신 엄마가 아니네 엄마는 지금 시골에 계시는데 약속에 의하면 내가 시골에 가기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시골에서 엄마랑 딸이 만나기로 되어 있으며 또 오시더라도 사전에 약속을 하고 와야지 불쑥 나타나면 이것은 엄마가 아니다고 합니다.
자 여러분, 이것 말이 안되지요? 눈이 감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하나님 찬양한다고 드럼치고 율동하고... 등등 온갖 찬양과 기도 철야를 합니다. 그런데 하늘을 쳐다보며 인간들이 행위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곁에서 어깨를 툭툭 칩니다. "너희들 무엇하고 있나? 나는 벌써 왔는데" '그럼 구약성경은 무엇입니까?' "내 그림자요 모형이며 나의 실체는 지금의 나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 경건한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데 하나님 본인께서는 이미 내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본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나를 이해 못하면 결국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거짓말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진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죄 때문에 아들이 대신 죽는 것과 죽음과 죽음의 만남입니다. 내 죽음 때문에 주님께서 죽으셨으며 이 진짜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분으로서 만의 하나님이 이해되어야지 다른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가상적인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찬양을 십일조를 우리의 전도를 봉사를 받으소서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네 것을 받으라 하지 말고 내 것이나 받아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 피나 받고 내 살이나 받아라. 이것이 새로운 언약이며 약속이다. 그러면 옛날 약속은요? 옛날 약속 안식일을 지키라 등은 그림자이고 허상이다. 실체가 오면 다 무너지게 되어 있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오지요. '누가 안식일 때문에 비난하지 마라' 그것은 십자가에 의해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란 것이 없습니다. 목사들이 주일 성수를 만들어 가지고 수요일은 안 오고 주일 오전만 오게 하고 수요예배는 예수님이 오시지 않고 천사를 보냅니까? 수요일은 시시하게 여겼습니까? 주일오후예배는 예배가 아닙니까? 주님께서 시간 맞추어서 교회에 들어오십니까? 11시59분59초에 말입니다. 주일 예배가 11시에 된 것은 미국 청교도들이 아침에 소의 젖 짜는 시간을 피해서 만든 시간입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무슨 주일 오전 11시에 주님도 천사도 모두 대기했다가 내려오십니까? 지금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예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모든 사랑을 받으면 그것이 움직이는 예배이고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눈이 열려 있어야 보일 수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전통에 익숙해 있어서 전통 그 자체에 현실관을 새롭게 만들어 낸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우리의 옆구리를 치면서 내가 너의 구주야 하고 속삭이면 그 속삭임에 우리는 애써 외면해 버리고 뭔가 내가 땀낸 행동을 해야 오늘도 내가 예배에 무엇을 했구나 하면 시원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은 옆구리 치는 정상적인 신앙이 없기 때문에 너무나 허전해서 무언가 채워야겠다는 자기 행위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서는 조용하게 일을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왜 못 믿습니까?
엘리사가 큰소리 쳤습니까? 엘리사는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주님도 마찬가지로 이 땅에 오신 그 자체가 계시의 끝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그것을 믿으면 부활이요 영생입니다. 끝입니다. 더 보태지 마세요 자기의 뜨거움을 보태지 말고 신앙경륜을 보태지 마세요. 교회 나온 지 5분된 자도 영생되도록 그냥 두세요. 그리고 그 영생이 오래된 자나 조금도 차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신앙의 주체는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실이 일어납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간단합니다. 뭐냐 하면 아람군대를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로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눈감긴 자는 자기 앞의 수많은 아람군대만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15절 아하 내 주여! 이 말은 절망이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었다! 이제는 어찌하오리까? 그리고 아람군대가 낮에 찾아 온 것이 아니라 14절에 보면 저희가 밤에 왔습니다. 밤은 어둡잖아요? 은폐하기 쉽잖아요. 숨기 쉽잖아요.
이 바보 같은 아람 왕은 침실에서 자기가 하는 이야기도 다 알고 계시다는데 엘리사가 밤이라고 모르겠습니까? 우리가 밤에 한 짓은 하나님께서 모르겠습니까? 귀를 만드신 분이 듣지 못하시며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못하겠습니까? 바르게 살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조심하자는 말이 아니고 지켜보고 계신 분이 있다는 이 현실을 우리가 왜 외면하십니까?
이것을 우리에게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켜보시는 자가 계시는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겁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를 지켜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뒤편에서 또 나를 지켜보는 주님을 우리는 염두에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람까지 보는 것은 눈이 감긴 자의 한계라면 사람 뒤에 계시는 이 땅에 오신 주님까지 아울러서 볼 수 있는 눈 그것이 바로 교회 온지 5분되어도 천당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 뿐 입니다. 지금 우리는 현실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로마서 8:3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지금 이 엘리사에게는 곤고와 환란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 보면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라 이런 것들이 사랑이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찾아 왔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 졌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눈감긴 자의 주특기입니다. 눈감긴 자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며 되겠습니까? 그렇게 살면 신앙이 아니지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 등이 생활의 어려움이 가정에 찾아 왔다고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 것은 눈이 감긴 상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아람군대를 가 보게 해서 했다. 하나님께서 해결 방법으로 아람군대를 물러가게 했습니까? 만약에 아람군대를 물러가게 했다면 그 사환은 또 다시 공포에 질려 있을 것입니다. 저 엘리사님 또 아람군대가 오면 어떻게 할까요? 하면서 말입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든지 안 오든지 상관없이 기쁘고, 상관없이 넉넉한 그러한 신앙이 될 때 그 사람은 교회 온지 5분이 되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기도했습니다. 16절에 보면,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우리와 함께 한 자가 많으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람군대가 많으니까 아람군대가 많은 것을 인정합니다. 예! 인생을 살면서 어려움이 즉 곤고와 핍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인정합니다. 동의합니다. 예수 믿고 살아가는데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주님의 사랑에서 안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근원적인 문제 해결을 하는데 우리를 포위한 그들을 오히려 천군 천사가 더욱 많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목사님 못 믿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요즘 올림픽이 한창 열리고 있는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 트랙에서 100m 달리기를 하는데 관중이 한 명도 없다 합시다. 썰렁하게 그렇게 경기를 하던가요? 아니지요. 십 만명 이상이 나방 날리는 시드니의 밤에 수많은 천군 천사 같은 이들이 관람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상을 뛰어 넘는 관람객들이 온 것입니다. 그때 선수들은 가슴을 졸이면서도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목사님 성경도 그런 이야기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 히브리서 12장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앞서서 가신 선배들이 스탠드에 앉아서 너희들 어떻게 달리는가 한번 볼까? 나도 너처럼 현실을 잘 몰라서 엄청 고생했단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달려온 증인들 보니까 히11장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노아 모세 그리고 목 베인 자 광야에서 수난을 받은 자 구약의 선지자들 사사들이었습니다. 그때 자기들은 혼자라고 여겼고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자가 자기 밖에 없는 줄 알았고 너무나 외로웠고 자기를 환대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고 자기만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느꼈었던 그런 일평생을 줄기차게 보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먼저 하늘나라 스탠드에 앉아서 지금 이 시간 2000년도 9월24일 지금 뛰고 있는 우리를 보고 힘내! 힘내! 박사교회 여러분 힘내시오. 환란? 환난이 모두가 아니야. 곤고? 핍박? 아무 것도 아니야. 주님의 사랑은 안 끊어져, 눈을 열어봐 너희들을 지켜보는 우리들이 있잖아 앞선 신앙의 선배들이 있잖아 이렇게 히브리서 12장에서 우리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목사님 바빠서. 돈 버느라 못 읽었는데요. 그러면 집에 가셔서 한번 읽어보세요. 바빠서 성경 못 보겠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본인이 손해인 것입니다. 새로운 현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여러분들이 버리면 안 됩니다. 현실은 힘들지만 성경 속에는 또 하나의 현실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시면, '원 세상에 내가 이렇게 신앙이 없었구나. 내가 믿은 경력만 자랑하고 말이야. 그래 지금 내가 예수를 믿은 지 5분밖에 안 되는 내라고 여기자. 그리고 저 스탠드에 앉아 있는 선배를 생각하자. 비록 나는 이토록 외롭지만….'
왜 우리는 엘리사의 사환처럼 이 수준에 머물기를 좋아하십니까? 그리고 현실을 보고 두려워하고 겁내고 바보 같은 생활을 청산합시다. 작심합시다. 우리는 비록 천사를 못 본다해도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다 알아서 마귀를 물리치시고 신앙을 인도해 주시니까 주님 믿고 오늘밤에 죽더라도 당당하게 천당 갈 수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 태어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생활 못한 것 남 핑계대지 말고 신앙생활 못한 것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말고 우리 같이 당하는 이 시련도 선배들도 똑 같이 당했다는 것을 왜 우리는 모릅니까? 이 시간을 통해서 내가 당하는 어려운 시련 외로움과 고독은 천당에 가는 모든 이가 다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가 안 된다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주님과 함께 있기를 세상의 어떤 재물보다도 더 좋아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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