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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왕하 6:20-23 / 엘리사와 이스라엘 왕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열왕기하

왕하 6:20-23 / 엘리사와 이스라엘 왕

정인순 2014. 2. 6. 16:31

 

 

이근호

 

5. 엘리사와 이스라엘 왕 (왕하 6:20-23)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저희의 눈을 여시매 저희가 보니 자기가 사마리아 가운데 있더라 이스라엘 왕이 저희를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왕이 위하여 식물을 많이 베풀고 저희가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저희가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왕하 6:20-23) 

 

  『우리의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천국 가서도 부를 노래를 주 앞에 부를 노래를 미리 앞 당겨 서 불렀습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도 천국생활을 시작 할 수 있도록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권고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전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전쟁의 결과에 보면 사로잡은 자, 사로잡히다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이긴 자가 패배한자를 사로잡습니다. 이긴 자가 패배한자를 사로잡고 백성들 앞에 국민들 앞에 끌고 올 때 국민들이 환호성을 보내지요. 그리고 사로잡고 온 장군을 향하여 박수를 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장군이 있는 한 그 백성들은 자신의 적들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로잡았기 때문에 공포를 느끼지 아니하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겁내지 않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로잡는 것이 핵심이 되는데, 그 이유는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누구를 사로잡았다고 우리에게 통보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사로잡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장군이 되어 가지고 또는 영적인 전쟁을 벌려 가지고 무엇을 사로잡았다는데, 도대체 예수님이 사로잡은 것은 무엇이냐? 예수님이 사로잡은 것은 바로 마귀를 사로잡았습니다. 마귀를 사로잡아서 '이 마귀는 나에게 잡혔다' 라는 기쁜 소식을 자기 백성에게 빨리 알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러면 마귀를 사로 잡게되면 사로잡았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무슨 가치를 부여하며, 현실적으로는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히브리서 2장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2장 16절에 보면,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마귀의 종노릇을 하는데 아브라함의 자녀들한테는 이 예수님께서 마귀를 사로잡았다 라는 소식을 전했더니만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야! 그러면 이 세상에 겁내지 않고 한평생 살게 되었네요' 하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귀를 겁내지 않게 되고 기뻐함을 받도록 주님께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해서 마귀한테 꼼짝못한 우리들에게 그 동안의 대장, 세상을 출발하는 악한 신을 이 예수님께서 마귀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사로잡았다는 이 사실을 자기 자녀들에게 공포를 하여 주니까 자녀들이 조마조마하며 살다가 '아 우리는 마음놓고 살 수 있게 되었네요. 우리는 안심 푹 놓고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게 되었네요, 정말로 주님만 찬양합니다. 주님만 믿습니다.' 라는 이러한 오고가는 고백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그 동안 우리들을 얼마나 괴롭혔습니까? 로마서 8장 30절에, 누가 너를 송사 하리요 누가 너를 정죄 하리요 라는 말이 나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욥이 경건하게 살고 믿음대로 사니까 그것이 시기가 나서 악마가 하나님께 나갑니다. '여호와여 저가 욥을 한번 혼내 줄까요?' 하나님께서는 '잘 안 넘어 갈텐데.'  '그래도 내가 그의 재산과 자식을 빼앗아버리면 하나님을 욕하지 않을까요?' 그리하여 나중에는 욥의 건강까지도 위협받게 되었지요.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이렇게 하나님과 악마가 내기를 합니다. 무슨 내기를 하냐하면 욥의 믿음을 떨어뜨릴 수 있을까, 없을까 를 가지고서 내기를 합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께서 붙드셨기에 악마한테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욥에게 악마가 공격했던 것이 딱 한가지 있었는데 '욥 너는 죄인이다. 너는 한평생 고생한 것은 너의 죄 값이다 죄 값으로 나왔다'였으며 욥은 '아니다 나는 의인이다' 라는 그 싸움이었습니다.


  우리의 양심을 긁어 놓는 것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우리 양심에 찾아와서 '넌 애쓰고 애써도 너는 하나님 앞에서 복 받을 수 있는 그런 요소가 없다'는 절망을 이르게 합니다. 늘 고소하니까 마치 하나님 앞에서 마귀가 욥을 고소하듯이 욥의 친구들이 욥을 고소하듯이 우리가 어떤 사업이 안될 때나 가정이 잘 안될 때에 인생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제일 먼저 우리는 내게 무슨 문제가 있나, 죄를 짓지는 않았나 하는 점검을 하지요.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고 극복하려는고 하면, 어리석게도 우리는 쉽게 마귀가 파놓은 함정에 빠집니다, 어떻게요? 교회충성하고 목사 잘 섬기고 성경 더 보고 기도 더 많이 하면 마귀가 놀래서 도망갈 줄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자기 이웃에 봉사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하면 마귀가 '아이구 너한테는 못 이기겠다' 이렇게 말입니다. 목회성공해서 많이 모이면 그것이 천국 가는 직행표라고 생각하는 것 등, 이런 것들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선행을 가지고 마귀를 쫓아내고자 하는 노력은 우리가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에게서 잘 볼 수 있듯이, 그리고 온 인류가 국가적인 단위로 심지어 가정적으로 마을 단위로 1년에 몇 차례씩 보이지 않는 신에게 제사하는 종교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독교나 불교나 유교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유교라는 것은 공자 말처럼 착한 일 해서 마귀를 쫓아보려는 것이고 불교라는 것은 부처 말대로 죽는 것은 없다 내가 스스로 자립하면 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다 이런 의식을 심어 주려고 하는 것이 불교 마귀를 쫓아내는 방법인 것입니다.


  기독교 마귀의 역사는 교회 잘 섬기고 교회 봉사하고 주님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이겨보겠다는 이런 노력 이것이 기독교 마귀의 특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내가 기독교를 불교를 유교를 가지는가 아니면 아무 종교도 갖지 않고 나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가? 라고 생각하든 어떤 식으로 노력한들 마귀가 주는 공포를 여러분들이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신학을 많이 하고 목사가 되고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무슨 인생이 주는 두려움과 절망이 주는 수치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못 벗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예수님을 기쁜 소식이다, 기쁜 소식이다, 기쁜 소식이다라고 자꾸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쁜 소식이라고 들여다보니 별 소식도 아닌데 기쁜 소식이라 합니다.


  이것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귀가 있는데.... 이 귀 가지고 들어보니까 출세한다는 소식도 아니고 병 낫는다는 소식도 아니고 이 땅에서 성공시켜주신다는 소식도 아니고 가정에 행복을 준다는 소식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기뻐하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마귀를 사로잡았노라 내가 율법을 이겼노라 다시는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라 기쁘지?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 짓는 것은 내 선행으로서 하나님께 봉사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런 잘못된 신앙관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라는 인간자체가 여기서 영적인 싸움, 하나님과 악마의 싸움에서 이미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날 때부터 악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악마에 사로잡힌 채에서 악마를 극복해 보려고 애쓸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즉 이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말고 하늘에서 오신 어떤 분이 하신 일, 어떤 분이 승리를 일구어 내신일 그것을 우리는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할텐데 우리는 밖에서 일구어 낸 업적에는 감탄도 못하고 관심이 없고  내 힘으로 이 난관과 절망을 헤쳐 나가려고 하니까 우리는 점점 더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싸움이 나오는데, 눈이 열렸는가? 감겼는가? 그 싸움입니다. 눈이 열린 채로 보는 현실과 눈이 감긴 채로 보는 현실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데 나사로가 살고 있고 부자가 살고 있는 것도 알고 있지요. 둘 다 죽었지요. 죽고 난 뒤에 일은 여러분들은 궁금합니까?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천국으로 갔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벌렸던 부자도 죽었는데 죽고 난 뒤에 물 한 방울 생산되지 않는 정말로 목이 마른 뜨거운 지옥 불에 갔습니다. 지옥에 가서 부자는 물 한 방울이 없어서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 나사로를 한번만 더 보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물 한 방울이 그립습니다. 나사로를 보내서 손가락에다가 물 한 방울 찍어 보내 주세요' 아브라함의 말이, 다시는 나사로는 지옥에 못 간다. 한번 천국에 가면 다시는 지옥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해줍니다.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 가보는 그런 신세라면 이 세상에서 무슨 수모들 감당 못하겠습니까? 여러분, 부자는 말하기를, 내 인생은 이미 이렇게 되었지만 지옥 가는 것도 모르고 자기 인생이 지옥으로 한 발자국씩 가까이 다가서는 줄로 모르고 돌아다니는 동생들은 지옥에 안 오게 나사로를 다시 세상에 보내서 나사로 입에서 나사로 자신의 천국이야기와 형의 지옥에서 고생하는 이야기를 해 주어서 동생들이 귀 담다 듣고 이제는 형을 본 받지 말고 동생들은 천국 갈 수 있도록 조치를 좀 취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때 그것도 안 된다고 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이야기해도 그 동생들은 안 듣는다. 지금 성경에서 나오는 현실을 안 믿는 자들이 지금 죽은 자 나사로가 살아나서 이야기해도 절대로 믿지 않게 되어 있다. 이것이 인생이다......'


  여러분, 우리가 항상 사람을 볼 때나 세상을 볼 때에 불붙는 지옥 불을 깔고 인생을 보고 세상을 보고 산을 보고 나무를 보시기 바랍니다. 나무 한 그루를 보더라도 지옥 불을 깔아놓고 보시고 바다를 보더라도 바다 배경만 보지 말고 지옥 불을 깔아 놓고 배를 띄어놓고 보시고.... 그렇게 보신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을 주느냐하면 예수님께서 마귀를 사로잡았다 라는 사실이 그제야 기쁜 소식으로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사로잡았다 누가 너희를 정죄하랴 누가 너희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를 죄 있다고 공갈 협박하리요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하더라도 예수님이 사로잡은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지옥의 앞잡이 마귀를 우리 대장이신 예수님이 사로잡아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예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천국가게 했다는 이 사실보다 더 중대한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축복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사로잡았기에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이제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 되게 되었다는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사로잡는데 있습니다. 사로잡았다는 말은 마귀가 활동해도 어디까지나 예수님 허락 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내에서만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마귀한테 맡겼지만 욥의 생명은 네가 손 못 댄다는 어느 지정된 범위를 허가 후에 사탄이 욥을 시험했지 욥에게 무한정 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욥은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택한 자라는 이것만은 확고하게 유지가 될 것이다. 내 인생에서 어떤 변화나 어떤 사태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마귀를 사로잡았다는 것, 정죄함이 없다는 이 사실만큼은 확고하게 가져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기쁜 소식이 기쁜 소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오늘 본문인 20절 봅시다.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저희의 눈을 여시매 저희가 보니 자기가 사마리아 가운데 있더라  21절, 이스라엘 왕이 저희를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20절과 21절을 비교해 보면 아주 우스운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 누가 사로잡았습니까? 엘리사가 사로잡았지요. 이것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스라엘 왕이 제대로 된 자라면 '엘리사여 알아서 해주십시오' 이렇게 되어야 할텐데, 새삼스럽게 무장해제 된 사로잡혀 와서 무기도 없고 또 졸지에 눈이 감겼다가 이제 눈이 열리고 풀이 죽어 잡혀 있는 그들을 보자 이스라엘 왕은 갑자기 인간적인 자신감이 생겼나보지요. '엘리사여 이제는 제가 치겠습니다. 제가 치리이까?' 이렇게 나서는 겁니다. 자... 여기서 제가 하고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철없고 시근없고 눈이 닫힌 채 있는 이스라엘 왕, 사실은 왕이 지금 새롭게 전쟁을 하려고 하고있습니다.


  전쟁이 이미 엘리사에 의해 끝이나버렸는데 자기가 왜 새롭게 전쟁을 하려고 합니까?자기가 승리자로 나서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아직도 의식적으로 아람에게  사로잡혀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아람을 너무 의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세상의 변화에 너무 의식한다는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악마를 사로잡았다는 현실을 그냥 받아드리면 되는데 새삼스럽게 자기가 칼을 빼고 설치면서 마귀야 나오너라 내 칼을 받아라 지구는 내가 지킨다며 온갖 모양으로 설쳐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남들 보면 믿음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믿음이 없어서 믿음 없는 것이 들킬까봐 믿음 있는 티를 내는 것입니다.


  사탄을 이겨야 구원받습니까? 칼을 들고 설치는 것.... 주님께서는 내가 다 했는데 네가 왜 그러냐고 하십니다. "제가 얼마나 용감한 왕인지 아람 왕아 나오너라.... 사로 잡아주니까 이제는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이제는 이길 만 하거든요. 주여 성경 말씀가운데 15개중 오늘 10개를 지켰습니다. 저 대단하지요?" 이런 사람은 아직도 눈이 감겼으며 아직도 잠자고 있습니다. 눈이 안 열려있어요.


  이런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기쁜 소식을, 예수님이 우리를 정죄 하던 마귀를 사로잡았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고 이런 사람의 기쁜 소식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수 십 명을 전도했다 내가 기도를 기록 세웠다 내가 성경 읽기로 일주일만에 한독 떼었다. 이것가지고 자기 생에 보람을 가지고 기쁨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인생에 승리감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새삼스럽게 승리할 필요가 있을까요? 새삼스럽게 승리할 필요가 있다는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하면 예수 승리한 것 이것 나는 못 믿겠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승리자라는 또 다른 현실을 시나리오로 만들지 마세요. 자기가 중심이 되고 영웅이 되는 새로운 작품을 또 다시 만들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기쁜 소식이 두 개가 되어 버립니다. 주께서 마귀를 이긴 소식이 하나있고 내가 멋있게 목회 했다 멋있게 인생승리 했다 훌륭한 종으로 등장했다 라는 시나리오를 각본 한 새로운 기쁜 소식이 또 있는 것입니다. 그 둘 중에 어느 것을 기쁜 소식으로 얻겠습니까?


  성경에 보니까, 사람이 두 주인을 못 섬긴다. 하나를 사랑하면 하나를 미워하게 된다. 사람이 자의식이 강하면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어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이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합당치 않다고 했을 때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아멘 아멘 아마 한 것으로 얼굴에 비쳤거든요. 몇몇은 노멘 했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 내 중심에서 기쁨을 얻고자 했는데 그것이 안될 때 인간은 죽을 때까지 누구하고 싸우느냐하면 하나님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와서도 싸우고 목사 되고 난 뒤에도. 하나님과 치열한 싸우움을 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내가 하는 일 안도와 주실 거예요?" 왜? 하나님이 훌륭한가 목사인 내가 훌륭한가를 죽을 때까지 이 싸움하고 있습니다. '엘리사여 엘리사여 이제는 제가 칠게요. 내가!' 정말로 기가 막힙니다. 이제 저 아람군대를 내가 치겠습니다. 엘리사야 너만 주의 종이냐? 나도 주의 종이다! 하는 식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그럼 누구를 의지합니까? 신앙이란 주님께서 하신 일에만, 공로를 전적으로 의지하지요. 바로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것을 못 믿으면 나중에 부자 꼴이 됩니다. 아브라함보고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어 동생을 구원해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지금 성경보고 안 믿는 자는 나사로가 가도 그들은 안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런 자들이 아닙니까? 다시 한번 봅시다 . 지금 이스라엘 왕이 철없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엘리사여 제 손에서 지금 제가 치겠습니다. 엘리사가 무엇을 했는지 엘리사가 어떤 일을 했는지 그 엘리사의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왜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새로 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 내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예수 당신에게만 당신의 한 일이 기쁜 소식이지 나에게는 하나도 기쁜 소식이 아니다라는 말이죠.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성공해야 따로 나 만의 기쁜 소식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게 무슨 신앙입니까! 자아실현이지…


   나는 내 인생에 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내 힘으로 극복해야겠다 내 힘으로 내가 잘난 놈 되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내가 인기 있는 목사가 되어서 나고 존경받는 목사가 되어 가지고 그래가지고 내 인생을 나도 보람있게 한번 살아보겠다. 남들이 보란 듯이 한번 살아보련다. 내 가문이 어떤 집안인데 가정 교육이 잘 되었다는 것을 남들에게 한번 과시해 보며 살아 보련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의지하는 것 아닙니까?


  성경을 볼 때에 지옥 불이 벌겋게 타오르는 유황불을 배경으로 보시라고 아까 제가 말씀 드렸지요?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 사람이 지옥 갈 사람인지 천국 갈 사람인지 유황불을 깔고 한번 보세요. 당신 누구 믿습니까 무엇이 기쁩니까? 나는 예수님께서 다시는 마귀에 의해 정죄 함이 없다 다시는 죄인이 없다 마귀를 사로잡은 그 기쁨으로 삽니다. 나는 주의 은혜로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고백 바로 이것이 거지 나사로와 한가족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10년 20년 믿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교회 나온 것이 무슨 천당을 보내주며 성경 많이 아는 것이 무슨 사람들을 천국 보낼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아무리 목회자가 외쳐도 자기의 기쁜 소식은 자기가 성공하는 것이 되는데 그게 무엇 신앙이 되겠습니까? 남 이야기 할 것 없이 우리자신들이 신기루 같은 출세욕에 빠진 것을 다시 한번 회개하오니 이 신기루에서 벗어나고 환상에서 벗어나서 눈을 활짝 떠서 천국이 현실이며 지옥이 현실임을 남한테 자랑스럽게 낱낱이 자랑스럽게 알릴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