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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은주
대전140123-행21장17절(예루살렘의 율법)
57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21장17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오늘 내용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거든요.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것은 우리가 대전에 도착했다. 남들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그게 아니에요. 예루살렘이라는 것이 보통 장소가 아닙니다. 모든 시간이 나오는 꿈을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특수한 지점, 특수한 공간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이야기에요. 예루살렘 바깥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어디가면 구원받습니까? 라고 물으면 뉴욕에 가거라. 멜버른에 가거라. 런던에 가거라. 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그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가거라. 그럼 예루살렘이 몇 번지에요? 요새는 또 도로명이니까. 무슨 로에 몇 번지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그 때는 이제 몇 번지가 아니고 죽는 사건, 메시아가 죽는 사건을 만나야 되겠지요.
여기에서 난해한 이야기를 미리 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 메시아를 만난다. 중보자를 만난다. 할 때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하늘에서 오신 어떤 분을 만납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을 만난다할 때, 어떤 교회에서 예수를 만난다할 때, 처음에 만날 때는 나도 살아있고, 살아있는 것이 또 살아있는 분을 만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촌에 가던지 통영에 가면, 수산시장이 있지요. 대구에 가면 죽도시장이 있지요. 그들은 살아있는 인간이 살아있는 활어를 만나잖아요. 살아있어야 믿을까 말까 골라잡을 수 있는 선택권이 유일하게 계속 살아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 만나는 것은 살아있는 내가 그 분을 산체로 만나겠다고 하는 이것은 안돼요.
뭐냐 하면, 그 분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죽어갑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만나지 않으면 만날 수 없어요. 자기 십자가라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유가 예수님 따라 죽어야 되는데 죽는 방법을 몰라서 그래요. 사람은 자기가 죽어서 가고 싶은데 죽는 방법을 몰라요. 기껏 죽는 게 자살인데, 자살은 죽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죽어줘야 하나님과 합세가 되는데, 언약은 예수님만 관련되어 있지 우리는 관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살해도 못 만나요. 가룟유다 같은 경우도 자살해도 못 만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살아있는 자기를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죽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자기를 없애는 방법밖에 없어요. 저 분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라 하고 자기 자신을 대체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분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다. 고린도후서5장14절에 보면, 한 사람이 죽음으로서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라. 제가 철학이나 과학책을 보면서 이걸 아는 철학자나 이걸 아는 과학자들이 없어요.
그 사람들은 자기가 아주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하고 대전강의도 해봤지만 그 많은 똑똑한 사람들 중에서 예수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내가 죽었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신을 만날까, 그것들이 우리가 공부했던 대전에 나왔던 94명의 신학자들의 특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이나 전부 다 자기가 살았다고 여기거든요. 왜냐 하면, 언약밖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은 그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어떤 인간도 만나러갔다가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만나러 갔는데 결국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하나님과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그러한 사건이 있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데요. 쉽게 해봅시다. ‘이스라엘은 중첩돼 있다’ 요걸 생각하면 돼요. 이스라엘은 중첩돼 있으니까 이스라엘을 하나의 시루떡으로 봅시다. 시루떡을 옆에서 보면 색깔로 층이 나있지요. 밑에는 백지입니다. 갑자기 시루떡 먹고 싶네. 우리는 빨간 팥 덩어리. 층으로 분명히 구분되지요. 잘라보면 층으로 되어 있지요. 위에서 보면 전부다 시커먼 팥 전체인데 잘라보면 떡 위에 팥이 나란히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같이 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언약 자체가 언약이 층을 이루는데 언약은 뭐냐 하면, 의인과 죄인,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같이 뭉쳐져 있다고 했지요. 이걸 박스에 담겨있다고 했지요. 언약 할 때. 대전강의 할 때 기억나시지요. 박스를 열어보면 거기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같이 들어있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인데 튀어나올 때 어떻습니까? 같이 붙들고 한참 한판 붙는 상태에서 튀어나오지요. 그걸 그대로 받아서 언약으로 포장을 해보면 그게 언약되는 겁니다.
노아방주도 마찬가지에요. 노아방주에 깨끗한 짐승만 들어가는 게 아니고 더러운 짐승도 같이 들어가지요. 나와서 누가 희생제물 됩니까? 더러운 게 아니고 깨끗한 것을 우리는 죽여 버립니다. 죽는 쪽이 깨끗한 쪽이고, 안 죽는 쪽이 더러운 쪽이에요. 야곱언약에서 아무 이유 없이 계시 받은 요셉이 고생은 딥다 하고 혜택은 요셉을 죽여 버린 형제들이 혜택을 받고 그래요.
요 근래 케이블의 언뜻 본 이런 드라마가 있어요. ‘응답하라 1994’가 있어요. 거기에 보니까 남성미가 풀풀 넘치는 도희라는 여자배우가 같이 하숙하는 자기 남자한테 목을 확 쥐고 몰아세우는 게 있어요. 죽으라고 목 쥐는 그런 보이시한 남성적인 그런 게 있는데 그걸 보면서 느낀 점이 뭐냐 하면, 뱀의 후손들이 여자의 후손을 목을 확 졸라가지고 역사 속에서 죽음으로 없애버리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목을 졸라서 죽이고 사두개인도 마찬가지로 죽인 것처럼 죽어나가는 쪽이 그게 언약에 의해서 희생되는 쪽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닮았고, 저 쪽은 그것을 가해하는 그런 악마의 모습을 닮은 자들이 죄인으로 되는 겁니다. 그게 나란히 가거든요. 요게 언약이 있는 지리적 바탕이 예루살렘이에요.
그래서 그 다음 이야기는 뭐냐 하면, 율법이야기, 할례이야기 나오거든요. 예루살렘에 사도바울이 갔더니만 여기서 신앙논쟁이 벌어져요. 율법이 아직도 유효 하느냐, 그 문제입니다. 율법이 아직도 유효 하느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갈라디아서2장16절에서 찾아볼게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요 대목 있잖아요.
사도바울이 이미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에 갑니다. 누굴 만나느냐, 야고보를 만나요. 논쟁이 벌어집니다. 논쟁이 벌어질 때, 여기서 상세하게 사도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십자가 사건이 있은 후에 율법은 어떤 취지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느냐, 라는 것에서는 사도행전에서는 상세하게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데 갈라디아서2장16절에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난 게 아니란 말이죠.
이 이야기를 딱 들어버리면 그 당시 우리가 야고보라고 해봅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율법을 왜 줬는데? 율법 내용이 아주 고상하고 거룩하거든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십계명도 율법이지만 잠언서 같은 거 보세요. 하나, 하나가 탄복할만한 내용들입니다. 모든 너희의 행사를 주께 맡기라 주께서 이루시리라, 이것은 뭐 대 심방 가면 대히트 칠 내용들이 많아요. 너희 일을 맡기면 주께서 때가되면 이루시리라, 이 얼마나 좋은 거예요. 잠언서3장16절 같은 경우에는 오른 쪽에는 장수가 있고, 왼쪽에는 부귀가 있느니라. 완전히 대 심방용 아닙니까. 3월 달에 벌이는.
오래살고 돈 벌고 “야, 하나님의 말씀에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다.” 착하게 살아서 요걸 빼먹자.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요거 복 주시겠지. 아이고, 요런 게 다 있었구나! 절에 갈 필요 없네. 교회 와서 오래 살고 부자 되는 비법 여기 있구나! 다 있다 말이죠. 그런데 다 있으면 뭐합니까? 하박국3장 17절에 보면,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으며, 제가 주일 때 그런 설교했거든요.
만약에 신랑 신부가 농사 안 짓는 부부라서 그렇지 만약 촌에 가서 소 키우는 부부 같으면 그 앞에서 주례사 하는데 외양간에 소가 없으며 광우병으로 다 탈나서 소가 도살당했으며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그게 신혼부부에게 할 소리냐 말이죠. 분명히 왼손에 장수 있고 오른손에 부가 있다 해놓고 왜 하나님이 말을 바꾸느냐 그 말입니다.
성경해석은 성경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돼요. 성경을 자꾸 빼먹을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말이지요. 빼먹을 생각하지 말고 성경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돼요. 뛰어들어서 그 흐름을 따라가야 돼요. 강물이 흐르거든요. 언약적인 강물이 흐르는데, 뛰어들어서 해석해야 되는데 목사들이 그걸 안 해주지요. 더 흘러가보면 이미 너희는 이 땅에서 죽었고, 이제는 소출이고 뭐고 아예 죽으래, 이미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복을 어떻게 챙깁니까?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 소리 하는 게 헛 거예요. 전부 다 헛소리에요.
도대체 우리보고 이미 죽었데요.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느니라. 죽은 인간이 세상에서 뭘 더 원해? 이런 식으로 나오더란 말이죠. 그 다음에 더 나아가보니까 로마서 14장 8절에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아, 그렇구나! 신약에서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내가 여기 있고 무엇을 성경에서 챙기느냐, 장수와 부귀를 어떻게 챙기느냐가 아니라 내 자리는 아예 의가 안 나온다고 이미 확인된 자리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서는 천국에 못 가거든요. 그러니 내 자리를 주의 자리로 바꾸어버리는 겁니다.
주의 자리가 바꾸게 되면, 그동안 내가 원했던 거 말고 주님이 원했던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주님이 원했던 것. 주님의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주는 주되 이게 십자가의 희생, 피 흘림에서 온 복분자요, 헛개요, 홍차요. 모든 것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받아들이란 말이죠. 부모를 공경하라, 또는 자식을 주안에서 기르라, 그걸 그냥 하지 말고 내 자식이 아니고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나는 부모가 아니고 주 안에서의 부모고,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고 주 안에서 주께서 주신 자식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요번 수련회하면서 마음속으로 적절한 예라고 생각된 것이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끼리 주차논쟁 하는 거, 실컷 죄인이라 해놓고는 “이 자리에 대지 마세요.” “왜?” 상대방으로 하여금 주님 믿도록 해야지 나를 이용하도록 해서는 안 되잖아요. 착한 며느리 이용하도록 동서들이 이용하도록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 말이죠. 예수 믿는다고 맞먹고 그렇게 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거든요. 주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가를 알아듣도록 우리가 아주 무섭게 아주 매섭게 달려들어 낑하고 물어줘야 된다니까요.
그것처럼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나란히 가게 될 때 율법을 준 이유가, 율법에 달려들게 되면 인간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율법 지켜서, 율법 지킨 나의 의가 나로 구원 받겠다 하는 시도가 나오는 거예요. 여기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뭐냐 하면, 개인구원은 없는 거예요. 요게 굉장히 어렵고도 중요한 겁니다.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개인이 율법 줘서 구원받는다든지 개인적으로 율법보다 십자가로 구원받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단체구원이에요.
단체구원이기 때문에 율법을 단체구원 입장에서 율법을 줬을 때는 나만 죄인이 아니고 다 같이 죄인이고, 나만 죽은 자아니고 다 같이 죽은 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을 통해서 나는 죄인이다가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죄인도 맞지만, 율법을 통해서 어떤 인간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게 율법이 주신 혜택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알게 되면 세상에 겁날 인간이 아무도 없어요. 왜? 다 같이 죄인이기 때문에. 다 같이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시체 앞에 겁을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거든요. 죽은 놈이 벌떡 일어나서 귀신 잡아먹자 내 다리 내놔라! 이러면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죽은 돌은 겁 안내면서 죽은 시체를 겁내는 이유가 혹시나 살아날까 싶어서 그러는데. 일단 죽었으면 죽은 값밖에는 못해요.
그래서 율법에 의하면, 선악과에 의하면, 죽은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선악논리로 우리를 주시하고 우리를 평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죽었다는 증거에요. 선악논리로. “니가 이렇게 악한데 니가 천국 가? 말도 안 돼!” 요게 아직도 율법아래 저주아래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겁낼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그걸 보고 즐기세요. 나도 그랬었었지. 나도 그렇게 살았었었지...십일조 안내면 저주받는다. 라고 협박할 때 나도 옛날에 저런 식으로 마귀한테 사로잡혀 살았던 적이 있었어요.
십자가를 모독하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율법 앞에서 겁을 내는 방법이 가장 최고의 모독하는 방법입니다. 요번에 수련회할 때 교재 있지요. 그 교재 내용에 그런 게 있어요. 내가 자기를 스스로 부인한다고 자기가 교도소를 만들어 놓고 자기가 갇혀서 스스로 고생합니다. 하다가 재미없으면 더 혹독하게 나를 힘들게 만든 교도소를 내가 일부러 만들어 놓고 스스로 거기에 갇힙니다. 그러니 불교의 도 닦는 중이나 소위 천주교의 도 닦는 수녀들이나 수사들, 기독교 가운데 성화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 교도소를 지가 만들어 놓고 지가 스스로 자기 부인에 장치를 무대 연극 장치를 자기가 만들어요.
그런데 성경은 뭐냐 하면, 누가 율법을 가지고 너희를 쏘개 하더냐, 너희는 자유라 했거든요. 고린도전서15장에 보면, 율법에 쏘는 것은 사망이요, 우리는 사망에서 이미 벗어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하는 것은 진정 너희가 자유를 아느냐를 보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율법의 밀림 속에 엉겅퀴 속에 우리를 그냥 집어던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순간, 순간 율법에 의해서 야, 저주 받겠다. 벌 받겠다. 라고 하면서 아~ 맞아! 이것이 바로 내가 옛날 잘못 생각했던 것을 또 다시 내 몸이 기억하니까 반복해서 내가 또 그걸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정말 좋은 말씀인데요, 그걸 자꾸 잊어버려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해서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너라는 존재는 니가 율법 지켜서 현재 니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졌기 때문에 지금 너라는 새로운 피조물이 만들어졌다. 그러니 너의 원천을 율법 지킨 너로 돌아가지 말고 십자가 모습이 바로 거기서 너의 바탕이 나온 거란 말이죠.
쉽게 말해서 엄마를 알아보란 말이죠. 엉뚱한 엄마를 엄마라고 하지 말고 그동안 익숙한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말고 엄마는 하늘에 있다는 말이죠. 지금 우리 엄마가 하늘에 있다는 말이죠. 십자가 지시고 하늘에 계신분이 엄마란 말입니다. 엄마를 엄마라고 불러야지 엄마도 아닌 걸 가지고 나를 낳게 하지 않은 율법을 가지고 엄마라고 부르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진짜 엄마가 섭섭지요. 참 섭섭해요. 오늘 아침에 가족문제에 대해서 상담하는 게 있었는데 문제가 뭔가 하면, 남편이 우연히 남편 무릎에 자기 말고 다른 여자를 남편 무릎에 앉은 걸 사진으로 해서 그걸 본부인에게 발각 당했어요. 그 때부터 부인이 완전히 뿔따구가 난 거예요. 왜 그 자리에 남의 여자 엉덩이를 놓느냐, 그게 발단이 된 겁니다. 그래서 남자가 하는 말이 여자가 아파서 잠시 자기 무릎을 빌려줬다는 거예요.
왜 우리는 율법에다가, 주님의 십자가에 얹어야 될 엉덩이를 왜 우리가 율법에다가 얹습니까? 누가 화내겠어요?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화내는 거예요. 복분자도 십자가에서 나왔는데 우리는 우리가 착해서 복분자 마셨다고 자꾸 율법에다가 우리 자신을 거기다가 걸터앉으니 주님이 얼마나 화나겠습니까?
17절에 봅시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게 되는 것은 이건 뭐에 대한 모독이라 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죄짓는 자로 만드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의인이에요? 죄인이에요? 의인이지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은 참 일을 잘하셨거든요. 그런데 그런 예수님 일 참 못했네. 엉뚱한 짓했네. 라고 하는 경우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함으로서 주님을 죄 지은 자로 만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에다가 우리의 엉덩이를 얹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또다시 율법으로 가가지고 의롭게 되려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헛되이 만드는 겁니다.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하고, 율법 지키고, 절기 지키고, 주일성수하고, 이런 것으로 만약에 우리가 저주 안 받고 복 받는 근거가 된다면, 이것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4장에서 하는 말이 내가 전한 모든 것을 ‘아, 헛방이구나! 내가 하는 짓을 도대체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못 알아먹는 것이구나!’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갈라디아서3장3절에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쳤구나.
어떻게 성령께서 새사람 만드는데 어떻게 하는 행세는 마치 성령에서 안 된 것처럼 옛날 육신으로서 율법 지키는 그 행세를 왜 그저 전철을 또 밟느냐, 아주 탄식을 하지요. 그래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십자가외에 다른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마세요. 라고 사도바울이 설교를 하는 겁니다. 이제 그렇게 해놓고 사도행전을 돌아가 봅시다.
이 야고보하고 싸울 때 21~24절에,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너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이리 되어있지요. 이거 누가 이야기합니까?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포위를 하는 거죠. 이걸 가지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적 기독교인‘이라 하는 겁니다. 유대적 기독교인.
이 유대적 기독교인을 겨냥해서 한 복음이 뭐냐, 야고보서에요. 이 사람들은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이 사람들은 하나만 생각해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신 그 분이 바로 옛날 구약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요. 사도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부활시킨 그 분이 바로 구약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반면에 야고보는 구약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켰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말이 똑같이 보이잖아요. 뭔가 순서는 바뀐 거 같은데 똑같이 보이지요.
요번에 강의하면서도 그런 게 하나 나왔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거 하고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했다. 하고 말은 같은 말로 보이지만, 한 쪽은 하나님이 창조했으면 우리가 천당 가는 것도 책임져야지 지옥은 왜 만들어놨습니까? 하는 대들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겁니다. “아니, 만들어놨으면 책임지라고! 왜? 가룟유다는 지옥 보냅니까? 그건 말이 안 되지. 아니 지옥 보낼 거 같으면 가룟유다는 왜 만들어놨습니까?” 지옥을 만들어놓고 지옥에다가 사람 집어넣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즐거워하고 그 하나님의 성품이 너무나 엽기적이고 변태적이잖아요.
자식새끼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데 지 새끼 거기 가서 고생해놓고 그게 즐거워요? 그게? 그게 그렇게 즐거워요? 만약에 우리부모가 예수 안 믿어 지옥가보세요. 우리가 즐겁겠습니까? 괴롭지요. 그래서 요번 대전에서 강의했지요. 파하나 해서 불교이야기 했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자꾸 끄집어내는 이유가 우리가 믿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계속 가짜일 것이라고 시도해서 계속 주지하고 깎아내는 겁니다. “믿습니다.” 하는 걸 “믿기는 뭘 믿어.” 깎아내면서 진짜 믿음의 원천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무한대로 믿게 하심, 그 믿음의 원천이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함이에요.
우리한테 있으면요, 몇 회 깎여버리면 밑천 다 드러나요. 그런데 주님이 주신 믿음은 아무리 깎여도, 깎여도 계속해서 믿음이 생기게 돼 있습니다. 콩나물 빼먹어도 자라고 빼먹어도 자라듯이 밑천이 우리한테 있을 거 같으면 몇 번 빼내면 밑천 다 떨어져요. 내가 믿습니다. 하는 것은요, 이것은 치매 걸리면 아예 안 믿는 사람돼버려요.
그런데 믿음은 성경대로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잖아요. 그러면 믿음의 원천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지요. 하늘에 있다면 하늘에 있는 값을 하자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계속 자꾸 깎이는 것에 대해서 허락합시다. 허락 안 할 재주도 없지만. 계속 허락하는 거예요. 하면서 새롭게, 새롭게 느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갔었던 쾰른 대성당 같은 경우는 밑에 때를 공사해서 벗겨내요. 하도 관광객이 많이 오니까 깨끗해야 되잖아요. 벗겨내면 또 먼지 끼고, 스모그 끼면 또 벗겨내고. 그래서 자꾸 벗겨내면 벗겨내야 돼요. 우리 자신이. 옛날 은혜 받은 거 몇 일 전 것도 벗겨내야 돼요. 벗겨내는 방법은 우리의 율법적인 요소, 선악적인 요소, 주님을 모독하는 요소를 벗겨내야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뉴스시간에 보니까 뺑소니쳤는데 기어이 CCTV에 붙잡혀가지고 뺑소니99% 체포되거든요. 그런데 뺑소니해놓고 신고를 안했다 말이지요. 불안했는데 보니까 뺑소니 다 잡힌다는 소리를 들을 때, ‘아! 그 때 참, 뺑소니 안치는 건데.’ 이렇게 돼요. 그러면 그 순간에 뭘 놓쳐버립니까? 십자가에서 벗어나서 어디로 가버린 거예요? ‘아, 그 때 내가 뺑소니 신고하는 건데.’ 갑자기 선악과로 갔지요. “주여, 뺑소니했는데 안 들키게 하옵소서.” 기도가 이렇게 되지요. 보세요. 분명히 복음 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다. 해놓고 뺑소니 걸리는 죄인이기는 싫어하는 거예요. 뺑소니 걸려도 괜찮은 죄인이어야 되는데 죄인인 걸 인정할 테니까 뺑소니 안 들키게 하옵소서. 이게 무슨 장난질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뉴스를 보게 하는 거예요. 주여, 강도라도 구원받습니다. 분명히 말을 해놓고 “안 돼. 교도소에 들어가면 안 돼!” 갑자기 강도라고 해놓고는 강도 안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나의 이중모습은 어디서 온 거예요? 고거 선악과에서 나온 거예요. 그거 깎아내야 돼요. 괜히 봤어. 괜히 뉴스 봤어. 보게 해 놓고 깎아내는 거예요. 늘 상 그래요. 사람이 예수 좋아서 믿는 게 아니고 지 몸 편하기 위해서 믿는 거예요.
다시 사도행전21장 봅시다. 자, 이렇게 할 때 사도바울이 이 말 듣고 기가 차지요. 지금까지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 했잖아요. 이 사람들 못 들은 거예요. 이 사람들은 뭐냐 하면, 언약의 층이 있는데 그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게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예수님이 주도가 아니고 누가 주도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도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하나의 부록이에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그 중에 일이 뭐냐, 십자가에 져서 우리 죄를 용서하는 일을 한 거예요. 그러면 용서를 했으면 앞으로 뭘 지켜야 돼요? 그동안 용서받지 못해서 못 지킨 율법을 이제는 본격적으로 용서받은 채로 지킬 수 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 당시에 야고보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야고보에 속한 여기에 이런 장로들, 아까 이야기했지요. 사람은 야고보가 다른 사람을 공경한다고 야고보처럼 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은 개인, 개인 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인데, 집단구원 되게 하는 것은 개인이 의견일치 한다고 모여서 집단 되는 게 아닙니다.
전부 다 깎아내야 돼요. 전부 다 예수님을 경유해야 되지 “당신 예수 믿습니까?” “나도 예수 믿습니다.” “우리 하나입니다.” 이리 되는 게 아니에요. 묶어준 것은 주님의 실이 예수님의 피를 경유해서 묶어져야 돼요. 당신보기에 사람이 참 좋습니다. 우리 친하게 지냅시다. 이건 친목회지 교회가 아니에요. 참 사람 좋습니다. 그건 아니고 주께서 하나 되게 하면 “저리 꺼져!”해도 밀어도 하나 되게 하실 뿐이에요. 밀어도. 떠밀어도.
만약에 사람이 취향에 따라서 사람을 포섭하게 되면, 자기 취향에 전혀 아닐 사람이 천국에 왔을 때는 천국에서 패싸움 일어납니다. “아이고, 니 같은 인간이 천국 오다니 이해가 안 된다.” “어떻게 니 같은 인간이 천국 왔어. 내 아들 유괴해서 죽인 니가 어떻게 구원받아서 나와 같이 천국에 있어. 이럴 것 같으면 천국에 괜히 왔어.” 이리 돼 버립니다.
천국은 나의 원수는 오지 마세요. 하는 게 천국이 아니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와 같이 천국 보내지 마세요. 하는 니가 내 원수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겁니다. 로마서5장10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원수 되었을 때에 나오지요. 이걸 성경에 분명히 있는 이야기입니다. 설마 이 착한 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될까, 이건 상상도 못한 일이라, 성경은 이해한다고 경험되는 것이 아니고 평생 동안 경험이 되어야 돼요.
내가 왜 주의 원수인가, 우리가 주의 원수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내가 싫어하는 놈 같이 천당 가는 우리가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이게 우리는 이미 주님 앞에 내 생각만 하고 있는 원수잖아요. 평생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취향과 주님의 취향이 이토록 다르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혹독하게 경험해야 될 그 세월이 긴 긴 세월이 아직까지 남아있어요.
자, 그렇게 했을 때 사도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①번 반항했다. ②번 홀딱 머리 깎았다. 몇 번 입니까? 홀랑 깎았어요. 머리를 홀랑 깎아버렸어요. 이게 율법으로서의 자유입니다. 이러니까 이런 율법강의가 그만큼 어려운 거예요. 율법으로 의롭다함이 없다고 분명히 갈라디아서에 했잖아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서 의롭게 되지요. 이건 누가 정했습니까? 사도바울이 정했습니까? 이건 하나님이 정한 거죠.
하나님이 정했는데 내가 믿는다는 말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어떤 것을 어떤 것을 수용할 때는 자기가 동의가 되어야 돼요. 그런데 내가 꾸미지 않은 일인데 남이 꾸민 일인데 전적으로 동의된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남이 한 것은 내가 전적으로 100%는 동의 안 해요. 70%는 동의해도 남의 꾸민 일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이 하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하려면, 왜 안 되는가 하면 거기에 100%동의되려면 나 자신이 사라져버려야 돼요.
내가 그 분 앞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될 때만 완전히 그 사람 앞에 복속이 되면 그 사람의 동의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와야 우리가 예수님 하신 일에 원칙에 동의하게 돼요. 그 원칙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계획, 십자가 지신 것을 믿음으로서 우리가 의롭게 된 것에 100% 동의됐다는 이 사실은 하나님이 홀라당 나를 완전히 나를 다 데려갔을 경우에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90%데려가고 10%남겨두고 이런 것이 아니고 몽땅 나를 삽으로 파버리는 거예요.
“내가 뭘 해드릴까요?” 하면 주께서 내 주위에 있는 흙 자체를 삽으로 파간다 말이죠. 여러분들이 나무 옮길 때 어떻게 옮깁니까? 나무 주위를 알맞게 옮기는 것이 아니고 흙 위를 넉넉하게 아예 흙을 파서 뿌리 채 파가지요. 뿌리 채 거름을 주면서 데려가는 거예요.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데려가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밖으로 죄가 넘치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죄까지 포함시키도록 넉넉하게 피를 발라놓고 삽으로 푹 데려가서 하니까 우리는 천국가도 우리주변에 뭐가 촉촉이 묻어있습니까? 주님의 용서의 피가 우리를 촉촉이 묻어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피로 말미암아 흰옷 입은 두루마기 입은 옷이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번에 딸 결혼식을 하면서 우리 아내가 35만원 줬던가 한복을 맞췄어요. 주님의 피 묻은 두루마기는 얼마짜리쯤 되겠어요? 두루마기 만드는 것이야 원단 값과 수공비 해서 될 수 있는데 피 묻히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그 피를 어디서 구입합니까? 구입할 길이 없네요. 짐승의 피할까요? 안되지요.
그래서 이러한 죄 용서 방법에 대해서 율법이라는 게 나오는데 율법과 더불어서 이방나라에서 하는 방법을 율법 주었을 당시에는 율법과 이방나라가 하는 방식을 대비한 거예요. 율법의 방식은 뭐냐 하면, 바로 왕과 신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옛날 민족들이 때가 되면 왕을 죽여 버렸어요. 왜 왕을 죽이냐 하면, 왕이 한3년간 하게 되면 옛날 구닥다리 왕이 돼요. 옛날식 왕이 됩니다. 꽃이 피고 곡식이 익을 때는 새로운 왕이 필요해요. 그래서 왕을 죽이고 그 자리에 새로운 왕을 등극시키는 걸 합니다.
백성들이 왕을 죽여요. 왕은 그걸 알아요. 나하나 희생되어서 새로운 꽃이 피고 열매가 잘 맺기를 바란다. 이리 되는 겁니다. 왕을 죽이는 것은 왕은 신의 아들이에요. 신은 안 보이잖아요. 신은 안보이지만, 풍요하게 하는 신을 대변해서 신의 아들 왕이 있고, 왕은 자진해서 죽던지 누가 죽임으로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다가 좀 더 발달되면 누굴 죽이냐 하면, 왕의 아들을 죽여요. 왕이 스스로 지는 죽기 싫고. 아들을 죽임으로서 몰렉신이죠. 우상들. 그렇게 함으로서 무슨 작용하는가 하면, 무기 작용을 해요. 신이 무기입니다. 옛날에 종족과 종족사이에 최고의 무기는 신의 깃발 들고 나가는 거예요. 신의 깃발 들고 나갈 때, “우리는 우리 혼자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넉넉한 신이 함께 있다.” “누구 신이 더 큰가 한 번 붙어볼까?” 이런 거예요. 애들 초등학교 운동회할 때 깃발 들잖아요. 청군 백군 하듯이. 청군의 이름으로 백군의 이름으로 싸우는 거예요. 국가 대표 팀이 그거에요. 온 국민을 대표해서 국민의 이름으로 나라이름으로 나서는 거예요. 우리는 응원해주고. 이게 무기거든요.
신이 곧 무기에요. 누구 신이 더 센가, 누구 무기가 더 센가, 누구 무기가 더 월등하냐 이거예요. 이러다가 청동기시대 들어가면서 왕의 아들을 잡아 죽이다가 대신 뭐를 하느냐 하면, 허수아비를 만들어요. 허수아비를 불에 태움으로서 작년의 신은 죽이고 새로운 신이 우리를 축복해 줄 거라고 하는 겁니다. 허수아비를. 그게 집시들이 축제에서 보면, 허수아비를 태우는 장면이 있어요. 일본의 신들도 허수아비를 태워요. 그리고 민족들 가운데 허수아비가 새를 쫒아내는 것이 아니고 원래 기능이 새를 쫒아내는 게 아니고 신을 태우기 위해서 태워진 그 재를 새로운 농토에 뿌리면 이상스럽게 농토가 다음에 곡식이 잘되는 거예요. 퇴비 작용하는 것을 모르고. 아, 우리가 하는 종교를 살아있는 신이 이게 합당한 교류체계로 인정해 주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군켈이라는 신학자는 바로 시편2편에 나오는 기름 받은 자가 바로 옛날 고대에 가나안 신화에서 나왔다 이렇게 주장했어요. 구약을. 그러나 구약은 언약에서 나와요. 아브라함언약에서 나오지 옛날 신화모습에서 본 따서 나온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언약 안에서는 어떻게 죽음을 봅니까?
언약 안에서는 어린양이 아침, 저녁으로 죽지요. 그래서 요한복음1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례요한이 예수님보고 뭐라고 해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 분이 죽음으로서 거름이 되고 그 거름으로서 새 생명이 나온다. 요한복음12장에 보면, 한 알의 밀이 죽어서 그냥 죽으면 의미 없지만 죽어서 열매를 맺으면 열매로 인하여 우리가 산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에 의하면 그 어린양이 어디로 통한다? 예수님으로 통하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의 기능을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그것을 누가 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한 그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뭡니까? 그게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뭘 이야기하는가 하면,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 방향이 둘 다 십자가인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자가 지게 하셨다. 방향이 과거서부터 이렇게 오는 반면에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위로 올려버려요. 십자가를 위로 올려버리면 과거에서는 같은 수평선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는데, 사도바울은 위에서 아래로. 위에서 아래이기 때문에 이것은 오른쪽, 왼쪽을 다 포섭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는 세대든 지난 세대든 간에 전부 다 십자가의 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 보기에 야고보의 이 모든 것은 아직도 어디에 있다? 율법 아래에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 결례대로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과정을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던 그 십자가의 과정을 자기의 몸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위에 있는 자의 여유로움. 이미 된 자의 여유로움이에요. 야고보가 그런 걸 요구할 때, 그 쪽에서 그런 걸 요구하는 것조차도 사도바울은 주께서 시킨 것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인간은 다 죽은 자에요. 인간이 뭘 시키든 간에 그걸 받아들여서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십자가 아는 사람이 이해하기 나름입니다.
그래서 율법 있는 자는 율법대로 하고 율법 없는 자는 없는 데로 한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전도방식 중에 하나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일조 없는 사람에게 십일조 강요할 필요 없고 예를 들어서 내가 우상에게 드린 제물을 제사음식을 안 먹겠다하는 사람에게 먹지 말라 할 필요도 없다 말이죠. 왜? 먹으나 안 먹으나 그게 상관없기 때문에 그래요. 개고기 먹느냐 안 먹느냐 그런 것도 상관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진정한 자유다, 말이죠.
왜냐 하면, 강도가 창기가 구원받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값없이 주신 사랑으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어제 혹시 수요설교 들어본 적 있습니까? 수요설교에서 핵심이 뭐였어요? 구원받는 것은 축복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사항이 아니고 그냥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그냥 받아버린 거예요. 그냥 공짜로 용서를 받아버린 거예요. 여기 뭐 요란 떨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받아 놓고 요란 떨 일도 없고 받기 위해서 요란 떨 필요도 없고. 그냥 무심히 살아가면서 감사하는 게 축복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래도 용서받았고 저래도 용서받았는데 그 뭐 새삼스럽게 요란 떨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구원받아놓고 이제부터 십일조하면 나는 개다. 이렇게 떠들 필요도 없어요. 유난 떤다고 해서 갑자기 더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바로 여기서 너희는 율법대로 머리 깎아라 하니까 머리 깎아버린 거예요. 그게 율법의 자유다, 말이죠. 그리고 또 요구하는 게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 바로 너희들이 아직도 복음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하는 그 위치를 출발점으로 삼아버려요. 출발점을 삼아놓고 도착지점이 뭐다? 십자가다 말이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 거기서 나왔습니다. 나왔는데 이렇게 했다고 해서 일이 무마되는 게 아니에요. 난리 났습니다.
난리 났는데, 21장11절 봅시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이게 아마 아가보의 딸 중에 한 사람이 아니고 따로 올라온 사람 같아요. 한 선지자 아가보라는 사람이 따로 빌립의 딸 말고 또 따로 이쪽의 손님으로서 온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그 아가보라고 하는 사람이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뭐한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게 당하지요. 자, 첫째시간 중요한 대목이 왔습니다.
사도의 인생은 일생을 가지고 저는 이렇게 해봅니다. ‘객관적 운명’이라고 합니다. 객관적 운명, 객관적 운명 처음 듣지요? 이걸 어렵게 이야기해서 뭐냐, ‘발견된 운명’ 발견된 운명이라 하는 것은 뭐냐, 내가 주관해서 만든 게 아니고 ‘어, 길에 뭐가 이런 게 떨어져있네.’ 하고 주워놓은 운명.
내가 생각한 운명 따로 있고 성령이 와서 “이건 니 운명이야. 빨리 주워!” 라고 줍는 운명. 그것을 저는 요번 수련회 때 그걸 존재라 하지 않고 뭐라고 했습니까? 사건이라 했지요. 사건. 내 딸이 결혼했다고 하면 안 되고요. 내 딸은 결혼해야 되는 사건에 휘말린 거예요. 휘말린 거예요. 선생님이 교사된 것은 교사되는 사건에 휘말리는 거예요. 내가 교사됐다 하면 안돼요. 왜냐 하면, 우리는 주워 든, 발견된 운명이기 때문에. 나의 주관적 운명이 아니고 객관적 운명이기 때문에. 그래야만 되기 때문에.
내가 선택 이전의 문제에요.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것이기 때문에. 갔다가 안기는 거예요. 내가 선택할 사항이 아니고. 갔다가 안기는 운명인데, 그걸 뭐냐 하면, ‘십자가의 반복’이라 합니다. 이 사도의 운명은 객관적 운명이고 발견된 운명이고 주워든 운명인데 그 안에 탁 깨어보면 십자가가 예수님의 고난이 되풀이되어야 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결박당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뭐 때문에? 율법을 안 지킨 것 때문에 율법을 모독했기 때문에 똑같은 과정을 사도바울이 반복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사도바울에게는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잖아요. 그러한 모습이 우리의 운명을 통해서 우리도 객관적 운명을 주워놓은 팔자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평생 동안 내가 구원받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아니고 성경지킴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의롭다 하는 것을 날마다 다시 되풀이 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이렇게 또 조정해 나가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