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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도행전54강 / 행20장25절(죽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54강 / 행20장25절(죽음)

정인순 2013. 11. 10. 18:30

 

음성1              

 

동영상1                

 

녹취:공은주

대전131031a-행20장25절(죽음)54강- 이 근호 목사

 

사도바울이 자기 죽음을 앞두고 사도바울이 자기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성령 받았다는 사실, 보통사람이 아니죠. 성령 받은 사람이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럼 우리하고 동감을 나타나야 되겠지요. 24절에 보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라고 돼있는데, 죽음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산 사람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는 거예요. 제일 큰 약점이에요. 죽을 뻔해도 이건 죽음이 아니거든요. 진짜 죽은 거하고 죽을 뻔 한거하고 이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수면내시경 하다가 깨어났다, 그것도 죽음이 아니겠지요. 진짜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죽음을 논할 수 없게 돼있어요.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말하기가 왠지 거짓말 같고 주저하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모든 하는 것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조립해서 이야기 나옵니다.

 

그런데 죽음이라 하는 것은 경험했다면 말할 수 없고 말을 한다면 죽음 속에 있지 아니한 게 돼요. 죽음 속에 들어갔다 하면 다시 되돌아 올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죽음이라는 게. 다른 경험은 되풀이 하면 되거든요. 빵이 맛있다. 한 번 더 먹어보면 빵이 맛있는 줄을 아는데, 죽음은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죽음이라 하는 것은 죽었다가 산분에 의해서만 죽음이 알려지지 그 외에 어떤 누구도 죽음에 대해서 모르게 돼 있습니다. 죽었다가 산분이 누구지요?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영이, 영은 쉬운 말로 마음이라 하고 또는 마음씨라고 하는데, 성령은 마음씨, 마음이거든요.

 

성령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니까 성령 받았다는 것은 죽음을 겪었던 마음이 우리 속에 들어온다, 이리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스데반집사 같은 경우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았을 때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입니다. 그 때 혹시 스데반이 하나님 아버지, 살려주세요. 이렇게 기도했겠습니까? 아니지요. 그럼 성령 충만 받은 상태 같으면 나는 이미 죽었다. 가 됩니다.

 

나는 이미 죽었다가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에요.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이 나를 돌로 안 쳐도 죽었는데 그들은 오해하기를 스데반집사를 쳐서죽이겠다는 거예요. 안쳐도 나는 그냥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하루 일기장이 오늘도 나는 죽어가고 있다. 이게 일기 내용이에요. 오늘 날씨는 참 맑다. 맑은 아침에 나는 눈을 떴다. 오늘도 나는 죽어가고 있다. 이게 일기장이다 말이죠.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죽이려고 했으니까 어디가 오해되느냐 하면,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성령이란 현실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죽음을 의미할 때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의 생각을 따라봐야 돼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의 죽음을 파악하게 되면, 스데반집사 또는 사도바울처럼 성령 받은 사람의 죽음이 뭐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 죽음이라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否定판단하고, 不正판단이 있습니다. 否定판단은 ‘아니야.’ 이게 부정이에요. ‘아니야. 그건 틀렸어.’ 아니야 할 때 부정이고, 不正은 뭐냐 하면, 정해지지 않은 걸 부정이라 합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이리 됩니다. 그러면 앞에 죽음을 두게 되면 사람들은 산 것에 대해서 반대를 죽었다고 이야기해요. 산 거 반대 죽음이고, 죽음 반대가 산거지요. 그런데 이게 바로 성령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가 살았다고 생각하니까 죽음을 판단할 때는 둘 중에 하나에 속합니다. 둘 다 엉터리에요. 엉터리이기 때문에 살았다 하는 것도 엉터리라는 것을 지금 이런 논리로 제가 몰고 갑니다. 살았다고 했을 때 죽음은 둘 밖에 없는데, 하나는 앞에 있는 ‘아니야’라는 죽음은 이것은 뭐냐 하면, 죽지 않았다. he is not dead. 성경공부하면서 영어 공부할 줄은 미처 몰랐죠.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게 否定이고, 밑에 不正은 뭐냐 하면, he is undead. 그는 안 죽었다. 이렇게 돼요. 살았다를 죽음을 집어넣어서 하면, 그는 죽지 않았다.

 

그럼 이 차이점이 뭐냐 하면, 否定은 살아있는데 간들간들하게 아직까지 숨은 이어졌다. 할 때 안 죽었어. 안 죽었어. 댁의 어머니는 아직까지 호스 꽂았는데 아직 죽지 않았어요. 간들 간들한다. 죽음의 경계선이 있다. 이럴 때 하지만, 不正의 그는 안 죽었다. 는 말은 “요새 그 사람 안 보이는데 죽은 거 아니야?” “그는 안 죽었어. 생생해.” 라고 할 때 이게 안 죽은 게 돼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죽음을 설명할 때 죽음을 직접 설명하지 못하고 산 것과의 차이가 뭐냐, 또는 산 것과의 거리가 경계선이냐, 아니면 팔팔 하느냐,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여분의 것으로,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반대쪽으로 설명하게 되지요. 죽었다는 게. 그러니 산사람 입장에서의 죽었다는 것은 결국은 살아있는 입장에서 죽음을 보기 때문에 항상 뭔가 살아있는 것에서의 붙어있는 그림자 같은 그런 쪽입니다.

 

그런데 성령 안에서 살았다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죽음이 있는 사람들의 죽음의 그림자가 살았다고 보는 거예요. 성령 받지 않은 자의 주도권은 살았다가 주도권이고 성령 받은 사람은 죽었다가 주도권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은 “빨리 죽어서 빨리 와” 이런 쪽이고, 살아있는 사람은 “아, 죽으면 안 돼!”이런 쪽이다 말이죠. 어느 것이 살기 편합니까? 어느 인생관이 편한 인생관일까요?

 

어쨌든 간에 살아남아야 돼!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렇게 바들바들 떠는 것은 히브리서 2장15절,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냥 혼자서 무서우면 괜찮은데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마귀한테 악마한테 종노릇하는 자들을 예수님이 해방시켜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야, 예수님 믿으면 안 죽는구나!” 그리 봅니다. 그게 아니고 그렇게 되면, 여전히 살아야 될 건데. 살아야 될 건데. 사는 방법은 없을까? 예수 믿어야지. 이리 돼버리면 오늘날 보통 교회 교인들이 교회 다니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 다니면서도 교회 마귀 한 마리씩 귀신 한 마리씩 몰고 교회 가는 셈이 되는 거예요. 교인 5000명 같으면, 귀신5000명 들어오는 거예요.

 

전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요번에 수입이 많게 해주세요. 요번에 장사하는데 가게 잘되게 해주세요. 우리 애가 공부 잘하게 하옵소서. 이런 말을 전부다 가지쳐버리면 하나밖에 안 남아요. 남은 죽더라도 우리 가정은 그저 어쨌든 저쨌든 간에 그저 살려주세요. 보름달 떠오르면 비나이다. 비나이다. 빌고, 1월이 되면 정도진에 가서 해 뜨는 걸 보고 빌고 그런 버릇이 가까운 교회 가서 또 빌고 개척교회에 새벽에 가서 빌고 본 교회는 머니까 가까운 개척교회 가서 빌고. 그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요번 애 결혼하는데 아무 탈 없도록 결혼 무사히 하도록 살려주세요. 새벽제단이라 하지요. 귀신 하나씩 붙어 다니는 거예요. 자기가 귀신 호위병 되는 거예요. 그리 되는 겁니다.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나의 사명에 있어서 나의 생명은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 하고 전혀 딴 동네 이야기입니다. 노는 동네가 달라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살았다는 것을 주부로 하고 술어로밖에 설명하지 못합니다. 기껏 해봐야 “아휴, 간들간들해.” 이거 던지 아니면 “나, 아직 안 죽었어. 버틸만해.” 이거 하고 그 두 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인생이란 뭐냐, 이 두 개가 인생이에요. 롤러코스트라, 아이고, 간들간들해. 아휴, 살았구나! 또 살았구나! 또 간들간들하고 완전 파도타기에요. 파도타기. 뭐 서핑할 일 있습니까? 해변 가에. 매일 삶이.

 

광주강의에 갔는데 조 집사님 계시잖아요. 조 집사님 애가 4학년 선배한테 얻어맞아가지고 학부모가 와서 학교에 난리를 쳤습니다. 칼 들고 위협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내가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옛날 교사생활 할 때가 생각나거든요. 강의 준비하고 애들 가르치고 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거기다가 행포부리는 학부모가 들이대면 정말 여자분 이라서 가정을 생각해서 교사를 하고 있지 남자 같으면 당장 교사 때려치워 버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사가 여자 분들이 많이 남아 있나 봐요. 그래서 조기 퇴진하는 거 같아요. 전부다 이것은 한 몫 보자는 이야기죠. 돈 달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죽기가 무서워서 돈에 매여 산다는 것은 결국은 사는 것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산다는 게. 산다는 것이 행복이 아니고 산다는 것이 나한테 무거운 짐이 되는 거예요. 역도 선수도 아닌 게 260Kg를 매일같이 아침 눈만 뜨면 300Kg에다가 용상하며 다 돌아다니고. 7살 때는 8살 때는 좋았지요. 동화책 보면 신발 잃어버리니까 왕자가 찾아주잖아요. 12시 이전에. 그 때 상상한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워요. 잠자고 있을 때 사과 먹고 아플 때 왕자가 와서 뽀뽀해주니까 도로 낫고. 그런 세계를 꿈꾸며 살아올 때 그때뿐이에요. 사회에 나가면 왕자란 인간이 순전히 사기꾼들이거든요. 사기꾼은 왕자란 모습으로 나타나니까. 왕자 아니면 내가 먹여 살려야 되는 인간.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지난 주일에 설교했는가, ‘사는 것은 복수하는 것이다.’했지요. 사람이 사는 것은 화풀이하기 위해서 더 살고 싶은 거예요. 지금 당장 죽고 싶은데 더 살아야 될 것은 그나마 손해 본 거 누구한테 화풀이하고 보복을 하고 마음속에 뭔가 시원한 보상이라도 노리기 위해서 악착같이 더 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법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복수의 수난을 고리를 국가가 대신해줌으로서 사적인 복수를 끊는 게 법입니다. 만약에 국가에 법이 없으면 성질나서 누구를 때리잖아요. 그러면 저 쪽의 오빠형제 동생 다 와서 복수합니다.

 

4번 때리면 저기선 아예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그러니까 법을 만들어서 사적인 복수의 보복을 끊는 거예요. 미국의 개척시대에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 압니까? 미국의 개척시대를 이태리 영화가 만든 걸 마카로니라고 합니다. 마카로니 거기에 보면 장고라든지 돌아온 무법자보면 그 때는 서부 개척시대에는 법이 없잖아요. 법이 없을 때는 총잡이 지가 법이에요. 복수가 복수를 계속 부른 겁니다. 자기 아내를 죽인 갱들을 찾아 기어이 총 솜씨 익혀가지고 복수하고 마지막에는 관 들고 석양의. 이게 석양의 무법자에요. 무법자는 법이 없잖아요. 무법자. 그 때 그런 시절이 왜 그리 그리운지. 얻어맞아서 보복하는 그 얘기를 듣고 옛날 교사들 막대기 들고 아예 출근할 때 그 때가 좋았지 싶어요. 휴대폰이 있나 스마트폰이 있나, 찌를 것도 없고 쥐어 패면 되니까.

 

이게 바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오직 목적은 뭐냐, 어쨌든 저쨌든 간 어떤 방법을 해도 살아남는 게 장땡이라는 거 이 자체를 성령 받은 쪽에서 보면 이 자체가 바로 죽음의 진수입니다. 죽음? 죽음을 경험하고 싶어요? 지금 매일같이 경험하고 있어요. 죽음은 불멸이에요. 죽지 않는 것. 저주가 뭔 줄 알아요? 불멸이 저주입니다. 차라리 캭 죽어버리면 속이나 시원하지 이게 안 죽어지니까 미치는 거예요. 좀비가 불행한 이유는 안 죽어요. 총 쏴도 안 죽어요. 인간은 안 죽게 돼있어요. 죽어도 다시 살게 돼있어요. 이게 저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저 영원히 살고 싶어서 교회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예배당 자체가 군대 귀신이 있는 데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은 영혼을 살았다고 위장해서 더 죽이는 더 지옥가게 만드는 교회가 이렇게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위험하지 않는 교회는 있느냐,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다 그래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누가 십자가마을에 멋진 질문했어요. 추도예배가 성경적입니까? 질문했어요. 제 답변이 뭐냐 하면, 추도예배는 고사하고 예배 자체가 성경적이 아니라 했어요. 예배 자체가 성경적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성경적으로 효과를 줄 수 있는 인간의 어떤 형식과 제도는 인간에게서는 만들어지지를 못합니다. 아침 11시에 하면 성령 옵니까? 10시30분에 하면 성령 옵니까? 안되잖아요. 기도순서를 앞에 넣어야 성령 오십니까? 광고시간 뒤에 하면 성령 오십니까? 안되지요. 설교 40분할까요? 50분할까요? 40분하면 주께서 오십니까? 30분하면 안 오십니까? 아니지요.

 

영적예배는 인간의 손으로 조작할 수 없어요. 스가랴4장에 나오잖아요. 앞으로 모든 성전과 예배는 사람의 능으로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 하나님의 신으로 되는 것을 인간의 육으로 이걸 재현시킬 수가 없습니다. 동일한 효과를 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예배를 가지고 조작해내는 거예요. 왜, 이유가 뭐냐, 죽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살고자 하는 모양새로 죽어있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서 은혜 받아서 살아있는 나를 더 살고 싶어서 예배드리러 오는 겁니다.

 

여러분들 어느 교회에든지 가보세요.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희망과 긍정적인 멘트를 날리지, 여러분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여러분은 죽었어요. 하는 멘트는 우리교회하고 몇 군데 밖에 없어요. 당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왜 자꾸 잊어버립니까? 살고자 하니까 목표가 생기고 목표와 목적이 있는 곳에는 온 동네 귀신은 다 들어와요. 예를 들어볼까요. 요번에 따님 결혼을 앞두고 있어요? 이럴 때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기도는 몇 번해야 되는지 모르겠지요? 일주일에 5번 해야 되고 시간은 전에는 30분했으니까 2시간씩 새벽 기도해야 됩니다. 이런 중대사를 앞두고 성경 석장 읽으면 안 되지요. 하루에 5장은 읽어야 됩니다. 계속해서 마귀는 우리 내부에다가 계속해야 돼요. 그동안 선교 헌금 밀린 거 있지요? 선교헌금 밀린 거 큰 일 앞두고 애 장가 앞두고는 마저 내시기 바랍니다. 그거 안내서 벌받아가지고 혼사 깨지면 하나님께 안 되니까 큰 혼사 앞두고는 잘 빌어가지고 무사히 이 일을 잘 치르고 난 뒤에는 많이 했으니까 헌금 좀 적게 내도 괜찮은데 큰 일을 앞두고는 그렇게 십일조 아끼면 안 되지요. 마귀가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쳐들어와요.

 

그 원인이 뭐냐 하면, 내가 어떤 특정 목적이라는 거, 특별히 그것만큼은 내가 반드시 이루고 말리라 하는 게 있기 때문에 마귀가 거기에 집중해서 들어오는 겁니다. 특히 몸 아플 때, 하나님이여, 얼마나 기도하면 내 몸이 낫겠습니까? 할 때 마귀는 다 기어들어오는 거죠. 7귀신 들어온다는 이야기 있거든요. 7귀신 다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목적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지요? 하나님이여, 이제는 목적을 없앱니다. 목적을 없애버리면 목적이 비워 있잖아요. 비워있는 곳에 마귀 들어와요. 그러면 어쩌라고? 채워도 안 되고 비워도 안 되고 그러면 방법은 뭐냐, 그 방법은 수요일날 제가 말씀드렸어요.

 

하나님과 십자가 앞에 하나님의 현존 앞에 직접 나타나니까 까짓 거 이런 되도 않는 목적과 목표를 아주 가볍게 버릴 수가 있지요. 왜, 주의 목적이 차지해버리면, 주의 목적이 뭐냐 하면, 24절에 보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사명. 그 사명이 차지해버리면 나의 목숨도 내 생명도 조금도 귀하지 않다. 뭐가 귀하기 때문에? 그동안 내 목숨이 귀하다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뭐가 귀하다? 사명이 귀한 거예요.

 

사명은 내가 붙들고 내가 하는 사명이 아닙니다. 이 사명은 내가 실시하는 사명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사용해서 주님이 모든 것을 진척해 나가는 일이에요. 사명은 담당자가 주님이지 내가 아니에요. 나는 그냥 수동적으로 사명자로 움직일 뿐입니다. 아침에 눈 뜨는 것도 사명이고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 가는 것도 사명이고 가끔 목욕탕가서 때 미는 것도 사명이고 애들 피아노 레슨 하는 것도 사명이고, 특별히 만약에 내가 사명을 감당하게 되면 사명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게 돼요.

 

생활하는 것은 사명이 아니고 성경 공부하는 것은 사명이고 이런 식으로 구분하게 되면 이것은 위험한 거예요. 이건 위험정도가 아니고 잘못된 거예요. 매사가 하나님의 업무고 주님의 업무고 주님의 사명이라 이리 생각하시고 그냥 편하게 살아가시면 그걸 소급해서 다 사명이 되는 겁니다. 참 쉽지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머리가 좀 길다. 그러면 미장원 다녀오세요. 왜, 미장원에 갈 때 사명이라 생각하게 되면 머리가 좀 못 나와도 다음에 머리 잘 나오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해요. 돈 벌려고 한다면 힘들어서 죽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주님은 이미 죽음을 경험하고 난 뒤에 죽음을 경험했으니까. 복습해 봅시다. 이 죽음은 뭐라고요? 우리의 삶이 곧 죽음이라했지요.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이미 마감했습니다. 십자가 죽을 때 이미 나는 죽고 다시 부여받을 때는 어떤 구경, 관람을 하느냐 하면, 평생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나를 죽게 했다는 것을 회고하듯이 느끼면서 우리는 사명가지고 이 땅에 내 목숨 마감할 때까지 우리는 살 수가 있습니다. 사명가지고.

 

사명가지고 있다는 말은 고래 잡는 낚시가 이미 우리 내부에 들어왔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그 낚시는 뽑히겠어요? 안 뽑히겠어요? 낚시가 꼬부러져 있기 때문에 한 번 걸렸다하면 절대로 안 빠져요. 우린 걸려든 거예요. 그래서 이걸 주께서 사명가지고 잡아당기면 우리에게 사명주신 주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이걸 고린도전서13장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는 낚시 바늘인데, 이건 제 버전입니다. 그 중에 제일의 낚시 바늘은 사랑입니다. 이리 보시면 돼요. 걸려든 거예요. 이걸 은사라, 프리젠트, 선물이라,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낚시 바늘이 우리에게 선물을 줬어요. 이 선물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천국 문을 두드려도 천국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자 없다 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노니, 라는 말이 있거든요. 이 말은 열쇠가 왜 필요해요? 열쇠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천국이란 말이에요.

 

그 열쇠가 누구냐, 열쇠가 예수님이에요. 사도바울은 이미 열쇠를 그냥 소유한 게 아니고 열쇠가 바늘처럼 자기한테 꽂혀버렸어요. 이 열쇠가 내부에서 확 확산됩니다. 독일약보면 이런 게 있잖아요. 물에 넣으면 확! 하고 갑자기 폭발하듯이 퍼지지요. 그래서 우리 속에 성령이 들어오면 사명이 자동적으로 확! 퍼져가지고 하루 눈뜨는 것도 아침에 화장실에 가는 것도 전부다 사명으로 화~ 하는 것처럼. 따라라라라~ 박하사탕 깨무는 것처럼 되는 거예요. 사명이 온 몸에 퍼지지요.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내 목숨이 이 사명보다도 귀하지 않다는 사실, 살려내시니까 사는 것이지 내가 죽으라고 사는 게 아니다 말이죠. 그것을 사도바울은 성령 받아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사도행전17장22절에 보면,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아레오바고에서 ‘바고’라 하는 것은 국회의사당 비슷한 건데, 연설하는 곳에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이라는 것은 요새 같으면 아테네에요. 지금은 그리스 수도가 아테네지요. 옛날에는 그리스 수도가 세 군데가 중요한 게 있었어요. 아테네, 고린도, 데살로니가, 지금은 데살로니가도 큰 도시에요. 그리스의 두 번째 도시인데.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거예요. 범사에 뭐가 많다고 했습니까? 종교성이 많다. 아! 요걸 설명하는 겁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교회가 많아요. 종교성이 많아요. 그 종교성이 많으면 좀 긍정적으로 봐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이걸 긍정적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이걸 반대로 봐요.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 “교회 다니십니까? 그럼 예수 믿어야 되겠네요.” 이리 이야기한다니까요. 교회 다니는 사람보고 예수 믿으세요. 하는 이야기다 말이죠. 그건 뭐냐 하면, 종교성이라 하는 것은 의미가 뭐냐 하면, 큰 현실가운데 하나가 종교에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그중에 하나가 종교에요. 정치할 때 따로 있고 직장 생활 따로 있지만, 또 교회일도 따로 있고 시간을 자투리 내어서 분할해서 나눠서 하는 거예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종교 자체가 종교성이 있다는 자체가 나는 죄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 들여 주세요. 하는 겁니다. 정치가 나를 죽이고 종교가 나를 죽이듯이 내가 믿는 내 종교가 나를 죽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슨 짓을 해도 점점 더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사는 것은 이 죽음에서 벗어나야 되는데 이 죽음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어요. 인간은 태어난 것이 종교성이기 때문에. 따라서 벗어났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분이 다시 투입되면서 요 어떤 자리를 새롭게 자리를 마련해줘요. 식당에 가면 방석하나 주지요. 방석하나 마련해주는 방석은 우리말로 쉽게 하면 이게 뭡니까? 자리지요. 요 자리가 십자가 자리입니다. 복음의 자리입니다. 자리가 되면 그동안 내가 있던 현실에 구멍이 뚫립니다. 내자리가.

 

구멍이 뚫리면서 거기서 성령의 바람이 솔솔 불지요. 방석이긴 방석인데 그 방석은 희한한 방석이에요. 앉으면 그 앉은 바닥에 구멍이 난 방석이에요. 그게 십자가 방석이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고백이 술술 나오게 만드는 방석, 나는 목적, 희망 없어도 주님 자체가 계속해서 나에게 프로젝트를 주는 거예요. 일감을 계속 주는 거예요.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일감이에요. 집사님 애 둘 키우잖아요. 그게 집사님 일감이에요. 주님이 일감을 주면 바람이 솔솔 들어온다니까요. 우풍이 세지요. 외부바람이에요. 외계바람. 이 현실이 아닌 다른 현실의 바람이 불면서 우리는 똘아이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야말로 특이한 존재, 다른 사람이 그렇게 좋다고 하는 것에 같이 동감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슬프다 하는 것에 동감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돼 버리지요. 그것은 아테네에서 하는 이야기고, 오늘은 밀레도라 하는 곳은 에베소와 가까운 거리인데 밀레도에서 아는 장로들을 불러내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거예요. 다시는 안 온다 하니까 장로들이 울면서 “가시면 안 되는데.” 하니까 “아니야, 나는 이곳을 떠나서 죽으러 갑니다. 죽으러 갈 때에 내 사명이 있기 때문에 갑니다.” 그러면 이걸 마지막 고별설교라고 하는데 이 고별설교에서 처음에는 자기 사명을 언급했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바로 29절에 ‘내가 떠난 후에’ 잘 보세요. 여기서 내가는 사도바울을 이야기하잖아요. 사도바울이 지금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죠. 죽은 사람인데 사도바울이 사는 것은 지가 사는 것이 아니고 지 안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예수님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사명이 있지요. 그럼 ‘내가 떠난 후에’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내 사명이 떠난 후에’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떠난 후에’ 떠난 뒤에 누가 온다? 이리라도 그냥 이리가 아니고 흉악한 이리, 흉악한 이리니까 요새 말로 실감나게 이야기하면 흉악한 멧돼지, 고구마 밭 다 뒤집는 멧돼지, 흉악한 멧돼지가 온다. 산짐승이니까. 흉악한 이리가 온다 하거든요.

 

자, 참 이 말이 보세요. 내 뒤에 다른 후임자가 올 것입니다. 이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떠난 후에 누가 온다? 빈자리에 흉악한 이리가 오지요. 지금 사도바울은 성령 받았지요. 방석을 깔았는데 그 방석이 구멍 난 방석이지요. 거기서 성령이 들어오지요. 사명이 곧 들어왔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사명이 떠난 후에는 뭐가 들어와요? 구멍은 메워지겠지요. 구멍이 메워지면 거기서 뭐가 들어오는가 하면, 종교성이 많은 자가 들어오겠지요. 중요한 문제입니다. 종교성가지고 사람을 속여먹는 사기꾼들이 사도가 떠난 후에 다 들어오겠지요. 그 자리에.

 

사도는 뭐라 했습니까? 사도는 살 이유가 없지요. 이미 자기가 죽은 자니까 살 이유가 없지요. 그러면 사도 외에 다른 사람이 나오지요. 어쨌든 저쨌든 간에 무조건 밥 먹고 살아야 겠다. 이 말 아닙니까? KBS2에서 개그콘서트 코너에 보면, “그래가지고 밥 빌어먹고 살겠니?” 이런 거 나오지요. 밥 빌어먹고 살겠니? 그 이야기가 저는 굉장히 비수처럼 느껴져요. 제가 20대에 늘 그런 걸 느꼈거든요. 뭐해서 밥 빌어먹고 살겠노? 그 이야기를 거기서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밥 빌어먹고 살겠니?

 

이건 매일 직장인들이 “내가 이 사표내면 밥 빌어먹고 살겠니?” “국회의원 그만두면 밥 빌어먹고 살겠니?” 모든 인간에게 다 적용되는 거예요. 선생님이 애들한테 “니 이거 풀어봐.” “못 풀어? 그래가지고 밥 빌어먹고 살겠니?” 이게 만인 공통 진리입니다. 이게. 모든. 러시아고 뭐고 이집트고 이태리고 관계없이 모든 어디에 여행가도 스위스에 배낭여행가도 전부다 그 집에 가게 되면 그 사람들은 밥 빌어먹고 살기위해서 손님맞이하는 사람들이에요. 올레 길의 게스트하우스에. 이태리에 유학 가서 최고 학부까지 마쳐 놓고 민박하는 그런 사람들. 조의 민박집, 아직도 이름 기억합니다. 주인장이 유명한 소프라노에요. 이태리 최고 코스 밟은 사람이에요. 한국에 들어와도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소프라노가 밥 빌어먹고 살겠니? 그 말입니다. 나 이 민박해서 밥 빌어먹고 살겠다는 거예요. 한국사람 받아가지고.

 

그 중에 하나가 종교가지고 밥 빌어먹고 사는 사람이 들어온다니까요. 이 자리에. 종교가지고 천국이 어떠니 십자가가 어떠니 언약이 어떠니 복음이 어떠니 하면서 들어오는 거예요. 이런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밥 빌어먹고 살기 위해서 들어오는 거예요. 밥 빌어먹기 위해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것도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그러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그래요. 다 밥 빌어먹고 사는데 문제는 성령께서 구멍 난 방석을 깔아준 사람은 설교하면서 “이것도 나는 밥 빌어먹고 사는 겁니다.” 라는 말을 술술 외풍 센 성령의 바람으로 막 나온다니까요. 그게. “여러분, 교회 와서 여러분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을 받아야 아! 내가 교회 나온다고 장로 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구나하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라고 설교하는 사람, 그거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 외는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이제는 그런 것을 좀 구분할 줄 아세요. 이제는.

 

뭐 신학이 어쩌니, 언약이 어쩌니, 십자가가 어쩌니 그 소리에 넘어가지 말고, “내가 지금 이런 소리를 하는 것도 다 밥 빌어먹고 살기 위한 하나의 인간의 근본 육신의 죄입니다.” 라고 노골적으로 까발리는 거예요. 그대로. 왜? 그런 소리 안하면 성령이 가만두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우리교회에 누가 질문 비슷한 게 있어서 답변을 이렇게 했지요. 하나님의 구원의 공식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만 의인으로 간주해서 구원시켜 줍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다가 자기 간증이나 자기 교회나 자기 신앙연조나 또는 자기 착한 일, 그것을 이렇게 대체해서 집어넣으면 진짜 구원의 십자가 받은 사람은 그걸 뱉어낸다고 했습니다. 그걸 안 뱉어내면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 아니고 그걸 뱉어낸 사람 같으면 들어오는 건 할 수 없어요.

 

우리는 매일같이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이다음에 잘되길..., 하다가 욱 토해내는 이걸 스스로 이건 아니야, 십자가지, 십자가 믿는 나는 아니야, 십자가 믿는 나 때문에 구원받는 건 아니야, 내가 예수 믿고 착한 일해서 구원 받는 건 절대 아니야, 라고 도로 이렇게 누가 앉아 계셔서 발로 차 버려요. “어디 내 자리에 니가 밀고 들어와. 착한 니가 왜 밀고 들어와.” 발로 차 버려야 돼요. 우리는 계속 죄인이 되어야 되고 주님만 의인이 될 때, 그 관계성 고무줄 같은 관계성이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 언약적 의인. 언약적 구원의 능력이 그 노선에 흐르고 있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사도바울이 미리 예언을 해요. 내가 떠난 뒤에 누가 온다고요? 악한 이리가 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이리를 알아봐요? 못 알아봅니까? 못 알아봐요. 그게 고리도후서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이 가고 난 뒤에 후임자가 왔는데 사도바울은 사이비라는 거예요. 이단이라는 거예요. 자기가 진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편지를 보내지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전부 다 다른 예수고 다른 복음이고 다른 영이라는 거예요. 그들이 성령을 언급하고 예수를 언급하고 십자가를 언급해도 전부 다 그것은 마귀가 진짜 복음을 가리기 위한 하나의 수작에 불과하다. 그들은 마귀가 부리는 하나의 마귀의 선봉자로서 고린도교회의 당회장으로 와있다 이리 지금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 양쪽으로 듣는 고린도 사람들은 얼마나 헷갈리겠습니까? 얼마나 헛갈리겠어요. 쌍둥이가 나타나서 둘 다 진짜라고 하니까 얼굴은 똑같이 생겼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이 거기서 제시한 내가 사도 권위에 증명됨을 이렇게 합니다. 나는 고난 받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난 주었다.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그렇지만 내가 약한데서 오히려 강함이라. 왜? 하나님께서 나를 낮추고 낮추게 함으로서 그리스도만 증거케 하는 게 이것이 사도다. 그런 목사가 있거든 그 교회가세요. 이상한데 가시지 마시고. 종교성 많은데 가지 마세요.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하는데 가지 마시고. 참 찾기 힘들어요.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이 말씀을 우리가 생각해 보세요.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살 것이다. 라는 말을 요한복음12장 25절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같이 연결돼 있느냐를 묻는 말씀이에요. 나하고 니하고 같은 팔자냐, 묻는 이야기에요. “아이고, 주님은 주님이고 나는 나죠.” 이게 아니고 주님 속에 들어있는 마음이 내 속에 성령을 통해 들어와 버리면 이 마음이 통해요. 이 땅에서 실연당하고 고난 받는 같이 고난 받고 실연당하는 것은 이것은 같은 통속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너희가 미운 게 아니고 내가 밉기 때문에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그 말씀은 반드시 실현돼야 되고 지금도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대로. 왜? 주의 말씀이기 때문에. 주의 말씀은 실현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좁은 길로 가라. 아마 동행자는 없을 것이다. 거의 없어요. 거의 동행하는 자가 없어요. 처음에 10명 왔다가 다 떨어지고 2명 가지고 해. 그래도 참된 영적 예배는 뭐냐, 영적 예배라는 것은 바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는 곳에 함께 있을 것이다. 영적 예배란 기존의 예배 속에서 내가 바로 전에 저렇게 종교성에 빠져있었다,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책망 받는 그 현장이 바로 예배입니다. 엉터리 예배 속에 진짜 예배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엉터리 예배 속에. 엉터리 추도예배 가운데서 남 죽은 거 추도 하는 게 아니라 지 죽은 거 추도해야 돼요. 우리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자기 추도예배를 매일같이 해야 되지요.

 

그럼 당신은 왜 살았느냐, 내가 사명을 감당해서 사는 게 아니고 그것은 내가 사는 방식의 일부이고 그게 아니고 사명이 나를 살려내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은 어디 가는가 하면, 지금의 그리스 예루살렘에 가요. 이사 이동을 자기가 하는 게 아닙니다. 이사 이동을 제가 예루살렘 가겠습니다. 하는 게 아니고 여기 갔다가 내일은 저기 갔다가 모레는 저기 갔다가 사명이 자기를 질질 끌고 다니는 거예요. 그 인생의 앞일은 몰라요. 디모데후서4장 7절 봅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의의 면류관은 어디서 줍니까? 이 세상에서 사도바울이 잘했다고 상 준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사도바울이 잘했다고 공로상 받은 적 있습니까? 감사패 받은 적 있습니까? 죽여 버렸습니다. 아예.

 

사도바울이 죽고 예수님이 죽은 이유가 뭔 줄 알아요?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것 챙기는 식으로 살아가는데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이나 스데반집사는 자기 게 없으니까 죽여 버린 거예요. 자기하고 어울리지 않으니까. 자기 게 없어요. 왜? 이미 죽은 자에게는 자기 게 없어요. 자기 게 아니고 다 부여받은 것이지 다 누구 것입니까? 주님의 소유지요. 주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니까요. 댁의 자녀분도 주님의 것으로 생각하고 계시죠?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진짜로 생각대로 될 겁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이에요. 좋다는 말이 아니고. 아스라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말이지요. 진짜 니 거야, 내 거야, 하는 분간할 시점이 올 수가 있어요. 항상 이렇게 성도의 삶은 사명이 가게 되면, 사명이 가는 곳에 원치 않는 이리가 등장해야 됩니다. 말씀이 이러니까.

 

그러니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는 이쯤 될 건데, 라고 생각한다면 내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고 주님의 시나리오대로 악한 이리가 오게 돼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대체하면 돼요? 대체하지 마세요. 왜 대체하지 마라 하느냐, 28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이 말이 참 중요한데.

 

이는 자기를 위하여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너의 일이라고 여기지 말라. 이 말이죠. 너의 일이라고 네가 알아서 할 일이 아니고, 문제가 아니고 너의 일은 아니고 주의 일이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지요. 하나님이 왜 피를 흘리지요? 하나님은 육신이 없는데 하나님이 어디 동맥피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의 피가 있습니까? 이 하나님의 피는 누구를 이야기하죠?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하지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사명을 받게 되면 무엇을 수정하게 됩니까? 예수님은 뭐다?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성령으로 사명 받게 되면 이미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고 예수님의 모습은 곧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화된 거예요. 이게 그 당시에 똘아이인 거예요. 정신이상자라는 말이지요.

 

예수는 33살 먹은 사람 청년이야. 이걸 전부 다 아는 사실에 있어서 기어이 사도바울은 “그 분은 하나님이었었어. 얘들 왜이래? 그분은 하나님이야.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구원하러 왔어. 왜?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니까. 하나님이 사람되셔가지고 사람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야.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이 인간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제2의 창조로서 직접 우리를 건져내는 구원이란 이름의 제2의 창조를 하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야.” 이걸 마구 자신만만하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장차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니까 교회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 그리고 그 분이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 같으면 이게 교회란 말이지요. 그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이리가 와야 돼요. 멧돼지가 나타나야 돼요. 왜? 그래야 교회도 아닌 게 들러붙어있는 것을 잠시만요, 떼고 가실게요. 다 떨어지고 가는 거예요.

 

우주선 올라갈 때 큰 둥치가 올라가지만 마지막 궤도에 오른 것은 뭡니까? 작은 좁은 캡슐하나 달랑 올라가잖아요. 좀 떨어져 줘야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떠는 방법이 뭐냐, 나가라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피, 요 피, 다른 복음 없어요. 피 복음. 피 복음 전해가지고 우리는 죄인인데 오직 주님의 피 때문에 의인됐다는 요 하나, 그 하나 전하시면 떨어질 사람, 기도해서 복 받는 사람 다 떨어집니다. 10분 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