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59강 / 행 22장 1절 (위치) 14032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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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은주
대전140327-행22장1절(위치)59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22장할 차례입니다. 사도행전22장의 내용은 5절부터 6절 7절에 나오는 그 내용인데요, 예루살렘에서 다메섹 가는데 오정쯤 되어서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그 이야기 사울아, 사울아 소리가 났고 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예수님 쪽에서 먼저 음성을 내려줬습니다. 이 모든 것이 6절에 보면 ‘홀연히’라고 되어 있어요. 이 ‘홀연히’를 우리 아는 이야기로 하면 ‘우연히’죠. 우연. 이것이 우연이라면 지상에 사는 우리 인간들이 사는 모든 것은 이것은 원인도 알고 결과도 아는, 예상된 결과도 아는, 원인 결과를 아는, 그래서 결과가 잘못되면 원인보고 따져 묻고, 원인만 고치면 원하는 결과가 나오리라고 생각하는 이 세계를 뭐냐 하면 이게 ‘필연의 세계’입니다.
이 필연의 세계는 우연을 쫓아내요. 우연을 미신으로 간주합니다. 그것은 아주 싫어해요. 우연히 들어오게 되면 왜 싫어하느냐 하면, 이 필연의 모든 원인과 결과라는 고리가 전체가 와해됩니다. 깨져버려요. 그러면 사람들은 왜 우연을 싫어하는가, 원인과 결과를 누가 갖고 있느냐, 내가 그걸 짐작하고 있거든요. 결국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다.’라는 그 생각을 꼭 쥐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꼭 쥐고 싶어서.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세월이 가도 변화지 않고 스스로 그걸 ‘자존’이라 하거든요. 영원히 나는 영원하다. 나는 그냥 영원한 존재가 아니고 영원토록 나는 영원한 존재로서 유지하고 싶다는 거예요. 내가 오래 산다는 것을 하는 게 아니고 단순히 내가 영원히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나는 영원한 존재인 것을 늘 인정하고 확인하고 싶은 그 세계. 단순히 사람이 오래 사는 것 가지고 탓하는 게 아니고요, 내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영원히 보장받으려 하는 그게 굉장히 강렬하지요. 그러면 누가 시비 걸면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그걸 남한테 자기를 방어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다.’ 이것은 확고하다. 진리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여기 있다는 이 자체, 내가 무엇 무엇이다. 라는 자체를 진리라고 이미 확정지어 놨습니다. 이미 확정지어 났는데 이것을 누가 공격하게 되면 기분 나쁘잖아요. 공격하게 되면 기분 나쁘다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공격할 것을 대비해서 나는 이렇게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원인과 결과를 주변에 논리를 구축해놨는데 갑자기 ‘홀연히’가 등장해버렸다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3절에 보면,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터키가 있고 그리스 지중해 있다면 터키 남쪽)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가말리엘 문하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옛날에는 정식 대학교가 없었어요. 유대인 같은 경우에는 유대인들은 얼마나 겸손한지 자기가 깨달았다고 해가기고 그걸 진리라고 우기질 않습니다. 그럼 뭐가 진리이냐 하면, 대대로 명망 있는 가문, 누적된 지혜가 내 개인적 지혜보다 우열하다, 라는 생각을 한 겁니다.
나는 40살 때 이런 걸 깨달았다. 그런데 50세대가 40대 라는 진리를 부정할 때가 있거든요. 그걸 유대인들이 아니까. 그리고 우리들끼리 동의했으면 제3자가 왔을 때는 동의 안 해버리면 그것도 진리가 아닐 수 있으니까 보다 많은 사람, 보다 역사가 깊은 것, 보다 많은 숫자, 보다 신앙적으로 존경할 만한, 보다 남들보다 희생적이고 헌신적이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했던 사람들이 알았던 그 깨달음,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 이런 것은 어린 애들이 잘 모르잖아요. 어린애 태어나면 모르잖아요. 인생사는 경험이 안됐으니까.
그러면 이런 모임에 가가지고 가르치는 거예요. 교육을 시키는 거예요. “자, 이것은 권위 있는 가말리엘의 문하야. 무조건 외워! 무조건 믿어! 확인하는 것은 니가 살아가면서 확인해 보면 되는 거야.”라고 할 경우에는 지식도 지식이지만 니 선생님은 얼마나 기품 있고 권위 있는 사람한테 배웠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사회적인 명망도 같이 덤으로 얻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요, 지방대학 출신하고 서울대학하고 이미 서울대학 하는 것은 한국 땅에서 이미 그것은 출신자체가 완전히 사람들의 인식가운데서 최고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걸 ‘이데올로기’라고 해요. 어려운 말을 하지 맙시다. 그냥 ‘통념적 관념’이라 해서 통념적인 겁니다. 모두 누구나 수긍하는 권위를 제공하는 사상이라고도 하고 이념, 보편적 이념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왜 중요한가,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진리를 측정할 기준이 되는 겁니다. 하루 동안 자기 주위를 청소했는데 청소노역비가 5억이래요. 봉투 붙였다가 풀었는데 5억이라, 이것은 사회적 통념상 용납이 안 되잖아요. 대주실업 회장, 안되지요. 통념상 허용이 안 되잖아요. 그게 바로 진리의 기준이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나는 뭐다? 가말리엘 문하다. 가말리엘 대학교 출신이다. 이렇게 보면 돼요. 가말리엘 명망 있는 교육기관의 출신이다. 사도바울에게는 이게 필연이고 그것이 그 당시에 이데올로기, 유대인의 진리 기준에 의해서 이것은 아주 존경받을만한 그러한 의미로서 자기가 자부심을 갖는 거예요.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4절에 보면,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옥에 넘겼다 했거든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친히 사람을 죽였습니까? 안 죽였습니까? 죽였지요. 그럼 살인자다, 말이죠. 살인자인데 왜 이리 뻔뻔해요. 우리는 살인했으면 부끄러워서 말도 못하겠는데. 자기가 살인했다는 겁니다. 누구를? 예수의 도에 빠진 사람들.
그러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어렵게는 안하겠습니다만, 성경에서 위치이동을 해줘야 돼요. 성경에서 위치이동을 할 때, ‘나는 성도다.’고 위치이동을 하지 말고요, 성도 이전의 자리로 먼저 가 있어야 돼요. 성도 이전의 자리, 성도가 아닌 자리, 성도를 공격할 자리, 성도를 미워할 자리에 자꾸 가있어야만 성령께서 골리앗 크레인처럼 딱 들어다가 데려가도록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가 이 자리에 있으면 다시 이 자리(성도의 자리)에 가가지고 매일같이 성령께서 해줘야 되지, 만약에 내가 이 자리(성도의 자리)에 턱하니 차지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내가 잘 믿는 행위를 하게 되면 그만이다.’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내가 뭐, 신자인데. 내가 신자기 때문에 앞으로 내가 하는 것도 성령의 일인데 뭐’ 이리 되거든요.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육신이기 때문에 자꾸 육신이 자리 잡은 자리를 자꾸 우리보고 가게 해요. 우리는 육신의 자리보다 무슨 자리인가 하면, 자아의 자리, 나는 근사한 그냥 자아가 아니고 근사한 자아 있잖아요. 이 자리와 나를 일치시키려는 그런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자꾸 육신으로 데려가는 이유가 성령은 무슨 중심인가 하면, 언약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중심이기 때문에, 십자가 중심이란 말은, 이렇게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합시다.
강도가 있잖아요. 강도가 오늘밤에 낙원에 간다는 소리를 들었지요. 그럼 오늘밤에 강도 죽은 것이 오후 3시라면 정오12시에 니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도가 죽은 것이 확실히 모르겠지만 오후3시라면 요 2시40분대 강도의 심정은 어떻겠어요? 강도는 이 육신의 자리에 있겠습니까? 나는 구원받았다는 자기 잘남의 자리에 있겠습니까? 육신의 자리에 있지요.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금 사형집행 당하는 것이 억울하다? 억울하지 않다? 억울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옆에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사형집행 당해도 억울한 거예요. 사람은 지금은 내가 잡혀있지만 앞으로 어떤 시간을 더 주게 되면 나는 얼마든지 착할 수도 있고, 강도짓 안할 수도 있고, 돈이 없어서 강도짓 했는데 돈만 생기면 나는 남들처럼 구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희망을 계속 품거든요. 그런데 여기 구원받은 강도는 희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기 자신이 기대한 어떠한 희망도 자기한테는 없는 거예요.
자기를 죄인과 동일시 할 수 있는 겁니다. 자기를 죄인과 동일시한다는 말은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요. 이것이 나중에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의 역사가 그렇게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할 때, 죄인이 무슨 큰소리를 치며, 죄인이 무슨 축복을 기대하겠습니까? 기복신앙 죄인 그런 거 있을 수 없지요. 죄인 되면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아직도 자기 자신이 잘났다는 것밖에 안되니까 그건 잘못된 거죠.
바로 오후2시40분에 이미 죄인을 안다면 그저 오후 3시에 진짜 죽어서 오늘밤에 낙원에 간다면 이 강도는 자기가 죄인의 자리에서는 주변의 일어나는 모든 일에 감사할 것이고 더구나 자기가 소급해서 과거에 강도짓 한 것도 감사할 일이죠. 피해자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한 가지 예를 들었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게요. 다윗이 밧세바와 통간한 것뿐만이 아니고 그 남편 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나단한테 들켰지요. 나단은 하나님이 보냈고, 하나님한테 들켰지요. 들켰을 때, 다윗이 기분 나빴습니까? 기분 좋았습니까? 기분 좋았지요. 그동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한꺼번에 다 날아간 거죠.
예를 들어서 아내에게 문신이 있는데 문신이 있는 걸 누구한테 이야기했는데 갑자기 바람이 날아와서 옷이 확 날아갔다면 문신이 드러났을 때 차라리 시원해버리지요. 후궁이 되어가지고 막대한 비자금을 어떻게 해서 자기 집에 딱 해놨는데 마침 남편 된 왕이 와가지고 “이거 뭐야?” 할 때, 차라리 비자금 들키는 것이 속 시원히 보는 겁니다. 기왕후 마지막 장면에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는 거예요. 왜냐, 구원이라는 것이 결국은 어디서 벗어나느냐 하면, 죄에서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나로부터의 무거운 짐으로 벗어나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시거든요. 죄에서부터. 그래서 제가 강의하는 게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자기는 주님으로부터 이미 구원받았잖아요. 이 시점에서 자기 자리가 “나 잘났다.“가 아니라 어느 자리에 가느냐 하면,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고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자기 육신의 자리에다가 자기를 세우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저쪽 사람들, 자기를 공경하는 사람들에게도 ”당신도 성령 받으면 나와 동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를 그런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 중에서 위치라는 것은 결국은 상황이, 우리의 상황이 어려워졌다. 돈 문제, 가정문제 이게 어려운 게 아니고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문제는 어디에 문제 있습니까? 우리의 위치가 잘못된 엉뚱한 자리에 있다 보니까 모든 게 짜증이 나는데 위치만 본래의 내 자리로 가버리면 되어 진 모든 것은 주께서 우리 제 위치 찾아가기 위한 주님의 조치였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주일날 설교에서 위치를 무슨 위치라고 했습니까? 바로 ‘죽음의 자리’ 어제 죽으면 오늘 우리가 살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제 죽었다는 생각을 왜 안 갖습니까? 사실은 가져야 돼요. 성령께서 어제 죽일 타이밍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치면 안돼요. 어제 죽을 수 있었는데 어제 무사히 넘어가고 어제 내가 안 죽고 집에 있는 바퀴벌레가 내 대신 죽을 수도 있고.
예를 들어서 진주에 있는 비닐하우스에 운석 20Kg짜리가 떨어졌거든요. 그 사람에 비닐하우스에 떨어져서 횡재했지만, 만약에 운석이 자기가 자고 있는 자기 안방에 떨어졌으면 그 사람 죽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 자체가요, ‘원래 내가 살아있어야 돼’ 라고 이렇게 해버리면 그것은 자기 자리가 아니에요. 자기 위치를 잘못 찾은 겁니다. 늘 죽을 수도 있는데 덤으로 이렇게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가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죽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원인이 뭐냐 하면, 나는 죽기 싫은 거예요. 나는 죽기 싫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살아있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를 논하면 이건 자기의 필연의 세계에요. 나는 죽을 수도 있는데 안 죽었다. 이렇게 할 때는 이건 뭐냐 하면, 필연이 아니고 이건 하나님의 은혜고 우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연의 관점에서 내 자신을 봐야 되지 내가 살려고 애썼기 때문에 나는 살아있다. 이렇게 우겨버리면 그러면 죽은 사람은 지가 죽고 싶어서 죽었습니까? 사고난사람은 지가 사고 난다고 해서 사고 났습니까? 아니지요.
이 점에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은 말을 하면서 위치를 먼저 잡아줍니다. “내가 옛날 예수 믿었던 사람들을 죽였던 그 자리에 내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예수님한테 잘 보이려고 했던 생각도 못했고 예수 믿으면 구원받겠다는 꼼수도 쓰지 않았고 그리고 나는 예수님 안 믿으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나는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갈 거야.‘ 그런 것은 사전에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고 나는 오히려 반대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었고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가말리엘 문하에서 그렇게 배웠다는 거예요.
그러면 가말리엘 문하는 유대에서 제일 유력한 문하거든요. 학교잖아요. 양성기관이거든요. 랍비 양성기관.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여기서 배웠다는 말은 사도바울의 모든 생각은 뭐로 대표한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상을 자기도 충분히 알고 대표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유대인들이 사도바울 시대 이 전에 누구를 만난 시대였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시대였지요. 그럼 예수님을 대적했던 그 유대인의 사상이 그대로 누구에게 이어졌다? 사울에게 그대로 이어진 거예요. 이어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던 십자가를 죽였던 그 움직임이 그 이후에 15년인가 그 이후에 사도바울에게도 그대로 전이가 됐잖아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곧 누구를 죽이는 거예요?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과 같았고, 예수님 쪽에서 그렇게 설명을 해 준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보기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으니까 눈에 안보이니까 예수님 시대는 한물 간걸로 여겼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메섹에 나타나가지고 “니가 나를 핍박했다.” 함으로서 이렇게 해석을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현실에서는 예수님은 한물 간 분이 아니고 같이 나란히 가고 같이 있는, 지금부터 2000년 전에만 예수님 계신 게 아니고 지금 2014년 3월 27일 오늘도 주님이 같이 나란히 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뭐가 옵니까? 성령이 오잖아요. 성령이 오니까 우리는 그 때 당시의 십자가 안 본 것을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때 당시의 십자가나 지금 십자가나 성령의 역사함에 따라서 그 십자가와 동일한 십자가이고 동일한 예수님이다 말이죠. 우리가 이스라엘 그 때 살았다고 해서 구원받는데 유일하게 작용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2000년 세월 지났다고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도 아니에요.
성령 안에서는 인간의 시간은 무시당해요. 성령 안에서는 인간의 시간이 무시당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성령께서 시간을 다루어버리면 인간에게는 시간이 무시당해요. 하나님에게 시간이 있으면 인간에게는 시간이 없고 인간에게 시간이 있으면 하나님한테는 시간이 없는 거예요.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것밖에 못하겠네요.
내가 몇 년 살았다고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 니는 몇 년 산 게 아니야. 시간이 그냥 다 날아갔어.“ ‘그래, 나한테는 시간이 없어.’ 하면 ”그러면 시간은 내가 만들었지!“ 하고 하나님 쪽에서 나서는 겁니다.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면 주님은 과거를 잊지 않고. 우리가 과거를 생각하면 주님은 과거를 없애버리고 그렇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의 시간은 오직 예수님이 지금도 만들어 나가시는 그 시간만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부터 50년 전에 나는 대성초등학교에서 약8km떨어진 곳에 소풍을 갔습니다. 이걸 내가 기억하면 나의 역사 과거가 되잖아요.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어버리면 이 소풍 누가 가게 했습니까? 주님이 그 때 가게 했기 때문에 주님의 역사입니다. 주님의 시간이 내 시간이라, 이렇게 하면 안돼요. 주님의 시간을 내 시간으로 만드는 순간 나한테는 시간이 생기지만 주님의 시간은 날아가 버려요. “니 50년 전의 초등학교 학생 때나 지금이나 내가 보기에는 둘 다 육신이다. 내가 보기에는 육신 똑같은데 뭐, 뭐가 발전했다고? 발전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니 다 육신이야.” 하고 시간을 무시해 버리고.
“그래, 나는 육신이야.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하면, 주님께서 “똑같지 않거든. 그 때는 소풍 보냈거든. 이런 은혜를 줬거든.” 이리 또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절대로 의미와 가치를 인간에게 빼앗기지를 않아요.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나 가치를 우리 몫으로 주지를 않는다는 것을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옛날 육신 때 있었던 자기 의미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옛날에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러 이러한 일이 있었고 나는 거기에 의미를 두었고 나는 가말리엘 문하의 이런 존재고 이런 자아였고 대단한 존재며 나는 이런 큰일을 했고 예수님 믿는 사람을 핍박했고 심지어 죽였고 체포했고 이래서 이렇게 했고 이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했고 이렇게 했다는 말은 뭐예요? 누구의 역사에요? 자기 역사잖아요. 자기 역사를 가지고 듣는 사람에게 “나처럼 여러분들도 자기 역사 있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소통하지요? 여기서 이해 안 된다는 소리는 안 하지요? 그런데 지금부터 이해 안 되는 소리를 하겠습니다.” “우리 다 이해되고 나도 과거 있듯이 여러분도 과거 있고 어릴 때 초등학교 다 있습니다. 이해되지요?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일을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내가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에 내려가는데 홀연히, 사도바울에 있어서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선으로 그어볼게요. 시간은 선이니까.
이런 일이 있었다. 여기에 수직으로 홀연히 뭔가 왔지요. 오게 되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과거시간이 어떤 사태가 벌어졌으니까 이 시간이라는 열차가 그 사건을 담고 새롭게 앞으로 달려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한 것이 다 엉터리가 되어버려요. 왜냐 하면 홀연히 왔던 주님의 성령의 역사는요, 인간의 육신적인 시간에 담기지를 않습니다. 담기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갉아먹어요.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고 그 십자가사건으로 말미암아 뒤에 것을 전부 다 잠식해서 뭐로 만드느냐 하면, 전부 다 십자가사건을 위한 하나의 선제작업이었다고 그렇게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성령이 왔을 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뭘 이룬다? 선을 이루기 위한 작업이었다는 겁니다. 강도가 천국에 갔잖아요. 천국에 가서 다시 옛날 과거의 강도짓을 보세요. 그러면 그 강도짓을 자기가 안 할 수 있었습니까? 해야만 했었습니까? 해야만 했던 일이에요. 왜 감사가 안 됩니까? 모든 해야만 하는 일들이 결국은 나로 하여금 구원받게 한 거예요.
의존교회에 들어가면 이 미아 선생님이 글을 올려놓은 게 있어요. 어떤 글을 올렸는가 보니까 아줌마들이 마사지 받는 그 대목을 따가지고 올려놨어요. 다른 사람들은 여자들이 사치스럽게 비싼 돈대고 시간 남아도는 할 일 없는 아줌마들이 비싼 돈 들고 마사지 받으며 “어, 시원하다.”라고 해도 이 근호목사는 그걸 가지고 환란이라고 해석해버렸다. 앞뒤 거두절미하고 그것만 쓴 거예요. 구원의 관점에서는 모든 게 환란이니까. 오골 뼈를 누를 때는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천국에서와 비교해서 환난이라고 했는데. 물론 이 미아 선생님은 그걸 다 알지요. 알고 했는데. 그것이 환란이다, 할 때 결국 지금 이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 환란 받는 것도 뭘 해야 된다? 소급해서 감사해야 된다는 거죠. “이런 마사지 받는 환란에 참여케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쥐가 고구마를 갉아먹으면 자꾸 없어지잖아요. 십자가가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다 갉아먹는 거예요. 그런데 갉아먹는 건 좋은데 이 육신은 아직까지 계속 있거든요. 갉아먹는 게 갈래가 두 갈래로 되어 버려요. 하나는 뭐냐 하면, 아까 제가 한 여러분 잘못 생각했다는 것, 십자가 믿었다. 성령 받았다. 그리고 내 인생 또 시작된다. 장차 부활의 나라에 갈 때까지 예상된다. 이렇게 가버리면 이것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술 끊고 담배 끊고 얼마나 착해졌는지 몰라.” 이렇게 나와 버려요. 이렇게 나와 버리면 자체가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나 잘났다가 되어 버리고.
그러면 또 하나의 길이 뭐냐, 십자가인데 이것은 미래의 일은 시간을 주지를 않아요. 십자가 안에 가버리면 하나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나의 시간은 없어요. 이걸 가지고 저는 ‘제자리 뛰기’또는 ‘스프링 뛰기’ 통통 뛰는 거라 보면 돼요. 그게 고린도후서에 나오지요. 나를 주께서 매일같이 죽음에 넘기고 매일같이 죽은데서 살려내는 성령의 역사. 통! 통! 통! 하고 이렇게. 3년 전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동안 3년 후 동안은 내가 알아서 산다. 이런 게 없다 말이죠. 그동안 3년 동안 계속해서 죽이고, 살리고, 죽이고, 살리고를 늘 그렇게 한 거예요. 죽이고, 살리고, 죽이고, 살리고, 이건 뭐냐 하면, 우리를 낮추시고 낮추게 되면 육신 때문에 또 높아지고 높아진 것은 또 낮추시고 또 낮아지면 육신 때문에 육신에서 욕망과 욕구와 충동이 나타나요. 특히 충동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향유, 즐거움과 쾌락이 관련되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알 수 없는 즐거움을 겨냥해서 움직이게 돼있어요. 남한테 흥! 하고 화내잖아요. 여러분, 화를 낼 때 즐겁습니까? 화를 참는 게 즐겁습니까? 화를 내는 게 즐겁지요. 그러니까 화내는 게 즐거움이에요. 화내는 게 즐거운 거예요. 자기 즐거움. 이게 육신의 본성이거든요. 육신의 본성은 뭐냐 하면 자기 즐거움이외에는 최종적인 게 없어요. 그냥 즐거움에 매여 사는 겁니다.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딸기가 있는데요. 딸기가 이리 있는데 지금 우리가 배부른 상태에서 딸기는 별로에요. 그런데 등산을 7시간 등산하고 있는데 점심 먹고 사과 먹고 싶어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사과를 잘라서 갔다가주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봅시다. 우리 팀에는 딸기가 아무도 없는데 어떤 아줌마가 딸기를 들고 자기 팀에게 주는 걸 봅시다. 보니까 앞에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붙여있다 봅시다. 죽을 것 같으면 아예 안 보이는데 치워놓으면 괜찮아요. 아예 치우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얼마나 계획이 깊은가 보세요.
‘따먹지 마라’를 앞에 붙여놓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러운 것을 눈앞에 카메라가 눈이라면 우리 앞에 어른거리게 하는 거예요. 물론 선악과 오자마자 덥석 먹은 게 아니에요. 얼마나 참았겠습니까? 따먹을 때까지 계속 눈앞에 어른거리게 하는 거예요. 사과를 그냥 통째로 주게 되면 사과 안 먹고 싶은데 세상에 사과 껍질을 맛있게 벗겨가지고 그것도 8조각 딱 맞게 벗겨가지고 주니까 지금 하나님은 계속 우리에게 약을 올리는 거예요. “이래도 화 안 나? 이래도 화나지?” 자꾸 약을 올리는 거예요. 왜? 죽으라고.
그냥 죽지 말고 죄 짓고 죽으라고. 우리는 죄를 안 지으면 살아있는 것이 내 잘났기 때문에 마땅한 상으로서 오늘도 이만큼 착실하니까 설마 나를 죽일 리가 있겠어. 이 정도 착하니까. 자꾸 착한 기운에 살게 되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이 감사가 안돼요. 이것은 당연한 조치라고 보는 거예요. 나는 착하다 라는 원인과 따라서 살아있다는 것이 결과인데, 그렇지 않고 죄를 짓게 되면 살아있는 게 이상해. 이건 살아있으면 안 돼. 내가 산 쪽 쪽 주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에. 주님의 영광의 차원에서 당장 나를 목을 베던지 날리던지 죽여야 돼요. 그렇게 되어야 돼요.
그런데 왜 삽니까? 그건 네가 사는 원인이 니가 생각하는 니 잘남에서 나온 게 아니고 다른데 원인을 두고 살려주고 다른데 힘을 두고 늘 밑바탕에서 계속 살려내고 있다는 것을 니가 알라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이게 바로 성령 십자가 주님의 선악과 따먹게 한 그 계획과 요한계시록의 모든 천국 그 안에 갇혀있는 우리들의 주어진 우리의 실존, 진짜 모습이 이겁니다. 지금 상황이 돌아가는 게 그렇게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우리는 매일 잊어버리지만 성경은 매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홀연히’의 의미를 놓치면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원인과 결과가 아니에요. 이만큼 착하니까 오늘 저녁까지는 나는 살아있어야 돼! 이런 자꾸 내가 잘나서 내 잘난 상급으로 내가 오늘 저녁까지는 살겠지. 라고 그러한 되지도 않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에요.
십자가를 과거사로 보지 말고 십자가가 현재 내가 여기 있는 이상으로 십자가가 여기 있다고 보세요. 보세요가 아니라 실제상황입니다. 항상 십자가 앞에 놓여있는 겁니다. 우리가 눈을 돌려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면 십자가가 보이지만, 우리가 만약에 앞 쪽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뒤쪽에는 뭐가 보입니까? 뒤에는 십자가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십자가가 안 보이니까 자기가 여기 있는 이유도 같이 놓치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 안이 내 자리인데 그 위치가 십자가 안인데 갑자기 위치가 십자가 밖에 벗어나서 따로 내 잘나 보이는 위치로 따로 설정해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홀연히’라고 하는 순간 이미 사도바울은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고 아담은 선악과 따먹고 죽었잖아요.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나타나신 주님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가 아님을 확인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이 살아있다면 나는 죽은 것이고 내가 만약 살아있다면 주님은 진짜 과거에 한 때 있었던 돌아가신 옛날 아저씨, 아저씨에 불과한 겁니다. 정말 주님이 살아있다면 우리는 그 주님 앞에서 나는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살아있다는 것은 한 분에게만 허용합시다. 그 분 안에서 우리가 살아있지 그 분 안에서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그 분 바깥에서는 우리는 살아있다는 말을 우리한테 붙이면 안돼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주의 힘으로 주의 은덕으로, 주의 은혜로 우리는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살아있으면서 하는 모든 감사와 영광은 마땅히 누구한테 드려야 되겠어요? 주님한테 드려야 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말은 니가 살았다는 말이 아니고 니가 사실은 죽어있는데 자꾸 살았다고 우기니까 그렇다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주님께서는요, 자기만 살아있기를 원해요. 우리도 같이 살아있다고 자꾸 빌붙기를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만 살아있고 내 안에 있을 경우에만 니는 살아있는 것이 되도록 그래서 결국은 주님 안에 우리가 있다면 결국은 우리 살아있는 것은 의미 없고 주님이 살아있으매 살려줌에 우리가 살아있다. 항상 모든 의미와 가치는 최종적으로 주님에게 도달되도록 그렇게 우리 주님이 원하고 있어요.
아까 한 거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다윗이 간음했고 다윗이 살인했는데 나단이 왔을 때 다윗이 왜 간음하고 왜 살인했을까요? 니는 죽고 나는 살아야 되겠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이 나타났을 때는 뭡니까? 나는 전에부터 주님만 살아계시고 나는 죽어있었는데 왜 내가 그 때 간음하고 살인했는가, 그게 내가 한 일이 아니고 누가 한 일이다? 살아계신 주께서 나를 통해서 일을 일으키신 거예요. 그걸 시편에서는 주께서 꺾으신 뼈라 하는 거예요. 우리아한테는 미안하지만, 다윗이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죽여 놓고 다윗은 그걸 누구 책임으로 돌리는가 하면, 내가 우리아를 꺾은 게 아니고 주께서 나를 매개로 삼아서 나로 인하여 죽였다는 겁니다.
주께서 작대기를 들었고 나는 작대기에 불과하고 얻어맞은 것은 우리아고. 그래서 우리아와 나와 이것을 통해서 주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그러한 부속품들로서 활용이 잘됐다 이리 보면 되는 겁니다. 상당히 누가 들으면 굉장히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해석이거든요. 어떤 행동을 해놓고 자기합리화 시킬 수 있는 그런 위험성이 농후한 어쩌면 죄를 조장하는 더욱 더 죄를 조장해서 세상을 아주 지옥으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드는 극히 위험한 발언을 한 것처럼 그렇게 이해되겠지요. 그러면 그들이 얼마나 화를 내겠습니까?
성경 봅시다. 22장 22절 읽어보세요.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 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맞습니다. 사도바울은 살려둬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이 지상에 없습니다. 어디에 있느냐, 주님 안에서 나타난 사람이지 이 지상의 사람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이 지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에 속하면서 주님이 이 지상에 있으니까 같이 등장한 인물이 사도바울이에요. 이건 사도바울에게만 해당되면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동일한 존재가 되어야 돼요. 나로 인해서 나타나고 살고 하면 안돼요. 우리는. 그러면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안 됩니다. 주님에 의해서 소급해서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있고 내일 죽을지 오늘 죽을지 모르는 것은 그것은 주님소관이고 살아있는 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들이 이렇게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말은 그들은 뭡니까? 그들은 살았다는 말입니까? 죽었다는 말입니까? 그들이 살았다고 생각하니까 사도바울은 죽이라고 된 거예요. 그러니까 복음을 알면 이런 대우 받습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복음을 알면 이런 대우 받습니다. 심지어 가족들로부터 이런 대우 받습니다. 뭐 예수님 어디계시냐고요? 보고 싶다고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우리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늘 성령을 통해서 점검하고 점검되어야 돼요.
우리는 이렇게 죽은 자가 너무 말이 많아요. 사실은 너무 말이 많고 갖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죽은 자에게 수시로 확인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딸기를 가지고 우리 앞에 왔다 갔다 코앞에 보이는 거예요.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아, 구찌, 명품 가방이 코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또 달려들지요. 살살 약을 올리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의 위치조정을 계속 해주시는 거예요. 그냥 내버려두면 7귀신이 아닌 70마리 귀신이 달려들어요. 그런데 자꾸 위치조정을 해주는 겁니다. 우리가 엉뚱한 데 가있으니까 귀신이 달려드는데 만약에 우리가 죽어버리면 귀신이 들어올 때가 없어요. 시체에 뭐 하러 들어옵니까. 살아있다고 우기는 자에게 귀신 들어오지 죽은 시체에게 들어와서 뭐할 거예요. 해골인데. 귀신도 재미하나도 없어요.
은혜 받았다 하면 자식이 애를 먹이고 다시 성질나고 또 감사하다고 하면 또 어떤 누가 와서 성질 건드리고 또 완전히 뒤집어놓고, 홀연히 라는 걸 저는 레코드판을 생각하거든요. 대학교 때 친구 집에 가서 전축이 그 집밖에 없었기 때문에 들었는데 얼마나 신기한지. 레코드판인데 여기에 바늘만 딱 있을 뿐인데 바늘이 홀연히라, 바늘만 있는데 소리가 나는 거예요. 복음의 소리가, 성령의 소리가 요 바늘에서. 그 때 들은 팝송이 뷰티풀 선데이 하루 밤에 50번 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아무리 봐도 물질인데 물질은 소리가 아니잖아요. 물질은 딱딱한데 바늘만 얹으니까 소리가 나더란 말이죠. 우리는 육신인데 육신에 십자가만 대니까 이게 복음의 소리가 나오더란 말이죠.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물론 그걸 판에 구정물 부으면 소리가 안나요. 다시 구정물 물로 씻어내면 다시 소리가 나고. 늘 같은 판이기 때문에 시간이 3분 걸려도 3분 갈 동안에 레코드판이 이동하지 않는 거예요. 매일 그 자리에 있어요. 우리는 우리 육신이란 자리에서 늙어 죽어도 변화지 않습니다. 내가 미국가도 내 육신이 가는 거고 독일을 가도 내 육신이 가는 거고, 내 육신이 가는 것이지 육신 빼놓고 내가 머리속으로 상상해서 가는 것은 가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신을 떠날 수가 없어요. 떠나보내지를 않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육신과 따로 떼어놓지 마세요. 나는 육신에서 만드는 게 나이기 때문에 늘 주님 앞에 책망 받고 얻어맞고 위치조정 당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어야 됩니다.
자, 그러면 사도바울이 주님한테 홀연히 무슨 소리를 들었습니까? 7절에 보니까 사울아! 사울아! 그 다음에 뭐라고 하셨죠? 핍박하지요. 이 핍박이라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사울이 가만히 잠자고 있는데 핍박 안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 5절에 보면,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사울이란 이 사람은 뭔가 매여서 움직이게 되어 있지요. 사울이란 사람이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독단적인 일입니까? 주위에서 주시하는 눈들이 많습니까? 시키는 많은 사람이 있지요. 그러면 어디에 소속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개인은 있습니까? 개인은 없다는 것이 오늘 제일 중요한 강의 어려운 내용이에요. 개인은 없고 집단의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의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핍박이라는 말을 할 때는 사울만 겨냥한 것이 아니고 사울에게 그런 일을 시키게 만든 배후 집단을 겨냥하고 있는 거예요. “사울아, 니는 나빠”가 아니라 “사울아, 니가 나쁜 집단에 속해서 나쁜 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게 하고 마귀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개인자격으로 보는 게 아니고 집단에 속한 존재로 보는 거예요.
혈과 육, 다시 말해서 베드로에게 니가 알게 한 것은 혈과 육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우리는 조상, 혈과 육에 속한 게 아니에요. 요한복음1장13절에 보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이 말은 우리는 혼자, 단독 자가 아니고 우리의 같은 성씨를 갖은 사람들 그리고 우리 올케, 우리 형부 또는 우리 아버지 형제들 다 얽혀있지요. 육이지요. 그 육에서 떨어져 나와야 돼요. 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안면 맞추고 부모 생각되고 어떤 인간의 행동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이런 행동 했을 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걸 항상 염두에 두고 개인이면서도 개인의 이름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니까요. 아까 재아가 뭐라 했어요? 한 방하겠다는 거예요. 누구 보라는 듯이 한 방하겠다는 거예요? 주변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이 소속된 존재로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한 방. 한 방해서 뭐할 건데?
결속이라는 것. 이거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했듯이 남녀에 관하여 질문했듯이 답변했잖아요. 하늘나라에 가면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고 했잖아요. 하늘나라에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지요. 그 때 뭐가 왔지요? 천사가 왔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는 결국 우리는 몸에 매여 있다는 거예요. 그 몸이 매여 있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해주신 겁니다.
그럼 우리는 형제, 자매 이런 것을 우리가 태어난 고향도 무시하고 형제자매를 무시하자는 말인가, 아까 제가 강의할 때 했지요. 이렇게 강의를 반복해야 된다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혈육에서부터 혈육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됐으니까 이제부터는 형제이고 동생이고 부모를 무시해버리고 내 맘대로 살면 되겠네. 라고 했을 때, 답변은 뭐라고 했습니까? 벌써 첫째시간 초반에 답변했는데. 백날해도 응용문제 들어가면 안 된다니까.
내 시간이 죽음으로 끝나면 그 다음부터는 주님의 시간된다고요. 주님이 붙여준 자식이고, 주님이 붙여준 남편이고 아내고 돼가지고 강도가 날 때부터 강도가 아니고 강도짓을 해야 구원받아야 됐듯이 우리는 그런 것에 얽이고 설키고 다투고 화내고 분통 터트리고 그리고 서로 좋아 얼싸안고 자식 잘되면 좋다고 환호성 부르고 이러면서 거기서부터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게 뭐냐, 내가 원한 아버지가 아니고 주님이 원한 아버지가 되고 주님이 원한 할아버지가 되고 모든 주변에서 다 뭘 발견하는가, 하나님의 흔적과 하나님의 시간 관리를 우리는 이렇게 체험하면서 “거기에 얽매이지 않도록 구원해 주시는구나! 천사와 같이 해주시는구나!”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하기 전에 누구를 만났습니까? 천사를 만났지요. 그 때 마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아이고, 내가 임신될 줄 알았어.” 이렇게 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홀연히’죠. 아까 이야기한 ‘홀연히’입니다. 홀연히 왔을 때, 마리아가 어떻게 돼요? 수긍했습니까? 놀래버렸어요? 놀랬지요. 그 놀람에서부터 구원이 됩니다. 놀랬다는 말은 내가 익히 아는 나의 시간 속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처녀가 애를 낳는 이것은 우리가 아는 동네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부터는 너로 하여금 니가 모르는 동네로 건져낼 거야.”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찾아온 주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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