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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58강 / 행21장27절 / 법 안의 자유 / 140227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58강 / 행21장27절 / 법 안의 자유 / 140227

정인순 2014. 2. 28. 10:06

 

 

음성1           동영상1

 

녹취:공은주

대전140227-행21장27절(법안의 자유)

58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21장25절할 차례입니다. 여기 사도행전의 사도바울하고 야고보하고 협상하는 대목이 있어요. 협상내용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유대인들과 그렇게 쓸데없는 충돌을 할 필요가 없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가지고 좋은 게 좋지 않으냐, 그래서 무엇을 타협했느냐 하면, 이런 것을 그 당시의 문화를, 성경을 통해서 이해할 것은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서로 의견 충돌될 때 협상을 하고 타협을 하잖아요. 협상, 타협하는 요소가 뭐냐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율법으로 협상을 하게 됩니다. 율법으로 협상한다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지요. 현대인들은 유대사회가 아니고 현대는 무슨 사회인가 하면, 경제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협상의 최종적인 것은 뭡니까? 결국 돈이지요.

 

교인들이 싫어하는데 나가줘, 그럼 목사가 원래 퇴직금에다가 몇 %더 추가해 달라, 좋다, 됐나? 됐다! 그럼 장로들이 목사님이 퇴직금 한 2천만원 더 얹어 달랍니다. 2천만원 줘서 보내자. 결국 모든 협상이 마지막 무엇으로 끝나요? 돈으로 끝나잖아요. 항상 어떤 문제가 있다, 하면 돈만 개입하면 모든 게 끝나는 겁니다. 파업을 하던, 이혼을 하던, 혼사가 되던, 모든 것, 남자가 철이 없어가지고 아가씨 사귀다가 어떻게 임신 됐다. 그러면 드라마에 보면 커피숍 테이블위에 보면 시어머니는 아니지만 남자 쪽에서 봉투 내어 놓지요. ‘사랑과 전쟁’에 보면 나오잖아요. 얼마면 돼? 이 모든 게 자본주의잖아요.

 

이런 자본주의 속에서 돈으로 협상하는데 여기 성경 사도행전21장에서는 무엇으로 협상하는가 하면, 법으로 협상을 해요. 참, 이거 기이한 현상입니다. 왜 이게 기이하느냐 하면, 율법은 누가 제정했지요? 하나님이 제정했지요. 그러면 법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면 협상을 해도 하나님이 협상을 해야 될 텐데 왜 유대인 자신들이 율법가지고 “당신은 율법을 이 정도는 지켜줘야 우리가 당신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라고 유대인이 무슨 자격으로 그 이야기를 하느냐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그 사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법은 하나님이 주되 법을 잘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그 법의 준수여부와 법이 계속 그 사회에 파급되도록 해야 될 그 관리책임은 바로 유대지도자, 자기들에게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물론 예수님도 이들에게 걸려들어서 살해당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법을 줬다, 할 때 이 법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법이 적용되는 건 아니다 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로마서2장에 보면, 너희들이 율법의 선생이면서도 남에게는 율법을 이렇게 하지 마라, 뭐 하지마라, 하지 마라, 하지마라, 남은 잘 가르치면서도 가르치는 너는 왜 율법 안 지켜도 되는 것처럼 빠지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 로마서2장 끝에 있거든요. 사도바울이 로마서2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법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있다, 하는 그들의 보통의 인식을 무너뜨리고 법은 이미 예수님의 손에서 법은 완성되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겁니다. 율법이 완성될 때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의고요, 그 의는 인간이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따로 지킬 분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거예요. 그렇다면 율법을 준 것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우리를 통과하도록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어느 식당에 떡볶기, 김밥, 라면도 파는 동시에 랍스타도 파는 식당, 그런 식당 없지만 예를 들어서 떡볶기 3천원짜리도 팔면서 오만원짜리 랍스타도 파는 그런 식당에서 전부 다 떡볶기, 김밥 천원짜리 한 줄 먹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랍스타를 주문해가지고 쟁반에 큰 랍스타들고 지나간다면 사람들은 떡볶기 먹고 있다가 무얼 전부 다 침 흘리고 부러워하겠습니까? 랍스타보고 침 흘리겠지요. 율법을 줬을 때, 율법이 지향하는 바는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은 뭐냐, 그 랍스타 지나가는 거 쳐다보듯이 그 율법이 어디를 향하여 완성되는가를 쳐다보게 한다는 겁니다.

 

율법을 쳐다보면서 자기가 나름대로 지켰다는 것을 보는 순간, 손을 다 놔버려야 되지요. 율법은 우리가 함부로 지킬 수 없는 그러한 아주 순수한 것인데, 더러운 우리가 이걸 지켰다고 우긴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고 손을 놔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걸 중간에서 그리스도가 통과했어요. 그러면 율법은 예수님이 혼자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죠. 줬는데 인간들이 그걸 모르고 널름 널름 주님이 지킬 걸 자기가 지켰다고 이걸 널름 널름 가져온 게 이게 바로 충돌이 야기되면서 십자가 피를 이 땅에 흥건히 적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기독교방송국에 나가서 “율법은 오직 그리스도만 지킵니다.” 라는 말을 한 마디만 해도 기독교방송 PD는 잘릴 거예요. 그런 발언은 아주 위험한 발언으로 취급돼가지고. 왜 기독교방송에서 모든 법은 주님 혼자 지키고 우리는 못 지킨다는 말을 왜 못하느냐 하면, 그렇게 돼버리면 기독교방송에 나오는 헌금, 십일조, 돈 이 문제가 근거를 상실해버리니까. “돈 안내고 모든 율법은 주님이 혼자 지켰습니다.” 했을 때,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의로 미흡 하느냐 그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만 믿어도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그동안 속았다는 것과 ‘그 다음부터는 안 해도 되네.’ 하는 생각이 들게 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건 될 수가 없지요. 유대인 지도자에 있어서의 하나의 이것은 국가가 곧 신입니다. 신의 역할을 국가가 대신해요.

 

신에게 나오려면 뭔가 중간에 뭘 거쳐야 돼요. 뭐냐 하면 법의 율법에 의한 국가를 거치지 않으면 신에 도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 유대나라 자체가. 신은 여호와 하나님은 유대 국가를 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신을 믿는다, 이건 말도 안돼요. 이방인들은 반드시 유대 국가를 경유해서 두가지해야 돼요. 기본적으로 할례와 안식일 지키는 거, 요 두 가지하고 여호와의 초보라고 들어와야 돼요.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출애굽기부터 에스겔에 보면 안식일은 영원하다 했어요. 할례도 영원하다 했으니까 영원한 걸 두 개 뽑은 겁니다. 성경에서 영원한 게 안식일과 할례 두 가지를 영원한 것을 구약에서는 그렇게 봤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안식교회에서는 안식이 영원하다 했으니까 그 영원한 것은 취소할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두 개 거쳐서 가는 겁니다. 그 당시 시대가 이런 시대입니다.

 

그러면 신이 국가라 했기 때문에 신은 뭘 갖고 있느냐 하면, 심판권이 있어요. 재판. 심판권의 마지막은 죽음이다 말이죠. 이 신이 갖고 있는 심판권을 국가가 가졌으니까 이 유대 국가는 이렇게 만약에 유대 법에 위반됐을 때는 돌에 쳐 죽이던지 어떻게 죽이던지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거나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거나 전부 다 이것은 바로 이 현실, 생명을 쥐고 있는 현실 자체를 자기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국가가 신을 대신 한다면 개인은 어디 있느냐, 여기서 어려운데요. 개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국가가 있는 요 안에 개인이 들어가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뭐냐 하면, 동조입니다. 동조. 동조해 주는 거예요.

 

이 사회에서 직장생활 한다는 것, 이것은 본인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이 사회에 동조한 거예요. 동의한 겁니다. 자기가 동의해 놓고 이 사회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떤 처벌을 받아도 우리는 할 말이 없지요. 이 동의하게 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받고 싶다’와 ‘무섭다’ 예요. 인간의 상반된 두 가지 심리성이 있어요. 사람이 태어나게 되면 딱 두 가지에요. 그 사람 마음속에. 딱 두 개가 서로 왔다, 갔다 해요. ‘나는 엄마한테 사랑받고 싶어.’ 또는 ‘나는 엄마가 무서워.’ 항상 이 두 개가 있어요. 사랑받고 싶고 무섭기 때문에 이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나를 휘감아 도는 어떤 나보다 더 센 나보다 더 힘이 있고 더 범위가 넓은 어떤 것을 요구하게 마련이고 이것은 자진해서 거기에 순응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어요. 순응했을 때 사랑받고 만약에 거기서 법에 위반되면 나는 얻어맞는다는 이 공포심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국가를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자식이 부모를 선택합니까?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국가도 인간은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태어난 그 순간 태어난 그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국가에 소속되면서 국가에서 묻지를 않아요. 이런 게 어려운데요. 내가 여기 있으매 신이 있는 거예요. 왜냐 하면 누가 나를 만들었겠어요? 신이 만들었으니까. 신에 대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고 신에게 사랑 받을 것이냐, 아니면 신에게 내어 쫓음을 당할 것이냐, 요런 상반된 감정 속에서 그냥 그 안에 머무는 거예요. 따라서 제가 이 말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소속된 이 세상에서 구원될 수 있다? 없다? 구원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구원이란 말 자체가 대부분 사기입니다.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발상이에요. 구원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가 잘살기를 원하지, 사랑받기를 원하지, 구원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모세가 애굽에 나타났을 때, 애굽도 모세를 반대했지만 누구도 반대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지시해서 건져내라는 그 히브리인들도 모세를 격렬하게 반대했어요. 왜, 무서우니까. 뭐가? 애굽이 무서우니까. 가룟유다가 그 당시에 권세 잡은 자를 무서워하고 베드로가 무서워하듯이 인간은 별난 존재가 없어요. 태어났으면 태어난 그것에 그냥 순응부터 시작하는 게 인간의 인생의 시작입니다. 걸음마할 때부터 순응을 보는 거예요. 순응을 생물학적으로 적응이라 하는데. 그냥 적응하는 거예요.

 

종교라 하는 것은 하나의 탈 쓰는 거죠. 가면이죠. 신앙종교생활이라 하는 것은 취미이고 탈을 쓴 가면을 벗겨보세요. 벗겨보면 어릴 때 그 마음 여전히 그 안에 수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요. 어릴 때 마음이. 사랑해주면 이게 불교신자인지 통일교인지 김정은인지 북한이든 뭐든 괜찮아요. 나를 사랑해 준다면 북한에 살 용의가 되어있는 게 우리에요. 나를 사랑해 준다면. 진리? 정의? 그것은 나중에 자기한테 불리할 때 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아요. 정의롭지 못하다고. 하지만 돈만 먹여버리면 나에게 정의로운 게 뭐냐, 내 이익을 얻으면 그게 전부다 이유 없이 전부다 무조건 정의에요.

 

진리라 하는 것은 승자의 여유입니다. 이긴 자가 진리를 외치고 역사를 말하고 정의를 말하지 패자는 정의를 말할 그런 자격조차 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패자, 진자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생존에 불리한 것.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걸 뭐냐 하면, 세력 또는 힘이라 하지요. 그러니 인간은 저주받은 사회에서 인간의 사는 방식은 딱 하나입니다. 힘을 모으는 것. 그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마귀 보고 싶어요? 마귀 못 봤어요? 마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마귀에요. 마귀가 따로 있고 마귀는 싫어 라고 할 대상이 아니고 내가 힘을 원할 때, 힘을 주겠다고 등장하면 그게 바로 마귀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개척교회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은 어떻게 하면 내 중심으로 힘을 모을 수 있느냐, 이건 개척교회나 큰 교회돼도 마찬가지고 큰 교회 됐다고 이만하면 됐다고 하는 교회 없어요. 계속해서 모든 힘들은 직결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굶게 했습니다. 힘 빼라 이 말이죠. 성령께서 일부러 40일 동안 금식하게 했고, 힘 뺀 상태에서 마귀는 달려들었지요. 정신 차리세요. 돌이 떡 되게 정신 차리시고 당신이 메시아라면 사명을 감당해야 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기 얻으려면, 사람들은 기적을 원하기 때문에 기적을 베풀면 당신은 메시아로 인정해 줄 것이고, 당신의 사명은 원활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을 당신과 더불어서 함께 모든 것을 점령합시다. 마귀가 제안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 뜻을 이루러왔다. 다시 말해서 나는 힘 빼러 왔다. 나는 죽으려고 왔다. 이리 되는 겁니다. 이 땅에 죽으려고 왔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모든 걸 자기한테 직결시키려고 원하는데 주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벌써 이야기 톤이 달라요. 한 알의 밀알이 죽지아니하면, 벌써 방향이 죽음이고 제자들은 “예수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높겠습니까?” 이미 힘의 이야기고,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은 중보자라고 이야기해요. 성경에 나오니까 맞는 것처럼 들리지요. 문제가 그겁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예수님이 중보자다. 그러면 예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누구냐, 중보자 또 생겨야 돼요. 그러면 예수님1, 예수님2가 등장해야 됩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예수님이 중보자라는 것은 틀린 말이에요. 예수님이 중보자로 오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없다는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인간은 중보자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원했던 것은 창세전에 택한 백성은 예수님이 중보자에서 새롭게 생겨난, 예수님이 새로 만들어낸 인간이지 인간에게는 중보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지체로서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새로 만들어내야 돼요. 새로운 피조물 되어야 되지, 나 있으니까 나를 건져봐라, 이런 중보자는 없습니다. “자, 하나님 살아있다면 나 한 번 건져보시지. 솜씨 한 번 보자.” 이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로마 군병들이 그렇게 조롱하면서 한 거예요. “당신이 이 자리에서 지금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나 당신 믿어줄게.” 또는 예수님의 눈을 감기고 뺨을 때리면서 우리 중에 누가 쳤는지 알아 맞춰봐. 그럼 당신을 메시아로 알아줄게. 이렇게 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빌라도가 예수님 보고 뭐라 했습니까? 진리가 뭐냐 물었지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당신이 진짜 진리라면, 내가 미흡한 거, 내가 부족한 걸 채워준다면 당신 믿을 용의가 되어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인간은 중보자를 원해요. 하나님은 인간이 원하는 중보자를 주지를 않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중보자 필요 없어요. 그냥 지옥 가세요. 그럼 돼요. 인간을 왜 구원하는데? 예수님은 꾸역 꾸역 자기 영역 만들러 왔지, 사람하고 협상하려 온 게 아니에요. 타협하러 온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에요. 종교는 이런 거예요. 신은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신은 인간을 책임질 것이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불쌍하게 봐서 그들을 건진다. 이건 종교고 그건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칸트라는 철학자 들어본 적 있습니까? 칸트의 철학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인간 속에는 영원한 것을 인간의 이성 속에 포함이 되어 있다고 본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성령 치워라, 신의 계시, 성경 치워라, 인간이 인간 속에 인간만 연구하게 되면 그 안에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걸 끄집어내면 그것이 천국에 대한 계시가 되는데 무엇 때문에 성경을 왜 드려다 보느냐 이 말이죠.

 

인간은 따지고, 이성이라는 게 따지는 거예요. 인간은 따지고 연구하게 되면 그 안에서 ‘야,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은 세상에서 훅 가는구나. 죽고 난 뒤에 어디가지? 죽고 난 뒤에는 좋은데 가야지. 좋은데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좋은 데는 보이지 않는 신의 음성을 들으면 되지. 신의 음성 듣고 거기다가 순종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좋은 나라로 가는 응답이다.’ 그게 칸트의 철학이에요. 교회치고 칸트의 철학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나 여기 왔다는 거예요. 신이시여, 제가 여기 출석, 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뭐 어쩌라고? 나를 이뻐해 보란 말이야. 어릴 때 두 가지 뭐라 했습니까? 사랑받고 싶다. 그리고 왠지 모든 게 모르는 게 있으니까 미지되니까 무섭다. 이 말입니다. 사랑받고 싶고 무서운 것은 앎을 통해서 무서운 것이 미리 해소되기를 원하는 이 두 가지 인간의 심리를 교회가 채워주면 교회는 부흥되지요. 커미션 받고 자기는 생활비 하면 되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의 복음은 이겁니다. 나는 그분을 만났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사람을 약 올리는 것밖에 안돼요. 자기는 좋겠다. 왜? 다메섹에서 누굴 만났어요? 예수를 만났잖아요. 그러면 예수를 안 만난 우리는 뭐가 돼 버려요? 만난사람이 티내는 자랑 질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사도행전22장 6절에 보세요.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말이에요. 누구 기 죽일 일이 있어요? 그 이야기를 왜 했습니까? 사도바울의 경험이지 내 경험이 아니잖아요. 그럼 그 사람들은 뭐라 하겠어요? “그럼 너 같은 똑같은 경험 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이 말이냐?” 라고 할 것이고 만약에 사도바울이 “그래” 라고 나온다면 “그럼 천국에 갈사람 몇 명되지도 않아.” 이리 나올 거란 말이죠.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이 기껏 숫자 해봐야 500명밖에 안돼요. 그럼 천국에 500명만 가고 나머지는 못 가는 겁니까?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이 사람이 내가 너에게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했어요. 고린도전서2장 4절에 보면, 내가 말하는 것은 한사람을 더 꾀려고 설득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뭐냐, 이건 ‘성령의 나타남’이라 했습니다.

 

성령의 나타남이라 하는 것은 사도바울은 이리 있는데 사도 본인마저도 제치고 비켜, 비켜! 너는 내 뒤에 서! 하고 뭔가 사도바울 앞장서서 일하시는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 분이 누구냐, 성령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보기에는 뭐가 보이는가 하면, 사도바울이 보이지 지금 성령이 안 보이는 거예요. 사도행전에서 요한과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건졌잖아요. 앉은뱅이를 건졌을 때, 이건 누가 봐도 사도 요한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한 거예요. 그런데 요한과 베드로가 하는 말이 방금 예수님이 일했잖아. 이리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지금 사도들이 있는 그 위치, 공간과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의 공간이 성령만 떼어놓으면 같은 위치에 있는데 성령이 들어가면 둘 다 하나의 큰 풍선 속에 들어 가가지고 서로 소통이 안돼요. 막이 있어서 막을 뚫고 나올 수가 없어요. 이것을 ‘성령 안’ 또는 ‘그리스도 안’ 또는 ‘예수 안’ 이라 했지요.

 

예수 안에 있으면서 나는 죽었고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그리스도 십자가 안, 이것은 그냥 안, 밖 할 것 없이 그 자체 세상이죠. 그래서 21장 26절에 보면,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함께 결례를 행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전에 사도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을 뭐로 보느냐 하면 서원한 사람으로 본 거예요. 이것은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아야 되는데요. 서원을 할 때는 이걸 나실인이라 합니다. 민수기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민수기6장에 나올 때는 자기가 작심하고 신에게 이 기간만큼은 세상과 다 끊어버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내 몸을 헌신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성경대로 1년 살기‘ 라는 책이 있어요. 바보처럼 성경대로 1년만 살고 그만 살려는 목적이지. 성경대로 1년만 살기가 있는데 성경을 교훈 책이고 잔소리 책이라면 1년 동안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제대로 성경을 1년 동안 사는 게 뭐냐 하면, 이게 나와야 돼요. 내가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나는 죄인입니다. 그게 나와야 돼요. 그래서 1년 뒤 2년 되고 3년 되도 성령 안에서 살아가게 되거든요. 구약에서는 기간을 정해서 거기에 말씀대로 세속과 멀어지면서 살기가 나와요. 포도주와 시체를 만지지 않고 살아가는데 그게 끊고 난 뒤에는 세속으로 와야 될 때, 30일 동안 결례, 30일 적절한 제사를 드리고 그렇게 해서 나오게 돼 있어요. 이걸 30일해야 되는 것을 이 결례를 간편하게 해가지고 그래서 제사 드려서 이제는 다시 세상에 온 걸로 그렇게 협상을 본 거예요.

 

사도바울이 이런 민수기 율법이라든지 민수기6장이라든지 그 당시 이야기해주는 것은 뭐냐 하면, 이미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 투성이고 절에 가고 이슬람 어디에 가도 성령은 성령이 앞장세우기 때문에 조금도 어떤 법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절에 가서 절에서 주는 음식을 먹었다. 그게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그것가지고 죄냐, 아니냐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지난 주일오후 설교에서 했잖아요. 반하면 조건이 문제가 안 된다. 했지요. 내가 누구한테 반해버리면 그대 앞에 선 자체가 그대 앞에 선 내가 생각이 안 나고 그냥 그대만 크게 보일 뿐이에요. 이게 구약의 아가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저 굶어죽어요.” 라고 하면 아가서에 있는 신랑이 하는 말이 “내 사랑은 니가 죽어도 니 죽음보다 더 커.” 크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가서의 마지막 결론부분이거든요.

 

예수님에게 반해버리면 예수님은 절대로 우리의 어떤 조건을 묻지를 않아요. 내가 절에 가서 비빔밥을 먹었는데 이게 죄입니까? 아닙니까? 이슬람교에 갔는데 이슬람에서 시키는 대로 절을 했는데 그게 나쁩니까? 아닙니까? 예수님한테 반해버리면 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예수님의 사랑에 만끽하지 못하고 반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 제가 봉사할까요? 아니면 봉사 안하고 내 인생을 따로 챙겨야 됩니까? 이런 모든 것이 법적인 관계망 속에 엉켜 있는 거예요. 꿈속에 그런 꿈 있잖아요. 거미줄에 들어갔는데 거미줄이 너무 세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는데, 그런 게 있잖아요. 우리는 내가 만든 내가 스파이더맨이에요. 내가 만든 거미줄에 꽁꽁 걸려서 매일 걸려있는 거예요.

 

문을 밀어야 되는데 당겼는데 이게 죄냐 하는 그 문제, 보상금을 받았는데 보상금의 십일조를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부조가 들어왔는데 부조금의 십일조를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그런 문제, 모든 것이 법적으로 따지려는 그게 있어요. 법대로 하면 사랑받고 법대로 안하면 혹시 주께서 매매하면 내 일이 꼬이게 되는 두려움 같은 거.

 

주님께서의 사랑은 어떤 조건, 어떤 행동도 세리가 됐든, 창기가 됐든 묻지를 않습니다. 그걸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아느냐 하면, 주님이 그런 사랑을 했다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은 알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은 구애받지 않고 그냥 어린애처럼 하나님을 받들듯이 그냥 주님만 받들지요.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삽니까?” 가 바르게 산다는 그 문제가 이미 나의 숙제에서 무거운 짐이 떼르르하고 굴러 떨어져가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삽니까, 가 떨어지는 거예요. 내가 바르게 사느냐, 바르게 살지 않느냐, 이게 문제거리가 되지를 않아요. 제가 대구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고린도전서15장하면서 우리는 흙에 속한다 했지요. 흙에 속했다는 말을 이걸 사랑으로 들으시면 그냥 그 자체에 나는 반해요.

 

내가 흙이구나! 흙인데 흙이 착하게 살면 예쁜 흙이 됩니까? 쫀득 쫀득한 흙? 맛있는 흙? 그런 게 되는 거예요? 이리 사나 저리 사나 흙은 흙이에요. 전도서에 나오잖아요. 전도서에 착하게 살아도 일찍 죽는 사람이 있고, 죄만 지어도 오래 고난 없이 잘 먹고 잘사는 사람 있다. 이 세상은 이리 사나 저리 사나 전부 다 희석돼 버리는 거예요. 바다에다가 구정물 부으나 정성 물 부으나 바다는 똑같이 되잖아요.

 

그래서 전도서는 모든 것이 바다와 같아요. 돌고 돌기 때문에 섞이면 그 중에 어느 것이 여기서 여기까지 내 것이고, 요건 니 것이고, 니 것, 내 것이 다 섞여버린다는 겁니다. 사람의 모든 때는 그건 주께서 할 텐데 니가 계획 잡는다고 되지를 않는다. 절대로 계획 잡아도 소용없고 계획 아무리 잡아도 좋은 일 안 생겨요. 16년 동안 해도 안 생겨요. 좋은 일 백날 해봐도.

 

맥아더장군이 그런 이야기했답니다. 사람이 시간이 늙어서, 시간이 지나서 늙은 게 아니고 꿈을 잃으면 늙는다는 그 말이 있어요. 사람이 시간 간다고 늙어 가는 게 아니고 젊은 애라도 꿈을 잃으면 늙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 말은 굉장히 멋있는 말인데 내가 보기에는 이거 같아. 이게 생각나는데, 미끄럼틀 타려면 계단 있잖아요. 계단 내려가서 죽 타면 되는데 꼭 어떤 애들이 있느냐 하면, 거꾸로 올라가요. 올라가면 죽, 올라가는데 죽, 재미 하나도 없어. 뒤에 계단 올라가는 거 모르고 눈에 이거만 보이니까 어린애들 그런 게 있거든요. 나도 그랬는가 모르겠어요. 요게 보이니까 요거 올라가면 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구원의 기쁨은 뒤에 십자가를 통해서 올라갔다가 내려가야 되는데 율법을 기어 올라가니까 올라가면서 내려가는 재미는 모르고 내가 지금 어디까지 올라왔나? 어디까지 왔나? 매일 어디까지 왔나 하다가 순간 미끄러져 버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간음하면 간음죄라 했는데 드라마의 전지현은 왜 그리 이쁜지, 졸닥 내려가 버리고. 구원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미 세리든 창기든 이미 올라와 있어서 죽~ 시원하게 내려갈 때, 성령 안 받은 인간이 끙끙 올라가는 이 과정을 이건 아주 자랑질하듯이 보란듯이 휘파람불면서 쏴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이런 재미 못 봤지? 하고 쏵~ 하고 내려가는 거예요.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마음껏 내려갈 수 있는 거예요. 낮은 곳을 향하여. 거지 나사로 돼도 괜찮아요.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도 괜찮고. 돌에 맞으면서도 기뻐하는 그 즐거움이 있고.

 

이것은 가정에 저주 있을까 싶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까딱 까딱 올라가면서 했는데 쭐떡 내려가고. 돈 바쳐도 안 돼, 몸 바치고 교회에 봉사해도 안 돼, 아~ 참, 꿈을 가져라 하는 것도 뭔가 근거가 있어야 되지 백날 올라가봐야 지는 나중에 쭐떡 내려가지.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오후인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대구공부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은 2013년도가 되면 아무리 많은 걸 했다 하더라도 2014년도 되면 2013년도로 되돌아갈 수 없잖아요. 이미 날아가 버린 거예요. 지금까지 아는 것은 2013년도 까지만 알고 문제는 2014년도 내일일은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항상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인간은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어요. 아는 것은 이미 되돌아 갈 수 없고. 매일 닥쳐오는 것은 모르는 것만 남아있고.

 

그러니까 시간을 이렇게 하지 말고 대전공부에서 시간의 역전했지요. 시간을 거꾸로 타게 되면 이건 완전히 동계올림픽이에요. 신나게 스키 점프하듯이 마구 날려버려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점프 스키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붕 날려버리세요. 이것은 바로 오직 나 같은 인간에게 이미 몸값을 치렀으니 그 분에 대해 반해버린 거예요. 어떤 조건도 묻지 않겠다는 그 점에 대해서 완전히 반해버렸어요. 좋아도 너무 좋아.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협상을 본 것은 바로 너희들은 율법에 매여 있지만 우리는 율법에 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율법 속에서도 성령의 공간은 침투할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법이 있어요. 우리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잘하면 사랑받고 못하면 미움 받으면 우리는 무섭고,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이 와버리면 잘하고 잘못한 것을 아예 내가 나한테 닦달 냈지 정작 주님은 전혀 우리한테 묻지도 않는 걸 우리는 매일 내가 어려운 문제를 내가 스스로 출제해 놓고 끙끙거리면서 그걸 풀고 있어요. 그걸 도착증이라 해요. 도착증이라 하는 것은 원래 성적인 병인데요,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여자가 벗어놓은 스타킹을 붙들고 자고 하는 그런 변태 있잖아요. 그걸 도착증이라 해요. 경로가 그 경로가 아닌데 엉뚱한 경로로 돌아가는 것을 도착증이라 하거든요.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을 세 분류로 나눕니다. 정신병이 있고, 신경증 환자 있고, 도착증, 전 세계 모든 인간을 세 개로 나눠요. 정신병하는 것은 환자를 말하는 게 아니고 정신분석학에서는 환자와 정상이 따로 없습니다. 전부가 환자입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인간은 날 때부터 이단이거든요. 아담의 조상이 날 때부터 이단이거든요. 날 때부터 신이 아닌 걸 신이라고 인정하고 살아가거든요. 이걸 정신분석에서는 어떻게 밝혀냈느냐 하면, 정신병은 신이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신경증은 신을 인정해서 신을 따라 붙이려고 해요. 신이 시키는 대로 다 하려는 거예요. 신이시여, 이러면 어떻습니까? 제 점수 어떻습니까? 항상 신에게 점수 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걸 신이라 하는데, 이걸 정신분석학에서는 ‘대타자’라고 합니다. 대타자는 아버지를 두고 얘기해요. 애들의 모든 정서와 마음은 공중에서 그냥 떨어진 게 아니라 어디서 세우는가, 가정에서 하지요. 가정에 누가 배치되어 있어요? 주변에? 가정에 태어나면서 배치된 인물이 있어요. 그 배치된 인물이 석고상처럼 가만히 있습니까? 싸우고 웃고 떠들고 하잖아요. 애들은 주변의 인물을 보면서 뭘 보느냐, 계급을 정해요. 순서를 정한다고요.

 

우리 집안에서 오야봉이 누구냐, 아버지냐 아니면 엄마냐, 아니면 나냐, 자기를 집어넣어야 돼요. 힘이니까. 엄마가 아빠를 만만하게 보면 자식도 아빠를 만만하게 봐요. 힘이 없는 걸로 간주해서. 힘의 서열 다툼이 매일같이 24시간 가정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어떤 때는 2013년도 서열과 2014년도 서열이 또 바뀌어요. 갑자기 아버지가 퇴직했다. 서열이 확 바뀌어버립니다. 심지어 서열에 강아지까지 개입해요. 강아지가 지도 인간인줄 알고 그 서열에 끼거든요. 남들이 무시하면 강아지도 무시해요. 그렇게 할 때 인간은 어떻게 정상화하는가 하면, 힘 센 자에게 인정을 해주고. 정신병은 뭐냐 하면, 자기가 최고로 여기며 살아가는 거예요. 신이 없어요. 자기가 신이니까. 자기가 제일 높으니까. 무조건 안 되면 울고 떼 부리고 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그런 애들, 아버지 엄마도 지에게 빌빌 기게 만드는 그런 애들.

 

신경증은 뭐냐 하면, 굉장히 소심해요. 소심하면서 아버지가 하는 대로 어머니가 하는 대로 다 해줘요. 다 하면서 기어이 아버지, 엄마보다 내가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다해.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노림수가 있어요. 절대로 사랑하지 않아요. 결국 자기를 사랑해요. 아버지, 어머니 권위를 인정합니다. 인정하면서 언젠가는 내가 따라 붙일 거야. 내가 아버지만큼 될 거야. 라는 목표점이 있고, 정신병은 지 맘대로 사는데, 지가 왕초인데. 신경증은 신을 지독하게 집착해서 신이 원하는 대로 다해주면서 순수한 수녀 비슷한 사람이에요.

 

도착증은 뭐냐 하면, 없는 신을 따로 지가 만들어요. 구약에는 우상 숭배하는 것. 없는 신을 만들어서 신하고 잘 지내요. 그래서 한국교회에 보면 두 종류가 한국교회에 차지하고 있어요.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해가지고 그 교회에서 자가가 제일 우수한 신앙인으로 티를 내는 사람과 목사 니는 해라, 나는 내 나름대로의 신은 따로 있다. 따로 만들고 신하고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것.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정신병자에요. 신은 없어요. 존재의 의미, 인생의 사는 이유도 목적도 없어요. 그저 술이나 퍼먹고 그 때마다 즐기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결론은 뭐냐, 모두다 정신병환자에요. 인간은. 분석에 의하면 다 맞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안 걸리는 사람이 없어요. 전부 다. 다 걸리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바로 복음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아까 반했다, 했지요. 뭡니까? 사랑. “나, 이거 맞거든요. 맞는데 어찌하여 나를 위해서 이렇게 대신 죽으셨습니까? 이런 인간밖에 안되는데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내 허락도 안 받고” 중요한 건 이거에요. 내 허락도 안 받고. 그런데 여기 정신병 전부다 뭐냐, 항상 애고 자기 자신이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 반해버린 사람은 내 허락도 받은 게 없어요. 받지 않았어요.

 

불교신자들이 사는 그림에 달마가 있지요. 달마그림을 왜 삽니까? 달마그림을 사게 되면 집안에 행운이 오지요. 자, 달마 그림을 구입한다. 이건 결국은 달마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부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구입한 나를 좋아한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은 그건 달마 그림을 돈 주고 산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도착증 비슷한 거예요.

 

도대체 나를 위한 일이 필요 없다니까요. 흙이잖아요. 이리 사나 저리 사나 흙으로 돌아가면 돼요. 왜, 우리에겐 하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하늘의 형상이, 예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리 사나 저리 사나 우리는 흙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흙은 자존심이 있어요? 없어요? 흙이 무슨 자존심이 있어요. 자존심도 없고 배알도 없고 명예도 사치고 누가 욕해도, 흙에게 욕해도 흙이 화냅니까? 흙보고 흙이라 하는데 화낼 게 뭐가 있어요.

 

사도바울은 바로 복음 안에서 그들이 해달라는 건 다 해줘요. 그리고 32절에 드디어 잡히게 됩니다. 죽이라고 나옵니다. 죽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유가 있어요. 29절에 보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사도바울과 같이 동행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과 일행이거든요. 몇 명 안돼요. 한 4명 정도 밖에 안 되는데. 그 사람이 이방인인데 성전에 들어섰으니까 이건 법에 어긋난다는 거예요.

 

성전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루살렘 전체는 성전이 아니고 예루살렘 한 부분에 성전이 있어요. 예루살렘 도시 다른 부분은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필요한 자재를 돕는 거고, 성전은 지성소와 성소가 있어요. 첫 번째 나오는 뜰이 있어요. 뜰은 무슨 뜰이냐, 이스라엘 뜰입니다. 이스라엘 뜰에 또 문이 붙어있는데 이 쪽 뜰이 뭐냐 하면, 여성의 뜰이에요. 여자의 뜰이에요. 여자는 여기까지 올 수 있어요. 그 밖에는 큰 뜰이 있어요. 바깥의 뜰이 뭐냐 하면, 이방인의 뜰이에요. 여기에 문이 또 따로 있어요. 헤롯의 요새가 있고. 로마인들은 여기 바깥에 거주하면서 소란이 일어났을 때, 뛰어 들고 한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이스라엘 뜰에 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방인이 들어왔으니까 사도바울은 유대인이니까 되는데, 이방인이 들어왔으니까 죽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하는 거예요. 왜 죽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 사람들은 국가가 뭐냐,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없으면 그 가정이 어떻게 돼요? 완전히 깨지지요. 국가가 신이고 아버지 신이거든요. 법으로 만든 국가를 모독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한 모든 질서가 다 깨지는 겁니다. 이걸 유지해 줘야 질서가 잡혀요. 이걸 정신분석학에서는 상징계라 합니다.

 

상징계라 하는 것은 전부 다 껍데기에요. 껍데기지만 껍데기와 껍데기가 모일 때 여기서 의미가 생긴다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껍데기를 기표라 하거든요.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지우개라 하지만 지우개하고 지우개는 아무 상관없어요. 그냥 표현을 그렇게 할 뿐이지, 지우개를 글자로 써 놓으면 지우개가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ㄱ, ㄴ, 이거잖아요. 의미 없는 껍데기지만 인간들끼리 껍데기로 소통하는 가운데 비로소 우리는 사는 이유가 목적이 거기서 발생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전부 다 환상을 실제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결국은 환상이. 김연아가 은메달 땄다. 10년 전에 우리는 피겨가 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어요. 괜히 김연아가 피겨 잘 타가지고 국민들이 피겨하면 다 알고 있어요. 일종의 환상이라니까요. 지금도 탄자니아, 우간다 피겨 몰라요. 그 나라에서는 김연아 모른다니까요. 몇 몇 사람은 알겠지만. 그 나라 국민들은 김연아 몰라요. 그 사람들이 바나나만 알지 김연아는 모른다 말이죠. 사람이 어떤 때에는 의미 있다는 것은 그건 의미 있기로 작정한 것이지 사실은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의미 없는데 고 순간에 의미가 생긴 거예요. 왕가네 식구들 드라마가 마지막에 시청률30% 나왔어요. 왕가네 지나면 이제는 왕가네 날아가 버리고 왕가네 대신 다른 게 또 다시 등장해야 돼요.

 

그냥 우리 눈앞에 스크린 영화처럼 자꾸 스쳐지나 가는데 지나가보면 의미 없는데 괜히 거기에 몸 달았지. 괜히 몸 달았어요. 괜히 거기다가 몰입했고. 지금 고3아이들 고민이에요. 6월 달에 월드컵 있다니까. 여학생들보다 성적 내려가면 걱정이에요. 월드컵 안 볼 수가 없거든요. 우리 삼촌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 놓고 차니까 우리 삼촌 하는 말이 저 사람들 이상한 사람이네. 공하나 놓고 차지 말고 공12개 주면 저희들끼리 놀면 되는데 왜 하나가지고 하느냐 말이에요. 이게 공이 하나라야 재미있어요. 공 12개로 놀면 재미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재미를 지가 만들어. 하늘나라와 천국 아무 상관없어요. 인간은 결국 지 즐거움에 지가 빠지고 지가 울고불고 자살하고 이 지경한다고요. 전부다 환상이라. 이걸 가지고 예수님은 껍데기라 했거든요. 껍데기밖에 없는데 껍데기끼리 모이니까 뭐가 있는 것 같아. 그걸 세상이라 하는 겁니다. 그게 상징계라. 그걸 현실이라 합니다. 현실은 환상이죠.

 

사도바울은 복음을 알아서 잡으려면 잡아라. 천부장, 군사들이 잡아갑니다. 잡아가면서 21장 마지막에 뭐냐, 내가 잡힐 때 잡히더라도 한 마디만 하고 갈게요.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우리 같으면 하나님 왜 잡히게 하십니까? 이리 나오는데 이게 아니고 이미 우리는 사도바울은 다른 의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흙으로 규정받았고 이 흙이 예수님의 성령이 있기 때문에 하늘의 형상으로 변화되기 직전에 잠시 잠깐 지금 이 세상에 놀다 가는 거예요.

 

놀다가면서 재미난 놀이처럼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22장하는 말이 뭘 전하는가?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여기 사도행전을 하면서 공식하나 만듭시다. 복음을 전하는 환경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집어넣는가 하면,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복음이 나오도록 그렇게 조치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하철에 가서 예수 믿으세요. 그게 복음이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외에는 희망 없다는 사태가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럴 때 복음 전할 때, 여러분들이 설득력 있게 하는 게 아니고 사도바울처럼 성령이 비켜! 비켜! 비켜! 내가 널 앞장세워서 내가 전할 거야.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우리를 껍데기 같은 기표 같은 의미 없는 우리를 가지고 주께서는 성령께서 직접 나서서 우리를 통해서 고난 가운데 있게 만들고 우리 입을 통해서 천국의 복음, 십자가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도할 부담을 갖지 마세요. 숙제는 내 숙제가 아닙니다. 주님 숙제지. 주님 숙제를 왜 내가 걱정합니까? 우리의 일체 문제를 삼는다? 삼지 않는다? 전도를 하나 안하나, 헌금을 하나 안하나, 교회를 다니나 안 다니나, 일체 문제 안 삼아요.

 

구원하는 것은 주님 소관이지, 내 소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일하시는 것에 그냥 그게 너무 멋있어. 반해버릴 뿐이지, 우리가 이 세상 책임질 건 없습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