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 11-13 / 하나님께로 난 자들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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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 난 자들 2001년 7월 18일 본문말씀: 요한복음 1: 11-13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세상에는 귀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하고 정작 좋은 것은 성경 안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내 자녀'라는 인정을 받아 본 적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요. 초대 교회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사실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 서슴없이 내어놓았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할 것 같으면 초대 교회 교인들은 서로 먼저 순교하겠다고 나섰다고 합니다. 먼저 죽는 것이 곧 주님과 먼저 함께 거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사실이 신났던 것입니다. 이 땅에 대한 미련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소중하며 무엇이 덜 소중한가를 구별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 이 한국 땅에는 곳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지만 소중하지 않는 것을 도리어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성도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실망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대해서 이미 그 자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약이 끝나 있습니다. 교회를 많이 세운다고 하늘 나라에 자리가 더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교회가 모두 절이 되었다고 해서 하늘나라 못 가는 것이 아니니 여기에 대해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기죽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사실에 대해 옆에서 안 알아주고 환영하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조용히 감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이 힘들다고 여겨지겠지만 이사야는 벌거벗은 채로 3년을 전도를 해야했고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구덩이에 들어가서 지내야 했고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평소에 늘 기도해주던 그 자식들을 다 죽게 되었고 재산마저 날라 갔으며 사랑하던 아내마저 자기 신앙을 안 알아주고 욕하고 떠나버렸고,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정해 왔던 친구마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고 욕했고, 더 나아가서 자신 신체에 악청이 나서 편한 밤을 지낼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조차도 성경은 그래도 믿음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불평하면서, "아, 예수 믿는 것이 이토록 외롭고 쓸쓸하구나"하는 탄식도 어쩌면 우리 주제를 모르는 사치스러운 마음가짐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 자녀'를 설명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았던 사람을 먼저 모델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도 바울인데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그 사람의 형편이 나와 있습니다. 4:7-10에,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더 심하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4-8절과 그 뒤를 보면,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나오는,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라는 이 대목이 참으로 실감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를 싫어하는 가정에서 같이 생활하다보면, 마치 죄도 없으면서 이유 없이 벌받는 듯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제가 뭐가 잘못한 일이 있기에 이런 징벌을 주십니까?"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하나님이 특별히 그 사람만을 지목해서 미워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만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성령의 충만을 받고 누구보다도 하나님도 인정하시고 예수님도 인정하시는 사도 바울에게도 마치 징계 받는 듯한 상황을 주시더라 이 말입니다. 우리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는 수모를 받았습니다. 단지 예수 믿는 것을 취미 생활의 일부로 여긴다면 이런 상황이 찾아오면 금방 손떼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사람 같으면 도리어 이런 처지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얼마나 소중한 신분인지 더욱 실감을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교회 10년, 20년 다닌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하고 싶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점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지 않느냐 라는 것입니다. "이러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라는 것부터 먼저 정리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무엇 무엇이 아니고'를 먼저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6:16-17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네 아버지'가 아니라 '내 아버지'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그런 신앙을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혈육과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가지고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냐 아니냐가 판가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사실과 '그 사실을 어떻게 되었느냐'에 대한 그 과정이 합쳐져서 성경 적으로 O. K가 되어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다운 것입니다.
여기서도 구약 성경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왜 혈육으로 되지 아니한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선한 윤리나 도덕이나 이웃 사랑이나 하나님 사랑이 인간의 실천력으로 해낼 수 있다고 자신 만만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예를 출애굽기 4장에서 들겠습니다. 4:22-23에 보면,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어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에 들어갑니다. 모세가 길을 가는데 숙소에서 모세를 도리어 죽이시려고 합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지 않습니까. 일을 시킨 당사자를 죽여버리고 한다면 그렇다면 애초부터 왜 모세에게 일을 맡긴 겁니까. 다른 사람은 죽이더라도 모세만큼은 안 죽도록 되레 지켜주어야 될 분이 오히려 모세를 죽이고자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때 모세가 십보라가 뭔가 눈치챈 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얼른 가서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그 양피를 베어 모세 발 앞에 던집니다. 그래서 해서 죽어 가는 모세가 낫게 되었습니다.
참 이것이 신기하고 이상하고 이해가 잘 안가는 대목이잖아. 지금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만들고자 하십니다. 여기서 모세가 죽음에 처한 것과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가 상호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취지에 대해 모세 가정에서부터 무슨 하자나 문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모세가 당했던 병은 다른 죄 때문에 걸린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됨'을 모세 가정조차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하나님이 알려주신 조치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해서 모세가 살아났는가 이 점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이 되겠지요. 모세 가정에서부터 "아하,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만드시는 구나"하는 점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모세 가정은 이 고백을 말로 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놀랍게도 할례 행위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양피를 모세에게 던지면서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당신은 피 남편이군요" 다시 말해서 피 없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가정의 가장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성화, 성숙 백년해도 예수님의 피를 유일한 신앙 고백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피 없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었다는 증거와 증표를 지닌 채 이제 모세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있는 곳으로 자기 인생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가는 곳을 봐라. 거기에 뭐가 나타나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은 예수의 피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갑니다. 모세와 예수님하고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모세를 엘리야와 더불어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말입니다.
결국 모세가 가고자 하는 곳은 무엇입니까? 이 지상과 하늘 나라의 접합되는 곳은 어딘가요? 바로 그곳은 십자가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어떤 과정, 무엇이 개입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 십자가의 피가 전부를 말해줍니다. 혈육은 죽어야 될 것이지 구원이 도움될 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자녀라면 오직 예수님의 피만 증거 할 따름입니다. 십보라가 왜 아들에게 할례를 행할 생각을 다한 것입니까. 보통 남편이 숨이 헐떡거리고 죽어 가면 그 남편을 위해 아내가 무엇을 해줍니까? 수지침으로 손가락 따 주는 정도이잖아요. 아니면 전신 맛사지를 해주든지 말입니다.
그런데 십보라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거룩한 피가 나올 데가 한 군데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언약의 피입니다.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계약입니다. 거기 보면, 누구든지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십보라는 지금 자기 남편이 헥헥거리며 죽어가고 있으니 이는 필시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계약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 때까지 자기 아들이 아직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황급히 십보라는 아들의 양피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럴 때 언제 아팠느냐 할 정도로 모세는 아무 탈이 없이 다시 소생되었습니다.
모세 가정에서 일어난 이 일이 앞으로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에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런 절차가 되풀이되고 반복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탄생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그 배후에 피가 있어 그 피에 의해 '피 남편'으로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언약의 피, 그 계약의 피가 죽을 육신으로 산 생명으로 바뀌게 합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오늘날에도 칼 들고 다니라는 이야기가 됩니까? 아닙니다. 구약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모형을 볼 수 있는 곳, 예를 들면 건축사 사무실 같은데 보면 거기에 모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앞으로 지을 집을 그렇게 모형으로 만들었는데 거기 있는 집을 실제 집인 줄 알고 들어가 가려는 자가 있다면 완전히 그 사람은 바보입니다. 모형을 보고 실체를 가름하지요. 더 이상 모형과 그림자를 붙들고 살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래도 계속 모형 되는 것을 붙들면 우리는 그 모형에서 뿜어 나오는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날에 그러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4:4-7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 가정은 그 당시 계약인 할례 계약 안에서 피를 내었는데 이 시대의 피는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그 피가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하셨다는 겁니다. 더 이상 신약 시대에는 십일조도 없고 안식일도 없다는 겁니다. 제사장도 없고 성전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유월절이나 맥추절도 없습니다. 만약 아직도 십일조가 있고 안식일이 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헛죽음입니다. 십일조하고 지옥가게 됩니다. 아들이란 지키는 자가 아니라 누리는 자입니다. 아들이란 아들의 유업을 이을 자라는 겁니다. 하늘이 주는 자비와 긍휼과 용서를 매일의 삶 속에서 누리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지키는 율법은 지나간 것입니다. 주일성수가 다 무엇입니까? 인간들이 만든 안식일에 불과합니다. 갈라디아서 4:9-11에 보면,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려고 하거든, 십일조가 어떻게 안식일이 어떻게 하면서 지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 믿으려고 하거든 이런 짓들을 하세요. "예수님 참 쓸데없는 짓 했습니다. 십자가에 피 안 흘려도 우리에게는 십일조 율법이 있고 안식일 율법이 있는데 참 공연한 짓을 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제 거기서 벗어나세요. 여러분 사람이 뭘 지키게 되면 여러분이 자유함을 얻는 줄 압니까? 착한 일을 하면 그 때부터 날개 돋은 듯 가벼운 지는 줄 아세요? 아닙니다. 다음에는 꼽배기로 하지 아니하면 편치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는 올무입니다. "작년에는 내가 전도를 10명했는데 올해는 한 명밖에 못했으니 야 나는 믿음이 떨어졌구나"하고 느끼게 됩니다. 이는 스스로 저주를 짊어지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지목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 됨을 예수님의 행위에서 나온 능력이라고 증거하는 자입니다. 뭐든지 소유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성도는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로 아들되게 하신 그 배경의 상황을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무엇이 하나님에게 아쉬운 것이 많아 원망합니까?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원망할 것이 없는데 왜 쉴새없이 하나님을 미워하게 됩니까? 산다는 것이 조차 우리에게 큰 사치인 것을 알게 해주시고 남은 여생을 은혜를 누리며 사는 재미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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