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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19-28 / 세례 요한이 증거한 것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19-28 / 세례 요한이 증거한 것

정인순 2013. 12. 28. 10:34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1080105.mp3

 

이근호

 

세례 요한이 증거한 것

2001년 8월 1일

 

본문말씀: 요한복음 1:19-28

 

1: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1: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1: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1: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1: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1: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1: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1:28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요한복음 1:5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을 가지고 어두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은 이 세상을 어둡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왠지 사는데 괜찮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더 앞서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뭐 어땠어. 이만하면 살만한 세상이잖아. 그런데 뭐가 문제야??

 

그러나 성경은 어둡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12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봐서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세상은 어둡고 이 어둡게 만든 세상 주관자들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라면 반드시 이 주관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런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깊은 내막이 담겨서 뜻을 알기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교회를 안일하게 다니게 될 때, 과연 이런 성경의 감각이 우리에게도 같이 생길 수 있습니까? ?아이구 이 어두운 세계를 빨리 벗어나서 빛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라는 열망으로 충만합니까? 우리는 우리 신상만 잘 풀리면 만사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저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 이러니? 하면서 위로 받기에 급급합니다.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보고 싸울 생각을 안하고 말입니다.

 

제가 젊을 때 봤던 영화 가운데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상당히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많았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은 주인공이 동굴 속으로 도망칩니다. 그런데 깜깜한 동굴 끝에 한 줄기의 빛이 비쳐 옵니다. 주인공은 ?이제 살았다?하는 기쁨으로 얼른 그 구멍을 통해서 동굴을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 구멍을 나서려고 하니 그 구멍은 수백 리 낭떠러지 절벽 한 가운데 뻥 뚫린 출구였습니다. 주인공은 참으로 황당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를 안일하게 다닙니다. 언젠가 이 아름다운 세상이 끝나면 아름다운 천국이 자신을 반길 것이라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펼치면 세상이 어둡다니 악이 주관자들이 현 세상을 다스린다니 하는 소리가 나오면 ?뭘 그럴까?하고 대수롭지 않고 안일하게 스쳐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찬란한 천국에 도착하는 희망을 갖습니다. 하지만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과 같이 나중에서 절벽에 떨어지는 황당한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평소에 성경에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무시한 결과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나중에 황당한 일을 당하기 전에 방향을 제 방향으로 틀어야 한다고 알려주는 천국 정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뭔가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뭔가 본 것이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뭔가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도 뭔가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구원을 받았고 천국을 갔던 사람들은 일반인들과 다른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낯선 말씀을 그대로 수용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왜 이 세상이 어두움인 지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거기 비하여 우리가 교회에서 듣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에 안 봐도 충분히 납득이 되는 이야기, 신문에 나오는 이야기, 이 세상사는 이야기, 교회 오래 다니면서 익숙해진 교회라는 종교 집단 내의 이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묻는 질문과 그 대답이 잘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묻기를, ?네가 누구냐??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속시원하게 답변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류의 사람은 아니다?하는 식입니다. 그들에게 친절하게 답변해 주는 것이 세례 요한이 아니라 그들이 질문 자체가 글러먹었다는 식으로 ?아니다?라는 말만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질문하는 그 범위 안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은, 엘리야라고 했고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이와 같이 ?내가 엘리야이며 내가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다 소개하면 될 터인데 세례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을 고려해 볼 때 오늘 본문 말씀은 안일하게 성경을 읽는 자들에게 답답함을 안겨다 줍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세상이 어둡다?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즉 세례 요한이 속한 세계와 세례 요한에게 질문을 퍼붓는 세계가 같은 세계 속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인간들에 의해 어두운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해봤자 그들이 못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빛의 세계요 다른 하나는 어두움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어두움의 세계에 속한 자들은 이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세례 요한마저 자신들이 속한 세계 안의 사람으로 간주해서 질문을 퍼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아니다. 너희들이 질문한 범주 안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같은 점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즉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의와 최선을 다하는 행위들을 전부다 어디 밑에다 집어넣는가 하면 바로 바리새인의 의 아래로 한데 몰아세웁니다.

 

그러면서도 하시는 말씀이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 속한 세계에서의 구원이란 아무리해도 바리새인 보다 더 완벽할 수 없으며 그럴 정도로 완벽한 바리새인의 의로도 결국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자기 의로 구원될 수 없다는 말씀을 이와 같이 하신 것입니다. 구원이란 어두움에 속한 유대인들과 같은 사고방식에 의해서는 아무래도 가능치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뭘 알아야 하면, 도대체 유대인들이 구원에 대해서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는가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어두운 세상?, 혹은 ?악한 세계?라고 한다면 기껏 에이즈, 마약, 단란주점, 미아리 텍사스촌이나 사창가나 방탕한 밤의 문화를 연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어두움의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그 거룩한 종교 단체의 모습이 바로 그 정점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네들은 이미 알고 있고 확신하고 있다는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바로 어두움의 산물에 나온 구원방식으로서 거짓된 하나님 지식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자, 여기서 유대인들이 이러한 질문을 세례 요한보고 물은 그 취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에 정통하고 그 구약의 말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 말씀에 의해 메시야를 참으로 고대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구약 선지서 말라기에 보니 이런 말씀이 나온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말라기 4:5-6의 내용입니다. ?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기에 보니, ?크고 두려운 날? 즉 세상에 총체적으로 심판 당해 멸망당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무슨 조치를 취하시는데 그 조치가 다름 아닌 엘리야를 다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말씀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철떡 같이 믿는 유대인들은 이런 종말과 구원의 징조를 놓칠 리가 있겠습니까.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래, 엘리야는 다시 온다. 그런데 그 분이 와서 무슨 일을 하지? 그렇지.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도, 그리고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리는 일을 하신다.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자가 나타나면 그 자가 바로 메시야 오기 직전에 와야 한다는 그 엘리야가 분명 맞다?하는 식으로 신학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란 딴 게 아니라 엘리야 만이 할 수 있는 회개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의 마음을 지상에서 아비에게로 되돌려 놓기 위한 사전 조치인 것입니다. 정말 누가 판단해도 이러한 해석이 참으로 합당한 해석처럼 들리겠지요. 말라기의 그 말씀을 보고 이렇지 정리 안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제 정신을 가진 자라면 다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 순수한 마음에서 세례 요한에게 다가와서 ?당신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으니 당신이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 그 엘리야가 맞소??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도 어지간하지 웬만하면 ?맞소. 당신이 말한 엘리야가 바로 나요. 나의 세례는 곧 회개의 세례요?라고 하면 될 터인데 세례 요한은 결단코 아니랍니다. 그러면서도 세례는 세례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바로 그 해석이 어두움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자신은 이사야가 예언한 바로 그 ?소리?라는 것입니다. 23절에 그렇게 나와 있지요.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자,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왜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의 질문 자체를 정면에서 해야만 했는지 그 내막을 이사야가 예언한 그 예언의 말씀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이 세례 요한이 언급한 이사야 예언은 이사야 40:3-8에 나와 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하라?

 

이 본문에 보면, ?소리?에 해당하는 사람이 전하는 그 소리의 내용도 함께 나옵니다. 그 외치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육체란 기껏 말라비틀어질 수밖에 없는 풀에 불과하다는 내용입니다. 즉 세례 요한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염두에 두면서 자신을 ?소리?라고 표현한 의도는 모든 인간은 다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들의 스스로 능력이나 힘으로 구원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사야가 언급한 ?소리?라는 표현 하나로 충분한 것입니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엘리야를 찾아 구분 짓는 그 행위조차 다 풀에서 나온 구원에 부합되지 못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풀에 지나지 않고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직면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의 뒷 부분에 사실상 ?소리? 내용의 핵심 대목입니다. 이사야 40:9-10에 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소리?의 역할은 인간의 가치나 행함을 부각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강한 자로 임하는 것?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강함?이 어느 정도로 강함인지는 역시 이사야가 예언한 대목을 찾아보면 알겠지요. 이사야 53:11-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즉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호와의 강하심입니다.

 

거기에 비해 인간의 풀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점을 소리하고 외쳐야하는 것이 ?소리?되는 자는 임무입니다. 즉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라는 소리를 세례 요한이 연속적으로 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왜 어두운가요? 그것은 바로 나타낼 빛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 대신 인간의 행함을 여전히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은 성경 도사들입니다. 맨 날 성경 펴놓고 우리가 무얼 해야 구원받을 수 있고 복 받을 수 있는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행함의 관점에서 이들은 세례 요한까지 자기 세계 안의 틀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이 답변을 거부하고 대신 ?소리?의 자격으로서 ?소리?의 내용을 내놓습니다. 인간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어두움이 아니라 빛이라면 이 세례 요한이 무엇을 증거 하고자 하는데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네가 무엇이냐 네가 무엇이냐??라는 질문 자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너도 풀이고 나도 풀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보여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너는 무엇을 비추어내고 나는 무엇을 비추어내느냐?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빛을 비추어내면 빛에 속한 사람이요 빛을 비추어내지 못하면 그 사람은 여전히 어두움에 속한 자입니다. 세례 요한은 지금 요한복음 1:7의 말씀처럼,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보고 빛에 대해서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연못 안에 달이 떴습니다. 어떻게 연못에 달이 뜰 수 있습니까? 달은 하늘에 있는데 말이죠. 그래도 연못에 달이 뜰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연못이 달빛을 그대로 비추어내면 됩니다. 고요한 연못이 달을 그대로 반사해 낼 때 우리는 연못에서도 달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연못입니다. 예수님의 달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뭘 비추어내었습니까? 스데반 집사님이 뭘 비추어내었습니까? 과연 그들의 신상이 온전하고 평온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제대로 구원받았습니다. 그것은 성도란 그저 내 비추어내는 자입니다. ?내가 얼마나 훌륭하고 멋있다는 소리를 들으며 사느냐? 하는 것은 성도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 세상 인간들이 행실이 나빠서 어두운 것이 아니라 빛이 없으면 그것으로 어두운 세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보다 더 저질스럽게 살기 때문에 더 어두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은 누구나 다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빌립보서 1:29-30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여러분 세례 요한은 빛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고난도 찾아 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빛에서 제외되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여전히 빛의 세계 속에 속해져 있습니다. 그는 끝까지 고난이 찾아왔고 그리고 끝까지 ?소리?로서 살아갔습니다. 그의 신분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따라서 자신의 성대가 살아있는 한 그는 ?소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두운 세상 속을 살아가는 빛의 자녀의 특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어두운 세상에 누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다 자기 사랑해서 교회 나오고 복 받기 위해 교회 나오고, 자기 신상 잘 풀리기 위해서 하나님 찾는 악마 같은 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이제 그저 조용한 연못으로서 한 평생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