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장 1-3절 / 말씀의 시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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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말씀의 시작 2001년 7월 4일 본문말씀: 요한복음 1장 1-3절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 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성경에는 항상 시작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하시면서 창세기에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며 시작을 말씀에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이야기와 모든 사상의 출발점을 하나님과 말씀에 두고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우기는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식으로 삶을 하나님과 말씀에서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모든 일상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상스럽게 자신의 욕구로부터 시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데 나의 욕심으로부터 출발하니까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어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기피하는 이유가, "에이, 성경을 봐봤자 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할텐데 내 취향에 안 맞다" 그런 선입감이 먼저 앞서서 성경 펼치기를 주저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이러한 성경의 뜻에서 이탈되어 있다면 손해는 누가 보느냐 하면 바로 우리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우리도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면 아무 탈이 없습니다. 인생의 끝도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욕심으로부터 출발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마지막은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이렇게 나오면 "계셨어? 계셨겠지 뭐"라고 나오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계신다면 지금 나는 그 말씀과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지금 내 속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이것을 우리가 푸근하게 받아드리면 우리는 정상입니다.
반면에 태초의 그 말씀으로부터 인생을 출발하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출발하게 되면 무슨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그 때부터 행함을 강조하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가만히 하늘에 계세요. 제가 이 땅에서 멋지게 행해서 하나님 계신 곳으로 제가 나아가겠습니다" 이렇게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난 뒤에 그러한 쓸데없는 짓들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 보면, 거기는 제사를 드리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자, 이 제사라는 행위와 행함이 우리가 보기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의 제사를 모두 하나님이 받아주시면 우리들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제사 중에서, 원 세상에, 한 명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 하나님은 하늘에 가만 계십시오. 제가 제사와 예물을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테니 하나님 받아주세요. 자 갑니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죄 짓고 등장하는 첫 번째 인물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인물이고 놀랍게도 그 제사가 하나님이 거절했다는 사실은 인간의 모든 행함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미 거부하기로 작정했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는 것을 세우고 거기서 하나님이 받으라고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이 기쁘게 받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디까지 일방적인 우리 기분에 들떠 있는 것뿐입니다. 행함의 몸부림일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가 신을 찾는 것은 우리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너무 한 맺힌 것이 많고, 뜻대로 안된 세상일에 상처를 받을 대로 받았기에 "에라, 매사가 안 되는 일 뿐이니 신에게라도 호소해 보자"라는 식으로, 자신의 울분도 달래며 그동안 맺힌 것도 풀고 하나님께 떼를 써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인정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 간절하고 순수한 나의 마음에 대해 무슨 기별을 주시겠지" 라고 지레 짐작해 보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드린 제사를 안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가인의 제사는 제 나름대로 순수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수함이 하나님에게 안 통하더라 이 말입니다. 우리의 순수함이 통할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생명나무 가는 길을 의도적으로 막았겠습니까 "얘들아 생명나무가 여기 있다. 자 이 열린 이 길로 와야지"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시는 것이 사랑의 하나님 속성에 더 맞지 않을까요? "너희들이 원하기만 하면 생명 나무 과일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도록 내가 마음껏 개방해 놓았다"라고 제시하는 것이 참된 하나님이신 것처럼 그동안 생각해 오시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실제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 하나님은 너희들이 이 생명 나무를 찾아오는 길조차 완벽하게 차단해놓았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함과 지혜로 이 생명나무로 오는 것을 나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는다. 내가 행하는 말씀 이외에 그 어떤 방법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교? 웃기지마. 열심? 웃기지마. 행함? 웃기지마. 바치는 것? 웃기지마 나 안 받아!"
우리가 성경을 안 보고 상식적으로 살면 "내가 이렇게 열심과 순수함으로 정성을 바치는데 정말 하나님이 만의 하나라도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외면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성경을 펼치고 제대로 보게 되면 "아하, 사람은 아무리 도 닦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해도 전혀 하나님에게는 통할 수가 없구나"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못한다는 것, 무능하다는 것, 할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면 비로소 성경에서 말씀하신 '기쁜 소식' 즉 복음의 의미에 접하게 됩니다. 복음이 왜 기쁩니까? 우리가 못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해 내시기 때문에 기쁜 겁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을 그 분의 능력 가지고 해 내니까 기쁜 겁니다.
요번에 제가 이사를 하면서 '포장 이사'라는 것에 처음 맡겼습니다. 전에 포장 이사가 아닐 때에 일꾼을 꾼 부르면 그 사람들은 목에 수건만 걸치고 옵니다. 그리고 힘만 씁니다. 그런데 이번 포장 이사 짐 센터에 맡기니까 이게 기쁜 소식이라. 이사에 필요한 상자나 일꾼까지 심지어 사다리 차까지 자기네가 다 알아서 동원시켜 놓았습니다. 이사 할 때마다 겪는 질곡과 고통과 괴로움을 포장 이사라는 기쁜 소식을 통해 해결해 주더라 이 말입니다. 그야말로 기쁨의 포장 이사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몽땅 포장해서 몽땅 제 자리에 갖다 놓을 때 평안과 기쁨이 샘솟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 행함으로 이 많은 이사 짐을 처리 할 것을 생각해 보면 슬프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복음을 아는 자라면 자기 자신의 행함을 바라 볼 때마다 "정말 나로서는 안 되는구나"를 절감하게 됩니다.
가인이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이 안 받았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자기의 경건으로 생명 나무 과실을 따먹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 쪽은 받았잖아요?"하고 하시겠지요. 그런데 그 다른 한 쪽은 다름이 아니라 그 제사에는 기름 받음의 뜻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야가 담겨 있었던 제사였습니다. 즉 아벨의 행함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야의 행함이 담겨 있는 제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의 이름이나 우리 장로님의 이름으로도 안됩니다. 목사가 정말 훌륭하고 목사가 경건되고 목사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목사가 기도 오랫동안 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존재라면 여러분은 이 목사를 통해서, 이 목사의 이름으로, 이 목사로 말미암아, 저를 딛고, 저를 사용해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외에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예 없습니다. 철저하게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방법 이외에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갈라서 있습니다. 건너고자 해도 건널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인간들이 홍해를 건너려고 시도는 해보았겠습니까? 아예 안됩니다. 왜냐하면 홍해는 바다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장벽입니다. 바다를 무슨 수로 건넙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바다가 갈라졌잖아요.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인간들이 상상이나 한 적이 있습니까. 요단강 건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갈라졌습니까. 물 속에 발을 담그니 그제야 갈라졌습니다.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인간이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죽으면 흙으로 파묻혀 그만인데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 하셨잖아요. 누가 감히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그리고 그 부활하신 주님이 그 부활의 영으로 죽을 우리 몸도 살려낸다는 것 누구 하나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리고 구름 타고 다시 오셔서 택한 백성을 공중에서 영접케 하시는 것, 누구 하나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여러분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 가운데 인간의 행함이 들어 있습니까? 우리의 충성과 우리의 헌금과 우리의 봉사가 끼어들 자리가 있느냐 말입니다.
지금 바깥을 보세요. 세상 사람들 차 타고 다니면서 바쁘게 움직입니다. 무엇 때문에 저토록 바쁩니까, 복음 때문에 바쁩니까, 기쁜 소식 때문에 바쁩니까? 이 모든 것은 내 욕심에 따라 내가 원하는 목표의 열매를 맺기 위해 바쁜 것이잖아요. 그러면 내가 바쁘게 행한 그 열매로 우리가 천국을 갈 수 있습니까? 영생 얻습니까? 사람들이 정작 소중한 것은 잊어버리고 정말 귀하고 귀한 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것은 놓쳐 버리고 내가 행해서 얻었다고 한 그것은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면서 그런 것으로 가지고 간증하고 다니더라 이 말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이 말은 달리 말하자면. "너희들은 포장 이사로 구원받았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손대지 말라. 말씀의 능력, 내가 간다. 내가 손댄다" 이 말입니다. 어떤 식으로 할까요?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방식으로 하십니다. 여러분, 관속의 시체가 기도합니까? "주여, 저 시체인데요. 지금 기도합니다. 제발 이 관속에서 살아 나가게 해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11장에 보니, 주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하니까 나사로가 베로 동이 맨 채로 나옵니다. 죽은 나사로가 그 무덤 속에서 기도하니까 응답 받아 밖으로 나온 것입니까. "지금쯤 주님께서 나를 불러줄 때가 됐는데 이 이토록 더디지?"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또한 나사로 종종 걸음으로 무덤에서 나오게 된 그 힘이 어디서 나온 힘입니까? 그게 나사로의 힘입니까 아니면 불러주신 예수님의 말씀의 힘입니까? 바로 태초의 계신 그 말씀의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이 말씀의 위력으로 인해 만물이 없는데서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신 그 말씀의 위력은 요한복음 8장에서는 어떤 능력으로 발휘되는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보면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옵니다. 자,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주목해야 합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이 간음을 여인을 한패로 엮으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자진해서 그 여인의 운명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에게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돌 들고 있던 사람을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입에서 나갈 때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알고 그 여인과 예수님 앞에서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묻습니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누구냐?" 여인이 대변하기를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과 더불어 있는 자가 얻게되는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정죄를 할 자가 아무도 없게 만드신 것은 순전히 하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리라"
여러분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큰 소리로 이야기했습니까? 큰소리로 이야기해야 죄 사함이 실감나겠습니까 작은 소리로 하면 죄 용서함 못 받은 거예요? 중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목소리가 크냐 적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담긴 내용이 중요합니다. 누구에게서 나온 말씀이며 누구의 소리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라면 세상이 뭐라 해도 진리 속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뭐라 해도 진리입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들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이란 요한이 전한 복음입니다. 이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것은 복음이 왜 기쁜 소식일 수밖에 없느냐라는 중요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이제는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죄도 사해주고 죽은 자도 살려주니 세상이 이 일보다 더 충격적이고 기쁘고 놀라운 일이 또 있습니까.
이걸 유식한 신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말씀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이 말은 맞습니다. "어두움을 빛이 되게 한다" 이 말도 맞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있는 우리가 왜 '없음'이며 왜 우리가 '어두움'인가 왜 우리가 '죽은 자' 일 수 밖에 없는 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죄로 말미암아 끊어져 버리니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인간들이 자신의 '행함'을 가지고 나타나더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을 보게 되면 항상 예수님과 예수님 맞은 편에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등장하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의 위력과 능력으로 구원하시는데 그 맞은 편에 포진한 인간들은 자신이 내세울 것이 자신의 율법 지킴과 행함뿐이니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영광을 돌리고자 하더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인간의 행함이 상호 충돌하는 스토리로 요한복음이 전개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는 이미 '말씀'과 '행함'이라는 상반된 이 두 개의 질서를 대비시키려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누가 뭐라도 행해서 성과를 봤다고 한다면 깜박 넘어가잖아요.
자.. 여기서 오늘날의 교회가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를, "목사님, 우리가 거듭나기 전까지 우리가 '없음'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만 일단 중생되고 난 뒤에도 우리에게도 우리의 행함에 의미가 주는 뭔가 '있음'을 소지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야, 예수 안 믿던 사람도 교회 가서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저토록 부자가 되었고 가정의 행복도 되찾았구나 나도 너도 교회에 가서 어서 예수를 믿도록 하세"라는 점을 유도해서라도 교회에서는 이제 '있음'을 강조해야 되지 않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보면. 그 '없음'이 예수 믿고 난 뒤에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 '없음'으로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26-29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흔히 듣는 소리에는 교회에 나오면 없던 자도 늘 있는 자로 둔갑하고 병든 자도 건강해지고 없던 교인들도 늘어나고 부흥되는 표적과 기사가 생기는 것으로 여기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요 다만 있다면 예수님이 주신 진리와 부활의 능력이 있는 것으로 만사가 족하다는 고백과 감사와 기쁨입니다. 재수하던 아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사놓은 땅값이 올라서 졸부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너나 나나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랑해서는 아니되고 예수만으로 자랑하는가 그 이유를 아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가졌다는 돈이나 지혜나 유학 갔다온 것이나 행복 같은 것은 마치 가인이 드리는 예물과 같아서 하늘에서 보시기에 '없음'에 해당되는 겁니다. 기쁜 소식이 못됩니다. 하늘의 응답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말씀이 있는 교회라면, "주여, 저는 없는 자 같사옵니다, 주여 저는 약하나이다. 주여, 지금 죽여도 하나님이 잘 하신 일이십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만 자랑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고백하나이다"라는 현상이 있어지게 됩니다. 이런 교회만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없는데서 있게 된 교회입니다.
이제 설교를 맺고자 합니다. 제가 처음 설교 때 이렇게 말씀 드렸지요. 성경은 모든 출발을 말씀에서부터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교회에서도 자신의 세상적 기대치나 욕심으로부터 출발해서 성경을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교회 잘 섬길테니까 이것 해 주시고 저것 응답해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조건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 말씀만 자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없음', '없음'. '없음'만 고백하는 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없음'이 살아있는 교회, 이것이 인력으로 될 문제입니까. 이 기적의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우리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많은 교회가 또 무슨 교회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복음이 필요해서 모였사오니 교회 증거하지 말고 기쁜 소식 증거 하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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