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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6-8 / 보내심을 입은 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6-8 / 보내심을 입은 자

정인순 2013. 12. 28. 10:29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1071102.mp3

 

이근호

 

보내심을 입은 자

2001년 7월 11일

 

본문말씀: 요한복음 1:6-8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빛 된 세계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세계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빛의 세계에 대해서 증거 하는 자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세례 요한을 향하여 질문을 던지기를 "당신은 무얼 하며 먹고살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이것은 부질없는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TV에 나오는 우체국를 광고하는 광고 문안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자기 딸과 곧 결혼 할 사윗감을 보고 장인 어른이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 자네 꿈은 뭔가?" 만약 세례 요한에게 그 어른이 묻는다고 합시다. "세례 요한, 자네 꿈은 뭔가?" 그 때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어르신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누군가가 계십니다. 저는 그 누군가를 증거하기 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르신네께서는 저처럼 그 누군가를 의식하시면서 하루 하루를 사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의해서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온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7절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세례 요한을 붙들고 묻고 싶은 것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빛 되신 분께서는 당신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한다는데 도대체 세례 요한 당신은 당신이 증거 하는 빛 되신 분을 어떻게 믿고 알고 있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남에게는 믿으라고 강요하고 남한테는 빛에 대해서 설명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전하는 당사자는 전혀 빛과 무관한 생활을 하고 도리어 빛을 무시하는 생활을 한다면 과연 그 사람은 빛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익히고 주위에서 배우고 터득한 것으로 보게 되면 산다는 것은 이미 틀이 잘 짜여져 있습니다. 태어나서 공부하고, 졸업해서 취직하고, 취직해서 아파트 사고, 아파트 사고 난 뒤 결혼하고, 결혼하고 난 뒤 아기 낳고, 그리고 그 아기 키우는 재미에 살다가 늙어서는 노인정에서 하루하루 소일하고, 그러다가 힘 떨어지면 세상을 은퇴하는 것, 이런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산다고 말합니다. 앞선 선배들이 다 들 그렇게 살아갔고 그 다음 차례는 우리 차례인 것처럼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난데없이 빛의 세계로부터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이 파고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들아 산다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인생이란 그런 일련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이 말하는 산다는 것은 "보내심은 입은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말씀드려서 '산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구분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돌멩이가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0년 뒤에 가도 돌멩이는 여전히 그 돌멩이고 20년 뒤에 가도 그 돌멩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비바람에 시달려 점 점 흙이 되어 가는 돌멩이, 이런 돌멩이를 보고 잘 살아간다고 이야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인생을 이런 돌멩이 일생처럼 유지하면서도 자기는 지금 살고 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죽으나 좀 더 오래 살고 죽으나 아무런 차이가 날 것도 없는 인생인 것입니다. 매일 같이 "나는 살아야 될텐데 살아야 될텐데" 하지만 실상은 "나는 존재해야 될텐데, 존재해야 될텐데"하는 이야기 밖에 안됩니다. 세례 요한이 말하는 인생이란, 하늘의 빛을 되받아 비쳐내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겁니다. 처음에도 자기 것, 나중에도 자기 것에 계속 고정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세례 요한의 모습을 보면서도 이렇게 우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 세례 요한, 너는 네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살게, 어차피 산다는 것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취향대로 사는 것은 맨 일반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런 안일한 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나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3:10-12에 보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도끼가 나무 뿌리리 이미 놓여 있다'고 말하고 있으면 또한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라는 말씀도 세례 요한이 하고 있습니다. 즉 '좋은 열매' 맺어야 될 책임이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각기 개성대로 사는 것이 선도 아니요 진리도 아닙니다. 좋은 열매라는 특정한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그 기준이 마지막 때, 즉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작업'에 동원되는 그 기준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내가 여기 존재하고 숨쉬고 있다는 그 자체가 산다는 것에 대한 정답도 아니요 진리가 아니라 정답은 세례 요한이 증거 하겠다는 그 계시의 내용에서 찾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벌면서 사는 것이 진정 사는 것 중에도 포함될 수 있는 삶이라면 아마 마지막 예수님 심판대 앞에서 무사히 통과되어야 합니다.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 주 그 당사자가 되시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이 마음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혼란스러워서 다음과 같이 묻게 됩니다. "예수님, 그러면 누가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즉 "그러면 아무도 못 들어가잖아요"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단순히 부자와 가난을 두 계층으로 구분 짓고서는 어느 한쪽은 무조건 천국 간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님을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이 알아들은 것입니다. 부자란 돈을 좋아하고 돈을 사랑하는 부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자만 돈을 사랑하고 돈을 좋아합니까 과연 누가 알아서 돈을 미워하고 알아서 돈을 초월해서 자기 힘으로 구원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의 말씀도 같이 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자...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이 말씀의 배경에는 반드시 "사람은 할 수 없다"가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들다고 이야기하실 때에 제자들이 결코 "그러면 우리들이 가난해지면 되겠네"라는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듣기에도 그 말씀은 "그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 불가능이구나"라는 뜻으로 들린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세우시는 구원의 기준과 심판의 기준이 너무 높다든지 너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기준을 좀 완화시켜 주면 몇 몇은 구원받을 사람이 생기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늘에게서 궁극적으로 내세우시는 기준은 이것입니다. 누구의 것을 증거하고 소개하면서 너의 인생을 사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자기 입장을 지탱하기 위해 변명 조로 일관하는 사람도 따로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이 요구한 완벽을 달성한 사람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스스로 죄인 됨을 아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의 의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보내심을 입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반해서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해도 너무 심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수로 하나님의 계명과 지시를 다 지켜냅니까. 우리 타협합시다. 하나님 편에서 좀 양보하시죠. 계명을 삭제하거나 완화시켜 주시면 그 때는 제 힘으로 구원을 이루겠습니다"라는 인간이 있다면 이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 것에 평생 고정된 채 존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믿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합쳐지는지 자기 일생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복음의 핵심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내세우거나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드니 있는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고 가난뱅이로 살면 되겠네"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세례 요한의 복음을 이해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개인의 능력으로부터 출발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늘의 빛으로부터 자기 인생의 출발점을 삼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보고 어쩌란 말인가?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을 소개하면서 여기에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로 8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 자 여기서 '그는 빛이 아니요'란 한마디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라는 것을 다시금 규정해 봅시다. 교회가 뭐냐? 교회는 분명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모임인 것을 믿으면 교회 됩니까? 우리가 한 것도 없는데 누가 사람들을 모이게 하셨느냐에 대해서 믿어야 그것이 교회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보다 앞서야 될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바로 이런 자세로서 모였느냐가 바로 교회 됨의 관권입니다. 사람들끼리 모인다면, 일당 주고 모일 수도 있습니다. 노골적인 일당은 주지 않더라도 교회 오면 하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도 노인들에게 현찰로 일당 집어 주고 전도 집회 여는 심보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심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의 능력마저 부인하지 않고서는 교회로서 모였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의 집회에 불과합니다.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자기를 비우도록 이르게 하신 분을 공통적으로 믿어야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분명 사람들끼리 모였지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라"는 것을 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 그것이 교회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님 이야기만 나오게 되어 있는데 이상스럽게도 성경을 가지고 설교한다고 하면서 그 설교 내용은 인간의 종교적 기술 발휘와 능력 발휘로 획득한 것을 거론하게 되면 이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간증 집회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저 사람처럼 되어야 구원될 수 있는 정 코스 인 것처럼 오도하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 예수님의 하신 일만 나오게 되어 있는데 교회 내에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나온다면 이는 비 성경 적인 교회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바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야말로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이 누구에게 전도 받았습니까? 세례 요한이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누군가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61억의 인구가 우글우글 거리지만 그런 인간말고 또 누군가가 계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그 누군가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자랑 할 것도 없고 겁낼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4-2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즈음 정말 이런 설교하기가 부담이 될 정도로 시대가 악해졌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서 보면, 그리스도가 눈에 보입니까? 그리고 공주의 아들이란 신분이 얼마나 대단하고 기대해 왔던 권력계층입니까. 늙은 분들은 장차 사위 될 사람을 앉혀놓고 "그래 자네의 꿈은 뭔가?"라고 재촉했던 그 꿈의 실체가 아니고 뭡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와서 자식들을 기도하는 것이 이런 신분상승을 노리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까. 이런 기도에 편승해서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는 이런 신분변화를 목표로 청춘을 불사르고 있습니다. 또한 흔히들 교회에서 말하는 축복이라는 것이 모세가 거절한 이런 애굽의 모든 보화와 재물과 같은 것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런 것을 거절했다는 겁니다. 그 거절한 이유가 다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가 주시는 상 때문이라는 겁니다. 모세도 두 눈을 달렸기 때문에 남들 보는 것보고 살았고 남들이 귀히 여기는 것 다 체험하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거절했습니다.

 

그는 그 누군가에 매여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남들 다 좋아한 사람이 그 누군가가 아니었습니다. 남들 다 찾던 사람도 그 누군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 누군가가 주시는 상이 현재의 세상 권력과 호사스러움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단정짓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의 뭡니까? 참으로 심각하게 성경을 다시 보셔야 합니다. 오늘날 목사가 되어서 설교 시간에도 이런 소리하기가 민망할 지경입니다. 믿지도 않을 소리를 왜 계속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축복이라는 빌미 하에 소중하지도 않는 것을 소중한 축복이라고 사기치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버리는데서 오는 자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소유가 도리어 자유를 뺏어 갑니다. 있더라도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이 자유입니다.

 

세례요한은 우리에게 이점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보내심을 받고 그 누군가를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유혹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사는 것이라는 겁니다. 세례 요한 인생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증거하고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님을 구원하신 분은 따로 계시다는 것을 증거 하고자 합니다. 교회 올 때도 누군가에 의해서 보냈다고 생각하시고 만났습니까? 하나님이 뜻이 있어 서로 서로 만나게 해주셨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평가에 휘돌리지 않는 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례 요한을 생각했습니다. 같은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어찌 이토록 다릅니까. 모세나 우리가 똑같은 인간인데 어쩌면 이렇게 차이 납니까? 이제부터 우리가 우리 되기를 포기하고 주님의 보내신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