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성실한 방치 131118 본문
[13 대구강의 19] - [피 105] - 성실한 방치
13,11,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306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말씀이 응한 상태', 그 자체가 완성이기 때문에 거기에 합류되어 있다는 점에서 성도 역시 여유만만하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에게 나누어줄 사랑이 넉넉하시다.
◈ 말씀의 완성은, 힘이 아닌 '사랑' !!
"말씀이 완성되었다" 라고 하면, 그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실적이겠는가? 아니면 사랑이겠는가? 여기 교재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말씀이 완성되면 우리는 커다란 기적을 원하지만, 하지만 정작 말씀이 완성되게 되면,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사랑이 나온다는 것은, 사랑이 없어도 되는 존재에게 사랑을 주실 때, 그 사랑의 가치가 높아지는데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사랑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버틸 수 있는 힘을 원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신으로부터 원하는 것은, "내가 나답게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힘을 얻기 위해서 인간들은 말씀을 추적해 들어가는데, 즉 "어떤 말씀을 지키면 그것이 나에게 힘으로 돌아올까?" 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말씀을 지켜서 내어놓은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힘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사랑도 힘의 일종이 아니냐고 할지 몰라도,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반대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 힘을 빼버리고, 자기 희생하고 자기를 포기한 근거에 의해서 사랑이 나온다는 말이다.
◈ 커피인가? 쓴 잔인가?
우리는 스스로 자기 근거를 뭉갠다든지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자기가 자기답지 않으면 자기 인생은 헛되다고 여기니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우리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데 말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부터 버림을 받고, 그리고 다시 되찾는 가운데, 그렇게 버림을 받는 것을 '쓴 잔'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는 커피가 가득한 달콤한 잔을 마시지만, 주님께서는 쓴 잔을 마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쓴 잔을 마신다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를 포기한다는 것인데, 빌립보서 2장에 나오듯이, 자기 자신을 비어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그리고 사람으로 모양으로 낮추시며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그것이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짊어진 모든 힘에 대해서 스스로 저항한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 제가 감수하겠습니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힘이 빠졌는데, 왜 사는가?
사람은 누군가가 알아주면 일을 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데 일을 하게 되면 꼭 어떤 손해를 본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알아주지 않으면 비참함을 느낀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배추를 키웠는데 값이 폭락해버리면, 그래서 그 소중한 배추를 갈아 엎어버리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배추경작면적이 늘고, 거기다가 날씨까지 좋아서 배추가 엄청나게 많이 출하되니 말이다. 그래서 배추가 작년이 반값이 되면, 물론 도시 사람들은 신이 나지만 농촌 사람들은 기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추를 그만 갈아엎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자기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기에 말이다. 즉 "힘이 빠졌는데 왜 사는가?" 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대로 있는 힘도 빼버리는데, 그것이 하나님다움이라는 말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할 때, 힘을 키우려고 하지 말고, 있는 힘도 포기하라는 것이다. 수영장의 튜브에 바람을 빼면 어떻게 되겠는가? 쭈글쭈글하게 되어서 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한 번 살아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힘을 빼고 살아갈 때, 그러면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낙엽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발로 걷어차고 밟고 무시해도, 낙엽은 본인이 떨어지겠다고 작정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결코 반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낙엽은 "나는 이미 떨어진 존재이다" 라고 여기기 때문에 말이다.
◈ 너무나 상이한 예수님과 바리새인 !!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우리가 보기에는 계획성도 없고 너무 허무한 인생을 살았다고 여길 수가 있는데, 예수님이 사신 인생이 말이다. 그런데 그 허무한 인생이 사실은 말씀을 수행하는 과정이었는데, 즉 아버지가 주신 모든 약속을 이루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서 바리새인들과 인간들은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고 하니, 자기를 보전하고 키우는데, 그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말씀을 실천에 옮긴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말씀을 지키는 두 개의 주체가 서로 대화를 해보니, 서로 맞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 쪽은 힘을 빼고 살고, 다른 쪽은 힘을 더 키우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서 복음을 아는 성도와, 성령도 받지 않고 육적으로만 교회에서 활동하는 사람과 만나서 다방에 앉아서 이야기를 해보라는 것이다.
그게 사돈이라고 하면, 사돈끼리 만나서 서로 그렇게 이야기를 해보면 보이지 않는 대립 각이 거기에 흐르게 된다는 말이다. 즉 "나는 나에게 힘을 주면서 사는데, 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왜 살지 않을까? 혹시 이단인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 권사님의 경우에도,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뭔가가 분명히 다른데, 그런데 이것이 어디서 틀어졌는지, 그것을 쉽게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을 대하는 의도에 따라서, 즉 힘을 모으기 위해서 말씀을 대하는지, 아니면 있는 힘도 놓아버리기 위해서 말씀을 대하는지, 바로 그러한 차이라는 말이다.
◈ 목사들의 보이스 피싱 !!
보이스 피싱을 하는 자들은 말을 번지러하게 하는데, 그렇게 그들이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기 위해서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나, 목사들이 사람을 하나라도 더 꼬드기려고 하는 것이나 그 의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동일한데, 둘 다 힘을 모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상대방이 자기 힘을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매개이고 수단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라면 자기 목숨도 전혀 아끼지를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기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것 말고 다른 방식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을 이 지상에 보내셔서, 자기 아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추려내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내어버려두사' 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분리시키는 작업이라는 말이다. 저는 그것을 '성실한 방치' 라고 하고 싶은데, 그것이 오늘강의의 제목이라는 것이다. 이 '방치' 라는 것은 내어버려두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성실하게 수행하신다는 말이다. '비켜라' 라는 것인데, 즉 따로 분류를 시킨다는 것이다.
◈ 성실한 방치 -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러면 성실한 방치가 아닌 성실한 관리 대상이 되는 것은 누구인고 하니,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하는데, 지금 다윗은 쫓겨다니면서 아무 것도 없는데, 그야말로 부랑자의 신세라는 말이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냐는 것이다.
(시 23: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시편 22편은 이렇게 초반에는 우리의 기대를 굉장히 부풀게 하는데,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하니 말이다. 5절에도 보면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하면서 뭔가를 많이 얻은 것 같은데, 그런데 6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마지막에 여호와의 집에 도착하게 되면, 그렇게 오기까지의 모든 경로와 그 모든 과정이 부족하다는 것인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인가?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 제대로 된 방향이기 때문에 !!
이런 것이 참 설명하기 어려운데 말이다. 우리 인간이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리가 차고 넘칠 때, 그럴 때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고, 하지만 하나님이 부복함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고정된 자리에 뭔가 들어오기를 기대하는 게 아니라 떠나고 떠나는, 그런 여정(旅程)을 말하는데, 즉 제대로 된 방향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주저앉아서 채우고 채우는데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왜 옛날에 여자들이 입는 아주 큰 주름치마가 있었는데, 월남치마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게 활용도가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양파를 까도 깐 껍질을 치마에 담아서 나중에 툭툭 털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밖에서 손자가 춥겠다 싶으면 치마 속에 넣어주면 되고, 그리고 깔고 앉아있을 치마 속에 발을 넣으면 보온도 되고 말이다(ㅋㅋ).
그러니 우리는 생각하기를, 자기 자리에 앉아서 거기에 끌어 모으면, 그것이 곧 인생의 성공이고 풍족하게 살았다고 보는데, 하지만 주님께서는 거기를 떠나서 그 다음 자리로 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즉 계속해서 이 땅에 미련을 두지 말고 떠나라고 촉구하신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이, 소급해서 보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여행지에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이 제대로 인도함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아, '길을 떠나라' !!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를 실 때,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길을 떠나라" 라는 것이다. 그런데 머물 곳이 없는 곳으로 떠나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당연히 머물 곳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에 머물 곳에 없게 만들어서, 이 땅 자체에 대한 의미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머물 곳이 없게 만들기 위한, 처음부터 그런 땅이었음을 아브라함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이 땅이 살 만한 땅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에 속해있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지나게 만들어서, 아무리 돌아다녀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살 곳이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백화점을 두 시간이나 돌아다니고도, 살 것이 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다.
◈ 육신 바꿔 타기 !!
실컷 돌아다니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예수님 만한 사람이 없이 없고, 주님만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 곳을 떠나게 만드는 그 모든 여정과 과정은,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에 오게 할 때는, 어제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지만, 육신을 바꿔 타게 하는 방식으로 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말을 바꾸어 타듯이 말이다.
그러니 기존의 육신으로는 안 되고 바꾸어 타야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과정 중의 하나가 구약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는, 그렇게 자기 아들마저도 잡아야 되는 경우를 겪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그렇게 스스로 '내어버려두는' 사건 속에 함몰되지 아니하면 천국은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인데,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보통 말하는 종교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도를 닦는 것인데 말이다. 모범적인 모델을 하나 잡아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렇게 자기 정숙과 안정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도를 닦는 훈련이 곧 종교라고 우리는 알고 있는데 말이다.
◈ 복음은, 아버지가 아들을 때려잡는 !!
그런데 복음은 그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식을 때려잡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극단적으로 바닥의 상태인데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로서 도저히 못할 짓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지옥에 갈 우리를 천국에 보내주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서로 동일한 짓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금 지옥에 가야 마땅한데, 그런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내는, 그러한 하나님의 짓은, 우리가 "차마 이 짓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손사래를 치는 짓에 해당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기 때문에, 아들이 아닌 자가 아들로서, 그 아들의 자리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 여자의 후손계열은, 죽음에서만 그 의미가 피어나 !!
야곱의 제일 마지막 아들이 베냐민인데, 이 베냐민은 엄마가 죽고 대신해서 태어난 자식인데, 그래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의 후손의 계열은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죽음에서만 그 의미가 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죽음이란 동그라미에 들어오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이 여자의 후손이란 노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노선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알아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우리의 노림수와는 정반대인데, 우리가 무엇을 노렸는지 주님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 강의에서 첫 번째로 어디를 살펴보는고 하니, 교재 306페이지와 관련해서 시편 20편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시 20: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시 20: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시 20:3)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시 20:4)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시 20:5)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시 20: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시 20: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 20:8)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시 20:9)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 머리에 총알이 박혀도 !!
여기 7절을 살펴보면,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런 것도 무지 어렵다는 것이다. 전쟁을 하면서 무기도 없이 할 수 있는가? 못 한다는 말이다. 총도 없이, 군복도 없이, 머리에 철모도 없이 무슨 전쟁을 한다는 말인가? 총알이 날아오면 그냥 총알받이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 자기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윗이, 그것도 소년 다윗이 완전무장을 한 어른 장수와 일대일로 맞짱을 뜨게 되었는데, 물론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배틀' 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선하셔서 그렇게 했으면,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이런 것도 어려운데 말이다.
◈ 할례와 무장해체 !!
할례가 없는 민족은 블레셋인데, 그 블레셋에서 대표로 '골리앗' 이라는 장군이 완전무장을 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누가 나왔는고 하니,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소년 다윗' 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을 때는, 자기 생식기 끝을 자르면 그것으로 다 끝난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그러한 의식과 양식이 이스라엘의 모든 전반에 걸쳐서 모두 확산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언약적으로 확산이 된다는 말이다.
자기는 신체의 일부에 표시를 했을 뿐인데, 할례를 받은 신체 자체로서는, 즉 "내가 할례를 받았다" 라고 해도 그 의미를 미처 몰랐는데, 그런데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 등장하니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을 하면, "고추를 꺼내봐라. 우리는 할례를 받았는데, 너거들은 없네" 라고 하면서, 그 정도의 선에서 자랑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저쪽은 완전무장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를 보호하면서 자기 인생을 살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들은 어떠한가? 우리의 장군님인, 김일성이 아닌 소년 다윗은 전혀 무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러한가? 지금 전쟁을 하는데 말이다. 도대체 할례를 받은 것과 무장을 하지 않은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왜 기도를 하는가? 힘을 달라는 것인데, 다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 교회 자체가 그러한데, 힘을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소년 다윗의 경우는 어떠한가? 초반에도 이야기했지만, 힘을 달라는 게 아니라, 있는 힘도 빼게 해달라는 것이다.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살게 해달라는 말이다. 즉 주께서 조성하신 이 모든 사태에 굴복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니 악바리가 되어서 살아보겠다고 나대지 말고, 그냥 추우면 추운 대로 쓰러지고, 또 더우면 더운 대로 쓰러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같은 경로를 이 세상에서 밟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과 대비가 되면서 !!
그러면 할례를 한 것과 무장을 하지 않은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몰랐는데, 물론 사울 왕도 몰랐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소년 다윗을 통해서 힌트를 주었는데, 즉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자기의 육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일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칼을 들고 창을 드는 것, 즉 인간이 육신적으로 스스로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와 가능성, 즉 "나는 이렇게 살아야 산다" 라는 것을 저기 할례를 받지 못한 쪽에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하나님의 칼질이 없는 육신이 품고 있던 잠재된 모습들을, 즉 자기의 진짜 모습을 저기 할례를 받지 않은 블레셋 나라를 통해서 모두 다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래서 "할례를 받았다" 라는 의미는, 혼자서는 모르고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과 서로 대비가 되면서 비로소 그 본질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을 다행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자꾸만 대비를 시켜서,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보게 하신다는 말이다.
◈ 신천지는 보아라 !!
예를 들어서, 신천지와 기존 교회와의 다툼은 무엇인가? 기존 교회가 힘이 있다고 주장하면, 반면에 신천지는 무엇인고 하니,"우리는 너희들보다도 더 큰 힘이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힘과 힘의 싸움이란 말이다. 힘과 힘의 대결이라는 것이다.
신천지 사이트에 가면 "대구에 있는 우리교회는 보아라" 라는 글이 있는데, 재미가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너희들이 아무리 우리를 이단이라고 해도, 우리는 이만희 선생님의 외침으로 이렇게 우리가 많은 수가 모이니까, 너희들은 질투가 나지? 그렇지? 이근호가 아무리 이단이라고 해도 우리 신천지는 든든하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 제목을 "대구에 있는 우리교회는 보아라" 라고, 글자 크기도 엄청나게 크게 적어놓았다는 말이다. 저도 우연히 보았는데, '우리교회'를 치니까 그게 링크가 되어서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교회'를 쳐보면 하여튼 안 좋은 것들이 많이 걸려서 나온다는 것이다(ㅋㅋ).
아무튼 골라앗보다 더 큰 골리앗이 될 때, 그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믿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평소의 인간들의 마음가짐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아서,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힘에는 힘,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전혀 '말 갈아타기'가 되지 않았는데,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50년을 목회를 해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믿기 전에 타던 말을 여전히 타고서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믿는 척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성실한 방치에 의해서 그러한데, 즉 '내어버려두사' 라고, 일부러 그렇게 내어버려 두신다는 것이다.
◈ 병거도 있고, 하나님의 이름도 자랑하고 ??
다시 시편 20편 7절을 보겠는데,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전쟁을 할 때 말이 있어야 하고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떤가? 그야말로 상식에 속한 일인데,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 않느냐는 말이다.
(시 20: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하지만 무엇이 당연하지 않은고 하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 라고 했을 때,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고 하면서도, 말과 병거도 필요하지 않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말과 병거를 가지고 나오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나간다" 라는 아이디어가 과연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전쟁은 이미 완료가 되었다 !!
그러니 이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까, 말과 병거를 가지고 나온 사람의 경우에는 "이제 전쟁을 해보자. 그 결과는 전쟁을 해봐야 나온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말과 병거를 가지고 나온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나온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전쟁은 이미 완료가 되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웃기지 않느냐는 말이다. 즉 "우리가 참여하지 않은 전쟁에, 다만 우리는 성과만 얻었을 뿐이다. 그게 바로 구원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 때,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면서 언약궤를 중심으로 진영을 짜서 돌게 되는데, 그러니까 이것은 전쟁을 하기 이전에 잔치 판부터 먼저 벌렸다는 것이다. 즉 정복하기 이전에 이미 여호와 이름으로 잔치를 벌렸는데, 그리고 그 잔치가 끝나니 성이 그만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 이미 보증금을 다 지불했기에 !!
40년 광야생활을 하기 이전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차지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은 뭐라고 하는가?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말은, 완성이 되었기에 주어졌다는 말이다. 주어지고 난 다음에 "앞으로 잘해보자" 라고 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이미 마련이 되었기에 우리가 통과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늘나라에 처소가 있기 때문에 성령이 왔는데, 즉 아파트 주인은 따로 있는데 우리에게 들어가서 살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미 보증금을 다 지불했으니 걱정하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보증금을 두고 성령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미 천국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 보증금으로서 우리에게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이 꽂혔다는 말이다.
◈ 우리는 왜 육신인가?
그러니까 성령을 따라가게 되면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되는데, 그 중간에 우리는 할 일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왜 육신인가?" 라는 것이다. 우리는 말과 병거를 의지하고, 또 돈을 의지하니, 당연히 육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버틸 수 있는 힘만을 추구하면서, 그런 식으로 기도를 했다는 말이다. 매일같이 필요한 것을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는 주님께서 이미 다 아시는데, 그런데 우리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매일같이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기도할 때 달라고 하지 말라" 라는 것인데, 즉 "이미 니가 필요한 것을 내가 알고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주시는데, 그러니 얼마나 고마우냐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4절에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기도하면 모두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기도할 때 누구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시는가?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예수님 이름으로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이미 어떤 작업을 마무리를 해놓으면, "주님이 무엇을 완성하셨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알게 하소서"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러한 기도대로 주님께서는 자기가 홀로 완성한 것을 우리에게 나우어 주신다는 말이다.
◈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
그러한 말씀의 완성을 교재 306페이지에서 뭐라고 하는가? '사랑' 이라고, 힘이 아닌 사랑이란 말이다. 춘향전의 '사랑가'에 보면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대목이 나오는데,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라고 하는데, 그런데 요즘 처자들은 전부가 앞태만 신경을 쓰는데 말이다.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그렇다는 말이다(ㅋㅋ).
◈ 죽음을 경유한 사랑 !!
하지만 사랑은 무엇인가? 수정한 앞태를 보나, 수정을 하지 않은 뒤태를 보나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벌거벗든지, 속옷만 입든지, 아니면 완전무장을 하든지 간에 말이다. 그 어떤 모습이라도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사랑이 죽음을 경유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미 주님께는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아이쿠, 요놈을 봐라. 죽었는데 살아났구나. 얼굴이 새파랗게 되었던데, 내가 살려주니 살아났구나"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인간이 힘을 원한다는 것은?
우리가 힘을 원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육신이 새파랗게 질려있다는 것인데, 이 세상이 무서워서 말이다. 마치 아이가 겁에 질려서 새파랗게 넘어가듯이, 그렇게 우리는 죽기가 무서워서 바들바들 질려서 떨고 있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귀신이 나타났다고 하면 그야말로 넘어가는데, 우리는 귀신보다도 죽기가 무서워서 떨고 있다는 것이다.
할 일이 없으면 더불어서 산다고 여기면 되는데, 할 일도 없으면서 더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아프면 당장에 병원에서 입원하고 말이다. 물론 할 일이 있으면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데, 하지만 이제 할 일이 없으면 덤으로 산다고 여기고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덤으로 사니, 강도가 와서 "돈을 내놔. 안 그러면 죽인다" 라고 하면, "고맙습니다. 어서 죽여주세요"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강도가 아니라 천사라는 말이다. "천사님,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얼른 데려가 주세요"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아직 일을 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은 제외하고, 경로 우대증을 가지고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니 죽음을 반길 수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러한 죽음이 다가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짜증을 내면서, 즉 "죽음이 왜 이렇게 시간을 안 지키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예수님은 33년만 살아도 자기가 할 일을 완벽하게 하셨는데, 그리고 사도요한도 요한계시록에 보면, 끝까지 밧모섬에서 자기가 써야 될 글을 다 쓰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계속된 지시가 없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어서, 태워라 !!
우리가 만약에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가서 이제 태워지려고 화장터에 갔다고 생각하면, 가서 금방 불에 타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앞에 관들이 밀려서 기다려야 한다면, 그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지루하겠느냐는 것이다. 끝까지 애를 먹이는데, 실제로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대기시간, 아무런 할 일도 없이 관 속에서 기다려야 하는데, 시계를 보면서 "내 몸은 언제 불타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이런 마지막 남은 징벌과도 같은 순간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 시간은 죽음을 다시 한번 혹독하게 경험하는 시간인데, 달리 말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던 그 죽음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힘을 빼는 것이 어느 수준까지 내려가는고 하니, 불에 타기 직전에 관 속에 누워있는 그 순간인데 말이다. 맹렬한 심판의 불 속에 들어갈 때, 그때는 자기가 대학교 교수를 했던 국회의원을 했던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나 장로가 되어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육신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하는 주님의 명령은, 아직도 전혀 취소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은 영원히 취소되지 않는데, 즉 "너는 아담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장터에서 불에 타는데, 그것이 무슨 원망스럽고 무서워서 벌벌 떠느냐는 말이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전쟁은 이미 완료된 상태 !!
교재를 보기 이전에 다시 한번 정리하면, 시편 20편 7절을 보겠는데,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전쟁이 완료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전쟁인데, 그러니 누구에게 지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17:1'로 싸워도 이긴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이름에 우리가 속해있다면, 우리의 운명은 이미 마감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괜히 자기 인생이 바뀔까봐 안절부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제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 자랑을 하는 것도 나쁘지만,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낙심하는 것인데, 도대체 우리가 무엇인데 낙심을 하느냐는 말이다. 낙심을 한다는 것은 아직 이 세상에 미련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번에 우리 아이가 시험에 떨어졌어" 라고 하면서 낙심을 한다면, 그러면 자기 아이가 시험에 합격될 것을 노렸다는 것은, "나는 니가 합격되는 것을 보고 눈을 감겠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눈도 자기 마음대로 감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 낙심은, 복음에 대한 모독 !!
그러니 낙심을 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모독인데, 우리는 전혀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고맙게 여기면 되는데, 거기에 무슨 자기가 무엇이 된 것으로 여기고서, 낙심까지 하느냐는 것이다. 이미 모두 완료가 되었는데 말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울면서 자기 머리카락으로 씻겨드릴 때, 하지만 그녀가 언제 낙심을 했느냐는 것이다. 그때 옆에서 바리새인이 놀렸는데(?), 그러자 마리아가 "에이 씨, 나도 이런 짓은 이제 안 할 거야" 라고 하면서 그 바리새인과 싸웠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게 무슨 짓이고? 칭찬을 좀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니 행세가 나오는구나" 라고 하셨느냐는 말이다.
그녀가 막달라 마리아인지 몰라도, 아무튼 마리아가 울면서 향유를 부을 때,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해도 전혀 자기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녀는 자기로부터 떠났기에 말이다. 이미 완료된 상태라는 것이다. (녹취 '구' - 나사로의 누이동생인 마리아죠?)
◈ 창녀가 되고 세리가 된 것이, 곧 복음 !!
그리고 간통을 하다가 잡혀서 돌에 맞아 죽는 여인도 마찬가지인데, 뭐라고 하면서 욕을 하고 또한 돌을 던진다고 해도 그녀는 전혀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기와 세리가 천국에 가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떠날 수 있기에 말이다. 그러니 그게 복음인데, 창녀가 되고 세리가 된 것이 복음이란 말이다.
철학박사가 된다고 해서 자기 자신에서 떠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부산 금정산에 터널공사를 하는데, 어떤 여자 중이 산에 도룡뇽이 죽는다고 해서 공사반대를 해서 5년인가 공사가 중단이 된 적이 있었는데, 진짜 중이라고 하면, 도룡뇽이 죽던 공룡이 죽던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도 객기가 남아있다는 말이다.
◈ 기타 대신에 수녀복을 벗어야 !!
중이 되어서 머리를 깎을 때는, 그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밀어버리겠다는 것인데, 그런데 왜 그렇게 간섭을 하느냐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들이 머리를 깎고 신부들이 유니폼을 착용하고 하는 것이 위선이라는 말이다. 그것도 극단의 위선이라는 것이다. 신부가 되어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물론 수녀들이 그렇게 모여서 집단생활을 하는 것도 일종의 위선이라는 것이다.
어디 수녀복을 입고 기타를 친다고 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인가? 차라리 기타를 치지 말고 옷이나 갈아입으라는 것이다. 머리도 파마를 하고 말이다. 파마를 한 수녀님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러니 그게 무슨 짓이냐는 것이다. 그게 마음을 낮춘 것인가? 높인 것인가? 전혀 높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속일 것을 속여야지 말이다.
그러므로 이미 완료이고 완성이 되었다고 하면 그 완성된 값을 하라는 것인데, 그러니 성도의 삶은 그 완성된 값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어떠한가? 과연 그러한가? 이 시대의 흐름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306페이지를 보자.
** 시대흐름은 실적과 성과로 사람이 사는 보람을 갖도록 요구한다. 성과가 없는 회사는 회사도 아니며, 성과가 없는 교회는 교회도 아니며, 성과가 없는 가족은 가족취급을 받지 못하는 시대이다. …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를 실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쥐어박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를 실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쥐어박는 것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조금 전에 말씀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런 사랑을 받아서 사랑을 고백하는 성도를 실적이 나쁘다고 쥐어박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교회가 말이다. "전도를 몇 명이나 했어? 헌금을 얼마나 했어? 봉사를 얼마나 했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실적을 가지고 쥐어박고 따진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교회 역시 가시적인 전도의 성과를 기대할 때, 컴퓨터 게임에 중독 된 아이의 핏기를 잃은 얼굴이 된다. 자신들의 가치에 스스로 중독이 된 것이다. 자기 욕망에 설정해놓은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인간들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 핏기를 잃은 얼굴 !!
그러니 이것은 예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즐거움인데, 그것을 여기 교재에 보면 "컴퓨터 게임에 중독이 된 아이의 핏기를 잃은 얼굴이 된다" 라고 되어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모두가 다 핏기를 잃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실적과 성과에 중독이 되어서 말이다. 그래서 그런 얼굴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의 가치에 스스로 중독이 된 것인데, 즉 "나는 가치가 있어야만 돼. 나는 가치가 있는 인간이야" 라고 하면서, 뭔가 알 수 없는 공포에 바들바들 떨면서, 그렇게 아침에 눈을 뜨면서도 떨고, 그리고 저녁에 잠이 들면서도 떨고, 심지어 꿈속에서도 떨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내일 것까지도 미리 다 떨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 야야, 엄마가 잘못이다 !!
그리고 여기 교재에 보면 "자기 욕망에 설정해놓은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인간들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라고 되어있는데, 인간은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 엄마가 자식을 보고 겸손하게(?)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데, 자식들이 듣기 싫어하는 게 있는데 말이다. "야야, 엄마가 잘못이다" 라고 하는 것인데,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자식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식은 엄마와 흥정하는 관계가 아니라 뜯어먹는 관계이니 말이다. "야야, 엄마가 잘못이다" 라고 하면, "그러면 더 뜯어내야 하는가? 안 들키고 뜯어내야 하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엄마가 자식에게 "야야, 고맙다" 라고 하는 할 수 있어도, "야야, 엄마의 잘못이다" 라고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그동안 자식에게 뭔가를 노리고 했으면 잘못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노림수를 가진 부모의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ㅋㅋ).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강물의 줄기는 "못해줘서 미안하다" 라는 것이지, 하지만 그런 부모의 심정을 자식들은 알지 못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자식들은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혹시 엄마 쪽에서 저렇게 잘못이라고 겸손하게 나오는 것은, 용돈을 올려달라고 하는 수작이 지나지 않는가?" 라고, 또 복잡하게 머리가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어머니가 저렇게 온유하게 나오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소홀히 대했구나. 마누라와 자식을 챙긴다고 엄마를 너무 홀대했어" 라고 생각도 하고 말이다. 그러면 결국 엄마의 그런 마음이 자식들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식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고 하니, 어느 정도로 해주고 나면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자식도 자기 인생을 살도록 해주어야지, 자꾸 자식에 대해서 뭔가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모도 그렇고 자식도 그렇고, 서로 죄책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 간격과 간극 !!
그리고 이런 죄책감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감이 아니라, 자기가 설정해놓은 자기의 이상적인 모습에서 오는 것인데, 왜냐하면 현실적인 자기 모습이 미치지 못하니 말이다. 그래서 오는 그 간격, 그것은 지난 시간에 '간극' 이라고 하면 더 좋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간극이란 것은 원래 하나였는데 균열이 생긴 것을 의미하고, 이에 반해서 간격은 무엇인고 하니, 처음부터 따로 따로 이었는데, 그래서 생긴 틈을 간격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연애를 하는 사이에는 간격이 있고, 부부사이에는 간극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틈이 없어야 하는데 생겼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이 아니라, 미리 자기가 설정해놓은 자신의 이상적 모습에 미치지 못해서 오는 것이란 말이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본성인데, 우리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이런 틈이, 즉 금이 죽죽 나있다는 것이다. 시멘트를 거기에 발라봐야 얼마 있지 않으면 비가 오면 또 샌다는 것이다. 그렇게 발라서 순간적이 기쁨은 있을지 몰라도, 그게 다 시간이 지나면 다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보다 금이 더 많이 생기고 말이다.
◈ 나보고 우짜라고?
남편이 된 사람이 아내를 생각하면서, 결혼생활에 있어서 제일 어려운 점이 무엇인고 하니, 겨우 봉합이 되었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다른 사건이 또 터지게 되면, 기존의 마무리가 되었다고 여겼던 것들이 또 다시 다 튀오나온다는 것이다. 7년 전에 있었던 일도 말이다. 그러니 남편의 입장에서는 감당이 안 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무마를 시켜야하는지 말이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어야할 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남편도 이제는 "나보고 우짜라고? 나는 나간다"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아내는 "그래, 차라리 잘 되었네. 제발 좀 나가라" 라고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면서 붙잡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집구석에 발도 들이지마. 돈이나 왕창 벌면 들어오든지 말든지 해라"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봉합이 안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하나가 되고 싶어도 말이다. 오랜만에 하나가 되는 것처럼 보다가도, 저녁을 잘 먹고서는 그만 드라마를 보다가도 틈이 생기고 만다는 것이다. 남자가 "야, 저 여자 주인공이 참 괜찮네" 라고 하면, 그게 또 하나의 금이 된다는 말이다(ㅋㅋ).
그때는 어떻게 해야하는고 하니, 이때 심리학자인 '칼구스타프 융'의 이론이 등장하는데, 부부사이에도 여자와 같은 남자가 있고, 남자와 같은 여자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남자와 같은 쪽이 여자와 같은 쪽을 다독거려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자가 마음이 넓으면 속이 좁은 남자를 덮어주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307페이지를 보자.
** 예를 들어서, 어떤 목회자가 새벽에 기도하기를 "하나님, 벌써 이 달 들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이 20명이나 빠져나갔습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소서. 다음 달에는 열심히 해서 30명을 채워서 날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교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이 목회자는 하나님에 의한 성도의 가치를 모독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의 성과란 예수님의 살과 피의 발생에 있기 때문이다.
◈ 목회자의 죄책감 !!
이게 바로 목회자의 죄책감인데, 무슨 죄책감인가? 적어도 자기가 목회를 하면 자기 교회에서는 빠져나가는 배신자는 없어야 한다고, 그렇게 자기와 일체화를 시켰는데, 그런데 그만 빠져나가니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은 핑계에 지나지 않고, 사실 하나님은 믿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를 신봉하는 자기 신도를, 주님의 성도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 신전에 엎드려서, 본인이 본인에게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벽기도를 자기에게 한 것인데, 30명을 채워서 자기가 보상을 받겠다는 것이다. 20명이 나갔는데 20명이 들어오면, 그것은 자기 아픈 상처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뭔가 더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위로금 격으로 10명을 더해서 30명을 채우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마음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겠다는 것이다.
◈ 여기서도 힐링, 저기서도 힐링 !!
치유(治癒), 그것을 영어로 '힐링' 이라고 하는데, 요즘 대세인데 말이다. 요즘 교회도 여기에서 뒤로 처지면 안 되는데, 교회도 계속해서 상품을 개발해서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교회나 거기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다른 교회는 다 난리라는 말이다. '힐링'에 관련된 상품을 개발해서, 세미나도 열고 한다는 것이다. 집에는 노는 아줌마들을 모아놓고 말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과 관련을 시키고 말이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리 그렇게도 성경해석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뽑아내지 않으면 모두 엉터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영광을 중간에서 자기가 가로채는 것은, 그것은 마귀가 시켜서 그렇다는 말이다. "하나님에게 다 주면 너의 것이 없잖아? 하나님에게는 절반만 주고, 너의 것도 좀 챙겨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반만 드세요 ??
이것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초대교회 때 헌금을 한 번 잘못해서, 그것으로 그만 자기들 인생이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반만 드세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다윗이 언제 골리앗과 싸우면서 칼이나 방패의 절반을 원한 적이 있었는가? 오히려 "이 싸움은 나의 싸움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싸우지도 않은 싸움의 결과물로서 이 땅에 투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에서 자기 것을 따로 챙기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나아만 장군이 병에서 나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게하시' 라는 인간이 어떻게 했는가? 하나님에 의해서 치료가 된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게하시가 가지고 갔다는 사실이 놀라운데, 그러니 문둥병이라는 저주는 멀리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아만 장군에게 있다가 게하시에게 덮쳤다는 것이다. 우리를 떠났다고 여긴 마귀가 지금도 누군가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지 모르는데, 그렇게 멀리 가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히 주님의 사랑을 원한다는 것도 문제가 있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을 해주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여기 교재에 보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인하여 등장된 성도가 예수님의 살과 피에 주목하고 있을 때, 그 목회자는 이들 성도들의 주목에 바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고 있다고 모멸감을 안겨주는 셈이 된다. 참 성도는,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피를 흘리고 살이 찢어져야 하는지 그 본질을 알려주는 경로 안에 놓여있다.
◈ 존재와 존재가 아닌, 살과 피를 통한 만남 !!
도마가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과 도마의 관계에 있어서, 주님이 도마에게 보여준 것은 주님 자신의 존재가 아닌데, 즉 "도마야, 내가 예수다. 봐라, 내가 여기에 존재하잖아"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철학의 한계인데, 철학은 여기까지라는 것이다. 즉 철학이라는 것은, "니가 여기에 있지? 있는 너 자신이 있는 나를 눈으로 보게 되면, 그게 바로 예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리면, 십자가 이전에 예수님이 하셨던 것을 되돌아볼 뿐이라는 것이다. 3년 동안 12제자와 예수님은 붙어살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붙어살아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라고 해도, 그 어떤 것도 공통점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공통점이 없는데 다시 그 존재를 제시한다는 것은,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전혀 건널 수 없는 존재와 존재 사이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해서만, 즉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여줄 때, 도마에게 비로소 부활된 주님이 자기의 하나님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기 눈앞에 부활된 분이 있어도, 그게 자기와 결합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오직 살과 피를 통해서만 온다는 것이다.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다시 말해서, "나로 인해서 당신이 죽었습니다" 라는 것이 가능하게 될 때, 즉 "내가 핍박하던 분이 곧 당신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될 때, 사울에게는 그 예수님께서 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 사울이 누구인가? 그가 바로 사도바울이라는 말이다.
◈ 활화산과 시내산 !!
오늘 아침에 이탈리아에서 화산이 분출했는데, 그 화산을 보면 그야말로 무섭고 겁이 나는데 말이다. 그런데 저는 화산을 보면 시내산을 생각해 보았다는 것이다. 시내산이 바로 그런 화산의 광경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말이다. 우선 땅이 흔들리고, 산 위에서는 광채가 나고, 그리고 나팔소리가 들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온 산이 떨고 돌은 굴러 떨어졌는데,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짐승도 산 위에는 접근이 전혀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시내산 위에 하나님이 산지기처럼 항상 계셨는가? 아니면 그때만 계셨는가? 물론 그때만 계셨는데, 그것을 상당히 어려운 용어로 '사건'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느 글에선가 제가 "구원은 없다" 라고 했는데, 즉 "구원은 사건이 터질 때만 있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자기가 잡으려는 구원은, 지금 광야에서 그 메마른 시내산과 같다는 것이다. 아무리 올라가 봐야 아무도 없는데, 시내산 밑에도 역시 흙이고, 위에도 연장된 그 흙뿐이라는 것이다. 전혀 거룩과는 상관이 없는 말이다.
◈ 주님께서 일으킨 '사건'에 의해서 !!
예수님이 계셨던 그 변화산도 역시 그냥 평범한 산에 지나지 않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변화산에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그것도 변화된 모습으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사건' 이란 것이다. 그러니 구원은 주님께서 일으킨 사건에 우리가 함몰되고 속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속했다고 하면, 비로소 우리는 거기서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 때문에 돌아가신 분, 그러니까 '나'는 더 살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 그냥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소용이 없는 식으로 존재하는 존재,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존재, 지금 집에 불이 나도 그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존재, 진작에 생명나무가 없는 곳으로 추방이 되어서 선악과의 저주가 있어야 되는 이 땅에서 흙으로 되돌아가야 할 존재,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존재에게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보여줌으로서, "이미 너는 구원이 완료가 되었어" 라는 것을 통보하는 식으로 성령께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기계적으로, 즉 반복적인 의식과 의례를 가지고, 11시 예배와 같은 것을 가지고 붙잡아 두려고 한다는 말이다. 즉 "나는 여기 존재합니다" 라는, 자기 존재로서 출발하니 그것은 사건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건이 아닌 존재로 들어가니, 즉 사건을 겪었다가도 다시 존재로 미끄러지고 만다는 말이다. 홍해나 오병이어 사건 때는 좋다고 하다가, 또 다시 어디로 돌아오는가?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떡을 어디서 구하지?" 라고 하면서, 또 다시 자기 존재로 귀환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은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육신 됨을 까발리면서 찾아오시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항상 무엇이 있는고 하니,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면서 오신다는 것이다. 책망하면서 말이다. 그게 성령의 나타나심이라는 것이다.
◈ 잠시 꿈 이야기를 !!
지난 수요일에 꿈 이야기를 하면서, 제 아내도 예배시간을 마치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제 당신의 본색이 다 드러나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되었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무슨 꿈인고 하니, 꿈속에서 교회에서 저에게 나가라고 하는데, 그래서 제가 "그러면 당장에 나는 뭘 먹고 살라고?"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꿈속에서 말이다(ㅋㅋ).
하지만 반대로 부끄럽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돈만 밝히는 부끄러운 이야기라고 숨기면, 그런 생각자체가 저는 전혀 옳지 않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데, 우리는 모두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데, 그런 가운데 자기만 빠지겠다고 하면, 그것은 비겁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지난밤에 또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까, 제가 저기 박사동네로 가는 와촌에 있는 교회에 가서 선을 보았는데, 교인이 70정도 되는데 말이다. 설교내용까지도 기억이 나는데, 그 본문이 이사야서인데 말이다. 그런데 자꾸 그런 꿈을 꾸게 되어서 그만 짜증이 났다는 것이다. 굳이 좋게 해몽을 하자면, 제가 설교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왜냐하면, 제가 자꾸 복귀하고 반복을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이미 내뱉은 것은 죄밖에 되지 않는데, 그러니 그것을 자꾸만 고상하게 변질을 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자꾸만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인해서 꿈들이 꾸어진다는 것이다. 즉 "잘해야 할텐데" 라는 일종의 강박관념과도 같은 것에 의해서 말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시면 항상 책망을 하시는데, 물론 꿈은 꿈이고 말이다.
그러한 꿈이 바로 우리의 본색임을 깨닫게 해주시는데, 물론 저는 이번에 꿈에서 그런 짓을 했지만, 평소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지 싶은데, 물론 꿈이나 현실이나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럴 때마다 성령께서 늘 책망해주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성도는 세상에서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된 자들이다. 성도가 본 것은 예수님의 궁전의 넓이요, 규모이다.
(계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계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성도는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된 자들인데,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해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보고 싶어했던 것들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상상하는 것은 그야말로 환타지인데,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것을 보고 싶어요" 라고 한다면, 자기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것은, 이미 자기가 보고 있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리 보고 싶어해도 보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평소에 보고 싶어했는데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아니, 이런 것들이 다 있었어?" 라고 하면서 기가 막히게 놀랄 정도로 낯설고 새로운 것인데, 자기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란 말이다.
여기 3절에서, "그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과 같고, 또 무지개가 있고, 녹보석과 같더라" 라고 하는데,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하면 굳이 죽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보석상에 가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변두리 말고 좀 유명한 곳에 말이다. 잘 모르면 주인에게 벽옥과 홍보석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되는데, 물론 무지개는 우리가 아는 것이고, 그러면 그게 천국인가? 그게 아닌데, 천국은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 잠시 '의미론'에 대해서 !!
이 시간에 '의미론'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면, "모든 의미는 상징이다" 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여기에 어떤 물체가 있다고 하면, 그 어떤 용어를 동원해도 이 물체에 대해서 정확히 일치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물체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용어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근접한 것을 임시방편으로 채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칠판을 닦는 '지우개'가 있다고 한다면, 물론 이 '지우개' 라고 하는 것과 이 물체가 서로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적당한 용어가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에 지우개라고 하자고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일단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간호원' 이라는 경우에도, 그 용어가 현재 그들의 직업수준과 교양과 능력에 적합하지를 못하다고 해서 '간호사' 라는 것으로 부르는 호칭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간호원은 일제시대에 의사에 구박받고 뒷치닥거리를 하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고 해서 말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간호원으로 불리다가 간호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나운서'의 경우에도, 그렇게 부르니 격이 떨어져 보인다고 해서 무엇으로 바꾸었는가? 물론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방송국에 격이 높은 사람들이 등장해서 상대적으로 떨어져 보이니, 그래서 '방송인'으로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가사 도우미, 환경 미화원 등도 그렇고 말이다. 그리고 안기부는 요즘 히트상품인 국정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 '상징'은 힘을 배당 받아서 !!
그렇게 일치가 되지 않는 것을 '상징' 이라고 하는데, 이런 상징에는 반드시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고 하니, 현재 기존의 지배하는 힘이 배당을 받아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김일성의 경우에, 남한에서는 '김일성' 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라고 하는데, 그러니 북한에서는 최고 존엄성을 훼손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김일성' 이라는 것 자체가 무슨 존엄한가? 하지만 여기에는 상징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그 상징 안에 분배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김일성 쪽에는 많이 배당이 되어있고, 다른 쪽에는 적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언어' 라는 것은, 이것은 놀이판의 글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트겐쉬타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일종의 게임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힘이 센 쪽이 자기 힘을 긍정하는 쪽으로 용어가 바뀌게 되고, 그러다가 다른 쪽이 힘이 세어지면 거기에 유리하게 용어를 바꾼다는 것이다. (녹취 '구' - 그래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각 부처의 이름을 다 바꾸는 것인가요?)
◈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
그러니 상징이라는 것을 신학에서 진짜로 다루게 되면 다음과 같이 해야하는데, 여기서 성경말씀을 한 번 찾아보자. 오늘 처음 찾는 것 같은데, 고린도후서 3장 6절인데, 이 대목은 아무리 봐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데 말이다.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여기에 보면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라고 하는데, 즉 글자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이냐는 말이다. 그만큼 모든 언어는 상징이고 그 안에 힘이 있다는 것이다. 문자를 들이댈 때는 "너는 내 소속이야" 라고 하는,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은 사람을 죽이는 힘이고, 그런데 이 말씀을 사람이 아닌 성령께서 다루시게 되면, 성령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성경해석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문자로 해야하는가? 영으로 해야하는가? 당연히 영으로 해야하는데, 여기서 어려운데 말이다. 문자가 지배하는 힘이 있다고 하면, 모든 인간은 성경을 볼 때 문자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성경을 볼 때 자기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여기면서, 힘을 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방식으로 보고자 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힘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제가 이것을 할 테니 힘을 주소서" 라고 하면서 힘이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남이 자기에게 문자로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미 자기가 성경을 보면서 문자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고 하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 일단 먼저 '문자'로 해석하고, 그 다음에 '영'으로 !!
그래도 우리는 일단 먼저 문자로 해석을 해야하는데, 순서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문자로 해석하고, 그리고 나서 성령을 통해서 책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니가 살려고 이렇게 해석을 했어? 그래서 너는 야단을 맞아야 돼. 이것은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이야" 라고 할 때, 그게 영이라는 말이다.
흔히들 영을 두고서, 모호하고 신비적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또 하나의 문자라는 것이다. 진짜 영은 구체적인 사건인데,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신비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즉 십자가와 연결이 되어있으면 영이고, 십자가와 통하지 않으면 그것은 육이라는 것이다. 그게 문자이고,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다.
◈ 마지막으로 '666'에 대해서 !!
예를 들어서, '666' 이라고 할 때에, 신천지의 천지일보에서 저에게 요한계시록의 '666'에 대해서 질문을 해서 제가 답변을 했는데, 그것이 문자인데 말이다. 오늘은 이것만 이야기하고 마치겠는데 말이다. '666' 이라고 할 때, 여기에 고린도후서 3장 6절을 적용시켜 보자는 것이다.
(계 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 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666'을 볼 때 인간은 제일 먼저 문자로 보게 되는데, 그렇게 문자로 보게 되니, 현재 '6' 이라는 숫자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인데 말이다. 즉 이미 인간들에게 통용되고 있는 숫자가 6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인간들이 이 '666'에 대해서 어떻게 사용하는고 하니, 그 당시에 인간들이 숫자를 권력에 사용했는데, 권력의 비중, 즉 어느 쪽에 권력이 더 쏠려있고 어느 쪽이 더 희박한지, 그러한 것에 의해서 숫자들이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그 당시 로마글자는 권력자인 황제의 이름인 동시에 그 안에는 숫자가 담겨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문자를 숫자로 사용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666'은 짐승의 숫자인데, 그래서 사도요한이 이러한 '666' 이라는 숫자를 사용하게 되면, 그 당시 사람들은 누가 자기들을 핍박하는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자기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이다. 그러면 그 당시에 네로나 도미티안 황제도 있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것은 예수님의 나라에 도전하는 악한 세력의 숫자인데, 그 숫자를 헤어보면 '666'인데, 그게 곧 사람의 숫자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말이다. 그러니 이 '666'에 해당되는 사람은 자기들을 핍박하는 어떤 특정한 로마의 황제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666'이 로마의 황제라고 하면, 그러면 네로 황제가 죽고 난 뒤에는 '666'이 있는가? 없는가? 사라지고 없는데, 그러면 이 성경구절도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 이야기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 '666'이 아직도 유효하려면, 이 시대에 '666'이 또 다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또 이 '666'을 계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껏 침례교에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소위 바코드에 '666'을 집어넣어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경제를 쥐고 있는 재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기들도 돈을 좋아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정작 본인들도 바로 이 '666'에 해당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해석할 때 문자로 하면 안 되고, 영으로 해석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의 해석이라는 것은 육의 해석을 먼저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그것을 책망하는 식으로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 책망하는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서 나왔고 말이다.
◈ '666'과 '그리스도의 인(印)' !!
그것을 요한계시록 13장에 어떻게 하는고 하니, '666' 이란 숫자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인을 맞은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인을 이마나 오른손에 맞을 경우에,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것을 숫자가 나와있는가? 그건 없다는 것이다. 그냥 '그리스도의 인(印)'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이라면 '777' 이라고 나가야 하든지 하는데, 그런 것은 없고 그냥 그리스도의 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왜 '666' 인고 하니, 아까 사건이라는 것은 구원이 벌어질 때 사건이라고 했는데, 지금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성령이 함께 해서 읽게 되면, 그러면 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이 '666'이 무엇이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을 맞은 사람은 무슨 모양이지? 십자가 모양인가?"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생각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떻게 행세하면 구원을 받겠는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무엇인가? "아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되는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 구원을 받는 과정이 소극적으로 !!
다만 그러한 가운데 구원을 받는 과정만 소극적으로, "육신이었던 우리를 이런 경우와 이런 상황을 통해서, 이 세상 속에서 이렇게 고생을 해가면서 기어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구나" 라는 것을, 바로 그런 여정과 과정을, 그렇게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 세상적인 일들을 배치해서, 그게 구약의 선지자가 나오는 사건인데, 그것이 배치가 되어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마치 퍼즐처럼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666'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도 뭔가 표시를 받는 것처럼, 반대로 성실하게 방치가 되는 사람들, 즉 구원을 받지 못하게 방치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인이 아닌 마귀의 인이 그들의 이마나 오른손에 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런 표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과 같이 보면 되는데, 그리스도의 인을 맞은 사람,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를 아는 자들을 빼놓고는, 이마나 오른손에 어떻게 하고 말고 간에 그 자체가 이미 '666'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인을 맞은 사람은 이마에 무슨 표시가 있는가? 그런 것은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그 전체가 하나님께 인을 맞은 모습의 기능을 발휘한다고 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하는 모든 행동과 태도와 삶의 모습은, 그 자체가 곧 '666'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그 당시에 인간들이 통용하는 숫자를 매기는 것을 가지고 표현을 하지만, 상징적으로 이마나 오른손에 '666' 이라는 숫자가 매겨지는 것으로서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빼도 박도 못하게 말이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전혀 지울 수가 없게 말이다. 이미 하나의 운명처럼, 팔자처럼 악마에 매여서 사는 것이 이 세상이라고 하면, 그것을 보고 고소하다고 여기지 말고,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도 마찬가지로 주님의 구원에서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팔자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 주여,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러니 결국 "666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주여,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된 장치들이 '666'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인을 이마에 맞은 자들이 성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장치 하나하나에 언어가 삽입되고 문자가 되더라도,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준비된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666' 이라는 것을 해석하면 그 끝은 십자가인데, 그렇게 십자가로 연결이 되어야 영적인 해석이지, "666이 무엇인가?" 라는 것에 집착하면, 그래서 그것을 해석한다고 하면서, 즉 "이것은 상징적인데, 하나님께서 더 나가지도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대로 가만히 두어야해" 라고 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것은 바로 "나는 이 정도만 아는 겸손한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결국 자기 자랑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가 그렇게 답변을 해놓았는데, 물론 그 쪽에서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말이다. 물론 이 '666' 뿐만이 아니고, 물론 이게 제일 어렵기는 하지만, 다른 모든 성경해석도 역시 인간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말씀이 완료되었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이미 완료된 사랑을 받아 누리고 있는 입장임을 알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모든 말씀이 우리의 지식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 모든 입장이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한 우리의 현재의 사실인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것임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12,11 오후 10시에 마침.
그런데 철이와 메텔의 은하철도는 왜 '999'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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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1 - 십자가 마을 게시판에서 목사님이 답변을 하시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식도 역시 문제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 답변 - 의식이 없을 수는 없고, 의식이 없는 것도 하나의 의식이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의식을 믿고자 하는 것인데, 즉 "이것이 예배입니다" 라고 하면서 우기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예배는 참석하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산 제사가, 즉 영적제사가 되게 하는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말이다.
* 질문1 - 그러면 굳이 '예배' 라고 표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 답변 -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상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통용되는 문화를 사용하되, 그것을 통해서 십자가와 관련을 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 질문2 - 사도신경에 보면,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 세상이 지옥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이 땅에서 삶 자체를 음부에 내려가신 것으로 보면 안 됩니까?
* 답변 -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처음에 신앙고백을 만들 때, 그것을 가지고 대논쟁이 벌어졌는데, 즉 "예수님은 지옥에 갈 이유가 없다. 그냥 죽었을 뿐인데, 그것을 음부로 표현했다" 라고 했고, 반면에 "아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가셨다. 그게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온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합의를 했는고 하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냥 "주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 라고, 그래서 그게 사도신경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일종의 무마책으로 말이다. 그리고 해석은 후대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방치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 음부는 구약의 용어인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이전까지의 용어라는 것이다. 그게 신약에서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데, 부자가 음부에 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음부가 과연 지옥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지옥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최종적인 지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난 뒤에 등장하는데, 그런데 십자가를 지고 난 뒤에는 음부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옥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음부에 갔다가 지옥에 가느냐?" 라고 하기도 곤란한데, 왜냐하면 사건의 진행방향은 우리가 아닌 예수님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음부에 가셨다가 올라오심으로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셨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부와 지옥은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같이 쓸 수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분리하게 되면 천주교의 연옥설이 되고 마는데, 그것은 곤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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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일보의 질문과 그 답변 --
⑭ '용의 7머리와 10뿔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 666'은 각각 무엇인가?
용의 머리와 10뿔은, 다니엘서에서 다니엘, 곧 인자의 나라에 속한 백성과 대결구조를 가졌던 그 바벨론제국의 연장에서 출몰되어야 했던 제국이다.(단 7:7) 이 제국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제국과 더불어 다니엘에게 내려준 계시가 어떤 식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어서 진정 ‘인자의 나라’가 어떤 식으로 세상에 등장될 것인가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용의 지배하에 있기에 자신을 지배한 정체는 지배 받는 입장에서는 알 길이 막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열 뿔 가진 제국, 곧 짐승의 정체는 인자의 나라의 실체, 곧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7:16)고 언명하시면서 그러면서도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성도에게 안겨 주신 나라, 곧 아들의 나라(골 1:13)를 역사 속에 흔적을 남기는 식으로 그 짐승의 나라의 기능을 복음의 배경으로 새롭게 사용하시는 것이다. 항상 뱀의 후손의 정체는 여자의 후손과 병행하므로서 그 실제적 실체가 기능적으로 노출되게 되어 있다. (창 3:15)
그렇다면 그 인자의 나라에 속한 아들 나라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살게 된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을 의지하고 스스로 자신을 살리는 식으로 세상 힘에 의지하지 않기에, 기존의 세상 권력을 이용하려는 의도를 가진 모든 이로부터 미움과 밉상을 받는 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은 이 상호 다른 두 부류를 숫자로 표기했다. 짐승의 숫자는 666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6백6십6명밖에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아무리 많은 숫자라도 모두 666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불리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의 운명은 결코 달라지지 않고 영원히 저주의 불 속으로 달려가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상대적으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의 운명도 이미 결정 났음을 말씀하기 위해서이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라고 언급하므로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 이 땅을 살면서 반드시 보여주게 되는 임무가 있는데 바로 그것은 짐승은 결코 어린양의 죽음을 이해하는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오로지 짐승에게 경배만 해야 하는 운명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666이런 숫자로 된 이름을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의 이름으로 삼으신 것은 언약의 완성인 ‘7’(7일만 천지를 창조를 완성했으니까요)의 완성차원에 아무리 해도 참여하지 못할 결정 난 운명이라는 것을 세 번씩이나 6을 덧붙여서 강조하기 위함이다.
‘666’이라는 것은 ‘7’이 가지는 창조적 표현을 위하여 이바지한다. 7인, 7나팔, 7대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실시하는 모든 것이 창조의 완성도를 품은 차원에서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완전성 속에는 완전성에 포함되지 말아야 할 것을 창조의 완전성을 위하여 축출해서 뽑아내어서 배제시키는 그런 기능도 함께 진행된다. 이것이 심판의 핵심인 분류 작업이다. 1, 2, 3, 4, 5, 6, 이걸 다 통합해서 의미를 제공하는 것은 7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의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룬다 할 때는 구원 받는 자, 외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바깥에 차버리고 배제하는 그 작업마저 ‘7’이라는 숫자로 묘사되는 창조 작업의 일환이 되는 것이다. 숫자는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존재성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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