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반대로 131007 본문
[13 대구강의 16] - [피 102] - 반대로
13,10,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302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그러나 예수님은 아신다. 세상 것이란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님을. 예수님께서 보고 계시는 이런 말씀의 세계를,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성도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과 더불어 다른 현실의 층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 안에서는 모든 것들이 그저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 보면 "세상 것이란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잘 알고, 교회의 행사도, 즉 바자회 같은 것도 참석을 잘 하는데, 교회의 운영방침도 잘 알고 말이다. 사회에 뭔가 보탬에 되면 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교회로 온다는 것도 잘 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누구인가?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해선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무엇인가?" 라는 것은, 그야말로 기를 쓰고, 권력투쟁에 나서고, 자기편끼리 모이고, 재미나게 지내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어보면, 그것은 큰 실례가 되는, 그런 뉘앙스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러면서도 남들이 자기가 예수를 잘 아는 것으로, 그렇게 속아넘어가 주기를 바랬는데, 그런데 속아주는 게 아니라, "혹시 예수님에서 대해 아십니까?" 라고 하면, 얼마나 그 마음이 쓰리겠느냐는 말이다. 교회에 관심이 있었지, 정작 "우리를 구원하신다" 라는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알아야 !!
그리고 교회 내부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자꾸만 궁금해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잊어버리자는 식이란 말이다. 정작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고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기껏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어릴 때 구유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마리아고 성장과정은 이러하고 하는데, 마치 위인전기를 소개하듯이 말이다. 최영 장군이나 장희빈을(?) 나열하면, 그 사람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몇 살 때 성전에 가시고, 또 어떻게 어떻게 하셨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은 아는 것은 아닌데, 그건 예수님이 겪었던 일이란 말이다. 정작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바로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를 아는 것인데, 그것만이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이다.
◈ 요한복음의 경우에 !!
요한복음이 바로 거기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예수님께서 겪었던 일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면, 요한복음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여기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번 정리해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역사의 인물을 아는 식으로는 아무리 예수님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분석해봐야,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알게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 진짜로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는 누가 있는고 하니, 성령님이 계시는데, 즉 성령님을 통해서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고 아들은 아들이 되는데, 따라서 그 관계를 안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야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 가족이 나오는데,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보기에도 좀 이상한데, 평소에 그들은 예수님을 잘 대접했고,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근처에 오기만 하면 숙식을 그 집에서 해결했는데, 굉장히 친한 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와 자매도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어떤 행동 하나 때문에,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그 예수님이 아니구나" 라고 하는, 그런 계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오빠인 나사로가 갑자기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혀 죽을 상황이 아닌데 말이다. 그러니 그 가족에 우환이 생겼고, 그래서 도움을 요청할 곳은 전혀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하필이면 먼 타지에 가 계셨다는 것이다.
◈ 역시, 예수님은 고쳐주지 않아 !!
이 대목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보는데, 예수님이 멀리 가 계셔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급히 전갈을 보냈는데, 자기 오빠를 살려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멀리 가신 것이 아니라 가까이 계셨다고 하면, 아니 예수님이 아예 그 집에서 숙식을 하고 있는 가운데 나사로가 그만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다고 하면, 그러면 예수님이 과연 낫게 해주실 것인지, 그렇게 제가 가정을 해봐도 역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분명히 전갈이 왔다는 것과, 그게 아니라 같이 있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질 게 없다는 말이다. 전갈이 왔다면, "이런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고? 그러면 내가 빨리 가야지. 애들아,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고 하니, 이번 스케줄은 취소하고, 내가 빨리 가서 그 가정의 우환을 없애주어야 하겠다. 어서 빨리 가자"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전갈이 왔음에도 불고하고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 반대로, 거꾸로, 로꾸거 !!
이것을 저는 이 하나의 단어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은데, 즉 '반대로' 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어떤 관계인고 하니, 육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는 모두가 반대로 보일 수밖에 없는 기능과 일들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강의제목을 '반대로' 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정작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와 정반대가 된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우리의 관계를 육이라고 보고,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는 오직 성령님이 함께 계시는데, 그것을 두고 영의 관계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육으로서는 영의 관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편하게 생각해서 "성령을 받으면 되지" 라고 하는데, 성령은 그냥 받아지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그 관계를 끌어오는 것이 성령이란 말이다. 우리는 여기 육에 놓여있으면서 성령만 달랑 소유하면 되는 줄로 아는데,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 혹시 성령이 있습니까?
대구의 칠성시장에는 별별 것들이 다 있지만, "혹시 성령이 있습니까?"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뭐라고 해야하는가? "여기 번데기가 있습니까?"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 되에 3천 원을 하는데, 참 싸죠? 그렇게 3천 원을 주고 사먹으면 된다는 말이다. 칠성시장에서 성령이 한 되에 얼마나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구입할 때, 그 대상자체로서 종결이 된다고 여기는데, 그 뒤에 뭔가가 딸려오는 것은 없다고 보고, 그것만 돈을 주고 구입하면 되는 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필요하면 성령을 달라고 하면 되는 줄 아는데, 성령을 받아야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를 믿어야 구원을 받으니 말이다.
◈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걸쳐 계시는 분 !!
하지만 성령은 따라오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걸쳐서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처소'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이 아버지와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관계 속에서 같이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괜히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비둘기를 한 마리 키운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둘기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도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곧 아버지 뜻을 아는 자만이,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그 관계를 아는 자만이 예수님의 패밀리가 된다는 말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말은, 여기서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는 남의 아버지인데, 누구의 아버지인가?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할 때, 그 아버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모르는가? 우리는 성령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교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모르는데, 나중에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정립되고 난 뒤에,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따로 예수님의 아버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아버지를 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제치고 "아버지, 이제 저와 이야기를 합시다" 라고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님 안으로 집어넣어서, 예수님 안에 들어가 보니 "아하, 이런 아버지구나" 라고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 아버지와는, 방금 오늘 강의제목을 '반대로' 라고 했는데, 그 하나님과 비슷한 것도 아니고, 뭔가 미흡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다가 뭔가 좀 더 채우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라는 말이다.
◈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겨라 !!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십계명을 설교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것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겨라" 라는 겁니다. 열심히 섬기는 말이다. 그게 우리 인간의 육적인 본색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말 자체가 우리가 지킬 수 없는 말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따지고 보면 그 자체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 딴에는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그 자체가 말이다. 그 뭉치 전체가 곧 다른 신을 섬기는 모양새라는 말이다. 그렇지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 때문인데, 그들이 믿던 하나님은 누구인가? 여호와인데, 즉 여호와가 여호와를 죽인 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는 여호와와 예수님을 죽인 인간들이 아는 여호와는, 미흡한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의 속성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려고 하면, 다른 교회 교인들이나 목사들과 대화를 해보면, 거기에서 뿜어내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다른 하나님이 나온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주장했던 그 하나님이 나오는데,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또 다시 유발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말이다.
◈ 강팍이 언제 등장하는가?
자기가 원하는 자만이 구원이 되고 달음박질을 해야 구원이 된다는 것이, 그게 곧 애굽이고 바로이고 강팍(강퍅?)이라는 것이다. 그 강팍이 언제 등장하는가? 진짜 아버지의 뜻대로 긍휼함을 입은 그 현장의 주변에 강팍이 자동적으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미워하고 핍박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나와 나의 복음을 위해서 욕을 얻어먹거든, 너의 구원에 대해서 안심해도 괜찮다" 라고 하셨는데, 로또에 맞은 것이 행운이 아니라, 진짜 행운은 예수님과 그 복음으로 인해서 핍박을 받으면, 그야말로 천사가 와서 수고했다고 등을 두드려주는, 그런 인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이 아니면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예수님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우리에게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먼저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말이다.
여기서 성경말씀을 한 군데 찾아보겠는데, 이왕 성경을 가지고 있으니 활용하자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18절인데,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누구를 먼저 미워한다고 하는가? 우리보다도 예수님을 먼저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혼자 미움을 받았다고 하면서, 외롭다고 질질 짜지 말라는 것이다.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목사님, 성령에게 탄식이 왜 필요합니까?
어제 오후예배를 마치고 나서 우리교회의 청년이 질문을 했는데, 그의 질문은 항상 예리한데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용서했다고 하면, 성령에게 탄식이라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모두 다 용서했다고 하면, 성령께서 굳이 탄식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질문의 뉘앙스를 알겠지요?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탄식한다는 것은 애를 쓴다는 말인데, 일방적으로 구원하면 그 구원하는 쪽에서 그리 애를 쓸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상대방을 이미 구원했다고 하면, 그런데 왜 애를 쓰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안타까워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런데 왜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러한 탄식을 하지 말고 깔끔하게 구원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름 의미가 있는 질문인데, 혹시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해보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하기를,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청년은 성령께서 구원을 하신다는 것을 깜박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셨는데, 그 성령이 탄식을 하신다는 말이다.
◈ 성령은, 예수님의 탄식을 그대로 전달 !!
하지만 그 탄식은 구원을 받지 못할까봐 하는 탄식이 아니라, 성령은 예수님의 탄식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탄식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시키는 탄식, 즉 "니가 그런 짓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라는 것을 전달하는 탄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나는 구원을 받았다. 헤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 고생하셨구나" 라고, 그렇게 예수님의 아픔에 참여되는 마음가짐을 성사시키는 기능을 성령의 탄식을 통해서 적용시킨다는 것이다. 성령의 탄식을 통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식이 "엄마, 나 오늘 100점을 맞았어" 라고 하면, "나에게 그런 소리는 하지마. 나는 너를 학교에 다니게 주면 그것으로 그만이야" 라고 하는 냉정한 부모는 없다는 것이다. "고뤠? 어이쿠 잘났어요. 내 새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엄마, 오늘 학교에서 놀다가 그만 정강이를 조금 다쳤어요" 라고 하면, "어이쿠, 많이 아팠어요? 엄마가 호호 해줄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기능이 성령의 기능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한 가족이니 말이다. 예수님이 낚싯대로 구원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아픔을 가지고 오셨는데,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주님이 성령을 주신 것을 믿을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 그를 위하여 고난도 함께 !!
그러면 그런 고난 가운데 어떤 현상이 있는가? 여러분도 잘 아는 내용인데, 시편 119편 67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되어있는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이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고난이 없을 때는 내가 혼자 잘난 척을 하면서 까불었는데, 주님의 고난을 통해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주님이 어떤 분인지, 그 주님을 위하여 내가 태어났다는 것을, 즉 태어난 내가 잘되기 위해서 차후로 주님이 필요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라는 것이다.
(시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욥이 참 안 됐어요 ??
예를 들어서, 구약에서 욥이 나올 때, 그 욥을 보고 "참으로 안 되었다. 팔자가 사납구나" 라고 하면, 그것은 욥의 남의 이야기가 되가, 즉 옛날의 먼 나라, 어떤 아저씨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욥에게 작용했던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그래도 적용시킨다고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그러면 욥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 이야기인데, 그러면 우리는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조차도 전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식에게 전화를 하는데, "야야, 너거들 잘 있나?" 라고 하면, 딸이 "엄마가 이 시간에 무슨 전화를 다 했어요?" 라고 하면, 엄마는 "응, 목사님이 오늘 욥기 설교를 했는데, 욥의 사태가 우리에게 그대로 반복이 된단다. 너도 알다시피 욥이 자식도 다 죽고 재산이 다 날아갔잖아. 그래서 전화를 했잖아. 자식과 재산을 잘 간수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전화를 하든 하지 않든 그게 우리의 솔직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욥기가 이야기하는 것이 고난인데, 그런데 욥이 죄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죄가 있을 때 고난이 온다고 여기는데 말이다. 그런데 욥기의 주제는 무엇인고 하니, 죄가 없는데 고난이 오고,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이 그러한데, 그들이 무지한 자들인데 말이다. 그들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즉 죄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들은 멀쩡하고, 정작 죄가 없는 자에게는 고난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난이 없는 자들이 억울하게 고난이 있는 자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하나님을 모르는데, 다른 말로 하면, 모두가 다 사탄에게 속아넘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사탄에게 속아넘어갔기에 그들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서 고생하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손해를 볼까 싶어서, 그래서 죄를 짓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지으면 이런 손해를 본다" 라고 하는 그 자체가 마귀에게 홀딱 빠졌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그게 욥의 친구들의 한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원래 고생을 해야하는데, 그 가운데 우리의 관심사는 "아버지가 기뻐하는 게 무엇인가? 라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물론 그것은 믿음인데,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버지의 기뻐하심, 거기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 땅에서 고난은 받게 되어있으니 말이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어차피 아담이 쫓겨서 내려온 땅 !!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이 땅에 쫓겨서 내려오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창세기 3장에는 고난과 고생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4장에서는 죄를 이야기하는데, 살인죄가 나온다는 것이다. 4장 끝에 가면 드디어 살인자의 후예들이 이 세상을 점령한다는 말이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고생을 하도록 되어있는 것이고, 즉 죄를 짓게 되어있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마주보면서 이 세상을 통과하고 있는데, 우리 성질이라면 바로 통과하고 싶은데, 아직 계약이 만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약이 끝나면 더 이상 고생하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 다시 요한복음 11장으로 !!
다시 요한복음 11장으로 돌아와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소식을 보냈는데, 자기 오빠가 죽어간다고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가지 않았는데, 그런데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야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무엇인고 하니, 마르다와 마리아의 심정을 좀 이해하자는 말이다.
자기들 딴에는 예수님을 안다고 여겼는데, 제가 강의처음에 뭐라고 했는가? 교인들이 교회에 대해서는 안다고 하는데, 그런데 정작 누구는 모른다는 말인가? 예수님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예수님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뭐냐 하면,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서 아는 것, 그것이란 말이다.
평소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고 하니까,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보다는 자기들이 많이 안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건을 하나 일으켰는데, 그게 오빠가 죽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너희들은 그동안 나를 아는 게 아니었다" 라는 것을 폭로시키는 계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게 되면 예수님이 참으로 고마운데,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고 하니, 아직도 우리에게서 폭로가 되어야하고,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제대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나름 예수님을 조금 안다고 여기지만, 막상 사건이 터지게 되면,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멱살을 붙잡고 "이제 왔어? 이제 왔어? 차라리 오지 말지. 왜 왔어? 오빠는 이미 죽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나?" 라고 하면서 땡깡을 부리는 심보, 그것을 우리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누가 감히 이야기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부모도 없이 오빠와 함께 살고 있는데 말이다. 아마 마르다와 마리아도 결혼을 하지 않은 노처녀가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든다는 것이다.
◈ 실망합시다 !!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했는데, 그 예수님이 자기들을 실망시킬 때, 그것은 바로 반대에서 진짜 주님의 나라로 갈 경우에는, 방금 제가 중요한 용어를 하나 내뱉게 있는데, 즉 '실망' 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실망하고 그런 예수님을 자기에게 실망하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에 실망하는 그 실망을 통해서, '반대로' 진리로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니 그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망을 좀 하자는 말이다.
어제부터 이상하게도 계명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다른 신을 섬깁시다. 부모를 공경하지 맙시다. 간음합시다. 살인합시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 오늘은 "실망합시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실망을 함으로서 거짓에서 진리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르다와 마리아만 실망을 했는가? 12제자가 몽땅 다 실망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베드로에게 실망을 했는데, "무슨 말로만 수제자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과 밥을 같이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저 꼬라지를 봐. 그게 무슨 복음을 안다고 할 수 있냐?" 라는 식이란 말이다.
교회에 대해서 실망하고, 목사에 대해서 실망하고, 남편에 대해서 실망하고, 자식에 대해서 실망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사람에게 은근히 기대했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눈에 있던 껍질이 벗겨질 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평소에 우리가 생각한 세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주님은 무작정 불쌍히 여겨서 구원을 하시는데, 그러니 "내가 얼마나 힘있게 예수님을 붙잡았는가?" 라는 것도, "내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간절히 믿었다" 라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으면 붙잡을 수록, 즉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것이다. 평생을 주님에게 헌신을 했지만 돌아오는 게 실망뿐이라고 하면, 그게 옳다는 것이다. 육은 계속해서 육이기 때문에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에게 성령이 관계를 하시고, 그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전혀 기도할 줄도 모르기에 말이다. 성령께서 그것을 늘 깨우쳐주시면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 정해진 코스대로 구원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고, 그러한 예수님을 우리가 안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했다는 것이고,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이 당했던 그 고난과 아픔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매일같이 했던 그 기대가 무너지면서 실망을 야기하는 인생을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교재 302페이지에 보면 '좁은 길'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좁은 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다. 그 길은 우리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가는 길이 아니고, 그야말로 본의 아니게, 그리고 유일하게 영생의 나라로 통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 이로서 성도는 본의 아니게 예언대로 십자가의 길로 접어든다. 그게 좁은 길이며, 유일하게 영생의 나라로 통하는 길이다.
(계 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요한복음 15장은 아까 했지 싶은데,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라고 말이다. 이제 302페이지 중간부터 살펴보자.
** 결국 십자가가 끝이었다. 십자가 그 뒷면은 없었던 것이다. 원래 인간은 막장 인생이었다. 끝과 부딪칠 수밖에 없는 인생인데, 그 끝이 십자가이다.
◈ 십자가와 절개지 !!
8년 전인가 문경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아직도 제가 기억하는데, 왜냐하면 너무나 인상에 남는 사건이기에 말이다. 어떤 아저씨가 예수님을 본받아서 죽는다고 하면서 자기 몸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인데, 아마 여러분도 기억을 하지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뒤쪽이 채석장이라는 사실이 저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채석장이면 이게 절개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는 숲이 있어도 잘라버리면 절벽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 뒤에는 절벽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그 소식을 듣고, "바로 저것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매다는 것은 필리핀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그리 놀라운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십자가의 끝에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자동차를 가지고서 그 절개지를 향해서 돌진하면 차가 아플 뿐이지, 채석장에 구멍을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너무 딱딱한 바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뚫고 지나갈 수는 없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고 하니까,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인간은 그동안 폐쇄된 공간에서 살아왔음이 그만 들통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폐쇄된 공간에 갇혀있는데, 사실 처음부터 갇혀있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말이다.
◈ 인간은, 자기 인생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어 !!
어제 오후설교시간에 '마천루'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죠? 아주 높은 빌딩을 마천루라고 하는데 말이다. 미국의 102층 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마천루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즘 건축가들이 한 평생을 하나의 건물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건물을 구상중이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데, 왜 그런고 하니, 그게 바로 창세기 3장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에덴동산 시절에는 에덴동산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고,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야 비로소 나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에덴동산 밖으로 나가니 그 에덴동산 외에 다른 동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가 지옥이고 저주가 충만한 세상이었다는 것이다. 즉 에덴동산 동쪽으로 추방될 때, 바로 그쪽은 저주였다는 말이다.
◈ 할머니, 왜 그래?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전도사님의 손자가 지금 4살인데, 그런데 그 아이가 할머니에게 묻기를 "해가 어디 갔어요?" 라고 하니, 전도사님이 "해는 다른 나라로 갔는데, 아침이 되면 다시 돌아온다" 라고 했는데, 그 아이가 "할머니, 왜 그래?" 라고 했다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를 왜 놀리느냐는 말이다.
해가 지고 나면 어디로 가는가? 전도사님의 말이 맞는데, 해가 지면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게 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구성할 때, 자기를 빼고 세상이 구성되는 법은 없는데, 자기가 있는 곳이 유일한 세상이란 말이다. 다른 세상은 없는데, 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세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가 지게 되면 해가 보이지 않는데, 그러면 해가 자기가 있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갔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유치원에서는 '해님의 나라' 라고 하는데, 물론 달은 지면 달님의 나라에 가고 말이다. 왜 그게 해님의 나라이고 달님의 나라가 되는고 하니,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이기 때문인가? 이 나라는 자기 나라이기 때문에, 즉 "나는 내나라, 해는 해나라, 달은 달나라",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해나라도 없어지고 달나라도 없어지고, 달나라에 가보니 토끼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만 지구에 사는 과학자 중심의 나라에 그만 모든 것이 다 편입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오직 인간의 나라밖에 없다는 말이다.
◈ 호킹 -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기 위해서 우주는 있다' !!
그래서 블랙홀을 예언한 그 유명한 스티브 호킹 박사가 하는 말이, "우주가 왜 있는고 하니,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기 위해서 우주가 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21살에 그만 운동신경물질로 인한 치명적 장애가 생겨서, 항상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분인데 말이다.
호킹 박사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고 하니, 신은 없기 때문에 그 신을 대행할 수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의미를 두기 위해서, 신이 없으면 이 세상은 의미가 없는데, 그렇게 이 세상이 의미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는 왜 있는고 하니까, "내가 너를 우주라고 부르기 위해서 우주는 지금까지 진화가 되어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었는데, 그렇게 만들어낸 것 가운데 가장 걸작품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만든 그 환경인 우주를 향해서 "너희들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에게 '우주' 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서 보답을 해줄게. 그러니 우리 같이 살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인데, 신도 없고 뭐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즉 오직 자기만 있으면 되는 세계라는 말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신시내티 레즈' 라는 팀에 우리나라의 추신수가 있는데, 1번 타자 겸 중견수로서 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LA다저스에 류현진이 투수로 있는데, 만약에 두 팀이 붙으면 한국사람은 누구를 응원하겠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고민이 되는데, 왜냐하면 '니 나라와 내 나라'를 구분할 수 없기에 말이다.
◈ 인간은, 갇혀있기에 아는 게 하나도 없어 !!
그처럼 인간의 모든 것은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성령의 세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주님의 나라, 천국 등등, 여기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은 단 하나, "너는 갇혀있고, 너는 그 자체로서 끝이다" 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끝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인생이라는 말이다.
◈ 결국, 십자가가 끝 !!
그러면 끝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끝은 그 다음이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끝 다음에 끝이 있으면 그 끝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교재 302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이 그러한 의미인데 말이다. 즉 "결국 십자가가 끝이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끝을 지나면 그곳이 천국일 것이다" 라고 하는 망상은 치우라는 것이다. 즉 "현재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것이 곧 끝이다" 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있는 이 세상에 무엇이 더 있다고 해도, 그것을 우리가 모르는 이상은 그게 끝이란 것이다. 여기서 아무리 천국을 만들어도, 이 천국은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만든 것이기에, 그만 튕겨서 자기 쪽으로 환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가 친 테니스 공이 자기에게 오는 것처럼, 자기가 믿은 예수도 자기에게 되돌아오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천국도 마찬가지고, 지옥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다 인간들이 지어낸 것이기에,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한 마디로 '끝'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끝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인데, 그러니 "애들아, 내가 너희들 손을 잡고 십자가까지 가겠다. 가서 내가 너희들에게 십자가를 소개하고 넣어줄게" 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은 아니란 말이다.
◈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홀로' 부활 !!
지금 여기가 중요한 대목이기 때문에 다시 설명을 하겠는데,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문제인데 말이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서 우리를 죽은 자로 완전히 확정을 지었다고 보면 제일 이해가 빠르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혼자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혼자 부활하심으로 다른 사람들은 죽었다가 깨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발로 다지면서, 그래서 홀로 부활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홀로 부활을 하셔야만,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는 것이 성사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을 하셨으니 자기도 십자가를 지면 부활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십자가를 져도, 그것은 문경에서 십자가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십자가에서 주님 십자가로 갈아타기를 해야하는데,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어야 '갈아타야지' 라는 것이 말이 되는데, 십자가는 우리가 '갈아타야지' 라는 생각조차도 다 죽여버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갈아타고 말고 할 여지를 전혀 남겨놓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 오직 예수님만이 아들 !!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만이 자기 아들이기 때문인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말이다. 다른 사람은 아들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만이 아들인데, 이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구약의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데 말이다.
어제도 설교를 했지만, 스가랴 3장에 보면 '순(旬)'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이새의 순으로서, 즉 이새의 아들로 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새는 뭔고 하니 다윗혈통인데, 하나님은 그 수많은 혈통들 가운데서, 이스라엘만 하더라도 13개의 혈통인데, 레위가 대표가 되니 12개가 되는데 말이다.
그 12지파의 혈통 중에서도 오직 누구만 택했다는 말인가? 유다지파만 택해서, 그 유다지파에서 순이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분이 이 죄 많은 세상 속에, 사실 굳이 오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죄가 없는데 왜 오시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유다지파라는 튜브를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묻혀서 그 튜브를 통해서 다시 주님께 간다는 것이다.
◈ 다윗언약의 경우에 !!
그런데 다윗언약의 내용에 보면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또 너희는 내 아들이 된다" 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낳았다고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해서 아들이 아니고, 반드시 다윗언약에 접촉이 되어야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삼하 7: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 저는 사람이니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었죠.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있고, 그 아버지에 의해서 제가 자식이 되었으니, 즉 아버지가 저를 낳았으니 저는 자동적으로 아버지의 아들이고, 아버지는 자동적으로 아버지죠. 이와 마찬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즉 신의 자녀인데, 그래서 아버지는 하나님이죠"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데, 구약에 보면 오직 다윗언약에 해당이 되어야만 아들이라는 것이다. 즉 "너는 내 아들을 낳았다" 라는 다윗언약을 통해서만, 즉 다윗혈통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지 다른 혈통은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이다. 단군의 혈통은 죄송하게도 안 되는데, 물론 제가 죄송해할 이유는 없겠지만 말이다(ㅋㅋ).
◈ 오직 한 명 !!
유다혈통만이 가능한데, 그렇다고 해서 유다혈통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은 유다혈통에만 해당이 되는데, 그 유다혈통에 해당되는 아들이 두 명도 아니고 세 명도 아니고 몇 명인가? 오직 한 명밖에 없는데,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이 몇 명인가? 갈라디아서 3장에서 말이다. 오직 한 명인데, 그렇게 한 분밖에 없는데, 그것을 유대인들이 모른다는 것이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러면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우리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죄의 지배를 받아본 적도 없고, 죄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다른 민족들은 다 죄의 종인 것을 인정하겠는데, 하지만 자기들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한 복이기 때문에, 그 복은 죄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고, 죄의 종에서 벗어났다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보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셨는데, 주님도 입이 얼마나 거치는지 모르는데, 너무나도 극단적이라는 것이다. 좋게 좋게 해서 잘 지내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마치 오승환처럼 돌직구인데, 주님께서 곧 바로 돌직구를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맞아서 멍이 들던 그것은 모르겠다는 것인데, 단지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는 말씀은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 우리가 마귀의 자식인가? 왜 그래?"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그러니 너희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마귀가 그렇게 했다는 말이다. 즉 "너희들이 마귀새끼들이니 그렇게 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우리도 역시 마귀새끼 !!
꼭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 같은데, 사실 그렇고 말이다. 우리도 역시 마귀새끼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는 것이니, 착실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우리는 마귀의 집에서 살고 있는 세간이었는데, 주님이 도둑이 되어서 집주인을 묶어놓고 우리는 데리고 나왔다는 것이다. "아빠랑 같이 가자" 라고 해서 천국에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기능인데, 하늘나라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활동을 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는 그동안 마귀에 속했음을 깨닫게 하면서 우리를 빼내신다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명심해야하는고 하니, 기독교라는 종교도 마귀가 만들었음을, 물론 교회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것을 전제로 반드시 깔아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 십자가로 끝, 뒷면은 없어 !!
교재 302페이지에 나오듯이 십자가로 끝이고 그 뒷면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일체 화투를 모르는데, 다들 성화가 된 삶을 살기에 말이다. 그런데 화투를 보게 되면 앞면은 동양화로 되어있지만, 뒷면은 그냥 칙칙하고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의 뒷면은 칙칙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똑같은데, 우리는 모두가 다 십자가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그 십자가에서 빼내주고 말고 하는 것은, 강의 처음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이 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에, 바로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우리에게 임해야만 십자가에서 처소로, 즉 영생의 나라로 우리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임해야만 말이다.
여기서 요한복음 14장 8절과 9절을 한번 보자.
(요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
여기 9절에 보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라고 하는데, 여기서 현대 과학자들은 현미경을 들고 설치는데, 즉 "예수님은 가만히 계셔요. 이제 CT촬영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했으니, 이제 확인에 들어가겠습니다. 힘이 들어도 조금만 참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데, 예수님을 본 자가 무엇을 봤다는 것인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예수님을 본 것을 1번이라고 하고, 아버지를 본 것은 2번이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봤을 때, 지금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안 보고 있는 것인가? 분명히 예수님을 보고 있는데, 그렇게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 맞다고 하면, 예수님도 진짜이고 자기도 진짜라면, 그러면 본 것도 진짜라는 말이다.
그러면 "내가 예수님을 보고 있다" 라는 것은 나쁜, 엉터리 봄이 아니라면, 그 문장을 1번이 아닌 2번 문장에 한번 써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본 자는 현재 아버지도 보고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런데 아버지는 보이지는 않으니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이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엄마, 아빠는 어디에 계시죠?" 라고 하면, 엄마가 "나는 본 것이 곧 아빠를 본 것이다" 라고 하면, 아이는 뭐라고 하겠는가? "엄마, 좀 비껴봐. 아빠를 숨겨놓았어요? 왜 그래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즉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을 보고 있는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다" 라고 하면, 그것은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아하,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구나"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지금 보고 있다" 라고 하시니, 예수님도 "내가 곧 아버지다" 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주님은 너무 바빠요 !!
그것은 사벨리우스의 유주론(唯主論)으로, 말 그대로 유일하게 주님만 계신다는 것인데, 즉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자신을 다른 모습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초반에 나오는 이론이 있는데, 교회사에서는 이단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매우 바쁘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질 때는 아들로 변신을 했다가, 또한 성령으로, 또 다시 아버지로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양태론' 이라고, 즉 형태가 그때 그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한 분인데 그게 바뀐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집에서는 아버지이고, 회사에서는 사장님이고, 교회에 가면 장로님이고 말이다. 그게 바로 양태론적 설명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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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주론(Monarchianismus) - 네이버에서
- 유일신론이라고도 하는데, adoptism(입양론)과 modalism(양태론)으로 구별된다.
ⅰ) 입양론 : 테오도토스 주장 - 하나님은 예수라는 인간을 그리스도로 입양했다.
ⅱ) 양태론 : 그리스도와 성부는 동일하다. 세 가지 주창자가 있다.
① Noetus : 성부와 성자는 같다(성부 수난설).
② Praxeas : 인간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가 결합하여 성자 그리스도를 낳았다.
③ Sabellius :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의 서로 다른 상태변화이다(가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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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러한 양태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따로 있고 아버지가 따로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니, 제자들은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 한다는 말이다.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 말을 이해를 할 것이라고 여겼는가? 그게 아닌데,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언어의 낭비가 아니냐는 말이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왜 하시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장차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왜 우리가 수학문제를 풀다가 제대로 안 풀리면 무엇부터 보는가? 뒤에 있는 답안지를 보게 되는데, 그런데 답안지는 문제가 먼저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문제가 없으면 답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3번에 '7' 이라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다. 1 더하기 6도 7이고, 14 나누기 2도 7인데 말이다. 그렇게 먼저 문제를 던지는데, 그 문제 속에 누가 포함이 되어있는가? 예수님을 보고도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마저도 문제에 속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나' 자신이 바로 문제라는 것이다. 무지몽매한 '나' 자체를, 그런데 주님은 그 '나'를 허비하지 않는데, 그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도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너무 시시하게 보면 안 되는데, 늘 허접스럽고 못났지만 필요하다는 것이다. 못났기 때문에 필요하고, 무지몽매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갇혀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말이다.
◈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독점해 !!
무엇이 때문에 말인가?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서 진짜 아들이었음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말이다. 예수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처나 아무리 유명한 철학자가 와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가 능히 아는 아버지라고 하면 다른 길로도 갈 수가 있는데, 하지만 예수님이 아버지에 대해서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에게로 가지 않으면 아무도 아버지에게로 갈 자가 없다는 것을, 그 사실을 성령이 오기 전에는 제자들을 비롯해서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몰랐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고 난 다음에는, 그 아버지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을 알려주는 성령이 오셨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생활이 좀 어렵고 궁핍해도, 회사에 부도가 나고 마누라와 이혼을 하더라도, 그런 것 때문에 너무 속상해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를 알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도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결혼 때문에 너무 상처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식도 없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왔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제 육은 잊어달라는 것이다. 육에 시달리는 것은 잊어도 좋다는 말이다.
◈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 !!
여기에 대해서 조금만 더 이야기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발로 밟고 "너는 내려오지마. 안 돼. 너는 오지마" 라고 하시면서, 예수님 홀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을 하셨다는 것이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말이다.
그 다음에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먼저 부활된 것을 보시는데, 즉 부활의 첫 열매로 말이다. 먼저 부활된 분을 장자라고 하는데, 점점 구약의 어려운 용어들이 나오는데 말이다. 이 장자의 특권이 무엇인고 하니, 그 뒤에 누가 부활이 될지는 창조 이전에 이미 아버지와 다 이야기를 끝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명단이 있는데, 그것을 '어린양의 생명책'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먼저 부활이 되고 나중에 부활이 될 자들은, 그것은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보낸 자에게만 해당되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즉 아버지가 보낸 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주님의 계획은 전혀 차질이 없어 !!
그래서 주님은 성령을 낭비하지 않는데, 반드시 필요한 자에게만 성령을 주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주셨으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데, 그러니 마귀의 그 어떤 방해에도, 이 세상의 그 어떤 환난이나 궁핍함에도 주님의 계획은 전혀 차질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 건설회사는 심심하면 부도가 나고 공사에 차질이 생기는데, 하지만 주님의 공사는 결단코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예'가 되지 '아니오'는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성령을 통해서, 그것 자체가 완료가 되었음을 우리는 미리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나그네인데, 뭘?
그러므로 우리는 여유가 있고 편안할 수밖에 없는데, 즉 "어차피 나는 이 땅에서는 나그네인데, 뭘?" 라고 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끝나는 세상에 대해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소풍을 가듯이 말이다. 만약에 아직 우리가 정신이 붙어있다면 이 세상을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남해에 가서 바다를 보는 것도 구경이지만, 그것보다도 인생을 살면서 인간들을 한번 겪어보라는 것이다.
끝에 갇혀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발작을 일으키는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목사를 하고 장로를 해도, 이미 끝에 갇혀있는 인간은, 즉 육에 갇혀있는 인간은, 성령을 받지 못한 인간은, 그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오직 긍휼로 빼내주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발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이 세상을 살았으면 손톱이 모두 닳고 없는데, 탈출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교회에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낙타무릎이 되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달음박질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말이다. 욕심을 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을 피크닉을 가듯이 즐기면 되는데, 여기 저기를 다니면서 구경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 발걸음도 가볍게 !!
아마 여자 분들은 잘 알지 싶은데, 백화점에 가서 물건도 사지 않고 3시간을 돌아다니면 남편은 따라다니다가 지쳐서 퍼지고 앉아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지는데, 왜냐하면 새로운 볼거리가 계속해서 나오니 말이다. 신상품들이 계속 나오는데, 그래서 "요즘은 이게 유행인가? 저게 유행인가?" 라고 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는 것이다. 지하1층 식품관으로 시작해서 지상8층 남성복 코너까지 말이다(ㅋㅋ).
그렇게 돌아다니면 누가 뭐라고 해도 재미가 있는데, 우리가 곧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재미로 말이다. 물론 이것은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이 되는데, 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하면 돈을 아무리 창고에 쌓아두어도, 그것으로 영생을 얻는 게 아님을 본인들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억만금의 돈으로 갇혀있는 이 세상에서나 힘을 쓰는 것이지, 하늘나라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 바치면 마음은 위로를 받겠지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나의 행함은 여기서 끝 !!
그러니 "십자가가 끝이다" 라는 것을 우리는 절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끝이라는 것을 바꾸어 말하면, 자기 행함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자기가 무슨 착한 짓을 해도 그건 십자가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함은, 우리의 모든 소지품을 다 십자가 앞에 내어놓아야 하는데, 최신 스마트 폰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검사대를 통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그냥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영생은, 장자 됨의 고유권한 !!
그리고 십자가를 건너서(?) 영생으로 가는 것은, 그것은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장자 됨의 고유권한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마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누구는 용서해주고 누구를 용서해주지 않을, 그런 권한을 예수님께서 독점하고 계시는데,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 곧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것이고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도 그것을 듣기를 원하시는데, 즉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라는 것을 아버지가 원하신다는 말이다.
그 다음에 교재 303페이지를 보자.
** 천국은 십자가 속에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천국은 십자가 속에만 자리를 잡고 있다" 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오늘 강의제목이 '반대로' 인데, 그러니 이것을 반대로 말해보면 "천국은 십자가 밖에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의 보좌가 어디에 있는가? 천국 안에 있는가? 아니면 바깥에 있는가? 아예 천국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양의 보좌가, 즉 언약궤가 말이다.
◈ 너희들은 교회에 갇혀있다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물론 제가 그림에는 전혀 소질이 없지만 친절하게 그려보면, 세상이 이렇게 있고 사람들이 탈출하기 위해서 이렇게 끝 부분으로 모여드는데, 여기는 주로 종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수도원이나 수녀원, 그리고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탈출 불가능' 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끝이기에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너희들은 끝에 갇혀있다" 라는 의미인데, 그 끝에서 아무리 손톱으로 파고 해도 구멍이 뚫리는 것이 아닌데, 그 무슨 발악을 해도 안 되는데, 문도 없는 폐쇄된 공간이라는 것이다. 열리는 것은 누군가가 들어갔다가 빠져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구멍이 생기든지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릴 때, 이렇게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는 그림으로 그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림의 한계가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그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것보다는 일단 여기 안에 점이 생겼다고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원판 뒷면에 뭔가 새로 하나 달렸는데, 그게 바로 부활의 세계이고 영생의 세계이고 천국이라는 것이다.
앞에서는 여전히 점인데, 그런데 뒷면에 보면 종기가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커지듯이, 아무튼 그렇게 내부로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 천국은 십자가 안에 있는데, 그러니 바깥에서 아무리 봐도 부활의 세계는 보이지 않고, 우리에게는 십자가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그것이 곧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인데, 즉 "내가 부활의 세계에 달려가기 위해서 여기 점으로 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어찌하든 내가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라고 말이다. 그게 바로 이렇게 십자가로 가면 그게 곧 부활의 세계라는 것이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 원판 세계 바깥에 부활의 세계가 있다고 여기는데, 그래서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출구를 이미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으로는 구원받을 길이 없기에, 여기에 이렇게 십자가가 점으로서 있는데, 하지만 사람들이 여기에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나 작기에 말이다.
◈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대해서 궁금해하니, 그래서 "여기에 있습니까? 저기에 있습니까? 언제 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는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이 세상은 내가 있기 때문에 내 세상이다. 그러니 이런 나의 세계 말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세계가 따로 있을 것인데, 그 세계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눅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 하나님은, 성전 안에 계십니다 ??
구약에서는 이것을 아주 알기 쉽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물으면, "성전 안에 계십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러니 구약성경은 매우 쉽다는 것이다. 농사를 짓다가도 일년에 세 번씩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가면 된다는 말이다.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게 무엇인고 하니, 예루살렘에 집결하는 날인데, 나중에 성전이 만들어지고 나면 말이다.
굉장히 쉬운데,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쉽다는 것이 엉터리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이건 일종의 미끼상품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철떡같이 믿다가보니까, 성전에 불타버릴 때 그들은 그동안 자기들이 알았던 모든 하나님 개념이 그만 와해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상하다. 성전은 누가 만들었지?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왜 만들었지? 자기 백성과 만나기 위해서 만들었지. 그러면 그런 만남의 광장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도 계시고 당연히 자기 백성도 있다는 말인데, 만약에 하나님 쪽에서 그 만남의 광장을 없애버린다면 어떻게 되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모세 때는 그것을 성전이 아니라 '회막' 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성전을 없애면 하나님이 스스로 '바이바이'를 하는 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바이바이를 하면 되는가? 언약에 의하면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이다. "끝까지 나는 유다백성을 지키겠다" 라고 시편 89편에서 다윗에게 그런 약속을 하셨다는 말이다.
(시 89:3)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시 89:4)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
◈ 사라진 만남의 광장 !!
다시 말해서, "나 여호와 하나님의 성실함으로 반드시 이루어서 임마누엘, 너희들을 떠나지 않겠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만 떠났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제 만날 장소가 없으니 말이다.
여기 파계사에 가는 삼거리에 보면 블루베리도 팔고 송이버섯도 팔고 하는 간이 천막들이 쳐져있는데, 아침에 제가 그쪽으로 산책을 하면서 "구청에서는 뭐하노? 이런 것도 철거를 안 하고" 라고 했는데, 어느 날 보니 저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는지, 모두 철거를 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제가 송이버섯을 샀는데 가짜라고 하면 그 자리에 가야하는데, 그런데 그만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천막만 남겨놓고 주인은 도망을 가고 말이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구청이 잘했다는 말이 아니라(ㅋㅋ), 하나님과의 만남이 계속해서 유지가 되려면 만남의 장소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 기억이 무엇인고 하니, "아하, 여기에 성전이 있었잖아" 라고 해서, 그래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성전을 만들 때, "그 성전이 바로 그 성전이야" 라고 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성전은 영원한 성전으로 교체가 !!
하지만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성전을 새롭게 짓는 것은, "이 성전이 영원히 간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성전은 새로운 성전에 의해서 교체가 되어야하는 허접한 성전이다" 라는 것을, 그래서 "이 성전이 무너지면서, 하나님은 성전은 영원한 성전으로 교체가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다시 지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스가랴서에 보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지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슥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지으신 성전이, 어제 낮 시간에 설교하면 것처럼, 하나님께서 더러운 쓰레기통과도 같은 우리를 직접 찾아오신다는 말이다. 출애굽기 29장의 말씀처럼(?) 말이다. 그렇게 찾아오시는데, 그런데 유대인들은 마치 아이아이들처럼 "밤이 되면 해님이 어디로 갔지요?"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좌표상 몇 번지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인데, 교회에 오면 하나님을 만나고 집에 가면 하나님과는 떨어져서 버스로 40분이 걸린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교회에 오면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못해도, 집에 가면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고 말이다. 왜냐하면, 40분 거리이니 말이다. 요즘 아이들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지 싶은데, 얼마나 젖먹이이고 유아적인 사고방식이냐는 것이다.
◈ 교회가 불태워지지 아니하면 !!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불태워버리는데, 그러면 그들은 많이 당황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기가 하나님과 교제한 모든 것이, 즉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그러니까 교회가 없어져야 "그동안 나는 뭐였지? 뭐야, 이 기분? 내가 예수님을 믿기는 믿어? 내가 천국에 가는 것이 맞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그동안 쥐고 있던 것이 허구였고 안개였음을, 자기가 그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세례를 받고 성만찬을 한 것이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는데, 그런데 그게 나중에 보니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추억에 지나지 않는데, 마치 빛이 바랜 앨범과도 같다는 것이다. 구한말의 사진 한 장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의 예수가 아니라 40년 전의 예수를 기억해가면서 믿으니, 그러니 본인이 보기에도 본인이 얼마나 가짜냐는 말이다.
◈ 죽음의 현장이 곧 만남의 광장 !!
예수님에게 "성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만남의 장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면, 물론 예수님께서 떡을 주니 제자들은 예수님이 곧 만남의 광장이라고 여겼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어렵게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죽여라. 나의 죽음의 현장이 곧 만남의 광장이다" 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그냥 놀면 안 돼. '주님이 여기 계신다' 라고 하지만 말고, 너희들은 너희들이 할 일을 해라. 나를 죽여라. 그래서 나의 살과 나의 피가 생기면, '제가 죽였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마셔라. 그것이 곧 너희들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즉 성전이 되는 방식이다" 라는 것이다.
◈ 이미 천국 생활을 !!
이것은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 그것이 곧 주님과의 만남의 장소가 된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가 죄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은혜가 되는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존재하게 된 것이, 이게 바로 천국의 원리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천국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육신은 우리가 죽으면 하늘의 형상을 입기 때문에, 이 껍데기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이미, 즉 "나의 난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가짐이 곧 천국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니 말이다. 주님이 우선이고, 자기는 주님을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데, 그렇게 자기가 중요하니 않으니 근심걱정도 일부러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으니 걱정거리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데, 굳이 일부러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돌아서면 또 걱정이 되고 하지만 말이다. 이것이 곧 성령 안에서의 삶이란 것이다. 이렇게 여러분이 신약성경을 보게 되면 이해가 잘 되지 싶은데, 이것이 바로 철저하게 예수님 중심이니 말이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303페이지를 보자.
** 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스스로 파멸을 시키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것은 주님을 은혜만 내세우기 위해서이다.
(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
여기 10절에 보면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라고 하면서 '주'가 나오는데, 이 주가 시편에서는 하나님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만드셨는데, 그것들이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 주님은 영원하지만, 그것들은 멸망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주님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고 하니, 멸망을 당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우리의 일이라는 것이다.
비록 가슴이 아파도 우리가 수용을 해야만 하는데, 그래야 주님의 나라가 영원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닌 주님의 나라인데, 하지만 문제는 우리는 멸망을 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하지만 우리가 우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은 말 그대로 주님이니 말이다.
◈ 죽으면 죽으리라 !!
그러니 우리가 죽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라고 하면, 장렬하게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마음가짐으로 죽으면 된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에스더가 황후이고 한 미모를 하는데,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하면 자기 황후의 자리도, 자기의 미모도 오히려 죽음과 바꾸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 저는 포기합니다. 저는 죽겠습니다. 주님의 일만 제대로 된다면 저와 같은 존재는 잊어도 좋습니다" 라는 것이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죽을 때 남는 것은 주의 일인데, 그렇게 주의 일만 남아서 주님을 위해서 봉사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봉사를 하면 자기 자존심이 높아지고 칭찬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자기가 죽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예수님을 빌미로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란 것이다.
그런데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의 자존심이나 손익은 애초에 생각할 자격도 안 되는데, "저는 주님만 영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라는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게 성도의 삶이라는 것이다.
제가 십자가를 이야기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욕을 하는데, "왜 십자가만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라고 말이다. 십자가를 모르니, 그 십자가를 믿지 않으니까 "십자가 따로, 삶 따로", 그렇게 되는 줄 아는데, 엮이지도 않을 것을 가지고 억지로 엮어놓으니, 그게 얼마나 가짜냐는 말이다. 엄청난 거짓말이고 구라인데, "십자가 따로, 삶 따로, 연결하면 온전한 신앙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거짓말에 좀 그만 속아넘어갔으면 한다는 것이다.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만 있으면, 거기에서 펄펄 거리면서 삶이 반드시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고, 그게 곧 성령의 열매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내가 모독하고 무시하고, 예수님을 내가 핍박을 했습니다. 주님은 시시하고, 나는 위대하게 여기고, 그것이 바로 갇혀있는 우리의 옛 품성인 줄로 압니다. 하지만 이제는 십자가 안에 있기에,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의도한 전략이고 작전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가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수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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