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죽음의 그림자 131216 본문
[13 대구강의 21] - [피 107] - 죽음의 그림자
13,12,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309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그림자가 실체를 모독하고, 그림자가 실체를 부정하고, 그림자가 실체를 대신하면서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지만, 그 그림자마저 사라지는 순간이 대기하고 있다.
◈ YOU ARE '그림자' !!
여기에 그림자가 나오는데, 이것이 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히브리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림자로 취급하는 성경책이라는 것이다. 우연히 우리는 살아있는데, 그러한 우리를 보고 그림자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격모독도 아니고,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듣는 사람이 그야말로 외면하고 싶은 내용인데, 그런 내용들이 성경에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경우에는, "세상을 벗한 여자들아, 너희들이 하나님의 원수다" 라는 대목이 나오고 말이다. 그게 4장에 나오는데, 세상을 찾는 것을 간음한 여자라고 간주하고, 그런 간음한 여자들은 이 세상과 벗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그러한데, 세상과 벗이 되려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말이다.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이러한 성경말씀을 볼 때, 모든 성경말씀에 동일한 권위를 부여해야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고, 자기 입장을 옹호해준다 싶으면 강조하고, 그게 아니라고 여기면 별로 중요하기 여기지를 않기에,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단들이 그렇게 설치는데, 근본적으로 자기 부인이 되지 않아서 말이다. 즉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야 한다" 라는 말인데, 이것은 곧 살고자 하는 충동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평소에 "나는 살아야 한다" 라고 하니까, 성경말씀도 그런 식으로 본다는 말이다.
◈ 그래, 죽자 !!
저는 그런 것을 보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쫓겨난 곳인데, 원래가 살지 말아야 할 곳이라는 것이다. 교도소를 자기 집처럼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빨리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 세상도 벌을 주기 위해서 있는 곳인데, 그런 이 세상이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살려고 몸부림을 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빠져 나와야 하는데, 그 방법을 보면, 즉 출애굽을 할 때 구원의 조건을 보면, 죽음을 통해서 빠져 나온다는 것이다. 죽음은 일종의 제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이 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낯설다든지, 실패와 같은 뉘앙스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 가지마오, 가지마해 !!
그런데 죽음을 무섭게 여기고 두려워하게 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인데, 우리 인간의 발목을 붙잡으려고 말이다. 즉 "가지마오, 가지마해!" 라는 것인데, "이 세상이 전부니까,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말고, 우리 사이좋게 같이 잘 지내자"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게 마귀의 속삭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마귀가 "너는 그러면 죽는다" 라고 하는 것은,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라고 하는, 이 무서움을 한자로 하면 '공포' 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하이데거를 이것을 이야기하기를,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래서 죽기 이전에 무엇을 할 것인지, 그게 곧 인생의 삶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하이데거의 윤리와 도덕은, 마음의 문제 !!
그러니 죽는 것은 기정사실인데, 그리고 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죽는 것은 순서가 없는데, 그러니 죽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지, 그러니 이런 죽음 자체를 익히 안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낮추게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말이다.
윤리와 도적은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데, "이미 나는 곧 죽게 되어있어" 라고 하는 마음이, 여기에 대해서 마귀는 "너는 죽는다" 라고 하면서 불안감을 주지만, 그 죽음을 미리 알게 되면, 불안하기는커녕 오히려 안정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밥을 먹으면서도 "그래, 하나님께서 이것을 먹고 오늘도 죽으라고 하는가보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사약을 먹듯이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보약을 먹으면서도 "오늘도 눈에 좋은 보약이구나. 그래, 먹고 눈이 좋아져서 죽자" 라고, 그렇게 모든 생각을 반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려고 하니 온갖 귀신들이 다 들어온다는 것이다. 집나간 귀신도 말이다.
◈ 진실이 있는 곳에서 '추락'한 인간 !!
그러니 히브리서나 야고보서에서 "너희는 그림자다"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우리가 섭섭하게 들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진실은 인간에게 섭섭하게 들리게 되어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진실이 있는 곳에서 추락했기 때문에 말이다. 추락을 말이다.
여기에 대한 '존 쿳시' 라는 작가가 쓴 '추락(Disgrace)' 이라는 유명한 소설도 있는데, 2003년 노벨문학상도 받았는데 말이다. 소위 잘 나가는 세계적인 문학가가 추락할 때, 즉 토스토에프스키가 타락할 때 어떻게 했는지, 그러한 것을 작가가 상상해서 소설로 썼다는 것이다.
◈ 하지만, 원래 인생자체가 바닥이 아닌가?
그렇게 추락한다는 것, 하지만 우리는 새삼스럽게 추락할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시작을 바닥에서 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모든 일에 감사하면 된다는 것이다. 원래 모든 것이 바닥이라는 말이다. 자기 스스로 남들보다 점잖다는 생각이 들면, 보너스라고 여기면 되고 말이다.
원래 자기가 잘났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내가 왜 이렇게 착한 생각을 하지?" 라고, 오히려 그것을 이상하게, 즉 보너스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는 인생에 있어서 얼마가 되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는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라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친다는 것이다. 90프로 이상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잘 살지? 재미있게 살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을 존중한다는 것은, 실제로 남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존중하기 위해서 남에게 그렇게 대우한다는 말이다. 즉 "남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나는 이렇게 잘났다" 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인데, 저축을 하고 보험에 들고 연금을 넣고 하는 것도, 사실은 죽기 싫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빠져 나온다는 것보다도, 이왕 살아온 것, 교도소든 감옥이든 상관없이, 살대로 한번 살아보자고 하면서 죽치고 앉아있다는 말이다.
◈ 정말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도 좋아?
그런데 히브리서나 야고보서는 그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이 세상과 벗된 것은 하나님과 원수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너는 자꾸만 살려고 하는데, 정말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도 좋아?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자꾸만 할거야?" 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제가 이렇게 착한 짓을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착한 짓을 한다고 해서 원수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반발하는 태도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을 고생하라고 주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려고 하니, 그러면 하나님이 결국 우리에게 실수한 것이 되는데, 즉 "하나님, 저에게 실수하셨습니다. 저는 괜찮은 존재인데, 그런데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라고 하면서 따지는 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자기 주제파악만 하면 돼 !!
그래서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성경구절이 궁금하다. 누가 해석할 수 있지? 누가 이것을 제대로 해석해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을 모르면 지옥에 가지 싶은데, 그러니 몇 개라도 더 알아서 챙겨야지" 라고 하면서 염려가 될 때는, 하나의 중심만 생각하면 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자기 주제파악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게 때문에, 성경말씀을 보면서 "이것을 제대로 풀면 구원을 받을까?" 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볼 때 이렇게 본다" 라는 것만 알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원래 살던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존재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바닥인생이고, 이마에서 땀을 흘려야하는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온갖 고생을 다하고, 벌벌 떨면서 죽기를 무서워하다가, 마귀에게 시달리고 시달리다가, 그렇게 마귀가 시키는 대로 온갖 짓을 다하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는 것이다.
◈ 우리 모든 인간의 이름은 단 하나, '아담' !!
우리 인간의 이름이 무엇인고 하니, '아담' 인데, 이름은 그 사람의 운명을 접어놓은 것인데, 그러니 그것을 펼쳐 보이면 그 안에서 그 사람의 운명이 소록소록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름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박씨, 김씨, 이씨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 이라는 것이다. 아담이 무슨 뜻인가? 흙덩어리,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먼지, 그렇다는 말이다. 먼지가 차곡차곡 쌓인 것인데,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그림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먼지 덩어리라는 것은 성경말씀만이 아니라 불교에서도 주장하는 것인데, 그러면 기독교나 천주교나 불교가 동일한 종교가 아니냐고 할 수가 있는데, 똑같은 소리를 하기 때문에 말이다. "인생은 흙으로 돌아간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불교에서 이야기한 것을, 구태여 성경까지 볼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라고, 당연히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다.
◈ 인간이 '왜' 먼지가 되었는가?
하지만 성경에서 먼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딱 세워놓고서 "너는 먼지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나오는 그 모든 것이, 인간이 왜 먼지인가를 밝혀주는 스케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스케줄, 그런 시나리오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불교는 이런 역사가 없는데, 즉 "왜 인간이 먼지가 되었는가?"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뭐라고 하는가? "인간이 먼지가 된 것은, 인간이 처음부터 먼지는 아니고 아담이었는데, 그렇게 같은 아담이었는데, 그 아담인 인간은 결국 자기의 본질인 먼지로 돌아갔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라고, 그렇게 인간이 먼지가 이유가 분명히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과거에 선악과를 따먹었다" 라는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긴긴 계시의 역사를 통해서, 왜 그렇게 인간이 먼지가 되어야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조치가 정당했는지를, 그것을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면면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에서 인간을 그림자라고 한 것은, "그래요. 우리는 먼지입니다. 하나님의 소원대로 죽을 게요" 라고 하라는 게 아니라,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인 문제이고, 먼지로 돌아가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따로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다는 것이다.
◈ 주님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을 위해서 !!
그러니 우리는 팔레트에 있는 일종의 물감인데, 그런 물감을 짜는 것에 대해서, "그래, 누르세요. 저는 물감입니다. 얼마든지 짜세요. 에이, 힘들어 죽겠네" 라고 사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아하, 내 속에서 나오는 이 먼지와 같은 것들이, 하나님이 그려내는 대자연 속에서, 이런 위치적인 의미를 갖는구나"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먼지니까, 죽으면 그만이다" 라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그렇게 먼지가 되어져 가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모자이크에 필수요건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림자야!" 라고 하면, 그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이런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주님이 그리는 어떤 그림에 기회가 되고 참여가 되겠습니까?" 라는 것을, 그것을 히브리서가 말하고 야고보서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이 세상과 벗되면 하나님과 원수다" 라고 할 때, 우리 생각에는 "그렇다면 이 세상을 없애든지 해야지, 이 세상과 벗되지 말라고 하면서도, 이 세상은 잘 되고 우리는 고생하고, 왜 그렇게 구원이 안 되는 쪽으로 우리는 몰아세웁니까?" 라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관심이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즉 이 세상과 벗되지 않고, 이 세상을 미워하는 자를 건져내시는 주님의 자기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 세상과 벗된 것은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개과천선을 해라"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아무리 이 세상과 벗되지 말라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주님이 진짜 뽑아내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 고소한 참기름이 된다면, 그것으로 !!
예를 들어서, 주인이 깨를 볶을 때 우리가 그 깨의 입장이라고 하면, 깨가 얼마나 뜨겁고 또한 아프겠는가? 달아오른 가마솥 안에서 말이다. 하지만 깨를 볶을 때 주인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것보다는 그 뒤에 만들어지는 고소한 참기름을 염두에 두고 볶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볶아져서 참기름이 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이 보통 곤란한 것이 아닌데, 고생 뒤에 낙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고생은 고생으로 끝나고, 그 낙은 주님이 누리신다는 말이다. 우리는 고생만 신나게 한다는 것이다. 욥기가 바로 그런 내용인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 피조물은 기껏해야 이런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성경에 대해서 신비한 해석만을 자꾸 찾는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그런 모든 마음가짐이 죽기 싫어서 살고자 하는, 그런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 본심만을, 짜증나는 본심만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보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내가 어떻게 쓰여지는가?" 라는 것이, "내가 어떻게 사는가?" 라는 것보다 우선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쓰여지기 위해서 살아있는 것이지, 살기 위해서 쓰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쓰여지지 않는다면,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쓰여지기에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 !!
그런 쪽으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되면, 그런 연결을 두고서 '하나님의 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제가 수백 번을 넘도록 이야기를 했는데, 돌아가서면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의를 소유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연결된 것이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또 다시 "나는 하나님의 의를 소유했다" 라고 자기 위주로 돌아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지구가 있고 그 바깥을 유영을 하는 우주인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냥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선에서 나온 끈이 하나 달려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데, 과거에는 다 그런 끈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끈이 '하나님의 의' 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 믿어지면, 그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은, 그 끈 자체가 우리가 제공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그 끈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설치기사라고 할 수 있는데, 케이블TV 설치기사가 집에 와서 어떻게 하는가? 자기 마음대로 들어와서 벽을 뚫고 선을 깔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말리면, TV가 안 나오고 인터넷이 안 된다는 것이다. 케이블이 설치가 되어야 바깥에서 들어온 소식을 듣는다는 것이다.
◈ 주님께서, 케이블을 다 깔아놓으면 !!
그렇게 성령님(예수님?)이 설치기사가 되어서, 우리 속에 케이블을 다 깔아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 때문에 고민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민이 되는 것은, 그것은 마귀가 그동안 우리 육신을 다루어왔기 때문에, 그런 버릇이 여전히 남아서 "너는 그렇게 하면 죽어" 라고 하면서, 뭔가 알 수 없는 미지의 'X', 그런 공포가 우리에게 밀려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던 일을 계속해서 하면 되는데, 새삼스럽게 새롭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아하, 주님께서 케이블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하시는구나" 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단독적으로 우리가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들에 있는 들풀이 무서워하는 것을 보았는가? "내일 내가 아궁이 들어간다. 어이쿠, 무서워라" 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들풀아, 내일 니가 베어져서 아궁이에 들어간다. 소감이 어떻노?" 라고 하면, 들풀은 "쉬이익, 쉬이익!" 라고, 그렇게 바람소리만 낼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저리 가라!" 라는 것인데, 즉 "니가 걱정이 되니, 나도 걱정할 것이라고 여기는 모양인데, 걱정은 마귀의 종노릇을 하는 너나 해라.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 지금까지 주께서 길렀어"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 에라이, 개만도 못한 놈아 ??
그러니 우리 인간은 태양보다도 더 못하고 다람쥐보다도 더 못한데, 그것이 시편에 나온다는 것이다. 즉 "천하보다도 더 못한 것이 인간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벌레만도 못하다는 것이 나이가 들면 이해가 되는데, 물론 젊었을 때는 벌레보다 자기가 낫다고 여겼지만, 살아보니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을 사서 하고 있는데, 그러니 바퀴벌레보다도 더 못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함부로 개를 빗대어서 욕을 하면 안 되는데, 우리는 전혀 그럴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설쳐도 오뉴월의 개 팔자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나 소와 더불어서 우리 인간도 그림자인데, 이렇게 우리가 그림자라고 하면, 그러면 실체는 무엇인가? 이러한 실체에 대한 것을 소나 개나 돼지에게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데, 인간이기 때문에 "실체가 무엇인가?" 라는 의문과 함께, 우리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허락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림자라고 하면, 그냥 그림자처럼 되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런데 그게 아니라 묻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그림자라고 하면, 당신은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즉 "나를 보고 그림자라고 하는 그분이 곧 실체이다" 라는 것이다. 그림자의 실체인 그분이 아니라고 하면, 누가 감히 이렇게 멋지고 잘난 우리를 보고 그림자라고 하겠느냐는 말이다.
◈ 그림자는 홀로서기가 안 돼 !!
이러한 그림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그림자는 깊이가 없는데, 즉 폭이 없다는 말이다. 그냥 표면에 투영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림자의 특징은 특별히 고정된 형체가 없는데, 표면이 울퉁불퉁하면 울퉁불퉁하게, 그리고 표면이 편평하면 편평하게, 그렇게 그림자는 그대로 따라갈 뿐이라는 것이다. 표면에 붙어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림자는 그림자 단독으로 자기 형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체가 떠나버리면, 그림자는 좋던 싫던 간에 어떻게 해야하는가? 자기도 역시 그 자리를 떠나야만 한다는 말이다. 마치 외지에 나가있는 공직자의 아내와도 같은 신세인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 남편이 군인이라고 하면, 전방에 가면 따라가야 하고, 그리고 후방에 가도 역시나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좋으나 싫으나,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오늘 여기도 군인이 한 분 계시는데, 이사를 자주 하시죠? 아무튼 그렇게 따라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림자의 좋은 점은 무엇인고 하니, 언제나 딱 붙어있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독단적인 결단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쪽에서 실체가 결정하게 되면, 자기는 부수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림자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성도가 맞다는 것이다. 주님이 가신 그 어디에도, 거기에 자기도 있다는 말이다.
◈ 우리는 왜 예수님을 기억 속에서만 ?
여러분이 지금까지 이해를 하셨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조금 어려운 것을 해보겠는데, 먼저 질문을 던지겠는데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왜 예수님을 기억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가?" 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왜 기억으로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가운데서 이순신 장군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혹시 있습니까? 없지요? 다만 우리는 기억으로 생각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시대의 선조 때 분명히 실제로 있었어" 라고 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기억으로만 남는 것이지, 실제로 지금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기억을 하든 말든, 모두가 같은 죄인이니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성경에서 수 십 수 백 차례에 걸쳐서 "너희와 함께 있다" 라고 예수님이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즉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우리는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기억 속에서만 생각하느냐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본인이, 본인의 살아있음에 대해서 독점적으로 !!
이 '기억' 이라는 것은, 다른 것에 신경을 쓰면 기억이 나는가? 나지 않는데, 왜 예수님이 기억으로만 생각이 되는고 하니, 예수님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게 누구인고 하니, 바로 본인, 즉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늘 본인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본인이 본인의 살아있음에 대해서 독점적으로 차지하고 말았는데, 그렇게 본인이 살아있기에 달력도 눈에 보이는 것이지, 본인이 죽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1번, "내가 살아있음. 2번, 예수님을 기억함. 3번, 예수님을 믿음"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하신 말씀과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함께 있다' 라는 것은, '기억하라' 라는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 아, 뼛조각 대성당 !!
천주교의 성당에 가면 왜 그렇게 기념물들이 많은지 모르겠는데, 유럽을 여행하면서 그런 것을 보게 되면, 독일의 쾰른에 가면 동방박사의 뼈가 있는 성당이 있는데, 아마 어떤 경로를 통해서 진짜 뼈를 구입한 모양인데, 마치 부처사리처럼 말이다. 뼈가 들어있는 통은 조그마한데, 성당은 무려 그 높이가 191미터라는 말이다. 청소를 해도 하루종일 해야하지 싶은데 말이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쾰른 대성당' 이란 것이다. 물론 관광객들도 많이 오는데, 도대체 동방박사의 뼛조각이 뭐라고 그렇게 큰 예배당을 짓는지 모르겠는데, 그러니 예배당 자체가 기념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리창의 모자이크도 모두가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고 말이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의 경우에는, 거기에 있는 미켈란젤로나 라파엘의 그림들은 성경의 내용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기억하고 기념하게 되면 자기가 그림자가 되지 않는데,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정답이라는 것이다. 지금 제가 질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까불어도, 그게 그림자로서 까분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어떤 분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는 이 세상에 살아있다. 그리고 나에게 비추어지는 것이 그림자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이 자기의 그림자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의 기억 속에 있으면, 자기가 먼저 있기에 자기 기억도 있고, 그러한 기억 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즉 강감찬도 있고, 이순신도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가 예수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기 기억력이 감퇴하게 되면, 예수님을 보고도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성경말씀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
이것을 정리해보면, 모든 것은 성경말씀에 의해서 규정이 되어야하는 것이지, 자기가 성경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이용하게 되면, 즉 "내가 우선이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성경말씀이 있다" 라고,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풀의 꽃과 같이 곧 사라지지만, 성경말씀이 영원하기에, 내가 죽는 그날에도 성경말씀은 그래도 변함없이 실행에 옮기기에, 내가 살아있어도 나를 그림자가 되게 하고, 죽었어도 그림자가 되게 하는 그분은 영원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 자신의 기억 속에만 살아있지 않으려고 하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까부는 것도 그림자로서 까부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저는 이 그림자를 다른 용어로 '자리', 혹은 '터' 라고 하는 것이 맞지 싶은데 말이다. 그냥 그림자라고 해버리면, '시커멓다' 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래서 "사람이 너무나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도둑질을 한 것도, "그러면 주님이 도둑질을 시켰네" 라고,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이루신 성과를, '하나님의 의' 라는 이름으로 !!
그러면 성도가 되는 자리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림자가 자리라고 하면 텅텅 비어있겠네" 라고 하지 말고, 아까 뭐라고 했는가? 케이블 기사가 와서 케이블을 깔고 설치를 한다고 했는데, 그러니 우리에게 있는 모든 장치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성과를 '하나님의 의' 라는 이름으로 설치하신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세금을 장기간 체납하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 낼 세금이 없는 분은 잘 모르지 싶은데, 세무서에서 와서 각 물건에다가 빨간 스티커를 붙이는데, 심지어 이런 안경에도 붙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내 인생은 내 것이고, 내 역사도 내 것이다" 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마치 세무서의 직원처럼 우리의 온 인생에 그런 딱지를 다 붙여놓았다는 것이다.
주님이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들어와서는,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모두가 내 것이다. 너는 그냥 그림자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했는데 말이다. 이게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일단 이렇게 해놓고, 교재 308페이지를 보자.
** 장로들은 감격한다. 자기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자신의 부족함에 신경을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가 쓰고 있던 면류관까지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 앞에 던진다.
(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 장로들은 감격한다 !!
여기서 제일 먼저 나온 단어가 무엇인가? 여기에 보면 '장로' 라는 두 글자가 나오는데, 그러면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는지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장로라는 말이 나오면, 거기에 대해서 "나도 안다. 우리교회에도 장로가 있고, 이웃교회에도 장로가 있는데, 그 장로는 이번에 은퇴를 했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용어들이, 장로의 경우에도, 이렇게 장로라고 하면 그 뒤에 반드시 어떤 인간이 붙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해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비록 장로는 아니지만, 나는 집사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집사다" 라고 말이다.
◈ 나는 장로다. 나는 집사다 !!
어제주일 오후설교를 마치고 난 뒤에 아내가 설교를 평하기를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다른 것은 다 좋았는데, '짜증난다. 그것이 나다' 라는 것이 너무 길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게 오후설교의 핵심부분이었는데, 왜냐하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장로다. 나는 집사다" 라고, 항상 앞에다 '나'를 붙이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나는 장로다. 나는 집사다. 나는 사랑한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12월 15일에, 30분도 안 되는 설교시간에 그것을 바꾸려고 하니, 그 부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짜증나는 것이 나다" 라고, 그렇게 바꾸면 되는데 말이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짜증이 난다" 라고 하면, 그게 어디로 다시 추가가 되는고 하니, "나는 짜증을 낼 수도 있지만, 나는 사랑도 할 수 있다" 라고, 즉 "나는 믿을 수도 있지만, 믿기 싫으면 안 믿을 수도 있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주인공이, '나'만 남아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들풀이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참새가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그들의 고백이 무엇인고 하니, "주께서 기르시나니" 라는 것이다. 참새가 아침에 먹을 것을 찾으니 없는데, 왜 그런가?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먹이 있음도, 먹이 없음도 말이다. 물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나는 7살 때 어떻고, 12살 때 어떻고, 20살 때 어떻고" 라고 하면서, 언제나 "나는, 나는, 나는"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장로다. 나는 집사다. 나는 장로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공중에 날아다니는 참새도 그러한가? 참새도 "나는, 나는, 나는" 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먼저 주님이 자리를 잡으시고, 그 다음에 우리는 그림자라는 것이다. 즉 주님은 실체, 우리는 허망한 그림자라는 말이다. 말씀은 영원하지만, 우리는 들의 꽃과도 같이, "언제 있었나? 없네" 라고 하면서 그냥 화장터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공중에 날아가는 에너지로서 흩어지고 만다는 말이다.
◈ 짜증냄을 당했다 !!
그래서 '장로' 라는 말을 어제 설교시간에 하면서 "나는 짜증난다. 나는 사랑한다" 라고 할 때, 이렇게 "짜증난다. 사랑한다" 라고 하는 자기 자신이 다룰 수 없는 육신의 주인이 따로 있는데, 그러니 짜증냄을 당했다는 것이다. 사랑함을 당했고 말이다.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내가 니 꼬라지를 보면 사랑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 주께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갑자기 사랑에 휘말려서 어쩔 수 없이 너를 사랑하게 되었어. 그러니 나는 너를 사랑을 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봐. 나는 주님의 딸랑이야" 라고, 물론 여러분이 이런 고백을 들어본 것도 아득한 추억이겠지만 말이다(ㅋㅋ).
결혼을 하고 10년이 지나면 대부분이 각 방을 쓰게 되는데,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평생을 살아가면서 한 방을 같이 쓴다는 것은, 그것은 보통 인내심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서로 좋아서 미치지 않는 이상, 같은 한 방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 장로는 모든 신자다 !!
아무튼 이렇게 '장로' 라고 할 때는,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그 장로처럼 나도 살아야지" 라고 하면서 나대지 말라는 것이다. 장로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인간에게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장로는 자리이다" 라는 말이다. 즉 주님께서 케이블 기사가 되어서 우리 속에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장로가 누구인고 하니,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면, "장로는 모든 신자다" 라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성도를 두고 장로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장로가 되고 싶다" 라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이 세상에 대해서 장로에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장로가 되기 싫어도 장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로 값을 해야하는데, 우리의 운명이고 팔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거부할 입장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 너는 그 집의 귀신이 되어라 !!
쉬운 예를 들면, 옛날에는 여자가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귀신이 되더라도 그 집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자리인데, 남편이 술을 마시고 오든 말든, 아무리 개판을 쳐도 거기서 이혼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운명, 즉 자리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자기 남편이 아무리 때리고 패도, 설령 다른 여자를 데라고 오더라도 이미 그 자리가 자기보다 우선이 된다는 말이다. 즉 "나는 이 집의 귀신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집의 제사음식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아들을 낳더라도 그 아들도 역시 제사를 드리기 위한 아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제사를 계속해서 드릴 수 있는 사명감을, 즉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집에 시집을 왔다는 것이다. 아들을 낳아야 계속 제사를 지낼 수가 있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제사를 지낼 수가 없으니 말이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상속분이 그만 날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에는 아직까지는 이 '자리' 라는 것이 전통적으로 남아있는데, 물론 요즘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일단 살아보고 계속해서 살 것인지 결정하겠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요즘 젊은이들은 자리가 우선이 아니라 자기가 우선인데,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게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데 말이다.
옛날에는 시집을 가면, 시누이가 어떠하든지 간에, 시동생이 어떠하든지 간에, 아무리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음주운전을 밥먹듯이 하더라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그리고 시아버지가 치매에 걸려도 모두 돌봐야하고, 그렇게 목숨을 바쳐서 이 집에 충성하고, 심지어 죽어서라도 이 집의 귀신이 되어야하는 사명을 띄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옛날 여자들은 이혼이 없는데, 그게 사명이기에 말이다. 이 사명은 자리에게 나오는데, 자기의 놀라운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우리 어머니의 경우에도, 그렇게 고생을 했지만 뭐라고 하는가? "내가 시누이들에게 더 해주고 싶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팔순을 넘어서, 그야말로 같이 늙어가고 있으면서 말이다. 시누이가 오면, 몸이 하녀처럼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자기 시누이고 시동생이니, 자기가 다 해준다는 말이다. 말려도 안 되는데, 그 자체가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리를 마련해준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합당하도록 개조를 해주시는데, 그게 안 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천국에는 기존의 우리 모습으로 가지 못하는데, 철저하게 개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개조의 바탕은 주께서 마련해주시는 자리에 있는데, 즉 "너는 장로야" 라고 한다면, 쉽게 말해서 "너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
그러면 이 '장로' 라는 자리는 어디에서 나왔는고 하니, 이 장로보다도 먼저 선행된 자리가 있었는데, 그게 곧 '이스라엘' 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출애굽기 3장 16절에 보면 처음 나오는데, 외우기도 쉽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연상하면 되니 말이다.
(출 3:16)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성경에서 '장로' 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니, 이스라엘은 없는데, 즉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자리는 없고, 아브라함만 있을 뿐 !!
제가 재미있는 것을 하나 이야기하겠는데, 아브라함의 자리는 없고, 아브라함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본토 아비의 집이 있는데, 사람이라면 자기 부모가 다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주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는데, 즉 기존의 있는 자리를 박탈을 당하면서 주께서 새로운 자리를 제공해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에게 자리를 제공하는 원칙이 무엇인고 하니, "있는 자리가 너를 구원할 수 없다" 라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면, '나'를 먼저 앞에 붙여놓고, 그 다음에 뒤에 뭔가를 하나 붙이면, 그것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나는 신자이다" 라고 하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신자인데, 그게 나로 되게 하셨다" 라고, 그렇게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참, 어렵지요? 물론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듣겠지만, 기존 교회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신자가 되기를 노력해서 이렇게 신자가 되었고, 그리고 교회에 목돈을 바치니 이렇게 장로도 되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모든 것이 "내가, 내가, 내가" 라고, 그게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나는 기독교 신자다 ??
천국에 가도 "내가 알아서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당연히 이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즘 설치는 신천지보다도 더욱 더 저질이고 못하다는 것이다. 물론 둘 다 같은 부류이지만 말이다. 정말로 죽이고 싶은 충동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뭔데? 당신의 구원을 당신이 결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당신이나 나나 추방된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추방이 되었으면 가만히 꼬부라져 있든지 해야하는 것이지, 추방된 주제에 다시 자기가 알아서 들어가겠다고 설치는 심보는 도대체 무엇인가? 반항심도 무슨 그런 반항심이 다 있는가?" 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경건하다. 고상하다. 멋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온갖 좋은 말을 다 뒤집어씌우면서 "나는 기독교 신자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기독교 신자가 되어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 보이스 피싱을 조심하세요 !!
저는 그동안 여기에 대해서 그들이 모르는 것은, 그들이 몰라서, 무지해서 그렇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그들에게 이야기해주면, 갑자기 그들이 발작을 일으키는데, 즉 강력한 반항을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신자가 되기 위해서 교회에 퍼부은 돈이 얼마인데, 내가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신자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러면 내가 그동안 목사에게 속았단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들은 목사라고 하는 게 목자님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속았는데, 그러면 속인 목사가 나쁜가? 목사가 나쁜 것이 아니라, 속은 본인들이 더 나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까?" 라고 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래서 온갖 귀신들이 다 달려들어서 따먹었다는 것이다. 마치 보이스 피싱을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동안 자기가 투자한 돈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런 자존심과 신자라고 하는 우열감이 너무 아쉬워서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복음을 밀치고 싶다는 것이다. "내 앞에서 두 번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마" 라고 하면서, 오히려 복음을 외면하고 거부하고 싶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천국에 가는 것이 더 중요한데, 그렇지 않은가?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천국에 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거기에 전문가들이 목사들이고, 그래서 전문가들이 시키는 대로 다 했다는 것이다. 주일마다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것이 소용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속인 셈이 되니,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다는 말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밀어내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죽이고 싶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주께서 하신 조치에 대해서, 즉 "당신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면 그 쫓겨난 이유부터 알고 들어가든지 해야지, 쫓겨난 주제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들어가야 한다' 라고 하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객기입니까?" 라는 것이다. "주여, 왜 버렸습니까?" 라고 해야지 말이다.
◈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 자체가 없어 !!
아무튼 이스라엘은 없는데, 이스라엘 나라 자체는 없다는 것이다. 있을 수도 없고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리를 빼앗아버리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즉 "너는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나라" 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고향을 떠나면 구원을 받는가?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를 가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그래서 구약을 보는 사람들이 헛갈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별미를 바쳤더니만 복이 왔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지금 목사에게 별미를 바치면 복이 오는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말하는 복과 저주라는 것은, 다시 말씀을 드리는데, 우리가 복과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이 먼저 있고 우리는 배당을 받는다는 것이다.
◈ 호명이 되는 것 자체가 곧 축복 !!
왜 각 학교에서 학기가 시작되면 어떻게 하는가? 1학년이 이제 2학년이 되면, 새로운 2학년 선생님이 오셔서, "여러분은 작년까지는 1학년이었지만, 이제는 2학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이름을 부르는 학생은 2학년 1반이고, 부르지 않는 학생은 2학년 2반입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그 담임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즉 호명을 하면 무조건 2학년 1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리가 먼저 있고 호명이 되었는데, 그게 축복이라는 말이다.
이런 놀라운 사실을 가지고 구약을 보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자기가 결정한다는 것이, 즉 "내가 행동한다" 라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그것을 따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별미를 바치면, 같이 별미를 바치려고 하고 말이다.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그저 자기가 잘되면 그게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께서는 '나' 라는 자리를 그만 빼앗아버리는데, 그래서 "너는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나라" 라는 것은, "너의 자리에서 떠나라" 라는 말이다. 즉 "너는 너에게서 떠나라" 라는 것이다. 어제 오후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나와 나의 차이를 발견하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떠날 때부터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이미 천사가 와서 케이블을 다 깔아놓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인생에 케이블 장치를 해놓았기에, 그래서 이제는 주의 의만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알고 있으니, 아브라함이 어떻게 되었는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아브라함의 그 어떤 행동과도 상관이 없이, 아브라함은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의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이용하셨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아브라함을 이용하셨다는 말이다.
◈ 의의 완성도를 못난이들의 인생을 통해서 !!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 못난이들을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리가 죄인도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러한 의의 완성도를 우리 인생을 통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그야말로 허접스러운 우리를 이용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믿어지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못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것이 이 정도로 대단하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야말로 대단하고 대한하며, 위대하고 위대하다는 것이다. 창녀도 구원을 받고, 간통한 여인도 그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북한의 장성택이 받은 재판보다도 훨씬 더 빠른데, 그 자리에서 곧 바로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즉 "너는 이제 내 것이다" 라는 말이다. 그러니 간통을 하던 무엇을 하던 간에,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셔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 낮 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그렇게 그 부분을 길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물론 길게 한다고 해서 교인들이 제대로 기억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성경말씀을 보는 눈을 완전히 바꾸어보자는 것이다. 결코 '나' 라는 것이 앞에 주어로서 나서면 안 된다는 말이다.
◈ 7천명은 모두가 따로 따로 !!
어제 오후시간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엘리야 시대에 7천명이 남겨져 있다고 하면, 누가 생각하더라도 "이 7천명으로 정권을 바꿔도 되겠네"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무려 7천명이나 남아있으니까 말이다. "7천명이 단합하면 막강한 힘이 되지 싶은데, 어디 기독교 정당이라고 하나 세워볼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7천명은 모두가 따로 따로 놀았는데, 그러니 전부가 다 "나만 남았다" 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왕상 19:15)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왕상 19: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왕상 19: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만약에 이게 단합하게 되면, 이게 바로 '신천지' 라는 모임이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끼리 단합하자" 라는 것인데, 무슨 그런 것이 다 있는가? 그것은 기존교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습니까? 우리끼리 단합합시다" 라고 하는데,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가 그렇고, 또한 천주교 계통도 그렇고 말이다.
모든 종교가 우리끼리 단합하자는 것인데, 하지만 그렇게 단합하는 순간 그만 은혜는 날아가 버리고, 단합했다고 여기는 단체가 그만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좀 안다고 해서 가보면, 다 이런 함정이 빠져있다는 말이다. "복음을 아는 우리끼리 단합하자" 라고 하는 것이 형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기 본색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님들은 교인들에게 애를 먹이면 안 되는데, 그냥 좀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목사들이 교인들을 다그치는 것은, 그 어떤 성경말씀과 미사어구를 가지고 포장을 해도, 궁극적으로 그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집단' 이라는 것이 가지고 싶다는 것이다. 즉 일종의 '소유 욕구' 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의 목사가 되고 싶다는 것인데, 대장이 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 라고 하는 의미를 이제 알았지 싶은데, 그러니 이스라엘에 있어서 그 자리에 부합되는 장로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장로가 되면 그게 자기에게 우상이 되어서 어떻게 나오는가? "그래, 이스라엘은 우리의 책임이다. 장로가 잘해야만 이 나라가 산다" 라는 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벧세메스로 가는 소 !!
부흥집회에 온 강사가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그것인데, 즉 "장로가 모범이 되어야 교회가 된다" 라고 말이다. 사무엘상 6장에 나오는, 소위 '벧세메스로 가는 소'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장로가 되어서 교회가 어려우면, 울면서도 묵묵히 그 언약궤를 메고 간 소처럼, 그런 역할을 장로가 먼저 모범을 보여서 해줘야 교회가 산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성경해석인데 말이다.
(삼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그리고 또 하나의 레파토리가 무엇인고 하니까, "모세와 같은 목사님이 힘이 빠져서 지팡이가 내려가려고 하는데, 그래도 장로라고 하면 오십견이 와서 고생하는 목사님을 잘 부축해서, 목사님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해주어야, 그렇게 해야 하늘나라가 확장이 된다. 그러니 장로가 되어서 도와주지 않고 무엇을 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목사를 도와준다는 것을, "기도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라고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말로만 하는 구라고, 목사의 월급이나 좀 올려달라는 것이다. 기도는 돈이 안 되는데, 그러니 기도보다는 현찰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ㅋㅋ).
거기에 대해서 교인들이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장로가 좋고 목사가 좋은 게 아니라, 그게 자기에게 좋다는 말이다. "그래, 이번 기회가 내가 뭔가 잘하면, 우리 집 아이의 결혼도 성사될 수가 있겠다" 라고, 그렇게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착한 일을 도모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기회가 오게 되면 적금을 깨서 목사의 승용차를 바꿔주고, 그 따위 짓을 한다는 말이다.
◈ 십자가 마을은 이단이다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어떤 목사가 한다는 말이, "저 양반은 얼마나 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으면, 한이 맺혀서 그런 소리를 하겠나?"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ㅋㅋ).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면,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안다는 것이다. 십자가 마을이, 자기끼리만 교회라고 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김대식 집사가 열을 받아서 "십자가 마을은 이단이다" 라고 글을 쓴 적은 있지만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들이 그런 집단이 보고 싶고, 그것을 이루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7천명을 모아놓은 집단이 그립다는 말이다. 그것을 위해 자기는 매진하고 있는데, 그런 집단의 오야붕이 되려고 말이다. 자기가 오야붕이 되려는 것은, 그래야 돈이 생기고 생계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목사들이 바로 그러한 심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장로라는 것은 자리를 말하는 것인데, 하지만 그 자리와 그 어떤 인물도 일치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그림자이기 때문에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장로라는 자리마저도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림자일뿐입니다" 라고 고백하면, 그러면 장로의 자리와 일치가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장로답게 살아볼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볼까?" 라고 하면, 벌써 이단이라는 말이다.
교재 308페이지를 다시 보자.
** 장로들은 감격한다. 자기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자신의 부족함에 신경을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가 쓰고 있던 면류관까지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 앞에 던진다.
(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
여기 요한계시록 4장 10절에 보면, 24 장로들이 엎드려서 무엇을 던지는가?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면류관을 주님 보좌 앞에 던지는데, 그런데 그게 누구의 면류관인가? 장로들, 즉 자기의 면류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던질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나는 그림자인데, 그림자가 이런 면류관을 왜 써야 됩니까? 말도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실체에게 던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면류관을 씌우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할지 몰라도, 그게 아니라, 면류관을 썼다가 다시 던지는 그 절차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이 말이다. 탕자의 경우에도, 탕자의 짓을 하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탕자 짓을 실컷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용서했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탕자의 짓을 하는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과정 속에서 !!
그러니 어떤 자리이든 그 자리에 대해서는, 우리는 마귀에게 속해있기 때문에, 어떤 자리가 오게 되면, 그 자리를 우리 쪽에서 일치시키려는 과정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곧 죄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 내가 이 성경말씀대로 지켜야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한번 지켜보라는 것이다. 과연 지킬 수 있는지, 일치가 되는지 말이다. 전혀 안 되는데, 인간은 단 한 구절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보면서, 그렇게 살아가면서, 성경말씀을 그렇게 지키려고 하는 가운데, 말씀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그것이 바로 세속에 물드는 것인데 말이다.
"세상과 짝을 짓는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세상과 떨어지면 되는가? 그게 아니라,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아하,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원수의 자리가, 그것이 바로 나를 보고 이야기하는구나" 라고, 그렇게 매일같이 실감이 나면서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고 하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밀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떠밀고 싶다는 것이다. 매사에 대해서 말이다. 즉 "이 일은 하나님이 간섭할 자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해야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가요?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의, 이러한 하나님의 원수를 알기 위해서, 또는 장로를 알기 위해서, 이 세상의 어떻게 되어있는고 하니, 일단 '나' 라고 하는 것이 먼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한데, 1번은 '나' 이고, 2번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확장인데, 이것을 어렵게 말하면, '내 이름의 확장' 이라는 말이다.
◈ 파편이 되어서 옆으로 흩어지는 바벨탑 !!
여러분이 바벨탑을 알텐데, 그 바벨탑의 건축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성경에 나와있다는 것이다.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라고 말이다. 창세기 11장에서는 이렇게 수직적인데,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다 수평적으로 변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 성질이 어디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려던 것이 전 영역으로 퍼지게 된다는 말이다.
(창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창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창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래서 주님은 이 바벨탑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벨탑을 짓던 그 본래 성깔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땅으로, 사방천지로 흩어져서 온 세상이 바벨탑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바벨탑을 따로 지었지만, 이제는 자기 몸 하나 하나가 벽돌이 되어서 천지를 바벨탑으로, 그만 랩을 씌우듯이 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온 세상이 바벨탑으로 확장되고 마는데, 물론 그 중에는 우리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첫 번째는, 어디까지나 '나' 라는 것이 중요한데, 즉 자기가 말씀을 지키는데, 두 번째는 그것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즉 '내 이름의 확장' 이란 말이다. 자기 존재의 확장, 자기 가치의 확장, 자기 명예의 확장, 자기 자존심의 확장, 그런 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1번에서 2번으로 말이다.
◈ 결국, '나'에게서 '나'에게로 !!
그리고 난 뒤에 세 번째로, 말씀의 일치를 선포하게 되는데, 즉 "나는 말씀을 지켰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그 말씀을 나는 지켰기 때문에, 나는 말씀과 일치가 되었다" 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도로 '나'에게서 '나'에게로 돌아가는 것인데, '나'에게서 나와서 돌고 돌아서 역시 마지막에는 '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예배가 어떻고 성경공부가 어떻고 해도, 아무리 철학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해도 말이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무엇인고 하니, "이 세상에서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기독교 신자에서 출발해서 불교신자로 끝나는 셈인데, 즉 "나밖에 없다" 라는 것이다.
◈ 성령께서 개입하면, 모든 것이 통 째로 그림자가 !!
그러니 이런 과정 속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성령이 개입해주지 않으면, '나'에게서 '나'에게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런데 십자가의 영이 개입하면 어떻게 되는가? "니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나라!" 라고 한다면, 이 전체가 무엇으로 변하는고 하니, 그 이전에는 자기가 있다는 것이 실체이고,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실체로 여겼는데, 그런데 이 전체가 그만 그림자로 변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하, 주께서는 나의 이런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행세하게 만들되, 통 채로 접시에 담아서, 그 전체가 그림자로 만들어버리는구나" 라는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누가 그렇게 하시는가? 숨어있던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인생을 지금도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시대에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즉 우리에게 틈을 깨고서 치고 들어오면, 약간의 균열이 생긴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 아닌 것 같은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본성대로 사는 것인데, 그러니 이렇게 사는 것이 진리는 아니지"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얼마 지나면 이것이 다시 무마되면서, "역시 나는 나야. 나밖에 없어" 라고 지내다가, 또 어느 순간에 뭔가가 다시 치고 들어오는데, 성령께서 그렇게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즉 파도가 치고 잠잠해지고, 또 파도가 치고 잠잠해지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특히 이런 겨울철에 손이 째지면 어떻게 되는가? 피가 나면서 몹시 아픈데, 성령께서 그렇게 짼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있는데, 뭔가 찌어지면서 그 피가 바깥으로 나오면 우리는 일시적으로 느끼는데,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진리가 아닌 것 같은데, 정답은 모르지만 이것은 아닌 같네" 라고 하는데, 물론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지만 말이다. 헤헤거리면서 그림자에서 실체로 돌아선다는 것이다. "역시 남는 것은 나밖에 없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장로 중심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전체가 !!
그런데 그런 과정을 주께서는 우리에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장로 중심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이, 이 장로들이 중심이 되어서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일부러 말이다. 그렇게 마음껏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해놓고,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징벌을 하시는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면 누가 먼저 걱정하는고 하니까, 장로부터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무엘과 같은 선지자가 시키고 하는데, 다윗도 그렇게 시키고 말이다. 아무튼 백성들의 대표자인 장로들이 먼저 회개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도 따라서 회개하고 말이다. 그런데 타락은 누가 먼저 하는가? 헤헤거리면서 장로들이 먼저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시기를 보겠는데, 이런 대목에 오게 되면 목사는 걱정이 슬슬 되는데, 왜 그런고 하니, 교인들이 사사기를 잘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 사사기 11장 5절 이하를 보면, 물론 그 이전에도 나오지만, 여기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는 말이다.
(삿 11: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 오려고 돕 땅에 가서
(삿 11: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삿 11: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삿 11:8) 길르앗 장로들이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게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삿 11: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삿 11:10)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반드시 행하리이다
(삿 11: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 입다와 그의 무남독녀 !!
여기에 '입다' 라는 사사가 나오는데, 이 입다를 장로들이 채택하는데, 그리고 9절에 보면 입다가 누구에게 이르는가? 장로들인데, 그리고 11절에 보면 입다가 장로들과 함께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성경을 많이 읽어본 사람들은 이런 대목을 알고 있는데, 신천지의 경우에도 이러한 훈련을 많이 받는다고 하는데, 이런 것이 어디에 나오는지 안다는 말이다. 욕을 들어먹어도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누가 책임진다는 것인가? 장로가 책임을 지는데, 그래도 장로 값을 한다는 말이다. 교회가 위태로울 때는 누가 책임을 지는가? 집안이 어려울 때는 역시나 맏이가 책임을 지는 것처럼, 장로는 교회의 맏이인데, 다른 사람들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맏이는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가 맏이로서 "나라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라고 해서 보니, 저쪽 암몬은 숫자가 많은데, 그래도 힘에는 힘으로 밀어 부치자고 한다는 것이다. 나름 장로 값을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영웅(용병?)을 모집하는데, '입다' 라는 깡패가 왔다는 것이다. 사사기 11장이 바로 이 깡패인 입다와 연봉을 협상하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이게 장로의 한계인데, 백성들이 한 것이 아니라 장로들이 했다는 것이다.
장로는 백성의 대표자로서, 장로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다른 백성들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되는데, 장로 자체의미가 '존경스러운 자' 라는 것이다. 존경을 받지 못하면 장로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존경한다는 것은 "우리가 못하는 일을 당신들이 해주소" 라는 것인데, 그래서 장로인데, 굳이 요즘 말로 하면 국회의원인데, 그러니 국회의원을 욕하면 자기를 욕하는 셈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입다와 계약이 되었는데, 물론 임시직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승리를 하면 엄청난 배당이 받게 되는데, 그만 일이 꼬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승리를 하기는 했는데, 찜찜한 승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게 뭔고 하니, 입다가 말하기를, "내가 승리하면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나를 영접하는 것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겠다" 라고 말이다.
아마 입자는 자기가 키우던 개가 나올 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만 자기의 무남독녀가 나와서 영접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시집도 가지 않은 자기 딸이 나오는 것을 보고 입다는 그만 기겁을 했는데, "딸아, 나오지 마라. 이것은 함정이다. 어서 들어가라. 너는 죽어. 안 돼, 들어가!"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딸은 "아빠, 왜 그래요? 저예요" 라고 하면서 나와서 아버지를 영접했고, 그래서 입다는 할 수 없이 자기 딸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죽음의 그림자 !!
그러니 이 사사기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죽음만이 소위 살았다는 인간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입다의 무남독녀, 그녀의 죽음이 이스라엘을 살렸다는 말이다.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그냥 '힘 대 힘'으로 하게 되면 옛날 이스라엘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장로들이 입다를 고용했고, 입다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막상 전쟁에서 승리하고 보니, 이 승리가 자기의 승리로 이어지지 않고, 억울하게 희생을 당한 입다의 딸로 인해서, 즉 승리한 집안의 대가 끊어지고 저주하게 하는, 그런 죽음을 당한 자의 승리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현재의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의 그림자의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하, 그림자가 주체이고(?), 살아있는 우리가 오히려 죽음의 그림자구나" 라고 말이다. 즉 '죽음의 그림자' 라는 말이다. 오늘 강의제목을 이것을 정하겠는데, 그러니 우리는 그냥 그림자가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 즉 어린양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누가 믿겠는가? 우리는 죽음을 나이가 들면 그때에 생각하려고 하는데, 아직은 만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죽어서 만나는 그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덤으로 살아있는데, 그래서 우리생명이 유지되고 있다는 말이다.
◈ 그림자가 무슨 면류관을?
이스라엘의 사사기가 그것을 보여주는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왜 면류관을 다시 주님께 반납하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장로 자체가 그림자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면류관은 장로를 했다고, 그런 고생을 했다고 쓸 면류관이 아니란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그림자에 불과한데, 그 그림자가 실제로 면류관을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체의 몫이고, 우리는 장로로서, 영원한 그림자로서, 즉 실체의 실체가 됨을 위해서 천국에 반드시 합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끌려서 강제로라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 고양이가 방에 들어가면 몸체만 들어가고 꼬리는 들어가지 않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몸체가 들어가면 꼬리는 딸려서 간다는 말이다. 즉 실체이신 주님이 천국에 들어가면, 그림자도 따라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 실체를 증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따라가는 부분이 그림자라고, 히브리서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그림자로서 실체가 되시는 분을 따라가는데, 그러니 성도는 꼬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여우 중에서도 그야말로 백여우인데, 그 꼬리가 무려 144,000개나 된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구미호도 꼬리가 겨우 아홉 개밖에 안 되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꼬리끼리 싸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이야기를 해도 항상 몸체를 경유해야 하는데, 꼬리가 직접 돌직구를 던지고 하면 곤란하다는 말이다. "너나 나나, '나다' 라고 주장할 입장이 전혀 아니잖아"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 지금은 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는가?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310페이지를 보겠는데, 이것을 하기 전에 어제 주일 낮에 미처 설명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지금 했으면 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의 초창기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없는가?" 라는 것이다. 즉 "우리교회는 참된 교회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어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출애굽기가 40장으로 끝나는데, 38절을 보면, "낮에는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친히 보았다" 라고 하는데, 이렇게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다 보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왜 보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출 40: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그들은 시력이 전부가 2.0 이상이라서 보았다는 말인가? 그러면 그들은 천국에 가고, 우리는 지옥에 간다는 말인가? 우리도 봐야하는데, 그런데 왜 보지를 못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뭔가 논리적으로 따져서 설명을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질문을 하니까 답변도 잘 떠오르지 않을텐데, 어제 설교시간에 답변을 드렸는데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전에는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신다는 증표가 되지만, 즉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는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인데, 그러면 저쪽은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데, 그러니 저쪽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는 이쪽과는 다른 식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계속해서 있어야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이 되면서 이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이스라엘의 적이, 즉 하나님의 원수가 이스라엘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내부로 옮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암세포처럼 말이다.
그러니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역할이 내부적으로 새롭게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새로운 언약의 투입으로, 그 언약에 맞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증거가, 새롭게 주어지는 언약에 맞추어서 '함께 하심'의 모양과 형태가 조율이 된다는 것이다.
◈ 사울과 다윗, 왜 왕이 두 명인가?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제가 그러면서 다윗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다윗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었는데, 그러면 다윗의 적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적인 이방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매일 같이 쫓기면서도, 희한하게도 이방민족과는 전쟁을 붙었다고 하면 이긴다는 말이다.
이방민족들에게는 다윗이 그야말로 붙었다고 하면 승리를 거두는데, 하지만 그렇게 이기면 무엇을 하는가? 사울에게는 마구 깨지고 있는데 말이다. 이것이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혼란스럽게 일을 하시느냐는 것이다. 이방민족에게도 이기고, 사울에게도 이기고, 그렇게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고 말이다.
이스라엘에 왕이 갑자기 몇 명인가? 두 명이 되어버리는데, 왕이 둘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둘 중의 하나는 가짜라는 것이다. 즉 둘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이다. 그런데 두 명의 왕이 표방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이스라엘을 위해서!" 라는 것이다.
오늘날 목사들이 주장하는 것도 "오직 교회를 위해서!" 라고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주장해도 그게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진정 교회를 위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무엇이 살아있는가? '나' 라는 것이 살아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말이다. 아무튼 '나'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라고 보면 간단한데, 그러니 '나'만 사라지면 된다는 것이다.
◈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렇게 사울에게 쫓기면서 다윗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자동적으로 나를 구원해주시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는 식으로 나오지 말이다.
(시 22:1)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얠롓사할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시는가? 사울이 아닌 다윗인데, 그 다윗이 하는 말이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니까,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쪽이 하나님과 같은 편이라는 말이다. 그게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라는 것이다. 즉 고난을 받는 종이 발생될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증거라는 말이다. 그 이전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소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우기는 그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즉 복음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가 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뭐라고 하시는가? "아버지, 이제 고만하소. 지금까지 우리끼리 쇼를 잘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다윗이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하셨다는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다윗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라고, 확실하게 돌직구를 던지셨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아버지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상태임을 분명히 알려준다는 것이다.
(녹취 '구' - 예수님의 경우에도 '엘리, 엘리' 라고 하신 것으로 되어있는데요?)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나는 버림받은 인간이기에 !!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알았는데, 이렇게 까불고 촐랑대고 해도, '나' 라는 인간자체가 버림을 받은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버림을 받은 인간에게, 그런데 케이블 기사가 와서 뭔가를 설치하게 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고, 그렇게 설치된 장비들로 인해서 하나님과 통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구원의 자리이고 곧 생명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설치된 것으로 인해서, 즉 성령으로 인해서 우리는 덩달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받은 면류관은 우리가 쓰는 것이 합당하지 않고, 그분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너무나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제 정말로 마치겠는데, 교재 309페이지를 보자.
** 그림자가 실체를 모독하고, 그림자가 실체를 부정하고, 그림자가 실체를 대신하면서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만, 그 그림자마저 사라지는 순간이 대기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자가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이다.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죽지 않는 것이 곧 저주 !!
여기에 "그것은 모든 자가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이다" 라고, 인자라는 말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죽지 않는데, 왜냐하면, 여기 요한복음 25절에 보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인자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다들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주인데, 죽지 않는 것이 말이다. 죽으면 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차라리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면 행복합니다" 라고 말이다. 물론 기독교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그러나 복음은 전혀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살아있다는 것이 저주가 될 날이 올 것이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살아있다는 것이 정말로 축복이 되고,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저주인데, 그래서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라고, 그것을 진작에 하면 되는데, 더 이상 죽지 않는 상태에서 아무리 그렇게 해도, 살아서 영원히 지옥 불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라는 것은 저주 가운데서도 최고의 저주라는 말이다. 앞으로 믿지 않은 친척들을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즉 "당신은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그게 그것이 욕인지 저주인지 못 알아듣겠지만, "정말 큰 일이 났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게 바로 저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만든 것을 주님은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고 안 사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 이미 주께서 확정을 시켜놓은 것인 줄 압니다. 이 땅에서 몰라도 되는 예수님, 몰라도 되는 십자가를 이왕 알도록 해주셨으니, 이제는 우리 자신의 인생은 사라지고, 주께서 다스리시고 이끄시고 조립하시는, 우리는 그렇게 매일같이 조립되는 인생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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