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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간극 131104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피

간극 131104

정인순 2013. 11. 4. 14:32

 

음성

 

동영상 1             동영상2  

 

[13 대구강의 18] - [피 104] - 간극

                                                            13,11,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교재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물론 차근차근히 하면 이것도 제법 되지만, 그래서 이 책이 끝나면 어떤 책으로 했으면 좋을지 생각 중인데,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좋고, 전도서도 좋고, 또 욥기도 좋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도 같이 생각을 해주셨으면 하는데 말이다.

 

◈ 무덤에서 다시 만나자 !!

오늘은 교재 305페이지에 '아, 무덤에서 다시 만나자' 라는 것을 하겠는데, 여기에서 '아'는 감탄사가 아니고, '가나다라'의 그 '아' 라는 것이다. '무덤에서 다시 만나자' 라고 하니까, 왜 찬송가에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거기서 ♬" 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저는 '무덤에서 다시 만나자' 라고 바꾸어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꾼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천국에 가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가? 우리가 천국에 가려고 하는 그 아이디어가 여기에 모두 동원이 된다는 것이다. 즉 "천국에 가려면 어떤 것을 하면 되지? 어떤 사람들이 천국에 가지?" 라고 하는, 우리 나름대로의 생각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 '영적인 단계'를 만들어서 !!

그것을 공동사회에서는 '계급사회' 라고 하는데, 계급은 사회적인 것도 있지만, 영적인 계급도 그들은 생각을 해놓았다는 말이다. 수도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영적인 단계를 개발해놓았는데, 즉 제일 높은 성스러운 사람, 그리고 제일 밑바닥에는 그야말로 짐승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이에는 내신등급을 매기고 말이다.

젊었을 때는 돈을 버는데 매진하고, 나이가 들면 영적으로 도를 닦아서 자기 알맹이를 채우는데, 즉 이제는 천국에 갈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 그동안 미루어놓았던 착한 일도 하고, 남에게 대접을 해주고, 그렇게 하나님의 눈치를 슬슬 본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부모의 눈치를 보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하나님의 눈치를 말이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서 깨끗하고 반듯하게 살아가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 음매, 기죽어 !!

바로 그러한 데이터와 스케줄을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연구해서 바깥에 배포를 한다는 것이다. 그 배포장소가 그 당시에는 성당이었는데, 물론 중세시대에는 교회가 아직 없었으니 성당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성당의 사제나 주교를 통해서 배포가 되게 되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성당에 와서 설교를 들으면 기가 죽겠는가? 죽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음매, 기죽어!" 라는 것인데, 농사를 짓는데도 정신이 없는데, 언제 성경공부를 하고 그렇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제발 한 수만 제대로 가르쳐주셔서, 불쌍한 우리 가정을 천국에만 넣어주신다면, 우리 사제님에게 무한한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당 자체가 이미 계급화가 되어버리는데, 제일 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 밑에는 예수님, 그리고 그 밑에는 교황인데, 교황부터는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말이다. 교황 밑에는 추기경, 그리고 추기경 밑에는 각 지역의 주교들이 있고 말이다. 각 지역의 교구장들 밑에는 사제(司祭)가 있고, 그 밑에는 부제(副祭)가 있다는 것이다. 사제를 도와주는 말이다.

 

◈ 보혜사는, 단독적으로 활동하지 않아 !!

이 '부(副)' 라는 것이 보혜사인데, 그러니 보혜사는 단독적으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보조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보통은 성령이 우리는 도와준다고 하는데,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도와주는가? 도울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우리편에 서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데, 그러면 누구 편인가? "예수님을, 혹은 예수님의 몸을 위하여,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위하여, 혹은 예수 안에 있는 현실을 위하여" 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몸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일을 하시는데, 우리는 무슨 고집이 그렇게 센지, "하나님이여, 저를 도와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설교를 하려고 가는데, 자동차 타이어가 그만 빵구가 났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라고 말이다. 자기에게 그럴 능력이 없으면 지나가던 여호와 증인이 도와줄 수도 있는데, 그럴 때는 바로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말이다.

 

◈ 성령은,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의 몸을 !!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성령께서 개입하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는 모양새가 무엇인고 하니, 이런 것은 외워놓고 전달해도 좋은데 말이다. 즉 "우리가 백 날을 기도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을 도와주신다" 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의 몸에 붙어있으면, 그 도움이 우리에게도 오지만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생각한다면, 결코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손해볼 장사를 하시는 분이 아니니 말이다. 저주받을 우리를 왜 도와주는가? 다만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도와주시지 말이다.

그렇게 도와준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해야지!" 라고 하시면서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이번에 우리 아이가 시험을 잘 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면, 성령께서는 뭐라고 하시겠는가?

"아이의 수능시험보다도 지금 너에게 아이가 우상이 되었네. 아이가 아예 신이네. 오늘 아침에 아이가 숨을 쉬는 것도 주님의 은혜인데, 너는 지금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욕심만 채우는구나" 라고 책망하시면서 다시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되도록, 즉 그리스도가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도와주시는 분이 '보혜사' 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오직 자기 이름을 위하여 !!

그래서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데, 성경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고 하니, "하나님은 오직 자기 이름을 위하여"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의 이름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주기도문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하면서, 오로지 주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책망을 받을 것은 책망을 받고, 징계도 받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동물이나 식물을 봐도 그렇게 버릴 게 없는 것들이 있는데, 콩나물도 그렇고 말이다. 돼지도 그렇다고 하는데, 즉 돼지도 한 마리를 잡게 되면 소시지도 만들고 하면서 모두 사용을 한다는 것이다.

 

◈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

우리 몸이 바로 그러한데,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버릴 게 없다는 말이다. 계절이 바뀐 것을 언제 아는고 하니, 자동차 앞 유리에 낙엽이 떨어져있을 때, "아하, 가을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래서 부러쉬로 낙엽을 한번 떨어내고 출발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형 소나타 정도가 되면 클래식을 크게 틀어놓고 폼을 잡겠지만 말이다(ㅋㅋ).
 
그렇게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손을 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낙엽에 손을 댄다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역시 손을 대신다는 것이다. 낙엽이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식물이 석화가 되면서, 그렇게 물질이 변하면서 떨어지게 되어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우리도 낙엽처럼 떨어지게 되어있는데, 갑자기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이란 노래가 생각나는데(ㅋㅋ), 그렇게 모든 인생이 낙엽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안개, 혹은 풀의 꽃과 같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우리를 인생을 양보하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풀의 꽃과 같이 피었다가 사라지는데,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면,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말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 실패하는 것이 곧 성공이다 !!

그러니 우리는 항상 말씀이 드러나도록 나대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어제 오전인지 오후인지 잘 모르겠는데, "우리 인생은 실패하는 것이 곧 성공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을이 되어서 바바리 깃을 올릴 생각만 하지 말고, 길에 떨어진 낙엽을 한번 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성공을 염두에 두니 실패가 자꾸 걱정이 되는데, 하지만 우리가 어차피 사라져야 한다고 하면, 그것을 느낀다고 하면 이미 성공이라는 말이다. 성공해서 사라지든, 실패해서 사라지든, 이제는 뭔가 자기 자리가 점점 닳아져서 그 자리라고 여겨졌던 것이 희미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면 눈도 침침해지지만, 그것은 눈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무엇에 양보해야하는고 하니까, "말씀만 생생하다고 하면, 저는 괜찮아요"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말씀에 양보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복음을 알게 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말씀만이 영원해서 초롱초롱 빛난다고 하면, 그것으로 자기는 만족하다는 말이다. 

사람이 고민거리가 없으면 기도가 되지 않는데, 기도가 진지하게 될 때는, 반드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만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모든 것이 뜻대로 잘되고 있는데, 그래서 기도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절망에 빠지고 큰 위기가 닥치면 기도를 해도 그야말로 눈물이 줄줄 나오면서 기도가 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 쪼개시는 하나님 !!

그래서 오늘강의 제목을 '간격'으로 정했는데, 낙엽은 그냥 떨어지면 그만이지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중간을 쪼개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릴 때의 그 제물처럼 말이다. 분명히 하나의 덩어리인데, 그런데 그 중간을 쪼개서 둘로 만든다는 것이다.

원래 아담과 하나는 하나의 덩어리였는데, 즉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인해서, 그래서 그만 여자가 뛰쳐나가면서 남자가 단독이 되면서, 이제는 여자를 붙들려고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간격이 그만 생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 간격(間隔), 혹은 간극(間隙) !!

간격(間隔), 혹은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해서 '간극(間隙)' 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즉 뭔가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두 개의 단어가 조금 차이가 나기는 하는데, 간격은 이것과 저것 사이를 말하는 것이고, 간극은 같은 덩어리인데 분열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할 때 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강의주제는 '간극'이 더욱 적합해 보이는데 말이다. 왜 갑자기 극이 생겼느냐는 것이다. 간격은 처음부터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간극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원래 하나이어야 하는데, 점점 더 거리가 멀어져 간다는 말이다. 즉 과거에는 붙어있었는데 이제는 멀어져간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이가 바로 그러한데, 처음에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고기를 낚는 어부가 되어라" 라고 부르실 때는 그야말로 딱 붙어서 살았다는 것이다. 합숙훈련까지도 받아가면서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하실 수록, 즉 말씀을 던지면 던질수록 점점 더 간극이 생긴다는 것이다. 뭔가 골이 자꾸만 깊어진다는 말이다.

 

◈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예수님께서 그렇게 한 말씀을 하니 제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하늘나라에게서 우리 12제자들 중에서 누가 제일 높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때 생기는 그 간극 사이에 누구를 집어넣는가?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어린아이를 딛고서 나에게 오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 지금 너희들 눈에는 나 예수만 보이는데, 나는 너희들과 나 사이에 어린아이를 두겠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늘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벌써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간극이 생겼다는 말이다.

(마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마 18: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상당히 난해한 말씀이 등장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동방박사들과 헤롯과의 관계인데 말이다. 2장 16절인데,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말이다.

(마 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여기에 보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정말로 동방박사들이 헤롯을 속였는가? 아닌데, 그런데 성경에는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헤롯이 박사들을 속였는데 말이다. 헤롯이 동방박사들에게 "나는 너희들을 죽일 것이다" 라는 것을, 즉 헤롯의 다음 계획을 박사들에게 감추었다는 말이다. 즉 "메시야가 어디에 태어나는지 알려주기만 하면, 메시야도 죽고 너희도 죽었어" 라는 것이다.

그것을 헤롯이 감추고서 들키지를 않았는데, 그런데 박사들이 원래 오기로 한 길로 오지 않고 다른 길로 가버리니, 사실은 헤롯이 동방박사들에게 자가 숨겨놓은 계획을 그만 들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헤롯은 박사들이 자기를 속였다고 한다는 말이다.

 

◈ 헤롯의 그 모습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그러니 인간은 얼마나 매사가 복음 중심,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누구 중심인가? 전부가 다 자기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고칠 수가 없는데, 그런 명의는 이 세상에는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손을 대면 몰라도, 목사가 설교한다고 될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성령이 오셔서 성경말씀을 보게 하시면 어떻게 되는가? 즉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라고 할 때, 그런 헤롯의 장난질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해대는 장난질과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속이지 않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어제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노래를 잘하는 '나'가 노래를 불러보고는 스스로 확인하기를, "역시 나는 노래를 잘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십자가가 들이닥쳐서는 어떻게 하는가? '나'와 '노래 잘함'을 그만 떼어놓는다는 것이다. 서로 갈라놓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노래를 하든, 기타를 치든, 공부를 하든, 하여튼 거기에서 '나' 라는 것만 따로 뽑아놓으면, 그것으로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처 우리가 몰랐던 말씀의 현실인데, 그것이 바로 어제 오후시간에 이야기한, 스가랴서에 나오는 납 속에 갇힌 여인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 과연 어떤 간격인가?

계속해서 이야기해보면, 이렇게 간격이 생겼는데, 즉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가 인정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인정할 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간격이 생겼다고 하는 것은, 지금 제가 말하는 간격은 그런 간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인 성도에게, 즉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그 하나 속에 집어넣고 난 뒤에, 그 성도의 주체와 간격을 만드신다는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생명과 단절이 되었으니, 그게 간격, 혹은 간극이 아니라, 그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누구나 다 주장할 수 있는데, 그런 간격이 아니라는 말이다.

 

◈ 진짜 간격은,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생겨 !!

그러면 어떤 간격이고 간극인가? 이미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몸 속에 들어와 있는데, 즉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그런데 그렇게 살면서도 이 주체가 그만 갈라진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여러분의 정신이 생생할 때 중요한 것은 하고 지나가야 하는데, 나중에 비몽사몽간에 있을 때 하면 곤란하니 말이다(ㅋㅋ).

예수 안에 우리가 들어왔을 때, 우리는 스스로 멀쩡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 안에서 살아가니 말이다. 그래서 "저를 이렇게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을 둘로 쪼갠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제부터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영광을 돌려야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것은 그 이전의 자기 자신이 아닌데, 예수 안이라는 것은 말씀 안인데, 그것은 인정하죠? 말씀 안이라는 것은, 말씀을 이루는 것은 십자가인데, 즉 십자가 안이라는 것이다. 역시 이것도 인정하죠? 그렇게 십자가 안에서 저촉을 받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둘로 쪼개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 멀쩡한 내가, 더욱 더 멀쩡하게 ??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멀쩡한데 십자가가 있으면, 내가 그 십자가를 믿으면, 나는 멀쩡한데 십자가까지 알게 되니, 더욱 더 멀쩡한 사람이 된다" 라는, 그런 가설을 우리는 염두에 두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는데, 진짜로 성령을 받게 되면, 그게 아니라 "내가 미쳤지. 내가 왜 이렇지? 내가 왜 죄만 짓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진짜 구원을 받은 자라면 말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야, 이제부터는 내가 이 멀쩡한 몸으로, 거기에다가 성령까지 받았으니 더욱 더 멀쩡한 몸으로 성령 안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전도해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자기가 성경을 보고 꾸미는 것인데, 자기 상상 속의 인물로 말이다. 모세가 자기고 엘리야가 자기인 줄 알고 말이다.

 

◈ 이름을 두 개를 가진 자를 주목하라 !!

하지만 진짜로 예수 안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 내부와 갈라지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을 대라고 하면, 이름을 두 개를 가진 자들인데, 아브람과 아브라함, 그리고 야곱과 이스라엘 등이 그렇다는 말이다. 같은 사람인데 이름이 두 개라는 것이다. 이름이 두 개이면 야곱으로 끝인가?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의 인물을 두고서 두 개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내막을, 그것을 한 사람에게 두 개를 모두 다 적용시키기 때문에, 둘 사이는 그만 갈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간격이 생기고, 그 간격은 십자가의 피가 들어가면서,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것을 우리 몸의 주체의 구원으로 적용시키는 보혜사의 활동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 예수님에 의해서 둘로 갈라지고 피에 의해서 하나가 되는, 그러한 과정 자체를 보여줌으로서, 무엇과 무엇이 분열되어있는 상황인지, 그것을 양쪽 다 벌려놓고 남들에게 증거한다는 것이다.

 

◈ 성도는, 간격을 뚜렷하게 드러내면서 !!

다시 말해서, "육신적으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다. 하지만 주의 은혜로 약한 자 같으니 강한 자이고,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이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자이고, 죽은 자 같으니 산 자이다" 라고, 항상 그 간격을 뚜렷하게 드러내면서, 그 사이로 건너가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 즉 피의 능력밖에 없음을 증거하게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곧 사도바울의 고백이고 오늘날 성도들의 고백이란 말이다.  그렇게 항상 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후 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왜 재물을 둘로 쪼개는가?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어떻게 드리는가? 제물을 둘로 쪼개서 놓는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그 의미는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그냥 제물을 잡아서 통 채로 놓고 "하나님이여, 받으소서" 라고 하면, 하나님은 "오냐, 고맙다" 라고 하면서 받으면 되는데, 왜 굳이 둘로 쪼개도록 하시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재물을 쪼갬으로서, 그 안에 담긴 속성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 제물에 담긴 속성을 구체화를 시키고 표면에 드러내는 것은, 그것은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언약의 작용에 의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언약의 작용에 의해서만 말이다.

진짜로 창세기 15장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요즘은 다섯 곳을 찾으면 두 곳은 틀리는데 말이다(ㅋㅋ). 창세기 15장이 맞지요? 9절과 1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창 15: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창 15: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여기 10절에 보면, "제물의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는다" 라고 되어있는데, 마주 대한다는 것은, 비록 쪼개었지만 처음에는 둘이 아니고 하나였다는 것인데, 그렇게 하나인데 왜 둘로 쪼개는고 하니, 그렇게 분열이 되어있어야 하는 의미를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서, 앞으로 그 내용을 채우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브라함은 자기가 바친 제물의 의미가 앞으로 반복적으로 확대가 되는데, 그렇게 제물의 의미가 확대되면서, 그 제물의 의미가 무엇을 삼키는고 하니, 아브라함 자신의 운명과 평생을 지배하게 되고 덮치게 된다는 말이다.

 

◈ 언약의 특징은, '휩쓸어버려' !!

어제 주일 낮 예배시간에 노아홍수의 특징이 뭐라고 했는가? 벌써 다 잊어버리면 안 되는데, '휩쓸어버린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언약이 우리를 휩쓸어버릴 때, 아브라함은 더 이상 아브람이 될 수 없고, 아브라함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모든 능력은 언약의 능력에서 왔다는 것이다. 즉 언약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다.

신약으로 말하면 그게 곧 십자가의 능력인데, 달리 표현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도와주시는 성령께서, 그 예수님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다는 것과, 우리의 삶 자체가 십자가 안에서 주님에 의해서 다루지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다들 이해가 되지 싶은데 말이다. 

 

◈ 최고의 수학 선생님도, 틀리고 실패한 경험이 있어야 !!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 특히 수학의 경우에, 제가 다닌 사대부고의 그 수학 선생님은 그야말로 최고였는데, 아마 대구에서는 제일 뛰어난 교사였지 싶은데 말이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너무나 문제를 잘 풀어서 학생들이 박수도 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34번, 나와서 풀어봐" 라고 하면, 우리는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 수학문제에 대해서 위반하고 실패한 경험들이 있어야만 그 문제가 풀려진다는 것이다. 수학문제는 자꾸만 틀려봐야 그게 풀린다는 말이다. 그러한 틀려본 경험이 없으면, 남이 푸는 것을 보면 감탄은 하지만 막상 본인이 풀게 되면 어디 방향으로 가야되는지, 그것이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수학 선생님도 교생시절에는 그렇게 잘 풀지 못했음이 분명하다는 말이다.

우리 서 목사님의 경우에, 운전을 하면 옆에 앉아서 잘 도와주는데, 그런데 막상 서 목사님은 운전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만약에 면허증을 따게 되면, 본인이 직접 운전하는 것과 옆에서 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혹시 권사님은 운전을 할 줄 아세요? 

 

◈ 자기가 알고 있던 십자가와 균열이 !!

물론 십자가를 알아야 되고 믿어야 하는데, 그것은 분명하게 맞는 말이지만, 하지만 그것은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가 믿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를 십자가의 사람으로 전환시킨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때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기존에 알던, 그렇게 자기가 알고 있던 십자가와는 균열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런 대표적인 정황이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를 아니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주실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 심지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도 상상하게 되는데, 십자가를 알면 성경말씀대로 어떤 시련이 올 것인데, 하지만 그러한 시련을 아주 아름답게 멋있게 극복하는 자아의 모습, 그것까지도 포함해서 우리는 상상해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십자가가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것들이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우리는 도움을 받을 대상에서 이미 탈락 !!

그래서 제가 강의 초반부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움을 받을 대상에서 탈락이 되었기 때문에 말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데, "제가 복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라고 할 때 도와주시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자기 기도의 목적이 되게 되면 결코 주님은 그렇게 헛되이 응답을 낭비하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은,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이 다가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도 잘 아는 이야기를 하겠는데, 십자가의 능력이 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것은 죽음의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가 맛보고 느끼게 되는 것은 사는 재미가 아니라, 죽음의 능력을 맛보면 된다는 것이다. 즉 "죽어도 괜찮구나" 라고 하는 능력을 말이다. 그런 능력을 맛보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긴 자라는 것이다.  

 

◈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 !!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이 복되다" 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이겼다는 말이다.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우리에게 협박을 하거나 공갈을 칠 수가 없는데, 즉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들이라는 것이다. 톱으로 켜는 것과 돌로 치는 것도,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그러한 노선이 바로 신앙인의 노선인데, 신앙인들만 탈 수 있는 열차, 그야말로 천국으로 가는 설국 열차가 아닌 천국 열차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복음 안에서 죽는 죽음의 능력인데, 물론 그냥 죽는 것은 능력이 아닌 징벌이고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이 복되다는 요한계시록의 말씀 그대로, 그것이 우리의 현실로 와서 닿을 때, 그것은 주와 함께 있는 자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제목에도 있듯이, "무덤에서 다시 만나자" 라고 하는 것은, 그 무덤의 상황이 미리 우리에게 마치 진드기처럼 달라 붙어있는, 즉 결국 우리가 죽는 죽음의 순간을, 그게 죽을 때 죽는 순간이 아니라, 미리 그 순간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어떻게 죽음을 미리 맛보는 것이 가능한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즉 우리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죽음의 순간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것을 설명해드리겠는데, 물론 결코 만만한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분명한 미래인데, 그 미래를 미리 맛본다는 것은 수상하다는 것이다. 뭔가 사기를 치는 것 같고, 실제가 아닌 이론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사실상 처음부터 간격이 있었는데,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것을 보고, "나사로가 잔다" 라고 하니, 도마가 뭐라고 하는가? "우리도 죽으러 가자" 라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간격은 제자들 개개인 덩치 하나와 예수님의 몸체 사이의 간격이라는 말이다. 그런 간격은, 매일 같은 이불을 사용하는 부부사이라도 달리 꿈을 꾸는데 말이다. 물론 쌍둥이도 꿈이 다르고 말이다.

(요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요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저는 개인적으로 꿈을 참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꿈은 언제나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완성이 되고 나서 꿈을 깨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마지막 대목이 남아있는데, "근호야, 밥 무라" 라고 해서 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은 나머지 꿈을 꾸고 싶어도, 꿈이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꼭 결정적인 순간에 깨게 된다는 말이다. 

 

◈ 예수님과 제자들의 간격 !!

물론 부부사이의 간격은 누구나 아는 것인데, 그것을 "인간의 자아는 타인이 개입하지 못한다. 타인을 이용할 뿐이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님과 그런 간격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래, 너희들은 너희들끼리 놀아라. 나는 내 혼자 구원을 받겠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떨어져 있는 간격을 메우는 작업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즉 언약을 통해서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떨어져 있던 그 간격을 메워서, 제자들을 예수님 자신의 세계 속으로 합류를 시켜주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 대해서 그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 언급한 것이 곧 로마서 6장 말씀인데, 오늘은 성경을 자주 찾는데, 1절에서 3절을 보겠습니다.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죄'를 가지고 찾아와서 합류를 시키는 예수님 !!

여기 3절에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는가?"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니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1절에 보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는가?" 라고 하는데, 그럴 때 여기에 해답이 있다는 것이다.

"목사님, 예수님이 어떻게 제자들을 자기의 세계로 합류를 시킵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 정답은 죄를 가지고 찾아와서 그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이게 참 놀라운 것인데, 다른 것이 아닌 죄를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왜 놀라운고 하니까, 우리는 보통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비로, 그렇게들 여기는데, 그런데 죄를 가지고 자기 쪽의 세계로 끌어당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죄를 그물로 사용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중국 어선이 불법조업을 하는데, 어망을 던져서 우리나라의 조기와 고기들을 다 잡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어망을 던지면 한국산 조기가 안에 들어오는데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죄의 어망을 던진다는 것이다. 물론 불법은 아니고 말이다(ㅋㅋ). 즉 "죄에 거하지 아니하면 은혜에 거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런 간격을 누가 유발시켰는가? 물론 악마가 그렇게 했는데 말이다. 제자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악은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려고 하는데, 즉 내부적으로 이미 악과 선을 자꾸만 분리시켜서 행동하는 것이 곧 인간이란 말이다. "아하, 이것은 선한 것이구나. 이것은 악한 것이구나" 라고 말이다.

 

◈ 선한 선생님이여 !!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한 어떤 관원인데 말이다. 즉 "선하게 살면 천국에 가고, 악하게 살면 지옥에 간다" 라는 것은 익히 인간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눅 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래서 주님은 이것을 하나로 묶어서 "선악과를 따먹은 자체가 곧 저주이고, 지옥에 간다" 라고, 그렇게 묶는 작업을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신 말씀을 양보하거나 취소시킨 적이 없다는 말이다. "이왕 따먹은 것은 먹은 것이고, 앞으로 잘하면 안 됩니까?" 라고 해서, 우리가 거기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어떤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을 가는데 !!

어떤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을 가는데, 방금 차도 새로 뽑아서 고속도로를 가슴 벅차게 달리는데, 희망찬 미래도 꿈꾸면서 말이다. 그런데 뒤에 오던 15톤 덤프트럭이 그만 졸업운전으로 인해서 박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신혼부부가 둘 다 중상을 입고 차는 그만 폐차가 되었을 때, 그러면 그 신혼부부의 잘못은 도대체 뭐냐는 말이다.

그때는 아무리 판사가 '100:0', 혹은 '80:20'으로 판정해도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무를 수도 없고 말이다. 신혼부부의 잘못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신혼부부는 그야말로 안전하게 과속도 하지 않고 차선을 지키면서 달렸다는 말이다. "1번, 죄가 있는데 그들은 모른다. 2번, 아예 죄가 없다" 라는 것 중에서 몇 번인가?

 

◈ 인간은, 근원적으로 죄를 몰라 !!

우리 인간은 죄를 지어도 모르는데, 그렇게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평소에 "이러 이러한 것은 죄이다" 라고 다 정리가 된 상태에서, 그런데 뒤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박았을 경우에는, 결단코 자기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근원적으로 무엇을 모르는가? 죄를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이 뭔가 "이것은 죄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전제로 하는고 하니, "이것을 내가 죄라고 인정하는 것은, 나는 죄만 짓는 존재가 아니고, 착한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정도는 구분할 줄 압니다" 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이단인데, 그들이 십자가 마을을 보고 계속해서 공격하는 이유가 그것 하나밖에 없는데, "왜 우리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서 출발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시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곧 개혁주의 신학이고, 칼빈주의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합당하다고, 그것은 1517년에 개신교가 만들어지고 난 뒤에, 벌써 600년을 내려온 변함이 없는 진리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 십자가로 출발하지 아니하면 !!

하지만 그것이 이단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으로 출발하면 되는가? 그것도 역시나 이단인데, 그러면 무엇이냐는 것이다. 천사로부터 출발하면 되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예배당에 걸린 십자가를 그렇게 봐도 정작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하나님은 하늘에 금복주 소주병에 나오는 그 어르신처럼 앉아 계시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하셨을 때, 바로 그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즉 "너희는 나를 보아도 믿지 못하게 되어있다" 라는 것이다.

 

◈ 메시야도 몰라보는 주제에, 감히 하나님을?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를 인간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게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다. 그렇게 메시야도 몰라보는 주제에, 하나님부터 출발하겠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말이다. 그들이 곧 바리새인들이고 사두개인들이라는 것이다. 진짜 메시야의 영을 받아서 메시야를 아는 자들은 그 출발점이 곧 '십자가' 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다음과 같이 사상이 되고 마는데, 십자가를 모르고서 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면, "첫째,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시다. 둘째, 하나님은 그렇게 완전하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셋째,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을 하되,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출발해야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근호 목사는 해명하라 !!

들어보면 틀린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계속해서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은 속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이근호 목사는 대전강의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속였다고 하는가?" 라고 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궁금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근호 목사는 해명하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해명이란 무엇인가? 이미 잘못된 것이 다 드러난 마당에 구차하게 변명하는 것인데, 즉 "너는 어차피 죄인이야. 그래도 이제 마지막으로 해명할 기회를 줄게" 라고 할 때만 해명이란 말을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 질문을 우리교회 사이트에 올려놓았는데, 해명을 하라는 말이다.

 

◈ 속이시는 하나님 !!

그래서 제가 열왕기하 4장을 언급했는데,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보고 하는 말이, "선지자여, 왜 우리를 속이려 하십니까?" 라고 하는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입장에서 하나님은 늘 우리를 속여주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속여서라도 우리가 이미 마귀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것을 인정한다면 성도이고,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은 참 말만 한다고 여기기에, 자기가 납득이 되는 것만 골라서 믿겠다고 하면, 그런 자는 성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출발을 하나님으로부터 하겠다는 것은, 자기가 멀쩡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즉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저의 이런 생각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자가 없지요?" 라고, 자꾸만 이것을 생각한다는 말이다. 즉 "제가 하나님의 주권만 생각하니, 그 마음 자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설마 이것마저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십자가를 모르는데, 성령을 받지 않아서 말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체험하지 못했으니,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속이는 방향으로 유도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 그렇게 하나님이 속였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화가 나겠느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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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대전강의 오병이어 내용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행하면서 이 속에 있는 가짜 메시아를 유도해 내신 거예요. 주께서 하신 모든 기적은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속임수를 쓴 겁니다" 라고 하셨는데, 속이는 자는 사탄과 사탄에 속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지요?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알겠는데, 주께서 속임수를 쓴다는 용어설정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이에 대한 해명을 부탁드립니다.

* 답변 - 이미 모든 인간들은 악마에게 속고 삽니다. 이럴 경우에 두 가지의 취지로서 하나님 말씀이 작용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버려져야 될 자들에 대한 조치입니다. 악마의 속임수가 이미 기정사실이기에 이는 인간들이 속성으로 매일 발휘되게 됩니다. 그렇다면 참된 하나님의 말씀 작용에 대해서 인간들이 도리어 "우리를 속이려 하는군요' 라는 반응을 나타낼 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래 속이려 한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는 성도요, 그렇지 않고 "나는 너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참말을 하고 있다" 라고 믿는다면 이는 버림받아야 될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 속에 악마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가로되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왕하 4:16,28)

사람은 매일같이 자신이 자기를 속여가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가짜 메시아를 도입하고자 한다는 점과, 또한 이러한 인간들에 의해 살해당한 메시아를 매일 같이 대비시키지 아니하면, 인간은 정체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십자가 피를 늘 성도에게 들이대시는 겁니다. 성도가 아닌 자에게는 이런 혜택에서 제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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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러분이 성경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해서 일부러 성경을 더 많이 찾으면서, 그렇게 심술을 부리는 것 같은데,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심술을 부려도 할 수 없지만 말이다(ㅋㅋ). 그게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열왕기하 4장 16절을 보자.

(왕하 4:16) 엘리사가 가로되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 화를 내는 것이 다행인 줄 알아야 !!

그러니 누가 옳다는 말인가? 자기가 옳고 하나님의 사람이 틀렸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간격, 이러한 간극, 그러니까 내부적으로, 주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갈라진 상태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주께서 찾아올 때, 우리는 '버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화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를 내는 것이 다행인 줄 알아야 하는데,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가해자가 되고, 주님은 우리에게 피해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출발점이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자기는 '뻥' 하고 구멍이 뚫려서, 자기 자신은 그야말로 스가랴서에 나오는 납 속에 갇혀있는 여인에 지나지 않았음이, 그것이 그대로 수긍될 때라는 것이다. "나는 죄인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하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말이다.

 

◈ 주여, 나를 떠나소서 !!

베드로의 경우에, 예수님이 고기를 그렇게 많이 잡게 해주면 그냥 챙기면 되는데, 같이 동업을 하자고 하든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 같은 인간은 상종할 가치도 없는 놈입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게 아니라,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함으로서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라는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바로 주님의 자기 백성을 건지는 방식인데, 이것 말고 다른 것은 없다는 말이다. "제가 지금까지 진실하다고 여긴 것은 다 거짓이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목사 노릇을 한다는 것 자체가 '보이스 피싱' 이라고 하는 고백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교재 305페이지를 보면, '무덤에서' 라는 대목의 첫 부분인데 말이다. 

** 인생이 끝나면 소꿉놀이도 끝난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긴 것도 실은 야무진 신념에 불과했다. 살아있는 것은 말씀이었지 자아가 아니었다. 자아는 쭉 죽어있었다. 죽은 자아가, 묶어낸 신념이 자기를 속여왔다. 신념의 시절이 끝나자, 하나님의 사건의 시절이 도래한다.

"인생이 끝나면 소꿉놀이도 끝난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우리의 인생 자체가 전부 무슨 놀이였다는 말인가? 소꿉놀이인데,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동안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야무진 신념으로 버텨왔다는 것이다. 야무진 신념으로 말이다. 과거에 삼성에서 만든 1톤 트럭이 '야무진' 이었는데, 야무지게 망했다는 말이다(ㅋㅋ).  

 

◈ 예수님께서 죄로 만든 어망으로 !!

다시 말해서, "그래, 나는 살아야 돼" 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 뒤에 무엇이라고 하는가? 살아있는 것은 말씀이었지 자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죄라는 것으로 만들어진 어망을 던지는데, 그런데 죄가 있는 곳에 무엇이 오게 되어있는가? 구약성경에 보면,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신명기 27장이나 28장도 그렇고 말이다. 말씀을 지키면 복이 있지만, 지키지 않으면 저주가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죄를 가지고 만든 어망을 가지고 투망질을 하니까, 비로소 제자들은 그 십자가가 정치범으로 몰린 예수님 본인이게만 해당되는 형벌이 아니고, 지금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내린 보편화가 되는 형벌이란 것을, 오로지 성령을 받는 제자들만 그것을 눈치챈다는 것이다.

 

◈ 저주를 받은 주제에, 무슨?

그러니 저주를 받는 입장에서, 선이 어떻고, 악이 어떻고, 메시야가 어떻고, 구원이 어떻고, 그런 말을 할 입장이 전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제자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제자들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는가? 자기 잘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누구를 증거한다는 말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제 너희들이 사는 것은, 너희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산다" 라는 것이다. 그게 고린도후서 5장 15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여기 교재에 보면 "자아는 쭉 죽어있었다. 죽은 자아가, 묶어낸 신념이 자기를 속여왔다"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이미 죽어서 깨어진 해골을 대충 자기가 사상으로 묶는데, 그 사상이 바로 마귀에게서 온 사상이고 선악과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즉 노끈이 선악과이고, 그 노끈에 묶여진 것은 흙덩어리에 불과한, 조각조각이 나고 파편이 되어야 하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신념의 시절이 끝나고, 하나님의 사건의 시절이 !!

그리고 그 다음에 "신념의 시절이 끝나자, 하나님의 사건의 시절이 도래한다" 라고 하는데, 이게 어느 순간인가? 성령이 찾아올 때인데, 성령이 찾아오면 자기가 자기의 신념으로 버티던 시절은, 자기 자존심으로 버티던 시절은 지나가고, 이러한 자기의 허무한 인생도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재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이런 나의 허무한 인생이 필요하구나" 라는 것을 말이다. 깨진 스마트폰의 액정을 가져다주면 5만원을 준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자기는 정작 깨어져서 소용이 없는데, 그런데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녹취 '구' - 액정이 깨지면 AS를 받아야하는데, 깨진 액정을 돌려 받아서 팔면 AS비용을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다고 합니다. 참고는 저는 스마트폰이 없어서 이러한 고민이 없습니다. 떨어져도 깨지지 않는 효도 폴더폰, 짱입니다. ㅋㅋ) 

 

◈ 우리의 액정은 계속 깨져야 !!

그러니 십자가 사건 속에서, 그 십자가 사건을 우리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그야말로 깨진 액정과 같은 우리가 도로 십자가 안으로 소유를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에 의해서 소유를 당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더 이상 자기 자랑을 할 필요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면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능력만을 말이다.

그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려고 하면 우리의 액정은 계속 깨져야 하니까, 결국 십자가에서 만나는 것은 바로, 남들이 보기에 죽음 안에서 계속해서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죽음 안에서 부활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부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된다는 말이다.

만약에 우리가 부활되면 마귀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다시 시험한다는 것이다. "니가 천국에 갔다왔다고? 그러면 이기는지 한번 해볼까?" 라고 말이다. 그렇게 마귀가 시험을 하면 과연 누가 마귀를 이기겠는가? 우리는 아무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로 부활이 되기 때문에, 그러니 율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시비를 걸 하등의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걸면 되는가? 예수님은 이미 율법의 완성자이기 때문에 역시 안 되고 말이다.

 

◈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그래서 로마서 7장과 8장에 보면, 성령과 결혼을 한 사람은 더 이상 율법으로 닥달을 낼 일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율법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율법에 시달렸지만, 그러나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죄함이 없는 자에게 다시 정죄함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가 굳이 그렇게 우리 팔자를 되돌리고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

그러니 한 번 구원을 받은 것은 취소가 되는 법이 없는데,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십자가로 오셔서 용서했으면, 더 이상 죄를 용서할 제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게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나오는데,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영적 제사를 드리는 것과 상관없이, 그런 제사를 드리던 말던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예배를 드리던 말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즉 교회가 우리를 구원시켜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것도 아닌데, 오직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그 구원의 작업에 넣어주심으로서 우리는 거기에 쓰여질 뿐이라는 것이다.

(히 10: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 10: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계속해서 교재 306페이지를 보자.

** '말씀이 응한 상태', 그 자체가 완성이기 때문에 거기에 합류되어 있다는 점에서 성도 역시 여유만만하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

 

◈ 말씀이 응한 상태 !!

여기에 '말씀이 응한 상태' 라고 되어있는데, 약간 어렵게 이야기하면, '말씀의 완성태' 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여기서 좀 더 해보자는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죄로 만든 어망을 던졌는데, 즉 저주의 어망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망을 던지면, 그 죄는 제자들이 알고 있는 죄가 아니라는 말이다. 제자들은 죄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제자들이 아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저주했다고 하는, 그 십자가의 능력만을 알뿐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자체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래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인데, 우리의 죄 때문에 이 지상에서 저주를 받음으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게 간격, 즉 거리가 생겨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그렇게 저주를 받고 끊어져버린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끊어진 상태를 제자들의 영혼 속에 !!

그렇게 끊어진 상태를 제자들의 영혼 속에 집어넣는데, 성령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영혼 속에 집어넣게 되면, 주님의 죽으심은 자기 죄 때문이고, 주님의 부활하심은 우리를 보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을 합당하게 이루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업적에 의해서, 예수님은 의인이 되고 부활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제자들은 더 이상 어떻게 되는가? 제자들은 더 이상 성령 안에서 자기 의를 자랑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자기 죄도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자기와 관련된 것은 그 어떤 것도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게 죄가 되었던 의가 되었던 간에 말이다. 자기와 관련된 것은 그 어떤 것도 안 된다는 말이다.

 

◈ 일체 자기 자랑은, 'NO' !!

그러니 모든 것은 십자가라는 어망을 던져서, 결국은 십자가 안에서 죄 용서를 받고, 그 간격을 피로 이어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말씀처럼, 그때는 "전에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때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서 하나가 된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여기 안에서 그대로 적용이 되면, 그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일체 자기 자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렇게 되면, 이것은 마치 포도원 비유에서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품꾼처럼, 그 사람이 어디 한 데나리온을 받고 불평했는가? "한 시간을 일했는데 이것밖에 안 주나?" 라고 말이다. 그게 아니고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서 사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되고, 나중에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포도원 비유가 곧 천국비유라는 말이다.

(마 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렇다면 방금 이런 제자와 예수님의 사이가, 즉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곧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죄가 되고, 그 죄는 십자가의 피로만 용서가 된다" 라고, 그렇게 되기 때문에 12제자의 모든 의견은 동일하게 오직 십자가만 증거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 내가 여기에 있는데 !!

그러면 오늘날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켜보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예를 들어서, 아프리카에서 비가 오지 않아서 대지가 메말라가고 있다면, "비가 제발 와야만 하는데" 라고 할 것이고, 그리고 추운 겨울에 땅이 너무 꽁꽁 얼었다고 하면, "날씨가 좀 풀려야 하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뭔가가 생략되어있다는 말이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고 하니,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삶이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비가 제발 와야만 하는데" 라고 하면, 그 앞에는 무엇이 생략이 되었는가? "내가 여기에 있는데" 라는 것이 생략되어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전제가 되어있다는 말이다. 즉 "내가 여기에 있는 이 동네에 왜 비가 오지 않지?"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앞에 반드시 '내가' 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사는데, 날씨는 왜 이렇게 춥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은 장화패션이 유행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어떤 아가씨가 장화를 새로 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요즘은 왜 비가 오지 않지?" 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 앞에 무엇이 생략이 되었는가? "내가 얼마 전에 장화를 샀단 말이야" 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산 장화를 자랑하고 싶은데, 그런데 비가 오지 않으면 뽐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

그리고 어떤 여자가 결혼을 앞두고 자기는 드레스도 맞추고 반지도 맞추고 했는데, 그런데 신랑이 될 사람이 그만 6개월 안에 죽는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세계평화를 위해서 기도가 되겠는가? 또한 시리아 난민들을 위해서 기도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기도는 당장 본인이 문제이기 때문에 하는 것인데 말이다.

지금 신랑이 될 사람이 병원에서 불치병 판정을 받았는데, 그래서 6개월 이내에 죽는다고 하면, 기도제목이 시시하게(?) 세계평화나 남북통일을 위해서, 그렇게 되겠는가? 그러니까 모든 기도는 그 앞에 무엇이 붙는가? "내가 여기에 있는데" 라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기도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강의를 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 성령의 삶이란?

성령의 삶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수밖에 없는, 거기에 합당한 상황을 만들어놓고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내뱉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욥기에 나오는 말씀처럼, "욥아, 황무지에 비가 오는 이유를 니가 아느냐?"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욥은 무엇인가? "하나님이여, 하필이면 내가 여기에 있는데 왜 이렇게 나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앞에는 "내가 여기에 있는데" 라는 것이 반드시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뭐라고 합니까? "욥아, 이 무식한 존재야, 내 말에 답변을 해봐라. 니가 없는 황무지에 내가 비를 내리게 하는 이유를 니가 대답할 수 있느냐? 있으면 A4 용지 3장으로 내일까지 제출해"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한 번 적어보라는 것이다. 주님이 내신 시험문제라고 여기고 말이다. 

(욥 38:26)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욥 38:27)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그 정답은 신약에 나오는데, 즉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주님은 우리가 아닌 누구 중심이라는 말인가? 예수님 중심인데, 그러니 모든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남기신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결혼 6개월을 앞두고 신랑이 그만 불치병에 걸려서 죽는다는 것은 제가 급하게 지어낸 것이지만, 물론 이미 눈치를 챈 분도 있지 싶은데, 사실은 '오로라 공주' 라는 드라마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것이다. 지난 115회에서 말이다(ㅋㅋ).  

우리 권사님의 경우에는, 정류소에 가자마자 버스가 그만 출발하고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20분을 또 다시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면 예배시간에 늦을 것 같으면 어떤 기도를 하겠는가? "주여, 혹시 버스가 중간에 좀 빨리 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그 정류소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란 말이다.

 

◈ 성령의 삶은, 토해내는 삶 !!

그러므로 자기가 가는 곳에는 자기 욕심도 자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 그것이 곧 성령의 삶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의 삶은 자기 욕심과 자기도 미처 몰라서 토해내지 못한 죄까지도 한껏 다 드러나게 만들어놓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라는 간격을 만든 재료가 되고 이유가 된다는 것을 수용하게 될 때, 그게 곧 성령께서 일하시는 현장이고, 또한 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천국에 가는 성도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복잡했던 복음의 모든 이야기가 오직 하나, 하나님 중심도 아니고 자기 중심도 아니고, 자기에게 구멍을 뚫어놓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서, 창세기부터 감추어진 모든 비밀이 다 나오니까, 사도바울이 전한, 즉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또 다시, '막 사세요' !!

그래서 "막 사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 말이 또 나온다는 것이다. 지겹지도 않은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우리 스스로 악을 물리치고 선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말이다. 주님께서 알아서 간격을 만드시니 우리는 막 살게 되면,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삶이 나오게 되고, 성령께서 간섭하신다는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누가 힘들어하는고 하니,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인데, "막 살다가 진짜로 막가게 되면 어떻게 하지?" 라고 말이다(ㅋㅋ). 그것도 저도 어쩔 수가 없는데, 주님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은 것을 말이다. 제가 성령을 나누어주는 알바생도 아닌데, 즉 "어서 오세요. 이번에 현빈이 나옵니다" 라고 하면서 전단지를 뿌리는 식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누구를 꼬드기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골라내는 작업인데, 그것을 사도바울에게 시켰다는 말이다. 또한 우리에게 말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28장에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지금 하나님의 추려내는 작업에 사도바울 자신을 그 앞에서 깃발을 들고 설치도록, 그렇게 주님이 시켰다는 말이다.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노아가 달랑 8명밖에 전도하지 못했는데, 그 중에서 나중에 두 아들은 저주까지 받았고 말이다. 아무튼 그 순간에는 한 가족밖에 구원시키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노아가 하늘나라에 가서 전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해서 주님 옆에서 무릎을 꿇고 손들고 있겠는가? 그게 아니라 주님 보좌 옆에서 주님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영원히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것에 부담을 가지고 살 이유가 없는데, 어차피 버린 몸인데 말이다. 그리고 아직 더 버릴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치매에 걸리게 되면 웃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어머니가 참석하지 못한 이유가 다 있는데, 지금 곤히 주무시는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예수님은 자기 사람에게 나누어줄 사랑이 넉넉하시다. 사랑의 물줄기가 멈추지 않고 솟아 나온다. 반면에 인간의 초조함은 스스로 창조자로 행세하기 때문에 발생된다. 자기 성과와 자기 실적에 미쳐있다. 자기 성과의 더미 속에서 원 없이 뒹굴면서 홀로 살기 싶어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초조함이다.

 

◈ 사랑은 멈추지 않아 !!

사랑이란 것은 멈추지 않고 솟아 나오는데,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듯이 말이다. 그렇게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넘친다는 것이다. 본인이 죄인이 되면 사랑도 저절로 오는데, 죄인이 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있는 사랑도 멀어져간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을 위해서 살아야지, 자기 잘남을 위해서 살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보면 "인간의 초조함은 스스로 창조자로 행세하기 때문에 발생된다" 라고 하는데, 이것만 더하고 오늘 강의는 마치겠는데 말이다. 이 창조 이야기가 참으로 엄청난데 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창조가 무엇인고 하니, 무에서 유가 창조가 아닌데, 창조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핵으로 들어와서 만들었는가?" 라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담길 때만 창조 !!

찐빵의 생명은 앙코에 있는데, 그 앙코가 핵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창조는 겉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담길 때 창조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특히 철학자들이 이런 오류를 많이 범하는데 말이다. 즉 "내가 여기에 있는데, 그 나를 누가 만들었지? 옳지, 신이 만들었구나. 그러면 신이 어떻게 만들었지? 옳지, 없는 데서 만들었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없음은 어디를 기점으로 출발했는가? 여기 있음에서 나온 없음이기 때문에, 그러니 이 없음이라는 것은 앞의 있음이 빠지면 같이 날아가 버리는 없음이란 것이다. 마지막에 괜히 어려운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즉 이것은 있음을 출발점으로 하는 없음이란 말이다.

이것을 '반명제(反命題)' 라고 하는데, 그런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빼고 말이다. 아무튼 여기에 있는 것은 없을 때가 있기 때문에 있다는 것이다. 창조가 말이다. 그러니 이런 창조는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나온 창조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창조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창조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즉 "너희들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것이 창조의 전부라고 생각한 것이 틀려먹었고,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창조되었다" 라고 해야 된다는 말이다.

 

◈ 과학에서는 예수님이 나오지 않아 !!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했다" 라는 것이, 그러면 그것이 있는 '나'에게서 예수님을 끄집어낼 수 있는가? 그게 안 되는데, 왜냐하면 죄 때문에 말이다.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악마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상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뭔고 하니, 과학에서는 예수님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학에서 신이 나오고, 무에서 유의 창조는 나오지만, 또한 발전은 나오는데, 정작 십자가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나오는 과학을 본 적이 있는가? 이번 201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사람은 1986년도에 '힉스' 라는 입자의 존재를 예언한 사람인데, 그게 두 사람이었는데, 둘 다 받았다는 것이다. 상금만 해도 25억이라는데 말이다. 

그 힉스가 무엇인고 하니, 남에게 질량을 주면서 자기는 사라지는, 그런 '최초의 질량부여입자' 라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의 비밀은 과학으로 드디어 풀렸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힉스가 예수님인가? 힉스라는 입자가 십자가를 졌는가? 물리학은 쪼개서 문제인데, 물리학은 인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은 세포를 연구하기는 해도, 거기서 인정미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 창조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십자가의 영인 성령인데,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라는 것이 중요하지를 않고, "나는 누구를 위하여 여기에 존재하는가?" 라는 것, 그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 인간은, 자기 자리를 벗어날 수 없어 !!

그러니까 "그 누구와 나의 관계이다" 라는 것이다. 힉스와 자기의 관계가 아니고 말이다. 즉 "입자와 나의 관계가 아니고, 내가 쪼개진 그 파편과 나의 관계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아무리 쪼개도 그것은 나의 일부인데, 아무리 흩어져서 멀리 가봐야 그게 다 나의 자리이다" 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는 입장이다" 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나로 인해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나와는 관계가 끊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끊어진 그분이 창조의 엑기스이고 핵심이었다는 말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기 이전에 몰랐고, 그저 여호와만 부르면 되는 줄로 알았지만, 그 여호와는 자기의 확장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확장은 무엇인고 하니, 좀 오래되고 후진 동네에 가면, 정원을 만든다고 하면서 공사를 하다가 보면 욕심이 생겨서 정원까지 조금씩 잡아먹는 게 있다는 말이다. 물론 불법공사인데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야금야금 잡아먹어서 우주까지 자기의 놀이마당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 '그래비티' 라는 영화를 보면 !!

혹시 '그래비티'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십자가 마을 사이트에 글도 올렸는데 말이다. 나이가 들면 극장을 잘 가지 않는데, 왜냐하면 잠이 오니까 말이다. 30분 정도를 보면 잠이 온다는 것이다. 더욱이 주위도 캄캄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 '그래비티' 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 공포를 느끼는데, 즉 "만약에 우주에게 그렇게 줄이 끊어졌을 때, 나는 어떻게 집에 돌아가지?" 라고 말이다. 차라리 집이 없으면 그런 걱정이 덜 되는데, 저기 밑에 지구에 집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때 다가오는 공포감, 그게 그 영화의 주제인데, 즉 '공포감' 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이 그 공간에서 놀기는 왜 노느냐는 것이다. 집에서 놀지 말이다. 그처럼 인간은 아무리 공간을 멀리 가봐야, 그게 자기 본래 자리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노는 장소를 조금 넓혔다는 것이지, 아무리 가봐야 거기에 천국은 없다는 것이다. 저기 우주 끝에 가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목사들은 여기 어디에(?) 가면 예수님이 있다고 하는데, 하지만 달나라에 가면 옥토끼가 있는가? 옥토끼가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떡방아도 없고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상상했는데, 물론 인간들은 지금도 그 상상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갖 것을 다 연구하는데, 하지만 과학자들이 아무리 밤을 세워 연구하고 노벨상을 받아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다른 차원에서 찾아와야 !!

 

구원은 다른 차원에서 찾아와야 하는데, 천사가 찾아오듯이 말이다. 그렇게 이제 마지막에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우리는 십자가가 예수님 혼자만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예수님의 온 우주가 집결되고 응축된 완결상태가 곧 십자가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십자가임을 말이다.

그러니 우리 하루하루의 삶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데, 괜히 자기가 쓰레기통을 사서 들어가서 치워달라고 하지 말고 말이다. 청소부가 와서 치워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치매에 걸려서 자기가 스스로 치울지 몰라도 말이다. 굳이 치우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이다.

저의 솔직한 심정은 지금이라도 당장에 죽고 싶은데,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니라, 복음에 필요해서 살려두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막 살아도,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의 뜻이 저희들을 지배해서 더 이상 내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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