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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이사야 48:1-4 / 완악한 이스라엘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이사야

이사야 48:1-4 / 완악한 이스라엘

정인순 2013. 11. 5. 16:52

 

129강-사48장,1-4,(완악한,이스라엘)-isa0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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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악한 이스라엘

2008년 2월 27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48:1-4

(사 48:1)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들을지어다』

(사 48: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옛적에 장래사를 고하였고 내 입에서 내어 보였고 내가 홀연히 그 일을 행하여 이루었느니라』

(사 48:4)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기초와 바탕을 겨냥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간과 만물은 한시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온 적이 없습니다. 마치 눈이 가득 덮힌 썰매장 위에서 눈 썰매를 타고 내려오면 자신의 수고는 조금해도 밑까지 내려오는 즐거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인생이란 주님이 깔아두신 은혜의 눈 밭에서 마음껏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식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수고는 조금이라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는 엄청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애쓰고 수고한 것만 항상 기억하고, 자기 밑바닥에 잔뜩 깔여 있는 하얀 은혜의 눈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인간의 바닥을 다시 봐주기를 바라면서 다가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끔 하십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유다여, 이스라엘여 부르시면서 근원을 다시 확인해 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은 자기 백성으로 삼았건만 유다 나라는 완악하고 심령이 완고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은 대가를 원하는 종교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큰 장애요소는 ‘대가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만약 대가를 바라고 교회에 나온다면 그 교회는 절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상대로 종교적 대가를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요한복음 12:43에 보면,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 은혜’를 외치면서 실상은 최종적으로 자기 영광과 자기 위신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삼사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뿌리와 근원을 늘 들여다보기를 바라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영광을 드높이기에 물 불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어떤 식으로도 대가를 노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영생입니다. 그 영생은 예수님의 피로서 이미 우리 속에 주어졌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쪽으로 우리에게 주실 것을 이미 다 주셨다는 말입니다. 죽어도 살고, 살아서도 영원히 사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으면 더 이상 더 주실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진정 주신 이 보혈의 피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신의 위신와 영광스럽게 만드는데 필요한 것을 달라고 새삼 요청합니다.

 

이런 태도는 악마적입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참으로 무엇이 소중하고 귀한 것인 것을 영적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인간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악마는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므로서 가장 중요한,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마태복음 16:17에 보면, 성도에 관한 출생의 비밀이 나옵니다. 성도의 아버지는 인간인 것 같지만 실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아버지 되십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이미 모든 것을 다 받게 된 처지에게 성도는 하나님의 일에 나섭니다. 따라서 따로 그 어떤 대가를 바랄 마음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 일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일을 못하겠다는 나오는 것도 실은 잘못된 발상입니다. 성도가 하는 일이 자기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모든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쪽에서 누락됨이 없이 다 준비해 두셨습니다. 열왕기하 6장에서 나오는 엘리사의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다.

 

수많은 아람군대가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성을 포위하고 나서니 엘리사의 사환은 공포에 질러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보이니 적 군사들의 수보다 더 많은 수의 천군 천사가 엘리사와 함께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엘리사에게 있어 모든 일은 엘리사 본인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참여했기에 새삼스럽게 자기가 따로 한 노동의 대가를 하나님에게 달라고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22장에서 이 두 부자는 모이아 산에 제사드리려 갑니다. 불과 나무와 칼은 갖고 가는데 이삭의 눈으로 봐서는 어디에도 제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게 됩니다. “아버지 제사 드릴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애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두 부자의 행위는 그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시키시는대로, 지시하는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해 두신 수양을 수풀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수양은 두 사람의 죄를 위해 대신 죽어야 될 제물로서의 수양입니다.

 

이들 두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수양을 만나보기 위해 이끌림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모든 삶은, 왜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셔야 했는가를 알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인도 받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복음과 희생을 증거하기 그 자체를 위한 것 외에 그 어떤 목적이라든지 대가라는 것이 성도에게는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자신이 나중에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싸우는 제자들을 향하여 “내 쓴 잔을 마셔야 된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인간은 예수님 곁에서까지 자신의 위신과 체면과 영광을 안 잃으려고 긴장을 하며 삽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피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유다 나라에 당부합니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이 다 인간을 배제하고 하나님 홀로 예언하시고 성취해온 일이라는 겁니다. 그 일의 덕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그 피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 발 밑을 살펴야 합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좁은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은 이 생명의 길, 피의 길을 매일같이 일깨어주신다는데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의 근원에서 예수님의 피 흘리신 자국을 다시금 보고 만지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