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이사야 6:9-13 / 하나님의 의도 본문
021강-사6장,9-12,(하나님의,의도)-isa060125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021강-사6장,9-12,(하나님의,의도)-isa060125.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021강-사6장,9-12,(하나님의,의도)-isa060125.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021강-사6장,9-12,(하나님의,의도)-isa060125.hwp
하나님의 의도
2006년 1월 25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6:9-13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6:11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되며 6:12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인간에게 맡길 때는, 그 인간은, 그 사명이 자기 목숨보다 더 우선된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이 인간의 목숨보다 덜 귀하게 대접받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이사야는 자신의 형편을 같이 고려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당시나 요즈음 사람들이나 항상 자기 목숨이 우선되는 모습을 보이기에 하나님의 일을 안 하고 있다는 증거를 감출 길이 없습니다. 흔히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우겨봤자, 전에 했던 일의 인간적인 관행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자기 목숨 지키기와 병행되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쭉 하나님의 일을 해왔다는 것을 근거로 앞으로 자신은 더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완벽하게 가짜 하나님의 일군임을 폭로하는 바가 됩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대에도 흔한 신앙의 세계였습니다. 신앙이 안정성과 토지의 안정성과 정치력의 안정성을 추구했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한 안정적인 토대를 쌓기를 위하여 오늘도 열심히 노동하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토대가 없으면 곧 죽음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들의 안정성 구축은 아무 짝도 소용없는 짓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뿌리 채 인간의 안정성을 흔들어대시기 때문입니다.
보기도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살던 토지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살던 고장에서 떠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은 유다 나라를 흔들어버리시는 겁니까? 그것은 그들은 엉뚱한 안정성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유다 나라를 지탱해오고 있었던 토대는 사실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 의하면 ‘거룩한 씨’입니다. 이 거룩한 씨를 사람들은 자신들 목숨을 우선시하는 애씀으로 인해 완전히 가리워진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흔들고, 잘라내고, 무너지게 하셔서, 이 유다 나라를 거룩한 하나님 나라로 유지해 왔던 그 근본의 핵심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사람들은 ‘거룩’에 통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무섭게 거룩한 분인가를 말입니다. 죄보다 하나님이 더 무서운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보다 더 무서운 세력은 또 없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형편없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으로 인해 유다 나라가 다른 이방 나라 속에서는 버텨온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세력도 이 거룩을 이길 힘은 못됩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라 할지라도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 치고 세례 요한처럼 위대한 아이는 없다”고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들에게 흠뻑 빠져있었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선지자가 또 등장하기만을 학수고대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놀라운 이적을 일으킨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모세가 그러하고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이 그러하고,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 선지자가 그러합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죽은 아이도 살리고, 많은 배고픈 사람들을 기적으로 먹였습니다. 쓴 물도 단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세례 요한은 무슨 기적을 베풀었습니까? 그는 아무런 기적을 베푼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도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궁에 사는 철없는 여인의 질투심의 가여운 희생물로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머리는 뭇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기 위한 전시물로 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세례 요한은 과거의 선지자들보다 더 위대한 선지자일까요? 그것은 얼마나 큰 기적을 베풀었느냐로 선지자의 위대함을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예수님의 높으심을 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주었기에 자신의 신체나 목숨마저 하짢게 여길 수 있었느냐를 가지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너무나도 거룩하고 거룩한 분이기에 자신의 목숨조차 그렇게 귀하게 취급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오게 된 것이 위대한 선지자의 요건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본문에서는 유다 나라를 마구 흔들어대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동안 인간들이 철통같이 믿고 의지했던 바가 다 주저앉아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조차도 주저앉아야 합니다. 성도가 구원받는 것은 자신이 지탱한 자기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오로지 인간과 인간들만 만나고 커서도 인간들 속에만 파묻혀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인간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배후 세력자와 만나도록 성령께서 배려해주셨습니다. 그 자는 악마였습니다. 악마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는 힘으로 그동안 인간 세계를 형성시켜 왔습니다. 마치 두꺼운 세 채의 이불로서 인간의 코와 입을 꽉 막아왔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비로소 밝혀졌습니다.
첫 째 이불은 경제 욕구입니다. 배고품을 누가 이기겠습니까. 굶어있다는 자연적 결핍을 인간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악마의 경제적 유혹을 이겼습니다. 둘째 이불은 신앙적 자부심에서 오는 유혹입니다. 자신의 신앙이 좋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주고 추종자들이 많기를 원하는 욕구입니다. 이 욕구도 예수님만이 이길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이불은 정치적인 권세욕입니다. 세상의 부귀, 영화를 어느 누가 마다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주인공으로 등장되는 ‘자기가 왕이 되는 자기 중심의 새 세계’를 싫다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안정성은 다 악마에서 나온 환상인 것입니다. 참으로 천국 백성은 ‘거룩한 씨’로 인하여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굴까요? 이사야에서 보면 처녀에서 태어나신 임마누엘이라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이사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 7:10-14 / 임마누엘 (0) | 2013.11.01 |
---|---|
이사야 7:3-8 / 스얄야숩 (0) | 2013.11.01 |
이사야 6:6-8 / 누가 갈꼬? (0) | 2013.11.01 |
이사야 6:1-6 / 이사야의 하나님 (0) | 2013.11.01 |
이사야 5:24-25 / 맹렬한 진노 (0) | 2013.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