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8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이사야 6:1-6 / 이사야의 하나님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이사야

이사야 6:1-6 / 이사야의 하나님

정인순 2013. 11. 1. 10:43

 

019강-사6장,1-6,(이사야의,하나님)-isa060111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019강-사6장,1-6,(이사야의,하나님)-isa060111.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019강-사6장,1-6,(이사야의,하나님)-isa060111.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019강-사6장,1-6,(이사야의,하나님)-isa060111.hwp

 

 

 

이사야의 하나님

2006년 1월 11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6:1-6

6:1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신앙 생활은 용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본인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제 3자가 개입했기에 일어나는 사태입니다. 본인 혼자 열낸다고 유지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비로소 알았습니다. 전부터 자신을 주시하고 관찰하고 주목하고 있었던 어떤 분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그 분에 의해서 조성된 환경을 말합니다. 신앙이란 본인의 행위로 유발시킬 일이 아니라 어떤 대상자를 만나고부터 그 대상자에 의해서 주도되는 사태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인간 쪽에서 일방적으로 끊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끊고 싶어도 끊지 못할 관계입니다.

그런데 흔히 신앙생활이라고 한다고 우기면서 주변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태에 대해서 꿈쩍꿈쩍 놀라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한 신앙이기에 그런 결과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주도해서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하게 된다면 은근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어떤 성과를 놓고서 따지게 됩니다.

 

자신이 기대하는 성과가 나오면 현재 제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처럼 위안삼고, 그렇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에 파탄이 일어난 것으로 오인하게 됩니다. 이런 식의 신앙은 유사품에 불과합니다.

 

신약 시대에 접어들어 신앙이란 복음의 위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신앙이란 주님이라는 제 3 자가 개입해서 일어난 일인데 그 분이 선물로 주신 것은 복음의 위력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위력이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주님은 인간들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잘 아십니다. 인간들이 제일 겁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서 그 밑바닥까지 낱낱이 핥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바로 그곳은 죽음의 자리입니다. 사람들이 가기를 기피하는 그 죽음의 공포가 기다리는 자리에 예수님은 당당하게 들어서십니다. 그리고 부활이라는 엄청난 위력과 더불어 무덤을 열어제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는 자조차도 예수님께서 이런 엄청난 복음의 위력을 생산하는 길에 나선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8:18-22에 보면,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제자는, 자기 부친의 장례식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마음조차 예수님에게서 제공되는 복음의 위력을 훼손한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위력이란 아무리 그 위에 층층이 죽음의 힘이 쌓여있다 하더라도 그것마저 거뜬히 열어 제쳐버릴 수 있는 위력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위력을 믿노라고 말하면서도 집안의 우환이 있든지 벌려놓은 사업이 지장이 있으면 그만 쉽게 주님에게 달려들어 탄식하면서 원망하기 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복음의 위력을 모르고 있는 증거로 봐야 합니다. 이사야 5:27-30에 보면 유다나라는 혹독한 징벌을 외부로부터 당하게 됩니다.

 

그 배후자는 놀랍게도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친 자식같은 유다 나라를 힘들게 하고 절망적인 사태로 몰아가시는 겁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력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1장에 나와 있듯이 유다 나라는 거창한 제사를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형식으로 예배와 절기를 치러내었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정기적인 종교 행사로서 신앙생활을 지탱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오해였습니다. 참된 거룩이나 영광은 인간들이 용을 쓴다고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최선을 다 한다고해서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 나라 사람들은 말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력과 사랑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을 자신들의 노고와 수고로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가만 두고 볼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위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유다 나라로 하여금 도저히 자력으로 일어설 수 없는 절망 속으로 집어넣으십니다. 아마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런 전쟁과 파멸 가운데 이사야도 다음과 같이 항변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비록 우리가 하나님에게 범죄했다 손치더라도 우리 손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 공평하지 않습니다. 우리 힘으로 다시 사태를 회복시킬 디딤돌 같은 것이라도 허락하셔서 이 절망적인 현실을 호전될 수 있는 기회를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이런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으로 직접 이사야를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일하심의 능력이 그 어떤 절망과 심판의 상황에서는 거뜬하게 해결짓고 말 능력임을 알려주십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자신이 용쓰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제 3자되시는 분께서 자신의 공로만으로 모든 사태를 능가하시는 능력에 쏟아내시는 겁니다. 즉 바로게 살고자 최선을 노력을 다 하는 것이 결코 신앙생활의 진수가 아니라 그 어떤 절망도 더 이상 절망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십자가 복음의 위력을 믿는 것이 곧 참다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자신의 열성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햇빛을 쬐기 위해 태양 가까지 접근할 필요가 없듯이 그저 주시는 복음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 자신의 위력으로 제공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어떤 절망도 절망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자기 자신부터 이미 기대할 이유나 필요가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고 외치는 자는 결코 세상적인 절망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기교로 연출해 내는 가짜 신앙생활을 청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